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크리스천의료인과세상의기대
이제, 현실적으로세상에서크리스천의료인에무엇을기대하고있는지생각해보자.
세상은크리스천의료인에게늘하나님을묵상하고기도할것을기대하지않는다.
세상이원하는것은단순하다.
실력있고인간다운의료인을원한다.
다시말해,
전문적인지식과실력,
그리고고도의직업윤리의식을갖춘사람이바로이상적인의료인상이다.실력이중요한이유는우리들크리스천을포함한어느누구도믿음은좋지만수술못하는외과의사보다믿음은부족해도수술잘하는외과의사를선호하기때문이다.
의료인의직업윤리를
Medical Professionalism이라고한다. 미국내과의사협회 (American
College of Physicians)에서지적한 Medical Professionalism의덕목은겸손
(Humility), 정직
(Honesty), 이타성
(Altruism), 공감능력
(Compassion), 그리고예의바름
(Courtesy)이다.의료인이이사회배출되는데있어서,
사회는우리에게사회가의탁한면세교육기관을제공했다.
예비의료인은사회의공인하에시체를해부할수있다.
환자는의료인과교육중인예비의료인에게자신의치부를노출시키며자신의비밀과걱정을떨어놓는다.그리고환자는의료인의선한의도를한치의의심도없이믿는다.
가장중요한것은환자는의료인의행위를평가하거나판단할수있는의학적지식이없다는것이다.
이모든사실은왜의료현장에고도의윤리성이요구되는지말해준다.
EBM이라는말이유행한다. Evidence-based
Medicine 근거중심의학을주로지칭하지만,
Etiquette-based Medicine을칭하기도한다.후자는 2008년 Dr. Kahn이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NEJM)이라는저널에서처음사용한용어이다.
아무리최신의학정보를바탕으로진료를한다하더라도최소한의예의가사라진오늘날의의료현장에서정말필요한것은에티켓이라는것이그의주장이다.
입원환자를진료할경우,
최소한노크부터하고,
들어가도되는지묻고,
웃는얼굴로자기이름을소개하며악수를청하는의료진을찾아보기가힘들다.세상은이런기본적인에티켓을잃지않는의료인을원한다.
나아가우는환자에게휴지를손에쥐어주며등을토닥여줄알며,
환자가누워서잃어나앉을수없다면무릎을꿇어환자의눈높이에서대화를할줄아는그런의료인을원한다.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성경은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인지의 여부를 결정했으며, 언약의 땅에서의 생존과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결정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고 그분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율법과 언약을 통해 자신이 원하시는 사회의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의 영역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 – 공평과 정의와 자비가 –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2:3]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예레미야 33:15]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모세오경에 나타난 구약의 율법은 제사법, 십일조법 등 종교적인 법 뿐 아니라, 정결법, 도덕법, 희년법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공평과 정의의 원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기25:8-10]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칠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해야 했고, 칠년이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의 다음해인 오십년 째 해가 종이 해방되고 팔려간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희년입니다. 가나안 입성 시 땅은 지파와 가족 별로 공정히 분배되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방과 달리 땅을 영구히 팔 수 없었고, 팔았더라도 오십년 째 해는 원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습니다. 땅은 인간이 생산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주신 것이며, 그 땅의 분배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희년법은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헨리 조지에 의해 토지경제학으로 연구되었는데,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가 발전함에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는 현상과 이 레위기 말씀을 연구하면서, 땅값의 상승이 이자나 임금의 상승보다 언제나 빠르고, 경제발전으로 창출되는 부가 대부분 지주에게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강화함으로서, 과거 레위기에 나타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고, 경제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고 대천덕 신부님이나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등의 활동으로 많이 알려진 바 있는데,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음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대천덕,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홍성사; 성경적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www.landliberty.org)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언약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엄성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기 원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산수단, 생존의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것이 바로 땅이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간의 존엄성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정의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영구히 잃어버리거나, 땅이 일부 부유층에 독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서, 생산수단과 생존의 기반을 영구히 잃어버린 백성의 일부는 경제적, 정치적 노예가 되고,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된 소수의 부유층은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는 비극적 상황을 방지하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이러한 희년의 정신은 신약에 들어와, 흔히 예수님의 취임사로 불리는 누가복음 4:18-19에서 '은혜의 해'로 언급되고 있고, 예수님 승천 후 성령의 강림을 통한 자원의 희년을 통해 계승됩니다(이 부분은 다음에 올릴 글들을 통해 더 자세히 다뤄질 예정입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이러한 희년의 원리가 실천 될 때 나타나는 평화와 축복을 보여줍니다.
[열왕기상4:24-25]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 이쪽에 있는 모든 지역, 곧 딥사에서부터 가사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모든 왕을 다스리며, 주위의 모든 민족과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의 일생 동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미가 4:4]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전도서 9:7-9]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성경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산다’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외적의 침략이 없는 것뿐 아니라, 사회 내에서도 경제적 정의와 공평이 이루어져, 구성원들이 자기의 생산 기반을 가지고 안정적 생활과 만족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희년의 정신이 구현된 사회입니다. 극도의 빈곤을 방지하고, 또한 극도의 탐욕을 방지하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필요가 채워지고 그분이 재어주신 구역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상태, 인간답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강력한 설계도를 우리는 율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실패합니다.
[신명기 27:17] '이웃의 땅 경계석을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이사야 5:8]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열왕기상21:17-19] 주께서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 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위의 말씀들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극심한 타락기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장치 없이 노예로 팔리게 되는 악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양극화, 백성의 노예화, 성의 상품화는 토지제도의 문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예나 오늘이나 기득권층들과 부유층은, 더 많은 부를 갈망했고, 욕심으로 인하여 희년을 지키기 싫어했으며, 오십년이 되어도 점차 땅을 돌려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의 증대를 통해 정치적 사법적 권력까지 갖게된 이들은 더 큰 욕망을 위해 자신들의 힘으로 공평과 정의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는 부의 집중과, 권력의 부패와 타락,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을 보면, 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끊임 없이 반복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가 단순히 돌에 절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상을 통해 제시되는 이방의 사회, 경제적 문화와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바알 숭배 사상은 대토지소유와 부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그리고 아세라 숭배는 끝없는 성적 욕망을 합리화 해주는 것이었습니다(참고도서: 하웃즈바르트,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 IVP).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줄로 재어주신 구역에서 살기 원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통해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와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에 만족치 않고, 더 많은 소유와 토지, 쾌락을 원하였기에 지속적으로 우상숭배와 이방의 시스템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이방의 공주로 시집온 이세벨에 의해 나봇의 포도원이 강탈당하는 사건은, 이스라엘 사회의 타락과 율법의 파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과 공평을 집행해야 할 정치권력이,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해 하나님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희년의 정신,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할 뿐 아니라, 이방을 본받아 극도로 양극화 되어 백성의 일부가 노예화 되고 인권이 무시되며, 개인윤리, 경제적 정의, 사법적 정의, 정치적 정의가 모두 무너지는 타락한 사회로 전락했습니다.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땅에서 뽑아내시며, 땅은 그들을 토하여 냅니다.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이라는 것으로 언약의 땅에서 그들의 생존이 보장 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했습니다. 언약을 무시하고 공평과 정의를 짓밟은 이스라엘이 땅에서 뽑히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9:6-7]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사야 1:21-23]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하나님은 망국이 임박한 상태에서도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고 종 된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 권력층과 가진자들의 악을 질타하십니다(예레미야 34장).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이스라엘에게 처절한 심판이 임합니다. 이스라엘이 벌인 강포와 패역이 심판으로 그치게 되고 그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자, 비로서 그들이 지키지 않았던 희년과 땅의 안식이 이루어 집니다 (역대하 36: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로기 칠십년 이후 그 땅을 회복 시키시고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을,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행위를 통해 계시 하십니다. (32장)
