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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1 19:01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영화를 본 후 자꾸 생각이 났던 말씀들이 있어서 잠깐 나눕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모습이 너무 상하여 사람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 52:14, 현대인의 성경)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개역한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22:6)

심해지는 채찍질과 십자가의 못 박히시는 장면들은 눈뜨고 보지 못했고 (그것을 눈뜨고 보지도 못하겠고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기도 힘이 들어서 내 안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 그대로 정말 사람의 모양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벌레의 모습으로... 도수장에 끌려가시는 잠잠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DC에서 K 자매)


저는 감정이 팍팍한 사람이라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늘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C.S. Lewis가 예로 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고 죽어서 부활할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회의하는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서 예수님의 고난이 장난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리얼하게 느껴지던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니 -아리러니컬하게도 -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고통을 주는 형벌이라는 식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극대화 시키는 말들을 우리가 많이 들어 왔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를 보고서 굳이 십자가가 가장 지독한 형벌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육체가 감당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지독한 고통이 있었다는 (가장 지독하고 아니고는 관계없이) 것으로 인해 그 구체성과 상징성이 다 만족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십자가의 고통이 제게 크게 다가와서 저를 심각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려고 단호히 기도 하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으로 가시려고 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글쎄요, 며칠 갈 지 모르겠지만, 고난받으시려고 기도하고 결심하고 (맨 첫장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끝까지 그 길을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계속 생각납니다. 피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고통을 정면에서 받으시니까 더욱 그분의 고난이 증폭되어 다가 왔었고, 이제 제 마음을 심각하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빌라도가 기회를 줄 때에, 차라리 대답을 잘 해서 그냥 풀려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베드로가 똑 같은 제안을 했다가 "사단"이라는 꾸중까지 듣는 것이나 영화 속의 사단의 생각이나 다 한가지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사실은 저 자신에 대한 동정이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의 엄연한 태도가 부각됩니다.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이 받는 고통이 그대로 그녀에게 느껴지는 장면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인식의 확고함 (믿음)이 그려졌습니다.

(Seattle의 K형제)

작년 초에 멜깁슨이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기사를 잡지에서 읽으면서 흥분했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 영향력있는 영화배우 중 하나인 멜깁슨이 크리스찬이라는 것도 놀랍고 기뻤고, 그가 자비를 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참 고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꼭 성경공부 지체들과 함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정일보다 조금 늦게 그러나 때 맞춰서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개봉되었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때 맞춰”라고 생각한 이유는 마침 성경공부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볼 때와는 달리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는 지체들이 본문을 많이 어려워했고 특히 예수님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이 영화가 본문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관람에 대해 광고를 하고 함께 볼 날짜를 정한 후에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져있는지 보지 않았기에, 지체 중에 혹 믿음이 약한 이들이 보다가 감당 못하고 시험에 들게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멜깁슨이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했는지 모르기에 혹 왜곡된 장면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또한 함께 보는 지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느껴보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을 잘 이해하게 되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성경공부 지체들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영화를 보기 전에 뭔가 준비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자매는 마태복음을 읽으며 제게 영화를 보기 전에 성경 어디를 봐야 도움이 되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지체들의 관심과 그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에 감동하며 성경공부 사상 처음으로 터프하게 숙제를 냈습니다. “영화보기 전에 요한 복음 읽어오기.”

영화를 보는 날 저녁 캠퍼스에 모여 출발하기 전에 기도를 했습니다. 여느 때 친구들과 영화보러 갈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과 자세로 가는 길 내내, 또 극장에 들어가면서도 지체들을 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극장에 들어가면서 한 자매가 “난 영화보러 극장에 가면 항상 자거든. 그래서 친구들이 나랑 영화보러 가는 거 싫어했어” 라고 하는 겁니다. 속으로 가슴이 철렁해서 그 자매가 졸지 않기를 또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듣던데로 잔인하고 피흘리는 장면이 많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을 볼 때는 눈을 질끈 감거나 소리가 안들리게 귀를 막으면서 보던 제가 그 날 만은 두 눈 똑똑히 뜨고, “잔인하다, 징그럽다”는 생각 한번 안하고 조용히 눈물만 흘리며 보았습니다. 그 분이 맞으시는 채찍, 바닥에 낭자하던 피, 지고 가시는 크고 무겁게 보이던 십자가, 그 분의 손과 발에 대고 무섭게 때리던 망치소리… 그 모두가 제게 외치고 있었디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옆에서 보던 예의 그 잘 잔다던 자매의 눈이 퉁퉁 부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 옆에 앉았던 지체들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그 자매가 영화 시작하면서 부터 끝날 때 까지 어찌나 엉엉 울며 통곡을 하던지 시끄러워서 영화를 못봤다고 했습니다.

영화의 무거움에 마음이 부담이 된다는 지체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영화본 걸 나누러 캠퍼스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 보단 나누면서 서로 느낀 것들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파서 함께 영화보러 가지 못한 어느 자매가 사랑으로 준비해준 스파게티를 먹고나서 돌아가면서 느낀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지체들이 어떻게 봤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안 믿으셔서 전도에 관심이 많은 한 자매는 “전도용으론 안 좋은 영화같아.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다루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고난에만 촛점을 둔 것 같아” 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영화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예수님이 정말 저렇게 까지 잔인하게 고난당하신 줄 몰랐어요” 라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조금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또 한 형제는 “인간이 저렇게 까지 잔인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감사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그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분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분의 고난을 묵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성공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다음 주에 요한복음 19장을 공부하면서 지체들이 이제는 영화를 보고 나니까 장면이 상상이 되고 이해가 된다며 풍성히 나누는 걸 보면서 또 한 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영화의 장면들이 지체들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서 세상살이 하다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에 들려고 할 때,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길 소원하며 기도해 보았습니다.

(NY에서 K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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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3절)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장 20절)
(Blessed are you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1)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는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민족회복 운동이다.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자생력을 주기 위함이요, 장차 한 민족으로서 우리와 함께 일할 동북아 시대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을 짓자는 것이다.

평양과기대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려고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물질 후원을 호소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돈에 대한 관심이 점점 생기게 되었다. 돈버는 일과 무관하게 지난 10년을 살아오던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돈을 모아야할 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굶주리는 동족들을 향한 사랑을 호소하는 것이었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결국은 그동안 돈을 쓰기만 하던 삶에서 돈을 모으는 삶의 방식으로의 일종의 방향 전환(?)을 하게 된 셈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이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뜻밖의 후원자들을 통해 감격스런 헌금을 받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신의 떡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마음들을 녹여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돈을 둘러싼 어려운 문제들이 얼마나 산적해 있는지도 조금씩 체감하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경제계에는 어마어마한 천문학적 액수의 정치자금이 불법적으로 오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산적한 물질적 부가 이렇듯 좋은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데에는 좀처럼 쓰이기가 쉽지 않음도 깨달았다. 다시금 돌이켜 돈의 문제, 물질의 문제, 떡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돈과 부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취급해야하는지에 대하여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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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원과 개인 구원의 문제는 성경에서 다루는 두 가지 중심축이지만, 각 교단과 신학자들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과 시각의 불일치를 낳는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회복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영적 복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쪽과, 현실 사회의 왜곡된 정치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회 복음을 더 중시하는 다른 한 쪽이 팽팽히 맞서 있는 것이다. 과연 성경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복음의 두 가지 다른 요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두 진영 사이에는 도무지 타협할 수 없는 평행선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 모두 결국은 떡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배고픈 자에게 떡을 주자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우리가 가진 우리가 더 받은 물질적 부와 우리가 먼저 받은 영적 풍성함을 나누어주자는 그런 이야기이다. 결국 다 같이 잘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자는 같은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기에 우리에게는 육체의 떡과 영혼의 떡이 함께 필요하다. 우리는 그 어느 하나도 경시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 두 가지 떡을 함께 주어야만 한다.

지난 18,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발명된 수많은 기계들은 사람의 육체노동을 대치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우리 인간의 먹는 문제, 떡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육체노동에서 소외된 인간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통한 부의 편중화라는 사회 현상 속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더 심각한 경제문제를 양산하게 되었다. 인간이 창출해 내는 부가가치는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의 산물로 급격하게 전환되었고, 지난 20세기를 휩쓸었던 전자/반도체 혁명에 의해 인간의 지식과 감성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지식 사회와 감성 사회를 거치면서 인간의 문화 활동이 삶의 중심부로 옮겨지게 되었다. 먹는 문제 즉, 입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우리의 눈과 귀가 또 다른 욕구를 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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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은 더 이상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의 문제이다. 사회 일각의 부유층은 물질적 부가 넘쳐나서 온갖 사치를 일삼으며 성인병과 비만에 시달리고 있는가 하면, 소외된 빈민 계층에서는 TV 드라마 속의 화려한 장면들을 물끄러미 넘겨다보며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어려움 속에서 더 큰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의 영향으로 지구촌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세상 속에서 이 문제는 한 국가 내에서 뿐 아니라 국가간에서도 마찬가지로 부각되고 있다.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 사이의 간격은 날이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는데, 부자 나라는 공룡처럼 비대해지며 더욱 자신의 체중 늘이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 조지가 예언한 진보사회 속에서의 빈곤 현상이 가일층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1)

이는 영적인 부요와 가난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나라는 복음이 넘쳐나서 식상한 가운데 영적 불감증에 빠져 있는가 하면, 이웃 나라에는 평생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부의 분배, 즉 떡의 분배는 성경의 최대 관심사다. 구약에서부터 복음서와 서신서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항상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말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도무지 피면하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인간의 타락상은 어떤 도덕 철학과 정치 제도와 경제 시스템을 동원하여도 만민이 함께 잘 사는 지상 낙원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나 온 역사는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는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엔트로피의 법칙, 열역학 제 2 법칙처럼 우리를 따라다닌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던 예수의 예언은 적중하였다.(14:7) 가난이라는 질병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불치병으로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으며, 그 가난의 정도는 시대를 따라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떡을 나누는 삶에 대한 강한 도덕적 책임이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크리스천들은 항상 가난한 자에게 눈길을 돌리며 그들에게 떡을 들고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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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된다. 예수는 자신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나사렛 성전에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낭독함으로 자신의 사명을 천명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9)>

복음의 대상인 가난한 자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가난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

첫째, 가난은 영적인 궁핍 상태를 나타낸다.

