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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핵심으로 들어가서 여태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리를  가르쳐 드렸는데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상대편이 나에게 상처준 것을 생각하면 절대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용서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입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를 보면 예수님의 아픈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offend한 거 아십니까? 우리가 모든  죄를 졌을 때 그 모든 offend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용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한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은 자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기억 안하고 용서하려고 한다면 참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김철수 선교사님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얼마나 큰 대가을 치르셨나요? ‘Passion of Christ’에서 그려진 하나님의 모습은 그 육체의 고통을 잘 표현해 줍니다. 육체의 고통도 너무 아프지만 제가 더 가슴이 아픈 것은 하나님이 외로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한번도 외로운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지만 항상 예수님이 여러분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둘째치고 하나님께서는 유아독존으로 유일하게 혼자가 되어보신 분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완전하게 separation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보신 분은 어떤 기분인지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게 일시적이라도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독생자를 완벽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내 상처가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에 절대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대가를 치르시고 여러분을 용서하셨는지 먼저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용서의 첫번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계가 없으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할 수 있듯이 용서를 받아본 것이 머리에만 있고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 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시면서 용서의 단계를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안되면 용서가 여러분에게 너무 큰 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지,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괴로움을 주었던 존재였는 지 기억하시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달은 후 해야할 것은 상대편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cool’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적으십시오.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나 망신을 주었는지, 자매 같은 경우에는 사랑한다고 해서 순결을 주었는데 어떻게 날 버릴  수 있는지. 그 모든 것을 다 적으세요. 그렇게 아픈 것까지 종이로 다 적어서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상처가 다 빛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상처가 치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픈 감정들을 다 적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raw feeling’을 전부 다 적으시고, 그것을 잘 소각하고 버리시길 바랍니다. 정말로 여러분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 지를 정확하게 드러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하면 많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모든 쓴 뿌리들을 하나님 앞에 다 적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죄를 짓는 것이 무서운 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raw feeling’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이 일이 정말 힘들지만 우리가 용서의 원어에 담긴 의미처럼, 탕감해주고, 던져주고,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만큼 아팠으니 나에게 보복의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게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저지른 행동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알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 용서를 실천하시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주고 복수할 권한을 포기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수할 권한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나에게 빚을 진 형제가 나에게 ‘백만 불’을 주어야 되는데 그 백만 불을 찢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시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이 용서했을 때 여러분을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교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만큼 중요한 것이 나에게 잘못한 상대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그것을 내려 놓았고, 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상처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서 담대하게 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는 이 일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다시 첫 번째 단계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날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용서를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자녀라 하고 싶지만 그래도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머뭇거릴 것입니다. 정상입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그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죄할 권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권리만 주셨지 정죄할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정죄는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다보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blind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죄권을 안주시는 것은 즐거운 복수를 혼자 하려고 하시게 아니라 복수의 과정에서 상처받는 게 우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신에게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결과적으로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내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하나님이 더 나은 ‘just maker’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공평하게 할 수 있도록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 용서했으니 봐 주세요’하더라도 그 사람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just maker’로서 일을 하십니다. 물론 상대편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이 잘 되는 방향으로 하시겠지만요. 모든 죄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했기에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예수님도 저희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처음 용서를 시작할 때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이 좀 더 자라면서 좀더 성숙한 이유로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한 분이십니다. 얼마나 정확한 분이신지는 물리적인 법칙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으셨을텐데 지구의  상태가 약간만 달라져도 지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리적인 세상도 굉장히 섬세하게, 정교하게 만드셨는데 여러분이 받은 상처를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여러분도 용서받고 싶은 것처럼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죄를 더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만약 사람들이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셨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죄가 아니라고 할 만큼 정신이 이상한 분도 아니었고, 다른 길도 있었는데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실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리다면 하나님이 복수해 주시는 것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숙하게 될수록  내가 받은 용서때문에 남을 용서하게 되고 내가 감사해서 용서를 하게 됩니다. 내가 일억의 빚을 졌는데 그게 탕감되었다면 누가 나에게 일 불을 탕감해 달라고 한다면 안 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감사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었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용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better ‘just maker’라는 믿음에서 하셨으면 좋겠고, 그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이 용서하시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도 용서를 해야 됩니다. 용서는 믿음의  행위이고, 선택하는 것이며, 복수할 나의 권한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이며, 여러분을 위한 일입니다. 용서의 유익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신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으시길 원하십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백만 달란트,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백 일과 천 오백 년의 노동의 차이와  같습니다. 용서를 안하겠다는 것은 일억 갚음을 받은 사람이 일 불을 안 주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제삼자와 가해자에게도 할 일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아픈데 주위에서 부채질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넌 크리스천인데 왜 용서 못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그 상황에 있으면 펄펄 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조심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제 삼자로서 도와야하고 곁에 있어주어야 한다면 기억하세요. 절대 쉽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정말 당한 사람에게는 큰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제 삼자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도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픔을 다 받으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대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시고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쉽게 해결점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상대편이 해결점을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들어주시고 아픔을 공감하고 기억해 주시는 것이 너무 필요합니다. 가해자로서 중요한 일은 사과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과를 받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사과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주고 회복을 시작시켜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실수로 상처를 주었고 사과를  하면 상대편의 상처의 치유가 굉장히 빨라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해자일 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하고 넘어가지 마시고 그 사람의 상처치유를 위해서 사과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아름다운 일이고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사과를 안 하는 것은 내가 상처를 주어도 나는 상관없다는 냉정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사과할 때 기억할  것은, 상대편에게 아픔을 준 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많이 싸우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이 의도를 하지 않았는데 당한 나만 바보가 되었다는 생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도하였던 그렇지 않던 상처를 받았다는 게 아픈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표현하고 정확하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나쁜 예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상대가 무엇이든지 잘못한 것 같으면 용서해 주세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잘못 안 했다는 말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상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집어주지 않으면 상대는 잘못한 것도 모르면서 ‘왜 용서를 해?’ 하는 식으로 나와서 여러분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모든 것은 실수다’라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고의건 아니건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상처를 주었다면 막연하게 화해를 청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저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에요.’하는식으로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상처는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라기 보다는  그 행동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기에 이 말은 올바른 사과가 아닙니다.  고백은 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부분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훨씬 축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고, 그것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 안에서 용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 놓으시고, 모든 일을 종이에 자세히 다 적으십시오. 그리고 내 안에 용서의 마음이 없는 것조차 고백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십니다. 용서할 힘도 구하십시오. 용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 마음과 힘도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감정과 분노를 생각나게 하세요. 상처가 곪으면 정말 아프기 때문에, 그것을 터트려야 합니다. 이 일은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과 아픈 고통들을 다 적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에서만 맴돌다가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들을 성령님께 드러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다  드러나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릴, 던져버릴, 그리고 뒤돌아갈 힘을 구하십시오.  
이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진정으로 믿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 어려움과 아픔을 통해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하기 힘듭니다. 한 번 용서하면 끝난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 받은 상처는 오래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이 과정을 반복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끝없이 축복하십시오. 그것이 진짜 여러분이 용서를  한 증거입니다. 축복을  하라고 하니, 정말 화가 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람을 용서할 때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 때에는 축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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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용서라는 말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어원을 보면 ‘나사’, ‘아피에미’ 즉, ’보내는 것’, ‘던져 버리는 것’이고 , ‘살락', ‘카리조마이’ 즉, ‘자비를 베푸는 것’,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을때 그 상처를 안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것을 던져 버려서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용서의 어원입니다. ‘던져버리는 것’, 그 어원을 기억하세요. ‘자비를 베푸는 것’은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상처를 주었는데 용서하는 것은 불쌍한 내가 당하고, 착한 내가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받으면 세상의 눈으로는 여러분이 복수할 권리를 갖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굉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보내 버리고 던져 버리는 것이고, 그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믿음가운데 그 담대하게 자신감을 가질 만한 일인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moving on’하는 것입니다. 뒤돌아서서 잊어버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처와 배신 이런 것들을 밑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저도 상처를 받고 용서하는데 일 년 반이 걸렸습니다. 지금도 자다가 그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일 년 반이 걸렸던 게 지금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아니까 5분이 걸립니다. 원칙을 생각하며, 날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니 5분 안에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부터 용서가 쉽지는 않지만 점점 더 좋아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일기장에 써 놓고 계속 묵상을 하게 되는데 그러지 마시고 던져버리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꾸 생각을 끄집어 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생각을 끊어버리는 게 필요한대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수 있지만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혹이 어디로 들어오느냐면 생각으로 들어옵니다. 과거가 자꾸 묵상의 주제로 올라오면 생각의 주제를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삼 분만 “초콜렛 초콜렛” 해보십시오. 초콜렛에 알레지가 있는 사람이 아닌 한 생각나는 건 초콜렛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처를 ‘잊어야지 잊어야지’하면 상처밖에 생각나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러분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속죄양이라고 해서 양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광야로 보내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의 상처들을 버리고 속죄하는 것처럼 양에게 그 상처들을 묶어서 다시 오지 못하게 보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여러분이 진, 큰 빚을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당하고 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진 빚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보내주고 과거를 잊어주고 잘못을 잊어주고 상대편을 자유케 해주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보내주는 것입니다.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 주고, 빚을 없는 것으로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용서하지 않을 일을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내가 혼자 조금 ‘오버’한 것인데 무조건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면 안 되지만, 용서했을 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만 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처를 받은 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이유는 ‘은혜’, 또 다른 표현으로는 ’용서’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용서가 다른 게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그 악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용서 안에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하나님꼐서 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서해야 할 때 너무 힘들지 않나요? 만약 상처를 준 사람이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여러분은 괜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할 때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당신이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용서는 선택입니다. 감정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감정은 한참  뒤에 오기에 용서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가 짚고 넘어갈 것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 중에 하나인데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는 그 사람의 input과 상관없이 던져주고, 버려주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해는 박수를 치는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한 사람이 용서를 하고 싶어도 상대편이 계속 상처를 주면 그 관계는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 주어야 하지만, 화해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고 돌아와야만 가능합니다. 남편이 부인을 때리면 부인은 남편을 용서해야 하지만 abuse하는 관계로 들어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화해는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때 관계를 끊으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나를 보여주고 상처를 주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예수님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 번을 확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사랑하느냐?” 본인이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가르쳐 주어야 상대방이 돌아설 수 있습니다. 화해에는 공평과 정의가 바탕이 되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강한자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하면 무언가 져준 것 같지만 강하지 않은 자는 결코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자만이 가능합니다. 용서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의가 없는데 무조건 친한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가 먼저 나와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는 의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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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용서를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둔한 분이면 잘 못 느끼실 수 있지만 민감한 분일수록 상처받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다니면서 훈련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다녀오면 머리를 뜯고 싶은 적이 있지 않으세요? ‘왜 그 사람은 나에게 그 말을 했을까? 정말 싫다.’한 적이 참 많습니다. 못 느끼시는 분이면 다행인데 여러분이 생각이 많은 사람이면 인간관계에 있는 한 그런 상처들을 받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게 되면, 한 번 찔리는 것도 아픈데 계속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성격 나쁜 사람으로 찍히고 싶지도 않고 여러분 모두 사랑 받고 싶지요? 모든 인간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삶이 풍성해지고 인간관계 안에서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용서의 원칙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것은 꼭 성경의 말씀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용서의 개념이 기독교의 개념이지만 대기업에서도 기업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은  그것의 실효성이 있기에 맞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합니다. 세상 학문도 용서가 얼마나 인간관계와 건강에 영향을 주는 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의 암발병률이 정말 높습니다. 암환자들이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서,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참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코스타에 오시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오시는 것 일텐데, 여러분이 용서를 하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서 힘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따르지 못한 우리들의 말을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능력있는 일 중 하나가 용서입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데 용서를 하면 내가 큰 일을 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용서가 정말 힘들 때 용서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정말 힘든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일을 하셨을 때 스스로 칭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상처 한 번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용서 받아서 행복하다면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아파하면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서하는 것이 나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며, 세상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사명감을 가질만한  일인데 왜 용서하기가 어려울까요? 

