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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nc Dimittis- 서툴지만 길게 예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가복음 2:29-30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오 스 기니스의 '소명'이란 책을 보면 재즈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였던 존 콜트레인도 이와 매우 비슷한 말을 했다. 1950년대 초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과다한 약물 복용으로 거의 죽을 번 했다가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한 후 마약과 술을 끊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의 최고의 재즈 연주 중 몇 가지는 그 이후에 이루어 졌는데, 그 중 하나가 '지극히 탁월한 사랑'(A Love Supreme)으로서 32분간 정열을 쏟아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고 자신의 영혼을 그 분께 바친 연주였다. 한번은 콜트레인이 매우 뛰어난 솜씨로 '지극히 탁월한 사랑'을 연주한 다음 무대에서 내려와 색소폰을 내려놓고는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란 말 한마디만 했다. 콜트레인은 그 곡을 그 때보다 더 완벽하게 연주할 수는 없으리라고 느꼈다. 그의 전 생애가 그 열정적인 32분간의 재즈 기도를 위해 살았다 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Nunc Dimittis(Release me). 참으로 멋진 말이라 생각했다. 길지 않은 인생. 짧고 굵게, 그리고 구차하지 않게 주님 앞에 멋지게 한번 사용되고 나서는 장엄하게 마감하는 인생.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비겁하게 하루하루 연장하는 시한부 환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예정일을 앞두고 주소록을 정리하는 사람의 심정으로 나의 인생을 떳떳하게 드리고 싶었다. 이만하면 후회스럽지 않게 남들에게 내 인생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발자국 하나 남기고 싶었다. 곡을 쓰고 찬양을 하는 나로서는 그게 아마도 멋진 앨범 하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재니스 조플린이나 커트 코바인처럼 몸 안에 가진 정열을 어찌하지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던 젊은이들이나 아니면 윤동주나 전태일처럼 불꽃같은 인생으로 사라진 젊은이들을 생각해 본다. 나는 내 인생의 불꽃이 될만한 불꽃 하나 가지고 있는지. 활활 한번 타오르고 나서도 후회스럽지 않은 인생이 되고 있는지 고개를 떨구곤 한다.

서른이 넘도록 무엇 하나 남기고 가는 것 없는 것 같아 아쉬워지곤 한다. 서태지가 나와 같은 동년배인 72년생이라는 사실이 그렇고, 칼빈은 스물여섯에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는 사실이 그렇고, 역사를 채워간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20대 초반에 인생을 헌신하여 19세기 대 선교의 시대를 열어갔다는 사실이 그랬다. CCM 쪽에서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데뷔하는 음악인들이 다 형들 누나들인 것만 같았는데 요즘에는 나보다 나이 든 사람이 오히려 눈에 띄는 것 같다. 왠만한 단체나 교회의 워십 리더들이면 요즘엔 어지간히 '라이브 워십 앨범'을 출반해서 자신의 프로필에 들어가는 모습이 괜스레 밉사리 보이는 것은 분명히 열등감일 게야. 오 주여, 콜트레인이 남겼던 그 한번의 연주처럼 내게도 "눈크 디미티스"하고 외치는 날은 과연 오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엔 오히려 바로 그 말씀이 내게 위로가 되곤 한다.

눅 2:25-32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 이다 하니."

시 므온. 한평생, 아마도 60-70년 동안 변변한 대접이나 화려한 주목 없이 평생을 그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을 한 늙은이. 떠오르는 스타 선지자들을 지켜보며 살았을 그의 삶이 때론 무료하고 지극히 평범함 속에 갇혀 버린 인생이었으리라. 그런데 바로 그런 늙은이에게 한 특권이 주어졌다. 바로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대면할 수 있는 특권이다. 눈크 디미티스! Paid-off! 기나긴 빚쟁이 생활을 마치고 마지막 수표를 보내는 사람의 후련한 마음이 이에 비할 수 있을까. 50년 분단의 아픔 속에서 드디어는 반세기만에 기다렸던 아들을 상봉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에 비할 수 있을까.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요 즘 가수의 인생이 6개월이라는 농담이 있다. 그래서 한 두 곡이라도 뜨는 날에는 열심히 방송도 출연하고 광고도 찍고 불러주는 곳에는 무조건 가서 인기가 식기 전에 본전이라도 건지자는 생각들이 팽배 하다고 한다. 태양이 지기 전에, 장이 파하기 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남은 하나의 물건이라도 더 팔려 하는 보따리 장사처럼. 내 마음속에 혹시라도 이러한 보따리 장사의 마인드가 자리 잡지 않았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이제 와서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나의 인생은 One-Night-Stand가 아니라 Long-Run 해야 한다는 사실을. 뛰어난 음악성으로 주목 받는 찬양 사역자가 아닐지라도, 서툴지만 잠잠히 그저 매주 만나는 한 회 중들을 고요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모시고 들어가는 예배 인도자가 되고 싶다. 늙은이 시므온에게 아마 반드시 있었음 직한 흰머리와 수염을 간직하며 롱런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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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01 22:52 이달의 초점

이달의 초점

[cKOSTA] 캠퍼스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작년(2002년) 미국 타임지의 마지막 호 커버 스토리는 올해의 인물 세 사람을 장식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 사람의 이름은 신시아 쿠퍼(월드컴), 콜린 로우리(FBI), 그리고 쉐론 왓킨스(엔론)이었습니다. Whistle blower(내부 고발자)라고 부제가 붙은 이 세 사람은 잘 알다시피 자신들이 속해있던 회사와 조직의 비밀을 세상에 알림으로 결국은 회사와 조직을 파멸(?)로 몰고 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들이 속한 조직에 비교한다면 작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로는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고(조직으로부터..),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조직내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세번째로는 행동을 통해서 자기들의 신념을 표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적인 자기희생을 드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그들의 희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위협앞에서도 자신들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이 세 사람은 소위 이야기하는 미국의 절대적 가치, 즉 자유, 용기, 그리고 정직을 위하여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캠퍼스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바로 2003년 처음 갖는 미주 cKOSTA를 바라보면서 갖는 소망의 작은 단편을 바로 그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위해서 희생을 무릅썼다면 캠퍼스속의 기독 대학생들을 바라보면서 갖는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어 내기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순결한 젊은이들인 것입니다.

