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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Lordship 구원 (엡 5:21-6:9)

한 유명한 기독교 계 지도자가 솔직한 고백을 남겼다. “지난 40여 년 간 나의 믿음은 진정 실패였다. 회심이후 사람들이 내 삶에서 분명한 변화를 볼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난 변화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족하고, 넘어지고, 거짓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복음의 진리가 손상되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늘어나고, 회심 자들은 증가되지만 구원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무엇이 문제일까? 존 맥스웰 목사는 ‘구원’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로드십구원"을 참된 구원으로 정의한다.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그분께 대한 구원의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받은 죄인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성취한 구속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바코드 그리스도인’들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으로 비유했다. 바코드는 스캐너에게 물품의 정보를 줄뿐이다. 개 먹이 바코드를 과자에 붙여놓으면 계산대 스캐너는 과자를 ‘개 먹이’로 읽어버린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바코드 정보만 읽을 뿐이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바코드만 붙였을 뿐 그 내용물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들어있지 않다. 바코드만 바꿔 붙여놓은 셈이다.
교회는 ‘구원’을 강조하지만 ‘구원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의 용서와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단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바울도 ‘로드십 구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구원의 반쪽 교리다. 나머지 구원의 절반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신앙과 삶의 연출에 있다.

아프리카 콩고 선교회에서는 선교사 훈련과정에 세(침)례 고백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훈련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염소고기를 먹었음으로 세(침)례를 베푸노라” ‘염소 고기 먹기’ 풍습은 콩고 노예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노예가 자기가 섬기던 주인이 너무 잔인하고, 혹독하게 노예를 학대하면, 그는 도망쳐 다른 새 주인에게 간다. 구원을 요청 받은 새 주인이 그를 구해줄 의향이 있으면 염소고기를 함께 먹었다. 노예가 새 주인과 함께 염소고기를 함께 먹는 순간 과거의 옛 주인은 도망친 노예에 대하여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다. 노예는 새 주인을 따라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죄의 종이었다가 의의 종이 된 신분변화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는지 새 피조물의 자각이 요구된다.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동상 세우기를 좋아하는 점이다. 10여 년 전, 구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을 때, 레닌과 스탈린 동상이 수난을 당했다. 미?영 연합군이 바드다드 시내로 진입하는 순간, 사담 후세인 거대한 동상이 무너지는 장면이 전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독재자의 동상을 철거하는 것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북한에도 약 3만5천여 개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일 비용엔 동상철거 비용도 상당부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주’ ‘소유주’ ‘주권자’ 예수께서 우리 자신과 온 세계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뜻한다. 내 영혼의 주님, 사회의 주님, 가정의 주님, 역사의 시간의 주님, 한국교회의 주님, 온 세상의 주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영접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6-9).

모든 사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날과 음식의 문제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업신여기자,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고 가르치고 있다. 주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사랑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스티븐 닐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 인간의 모든 관계는 변화된다”고 가르친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모든 인간관계에 머물기 때문이다.

1. 부부관계(엡5:22-3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2-33).
미국판 현모양처를 촉구하는 "항복하는 아내가 행복하다"는 책이 화제가 되었었다. 저자 도라 도일은 페미니스트로 바가지 긁는 전형적인 아내였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파경으로 치닫는 결혼생활을 통해 도라 도일은 ‘항복하는 아내’의 결론을 얻었다. ‘바가지를 긁거나 논쟁하지 말고 남편이 원하는 일을 하라. 남편을 통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 남편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여 전사와 같은 모습을 직장에 두고 집으로 와라..’ 그 말들은 불행을 통해 깨달은 아내의 아름다움과 사랑이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하나님의 권위의 질서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다(고전11:3). 하나님의 권위가 인정될 때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하는 태도로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해야 한다. 아내의 역할과 위치가 지나치게 굴종 적인 과거 문화 유산이나, 낡은 보수주의적인 견해가 아니다. 서로의 위치와 역할이 분명하지 않은 ‘권위의 질서 실종’으로 인해 오늘 많은 가정이 이혼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 두 가지 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신델렐라의 꿈과 평강공주 꿈이다. 신데렐라 꿈을 가진 여성은 백마 탄 왕자가 유리구두를 들고 자기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여성이며, 평강공주 꿈을 가진 여성은 현재의 남자가 바보온달 같아서 자신의 헌신으로 그를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여성이다. 출세한 남자를 원하는가? 아니면 출세 가능성이 있는 남자를 원하는가? 남자를 통해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두 성향에서 여성들의 남성관을 엿볼 수 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의 두 가지 꿈은 미스 코리아 형과 복부인형에 있다고 한다. 미인이냐? 아니면 경제력이냐? 에 목표를 두고 있다. 진정한 결혼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 코넬대학 인간행동연구소 신디아 하잔 교수 팀은 지난 2년간 남녀 5천명을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가슴 뛰는 사랑은 18개월-30개월이면 사라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으로,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화학물질을 상실한 뒤 독서와 생활에서 다듬어진 지성미와 교양미로 원숙한 아름다움을 가꿔나가는 것이 사랑을 오래 지속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과 믿음에 있지 않을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부부의 관계는 언제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부모와 자녀관계(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 순종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이미 약속되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3). 인생의 성공과 건강은 모두가 추구하는 공통적인 소망이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자녀들에게 두 가지 약속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 우리는 부모공경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비밀을 배워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그분의 축복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원자력 분야 세계적 석학 정근모 박사는 사람들 사이에 천재로 통한다. 서울대 차석 입학. 미국 미시간 주립대졸업. 24살에 플로리다대학 교수가 되고, 과기처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정근모 박사는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 안에서 생활한 결과일 뿐”이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는 그의 저서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공부 잘하는 7가지 방법을 말했다. 그가 첫 번째로 가르친 비밀이 ‘어머니의 기도와 잔잔한 미소가 힘이다’라고 고백한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하나님께서 정근모 박사의 인생을 만드시는 섭리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부모님을 주님의 권위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소유할 때 비로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두 번째 인생을 산다”고 했다. 부모와 자녀는 한 생명을 가진 운명공동체다. 부모의 삶이 자녀들에게 유전되고, 자녀들은 부모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모의 존재가 자녀들의 인생의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으로 논쟁을 벌이다 랍비를 찾아갔다. 남편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짓고 싶어하고, 아내도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짓고 싶어했다. 랍비가 물었다. “두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두 분 다 요셉인데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지 않나요?” 아내가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시아버님은 말 도둑이고, 저의 아버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누구 아버지 이름 따서 지었는지 저희가 나중에 어떻게 알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말 도둑이 될지, 아니면 정직한 사람이 될지 지켜봅시다. 그럼, 어떤 아버지 이름을 따른 것인지 자연히 알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3. 사회생활 관계(6:5-9).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5-6).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9).

44개국에서 7만 명이 넘는 직장인들에게 강의한 탁월한 ‘인력 전문가’ 존 곤스틴박사는 “유럽기업들은 매년 매출액 1%를 기업 내 사람 사귀는 법에 투자한다”고 강조한다. 직장인이 직장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회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 상사나 동료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업은 좋은 인재를 쉽게 잃고 만다. 무엇보다 중간 간부가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면 조직의 안정이 어려워진다.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의 주권이 직장, 사회생활에서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배당을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 율법주의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만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유를 유지하는 유지 주이시며, 만물의 소유주가 되신다(골1:15-17). 그러므로 주님의 주권은 제한된 예배당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회조직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서울대생엔 ‘나 홀로 족’이 많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최모 씨(28)는 1년도 안돼 직장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조직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결국 직장을 포기하고, 사법고시를 준비중이다. 이기춘 서울대 총장은 “이제는 감성지수, 도덕지수가 높은 졸업생을 배출해야 한다. 대학에서 인성과 대인관계 증진을 위한 리더십개발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대인관계 능력 부족은 사회생활에서도, 주를 섬기는 제자의 삶에서도 결국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갈등과 개인적인 깊은 고민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세상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은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17)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의 탐욕과 쾌락주의, 물질주의를 경계하고, 세속적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야 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요17:11)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주님께서는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 깊이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다. 우리들이 주님을 섬길 장소는 예배당 뿐 아니라 세상이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 주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여야 하고, 우리들의 삶의 공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여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우리 몸이 가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가 되며, 우리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손상시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뉴욕 셔틀버스 운전사 모임에 고든 목사가 참석했다. 한참 교제하다가 운전사 한 분이 “우리는 겨우 말 못하는 버스를 끌고, 맨해튼 섬이나 왔다 갔다 할뿐인데 목사님은 여러 나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시니 부럽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한심스러워하는 운전자들에게 고든 목사는 한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버스를 운전하기 전에, 빈 버스를 향해 이렇게 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앞으로 8시간 동안 이 버스를 성소로 선포하노라. 이 버스를 타는 사람들에게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을 선포하노라.’ 그리고 버스 운전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뒤 고든 목사는 셔틀버스 운전사들을 만날 때마다, “버스를 운전하십니까? 성소를 운전하십니까?” 하며 반갑게 항상 질문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버스 운전사로부터 은혜로운 간증을 듣게 되었다. 한 남자가 정류장 아닌 곳에 내려달라며 우기고,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자신에게 무례한 태도와 험악한 말을 하는데, 자신은 성소를 운전하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야하는 사명이 있기에 즐겁게 참았다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같이 반응했을 자신이었지만 그날은 다음 정류장에서 투덜거리며 내리는 그 신사에게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제 버스를 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운전사를 잘 아는 한 여자 승객이 “정말 많이 변화되셨군요” 하며 칭찬하더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성소이며, 우리의 하루하루는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삶이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평화의 인간관계를 이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요20:28) 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주권이 높임을 받는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참된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의 복종. 하나님말씀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방에 있다”고 정의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부부와 부모와 자녀, 직장생활의 인간관계에도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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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지성, 그 깨지기 쉬운 유리알 유희