[예레미야 34:13-17]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 지 칠 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너희가 비로소 마음을 돌이켜서, 각자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줌으로써,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것도 나를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서 언약까지 맺으며 한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또 돌아서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다. 너희가 각자의 남종과 여종들을 풀어 주어, 그들이 마음대로 자유인이 되게 하였으나, 너희는 다시 그들을 데려다가, 너희의 남종과 여종으로 부리고 있다. 그러므로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두 너희의 친척, 너희의 동포에게 자유를 선언하라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것을 보고 무서워 떨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예레미야32:14-15]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증서들, 곧 봉인된 매매계약서와 봉인되지 않은 계약서를 받아서, 옹기그릇에 담아 여러 날 동안 보관하여라.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예로 부터 새로운 왕조나 정부는 언제나 토지개혁을 가장 먼저 실시했고, 정권이 망할 때에 이르면, 토지제도가 지극히 문란해져, 소수 귀족층이 땅을 독식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소작인, 노예, 유랑민으로 전락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양극화와 백성의 노예화가 극단화 되면, 민란, 혁명, 전쟁등이 일어나 정권의 교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타락한 사회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자, 하나님의 심판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힘과 재물이 그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룰 때 찾아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많은 경우 사회의 붕괴와 외적의 침입은, 그 사회 내부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데 실패한 결과입니다. 안보의 문제에 대해, 세상의 권력은 그것이 오직 힘과 재물로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하고, 안보를 위한 안보를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회의 안정과 생존은 언약의 순종 –즉, 공평과 정의가 구현된 사회를 만드는가- 에 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외부의 위협을 부풀리고, 안보와 번영를 위해 공평과 정의를 희생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여,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를 만들고,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가 우리 사회 속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22:3-5]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너희가 이 명령을 철저히 실천하면, 다윗의 보좌에 앉는 왕들이 병거와 군마를 타고, 신하와 백성을 거느리고, 이 왕궁의 대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맹세하지만, 너희가 이 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바로 이 왕궁은 폐허가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토지정의, 경제정의의 문제는 우리 삶과 신앙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헨리조지가 관찰했듯이 지대가 오르는 속도는 언제나 임금이나 이자의 상승 속도보다 빠르기에,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번 사람들 상당수가 부동산을 통해 불로소득을 쌓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IMF 이후 이러한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있는데, 2006년 행정 자치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상위 1% 인구가 전체 토지 57%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2009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이 33.4%에 이르고 실제 비율은 더 높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한 최근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약 54만가구가 월 20만원도 못 벌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의 편중과 중산층의 몰락,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견제장치를 약화시켜 부의 양극화를 가속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소위 ‘카지노 캐피탈리즘’이라고 하는 투기형 자본주의가 판을 치면 정당한 방법으로 일해서 돈 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지고 경제활동 전반이 투기화 되어 돈이 돈을 벌고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 됩니다. 현대에는 노예제가 없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양극화가 진행되면, 하위계층은 낮은 임금으로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과 빚을 벗어날 수 없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사채업자나 포주들이 피해자를 빚으로 얽어매어 노예처럼 부리는 것처럼, 개인의 기본적 생존수단이 보장되지 않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권이 껍데기만 남아 무의미 해 집니다. 2009년의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약자의 경제권과 인권이 얼마나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임대인이나 피고용인의 권리 뿐 아니라, 토지소유자, 고용인의 권리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의 입장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법과 공권력은 언제나 가진자의 편이 되기 쉽고, 갈등이 있을 경우 강자에게는 그것이 '이익과 손실'의 문제인 반면, 약자에게는 그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공권력으로 무참히 진압하는 사회는 이미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사회도 희년의 정신에 나타난 기본적 경제권이 무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관심있는 분은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를 한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미국 의료보험 시스템의 심각성은 잘 알려져 있어서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중하위 계층에서 의료비용으로 고통받거나 파산하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고, 최근의 경제위기로 집을 차압 당하고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단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비극을 합리화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라는 차원에서 현실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영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서 루즈벨트의 '제2권리장전'을 언급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꼽히는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4년 연두교서 연설에서 제2 권리장전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에 명시된 '정치적 권리'가 모든 국민의 평등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아래에서 언급되고 있는 '경제적 권리'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특정한 경제적 진실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제2 권리장전 아래 새로운 안전과 번영의 토대가 신분과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것은 합당한 임금의 일자리를 가질 권리, 적절한 음식과 의복과 즐거움을 누릴 권리, 모든 농민이 작물을 기르고 팔아 그와 가족이 걸맞게 생활을 영위할 권리, 모든 기업인이 사업을 함에 있어 불공정 경쟁과 국내외 독점체제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모든 가정이적절한 주거를 누릴 권리, 적절한 의료보호와 좋은 건강을 누릴 권리, 노령, 질병, 사고, 실업 등의 경제적 공포로부터 적절히 보호받을 권리, 훌륭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권리, 이 모든 권리들이 말하는 건 사회보장입니다. 우리는 이들 권리의 이행을 통하여 인류 행복의 새로운 목표에 정진해야 합니다.. 자국에서 사회보장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세계 평화도 지속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루즈벨트는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는 정치적 권리가 무의미해지기 쉽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희년의 정신에 상당히 부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네 번째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차대전의 종전을 앞둔채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경제적 권리를 법제화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이후 특히 레이건 대통령 시기를 거치며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국 사회의 경제권과 약자에 대한 보호는 더욱 더 약화되고, 감세정책으로 대변되는 가진자의 이익에 대한 철저한 옹호가 미국의 정책과 법률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미국이나 한국의 보수 기독교회가 공평과 정의의 원칙 보다는, 현대의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로 복음을 개인적 내세적 의미로 축소하고, 하나님 나라를 오늘 이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닌 죽은 후 가게될 천국으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안에 자본주의 정신과 반공주의(엄밀히 말해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의에 대한 주장을 무조건 좌파로 매도하는 매카시즘)가 복음보다도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공평과 정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강자의 횡포로 인한 약자의 고통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함과 분노를 듣지 못하고 있는 사실 때문입니다.
[시편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예레미야 5:26-29]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미가3:1-3] 그 때에 내가 말하였다.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의 지도자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너희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 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살려 달라고 주께 부르짖을 날이 그들에게 온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그렇듯 악을 저질렀으니, 주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아모스2:6-8]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에스겔 22:29-31]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국 이 시대의 지배적인 우상은 맘몬으로 상징되는 물신주의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우상을 분별하고 비판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맘몬의 포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이 사회에 구현하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우리 사회의 약자들)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물신주의 숭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거짓된 복음을 이야기 하고, 교회가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의 여부를 결정했듯이, 오늘날도, 기독인의 숫자나 교회의 숫자가 이 사회를 기독교 사회라고 보장해 주지 못하며,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방지해 주지 못합니다. 기독인과 교회의 숫자가 많다고 기독교 국가가 된다거나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를 축복하신다는 생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또 하나의 '선민의식'에 불과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가 억압과 고통을 받을 때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 줄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기독인들과 교회는 바른 사회 윤리를 외치고, 불의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희년의 원리를 살펴볼 때에, 우리에게는 '자선과 구제'를 통해 약자를 도와야 할 책임과 더불어,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도록 해야할 책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룻기는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자발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구조적인 '희년제도와 기업무름제도'가 어떻게 남편을 잃은 과부라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구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먼저 자선과 구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대변합니다.
레위기19:9-10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신명기24:19-22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말아라. 그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이다. 그래야만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너희는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딴 뒤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포도를 딸 때에도 따고 난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명기23:24-25 너희가 이웃 사람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지만, 그릇에 담아가면 안 된다. 너희가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
신명기14:28-29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출애굽기23:10-11 "너희는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서,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 너희의 포도밭과 올리브 밭도 그렇게 해야 한다.
