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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에 입학한 후 첫 등교 길, 신입생을 환영하는 여러 현수막들이 가득한 캠퍼스를 꿈에 부풀어 더듬어 올라갈 때, 푸른 창공에 휘날리며 내 눈을 사로잡는 한 글귀가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어느 단체에서 내다 붙인 현수막이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고, 그 때는 그 글이 예수의 말씀인 것조차 몰랐지만, 그 글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대학 생활의 막연한 기대와 용솟음치는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대학입시라는 질곡을 통과하여 마침내 자유의 바닷가 앞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진 것처럼, 지난 날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유아기적인 몽상과 신화로부터 탈출하여 진리의 대양으로 마음껏 노 저어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싱그러운 봄날의 부푼 가슴으로 진리와 자유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찾아간 강의실에서 어느 젊은 교수의 실존주의 철학 강의로부터 나의 대학 생활은 시작되었다.

"인간은 피투성(被投性)이다"

아무 이유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그저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 그 실존의 인식으로부터 인생이 시작된다는 그의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 펼쳐질 피비린내 나는 대학생활에 대한 예고요 선언이기도 했다. 모호한 것이 약간은 멋있어 보이던 그 교수의 강의를 통해 내가 받았던 감정은 절반은 매력적이게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본능적 거부감이었다. 만일 인생이 그와 같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줄달음질치는 것인가? 그리고 삶을 지배하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자유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독재 정권의 시녀로 전락해 자유로운 학문 정신을 상실해버린 피폐해진 캠퍼스, 지성의 전당이라고 상상하던 교실 안에서 자행되는 공공연한 부정행위, 절대 권위의 부재로 인한 영적 빈곤 상태를 권위주의로 억누르는 교수들에 대한 실망 감들로 진리와 자유에 대한 대학생활의 꿈이 허상이었음을 점차 깨달아가던 그 해 가을, 캠퍼스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첫 휴교를 맞이했다. 그리고 최루탄과 실연의 따가움에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진리를 향한 내 인생의 길고 험한 장외 투쟁의 노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대의 청춘을 술과 담배 연기 속에 쏟아 붓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진리를 찾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같은 자로 되돌아 와 있었다.

(2)

장님으로 살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의 마음이 어떠할까?

그토록 보고팠던 딸 효녀 심청의 얼굴을 보고 울다 웃다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심 봉사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흑암의 세월 속에서 살다가 광명의 세계로 옮겨간 사람의 그 자유함... 얼마나 기뻤을까? 그러나 더러는 시각장애인이 되면서 비로소 진리의 빛을 찾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안요한 목사님의 이야기에 우리는 또 다른 감동을 맛본다. 참 자유란 반드시 육신의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2003년 캐나다 토론토 코스타에서 아주 특별한 두 사람을 만났다. 한창의 젊은 나이에 시력을 잃은 안요한 목사님과, 불의의 교통 사고로 인한 화상으로 청초했던 소녀의 아름다움을 잃은 이지선 자매가 함께 강사로 참석한 것이다. 흑암 속에서 잔잔히 빛나는 촛불을 바라보듯 그 두 사람의 간증을 듣는 동안 아름다움의 본질과 영혼의 자유함에 대한 근원적 생각을 다시 다듬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감내키 힘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들 안에서 타오르는 아름다운 생명의 빛은 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간증은 우리의 건강한 육체를 오히려 부끄럽게 하였다. 이지선 자매의 정금같이 순수한 간증을 듣고 난 후, 안요한 목사님은 그의 맑고 투명한 두 눈을 허공을 향해 깜박이며 이렇게 말했다. "자매야말로 우리의 자랑스런 미스코리아 진입니다." 육순의 이 시각장애인 목사가 보았던 것이 무엇일까? 육신의 아름다움을 상실한 한 여인의 아름다운 영혼을 향한 그 고백이야말로 진리 속에서 위대한 자유를 체득한 자만이 낼 수 있는 승리의 목소리였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두고 제자들이 예수께 묻는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전혀 다르다.
"그가 소경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예수는 종종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함으로 자신의 빛 되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를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을 선언하였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9:39)"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 진리의 빛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러하기에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 피하는 자들은 스스로 소경 된 자들이며 이미 심판의 길로 들어섰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육신의 질병과 영혼의 불구로 고통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 저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자유를 주기 위해 찾아온 예수,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당한 그 고통은 단순한 육체의 고통이 아니었다."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 고 간절히 부르짖었던 예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십자가에서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잔에 대한 영적 두려움 때문이었다. 순종의 아들 예수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영적 분리(分離)와 유기(遺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겁에 질려 아빠 양을 찾는 어린양의 울음소리처럼 간절했던 그 기도... 사실상 그 형벌은 바로 우리들이 받아야 할 죄의 삯이었다. 그 시간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던 그 '야훼의 밤'에 애굽의 모든 이들이 잠이 들었던 것처럼...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아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의 절규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우리에게 임할 그 심판은 오직 어린양의 흘린 피로만 대속 될 수 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키 위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외 아들의 고통과 외침을 외면하시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을 아버지께로 이끌어 살리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침내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버리셨다. 그리고 그 아들은 완전한 순종을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순종의 아들 예수가 가장 높은 하늘 생명의 보좌에서 가장 낮은 땅 사망의 십자가로 내려와 마침내 숨을 거두는 그 순간,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사랑의 빛이 흑암에 싸인 온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진리의 광채가 역사의 시공을 따라 흘러 이 시간 이곳까지 이른 것이다. 그 섬광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 기이한 빛을 한 번 비추인 사람마다 그의 딱딱한 머리와 얼어붙은 가슴은 녹아내리고 세상의 욕심을 향하던 그의 옛 눈은 멀어버리며 새로운 영적 세계를 향해 눈뜨게 되는 것이다.

(3)

만주 벌판의 끝없이 펼쳐진 구릉지대에 초원의 신록이 한껏 물을 먹어 싱싱하게 오르고 있다. 멀리서 보면 무덤을 갈아엎어 세운 학교가 흰 파도 거품처럼 꿈틀거리며 그 능선을 따라 물결 치듯 늘어서 있다. 화사한 주일 오후, 분홍색 벚꽃과 철쭉, 노란 개나리가 만발한 교내 정원에서 쌍쌍이 데이트하며 지나가는 대학생들 사이에 교직원 자녀 아이들이 깡충깡충 뛰논다. 이웃에 사는 동역자가 첫 딸을 낳고 이름을 '진리'라고 지었다. 그리고 다시 남동생을 보자 이름을 '길'이라고 지었다. 일곱 살짜리 내 아들 문영(데이빗)이도 길과 진리와 어울려 함께 달린다.

정신지체장애 아들을 둔 고등학교 후배 J 교수가 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걸어가는 얼굴이 하얀 찬영(가명)이가 그 집 아들이다. 막내 문영이와 동갑인 찬영이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항상 가슴 한 귀퉁이가 아리며 당황스런 마음을 감추게 된다. J교수가 후배여서 그럴까? 아니면 찬영이가 우리 아들과 동갑내기여서 그럴까? 가슴이 아프다. 그 부부를 도우려 해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고 위로를 하고자 해도 어떤 한계를 느낀다. 천사와 같이 천진스러운 찬영이를 간혹 안아주고 항상 밝음을 유지하며 지내는 젊은 그 부부가 기특(?)하게 여겨지다가도, 그들이 비장애인 아동들을 바라보며 어쩌다 흘리는 눈물 앞에서 우리 부부는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외면한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그 아들을 바라보는 J 교수 부부의 마음속에 담긴 그 고통과 절규를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찬영이를 위해서 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사랑 고백을 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 뒤에는 어쩌면 십자가 위에서 침묵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J교수가 언젠가 대학생들 앞에서 특강을 했다. "나는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 연변과기대의 교수가 되는 것이 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박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인생의 참 행복은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때 얻어집니다. 여러분들이 장차 그런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내 아들 찬영이를 바라보며 과연 이 아이가 커서 누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줄 수 있는 그 도전을 내 아들에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찬영이로 인해 아픈 자녀를 둔 다른 부모들이 위로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찬영이가 상처 받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영이가 항상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인 나는 찬영이가 있음으로 인해 정말 행복합니다."

지금도 순종의 아들들이 당하는 고통 뒤에는 그로 인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더 큰 사랑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 믿음으로만 함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부활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에게서는 빛이 난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사십 일간 하나님과 함께 거한 후 내려올 때에 그 얼굴에서 광채(shekinah)가 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중국으로 오기 직전 깊은 기도로 매일 새벽 하나님과 만나고 있었던 무렵,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얼굴에서 어떤 광채가 나는 것 같다고 했었다. 그 이후로 더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동역자들의 얼굴에서 은혜의 광채가 발하는 것을 드문드문 경험하기도 했다.

우리가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에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만나게 되는 날, 희미하게 깨달아 보던 그 진리의 빛을 완전히 바라볼 날이 올 것이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으며, 이전에 있던 모든 상처와 질병들이 다 지나간 곳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진리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처럼, 수정처럼 빛나며 해와 달의 비췸이 소용이 없고 오직 어린 양 예수가 그 등불이 되며 만국의 백성들과 만왕들이 그 빛 가운데 지나갈 것이다.

그 행렬 가운데는 통일된 조선의 백성들도 흰옷을 입고 얼굴에 광채를 내며 함께 줄지어 지나갈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한국인과 북한 사람의 경계도 없을 것이요, 중국 조선족과 미국 교포의 구분도 없을 것이다. 재일교포와 사할린 동포가, 우즈벡의 고려인 3세와 브라질의 교포2세가 함께 어울려 웃으며 지나가지 않겠는가? 연변과기대 졸업생과 한동대학 졸업생이, 평양과기대 출신과 포항공대 출신이 함께 지나갈 것이다. 목사요 장로요 집사의 구분도 없을 것이며 기업 총수와 문지기의 구분도 없을 것이다. 북한의 탈북자와 순교자가 나란히 걸어갈 것이다. 한족과 조선족이 하나가 되고, 이라크인과 미국인이 하나가 되어 예수 앞으로 모여들 것이다. 그때 거기서...... 루카스와 상재가 웃으며 손짓하고, 찬영이와 문영이가 어깨동무로 함께 손잡고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던 그분이 인자하게 웃으시며, 다시 한번 영원한 진리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실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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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11 00:27 이달의 초점

2003년 7월 12일에쓴 간증서신

구자신 형제와 황윤희 자매 그리고 요셉이 가정에 대한 사랑에 감사드리며

미국 코스타 황지성 간사가 존경하는 믿음의 동역자님들과 선배님들께 올리는 감사의 편지.

코스타집회를 통하여 많은 헌신과 수고로 함께 해주셨고 요셉이 가정, 구자신 형제와 황윤희 자매의 가정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 기도해 주시고 사랑을 보여주신 여러 믿음의 선배님들과 동역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서신을 올리면서도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은 지난 일년동안 코스타를 섬기는 간사님들 가정가운데 두 가정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천국으로 보내야 하셨던 일에 대하여 또 캔사스에서 코스타에 등록했던 한 자매가 교통사고로 소천한 사건에 저 자신 마음을 다해 같이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저 자신 사랑으로 그 어려움들에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가 제 마음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구자신 형제님 가정에 사고가 난 후 벌써 두 주가 지났지만 몇 개월이 지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큰 그림의 조그만 퍼즐조각들이 맞추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 가정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이 엄청난 고통가운데에서도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의 순결한 모습을 보여주신 구자신 형제님의 믿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깊은 감동이 있어서 이렇게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격려속에서 구 자신형제님 가족은 이제 영육간에 빠르게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황윤희 자매 (요셉이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글로 자기 의사표현을 할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아직은 몇주동안 더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7월 15일 화요일 12시에 구자신 형제와 황윤희 자매그리고 둘째 아이 송아는 인디아나 Elkhart General Hospital에서 Washington DC의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Hospital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제 그 주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간단한 보고를 드립니다.