(1)

문명 충돌과 붕괴의 時論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세계 무역 센터(WTC)의 붕괴 장면은 전 세계인을 경악하게 한 세기적 사건이었다. 정보화시대를 실감하며 생방송으로 엽기(?)적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바야흐로 다각화된 문화에 의한 문명 충돌의 시대로서 21세기를 예견했던 새뮤얼 헌팅턴과, 인류 역사 속에 나타난 문명의 한계 수익 체감에 의한 문명 붕괴의 필연성을 역설한 조지프 테인터의 노작(勞作)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2,000년 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건너갈 때 타고 간 배를 가리켜 유럽의 운명을 싣고 간 배였다고 말했듯이, 세계 역사는 끊임없는 서진(西進)을 계속하며 새로운 문명과 역사의 주역들을 탄생시켜왔다. 21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발생한 WTC의 붕괴는 어쩌면 지난 20세기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주역이었던 한 문명이 무너져 내리고 이제 또 다시 새로운 주역의 부상을 예고하는 역사의 한 서막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지난 20세기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앞세운 과학기술을 무기로 유토피아 사회 건설을 추구하며 시작되었다. 20세기가 평등과 자유의 이데올로기를 나누어 가진 체 동서 냉전의 양극화 구도로 치닫는 동안, 세계는 수많은 전쟁과 혁명 속에서 무고한 피 흘림과 비인간화의 값을 치렀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는 다원화된 문화 전쟁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피 흘림을 예고하고 있음이 아닌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철학과 과학의 가장 오랜 주제였다. 지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의 라메트리가「기계인간」의 개념을 제시함으로 출발한 소위 <생물학 결정론>은 모든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 고도로 복잡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낳았다. 급기야 그것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유전자를 지닌 사람만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열등한 인종을 도말(?)하는 히틀러 식의 급진 우익 사상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생물학 결정론에 반대하는 <문화 결정론>자들은 인간은 주변 환경과 교육 문화에 의해 언제든지 가변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문화 결정론이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칠 때, 소위 행동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을 환경적 자극에 의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환경적 기계장치 또는 시스템으로 파악하게 된다.

결국 이 논쟁은, 인간이 안고 있는 피면 할 수 없는 두 가지 조건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분명 인간은 자연적 요소를 지닌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문화적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을 파악하는 시각이 <자연>이냐 <문화>냐 하는 양자택일의 이원론에 빠질 때 결국 인간의 사물화(死物化)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만다. 이데올로기화한 원리주의(原理主義)는 항상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그래서 항상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생각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자연>과 <문화>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중간 영역은 철학과 과학의 오랜 탐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블랙박스(Black box)로 남아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경직된 사고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균형 감각이며, 내 자신에 대한 무지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출발선이 될 것이다. 문명 충돌의 시대에 자신이 붕괴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사의 완충지대를 바로 읽는 지혜와 탄력성이다.

위 글은 2001년 10월 18일자 연변과학기술대학 신문의 <북산가 칼럼>에 실었던 글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대학 신문에 게재한 글이라 신앙적인 내용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 해답을 논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블랙박스>로 처리 해버린 부분에 대한 신앙적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적 힘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지난 20세기에 인류는 천체의 궤도를 예측하여 달과 화성에 로켓을 쏘아 올리고, 원자의 구조를 파헤쳐 신기한 반도체와 컴퓨터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 이성의 힘으로 미사일의 탄도를 예측하고 원자 폭탄을 만들어 대량 살상을 일으킨다.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 지닌 양면성이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2)

세계 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그의 생애 최고의 대작이자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작품 <유리알 유희>를 발표하여, 1946년 전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그것은 나치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독일 지성인의 자존심과 전쟁의 광란과 공포에 젖은 20세기 지성의 회복을 희구하는 헤세 문학 집념의 산물이기도 했다. 서기 2,400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래소설이자 유토피아 소설인 <유리알 유희>는 인류가 20세기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지성의 회복을 통한 종교적 이상향을 건설하고 영재 교육을 통해 학문과 예술의 정신문명을 극대화하는 지적 유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과 예술의 최고의 경지를 헤세는 <유리알 유희>에서 마치 수학적 대위법으로 작곡된 바하의 파이프오르간 푸가(Fugue)를 연주하는 것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더 이상 정교하고 더 이상 웅장하며 더 이상 합리적이며 더 이상 경건할 수 없는 꽉 짜여진 위대한 음악... 그 음악의 명인들에 의해 펼쳐지는 유토피아라는 대곡은 마침내 연주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인간의 역사는 헤세가 지향하고 갈구했던 대로 이상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고대로부터 인간의 이성적 힘을 믿었던 소수의 사상가들은 탁월한 지도력을 지닌 소수 엘리트 혹은 철인(哲人)을 통해 다스려지는 이상국가(理想國家)를 만들고 싶어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그랬고 공자가 그랬다. 그 시대와 환경, 그리고 방법론은 서로 달랐지만 퇴계와 율곡이 그러했고 크롬웰이 그러했으며 마르크스가 그러했다.

지금부터 꼭 100여 년 전.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인류 역사의 수레가 역동적으로 올라서던 시기에 서구 세계는 17세기 이후 자신들이 이룩해 낸 과학기술의 혁명적 진보와 그에 따른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학 혁명에 의해 형성된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게 되었고, 마침내 서구 지성인들의 자만심으로 표출되었다. 19세기 중엽 찰스 다윈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던 진화론은 그와 같은 시대사조를 등에 업고 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유럽과 미국을 뒤덮는 사회학적인 혁명적 풍조가 되었고 진화 사상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서구 열강이 전 세계를 제국주의 식민지 영역으로 패권 쟁탈을 하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 세계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첨예하게 나뉘는 과정 속에서도 양 진영 모두 과학 기술의 무한한 발전과 더불어 마침내 인류는 20세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되리라는 신념만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주의는 현대성의 상징이었고 20세기를 여는 화두였다.

그와 같은 신념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그 꿈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이룩해 낸 과학기술의 열매가 핵 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로 등장하면서 온 인류를 핵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참상, 끝없이 이어지는 냉전 상황 속에서 서구의 지성은 자신들이 가졌던 진보 이데올로기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할 지 모른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소위 탈 현대, 즉 포스트모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적 논쟁이 일반 대중들의 삶 속에까지 파급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었다.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는 진보 이념이 신앙 고백처럼 설파되고 있었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탈 현대의 외침은 20세기 지성이 이룩해 내었던 거대하고 냉혹한 기계문명에 대한 반발과 자성 그리고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와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911테러로 21세기는 그 서막을 연다. 곧 이어 반격으로 가해진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은 세계인들로 하여금 지난 20세기 세계의 학문과 예술을 이끌어 가며 정치와 경제의 종주국이요 지성 국가로 자처했던 미국에 대한 극심한 반발과 실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성과 이념으로 시작했던 20세기보다도 감성과 경제 논리만을 앞세우는 21세기는 역사를 더욱 극심한 지적 공황과 불안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 과연 인류는 이제 지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3)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창조된 인간... 그 특별한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성경은 세 가지 구성 요소를 암시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한 창조행위를 표현하는 바라(bara)라는 동사가 단계적으로 세 구절에 등장한다. 첫째가 절대 무의 상태에서 시공간과 물질을 창조하는 1절이요, 둘째가 의식적 존재로서의 생물을 창조하는 21절이며, 마지막 세 번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는 27절이다. 인간은 이 세 가지 단계를 통해 물질적 요소(body)와 의식적 요소(soul) 및 영적 요소(spirit)를 함께 갖춘 존재가 되었다. 물론 유기체로서의 인간에게 이 세 가지 요소가 삼분법(三分法)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다. 육체적 결함과 상처가 더러는 의식과 영적인 함몰을 가져오기도 하며, 영적인 치유가 육체의 손상을 회복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기에 인간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지닌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한계성을 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세 가지 요소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D. G. Barnhouse는 인간을 하나님에 의해 아름답고 완전하게 지어졌던 3층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 1층인 몸(body)은 흙으로 지어진(formed) 물질적 요소요, 제 2층인 혼(soul)이 인격성(personality)을 나타내는 요소라면, 제 3층인 영(spirit)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를 가능케 하는 영성(spirituality)적 요소이다. 문제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인간이 불순종의 죄를 지어 타락(fall)하는 그 순간 마치 원자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근원적으로 훼손해 버린 것이다. 폭탄이 투하된 순간 하나님과의 대화를 가능케 하던 제 3층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파편만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음), 인간의 지성, 감성, 의지를 나타내던 제 2층은 파괴되어 절반이 남았으나 남은 절반도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제 1층 육체는 그 순간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폭발진동에 의해 보이지 않는 미세 균열(micro-crack)이 가득 발생하여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약속했던 대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인간의 지성을 과대 평가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성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신론과 유물론으로 무장된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과학을 올려놓음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이 인간을 결정론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해 가는 과정에서 서구 사회에 처음 등장한 것이 <기계적 결정론>이다. 즉 인간을 단지 유전자와 생체 화학반응에 의해 결정되는 물질적 산물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나중에 유전자 구조의 이해와 분자 생물학의 시작과 더불어 <생물학 결정론>으로 발전하며 다윈이즘에 의한 적자생존의 원리와 결합하여 자본주의 보수,우익 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놓게 된다. IQ, 가부장적, 성적(性的), 사회적, 인종적 나아가서는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기원을, 인간 내부에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유전적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심리학 결정론> 또는 <문화 결정론>은 인간은 오직 그가 자라온 환경과 교육에 의해 결정되는 역사적 산물로서 파악한다. 의식의 정신적 진화과정을 변증법적으로 기술한 헤겔에서 출발하여 인간 행동을 외부 자극에 의한 학습된 반응으로 파악한 스키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철저히 탈 신격화(脫神格化)한다. 이는 교육과 학습을 통한 사회변혁을 꿈꾸는 좌익 급진 사상에 영향을 주며 역시 다윈이즘의 자연도태의 원리와 결합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 계급투쟁의 사회주의 철학으로 발전해간다.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생물학 결정론이든 문화 결정론이든,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인간에게는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고 만다. 그가 어떤 사회적 문제나 불평등이나 혹은 폭력을 야기하거나 당하더라도, 그것은 생물학적 원인 혹은 그가 처했던 환경적 원인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상 위에 유토피아를 꿈꾸고 출발했던 결정론적 세계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심각한 사회적 질병과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끔찍한 전쟁으로 지난 20세기를 점철시켰다. 보수 우익 사상이 빚어낸 우생학은 생명경시 현상으로 나타나 나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일본의 남경대학살과 713부대의 만행을 일으켰으며, 좌익 급진 사상이 일으킨 공산 혁명은 사회주의 국가마다 엄청난 피의 숙청을 불러왔다. 결정론주의자들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지를 몰랐다. 그들의 이성은 너무나 불완전해서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불완전한 이성으로 완전한 이상사회를 결코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서 냉전으로 팽팽히 맞서던 20세기가 그 균형을 상실하고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내닫던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영국 사회를 중심으로 신 우익(New Right)이라고 부르는 정치권력이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레이건 과 대처를 거쳐 부시와 블레어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권들의 배후에는 생물학 결정론의 사상으로 새롭게 무장하여 세계의 정치,경제 질서를 보수 우익의 패권 하에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깔려있다. 그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합하여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한 신탁 국가로서 타민족을 징벌하는 정의의 칼을 휘두르며 새로운 십자군 운동과 우생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2000년 6월 26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인간의 DNA 염기 서열의 위치를 판독하려는 인간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초안을 발표했다. 그것은 생물학 결정론의 위대한 승전보였으며 신 우익 세력의 21세기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하버드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옥스퍼드는 세계의 학문 정신을 이끌어 가는 최고 지성의 명문대학들이다. 그곳에 현대 진화론의 생물학 결정론을 주도하고 있는 두 선두 그룹들이 있다.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과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가 그들이다. 강자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공격하는 것이 자연이 만들어낸 정당한 법칙이라는 그들의 논리가 이 두 기독교(?) 국가에 팽배해 있는 것이다. 마치 서구의 중세 시대가 표면적으로는 로만 카톨릭의 기독교 국가였지만 그들을 지배하던 철학과 과학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레니즘 철학과 과학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중세 수도원 운동에서 출발한 옥스퍼드 대학, 청교도 정신으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이 전 세계 인본주의의 산실로 탈바꿈한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버드 대학의 설립 이념에는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드러나게 하겠다는 선언문이 유리알처럼 빛나며 아직도 남아 있다.

