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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의 관심은 한국인이 신앙, 인생, 세계와 사람들을 접근할 때에 어떤 특색이 있느냐는 데 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내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나의 신앙 형태가 한국인이라는 기본 틀 안에서 움직인다는 자 인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그 문화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어떻게 제자리를 잡아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특정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숙제이다.

우 리는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사는 다민족, 또 우리가 찾아가서 섬겨야 할 다민족에게 한민족은 어떤 특징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하게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오염된 민족의 모습들을 정화시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언약의 천국백성의 모습으로 승화시켜 가는지 담담히 정리 해 볼 이유가 있다. 그 과정적 어색함과 초라함까지라도 말이다. 복음은 겉치레로 감싸왔던 선비의 도포자락을 세마포 흰옷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예수가 그 일을 한다. 진짜 백의 민족이 탄생하는 것이다.

씨는 땅을 먹고 자란다

어 릴 적 출옥성도 손 양원 목사님의 옥중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인 재판관이 손 양원 목사님께 ‘어째서 내선일체로 다른 기독교인들과 같이 일본적 기독교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손 양원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일본은 조그만 간장 그릇 같은데, 기독교는 천지 만한 바윗돌이다. 그런데 이 간장 종지 같은 그릇에 바윗돌을 담으려 한다면 어떤 것이 깨어지겠는가? 그래서 일본의 노력은 풍비박산으로 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복음이 씨앗이라면, 민족성과 문화는 그 씨가 먹어야 할 토양이다. 씨는 땅 속에 들어가도록 심겨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씨는 씨고 땅은 땅이다. 그 씨가 토양을 먹으면 생명이 자라난다. 반대로 토양이 씨를 먹을 때에는 토양만 커졌을 뿐이다.

한 국인이 기독교를 수용하고 받아들인지도 구교 200년, 신교 100년의 역사가 지났다. 세계 선교사의 유례 없는 성공사례로 자찬하지만, 너와 남의 집을 가릴 것 없이 곳곳에서 한국 교회의 오염된 문화, 지도자, 교인들이 쏟아낸 오물도 세계에 그득하다. 그리고 그 배설되는 오염에도 한국인 적인 공통점이 있다. 대단한 저력이다.

우 리의 방심을 타고, 한국적 기독교가 부정적인 줄기를 타고 형성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반만년 민족을 괴롭혀왔고 병들게 했던, 독특한 한국적 병폐가 교회 안팎을 둘러싸고 옴짝달싹도 못하게 얽어 매고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소리에 선지자적 권위도, 지혜자적 혜안도 상실하게 되었다. 장독 안을 맴도는 메아리처럼 그런 하릴없는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유기농장 대한민국

그 렇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누가 8장). 하나님의 밭도 유기농업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풍성한 유기농 거름을 자체 생산하는 민족이다.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가 한국인의 문화와 민족성을 거름처럼 먹어야 한다. 토양은 한국인의 토질인데, 피어나는 것은 예수의 꽃이 되어야 하고, 맺히는 것도 예수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 그래야 세계교회와 역사에 누(累)가 되지 않고, 보탬과 유익이 되는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다.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세계역사가 조용한 주목을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민족을 사랑하는 신의 섭리가 있다면, 이보다 더 이상 귀한 대우가 어디 있겠는가?

내 가 존경하는 목사님의 사모님은 자신을 예수 향기로 소개한다. 그 분과 목사님은 성년이 되어서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다. 기독교와는 무관하게 지어졌을 수향이라는 이름을 예수 향기로 전환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이름의 본뜻을 예수가 살려준다. 예수의 마음이 한 민족의 심성을 먹어서 예수의 향기가 나는 인격과 공동체로 민족이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조주의 창조물로서 주어진 우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알아 가는 잣대와 시각을 성경 속의 복음에서 찾아야 한다. 민족혼 속에 이미 들어와 계시는 예수의 복음 이야기를 캐내어야 한다. 수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예수 향기는 전달자의 인격과 삶을 통해 전달된다. 그래서 성경기록도 전달자가 기계적으로 책을 적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인생에 일어난 사건들과 그런 와중에 일어난 깨달음과 계시들이다. 그래서 기록자들을 알면 성경이 보이고, 성경이 보이면 기록자의 세상이 느껴진다.

성경도 유기농을 한다

성 경이 다른 경전들과 다른 특징은 다른 종교에서 내세우듯이 전면에 내세워서 미화하는 인물들이 없다. 성경은 그들을 미화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지극히 사적이라 할 수 있는 치부와 오점들을 가릴 것 없이 뚜렷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된다. 일반 세속의 기준으로 따지면 혹독한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다. 안면이 뜨거워서 감히 다루기가 힘든 주제들을 성경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놀라운 기독교의 진리는 그런 흠을 가진 인물들을 가지고 역사와 나라를 펼쳐나가는 신의 고집이다.

십 자가가 십자가인 것은 예수의 몸이라는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는 사형장의 형틀에 불과할 뿐이다. 혐오스러운 부패와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 일그러진 고통의 현장이다. 예수는 여기에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씨앗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벽의 중압감에서 개인 뿐 아니라 민족정기를 해방시킨다. 낮은 땅에 처하는 자는 그만큼 높고 큰 하늘을 머리 위에 지고 살아 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개인이 모자란 점이 있듯이 민족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척 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완성은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복음은 개인뿐 아니라, 무리도 민족도 인류도 온전한 회복을 하여주시는 명약이다. 그게 신약과 구약이 아니겠는가!