6월 30일 월요일

사고는 6월 30일 월요일 정오경에 Indiana Toll Road에 일차선으로 주행하던 자동차에는 운전하시던 황윤희자매, 앞자리에 구자신 형제, 뒷자리에는 본겸이 (14살) 요셉이 (5살) 그리고 세번째, 맨 뒷자리에는 송아(8살) 그렇게 타고 있었습니다. 코스타 장소로부터 거리가 약 3시간 정도 떨어져있어 긴장이 약간은 풀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92번 Exit근처에서 2차선으로 달리던 트레일러 한 대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어 일차선으로 들어왔답니다. 그리고 윤희자매는 급히 핸들을 중앙선 쪽으로 틀고 그 순간 자동차는 중앙분리대 지역을 넘어 건너편 하이웨이로 치솟아 떨어지면서 수 차례 회전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 때에 충격으로 몸이 비교적 작은 요셉이는 차 안에서 튕겨져 나오면서 땅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구르는 차 안에 갇혀있었고 다행히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들이 없어서 더 큰 사고를 모면했습니다. 큰 아들 본겸이는 순간적으로 차에서 나와 건너편에서 오는 차량을 수신호로 막은 후에 가족들을 아버지와 송아를 차 안에서 끄집어 내었고 엄마는 너무 심하게 다쳐있어 운전석에서 끌어낼 수가 없었답니다. 그리고는 먼 발치에 튕겨져 나가있는 요셉이를 찾아내었습니다.

볼티모어 갈보리교회 노진준 목사님께서 불과 몇분 사이로 사고 현장을 포착하셨고 그래서 병원까지 가셔서 도움을 주실 수 있었던 일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세심한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우선 본겸이는 검사결과, 하나도 다친 부분이 없이 불과 몇시간 후에 노진준 목사님께서 코스타로 데리고 오실 수 있었습니다. 김만풍 목사님과 제가 코스타로부터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약 5시였습니다. 가족들 모두 수술중에 있었고 윤희자매는 큰 수술중이어서 그날 저녁 늦게 되어서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기도로 매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날 밤에 중환자실에서본 황윤희자매는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풍선과 같이 크게 부어오른 얼굴은 누구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고 의식도 없는듯 했습니다. 구자신 형제는 오른쪽 발뼈들이 흩어져서 뼈를 맞추는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송아는 허벅지 뼈가 부러져 여섯개의 금속핀을 허벅지 뼈에 박는 대 수술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내아들 요셉이는 병원으로 왔다가 상태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Elkhart에서 약 두시간 떨어진 Fort Wayne으로 헬리콥터로 옮겨져야 했습니다.

화요일

초조한 몇 시간이 지난 후, 화요일 새벽 1시경에 Fort Wayne 중환자 실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요셉이의 뇌 기능이 점점 약해져 간다는 소식이었고 만일 심장박동이 멎을 경우 CPR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아버지인 구자신형제님께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질문이었습니다. 구형제님과 저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새벽녘에는 절망적인 전화가 다시 걸려왔습니다. 요셉이의 뇌사가 임박했으니 마음의 준비와 그리고 기계에 의지해서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인공호흡기를 만일의 경우 계속 유지시킬 지 아니면 떼어낼 지를 결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Elkhart병원의 Chaplin David Hudson목사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지금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고 분명 하나님께서 회생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랍고 감동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습니다. 구자신 형제님께서 요셉이의 출생에 관해 숨기셨던 사실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셉이는 너무도 특별한 아이라서 하나님께서 꼭 살려주셔야 합니다. 그 아이는 원래 제 아이가 아닙니다. 요셉이 엄마는 이 아이를 낳다가 낳은 날 병원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데려다가 친아들로 삼고 기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에 이렇게 해서 이 가정에 들어오게 된 이 아이는 반드시 살려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감출 사실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알고 함께해야 할 일이기에 구 형제님과 어제 전화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밝혀도 좋다는 승락을 얻었습니다.)

그날 오전에, 우리 모두의 기도의 힘으로 윤희자매의 회복이 빠르게 감지되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지금 의식이 있고 내가 누구인지 아시면 발가락을 움직여보라는 말에 오른쪽 발가락끝이 약간 움직였습니다! 정말 기적과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간호사들 모두 같이 기뻐해주었습니다. 구형제님도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오후 한시경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셉이의 뇌사판정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심장은 인공호흡기에 의해 뛰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병원측에서는 한가지 요청을 하였습니다. 비록 뇌의 기능은 온전히 정지되어있지만 장기의 기능들은 아직 살아있으니 장기기증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구형제님은 한동안 기도하시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장기기증을 결정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요셉이를 회생시켜주실 기적을 기대하고 더 버티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장기를 이식하면 살 수 있는 두 세명의 아이(사람)들을 살리느냐 하는 정말 숨가쁜 결정이었습니다. 장기기증을 수락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아버지에게 한 가지 요청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한번 보고싶다는 요청이었습니다. 구형제님의 건강상태도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기에 Case Manager는 강력히 반대를 했습니다. 아마도 환자의 liability문제가 심각한 우려로 대두되었던 같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요셉이에게 전화를 걸어 귀에 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미 뇌사판정을 받은 아이라서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쪽 병원에서는 말했지만 우리는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스피커폰이 연결되었습니다. 구형제님의 마지막 전화내용은 이랬습니다. "요셉아 아빠가 정말 너에게 잘 대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너는 이제 네 친엄마를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겠구나. 그리고 예수님도 만나고… 이제 하나님 앞에 가면서 이렇게 기도하자. 너를 살리려고 그렇게 애썼을 그 병원 간호사들하고 의사선생님들에게 감사하자. 그리고 이 병원과 네가 있는 그 병원이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병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요셉아 잘가라. 이제 다시 곧 만나자…" 저는 이 기도를 하고 있는 구형제님 옆에서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병원을 축복하고 있는 구형제님의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후에 제가 그 병실에 모여있는 간호사들과 case manager에게 말했습니다. 이 아빠가 무슨 기도를 했는 줄 아느냐고, 이 어려운 순간에 당신들을 축복했노라고… 모든 사람이 다 울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복도에서 짤막한 회의가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case manager가 병실로 돌아와서는, "OK. Mr. Koo, we decided to let you go." 그리고는 앰뷸런스를 병원측에서 준비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습니다. 수간호사 Bobbie는 진통제와 약들을 챙기고 앰뷸런스안에 모든 모니터 기구들을 싣게 했습니다. 구형제님을 싣고 paramedic 팀과 저와 수간호사 가 앰뷸런스 에 타고 장장 두시간 거리에 있는 Fort Wayne의 Parkview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시간에 김만풍 목사님과 민동식형제님은 그 병원으로 오시게 되었고 그 병원에서 우리는 저녁 8시경에 아직도 심장이 뛰고 체온이 따뜻한 요셉이의 얼굴과 몸들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사망판정이 난 요셉이, 그러나 다시 살아날 것만 같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면… 아직도 체온은 따뜻한데… 김만풍 목사님의 집례로, 요셉이의 손을 잡고 임종예배를 드렸습니다.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종예배가 끝나고 이제 장기기증을 하는 절차를 밟는 도중에 저는 한국에서 오실 요셉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이모의 비자문제로 병실 전화통화를 통해 한국에 여기저기 통화를 해야만 했습니다. 요즘같이 비자가 까다로운 시절에 어떻게 비자를 빨리 받을 수 있게 될까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 저기 전화를 하는 도중에 그 병원 간호사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I have a good news. I found out that our deputy surgeon general's wife and daughter are donating their organs now here at this hospital. We probably can ask him for some help…" 놀랍게도 그 분, deputy surgeon general은 한국주재 미 대사관과 워싱턴 homeland security 에 보낼 편지를 즉석에서 써주시게 되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6시간만에 10년짜리 비자를 받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은혜였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은 착잡했습니다. 제 손에는 요셉이가 기증하기로 되어있는 장기의 목록을 담은 영수증이 들려있었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온 구형제님과 저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낸것 같습니다. 수요일 새벽녘에 안구, 신장, 심장, 신장, 이자, 간등을 포함한 장기제거 수술이 끝났다는 전화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요셉이가 다살지 못한 삶을 그 장기를 받은 아이들이 살아드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들이 살아드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기도를 구형제님의 손을 붙잡고 같이 드렸습니다.

수요일

수요일은 요셉이 엄마 황윤희 자매에게 조금씩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습니다. 요셉이의 몸을 버지니아 알링톤 funeral home으로 이송하기로 조치해 놓고 수요일 밤에 잠깐 짬을 내어 오헤어 공항에서 아내를 픽업하여 휘튼에 돌아왔습니다.

목요일

목요일 아침에 휘튼에서 다시 병원으로 떠나기 전에 몇분의 강사님들이 저에게 요청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집회중에 요셉이 가정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었고 궁금해 하니 짤막한 리포트를 아침집회때 해달라는 요청이셨습니다. 아침 집회중간에 잠깐 나가서 하나님께서 요셉이를 불러가신 일을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고를 마치고 떠나는 참에 두 분이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요셉이네 가족이 있는 병원근처의 은혜침례교회 나창옥목사님과 노틀담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일하시는 천성창형제님이셨습니다. 천형제님께서는 이제 곧 한국에서 오실 요셉이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가 묵으실 숙소로 자기 집을 내주셨습니다. 나목사님은 또한 제가 토요일 매릴랜드로 떠난 후에 요셉이 가족을 돌봐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습니다.

목요일 점심때쯤 휘튼으로부터 제 아내와 구 형제님 큰아들 본겸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윤희자매를 찾았습니다. 입으로 반경 1인치 정도의 튜브를 폐까지 깊게 박아서 산소 호흡기로 호흡을 하고 있었고 자매는 입과 목의 통증으로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얼굴의 붓기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정말 의식이 온전히 돌와왔는지는 미지수였습니다. 본겸이를 침대 왼쪽에, 휠체어에 앉은 딸아이 송아를 오른쯕에 가게 하고 손을 잡게 했습니다. 그리고 윤희자매가 평소에 좋아하던 찬양 "주만 바라볼지라" 찬양곡 씨디를 틀고 구형제님과 함께 같이 모두 찬양을 했습니다. 찬양을 한참 하는 중에 병실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꼈습니다. 저는 병실 구석에 서서 이를 지켜보는 간호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간호사들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있는 것을 보고 윤희자매를 바라보는 순간 그 튜브를 박은 입의 입술이 찬양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매는 찬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뛸뜻이 기뻐했습니다. 그때부터 자매의 건강은 급격히 호전되기 작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금요일

금요일 저녁 병원을 떠날때 Bobbie를 포함한 많은 간호사들이 다가와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감격적인 말들을 저에게 해주었습니다. "We are so honored to have the family with us. We are seeing God's hands through their witnessing." 그리고 한 간호사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것은 무엇이냐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구형제님의 기도를 통해 이미 그 병원은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 가정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제 눈으로 볼 수 있었음이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7월 12일 현재

어제는 구형제님이 전화에 그러시더군요. 요셉이 그놈만 아니었다면... 그러나 이번 일은 형제님 가정에 엄청난 축복이라고요... 요셉이가 우리 대신 갔다고, 마치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윤희자매는 이제 눈도 뜨고 글씨도 쓰고 한답니다. 어제밤에는 전화도 직접받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회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아직도 확실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영적인 눈이 어두워서이겠지요... 아직도 가슴아픈 것은 요셉이 엄마는 요셉이가 천국에 간 사실을 아직은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형제님이 그러시는데, 윤희자매가 정신이 좀 돌아오면서, 며칠 전에 요셉이가 요셉이 친엄마와 천국에 있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답니다. 이 부분을 갖고 계속 기도했는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충격이 크지 않도록 미리 준비를 시켜주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하튼 이 소식을 곧 알려야 하는데, 충격이 크지 않아서 자매의 회복에 지장이 없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이네 가족을 위한 기도제목을 몇가지 적으며 이 서신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1. 요셉이 아빠가 기도하신대로 Elkhart General Hospital 과 Fort Wayne Parkview Hospital이 환자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적 치료도 할 수 있는 병원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병원전체의 복음화와 병원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요셉이의 장기를 받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자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이 세상을 치유하는 서번트 리더들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3. 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지혜와 계획이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아빠 구자신 형제님과 엄마 황윤희 자매님의 소명이 확실히 확인되어지고 그들의 삶이 아름답게 드려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아빠의 전공(microbiology)와 엄마의 전공(성악, soprano)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나 혹 이 전공과 다른 소명을 주신다면 그 소명이 확인되어지고 하나님께서 나머지 인생의 길을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나갈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4. 큰 아들 본겸이와 딸 송아의 마음속에 상처가 남지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5. 윤희자매가 요셉이 소식을 들었을 때에 큰 충격없이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6. 모든 재정적인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7. 이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있을 장례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고 이 예배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들이있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계속적인 기도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황지성 드림

2003년 7월 12일에

2003년 8월 1일에 이 글에 덧붙이는 소식

여러 믿음의 동역자님들과 선배님들의 기도와 격려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알려드린 대로 지난 7월 18일 19일에 요셉이 장례를 잘 마쳤습니다. 지구촌교회 성도님들을 비롯하여 많은 코스탄들과 그리고 지역의 목사님들과 성도님들도 많이 참석하셔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례식이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요셉이 어머니께는 요셉이의 장례소식을 고별예배가 있던 금요일의 하루 전날, 목요일 오후에 조지타운 병실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사고 후 모든 사실을 남김없이 알려드렸습니다. 매우 힘든 시간이었지만 ,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덕분에, 김만풍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누면서 그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힘든 몸이었지만 그래도 장례예배에 가족 모두가 같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마자 요셉이 엄마아빠는 곧바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서 매우 연약한 육체로 참석했던 요셉이 엄마였지만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마지막 찬양으로 "주만 바라볼지라"를 이 가족을 향해 불러 드릴 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셨습니다.