유리알은 또 다시 깨어졌다.
그리고 윌슨과 도킨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충격과 공포와 죽음의 현장...
깨어진 가정과 울부짖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포화의 연기 속에서 무너지고 스러져 가는 인간성들...배반과 약탈, 방화...
지난 세기 전쟁의 잔혹함을 경험했던 우리 민족에게 이 일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들의 통곡과 눈물의 상처들이 치유되기 위해,
이제 또다시 얼마나 많은 순교자의 십자가가 저 땅 위에 세워져야 할지...
사막의 모래 바람이 메마른 가슴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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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교회생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합시다

한국 교회 자랑거리 중의 하나가 새벽 기도입니다. 성도들이 아침 일찍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예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새벽 기도에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회라고 하지만 참석하신 분들이 기도에는 별로 시간을 드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기도 아닌 다른 순서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석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교통 수단의 발달로 근처에 있는 교회가 아닌 먼 곳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분들이 새벽마다 교회를 찾아 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감안하여서 저희 교회에서는 새벽 기도 시간을 갖되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시간도 제가 본당에 나와서 기도 드리는 시간인5시부터 8시 사이 아무때나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 기도하도록 하는 이유는 교회에 나와야 기도가 더 잘 되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집에서 기도하면 교회 오가는 시간을 절약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집에서 새벽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기도한다는 것이 여느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정해서 교회당에 나와 기도할 때에 규칙적으로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할 때에는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웬만큼 기도훈련이 되어 있는 분이 아니면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장시간 기도한다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졸든지 잡념과 싸우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수요 저녁과 토요 새벽 기도회 시간에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 후에 중보 기도 시간과 개인 기도 시간을 갖는데 이때에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도록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기도에 집중도 되고, 응답에 대한 확신도 생기고 영적으로 눌렸던 것이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내용을 옆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배경 음악을 크게 틀어줍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를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더 큰 소리로 기도해서 옆 사람 기도가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한 가지 형태만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묵상 기도, 대화식의 기도, 부르짖는 기도 등, 골고루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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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밤과 낮

죽을 만큼 배가 고프면 빵으로도 보일만한 돌덩어리가 흩어져 있는 황무지입니다.

눈을 돌리니,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유대 광야에 길이 어지럽게 보입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은 마른 땅에 동물들과 해와 바람이 낸 길입니다.

밤새 바람이 식힌 땅을 낮엔 해가 덥히고

다시 달과 별이 유대 광야를 소리없이 채웁니다.

달도 없는 그믐 밤 멀리 이스라엘 성에서 타고 있는 세속의 빛이 하늘을 물들입니다.

*(새벽 1시 못내 이해가 안된다는 이스라엘 군인의 검문과 의심을 받으며 유대 광야에서 이스라엘 성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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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의 삶 (9)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이 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대하 36:21-23)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장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땅의 물리적인 세계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눈에 보이는 날씨의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권의 변화로 인함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히터와 전등도 결국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전자력의 영향이다. 온 우주가 유지되는 것도 온갖 힘의 작용이다.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경영학이든, 눈에 보이는 사회현상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들의 상호역학작용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다. 시장에서의 가격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변수는 결국 수요와 공급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배웠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로운 자와 지혜롭지 못한 자들의 차이는 바로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의 힘의 역학을 이해하는냐 하지 못하는 냐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종착점이라고 하겠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결국은 개인의 삶, 한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보면서, 그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한 개인과 국가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리더들을 가까이서 만나면 남들에게서 만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그 시각의 매력이다. 얼마전 일본에서 한 때 가장 빠르게 성장한 회사였던 DoCoMo의 회장으로부터 직접 그의 경영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21세기의 지식경제 시대의 일본사회경제를 놀라운 역사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의 혜안에 큰 감동을 받았다. Cisco의 회장 John Chamber도 그와 같은 인물이다. 시대의 경제, 사회, 기술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데에서 나오는 탁월한 시각이 있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삶은 그 quality가 역사의 맥을 보고 사는 삶에 비하여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어지는 삶의 패턴을 보면서도 그것에 대한 거시적인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삶이다. 그때 그때 삶에 사건이 터질 적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바쁜 삶이다. 이번주는 시험으로, 다음주는 가족일로, 그 다음주는 교수와 세미나준비로 정신없이 끌려가면서 사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런 삶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고 사는 삶이다. 그래서 그곳에 내가 왜 있는지, 뭘하면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삶이다. 어제 동료교수가 집에 가다가, 자신의 수첩에 그다음날 아침 8:30분에 약속이 잡혀있는 것을 보면서 비서에게 "What am I doing here at 8:30 tomorrow morning?"이라고 말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That's what happen, when you let others control your life"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불행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삶을 영위해 간다. 많은 기도를 한다. 병이 나면, 병을 고쳐달라고, 돈이 떨어지면 돈을 채워달라고, 직장이 없어지면 직장을 구해달라고, 마음이 불안하면 평안을 달라고, 교회가 어지러우면 교회가 평안하게 해달라고, 많은 기도를 한다. 그러나, 그 인생의 나가는 방향은 마치 안개속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두렵고, 답답하다.

역사의 맥을 잡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떤 시각에 역사를 보는가 하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 나는 유학생들이 역대상하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개인의 역사와 그 속해있는 국가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훈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열왕기서가 솔로몬왕 때부터 이스라엘과 유대왕조의 멸망의 시점까지를 기록한 책인데 반하여, 역대상과 역대하는 정통 유대왕조를 중심으로 창세기부터 시드기야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를 왕실에 있던 기록을 중심으로 적은 책이다. 열왕기가 왕들의 치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건들,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 그 당시 백성들의 고통받은 장면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매우 담담한 어투로 유대 왕들의 치적을 중심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역대상은 성경책을 창세기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 지루한 족보를 줄줄이 엮어가고 있다. 왜 하나님은 역대상과 역대하를 쓰게 하셨을까? 그리고 왜 구약성경 한 가운데 그 책들을 넣도록 하셨을까? 이미 다른 성경책에 모두 기록된 이야기인 이스라엘과 인류의 역사를 왜 두 권의 책에 다시금 기록하게 하셨을까?

일반적으로 역대기는 에스라에 의해서 포로귀환시기에 쓰여졌다고 믿어지고 있다. 에스라는 고레스왕의 칙명으로 인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의 성전이 다시 건축되어지는 상황에서 이 책들을 쓴 것으로 알려진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참으로 참담한 지경이었다. 국가는 없어지고, 왕실은 산산이 분해되었으며, 그들이 믿던 하나님의 성전은 돌부리하나 남지 않고 부숴졌다. 찬란했던 솔로몬의 궁전은 시랑의 굴혈이 되고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영화를 누리던 그들의 왕은 눈알이 뽑혀서 적들의 손에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고, 그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방 신들을 섬기며 다른 민족의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는 역대기를 통해서, 이제까지 놀랍게 자신들의 민족을 축복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준다. 그들은 선택받은 다윗의 후손이며,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여주었던 것을 일깨워 준다. 그는 눈에 보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오늘 바로 이와 같은 황무지의 돌무더기 가운에서도 우리에게 유효하며 우리 조상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은 바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 역대기의 주제이다.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이 용맹한 왕도, 솔로몬과 같이 지혜로운 왕도 없고, 오히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다윗과 솔로몬에게 하셨던 그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는 역대하 마지막에 고레스왕의 성전재건축 명령이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였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시고 단 하나의 실수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도하신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들의 눈을 돌려준다. 그리고 역대기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볼 것을 우리들에게 권면한다.