둘째, 가난은 물질적 궁핍 상태를 나타낸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은 영적, 육적 가난을 총칭하고 있다. 예수는 이 총체적 가난을 치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가난의 문제를 예수가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하는 점은 그의 공생애 기간 가르침을 집약한 설교로서 잘 알려진 산상수훈의 첫 말씀(누가복음에서는 평지 설교라고 알려진......)이 바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천국 선포였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의 제일성(第一聲)이 바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예수에게는 모든 사역의 초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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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설교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선포인데 비해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는 보다 직설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던지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예수의 관심사가 영적, 육적인 가난을 모두 포괄하고 있음이 암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의 대상을 어느 한쪽에 지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깔려있다. 실제로 영적 복음만을 중시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더 인기가 있고, 사회 복음을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누가복음이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주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향한 영적 윤리적 가르침으로 알려진 것에 반하여, 누가복음의 가르침은 배고픈 무리들을 향한 복음이요 사회정의를 일깨우는 직접적인 설교의 성격이 더 강하다.(마태복음에서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3인칭으로 묘사하고 있는 데 비하여, 누가복음에서는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고 2인칭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유의해 보라.) 그러나 복음의 총체성은 그 어느 한 쪽도 무시할 수 없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가난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결핍상황을 통칭하는 말이다. 가난이란 하나님께서 창조 시 사람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그 아름다운 환경, 보시기에 완전했던 에덴의 풍요에서 벗어난 모든 조건을 지칭한다. 타락의 순간....... 실낙원의 순간, 인간에게 엄습한 전면적(全面的)인 결핍 상태가 곧 가난인 것이다. 모든 부요의 근원이요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그 순간, 우리는 영적 가난, 육체적 가난, 사회적 가난, 환경적/생태적 가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인간의 역사에는 영적, 육적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의 기나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은 전 인류가 가난한 자가 되었다. 영적, 육적인 궁핍함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있는 자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가 왔던 것이다.

예수는 전 인류 앞에 서서 엄숙히 선언한다. 나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노라. 가난한 자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복음을 받으라. 그리할 때, 너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선언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산상수훈의 팔복 중 나머지 칠복은 가난한 자들에게 임할 천국의 복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가난의 총체성은 사람들에게 세 가지 국면으로 나타난다.

첫째, 포로된 자

둘째, 눈먼 자

셋째, 눌린 자

이것은 선악과에서 나타난 세 가지 죄악상을 그대로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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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 하고> : 우상 숭배와 탐심에 사로잡힌 자들

<보암직 하고> : 명예욕에 눈먼 자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 권력욕에 억압된 자들

, 돈과 명예와 권력욕에 묶인 노예 상태로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에게 참 자유를 선포하고 영적인 눈을 새로 뜨게 하기 위해 예수가 온 것이다. 그때 비로소 천국이 임하게 된다. 구약시대에 천국도래의 표상으로 주어졌던 희년, 은혜의 해처럼....... 모든 억압된 자들과 노예들이 해방되고 빼앗겼던 토지가 다시 원 주인을 찾아 되돌아가는 것, 이 희년이야말로 오직 은혜로 임하는 기쁜 소식이요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천국이었던 것이다.(2)

이것이 장차 우리가 소유할 종말론적 천국의 작은 모형이었고, 지금도 복음이 임하는 곳마다 벌어지고 있는 현세적 천국이기도 하다.

 

(3)

평양과기대를 위해 뛰어다니던 지난겨울 두 달간, 강남의 한 커피샾에서 코스타 강사로 알게 된 P목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뜻밖의 만남에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교제하는 가운데 갑자기 주일 말씀 부탁을 받게 되었다. 상가 2층의 자그마한 교회였지만, 성도들이 뜨겁고 목사님과 한 마음이 되어있는 아름다운 교회에서 메시지를 전하니 말씀이 살아 역사함을 느꼈다. 평양과기대를 위해 특별 헌금까지 해 주시는 그 교회 성도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남기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려는데, 어느 아주머니께서 급히 달려오더니 하얀 봉투를 전해주었다. 아마도 예배시간에 돈이 없어서 급히 돈을 구해 오신 모양이었다. 그분이 가시자 옆에 있던 목사님께서 저 여 집사님은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시는 분이예요... 라고 조용히 일러주셨다. 봉투 안에는 빳빳한 새 돈 60만원이 곱게 들어있었다. 그 돈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아픔처럼 밀려들었다.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었던 과부의 두 렙돈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의 헌신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들은 가난하기에 천국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부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동족의 굶주림 앞에서 외면하는 그들이 진정 예수의 제자들인가? 한국 사회의 부유층으로 올라갈수록 크리스천의 비율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그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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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된다. 이 말은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복음의 수혜자요,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심령이 가난하여 도무지 의지할 데가 없는 자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며 오직 하늘의 은총만을 기다리는 그들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힘 있게 역사한다. 이들은 복음의 정적(靜的) 수혜자들이다. 복음을 받을만한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공급되는 생명의 떡과 육신의 떡은 그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복음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말에는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유한 자는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또 부자란 누구인가? 부자에도 역시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첫째, 영적인 부자 : 종교인, 지식인, 도덕철학자, 대학교수 등등....... 뿐만 아니라 선교사나 자선사업가라 할지라도 스스로 선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 교만한 사람들이다.

둘째, 육적인 부자 : 백만장자, 억만장자, 복부인, 대기업 사장 등등....... 뿐만 아니라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라 할지라도 물질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 탐심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얼마나 어려운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예수는 비유로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이 말에 제자들은 놀라고 낙심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반문한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던 사람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7:21-3) 너희는 하나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네 뜻을 위해 그 일들을 했노라. 그리고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6:24)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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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예수는 도전하고 있다. 그들의 천국행을 가로막고 있는 우상을 먼저 제거하라는 요청인 것이다. 그 요청을 바리새인과 부자 청년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마태와 삭개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베드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의 동적(動的) 수혜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비록 교만하고 탐심에 가득 차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부()를 복음을 위해 기꺼이 던져버린 사람들이다. 결국 예수의 제자도는 자신이 지닌 것들을 던져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Give)'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주기 위해 온 사람 예수, 자신의 모든 것, 온 몸과 살과 피를 던져 생명을 살린 사람 예수.......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단호하게 같은 인생을 살도록 요청한다. 떡의 인생, 떡을 던지는 인생, 가난한 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그런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620-38절에는 어떻게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는 것의 미학'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첫째, 그 대상을 제한하지 말라. 우리에게 떡을 받아야할 가난한 자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미워하며 모욕하며 핍박하고 더러는 우리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원수들일 수도 있다. 그들을 향해 선대하고 사랑을 베풀며 축복하고 대접하라는 것이다. 기가 막힌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떡을 주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요 죄인들도 그리하는데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느냐고 반문까지 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의 자비하심 같이 우리도 그렇게 자비하라는 요청이다.

둘째, 주되 돌려받을 생각을 말고 그냥 주라. 아울러 보상과 칭찬을 받을 생각조차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사람에게 칭찬 받을 생각을 아예 버리라는 말이다. 그리해야 하늘의 보상과 칭찬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 주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며, 정죄하지 말고, 모든 것을 용서한 후에 주라는 것이다. 그리할 때 참 베품이 이루어진다. 비판과 정죄와 용서치 못하는 마음을 지닌 채 주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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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주되 마음껏 후하게 담아 주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라고 명하고 있다. 줄때 헤아리는 마음으로 인색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헤아리는 그 헤아림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후한 상급을 원한다면 그만큼 후하게 베풀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조금씩 가난해진다. 그리고 복음의 정수와 핵심을 배워가게 된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베품의 미학, 다 주어버림, 철저히 가난해지는 삶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저들은 진정 예수의 제자들이다 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3)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에게는 가능한 일이었기에....... 다 주어버리고 마침내 가난해진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위로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8:29-30)'

주의 제자된 우리들이, 오늘날 영적, 육적 가난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묵상해야할 말씀은 예수가 공생애를 앞두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했던 바로 그 가난의 복음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9)>

가난의 복음은, 가난한 자와 가난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 모두에게 복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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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보와 빈곤>, 헨리 죠지, 무실(1989)

(2) <토지와 경제정의>, 대천덕, 홍성사(2003)