가장 먼저 바라는 것은 ‘캠퍼스속의 순결함’은 “작은 존재들”이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잊지 않는 기독 대학생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창조적인 소수(creative minority)가 만들어 나간다고 했습니다. 학생 선교 운동사에서 볼 수 있는 건초더미(Haystack) 기도모임이나 영국의 캠브리지의 7인, 미국의 존 모트에 의한 학생선교의 운동은 바로 캠퍼스의 순결함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바로 작고 미미한 존재들이 만들어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이 곳 미국에서 공부하고 삶을 살아가는 학부 유학생들과 한인 대학생들이 그런 영적인 창조적인 소수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수혜자인 우리들이 이제는 우리가 공부하고 발을 딛고 살아가는 미국대학 캠퍼스의 순결함을 위해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작은 존재들이 cKOSTA를 통해서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합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이사야 6:13) 바로 이렇게 작지만 거룩한 씨들이 캠퍼스속의 그루터기로 자라기를 소원합니다.

두번째로, ‘캠퍼스속의 순결함’은 “인정받기 힘들지만 값어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기독 대학생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끊임없는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 열매는 더디고 작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부분에 치중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그 그림 가운데서 찾으면서 인내하는 기독 대학생들이 cKOSTA에서 헌신되기를 바랍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이 에콰도르 원주민들에게 무참히 살해 되었을 때에 타임지는 그들의 죽음을 “커다란 소모 (What a Waste)”라고 비판했지만 우리는 짐 엘리엇이 선교를 떠나기 7년전 21살때 자기의 일기장에 썼던 글귀를 기억하면서 우리도 캠퍼스의 순결함을 위해서 발걸음을 내딛는 기독 대학생이 되었으면 합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캠퍼스속에서 나타나기를 위해 애쓰는 많은 바보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캠퍼스속의 순결함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신념을 표현하는 많은 기독대학생들이 cKOSTA를 통해 배출되었으면 합니다. 헬무트 틸리케라는 사람은 식품이나 음료광고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이 정말 그 제품을 사용할까 궁금할때가 많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 질문이 ‘캠퍼스속의 순결함’을 이야기하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캠퍼스속의 순결함을 추구하는 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파는 일입니다. 바로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가진 것을 파는 장사가 되는 일입니다. 밭에 보화가 있다, 좋은 진주가 저기에 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쉽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보화를 찾으러 나가는 일이고 진주를 사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 일입니다. 행동으로 믿음과 신념을 드러내는 많은 젊은 기독 대학생들을 기대합니다.

지난 연말에 최대 흥행작 중의 하나인 영화 “반지의 제왕 (Lord of the Ring)” 2편을 보았습니다. 1편에서부터 느끼는 점이지만 주인공 프로도가 존경스러운 것은 자기의 사명과 꿈을 가지고 멀고 힘든 여정을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 cKOSTA 2003을 통해서 각자의 삶가운데 허락하신 작지만 소중한 꿈들을 발견하는 기독대학생들이 많이 헌신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꿈을 안고 캠퍼스로 흩어지는 작은 영적인 프로도들이 자신들의 캠퍼스를 누비며 하나님의 순결함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꿈과 소망에 힘을 실어주는 cKOSTA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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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두 개의 세계...어두움과 빛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인 생의 삼분의 일을 억압상태에서 보낸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송금사건으로 더 큰 고통의 여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국민의 분노와 실망이 그를 외롭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퍼주기’ ‘현대 봐주기’로 이어진 북한과의 평화유지비의 비밀 송금에 대해 대통령 국민담화가 발표되었지만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지난 50여년 동안 갈라진 남과 북에 금강산으로 가는 비포장 도로와 대북 사업 교역의 물꼬를 텄지만, 월 스트리트 저널이 지적한 대로 ?김정일 돈 바치기?로 만들어진 남과 북의 평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도 보이지 않는 두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이중 자아와 어두움과 빛의 이중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회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거룩한 햇볕정책은 무엇일까?

1. 이중 세계의 속성.

에 베소는 로마 제국의 종교적 도시였다. 학문과 철학의 도시 아덴과 상업과 교역의 도시 고린도와 더불어 에게해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에베소의 ‘아데미 숭배’는 여사제들과의 혼음으로 도시 전체가 섹스의 쾌락에 빠져 있었다. 바울이 어두움의 속성으로 지적한 ‘음행, 더러움, 탐욕’은 모두 타락한 성적 욕망을 드러낸 부끄러운 단어들이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5:3)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5:5-6).

어두움의 열매

 

빛의 열매

음행

참예하지 말라

착함

더러움

시험하여 보라

의로움

탐욕

 

진실함

세상은 성적 탐욕의 늪 속에 빠져있다. 한국은 여성부에서 최근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매년 섹스산업에 허비되는 돈이 24조원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섹스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청소년 원조교제, 보도방..같이 숨겨진 일들은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20-30대 여성 25명 중 1명이 쾌락산업에 빠져있다. 섹스의 쾌락의 끝은 에이즈의 증가로 이어진다. 매일 전세계에서 1만5천명이 새로 감염되고 있으며, 한국은 매일 1명이 감염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계 에이즈 감염자는 2001년 말 3610만명으로 보고되었으며, 청소년 감염자도 매년 300만명이 증가하고 있다. 피어트 유엔 에이즈국장은 ‘미국에서 매년 비만 치료와 예방에 쓰는 돈 520억 달러 중 30억 달러만 있어도 아프리카 에이즈 감염률을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세계인구 2.7%가 에이즈로 숨지고 있으며 매년 그 숫자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빛의 자녀들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도덕적 실천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이 살면서 인가다운 삶을 사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도덕성과 윤리적 실천력을 소유한 새로운 하나님의 피조물들이어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5:8-10).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은 15살까지 교회를 출석했으나, 이후 교회를 떠나 무신론자가 되었다. 러셀은 기독교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웃을 사랑하고, 고난당하는 자를 동정하고, 잔인성과 가증한 악에서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무신론자를 자처했지만, 그가 말한 기독교인의 세가지 정의는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자아상을 지적한 말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도덕적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졌다. 권력남용, 이권개입, 불법정치자금, 뇌물수수와 청탁, 분식회계와 주가조작, 부정과 사기.. 청와대에서 검찰, 언론까지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었다. 지난 30년간의 압축, 고속성장과정에서 한국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했다. 근면, 성실의 도덕적 가치관은 퇴색하고, 물질과 쾌락 추구가 새로운 삶의 목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도덕적 나침반이 멈춰버렸다. 국제 경쟁력의 원천인 반부패와 투명성에서 한국은 하위그룹에 밑돌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도덕성을 상실해버린 무기력한 교회가 있다. 교회는 한국사회의 도덕과 윤리 붕괴를 저항할 힘을 이미 잃어버렸다.

2. 빛의 자녀들의 의무.