이 제 한민족은 십자가의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로마병정도, 철새처럼 바뀌지만 있는 동안에는 한껏 폼을 잡는 권력자들, 비아냥거리는 구경꾼의 무리, 이들을 부추기며 군중 뒤에 숨어있는 종교 기득권자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무기력한 제자들, 통곡하는 여자들, 그리고 예수 흉내를 내어서 같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인물들, 그리고 해골의 곳이라는 골고다라는 장소까지 이제 한편의 대 드라마가 펼쳐질 준비가 다 갖추어 졌다. 각본도 완성되어 있고, 연출과 감독까지 준비가 되었다. 이제 그 십자가에 예수 마냥 자신의 생애를 던져 한 알의 밀 알이 되어질 주인공의 자리만 비어있다. 한 민족이 그 주인공이 될 자격을 성경은 이렇게 알려준다:

하 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1: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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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는 한국교회

“한국교회가 지역사회나 이웃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 있냐? 오직 자신들의 배만을 채우는 것이 기독교인들이다.”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한국의 기독교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권위적인 집단이 교회다”
“한국의 기독교는 역사의식이라고는 손끝만큼도 없다.”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 게시판에서 부분 발췌한 글들>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제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의 사회적 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기독교인(여기서는 개신교인 만을 의미)들이 한국사회로부터 엄청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어느 정도 이미 예상했던 현실이었지만, 막상 한국 땅에서 직접 경험해 보는 한국사회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왕따라는 단어처럼 한국교회의 현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왕따’란 알다시피 ‘왕 따돌림’의 준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왕 따돌림, 곧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의 ‘이지메’로 시작된 청소년들 사이의 ‘왕따’처럼, 힘센 한국사회가 힘없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따돌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기에는 힘이 세져버린,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 단체가 되었습니다. 다르게 보자면 한국사회내의 불의와 잘못된 흐름을 향해 왕따를 선포하며(?) 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개혁할 수 있는, 그런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왕따 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위치에 있음에도, 한국사회는 왕따 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체념한 듯한 눈길로 한국교회를 향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 있는 듯 합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제가 볼 때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왕따 당할 행동을 너무나 골라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매체를 통해 접하는 교회 관련 기사나 방송을 보면 한국사회의 이러한 시각을 단면적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좀 잊혀지겠다 싶으면 여지없이 교회나 기독교 선교단체?학원?재단과 관련된 도덕적, 정치적 문제들이 언론에 등장합니다. 목사, 장로, 집사, 신학생이라는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개인적인 치부 또한 심심지 않게 등장하여 비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의 낯짝을 붉게 만듭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언론매체들이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 언론들처럼 마냥 친 기독교적인 언어로, 은혜롭고 덕스럽게만 한국교회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나 방송이 나간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의견란을 찾아가면 한국사회 전반에 골고루 퍼져 있는 왕따 문화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올려져 있는 글들을 보면 거의 대다수가 기독교를 성토하는 시민들의 체념 섞인 글들인데, 문제는 기사화 된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글들을 자주 엿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마치 네티즌 개개인이 지난 수년간 한국 기독교로 인해 많은 상처와 실망을 경험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단군상 철폐 논란이나 교회세습문제 때도, 작년 초 월드컵을 앞두고 한 보수적인 기독교 연합회에서 ‘붉은 악마’를 ‘하얀 천사’나 ‘붉은 호랑이’로 바꾸자며 개명운동을 벌이는 중에도, 올 1월과 3월 두 여중생의 죽음을 추도하는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집회를 연달아 가지는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인터넷 상의 각종 게시판에서 엄청난 무시와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글들을 읽다보면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며 내가 믿고 따르는 종교가 이렇게도 한국사회 속에서 신망을 잃었는가 하는 절망감마저 듭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이런 평판을 받는 신앙 공동체가 되었는지, 그동안 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답답한 마음이 들뿐입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모두 타당하거나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중에는 상당히 주관적인 잣대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한국교회를 재단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비아냥거림이 틀렸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용기는 솔직히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지난 20-30여 년 간 한국교회가 주변의 이웃들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의 자신들에게만, 그리스도인의 내적 성숙보다는 오직 외적인 고속성장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보다는 축복에만 집중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원받느냐?"(“How to be saved?")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두었지, 성경이 구원받은 자에게 변함 없이 강조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냐?”(“How to live as a Christian?") 에는 너무나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왕따는 결국 이러한 편식된 흐름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왕따를 당하는 또 다른 이유

“원래 기독교인들과 논쟁하면 싸움밖에 되지 않는 이유가 있죠. 논리 내 세우다 안 되면 결국 하는 말이, “넌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고 말하죠.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떤 소리도 악마의 소리”
“왜 기독교인들이 말을 잘 하는 줄 아십니까? 기독교인들은 비 기독교인들과의 대화를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나누는 장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꼭 이겨야 되는 말싸움의 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듣기보다는 으르렁거리며 결사적으로 덤벼들죠.”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 게시판에서 부분 발췌한 글들>

하지만 이러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단순히 세상(?) 언론을 통해 전해진, 일부 부조리한 기독교인들의 행실, 곧 ‘삶과 괴리된 신앙’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현재의 왕따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 한국교회는 ‘삶과 괴리된 신앙’으로부터 ‘삶과 함께 하는 신앙’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싼 복음이 아닌 값진 복음으로 만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양성해야 하며, 이것이 이 왕따에서 자유해지는 근본적인 접근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후기 현대주의적 사회의 특성을 올바르게 파악함으로서 그 특성에 맞게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론적인 접근 또한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우리가 빛을 내고 맛을 내야될 이 세상을 바로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개혁해 나가는 동시에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특성과 변화를 깨달아, 이에 맞게 효과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전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이리 왕따를 하는지 한편으로는 마음이 상하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게시판에 올려진 냉소적인 글들을 챙겨 읽고, 또 비 기독교인들과 지속적인 대화의 시간을 갖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형적으로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한국교회의 부조리일지 몰라도, 내면적으로 비 기독교인들이 우리를 향해 참으로 답답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우리의 일방적이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세(attitude) 라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꽉 막힌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우리를 더욱 왕따 하는 것입니다.