위의 레위기19:9-10과 신명기24:19-22에 따르면, 추수할 때 지나치게 철저히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의도적으로 조금씩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는 어느때나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도둑으로 정죄당하지 않으면서 당장의 허기를 채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신명기 14:28에 따르면, 매 삼년 째에는 십일조를 모아 사회적 약자들 – 다른 직업이 없는 성직자, 외국인, 과부, 고아들-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출애굽기23:10-11에 따르면 7년마다 휴경하는 것에는,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들이 거기서 자라난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룻기 2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한 자들에게 남은 곡식을 줍게함으로서, 이러한 자선과 구제의 원리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또한 4장을 보면 희년의 원칙에 따라 기업무름(가난한게 된 사람의 땅이나 자식없이 죽은 사람의 아내를 가까운 친척이 취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유업이 끊어지지 않고 가족들이 빈곤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제도)을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와 롯은, 자신의 게으름이 아닌, 자연재해와 남편의 죽음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자칫하면 빈민이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이자 여성, 그리고 과부로서, 다중적 약자였던 롯이라는 한 여성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실천되고 있었던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 제도적인 희년제도에 의해서, 보호받고 구제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 사회속에서도, 기독인들이 개인적으로는 적극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으로 복지제도와 경제정의, 토지공개념 등의 확립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형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정의롭고 공평하며 인애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 것을 촉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실천된다면, 보다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고, 우리 사회의 고통과 악이 상당부분 덜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들을 명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며, 정의와 공평과 인애가 넘치시는 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부디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성경에서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독교의 역사속에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가 침투해 들어온 것에는,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격을 '민족적, 인종적 관점'으로 오해해온 것도 큰 영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구성원의 대부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열 두 아들의 혈연적 후손으로 구성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은 혈연 보다는 ‘언약’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였습니다.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수차례 반복됩니다. 동시에 혈통적으로 비 이스라엘일 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정의를 사모하여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은 이스라엘에 편입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 다말, 라합, 룻,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 등 다수가 이방출신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누구나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36-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렘18:27-29]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개정개역)
[이사야 56:3-7]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에스겔44: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아모스 9:7]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디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이 나라면 블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 내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온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위의 말씀들을 보면, 출애굽 당시부터 다양한 족속들(이집트 내의 피압박자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발했었고,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마음과 육체의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혈연에 기반한 공동체라기 보다 (그들중 다수가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일 지라도), 언약에 기반한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 할 경우 백성중에서 끊쳐진다는 것은, 단순한 혈연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약의 땅(The Land of the Covenant)’, 즉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진 땅이며,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앞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스라엘이 그 땅을 얻게 된 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악이 극에 달해 땅에서 뽑힐 정도로 관영했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시고, 그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으십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이 특별한 백성이고,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안보와 번영을 무조건 적으로 보장하신다는 '선민사상'과 정확히 충돌합니다. 심지어 성궤를 가지고 나가도 죄가 있으면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어떤 '상징, 명칭, 이름, 혈연'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가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원칙을 현재 국제관계의 상황에 적용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현재 민족국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학살과 폭력에는 눈을 감는, 미국과 한국 기독인들의 입장이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현재 세계 많은 민족 국가중 하나일 뿐인 국가 이스라엘을, 성경 예언의 성취로 확신하거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언약공동체이자 신앙공동체였던 구약의 이스라엘과 등치 시킬 수 있는지는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설령 그것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인종이 아닌 언약의 순종여부를 보고 심판하셨던 성경의 역사를 볼 때, 팔레스타인 땅이 무조건 인종적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인가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지원과 강력한 힘에 기반해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가는 이스라엘은, 다윗 보다는 골리앗에, 피해자 보다는 압박자와 가해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수천명의 팔레스타인들이 적절한 재판도 없이 구금되어 있고, 지난 2008년 12월 27일 가자지구 전쟁때는 무방비 상태의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1400명 가량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살해되었습니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도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 사망한 이스라엘인은 8년동안 20명에 불과한 반면, 이스라엘 전투기가 하루 공격으로 3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흔한일이라고 합니다. 2010년 1월에는 모사드 요원으로 추청되는 암살자들이 유럽과 호주 등의 여권을 위조해 두바이의 호텔에서 하마스 간부를 암살하기도 했고, 2010년 5월 31일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향하던 국제 구호선의 승선자들에게 발포해 10여명을 숨지게 하는 등, 이스라엘의 정책은 말 그대로 국제법과 인권을 무시하고 국가 테러를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세의 기독인들은 반유대주의에 기반해, 유대인들을 처절하게 차별하고 핍박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현재 보수적 기독인들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식의 반대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이스라엘이 핍박과 차별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내에서는 홀로코스트가 다른 역사상의 학살들보다 특별하고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이나 (실제로 북미와 남미의 원주만들에 대한 학살은 숫자나 처참함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에도,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무시되다 시피 한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문제제기도 곧 '반유대주의'로 취급되고, 결코 용납될 수 없다라는 식의 분위기가 미국 내에서 팽배한 것도 상당히 기이한 현상입니다. 심지어 미국의 몇몇 국제정치 학자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스라엘의 로비에 의해 납치 되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예전에 한 유대인 친구와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웃으면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유대인들보다도 오히려 이스라엘 문제에 열을 올리고 극단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을 보이는 것이 자기도 신기하다는 말을 하더군요. 실제로 미국의 팻로버트슨 목사 같은 경우는, 팔레스타인의 완전 점령을 주장하는 이스라엘 극우파의 입장을 지지해 왔는데, 지난 1995년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개념 아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시도했던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암살과 2006년 샤론 전 총리의 뇌출혈로 인한 사망을 하나님의 땅을 나눈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까지 주장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조악하고,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을 상당수 미국 기독인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교 신자들이 구약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마음과, 마지막 때에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독인들에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것과 현재 국가 이스라엘의 정책은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상식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에 비춰볼때,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상당히 비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한편, 미국의 보수기독인들안에는 “God bless America”로 대표되는 자국중심주의와 기독교신앙의 결합이 두드러집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고 그렇기에 ‘선’이며,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실 거라는 생각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먼저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적인가, 그것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인구가 많다고 해서 그 국가가 기독교 국가인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운동이 일개 국가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가 등 의문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축복을 받을 것이며, 이방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구약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의 오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궤를 가지고 나갔어도, 이스라엘 안에 죄가 있을 경우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오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느냐 였습니다. 언약을 지킨 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를것을 의미했는데, 하나님은 혈연이나 기독인들의 숫자가 아닌, '정의와 공평'에 따라 이스라엘과 이방을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선을 행한다면 하나님이 미국의 편일수도 있겠지만 불의를 행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에 따라 미국이나 그 어느나라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링컨대통령은 하나님이 우리편인가를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를 기도하라고 했는데,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이 무슨 짓을 하든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고 자기들 편이어야 한다고 믿음으로서, 성경과 기독교의 정신을 왜곡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반성력을 상실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합리화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짐 월리스는 자신의 책 ‘회심’에서 진정한 회심은 우리가 섬기던 모든 죄와 우상에서 돌아서는 총체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외에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이 우상일 수 있고,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의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관찰한 보수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결국 미국이 기독교화가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미국화' 된 것이, 오늘 미국 보수 기독교의 안타까운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기독인들안에도 이런 민족중심적 사고가 많이 나타납니다.그 예로, 한국은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제사장 민족이요, 앞으로 공산권과 무슬림을 향한 복음의 서진을 위해 하나님이 크게 쓰실 민족이라는 생각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부어주신 축복은 말할 수 없이 놀랍고, 저도 위의 바램이 이루어 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서 이후 ‘제사장 민족’이라는 개념이 성경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안에 집단적 물질적 축복과 성공을 신앙적으로 합리화하는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닌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3세계에 나간 일부 한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처럼 예수 잘믿으면 경제가 발전하고 잘살게 된다는 것을 복음(?)으로 가르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게 복음의 핵심이라면, 예를 들어 기독인과 교회가 적은 일본은 왜 잘 살고 있는걸까요? 축복이 아닌 핍박을 받은 순교자들의 삶은 또 어떻게 설명합니까?). 한국교회와 한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면, 한국의 선교사들이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동시에, 한민족이 대륙을 달리며 세계 역사를 주도할 것이다(?)는 식의 희망을 피력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담론에서는, 심지어 과거 제국주의 선교모델과의 유사성까지도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론적 관점은 하나님의 윤리와 정의보다 성공과 부를 우선하게 하고, 그에 대한 욕망을 신앙적으로 합리화 해줄 가능성이 큽니다. 내부적으로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독재정권시기 비판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지 못한 것, 많은 사회 이슈들에 있어서, 약자의 입장에 서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강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대해서도, 교회안에 존재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사고의 악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 하나님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편이라고 믿는 것은 세계 열방의 하나님을 일개 민족이나 국가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키는 신성모독적 행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십자군이나, 이스라엘의 왜곡된 시오니즘, 그리스도인들안에 존재하는 인종주의, 민족주의, 패권주의, 선민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명백한 왜곡입니다.