(3)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IVP(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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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4월호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밟고 2002년 5월에 가족이 있는 북버지니아로 왔습니다. 그해 7월부터 시작되는 직장생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을 처음 하게 될 나를 보면서 긴장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제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사함은 조만간 불평으로 바뀌었습니다. 출퇴근이 너무 오래 걸렸고, 일 하는 나의 노력에 비해서 월급은 너무 조금 나왔고, 특히 나의 동료들의 95%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저에게는 가장 큰 부담으로, 불평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부담은 이어 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상시 2세 교포 친구들과 주고 받는 농담을 던졌더라면 크게 상처받을 제 동료를 생각하면서, 저는 말 하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내 뱉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런 부담감은 3개월이 지난 후에는 나의 일상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그 부담감에 잘 적응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부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년 9월에 저희 회사에서 주최하는 4000 명이 넘게 오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애나하임에서 열려서 기대에 찬 마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어떤 남자 직장 동료가 저에게 다가 와서는 제가 그의 직장동료가 아니었다면 저와 사귀자고 물어봤을 것이라며, 제가 어떤 방에서 묵고있는지, 그날 밤에 뭘 하는지 저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그날 저녁에 제 방으로 놀거리를 보내겠노라 하며 노골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저는 눈치가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제 동료는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저는 무서웠고, 두려웠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필요했던건 나의 심정을 들어 줄 수있는 친구였고, 감사하게도 애나하임 부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를 그 날 저녁에 만났습니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나누고 기도 부탁을 하고, 또 위로를 얻을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런 일이 매달 일어나지는 않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나를 위축시키고 나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물어 온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왜 나를 여기로 보내셨습니까’ 입니다. 회의적인 질문도, 반항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해서 내뱉는 나의 솔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저를 왜 이 직장으로 보내셨는지 이유가 명백해 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게 주시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로 하여금 내 이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산 지가 벌써 13년째 되어 갑니다. 저는 한 인종을 또는 한 그룹을 더 선호하거나 혐오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한다면, 이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건, 제가 게이나 레스비언에 대한 편견이 – 심한 편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손수 빚어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든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모든 영혼을 사랑해 줄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리라 확신합니다. 나의 편견을 넘어, 하나님의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동성연애가 막중한 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피조물을 미워하고 편견의 안목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들을 향하신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 명백히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 2년간 격어온 갈등, 부담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체험한 분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에 박히셨습니다. 한 마디의 대꾸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 18). 순종하는 모습을, 죽임에까지도 순종하는 모습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여러분께 조심스레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죽임을 당하면서 까지도 새계명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듯 싶어서 이 모든 것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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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1 02:00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영화 <패션>을 보셨습니까?” 지난 1월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에 있는 풀러 신학교에서 존스톤교수가 나를 만나자 마자 건네온 첫마디였다. <영화와 영성> Reel Spirituality라는 책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존스톤은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는 드물게 영화를 비롯한 현대예술과 기독교를 연구해온 사람이다. 그는 영화가 영적 통찰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영화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또 할리우드가 가까운 관계로 자주 영화계 사람들을 만나고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도 편집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 영화에 대해서 “패션” (열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내게 건넨 큼지막한 포스터를 말아 쥔 채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체 120여분 중 100분이 넘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상세하게 묘사한 것에 대한 찬사가 핵심이었다. “그것 만으로 영화가 될까요?” 그것이 내가 보인 반응이었다.

그 다음 주일 나는 LA 근교의 잘 알려진 대형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거기서도 영화 <패션>에 대한 “광고”를 10여분에 걸쳐서 들었다. 이 교회는 LA 주변의 상당 수 영화관을 빌려 이 영화를 시중 개봉 이전에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행사를 주최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 행사를 한 미국 전역의 교회 중에서도 선봉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목사가 권할 유일한 R등급의 영화일 겁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영화를 강력히 권하면서도 피로 얼룩진 작품임을 거듭 경고했다. 만약 그렇게도 폭력적이고 잔혹한 장면이 내내 계속된다면 정말로 교회가 나서서 성도들에게 권할 만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2월에 들어 수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 맞춘 개봉을 몇 주 앞두고 영화는 이미 많은 관심과 비판을 불러일으키며 뉴스 거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이 영화가 유태인을 비하하고 예수를 죽인 사람들로 묘사한다는 논란이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반유태주의”는 그리 절대적인 관심사가 아니므로 그 논쟁에 뛰어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아쉬웠던 것은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을 놓고 번민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 것과 달리 가야바를 비롯한 제사장들을 철저한 악당으로 그린 점이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교활하고 주도 면밀한 음모자요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악마처럼 묘사되었다. 요한복음이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을 유익으로 생각했다는 점(11:50)을 밝혀 그 역시 고민이 없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시각이다. 아마도 이런 다소 치우친 관점이 “반유태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 한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갔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본래가 개봉 초기부터 뛰어가 보는 것보다 기다려 평을 참고하여 볼 가치를 결정하는 버릇이 있는 터였지만 일부러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 계속되는 평들은 극히 엇갈린 것들이었다.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영화가 엇갈린 평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많은 경우 그렇다. 하지만 특히 종교적인 영화가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경우 거의 그래왔다. 예외가 있다면 50년대의 <왕중왕>이나 <벤허> 정도일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은 오랫동안 한국서 상영되지 못할 정도의 반대에 봉착했었다. 영화 <패션>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극찬과 혹평이 엇갈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전세계의 기독교인과 일부이지만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토론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간의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패션>이라는 주제이다. 멜 깁슨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로 얼룩진 최후의 10여 시간에 그토록 가까이 카메라를 현미경 대듯 들이대지 않았을 것이다. 제작의도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보통 의미의 “오락물”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제작비를 많은 부분을 사재를 들였고 각종 논란과 비난 그리고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작업이었다. 영화산업은 돈이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이 상식이므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는 평가도 일리가 있다. 제작 의도가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고 과정도 상당부분 신앙으로 난관을 극복하며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제를 다루는 방식도 극도로 “사실적”이고자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사실성”을 더하려는 의도에서 인지 언어를 아람어와 라틴어로 했다. 비록 비교적 적은 예산을 들인 영화지만 세트나 의상, 분장도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내용면에서도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같은 영화와 달리 성경에 성실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묘사는 지금까지 그 어떤 묘사보다 자세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은혜”나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반면 너무 “사실적”이고자 애쓴 나머지 지나쳤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예를 들어 채찍질 장면이 9분여 계속되는데 많은 의사들은 그런 식의 고통을 건강한 사람도 3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에 앞서 쇠사슬로 내리치는 등의 가해진 구타까지 더하면 지나침은 도를 넘었다고들 한다. 그 후 처형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가야 했던 점을 감안하면 과장에 대한 비판은 옳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인 능력으로 견디셨다고 단순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패션>의 주제를 벗어난 것이다. 그의 수난은 철저히 인성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으시는 처절한 고난과 죽음을 주제로 보여주고자 한 시도 자체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 작품은 작가의 관점에서 주제를 해석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경우는 그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멀티미디어요 특히 시각에 중점을 둔 영상매체인 영화의 본질이다. 특히 이 영화는 언어조차 자막으로 접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패션>은 고난을 “보여주기” 위해서 극단의 조처를 마다하지 않은 영화이다. 많은 비판가들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극도의 폭력이 한 시간을 훨씬 넘어서 계속되는 끔직한 영화이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시카고 선타임즈) 는 “자기가 본 영화 중 가장 폭력적인 영화”라고 했다. 뉴요커의 평론가 데이빗 덴비는 이 점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최하위 등급인 별 한 개를 주었다. 상식적인 영화 비판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선정성과 폭력성인 점을 감안할 때 아무리 주제상 또는 특별한 의도가 있더라도 이처럼 생생하고 나아가 과장이 심할 정도로 길게 폭력적인 장면에 초점을 둔 것은 비판거리가 될 수 있다. 물론 나 자신은 폭력의 묘사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쉰들러스 리스트>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폭력적이었지만 그것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폭력을 묘사하고 “보여주는가”하는 것이다.


영화 <패션>의 의도는 이미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자세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한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보는 것을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인터넷 등 멀티미디어와 더불어 자라난 세대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는 것 역시 명백한 한계를 가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고속도로 변의 목장의 송아지처럼 큰 눈망울을 굴리며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을 하루 종일 보아도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 있다는 한 비평가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사람들이 폭력의 묘사에 익숙해져 어지간해서는 아무런 감동이나 시각적 충격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극단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은 이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수난의 장면부터 오히려 긴장을 잃기 시작했고 도가 지나친 폭력의 묘사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었다. 더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나는 그렇질 못했다. 평소에 눈물이 인색하지 않은 자신이 미안할 정도였다. 남들처럼 감동하고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을 굳이 변명하자면 바로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오가는 플래쉬 백으로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영화는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피가 마리아의 얼굴에 까지 튀기는 장면으로도 고난의 의미는 살아나질 못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사고나 상상력이 훨씬 월등하여 그것을 살려내며 감동과 “은혜”를 받았을 것으로 믿는다.


일부에서 이 영화가 역시 제작자 멜 깁슨의 카톨릭적 신앙을 반영한다는 지적은 옳다고 보인다. 특히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가 부각되는 여러 장면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어머니를 “여인이여”라고 부른 이유를 아들로서보다 메시야로서 대하신 것으로 해석해온 개신교 신학에서는 생소한 모습이 영화 전체에 상당히 있다. 가장 카톨릭적인 면은 주제인 <패션>에 대한 접근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는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하신 것이다.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 신학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한 비참하고 참혹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카톨릭에 강하다. 중세의 성화들 중 <피에타>라고 불리는 그림이 있다. 거기에는 대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측은히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한 구석에 등장한다. 마치 너무도 참혹하게 죽은 성자의 모습이 안쓰러워 인류의 죄를 사하신 듯한 인상을 풍긴다.

멜 깁슨이 수난과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남미나 필리핀 등지에서 간혹 수난절 행사에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재현행사를 포함해 각종의 고행과 고난이 강조되는 이면에는 이런 전통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신학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카톨릭의 저력은 부러웠다. 그것은 물론 멜 깁슨이라는 한 사람의 비전과 노력의 결실일 수 있다. 하지만 1920년대 영화와 정면 충돌해서 싸웠던 카톨릭은 바티칸 공의회 II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카톨릭 안에서도 반대와 이견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한 배경이 이 영화의 출현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대중문화가 일상 환경이 된 오늘날 개신교 역시 대중문화와 특히 영화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바로 보고 비판하며 나아가 변혁하려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이런 영화가 주류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고 배급되었을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인해 앞으로도 좋은 “종교영화”가 더 많이 제작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끝으로 이 영화를 과연 볼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앞서 말한 지나친 폭력적 장면으로 인해서 이 영화는 성인등급인 R을 받았다. 하지만 로저 에버트의 말과 같이 “종교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17세 미만 절대 불가인 NC17을 주었어야만 했다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따라서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어린아이들을 이 영화에 동반하는 것은 전혀 권할만한 일이 아니다. 다른 것은 접어 두더라도 좋은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교회에서 모든 교인을 불러 놓고 상영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지금 한국서 일부 교회가 불법 DVD를 상영한다고 하는데 이는 제작권 존중은 제쳐놓고라도 과연 상식적으로 타당한 일인지를 물어야 할 일이다.