“너 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5:11-14).” 4세기 중엽, 안디옥에서 출생한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크리소스톰은 그가 살던 도시가 사치와 쾌락의 극에 달하자,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세상을 책망했다. 좋은음식을 찾지 않았고, 화려한 옷을 거부했다. 기도와 명상으로 살면서, 자신의 것을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가 가진 것은 몸에 걸친 옷이 전부였다. “깨어있으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돈을 쥐려는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움켜쥐어야 한다. 세상의 것은 나눠지면 적어지지만, 영적인 것은 나눌수록 늘어안다. 나누지않으면 가난해지고, 결국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것이다” 온 도시가 그의 말에 떨었으며, 황제도 그를 두려워했다. 오늘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이 교회를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 세습으로 한동안 곤혹을 치루었는데, 김동호 목사의 연봉 파문으로 또 다시 세상의 가십거리가 되고, CCC의 세습 움직임으로 또 다른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여중생 장갑차 희생사건으로 촛불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한기총이 시청 앞 광장에서 연 기도집회가 교회의 명예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책망하라. 참예하지 말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책임은 책망하는 삶의 실천에 있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가지는 빛이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곧 사라진다.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열매를 실천해야 한다. 1998년 중국에 취임했던 주룽지 총리는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내 것을 포함해 관 100개를 준비하라. 청렴한 정치 이뤄지지 않으면 경제강국의 꿈은 이뤄질 수 없다. 국가가 바로서기 어렵다.” 그는 취임직후 ‘밀수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2000년 ‘부패관료와의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

세상은 빛을 찾고 있다. 기독교를 외면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빛’의 원리여야 한다. 스티브 쇼그린 목사는 섬김의 전도를 통해 복음이 닫혀버린 세상에 새로운 빛의 전도를 실천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무료 세차, 상점 포장 도와주기, 상점 유리창 닦아주기...등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30대 한 남자가 주일 아침, 교회 앞을 서성거렸다. 손에 빈 콜라캔을 들고.. 안내위원이 “제가 버려드릴까요?” 미소를 지으며 묻자 그 청년은 “아닙니다. 이 콜라 캔을 저는 간직하고 싶습니다. 제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소중한 기념물이니까요” 그는 전날, 무료로 나눠주는 콜라 캔을 받아들고, 처음 자신에게 사랑과 친절을 보여준 전도팀에 대한 호기심으로, 교회까지 찾아오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빛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도덕적 실천능력일 것이다. 단순히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윤리 기준은 아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이 기독교는 아니다. 세상에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빛의 열매’는 세상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3. 빛의 자녀들의 삶.

“그 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15-21).

지혜-시간-주의뜻-성령충만 앙드레 모로아는 “인생을 영위하는 기술은 하나의 공격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다. 역사의 인물들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기 인생에 목표를 정하고 그 한가지 일에 전력을 다했다”고 인생의 바른 태도를 설명한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세상의 돈과 명예와 부를 좇는 ?죽은 자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현하는 바른 인생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지혜가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다. 신학자 존 데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챨스 휴멜도 “우리들의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는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한데서 온다.”고 지적했다. 19세기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의사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장래가 보장된 뛰어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미래를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심하자, 그의 형이 이렇게 동생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너는 네가 원한대로 네 인생이 아프리카 정글의 미개인들과 매장되지만, 난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가 될 것이다.” 수세기가 지난 오늘, 리빙스턴의 유골은 영국으로 옮겨져, 정중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죄었지만, 그의 형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누가 더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리석다. 삶의 지혜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창고 문은 열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 삭개오의 소유는 무엇이 인생의 참된 목적인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다. 어디서 그 인생의 목적을 찾았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현대사회는 급하게 발전하고 있다. 자연과학 계열의 지식은 3개월 시차를 두고 변화하고 있다. 3개월전 논문은 이미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인문과학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인터넷이 학문의 속도를 더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다. 선진국의 학문이 당일에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인들이 함께 읽고 있다. 학문에서의 답보는 곧 퇴보다. 인생에서도 자기중심의 삶을 곧 퇴보다. 모험없는 인생은 어리석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를 결단해야 한다.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노라”고 고백하셨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라. - 예배. 찬양. 감사. 복종. 황성주 박사는 그의 책에서 “나는 주님 때문에 팔자 고친 사람이다. 내가 올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리 온 사람이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누린 사람이다. 오직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인해 변화받게 하시고,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게 하셨다. 이젠 그 행복이 흘러 넘쳐 행복의 전달자로, 기쁨의 발산자로 살게하신다. 차고 넘치는 은혜, 사역의 확대, 비전의 확대, 인맥의 확대로 나타났다”고 자신의 인생을 설명한다. 2003년 2월.. 러시아 코스타에서 황박사는 만났을 때 그는 “호산나 네트워크를 인수하고, 크리스챤 여성 잡지 레베카를 인수했다”고 말하면서, 인도와 아프리카 등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을 설명하며 흥분에 넘쳐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사랑의 전달자, 행복의 전달자, 복음의 전달자’이셨다. 바울은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충만을 유지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인간의 능력과 도덕적 의지와 자기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4가지 비밀을 가르치고 있다. “①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②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③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④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 예배에 힘쓰라.
매 주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혼과 몸의 안식을 계속 얻는 사람들이 매일의 삶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지시하는대로 따라갈 수 있었다. 죠지 물러가 하루 16시간 넘게 일하는 한 형제를 방문했다. 그 형제는 심한 피곤과 영적 메마름에 지쳐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실하자, 모든 삶이 균형을 잃고 말았다. 뮬러는 그 형제에게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속사람이 힘을 얻게 하라”고 권면했으나 “이렇게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데..일하는 시간 줄이면..”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잃고 있었다.

(2) 찬송을 힘쓰라.
하 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충만과 찬양은 영성의 두 날개와 같다. 사울 임금이 악신으로 고통당할 때 다윗의 수금을 타는 찬양으로 평온함을 얻곤 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하고 기도할 때 감옥터가 흔들리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을 베푸셨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구원받으면서 빌립보 간수와 그 가족도 구원을 받는 성령의 능력이 빌립보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한 교수님이 갑자기 이상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있거나, 거리를 걷든지 혼자 중얼렸다. 궁금한 학생들이 질문하자 교수는 “며칠전 꿈을 꿨는데, 갑자기 베드로가 ‘찬송가 279장 불러봐’ 말하는데 우물쭈물거리자 ‘형편없는 신자구만, 찬송도 못부르면서 어떻게 천국 오려구해. 다음에 와..’ 놀라 깨서 찬송가부터 찾아봤지. 그날부터 매일 찬송가를 부르며 찬송이 충만해지도록 애쓰게 되었네” 웃으며 대답했다. 찬송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다.

(3) 감사를 힘쓰라.
감 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제물이다. 감사는 중요한 경건의 훈련이다. 감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믿음의 열매다.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다. 작은 감사를 잘 실천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닮았다. 글로벌화. 디지털화로 대변되는 21세기는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제품만이 생존하는 시대다. 세계일류기업의 뚜렷한 특징은 ‘연구개발, 제품개발, 생산, 마케팅’ 등 기업활동 4단계중 하나이상의 독특한 강점을 갖고 있다. 미국의 델 컴퓨터는 인터넷 마케팅으로 세계 컴퓨터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노키아는 직원 32%가 R&D 연구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강점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는 성령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 성품이기 때문이다.