P.S. 미리 소개하는 결론
이 시리즈의 결론이 되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기독인들 마저, 국제관계와 국내 정책에 있어 “안보와 번영”을 최 우선으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 안보의 위협을 제거하고 경제발전을 이루어 잘먹고 잘살게 되는 것이 지고지선의 가치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형적 부국강병의 논리이지요. 오늘이 한국에서는 지방선거일인데, 결국 선거를 좌우하는 메시지도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안믿는 이들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인들마저 이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안보와 번영”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 화해와 평화”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법도를 최우선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 도입 질문에 소개했듯이, 이라크 파병과 같은 정당성이 부족한 정책에 있어, 저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국가 이익보다 정의를 우선하고 끝까지 반대할 사람들은 기독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되고 안되고의 여부를 떠나, 모두가 이익을 좇을 때라도, 정의를 위해 No라고 말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승리를 믿는 자가, 당장의 이익이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외칠 힘을 갖게 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보수 기독인들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인 '정의' 보다도, '국익'을 금과옥조로 따르는 것 같아 의아함을 많이 느낍니다. 이런 왜곡의 결과는 역시 국가의 기독교화가 아니라, '기독교의 국가주의화'겠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단기간의 국익보다 정의를 우선했을 때, 장기적인 측면에서 더큰 국익이 찾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동시에 단기적 국익을 위해 정의를 희생했을 때, 장기적으로는 국익에 손실이 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시기를 얼만큼 잡느냐, 그리고 국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논의가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상당히 믿을만한 정보에 따르면, 파병결정 당시, 정책담당자들은 이라크 파병과 부시정부의 대북정책 유연화를 놓고 일종의 ‘빅딜’을 기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이러한 현실주의적 정책결정이 어떠한 득실을 가져왔는지 분명한 성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2004년 9월 3일 연설에서 제 3위의 파병국인 한국의 이름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며, 미국이 대북 정책을 선회는, 한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가 아닌, 미국 국내 선거의 공화당 참패와 네오콘들의 퇴진,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으로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 내 비난이 고조된 2006년 말, 2007년 초에 일어났기 대문입니다. 많은 경우 안보와 번영을 추구하면서 평화와 정의가 파괴됩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권력자들은 '안보와 번영이라는 거짓된 약속'을 내세워 평화와 정의를 파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처럼' 그것을 절대화된 '우상'으로 섬길 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 – 즉 공평과 정의를 추구할 때 '따라'오는 것이라는 점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무너진 것은 외적의 위협도 있지만그 안에 이미 정의와 공평이 파괴되고 극심한 빈부격차, 토지제도의 문란 등으로, 국민들이 그 나라의 체제를 지킬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도 외적의 침입과 나라의 상실은 이스라엘의 국내적 죄(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총체적 타락)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고, 동시에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이었습니다. 반대로 국민들이 삶에서 공평와 정의를 누리는 나라는 그 누구도 쉽게 침략할 수 없고, 그렇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의 원리를 따를 때,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안보와 번영이 최고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라를 지킬것이고,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느냐? 순진한 소리 말아라"라고 한다면 이렇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먼저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공평과 정의가 서면 하나님이 안보와 번영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이는 개인의 신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와 성공과 생존"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고 정의와 공평과 인애의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욕망에 굴복하기 쉽고 그럴때에 우리 삶에서 정의와 공평과 인애는 파괴됩니다. 현재의 기독교는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보다 부와 성공을 합리화하고 축복하는 왜곡을 보여주고 있고, 심지어 복음의 내용 자체도 물질주의, 성공주의, 승리주의로 교체되는 경향마져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회의 비극이며,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악'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고, 그분의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기독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관련 성경구절을 몇구절 소개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의'는 가급적 정의로 바꾸어 읽어야,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두 구절은 제가 개인적으로 바꾸어 읽은 것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5:10]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벧전3:14]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10:31]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이제 다시 내가 너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 내듯 너를 씻고, 너에게서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주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패망하고, 주를 버리는 자들은 모두 멸망을 당할 것이다. 너희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 숭배를 즐겼으니,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가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으므로 창피를 당할 것이다. 기어이 너희는 잎이 시든 상수리나무처럼 될 것이며, 물이 없는 동산과 같이 메마를 것이다. 강한 자가 삼오라기와 같이 되고, 그가 한 일은 불티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둘이 함께 불타도 꺼 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아슬란님, 좋은 답글 감사합니다. 결국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막강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의 결과인데, 동시에 종교적인 부분도 그러한 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이 곧 성경적인 입장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배우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이 부분도 참 중요한 이슈인데, 기회가 되면 한번 글을 써 보려고 합니다.
꼼꼼하게 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묻고 싶네요
1.지금 세계 상황도 이스라엘 포함 하나님이 주권아래 있다고 믿습니다
2.이스라엘 독립에 문제가 있어 당시 영국이 이스라엘보다 더욱 크고 비옥한 땅 아프리카 식민지를 유대인에게 주어 독립국으로 만들려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유대 독립국을 주도한 시온주의자 지도자들이 찬성하였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지지자들이 모두 일년안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일본.넑은 미국 땅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독립국으로 만족하고 살기원했지만 그들도 자기가 선택할 땅은 가나안 땅이라는 것을 벗어날수 없었습니다....그들도 테러에 시달리고 살고 싶지 않습니다...
유대인들도 평화를 원하고 환경이 좋은데 살고 싶습니다...폭탁인 터지고 문제 많은 곳에 왜 하나님이 떠나지 못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왕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계획을 할지라도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결정합니다.
3.팔레스타인도 그리스도 사랑에서 유대인도 그리스도 사랑에서 결합하며 서로 위로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지금 상황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먼저 입니다
비판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하용조 목사님 설교중
전부현님 답글 감사합니다. 먼저 무슨말씀이신지 잘 이해할거 같은데, 그건 저도 몇년전까지 전부현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일부 목사님들이 하는 성경해석만을 듣고, 무조건적인 이스라엘 지지가 성경적 관점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성경을 좀더 읽어보고, 국제정치를 공부해 보면서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1. 저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구요,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제 주장은, 예수님 이후에, 유대인을 포함한 어떤 민족이 선민이라는 사상은 비성경적이며, 유대인이 구약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특수성과 유대인 복음화의 중요성을 인정하더라도, 현재 세속 국가 이스라엘이 추진하는 모든 정책이 무조건 옳다라고 믿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입장은, 상당히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왜곡된 선민사상이 아닌,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구요.
2. 또 한가지, 내가 이해한 하나님의 뜻이나 성경해석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를 들어, 위에 언급하신 시온주의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오늘도 여러 자연재해나 사망사건들이 있는데, 그걸 하나님의 심판으로 손쉽게 대응하는건 상당히 조심스런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3.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하나님이 위로하실 거라는 말씀은 저도 무척 동의하고 바라 마지 않습니다. 다시말하지만,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 화해와 평화라는 관점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봐야할 그리스도인들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입장만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이 제 글의 목적이었습니다.
