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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복종의 사회학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 준수 교수는 "뇌 중풍환자의 30%-50%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분노와 우울증이 밖으로 폭발할 때 대구 지하철 같은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2002년 정신질환자가 일으킨 범죄는 1,447건에 이르며 한국에 약 16만 명의 심한 우울증환자가 방치되고 있다. "혼자 죽기 억울해.." 세상에 대한 원망이 깊어가고, 살기 점차 힘들어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대인관계 파괴와 소외감에 절망한다. 서울대병원의 보고는 충격적이다. 20세 이상의 남자 45%가 인격이상징후가 있다고 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범죄는 소외감이 가져온 절망과 자포자기 행동이었다.

인간관계 파괴는 영적인 삶에도 치명적이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는 그의 저서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라(Restoring Your Spiritual Passion)>에서 "열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는 열정, 믿음으로 살며, 아낌없이 주를 섬기고 봉사하려는 열정, 자신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열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소망하는 열망이다. 그러나 이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열정을 얻는 지름길도 쉬운 길도 없다. 신비로운 해결책도 없다. 열정을 계속 공급받는 사람들만이 꼭대기로 오를 수 있다. 한 개인을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만드는 힘은 열정이다.." 열정은 마치 만나와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치 음식을 광야에서 거둬들여야 하듯 열정도 매일 새롭게 채워야 한다. 만나를 오래 간직하면 곰팡이가 펴서 먹을 수 없듯이 열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러들어 못쓰게 된다. 주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뒤에 쳐져 구경꾼으로 남겨지는 것은 열정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고백했다. 바울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주를 섬겼다. 쉽게 열정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죄의식과 패배감, 지루한 종교행위를 힘겹게 치루고 있다. 열정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고든 목사는 다시 모으기를 하라(Re-collection)고 권면한다. "나"라는 조각을 다시 모아야 한다. 영적인 열정과 에너지의 저장고가 되게 해야 한다. 흐트러진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목적과 헌신의 다짐, 비전과 소망의 에너지를 다시 되찾아내야 한다. 다시 모으기의 세 가지 원칙이 ?특별한 시간. 특별한 예배. 특별한 친구들?에 있다. 세 가지 원칙은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특별한 예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특별한 시간/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특별한 친구들"(엡5:18-21) .

특별한 친구들. 모세가 아말렉 족속과 전쟁할 때 ‘특별한 친구’들의 관계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승리는 특별한 친구들에게 달려있었다(출17:9).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우리도 주를 섬기다 피곤에 빠질 때가 많다. 모세의 팔이 피곤할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패배하고 있었다. 모세의 팔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아론과 훌이 모세를 앉히고 좌우에서 그 팔을 붙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세가 언덕 위에서 팔을 들고 있는 동안, 여호수아는 골짜기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출17:13). 모세의 주소록에는 특별한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잠재력을 증가시키거나 피곤을 막아주고, 약점을 막아주기 위해 동료의식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분주한 생활과 시간 속에서 특별한 친구들을 위한 시간이 할애되어야 한다. 특별한 친구들과 교제하고, 서로 양육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시간을 그들에게 투자해야 한다. 특별한 친구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영적 일과 중 하나여야만 한다. 바울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방인 전도를 위해 특별한 친구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곁에 두었다. 그의 주소록에는 바나바, 마가요한,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누가, 실라, 두기고..등 많은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의 중요한 원리로 제시한 "복종의 사회학"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복종은 사람에 대한 비굴한 노예적 굴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자발적 봉사를 뜻한다. 영국의 심리학자 캐럴 로스웰과 인생 상담사 피트코언은 지난 18년간 1천 여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80가지 상황에서 행복하게 만드는 5가지 상황을 선택하는 실험을 통해 행복의 공식을 발표했다. P+(5×E)+(3×H). P는 개인적 특성으로 인생관, 적응력, 탄력성을 의미하고, E는 생존조건으로 건강, 인간관계, 재정상태를, H는 더 놓은 수준의 조건으로 자존심, 기대, 야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복공식은 "생존조건이 개인적 특성에 비해 5배, 자존심, 야망등 더 높은 수준의 조건은 개인적 특성에 비해 3배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인간의 행복은 건강과 돈 대인관계가 훨씬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흥미와 취미를 추구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현재에 몰두하고, 운동하고 휴식하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리스도인의 모든 인간관계는 세 가지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부부관계(5:22-33). 부모와 자녀 관계(6:1-4). 사회생활(6:5-9). 가정과 사회적 관계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중심으로 관계되어 있다.
  •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5:22)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5:25)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6:1)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6:4)
  •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6:7)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도 인간관계의 비밀을 가르쳤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 여자-남자-그리스도-하나님으로 이어지는 헤드십의 관계는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행복한 삶이 만들어진다는 행복공식을 이해하게 된다. 헤드십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서로 섬기고 돌봐야할 섬김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의 관계에서도 머리가 되신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되지 않음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되고 그로 인한 피해가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환경과학자 데이비트 왠은 현대인의 소비 지향적이고 물질주의 적인 삶을 ‘어플루엔자’ Affluenza 유행성독감과 같은 전염성으로 비유했다. 소비적이고 쾌락적인 삶은 과중한 업무, 많은 빚, 근심과 낭비등 증상이 수반되며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방법은 검소한 삶과 자연에 접하는 단순한 삶 그리고 공동체생활에 있다고 지적했다. 느림의 자세와 단순함의 실천이 경쟁의식에서 떠나 자신만의 장점과 가능성을 개발하는 삶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자연과 친해지는 삶과 사람과 사람이 함께 모여 숨쉬는 공동체의 삶을 통해 잃어버린 인간의 소중한 자아상을 회복할 수 있다. 참된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먼저 모든 인간관계에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계심을 알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사랑"을 깨닫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선언되어야 한다.

두 가지 전쟁.

750여명의 호주 여인들의 누드 사진이 신문 1면에 컬러사진으로 실렸으나 선정성 시비가 없었다. 호주의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 시위였기 때문이다. 'NO WAR' 알몸으로 글자를 만들어 전쟁반대 시위를 연출하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축하행사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전 시위가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 러시아, 중국을 끌어 들여 형성한 반전전선으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지만 결국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라크 전쟁이 지구촌을 동맹구도로 재편하고 말았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석유독점을 위한 미국 패권주의를 그대로 드러낸 전쟁이었다. 모든 인간관계에도 비슷한 두 가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 야망의 전쟁. The Battle of Ambition. 야망은 앞장서 가려는 충동이다. 야망은 거룩한 언어로 포장되어 나타난다.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하나님의 뜻이면.. 문을 여시면..." 야망은 보상과 명예가 있는 자리에 유혹을 당한다. 개인적인 야망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향하는 열정은 서로 비슷해 보인다. 둘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전진하고 싶어하고, 자신과 재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어한다. 우리는 기회를 노리고, 자신을 높이고 싶어한다. 주목받는 것을 열망하고, 더 높은 명성을 주는 자리라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려 한다. 영적인 열정과 야망은 한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없다. 야망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끊임없이 정신적 게임을 시도하고, 자신의 처지와 하는 일을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성령의 빛이 없이 야망을 볼 수 없다.
  • 교만의 전쟁. The Battle of Pride. 야망의 친구는 성공을 다룰 능력이 없는 교만이다. 웃시야 왕은 교만의 경계가 되는 성경인물이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하나님을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26:5). 웃시야는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군대를 재조직하고 열악했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대하26:16) 몰락이 이어졌다. 결국 웃시야는 문둥이로 심판 받아 죽는다. 교만이 가져온 비참한 종말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망과 교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그들에게 인간관계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없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 인간관계가 맺어지고, 끊어지며, 다시 비겁한 거래가 계속될 뿐이다. 야망의 세상에서 인간은 철저한 이용물일 뿐이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폐기될 뿐이다.