역대기를 읽고 나서 이후의 예언서를 읽으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하는 마음을 생각하며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줄을 잇는다. 오늘 역대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의 삶, 조국 한국, 그리고 이 땅 썩어져가는 미국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 한계적인 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낙심한다. 더 이상은 어떻게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들어가는 환부를 보고 포기를 선언하며 환자의 상처부위를 덮어버리는 외과의사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고 이 사회를 포기하고나 있지는 않은가? 이제까지 나를 지키고, 축복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 손길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분과의 약속을 잃어버리고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는지 모르나, 그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신다는 것을 잊고 있지는 않았는가? 당신의 유학의 삶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 지금 성공하고 있는가? 이스라엘민족의 고난은 가장 영화스러웠던 솔로몬왕의 시대때 이미 시작되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아니면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가? 예루살렘의 멸망도 결국은 하나님의 예정안에서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자. 더 이상, 그때 그때 임시방편으로 살지 말자. 비롯 유학을 오는 결정은 기회가 있어서, 남들이 다와서, 직장이 지겨워져서, 아무 생각없이 왔다 할 지언정, 앞으로의 남은 유학의 삶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아보도록 몸부림쳐보라. 이제까지 나를 위해서 살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눈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채워드리기 위해서 한번 살아보자. 당신을 이곳을 끌고 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자.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을 놓고 역대기를 쓴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을 뭐라고 기록하겠는가?

한국의 사회와 교계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인과 경제인을 욕하기 전에, 반미 혹은 친미를 논하기 전에, 북한의 핵위협을 논하기 전에, 그 뒤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자. 전세계에 가장 큰 교회가 있는 나라, 가장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자랑하는 나라, 가장 뜨겁게 기도하는 전통이 있는 나라라고 자랑하기 전에, 썩어가는 한국의 교계와 정치와 문화를 바라보고 계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보자. 하나님의 손이 무엇을 어떻게 움직이시는 지를 주목하여 살펴보자.

미국을 생각할 때, 이락과의 전쟁이 옳고 그르고를 논하기 전에, 부시의 외교정책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미국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도록 하자. 역사상 유례없는 군사, 정치, 경제, 문화, 학문의 초강국이 된 미국,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6개월을 토론하며서 세운 나라 미국, 그 미국의 역사 뒤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하여 보자. 그 마음을 품으려고 몸부림쳐 보자. 인류역사상 유례없이 청교도의 신앙의 고백을 근거로 세워지고, 그들의 지폐에 "In God We Trust"라고 쓰는 나라인 미국.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보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한 이라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위스키, 섹스!" 전세계의 포르노 수출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타락과 향락의 상징이 되어버린 할리우드가 문화의 대명사가 되어버리고, 하루에 3000명이 넘는 unborn child가 낙태로 살인되어지는 이땅 미국을 하나님의 심장으로 한번 바라보기를 바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미국에게 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90년대의 유례없는 경제 호황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으나, 하루아침에 그 부는 다시 천문학적인 숫자의 재정적자로 돌아섰고, 그 엄청난 부를 통해서 복음의 말씀의 도구로 사용하기 보다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찟는 회개의 눈물이 있기를 바란다. 미국이 좋아서, 친미를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만일 당신이 오늘 미국의 역사를 가지고 역대기를 기록한다면 무슨 말을 기록할 것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대기를 읽으면서, 내 자신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 한국과 미국 교회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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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 리포트

가족 요법 (Family Therapy): Caring Heart for Others

처음 미국에 와서 도저히 이해 되지 않고, 문화적 충격 이었던 것이 있다면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미국의 가정 생활이었습니다. 제가 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주위에 있는 친구들만 보아도 원만한 가정-양쪽 부모님이 계신-에서 자란 친구들 보다는 기독교인들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들이 이혼하여 편 부모와 함께 혹은 친척들이나 조 부모님들과 함께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어 가면서 사는 친구들이 더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보아도 제 클래스의 90%의 아이들은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 대 부분이고,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자란 아이들 보다는 결핍과 학대로 상처 받은 아이들이 더 많이 있다 보니, 그 아이들은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저의 학급에 D라는 학생이 있는데, 그 아이는 매일 아침에 저를 보면 얼마 전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난 Mr. Roger가 그의 TV 프로그램 Mr. Roger's neighborhood에서 부르던 노래 한 곡을 부릅니다.

It's a beautiful day in this neighborhood,
A beautiful day for a neighbor.
Would you be mine?
Could you be mine?

It's a neighborly day in this beauty wood,
A neighborly day for a beauty.
Would you be mine?
Could you be mine?

I've always wanted to have a neighbor just like you.
I've always wanted to live in a neighborhood with you.

So, let's make the most of this beautiful day.
Since we're together we might as well say:
Would you be mine?
Could you be mine?
Won't you be my neighbor?
Won't you please,
Won't you please?
Please won't you be my neighbor?

D라는 학생은 이 노래를 저에게 와서 부를 때 "Would you be mine? Could you be mine? Please won't you be my neighbor" 이라는 가사 중 'mine' 이나 'neighbor' 라는 단어 대신 'mother' 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부릅니다. "Would you be my mother? Could you be my mother? Please won't you be my mother?" 이렇게 말입니다. 처음에 그가 이 노래를 부를 때 저는 너무 재미 있어서 그냥 웃어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엄마가 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할 때에도 계속 웃고만 있었더니, 제가 대답을 안 하면 계속 노래만 할 거라고 하여 결국은 "Yes"라고 대답 했답니다.

그 아이의 아빠는 감옥에 가 있고, 혼자서 두 남매를 키우면서 사는 엄마는 생계 유지에 허덕이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적인 여유 조차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그런 가정 환경 뿐만 아니라 그에게 기대하는 엄마의 생각에 저는 더욱 놀랐습니다. 그의 엄마는 아들인 D가 워낙 학교에서 문제만 일으키는 정서 장애 아동이다 보니 아예 포기하고 이미 초등 학교 2학년 때부터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 하고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소년원에 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학습적인 면을 보면 그렇게 장애를 가진 아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의 원만하지 못한 가정 생활로 인해 그가 정서 장애 아동이 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또 한 몇 달 전에 이코스타에서 소개한 알코올 중독 엄마의 가출로 다른 엄마를 필요로 하는 B 라는 어린이는 한 동안 새 엄마가 있었으나 학대와 구타를 당해서 힘들어 했습니다. 결국 싱글 인 저에게 자기 아빠와 결혼하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답니다. 제가 보기에 청교도 정신에 세워진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의 가정은 너무나 많은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급격하게 증가하는 이혼율, 알코올과 마약 사용의 증가, 타락한 성 문화, 10대의 임신, 동성 연애 등등은 한 가정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런 가정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태어난 학문이 바로 가족 요법 (Family Therapy)입니다. 사회의 기본이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할 가정의 무너짐은 우리들에게 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가져와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담 (counseling)에 비해 가족 요법은 그 문제를 좀 더 폭 넓게 이해하고 함께 연구하려는 관점에서 치료 (Therapy)를 시작 합니다. 1950년대에 새로이 태어난 가족 요법이라는 학문은 그 역사도 짧은 반면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학문으로서 많은 관심을 얻고 있습니다.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철학 등의 다양한 학문들이 합쳐 져서 이루어진 가족 요법은 가족 서로간에 갖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회 복지 (Social work/ Social welfare)에 가까울 수 있겠고 문제를 이해하고 도움을 찾았을 때 정신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정신 의학 (Psychiatric medicine) 에도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족 요법이 사회 복지 대학 내에 있는 학교도 있고 의과 대학 내에 있는 학교도 있으며 심지어 많은 신학교에서도 기독교 상담 학을 하면서 가정 사역에 관심 있는 목회자들에게 가족 요법(Family therapy) 자격증을 취득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럼 이 가족 요법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자세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저는 가족 요법의 기본 적인 개념과 우리 기독교 세계관이 많은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가족 요법을 통해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다 보니 .(Accept yourself the way you are.) 우리에게 처한 환경을 현실 그대로 받아 들인다. (Accept your situation the way it is)

만 약 우리 자신과 처한 환경을 부인하는 것은 어떤 문제와 갈등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가족 요법 치료사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 하기 때문에 각자가 다른 환경에서 자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감옥살이를 한 요셉의 삶을 보면,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시기와 질투 속에서 미움을 받고 결국 노예로 팔려가 수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 갔지만 그의 현실을 비관 하지 않고 언제나 꿈을 갖고 그 꿈을 현실화 하는데 노력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꿈이 이루어 진 이후에도 요셉은 형제간의 우애를 변치 않으며 살아가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 크리스천들도 요셉 처럼 자신에게 처한 고난과 아픔 까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가족 요법을 통해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Understanding others and their life situation)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의 환경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가족 요법 치료사들은 심리극 (psychodrama)과 같은 방법들을 도입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에 앞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이해 시키는 역할을 먼저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큰 다른 점이 있다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순결한 섬김을 통해서, 특히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서 온 인류의 영혼 구원까지 책임지신 그의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남을 사랑으로 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잘 이해해 주시는 첫 번째 role model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각자 자라온 환경, 즉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Understanding of diversity)