토요일은 화창한 날씨를 주셨습니다. 이진석 목사님의 집례로 발인예배후에 곧바로 장지로 떠나 요셉이를 땅에 묻었습니다. 고상환 목사님의 집례로 하관예배가 있었고 참석한 사람들이 마지막 헌화를 하면서 장례식은 그렇게 아름답게 끝났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에는 요셉이의 장기를 기증받은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간단한 편지가 미국 장기 기증협회이름으로 날아왔습니다. 요셉이의 간을 이식받은 아이는 미시간에 사는 10살난 남자아이로, Frank라는 거북이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또, 신장을 받은 사람은 인디아나에 사는 수영과 음악을 좋아하는 28세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장기들은 장기은행에 보관되어, 추후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기증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 제 이 장기기증을 받은 위의 두 사람들이, 이름은 모르지만, 건강하게 회복되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요셉이 가족 모두가 퇴원하셔서 집에 계십니다.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회복되어가는 가정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 가정을 향한 기름부으심이 가슴 설레도록 기대됩니다. 요셉이 어머님은 아직은 누워계시지만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계시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신 것이 너무나도 감사할 뿐입니다..

혹 요셉이 가정에 직접 연락을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주소나 이메일로 연락하시면 되겠습니다.

Jashin Koo
15608 Marathon Circle #104
Giathersburg, MD 20878
jashin1028@yahoo.co.kr

다시 한번 여러 믿음의 동역자들과 선배님들께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메릴랜드에서 황지성 드림

요셉이의 하늘

요셉이의 하늘:
촬영 : 민동식 , 2003년 6월 30일 저녁 8시경
Elkhart, Ind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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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11 00:17 책이야기/eKOSTA 서평

'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부터 지금까지 이 질문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되새김질 할 때마다 믿음을 이해하기위해 내가 버려야 할 가치관과 붙잡아야 할 가치관이 있음을 절감한다. 도대체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쉽지 않은 화두이다. '8월의 책'으로 선정한 박영선 목사님의 '신앙 클리닉' 은 이와 같은 질문을 고민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신앙도 클리닉이 필요한 시대다. 세상의 가치관에 젖어 살다 보면 무엇이 세상적 가치관이고, 무엇이 성경적 가치관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비전과 성공에 관해서 그러하다. '하나님을 나의 성공의 사닥다리로 이용하지 마라' 란 말에 동의 하면서도 어느새, 은근히 하나님을 사닥다리 취급하는 나 자신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를 구원해주셨으니 이것은 꼭 들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기도는 나의 기도 리스트에 사라진 적이 없다. 오호통재 라, 언제나 주님만으로 만족하게 되려나?

잠시 저자의 말을 들어 보자.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지닌 축복을 확인하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상태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해를 얼마나 깊이 하느냐에 따라 예수를 믿게 된 그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감사하는 생활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p19)

이 책은 '그 이해'를 깊게 하도록 도와 준다. 신앙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을 제거하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고급 신앙'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으로 나가도록 저자는 촉구한다.

이 책은 9부로 구성되었다. 그것들은 구원이란 무엇인가(1부), 믿음의 조건(2부), 확신:사실인가 감정인가(3부), 신자의 생활근거(4부), 신자의 생활도리(5부), 구원과 교회(6부), 거룩의 연습과 교회(7부), 하나님의 나라가 천당인가(8부), 하나님나라의 운행(9부)으로 전체 50과로 짜여져 있다. 이 구성에서 보다시피, 저자는 구원에서부터 하나님 나라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하룻밤에 후딱 읽어 버릴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하루에 한 과 씩 읽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건강을 뺏기도 하고 물질을 뺏기도 하십니다. 오해와 경멸과 천대 속에서 살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문젯거리인 자녀들도 주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무한히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인간이 무엇이며 인생이 무엇인가, 물질이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이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우리 앞에 가져 다 놓고 유혹하는 현란한 색깔들의 이면에 있는 허무를 비로소 꿰뚤어보는 눈이 생기는 것입니다."...(p207)

보이는 것 이면에 숨어있는 안 보이는 것을 보는 능력, 그것이 믿음이 아닐까 싶다.

사족: 저자의 책 중에서 '하나님의 열심'도 권하고 싶다. 약 20년 전에 출간됐지만 아직도 스테디 셀러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영웅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빚어진 존재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추적한 책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조차 시작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과 더불어 우리에게 '나도 믿음의 인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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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의 4월이었다. 개혁을 표방하던 의원이 패션으로 승부수를 걸었다. 의원 선서식에 흰색 면 바지, 라운드 셔츠 차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날 고성과 퇴장으로 국회가 정회 되었다. '튀는' 패션의 그 캐주얼 의원은 기존 국회의원 들이 문화 수용의 폭이 좁고 옹졸하다고 지적했고, 양복정장의 기성의원 들은 문화의 품위와 격이 떨어졌음을 한탄했다.

그 기사를 읽으며, 20년 전 80년도 중반 한국에서 어색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때만해도, 한국 남자의 양말은 흰색이어야 만 했다. 미국에서 좀 있었던 영향이었을까? 난 그것을 몰랐었던 것이 문제였다. 적어도 나의 상식에는 검은 색 양복에는 짙은 색 양말이 어울리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장례식이 아닌가? 그런데 방안 모든 남자들 옆의 검은 가죽 성경책, 검은 양복 바지 밑으로 하얀 색 이빨처럼 흰색 목양말들이 가지런히 나와있었다. 그 시위행렬 속에서 새까맣게 반질거리던 나의 외로운 나일론 검정 양말은 영 판 썩은 이빨 빠진 자리였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힐끔 나를 보던 눈들… 그때 난 처음으로 소리없이 쏘아대는 '눈총'이 그렇게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줄 처음 알았었다.

사 실, 양말과 셔츠 둘 다 서양에서 수입된 복장이 아닌가? 웬만한 일에는 감정 표현이 덤덤한 한국인의 정서가 이렇게 민감히 자극된 이유가 무엇일까? 유니폼이 주는 장점은 전체의 공통 분모 속에 개인의 변수가 함몰될 수 있는 편리함이다. 물론 개인주의적 사고 방식에서는 자기 표현을 막는 장애요 구속이겠지만, 전체의 고양된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도회의 중심가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각 종의 상표를 자랑스럽게 드러내어 놓고 다니는 것도, 이런 네임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에 자신이 동반승차 되어있다는 착각 때문 일 것이다.

청교도도 옷가지고 싸웠다

한 국인만 옷가지고 옥신각신 하는 것이 아니다. 청교도가 본격적으로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성복논쟁(Vestiarian Controversy,1563) 이었다. 이미 1550년에 존 호퍼 (John Hopper)가 주교 임명 시 성복 입기를 거부한 것은 단순한 복장의 문제가 아니라, 청교도와 성공회 사이의 신학적 입장을 포함한 다양한 이슈들이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난 것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을 걸친 사색과 논쟁의 결과로 정립된 것은, 청교도 사상과 신학적 이념들이었다. 복식논쟁은 그런 사상의 표현 방식에 따른 당연한 귀결에 불과하였다. 물론 청교도의 성복 논쟁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왕권 강화 정책과 맞물린 정치적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정권 쟁취를 위해서 가외의 의미가 부여되었던 조선의 상복 논쟁 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 래서 한국인의 동질성은 의복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단 피부에 와 닿게 하나가 된다는 자극 점이 있어야 된다. 한국인에게 의복은 동질성의 소산, 열매가 아니라, 동질성의 시작이요, 씨앗이다. 동일한 복장은 소속 집단에 귀속하는 의사표시이자 신고식이다. 동질성은 그 다음 하나씩 배워갈 생활의 문제로 남게 될 뿐이다. 목사님 중에 신부님과 같은 복식을 입는 것이 나 개인적으로는 넥타이와 와이셔츠 색깔 고르는 고민을 안 해도 되는 이점이 있을 것이란 이기적인 생각도 하여보지만,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이 불편함을 가지는 것도 복식이 단순한 유니폼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란 생각도 든다.

이 런 한국인의 경향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올림픽의 붉은 열풍이었다. 붉은 색은 전통적으로 중국인이 선호하는 색이다. 한국의 단풍이 그렇게 붉어도, 한국인의 감각에는 조심스러운 색깔이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빨갱이로 통하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공산주의와 더불어 붉은 색은 사회적 금기 조항이었다. 그렇던 한국에 붉은 색의 열풍이 전국을 휩쓸었다. 전국의 거리가 붉은 색으로 도배되다시피 하였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한국계 2세들까지도,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붉은 악마의 휘장과 셔츠를 입고 다녔다. 지방색도, 배경도, 세대도, 이념도, 종교도, 언어까지도 더 이상 갈등의 요소가 아니었다. 복장 통일은 한국인이 선호하는 화합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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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11 00:12 유학생 사역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를 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집에서 처음 여는 파티라서 긴장도 되지만 철저하게 준비해서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갖게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들뜬 마음으로 상상을 합니다.

'파티를 열자!
그래 그럴싸하게 하는 거야.
음식도 모든 종류를 빠짐없이 준비하고 온 집안을 멋있게 장식하는 거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야지.
오후 7시 반이라고 얘기했으니까 늦어도 8시쯤이면 한두 명씩 나타날 거야.
그러면 활짝 웃는 미소로 손님들을 맞이해야지.
아마도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우리 집에서처럼 멋있게 파티를 열지는 못할 거야. 이렇게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고 세심하게 준비를 하는데 안 온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
생각만 해도 정말 신나는 일이야.'

7시 30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 시계와 바깥을 번갈아서 바라보게 됩니다. 8시가 되었습니다. 1명이 나타났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친구에게 이야기 합니다. "와 주어서 고맙다"
친구가 대답합니다. "내가 안 나타나면 네 얼굴을 다시 어떻게 보냐?"
반갑게 맞으면서도 마음은 실망과 걱정으로 눌려 있습니다.
8시 30분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명이 나타납니다.
또 다시 생각합니다.

'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벌써 8시 30분인데 왜 두 명밖에 오지 않은 거지.
나머지 11명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준비도 완벽하게 했고 모두 온다고 약속했는데 왜 오지 않는 걸까?'

캠퍼스에서 성경 공부를 한 번이라도 인도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음 직한 일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집에서 파티를 여는 것하고 캠퍼스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것하고 비교할 수 있느냐고 누군가가 반문하겠지만 그 준비하는 마음과 기다리는 상황은 아주 흡사한 것 같습니다.

지난 5년 반 동안 캠퍼스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간사로 섬겨 오면서 매주 금요일을 같은 마음으로 보내 왔습니다. 금요일 저녁 7:30에 성경 공부를 한다고 모두에게 알리고 일주일 내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름대로는 준비도 열심히 하고 찬양도 연습해 보고 기도하면서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그룹의 멤버들 얼굴을 떠 올리며 내 안에 부어 주신 귀한 말씀을 빨리 전하고 싶어서 못 견뎌 할 때도 있습니다.

드디어 금요일 오후가 되면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할 마음에 흥분된 마음을 가라 앉히며 캠퍼스로 향합니다. 운전을 하고 가면서 '오늘은 몇 명이나 나올까' '아 참 아무개에게 다시 한번 연락을 할걸… 저번 주에도 온다고 해놓고 마지막 순간에 안 타나 났지' '그래도 이번 주에는 많이 나오지 않을까' 등의 생각을 하면서 그 날 전할 말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주차를 하고 등에는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기타를 들고 예약해 놓은 방으로 뚜벅 뚜벅 걸어갑니다. 금요일 저녁인지라 대개는 캠퍼스 전체가 한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면 텅 빈 방안에 혼자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방을 내려 놓고 그날의 성경 공부를 주관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잠시 기도하고 책상들을 소그룹 성경 공부하기에 좋게 배열을 해 놓고 기타 줄도 다시 한번 맞추어 봅니다. 첫번째 학생이 나타날 때까지의 시간이 무척이나 길고 때로는 외롭기도 합니다. 물론 그 방에 함께 와 계시는 예수님이 계셔서 위로가 되지만 눈은 계속 문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복도쪽에서 낯익은 급한 발소리가 들려 옵니다. 한 자매가 들어옵니다. 시계를 보니까 7시 45입니다. 그래도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는 시간을 잘 지키는 자매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8시가 다 되어서야 또 다른 형제 한 분이 나타납니다.