(4) 복종하라.
바울은 복종의 인간관계를 가정과 사회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다음 시간에 ?복종의 사회학?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성령충만한 삶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고 피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유는, 인간관계의 파괴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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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회복의 신학

선악과와 무감독 시험 - 그 원죄의 현장

(1)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 학생들의 마음 토양을 준비하기 위한 밭갈이 과목으로 <과학사>를 가르친다. 이 과목을 통해 서양 문명에 대해 상식이 부족한 중국 학생들을 일깨우고 더러는 충격을 준다. ‘아담에게 배꼽이 있었겠는가?’ 라는 첫 리포트에 아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도무지 아담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문화 비교, 로마제국의 흥망과 기독교의 전파, 중세 스콜라 철학,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과학혁명 그리고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가르쳐 나간다. 그러다 보면 학기 초에 굳게 닫혔던 학생들의 마음과 생각이 열리면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기까지 한다. 20여 년간 자신들이 지녀왔던 세계관이 허물어져 내리는 아픔 속에서 어떤 학생들은 리포트 빼곡히 자신의 하소연을 적어서 내기도 한다. 더러는 ‘요즘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입니까?’ 하는 절규가 담긴 글도 있다.

그러나 과학사 과목의 백미(白眉)는 역시 두 차례 치러지는 무감독 시험이다. 무감독 시험은 학생들에게 양심을 일깨우고 정직한 마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실시하는 가장 좋은 훈련이다. 진화론과 유물론 교육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사회주의 학생들은 대체로 양심이 무뎌져 있어 죄의식에 둔감한 편이다. 더욱이 거세게 몰려드는 물질주의에 노출되어 있는 가난한 학생들이 장학금과 직결되어 있는 시험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시험 부정행위를 하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학생들 중에도 그런 모습들이 종종 나타난다.

무감독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계획이 필요하다. 물론 세밀한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감독 시험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전혀 없는 학생들에게 몇 주 전부터 정직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감독이 있어도 어떻게든 치팅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무감독 시험이라는 말은 너무나 생소한 느낌일 뿐이다. 학생들에게 정직의 중요성에 관한 예화를 들려주고 더러는 정직 서약까지 받은 후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매년 끝까지 양심을 지켜내는 학생들은 삼분의 일에 불과하다. 다른 삼분의 일은 양심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마지막에 무너지는 학생들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물을 만난 듯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베껴내는 학생들이다. 촘촘히 앉은 계단강의실에서 손만 뻗으면 잡히는 교과서와 강의 노트, 그리고 눈만 돌리면 보이는 옆 사람의 시험지를 외면하고, 더구나 다른 학생들의 부정행위 장면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는 일은 한 바탕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 어렵다. 바로 그들이 이제 나아가 싸워야할 세상 속에서의 영적 육적 전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속삭임이 확성기처럼 시험 시간 내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학생들이 제출한 시험지를 가지고 와서 채점을 하는 동안 그들의 병든 양심과 인격을 대면하며 사투를 벌인다. 보통 100여명의 수강생이 시험지 두 세 장에 가득 채워 제출한 논술형 답안지를 읽어보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답안지는 그들이 살아온 병든 환경과 영적 상태뿐 아니라 앞으로 치유의 가능성까지 전부 담고 있는 병리 기록이기에 어느 한 장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특별히 무감독 시험의 성공 여부와 자신의 소감을 적으라는 마지막 문제의 답안에는 그들이 시험 시간에 겪었던 심각한 영적 전쟁의 상처들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특별히 감동과 충격을 주는 눈에 띠는 답안지들을 골라낸 후 그 다음 시간에 들고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읽어준다. 내가 읽다가도 목이 매여서 읽기가 힘들만큼 적나라한 자기 고백과 회개의 글들이 튀어나온다. 일단 그 시간에 학생들은 심리적인 충격을 받고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옛날이야기 식으로 각색한 <두 아들 이야기> 즉,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 강퍅했던 아이들의 마음까지 대부분 허물어져 내린다. 양심을 지켰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교만해져 있던 학생들조차 함께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자신의 답안지를 스스로 양심 채점을 하여 점수를 정정토록 한다. 이 때가 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양심을 회복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인생 속에서 또다시 실족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양심 회복에 대한 충격적인 이 체험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죄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자각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무감독 시험에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수확이다.

회개하고 돌아온 학생들에게는 양심을 되찾은 자유함으로 기쁨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끝까지 양심을 속이며 자신의 불의한 이익을 챙기려는 학생들도 일부 남기 마련이다. 그들에 대해 화가 나고 안타까움이 끓어오르다가도 그냥 내버려둔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심판과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과의 시험을 주셨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다 알고 계셨을 텐데 왜 그런 시험을 통해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는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사람은 선과 악도 분별할 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있었는가?
선악과란 도대체 어떤 과일인가? 사과인가? 복숭아인가? 아니면 눈을 밝혀주는 신비한 묘약인가?

창세기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넘어야 하는 첫 고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선악과의 준령이다. 말씀에 대해 반감을 지닌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어느 정도 신앙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선악과 문제만 나오면 쉽게 답변키 힘든 여러 가지 질문들을 퍼붓곤 한다.

무감독 시험을 치를 때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향해 베푸신 일종의 무감독 시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선악과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테스트(test)이지 아담과 하와를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해 일부러 처 놓은 덫으로서의 시험(temptation)이 아니다. 좋은 선생이라면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시험문제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과 마찬가지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된 가장 아름답고 완벽했던 환경... 그 에덴동산 중앙에 놓여졌던 한 그루의 나무 선악과... 금단의 열매,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7)"

문제의 그 현장으로 가 보자.

에덴동산을 지구상에 실존하였던 그 어떤 곳으로 보든지... 아니면 피안(彼岸)의 세계를 그리기 위한 또 하나의 가상공간으로 보든지... 아무튼 좋다. 역사의 시작이 그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에덴동산에는 온통 순금과 같은 보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에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임에 분명하다. 그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뜻이다. 그 속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된 두 남녀에 의해 펼쳐지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역사가 그렇게만 될 수 있었다면... 설사 에덴 이야기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간절한 바람일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 가상공간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가장 사람이 살기 좋게 설계된 자연 환경 속에서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왜 그들은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았을까? 아니, 왜 인간은 벌거벗으면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왜 인간만이 옷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일까? 모두 비슷한 질문이다.