4. 하용조 목사님이 무슨 맥락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수님이 하신 수많은 비판들도 부정해야 겠지요? 잘못된것에 대해 비판조차 없다면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 해결이 어떻게 가능할지 궁금하네요. 그런식으로 비판을 막아온것이, 오늘 부패한 많은 교회들의 모습을 낳은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P.S. 꼼꼼하게 읽지 않으셨다고 하는데, 이 정도로 단정적인 답글을 달으시려면, 먼저 글은 한번 꼼꼼하게 읽어주시는게 예의겠지요?^^ 이 문제에 대해 관심도 많고 열정도 있으신거 같은데, 부족하지만 최근에 이스라엘에 대해 구체적인 글을 여기에 하나 더 썼고 앞으로 한두번 더 연재를 할 예정이니, 꼭 한번 정독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조지아주에서 아내와 함께 살면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인엽이라고 합니다. 2009년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석했었는데, TM 코스타에서 강의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때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었고, 강의안을 정리해서 올리기로 eKOSTA에 약속드렸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마무리를 못하던 중, 이번에 블로거로 초대해 주셔서, 앞으로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지난번 강의안으로 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읽으며 전공인 국제정치를 공부하면서 고민 했던 것을 정리해 올리는 글이 될것 같네요. 제가 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전공분야에서도 아직 기초를 다지는 중이라, 이렇게 글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신앙과 세상을 함께 고민하는 하나의 시도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소 딱딱하거나, 정치적인 견해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점 또한, 다양성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들어가며>
이런 류의 강의를 할때 제가 주로 시작하는 도입 질문중의 하나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당신이 당시 대한민국의 정책 결정권자라면 (파병 여부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입니다. 이 질문에는 국가의 이익과, 윤리라는 두 가지 변수가 중요할 텐데, 국가 이익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크게 세가지 정도의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파병을 통한 국익도 있고 이라크 전쟁이 윤리적으로도 정당하기에 찬성한다. 2.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국익을 생각해서 찬성한다 3. 국익이 있더라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기에 반대한다.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놀라는 것은 비기독인은 물론이고, 상당히 많은 기독인들이 두번째, 즉 현실주의적 선택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결국 국익이 최종 선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보수나, 진보보다도 강력한 담론은, 현실주의혹은 국익 우선주의가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실제로 노무현 정부하에서의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과,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의 집권과 정책들 뒤에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국가이익(경제와 안보에 있어서의 물질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서, ‘올바로, 정의롭게, 평화롭게 살아보세’ 보다는 ‘잘먹고 잘 살아보세’가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국내적으로는 애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자국 중심주의, 일방주의, 패권주의와도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크게 보자면,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이러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접하는 많은 사회문제의 기저에는, 그리스도인이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이익이라는 강력한 이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안에,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로 신앙을 개인의 차원으로 국한하는 이원론적 관점이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언제나 일치한 다는 관점, 혹은 하나님 잘 믿으면 우리 나라가 잘 된다는 축복론적 입장 등이 암묵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온것이 아닌가 싶은데, 과연 이런 관점이 성경적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정치적 역할의 문제점들을 살펴봤을 때도, 역시 이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에 대한 논의와 고민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대략 아래와 같고, 인용한 성경은 표준새번역을 썼습니다.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4)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약의 윤리와 선지자들의 비판 전통
(5) 신학의 문제: 이원론과 콘스탄틴 주의
(6) 국가의 기원과 그 속성. 권력의 악마성과 그 대안.
(7) 정치적 권위에 대한 두 가지 왜곡된 생각
(8) 국제관계에서의 정의: 제국의 정신과의 충돌
(9) 예수님의 삶, 십자가의 영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
(10) 성령의 역사와 해방적 함의
(11) 뒤틀려진 기독교
(1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요한계시록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많은 경우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국가주의가 정치 조직과 구조에 기초한다면, 민족주의는 인종과 문화에 기반한다고 하겠죠. 한국처럼 비교적 인종적으로 단일한국가라면(이 부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고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비롯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만), 두 개념이 중첩되고 서로 강화하는 형태를 띌 것이고, 미국처럼 다인종 사회 같은 경우, 인종보다는 문화와 정치조직이 더 중요시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가지의 공통점은, 자기 집단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민족주의나국가주의를, 자기애와자기 중심성의 확장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물을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것이 애국 애족을 넘어, 우리를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또한 내부적으로는,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의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집단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언제나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이러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부분을 성경의 관점에서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역사 중,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에서 나타난 이집트 심판과 가나안 정복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관점으로 읽혀져 왔습니다. 실제로 유럽의 기독교인들과, 흑인노예제 및흑백차별제도하의 미국 남부 기독인들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이 저주받은 일화를 이용해 인종차별을 합리화 하기도 했고, 미국 역사 초기에 일어난엄청난 숫자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의 기독인들은 가나안 정복이야기를 통해 합리화 했습니다. 최근에도 미국의 보수적인 목사들 중에는, 이라크 전쟁이나 대 테러 전쟁을 '이스마엘의 후손 대 이삭의 후손'의 전쟁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이 과연 위의 인종주의적 오류들과 얼마나 다른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민족, 혹은 국가의 수호신으로 왜곡하고, 이를 넘어서 폭력이나 학살을 합리화하는 데까지 성경의 가르침이 악용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한편, 사랑의 하나님이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일순간에 쳐서 죽인이야기나, 어린아이와 가축까지 모조리 없애라고 하신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기독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상당히 힘든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기독인들은,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그냥 넘어가자라고 하거나, 이를 영적인 싸움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오류들처럼,이를 민족주의나 패권주의 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성경과 신앙서적들을 살펴보았는데,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민족주의적 성경해석의 오류를 풀어주는 성경구절들을 몇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창 15: 13-16]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레 18:24-29]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저지르면, 이것은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들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혔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더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악한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 너희는 모두 내가 세운 규례와 내가 명한 법도를 잘 지켜서,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지 않도록 하여라. 본토 사람이나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 역겨운 모든 짓을 하여, 그 땅을 더럽히고 말았다.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누구든지 위에서 말한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면, 백성은 그런 짓을 한 그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들에 대해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아니라, 공정한 열방의 심판자로서 접근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을 줄 수도 있었지만, 사대를 걸쳐 기다려야 했는데,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그 땅에서 쫓겨나거나 멸망 당할 만큼 ‘차고 넘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호수아 정복 시기에는 그들의 죄가 ‘관영’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수간이나 인신제사 같은 극악한 죄악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18:1-23)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그들이 민족적으로 이방민족이거나, 하나님을 안믿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기준에서 그들의 악이 멸망과 땅에서 토함을 받을 정도에 이르렀기에 심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시기나 제국주의 시기에 주장된 것처럼, 단순히 원주민들이 이교도들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논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런 논리가 맞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을 멸망시켜야 하셨어야 할텐데, 성경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 만민이 구원을 경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사상에 어두워 그 소명을 감당하지 못한것 뿐이지요. 그러므로 가나안 주민들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내주기 위해 없어져야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그 심판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같은 죄를 범하면 멸망당한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일하게 땅에서 ‘토함’을 당할 것이라고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점입니다.이 경고는,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루어져서, 가나안 못지않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은 처절한 심판과 포로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거주민이 하나님의 뜻과 언약에 따라 '살아갈 때', 거주할 권리를 갖게 되는, ‘언약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적, 인종적으로 이스라엘만을 편애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무고하게 멸망시키시고, 이집트백성들을 죄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실제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하던 시기, 그는 가나안족속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고(창23장), 야곱과 요셉 시기에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창47:1-12). 그들이 인종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 할 때 일어난 이집트에 대한 심판을 살펴보면, 이집트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들이 당시 약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강제노동과 영아살해와 같은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들을 보내라는 하나님께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전 이집트의 장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의 남아들은 태어나는 족족 죽임을 당했습니다.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압박자와 피압박자',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지, 인종적 차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참고로 이사야서 19장의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다음과 같은 회복과 구원의 예언으로 끝납니다.