5 분 정도 더 기다리다가 찬양을 시작합니다. 비록 세 사람 밖에 없지만 큰 소리로 찬양을 합니다. 찬양을 하는 중에 문쪽에서 또 다른 자매 한 명이 나타납니다. 갑자기 찬양에 더 큰 힘이 갑니다. 저도 모르게 기타를 힘껏 치다가 줄이 끊어집니다. 순간 당황이 되지만 나머지 5개의 줄을 가지고 계속 찬양을 합니다.

찬양을 마친 후에 그 시간을 성령님께서 주관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다 모이지 않았지만 함께 앉아 있는 귀한 영혼들 한 명 한 명 모두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영혼들을 위해서 말씀을 전할 때 힘을 주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성경 공부가 거의 다 끝 나갈 때 즈음에 또 한 명의 형제가 조용히 들어옵니다. 비록 늦게 와서 성경 공부의 내용을 거의 다 놓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나 반갑습니다. 말씀을 다 전하고 나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제목들을 나누면서 친교 시간을 갖습니다.

결국 멤버 중 다른 6명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은 이번 학기 들어서 한 번도 빠지지 않은 형제입니다. 내일 꼭 전화해 보아야지 하고 결심합니다.

집으로 가는 차에서 생각해 봅니다. '왜 그 형제가 안 나타났을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통화했는데.. 어쩌면 내가 조금 더 열심히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일거야.'

이렇게 지난 5년 반 동안 매주 금요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파티를 연 자가 손님을 초대하여 놓고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나 파티와 캠퍼스에서 제자 삼는 일 사이에는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파티는 사람들이 안 나타나면 실망해서 다시는 안 열겠지만 캠퍼스에서 젊은 영혼들을 예수님께 복종시켜서 제자 삼는 일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꼭 올 건만 같았던 학생들이 몇 번이나 약속을 하고도 안 나타날 때마다 매번 실망하면서도 다음 주에는 그들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간절히 기다리며 또 다시 한 주를 보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수십 번 아니 수천, 수만 번을 실망시켜드린 예수님께서도 나를 변함 없이 기다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점은 하루 저녁만 즐겁고 말아 버릴 파티가 주지 못하는 기쁨이 제자 삼는 일에는 있다는 것입니다. 매 번 실망을 시키면서 안 나타나던 어떤 형제 혹은 자매가 결국은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 잡힌 자가 될 때 느끼는 바로 그 기쁨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게 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 스스로 도 매 주를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다리는 사람이 결국은 또 다른 사람들을 기다려 주게 만드는 그 일 - 바로 제자 삼는 일이 계속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있기에 나는 이번 주에도 캠퍼스로 변함 없이 발걸음을 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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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교회가 이민 2세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보다 이민 역사가 긴 중국과 일본의 예를 볼 때에 지금 관심을 쏟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뻔합니다. 후대들을 신앙적으로 다 잃습니다. 중국과 일본 교회를 보면 2세들이 1세들의 신앙을 전승하지 못해서 1세 교회가 노인들만 남는 쇠락한 교회로 전락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부모님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2세들이 1세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를 한다 해도 기초적인 용어나 알기 때문에 재미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미국 교회를 나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2세들은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 미국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교회에서는 이들이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민 2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문화를 존중해주고 이들이 더 잘 이해하는 언어가 통용되는 교회를, "내 교회다"라는 소유의식을 가질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많은 한국교회들이 2세 목회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주지 아니하고 부모들의 순 한국적인 문화를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간섭과 통제로 인하여 "나의 교회"라는 의식을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약 6년 전에 2세들을 위하여 성인 영어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재정적으로는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금전적으로는 100 퍼센트 지원을 하되 완전 자치권을 인정해주기로 했습니다. 교회 헌법도 바꾸어서 영어부가 한어부에 종속되어있지 않고 대등한 위치로 만들었습니다. 서울침례교회라는 우산 하에 한어부와 영어부가 존재하여 둘 중에서 주일 출석 인원과 예산이 더 많은 쪽 목사가 담임 목사가 되도록 했습니다. 현재로서는 한어부가 크니까 제가 서울침례교회 담임목사입니다. 그러나 한인 이민 숫자가 줄어들어 한어부가 성장을 멈추고 2세 교회가 1세 교회보다 더 커진다면 영어부 목사님이 담임목사가 될 것입니다.

영어부는 처음부터 다민족 교회로 시작하였습니다. 2000년도 인구 조사에서 한인이 1만 341명으로 집계된 휴스턴에서 전도 대상자를 한인 2세로 제한한다면 전도를 하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현재 영어부원의 30퍼센트가 백인을 포함한 타민족이고 교회 리더십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영어부가 한어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영어부 주일 출석 인원이 현재 약 250명입니다. 한어부와 대등한 입장에서 상호 협력하는 체제도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 학교에서는 한어부가 영어부 자녀들을 돌보아주고 있고, 중고등부 주일학교에서는 영어부가 한어부 자녀들을 지도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들이 고려해 볼만한 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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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10 23:52 이달의 초점

시작하며

특 별한 은혜가 넘쳤던 2003년 코스타가 끝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그 풍성했던 천국잔치에 참석한 후에 아직도 그 생생하던 코스타 때 받은 은혜들을 생각하며, 오늘도 매일 매일 코스타 때처럼 승리하며 살아가는 코스탄 들이 있을 것이고, 또 코스타 기간동안에 은혜를 받으면서 결심했던 일들을 처음 며칠 내지 몇 주는 잘 지키다가 지금쯤 지치기 시작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벌써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어쩌면 자포자기 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현재 어떤 상태이던지 혹시라도 이 간증을 읽으시면서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 금은 post KOSTA라 하여 코스타 이후에도 tmKOSTA, eKOSTA, jjKOSTA, gpKOSTA, missionKosta 등의 프로그램과 각 조들이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대화하고 그것도 모자라 메신저를 통해 매일매일 코스타 때처럼 교제를 계속해 나가는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96년 당시만 해도 일년 연중 코스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전혀 없을 때였습니다. 미리 이것을 밝히는 것은 지금 같이 여러 프로그램이 있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이번에 계속되는 제 간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난 호에 실패한 코스타(?)에 대한 선언 후에 일년 동안 하나님께서 제가 전혀 생각치 못한 일을 보여주신 일은 지금으로 말하면 부분적으로 포스트 코스타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코스타 이후에 개인적으로 경험한 교회 청년부 공동체와 한 교회의 변화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96년 코스타 이후 경험한 한 지역 교회의 회복

제 가 다녔던 보스턴 근교의 한 한국 교회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코스타 이후 8월 즈음에 청년부의 위기 상황 가운데 세 명의 임원들이 모여서 새벽기도를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자매는 비교적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믿은 지 3년 정도 밖에 안 되는 그 당시 청년부 회장한테 요한복음을 다시 읽어보라는 권유를 듣게 되었습니다. 황당해 하면서도 자매는 요한복음을 읽기 시작했는데, 요한복음 3장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는 말씀을 읽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몇 주후에 그 자매가 공식적으로 청년부에서 개인적 간증을 할 때를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청년부 임원과 조장으로 섬기고 있던 자매가 청년부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자기가 이제야 처음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다며 지금까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섬겼던 조원 들과 청년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일어난 변화들-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 그리고, 자기는 원래 소리내지 않고 기도하던 사람인데 속으로 기도하던 중에 자기의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던 일- 에 관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기도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마침 목사이신 아버지께 상담하던 중에 한나의 기도를 예로 들어 주시며, 자기같이 차갑고 이성적이고 성령과 은사에 대해서 무지하고 냉랭했던 자에게 심지어 소리 없는 방언을 주시면서 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자기에게 보여 주시는 분임을 알게도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리며, 고집스러운 자신 같은 사람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청년들에게도 임하기를 바란다는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임원 세 명만이 참석하기 시작한 새벽기도회에 더 많은 청년들이 참석해서 15인 승 교회 밴을 운행하고 그 밴이 매일 꽉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비전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교회는 차가웠고 새벽기도가 시작된 지가 5개월 정도밖에 안 되었던 때인지라, 새벽기도에는 기껏해야 예닐곱 명 정도가 참석하던 때였습니다. 그 기대와 비전들이 청년부 사람들 가운데 번져 나가기 시작 하였고, 간증을 나눈 뒤 한 달여가 지난 후에는 승용차 한대로 충분했던 서너 명의 청년들이 한두 사람 불어나면서, 비전과 기대를 갖고 기도한대로 15인 승 교회 밴을 운영 해야만 했으며 급기야는 이 밴이 청년들로 가득 채워져서 매일 아침 새벽 5시 45분에 시작하는 새벽기도로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기대한 것 이상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은 밴도 모자라 몇 대의 승용차로 카 풀을 하면서 이삼십 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거의 매일 새벽마다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밴을 운전하던 형제는 공대 박사과정 학생이었음에도 거의 6개월 동안이나 계속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스케줄에 따라 보스톤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한 명 한 명의 집으로 라이드를 주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몇 명의 헌신자들이 더 생겨 순번을 정해서 그 새벽에 청년들의 발이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새벽기도 참석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변화된 청년부 모습의 한 결과일 뿐이고, 전체적으로는 청년들이 개인적인 회심을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면서 말씀에 대한 갈망과 기도에 대한 열정으로 청년부 모임들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3, 4 개월이 지나면서부터 그 불길이 어른들로 번지게 되었고, 그 다음해 초부터 계속 늘어나는 새벽기도의 참석자들이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에는 70여명의 사람들이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엄청난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 주일 대예배에 참석하는 교인 숫자가 200명이 채 안 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교인 3분의 1 정도가 매일 새벽 5시 45분에 있는 새벽기도에 참석한 셈입니다. 그 중에는 소문을 듣고 주위의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분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참석하는 숫자의 증가만이 아니라 그들의 기도의 태도와 언어가 바뀌며 그 이성적이고 지식적인 청년 학생들에게조차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변화의 결과 중 하나일 뿐이고 전체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죽어있던 교회와 청년부가 살아나는 그런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소망하고 기대하던 참된 '부흥'의 최종적인 모습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부분적으로 한 교회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변화된 청년들과 교인들이 계속해서 그 지역과 나라와 전 세계에 걸친 역사적인 큰 '부흥'을 기대하고 갈망하며 열정으로 기도한다는 면에서 너무나 큰 은혜라고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큰 변화의 또 하나의 결과로는 전해에 열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코스타에 참석했었는데 그 다음해 그 한 교회에서만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밴을 빌려 20시간 동안이나 운전을 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기도 하면서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단일 교회에서는 아마도 가장 많이 코스타 참석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코스타가 열리는 가까운 지역의 교회가 아닌 1000 마일 이나 떨어진 보스턴의 한 작은 지역교회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당시의 변화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 이후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진 지역 교회들의 변화

96 년 코스타 이후에 그렇게 한 지역교회의 회복을 경험한 후에 97년 코스타에 다시 참석하게 되었을 때 또 한번 깜짝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조장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몇 사람들이 간증하는 바, 작년 한 해 동안 코스타 이후 받은 은혜들을 지역 교회에 가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나누게 되었고, 그러면서 교회 공동체가 변하는 것을 경험 했으며 그 결과 중 하나로 몇몇 지역 교회에서 그 전년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함께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여러 지역에서 오신 분들이 입을 맞춘 듯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스턴 지역에서 내가 속한 지역교회에서 경험한 그런 역사가 몇몇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있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중 한 지역에서는 코스타 이후에 그 지역의 몇몇 교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서로 협력하며 사랑하며 그 지역 한인 유학생들과 이민 사회를 함께 돕는 사역을 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고백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을 행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 집회에서 일회적으로 큰 역사를 허락하시지는 않았지만, 점차적으로 각 지역교회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셨던 것입니다. 그 때 당시 저는 간사도 아니 였고, 전체적인 코스타의 진행이나 준비나 계획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단 두 번 그것도 처음으로 참석했던 한 개인이 느낀 것이기에 얼마나 객관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제게 주어진 정보가 아주 제한적이라서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주관적으로 한 개인이 바라고 원하는 대로만 듣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참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제한적으로 제게 주어진 정보와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서 제가 느끼게 된 점을 기억을 더듬어서라도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변화는 주제에 상관없이 매년 일어나는 변화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저 개인적으로는 그 해의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특별했다고 느끼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그 지역교회 회복의 현장 한 가운데 서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나눔의 기회가 우리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들이 몇몇의 기억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객관적으로 기록되고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받은 축복