가족 요법 치료사들은 사람들의 자라온 환경을 비롯해서 사회적 문화적 차이를 이해할 때 그들의 문제점과 갈등해소 방법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상대방을 향해 마음의 문이 열려 있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 과정에서 치료는 시작된다고 보는데 예수님께서도 어떤 문제들을 갖고 찾아 오는 분들을 위해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받아 들이시고 치유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양성의 이해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열린 마음 (Open mind)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3가지의 내용들을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에 적용해 봅시다. 각각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자와 여자가 부모님을 떠나서 한 몸을 이루어 한 지붕아래 살아갈 때, 자기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제대로 알지 못 하고 자신에게 처해 있는 현실 (고난 혹은 어려움을 의미함)의 이해가 부족하다면 상대방 (배우자, 자녀, 가족 구성원 모두)을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생물학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으로 달리 성장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에는 반드시 어떤 문제를 갖고 살아가고 그 문제 해결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의 가족 관계 형태 (different structure of the family)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가 족 요법은 크게 근대적 가족 요법 (modern family therapy)과 현대적 가족 요법 (post modern family therapy) 으로 나누어 지고 이 두 가지 요법 안에는 대략 15개 정도의 요법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과 처한 환경에 따라 치료 방법 또한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법들이 사용되기 전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 (Caring Heart for Others)" 입니다. 지금까지는 가족 요법의 이모저모를 살펴 보았는데 다음 달 이코스타에서는 여러 가지의 가족 요법들 중에 제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들을 소개할 까 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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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01 23:34 책이야기/eKOSTA 서평

KOSTA 서평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 립 얀시의 책을 소개하기로 작년부터 마음먹었다가 이제서야 소개하게 되었다. 그의 여러 저작들 중에서 두 가지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를 놓고 어떤 책을 소개할까 고민하다가 "실망"보다 "은혜"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번 달에 소개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거나, 아니면 이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의 영문 판 제목 "What so amazing about grace?"가 말해주듯 은혜가 왜 놀라운지 묻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은혜가 빠진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 생활 중 은혜는 실종되기도 한다. 처음 믿기 시작해서 믿음이 새록새록 자라는 형제 자매들을 보면서 믿음의 선배들이 종종 하는 말들이 있다. "처음에는 다 그래." "꽃 믿음이야, 조금만 지나봐." 얀시는 믿음의 선배나 후배나 동일하게 은혜의 바다로 들어 갈 것을 권유한다.

영국에서 열린 비교 종교학 회의에서 세계 각국 전문가들이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찾아 토론에 들어갔다. 그들은 여러가지 답을 하나 씩 지워나갔다. 성육신?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야기는 타종교에도 있다. 부활? 사자의 환생기사 역시 타종교에 있는 것이다. 토론이 길어지고 있는데 C.S. 루이스가 방을 잘못 찾아 들어 왔다. "토론의 주제가 뭡니까?" 그의 질문에 동료들이 전세계 종교중 기독교만이 기여 할 수 있는 바를 찾는 중이라고 말하자 루이스가 답했다. "그거야 쉽죠. 은혜아닙니까?" (P49)

불교도,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모두 인간의 노력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대가 없이 얻는다는 개념은 인간의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에게 어색하다. 은혜로 구원 얻고서도 본능적으로 우리는 그래도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의식에 시달린다. 은혜가 빠진 신앙생활은 재미가 없을 뿐 아니라 피곤하다. 내 힘으로 하는 신앙 생활의 피곤함, 이것의 정체는 무얼까?

내 생각에 위선의 해결방안은 완벽 아니면 정직 두 가지 뿐이다. 그러나 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한 번도 본적이 없기에 완벽은 현실적인 방안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해결방안은 회개에 이르는 정직이다. 성경이 말하듯 하나님의 은혜는 살인, 외도, 배반 등 어떤 죄든 다 덮을 수 있다. 정의 상 은혜란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선은 은혜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가면이 떨어지면 위선이 은혜를 기피하기 위한 정교한 책략이었음이 밝혀진다. (P242)

얀시의 글의 특징은 '설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꼼꼼히 나열한 뒤 하나하나 독자와 함께 풀어 나간다. 자신의 경험과 간증을 등장 시킴으로 독자의 마음을 열곤 하는데 이 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헤럴드 형의 이야기는 은혜를 외면한 사람의 말로를 극명히 보여준다. 헤럴드 형은 얀시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동네에서 알게된 사람이다. 그는 도덕과 정치에 강박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개방 풍조로 인해 심판이 임한다고 믿었고 인종차별 개선정책에 불만을 품고 남아공화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얀시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평신도 설교자로 주일마다 심판과 정죄를 선포하던 그는 그의 집에서 포르노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순수세력과 불순세력으로 양분하다가 그 반경을 좁히기 시작했고 결국 자기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자기마저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책의 맨 끝에 얀시의 결론이 나와 있다. "세상은 은혜에 목말라 있다. 은혜가 임할때 세상은 그앞에서 침묵에 잠긴다." (P333)

사족: 얀시의 또다른 책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역시 한번쯤 꼭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부르짖으나 들으시는 것 같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듯한 하나님께 실망한 사람들과의 인터뷰와 저자의 욥기에 대한 단상, 그리고 그의 간증이 어울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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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의 소리

로마를 꿈꾸는 나라에서 (1)

- 결과론에 대하여 (On Consequentialism)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예레미야애가 3:40)

들어가며

몇 해전 9.11테러로 수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이유없이 죽었을 때만 해도, 사건이 터지자 병원으로 달려가 헌혈하는 미국인들을 보았을 때만해도, 교회에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미국인들과 함께 기도할 때만해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알카에다를 소탕한다며 쳐들어가서 부수고 뒤지고 할 때만해도 담담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바그다드 시내 외곽으로 진입한 오늘 십 수년동안 억눌러 온 옛날 일들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2003년 4월 5일에 쓰여졌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이후부터는 바울의 고백에 나오는 헛된 과거로 (빌립보서 3:1-16) 치부하던 일들이 뇌리를 스친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일들이 구태여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된 이유는 이때 제가 하나님이 중심 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과, 이 일들이 언젠 가부터 저도 모르게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일들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기만했던 시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한 세대의 고민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결과론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과론 (Consequentialism)

대학을 다닐 때 미국 유학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식민지 반봉건 사회냐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냐 하는 구성체 논쟁에서 민족민주전선 이니 민중민주노선 이니 하는 민주화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분단의 책임자요 개발독재의 후견인이요 제국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던 제게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또 바람직하지도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아내도 박사과정에 있는 지금의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들은 자기기만이나 젊은 시절 철없는 생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론적 시각은 '현실'이나 '힘'만을 강조하는 비관적 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편견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도 이런 결과론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라크와 벌이는 일방적 전쟁이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타당한 명분과 절차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전쟁을 이끌고 있는 강경파든 여론을 두려워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온건파든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담 후세인 을 폭군(tyrant)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자유(freedom)나 해방(liberation)이라는 용어들은 영미전통에서는 동의를 수반하지않고 법률적 절차를 따르지않은 자의적 지배와 힘으로부터 자유, 즉 '비지배' (non-domination)의 원칙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주권을 가진 다른 나라에 선제공격을 하면서 국제법과 절차를 무시했고, 전쟁이 시작될 그 때까지 한번도 이라크 사람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을 환영하는 이라크 사람들, 구호물자를 앞 다투어 가져가는 사람들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벌이는 전쟁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의 정당성은 단지 미국인들의 안전, 자기들이 상상한 위협(self-imagined threat)으로부터의 자유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 석유를 놓고 독재와 타협하려 했지만 번번히 기만 당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말한다면 솔직하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미국이 주장해 온 국제화와 민주화의 세계적 흐름도 이 전쟁에 당위성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전쟁 이후 경기부양정책이 실효를 거둘 것이라는 전망만이 그나마 솔직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히려 성경말씀을 자기 주장 속에 작위적으로 집어넣는 현 미국 대통령의 연설들은 우리를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while almost every president has invoked a belief in God in some manner, Bush's use of Scripture is notable because he has used it to help frame the stakes for possible war with Iraq" Chicago Tribune, March 2.)

모두가 결과론에 매달려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강경파는 이라크 재건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벌써부터 손을 쓰는 유럽의 강대국들을 소개하며 국제질서는 결국 승자에게 줄을 서서 떡고물을 먹는 것일 뿐이라는 (to jump on the bandwagon) 신현실주의 이론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온건파 정치인들은 안전을 갈망하는 중산층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기에 이번 전쟁이 단기간에 승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결과적으로는 이익이 될 것이라며 비판보다 협력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테러와의 끝없는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부터 다문화주의 나 국제협력의 화술은 힘을 잃었습니다. 인권 단체들도 이왕 일어난 전쟁이니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는 주장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 이라크가 실제 대량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2) 이라크 인들이 미국이 주도해서 세운 새 정부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3) 전쟁을 반대했던 강대국들이 이라크 재건에 참여하기위해 전쟁의 당위성을 뒤늦게 인정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일만 남은 인상입니다.