부끄러움은 존재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다. 그러하기에 옷은 도덕적으로 격하된 존재의 열등의식을 가리고자하는 도덕적 표현이다. 반대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은 두 사람의 완전한 관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에게는 가릴만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결국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도덕적으로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이 살고 있던 동산 중앙에는 특별한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동산의 모든 실과는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지만, 유독 그 나무의 열매만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선악과(善惡果)였다.

자... 선악과 이야기만큼,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나 혹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자(膾炙)되며 제각기 해석되고 더러는 공격을 당해온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논하기 위한 학문적 주제로서 일련의 통찰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분명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지닌 선과 악의 양면성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은유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지닌 선한 속성은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기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악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금수가 행하지 못하는 마귀적 행동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깡패 집단이 동료를 죽인 후, 토막을 내고 그의 내장을 파서 나누어 먹은 후 매장했다는 엽기적 뉴스를 접하고 인간의 악함에 새삼 놀라지 않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 뿐인가? 지난 세기를 붉게 물들였던 수많은 전쟁과 수용소 군도에서 벌어졌던 그 참혹한 역사의 다큐멘터리들을 우리는 물증으로 가지고 있다. 마약과 매춘이 행해지는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매일 밤 벌어지고 있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행위들은 어떠한가?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한 점 부끄러운 얼룩도 없이 완전한 존재로 남아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 그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항거하여 비교적(?)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다가 옥사(獄死)한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는 그의 중요한 저서 <윤리학(Ethics)>에서 완전한 도덕의 기준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1)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제시되는 어떤 기준도 완전성에 이를 수 없기에, 도덕의 기준은 완전한 신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즉,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 신이 원하는 것이 선이요, 그 신이 원치 않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선이요, 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이다.

선악과... 그것은 신의 뜻을 알리고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금석이었다. 선악과가 상큼한 사과이었는지 신 포도였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특별한 성분을 지닌 과일이어서 먹는 순간 신기한 반응이 일어나서 선악에 대해 무지했던 아담과 하와의 눈을 일깨움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한 것은 더욱 아니다.

완전한 신은 그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여 선악과의 화두(話頭)를 던진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도덕적 완전성을 지키는 길임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함의(含意)가 들어 있다. 첫째, 그는 신과의 완전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그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존재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단어 자체가 도덕적 요구에 어떻게 반응(response)하는가 하는 능력(ability)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도덕적 존재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신의 도덕적 요구조건을 지킬 수도 혹은 어길 수도 있는... 즉,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혹은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신의 뜻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들이 도덕적 완전성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즉, 신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완전한 도덕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선택이었다.

선악과는 그 자체가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과 악의 갈림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 갈림길에서 그들은 불순종의 길을 택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보다는 자신의 길, 인간의 길, 악마가 유혹하는 길..., 결국은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3)

(L학생) 무감독 시험_ 내 인생의 첫 양심 측정_ 감동과 뼈저림_ 교수님 뭐라 할까요? 느낌이 너무너무 복잡합니다. 내가 무감독 시험에서 양심을 지켜냈다는 뿌듯함과 그 성적에 대한 실망감... 사실은 시험을 치를 때는 많이 갈등을 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무감독 시험... 너무 새로운 느낌을 저희에게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통하여 나는 만족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자신에 대해 신심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한 학교생활을 하다가 복잡한 사회에 들어가면 내가 어떻게 적응을 하고 자신을 지켜갈 수 있을지 많이 근심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번 시험을 통해서 내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신심이 생겼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 확실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그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뿌듯함... 이것이 내 평생의 재산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세상 어디를 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떳떳이 난 정직한 사람이라고 외칠 수 있기에... 교수님,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교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H학생) 전번 시험 때에는 여러 가지 고려가 많았습니다. 보고 쓰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고 보고 쓰지 않으려니 밑지는 것 같고, 결국에는 내 양심을 버리고 커닝을 하였습니다. 훌륭한 21세기의 리더를 키우는 우리대학의 과학사 중간고사에 커닝을 하였습니다. 리더가 갖추어야할 양심과 정직성은 나의 손과 눈에 의하여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커닝을 하면서 전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머리 속은 끊임없는 내부 전쟁을 하였고, 시험지에 꽉 적어놓은 답안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지난 일주일을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도 민망하여 교수님의 얼굴을 도무지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읽으신 동학들의 글은 채찍이 되어 나의 마음을 후려쳤습니다. 숨을 쉬고 있는 것마저도 나에게는 그렇게 큰 부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량심적으로 다시 채점하라는 말에 나는 내 인생의 1949년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해방된 기분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채점해보니 49점이었습니다. 무려 23점이나 감점이 되었지만 나의 정직을 찾았다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동학들의 뉘우침과 성실한 고백을 듣고 그렇게 열심히 양심 채점을 하는 동학들을 보면서 이번 무감독 시험이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잃었던 양심을 되찾고 정직의 중요성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YUST의 신입생으로서 기둥이 되어야할 내가 YUST의 취지_ 정직을 잃을 뻔한 가슴 아픈 교훈...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성적을 위하여 량심을 버리는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량심을 되찾도록 이끌어주신 교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B학생) 시험을 치를 때, 좌우에서 많은 학생의 소곤대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아니꼽게 생각하고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다. 내가 앉은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자리이고 그 앞자리는 시험지를 제출하는 자리였다. 어떤 학생이 먼저 답안지를 놓고 나가자 옆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천천히 일어나 그 답안지를 가져다가 보려고 했다. 참 민망하고 불쾌하여 그 애를 지적하고 말렸다. 내가 마음 아팠던 것은 부정행위를 하는 그 친구들보다도 이미 제출한 시험지를 가져다 봐도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위환경 때문이었다. 어지러운 세상 환경을 보는 것 같았다. 다음 시간은 시험 문제를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무감독 시험에 동의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교수님은 많은 학생들의 생각을 읽어주셨다. 반대하는, 찬성하는 여러 친구들의 시험지에 남겨진 마음들을 읽으면서 나에게 새로운 감동이 왔다. 다만 부정행위를 하는 애들이 틀렸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나에게 그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안간힘을 쓰며 죄와 싸우려는 선한 마음들, 하지만 마지막에 대부분 넘어지는 모습들, 넘어지면서도 정직을 향해 외치는 모습.... 너무나 가슴이 뭉클했다. 내 마음과 눈에서 눈물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마음을 몰라주고 있었다. 그저 틀리다고 원망했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과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싶다. 아픈 마음을 찾아서 위로하고 어루만지고 선한 마음을 찾아서 같이 나서고 싶다. 교수님은 집 떠난 탕자와 남아있던 큰아들 이야기를 했다. 다시 돌아온 탕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나도 돌아온 탕자였다. 그러나 어느새 큰아들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 마음이 깨끗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항상 회개한 탕자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마음을 읽어주시는 동안 나는 친구들의 선한 마음들과 만났다. 혹시 내 옆에, 내 뒤에 그런 친구가 있을까 하여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어두운 세상에 가려서 그저 무관심하고 삐지고 생각 없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그 속에 선한 마음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번 무감독 시험은 성공했다. 한 사람이라도 선한 양심으로 돌아왔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히 이 시험을 치러낸 친구들한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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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교회생활

소수 민족 교회를 후원합시다

우리 교회에서 히스패닉 미션을 시작한지 3년이 됩니다. 교회 건물을 무료로 사용케 하고 사역자에게 매달 1,000불씩 지불하고 있습니다.

