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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함께 일하는 직원한 분과 함께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나만 든다면 무엇일까? 함께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Integrity라는데 동의하였다. 지도자가 진실하지 못하면 다른 모든 활동이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 지도자의 진실함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 정직한 , 일관성이 있는 , 투명한 사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와 동일하게 행동하는 사람, 남이 보던 안보던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진실된 사람이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눈을 먼저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다. 

지도자가 진실해야 추종자들의 신뢰성을 얻고 영향력을 끼칠 있다. 창세기 19:14절의 롯의 이야기를 보면 롯이 그의 사위들에게 다가 심판을 경고했을 때에 그들이 농담으로 여겼다고 하였다. 이것은 평상시에 롯이 그의 사위들에게 신임을 얻을 만한게 진실한 태도를 가지지 못한 증거라고 있다. 그가 진실을 추구하기 보다는 타협하는 사람이었기에 위기의 순간에 진실을 이야기해 주는데도 그의 사위들이 롯의 말에 신뢰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진실함을 포기하면 당장에는 성취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지도력의 법칙이다. 진정한 의미의 영향력은 진실함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진실성이 있는 지도자들을 사용하신다. 지도자가 많은 능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진실해야 한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연구한 풀러신학교의 클린톤 교수는 지도자들이 삶과 사역에서 도중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사역의 기술적인 이유나 전략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영성이 이유라고 하였다. 삶과 사역의 초반부에 진실성에 따라 사는 자세를 분명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결과라는 것이다. 사역의 후반부에 오는 실패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주로 처음부터 이런 진실성의 면에서 타협하고 넘어온 것의 산물일 뿐일 경우가 많다. 진실성을 타협할 때 즉각적으로 힘든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지도자로써 영향력을 잃게 된다.

진실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지도자를 반드시 사용하신다. 성경에 나오는 진실성 있는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과 다니엘이다. 요셉은 지도력의 중요한 자질인 꿈도 있고 또 실력도 있는 사람임에 분명하였지만 그 보다도 그는 우선 진실된 사람이 었다. 부정한 유혹 앞에서 넘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동을 하였다. 다니엘도 진실된 사람이었다. 자기의 신앙 양심을 쉽게 타협해 버리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의 신앙 양심을 고수한 사람이었다. 다닐엘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진실함을 가졌을 때에 즉각적으로 구원해 주시고 그의 영향력을 넓혀주셨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에는 그가 진실되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행동한 이 두 사람 모두를 귀하게 사용하셨다. 진실을 선택하는 순간은 힘이 들지만 또 때로는 즉각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진실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신다. 우리가 진실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때에 우리를 들어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2 20-21절에서 권면하기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라고 하였다.

내가 진실성에 있어서 경험한 하나의 좋은 예를 보여주겠다. 우리 월드미션대학교가 미국에서 기독교 대학 연합체의 회원학교이다. 이 단체에 가입하기 위하여 우리 학교가 오랜기간동안 여러가지 과정을 거치고 특히 감사(Team Visit)를 받았다. 이 단체에서 학교의 회원학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Integrity이다. 때로는 학교가 아직 모든 면에서 성숙하지 않았어도 앞으로 그런 부족한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움직여 나아가는 모습이 있으면 학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고 감사를 할 때에도 심판하여 떨어뜨리려고 하는 자세보다는 도와주고 세워주어 어떻게던지 회원학교가 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도와주고 부족하더라도 세워주려고 하지만 하나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Integrity을 갖지 않을 때이다. 학교가 행정을 하면서 속이던지 혹은 어떤 면으로던지 진실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절대로 회원학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학교 운영에 있어서도 Integrity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진실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닐수도 있다. 진실성은 근본적으로 건강함이다. 우리 자신이 진정한 의미로 건강할 때에 우리가 진정한 의미로 자유함 속에서 진실할 수가 있다. 진실함은 우리의 인격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갖춘 모습이다. 우리의 인격이 깨어지고 문드러지고 왜곡되지 않고 건강할 때에 진실함은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격의 건강함이 필수적이다. 진실함이란 어떤 문자나 글짜에 충실한 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진정한 의미로 자유하고 건강하고 풍성할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진실되게 행동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인격이 건강해야 한다. 우리 인격이 왜곡되지 않고 건강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의 저주로 부터 진정한 의미로 자유함이 있을 때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죄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힘을 발휘하지 않을 때에 우리 자신이 진정한 의미로 건강해지고 진실해 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진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연스런 산물이다.