한국사회는 ‘사오정’의 시대를 맞았다. ‘45세 정년을 맞는 시대’라는 뜻이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60년이었을 때, 2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고 10년쯤 죽음을 기다렸다. 평균수명이 80년인 지금, 30년 공부하고, 10년 일하다가 퇴출 당하고, 40년을 막막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정년 이후 살아가야 할 시간이 20-30년으로 우리 사회의 중간허리 부분인 40대가 불안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40대가 불안한 시대는 오래가지 못한다. 40대를 불안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정 진홍 교수는 지적한다. 한국정부가 40대를 살려내는 정책을 펴야한다고 강조한다. 불안한 40대로 인해 가정도 깨어지고, 남자들의 존엄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크게 약화되고 있다. 야망도 교만도 상실한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사오정 남자들은 이 시대에서 패배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의 위치와 권위가 인정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주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주님을 섬긴다는 말이 공허한 말로 남을 뿐이다.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인간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바울의 선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따뜻한 인간관계 회복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 부부는 따뜻한 부부애와 동료의식으로 온 힘을 다해 주를 섬길 수 있었다. J.C. 폴록은 테일러 부부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허드슨은 자기 아내를 모질게 대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영적인 성숙함과 고요함. 확고한 신앙과 애정으로 활력을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리고 남편이 하는 모든 일에, 그녀에게 있는 힘을 모두, 그녀의 총명한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생각을 모조리, 그녀가 가진 사랑과 힘도 모두 쏟아 부었다. 그녀는 남편 허드슨으로 하여금, 자신을 고갈시키도록 허락해주었고, 때로 그의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이기적으로 흐를 때도 그녀는 그것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오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긴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우리의 허상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우리가 어디서 허드슨 테일러 부부에게 보여진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 부부사이에서도 서로 마음을 줄 곳 없어 외로워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님 안에 산다는 말은 거짓일 뿐이다. 황폐한 땅 중국에서 평생을 허비하면서, 그렇게 소중한 사랑으로 한사람 곁에 특별한 친구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그리스도"이셨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모든 인간관계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해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한 겸손한 종들에 의해 무너진 하나님나라는 다시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최인호씨와 김수환 추기경께서 대담을 나누셨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네.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질 못했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마음 한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수님을 닮아가야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마음 한가운데 계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 한가운데 계신 주님이셨다. 평생 주님께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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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회복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윗물이 맑아져야 아랫물이 맑아진다

(1)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 사~공~ ” 돌아가신 김정구 선생의 구성진 이 노래를 지난 반세기 줄기차게 부르며 술타령을 하던 한국 사람들... 그들이 중국 연길을 방문하면 손쉽게 찾는 곳이 가까운 도문시다. 두만강과 북한을 넘겨다보기 가장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두만강을 처음 보고 느끼는 감정에는 약간의 짜증과 실망감이 섞이게 마련이다. 민족 분단 아픔의 현장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며 호객행위를 하는 조선족 아줌마들이 달라붙는다. 더러는 자칭 북에서 건너왔다는 탈북자들이 구걸을 하기도 한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 하면 장소비를 내라며 가로막는 어이없는 텃세에 기분을 잡치기도 한다. 그 같은 난관을 뿌리치고 두만강 가에 서서 건너갈 수 없는 산하를 바라본다. 눈길에 처음 잡히는 것은 북한의 민둥산에 새겨진 <속도전>이라는 선전문구다. 그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샛강이 바로 말로만 듣고 노래만 부르던 두만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강은 결코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푸른 물이 넘실대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아니다. 실망스러우리 만큼 협소하고 그나마 오염되어 온갖 오물이 함께 떠가는 더러운 탁류가 한줄기 힘없이 역사의 어두운 자락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두만강과 압록강의 물 근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갈라져 내려온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산천어가 서식할 만큼 두만강 물은 맑아진다. 평상시에도 숭선이라 부르는 두만강 상류 지역의 마을로 들어서면 오묘한 산세와 맑은 강물이 굽이굽이 부딪혀 만나며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가을철에 오색 단풍마저 들게 되면 아~ 이곳이 바로 금수강산 우리 땅이었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리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장백산을 뒤로 돌아 압록강 쪽으로 넘어가면 북한의 혜산시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의 변경 마을이 있다. 조선족 자치현인 장백현이다. 그 곳에서 맑은 압록강 줄기을 타고 올라가는 길 역시 10월 단풍은 미국 메인 주의 가을을 떠올리듯 절경을 이룬다. 더욱이 두만강 쪽에서 볼 수 없는 대 협곡이 압록강 건너 북한 쪽에 나타나 마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한다. 어느 모로 올라가 보아도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물은 태고의 순수를 머금은 듯 맑고 차갑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물이 하류에서는 저렇듯 부패하고 썩은 물로 변할 수 있었을까?

두만강 변경을 구경하기에 제일 좋은 코스는 도문에서 강변을 타고 따라 상류로 올라가는 길이다. 변경을 한번 보고 싶어하는 외부 손님들을 모시고 가끔 다니곤 하는 코스이다. 철을 따라 여름철에는 시원한 드라이브 코스가 되어 더러는 강 건너 민둥산조차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 97년경 북한이 한창 기아에 허덕이던 무렵 강을 따라 올라가던 나는 두만강 물이 이전과는 달리 갑자기 맑아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전에 보던 거무죽죽한 물이 아니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웬일일까? 의아해 하며 강변을 달려가던 나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길서 승용차로 세 시간 쯤 가는 거리에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내려다보이는 접경도시 북한의 무산시가 있다. 무산은 자철광 마그네타이트가 13억톤 가량이나 매장되어 있는 아시아 최대의 철광 도시이다. 중국 측 언덕바지에서 내려다보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올 만큼 가까이 있다. 도시 전체가 온통 노천의 철광석을 캐내는 공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뜻 첫 인상이 검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다닥다닥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낡고 허름한 단층집들마다 가느다란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밥을 짓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이 깊었었다. 그 속에서 살고 있을 가난하지만 정겨운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에는 그 적막한 도시가 마치 죽음의 기운에 휩싸인 듯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그나마 살아 있는 증거로 보이던 굴뚝 연기마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무산시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공장에서 내보내는 시커먼 폐수가 두만강으로 유입되어 온통 강 하류를 오염시키는 근원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는... 극심한 기아 상황에서 공장을 움직일 전기마저 끊기고 일할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공장의 부품들을 뜯어 식량으로 바꾸어먹는 사태가 발생하자 공장의 가동이 멈추어 서며 온 도시가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오히려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이 멈추어 서자 강물은 제 모습을 되찾았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며 울어야 할지, 맑아진 두만강 물을 바라보며 웃어야 할지... 죄에 깊이 물든 인간들이 만들어낸 한 폭의 희화적인 코메디처럼 느껴졌다.