비 기독교인들의 시각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꽤나 고집 센 대화상대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이나 주장은 철저하게 챙겨 밝히면서도 상대방이 이야기 할 차례가 되었을 때는 좀처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그런 매너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마치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과 같은 자세로 비 기독교인들과 대화합니다. 물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비록 "적은 누룩”과도 같은 상대방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이를 방치하면 엄청나게 부풀어올라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 수 있기에, 될 수 있는 한 이런 이교도(?)들과는 상종하지(대화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깨어 경계하는(?) 자세로 대화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경우에 목회자님들이 우리를 그렇게 교육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의식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잘 대화하지도 않을 뿐더러, 혹 하더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하게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비 기독교인들과 접촉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그러면 그럴수록 한국사회는 우리 기독교인들을 ‘그들만의 리그’속에 정신 없이 빠져 있는, 배타적인 존재들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한국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우리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접촉점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과 역사 하심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의 영혼들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접촉점이 있어도 진지하게 비 기독교인의 입장을 알려고 하지는 않고 무턱대고 “내 말부터 들어 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겠습니까?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과 부담 없는 대화를 나눌 때야 염려할 것이 없겠지만, 행여나 상대방이 한국교회 내의 뜨거운 이슈(단군상 철폐, 교회세습, 기복주의, 교회권력, 헌금 등)나 자신이 속한 교회나 선교단체의 문제점들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순식간에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에게 틈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들어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우리의 주장만을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행여나 들어줘도 성실하게 들어주지 않습니다. 좀 들어주다가도 아직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느니, 지금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느니 하는, 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기에는 힘든 기독교적 용어를 써 가며 상대방의 말을 자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대화를 통해 서로가 유익을 얻기보다는, 이기기 위한 말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상호교환 되는 대화가 아닌 일방통행 식의 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궁극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득보다는 더 많은 실을 안겨 주게됩니다. 짧게 보면 그 순간의 ‘억지승리’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지 몰라도, 길게 보면 결국 기독교를 왕따 할 또 한 명의 적대자를 양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제목이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뿌리와이파리, 2003)인데, 이 책의 저자인 독일인 철학자 슐라이허르트는 현 서구사회의 대표적인 꼴통들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선택하고 이들과 대화하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토론하는 법을 책에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눈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도대체 대화가 안 통하는 ‘꼴통’들이고, 이들과 대화할 때는 감정 상할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 ①열린 마음으로 진실하게 들어주는 것

“이러한 종류(성경말씀에 입각하여 이웃사랑을 실천하는)의 유니테리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정통 신앙은 정통, 혹은 바른 교리라고 불릴 가치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참된 관용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정직한 신앙을 허용하고 참아 주는 것이다” (p, 186)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홍성사)

“4월 하순에 어떤 유물론에 조예가 깊은 친구의 예방을 얻어 연일 논의를 계속 하였다. 우리와 같이 태만하고 편협한 자에게 이처럼 동과 서가 멀고 적과 백이 다른 것처럼 전혀 다른 세계에 호흡하는 친구를 주어, 애씀이 적고 배움이 많은 기회를 주시는 섭리의 은총을 감사하면서 혹은 서로 ○○하며 혹은 서로 냉정에 돌아갔으나 대체로 그는 많이 말하는 편이요, 나는 대부분 듣는 편이었다” (김교신, 성서조선 1934년 6월)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빌립보서 4:5)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했던 70, 80년대에는 근대주의 사회의 특징처럼 명제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또 이원론적인 자세로 교회가 사회현상에 접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교회가 애매모호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진리를 명확하게 선포하면서 이 진리를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분명하게 질타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 시대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명확하고 분명한 진리를 듣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해체주의(Deconstruction)와 다원주의(Pluralism)를 그 근간으로 하는 후기 현대주의에서는 개개인간의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상대방이 옳아도 내가 믿기 싫으면, 내가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의 내용(text)보다 이 진리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개(present)하는 소통(communication)의 지혜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적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차피 여러 진리(종교)들을 접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리들 중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적 진리가 참된 진리라는 것을 남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진리의 내용 못지 않게 이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진리의 홍수 속에 있는 이상, 진리끼리의 대결구도를 통한 끝없는 대립과 갈등보다는 이 진리를 소개하는 방식에 사람들은 더 호감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후기 현대주의 사회에서 대결구도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정의하는 방법이 근대주의처럼 대결구도를 통한 명제적, 논리적 승리를 통해서가 아닌,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주는(listening) ‘소통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냥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attentive) 들어주는 자세 말입니다. 나중에 자신이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단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무엇을 믿고, 왜 그것을 신봉하는지, 어떤 부분에 있어 우리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고 있는지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들어줘야 합니다. 설혹 우리의 신앙 관으로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억울한 비판이나 지적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진지하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나아갈 때, 상대방도 우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무엇인가 배울 수 있겠다는 마음 밭이 그들 안에 조성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은 진지한 대화를 통해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고, 반대로 비 기독교인은 진지하게 들어주는 우리의 자세를 통해 복음을 향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의 지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관용’이라고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조심스러우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자세(manner)가 요구됩니다.

종교 다원주의적 사회 구조 속에서 그동안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벽을 쌓으면서 대결만 하는, 비관용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습니다. 다른 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우리 식의 신앙적 잣대를 고수하며, 그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잣대로 세상에 반응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의견이나 관점을 존중해 주지 않게 되었고, 또 목소리를 내더라도 사회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주장만을 일삼으며 결국 왕따의 또 다른 원인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하고 이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해 나가는 것은 분명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지켜 나간다는 것이 곧 비 기독교인의 의견이나 입장을 일체 들어주지 않는, 인정해야 할 것도 인정해 주지 않는, 그런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신앙자세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이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관점을 허용해 주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용은 먼저 나와 다른 종교관?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attentive) 들어주는(Listening)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음 달 주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지혜
②자신의 신앙을 정중하게 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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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9월호

올 여름 많은 시간을 저는 바다에서 보냈습니다. 낚시에 재미를 붙여서 어쩌다 시간이 나면 선택의 망설임도 없이 간단한 도구를 챙겨서 바다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무척 더운 날 대낮에 햇볕을 그대로 받으며 서있기도 했고, 갑작스런 폭우를 만나 물고기처럼 젖은 채 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곳을 다니다보니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도 얻게 되더군요. 이를테면 가는 장소에 따라 잡히는 물고기의 종류가 다른 것과 물고기가 몰려드는 시간을 맞추는 것, 특정한 종류의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시간과 고기떼의 움직임으로 그 깊이를 가늠하는 것까지 익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손길이 분주할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기도하고, 어떤 날은 종일 허탕을 치면서 깜찍하게 미끼만 먹고 달아나는 피라미나 게 때문에 미끼 끼우기만 바쁜 날도 있고, 엄청난 대어를 만나 흥분하여 힘을 쏟으며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낚시 줄을 끊고 달아나는 놈의 꼬리를 바라보며 허탈해지는 경험도 몇 번했습니다.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면서 자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바다에 자주 나가게 되면서 점점 낚시하는 일, 고기를 잡는 일보다는 다른 것에 마음과 눈길을 빼앗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낚시 대를 던지기 위해 바람의 방향을 잡다가 바람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할 일을 잊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시간마다 변하는 바다의 색과 물결의 모양을 넋 놓고 바라보는 일이 더 많아졌지요.