[이사야 19:21-25] 주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이집트 사람에게 알리실 것이며, 그 날로 이집트 사람은 주님을 올바로 알고, 희생제물과 번제를 드려서, 주께 예배하고, 또 주께 서원하고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주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치시고 나서는 곧바로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이므로,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주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
결국,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는,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하지, 민족적, 인종적인 차원에서의 폭력과 학살을 합리화할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동시에 이스라엘이 심판 받은 역사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말씀을 모르고 범죄하는 이방인과 싸우시지만, 말씀을 알고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과도 처절하게 싸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칼은 양날의 칼이요, 하나님의 전쟁은 이방과 이스라엘 모두를 향한 정의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타락하고 나서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점령당하고 포로되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도 잔인하실 수 있는가를 묻지만, 그 전까지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타난 총체적 타락상 – 성적타락과 부정직이 만연하고, 희년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노예로 부리고 팔아버리며, 뇌물을 받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하나님이 아닌 군사력과 강대국을 의지하고, 이방종교와 우상을 섬기는 – 을 살펴보면, 심판받을 당시의 이집트나 가나안 원주민이 보여준 타락과 포악의 정도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할 뿐더러, 오히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신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놀랍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결코 한 민족의 수호신이 될 수 없으며, 기독교의 사상은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와 근본적으로 충돌합니다. 과거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위해 불의한 인종차별과 학살, 전쟁등을 합리화 하고자 했고, 이에 발맞춰 일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악을 저질러 왔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고, 성경을 그에 맞춰 왜곡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그분의 정의를 더럽히는 심각한 죄일 뿐더러, 정의와 공평을 기대했던 많은 이들을 교회와 복음으로 부터 멀어지게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다음 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는 두가지 관점 (혈연적 공동체 vs. 언약적 공동체)을 소개하고 비교해 볼 예정입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파고들다가 이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지난 수십년간 맘속에 담겨있던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을 드디어 찾은것 같아 정말 행복한 기분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떳떳히 말하고 또 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이런 종류의 애매한(?) 의문점들이 저를 항상 가로막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할만한 곳도, 대답해 줄 사람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한국기독교의 분위기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요? 말씀을 더욱 묵상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과학하는 크리스천’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 해봄직한 질문이 있다.'내가 개발하는 기술 혹은 발견하는 자연 원리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인가?'하는 것.이 질문은 순수 과학을 연구한다 하여 비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며,주가 지으신 대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기본적인 목적과도 결부되어 있는 '기저 질문' 이다.세상의 모든 것이 주께서 정하신 목적이 있듯, 우리가 자연을 탐구하는 일도 마땅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은 일관되게 우리 주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수행하는 과학은…그 기본적 목적에 합하는가?혹시 너무 한쪽 - 부자 - 만을 위한 것은 아닌가?하나님의 관심사와 얼마나 유사한가?세상을 대신 맡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적합한 방향을 취하고 있는가?이러한 고민들을 부족하나마 함께 나누고자 한다.
GTM 900 정치학 분야 : 이인엽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등,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이슈들의 뒤에는, 국익을 최 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문제가 있으나 국익이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다’는 이런 논리는, 극우나 극좌의 논리보다도 더 큰 파급력으로 우리의 현실을 규정해 온 것이 사실이며, 크게 볼 때,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내부적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권력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일방적인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며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 하고, 우리의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역사적으로 일제시대와 6.25,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일방적인 친미, 반공, 보수적 사고를 내재화 하고, 정치 권력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 혹은 그에 대한 헤게모니적 장악과 같은, 성경적 근거가 빈약한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율법서에 나타난 계약사상, 선지자들의 권력과 불의에 대한 비판, 예수님의 비폭력주의, 성령강림의 해방적 함의, 초대기독교인들과 로마제국과의 관계,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간략히 살펴보고, 성경은 물질적 축복과 세속적 성공인 ‘잘 살아 보세’가 아닌, ‘올바로, 정의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아보세’를 외치고 있으며, 화해와 평화를 추구 하고 있다는 것에 기반해,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습니다.
GTM 1000 경제학 분야 : 신자은
Capitalism in Christian Perspective: Theory and Practice
공산주의라는 역사적인 실험이 실패로 드러난 이후, 전세계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의 틀 아래에서 빠르게 진화해나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극대화 추구와 시장의 기능을 통해서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있다는 neo-classical economics의 이념은 이러한 초자본주의의 흐름에 부응하여 Academia와 실물경제 모두에서 주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편, 국가간, 사회계층간, 지역간의 빈부격차 문제, 식량문제, 그리고 environmental injustice 는 더욱 심각해져만 갑니다.
경제 영역에서, 연구자로, 경영자로, 정책결정자로써 활약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치의 conflict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의 선택과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경제영역의 주도적 세력으로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소명을 온전히 이루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본 세미나는, 성경적 경제관을 바탕으로 현 경제구조와 흐름을 진단해보고, 성경적 경제관을 직업과 학문에서 구체화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나의 삶 가운데서 구현가능한 형태로 발견해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GTM 1100 행정학 분야 : 최유진
성경적 정책결정 (Bible-based decision making): 인간의 결정 vs. 하나님의 생각
행정 및 정책 연구자들의 연구 범위는 그 어느 학문보다 넓은 것 같습니다. 사람(labor force)을 연구하기도 하며 때론 사람들의 집합체인 조직(organization)을 연구하기도 하고 그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물질(finance)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의사결정, 환경, 복지, 도시 등 정말 연구의 대상은 무궁무진합니다.
행정 및 정책 연구의 본질은 “공공의 가치” 혹은 “공공의 이익 추구”라고 할수 있습니다. 나 자신 만이 아닌 이웃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성경적 세계관과 닮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배제된 공공에의 관심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정책 수예자만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정책의 본질이 되어 인간의 배를 불리우지만 영혼은 매마르게 합니다. 과연 공공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이 다른 인본주의의 막장 시대에 행정 및 정책연구자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 딜레마에 대한 본질적 해답은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민까지 멈출순 없습니다. 광역 단위의 정책결정이 미치는 삶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찾지 못해도 같이 고민하는 동역자를 찾고 싶습니다. 서로의 연구주제 속에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계신지 나누고 싶습니다.
GTM 1200: 음악분야 : 배윤영
음악부문 tm kosta 에서는, Christian음악인으로 살아가면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지 함께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보다 등수와 점수, 스타성이 인정받는 이 경쟁의 현장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며, 복음을 나누는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음악계의 모습, 나의 모습은 무엇인지 함께 토의하고자 합니다. 비교의식, 열등감, 자만심, 완벽주의 속에 개인주의가 자리잡은 이 음악계의 현실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역류하며 살아가야 하는 Christian Musician들이 tm kosta를 통해서 혼자만 또는 각 학교만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전 미주지역에 퍼져있는 지체들을 만나게 될 것 입니다. Competition, audition 등의 제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승리는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영역에서 무엇을 주님이 창출해내길 원하시는지 진지하게 토의하고자 합니다. 현재 미국전역의11 곳의 음악학교의 캠퍼스 사역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음악이라는 tool을 가지고 앞서서 선교사로 살아가시는 분들의 이야기도 나누려 합니다.
GTM 1300 지구/환경/해양 분야 : 유상준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새천년의 막이 오른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인류는 기후변화와 자원고갈, 그리고 환경오염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에너지를 포함한 자원은 그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종이 인류에 앞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북극권에 사는 북극곰은 먹이사냥을 위해 조오련이 횡단했던 대한해협보다도 먼거리를 매일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토양은 필터기능을 상실했고 바다는 쓰레기국이 되어가고 있다. 유기농이란 농약 이외의 오염물질에 노출된 농수산물로 정의가 바뀌어야 할 판이다. 모두가 우리의 무절제와 탐욕에 의한 결과물들이다. 결국 지구환경문제가 가장 먼저 세계화를 달성한 분야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문제해결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토의주제를 다룰 것이다. (1) 지구환경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 현존하는 지구환경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3)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세계관은 무엇인가?