그 이유는 참  많이 있습니다. 용서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받은 만큼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후에는, 용서라는 것이 내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갚아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용서가 자연스럽다는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진짜 상처 받은 사람들 중에서 용서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죄된 성품과  우리가 받은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원하지 않습니다. 받은만큼 갚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포도원지기’ 예화에서,  한 시에 간 사람, 두 시에 간 사람, 세 시에 간 사람, 여섯 시에 간 사람이 똑같이 일당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여섯 시에 간 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돈을 받고, 또 일찍 온 사람은 더위에 오랜 시간 일했기에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화를 보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스스로를 아침부터 일하러 온 사람과 동일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여섯 시에 온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 오셨지 의인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말이 싫었는데, 죄인을 위해서 오신 건 좋은데 “나 같은 의인은 어떡하라고?”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요지는 너희에게 조건없이 선물을 주려는 것인데 우리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면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원지기가 여섯 시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당을 준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인데, 우리는 아침 7시부터 온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잘못된 개념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에 용서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무마시켜주고, 무조건 변명해주고 나쁜 사람이 아니야 하고 넘어가고 당한 사람만 불쌍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편이 때리면 맞아주고, 맨 마지막으로는 모든 것을 참고 절대 화내지 않기도 합니다. 용서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이런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 여러분과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용서에 대한 잘못된 개념 중 하나가 우리 가슴이 터지고 속이 뒤집히는데도 용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위장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좋아하신 사람은 ‘good person’이 아니라 ‘real person’입니다. 속은 그런 게 아닌데 기뻐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정말, 용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아프게 보시는데 공평함이나 정의가 없는 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못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아닌 척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가 싫다고 합니다. 분명히 잘못 됐는데 자기가 잘못하면 대충 넘어가고 남이 잘못하면 그렇지 않은 모습도 싫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우리 아빤 술을 조금 하셔” 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하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을 원하시지 죄를 죄라고 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이 혼동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과 죄를 죄라고 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가 아닌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것은 공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악을 선하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악을 선하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죄는 그 사람의 성품에 관해 뭐라고하는 것이지 죄를 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용서는 상대편을  위해 변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데도 불구하고 용서해주는 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화가 났을 때 솔직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다루겠지만 여러분의 감정을 마구 표현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진실한 감정에 대해서 창피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 악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가 알콜 중독자인데 “아빠 기분이  조금 안 좋으신가봐”,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여자친구가 성격이 좋아서 그런 거야”라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잘못된 일이 일어나서 그런 일을 지적하면 정죄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거짓 평화를 참 좋아합니다.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숨기는 것은 언젠가 다 터지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싸움을 일으키면 안 되지만, 감정에 솔직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문제가 있는데 없다고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침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회사업에서도 그렇지만 문제를 모르면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인식하면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문제를 인식하지 않으면 정말 고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흡연이나 마약 중 어느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보통은 마약이라고 합니다. 마약이 미디어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통계를 보면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흡연 문제를 더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약 문제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으면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절대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상처를 받고 부정한 일을 당해도 절대 화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이면 항상 순한 양 같아야 한다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엡 4:26-27 말씀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목하실 것은 하나님께서 분을 내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어원을 보면 “화내라, 하지만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말은 permissive imperative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분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 선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정당한 분노를 허락하셨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노하심과 우리의 노함과 차이가 있을 때가 많지만, 우리가 노할 상황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악한 상황을 봤을 때 노하셨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진노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진노는 분노보다 훨씬 더 intensive한 감정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일을 당할 때 분노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여러분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된 일을 당하고 화를 낼 때 ’나는 크리스천이 아닌가봐”하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정당한 분노는 잘못된 일에 대해서 한계를 정하는 것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노예를 만드는 것에 분노해서 평화적이지만 싸움을 해야 되는데, 정당한 분노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당한 분노는 다른 사람이 더 이상 죄를 짓게 않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의 문제 중 하나가 가해자도 문제가 있지만 맞아주는 부인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분노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계속 때리면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시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봐가면서 괴롭히거든요. 그게 여러분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 있을 때 stand up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노라는 감정을 주셨지만 우리가 죄된 인간이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낼 때 성경적인 화냄인지 아닐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 안에서 해야 됩니다.  상황에 따라 화냄의 정도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화를 적게 내야 할 때도 있고 화를 크게 내야 할 때도 있는 것이지 무제한 화를 내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뜻 안에서 분노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정당한 분노는 죄가 아닌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냥 “쟤 생긴 게 맘에 안 들어 뭐.”와 같은 식의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분노가 아닙니다. 그래서 화가 날 때 한 번 기도해 보세요. 이런 감정 느끼실 때 이 감정이 과연 하나님께 받은 감정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용서를 힘들게 하는 잘못된 개념 중에 하나가 ’그 일만 아니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내 성격을 망가트리지 않았다면 인생이 괜찮을텐데’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내 삶의 행복을 빼앗은 사람 때문에, 억울함 때문에, 상실감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심장을 주시고 사신 분들이기에 여러분의 고통을 절대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그것을 체험하실텐데 제가 성경의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분도 있겠지만, 요셉도 만만치 않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형제들이 그를 팔았고, 종으로 열심히 살고 있을 때 보디발이 강간범으로 감옥에 보냈고,  감옥에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무시당하고. 억울한 것, 속상한 걸로 따지면 요셉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행해진 일은 악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좋게 바꿔주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힘을 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의 고통을 통해서 그것을 선하게 바꾸시지 절대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용서를 안 할 때 ‘내가 싸움에서 이겼다’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 안하고 너를 꽉 쥐면서 너를 나쁜 놈으로 보고 있을거야’ 라는, 약간은 masochistic한 즐거움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 안 한 것이 웬지 싸움에서 이긴 것이라는 생각에서 용서를 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를 안 하면 ‘내가 희생자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즐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상처 받았기 때문에 나는 불쌍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용서를 안 하는 경우도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안 하게 되는데 문제는 용서를 안 할 때 오는 불이익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에 들어갈 수 없기에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 못하고 미워해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기뻐하기가 힘듭니다. 교회 안에서 그 사람 얼굴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어떻게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상처를 받은 것도 힘든데 하나님이 주신 기쁨까지 놓치는 것은 두 번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 위해서 용서를 생활화하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용서하지 않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않습니다. 