넓은 평면의 바다는 자칫 단순한 경치 때문에 지루할 것 같이 생각되어지지만 종일 바라보고 있어도 바다는 얼마나 다른 얼굴과 표정을 보여 주는지 모릅니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 바다의 붉은 수면과 해가 지는 저녁의 붉은 수면이 얼마나 다른 색조와 분위기를 그려내는지, 가슴 벅참과 어떤 애상, 희망과 애잔함, 신비함, 쓸쓸함.. 큰 감정의 기복을 일으키게 합니다. 해가 뜨거운 날 일수록 잔잔한 바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혀주기도 합니다. 더위로 인한 짜증이나 불쾌감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지요.

깊은 밤이 되면 낚시하는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물결 소리와 뒤섞여 묘한 화음을 이룹니다.

조명등의 빛을 받아 윤곽을 드러내는 물결의 하얀 포말의 움직임이 마치 살아있는 동물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바다와 맞닿은 하늘엔 얼마나 많은 별들이 다투어 신호를 보내듯이 반짝이는지요 !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생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음성으로 들은 자는 얼마나 행복하고 가슴이 벅찼을지, 밤바다를 지키고 있는 제 자신이 최초의 인간이 되어 그 음성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바다의 전설 중에 싸이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끝없는 바다의 지루함과 오랜 항해로 지친 어부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유혹하여 배를 암초에 부딪치게 하는 아름다운 인어 아가씨들의 전설은 언제나 우리에게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망망한 바다를 지도도 없이 별빛에 의존하여 길고 긴 길을 가는 어부들의 불안하고 지친 마음에 섬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모든 것을 잊고 홀려 따라갈 정도였나 봅니다. 지혜로운 어부들은 싸이렌의 섬을 지날 때 귀를 막았고, 율리시즈는 부하들에게 자신을 밧줄로 묶게 함으로써 무사히 섬을 지나쳤다는 전설을 기억합니다.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그 변화와 느낌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있다보면 우리의 삶이 긴 항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내면서 때로는 잔잔하고 지루한 노젓기를 계속해야하고 때로는 거친 풍랑과 어둠을 견디어 내면서 자신이 가는 길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수없이 자문해야 하는 항해 말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자연의 섭리에 이끌려 가듯 운명의 행로에 순응해야하기도 하고, 순간마다 판단과 결단을 내리며 모든 상황을 극복하여야 하는 선장의 역할을 감당하며 내 삶의 배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야 하기도 합니다. 때론 지치고 절망하며 노 젓는 손길을 멈추고도 싶고 난데없는 풍랑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수고를 멈추! ! ! 고 평안의 섬에서 쉬어 가라는 유혹이 나를 흔든다면, 그 아름다운 노래 속에 숨어 있는 쾌락과 죽음의 검은 유혹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소리를 향해 가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막막한 바다를 건너는 우리에게 다행히도 지도 대신 빛나는 별빛이 있기에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담대하게 목표를 향해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폭풍우에 별빛이 가리워도 우리 마음 속에 등대가 되어주는 그 빛은 변함이 없습니다. 싸이렌의 노래에 귀를 막은 어부처럼 자신의 몸을 기둥에 묶은 율리시즈처럼 말씀에 귀를 집중하고 십자가에 나를 묶는다면 어떤 세상의 유혹도 그릇된 가치도 초연하게 지나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배가 영원히 귀착할 그곳을 향해 가는 동안 돛대가 되어주시는 분, 그 분을 믿고 평안한 마음으로 향해할 수 있으니 우린 얼마나 즐거운 여행을 하는 것인 지요.

거대한 바다 속의 작은 물고기처럼 힘없고 보잘것없는 제 자신을 느끼면서 이렇게 작은 존재가 바다와 땅의 주권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격을 하곤 합니다. 그 넘치는 사랑이 물결처럼 내게 다가오기도 하고 바람결처럼 나를 어루만지기도 합니다. 깊고 아름다운 무한의 사랑의 바다에서 한껏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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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deck same as chapo?

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다.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출한 후 승리감에 도취된 채 돌아오는 아브라함......
자신이 빼앗긴 부하와 재물을 되찾기 위한 계략을 품고 아브라함을 기다리는 사악한 소돔왕 베라...... 그들 사이를 가르고 떡과 포도주를 들고 갑자기 나타난 대제사장 멜기세댁......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성경 전체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은 표지 그림이라고 할까?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임무는 죽음 가운데 놓인 우리들의 조카 롯을 구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전쟁의 전리품을 가득안고 기쁨에 가득 차서 승전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고 계략이 뛰어난 사악한 소돔왕이 우리와 한판 승부를 걸고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창과 칼의 전쟁은 아니다. 21세기는 경제 전쟁의 시대다. 오히려 떡을 사이에 둔 비즈니스의 전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터 안에서 살아간다. 국제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분쟁과 전쟁 상황도 그 이면에는 냉혹한 떡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라크 전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순간 순간 선택해야할 수많은 떡들이 협상 테이블에 놓여있다. 소돔왕 베라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고 겉으로 멋들어지게 보이는 협상안을 제시한다. 내가 너에게 내 떡을 주마. 그리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그리고 나에게 절만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결해 주마. 우리는 결코 그 유혹을 물리칠 만큼 강하지 않다. 항상 그 유혹에 넘어가고 먹어서는 안 될 떡을 취하고 소돔왕과 더불어 화친하고 마침내 그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떡의 문제는 불신자뿐 아니라 크리스천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은 떡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떡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려면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수도승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가꾸고 변화시켜야할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한, 내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떡의 문제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기 마련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으로부터 거꾸로 영향받아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형 부정부패 사건마다 연루된 크리스천의 부끄러운 모습이 연일 보도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라. 떡의 문제에는 목사든 선교사든 평신도든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떡이란 돈, 명예, 권력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의 물질을 지칭한다.)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끝없는 전쟁...... 떡의 전쟁......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떡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전쟁의 발생 원인과 진행 상황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대처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것을 위해 이제 포탄이 빗발치고 화염이 넘실거리는 그 전쟁터 안으로 직접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