미주 한인 교회가 미국 교회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한인 교회가 다른 소수 민족에게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 는 캘리포니아 한 교회에서 평신도, 교육 전도사, 교육 목사로 12년을 섬겼습니다. 섬기던 교회는 미국 교회를 빌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장년 주일 학교로 성장했다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많은 교실을 필요로 하였고 사용 빈도수도 높았습니다. 고맙게도 미국 교회는 쓰고싶은 만치 교실을 쓰도록 허락했습니다.

교 인 숫자가 증가하면서 더 큰 예배 처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빌어 쓰는 별관 대신에 교회 본당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 당하고 말았습니다. 특별 집회를 위하여 본당을 몇 번 빌어 쓴 적이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고 난 후에는 김치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는 미국 교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 행히 다른 교회가 본당을 쓰도록 허락해 주어서 이사를 했습니다. 그 곳에서도 교회는 계속 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 교회 교인 숫자와 우리 교인 숫자가 비슷했는데 수 년 되자 우리 교인 수가 미국 교회 교인 숫자의 두 배가 되었습니다. 건물 사용 빈도수는 4배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서도 불평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불 평의 주 원인은 어린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얼마나 뛰고, 얼마나 심합니까? 불평 불만도 할만 했습니다. 그래서 파손된 기물이 발견되면 우리 애들, 그 교회 애들을 따지지 않고 즉시 수선해 주었습니다. 월세도 달라는 대로 지불했습니다. 냄새 풍길까 봐 친교실에서 김치는 절대 먹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상 더 빌려 주겠다는 교회가 없어서 건물 구입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교회 건물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전화 위복이 된 셈입니다.

미 국교회 건물을 빌려 쓰는 한인교회 교인들은 다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미국교회 성도들이 참 무던했다고 생각합니다. 입장이 바뀌어서 우리가 주인이고 그들이 손님이었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그만치 나마 참아 주었을까?

우 리가 소수 민족 교회로서 쓰라린 경험을 했으니까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다른 소수 민족 교회를 후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는 그들의 고유 음식 냄새가 역겹다고 흉보거나 하지말고 미국 교회가 한인 교회에 해준 것보다 더 잘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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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의 삶

성공한 소수 (小數)

예 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 (막 10:17-22)

마 가는 자신이 적은 복음서 10장에 한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에 관하여 적고 있다. 예수님께 찿아온 이 사람을 다른 복음서에는 부자 청년 관원이라고 했다. 그는 젊고, 관원이고, 부자이며,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으며, 또한 예수님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그러나, 그의 배경을 조금 생각해 보면, 그는 모순 투성이의 인간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젊어서 부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관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관원은 많은 돈을 벌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의 율법을 지키던 많은 사람들은 로마에 대하여 저항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관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별로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자신의 질문을 던지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자관원의 삶의 모습을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의 삶속의 모순은 바로 성공을 지향하는 그의 삶의 결과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이다. 세상 속에서는 로마의 관원으로, 그 동네에서는 부자청년으로, 회당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청년으로 살았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또 다른 하나의 "성공"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예수님께도 인정을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물어본 영생에 관한 질문은 그가 진정으로 영생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 보다는 어쩌면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위한 잘 준비된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청년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찬 유학생들의 모습을 또한 본다. 지극히 성공지향적이다. 어느 곳에서나 인정받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그곳이 학교이든 교회이든,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내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나의 주변에 힘있는 자를 위해서 살았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은 바로 나보다 힘있는 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로마정부, 율법주의자, 사업가,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내가 "인정받아야할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교수님께 인정받아야 하고,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친구의 가장 친한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야 하고, 집에서는 부모님들께 가장 훌륭한 아들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목사님 앞에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은 나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위한 삶이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삶이다. 나의 삶의 내면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마치 부자청년에게 로마정부와 율법주의자와 예수님이 각각 상충된 삶의 모습을 요구했었던 것 처럼, 나의 삶속에서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욕망이 그와 같은 모순을 덮어놓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그 렇게 성공한 젊은 청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성공을 추구하고, 강한 자들을 만족시키기만을 위하여 살아온 부자 청년 관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

성 공한 자들의 주변에는 반드시 실패한 자들이 있기에 마련이다. 이세상의 법은 한사람의 최후 승리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패배자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법은 그와 같은 생존경쟁을 통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강한자는 약한자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혁명적인 권유를 하신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의 성공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이웃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때 그의 성공은 아름다운 성공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유 학생들은 성공하려고 온 자들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이미 성공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학의 소원은 품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유학을 오지 못하고 그 꿈을 접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유학에 성공하면, 그 유학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성공이다. 우리과에서는 박사과정 신입생들을 매년 50%이상 걸러내곤 한다. 2년차로 진급하는 것이 성공이다. 그러나 그 성공의 뒤에는 실패한 자들의 아픔이 깔려있기에 마련이다. 학위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직장을 구해야 한다. 우리분야에서 교수 한명을 뽑는데 150명 정도의 지원자가 들어오는 것은 일반적인 예이다. 한 사람이 교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149명의 실패자가 생겨야 한다. 학회지에 논문을 보내면 평균 선택율이 5%를 못미친다. 5편의 성공한 논문을 위해서 95편의 논문이 rejection의 통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의 환경속에서 살다보면,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나의 삶의 DNA 속에 박혀있는 것 같은 느끼게 된다.

그 런 나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내가 그 부자 관원이라는 것이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네 주변에 너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자들을 섬기라는 것이 주님의 음성이다. 참으로 힘든 적이 많다. 그러나 주님이 그 부자관원을 보실적에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셨다는 말씀이 힘이 된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나의 눈을 내가 자연적으로 보지 않는 곳으로 돌리는 훈련을 한다.