그때 깨닫게 된 단순한 사실이 있다. 창조주의 손길이 닿아있는 곳, 그 아름다운 상류에서 내려오던 맑은 물이 중간지점 무산에서 시커먼 폐수를 방출하기 시작하자 하류는 몽땅 탁류로 바뀌고 만다. 하류의 물을 다시 맑게 하려면 폐수를 방출하는 상류의 물 근원을 새롭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폐수가 사라지면 물은 맑아진다. 아랫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윗물을 변화시켜야 한다.

(2)

1966년,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우리의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근원(The Historical Root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유명세를 탄다. 그는 지구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한 서구 문명의 책임을 논하면서 그 사상적 배경에는 기독교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 명령을 근거로 한 성서적 자연관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환경 훼손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논쟁을 계기로 고대의 유기체적 세계관의 복고 현상이 나타났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문명권 특히 동양적 유기체적 범신론적 자연관이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최근의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과 같은 생태주의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가이아 가설1)이 나 어머니 지구 이론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현대적 유기체 이론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연 만물에 영혼이 숨어 있다는, 그러니 함부로 다쳐서는 안 된다는 고대의 정령 숭배 사상과 범신론적 물활론이 생태주의의 포장을 하고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이 같은 생각들이 지구환경보호를 위해 일부분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 문명이 동양을 제치고 세계 역사의 주축으로 올라선 계기를 마련한 것은 16세기 과학 혁명 이후 근대 세계에 이르러서였다. 과학 혁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견지해 오던 중세 이전의 유기체적 세계관으로부터 성서적 기계적 세계관으로의 천이를 가져다주었다. 그 일은 서구인들의 사고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자연을 숭배하고 두려워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이 타민족에게 자행한 제국주의적 환경 파괴에 대하여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린 화이트의 지적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역사의 한 단면만을 부각하여 전체의 책임을 전가하는 환원주의적 오류를 품고 있다. 과학혁명을 일으킨 당시의 기계적 세계관은 철저히 유신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 과학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안에 감춰진 오묘한 설계와 목적성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충돌을 야기했던 중세적 세계관은 오히려 헬레니즘의 유기체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었다.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자연 세계가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진(formed, fabricated)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기계적 세계관은 광대한 우주를 구성하며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행성과 은하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구 생태계의 모든 동식물, 그리고 흙으로 만드신 사람의 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을 재료로 하여, 만물이 목적과 설계에 의해 기계적 2)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복잡하고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 자연 스스로가 자기조직화 하여 나타난 유기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현상의 특징인 유기체가 발현된 것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간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는 관점이다. 사람의 생명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탄생한 것이기에 자연과는 구별된다. 우리의 몸은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지라도 영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유신론적 기계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이신론(理神論)으로 탈바꿈하고, 마침내 무신론적 기계론으로 귀착되고 만다. 다스리고 정복하되 선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정성스레 관리하듯 해야 할 자연을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탈취하고 빼앗고 남용하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 의해 끝없이 유린당할 그 자연의 모습을 미리 내다보셨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제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예언적 저주를 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기계적 세계관은 오직 인간의 이성만을 신봉하는 과학주의와 물질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 이성의 시대가 만들어낸 사생아가 전 지구적 환경 파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숭배하던 시절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만일 기독교 자체가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현재 기독교 국가마다 환경 파괴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다. 기독교 문명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국가는 비교적 환경 보존이 양호한 반면에 유물론, 즉 무신론적 기계론 사상에 입각해 세워졌던 공산주의 국가마다 더 심한 환경 파괴와 훼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환경 파괴는 기독교의 자연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이기적으로 타락한 인간에 의해 야기된 문제인 것이다.

연길에 처음 왔을 때,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온 도시를 휘감고 있는 먼지와 악취와 쓰레기들이었다. 우리가 처음 아파트를 얻었던 뻬이따라는 동네와 학교 사이를 오가는 길에는 진흙과 쓰레기가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각종 오물과 하수가 길 가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었다. 여름에는 시뻘건 흙탕물과 싸워야 했고, 물이 안 나와서 항상 욕조에 물을 받아서 살았다. 그 물을 다 쓰고 나면 욕조 바닥에 마치 갯벌처럼 진흙이 남았다. 겨울에는 온 도시를 휘감는 석탄 매연으로 아이들은 폐렴에 시달렸으며, 어른들도 늘 기관지에 새까만 가래가 끓었다. 사람들이 마구 버린 플라스틱 비닐 종이가 바람에 날려 온 도시의 나무 가지마다 빨간 파란 열매처럼 매달린 진풍경을 낳았다. 노상에서 방뇨하는 모습은 다반사요 재래식 화장실에 얽힌 놀란 경험담이 너무 많아 (창피한 일이지만)늘 식탁의 이야기 거리가 되곤 했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복음이 들어오기 전 한국 사회의 옛 모습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복도에서 기숙사에서 교실에서 아무 곳이나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아이들을 붙들고 씨름하기 10년...

중국 전역에, 그리고 연변 지역에 10여년 전부터 조용히 불기 시작한 복음의 바람들... 수많은 발걸음들이 오고가며 씨앗을 뿌렸다. 과기대 교정의 아름답게 다듬어진 조경... 화사한 꽃들과 푸른 잔디밭 사이를 오간 많은 시민과 학부형들... 방문자마다 놀라고 감탄하던 깨끗한 기숙사... 그 생활에 물들어 오히려 방학 때 집에 돌아가기를 싫어하던 학생들... 함께 교정에서 생활하는 외국 선생님들의 깨끗한 옷차림과 예절들... 이런 모습을 보고자란 우리 학생들이 10년만에 어떻게 변했을까? 학생들이 변했다. 학교가 완전히 변했다. 연길 시 전체가 변하고 있다. 해가 다르게 연길이 깨끗해지고 있다. 아니 중국 전체가 깨끗해지고 있다. 이제는 2008년 북경 올림픽을 그린 올림픽으로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물과 같이 스며들며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3)

성경에서는 모든 죄의 근원을 불순종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스스로의 길로 나섰던 인간들... 선악과를 따먹은 그들의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분리되고 모든 피조계마저도 분리되어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를 일으킨 그 사건의 배후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탐심과 교만 그리고 불신앙이 도사리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고 속삭였던 사단의 교만과 선악과에 손을 대는 순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느꼈던 아담과 하와의 탐심이 숨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상류의 오염원을 먼저 치유하지 않고는 결단코 우리의 행동을 순종으로 바꿀 수 없다.