교 회의 회복을 통해 받은 복을 누리던 그 때는 저에겐 개인적으로도 큰 복을 받았던 한 해였습니다. 전혀 연구 조교를 얻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그 때에, 그리고 다가오는 가을학기에 조교자리를 못 찾으면 당장 등록을 할 수 없었던 그 때에 코스타에서 만났던 조원 들에게 기도 제목을 나눈 뒤,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저는 극적으로 연구조교 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기적은 저희 코스타 조원 들을 비롯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코스타 때 조원 들의 계속적인 기도 외에, 다니던 미국 교회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몇몇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전략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때 당시 제가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에 세 분의 교수가 있었는데, 한 분은 정년퇴직에 가까워서 더 이상 학생을 받지 않았고, 또 한 분은 큰 병으로 학교를 나오지 못하였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한 교수만을 바라볼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의 박사과정 말년에 있던 미국 친구가 아무 이유 없이 저를 아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교수에게 편지를 쓰도록 권유하기도 하고 편지 수정도 봐 주고, 박사과정으로 연구조교 신청을 하면 거의 불가능하니 석사를 일단 하기로 하고 석사 기간 동안만 연구조교를 하게 해 달라고 하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권고도 해 주었습니다. 결국 제가 그의 도움을 받은 것이 연구 조교 자리를 얻는 데 유용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이것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 하긴 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런 접근 없이는 사실 제가 연구 조교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가 나중에 제 석사 과정 연구 테마까지도 제공 해주고 무능력하고 실력 없는 제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일년 후에 석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기적같이 연구조교가 확정된 이후로 유학생활 일년 동안 너무 지치고 힘들었던 때라 쉬고 싶기도 하고, 또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한국을 다녀와야 될 것 같아서, 급히 서둘러 2주 동안 한국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생각치도 않게 친한 교회 선배의 소개로 지금은 제 아내가 되어있는 자매를 만나게 되었고, 6개월이 채 되기도 전인 그 다음해 2월초에 결혼을 하고, 97년 코스타에는 함께 부부로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 하면서

2003 년 코스타에 특별한 은혜가 있었음에도 저는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사항별로 꼬집어서 얘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받았던 시간이나 사건이나 말씀이 없어서도 아니고, 저 개인적으로는 정리가 조금 늦게 되는 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이제 또 다시 일년을 살면서 코스타 때에 감동하면서 받았던 그 은혜의 말씀들을 가지고 이 세상 속에서, 특별히 저의 삶의 영역이 될 제주도 지역에서, '순결'하게 살기위해 씨름하며 얻을 축복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보류해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받은 은혜 자체를 나누며 풍성해지는 기쁨을 모른다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웬 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꼭 그러고 싶어집니다. 지금 96년의 코스타와 그 이후 일년 동안 경험한 변화들을 기억하며 간증하듯이, 나중에 이번 코스타에서 받은 은혜와 코스타 이후에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또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의 말씀대로 이제는 매일 매일을 코스타처럼 살아가는 daily KOSTA, 즉 dKOSTA로 살아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올해에도 96년 이후에 있었던 그런 지역 교회들의 회복의 역사가 우리 코스탄들을 통해 계속되어지고, 더 나아가 '순결한 삶'과 '거룩하게 구별된 삶', 즉 '먼저 자기 집 앞을 청소하는' 그런 선교사적 삶을 통해 적극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 나가는 저와 코스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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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8월호

한국에서 이민 온지 얼마 안 되는 분이 언젠가 교회 친교 시간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 이 지역을 잘 모르는데, 음, 이 지역 학군은 어때? 우리는 아이가 둘이 있는데, 애들 교육문제에 대해서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네. 뭐 이 동네 학군 괜찮아요. 지금 사시는 곳에서 적합한 공립학교에 보내세요. 아마 아이들을 위해서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program도 잘 되어 있고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과 친구하기도 좋을 거에요." 그러면서 이 지역에 있는 여러 초, 중, 고 공립학교 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근데, 이야기를 한 참 듣고 계시던 한 40대 초반 자매님께서 "에구, 무슨 공립학교야? 이왕 미국까지 왔는데 …… 공립학교는 학문적으로 수준이 너무 낮아. 그리고 워낙 못 사는 애들을 비롯해서 가정환경이 안 좋은 애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안 좋아. 더군다나 좋은 대학 보내려면 어렸을 때 부터 college prep school을 보내서 기초를 튼튼히 해 주어야 좋은 대학 가서 훌륭한 사람 되고 부모들이 이민 와서 고생한 보람 있지. 또, 대부분 이런 사립학교 들은 성경 공부도 시키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심어 줄 수가 있어서 아주 좋다고. 그러니까 돈이 좀 들어도 사립학교 보내. 알았어?"

유난히 한국인들은 그 어느 민족들 보다 교육열이 높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정규 수업 이외에 어려 서부터 비싼 사교육비를 들여 아이들을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시 경쟁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는 미국에 있는 한인들 역시 이와 똑같은 현실임을 발견합니다. 미국은 초, 중, 고 공립학교가 무료인데 비해서 사립학교는 대학등록금 만큼이나 학비가 비싸고 장학제도나 어떤 특혜도 다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립학교를 선호하고 특히 college prep school을 선호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첫째, 사립학교는 높은 학문적인 수준과 대학 진학 시험인 SAT (Scholastic Aptitude Test)나 ACT (American College Test)를 위주로 공부를 시키고 둘째, 사립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로 오로지 대학 진학을 목표하는 아이들만 있기 때문에 많은 한인 부모들은 제정적인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도 어떻게 해서든 자녀들을 사립학교에서 교육시키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들의 의견에 저도 처음에는 많이 동의 했고 나중에 저 역시 가정을 이루어 자녀가 있으면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공립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해 보고 또 이번 코스타 2003을 다녀와서 저의 생각은 아주 많이 바뀌었습니다. 공립학교, 특히, 미국의 공립학교는 미국 사회와 문화를 배우는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처럼 단일 민족국가가 아닌 여러 이민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를 이루고 있는 미국의 사회와 문화는 참으로 다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살고 있는 조지아는 아직도 미국 남부의 전통을 그대로 갖추고 있어서 남부 사람들의 훈훈한 인정미Southern Hospitality를 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 보다는 중산층 혹은 그 보다 못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많고 그렇다 보니 결손 가정이나 마약 및 알코올 중독, 그리고 범죄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들도 있을 수 있고 대학 진학 목표 보다는 기술 교육을 받아 취업 일선으로 가는 아이들도 있으면 또 일반적인 교육 자체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 해서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해 GED (General Educational Diploma)을 받는 학생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특수 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있기도 합니다. 사회학자인 밴더라 (Bandera)는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고 배우려는 경향이 있다고 그의 학설에서 이야기하는데 많은 부모님들이 이런 이유로 사립학교를 선호할 수도 잇습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인데, 한 번 이렇게 생각을 해 보았으면 합니다.

학교 교육은 단지 학문적인 교육만이 이루어 지는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주입식, 입시 위주의 교육에 비해서 미국의 교육은 전인 교육이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행동 수정 (Behavior Management) 방법과 가르치는 방법 (Teaching method)이 매우 창의적이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림으로써 사회 생활의 기초를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즉, 학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한 작은 사회라고 볼 수가 있는데,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다양한 문화와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고, 그렇다 보니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인 이슈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다란 사회에 좀 더 잘 적응하고 살아가려면 어려서부터 올바른 훈련이 필요하고 그런 훈련의 장소는 공립학교 입니다. 사립학교는 어떤 특정한 사회 계층의 학부모님들과 아이들이 모여 추구하는 목적의식이 거의 비슷하나 공립학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사회 계층의 아이들과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환경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도 가질 수 있고 또 세상의 그릇된 환경을 보면서 그것이 옳지 못함을 판단하고 자기의 자아와 정체성을 발견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번 코스타 2003의 주제 말씀인 마태 복음 10장 16절을 묵상해 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우리의 아이들이 속해 있는 대부분의 미국 공립학교가 갖고 있는 조건들은 이리들이 우글거리는 거짓과 그릇된 모습들만 갖춘 환경에 비유할 수 있는데,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아이들은 지혜롭고 순결함에 대해 "학교"라는 작은 울타리 속에서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론 세상 속에 순결한 아이들로 키우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판단력이 흐린 이유로 교사나 학부모님들의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 학부모, 교사가 한 마음이 되어서 사랑으로 아이들을 섬길 때 그들은 이 험악한 세상에서의 삶을 지혜롭게 개척해 나갈 수 있고 그런 독립심과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어떤 한 사회 계층이 모인 장소 보다는 조그만 사회의 한 파트에서의 생활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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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8월호

Q: 나는 순수히 섬기는데 이웃이 날 이용해요! 그 사람이 싫어졌어요!
    어떡하지요?
A: 창조의 3가지 차원 Balance 저울을 Check up 하세요.

한 싱글 자매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 사람이 정말 싫어 졌어요.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 순수하게 이제까지 끊임없이 도와주고, 나누어 주었는데, 그 사람은 끊임없이 저를 이용만 해요. 이제는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 자꾸 피하게 되요. 이렇게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벌써 그렇게 되었는데 어떡하죠?"

전화에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섬기다가 지친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철면피같이 양심 없는 사람들에 질린 듯 했다. 하지만 그래도 착해야 하고 복음은 전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감 때문에 답답하고 억눌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려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이후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늘 가득 차 있었던 한 자매가 유학을 오게 되었다. 그 자매에게 있어서 이 유학은 공부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선교사로의 파송 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유학을 와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 어떤 이웃을 만나게 되면서 이 자매는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에 함께 나갈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2년이 지나도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자매에게서 미안해 하지도 않고 도움을 부탁하였고, 당연하다는 듯이 필요한 정보를 뺏어 갔다. 그러면서 항상 이 자매에게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간주했다. 반면에 그 자신의 것은 전혀 나누지도, 아니 나눌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점점 많이 흘러가면서 이 자매에게 결국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피하고 싶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경우는 전화 통화를 한 그 자매의 경우만은 아니다. 오히려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는 그리스도인 들이 삶의 현장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복음 선포의 열정을 잃고 오히려 상처 받아 무능력하게 그 자리에 주저 않게 된다. 이 자매의 경험과 비슷하게 심지어는 이러한 경우도 있었다.

결혼 한 한인 유학생 가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기숙사에 살고있는 한 유학생 자매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음식을 만들면 같은 층에 사는 한인 이웃과 나누고 이웃의 아이들이 자신의 집에서 놀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개방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부터는 늘 당연히 여기고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을 보내는 이웃들이 이 자매에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공부에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제출해야 할 페이퍼도 정상적으로 끝내는데 어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나도 공부하는 유학생인데 자기들은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아이들을 보내고, 나는 공부도 못하고…"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웃이 더욱 불편한 존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 불고기' 먹는 것도 부담되었다. 무엇을 하면 늘 나누었는데 오늘은 특별히 불고기해서 냄새가 나는데 안 나눌 수도 없고, 나누자니 마음이 무겁고...

성격적으로 내성적인 그녀는 결국 말 못하고 답답한 상황가운데 스스로 억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이웃이 싫어지고, 이웃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싶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려 해도 기도가 안되고, 이웃을 만나도 반갑지 않게 되고… 결국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섬기다가 사람에 실망하고 상처 입어 주저 앉게 되는 경우를 경험하거나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혹은 우리 주변에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 착하고 순진하게 섬기는 좋은 그리스도인을 많이 보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할렐루야! 너무 좋다. 참 잘한다.' 하는 칭찬인가? 아니면 '좋은 사람 만나야 하는데', '이용당하지 않아야 할 텐데' 혹은 '지혜롭게 해야 할 텐데', '너무 착해만 가지고도 안 돼' 하는 염려인가? 아니면 칭찬 반 염려 반인가?