교 수라고 하는 직업은 참으로 묘한 자리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 비서, 학생, 심지어 가족들까지, 자신이 하는 연구와 강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자리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러한 기대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게 만든다. 내가 6년전 Case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학회를 가려고 준비하는 때였다. 비행기표를 끊어야 하는데 비서가 물어본다. "Do you have any preference?" 그래서 아무자리나 괜챦다고 말했다. 그 비서가 웃으면서 하는말이, "Youngjin, you have a long way to go to become a faculty member. As a faculty member, you should say, 'I will never fly unless I get seat number 4C on that flight.'" 물론 그때는 웃고 넘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 그와 같은 대접을 기대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교수들의 삶은 deadline으로 이루어져 있다. Deadline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교수들 같다. 그래서 연구제안서나 강의안 제출 마감일이 되면 학교가 마치 동물원 같다. 마감 시간 직전까지 자신의 제안서를 붙잡고 이렇게 저렇게 고치다가, 마감 직전에 비서나 학생들이 기타 다른 모든 필요한 자료를 완벽하게 준비해 놨다가, 제출시간에 맞추어서 제출하기를 원한다. 모든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삶, 그것이 교수들의 삶의 모습이다.

학 교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그럴수록 대접받기를 바라는 나의 욕망은 더욱 커져 간다. 그들이 나를 위해서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짜증이나고 분노가 생긴다. 그들이 나의 일을 잘 도와줬을 때에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게 된다. 내가 늦어서 일이 지연되는 것은 아무 일없는 것처럼 지나가게 된다. 나의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도구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 때, 주님은 나에게 젊은 부자 관원을 기억나게 하신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섬기기 위해서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음을 주님은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하신다.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임을 주님이 생각게 해 주신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해야 할 나의 섬김의 대상임을 다시한번 기억케 해 주신다. 문득, 나의 비서의 책상에 붙어있는 그의 딸이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한번도 보이지 않던 그림이 오늘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가 첫딸을 백혈병으로 잃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그 그림은 최근 자주 아픈 그의 둘째딸이 그린 토끼 가족 4마리의 그림이다. 그 그림을 이야기 하면서 그 딸의 건강을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그녀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면서 웃어보았다.

학 교에서 있다가 저녁에 집에 도착하면 몹시 피곤하다. 저녁강의를 마치고 집에 간 날은 특히 더 피곤하다. 밤 늦도록 하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저녁을 준비해놓고 졸린 눈으로 나를 기다리던 아내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얼른 허기를 채우고, TV를 켜고 CNN 뉴스를 보면서 강의하느라고 긴장해 있는 나의 태옆을 풀기를 원한다. 그때 주님이 다시 한번 나에게 부자 청년관원을 생각나게 하신다. 나는 나의 가족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음을 기억하게 하신다. 대부분의 유학생 배우자와 마찬가지로, 나의 아내는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 너무나 많은 순간, 단순히 내가 남편이라는 이유하나로 나를 위한 아내의 희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 해야지라고... 주님은 나에게 나의 아내는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주신다. 오히려, 내가 아내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함을 생각하게 하신다.

우 리집에는 두아들이 있다. 아내가 학교에서 첼로 레슨을 하는 목요일과 토요일은 이 두아이들이 내차지이다. 목요일은 저녁 6시경에 학교에 가서 after school care에서 두녀석을 pick-up해서 집에 온다. 집에 오면, 나도 배가 고프고 그 녀석들도 배가 고프고, 모두다 cranky해져 있기에 마련이다.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녀석들은 가방과 겉옷을 사방으로 집어 던지면서 저희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집에서 오후내 혼자있던 강아지 Freddie는 정신없이 날뛰면서 밖으로 자기를 데리고 나가서 오줌을 뉘여달라고 성화를 한다. 둘째놈은 배가 고파서 뛰어내려와 냉장고를 열고는 먹을 것을 찾는다. 학교에서 피곤한 미팅이라도 있던 날, 신경질부터 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문득 주님이 나는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 주신다. 자녀들이 더 이상 집안에 TV 리모콘이 보이지 않을 때, 리모콘 대신 내가 원하는 채녈로 바꿔주는 "인간 리모콘"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눠야 할 섬김의 대상임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자연스럽게 오는 생각은 아니다. 내속의 싸움이 있다. "나도 피곤한데..." 밥먹으로 식탁에 앉은 두 녁석에게 "Tonight, I am your servant. What can I do for you?"라고 물었다. 생각없는 둘째 동현이는 "Water, please!"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자 마음 좋은 큰아들 광현이가 "I will do it."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항상 이렇게 섬기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에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날은 평안한 저녁이었다.

섬 기는 삶. 나누는 삶. 나에게는 참으로 힘든 짐이 된다. 나 때문에 희생하고 나를 돕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훈련, 이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오지를 않는다. 나는 평생 나의 주변의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살아왔고 그렇게 훈련받아왔다. 내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오는 훈련을 하였다. 그런 나에게, 남을 돌아보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오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사람을 돕고 그들과 함께 아퍼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의 깨우치심이 필요하다. 성령님이 주시는 민감한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성공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웃사람보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그사람들을 먼저 바라보는 훈련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부자관원처럼, 근심하고 떠나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주 변의 많은 유학생들에게서 나와 같은 모습들을 발견한다. 많은 부자관원들을 본다. 아니면 부자관원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본다. 그들에게 질문해 보고 싶다.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성공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그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는 훈련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인간의 역사의 발전은 소수의 천재들의 탁월한 능력과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능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그 소수의 리더들이 자신을 죽이는 헌신과 섬김으로 주변을 사람들을 보다 낳게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성경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소수의 희생적 리더들을 찾고 계시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수많은 사사와 선지자, 그리고 왕들의 순교적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사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고, 그 계획을 이루어나가셨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소수의 헌신적 섬김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다.

한 민족, 한 국가, 한 사회, 한 교회, 그리고 한 가정을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변화와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은 수의 자들, 자신이 받은 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자, 자신의 성공을 사명으로 발견한 적은 수의 리더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계획을 이끌어나가고 계신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려서 평등을 이루는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그것을 사명으로 삼고, 주변의 자들을 섬길 때, 진정한 사회의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믿는다. 오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성공한 소수이다. 자신의 성공으로 자신의 주변을 섬기는 소수가 필요하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국가에서, 부자관원을 찾고 계신 예수님의 찾음에 대답하고 나오는 자들이 필요한 때이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는 성공한 소수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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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 리포트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

아 이들과 매일 생활하면서 저는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양쪽 부모님들과 생활하기 보다는 그렇지 못 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도 이들은 언제나 수업 내용과 관련 되지 않는 즉, 자기들의 생활 이야기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말다툼을 많이 하곤 합니다.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나름대로 우습고 재미 있는 이야기들도 있고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들도 있는데 이번 달 이코스타에서는 그런 이야기들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참고: 소개 되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입니다.)

전문성이 있는 도둑 (professional thief)?