<패션>외에도 모든 가족이 보아서 좋을 영화는 많다. 특히 신앙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들 가운데 많다. 예를 들어 1982년 휴 허드슨이 만든 에릭 리틀이라는 올림픽 달리기 선수의 이야기인 <불의 전차> 같은 것이 그렇다. 이 영화는 좁은 의미의 종교영화는 아니지만 정말 감동적이다. 부디 “종교영화”라는 좁은 장르에만 집착하여 “은혜”를 받으러 영화를 보러 가지 않기를 바래본다. 사실 “은혜”는 눈물만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진정한 “은혜”는 도전을 받아 삶의 변화가 일어날 때 강하게 임한다. 그리스도를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아니 조금이나마 그렇게 될 때 진정하게 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눈물보다 훨씬 진하다. 그것은 스크린을 피 빛으로 물들이는 것보다 훨씬 진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을 씻어 새롭게 변화시킨 진정한 은혜의 샘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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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4월

최 근에 탐 크라우터의 새로 나온 책 “예배자가 알아야 할 60가지 메세지”를 보면서 중요한 원리들이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몇 자를 적어 본다. 예배와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중보기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나 실제로 그 중요성을 알면서도 예배와 찬양팀에게 늘 부족한 것은 이 중보기도이다. 지난 몇 년간 코스타 찬양팀을 섬겨 오면서도 사실 가장 큰 부담감은 중보기도에 관한 문제이다. 어떨 때는 예배와 찬양을 인도하는 우리조차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인도를 할 때가 많은 것 같았던 것을 기억한다. 사실 찬양인도를 하는 팀은 중보기도를 위해 모였다기 보다는 음악적인 사역을 위해 모인 것이 오히려 더 가깝다. 그러기 때문에 중보기도는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지 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이 중보기도에 오랫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은사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은사차원이 아니라 날마다 꾸준하게 하므로 하나님앞에서 자라가게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중보기도가 은사라고 말하는 것은 찬양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있듯이 중보기도에도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서 미안하지만 오랫동안 나에게 중보기도는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예수전도단라는 선교단체에서 섬길 때에도 중보기도시간만 되면 나는 졸음의 영과 싸워야만 했다. 찬양을 인도하라고 하면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었지만, 중보기도를 인도하는 날이면, 어떻게든 빠른 시간 안에 해 치워야 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 중보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에 있는 동안 잠시 미국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한 교회의 영어권목사님과 교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마침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교회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내 마음속에 영적인 부담감이 일어나면서 내가 만나는 존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기도방을 찾아서 기도하려고 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찾아서 들어간 기도방의 이름은 성경에서 모세를 도와 기도했던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론과 훌 방이 있었다. 훌 방에 들어가서 이마에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열심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동안 몇 시간을 기도한 것 같았는데, 눈을 떠 보니 단지 1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목사님과의 약속시간이 되어서 올라가서 전화를 기다리는데 기도하는 동안 음성메세지가 들어와 있었다. 음성메세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약속시간에 맞춰서 오다가 한강대교에서 불법 유턴한 택시와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차만 부서지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라고. 사고가 난 그 시간은 내가 훌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던 시간과 일치했다. 나는 그 시간에 기도했다고 했던 이야기를 목사님과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내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시기 원했던 것이었다. 그 후에 내가 인도하던 모임에는 중보기도 팀이 생겨났다. 사실 이전에 간사들이 중보기도를 해 왔었는데 따로 모임을 위한 중보기도 팀이 세워진 것이다. 그들은 찬양팀이지만 악기나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모임시간 전부터 중보기도를 하면서 준비한다. 그 중보기도는 예배 안에서도 일어난다. 예배를 드리는 각 처소에서 그들은 중보기도의 사역을 한다. 그들의 찬양은 중보기도의 찬양이다. 우리의 모임은 이 중보기도팀이 생긴 이후로 모임 자체가 변화가 되었다. 단순히 찬양을 드리는 모임에서 찬양과 중보기도가 합하여 이루어진 온전한 예배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찬양팀 전에는 단순하게 모여서 기도를 하는 정도였지만, 중보기도팀이 같이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찬양팀이 가지는 고질병같은 기질들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우리 팀안에는 놀라운 간증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 찬양인도자는 먼저 하나님앞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단 1분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회중을 위하여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원수인 사단은 이 시간을 가장 싫어한다. 작년 여름의 시카고 코스타의 중보기도팀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났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전쟁에는 찬양과 경배, 그리고 중보기도,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반드시 함께 해야 승리를 할 수 있다.

말을 맺도록 하겠다. “기도를 통해 예배를 섬기라.” 탐 크라우터가 강조했던 것처럼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기도가 쉽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 의미를 가지지 않는 중보는 또 다른 무거운 짐에 불과할 것이다. 허나, 진정한 예배와 찬양을 드리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는 부족한다. 엎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나를 위해서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중보의 마음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예배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함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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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최근에 멜 깁슨이 감독한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가 개봉되어, 여러 논란이 있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고난의 무게에 관한 강렬한 영상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이 영화로 인하여 믿는 자들의 신앙이 새로와지고 믿지 않는 자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있다는 소식은 금년의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특별한 의미를 더하여 주고 있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팔십 년 전 유럽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는데, 그 당시에는 영화가 아닌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들이 그 매개체가 되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마태수난곡’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하의 모든 음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 “합창 음악의 최고봉”, 더 나아가서는 “인류 음악 예술의 최고 걸작” 등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건만, 당시에는 난이하고 복잡하게만 받아들여진 탓에 작곡된 무렵에 세 번 정도 연주된 이후로는 근 백 년간이나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지게 된다.  그러던 것을 당대의 작곡가 겸 지휘자였던 멘델스존이 발굴하여, 작곡된지 꼭 백 년이 되는 해에 다시금 연주되어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한 각성과 신앙적인 도전이 이루어짐은 물론, 당시 전 유럽을 휩쓸고 오늘날까지도 맥을 이어 내려오는 ‘바하 르네상스’ (“바하의 음악으로 돌아가자” 는 음악 무브먼트) 의 싹이 틔여지게 된다.1) 바하 음악이 지니는 완벽함과 순수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으로 나타나는 그의 음악의 깊은 정신성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음악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반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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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수난곡은 바하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학교와 교회에서 칸토르(음악감독)로 지냈던 그의 장년기 시절에 만든 작품으로, 마태복음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수난 부분(26, 27장)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작곡된, 연주 시간이 세 시간 반이나 걸리는 대곡이다.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고 백 년 후에는 이미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던 헨델의 “메시아”가 3부로 구성된 전체의 한 부분(제 2부)을 예수님의 수난에 할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바하의 수난곡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2), 3) 당시에는 네 개의 복음서를 바탕으로 한 각각의 수난곡들이 존재하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마가수난곡은 분실되었고 누가수난곡은 후세의 위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까닭에 현재에는 마태수난곡과 이보다 몇 년 앞서 작곡된 요한수난곡만이 연주되고 있다. 음악적인 면을 살펴보면, 독창자들과 두 개의 합창단 및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솔로에서 이중 합창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다양한 음악적 기법들이 동원되어 예수님, 성경 나레이터, 베드로, 빌라도, 군중들 등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 전개와 그에 따른 일련의 사건의 흐름들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개별곡들은 단순한 모음집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미적인 통일체로서 파악되는 전체적인 구조를 가지며, 이 안에는 회화적인 특성과 상징적인 표현들이 풍부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인 묘사들, 정열과 냉정함, 드라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 등 다소 상반된 성격의 측면들이 조화 속의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 자체만으로도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이 모든 기법들이라 할지라도, 작곡자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승화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메세지를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같은 감동과 도전으로 전달하기 원하는 작곡자의 의도를 놓치는 경우에는 이 음악 작품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와 기능에 대한 온전한 자리매김을 이루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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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하의 마태수난곡이 단지 음악적으로만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작곡자 자신의 신앙이 음악을 통하여 표현되고 승화된 것이었다는 점에 관하여, 그의 부인 안나 막달레나 바하는 남편이 작고한 얼마 후에 그가 마태수난곡을 작곡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느날 그의 방으로 불쑥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마태수난곡의 알토 독창 “아, 골고다”를 작곡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평안하고 안색도 좋았던 그의 얼굴이 완전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어두워진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그의 방문 옆 계단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곡을 쓰면서 비통해하는 모습을 내가 보았다는 사실을 끝내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만이 볼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이 곡을 쓰고 있었을 때, 그는 간절하게 구원받기를 원하는 영혼들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숭고하심과 그 비밀들에 관하여 깊이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후 한 수난절에 토마스 교회에서 마침내 연주된 마태수난곡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으로 벅차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곡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너무 난해하고 상당히 많은 연습을 하지 않으면 연주하기가 어려운 곡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마 언젠가는 그 음악을 천국에서 다시 들을 수 있겠지요...  (안나 막달레나 바흐 저, “내 남편 바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으며 수많은 연주자들과 음악학자들이 자신의 평생을 바칠 만한 “순수 서양 음악의 시작이요 완성”이라고 여기고 있는 바하.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이 생각한 음악이란, 루터 신학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explicatio textus (interpreting texture)” 였으며, “praedicatio sonora (resounding proclamation)” 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서의 음악 철학이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그분을 계시하는 ‘예배의 행위’요, 그러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신 또 하나의 ‘언어’와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일찌기 바하 음악에 깊이 심취하였던 슈바이처 박사(Albert Schweitzer)는 이러한 바하의 음악의 본질적인 면모를 일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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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예배의 행위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 심지어는 세속적인 것들마저도 그에게는 신앙적인 표현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로 그의 음악은 가장 깊은 기도와도 같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그 무엇이 되고 있다

라고 평한 바 있다.  학교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때로는 학생들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던 바하는,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늘 깊이 묵상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묵상하고 연구한 점들은 본문 옆에 스스로 주석으로 달아놓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소장했던 성경책의 역대하 5장 부분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 봉헌 제사를 드렸을 때 찬양대와 기악대가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시작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과 같이 임하였다는 대목이 나오는 13절 옆에다 바하는 자필로 다음과 같은 주석을 적어놓았다고 한다. 