그리스도인 이라 하면 모두가 이 두 자매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순진하게 사랑하고 섬기면서 복음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이 자매들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한편으론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칭찬과 염려가 교차해 가는가?

그것은 순진한 그리스도인이 접하게 되는 현실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00여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도 그러했음이 분명하다. 그러했기에 예수님도 12 제자들을 양육하여 세우시고 그들을 삶의 현장으로 파송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마10:16a) 예수님은 세상을 '이리'로 표현하신 반면에 상대적으로 제자들을 양으로 표현 하셨다. 물론 '이리'의 이미지는 여러 방면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바로 그러한 곳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아마 제자들이 접하게 되는 세상이 어떠한 지를 단 적으로 알려주신 말씀일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그 이리와 같은 세상을 접할 제자들은 양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음을 지적하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이리'와 같은 모습을 만났을 때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전쟁에 있어서 적을 알면 그 싸움은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이 '이리'와 같다는 것을 알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2000년 전의 세상이나 오늘의 세상이나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현실은 다를 바 없기에 아마도 그러한 양처럼 순진한 그리스도인 들이 접하는 세상의 쉽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해 2003년 USA 코스타 (KOSTA) 주제도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 인'으로 선정되었으리라!

그러한 세상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어지는 제자들에게 2000여년 전에 이렇게 당부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b).

바로 예수님은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양' 같은 제자들이 승리하는 전략 2가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것이다. 첫째는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앞에 '지혜'가 먼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지혜를 먼저 가지고 난 다음에 순결한 모습으로 살아라 하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식당에서 음식이 손님에게 나올 때 음식과 그 음식을 담은 그릇이 하나가 되어 나온 것과 같다. 음식과 그릇을 떼어서 놓지 못하듯이 말이다. 음식을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비유한다면 그 음식을 담은 그릇은 '뱀처럼 지혜로움' 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뱀과 같은 지혜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는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 놓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전략 2가지는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이 하나로 붙어있는 셈이다. '순결'이 그 승리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지혜'는 승리로 이끄는 방법론인 것이다. 결국 이기는 전략은 하나! 야구공 던지듯이 지혜로 감싼 순결의 볼을 던지는 것. 이것이 양 같은 제자들이 바로 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인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뱀과 같은 지혜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는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 놓여질 수 있는가?

그것은 영적인 차원 (Spiritual Dimension), 육체적 차원 (Physical Dimension), 그리고 감정적 차원 (Emotional dimension)의 균형(Balance)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셨을 때 우리에게 영(Spirit)만 주시지 않았다. 영과 더불어 우리의 육체(Body)와 우리의 마음(Heart)도 만들어 주셨다. 영(Spirit)과 관계된 부분을 영적인 차원(Spiritual dimension)으로 본다면 육체(Body)는 육체적 차원(Physical dimension)이요,마음/감정(Heart)과 관계된 부분을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으로 볼 수 있다. 이것들 각자 각자가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 다른 역할을 하지만 이들은 또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서로에게 긴밀하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먼저 영성 차원(Spiritual dimension) 을 보자 .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날아갈 것(up) 같은 아니 할렐루야가 터져 나오는 감정적 차원의 감격과 사랑, 용서와 같은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주님과 동행의 확신으로 인해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지는 육체적 차원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육체적 차원(Physical dimension)을 보자. 육체가 힘이 들어졌거나, 약해지거나, 혹은 병이 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감정적 차원이 처지게 된다(down). 교회에 가는 것도 그리스도인 들의 섬김의 자리에의 참여도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진다. 무엇이든지 귀찮고 일단 쉬고 싶어진다.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을 보자. 누군가와의 관계가 감정적으로 상하거나 불편한 관계가 되면 어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부담이 된다. 가는 길목에 그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돌아서 가고 만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사람과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지 싫어진다. 더욱이 그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일 경우는 찬양과 기도가 막히게 됨을 경험한다. 부부가 싸워도 기도가 막힘을 경험한다. 애인과 싸워도 찬양이 막힘을 경험한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 차원과 육체적 차원, 그리고 감정적 차원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하나를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세 차원의 밸런스(balaence)가 잘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한 쪽으로 인해 다른 기능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웍샾(Workshop):

이 그림들에 자신의 현재 영적, 육체적, 감정적 저울을 확인해 보라.
셋 다 정상적 인가?어느 저울이 가장 떨어져 있는가?
왜 떨어졌는가?어떻게 그 떨어진 저울을 정상적으로 올릴 것인가?

자!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차원 (Three Dimension) 창조의 원리와 그 균형의 지혜를 가지고 이 글을 시작할 때 제기된 자매들의 경우들을 다시 한번 첵업(Check up)하면서 문제와 그 해결 방법을 찾아 보자.

첫 번째 싱글 자매의 경우를 첵업(check-up) 해 보자.

이 자매의 경우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나눔을 통해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섬겨 왔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 들은 누구나 되어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다. 이 자매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자매의 마음을 훨씬 전부터 읽어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그 자매의 생각은 모른척하고 그 자매 이용하기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이를 위해 섬기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바울도 권면하기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갈 6:9a)했던 것 아닌가!.

결국 이 자매의 상태는 상대방의 인격적 관계 (I-Thou)가 아닌 이용의 관계(I-It) 에서 개인적으로 낙심하게 된 상태이다. 그 동안 쌓아 놓은 관계도 무너지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미움까지 생긴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이 자매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전에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과거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가 더 중요한 문제다.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까?

창조의 3가지 차원과 균형의 저울로 돌아가자. 이런 상태에서 이 자매는 무엇보다도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에서 많이 다운(down)이 된 상태이다. 이 감정이 더 이상의 상대방에 대해서 물질적 나눔과 도움을 피곤하고 지치도록(육체적 차원) 그리고 무의미(meaningless)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선한 의도를 악용하는 것에 미움으로 반응(영적인 측면)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이 자매는 현재 관계가 어그러졌다 할 지라도 관계회복을 위해 의무적으로 노력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감정적 쉼이 필요하다. 관계의 회복은 내가 회복이 되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양적으로 다시 관계가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할 지라도 사람은 지극히 영적인 감각을 가지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내가 회복되지 않은 외양적 관계의 회복은 더 깊은 상처를 두 사람 관계에 가져오게 만든다. 이것이 사탄의 계략이다. 성령의 거룩한 부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착해야 하고 관계가 좋아야 하고 용서해야 하는 의무감을 자꾸 주어서 부담을 가지게 만들어 결국 깨지고 무너뜨리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것은 내적부터 우러나오는 근본적 자유 함과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이지 외양적 겉치레의 관계회복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상대방이 바로 느끼게 된다. 사람이 속으로는 "너 이놈 두고 보자, 잡아 먹을 꺼야" 하면서 겉으로는 웃으며 개에게 "누렁아 이리와" 해 봐라. 꼬리를 살랑거리며 오나. 으르렁 거릴 뿐이다. 하물며 사람이 그것을 모르겠는가?

내 마음이 먼저 회복될 때까지 어그러진 관계 그대로 놓고 쉬어라. 그러면 성령께서 내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기 시작할 것이다. 그 자매의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신다. 주님이 얼마나 자매를 사랑하시겠는가! 만일 어느 제자가 스승의 영광과 그 영광의 나눔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어느 스승이 그 제자를 미워하겠는가?

똑같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하는 모든 일들을 다 보시고 기뻐하고 계신다. 주님이 우리의 중심까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의 지침과 상함을 만지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쫀쫀하신 분이 아니다. 걱정 마라. 푹 쉬라. 그리고 아픈 가슴 상한 감정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에 울고 또 울라. 내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이때 성령님이 이 자매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실 뿐 아니라 한층 더 그리스도안에 성숙하도록 이끄신다. 이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성령님은 이 기회를 더 귀하게도 사용하신다. 이제껏 이 자매의 사랑과 섬김을 이용했던 상대방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돌이킬 수도 있게 만드신다. 혹은 이러한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이 자매에 대해서 조심하게도 만드신다. 이 자매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만드신다.

그런데 만약 그 불편한 사람과 피할 수 없는 자리에 할 수 없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친절한 관계만 유지를 하고, 말조심을 하라. 감정 표현에 있어서 조심을 하라. 그리고 내가 회복될 때 까지 가능하면 잠시 바쁜 것처럼 지혜롭게 일대일 자리를 피하라. 성경의 말씀대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은 지혜로운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두 번째 결혼한 자매의 경우도 창조의 세 가지 차원에서 그 균형을 첵업(Check up) 해 보자.

이 자매 역시 첫 번째 싱글 자매와 비슷한 경우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본이 된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를 원해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을 위해 집을 개방하였다. 기숙사의 누구에게도 좋은 이웃이 되었다. 영적 측면(spiritual dimension) 에서 잘 자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 자매 역시 이웃들의 이기적인 모습들에 상처를 받기 시작했다(감정적 차원: emotional dimension). 그런데 이 자매의 경우 잘 생각해 보면 감정적 차원의 상처를 받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원인이 되었던 것은 자신의 학업의 관리 (management) 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보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놀러 오는 이웃집 아이들에 대해서 내성적인 그녀의 성격이 오지 말라고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 차마 이웃집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덕스러움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이야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시간을 조절(time manage)하는데 실패하게 되었고 이것은 자신의 학업의 불성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육체적 측면: physical dimension). 이러한 스트레스는 결국 영적인 차원(spiritual dimension)과 감정적인 차원(emotional dimension)을 상처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웃이 보내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이웃들의 행위를 이기주의로 보도록 만들었고, 그들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사랑의 음식을 나누었던 것들이 이제는 의무감이 되어서 부담이 되었다. 더욱이 그녀의 내성적 성격은 더욱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표현하는 것을 억눌렀다. 이러한 억눌림은 영적 차원에까지 미쳐 기도가 막히고 결국 이웃이 싫어지게까지 되었다. 급기야는 이사까지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피해 속에 갇히게 되어 우울증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자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 차원의 관리가 잘 되지 않은 것이다. 육체적 차원에서의 무너짐이 결국 감정적 차원과 영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인간 관계와 주변의 일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자신을 피해자의 인생으로 몰아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자매는 육체적 차원의 밸런스(Physical dimensional balance)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 시간 관리를 되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녀들과 놀 시간, 공부 할 시간, 밥 먹을 시간, 등등 의 시간표를 짜라. 그리고는 이 스케줄에 맞추어서 이웃집 아이들이 놀러 올 경우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놀 수 있으니까 그때 오라고 이야기를 해서 자신의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 학업이라고 하는 것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라면 그녀에게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어진 시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니 만큼 그에게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이것을 보완하려고 밤에 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려 한다. 하지만 육신은 육신인지라 쉼이 필요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또 졸기까지 하게 만들어 보완이 안 되는 적도 많다. 입술을 악 물고 밤에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한다 할 지라도 역시 낮에 피곤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육신이다. 몸이 피곤하게 되면 만사가 귀찮게 된다. 이웃집 아이들 때문에 쉬지 못해 화가 나고, 누군가를 만나야 하면 피곤한데 이야기해야 하니 피하고 싶고, 심지어는 교회 가는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는 강한 부담감 때문에 교회에도 가기 싫어지거나 가더라도 한 두 시간 섬기는 것을 굉장히 부담을 가지게 된다. 결국 육체적 차원의 균형을 잃어 버리면 영적, 감정적 차원의 균형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지게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네 마음(감정적 차원: heart)을 다하고 정성(영적인 측면: soul) 을 다하고 뜻(육체적 차원: mind)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말씀을 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던 우리의 열정에 혹은 주님을 위한 우리의 섬김에 이상이 생겼는가?

첫째는 창조의 세 가지 차원, 즉 영적인 차원, 감정적 차원, 육체적 차원의 균형을 첵크 해 보라.

둘째는 어느 차원의 어떠한 원인 때문에 그 이상이 왔는지 그 근본적 원인을 진단하라.

셋째는 이상이 생긴 차원의 균형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라.

넷째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이 다 아심을 기억하고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 그리고 담대 하라.

다섯째는 하나님은 그렇게 째째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한없이 넓고 사랑이 풍성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열정과 섬김에 문제가 생겼나요?