◆ 죄 (Sin) : 불신앙 교만 탐심 불순종
◆ 치유(Healing) : 믿음 회개 자유함 순종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참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수반한다. 그 속에서 떡(물질, 명예, 권력...)에 대한 자유함과 순종의 행위들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크리스천들... 이들은 이웃과 자연 속에 불신자들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긴다. 마치 하나님을 떠난 기계론이 하나님 없는 유기체론 보다 더 큰 환경 파괴를 일으킨 것처럼...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던 우리의 인생 방향을 완전히 180도로 전환시킨다.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회심의 순간 우리는 드러난 자신의 죄악을 내버리고 전 존재를 예수 앞에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게네사렛 호수가의 베드로와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삶이 45도 혹은 90도 정도 방향을 전환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의 인생 방향은 세상의 또 다른 어떤 곳을 향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은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웃과 피조계에 서슴치 않고 파괴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마피아 크리스천이라고 해야 할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수많은 십자군 전쟁의 참상, 그 이면에는 위정자들의 정치 경제적 통치 논리가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갈망하며 예수를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던 군중들의 손을 피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갈릴리 사람을 생각하며, 피 흘림의 현장에서 고통당하는 그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전쟁의 포화 속에 함께 유린당할 생태계를 슬퍼한다. 하루 속히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피조계가 회복되고 온 인류의 상류 물 근원이 맑아지기를 희망한다. 완악한 종교인들을 향해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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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교회생활

"부부는 같이 잡시다"

이 컬럼의 주제는 교회 생활이지만 이번에 결혼한 젊은 학생 부부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젊은 부부들 가운데에 각 방을 쓰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말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부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서로 편하기 때문이랍니다. 아빠가 공부에 몰두하느라고 각 방을 쓰기도 하지만 보통은 엄마가 아기를 떼어 놓지 못하기 때문에 아빠가 다른 방에 가서 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안될 일입니다. 비성서적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십시오. 아내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도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주장합니다. 서로 물리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에 전념하려고 하여, 얼마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다시 합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3∼5)."

요점은 부부는 성 관계를 요구해 올 때에 서로가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각 방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동안 기도하기 위하여 잠시 각 방을 쓸 수는 있지만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잠자리를 합치라는 것입니다.

젊은 부부 가운데에 아기를 같이 데리고 자는 부부도 꽤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도 건강한 부부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됩니다. 환경이 절대적으로 허락하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부부가 한 몸이 되기 위하여서는 둘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엄마가 남편보다 자녀에게 더 관심을 쏟는 것은 건강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기들을 데리고 자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기는 많고 주거 환경을 좁기 때문에 부득이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한국 남성들이 외도를 쉽게 했던 것은 아내가 자녀들과 같이 자면서 남편의 성적인 욕구를 외면했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분방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분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부부들은 같은 침대를 써야 하겠습니다. 자녀들은 가능하면 딴 방에서 재우고 부부끼리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같은 침대를 쓴다는 사실이 부부간의 친밀감을 보장해 주고 다투었을 때에 화해를 쉽게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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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광야 바람소리

버림받은 사람들이 무딘 손톱으로 맨 땅을 파헤치던 곳.
하늘의 뜨거운 모래 바람과 생명의 한숨이 어그러져 만나는 곳.
뿌리까지 흔들리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리는 얘기들을 전해 주는 곳.
아무도 찾지 않아 수백년 씩 비어 있는 곳.
그렇지만,
이 천년 묵은 바람 소리 하나 갈라 내어도 하늘과 온 땅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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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의 삶 (7)

부활을 생각하며

"More than that, I count all things to be loss in view of the surpassing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but rubbish so that I may gain Christ ...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eing confirmed to His death; in order that I may atta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빌립보서 3:8, 10-11)

오랜만에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학교로 출근을 하였다. 광현과 동현을 학교에 내려놓았다. 동현이는 언제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학교로 뛰어 들어갔다. 어제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서, 자랑을 하기 위해서 바지를 두 번 접어 입고는 학교로 갔다. 그 뒤를 광현이는 천천히 따라 걸어 들어간다. 나를 쳐다보고는 씩- 웃는다. 창문너머로 “I love you"라고 말해주고는 학교를 향해서 떠났다. 학교에 오니 봄방학이라 6층이 조용하다. 이번 방학에는 밀린 paper를 반드시 끝낼 결심을 하고는 office로 들어섰다. 얼마 전 새로 산 Power Book을 켜고, 커피를 옆에 놓고서, 브라암스의 음악을 켜놓고 부탁 받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는데, 선배교수 Fred가 들어와서 다음주에 같이 점심을 먹자고 약속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눈이 부시도록 파랗다.

삶이 아름답다. 순간 순간 지나칠 적마다, 다시 보지 못할 찰라가 아쉽다. 사진에도 담아보고, 비디오도 찍어보고, 일기로도 적어보고,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보기도 하지만, 너무나 빨리 달려만 가는 시간이 안타깝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늘어서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계산을 해보면 평생에 가질 수 있는 주말의 숫자가 4160이다. 그 중에 이미 1800여 번을 사용하고 이제 약 2300여 번이 남았다. 아쉽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아쉬움은 더욱 커가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삶과 그 속의 만남과 경험이 소중한 만큼, 그리고 인생의 끝과 그로 인한 헤어짐이 아쉬운 만큼, 부활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커짐을 느낀다. 얼마 전 읽은 C. S. Lewis의 글이 생각난다. 죽음에 대한 철저한 경험과 인식이 없이는 부활의 감격과 감사를 느낄 수 없다고 했던 말.

2000년 전, 목숨을 걸고, 가족과 온 재산을 버리고 따르던 예수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을 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의 사건은 현실이었다.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그녀에게 부활한 예수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오직 단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자신의 모든 credential을 버리고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평생을 투자한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 오직 단 하나뿐인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기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위협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사도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였다. 그들의 눈앞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분의 부활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 부활의 현실이 그들의 삶을 붙잡았다. 그 부활의 현실이 그들을 흥분케 했다. 그 부활의 현실이 이 땅 위에서의 기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 그 부활의 소망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하고 가치 있는 투자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활을 해왔으나, 부활은 나에게서 관념적인 대상에 불과했다. 삶의 소중함을 깨닫지도 못했고, 죽음의 현실성을 피부로 느끼지도 못했으며, 그로 인한 나의 한계성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활의 약속은 그저 하나의 신학적인 관념에 불과했다. 부활은 나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부활은 그저 부활절 설교와 성경공부의 주제에 불과했다. 천국과 영생의 소망보다는, 이 땅에서의 죄 사함과 축복 받고 능력 있는 삶의 약속이 나에게는 더 매력적인 약속으로 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이 부활절뿐만 아니라 365일의 나의 생활 속에서 소망이 되고, 그 부활이 단지 신학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신학적인 관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체적인 삶에 활력과 의미를 주는 현실이 되었다. 삶의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잊어버리고 싶은 모든 구석들이 부활이라고 하는 렌즈를 통해서 바라볼 때, 나의 이 땅위에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된다. 붙잡고만 싶었던 것들을 이제는 지나가는 흐름 안에서 아름답게 볼 수 있고, 피하고 싶었던 것들을 담담하게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전에는 생각 없이 스치던 대상들이 부활의 렌즈를 통해서 볼 때, 새롭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나에게 다가온다. 이제 어렴풋이 나마, 사도바울이 그토록 알기 원하고 동참하기를 원했던 예수님의 삶과 부활,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유학생활, 무척 바쁘다. 힘들고 정신이 없다. 당장 눈앞에 와 있는 시험과 논문, 세미나 발표와 교수와의 만남이 삶의 모든 것인 양 다가오기 쉽다. 내가 현재 하고있는 일이 나의 삶을 사로잡기 쉽다. 그럴 때, 부활의 예수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보기 바란다. 전쟁의 소문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 때에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이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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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 리포트