GTM 1400 종교/신학 분야 : 김상권
청년 크리스천의 교회론 깔끔하게 다지기
교회가 만든 청년들을 다 어디로 갔나? 전통적인 교회론에 입각한 한민족 공동체의 100년 역사는 청년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리고 다가올 미국교회, 유럽 교회의 ‘급속한 쇠퇴’라는 우려를 짐작하는 기성세대만을 남긴 채... 이제 그리스도께 헌신한 청년들이 만들 교회는 다음 세대들인 또 다른 청년들을 교회 안으로 다시 초대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왜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는가? 다음 세대를 대변하며, 다음 세대 교회를 책임질 청년들에게 교회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현재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변종 바이러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주께서 피값으로 사신 그래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전통적인 교회론의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보고, 오늘 날의 교회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들을 나누며, 꿈에 그리는 그 교회와 다음 세대 교회관을 정립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교회에 대한 그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GTM 1500 Tent-making : 박나영
Tent-making
기독교 선교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선교방법론과 전략에 있어서 더욱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형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적 흐름아래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기독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선교 핵심 국가로 자리잡았습니다. Tent-making은 현 시대에 효과적인 하나의 선교전략으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타문화 권에서(Cross-cultural countries/settings) 선교사적 사명과 부르심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나누는 선교 형태입니다. Tent-making이란 무엇인가 성경적인 (Biblical) 관점과 선교적인(Missiological)관점에서 조명하고, 왜 Tent-making 사역이 현 기독교 선교에 효과적인지- 이 선교 전략의 효과적인 특징들과, 실제적인 Tent-making사역의 예 들을 살펴보고, 또한 Tent-making선교 전략에 대한 토의점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자신의 Career와 직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고자 하시는 분들, 또 타문화 지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자신의 직업과 삶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을 환영하고 함께 이 주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GTM 1600 의료분야 : 채영광/김용정
Healthcare as a Mission
Healthcare 분야의 최전선에서 사역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넘어야 할 내적 외적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환자의 모든 요구를 제한적으로밖에 충족시킬 수 없는 사회적 제도적 한계에 좌절하는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내적으로는 매일 매일 일상에 함몰되어 환자 한명 한명에 대한 compassion을 상실하게 되는 정신적 영적 권태감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본 세미나에서는 Healthcare 분야에서 필연적인 이 내적 외적 '환난'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용기'를 가지고 Healthcare를 주님 주신 'Mission'으로서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현재 healthcare 분야에 계신 분이나 healthcare 및 의료선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모두 함께 Healthcare 사역자가 어떻게 '예수의 평화'를 전하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GTM 1700 생물학분야 : 김성중/김병재/이성일/이지혜/한상진
the second calling
문제의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훈련하신 것은 이방 민족들의 침노 받은 땅을 정복하고 거룩의 땅을 회복하시고자 함이었다. 우리의 학업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으로 나아가기 위한 광야 훈련이라고 할 때, 우리를 통해 되찾고자 하시는 거룩의 땅은 어디이며, 어떻게 되찾을 수 있겠는가?
초 록: 주님께 부름 받은 우리는 성도로 제자로 하나님의 가족이란 동일한 아이덴티티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각각 다른 땅과 영역이 주어졌듯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기 위해 삶으로 섬기고 감당해야 할 영역들은 다양하다. 본 TM에서는 먼저 이 시대에 생물학 영역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떤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이 하나님 나라에서 갖는 의미와 비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아울러 진화론과 같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과학계의 이슈들에 대한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의견과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나눌 내용들:
1)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소명
2) 진화론에 대한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견해
3) 성경적 관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researches
GTM 1800 경영분야 : 조성문
크리스천 기업 경영과 롤 모델
1. Discussion
* Job and Mission: What does it mean to find 'vocation'? 하나님의 사역과 내 job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 MBA란? Business School과 Christian Life를 연결하기
* 성경적 기업 경영이란 무엇일까? 성경에서 배우는 성공적 사업 전략? 예)욥기 22:21-30,요한복음 4:13~15,고린도전서 10:31-33
2. Sharing
* 주변 사람, 또는 유명인 중 진실된 Christian인 동시에 성공한 business person 의 이야기 공유하기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는 크리스천):
o 예) John Wanamaker (세계 최초 백화점 창시자),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 강영우 박사 (3C 혁명 저자), 황성주 목사 (이롬생식 창업자), 김성오 (메가스터디 대표, '육일약국 갑시다' 저자)
GTM 1900 예술분야 : 임채석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크리스천 예술인들의 가져야할 바람직한 Art Management 이야기
음악, 미술, 공연 등 수 많은 예술관련 크리스천들은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 지를... 이 세미나는 특별히 예술과 관련한 공부를 하는 젊은 청년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귀한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영 Flow를 통해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술의 필요성과 전문성을 요구하고, 그에 맞는 경영기법을 연구,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곳. 예술 세계에서 우리가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고민해야 할 지를 각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혹은 공부하는 우리들이 그 방법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 청년들이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를 같이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습니다. 폭 넓은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민하는 부분을 놓고, 현재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경영 과정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며 살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지구/환경/해양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KOSTA 2009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Task-Major KOSTA
GTM1300: 지구/환경/해양 분야
유상준
개요
새천년의 막이 오른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인류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등의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환경오염문제는 국지적인 영향을 지나서 지구 전체 생태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가 되었다. 특히 대기오염의 경우를 보면, 1950년대에는 핵전쟁으로 인한 방사능 피해 정도만 전체 지구를 오염시킬 수 있는 물질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성층권 오존, POPs (Persistent Organic Pollutants), 수은등을 비롯한 많은 오염물질들이 지구의 전지역으로 골고루 이동되어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1).
Figure 1. Evolution of the perceived spatial scale of air pollution problems in the United States. (Keating et al, 2004)
해양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육지에서 유입된폐기물이 바다의 곳곳을 오염시키고 있다 (Figure 2).특히 태평양에 떠있는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Great Pacific Garbage Patch)의 경우 그 규모가 텍사스주의 넓이보다도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물질이 분해되어 정화되기까지는 수백년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계산된다.
이렇듯 인간활동에 의해 지구환경으로 배출된 오염물질은 Environmental Fluids인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고, 이들은 다시 기권 (Atmosphere), 수권 (Hydrosphere), 암권 (Lithosphere), 그리고 생물권 (Biosphere)에 까지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환경오염문제는 지구의 전체 시스템을 오염시키는 Global Problem이 되었다.
Figure 2. Great Pacific Garbage Patch. (oceans.greenpeace.org/en/the-expedition/news/trashing-our-oceans/ocean_pollution_animation)
인류의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은 기후변화와 자원고갈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종이 인류보다 앞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이를 정지시키지 못한다면 인류 전체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해마다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북극권에 사는 북극곰은 먹이사냥을 위해 조오련이 횡단했던 대한해협보다도 먼거리를 매일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산화탄소등 온실가스의 배출량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며 (Figure 3),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장서야 할 선진국과 강대국들은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4).이처럼 기후변화문제 역시 환경오염과 더불어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고 말할 수 있다.
Figure 3. Recent Global Monthly Mean CO2. The
dashed red line with diamond symbols represents the monthly mean
values, centered on the middle of each month. The black line with the
square symbols represents the same, after correction for the average seasonal cycle. (www.esrl.noaa.gov/gmd/ccgg/trends/)
Figure 4. Carbon Tracker shows Atmospheric Concentrations of CO2. (www.esrl.noaa.gov/gmd/ccgg/carbontracker/)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에너지 사용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Figure 5).전세계 인구수 또한 증가하는 추세여서 에너지 사용량의 증가 추세는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현재의 기술로 미루어 볼 때 석유는 앞으로 약 30년, 석탄은 120여년의 여유분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고, 각국이 앞다투어 청정 및 재생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에너지를 포함한 자원고갈문제 역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 할 수 있겠다.
Figure 5. World Marketed Energy Consumption, 1980-2030.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이렇듯 지구는 인간의 무절제와 탐욕에 의한 자원남용으로 인해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태계가 생존의 위협에 쳐하게 되었다. 결국 지구환경문제가 가장 먼저 세계화를 달성한 분야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문제해결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토의주제를 다룰 것이다.
(1) 지구환경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 지구환경문제에 세상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3) 지구환경문제해결을 위한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근본원인
그렇다면 이런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환경오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 모두 인류의 탐욕과 무절제함이 초래한 결과이고 국제사회를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팽배한 무한경쟁에 따른 비협조적인태도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Figure 6).자원을 무분별하고 경쟁적으로 발굴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생태계를 위협하는 오염물질이 자연정화능력을 초과하여 배출되었고, 오염물질은 아니지만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조절하는 온실가스의 대기중 농도가 한계농도를 초과함으로 극심한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18~19세기의 철학 및 사상의 조류를 주도한 모더니즘적 세계관에서 발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유토피아의 달성이 가능하다는 논리로서, 진화론과 같은 논리로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고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등을 통한 인간의 능력만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이 사상은 결국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와 같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등이 팽배해진가운데인류는 지구환경 전체에 걸친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다.