경건한 음악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신다!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작곡가로서의 바하의 일생을 지배한 그의 삶의 동기요 소명이자 간증을 가장 적절한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작곡 활동의 첫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첫 칸타타의 제목이 “하나님은 나의 왕”4) 이었으며, 숨을 거두기 바로 며칠 전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르간 코랄전주곡의 제목이 “주의 보좌 앞으로 이제 나아갑니다” 였다는 점은 이러한 측면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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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한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백 여 개나 되는 칸타타와 수난곡 등 직접적인 찬양 가사가 달려있는 합창 음악들이나, 성경 말씀을 멜로디로 표현한 수백 개의 오르간 곡들은 우선 그 직접적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가 말한 “세속적인 것에 묻어있는 성스러움”이라는 측면은,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쾨텐 시절의 기악곡들 – 무반주 첼로곡, 평균율 피아노곡, 각종 기악 협주곡들 등 – 으로부터 ‘커피 칸타타’, 결혼 음악 등과 같은 세속 주제에 의한 곡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곡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을 그 문맥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입증은 아마도 직접 들어보는 것으로써 가능할 것이다.5)  몇 년 전에는 한 연주가가 그러한 고백을 했던 것이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현존하는 가장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의 한 명인 머레이 퍼라이아(Murray Perahia)는, 연주자의 길을 거의 포기할 뻔한 위기를 넘긴 직후 “골드베르크 변주곡”6) 을 녹음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 변주곡들은 각각 예수님의 다양한 사역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25번 변주곡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연상시킨다.” 

한편, 당대 최고의 오르간 연주가이자 바하 전문가이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바하의 음악에는 인간 정신의 깊이가 담겨있고 영성이 있으며 내적 평화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음악들에는 무의식 중에라도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동안 원주민들의 정신과 영혼을 가꾸는 데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교회의 문을 열어놓고 바하의 오르간 음악들을 연주해 들려주었다고 전해진다.7)  그리고, 그런 노력은 슈바이처 자신의 사랑 및 섬김의 삶과 더하여져 영혼들을 일깨우고 변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바하의 음악은 조금만 귀기울여 들으면 그 안에 주님의 흔적이 직간접으로 가득히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 안에는 참다운 의미에서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음을 우리는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바하의 음악에 보편적으로 영성에 관련된 측면이 묻어있다는 점은, 마태수난곡이 지닌 면모가 그의 음악들 중 결코 이 한 곡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곡들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주님의 흔적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곳 그 정점에 마태수난곡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곡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가장 훌륭한 찬사이기도 한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마태수난곡의 개별 곡들을 일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제 1곡은 전 곡을 여는 도입 합창으로, 두 개의 합창단이 주고받으며 엮어내는 장엄함과 엄숙함은 주님의 고난의 메세지를 파도와 같은 감동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의 마음가짐은 주님께서 고난당하셨던 그 현장에 찾아온 듯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준비된다. 음악적으로도 완벽한 대위법적 어법은, 이 곡을 능가하는 대위법적 합창곡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도무지 갖지 못하게 할 정도로 합창 음악의 극치를 들려주고 있다.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표현법은 전 곡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길게 늘여서 연주하는 현악 반주로 예수님을 둘러싼 빛을 표현한다든가,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대목에서 플룻이 스타카토로 떨어지는 음을 연주하므로써 예수님의 발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묘사하고 있는 점, 그리고 예수님이 감람산에 오르시는 모습을 베이스가 상승하는 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예수님이 잡히신 장면을 묘사하는 제 33곡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여자들을 묘사하는 알토와 소프라노의 이중창이 “나의 예수님이 이제 잡히셨네” 하면서 느리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동안, 군중을 나타내는 합창은 격정적이고 빠른 멜로디로 “놓아줘! 잠깐, 묶으면 안돼!” 하며 다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 곡 안에서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와 템포의 멜로디들이 절묘하게 조화되는 이런 모습들은 마치 여러 영상이 시각적으로 오버랩되는 듯한 느낌을 연상시켜 주므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다.

  제 47번곡(버전에 따라서는 39곡)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직후에 부르는, 아마도 전곡에서 가장 유명한 알토 아리아인데, 바이올린의 애를 끊는 듯한 독주를 타고 베드로의 애절한 심경이 노래된다.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울고 있나이다. 마음도 눈도 아프게 울고 있는 나를 보소서...  때로는 나 또한 베드로와 같은 입장에서 이렇게 주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했었음을 돌이켜 생각할 때, 이 노래는 내 마음 안에 밀려들어 공명하는 ‘나의 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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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숨가쁘게 진행되는 재판 과정,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애처로운 모습, 격앙된 군중의 반응,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 아프게 바라보는 여인들의 애닲은 마음들, 돌아가시고 난 후 지진이 일어나며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 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이 한 편의 드라마로서 펼쳐지고 난 후에, 맨 마지막으로 찬송가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에 수록되기도 한 종결 합창8)으로 마무리되면서 주님의 수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같은 작품이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유익은 무엇이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주신 소명에 충실하기 원하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는, 우리에게 문화 유산이라는 형태로 이미 주어진 이러한 삶의 자원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들을 더욱 주님으로 풍성한 곳이 되도록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 문화 유산’들의 유익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경배하는 수고를 그치지 않았던 한 신앙의 선배를 통하여, 오늘 우리가 주님을 묵상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일에 또 하나의 본보기와 길잡이를 삼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 삶을 그분의 온전한 ‘작품’이 되도록 가꾸어 가야할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러한 작품들이 뜻밖에도 우리에게 지속적인 격려와 도전을 주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조명한 한 영화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깊은 묵상을 도와주었듯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낸 사람” 이라고 혹자는 일컫기도 하는 바하의 음악들과 가까이 하는 일 또한 보다 다른 각도에서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일에 도움과 동기 부여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본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어느 때보다 그분의 고난의 메세지에 가까이 다가서며, 주님 서신 그곳에 동참하라 부르시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내 안에 깊이 새겨지는 이번 사순절과 고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각각 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입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4:1-2)



1)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바하 음악의 순수음악적인 측면과 기술적인 측면들만이 남고, 정작 그의 삶의 철학이요 근본적인 창작의 동기가 되었던 신앙적인 측면이 도외시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2) 같은 해(1685년)에 독일의 이웃 동네에서 태어난 헨델과 바하는 동시대를 산 위대한 음악인들이었지만, 헨델이 영국 왕실의 지원 아래 부귀와 전유럽에 걸친 명성을 누렸던 것과 달리, 바하는 때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그의 명성 또한 주로 독일 국내에 국한된 것이었다. 더우기, 바하의 음악은 그의 사후에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상당 부분 잊혀져 오고 있었다.

3) 헨델의 “메시아”가 이전에 나온 “Jesus of Nazareth” 등과 같은 주님의 일대기 영화와 같은 방식이라면 바하의 수난곡들은 멜 깁슨의 “The Passion”과 비슷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코 신동이 아니었던 그의 작곡가로서의 경력은 열 살 전에 이미 교향곡을 작곡한 모짜르트와는 달리 2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주어진 시간 사용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응답이라고 여겼던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기고 갔다. 그에게는 작품 번호가 매겨져 있는 작품들이 1080 가지가 있으며, 세 시간 반이 걸리는 마태수난곡도 그 중 한 번호(BWV 244)를 부여받고 있다.

5) 바하의 음악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평화가 어떤 것인지 우선적으로 느껴보기 원하는 분은 (Karl Richter 등이 지휘한) 칸타타 140번 “시온은 파숫꾼의 노랫소리를 듣는도다”, 147번 “예수, 나의 기쁨되시네” 나 (Helmut Walcha 등이 연주한) 오르간 코랄 전주곡 BWV 639, BWV 731 등을 들어보기를 권장한다.  가사가 없는 일반 기악곡들 또한 얼마나 정신적 순수함과 영적 경건함을 이끌어내어줄 수 있는지 경험해보기 원하는 분께는 (S. Richter 등이 연주한) 평균율 피아노곡집이나 (Fournier, Maisky 등이 연주한) 무반주 첼로 조곡을 추천한다.  바하의 음악이 어떠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는지, 그의 음악이 어떠한 평화를 가져다 주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느껴보지 않고서는 필설로는 설명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6) 주제곡인 아리아(aria)에 대한 30 가지의 다양한 변주가 덧붙여진 바하의 유일한 변주곡(BWV 988)으로, 그 완벽함과 즉흥성의 조화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물론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 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끔 만드는 그 어떤 매력이 있다.  여기의 주제곡은 바하의 음악들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다른 소품들과 더불어 “안나 막달레나 바하를 위한 곡집” 에도 삽입되어 있다.

7) 슈바이처 박사가 영혼을 매만지는 사랑을 담아 연주한 바하의 오르간 곡 연주들은, 그가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던 만큼 그 녹음이 현재에도 남아서 일부 (음반 석 장의 분량으로) 전해지고 있다 (1930 년대 후반; EMI Record).  위에서 추천한 BWV 731 (“사랑하는 예수님,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껏 묻어난 그의 바하 연주를 대표할 만한 곡이다.   