2003년 8월 9일, 나는 그토록 밟고 싶었던 북녘 땅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과기대 건립을 위한 협의를 위해 김진경 연변과기대 총장, 김동호 높은뜻 숭의 교회 목사를 앞세운 방문단이 평양 순안 공항에 발을 내딛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수년 간 네 차례의 방북 시도 끝에 얻은 소중한 순간이었기에 더욱 감회가 넘쳤다. 많은 외국인들이 북경발 고려항공에 우리와 함께 동승하고 있었다. 이념과 대립으로 막혀있던 그 땅도 마침내 경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서서히 휩싸이며 문을 열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들에게도 결국 떡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젊은이들에게 생명의 떡을 주기 위해 시작하는 평양과기대 프로젝트...... 그러나 그것을 철저히 경제적 떡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맞이하는 북측의 당국자들...... 그것은 실로 생명의 떡과 육신의 떡이 맞부딪치는 첨예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평양 방문은 나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든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방북 전날, 갑상선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종합검진 결과를 전해 듣고 급히 조직검사를 받았다. 혹시 악성종양일수도 있으니 받고 떠나라는 의사의 충고 때문이었다. 비록 갑상선 암은 손쉬운 축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병원 침상에 들어 누워 검사를 받는 순간부터 야릇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생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고, 지나온 시간들과 남기고 온 가족을 깊이 생각하며 평양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평양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런 일을 통해 인생에 대하여 반성토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면서도 여섯 살 짜리 어린 데이빗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공연한 상상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만일 정말 암이라면......?
그리고 내가 죽게 된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 하여도 전혀 무섭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깝거나 후회되는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지난 10여 년을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다는 그 추억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두고 갈 가족에게 상처를 안길 것을 상상하니 그것이 가장 아팠다. 그것도 어린 아들 데이빗에게 어떻게......?
귀국 길에 인천 공항에 다시 도착하자마자 친구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양성으로 판정났으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홍성사 발행인인 이재철 목사께서 앞서 출간한 나의 책 <예수는 평신도였다>와 곧 출간케 될 <루카스 이야기>의 원고를 읽고 난 후, 칭찬과 격려의 메일을 보내주셨다. 평양 방문 후 잠시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점심 식사 초청을 해 주셨다. 자장면 한 그릇씩 하자고...... 아마 내게 무슨 해주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 같았다.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배달하여 집 마당에서 소박한 오찬을 나눈 후 목사님은 내게 근처의 양화진과 절두산 묘역을 산책하자고 제의했다. 개화기 서양 선교사들이 머나먼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죽어 이국 땅에 묻혀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인을 조선인보다 더 사랑하여 조선인과 더불어 살다가 이 땅에 묻힌 사람들...... 한국 기독교와 카톨릭의 성지가 바로 한 동네에 100m 남짓 거리를 두고 이웃하고 있는 것이다.


양화진 묘역에는 교회에서 단체로 방문한 관람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였다. 10년 전 중국에 들어가기 직전에 처음 이곳을 찾았을 무렵 휑하니 쓸쓸한 빈 무덤 사이를 홀로 거닐던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목사님은 언더우드, 베델, 홀 선교사 등 한 분 한 분의 묘소에 이를 때마다 그분들의 삶의 뒷이야기와 역사적 의미를 실감나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양화진 묘소가 최근 들어 한국 기독교의 성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한국 교회들이 그곳에 불필요한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헛된 흔적의 모습들도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보니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이름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었다. 우리 신앙인들조차 빠지기 쉬운 허위적 모습들......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그 욕심들...... 절두산 묘역 안에 있던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교황의 방문을 맞아 강대상과 단상을 만들기 위해 설치해 놓은 콘크리트에 갇혀 까맣게 타죽은 모습을 보았다. 인간들의 명예욕의 굴레에 휘감겨 훼손되는 역사 유적지의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 날, 내 마음을 가장 흔들어놓은 것은 아펜셀러 목사 묘역 앞에서 그가 내게 던진 말이었다. 한창 무르익어 일하던 나이에 목포 앞 바다에서 배가 충돌하여 물에 빠진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익사함으로 일생을 마친 아펜셀러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자리에 서면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린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낍니다. 20-30대의 젊은 혈기라면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노년의 나이를 지닌 분이었다면 또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사십대는 한창 자신의 사역과 일에 바쁘고 욕심이 생길 나이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이 가장 두드러지는 그 나이에 어떻게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었는지 그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마흔 다섯의 헌신......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올해가 마침 내가 마흔 다섯의 나이를 통과하는 시점이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한창 일에 대한 욕심이 불타오르고 가정적으로는 자녀들을 교육하고 뒷바라지하느라 걱정과 염려가 절정에 이른 시절, 가장 경제적으로 쫓기고 흔들리기 쉬운 이 시기에 나를 다시 불러 재헌신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도와 음성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음성의 내용은 이것이었다.
“네 생명을 내놓아라.”


*

김동호와 이재철......
나는 이 두 분을 함께 존경한다.
두 분과 개인적으로 나누었던 따뜻한 교제 때문일 수도 있다.

최근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펴내어 크리스천 물질관에 대한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댄 김동호 목사...... 그의 유명한 <고지론>과 함께 이 책 역시 자칫 나약해지기 쉬운 많은 기독 청년들에게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며 승리할 수 있는 영감과 동기부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부유한 교회와 교인들에게 면죄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타락한 인간에게는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며, 새로운 기복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정신여고 강당에서 깨끗하고 성공적인 목회의 표본을 보이며 <주님의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던 이재철 목사...... 10년 목회 후 사임하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한치의 빈틈도 없이 지켜 교회 안팎의 놀라움을 자아냈던 분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 역시 혹자에게는 자기 의의 표출로서 비추어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내가 이 두 분을 존경하는 이유는 이들의 이론이나 행동이 완전하다고 생각하거나 내 생각과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떡의 유혹 앞에 노출된 부족한 인간들, 죄악에 깊이 물든 세상 속에서 그 어두움의 권세, 떡의 권세를 꺽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행동으로 결단하는 그 모습 속에서 배워야할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물들이고 있는 총체적 부패와 부정직 속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크리스천의 바른 물질관을 세우기 위해 선전포고를 하며 과감히 앞서나가는 용기가 너무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몸부림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도상에 있는 사람들이다. 비판하는 분들의 말도 더러 일리가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 두 분 같은 크리스천만 되었어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에게는 이들처럼 떡의 문제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크리스천 리더들의 영성과 지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소돔 왕은 결국에는 심판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왕이다. 하지만 소돔 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브라함은 그의 책략에 쉽사리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 때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신비스런 인물......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신 그분이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그가 들고 있는 떡과 포도주는 전장의 탈취물이 아니다. 모든 전쟁 상황을 끝내기 위해 거저 주어지는 은혜의 떡과 긍휼의 포도주인 것이다. 그것을 받아먹은 아브라함은 비로소 이 전쟁의 주재가 하나님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린다. 그리고 담대하게 소돔왕 앞에 나아가 담판을 벌이는 것이다. -----