Figure 6. 지구환경문제의근본원인
해결방안
그렇다면 위기의 지구환경에 대하여 세상이 제시하는해결방안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절제와 협력을 통해 문제의 근본원인인 무절제와 비타협의 문제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이다(Figure 7).실제로 세상 리더쉽은 소비와 생산의 구조적 변화와 기술개발등을 통한 자원남용의 절제, 그리고 그로 인한환경오염물질과 온실가스의 배출 저감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해 글로벌 협력이필수요소로 제시되고 있다. 이미 국경을 넘은 지구환경문제는 Global Agenda가 되었고, 이는 Global Collaboration을 통한 Global Solution에 의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만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모더니즘 시대의 결과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와 같은 위기가 초래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이제 국가와 같은 기존의 질서와 지성 혹은 윤리와 같은절대적사회기준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되었다. 이는 모든 기존의 질서와 기준을부정하고 해체하여그로 인해 다양화된 것들을 새롭게 혼합하여 새로운 글로벌질서를 세우려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으로 볼 수 있다.이는 현재 정치, 경제, 문화등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구환경문제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새로운 글로벌 리더쉽에 의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리더쉽은 지식/정보화 사회에 걸맞는 과학기술을 보유한 형태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결국,남보다 앞선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개인 또는 집단이 글로벌 리더쉽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이 리더쉽은 모더니즘의 시대보다 좀더 글로벌화되고 강화된 권력인 동시에 지성과 윤리보다는 감성적이고 쾌락적인 면을 띄게 될 가능성이 높다.
Figure 7. 지구환경문제에대해세상이 제시하는해결방안
그렇다면 이들이 세상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지구환경문제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모든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건져내기 보다는 글로벌 리더쉽을 중심으로한 협력 세력들만이 혜택을 누리게 되고 나머지는 소외되며 오히려 핍박받는 구조로 재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왜냐하면 위와 같은 글로벌 리더쉽은 감성적으로 친화력은 높이겠지만, 비윤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리더쉽이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Figure 8과 같이 이런 리더쉽의 형태와 시대의 조류를 성경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우선 창세기의 바벨탑 시대를 살펴보자. 하나의 언어를 가진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 건설이라는 구심점 아래에 모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열방으로 흩으셨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침묵의 시대를 보면, 모든 길을 연결한 로마의 토대위에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려는 그리스 철학을 중심으로 세계가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로마가 닦고 연결한 이 길을 따라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날, 인류는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터넷, 휴대폰등의 네트웤을 통해 연결되고 있다. 여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가 세상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고 있다. 결국 시대에 따라 얼굴을 바꾸어 세상을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이끄는 글로벌 리더는 사탄인 것이다. 어떤 개인, 집단, 혹은 국가가 글로벌 리더쉽으로 나서더라도 결국 그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사탄이다. 이런 사회에서 절제와 협력을 통한 인류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제와 협력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바벨탑모델로는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구할 길이 없다.
Figure 8. 지구환경문제해결의세상적모델: 바벨탑모델
성경적 대안
그렇다면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여기에서는 노아의 모델을 통해 살펴보았다. 노아의 시대는대홍수라는 지구환경의 격변으로 인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놓이게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류와 생태계는 이미 멸망하여 없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인류와 생태계 또한 멸망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노아의 방주와 같은 대안을 제시하여 인류를 멸망에서 건질 노아와 같은 글로벌 리더쉽만 있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노아의 리더쉽 모델을 잠시 살펴보자. 노아의 모델을 전문성 (Specialty), 영성 (Spirituality), 그리고 글로벌 리더쉽의 세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다. 첫째, 노아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Figure 9).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다.그래서 그는 혼자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 수 있었고, 방수재로 역청을 사용하였으며, 생물종의 씨(Seed) 역할을 할 수 있는 짐승을 분류할 수 있는 생물학적 전문성이 있었다.성경적 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뿐만 아니라 각각 육식과 채식을 하는 새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지표면의 상황을 모니터링하였다.
Figure 9.성경적 대안: Specialty
둘째, 그에게는 영성(Spirituality)이 있었다. 그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 (창6:8) 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미리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에 대해 알려주셨다. 그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홍수는 시작되었으며 (창7:1), 그가 제사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창8:20-22). 영성이 있는 사람은 문제의 본질 혹은 핵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그리고 영성이 있는 사람만이 자신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셋째,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었다. 비록 여덟명이었지만 모든 인류와 모든 생태계를 구하였던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방주를 예비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히11:7). ‘Global Leader’라는 단어는’Global’ + ‘Lead’ +‘er’로 분해할 수 있으며, 이는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즉 글로벌 리더는 전체 (Big Picture)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올바른 방향 (Vision)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영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리더쉽이다. 코스타 강사이신 앤아버대학촌교회의 박상춘 목사님께서 리더쉽 훈련중 하셨던 말씀을 잠시 인용해 보면,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여 눈이 밝아지게 했다. 바로 세상을 보는 눈, 세계관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 눈을 다시 타락 이전의 눈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가치관과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이와 같이 전체를 보고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눈이 없는 사람곧 영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글로벌 리더쉽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리더쉽을 생각할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명성 또는 직위에 의한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작은 요소라는 것이다. 노아는 홍수가 시작될 때까지 최소한 무시당하는 존재였다는 사실 (마24:38-39)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글로벌 리더쉽은 세상적인 명성 또는 신분을통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는 Global Heart, 즉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자를 의미한다. 진정한 글로벌 리더쉽은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성과 세상을 구하려는 열정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주님의 머리 (Specialty), 주님의 눈 (Spirituality), 그리고 주님의 심장(Global Leadership)을주시고 노아처럼 사용하신다고 확신한다.
Figure 10. 세상모델과성경모델의비교
도전
지구환경문제에 직면한 위기의 인류에게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새로운 비용편익분석 (Cost-Benefit Analysis)을 해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비용편익은 “Cost from Me, Benefit to Me”이다. 하지만 세상을 품는 글로벌 리더쉽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Follower of Christ)가 가져야 할 비용편익의 새로운 개념은 “Cost from Me, Benefit to the World”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세상을 따라 결국은 침몰할 타이타닉호의 건조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감당못하는 믿음의 용사로 서서 또한번의 노아의 방주를 만들것인지 말이다.
참고문헌
Bible
Keating,
West, and Farrell (2004), Prospects for International Management of
Intercontinental Air Pollution Transport, The Handbook of Environm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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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International Energy Outlook 2009, U.S. Department of Energy, Washington, DC.
International Energy Agency (2007), Renewables in Global Energy Supply: An IEA Fact Sheet, OECD.
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me (2009), UNEP 2008 Annual Report, 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me (2009), UNEP Year Book 2009, New
Science and Developments in Our Changing Environment, UNEP.
Day,
Shaw, Ignell, and Steven (1988), Quantitative distribution and
characteristics of neustonic plastic in the North Pacific Ocean. Final
Report to US Department of Commerce, National Marine Fisheries Service,
Auke Bay Laboratory. Auke Bay, AK, pp. 247–266.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경제학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Capitalism in Christian Perspective (2): Practice
현대의경제학과자본주의가, 하나님의성품을닮아창조된인간의capability과함께unlimited
resources의근원이되시는하나님에게서분리된일그러진인간의실존을동시에담아내고있다는측면에서우리는현경제체제에대한긍정적인가능성을타진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가능성이원칙적으로역사적으로인정된다는점이, 오늘의삶가운데서이러한가능성을사실로구현해내는것의용이성을조금도보장해주지않는다. 따라서, 우리가짊어진‘신앙과학문/직장의통합’과제는그만큼힘겹고또비현실적으로보이기까지하다.
‘나눔’이라는단어만으로도우리는숨이멎을것같은부담감에사로잡힌다. 그러나예수님의기준은‘나눔’의차원보다훨씬높다. 나눔은그단어자체로, 전체가아니라일부를의미한다. 즉, 일부만을남에게내어놓음을의미하는것이다. 그러나, 과부의두렙돈은그녀의생활비전부였다.부자관원에대한예수님의요구도‘전재산을팔아가난한사람에게나누어주고’였다. 따라서, ‘나눔’은우리가실천하기에너무무거운짐이아니라, 오히려기준을낮추어우리가좀더쉽게하나님의뜻에따라살수있도록숨통을틔어준것이라고이해하는것이오히려진실에더근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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