이런 결과론에 기초한 텔레비전 뉴스와 틈틈이 듣는 국방부의 발표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결과론은 어쩌면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sy)을 심리학적 언어로 위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폭력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는 일을 고뇌에 찬 결단인 것처럼 말하면서 우리는 종종 상황을 과장할 때가 있습니다. 개발독재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은 물리적 힘으로 질서를 잡고, 강제로 반대론을 잠재우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만든 그럴듯한 결과를 무조건 칭찬하는 문화입니다. 이런 결과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완성하는데 가장 공이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 그대로 예수님을 팔아 하나님의 말씀을 만족시킨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결과론에 입각해서 가롯 유다를 잘했다 칭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결코 결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로마 흥망 사 속의 기독교

미국에서 벌어지는 보수다 진보다 하는 논쟁에서 흥미로운 점은 로마에 대한 언급입니다. 미국이 로마 공화국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몇 차례나 농사를 짓다가 독재 관(Dictator, 6개월 임기로 위기 시에 선출되며 전시 미국대통령과 비슷한 지위가 보장되는 직책)으로 선출되어 위기로부터 국가를 건져내고 위기상황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농부로 돌아간 킨키나투스 (Cincinatus)를 존경했다는 것, 연방 주의자들 (the Federalist)과 이에 맞선 반 연방 주의자들 (the anti-Federalist)의 논쟁에서 로마에 대한 갖가지 해석들이 공공연히 나타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 정치인들의 활동이 로마공화국의 원로원과 민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연상하게 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선동적이라는 비난에 민감한 미국 정치인들의 모습을 볼 때 선동이라는 죄목으로 서로를 견제했던 로마의 귀족들이 생각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로마의 평민들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귀족과 벌이던 싸움을 포기한 것과, 미국 시민들이 많은 문제들을 접어두고 하나가 되어 전쟁에 몰두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로마보다도 더 로마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적이라고 자기들이 먼저 규정하고, 직접적인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쳐들어간 전쟁을 75% 이상이 지지하는 것은 11년 전의 걸프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일입니다. 수천발의 폭탄이 터지는 바그다드의 야경과 미군 탱크가 진입하는 바그다드 전투상황을 프로농구와 프로야구와 동시에 시청할 수 있는 이 상황을 이제부터는 미국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소위 '신보수'로 분류되는 정치인들 중에 로마의 멸망을 기독교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성적인 전투성, 견제와 균형에 기초한 정치제도의 역동성, 경쟁을 통한 탁월함을 덕(virtus)으로 추구하던 로마의 문화는 공화국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속 되었지만,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는 차츰 변질되어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의 역사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말기, 중세와 르네상스의 초기, 그리고 니체의 자조적인 비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현실을 회피하는 생활태도를 소위 '사색적 생활' (vita contemplativa)이라며 비난했던 경우는 많습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삶(vita activa)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비난을 하는 경우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나타나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쳐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용맹성으로 신약에서 가르치는 사랑의 실천윤리를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부시대통령이 "America is not soft!"라고 말할 때, 럼스펠드 국방부장관이 기자들에게 "we will see soon!"이라며 비판을 피해갈 때 혹시 이 지도자들에게 신보수의 생각이 미국의 미래라는 이름으로 이미 자리잡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로마의 멸망은 기독교가 가르치던 사랑이라는 덕목이 아니라 무분별한 향락문화, 지도층의 부패, 그리고 가난에 허덕이던 하층민들에게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애국이라는 화 두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는 어쩌면 기독교로 인해 멸망의 시간이 조금 연장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향락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양심이 상실되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고, 지도층의 부패가 이미 상식이 된 로마에서 기독교인은 오히려 소금이요 빛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로마는 건강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패한 로마는 부패한 삶에 대한 집착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며

결과가 과정을 합리화한다는 말이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꿈 속에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따가운 햇빛때문에 벌어진 땀구멍으로 최루탄 가스가 들어가서 온통 물집이 생긴 일, 가로투쟁을 가며 두려운 마음에 선배의 대수롭지않은 영웅담을 애써 기억해 내려고 한 일, 종로와 동대문 뒷골목을 이를 악물며 도망 다니느라 허리춤에 넣어둔 유인물들이 땀으로 흠뻑 젖은 일, 닭장차에서 친구와 함께 두들겨 맞은 일들이 꿈 속에 나타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어쩌면 힘(power)이 지배하는 권위주의를 무의식 중에 배웠을 수 있습니다. 혹은 독재에게 배운 나쁜 버릇들이 익숙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숫자에 기초한 싸움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는 오랜 시간동안 순간순간 소신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준 조용한 다수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이러한 과정을 모르는 세대에게 민주주의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경쟁의 공간이나 제도일 뿐이고 권력만이 그 목표가 될 것입니다.

케이블 회사마다 기본에 공짜로 넣어주는 Fox뉴스에서 미국 중산층의 배타적인 애국심이 여과되지 않은 체 나올 때, 이 흥미위주의 뉴스채널에 기독교방송 책임자라는 사람이 나와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역사에서 모두 반 기독교 세력이었다'라는 말을 내뱉을 때, 이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비난하던 뉴스 진행자가 매 시간마다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전쟁소식을 스포츠 뉴스처럼 전하는 것을 볼 때면 여러 해 동안 미국에 살았지만 철저하게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스스로를 보게 됩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식료품 가게에서 말을 걸어온 미국인이 전쟁이야기를 피하는 제게 '북한사람'이냐고 물을 때면 로마제국 말기의 기독교인들이 생각납니다. 다음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한국인이라는 말과 함께 '기독교인'이라고 꼭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미국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러 왔던 아니면 이민을 왔던 간에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땅이 예전 같지 않을 때에도 과정과 결과 모두를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 들은 예전같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에는 애국심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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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기독인의 초상

사법시험 이야기

얼마 전 <다니엘 학습법> 열풍을 비판하는 글이 <뉴스앤조이>에 올라왔습니다.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김동환 전도사님의 책이 이처럼 큰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자체가 결국 한국 기독교의 상향성 또는 업적주의를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기독교 서점을 갈 때마다 베스트셀러 분야를 장식하고 있는 그 책을 보았지만, 제가 다시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사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뉴스앤조이>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다니엘 학습법>의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완벽한 프로그램 하에 10분 단위까지 계산해 가며 학창생활을 하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동환 전도사님과는 달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어디에서도 완벽한 프로그램 아래 10분 단위로 계산하며 살지 못했던 저는, 시험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주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시험 때마다 운이 좋은 편이었고, 기독교적 표현을 빌자면 시험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저에게 언제나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 계신 것처럼, 예수 믿는다고 모두 서울대를 나와, 성공한 벤처 기업가, 판사, 검사, 의사, 교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슨 요술 방망이가 아니니까요. 예수만 믿으면 마음에 드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선전하는 교회 지도자가 있다면 교회를 때려치우고 차라리 입시학원을 열어야 할 겁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고시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로 의미 있는 은혜란 나 같은 죄인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실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세속적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저의 부끄러운 고시 합격 이야기를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글은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 자기 자랑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법시험이 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까닭에 그냥 빼먹고 넘어갈 수가 없네요.

1989년과 1990년은 저에게 여러 모로 절망적인 시기였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준비를 시작했던 사법시험은 대학을 졸업하도록 1차에도 붙지 못했습니다. 특히 4학년 때(1989년) 도전했던 시험에서는 총 320문제 중 단 1개 차이로 실패의 쓴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등을 돌린 것 같은 느낌, 시험에 떨어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차가운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그 추운 느낌을 알고 있을 겁니다. 모두들 "저 자식은 별 능력도 없는 것이 사법시험을 하겠다고 폼을 잡는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떨어지는 것을 보니 돌대가리가 틀림없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법시험 한답시고 대학 4년 동안 외국어 공부라고는 해 본 적이 없으니, 고시 떨어지면 회사 취직도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내년에는 꼭 붙을 것”이라는 주변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험에 떨어져본 경험은 그것이 대학입시이든 사법시험이든 입사시험이든지 간에 인간을 성숙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군대 연기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공부를 몇 년이고 계속할 마음이 없었던 저는, 졸업 직후의 1차 시험에도 떨어지면 그냥 고시를 집어치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 혹시 1차 시험에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응시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 불씨를 아예 제거하기 위해 대학원을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으면 졸업 후의 1차 불합격과 동시에 군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제 인생에 가끔씩 써먹던 ‘벼랑 끝 전술’을 이때도 한 번 구사해 본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1990년 6월, 1차 시험에 합격했고, 1년 동안 입영을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1차에 합격하고 막 2차 준비를 시작할 무렵, 오랫동안 사귀어오던 여자친구가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이성교제가 절단 나는 것 역시 성숙의 좋은 계기가 되지요. 요즘처럼 먹고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실연의 문제는 남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명한 영화 "유로파 유로파(Europa Europa, 1991년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의 원작이 된 솔로몬 페렐(Solomon Perel)의 자서전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유태인임을 숨긴 채 소련의 소년단, 독일군 통역관, 히틀러유겐트(히틀러 소년단) 등을 두루 거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솔로몬이 전해 듣게 되는 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의 체스 친구였던 예르지크는 독일 점령하의 게토(유태인 집단거주지)에서 유태 공산당 지도자로 영웅적 투쟁을 벌인 끝에 소련군에 의한 해방을 맞이합니다. 예르지크가 나치 하의 게토에서 겪은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그의 생명력은 그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지요. 그런데 유태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는 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고 그 아가씨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나치 하에서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 끝에 생존한 사람이 겨우 여자 문제로 자살을 하다니요.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실연은 젊은이들에게 그만큼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실연을 통해 인간은 성숙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는 것이지요.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실연을 통해 인간적으로 많이 성숙한 건 감사한 일이었지만, 두 달 정도를 책 한 권 읽을 수 없는 공황상태 속에서 허송하게 되었거든요. 그러고 나니 어느새 겨울의 문턱이었고 2차 시험은 8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었습니다.

겨울바람과 함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으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의 인생에 그 때만큼 열심히 공부한 때도 없었을 겁니다. 12월호에 잠깐 이야기했었지요? 1986년 여름 UBF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가 가을에 그 분과 이별한 친구가 있다구요. 바로 그 친구와 함께 고려대 대학원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그저 하루 종일 교과서를 읽고 밑줄치고 이해하고 외우고, 또 읽고 또 밑줄치고 외우는, 그런 단조로운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남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같이 2차 시험을 준비하던 동료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모의시험을 쳐보아도 결과는 늘 꼴찌였습니다. 스터디 그룹 모임시간에도 워낙 아는 것이 없어 언제나 멍청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가끔 논쟁에 끼어 들어봐야 결론은 늘 제가 틀렸다는 쪽으로 났습니다. 남들이 잘 안보는 교수님들의 교과서만을 택해 공부한 탓에(남들이 좋다고 추천하는 교과서들은 도대체 저의 체질에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늘 남들과 달랐고, 그렇다고 저의 논리로 남들을 설득할 실력도 없었습니다.