부활절을 앞두고: 희망의 십자가

고 통 속에 있는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찾아 오신 하나님,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주님, 너희의 고통을 이해 한다고 말씀하시며 다가 오신 주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파요, 힘들어요, 그렇지만 제가 알아요.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걸 제가 믿어요. 저는 다시 일어나요. 일어 날 수 있어요." (인생 레슨 : 이 동원 목사 지음)

언젠가 교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문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와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데 우리들의 눈에 보기에 그 사람들이 참 행복해 보일 수 가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좋은 학벌, 경제적인 여유, 그러다 보니 넉넉하고 윤택한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며 부러운 시선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들이 사회적으로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들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런 문제와 고민 없이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그들 만의 고통과 고민거리들이 있지만 단지 내색하지 않을 뿐 입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 입니다. 남 보기에 늘 행복해 보이고 웃고 다니니까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사는 것 같지만 그 나름대로 보이건, 보이지 않건 간에 다들 문제들을 갖고 사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과 또 그렇지 못한 것들을 장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장애인들이고 우리 모두가 그 고통을 이기는 방법 즉 문제 해결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왜 고통을 당하고 사는 지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 하고 문제 해결 대책 보다는 그 고통을 피할 길을 찾아 가려고 애를 씁니다.

한 예화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 하려고 합니다. 일반 학급에 있는 K 학생이 학습적인 능력이 떨어지고 행동이 거칠어 지며 정서적으로 불안해 하여 혹 장애가 있는 게 아닌가 해서 테스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학습 태도 보고서, 성적표, 행동 수정 보고서 가정 환경 및 병원 기록 등과 같은 데이터를 모았고 심리 테스트를 거쳐 그 학생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판정 되었고 특수 교육 프로그램을 추천하기 위한 미팅을 해서 그 학생에게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교육 프로그램을 IEP (individualized Educational Program)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팅에 참석한 K의 부모님들은 무조건 자기 아이는 절대로 장애가 없고 특수 교육 프로그램을 받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모는 또 어떻게 내 아이에게 "장애인" 이라는 label을 붙일 수 있으며, 평생 그가 성장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받을 거라고 불평도 늘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모는 학교측과 계속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특수 클래스에 놓겠다고 동의를 했지만 부모의 얼굴에는 만족함 보다는 그늘 진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런 후, 그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또 그 아이가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 하고 사랑으로 감싸 주기 보다는 무관심과 불평, 그리고 심지어 아이를 구박하고 학대도 했습니다. 이 부모님들은 K를 특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 시키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고 수치 스러운 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우리에게 시련이 닥쳐 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동원 목사님이 쓰신 인생 레슨 이라는 책 에는 첫째, 고통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의도의 시험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평가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 장 13절에서는 "시험을 찾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 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 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위 에서 이야기한 K의 예화 속에서 그는 이미 그의 장애로 인해서 특수 클래스에서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K의 부모님들은 K가 장애 어린이라는 사실에 동의 하지 않았고 불만족스러운 자세로 아이를 특수 교육에 참여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K의 학교 생활에 별로 도움을 주지는 못 했습니다. 그에게 장애가 생긴 이유는 그의 잘못도 아니고 부모님의 잘못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K를 구박하고 학대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K만이 세상에서 고난의 십자가-문제와 어려움-를 지고 갈까요? 다른 어린이들과 그의 부모님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와 고민거리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K라는 장애 아이를 한 가정에 주심으로 해서 분명 하나님의 어떤 숨겨진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주님은 K의 부모님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인내, 그리고 희생과 노력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K를 위해서 전혀 희생과 노력이 없었던 K의 부모님들은 계속적으로 K의 학교와 가정 생활에 무관심을 보였고 가정에서 이어지는 학대는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주어서 정서 장애 라는 또 다른 장애를 낳게 하고 말았습니다.

우 리가 고통을 현명하게 대처하고 극복하지 못할 때 그 고통은 더 큰 고통을 만들게 됩니다. 반면에 극복한 고통 뒤에는 환희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 동원 목사님은 그의 저서 인 "인생 래슨" 애서 고통을 축복의 통로에 비유하시며 고통은 하나님의 복이고 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믿음도 성숙해 지는 가운데 우리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K의 부모님들이 K를 위해서 좀 더 희생하고 노력했다면 그의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K가 갖고 있는 고통 (장애) 은 없어지지 않는 십자가라서 K의 부모님들과 K가 함께 노력했다면 그의 십자가는 절망의 십자가가 아닌 자기와 같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십자가로 바뀌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지금 어느 곳에서 생활하던지 우리의 어려움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낙심하지 말고 잘 대응한다면 우리들이 지닌 고난의 십자가도 희망의 십자가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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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01 21:57 책이야기/eKOSTA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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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sh Faith

by Jim Cymbala, Zondervan, 1999

내 가 짐 심발라 목사님을 알게된 것은 4년 전쯤이다. 어느 주일날 오후 서점에서 ‘Fresh Faith'라는 책을 발견하고 집에 와서 눈물 콧물 흘려가며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후에도 이 책을 두세 번 더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처음에 책을 잡았을 때의 감동을 동일하게 접할 수 있었다. 한번은 보스턴으로 가는 United 항공사 비행기안에서 읽다가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서 혼난 적이 있다. 신앙서적이라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을 만져주는 책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Fresh Faith'는 이런 예외에 속하는 책이다. 그래서 내가 아끼는 책 중에 하나가 되었다.

조이 출판사에서 이 책이 "푸른 믿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일단 미국에 계신 코스탄은 서점에서 일단 몇 페이지라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문체가 쉬움에도 불구하고 행간에 저자의 파워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만 다소 감상적 서론을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책에서 저자의 관심은 믿음에 있다. 믿음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치유하며 생활 속에서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크리스천에게 있어 믿음은 그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 상태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 할 것인가? 우리가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하나님과 같이 했던 첫사랑을 회복하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 치유하시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역사를 허락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책에 예화로 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자, 동성연애자, 범죄자들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어떻게 이들이 회복되었는가를 저자의 목회 현장에서 증거하고 있다. 이들이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다. 2장에 등장하는 Amelia의 예를 보자.

어느 날 한 여인이 심발라목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녀의 이름은 Amelia. 그녀는 그녀의 지난 과거를 심발라목사에게 털어놓는다. 가정폭력, 성폭행, 낙태, 마약 등의 단어들이 그녀의 지난 삶을 요약해주는 단어들이었다. 마치 심발라 목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Pastor, I am really messed up. I feel really dirty in your office...Am I hopeless? Do you want to kick me out into the street?" (p33-34) .