진실함은 효과적인 지도력의 근원인 동시에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할 모습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는 하나님을 닮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을 위하여 부르셨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은 거룩함을 추구하게 된다. 우리를 부르신 자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가운데서 때로는 성취를 위하여 진실함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성공과 성취도 진실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워런 위어스비는 말하기를 아무리 많은 명성도 그것이 진실함을 대신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4:16절에서 고백한다.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궁극적으로 설 것을 의식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꺼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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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자리에는 항상 어두움의 도전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 가을 LA지역 침례교회협의회 주최로 진행된 좋은씨앗, 조재옥 찬양 간증집회 때 있었던 그 도전의 현장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집회는 남침례교단 소속 LA지역 중소형 교회 중심으로 한 달에 1회씩 함께 모여 서로 교제도 하고, 집회도 갖는 작은 교회 연합행사입니다.

당시 저희 교회에서 진행되던 90일 작정 새벽기도회가 체질화되었는지 이날 새벽부터 눈이 떠졌습니다. 한빛지구촌교회를 위해, 그리고 이날 저녁집회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습관적인 근심과 염려에 대한 짐’을 내려놓으라는 메시지가 자꾸 떠올라 이 부분을 놓고 묵상하며, 중보 했습니다.

이날 스케줄은 제 의도와 상관없이 빡빡했습니다.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후 4시에나 끝난 방송국 인터뷰, LA중앙일보 인터뷰, 식사 교제 등으로 사알짝 지쳐 있었는데, 집회 장소인 예닯교회까지 이동하는데 우여곡절을 겪으며 차 속에서 3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마음도 육체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로 도착하자마자 음향 셋업과 찬양팀 연습을 시작했는데, 잇따른 음향 시스템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며, 식사도 못한 채로 집회 시작 시간에 가까스로 연습을 마쳤습니다.

이날 저녁 집회를 실패케 하려는 영적인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 상태에서 2시간짜리 집회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보였습니다. 찬양팀과 함께 밖으로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를 짧지만 뜨겁게 올려 드렸습니다.

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8개의 지역 교회에서 오신 담임 목회자들과 성도들 150여명이 모였습니다. “이날 집회가 시작되기까지 여러분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곳에 도착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밤 모임을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쁘게 시작합시다.” 말을 던진 순간 나도 모르는 힘이 솟구쳤습니다.

뜨거운 찬양과 간증이 이어졌고, 와이프의 간증과 찬양 “아침안개 눈앞 가리듯”에 이어 제가 예수님 만난 간증을 하면서 찬송가 455장을 함께 부르는데, 갑자기 오열이 터졌습니다. 성령님께서 회중의 마음을 만지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너무 무겁고 아팠습니다. 찬양을 마치면서 예정에 없었던 통성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새벽부터 하나님께서 기도시키셨던 바로 그 부분을 회중에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있는 모든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인생에서 관계의 짐, 미움의 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짐, 습관적인 근심, 부정적인 생각들, 비교의식, 남을 비교하고, 비판하는 생각들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회중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뜨거운 기도의 열기 속에 이곳에 모인 심령들의 아픔, 고통, 죄로 인한 탄식들이 마치 제 고통처럼 느껴졌습니다. 눈물 콧물 쏟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은혜가 가득했습니다.

이후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 모인 회중을 확인해보니 Junior high school부터 노년층까지 1세와 1.5세, 2세가 모두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말에 익숙치 않은 2세들도 있었습니다. 세대와 언어를 초원해서 1세가 1.5, 2세가 서로를 향해 축복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에 이어 이날 오신 목회자들을 축복하는 시간을 통해 8개의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감격스런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있던 저와 아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어떻게 집회를 마쳤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100%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집회를 마치고 2세 여학생 한 명이 다가왔습니다. 자신은 솔직히 무슨 말인지 100%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성령께서 마음을 touch하셔서 큰 은혜를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언어를 초월해서 역사하신 성령님께 감사했습니다. 이후 이날 일어났던 간증들을 계속 듣게 되었습니다. 큰 기대감 없이 참석했다가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회개, 치유, 회복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목회자들 간에 껄끄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이날 성령께서 touch하셔서 회복된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부흥의 전조에는 항상 공중 권세 잡은 영(엡 2:2)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내 삶에 짙은 어두움이 있을수록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부흥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약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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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바른길로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The Way to Live Thy Kingdom Come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개역개정판)