시험이 한 달쯤 앞으로 다가왔을 때부터는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포기하는 친구들도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즈음(1991년 6월 중순),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저에게 행정법에 대한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너 혹시 이 문제에 대해 설명 좀 해 줄 수 있냐?" 그런데 그 때가 시험을 겨우 보름 앞둔 시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머리 속에는 친구가 질문한 문제와 관련된 지식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공부량의 절대부족을 절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전혀 모르겠다. 그게 도대체 뭐냐? 나는 그 용어도 모르겠는데..."라고 제가 대답하자 친구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거 이번에 나올 가능성이 높은 아주 중요한 거야. 그런데 아직도 이걸 모르면 어떻게 하냐? 집에 가서 책 좀 찾아보고 내일 같이 이야기해 보자"고 말했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보충해 주려는 고마운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시험 보름을 앞두고도 처음 들어보는 법률용어가 있다는 사실에 저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8개월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절대적인 공부량의 부족은 어쩔 수가 없구나. 어차피 떨어질 시험인데 이쯤해서 그만 두자. 내 실력으로는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 대화가 오간 직후,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가방을 쌌습니다. 그냥 집으로 가서 쉬고 싶었습니다. 시험을 눈앞에 두고 한나절이 천금같던 시기였습니다. 저의 심상찮은 변화를 눈치 챈 친구는 "야, 공부 좀 더하다 가. 너 왜 그러냐?"하면서 저를 붙잡았으나 저의 머리 속에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늘은 집에서 쉬려고." 가방을 들고 도서관을 나와 학교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아름다운 교정이었습니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고 있던 교정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석조건물들과 만발한 꽃들의 조화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저에게는 어울리는 않는 낯선 그림들이었습니다. 집을 향해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역 앞 고가도로를 지날 때부터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왕 사법시험은 틀린 거고.... 빨리 군대를 가야겠다. 일단 군대를 가고 나면 결국 법조계와는 완전히 안녕이지만 어쩌겠나, 처음부터 내 길이 아니었던 것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공연한 욕심을 부렸나 보다. 실력이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줄줄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제1한강교를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를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한데 그렇다고 내가 내는 것은 아닌 소리, 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상에 가까운 것 같은 느낌, 어쨌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마음의 소리였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가 믿고 있는 것은 너 자신이냐? 아니면 나냐?"

그 순간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 내가 그동안 예수 믿는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과연 내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서 내가 지금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나 혼자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니다. 그리고 이까짓 시험 안 붙는다고 내 인생이 망하는 것도 아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을 얻는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날 밤은 집에 가서 여전히 마음속에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던 그 소리를 깊이 묵상했고, 다음날부터는 다시 학교에 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정된 상태에서 시험 전날까지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음성은 이후에도 제가 불가능한 일에 부딪힐 때마다 마치 중요한 삶의 원칙처럼 저를 일깨우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사법시험 2차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2차 시험은 논술식으로 하루에 두 과목씩 총 여덟 과목을 평가합니다. 한 과목당 50점짜리 큰 문제가 하나, 25점짜리 작은 문제가 두 개 출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모두 합하면 약 24문제가 되는 셈이었지요. 각 과목 100점이 만점이지만, 평균으로 보아 65점 정도만 되면 수석을 할 수 있고, 55점 정도만 되면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사법시험 2차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부해야 할 범위가 엄청나게 넓다는 데 있습니다. 민법 한 과목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가장 기본적인 교과서들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00페이지가 넘습니다. 교과서들의 내용도 날로 깊이를 더하고 있어서 하루가 다르게 두꺼워지고 있습니다. 워낙 책이 두껍다 보니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쯤이면 처음 읽었던 부분은 모두 잊어버리게 되지요. 그래서 고시공부를 흔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표현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엄청난 범위 중에서 실제로 시험에 출제되는 것은 겨우 30-40페이지에 불과하다는데 있지요. 인간의 머리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엄청난 범위를 다 외울 수는 없고, 어차피 이해하고 잘 정리하고 최소한의 것만을 암기해야 하는데, 하필 자기가 간과한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면 실패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법시험은 이른바 ‘운’도 많이 작용하는 시험입니다. 물론 공부를 전혀 안 한 사람이 시험에 붙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상당한 준비를 마친 사람 중에서 누가 과연 그 좁은 관문을 통과하느냐를 결정하는 데는 운도 많이 작용한다는 의미이지요.

여덟 과목 중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한 것은 형법이었습니다. 법대기독학생회 지도교수로 모시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김일수 교수님의 전공이 형법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지요. 그 다음으로는 헌법이 자신 있었고, 아마 그 다음이 민법 정도 되었을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저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2차 시험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그 결과 2차 시험에만 포함되어 있는 행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의 과목은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횟수가 3회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은 민사소송법이었습니다. 시험 마지막까지도 저는 도대체 민사소송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험 보름 전에 저를 절망시켰던 행정법도 비슷했습니다.

1991년 7월 마침내 시험 날이 되었습니다. 사법시험 2차 시험 현장의 모습은 조선시대 과거장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시험장에 들어가면 둘둘 말린 전지가 한 장 칠판에 붙어있고 그 속에 시험문제가 적혀 있습니다. 시험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말려있던 종이가 쫙 펼쳐지고, 그 때부터 2시간동안 거기 적혀 있는 논제들을 정신없이 적어나가면 됩니다. 말려있던 종이가 펼쳐지기 전까지는 피 말리는 긴장감이 교실에 넘쳐나고 종이가 펼쳐지는 순간 교실에는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됐어"라고 자신 있게 소리치는 학생도 있고(이상하게도 이런 학생들 중에 낙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무 좋아하다가 논점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까닭입니다), 자기가 준비하지 않은 엉뚱한 논제에 넋을 잃는 수험생도 있습니다. 그 때의 긴장은 정말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2차 시험 응시 첫날, 국민윤리나 헌법은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주제가 나왔기 때문에 특별히 잘 쓰는 사람도 없고 못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첫날 시험을 끝내고 출발은 그런 대로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둘째 날과 셋째 날 과목들이 모두 자신 없는 것들뿐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들은 둘째 날 시험부터 일어났습니다. 행정법부터 시작해서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순간마다 저는 저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신기할 정도로 제가 시험 직전에 마지막으로 점검한 부분에서 문제들이 출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민사소송법은 제가 시험 준비기간 동안에 한번도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이 없는 부분에서 큰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그것도 역시 시험 바로 직전에 제가 화장실에서 읽고 들어간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시험 직전에 읽지 않았더라면, 두 페이지도 제대로 적지 못했을 문제였습니다(보통 큰 문제는 여덟 페이지 정도 적어야 합니다). 나중에 들으니 아버지께서 매일 시험시작 30분전에 학교 교장실 문을 걸어 잠근 채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다른 것은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우리 아들이 지금 보고 있는 바로 그 부분이 시험에 나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다운 순진한 기도였고, 저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큰 문제는 직전에 본 것’이, ‘작은 문제는 원래 잘 아는 것’이 나오다 보니, 셋째 날 시험이 끝나고 난 후에는 합격을 자신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의 형법은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던 과목이었고, 형사소송법도 다른 과목들에 비해서 위험부담이 적은 과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이 저의 힘으로 붙게 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날의 형법은 예상했던 것과 여러 모로 달랐습니다. 문제 뜬 것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답안지를 채운 다음 여유 있게 시험장을 나섰습니다만, 쉬는 시간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논점을 완전히 잘못 잡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정작 적어야할 논점에 대해서는 한 줄도 적지 못했던 것이지요. ‘오, 하나님, 저를 이렇게 실패하게 만드실 거라면 어제까지는 왜 그렇게 저를 도와 주셨습니까’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사법시험에는 과락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단 한 과목이라도 40점 이하의 점수가 나오면 무조건 떨어지게 되어 있답니다. 따라서 나머지 일곱 과목을 아무리 잘 쳤다 하더라도 형법 한 과목이 40점 밑으로 나오면 설사 나머지 점수를 합산한 것이 수석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후의 마지막 형사소송법 시험을 뭘 적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때우고 나서 시험장을 터벅터벅 걸어 나오자니 제 입에서는 한숨만 흘러나왔습니다.

바로 그 때, 저는 다시 한번 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 것보다 한결 간단했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

마치 선언과 같은 짤막한 문장이었습니다. 언젠가 들어보았으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감격이 몰려왔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왜 이렇게 이런 소리가 자주 들리나. 혹시 내가 마음속으로 혼자 상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도 생겼지요.

그런데 그 날 밤에는 더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사법시험 끝나는 날이 금요일이었기에, 저는 감사 기도를 드리러 교회 철야기도 모임에 나갔습니다. 나흘 동안 거의 한 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는데 어떻게 철야기도 나갈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신기합니다. 어쨌든 그 날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부목사님께서 막 설교를 시작하시는 중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 43장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의심 많은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너는 내 것이라"라는 말씀에서만 눈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낮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이 신기한 현상을 그저 우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고시 공부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상심리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날 들은 음성이 하나님의 것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홍천의 예수전도단 전도학교에 이어 또 한 번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철야기도 이후 저는 이사야 43장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배경은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국가를 향한 것이었지만, 저에게는 ‘물 가운데로, 불 가운데로’라는 말씀이 더하고 뺄 것 없이 제 인생을 향한 위로의 말씀이라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제 글을 읽어 오신 분이라면 제 삶에 영향을 준 몇 가지 사건들이 하필 물이나 불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시험 발표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은 학교에서 예수전도단 신입생 후배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배들이 "결과가 어찌될 것 같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붙으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고, 떨어지면 실력 없어 떨어진 것이니 별로 걱정 안 해"라고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시험 붙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된 사람인데 그까짓 시험에 떨어진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는 배짱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신입생 가운데 고환경, 권대식 두 후배는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로펌에서 일하고 있고, 윤유덕은 보험회사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를 옆에서 지켜보던 1년 후배 류기인은 벌써 몇 년째 검사로 일하고 있지요. 선교단체 출신들 치고는 비교적 특이한 길을 걷는 무리들이 생기게 된 셈입니다.