그녀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교회의 기도회가 시작할 즈음이었다. 심발라 목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Amelia, we're going to go into the prayer meeting now and ask God to do a miracle. Jesus Christ can cleanse you and make you into the woman he wants you to be." (p34)

심발라 목사는 그녀를 회중 앞에 세우고 기도 요청-그녀가 삶의 위기에 처해있으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리도록-을 했다. Amelia의 이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더 이상 불면의 밤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고 마약의 유혹에서도 해방되었다. 옷차림도 바뀌었고 인상도 달라졌다. 직업도 receptionist로 바뀌어지고 나중에는 월가의 한 보험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수년 뒤 Radio City Music Hall에서의 찬양 집회에서 그녀는 간증하게 되었고 그녀의 변화된 모습 (before&after)을 담은 슬라이드가 스크린에 비춰질 때 다음의 찬양이 찬양대를 통해 흘러나왔다.

There is a blood, a cleansing blood that flows from Calvary,

And in this blood, there's a saving power,

For it washed me white and made me clean..

Oh, I stand today with my heart so clean;

Through the blood that Jesus shed I'm truly free.

유학생활 중 추락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하나님께 이것이 정말 바닥입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바닥이 아니었다). 이럴 때에, 신앙을 가졌지만 도대체 내가 안 믿는 이와 무엇이 다른가 자문해보지만 도무지 다른 점이 없을 때는 또 절망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람은 절망할 수 없음을. Amelia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 책을 유학생활에 지치고 낙심한 분들께 권하고 싶다.

사족1: 짐 심발라목사님의 세 권의 ‘Fresh' 시리즈가 있는데 그것은 ’Fresh wind, Fresh Fire', 'Fresh Faith', 'Fresh Power'이다. 나는 이번에 소개한 ‘Fresh Faith'가 제일 좋았다. ’Fresh wind, Fresh Fire'에는 Brooklyn Tabernacle에 얽힌 비화/간증들을 볼 수 있다.

사족2: 짐 심발라 목사님은 정규 신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장인의 권유로 작은 교회를 목회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뉴욕의 Brooklyn Tabernacle을 30년이 넘게 목회하고 있다. 2003년에는 San Diego에서 열렸던 National Pastors Convention에서 주 강사로 섬기신 분이기도 하다. 부인인 Carol은 Brooklyn Tabernacle Choir를 이끌고 있다(그래미상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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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의 소리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3)

- 갈등 (Conflict): 현실의 벽을 넘어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1-12)

들어가며

기독교적 시각에서 갈등에 관하여 잘 서술된 책을 말하라면 저는 스스럼없이 랄프 네이버 (Ralph Neighbour)의 Living Christian Values를 꼽습니다. 이책은 이미 '영적성장의 정상에서' (Survival Kit 2) 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평신도 사역자를 훈련시키는 교재로 많은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6주짜리 교재로 편집되어 다시 출판되었는데, 훈련의 강도는 약해졌지만 기간이 단축되어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훈련을 마칠 수 있어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성경에 철저하게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말씀의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을 통한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동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원론에 지나치게 착념하다가 성경에서 강조하는 훈련의 중요성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히 5:8). 그리고, 르네상스시대 전술학 (the art of war)에서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습니다: '훈련 없이 전쟁에 나간 군인의 높은 사기는 어떤 효과도 없다.' 다시 말하면, 훈련되지 않은 군대는 한번 승리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 승리할 수도 또 승리를 지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vs. 현실직시

첨예한 갈등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고결함 (integrity)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가운데 인간 본성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는 현실주의(realism)의 편견이 신중 (prudence)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결코 자신의 소유와 안전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사실처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한 갈등해결의 한계를 강조하거나, 강제 또는 폭력을 통한 갈등의 해결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은 현실주의 시각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현실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인간본성(human nature)은 성경에서 묘사하는 인간의 '옛 속성 (the old nature)'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분쟁, 시기, 분냄, 그리고 파당과 연결된 옛 속성과 현실주의의 비관적 인간관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갈 5:20). 물론 육체의 소욕은 원죄론(the Original Sin)에서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비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주의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가려는 세상은 출발점이 유사하더라도 큰 차이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주의적 세계관은 '죽음에 대한 공포' (the fear of death)를 가지고 모든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갈등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부림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또 이러한 공포를 역이용함으로 갈등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됩니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는 이유도 죽음의 공포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환경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결핍(scarcity)과 경쟁 속에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국가며 정치사회라고 이해합니다. 여기에서 갈등은 필연(necessity)입니다. 그리고, 갈등 해결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포의 제도화, 즉 죽음이 연상될 정도로 강력한 강제(coercion)를 통해 순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대화는 선택일 수는 있지만, 불확실성(uncertainty)을 제거하기위해서는 폭력이 합리적인 갈등해결의 필수적인 수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생명에 기초한 소망' (the Hope in the Eternal Life)으로부터 현실을 바라봅니다. 영생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예수로 말미암아 이미 이겨낸 사람들 만이 가지는 삶의 이유입니다. 모든 행동은 생명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시기까지 이루시려고 한 것도 '모든 자에게 영생 (eternal life)'을 주려 함이셨고, 영생을 얻은 자의 목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요 3:16). 현실주의와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에서 죽음은 인간이 神을 찾는 이유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까지 다가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임하게 되면 모두가 '새 사람' (the new nature)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갈등을 바라보고 또 해석합니다 (고후 5:17). 여기에서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갈등해결의 원칙은 생명이요 수단은 사랑입니다.

요한의 편지는 이러한 원칙과 수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갈등을 두려워하지도 또 회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가혹한 훈련을 통한 인간성 개조와 지식을 통한 구원을 믿었던 영지주의자에 대항해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충고할 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영지주의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몰아 세웁니다 (요일 4:1-6). 요한은 새로운 형태의 바리새인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사랑이 그의 원칙이었습니다 (요한 20:3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 진리는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 요한이 붓을 든 동기였고, 사랑은 모든 갈등을 생명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요한이 분연히 일어난 이유였습니다. 요한의 이런 태도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갈등을 일으키신 이유가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셨고, 목숨을 내놓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결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요일 4:12).

상호존중 (Mutual Respect)

랄프 네이버는 갈등을 네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1) 내적 갈등 (conflict inside), (2)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conflict with someone else), (3) 확신에서 오는 갈등 (conflict because of your convictions), 그리고 (4) 권위와 책임에서 오는 갈등 (conflict between authority and responsibility) 입니다. 여기에서는 네이버의 분류에 기초해서 상호존중의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모든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적 갈등, 즉 옛 속성과 새 속성 간의 갈등에서 시작됩니다. 내적 갈등의 해결은 평생을 요구하는 긴 여행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또한 내적 갈등과 함께 생활 속에서 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네이버는 이 두 가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순종하는 자세, 그리고 예수를 본받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겸손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실천 강령들이 나온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1)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적 갈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더불어 사는 우리에게 서로 간의 차이에서 나오는 대립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갈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때 다른 사람과 갈등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좌절하거나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쉽게 실망하는 오류를 줄일 수 있지않을까 생각합니다. (2) 갈등의 발생이 아니라 갈등의 해결에 성경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갈등이 우리에게 일어났을까 하고 성경을 동원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보다, 갈등이 발생한 이후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성경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왜 더욱 사랑하지 못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주고 치유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서로 기도하며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태 18장).