3 가지 창조 원칙 저울의 균형을 첵크 업 하세요.

p.s. 개인적 신앙의 문제가 있거나 소그룹을 인도할 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메일 주세요. 이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름의 비밀은 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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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8월호

저희는 지금 유학(留學) 중입니다. '유학' 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지요? 1990년대 들어 조기유학, 단기유학 같은 말이 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는 유학이라는 말이 담아내고 있는 의미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유학' 하면 대개는 한 남자가 한국에 돌아가 교수가 되기 위해 학위를 따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지요.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이름 있는 학교에 입학해야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죽어라 공부해야 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남편이 거의 모든 시간을 책과 씨름하는 동안 여성 배우자 역시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살림하고 애들 키우면서 나름의 고생을 하게 됩니다. 부자가 아닌 이상에야 유학 기간 내내 돈에 쪼들리면서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유학 기간을 즐기기보다는 할 수 있는 한 빨리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덕이 되고 말지요. 대충 이러한 몇 컷의 스틸 사진들이 유학 생활의 스테레오 타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색깔이 다르기에 유학의 빛깔도 가지각색일 겝니다. 아무리 각박하고 버거운 유학 생활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나름의 여유와 멋이 없을 리 없지요. 하지만 유학에 대한 전체적인 틀은 확고 불변하며 좀체 끄덕하지 않습니다. 저희 가족의 유학 역시 다른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같은 틀에서 나온 변주(變奏)가 아니라 다른 틀을 지닌, 어찌 보면 약간은 파격적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희 가정의 조금은 다른 유학 생활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앞날에 매이지 않는 유학(幼學)

제 지인(知人)들이 제가 공부하러 토론토에 온 것까지는 아는데 재미있게도 제가 무얼 공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더라구요. 저는 지금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에서 철학적 미학(Philosophical Aesthetics) 석사과정을 밟으러 왔다가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아귀가 다소 맞지 않는 면이 있어서 신학에 토대를 둔 학제학적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로 전공을 변경해서 수학하고 있습니다. 학부시절부터 저의 일관된 관심사가 세계관(또는 종교, 혹은 신학) 및 문화('대중문화'라고 할 때의 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양식 전체를 가리킬 때의 '문화')의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신학(종교학, religious studies)과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그리고 철학이 버무려진 비빔밥식 공부에 아주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오늘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신학'하는 실비아 키이스맛(Sylvia Keesmaat)과 브라이언 월쉬(Brian Walsh) 부부를 저의 멘토(mentor)로 삼아 공부하는 것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일입니다.

지금 하는 공부를 마친 다음에는--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일반학교로 적을 옮기거나 우리 학교를 포함한 기독교 계통의 학교 또는 신학교에서 문화와 관련된 공부(문화이론, 문화철학, 혹은 문화신학)를 하거나 방향을 조금 바꾸어서 영성신학이나 가정상담학도 상당히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학부부터 시작해 석사과정,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따로국밥식 전공을 하려는 것에 대해 저를 아끼시는 몇몇 분들은 공부를 마친 다음의 일을 염려하시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전공의 변경으로 인한 불이익을 이름이지요. 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 더구나 박사 실업자가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전공을 바꾸는 것은 장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다소 무모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략에서라면 모를까 지위나 생계를 위해서 어떤 자리에 연연하는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무슨 공부를 하든지 앞으로 이어질 학문의 모든 여정을 그 분께 내맡기는 유목민적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저는 더디 가고 에둘러 가더라도 이미 주어진 레디메이드 학문이 아닌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유목민적인 공부를 해서, 인문학다운 인문학(人文學), 즉 사람(人)과 문화(文)를 살리는 학문(學)을 하고 싶습니다.

소제목에 사용한 유학(幼學)이란 한자는 본디 고려 및 조선 시대에,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儒生)을 이르던 말인데 저도 이처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내키는 대로 공부하고 있으니 저의 유학 생활을 지칭하는 말로 이보다 더 좋은 말이 또 있는가 싶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나가자면, 박사학위를 받아오면 전부 다 강단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식적인 생각'이 얼마나 지식인들과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를 지식인들에게 가해지는 일종의 폭력으로 봅니다. 물론 교수라는 폼나는 자리에만 연연하는 대부분의 박사 학위 소지자 자신들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유학 갔다 오면 당연히 교수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패배자로 간주하는 집단무의식적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웬만한 내공으로는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학위를 받고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지천으로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부담감이 현장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막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엄청난 손실을 빚어내고 있는 실정이지요.

대학 주위에는 강단의 빈자리를 뚫으려는 사람들이 '박사실업자'라는 호칭을 달고 버글거리는 반면 '현장'에는 전문가가 부족하다며 볼멘 소리들을 하더군요. 박사님들 역시 "내가 이걸 따느라 얼마나 많은 돈과 정력을 들였는데…"하는 '본전생각'만 버린다면 창조적인 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을 텐데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물론 제 취향이긴 하지만 학위를 받고 학자연(然)입네 하는 것보다 시민단체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더 폼나지 않을까요? 예를 들자면, 월드컵 4강을 이루었던 히딩크 사단의 체력담당관이 박사 출신임은 내남이 다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제가 언제까지 공부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저를 심으신 이 땅과 이 시대에 사람과 문화를 살리는 데 한몫 거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기실 공부를 마친 다음에 제가 가장 하고픈 일은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농사입니다. 4시간 밭을 일구고(피조계와의 사귐) 4시간 공부하고(삶과 문화를 배움) 4시간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이웃을 섬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훗날 이곳 캐나다에 머물지 고국으로 돌아올지 그 역시 님의 뜻을 따르겠지만, 만약 한국에 돌아온다면 갯살림, 들살림, 산살림이 고루 가능한 천혜의 공간인 변산(邊山) 같은 곳에 가서 태평농법(泰平農法)으로 태평하게 농사지으며 농촌과 지역 사회를 기름지게 할 하며 살 수 있다면 대만족이겠고, 외국에 남는다면 켄터키(Kentucky)에서 농사짓는 괴짜 노인이자 기독교 작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와 버몬트(Vermont)의 숲 속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다 간 니어링 부부를 따라 캐나다의 대평원(prairie) 같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북미에 사는 이들 및 이곳의 기독인들, 그리고 이민 온 한인들을 소박하게 섬기며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흡족할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有學)

지난 가을학기는 공부만을 놓고 봤을 때 가장 버거운 한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언어의 문제도 큰데, 전공 변경이라는 이중고까지 겹쳐서 호락호락하지 않더군요. 게다가 아무리 질박하고 소박한 삶을 영위하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에 얽혀서 살다보니 토론토 정착과 관련된 굵고 자지레한 일들이 첫 학기와 두 학기 내내 적지 않은 시간을 뺏어갔습니다. 더구나 작년 6월 편도선 수술로 인한 몸의 변화와 뒤따른 세 차례의 출혈로 인한 체력 저하로 인해 두 세 시간만 앉아서 공부를 해도 더 이상 집중을 못할 정도로 눈이 아프고 지치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설마 제가 한 학기 내내 한숨만 푹푹 쉬며 살았으리라 생각지는 않으시겠죠? 만만치는 않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특유의 여유와 낙관으로 늘 웃으며 지냈더니 군대 동료들이 그랬듯이 여기 와서도 학교 사람들이 저를 해피맨(happy man)이라고 부르더군요.

가족에게로 눈을 돌려보자면, 제가 늘 보살펴야 할 사랑하는 두 사람 역시 꽤 많은 시간을 가져갔습니다. 저 역시 유학 첫 학기인지라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두 사람 역시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첫 발을 내디딘지라 말은 꺼내지 않아도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달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공부만 놓고 보자면(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그렇게 분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안팎으로 우환이 겹친 격인데, 다행히도 제게는 크게 고민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고민이라는 것이 대개는 확고불변하지 못한 원칙에서 비롯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철저하게 학업보다 가정을 앞에 두는 것을 제 유학 생활 전체를 관통할 몇 가지 원칙 중 하나로 삼았거든요. 물론 당장 내야 할 과제물이 있을 때는 양해를 구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평소에는 상당한 시간을 가족과 더불어 보냈습니다. 이를테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찍 귀가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기회가 닿는 대로 장도 같이 보고 세탁소도 같이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유학 와서 공부에 전무하기 보다 가족을 먼저 챙겼다고 하니 어찌 보면 자랑은 아니지만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울 아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백방으로 알아보았고, 토론토 지역 소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채널을 열어주었고, 학교 친구 에이미와 상호한미교습(서로 한국말과 영어를 가르쳐 주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해민이 난날(生日)도 아내랑 더불어 지성으로 챙겨주고, 집에만 있는 해민이가 심심해하지 않도록 귀갓길에 중고가게를 헌팅하여 장난감도 자주 안겨주고 관심 있어 하는 책과 비디오도 검색해서 끊어지지 않게 대어주었습니다. 동네도서관과 지역문화센터에서 무료로 혹은 저렴하게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을 찾아 데려가고, 가족과의 나들이를 꿈꾸며 매월 토론토의 가족관련 소식지를 챙기고, 해민이와 아내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토론토의 가볼 만한 곳과 먹을 만한 곳이 담긴 책--Toronto: The Family-Tasted Guide to Fun Places 또는 Toronto with Kids와 같은 책들--은 동네 도서관에서 죄다 가져다가 읽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관계'가 '성취'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가족은 항상 공부보다 한 발 앞서 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제출해야 할 과제를 어떻게 마쳐야 할지 캄캄한 지경이라도 해민이 침대에 나란히 앉아 그림책과 성서이야기책을 읽어주지 않고 잠자리 뽀뽀(goodnight kiss)를 한 적이 없습니다. 서 있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지칠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어도 밥 먹고 설거지는 했습니다. 아내가 그냥 두라고 하면 "밤에 10분만 늦게 자면 되는 걸, 뭘."하며 고무장갑을 끼곤 했지요.

이번 소제목에 달린 단어 '유학'(有學)은 원래 불교 용어로서 불가에 귀의하여 진리를 인식하였으나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하여 항상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닦는 불제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저 역시 공부에 전념하러 여기 왔으나 가족에 대한 번뇌를 끊지 못하여 늘 가족에게 마음을 두고(有) 공부(學)를 하니 유학(有學)이라 한들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닌 듯 합니다.

생활을 즐기며 삶을 통해 배우는 유학(遊學)

유학(遊學)이란 타향에서 공부한다는 뜻으로 우리 어릴 적 시골 출신 선생님이 우스개로 "이래봬도 내가 도시에 유학 다녀 온 사람이여"라고 하면 어린 학생들이 "하하, 선생님. 도시에서 공부하는 것도 유학입니까?"라고 웃을 때의 그 유학입니다(실은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유학과는 한자가 다르지요). 그런데 하필 배울 학(學)자 앞에 정반대의 의미인 다닐/놀 유(遊)자를 썼을까요? 읍내에만 가도 눈이 휘둥그래지는 시골 출신의 학생에게는 장안을 다니며 보고 겪는 모든 것도 다 공부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처럼 보고 겪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겨우 하루에 8시간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자는 것이 목표인 저 같은 사람에게는, 유엔에서 무려 다섯 해나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국제적인(cosmopolitan) 도시로 선정한 이곳 토론토에서 오만가지 문화를 겪으며 배우는 인생 공부를 더 즐기는 사람에게는, 외국에 유학 갔다고 할 때의 '유학'(留學)보다는 '유학'(遊學)이 더 맞을 겁니다.

작년 여름 토론토에 닿자마자 이 도시를 사랑하고자 기도하였고, 그 기도가 응답이 되어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처럼 진실로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하면 알고 싶어진다고 이곳을 알아가기 위해 늘 잡스러운 노력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토론토의 역사와 개관에 관한 책을 읽어가면서 토론토의 과거의 현재, 미래에 관한 전체적인 모양새도 슬슬 머리에 담겨지고, 길과 동네 이름의 유래도 차차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그 덕에 이곳에서 오래 사신 분들도 모르는 것들, 이를테면 1792년 온타리오의 수도로 지명되었을 당시 단지 12채의 집이 있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토론토란 지명이 원주민 인디언들에게서 유래한 것인데 그 뜻이 만남의 장소(the place of meeting)라는 것 등을 저보다 더 오래 사신 분들에게 문제로 내기도 합니다.

학교와 집을 오갈 때에도 가능하면 낯선 길로 다니면서 이곳 저곳 눈요기를 하고,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한국에는 없는 가게가 있으면 일부러 들어가 한 번 들러봐도 되냐고 묻고는 낯설고 진기한 것들을 살펴보고 구경합니다. 전세계 장신구들을 모아놓은 가게,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문화상품을 취급하는 가게, 인도산(産) 선물용품으로 가득 채워진 가게, 겉보기에도 묘한 기분이 드는 오컬트샵(occult shop), 네덜란드식 아이스크림과 얼린 요구르트를 파는 가게, 카리브해 먹거리만 전담하는 수퍼마켓, 캔디와 생일용품 등을 파는 캔디스토어가 바로 그런 곳들이지요.