네 번째로, 다시 상처 받지 않으려고 용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사람의 관계 안에 들어가지 않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용서를 안 하는 것인데,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예전에 받은 상처와 같은 상처를  연속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예전의 기억이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게 내버려 두는 것과 같습니다. 지속적인 갈등과 괴로움에 힘들고 고민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를 감정적으로 지치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실제적인 이유 때문만이라도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quote중에 하나인데 ‘사람이 주는 고통에서부터 완벽하게 보호 받을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사랑하게 되고 관계 속에 있으면 상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면 사랑 밖에 있어야 합니다. 지옥에 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옥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라 무섭습니다. 여러분 싫어하는 사람과 있어본 적 있으십니까? 거기가 지옥이지 않습니까? 지옥은 하나님이 인간을 정말 존중하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니까 보내 주는 곳. 하지만 정말 무서운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완벽한 선인데, 하나님이 빠지시니까 모든 선이 빠지고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아픔이 따르지만 그것을 안 할 때 더 큰 문제가 오기에 우리가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시 상처 받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많은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정리를 하겠습니다. 용서에 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는 괜찮은  척 하는 것 아니고, 무조건 자제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쳤다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안 한 것이 이긴 것이 아니고,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신 말의 의미를 같이 찾아보면  좋겠어요.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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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02:06 코스타 사역/tmKOSTA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영혼구원과 제자양육 (Discipleship)

마지막으로, 진정한 의료선교사이기 위해서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끝까지 증인이 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며, 당신의 양을 쳐야 한다. 물론 착한 행실로, 실력과 정성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함께 직접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실로 막연히 크리스천들에게 무언가 있나 보다 그치게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해주는 기쁨 선사할 의무가 우리 의료선교사들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내성적인 성격상 의무가 우리의 목사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훈련을 받아서 그냥 우리의 의료실력으로 우리의 신앙을 대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령께서 분명  말씀하신다.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는데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구원 사역은 우리 주님이 친히 하신다. 우리는 다만 기회가 오든지 오지 않든지 씨를 뿌리거나, 거두기만 하면 된단다. 기회는 기도만 하면 언제든지 주신다.

나의 경우, 병원에서 환자를 보면서, 환자를 위해 기도를 했을 주님께서 씨를 뿌리거나 거둘 있는 기회를 종종 주셨다. 다발성 골수암 (multiple myeloma) 환자가 심정맥 혈전증 (deep vein thrombosis) 의심되어 초음파 검사실에 내려가야 일이 있었다. 간호사의 일손이 부족해 당시 인턴이었던 내가 심장 모니터를 환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서 검사실 앞에서 한참 같이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나는 주님께서 내가 환자를 위해 기도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을 느꼈다.  환자에게 기도에 대해 승낙을 얻은 오랜 시간 처음에는 영어로, 나중에는 한국어로도 환자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환자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던 색다른 경험이었다. 

한번은 위에서 언급한 심내막염 환자가 호스피스로 퇴원해야 하는데, 거의 일주일이 지나도록 호스피스 자리가 나지 않아서 계속 병실에 있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병동 스케쥴이 끝나는 바로 그날까지 환자를 내가 돌보게 되었고, 내가 휴가를 떠난 다음날 환자는 호스피스로 퇴원하였다. 내가 병동을 떠나기 마지막 환자와 나는, 환자에서 MRSA라는 균이 검출되었기에 배정된 격리 핼액 투석실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간호사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인턴은 호출을 받고 사라졌다. 순간, 나는 하나님이 환자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통해서라도 기도를 받기를 원하심을 느낄 있었다.  환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지금 정말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이 내가 병동에서 환자를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말씀 드렸다.  환자도 괜찮다고 했다. 하나님이 환자 분을 너무 사랑하신다고 말했고, 환자분을 알게 되고 환자 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있게 되어 내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지금은 주께서 허락하신 육체의 고난으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평강으로 승리하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같이 일시적인 육체를 벗고 육체로 천국에서 함께 예수님 안에서 함께 멋지게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기도를 드리면서 나도 울고 환자도 울었다. 불평도 많고 힘들어했던 환자였는데,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님의 마음이 내게 부어졌다. 내가 오늘 너의 기도를,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기다렸다고.

어떤 날은 환자도 아니었는데, 자기 남편을 수술장에 보내고 남편이 없는 병실에서 혼자 어쩔 몰라하고 있는 한국 할머니를 만난 적도 있다. 할머니가 영어를 못하니까 간호사가 지나가는 나를 알아보고 할머니께 할아버지가 지금 수술장에 내려갔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사실 그냥 할머니께 위로라도 해드리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너무 불안해 하셔서 내뱉은 말이 할머니 기도해드릴까요?”였다. 할머니께서 고맙죠 하시길래, 할머니 손을 붙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면서, ‘우리 하나님하는데 때부터 목이 메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하게 임했다. 동안 목이 메어서 말을 못했다. 사실 처음 보는 할머니 앞에서 우는 모습에 내가 많이 당황했다. 할머니도 같이 우셨는데, 내가 기도하면서 나온 말이, ‘우리 하나님이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지나가던 나를 불러 쓰셔서 당신의 기도를 드리게 하십니까였다. 할머니께 주님의 사랑과 위로, 그리고 평강이 임하길, 할아버지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간절히 구했다.  기도란 언제나 나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환자뿐 만이 아니라 동료 의료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마음 역시 소중하다. 의료 현장은 언제나 사역이다. 팀원 끼리 같은 영적인 호흡을 맞출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며느리 마음은 며느리가 안다고, 의사 마음은 의사가 알고, 간호사 마음은 간호사가 안다. 같은 의료인들끼리 현장에서 삶으로,  섬김으로 복음을 공유하는 축복을 유통시켜보자.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동료들을 마음으로 품고 꾸준히 기도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열정을 부어주시고 기회도 만들어 주신다.  나의 경우 선배의사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던 와중 신기한 체험을 적이 있다. 선배와 전화 통화를 마치자 마자, 내가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안에 성령님이 선배의사의 영혼을 향해 깊이 애통하시는 같았다. 후로도 분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도와 대만에서 동료 의사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하나님 이야기를 기회들을  여러 만들어주셨다.

결론

결론은 이것이다.  의료인으로서 실력과 윤리의식은 기본이다. 환자를 대할 주께 하듯 하는 섬김을 소명으로, 사명으로 인식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비로소 진정한 크리스천 의료인이라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서는 된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복음으로 거듭나고 기도와 섬김으로 주님의 손과 발이 되며 의료 현장에서도 제자 만들기에 힘쓰는 복음의 군사로 白衣從軍할  , 우리는 참된 의료선교사 있다. 비로소 글의 주제처럼 Healthcare Mission 된다. 의료가 우리의 사명이 되고, 의료현장이 우리의 선교지가 된다.


하나님이 때를 위해 나를 쓰심 (God-given opportunity)

에스더 4 14절에서 모르드개가 딸처럼 기른 자신의 사촌 에스더 왕후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네가 왕후의 位를 얻은 것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에 에스더는 16절에서 죽으면 죽으리로다 답한다. 사람이 죽다가 살아난 경우만이 기적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 역시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의료인이 것은 하나님의 정말 특정한 때를 위함일 수도 있지만, 우리 일터의 작은 만남 하나 하나를 위함일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두신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환자에게 나를 생애 마지막 문턱에서 만나는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어야 한다.

한번은 응급실에서 명의 환자를 내과로 입원시키고 있는데, 환자 모두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었고, 환자와 보호자 모두 영어를 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나님이 분들을 사랑하시는구나.’ ‘나에게 미국의사고시 시험을 보게 하시고 어쩌면 미국 필라델피아로 부르셔서 분들을 모국어로 돌볼 있게끔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나는 내가 되기 원하는 의사상을 그리며 정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 주님이 나를 들어 쓰심은 때를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생각이 단순해졌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도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오직 바라옵기는 오직 한가지 우리 주님께 쓰임 받는 것뿐입니다.’