확신에서 오는 갈등이나 권위와 책임 사이에서 나오는 갈등은 교회나 단체에서 나타나는 갈등들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유형의 갈등들은 평신도 사역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확신에 찬 사역자가 목회자와 빈번한 갈등을 피해 교회를 떠난 다던지, 동역자들 사이에서 의견의 차이로 반목하는 경우는 성경을 통해서나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나 보게 됩니다. 랄프 네이버는 이러한 갈등의 예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하는 베드로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한 사도 바울 (갈 2:6-14), 롯이 아브람의 권위에 도전해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버리는 사건 (창세기 13), 그리고 (비록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분류되었지만)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와의 동행을 놓고 서로 다툰 사건 (행 15:35-40, 디후 4:11)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다양한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갈등해결의 원칙들이 있습니다.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1) 갈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담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2)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상대를 끝까지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나바에 대한 믿음만은 결코 잃지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죽기 전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전한 편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디후 4:11). 아브람은 롯의 잘못을 침묵했지만, 아브라함은 롯의 죽게된 환경을 결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창 18). 베드로도 자기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행 10:16).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1) 자기자신의 의견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 (Only God is the Master who decides what's best), 그리고 (2) 하나님께서 갈등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자세 (Mutual respect through listening to people in conflict with you can bring His message to you) 였습니다. 이 같은 자세때문에 누구도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갈등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또 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이 발견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상호존중 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8).

마치며

최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세계는 신으로부터 선택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비관적인 현실주의만으로 갈등을 바라볼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대적인 종교갈등의 위험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고민 없이 수용할 때 우리는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레위인처럼 무책임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지만 의무를 다했다며 자위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비관적 현실주의 그리스도인의 현실직시
갈등해결의 목적 죽음의 공포로 부터의 해방 (Free from the Fear of Death) 생명에 대한 희망 (Hope for the Eternal Life through God)
갈등해결의 일반적 원칙 죽음의 공포에 비례하는 처벌의 제도화 (Institutionalization of the Fear of Death with the Fear of Punishment) 사랑과 상호존중 (Love and Mutual Respect)
갈등해결의 궁극적 수단 폭력과 강제 (Violence & Coercion) 용서 (Forgiveness in God)

그리스도인도 갈등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때때로 첨예한 갈등을 가져오는 의견들은 서로 납득이 가는 근거들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는 결코 갈등이 용납되지 않는다거나, 그리스도인의 갈등은 사랑을 깊이 있게 배우지 못한 경우에만 발생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기독교인이 비관적 현실주의를 무슨 진리인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무분별하고 원칙 없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폭력과 강제를 통한 갈등의 해결만을 강조해 왔다면, 아마도 우리는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심으로 주신 '생명에 대한 희망'을 잃지않고 세상 속에 당당히 서 있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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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을 이야기 하자

전쟁의 시간에 부르는 한줌의 찬양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편 46편)

3월17일 저녁 8시, 부시 대통령의 최후통첩(最後通牒) 연설이 전세계에 방송됨과 동시에 그동안 우리 모두가 걱정과 안타까움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전쟁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최후통첩으로 던져준 시간이 72시간에서 48시간으로 줄었다는 것만 예상과 달랐지 사실 모든 내용은 언론이 예상했던 것과 거의 동일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느낌이다.

이번 전쟁은 나의 마음을 참으로 무겁게 한다. 얼마 전부터 담당하게 되어 내가 사역하고 있는 대학부에 소속된 3명의 젊은이들은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파병되어 지금 쿠웨이트에서 전쟁 개시를 기다리고 있다. 자기의 양들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나가서 외로이 떨고 있는데 안타까워 하지 않는 목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목자일 것이다. 그중의 한 형제는 얼마 전 싱가폴의 어느 해안을 배로 지나가고 있다며 ‘바그다드의 지상군으로는 아마도 최초로 투입되는 부대의 소대장으로서 자신이 부대원들을 두려움 없이 잘 인도할 수 있도록, 또 생화학 무기가 사용되지 않도록 제발 기도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받고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때를 잘못 만난 까닭에 이제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야 하는 수많은 젊은 군인들, 가공할 만한 최첨단의 무기와 폭탄에 의해 희생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수많은 이라크의 민간인들, 바그다드 인구의 반 정도가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라는 어느 기사를 읽은 나의 마음은 더더욱 아프다. 과연 전쟁을 불가피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던 지난 수개월 동안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게 동시에 오버랩 되는 이라크의 정유 탱크들의 모습과 정치인들의 미사여구로 치장된 연설문 속에 담긴 꿍꿍이속을 짐작하는 나의 마음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9.11사태 이후 딕 체니 부통령이 가장 많이 읽고 연구했던 분야가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지금 부시 행정부가 밀고 나가는 모든 대외적인 추진력의 향방은 과연 아메리카 제국이 계속해서 앞으로도 세계 최고의 열강으로 커나갈 수 있는가 하는 고민 속에 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라크,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2001년의 국정연설에서 이미 이번 전쟁의 서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때 이라크에 대해 걸고 넘어졌던 알 카에다와의 관련성 이야기는 전쟁을 시작하는 지금 쑥 들어가고 없는 것이 내게는 신기할 뿐이다.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또한 이번 전쟁이 어쨌든 끝나고 나면 지금 북한에 대해 걸고 있는 정치적인 시비가 다시금 링 한가운데로 올려져서 이제 한반도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격전장으로 치닫게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걱정한다.

매일 아침 기도로 일과를 시작하고 성경공부 모임을 주도한다는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이야기는 혹시나 아랍인들의 눈으로 볼 때 사악한 근본주의자 기독교인들이 시작하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비추어 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앞으로 계속될 중동과의 분쟁을 통해서 13억 모슬렘 국가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왜곡되고 복음의 문이 더더욱 닫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에 벌어진 상처의 골이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깊게 남아 있는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으로 요즘 마음이 매우 무겁다.

사담 후세인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도 결코 편한 것들은 아니다. 생화학무기가 없기 때문에 사용할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라 치더라도, 바그다드의 병원과 학교 등의 민간인 시설에 민간복을 입은 군인들을 배치하여 끝까지 결사항전 하겠다는 이라크 측의 성명은 결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한편으론 쿠르드족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본다. 얼마 전 교회에서 있었던 선교대회에서 우리가 입양했던 종족이 바로 이 쿠르드족이었기 때문에 내게 더더욱 관심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북 이라크 지역에만 5백만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는데 이들이야 말로 후세인 정권의 몰락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것이 아닌가. 이번 전쟁을 계기로 자신들에게도 그토록 목이 마르도록 기다렸던 민족 해방과 새로운 쿠르드 국가의 건설이 꽃피게 되는 것은 아닐지 기대하고 있는 민족도 있다는 사실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터키 정부에게 눌려서 살던 쿠르드 족들까지도 다들 북 이라크 지역으로 이주해 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꿈에 젖어 있는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다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란과 이라크와의 분쟁 속에서 미국과 서방이 개입해 왔던 중동의 80년대 정치사를 공부해 보려다 그냥 덮어 버렸던 것도 너무 머리가 복잡해서였다.