크리스천 물질관에 대해 어떤 이론을 제시하고자 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런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떡의 유혹에 초연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언제나 실수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앞에 당면한 이 본질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독자와 함께 고민하며 해결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러나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으로......

성경은 한 마디로 떡 이야기이다. 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 이야기가 성경 안에는 가득 차 있다. 이제 그 피흘림의 현장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찾아서...... 말씀 안에서 열 두 덩이의 떡을 골라낼 생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 평화의 떡을 또한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2003년 8월, 평양 북경 그리고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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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9월

얼 마 전 내가 살고 있는 워싱턴 지역의 한인교회에서 활동하는 몇몇의 청년사역자들과 오랜만에 깊은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우리는 청년 사역에 관한 이런저런 고민들과 생각들을 나누다가 주제는 어김없이 예배와 찬양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한 선배는 이렇게 그의 고민을 표현했다. "우리 시대에는 고형원의 부흥을 부르며 시대의 아픔을 생각하고 자신의 젊음을 돌아보는 역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N세대들에게 그러한 정서를 강요하거나 기대할 수 있겠냐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80 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한 다른 선배는 이런 고민을 나누었다. "요즘 불리는 찬양들을 보면 도대체가 단조, 마이너(minor) 찬양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같이 밝고 분위기 띄우는 찬양들이에요. 때때로 그런 찬양곡조들은 우리의 다른 정서를 나타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와 동시에 나는 이렇게 반론했다. "요즘 세대의 문제는 단조로 부르지 않아도 자기들의 마이너적인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데 있지요." 우리는 어설픈 웃음으로 서로의 정서가 동감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맞 다.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상당히 독특하면서 전무후무한, 그래서 나와는 얼마든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그런 세대와 함께 부대끼며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모든 새로운 세대는 전무후무한 세대가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또 이렇게 생각한다. 해 아래 완전히 새로운 세대가 또 어디 있겠느냐고.

79년도에서 84년도에 태어난 젊은이들과 함께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이제 거의 만 일년이 되어 간다. 간접적으로 지켜만 보거나 그냥 넌지시 건너뛰어서 생각하던 이들의 삶의 방식(Lifestyle)을 좀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때론 당혹감이 들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던 순간이 많이 있었다. 자유로움을 주지 않으면 거의 질식할 정도로 힘들어하고, 단체적인 행동이나 막무가내의 의사결정에 대해선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을 나는?월드컵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2년도에 한반도를 붉게 물들였던 그들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엇박자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으며, 사이버 공간에서의 사귐이 매우 익숙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강한 비트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는 이들이 초등학생이던 92년경부터 지금까지 댄스음악이 주류음악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들과 함께 하는 예배 시간에 나는 항상 볼륨이 좀 크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멜로디 위주의 흐름보다는 비트가 강한 리듬섹션이 강한 찬양이 이들에게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볼륨을 좀 줄일 수 없겠냐?'는 고리타분한 부탁은 눈치를 보며 좀처럼 하지 않는 편이다. 나 역시 밝고 강한 찬양을 주로 인도하는 편이기에 이들 역시 나를 같은 편 정도로 생각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심정일까. 그러나 역시 나는 '부흥'의 정서와 단조음악의 정서를 이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선배들의 연민 어린 마음을 읽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보다 늘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축제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서 삶의 고백과 성찰이 담긴 묵상적인(Contemplative) 찬양을 기대하는 것이 나의 심정이다. 나 역시 그러한 묵상적인 찬양이 갈급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들뜬 금요일 밤의 열기가 아니라, 잔잔하게 가라앉은 어느 화요일 아침의 찬양을 함께 퍼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장 바닥의 번잡함과 들뜬 마음뿐만 아니라, 적들의 화살을 피해가며 동굴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찬양으로 퍼낸 다윗의 영성을 퍼내어 찬양으로 연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사랑하는 '월드컵 세대'에게 기대하는 또 한가지의 부탁과 바램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동안 계속 되는 나의 고민과 비전일 테지만, 우리 민족(Korean 혹은 Corean)의 정서에 흐르고 있는 그 어떤 물줄기가 있다면 이제는 이들에게서 바로 그 정서와 물줄기를 담아 낼 수 있는 찬양이 어서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보아’라는 가수의 국제화를 기뻐하며 과연 이것이 우리 민족음악의 미래이기를 기대하는 것만이 대세일까.