이 세대는 세계화, 포스트 모더니즘, 뉴에이지 등의 영향 아래서 절대적인 기준점을 잃어버린 채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극단적으로 상대화시킨 이 세상은 개인의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지만, 우리는 오히려 불안과 욕망의 노예로 우리 자신들을 전락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물신주의는 돈으로 모든 가치를 집결시켜 마치 바벨탑을 쌓았던 시대처럼 모든 사람들을 그 영향 아래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이제 돈과 물질은 삶의 안정을 약속하는 신앙이 되어버렸다. 돈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여져서 그 자체가 선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은 쉽게 정당화되었다. 조국의 현실도, 디아스포라의 삶의 현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교육은 안정된 직장을 갖으려는 방편으로 전락해 버렸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피교육자의 인격도, 인간, 사회, 자연, 역사에 대한 책임도, 서로 함께 살아가는 삶도, 그에 따른 삶의 의미도, 또한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직 돈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물질적인 안정과 풍요로운 삶을 쟁취하고 지키는 것이 ‘그 길(The Way to Live)’이 되어버렸다. 성공과 생존을 위한 모든 노력이 정당화되고 칭송되었고, 현실을 극복해내는 이상과 물질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 그리고 그것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조롱거리가 되어 버리고 있다.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고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참된 길을 가지 못하는 세대가 지금 이 세대가 아닐까?

이러한 세속화와는 반대로, 이원론(dualism)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기독교를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로 변질시켜 버리는 일들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종교활동을 제외한 세상 속에서의 모든 활동을 ‘속된 것’으로 규정하며 세상과 분리된 종교활동을 더 고상한 것으로 여기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며 사는 모습은 우리 안에 발견되는 또 다른 극단의 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이원론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현실의 도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러한 삶의 자세를 이용하기도 한다. 경건함과 거룩함을 내세우며 종교생활에 매달리지만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그 길’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에 실패하고 그저 격리와 회피의 삶을 사는 비복음적 삶의 자세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로부터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세대는 목말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세대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끌려가면 갈수록 진정한 ‘그 길’을 갈망하고 있다. 초자연적인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세계적인 추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영혼 내부의 외침이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현실은 목말라 하는 이 세대가 자신들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를 기대했던 기독교로부터 받은 ‘배신감’의 표현이다. 목마른 이 세대의 갈증을 채워주기에 대부분 기독교인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 현실을 등지고 예배당 안에서 자신들만의 천국을 구축하느라 바쁜 나머지 예배당 밖에서의 능력을 상실했거나, 세상의 모습을 본받아 신앙을 정서적인 영역에만 제한시킨 채 성공과 정복의 이념으로 삶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세속화와 이원론, 이 두 가지 극단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바람직한 모습으로서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세상보다 더 효과적으로 세상의 길을 추구하는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이 기독교에 돌을 던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초월해서 영원을 갈망하며 살고, 한편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비복음적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그 길’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해답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보여 주시고 또 ‘그 길’을 살아내고자 이 땅에 오셨다. ‘그 길’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삶이었다. 그 안에서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통합이 있었고 그의 삶에는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의 통합이 있었다. 오직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었다.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는 생명 없이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새로움 패러다임이었다. 세속화나 세상과의 분리가 아닌, 초월적 가치와 치열한 삶을 통합시키는 가치였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고, 또 그런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

우리는 KOSTA 2008을 통하여 바르게 삶을 살아갈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음을 선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삶,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 아니고는 ‘그 길’을 추구할 기초가 우리에게 없음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으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그 성령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함을 보게 되기를 원한다. 또한, 소망을 잃어버린 시대 속에서 이 땅에 살면서도 영원을 추구하고, 초월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 땅의 삶에 충실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그리고 세상이 목말라 하는 ‘그 길’임을 깨닫기 원한다. 이 세상과 대적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는 눈이 열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자 이 세상을 거슬러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구름과 같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 길’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허락하시며, ‘그 길’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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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온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지만, 막상 하나님 나라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면 그다지 쉽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하나님 나라라는 짧은 표현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가 너무 커서, 오히려 짧은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시도 같은 어려움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eKOSTA에서 앞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게 하나님 나라 내용 기초라고 있는 부분을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