매일매일을 주께서 나를 때를 위해 쓰심이 아닐까하는 설레는 기대감으로 산다면, ‘크리스천 의료인에서 의료 선교사 거듭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멋진 순간들이, 섬김과 전도의 기회들(God-given opportunity) 우리들 삶에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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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2) - 김현회


[2] 성령 세례
중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점은 무엇이냐면 그 결과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점을 강조하냐면, 다음 주제가 성령 세례인데, 성령 세례와 중생을 다르게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믿고 중생했지만 아직 성령을 못 받을 수 있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오류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모두 성령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하고 예수님의 영이시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는 것은, 즉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로 믿고 주로 시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가능한 것이고, 내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내 안에 성령님을 모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 ‘다’, ‘우리가’가 반복되는데 이 말은 성령 세례를 말하는데, 바울이 이 성령 세례를 말할 때 바울의 의도, 요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일이 오히려 교회를 둘로 나누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고,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뉩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을 하였어도,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중생과 또 다른 사건으로 보는데, 어떤 신비적인 체험, 대표적으로 방언을 염두에 둡니다. 성령의 뜨거운 진동이 왔고 방언을 받았고 이런 체험을 받으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이렇게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중생을 했지만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 거듭났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지체가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마셨다는 말은 내가 성령을 소유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이지, 일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접근할 수 있겠습니다. 신약에 세례에 대한 본문이 7군데 있습니다.  모두 종합해 보면 세례에는 4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주는 자, 세례받는 자,  세례의 매개체, 그리고 세례의 목적. 이것을 요한의 물 세례에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의 물 세례에 있어서 주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받는 자는 요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 세례의 매개체는 물, 세례의 목적은 죄사함.  그래서 죄사함을 받기위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 세례입니다. 종종 우리는 성령 세례를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배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에서 주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받는 이는 믿는 우리 모두이며, 세례의 매개체는 성령, 그리고 세례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며 성령 세례와 중생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적어도 동시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은 성삼위 하나님이 다 함께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어떤 측면에선 예수님이, 어떤 측면에서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부르심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함께하시는 일인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일하거나 동시적 사건이고  같은 사건을 다르게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마치 성령세례가 중생과 별개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로 오순절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제자들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제자이기에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오순절까지는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중생과 성령 세계가 두 단계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후에 성령을 받았다는 오순절 성령사건은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한 번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성령이 아직까지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강림이 있자 술취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합니다. ‘때가 제 삼 시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선지자 요엘로 약속한 것을 성취한 것이다 - 말일에 내가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다.’  남종과 여종이란 말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란 뜻입니다. 남녀 차별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그 예언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앉으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너희가 보는대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이것이 너희가 보는 현상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성령을 보내주신 사건입니다. 그전에는 성령이 임재하셔서 사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는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는 어찌할꼬’하며 마음에 찔림을 느낍니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에 대한 찔림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날 오순절날 3000명이 예수를 믿고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인 것을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즉 예수를 영접하면 성령을 받으리라"고 선포합니다.  그 중간에 어떤 다른 것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날 3000명이 세례를 받고 나서 오전에 있었던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을 받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성경엔 그 기록이 없습니다. 그 3000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join을 합니다 - 오순절이 교회의 출발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증거는 무엇이냐면 기쁨의 충만이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다 함께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떡을 떼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 받은 그룹은 2그룹입니다. 첫째로 사도들, 그리고 3000명. 그런데 두 그룹의 모습은 다릅니다. 하지만 똑같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님이 오셨으니깐 우리는 3000명에 해당되면 생각하면 됩니다.

성령강림과 중생이 다르게 보이는 듯한 다른 본문은 사도행전 8장, 10장, 그리고 19장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고 많은 사람이 믿자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거기에 세례를 받았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그들이 정말 예수 믿은 것을 확인 하고 나서 사도들이 안수하매 성령이 저들에게 임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도 분명히 오순절과 비슷하게 두 단계죠.  빌립이 전하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사도들이 안수했을때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그런 여러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보는것이 옳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는 같습니다, 다 유대인들이기에. 이 유대를 넘어서 제일 먼저 복음이 전파된 곳이 사마리아입니다. 먼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다는 원수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사마리아까지 전파되면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받아드려야 하는데, 그러면 어떤 현상이 있어야 하면, 오순절이 한번 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행 8장에서 나오는 사마리아판 오순절입니다. 그런 현상이 똑같이 일어나야만 ‘이들도 똑같이 성령을 받았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비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경건한 자’라고 했습니다.특별한 용어로써 Godly man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기도하는 가운데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불러 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어 그곳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가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엔 부정한 짐승이 잔뜩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그럴수 없다고 대답하였고, 하나님께서 ‘내가 정케한 짐승을 네가 부정타 하지 말라’ 라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을 하여, 그들을 따라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듣는 중에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임하는데 오순절 사건과 같은 형태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과 이들도 똑같이 받았으니 누가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도 오순절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유대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사마리아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이방인에게 넘어갈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유대인들이 너무나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민족적인 장벽, 유대인과 사마리아 관계에 장벽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때 거기 몇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에 제자들의 반응이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몰랐다’였습니다. 바울이 조금 의아해하여 ‘그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물세례만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 합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인데 아직 성령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잘 보면 2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1. 믿을 때 성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2.믿을 때 당연히 성령을 받는다.  저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상했던 건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않았던 제자들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이전 18장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 있는 아볼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볼로는 열심히 말씀을 전했지만 요한의 물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 하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 주의 도를 자세히 일러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냐면, 오실 메시아를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요한이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그가 메시아며 구세주라고 해던 것까지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셨던 것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이 문제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성령의 인치심.

(엡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주시는데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실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의 소유라고 도장을 찍으신 것이며,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앞으로 우리가 장차 얻을 기업 – 상속 –하나님의 상속자, 얻을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라는 뜻입니다. Deposit/보증금으로 성령님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인치심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예수 믿는 자 안에 불꽃이 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자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거듭난 사람, 성령 세례를 받은사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령님이 무슨 의미냐면, 마치 자동차를 살때 downpay를 하고 사는 것처럼 앞으로 나머지 것을 주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그 새로운 세상을 상속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속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증하기 위해 우리안에 세로운 세대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3가지 - 중생, 성령 세례, 인치심- 모두는 예수를 믿는 출발점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출발점 사건의 공통점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사신다, 곧 내주하신다고 말, 즉 In dwelling Holy Spirit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요즘 성령세례에 관하여 그릇됨들이 있어서 자꾸 예수를 믿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고 second class Christian인것처럼 그렇게 구분하는 건강하지 못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때 체험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모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것입니다. (계속)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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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 김현회


서론 :
‘그리스도인’의 삶은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삶을 계속 사실 때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일은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 진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성령님의 바른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다락방 설교’ 혹은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가지신 장소가 다락방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요14:16).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인데, ‘우리 옆에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comforter(위로자)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original 보혜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original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상에 오셨을 때 육체를 입고 오셨기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으셨고, 그 때문에 오직 제자들과만 함께 있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영’이시기 언제, 어디서나 계실 수 있고 모든 믿는 자 옆에 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을 생각할 때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는, 우리가 성령님이 없이는 살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1)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며, (2)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알고, (3)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체험입니다. 성경과 체험은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를 보면, ‘오직 성경’을 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령파’ 교회는 체험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과 체험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그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성경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관해 배울 때 일단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체험 속에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체험은 매우 다양하며,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방언, 입신, 신유 등의 체험이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체험을 보고 “이것이 진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읽은 힌두교 신자의 글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명상’, ‘참선’의 기쁨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명상을 깊이 하다보면 내면 깊이 샘 솟듯이 기쁨이 끊임없이 솟아 오른다.’ 제가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은혜 받을 때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가 힌두교 신자라는 이유로, 우리가 ‘당신의 체험은 가짜야’라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체험은 진짜일 것입니다. 그 사람도 기쁨이나, 내적인 평화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은 성령님으로부터 온 체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준이고, 체험은 기준이 아닙니다. 체험은 성경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고, 분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그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성경이 어떤 체험이 있다고 가르치면 우리는 그 체험을 우리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체험에 관계를 여러분이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오늘 강의를 진행해보겠습니다. 체험으로 인해서 가지고 있는 질문이 있다면 성경에 비추어서 그 체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 중생, 성령세례, 인치심

[1] 첫째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사역은 중생입니다.

중생, 거듭남, 영어로는 re-generation인데 무슨 의미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요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대화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선생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모습을 유심히 보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니고데모가 만일 오늘날 교회에 찾아온다면 교회에서 굉장히 환영할 것 같습니다. 당신같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니고데모 정도의 background를 가졌다면 교회에서 금방 장로도 되고 높은 직책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네가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있구나’.  또는 ‘네가 나를 알아보는 눈이 있구나’. 이렇게 칭찬하시는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볼 수 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하고 율법에 통달했다. 하지만 너는 영적인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너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도, 예수님의 평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질문을 합니다: “나처럼 늙은 사람이 어찌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  니고데모의 말 자체가 영적인 것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거듭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과거에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하여 물은 물 세례, 성령은 성령 세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물 즉 성령’ 물과 성령은 같은 것으로 혹은 물은 말씀, 성령은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에스겔서 36:25-27에 있습니다.