이 들의 음악이 얼터너티브 계열의 대학로에서 들려지는 거친 롹음악일 수도 있겠고, 홍대 앞 전위적인 음악 카페에서 들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건 간에 송창식이나 강산에의 포크 음악에서 느껴지는 어떤 민족적인 동감, 혹은 조수미의 아리랑이나 백남준의 비디오에서 느껴지는 고급문화로 덧입혀진 조선의 정서, 아니면 고형원의 ?부흥?을 부르며 시대의 아픔에 동감하던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쏟아내던 어떤 부르짖음이 담긴 그런 찬양이길 바란다. 더 이상 ?서편제?의 성공을 생각하며 순수민족음악만이 진정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도 힘들다고 본다. 70년대에 태어난 나 역시 솔직히 고백하자면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서양음악을 밥먹듯이 먹고 듣고 호흡하며 자란?다른?세대이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나는 그러나 윌로우 크릭 스타일의 예배만이 최상의 예배인 것처럼 호도 되는 안타까움을 나타내 본다. 윌로우 크릭의 예배는 베이비 버스터 세대인 백인 중산층들을 타겟(Target) 삼아 시작했던 전략적인 예배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예배를 걱정하며 담아낼 새 부대와 새 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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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반 년 동안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K라는 보조 교사 한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K는 나이도 많으시고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특수 교육 클래스 룸의 보조 교사로 8년 동안 일을 해 오고 있다. K는 매일 하루에 한 시간씩 제 클래스를 도와 주었는데, 어느 날 제가 잠깐 미팅을 갔다 돌아 와 보니 아이들과 무슨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지 그녀를 향해 아이들이 집중을 하고 경청하고 있었다. 방해되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뒷자리에 살며시 앉아 K와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B어린이가 질문했다. “그럼,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을 믿으면 외롭지 않나요? 어떻게 예수님을 믿나요? 안 보이는데...” 다른 E라는 남자 어린이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누가 그러는데, 예수님은 마귀의 친구라던 데... 난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러자 교회에 잘 다니는 D라는 짓궂은 남자 어린이가 말했다. “You are so dumb. The church is a Lords house, and if you do not believe in Jesus, you will go to hell.” 결국 서로 으르렁거리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는 K는 예수님, 하나님, 그리고 교회에 대해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림을 그려 가면서, 그리고 자기가 갖고 다니는 작은 성경책을 보여 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창유리 밖으로 교감 혹은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다가 혹시 들어 오셔서 참관 수업이라도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조지아에서는 교사의 경력에 따라 교사들이 일 년에 1-3번씩 불시에 교육 행정관들로부터 참관 수업을 받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K의 설교는 계속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주위가 산만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 하는 아이들인데 K의 설교에는 경청을 하고 질문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가 기독교 적인 질문들이었다. K는 아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대답을 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이들은 평상시에 궁금해 오던 것들을 물어 보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집중을 사기 위해서 질문하는지는 몰라도 계속된 질의응답 때문에 다음 시간이 되어서야 그 이야기들을 마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다른 클래스로 가고 나서 난 K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I know you are very good Christian, but you know it is illegal to talk about religion at the public school. 그러자 K는 나를 보며 I know Ms. Cha. I know the school rule and the law. You know something? First, these children with special needs really need someone in their heart. They have been sexually abused and neglected at home. They have not been exposed to love. They don‘t know how to love others because their families have never loved them. They need to know that God loves them no matter what. Also, if I get fired because I talked about the religion at school, then, the Lord has better plan for me. Don’t you think?”

신앙적으로 보면 K의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K는 다른 교사들 처럼 교육학을 공부해 본 적도 없고 교사 자격증은 당연히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삐뚤어지고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녹이는데, 특별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Jesus loves you even though your mom and dad don‘t take care of you. Invite Jesus to come to your heart and pray, and he will live and take care of you.” 이야기를 해 주면서 기도도 같이 해 준다고 그녀는 말했다.

미국의 공립 학교가 갖고 있는 문제점의 출발은 기도가 폐지되고 하나님의 위대함과 존엄성과 성경 적인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대부분의 교사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존엄성, 그리고 성경적 가치관 상실은 급격 하는 이혼율, 가정 폭력으로 인한 불화를 가져 왔고 가정 불화는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마땅히 가정에서 배워야 할 교육들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이들은 discipline problem으로 학교 교육에 까지 악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기도’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와 아픔이 있는 아이들과 부모들로부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학대를 당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정서적 불안으로 주위가 산만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서 (attention seeking)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들을 하게 되는데, 이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다. “I don‘t like anyone. I hate myself and don’t like anything at all.” 그들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서 늘 걱정과 근심이 얼굴에 가득한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왠지 모르게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은 좀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언젠가 B 라는 4학년 초등학생이 한 이야기를 소개 한 적이 있다. “You know, my mom is an alcoholic, and she has done verbal and physical abuse to me, but I am going to pray God for my safety at home.”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

기도는 아마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 할 수 있고 어느 누군가를 신뢰하다 보니 자연히 그를 의지하게 되고 상처받은 아이들에게는 평안과 위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빌립보서 4장 6-7말씀에도 아무 것도 근심, 걱정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함으로 하나님께 구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한 것처럼 나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기도를 통해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음의 위로가 되는 기도는 아이들의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게 만든다. 흔히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상처받은 이들은 낮은 자존감 (low self-esteem) 때문에 사회의 관심을 사기 위해 좋지 못 한 길로 탈선을 하게 되기 쉬우나 기도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게 되니 탈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에게 중요한 기도는 종교의 자유라는 미국 헌법 때문에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있는 공립 학교에서는 폐지되었다, 물론 다 문화권인 미국공립학교에서 너무 기독교 적인 사상으로 강요하고 억압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처음 탄생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온 청교도 정신인데, 정교 분리는 참다운 청교도 정신을 서서히 사라지게 만들었고 도덕적 가치관 상실을 비롯해서 사회적 문제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극심한 사회 문제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 하게 되었고 서로를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위 풍토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마음의 상처만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옛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정교 분리를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기독교 적인 가치관을 나눌 수 있게 하고 기도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성탄절이 되면 교사들이 자유롭게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게 하고 부활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아이들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도록 교육 과정 (curriculum)자체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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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1 03:00 책이야기/eKOSTA 서평

2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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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책으로 선정한 책은 크리스티 김 교수님의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이다. 영어 제목은 "Pour out your heart to God"으로 "하나님께 너의 마음을 쏟아라"정도로 해석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내적 치유에 관한 책이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상처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처가 드러나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아닐까. 특별히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는 도무지 내어 놓기가 힘들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치유로 나가는 출구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기술한다. "내면의 변화는 도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의 만남과 교제에서 시작합니다. 진리는 이론이 아니라 인격체이십니다" 이러한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만날때 우리는 참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데, 저자는 네가지 측면에서 이런 인격적 변화를 조망하고 있다.

첫 째는 용서다. 이 용서의 키포인트는 나를 위한 용서. 미움이란 칼을 마음에 품고 있을때 결국 상처 받는 것은 나다. 은혜를 받은자가 용서할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 둘째는 기도다. 나의 상처 받고 이픈 마음을 주님 앞에 꺼내 놓을 때 진정한 치유가 나에게 임한다. 저자는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쏟아놓은뒤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고 말한다. 셋째로 영적전쟁에 대한 인식이다. 결국 크리스찬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영적 전쟁이라면 이 싸움에 승리 하기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넷째로 변화를 기대해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내면의 변화를 기대하라.