그 해 가을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에는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성적도 아주 우수한 편에 속했습니다. 실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결과였습니다. 각 과목의 성적은 그 좋은 결과가 제 실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가장 자신 없어하던 과목부터 시작해서 평소실력과는 완전히 역순으로 점수가 나왔던 것입니다. 가장 자신 없던 민사소송법과 행정법에서는 70점이 넘는 경이로운 점수를 얻었고, 가장 자신 있어 하던 형법은 47점으로 간신히 과락을 넘겼습니다. 형법 과락자가 너무 많아 형법 점수를 전체적으로 10점씩 올려주었다는 뒷이야기가 수험가 주변에 흘러나온 것을 보면 원래 저의 점수는 37점으로 과락에 해당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시험결과 앞에서 정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4학년 때 아까운 점수로 1차에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사랑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학년 때 1차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 해 가을 동안 헌법, 민법, 형법의 기초를 충실히 다질 수 있었고, 덕분에 2차 수험기간이 너무나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참고로 4학년 때 1차에 합격했던 저의 동기들은 다음해 모두 2차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그해 1차에 합격했더라면 저도 아마 그 대열에 동참했을 겁니다)

저는 그런 기적적인 과정을 통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니까, "실력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니면 어떻게 하냐? 변호사 영업에 지장 있잖아"라고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실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제 인생에는 그보다 더 큰 기적도 많았지만, 오늘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사법시험 이야기를 한 번 해 보았습니다. 물론 저의 글을 읽고 하나님이 그저 기도하면 시험이나 붙게 해 주는 그런 분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할 수 있는 분이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제가 느낀 점 몇 가지를 나눠보겠습니다.

첫째는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저는, 그 메시지에 알게 모르게 담겨 있는 인과응보의 논리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믿음도 하나님 앞의 어떤 ‘행위’로 해석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축복이 뒤따른다는 논리가 그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은혜는 그 누구의 행위보다 앞선 것이며 거기에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으로 부르심에 순종했다 해도, 그 순종보다 앞선 것이 부르심과 은혜였습니다. 부르심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축복은 시작된 것이고, 왜 하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저 은혜일뿐입니다. 저는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왜 여러분에게도 그런 음성을 들려주고 계신지 설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왜 나를 부르시고 복 주시면서, 내 친구에게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는지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걸 자꾸 설명하려고 하고, 그건 “김두식에게 이러저러한 믿음과 선행과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석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저런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결코 제가 남보다 하나님을 잘 믿었거나 정직하거나 신실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먼저 저를 사랑하셨고, 제 필요를 아셨고, 그걸 채워주신 것일 뿐, 제 쪽에서 원인을 찾을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둘째로, 어떤 시험이든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력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조차도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대해 보이는 시험 앞에 지레 겁을 먹고 시험장에 가기도 전에 싸움을 포기합니다. 저도 아마 시험 보름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분명히 시험을 포기했을 겁니다. 시험을 포기하고자 하는 기독인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웃기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무리 여러분이 지금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부분에서 문제가 안 나오면 그만’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험을 준비하다보면 왠지 내가 잘 모르는 그 부분에서만 문제가 나올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도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전 날의 기도를 잊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험 합격 전 날 저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판검사, 변호사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으니, 제발 시험만 붙게 해 주세요. 고시 공부하는 동안 저의 인생은 마치 벌레와도 같았습니다. 이제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시험 좀 붙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만약 저를 시험에 붙여주신다면 저는 앞으로 평생 동안, 저하고 함께 시험을 쳤지만 합격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만큼의 평균적 부와 명예만을 누리며 살겠습니다. 시험에 붙더라도 마치 시험에 붙지 않은 것과 같은 마음자세로 살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올리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험에 붙게 되더라도 어차피 제 실력이 아닌 순전한 은혜로 붙게 된 것일 텐데, 그 추가적 열매를 제가 다 누리고 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제가 잊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은 이 결심 하나였습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둘 때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노력으로 얻은 열매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제가 그 결심을 지킬 수 있도록 잘 인도해 주신 것 같습니다.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대학 동창들 중 사법시험에 실패해서 다른 직장에 진출한 사람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저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며 살고 있으니까요.^^

사실 살아오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전 날’의 경험을 갖기 마련입니다. 대학 합격자 발표 전 날, 입사시험 합격자 발표 전 날, 사랑을 고백하기 전 날, 중병 진단 결과를 알기 전 날 등등. 그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런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를 알게 되어 환호성을 지르게 되지요. 동시에 ‘그 전 날’의 결심들은 눈 녹듯이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일단 하나의 관문을 뛰어넘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다 자기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 법조계라는 하나의 분야를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법조계에 진출한 사람들 모두, 아니 기독교인으로 법조계에 진출한 사람들만이라도 ‘그 전 날’의 기도와 결심을 잊지 않았다면 우리 법조계가 이렇게 이상한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렵지만 ‘그 전 날’의 기도와 결심을 잊지 않는 게 저나 여러분들이 행복을 누리며 사는 지름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기 껏 시험 하나에 합격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적었군요. 미숙한 제가 누려온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작은 경험이, 지금 절망 가운데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긴 제 부족한 글 솜씨를 생각하면, 제 글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이나 안 생기면, 그 자체로 은혜겠지만 말이지요.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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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호

가끔 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는 친구인 한 자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저는 이번엔 어떤 따뜻한 글이 있을까 기대를 하곤 합니다. 그녀의 글 속에는 제가 평소 깨닫지 못하는 감사의 의미가 늘 담겨있어 제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십여 년 전 교통사고로 전신장애를 갖고 살게 된 그녀는 휠체어에 의지한 생활에 어느덧 익숙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음악 듣는 것과 책 읽는 일을 무척 좋아하는 그녀의 감사는 자신이 가장 즐겨 하는 일에 지장이 없는 장애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그녀의 감사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진실하기에 더욱 귀하게 느껴집니다.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젊은 시절 늘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콧대가 무척 높다는 평을 듣곤 했다는 그녀의 아름다웠을 시절을 상상해 보면 모란꽃이나 다알리아 꽃처럼 수려하고 당당했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그녀가 느꼈을 절망과 분노를 상상해 보면 얼마나 처참했을지 마음이 아파 옵니다. 그러나 그녀가 보내는 편지에는 늘 밝고 온화한 모습만이 느껴집니다. 교만했던 자신을 겸손케 하시는 분, 쉽게 분노하고 모든 일에 성급하던 자신에게 인내를 가르치신 분, 헛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가치관을 갖게 하신 분, 캄캄한 절망의 늪에서 자신을 건져내신 손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언제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저 자신을 포함해서) 늘 불만 불평을 늘어놓는 일에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자신과 남들을 비교하며 상대적인 빈곤과 열등감을 이끌어 내어 자신과 주변 환경에 대한 분노를 품거나, 이웃의 작은 결함을 확대하여 자신의 열등감을 회복하려는 교만으로 다른 이들을 상처 입히는 행위를 알면서 모르면서 저지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건강한 육신과 일용할 양식,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안전한 사회에서 이웃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느끼며,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덫에 걸린 채, 감사한 마음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를 성취하면 다른 한가지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안에서 샘솟듯 일어나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감사보다는 원망과 탄식이 자주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 자매가 음악을 듣다 말고 감격하여 써 보낸 편지에는 하나님이 그 음악가에게 주신 재능에 대한 감탄과 그 재능으로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한 감사, 자신의 귀를 온전히 지켜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책을 읽다 말고 써 보낸 편지에는 진리에 대한 온갖 질문과 온전한 판단력을 지켜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날씨가 궂으면 아파 오는 관절과 독신 생활의 외로움과 생활의 온갖 어려움을 통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사마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태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곤 합니다.

분명히 내적인 갈등과 번민이 수없이 그녀를 괴롭혔을 그녀의 삶에 주님의 만지심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빛나는 감성을 대할 때마다, 그녀 안에 빛나는 소중한 무엇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통해 사모하는 것은 물질과 명예와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이 아니라 참된 지혜와 정결한 영혼에 대한 소망일 것입니다. 순수한 영혼을 느끼는 자는 현실에서 듣지 못하는 아름다운 소릴 들을 것이며,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나 홀로 드리는 기도 중에 간구하는 축복이 얼마나 즉물적이고 가시적인 안정과 가치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인지 가끔 반성하곤 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고 정의로워지는 것, 나의 삶이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는 것은 내 자신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성숙한 영혼을 가질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획득이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절실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우리에게서 사랑을 이끌어 내거나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하지는 못하므로 삶은 늘 공허한 상태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내 안에 성숙한 자아의 눈이 열리고 작고 사소한 일들에도 감사를 느낄 때, 더불어 사는 사회, 아름답고 공평한 인간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소망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부족한 환경 때문에 도전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아플 때 비로소 건강함에 감사하게 되며, 외로움은 벗과 가족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를 일깨우게 합니다. 각 지체마다 다르게 소용되어짐을 알기에 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음은 범사에 그분의 손길이 닿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감사는 주님께 대한 우리 사랑의 표현입니다.

"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 송명희 시인의 놀라운 고백을 통해 감사의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다시 헤아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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