"이방이 훤화(喧譁)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6절) 본문은 딱 요즘의 중동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에 하나님이 언제 소리를 발하셨다고 지금 시편 46편의 기자는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이방과 왕국은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만을 말하는 것일까. 기독교인 부시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나라’에 속한 아랍 국가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8-10절) 이 말씀은 무슨 말인가.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신다고? 이라크 군이 들고 있는 초라한 장총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의 무기들- 스텔스 비행기와 각종 신형 폭탄들, 지하벙커를 뚫고 지나가서 통신기기들만을 감지해서 폭파시키고 통신수단을 두절시키는 폭탄과 무인정찰기, 목표물의 범위가 10미터를 벗어나지 않는 최첨단 폭탄 등- 이 모든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깊이 드는 것은 잘못된 착각일까.

과연 하나님은 이 광기(光氣)의 시대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분일까. 이런 상황에 노래는 무슨 노래? 무슨 찬양은 찬양? 어떻게 시편의 기자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10절)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지나왔던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수백년 동안 진행되어 왔던 십자군전쟁이 비 서구인들에게 준 아픔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서구 기독교 백인들이 외치는 그들만의 하나님도 아니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만을 편애하시는 하나님도 아니요, 중동의 모슬렘 국가들을 쳐 죽여야 할 사탄의 무리들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도 아니요, 시편 46편의 고백처럼 활과 창과 수레의 힘만을 믿고 까불대는 모든 바벨탑의 후예들에게 참된 메시지를 던지며 다만 하나님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분이 주시는 참된 평화의 소식을 고대하는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나타내시고 드러내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은 미국 편도 아랍국가 편도 아니시다. 대한민국 편도 북한 편도 아니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이 모든 정치, 사회, 경제학적인 이념과 이해관계를 뛰어 넘어 모든 열방이 주를 보며 주 앞으로 나아올 때까지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실 분이시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어찌해 볼 수 있다는 헛된 자만심이 꺽이는 그날이 오면 이 말씀의 참 뜻을 알게 될 것이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모든 열방들이 주를 알게 되는 그날이 어서 오기까지 이 찬양의 메시지를 외치며 불러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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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4월호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지던 겨울도 시간의 흐름처럼 슬며시 사라져갑니다. 이른 아침에도 환하게 창을 밝히는 햇빛과 부드럽게 살에 부딪치는 바람, 먼 풍경 위로 번져 오르는 아지랑이가 봄을 알리고 있습니다. 겨우내 땅 속에서 얼어죽은 줄만 알았던 알뿌리들은 여리고 푸른 잎새들을 힘껏 내밀고, 여윈 나뭇가지들에서는 새 눈 터지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아 슬며시 다가가 귀를 기울여 봅니다.

두터운 눈 더미 아래 어둡고 차가운 땅 속에서 그 작은 뿌리가 어떻게 생명을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얼마 후면 제가 사는 동네에는 화사한 벚꽃으로 온 천지가 물들 것입니다. 벚꽃이 가득한 마당이나 거리에 서 있으면 내가 꽃나무의 한 부분이 되어 가는 것 같이 느껴져서 조용히 팔을 들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메마른 가지들의 어느 한곳에 그리 화려한 꽃이 숨어 있던 것이고, 작은 씨앗들 속엔 봄날의 훈풍이 숨어 있던 것인지. 마술사가 빈 보자기에서 비둘기와 꽃을 꺼내어 내듯이 문득 다가온 봄의 모든 징조들이 놀라운 선물로 느껴집니다.

어느 봄날 밤에 무심히 집 앞에 들어서다가 마주친 목련 꽃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서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득해지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비어있는 줄 알았던 뜰에 어느 날 갑자기 여러 색의 작은 꽃들이나 튜울립이 가득 피어 있어서 혹시 조화가 아닐까 의심하며 만져본 경험도 봄에 대한 작은 추억을 만들어 줍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 봄날의 특권이자 축복인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들뜨고 무언가 발산하고 싶어지는 힘을 느끼게 되는 순간 경쾌한 봄의 왈츠가 가슴에서 연주되곤 합니다. 얼음이 녹아내려 풍만해진 강물도 그 왈츠 리듬에 합세하여 박자를 맞추고 있는 동안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집니다. 이런 날에는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특정한 대상 없이 사랑의 예감이 벅차 오르는 신비한 힘이 봄의 기운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지요.

캄캄한 어둠 속에 비추는 한줄기 빛이 일순간 어둠을 지워 버리고 얼었던 대지를 촉촉하게 녹여 버리는 것을 보며 결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곤 합니다. 숨어 있던 작은 동물들이 활개치며 분주하게 양식을 찾아 뛰어 다니는 것을 보며 생명의 힘은 무엇보다 강하다는 것에 감격 하게 됩니다. 겨울의 어둠과 추위가 없었다면 봄의 화려함이 그다지 빛나고 감격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삶의 역경과 고난 뒤에 찾아오는 성취가 더욱 감사하고 소중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실 때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고 어둡고 절망적이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가 웃으며 십자가를 부수고 내려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기적이 일어나길 마음 속으로 무척이나 바라고 기대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슈퍼맨처럼 지구의 회전을 되 돌이켜 시간을 뒤집어 주길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나약하게도 피를 흘렸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처럼 말입니다. 누군가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조롱하며 등을 돌렸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가 약속한 일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그의 말속에 숨어 있던 의미를 이해하거나 진심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분이 다시 나타나 손의 못 자국을 보여 주었을 때의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놀라움과 의심과 두려움이 엄습했겠지요. 그리고 진정으로 사실을 이해하고 믿었을 때 비로소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기쁨과 경이에 젖어 뛰어 오르며 춤추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감격과 환희에 젖어 그들이 외쳤을 함성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 그가 다시 사셨다. 죽음도 물리치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믿을 수 없었던 일을 목격한 자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부활의 축제에 우리도 초대 받았다는 약속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어느 날 문득 피어난 목련 꽃이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겨울의 지루함과 추위, 모든 것이 잠들어 버린 막막함,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오는 봄날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에 눈송이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듯이, 삶의 고난과 상처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길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그의 약속이 있기에 기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희망이 없는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주님이 보여주신 고난과 순종의 길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였음을 확신할 수도 없었겠지요. 세상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길을 바라보는 밝은 눈을 얻을 수도 없었겠지요.

바울의 고백을 바꾸어 봅니다. 나는 매일 매순간 죽노라. 그리하여 나는 매일 매순간 다시 태어나노라. 그와 함께 죽은 나를 버리고 그와 함께 다시 태어난 나로 사노라. 꽃잎이 땅에 떨어져 썩지만 이듬해가 되면 더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태어나 향기를 가득 품는 것을 벚꽃 나무 아래 서서 깨닫곤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 나의 그릇됨과 죄로 가득 찬 옛사람을 함께 죽이며, 그가 부활하실 때 새롭게 그를 닮은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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