8) 원래 해슬러(Hassler)가 작곡한 이 곡은 바하가 특별히 애착하여 요한수난곡에서 도입 합창으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마태수난곡에서도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

현재 시중에는 마태수난곡 연주를 수록한 좋은 음반이 많이 나와 있다. 크게 정통적인 (authentic) 연주와 원전 악기 (periodic instrument)를 사용한 연주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태수난곡 연주의 모범적인 전형을 세운 칼 리히터 (Karl Richter)의 연주 (Archiv; 1958)는 전자의,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애절하고 감미로운 음악으로 승화시킨 가디너의 연주 (Archiv; 1988)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연주로 호평받는 것으로는, 아르농쿠르 (Harnoncourt)의 신작 (Teldec; 2001), 헤레베헤 (Herreweghe)의 신작 (Harmonia Mundi; 1999), 그리고 일본인 스즈키 (Suzuki)의 연주 (Bis; 2000) 등이 통상적인 명연주들로 꼽히고 있다. 경제성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처음에는 주요 곡들로만 구성된 하이라이트 음반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전곡 감상에 도전하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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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1 02:00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1. 자발적 고난: 예수님의 고난만을 강조하다보면, 외부에 의한 타율적인 고난으로 비쳐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영화를 접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끝없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자발적인 고난의 관점이 대단히 잘 그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택해서 가시는 고난의 길...

2. 영적인 고난: 고난을 시각화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단점은, 지나치게 육체적인 고난에만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죄로 인해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가는 영적인 고난의 의미도 나름대로 잘 부각되어 있는 듯 싶었습니다. 또한 자발적인 고난의 동참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피하고픈 인간적인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면서 오는 고난 또한 잘 표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3. 건강한(?) 사탄: 가장 우려한 부분은 사탄의 역할이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저 그렇게 교회를 통해 들어오던 사탄의 역할,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는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탄의 모습으로 그려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타난 사탄의 역할은 초지일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막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고, 또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패배에 고뇌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탄... 그 건강한(?) 사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 ^

(Seattle에서 C형제)


Passion of the Christ 가 원 제목인데 여기서의 Passison 이란 '열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수난'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한 많은 유산들이 있지만 흔히 잘 알려진 것으로는 음악에서의 수난곡을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의 하인리히 쉬츠의 마태수난곡을 위시로 해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이 특히 유명하죠. 물론 핸델의 메시아 2부의 제목도 수난과 죽음이죠. 따라서 이 음악들은 대개가 아주 슬프고 애절합니다. 아마 이 영화의 제목이 Passion으로 정해진 것도 이런 서양의 전통과 무관치 않을리라 생각합니다.

신문지상에서의 설명을 보면 아주 엉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대로 만들었다는 말도 그렇고 모니카 벨루치가 연기한 역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써 놓은 것들도 그렇습니다. 후자를 먼저 언급하면 성경상에는 많은 마리아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에서의 마리아(예수께 향유를 부은 바로 그 여인), 일곱 귀신 들렸다가 풀려난 마리아(눅 11:2),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등등..... 이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일곱 귀신들렸다가 풀려난 그 마리아 입니다. 물론 누가,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돌아가실때도 있었던 것 같고, 또 무덤에 간 여인들 중에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데 영화에서의 모니카 벨루치는 분명 간음하다가 붙잡혀 예수님 앞에 왔던 여인으로 나옵니다, 이 여인은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요 8:1-10) 그냥 간음한 여인일 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간음한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를 일치시키는 인식은 꽤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멜깁슨도 그런 인식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임종에 함께 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간음한 여인을 동일한 배우로 연기하게 한 모양인데 성경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자연히 이야기가 성경과의 일치로 옮겨졌는데 대개 성경에 근거하긴 했지만 중요한 부분들에서 성경과는 무관한 내용들이 나타났습니다. 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후에 뱀의 머리는 부수는 모습은 매우 상징적인 모습이기에 성경에는 없더라도 꽤 좋은 장면인 것 같습니다. 빌라도의 부인이 피를 닦을 수건을 주는 것도 상상할 수 있고요. 그러나 헤롯에게 넘겨진 후 다시 빌라도 앞에 올때 헤롯은 분명 빛나는 옷을 입혔다고 되어있지만(눅 23:11) 영화에서는 복장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건 뭐 작은 부분이지요.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길에 한 여인이 수건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이 얼굴을 닦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건 전혀 성경에 나오지 않는 허구입니다. 다만 이 장면이 삽입된 이유는 충분히 추측 가능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수건을 드렸고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대로 찍혔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전설에 의거하여 베로니카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축일도 만든 모양이지만 성경상의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후 고통속에서 갈증을 호소하시는 장면에서 로마 군병이 해융에 포도주를 적셔서 창에 끼워 예수님의 입에 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상에는 해융을 댄 주체가 누군지 모를 뿐 아니라 창이 아니라 우슬초에 매어 댑니다(요 19:29)


뭐 좀 더 있겠지만 제가 지적할 수 있는 내용은 이 정도입니다. 상당히 성경에 근거해 만들었지만 완벽하다는 말은 할 수 없지요. 이건 제 느낌이지만 성경과 더불어 가톨릭의 전승이 아마도 함께 주요한 원전이 된 인상을 받습니다. 베로니카의 이야기도 그렇고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이 극명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예수의 고난 못지 않은 고통을 겪는 것으로 영화에서는 묘사되고 있는데 성경에 근거하기 보다는 가톨릭에서 성모를 존숭하는 상황이 투영된 인상이 짙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후 그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떠오르게 합니다. 주지하듯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임명하에 가톨릭 성화 조각을 그리는 데 평생을 보낸 인물이죠. 그리고 시신의 발아래서 마리아가 불렀다는 노래는 가톨릭 작곡가들에 의해서 '스타바트 마테르' 라는 곡명으로 아주 많이 작곡 되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눈물의 성모'가 되죠. 교황청 공식 인정 성가입니다.

멜깁슨이 아주 보수적인 가톨릭 신도임을 감안한다면 영화의 내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Ann Arbor의 H형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 자신이 매우 주관적이고 논리에 약한 typical intuitive thinker 인 관계로 보다 비판적, 분석적인(^^) 평가를 원하신다면, 그것은 다른 분들께 미루고 싶구요. 간략하게 몇 가지만 나눌까요?

영화화 되었다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도, 영화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간 말씀과 일상 속에서 가져온 ‘강렬하고 가슴 아프긴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이었던’ 주님의 고통에 대한 느낌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신체적 고통을 드러내는 데에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 하여서 관객의 눈물을 짜낸다는 비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성경말씀에 바탕하여 (난잡하게 말씀을 우롱하듯 이용해온 다른 영화들과 달리)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씀이 다시 한번 대중에게 선포되어지는 효과가 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받으시는 ‘피가 낭자한’ 장면마다 성경 말씀이 함께 시각화 되었고, 대부분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마음을 읽어내려가는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속 폭력성에 대해…
또한, 영화 속 장면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too much bloody”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해서는 우리 죄가 바로 그만큼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사악한 것이라고 대답해주고 싶습니다. 우리 죄성이 그만큼 끈질기고 추악하기 때문에 주님의 피흘리심도 끝까지 한방울도 남김없이 쏟으셔야만 했던 것 아닌가요? 그런점에서 눈물을 짜내기 위해 피흘림이 과장되었다거나 너무 폭력적이었다는 비판은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자세로 관람하셨는지…

영화를 관람하기 전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극장에 갔는지도 영화의 소감에 상당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한 자매가 있어요. 새벽기도할 때, 지난 2년간 무릎 꿇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영화를 본 다음날로 부터 매일매일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참회하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삼일 동안 이 자매의 전화와 이메일에 채근되어 등떠밀리다시피 극장에 갔습니다. ‘뭔가가 진짜 있나보다!’ 기대가 은근히 되었습니다. 그리고 극장에 가기 전, 공관복음의 말씀을 찬찬히 복습하고 갔습니다. 아예 은혜 받으려고 작정하고 갔는데 왠만한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다해도 크게 영향을 받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객관적 평가가 힘드네요. ^^ 일각에서는 영화에 대해 격찬을 너무 많이 듣고 기대를 하고 가는 바람에 오히려 기대에 못미쳤다는 이야기들도 하더군요.

한 가지 덧 붙인다면…
‘주님의 고난이 바로 내 죄때문’이라는 것을 잘 연결시키지 못할 것 같다는 지적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네요. 곰곰 생각해봤는데, 제 짧은 생각으로는 그 부분은 영화 제작자가 나서서 뭐라 말 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마치 저희 사회학과의 모든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이 성경을 적어도 한번 이상 정독했지만, 이들 중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무엇을 본들 무엇을 들은들 믿음과 합하여지지 않았는데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저는 그냥 영화 끝나고 앉은 자리에서 기도하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저 그 사람의 마음이 ‘저 피가 내 죄를 사했다’고 인정하게 하옵소서.”

끝으로...

아래는 메신저에 연결된 친구들, 학우들, 성경공부 지체들에게 물어서 급하게 모아본 후기입니다.


21살 남. 대학생. NY. “파워풀하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준 점이…영화에 대해선 잘 만들었다 못만들었다 등등.. 뭐라 할말은 없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31살 여. 대학원생.MI. “I wasn't as impressed as the "public". It made me think about Jesus' suffering but don't think it had that much impact other than that. And I thought this as just Mel Gibson's interpretation... and I feel that reading Bible has much more impact on me than seeing the movie.”

36살 남. 선교사. NY. “성령에 감동된 영화다. 타락해가는 미국 영화 산업에서 하나님의 일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고 감동 받도록 기도해주십시오.”

27살. 여. 대학원생. NY. “영화 속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29살. 여. 대학원. NY. “잔인하다고만 생각하면 잔인하지만, 그 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의미라고나 할까..”

30대 후반. 남. 청년회 담당 목사님. NJ. “가장 성경적인 영화다. 예수님의 고난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초신자보다는 나일론 신자가 보면 좋을 것 같다.”

20대 후반. 남. 직장인. NJ. “일부에선 폭력적이라는 말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기우다. 고난 주간에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적극 추천. 저도 고난주간에 다시 한번 볼 생각입니다. 크리스찬 문화가 세상 문화에 일침을 가했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인 내용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되었으면 한다. 성경적으로 돌아가면 가장 확실히 어필한다는 확신을 준 영화였다.”