(겔 36:25-27)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상태에 있는데, 이들을 본토로 돌려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주신 약속입니다.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본토로 돌아와도 포로가 되기 전의 영적 상태,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우상 숭배하고 타락한 그대로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본토로 돌아가는 외적인 회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물이 나옵니다. “내가 물로 모든 더러운 것을 씻겠다. 그리고 새 영을 주고, 나의 신을 –성령님을-주겠다.”  다시 말하면 속에서부터 새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 너희가 성령님에 의하여 내면으로 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변화되어야 한다,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기 전 영으로 죽었었기에, 죽은 영을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인해서 하나님과 영으로 분리되어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말씀이며,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맞지 않습니까? 이제 니고데모의 현대판 인물을 생각해봅시다.  Richard Dawkins을 아십니까?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진화론자입니다.  ‘God Delusion’이란 책에서 얼마나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책이  best seller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 책을 부분적으로 읽어봤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도덕이 어디서 오는지, 인간에게 있는 옳고 그름의 의식이 어디서 오는지 그런 부분을 관심있게 봤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 논리적으로 헛점이 많고, first class 책이 아니라 삼류 책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학자, 지식인들은 그 책이 무신론에 복음이나 되는 것처럼 환영합니다. 그것을 보고 깨달은 점은 역시 영적인 것은 육신의 눈으로 분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적이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며,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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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20:34 코스타 사역/tmKOSTA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채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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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선교사 되기

이제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사고하기를 거부하자당당히 의료 선교사 되자.  의료를 평생 선교지로 삼고 사명 의식(Mission mind)’으로 살아가는 의료 선교사 되자. 엄밀한 의미로 우리가 매일 만나는 환자는 우리의 이다.  사도행전 1 8절의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예루살렘이 우리의 가족이고 유대가 우리의 친척과 친지라면 사마리아는 우리의 일부였던 우리의 원수이다하지만 끝은 정말 끝이다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 끝이다가지 않으면 평생 모르고 죽을 곳이 끝이다우리의 의료 현장에서 우리가 현장에 나아가지 않으면 평생 우리와 아무 상관 없을 사람들이 우리의 환자들이며 보호자들이다. 그런 의미에 우리의선교지의료 현장은 분명 우리의 끝이다.  당당히 스스로 의료 선교사임을 선포하자. 그리고  직함에 걸맞게 치열하게 살아가자그러한 삶의 실천적 지침으로서 아래의 세 가지를 제안한다.


복음과 회개 (Christ-centeredness)

진정한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환자보다 보호자보다 의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지적 교만공포와 근심에 사로잡힌 환자나 보호자와는 다르다는 감정적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내가 주님의 은혜의 혈관이어야 하는데 스스로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분히 시혜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 않은지환자와 보호자의 모든 칭찬과 칭송을 스스로 다 받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C.S. Lewis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이야 말로 고린도전서13장에 나오는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있는 어떠한 선행도 가능케 하는 가장 죄악이라고 지적한다우리는 돌아온 탕자가 되어야지탕자의 형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우리의 분노를 회개해야 한다의료 현장에서 사실 화가 나지 않을 상황을 찾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의분도 있겠지만대부분의 경우, 분노는 사단에게 멋지게 이용 당한다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를 깨고동료 의료진 사이에 두터운 불신의 벽을 쌓는데 이용당한다우리는 일곱 번씩 일곱 , 49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분노를 회개하고 긍휼히 여김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우리의 마음에 분노가 있을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깨끗한 그릇만이 주님의 축복을 담을 있고깨끗한 혈관만이 주님의 은혜를 흘려 보낼 있음을 기억하자.

마지막으로 우리의 自己愛를 회개해야 한다의료인들은 많은 시간을 자기 경력을 쌓고 관리하는데 투자했다엄청난 시간과 돈을 학업에 투자해 오늘날 자신의 이력을 만들었다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일정 수준의 전문인이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한다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손길로 인도함을 받은  神手成家 아닌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룩한 自手成家 인간이 된다. 후자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할 있는 위험이 크다 남이 나를 조금이라도 무시하면이처럼 대단한 내가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참을 없다 내가 실패하게 되면이만큼 이룩한 것이 아까워서 깊은 우울의 늪에 빠진다.  모든 과정에 처음부터 주님이 없었다예수님 분으로 만족하는 삶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없다내가 삶의 모든 초점이 되면 우리 주님이 거하실 곳이 없다. I-centeredness에서 Christ-centeredness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문해보아야 한다. “Is it all about me?” 우리 삶의 초점이 의료진으로서 얼마나 고생했고, ‘ 환자나 병원으로부터 얼마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 의료진으로 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지에서, ‘하나님 아무 것도 아닌 삶에 정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공급해주셨고’, ‘하나님 나에게 얼마나 멋진 소망을 품게 해주셨으며, ‘하나님 나를 어떻게 지금 자리에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용하고 계시는지 옮겨져야 한다. 

自己愛, 자기연민에 대한 회개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 삶에 회복해야 한다결국 복음이 해답인 것이다. 내가 삶의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되면 이상 아파할 없다시체는 아플 없다성경이 분명 이제는 내가 것이 아니라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갈라디아서2 20절에서 선포하고 있다. 

기도와 섬김 (Servantship)

진정한 의료선교사이기위해  우리는 복음에 빚진 주의 (servant)으로서 기도와 섬김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기도할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기도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환자와 보호자에게 하는 모든 격려의 말이 하나님 앞에 기도가 되게 하자미국에서는 문화적으로 아직까지 ‘God bless you’라는 말이 종종 쓰인다. 나는 환자를 진료하고 나서 마지막 인사로 항상 ‘God bless you’라고 말한다. 말을 때마다, 다니엘처럼 정말로 잠깐이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주께서 정말로 환자분을 축복해주시라고.  대부분의 환자는 축복의 말을 들으면 나에게 ‘God bless you, too’라고 화답해준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그것도 가장 몸이 아픈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은 축복을 받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나 내가 쓰는 말은 ‘I will pray for you’ 또는 ‘I will remember you in my prayers’,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이다사실 종교를 떠나 말을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그리고 실제로 진료실을병실을 나설 때마다 나는 기도한다주께서  환자 분의 힘이 되어 달라고. 만약 환자가 정말 힘들어 때는 기도해주어도 괜찮을까요하고 물은 괜찮다고 하면 환자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한다이러한 기도 내가 눈물이 나서 당황했던 적도 있다실제로 많은 환자들이 같이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고감사하게도 예수님 영접기도까지 같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료인으로서의 섬김에는 최선의 진료돌봄을 제공하는 외에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경청해주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그리고 좋은 책이나 음악을 선물해주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있다.  퇴원 후에도 전화해주고 지속적으로 격려해주는 것도 훌륭한 섬김의 방법이다.  사실 업무를 처리하는 것만 해도 하루가 고되다하지만 잊지 말자우리 주님은 우리 의료선교사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고린도전서 15 58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안수현 선생님은 그를 추모하여 나온, ‘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에서 진정한 의료선교사의 삶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계신다.  역시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많은 이들이 책을 필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안수현 선생님은 안목 있는 책과 음악 선물을 통해 많은 환자와 보호자동료 의료인들의 인생에 필요한 복음적인 메시지들을 전하셨는데다음은 그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죽음과 싸우고 있던 백혈병환자에게 창세기 강해설교 5권인 죽음의 한계를 넘어선 신앙 선물했다책을 전하면서 환자에게 말했다선생님의 병을 낫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은 병이 낫는 것보다 선생님이 주어진 곡을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나서성도들과 천사들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환자는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금까지 강건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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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카고 코스타 집회에 참석한 코스탄들과 시카고 코스타 집회를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가회는 8월 9일에 90분 동안 컨퍼런스콜로 진행이 되었고, 장지훈 형제, 문세진 형제, 강지연 자매, 하희임 자매가 참여하였습니다. 