제가 워낙에 풀꽃나무를 사랑했기에 토론토의 자연과 벗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 『토론토의 계곡』(Torontos Ravines: Walking the Hidden Country)이라든지 『토론토 주변을 산책하기 위한 온타리오 하이킹 가이드』(The Hike Ontario Guide to Walks around Toronto) 같은 책을 들여다보며 일주일에 한 번은 아내랑 해민이와 함께 하루여행객(daytripper)이 되기 위해 대중교통으로 갈 만 한 곳의 목록을 뽑아놓기도 합니다.

저는 의식주를 통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위에서 언급한 것들에 더해 정치 사회, 자녀 양육, 학교 교육, 지역 사회, 가정의 제도와 의료 체계, 여가 및 놀이, 뒤뜰 가꾸기, 자전거 타기, 거라지 세일(garage sale) 등 이곳 생활의 모든 부스러기들로부터 '삶'을 배우고 '신학'하기를 원합니다. 제 컴퓨터에 '삶과 글'이라는 디렉토리 아래에 '토론토 생활 잡동사니'라는 꾸러미를 만들어놓고는 토론토에 사랑하는 이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스크랩한 것도 이미 적지 않은 분량이 되어 갑니다. 아마 이렇게 살다가 한 몇 년 지나면 "토론토 100배 즐기면서 영어 배우기" 뭐 이런 제목의 책이라도 쓰게 될지 모를 일이지요.

저는 늘 기도하기를, 학교 수업과 제 전공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저의 이러한 성향을 통해 타국 생활의 전 기간 동안 삶 전체로 배우고 공부하며 그것을 글로 녹여낼 수 있기를 빕니다. 말 그대로 살림을 통해 '신학'하며 '문화 연구'를 하는 이가 되기를 빕니다.

더디 가도 함께 가는 유학(留學)

저는 오래 전부터 이번 유학이 저만의 유학이 아닌 저희 가족 모두의 유학이 되도록 기도해왔습니다. 흔히 볼 수 있듯이 남편은 죽어라고 공부하느라 집을 하숙집처럼 여기는 사이에, 아내는 유모와 가정부로 전락하여 영어 한 마디 못하게 되는 그런 비인간적인 유학이 의외로 많습니다. 게다가 어린애들이 둘 셋 있는 집은 정말 한숨밖에 안 나오죠. 하루 하루가 얼마나 정신 없고 피곤할지 환합니다.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죠. 애들한테 매달리다보면 하루는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데가 있다고 해도 갈 엄두가 나질 않고 외국 친구를 만드는 건 꿈도 못 꿉니다. 게다가 주변에 한국사람이 없으면 말벗조차 없어 외로움과 답답함은 점점 깊어가지요. 이민 온 사람들처럼 상대적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가끔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기분 전환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한국처럼 대중교통도 여의치 않은 곳에서 애들 데리고 밖에 나간다는 건 좀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지요.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빨리 학위 따서 돌아가는 게 상책이다 보니, 유학생 부인들은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분노는 풀릴 길이 없어 마침내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마는 뻔한 시나리오가 의외로 자주 현실화된다는 것은 염연한 사실입니다. 애들은 애들대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결함을 안게 되고, 정체성의 문제로 인한 혼란스러움과 가난에 대한 스트레스 등을 부모 발음을 놀리는 재미로 해소하는 식이 되고 말지요. 그러다 보니 가정은 무너지고 어찌 어찌 해서 겨우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이는 만약 배우자와 자녀들의 한결 같은 동의가 있을 리도 없겠거니와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이는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담보로 한, 좀 심하게 말하면 가족의 삶을 착취하면서 이뤄진 학위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학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단 첫 번째 시기는 제가 먼저 시작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일단 준비가 되어 있는 제가 3년 간 ICS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저의 소명을 위해 전념하는 '유학 1기'입니다. 그 시간동안 아내는 살림과 육아를 감당하면서 영어를 익히는 등 자신의 소명을 틈나는 대로 차근차근 준비할 것입니다. 또 하나 이 기간에 주님이 허락하시면 해민이 동생을 가질 생각입니다. 이어 '유학 2기'인 이후 3년 간은 제가 집으로 들어와 살림을 하고 아내가 간호사로서 공부하고 일을 하든지 혹은 다른 소명을 품게 된다면 그에 맞는 공부나 일을 할 계획입니다. 아내 자신의 소명을 위해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지요. 이 세 해 동안 저는 아내 뒷바라지를 하면서 애들을 키우고 공부하며 글을 쓸 것입니다. 다음 '유학 3기' 시기는 두 사람이 다 자신의 소명터에서 전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해민이도 즐겁게 학교에 다닐 것이고 둘째 아이 역시 제 형 또는 제 옵바 손을 잡고 유치원에 나가겠지요. 적어놓고 보니 그야말로 장밋빛 계획에 다름 아니군요. 말이야 쉽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만 그의 나라에서는 '성취'보다는 '관계'가 항시 먼저임을 늘 되새기면서 조금 더 힘들고 시간이 들더라도 가족과 더불어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을 착취하면서 얻어진 공부는 다른 이웃들에게도 영향력이 없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론토에 오고나서 계획이 좀 변경되었습니다. 사실 아내가 한국에서 간호사 자격증을 따기는 했지만, 병원 근무 경험이 전무한데다가 전공을 살릴지 다른 공부나 일을 할지 아무 것도 결정한 것이 없이 왔고, 따라서 온타리오 간호사 자격 취득 관련 정보 같은 것은 전혀 알아보지도 않고 왔는데, 저희가 이곳 변두리 아파트에 둥지를 틀기도 전에, 아니 시차 적응도 채 되기 전에 간호사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아내 역시 몇 년간의 직장 생활 후에 어렵사리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됐지만, 해민이 키우느라 배운 것을 묻어두기만 했는지라, 이 참에 온타리오 간호사로 일하고픈 마음이 자연스레 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여름날 해민이를 데리고 RN(Registerd Nurse, 정규간호사) 준비 학원이니 취업설명회니 온타리오 간호협회니 해서 여기저기 다리품 좀 팔고 다닌 결과 본디 계획을 조금 수정하여 온타리오 간호사 준비에 지금부터 시동을 걸어놓기로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온갖 서류를 준비하여 온타리오 간호협회에 RN 등록을 위한 자격 조회를 했더니 간호사 등록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시험과 영어만 해결되면 되는데 그게 한 2-3년은 족히 걸린다고 하는군요. 혼자 준비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비용이 6,750불이나 하는 학원은 엄두를 못 내고 대신 RN Prep Guide 책을 구입해서 혼자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은 저한테 영어 못한다고 구박을 받아가며 꿋꿋하게 혼자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첫 학기가 힘들다고들 하지만, 아내가 간호사 준비를 안 한다고 해도 영어 배우러 다니는 시간 정도는 내주려고 전부터 맘을 먹고 있었으니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었는데, 솔직히 3년 뒤에 할 일을 당겨서 준비한다고 하니 제 코가 석자인 입장에서 조금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을 뜨기 전 지난 1년 반 동안 저의 유학 준비를 위해 아내가 처갓집에 들어가 식모살이에 준하는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까짓 거 정말 필요하다면 제가 파트타임 학생으로 등록해서 아내를 팍팍 밀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회가 되어 유학 2기로 예정되어 있던 아내가 시간을 먼저 갖기 위해 나랑 자리바꿈을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요즘 여성들이 조선시대처럼 합의되지 않은 인고의 세월을 감내할 리도 없거니와--그것이 옳지도 않으니 당연히 반대해야 하겠지만--자녀들 역시 아빠의 학위 취득을 위해 평생을 위한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를 볼모로 잡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학위가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가정 불화, 자녀 가출, 주부 우울증, 파경, 이혼 등에 이르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ICS에서 함께 공부하는 한 형으로부터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유학왔던 한 가정이 있었는데, 남편은 죽어라고 10년을 공부만 해서 신학박사가 됐지만 부인은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는 얘길 들으니 속이 어찌나 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내는 교수님 사모님 소리 듣는 걸로 치유가 될까요? 그 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한국 유학생 가정 뿐 아니라 북미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는군요. 그리하여 수많은 석박사과정 학생들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관계지향적이기보다는 성취지향적인 오늘날의 문화에 편승하는 대부분의 남자들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가정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몰고가는 오늘날의 대학의 시스템에 있을 겁니다. 겉보기에는 폼나고 멋져 보이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알고 보면 학술지 기고, 무슨 학회발표, 각종 강연, 수업 평가 등 데드라인으로 거미줄 쳐져 꼼짝도 못하는 자리라고 하는군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료 교수들에 비해 승진이 느려지고 그러면 자존심을 구기게 되니 슬슬 놀아가며 할 수도 없고요. 그러나 간혹 일부 교수들은 가정이나 다른 더 큰 가치를 위해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천천히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바로 그런 사람들이 희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한다는 유학(留學)이라는 것이 원래 거할 류(留)자를 써서 외국에 머무르며 공부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이곳에 오래 거하더라도 더디 가도 함께 가면서 하는 저희의 유학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유학의 의미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나 싶네요.

아내의 안식년은 남편이 챙겨주자

불행인지 다행이지 몰라도 아내는 지금 당장은 제게 계획을 다시 세우자는 얘기를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살림과 육아를 해가면서 영어공부에다가 간호사 시험 준비를 하나 더 병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2004년 5월은 우리 가족에게 아주 중요한 때입니다. 이 달은 아내가 결혼해서 전업주부 생활을 한 지 만 6년이 되기 때문에 안식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시기가 딱 떨어지는 것은 제가 2004년 4월이면 2년 간에 걸쳐 수업과정(coursework)을 다 마치기 때문에 아내가 안식년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년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1년 365일 일하는 전업주부는 어떻게 안식년을 가질까 하는 문제였는데, 저희는 시쳇말로 '아다리'가 딱 맞아떨어져서 뜻을 이루게 됐으니 아주 고마운 일이지요. 보통 안식년이 그동안 몸담았던 곳을 떠나 미래를 위한 준비에 투자되듯이 아내 역시 지금으로는 자신의 안식년 기간을 이곳 대학에서 간호사가 되기 위한 4-6개월 과정의 재교육(refresh)을 밟을 생각입니다. 토플 성적표를 제출해도 되지만 아내가 워낙 시험에 약한 데다가(^^) 재교육을 수료하는 것이 버겁긴 해도 영어 실력 증대나 실습을 통한 현장능력 배양 등 모든 면에서 더 이롭다 게 저희들 판단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전업주부(專業主婦가 아니라 專業主夫, househusband) 자리를 꿰차고 집에 들어앉아 공부하느라 스트레스 받을 아내를 착실히 내조하며 애들 키우고 살림하고 텃밭 가꾸면서 틈틈이 논문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물론 늦어지기야 하겠지만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더디 가도 같이 가면 되지요. 집에서 애들이랑 놀면서 화분에 물을 주고, 퇴근할 아내를 위해 저녁을 차리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저를 즐겁게 합니다.

이상은 물론 저희의 계획일 뿐이지요. 실상 우리는 한치 앞도 못 보는 근시안이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제 공부만 10년은 잡는다고 하고, 더디 가도 가족과 함께 갈 것이기 때문에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또다시 우라질 놈의 돈 문제를 꺼내듭니다. 1년도 쓸 돈을 갖고 와서 10년 공부를 한다고 하고, 또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을 하겠다고 하면, 언뜻 봤을 땐 어불성설일지 몰라도 그 분을 따르는 이들의 삶은, 제가 늘 감탄하며 읽는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표현을 빌자면, 예수를 따르는 우리네 삶이란 불가능성에 뿌리내리는(Life is rooted in impossibility)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저희 가족의 유학이 앞날에 매이지 않는 유학(幼學),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有學), 삶 전체로 공부하는 유학(遊學), 천천히 머물면서 더디 가도 함께 가는 유학(留學), 거기에다가 할 수 있다면 아내의 안식년을 챙겨줄 수 있는 유학이 될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간곡히 기도했듯이 유학에 대한 저희들의 진리 실험이 성공을 거두어서 하나만을 위한 유학이 아닌 모두를 위한 유학의 오솔길을 낼 수 있기를 오롯이 빌 따름입니다.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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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우승 2008/08/16 07:17  Addr Edit/Del Reply

    글이 좋아서 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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