27살. 남. 대학원생. (비기독교인) NY. “너무 헤비한 영화다. 진정이 잘 안된다. 왜 그렇게 유대인들은 잔혹하게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난 아직 볼 준비가 안된 영화 같다. 괜히 본 것만 같다.”

28살. 남. 대학원. (비기독교인) NY. “정말 사람들의 잔인함 속에서...그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33살. 남. 대학원. NY. "두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죠.하나는 아마도 실제적상황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제작자의 노력 의도로 본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에 상당한 성공을 한 영화라고 생각하구요,,.두번짼 예수님의 그런 사역의 고통이 제작자들의 영화틀속에 고정화되어 또다른 편견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를테면 예수님의 육체를 통한 고통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도 있지만 실제로 낮은 곳에서 더 천한 피조물들이 예수님께 가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모멸감과 학대 그것을 능히 감당하셨다는 면이 오히려 더 클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그러한 정신적 고통이 더 컸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NY에서 K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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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던 행인1 2010/03/19 04:01  Addr Edit/Del Reply

    솔직히 저는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지적하신 베로니카 성인화는 물론이고, 카톨릭에서 중시하는 '성물:성배니 성의니 하는 것들'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너무 '휴머니즘'에 입각한 해석과 '마리아 신격화'로 대표되는 캐톨리시즘의 색이 너무 짙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카톨릭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성모'로 추앙하는 근거가 바로 '마리아가 성모이었던 까닭에 그 아들 예수님이 고난 당할 때 그 모든 과정을 인내하며 바라보아 그 고통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부분이라는 데서 그 위험성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휴머니즘'의 극치거든요. 아시겠다시피 위 영화에서 마리아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 또 마리아를 대하는 주변 인물들의 행동 등에서 '마리아 띄우기'가 얼마나 공공연하게 이뤄졌는지를 확인 하실 수 있을겁니다.

    예수님의 행적 묘사 부분에 있어서도, 예수님이 주변 인물들에 대해 '인간적인' 애정을 드러내시는 것 처럼 묘사되는 부분들도 제법 있는데, 이 역시 굉장히 위험한 묘사이지요. 예수님은 절대로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죄없는 어린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위험성은, 예수님 사역의 초점을 '고난'에 집중시키는 효과를 발생시켰다는데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예언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러 오셨지, 고난을 당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고난은 '예언 성취'의 한 과정이지 목적이 아님에도 이 영화에서는 마치 이 고난이 구원사역의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라도 한 듯, 이 핵심을 교묘히 어긋나게 만들었다는 거죠.

    너무 카톨릭을 비난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는데요........ 맞습니다. 카톨릭이 성경적으로 얼마나 근본부터 잘못 되어 있는지는 이 영화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코스타 2004년 4월

사실 지금까지의 글들은 조금은 이론적인 것에 불과하다. 글에 담긴 내용이 실제로 필자 자신에게 생활 속에 얼마나 적용이 되고 있는지 한 번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따라서 학교에서의 생활을 제외한 출근 전과 퇴근 후에 집에서 하는 생활을 한 번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러운 면이 많이 있지만 회개하는 의미에서 한 번 적어보면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침대에서 졸린 눈을 부비고 일어나서 찬물을 한 컵 가득 들이킨다. 학부 시절 일반화학 선생님께서 해 주신 당신의 경험담이 계기가 되어서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건강 유지법 중의 하나인 것으로서 잠에서 깨고 나서 찬물을 두 세컵 마시면 위장에도 좋고 변비도 걸릴 염려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다. 잠시 기도와 묵상을 하고 성경을 읽고나면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 인사를 나누고 막 백일이 지난 아들의 하루 일을 들으며 가슴 가득히 메어오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 하루를 시작한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한국에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아들 녀석의 냄새와 웃는 얼굴과 막 시작한 옹아리 모습이 그립기만 하다.

얼마 자라지 않은 수염에 비누칠을 하고 몇 달 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일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한다. 비누를 두 세 번 칠하고 물 세기를 약하게 해서 샤워를 하고 나면 조금씩 허기가 밀려온다. 요즘 가뜩이나 운동을 안한 탓에 체중이 많이 불어서 지방간이 있다는 경고를 받고 식사량을 조절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왕성한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체중조절 노력의 일환으로 아침을 토마토 한 개, 사과 한 개, 작은 빵 하나, 지방을 제거한 우유 한 잔 정도로 간단하게(?) 하고 학교로 향한다. 처음 학교에 왔을 때는 차가 없기도 하고 딴에는 도보출근을 실천하며 건강을 유지한다는 생각에 25분 정도 걸어다녔는데 최근에 학교 건물을 옮기고 나서 거리가 좀 더 멀어진 이후로는 많이 나태해진 탓에 35분 정도 되는 거리를 차를 타고 4분만에 출근한다. 출근할 때마다 마음이 괴롭다. 학교로 가기 전에 요즘 조금 추워진 탓에 조금 높게 맞춰놓은 난방기와 백열등이 꺼져 있는지 확인한다.


가끔씩 잊고 학교에 갈 때는 하루 종일 자동조절 온도계의 도움으로 주인 없는 방이 훈훈해지곤 한다. 이렇게 생각과 글과 말과 생활이 달라서야 어디 글 쓰고 가르칠 자격이 있나하는 자책감에 시작하는 하루가 늘 괴롭게 느껴지곤 했는데 요즘은 바쁘다는 핑계로 안위를 삼고 있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서는 게으름을 채찍질하고 있다. 자신이 미국 영화나 텔레비젼에 나오는 배불뚝이 주인공처럼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학교에서 일을 하고 오후 퇴근시간이 되면 체육관으로 향한다. 작심 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 체육관에서 50분 이상 걷기도 하고 윗몸 일으키기도 하고 체조도 하면서 체중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땀이 비오듯 하여 입고 간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버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여전히 차를 몰고 있다. 사실 체육관에 등록을 한 것은 벌써 지난 학기 초인데 본격적으로 걷기운동을 실시한 것은 한국에 갔다가 나름대로 경고를 받고나서 미국으로 돌아온 두 주 전부터이다. 이렇게 게으르니까 생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운 맘에 그저 숨고만 싶어진다. 집으로 돌아와서 젖은 옷들을 모아 며칠 째 쌓여 있는 빨래통의 옷들과 함께 세탁기에 넣고 합성세제인 세탁액을 적정량의 3분의 2 정도를 넣고 세탁기를 돌린다. 목욕할 때 샴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데 빨래를 할 때 천연세제를 구하거나 만드는 것이나 비누를 칠해서 빨래를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합성세제를 사용하곤 한다. 빨래하는 마음 한 켠이 늘 아리고 죄송스럽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현미와 잡곡을 고루 섞은 쌀을 씻고 쌀을 씻은 물을 모아 둔 후 압력솥에 넣고 밥을 한다. 현미밥을 장기적으로 먹으면 여러 질병이 없어진다는 연구보고를 읽은 이후 식단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다. 장모님과 어머니의 배려로 미국에 올 때 가져온 김치와 밑반찬들과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는다. 된장찌개를 끓일 때 넣는 야채들은 대부분 South Side Produce라는 곳에서 거의 도매값으로 산 것들인데 유기농산물은 아니다. 대규모로 지은 농산물들인데 대부분 주변 지역에서 온 것들이지만 오렌지를 비롯한 몇몇 농산물들은 캘리포니아나 멀리 다른 지역에서 온 것들도 있었다. 교통이 발달해서 가능해지긴 했지만 농산물은 가능하면 주변지역의 유기 농산물을 이용해야 사람의 건강을 지키고 땅의 힘을 보다 강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혼자서 먹는 식탁이 재미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빨리 많이 먹으려는 경향이 있어서 늘 위험을 느낀다. 식사를 하면서 가끔씩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는데 식구가 함께 둘러 앉아 오손도손 음식도 나누고 하루를 지낸 이야기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꿈같이 느껴지곤 한다. 언제나 이러한 꿈이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가족들에게 실현될지 자못 기대된다. 물론 다분히 우리 개개인들의 강한 의지와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야하겠지만…

위 글은 필자가 학교를 한국으로 옮기기 전인 지난 해 12월경에 써 놓은 글인데 게을러서 제 때에 투고하지 못하고 상황이 많이 변한 지금에서야 글을 내보내게 되어서 송구스럽다. 한국으로 옮긴 후 필자는 가족과 주말에 상봉하면서 나름대로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생활을 함에 있어서 무늬만 결혼 신세를 면한 것은 물론 빨래도 이제 손수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좀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집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살펴 보았다. 줄이기, 다시 쓰기, 다시 만들어 쓰기, 다시 생각하기 등으로 나누어서 각각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과 함께 실천방안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있어 보완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는 한국적인 상황에 맞는 체크 리스트를 만들어 보면서 지금까지의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종합 체크 리스트는 줄이기, 다시 쓰기, 다시 만들어 쓰기 중에서 실천 가능하고 실제적인 항목을 중심으로 작성하고 실천여부를 묻는 여백은 표의 맨 마지막에 넣는다.


 

 

수질 오염 줄이기

기름류

쓰고 기름은 그냥 흘려 보내지 않고 모아서 비누를 만들거나 분리수거통 (만일 있다면) 넣는다.

음식

찌꺼기

분리 수거

반드시 체로 거른 따로 모아서 분리수거통 (만일 있다면) 넣는다. 

수분제거

분리 수거통이 없을 경우는 짜거나 신문지에 펴서 수분을 제거한 다음 배출한다.

퇴비화

썩을 있는 것은 퇴비화 발효용기를 사용하거나 땅에 파묻어서 퇴비로 만든다.

정화조

일년에 이상 정화조를 점검하고 보수한다.  아파트에 사는 경우 이러한 사실을 확인 또는 요청한다.

쌀뜨물 또는 국수 삶은 이용

쌀을 씻거나 국수를 삶을 나오는 물을 모아서 기름묻은 그릇을 씻거나 화분이나 정원에 뿌린다. 