eKOSTA: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장지훈 형제님 (이하 지훈): University of Colorado 마케팅 박사과정에 있는 장지훈입니다. 2008년 처음 코스타에 참석했었고요, 올해는 3지역 코디,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문세진 형제님 (이하 세진): 이번에 처음 참석해서 조장으로 섬겼고, Western Michigan University 정치학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강지연 자매님 (이하 지연): University of Iowa에서 Communication 교수로 이번에 시작했습니다. 코스타는 네 번째 참석했고, 올해는 중보기도 팀으로, 또 처음으로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하희임 자매님 (이하 희임): San Francisco에서 코오롱에서 일하고 있고요, 이번에 처음으로 코스타에 참석하고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eKOSTA: 이번 코스타 집회에서 전체적으로 좋았던 점, 그리고 아쉬웠던 점으로 남는 부분이 있었나요? 이번에 처음 참석이 아니셨던 분들께서는 예년과 비교해서 말씀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희임: 이번 집회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북한을 위해서 금식하는 시간이 있어 한 민족으로서 북한을 마음에 두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집회 이후에도 계속 중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더욱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행정 처리 하시는 분들이 잘 조직화 되어있고,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이 헌신적으로 섬기셔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코스타보이스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것도 효율적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이야기 해주셨던 개인 상담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화요일 저녁 집회 시간에 조 전체가 영아부 자봉으로 섬기게 되었는데요, 저희 조에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조원이 있었는데 구원 초청 시간을 놓쳤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집회 내용을 미리 알고 조정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지연: 예전 참석 때도 그랬듯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또한 조모임이 좋았습니다. 중보기도 참가자들의 조는 세미나 시간에도 별도로 훈련이나 기도 시간을 갖는데,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특히 정말 훌륭한 찬양과 말씀이 있었던 새벽 기도가 좋았는데, 많은 분들이 참여하지 않으셔서 아쉬웠습니다. 광고가 잘 안되기도 했고, 또 밤에 조모임이 늦게 끝나면 새벽 6시에 기도회에 참석하기가 힘들었을 거라 생각이 들지만, 그 점이 아쉬웠습니다.

지훈: 저는 우연히 중보기도 팀의 새벽 기도회에 가게 되었었는데 지연 자매님 나눠주신대로 큰 은혜를 받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새벽 기도회가 광고가 더 많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코스타 진행 면에서 전체적으로 시간 엄수가 잘 되었던 것, 코스타보이스가 새로운 정보들을 전해준 것, 그리고 김동민 간사님의 광고가 적절히 짜여졌던 점 등을 통해 볼 때, 진행이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동원 목사님께서 세 번의 설교 중 두 번이나 설교 본문을 바꾸셨다는 것, 그래서인지 아침 큐티 내용과 전체 집회 말씀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약했던 부분을 꼽고 싶습니다.

세진: 저는 처음 참석했는데 전체적으로 굉장히 잘 준비된 집회였다고 생각됩니다. 여러 섬기시는 분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기혼조들은 어떻게 보면 많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데, 싱글 자봉 여러분들의 도움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또한 조장으로 섬기면서, 개인적으로 모태신앙을 가지고 지내면서 경험하기 힘들었던 긴급성을 체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저녁 집회 찬양 시간에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서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또 홍정길,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특히 복음, 민족, 땅끝을 이야기 할 때는 과거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될 것 같은데요, 조장 코스타 중에는 교회의 역할, 역사에 대한 강조가 있었지만 본 집회 중에는 이런 부분이 다뤄지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는데 무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eKOSTA: 코스타 전 온라인 훈련 및 조장 수양회 관련해서 좋았던 부분과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을 나눠주십시오.

세진: 온라인 훈련을 통해 미리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 유익했습니다. 그리고 컨콜을 통해 지역 멘토, 조장님들과 같이 기도했던 것이 초보 조장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조장 수양회 또한 굉장히 좋았는데, 세 분의 주제 강의는 코스타의 정신과 주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장의 맥을 잡아라’와 같은 세션 또한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지역의 조장, 멘토님들을 알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지훈: 저도 조장 수양회를 통해 코스타 주제와 관련된 것을 풍성히 묵상할 수 있어 유익했고, 사전 온라인 훈련 및 교제를 통해 묵상 뿐만 아니라 친밀한 나눔이 이뤄진 것이 좋았습니다. 한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QT 내용 및 질문을 여러 강사님들께서 준비하셔서 그런지 난이도가 일정하지 않았고, 나중에 가서는 조금 힘들어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지연: 저는 조장 수양회에 참석하지 못해서 많이 아쉽습니다. 온라인 훈련이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주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중보기도팀은 조원들이 모두 훈련에 참가했기 때문에 집회 중에 QT 나눔이 훨씬 풍성했습니다. 일반조에서도 조원들도 마찬가지로 사전에 QT를 하고 올 수 있도록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임: 온라인 훈련이 굉장히 좋았는데, 막상 집회 중에는 QT를 조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날도 있고, 나누는 시간이 조금 적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장 코스타 중에 다른 조장님들께서는 강사와 조원들과의 만남을 미리 준비하신 것 같았는데, 처음 섬기는 조장들에게도 그런 팁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eKOSTA: 2010년 주제인 ‘복음 민족 땅끝’이 (1) 조장 코스타를 통해, 그리고 (2) 전체 프로그램을 통해 얼마나 잘 전달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이것이 연속적으로 조원들과 주제 관련 토론을 나누는데 (예를 들면 북한, 통일 관련) 어떻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희임: 저는 처음에는 주제가 광범위하다고 생각했지만, 조장 수양회 말씀을 통한 이해와 은혜를 가지고 집회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좋았습니다. 특히 북한을 향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지연: 복음, 민족, 땅끝을 하루 하루의 주제로 삼아서 진행된 것이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족과 땅끝에 관한 전체 집회 말씀 중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관점 보다는 다소 특수한 관점이 전달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쩌면 코스타 25주년을 맞아서 코스타가 얼마나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왔는지를 되돌아보는 의미를 담은 관점이었을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코스타’라는 것이 많이 드러난 집회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민족, 땅끝에 관한 전체 집회 말씀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조모임 중에는 또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고 서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훈: 저도 지연 자매님과 같이 전체 집회를 통한 주제 전달 내용이 조금 불편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민족, 땅끝의 개념에 있어 조장 코스타에서의 말씀과 관점이 많이 다른 것 같았습니다. 조원들의 경우, 전체 집회 말씀과 QT를 연결시키기 조금 힘들어했던 것 같고, 그래서인지 QT 나눔 시간에 생각이 모아지기 보다는 조금 겉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전체 집회 말씀에 대한 조원들의 평가도 다소 부정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진: 개인적으로는 조장 수양회의 말씀이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QT 본문도 주제와 연결이 잘 되어서 좋았습니다. 아쉬웠던 부분은, 저희는 자녀가 있는 기혼 분들의 조를 맡았는데요, 복음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이루어진 반면, 민족, 땅끝에 대해서는 조원들이 조금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당장 가정, 학교, 직장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그들의 삶 가운데, 민족과 땅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했습니다. 사실 민족, 땅끝의 개념을 조금 더 일반화 해서 우리 가족, 이웃이 민족, 땅끝이 될 수 있음을 이해시키고, 융통성 있게 주제가 전달되었다면 기혼조들의 반응도 더 좋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수련회 이후에 김두식 교수님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읽으며 그러한 의문에 도움이 되는 예화들을 찾았는데, 미리 읽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eKOSTA: 처음 참석이 아니셨던 분들께서는 예년의 주제와 관련해서 이번 주제가 어떠했는지 나눠주십시오.

지훈: 25주년이라 back to basics의 취지가 담긴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인 복음, 민족, 땅끝을 스스로 돌아보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주제 자체만으로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지영: 예년의 코스타 주제에도 민족, 공동체 등의 가치가 담겨있었지만 이번에는 더욱 직접적으로 그 가치를 내세운 것 같습니다. 코스타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전달되었던 것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세진 형제님께서 지적하신 것 처럼, 민족, 땅끝의 다면적인 부분, 의미들을 짚어보기 보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만에 초점을 맞춰 전달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eKOSTA: 선택식 세미나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세션을 나눠주세요. 또한 세미나 프로그램에 대해 일반적으로 좋았던 부분과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세진: 기혼조의 강사와의 만남 시간에 이재천 목사님의 세션에 들어갔는데 굉장히 좋았고, 조원들도 각각 들어가셨던 세션에서 많은 유익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선택식 세미나 중에는 정민 목사님의 “하나님 나라”를 듣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내 사랑을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하라”고 하신 말씀이 결혼 생활에 있어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세미나 내용이 다양해서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께는 좋지만, 두 세 번씩 오시는 분들은 들을 것이 많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세미나가 매년 반복된다는 느낌이 좀 아쉬웠습니다. 또 하나는 TM 세미나를 하실 분들이 더 많이 발굴되고, TM이 더 잘 장려되어 개발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 개설된 강의가 많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지훈: 저도 역시 기혼조와 강사와의 만남 시간 굉장히 좋았습니다. 유남호 강사님의 캠퍼스 사역 세션에 들어갔습니다. 선택식 세미나 중에는 백은실 강사님의 “사람을 낚는 리더”가 기억에 남습니다. 제자를 삼는 가운데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화를 하는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대화를 이끌 때 더 많은 열매가 있을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강사님의 전달 방식, 사례, 말씀의 인용 등이 정말 훌륭했던 세션이었습니다. 반면에 저도 매년 세미나가 반복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물론 중요한 내용이라 반복되지만, 매년 주제와 맞추어 연관성을 더 강화시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강사님들께서 너무 방대한 자료들을 준비하시다 보니 시간 엄수가 힘들어지고, 내용이 다 전달되지 못한 채 황급히 마무리 하시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그런 세션들의 경우 좀 더 짜임새 있는 진행을 위해 더 노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희임: 저는 임현수 목사님의 북한 선교 세미나를 통해 평소에 접하기 힘든 북한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스타 이후에도 목사님께서 follow-up을 해주시며 계속적으로 북한 소식을 전해주셔서 저희 지역 교회의 지체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재천 목사님의 에니어그램 세션도 유익했습니다. 전도할 때 상대의 유형을 미리 파악하고 더 잘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짧아서 많은 내용이 다뤄질 수 없었던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eKOSTA: 조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해주십시오. 특별히 불편했던 점, 또는 제안하고 싶으셨던 부분은 없으셨나요?