이 책을 읽으면서 결국 우리의 상처조차 주님 앞에서는 사명으로 승화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가 겪어야 했던 우울했던 어린시절의 경험들이 오히려 주님의 사역에 쓰임 받는 것을 보며 더욱 확연해 졌다. 유학생활이란 광야를 통과하는 우리 코스탄을 생각하며 이책을 권한다. 상처 받으셨으면 치유하시라. 치유하신후 치유자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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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9월

얼 마 전 교회 중등부에 있는 12 살 난 아이에게 요즈음 학교 생활이 어떠하냐고 물어 보았더니 한 마디로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Busy! 또 어떤 잡지에서 보니, 현대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도와 생활 능력이 이전보다 매우 향상되었는데도 평균 건강은 오히려 나빠져 버렸는데, 그 이유인즉 밥 먹을 돈은 있어도 제 때에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란다.

현 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늘 분주하다.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주부는 주부대로 각자 자기 위치에서 나름대로 다 바쁘다. 그렇다 보니, 중요하면서도 당장 급하지 않았던 일들이 상황에 밀려 희생되는 경향들이 생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일, 이웃과 함께 하는 일, 매일 아침 말씀 읽고 주님과 교제하는 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곰곰이 살펴보니, 이러한 일들은 대개 관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분주한 삶이 첫 번째로 주는 위기는 바로 우리의 가족 관계, 이웃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훼손되는 일이다.

이 바쁜 현대인의 삶 가운데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마도 예수님 역시도 바쁘게 사역하셨을 것이다.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가난한 자를 위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제자를 키우시고... 어쩌면 평신도로서 목수 일도 계속 겸직하셔야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이셨다면 사역을 감당하느라 가정 안에서의 관계가 깨어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도록 방치하거나 택하여 가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성 경을 보니,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전도하시는 등 (막 1:21-39),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실제로 바쁘게 사역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행하여지고 있는 한 가운데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하는 대목이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분주한 사역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홀로 조용히 기도하시는 주님... 그렇다면, 상황이 바쁘게 돌아가는 중에 계셨더라도 주님 자신은 그리 바빠 하지만은 않으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아 마도 주님이 안 계시는 동안에, 아직도 많이 남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 그리고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들이 아침부터 주님을 만나고자 몰려와 아우성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리저리 당황해하며 주님을 찾고 있었을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정작 이 모든 이들을 뒤로 두고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선한 일과 옳은 일 자체에 몰두하시기 이전에, 지금 아버지께서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분별하며 순종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수 있을 법한 일을 행하는 것 그 자체보다, 매 순간 아버지께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고도 볼 수 있다.

오 늘 하루의 일을 손에서 놓고 잠들기 어려워하는 사람은 죽을 때에도 이 땅에서의 일을 놓고 가기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양의 옛 선인들이 말했던 盡人社 待天命 (진인사 대천명), 즉 사람이 할 바를 다하고 나면 결과는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이야말로 어쩌면 모든 일의 주재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겸손히 품어야 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그러나 살다 보면,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할 일을 다한 후에 모든 뒷일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겸손히 물러나는 일이 늘 그다지 쉬운 것만은 아님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된다. 우선은, 시급히 결과를 요구하거나 사회경제적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적 요인들 탓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집착이나 완벽 추구 심리, 조금만 더! 하는 욕심, 그리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의 마음에 기인하는 이유들이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오천 명이 먹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전부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는 일과 우리 스스로가 오천 명을 먹이는 일을 혼동하기 때문인 경우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동기부여에서 벗어나 주님이 중심 되시고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린 삶을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주님께 온전히 맡겨지지 않는 한은 주어진 삶을 잘 감당하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그 가운데 평안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아 버지께 맡기는 삶과 사역의 표본은 역시 예수님이시다. 헨리 나우웬이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특별하였던 한 가지 면모는 그분의 최후의 사역인 십자가 구원을 이루시는 과정이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주님은, 사람들이 심문할 때 심문 당하셨고 매를 때릴 때 매 맞으셨으며 십자가에 못박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였을 때에 죽으셨다. 그리고는 성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올리실 때 부활하셔서 그분이 앉히시는 보좌에 앉으셨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역을 완전하게 이루셨지만, 그 과정 자체는 외면적인 노력이나 분주함과 무관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내면적으로 치열한 고뇌 가운데 순종과 헌신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지만, 외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안 하셨다.

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수고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선을 다하는 것도 귀하고 잠잠히 따라가는 것도 귀하되, 이 모든 일은 나를 향하신 그분의 뜻을 그분 스스로가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보다 큰 컨텍스트 안에서만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만, 내가 한다고 해서 꼭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지 못했다고 해서 꼭 안 되는 것이 아닌 현상들을 우리는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일과 분주함에 관련하여,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관점 아래에 우리의 기회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수고와 우리의 기여라는 측면들을 겸손히 내려놓을 때에만 비로소 이 문제들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다.

우 리에게 열심히 감당할 일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에선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부르셔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의 표현으로서 주신 바에 대하여 열심히 일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혹 지나치게 바쁘다면, 예수님처럼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 속의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독대하는 가운데 주님의 시각을 회복하여 스스로를 재점검해야 한다. 나의 영적 상태는 건강한지, 나를 둘러싼 관계들은 온전한지, 다른 영혼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목표를 위하여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나 아가야 할 때와 멈추어 서야할 때를 온전히 분별하여 조화된 모습으로 실천하며 사는 삶은, 분명 단순한 결심이나 노력으로 당장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일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영적인 집중력과 분별력, 매 순간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종함, 인생의 거시적인 계획들이 세워지고 실행되는 자리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내가 지금 가진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내려놓고 그분께 기대어 맡길 수 있는 전폭적인 믿음과 헌신 가운데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드렸던 기도를 매일매일의 생활 가운데에서 지속적으로 드리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분주함이라는 영성생활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 우리의 앞에는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가 동시에 주어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과하는 열쇠가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며 따르는 일에 있음은 물론이다.

여 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시 127:1-2)

(본 글의 예수님 사역 부분에 관련하여 헨리 나우웬의 Out of solitude 및 Adam: Gods beloved에 있는 내용 일부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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