합성세제사용자제

샴푸를 비롯한 가정용 합성세제의 사용을 가능한 자제한다. 대신 비누나 천연세제 (밀가루, 쌀뜨물, 또는 약한농도의 식초 등)를 이용한다.  

음식 쓰레기 줄이기

반찬 가지 줄이기

계획 식단을 실시하여 식사 때마다 나오는 반찬의 수를 제한한다. 가족의 영양공급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뷔페형 잔치상 차리기

가족에서 잔치를 상에다가 음식을 각각 차리지 않고 뷔페형으로 음식을 차려서 음식낭비를 줄인다. 

냉장고

냉장고에 보관하는 음식의 수를 줄이고 가능한 싱싱한 음식을 먹도록 식단을 짠다.  계절에 나는 음식을 때에 적당히 먹으면 냉장고가 필요없게 된다.

덜어 먹는 음식 문화 가꾸기

음식을 먹을 때 빈 그릇에 덜어먹으므로써 불필요하게 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한다.

기타 쓰레기

플라스틱 일회용 제품

물건을 구매할 플라스틱 용기로 것들이나 일회용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가능한 피한다. 만일 구매해야만 하는 경우 여러 사용하고 가능한 재활용하도록 한다.

자원 절약

수세식 변기

수세식 변기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수조 안에 벽돌 1장을 넣어서 물의 낭비를 막는다.

수도

필요할 때만 틀고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잠근다. 

- 샤워: 샤워할 때는 물의 세기를 중간정도로 한다. 

- 세수 양치: 이를 닦거나 세수를 때는 컵이나 넓은 접시를 이용하여 필요한 만큼의 물만 사용.

- 설겆이: 그릇을 처음 씻을 때는 물을 받아놓고 하며 적당한 양의 물을 틀어서 헹군다.

전기

냉난방 시설

여름: 에어컨의 온도를 너무 춥지 않게 하고 선풍기도 적당한 만큼 사용한다.

겨울: 실내의 온도를 낮게 하고 옷을 입고 생활하도록 한다.

전열기구

사용하지 않는 전열기구 (전기장판, 전기난로, 전기렌지 ) 꺼둔다.

조명기구

집안이나 복도의 조명등을 필요하지 않을 때는 꺼둔다.

냉장고

묵은 음식은 정리하고 적당한 양의 음식을 넣어 두도록 한다. 그리고 계절에 맞는 음식을 먹도록 한다.

가스

가스렌지

음식을 하지 않을 때는 언제나 가스렌지의 밸브를 잠가둔다.

교통수단

걷기와

대중

교통

가까운 거리는 가능한 걸어다니고 자가용 차의 운행은 가능한 자제한다. 일하러 갈 때나 사무 약속이 있을 경우 가능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토양오염방지

유기농업육성

유기농산물 구매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먹거리가 나오는 것을 알아서 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유기 농산물을 구매한다. 유기농을 하고 있는 농가와의 직거래를 통해서 좀더 신뢰성 있는 먹거리를 유통하여 농지의 토양오염을 원천적으로 방지한다.

유해 쓰레기

쓰레기 처리

가정에서 나오는 유해 쓰레기들을 농가나 빈터에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버려서 토양 오염을 시키지 않는다.

다시쓰기

생활용품

가구류 , 주방용품

나무로 만든 제품을 버리거나 다시 사려고 다시 있는 지를 확인한 가능하면 중고제품  판매처에 넘기거나 중고제품판매처에서 구매한다.

다시 만들어 쓰기

생활용품

종이, , 기타

종이, 알루미늄, , 유리, 플라스틱, 등으로 제품을 사용한 버릴 경우 다시 만들어 있도록 분리하여 모은다. 

         
----- 위의 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관계로 각 개인의 특수한 상황에 맞지는 못한다. 따라서 각자 자신에게 맞는 표를 만들어서 실제의 삶에 적용하면 좋겠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필자는 자괴감으로 인해 많이 괴롭다. 왜냐하면 환경보호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돌아본 필자의 삶은 환경보호와는 아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인할 수 밖에 없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시스템이 무한소비를 조장하고 편하고 빠른 문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한 시민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가 이러한 핑계를 대고 있을 만큼 세상은 한가롭게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벌써 미국에서는 먹는 물값이 기름값보다도 비싸게 되었고, 우리의 강은 물놀이는커녕 냄새가 나서 접근하기 어려운 지경이 된지 오래되었고, 공기는 점점 탁해지고 오염되어가고 있다. 일례로 서울하늘은 일년 대부분 스모그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리의 어린 아이들이 기관지 질병을 앓는 빈도가 많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새롭지 않은 사실이 되어가고 있다. 땅이 좁은 한국에서는 쓰레기 처리장이나 기타 우리 생활의 부산물을 처리하는 시설들이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해 온 국민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조금 부유하여서 좋은 공기와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고 자만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의 행태를 바꾸지 않고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앞으로 몇 십년이 지나면 환경문제는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되어 부메랑처럼 온 인류를 향해 돌진해 올 것이기때문이다. 그 때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아직 늦지 않은 이 시기에 가능한 한 편함과 빠름을 추구해가는 개인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소비하도록 삶을 정돈해야 한다. 지금까지 익숙한 생활을 근본적으로 되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가 아직 남아있을 때에…


환경계획 및 정책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필자는 한국에 돌아와 몇 가지의 각오를 하고 있다. 첫째, 집과 일터에서의 생활을 간소하게 한다. 둘째, 가능한 한 개인 차를 갖지 않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출퇴근한다. 셋째, 먹는 음식을 최대한 친환경적인 것을 선택한다. 넷째, 생활 후에 나오는 쓰레기의 양을 최소화 한다. 다섯 째, 사용하는 에너지를 최대한 절약하며 가능하면 재활용한다.

우리는 매 예배 때마다 주기도를 암송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길 바란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곧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끼고 기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이 예배의 형식으로 전락한지 너무도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루터도 이러한 탄식을 하고 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길 바란다면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내야 한다. 필자를 비롯하여 독자들 모두 가족과 함께 환경보호에 대해 함께 얘기하면서 대안을 찾아가면 좋겠다. 가정예배 시간에 그리고 가족회의 시간에 적극적으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를 의제로 채택하여 보다 건강한 가정의 삶을 꾸려갔으면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의 현장에 임하시길 기도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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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연 실생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궁금했는데, 막연했던 것을 깔끔하게 정리한 글이 여기 있었네요. 다는 못하더라도 많은 부분 따라해 보겠습니다!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06년 6월 6일 밤에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났다. 전 세계는 핵폭탄에 의해 가루가 되었고 핵미사일이 태양의 중심을 타격했다. 지구는 완전한 어둠과 추위 속에 빠져버렸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까미유가 잠든 사이에 일어났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세상은 암흑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가 어둠 속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오직 그의 손에 있는 검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괴물들이 지구를 점령했기 때문에 까미유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을 내리치며 거리를 다닐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괴물들을 먼저 공격하는 법을 익혀가면서 그는 자신을 지켜갔다. 어느 날 아침 몇 명의 강도들이 그를 공격해서 난투를 벌였지만, 결국 그는 납치당하여 낯선 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에테르 냄새를 풍기는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삼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태양도 지지 않았으며 다만 까미유가 시력을 잃었을 뿐임을.

그가 싸웠던 괴물들은 그가 차에 치거나 건물에 부딪치지 않도록 도우려는 손길들이었으며

그의 검은 양로원에서 준 지팡이였음을 설명해준다.


위의 내용은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암흑'이라는 짧은 소설을 요약한 것입니다. 짧은 내용 속에 함축된 의미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 까미유는 아마도 늘 핵전쟁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늘 그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어서 언젠가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갖게 했고, 그가 시력을 잃은 밤, 꿈속에서 전쟁을 경험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환상을 실제로 일어난 일로 믿은 그에게 세상은 암흑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 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 근심을 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그에게서 보입니다. 때로 그 걱정, 근심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우리를 덮치고 스스로 만든 그물 속에 갇히게 만듭니다.

자신의 내면의 빛을 지워버린 것을 세상에 빛이 사라졌다고 공포에 떠는 모습.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만나는 괴물의 실체는 자신이 만들어 낸 공포와 죄의 형상일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내면의 등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지, 오해와 편견 때문에 사랑의 손길을 뿌리치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세상의 어둠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그가 휘두르는 검은 자신을 지키기 보다는 상처 입히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더 강한 검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명예의 검, 권력의 검, 물질의 검을 구하여 휘두를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은 점점 더 흐려져만 가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빛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려 우리는 빛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곤 합니다. 내 안에 환한 불이 켜 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불의와 정의로움, 선함과 그릇됨, 진실과 미혹의 분별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식견도 눈과 마음이 밝고 맑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따스하고 밝은 불빛은 다른 사람들과 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근심보다는 희망을, 불안보다는 평강을, 다툼보다는 이해와 화해를, 인내와 온유의 밝은 빛이 넓게 퍼져나가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환한 등불 하나를 켜주는 시대를 꿈꾸어 봅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정결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밝은 햇살 앞에 그대로 드러나듯이, 우리 안의 부정한 것들도 빛의 씻김을 받으면 더욱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투명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듯이, 자신의 안에 빛을 가진 자는 타인의 내부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처음 지음 받은 모습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지으신 분의 성품을 알아갈 수록 그 빛은 선명하고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빛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 그 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고난의 훈련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처음 빛을 바라볼 때 느끼는 통증과 혼란의 과정을 통해서 눈은 서서히 빛에 더 친숙함을 느끼게 되며, 이제는 감출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단단히 자신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에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검이 아니라, 어둠을 물리치는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나와 세상의 어둠을, 불의함을, 거짓됨을 잘라내는 검을 꼭 잡고 이 거칠고 오염된 세상을 걸을 때, 우리에게 더 이상 적은 없고 오직 사랑해야 할 이웃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 내민 손길이 서로에게 등불이 되고 지팡이가 되어주는 세상에서 빛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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