지훈: 저는 혼자 오신 기혼, 형제님들의 조를 섬겼습니다. 조원들 간에 나이차가 열 살 씩 났지만 모두들 성숙하신 형제님들이었고, 첫 날부터 쉽게 자신들의 삶을 오픈해주셨습니다. 아직까지도 온라인으로 기도 제목을 나누고 있고요, 정말 너무 좋은 조였습니다.

희임: 저희 조의 지체들은 처음 만났을 때는 별로 말 수가 없으셨는데요, 제가 먼저 제 삶을 솔직히 나누었고, 조원들도 따라서 쉽게 마음을 열었고 첫 날부터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외부 숙소에 묵었기 때문에, 이동 시간 동안에 조원과 한 명 한 명씩 얘기하며 깊은 기도 제목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지금도 온라인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연: 저도 조활동 너무 좋았습니다. 저희 조는 집회 전에 온라인으로 15문 15답과 같은 것을 통해 모두가 소개를 나누었기 때문에, 코스타에서 만났을 때는 금방 서로에게 오픈할 수 있었습니다. 중보기도로 섬기다 보니, 서로 개인적인 기도 제목은 많이 나누지 못했지만, 같은 마음으로 같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습니다. 코스타 이후로는 오히려 개인적인 기도제목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조모임이 코스타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습니다.

세진: 저희 조모임도 대체로 좋았습니다. 조원들이 쉽게 삶을 나눠주셨습니다. 아침 QT는 하루씩 번갈아서 자매들만, 또는 형제들만 모여서 했는데, 굉장히 깊은 나눔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힘들었던 점 하나는, 저희 조 다섯 가정에 자녀들까지 포함해서 18명이나 되어서 모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밤에 조모임 할 때는 옆에서 몇 몇 조의 자녀들이 함께 뛰어놀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eKOSTA: 찬양, 전체 기도회, 조별 기도회, 상담에 대해 의견 부탁드립니다.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의견이 있으신 항목을 고르셔서 자세히 나눠주세요.

지연: 저는 찬양이 너무 좋았습니다. 많은 은혜가 되었고, 찬양이 설교, 간증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 이후에도 찬양시간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제안을 해봅니다. 전체 기도회 시간에는 많은 분들이 기도에 참여하지 않으시고 나가셨는데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 자녀들 데리러 가야하기 때문에 기도회에 참석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들이 계셨을 것 같은데, 이런 부분은 좀 더 배려를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희임: 저도 찬양 시간이 좋았습니다. 또 유익이 되었던 것이 개인, 그룹 상담이었습니다. 개인 상담은 정말 좋았는데 시간이 짧아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룹 상담 시간에는 참석자 30명 정도, 강사 네 분이 계셨는데,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질문 하나 하나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서 많은 질문이 다뤄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한 질문에 강사님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셔서 조금 혼란스러웠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또 저희는 외부숙소에 있어서 조별 기도회를 갖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외북 숙소의 기도실에 조원들과 함께 갔을 때는 조용히 개인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중보 기도회를 오래 할 수 없었습니다. 외부 숙소에 기도실을 적어도 두 군데 정도 마련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진: 목요일 금식 기도회 때, 기도를 많이 하고 싶었는데 이동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집중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로 이동하셔야 하는 분들이 계셨던 것 같은데, 기도회 시간에는 모두가 기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짜여졌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목요일 저녁 집회 후 기도회 때는 선교 헌신하신 조원들과 함께 계속 기도하고 싶었는데, 다른 방으로 옮겨가서 그럴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습니다. 선교 헌신하신 조원들과 더 기도할 수 있었으면 더욱 풍성했을텐데요.

지훈: 목요일 금식기도 시간에 북한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은 좋았지만, 평소에 배경 지식이 많이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서 좀 더 정보를 주고 소개를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동영상으로 소개를 해줄 수도 있고요. 그랬다면 좀 더 북한의 실상에 대해 잘 알고 마음으로 느끼며 기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KOSTA: 다음 번에 코스타가 이런 주제 또는 내용도 다루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지연: 코스타에서 민족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한민족이란 걸 강조하는 것이 매우 당연시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에는 다문화 가정, 유학생, 코시안 (한국 남자와 동남아시아 여자 간에 태어난 자녀) 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다인종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인종 차별적인 관점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더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스타에서도 민족이라는 주제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할 때, 이렇게 변화하는 한국의 모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실정에 더 잘 어울리는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세진: 이번 코스타에서는 교회에 관한 언급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이 중요하지만 그것도 교회 공동체와 동떨어져서는 안되는 것인데, 요즘 한국의 교회들이 바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가 코스타에서 다뤄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희임: 저는 San Francisco에 살면서 여런 민족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타민족 사람들을 대하고 전도할 때 실질적으로 어떻게 접근하면 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주제, 또는 선택식 세미나가 준비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KOSTA: 올해의 주제, 큐티, 또는 선포된 말씀으로 인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에 생긴 변화가 있으시다면 나눠주십시오.

지연: 저는 이번에 네 번째로 코스타에 참석했는데요, 코스타가 유학 생활 중 신앙의 터닝포인트 되기도 하였고, 하나님을 새로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올해도 아주 좋기는 했지만, 제가 앞서 말씀 드렸던 약간 불편했던 부분들이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부담이 되어서 좌담회에 초대하셨을 때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번 코스타를 볼 때는, 어떤 코스타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었다면,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는 역사의 흐름 가운데 내가 어디에 서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스타를 처음 시작하셨던 목사님들과, 지금 참석하시는 80년대 생 참석자들을 보면 그 사이 세대가 많이 바뀌었음을 봅니다. 또 그 가운데, 코스타의 역사 가운데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해도 부족함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완벽하시기에, 코스타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100%의 은혜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희임: 저는 직장인으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코스타에 대해 알지 못하다가, 미국에서 생활한지 몇 년 째 되어서야 알게 되었는데요, 이번 처음 참석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녀와서 직장 동료들에게도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요, 불교 신자인 직장 상사에게도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였었는지, 어떤 것을 배우고 왔는지 나눌 수 있었습니다. 직장 상사가 뜻밖의 관심을 보여서 저희 교회에 모시고 갈 수 있는 기회도 생겼습니다. 앞에서 나눴듯이, 북한 선교사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북한 실정에 대해 무지했는데, 코스타에서 만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믿지 않으시지만, 그런 얘기들을 아버지께 나누면서 또 기도 부탁도 할 수 있었고, 그런 기회를 준 코스타에 감사합니다. 코스타에 다녀와서 큐티도 더 잘 하고, 귀납적 성경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쁜 가운데 코스타 참석을 많이 고민했었는데요, 다녀와서 직장 생활도 오히려 더 잘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세진: 코스타에 다녀온 저의 삶 속에는 여전히 갈등과 좌절이 있지만, 코스타를 통해 경험한 은혜가 많은 힘이 됩니다. 저는 코스타에 대해서 한국에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고, 유학 나온 후 꼭 와보고 싶어서, 연애하는 기분으로 코스타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것은, 코스타 참석 보다는, 돌아온 현실에서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코스타를 통해서 중보기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선한 부담감을 많이 갖고 돌아왔습니다.

지훈: 코스타를 평가할 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너무 비판적이지 않았다 하는 생각이 들지만, 좌담회를 통해서 잘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2년 전에 코스타에 참석했을 때는 참석하는 거 자체에 의의를 두었다면, 이번 코스타는 제게 매우 특별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 학생 운동인 코스타는 일회성 집회가 아니라 돌아온 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집회인 것 같습니다. 코스타가 끝나고 집에 와보니, 땅끝에 와보니, 땅끝의 실정이 말이 아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 조그만 땅 덩어리를 생각하며 중보기도 하려고 합니다. 장평훈 멘토님께서 조장 수양회 중 해주셨던 말씀 중에,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런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선한 예가 우리 기독교 가운데 너무나 부족하다는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제가 그 선한 예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생각이 듭니다. 수 십년 동안 노력해야하는 과정이겠지만요.

eKOSTA: 참여해주시고 좋은 의견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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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주년을 맞이한 KOSTA/USA이지만, ‘KOSTA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모임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어떤 이들은 KOSTA를 일년에 한번 열리는 부흥 집회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유학생 선교단체라고도 한다. 이제 KOSTA/USA 25주년 2010 연차수양회를 마무리하면서 코스타는 어떤 운동인지,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간략하게 나누어보자.
KOSTA/USA 웹사이트 (http://www.kostausa.org)에서 ‘코스타 소개’를 클릭해 보면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 하나님 나라 백성(Kingdom of God within Korean Student Diaspora)’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KOSTA/USA의 mission statement이다. KOSTA/USA가 어떤 운동을 하는 모임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한 문구인 셈이다. 이 mission statement에 의하면, 첫째, KOSTA/USA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다. 미국에서 KOSTA/USA가 열리지만, 언어가 한국어인 이유도 바로 그 대상이 ‘한인 청년’이기 때문이다. 또한 KOSTA/USA는 더이상 고국으로 돌아갈 한인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게 될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 둘째, KOSTA/USA는 전세계에 흩어지게 될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운동이다.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여 풀어 놓은 것이 바로 vision statement이다. KOSTA/USA의 vision statement에는 세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다. 첫째,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운동’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만이 왕이 되셨다는 기쁜 소식을, 한인청년 디아스포라에게 선포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말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대 가운데, 또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마저 대담하게 이용하는 세대 가운데, 하나님만이 왕이 되심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애쓰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연차수양회이다. 둘째,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운동’이다. 세상을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이미 소유한 선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 하지만, 완전히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더라도,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성경적이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돕는 운동이 바로 KOSTA/USA이다.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미 성경적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시는 선배들의 삶을 책이나 직접적 만남을 통해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또 함께 한다. 셋째,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살게 하는 운동’이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저 멀리있는 어떤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완성될 샬롬이며, 예수님을 통해 이미 이 땅에 들어와 우리가 맛보고 사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직 미치지 못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선포하는 삶을 살도록 돕는다. 그곳이 직장이 될 수도 있고, 가정이 될 수도 있으며, 교회가 될 수 있고, 또 해외 선교지가 될 수도 있겠다. 코스타에 자주 오시는 한 강사님은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신다: “예배자가 사는 삶이 예배다”. 그렇다. 예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사는 모든 삶의 모습이다. 특정한 장소에 모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예배도 참 소중하지만, 진정한 예배는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될 때, 바로 그 예배자된 우리가 숨쉬고 사는 모든 삶이 예배가 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KOSTA/USA는 미국에 있는 한인 청년 학생들로 하여금 진정한 예배자가 되도록 돕는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25년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어온 KOSTA/USA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견지하면서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나라의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모습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KOSTA/USA는 스스로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가려는 오류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어떤 특별한 계획을 짜고, 효과적으로 그 계획을 추진함으로 앞당길 수 있는 것이 하나님나라가 절대 아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묵묵히 한걸음 한걸음을 떼어 놓기를 원할 뿐이다. 그래서 몇가지를 염두에 두고, 세상의 가치에 거슬러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살아가는 KOSTA/USA가 될 것을 기대하며 다음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KOSTA/USA는 성과와 결과를 추구하지 않고, 소외된 한사람에게로 다
가갈 것이다. 예수님도 때로는 많은 군중과 함께하시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결국 소외받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사역을 하셨다. 세상에 버려진 자들 - 가난한 자, 병든자, 창녀, 어린아이, 과부 등 - 을 찾아 가셔서 그들과 함께 있어 주시고, 그들의 아픔을 회복시켜주셨다. KOSTA/USA도 그럴 것이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많은 군중 가운데 있겠지만,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있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 그들을 만나고 함께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당장의 성과와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그런 성과와 결과의 책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그저 그들에게 다가가 머물 것이다. 때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게 될지라도, 우리의 이런 ‘끙~’하는 신음조차 기도로 받아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조금씩 움직여 나아갈 것이다.
둘째, KOSTA/USA는 우리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정말 성경적이며,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전달되고 있는지를 점검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받아들인다고 진리는 아니다. 현대 교회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많은 사람이 진리라고 외친다고 해서 그 진실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KOSTA/USA는 우리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진정 성경적인지를 늘 겸허하게 점검할 것이다. 현대의 흐름에 편승한 어떤 거짓된 가르침에도 단호하게 No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 가름침이 비록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고 받아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성경적 진리는 현대를 사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하지만 그 ‘적절한 방법’은 ‘효과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다. 어느 누군가 소외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을 인격이 아닌 도구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점검을 스스로 계속해 나갈 것이다.
셋째, KOSTA/USA는 외부의 어떠한 위협과 어려움에도 절대로 힘으로 대항
하거나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강산이 두번 하고도 반이 더 돈 세월을 지내온 KOSTA/USA. 이제 제법 유명해졌다는 사실이 반갑지만은 않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KOSTA/USA는 내부 혹은 외부로부터 적잖은 위험과 어려움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KOSTA/USA는 그 어떤 역경에도 절대 힘으로 대항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어려움 가운데 굴복하거나 타협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힘으로 대항하지도 않고 타협도 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택할 것이다. 즉 KOSTA/USA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질 것이며, 언젠가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릴 것이다.
이제 KOSTA/USA-2010 연차수양회를 뒤로하고, 예배자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땅끝이기도 한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나아간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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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01:03 코스타 사역


2010 KOSTA/USA-Chicago  컨퍼런스 후, 시애틀 지역 참가자 후기 모임이 717일 토요일 아침에 있었습니다. 코스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코스타 컨퍼런스 기간 중에, 또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코스타를 통해 하신 일들과 하실 일들을 함께 나누고, 특히 컨퍼런스 기간 중 각자 맡은 다른 사역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모여 그 은혜를 나누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고민해볼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방문중이신 김도현 교수님 (Colorado Christian University, Denver)과 시카고 컨퍼런스에서 JJ 멘토 및 세미나 강사로 섬겨주신 김동록 멘토님, 그리고 올 해 첫 참가자인 유다혜, 공혜진, 윤성혜 자매님, 2010 컨퍼런스에는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지난 코스타 컨퍼런스에 참석하셨던 한상윤 형제님, 이동훈/정현지 커플, 그리고 김다연, 이금영 자매가 함께 했습니다.

올 해 처음으로 시카고 컨퍼런스에 참석한 유다혜, 공혜진, 윤성혜 자매님들의 소감을 정리해봤습니다.

유다혜: 코스타를 통해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한 조에서 만난 지체들이 이제까지는 ‘선교’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고민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정진호 교수님과의 그룹 만남을 통해 ‘선교’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고, 두 명이 선교 헌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성혜: 이번 코스타 주제가 원래 관심이 있었던 주제여서 생소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왜 하나님께서 저를 KOSTA에 보내주셨는지 이유를 알게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북한 선교’를 향한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대한 confirm을 받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오는 미션 코스타에도 참가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공혜진: 처음 코스타 주제를 접하고, 기대를 많이 하고 왔는데, 전체적으로 집회의 focus가 ‘통일’이나 ‘북한’에만 맞춰지는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북한을 위한 금식 및 기도시간 이전에 현 북한의 상황이나 우리가 왜 북한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사로 참석하셨던 김도현 교수님, 김동록 멘토님은 다음과 같은 생각 및 의견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김도현: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주제를 처음 접했을 때, 로마서 말씀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코스타 집회에서 다룬 주제가 로마서와는 달랐지만, 민족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전세계에 흩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다른 민족을 섬기는 방향으로 더 나아가고, 우리 세대에 세워진 많은 교회들이 늦어도 다음 세대에는 다민족 교회로서 쓰임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주제가 그러한 방향으로 구현되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김동록: 통일이 민주주의 정치적 체제의 단일화를 의미한다면 성경적 의미로서의 동기가 약화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정치적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과의 절대적인 연관성을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대신 통일을 “분단된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에 들어감 (즉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됨)”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분단된 이스라엘, 포로시기를 거치면서 사라져버린 10족속, 포로귀환 뒤 2족속만 남았지만 여전히 12족속으로 표현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 등을 생각해 보면 마치 분단되고 흩어진 우리 민족도 포로기에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방언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구속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이 포로기에서 회복되는 것도 그 필연적인 과정중 하나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통일이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회복은 통일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요.


생각해 보면 별 만남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같은 지역에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런 만남을 통해서, 내가 가는 이 길이 외롭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함께 중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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