지 금은 7학년이 되어 있는 W라는 남학생이 2년 전, 그가 5학년 때 저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란 W는 정서 장애와 학습 장애를 가진 학생으로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주위가 산만하며 학교에서는 말썽만 피우고 어느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 문제아로 소문이 나 있어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조차도 없었습니다. 한 번은 W가 제 클래스에 와서 저는 예전과 다름 없이 수업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Good Morning"이라고 인사를 하자 다른 아이들도 "Good morning, Ms. Cha" 라며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W는 "Ms. Cha, I am not having a good morning"이라며 책을 집어 던졌습니다. 순간 저는 이 학생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니?" 그러자 W 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아빠가 집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지 못 했어요."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왜? 아빠가 어디 가셨니? 바쁘신가 보다." 그러자 W는 저를 처다 보며 "우리 아빠는 원래 감옥에서 살아요. 아빠의 직업은 전문성을 갖춘 도둑이에요. 그런데, 어제는 우리 아빠가 자기의 전문성을 잘 살리지 못 했었어요." 세상에! 아무리 여러 종류의 직업들이 있고 우리는 그 직업의 전문성과 소명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는 이야기 하지만 "도둑"이라는 직업에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궁금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도둑"이라는 직업에도 전문성이 있니?" 그러자 W는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일에 대해서 전문성 (professionalism)을 갖고 일을 하듯이 우리 아빠도 남의 물건을 훔칠 때 특정한 기술을 사용해요. 그것은 지문 자국을 없애기 위해서 장갑을 끼고 물건을 훔치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전문성을 갖춘 도둑은 경찰 아저씨한테 잡히지 않아요. 우리 아빠는 언제나 자기의 그 전문성을 유지해서 걸리지 않았었는데, 어제는 일반 도둑 (regular thief) 이었어요. 그래서 경찰 아저씨한테 걸려서 다시 감옥으로 갔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는 6개월 동안 얼굴 한 번 못 본 아빠가 그리운 듯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 음에 이 이야기를 들은 저와 다른 학생들은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중에 W에게 너무 미안했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W가 안타깝고 가여워서 좀 더 그를 따뜻한 사랑으로 잘 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이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웃고 지나가 버립니다. 하지만 이 예화 속에 W의 솔직하고 순수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기의 가정 환경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별로 좋지 않으면 창피해서라도 숨기려고 할 텐데 W는 아빠가 감옥에 있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 낌 없이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사람들 보다 친절한 동물들

어 려서 부 터 할머니가 읽어 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자란 K라는 정신 지체 남자 아이는 기억력이 아주 좋고 한 번 들은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능이 낮은 관계로 자기 또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사회성 (social skill)도 부족하다 보니 심지어 특수 학급에서도 이 아이는 놀림의 대상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K에게 장난치고 괴롭히는 일을 즐겨 하고 그럴 때 마다 K는 그들과 맞서 보다가 결국 지고 맙니다. 어느 날 K가 동물들이 그려진 잡지를 저에게 가져와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Ms. Cha, 동물, 특히 강아지 좋아해요? 우리집에는 내가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나의 영원한 친구에요. 집에 가면 강아지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요." 별로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 저는 그냥 계속 듣고만 있었습니다. K는 계속 이야기 했습니다. "강아지가 왜 내 친구인 줄 알아요? 강아지는 사람들 보다 나쁘지 않기 때문이에요. (Dogs are not meaner than people). 내가 아무리 바보같이 행동하고 별로 잘 해 주지 않아도 그들은 나에게 대하는 모습이 똑같아요."

저는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물끄러미 처다 보았습니다. 지능이 낮은 그에게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너무 뜻밖이었고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 순간순간 환경과 자신의 이익 추구에 따라 변하는 우리들의 모습,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자들과 어울리고 도와 주기 보다는 따돌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K는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인상 쓰지 마세요.

초 등학교 2학년인 남자 아이 W는 주위가 산만해서 집중하는데 어려움이 많으며 그렇다 보니 가만히 앉아서 학습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직 7살 밖에 안 된 W는 장난기도 많이 있어서 농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러다가 그 정도가 지나쳐서 문제가 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처음에 W와 행동 수정을 하는데 잘 따라주지 않았고 반항적일 때도 많았으며 심지어 저에게 "You don't like me"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제 클래스에 오자마자 밖에 서 있고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과 저의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교실 밖에 서 있었고 저는 그가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참 후에 문을 열고 들어온 W에게 저는 물었습니다. "아니, 클래스에 왔으면 문을 열고 들어와야지. 왜 밖에 서 있었니?" 그러자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선생님이 저하고 눈만 마주 치면 내가 오늘도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그런지 인상 쓰고 있었잖아요. (When I look at you, you are making bad faces at me because you think that I would be a bad boy today)" 그러자 저는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인상을 썼다니? 네가 들어오기 전에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W는 말을 이으며,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나하고 눈만 마주 치면 내가 오늘 또 무슨 이상한 행동을 하나 하고 생각해서 그런지 인상부터 쓰셨잖아요." 처음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기가 막혔고 어떡해 대답해야 할지 몰랐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 아이만을 빤히 처다 봤을 뿐인데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정말로 인상을 썼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가 건방지고 버릇없다고 느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저의 모습이 어떤 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던 고마운 사건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집에 와서 그 아이를 비롯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미소 (extra smile)를 주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를 선물로 줄 수 있나요?

아 이들에게 협동 심을 길러 주기 위해서 행동 수정 방법 중에 하나로 어떤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아이들로 하여금 영화 감상, 피자, 아이스크림 파티 등등 다양한 reward를 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 지체를 가지고 있는 B라는 학생이 손을 들고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은 별로 안 좋아해요. 내가 정말 필요한 보상은 엄마에요. 우리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라서 우리 사 남매를 버리고 집을 나갔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엄마를 비롯해서 나도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아빠가 다시 재혼 하면 나에게도 엄마가 생기는데, 그건 아직 잘 모르는 일이고…" 하고 말을 멈추었다. 저는 그 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생각이 있는 아이였는지 몰랐고 얼마나 엄마가 그리울까 하는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맺으며

이 밖에도 재미 있는 에피소드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냥 무심코 지나갈 수는 있지만 이런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르치시는 교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 째, 하나님 앞에서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 겠다는 도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아빠가 도둑이었지만 아무런 거리 낌 없이 이야기 한 W,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솔직히 표현한 K 와 W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그리고 엄마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B라는 아이들 모두 거짓과 꾸밈이 없이 순수한 마음들을 지녔습니다.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실 지라고 우리의 솔직한 생각들을 꾸밈 없이 말씀과 기도로 이야기 하고 우리들의 아픔까지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둘 째,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K 어린이의 강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저는 무조건 적인 사랑을 소외되어 있는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K가 부족하고 어리 석게 보이며 가끔 강아지에게 관심을 덜 보일 지라도 그의 영원한 친구인 강아지는 그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 (unconditional love)을 보여 주며 끝까지 그의 벗이 되어 주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가끔 우리들이 지치고 그를 외면하더라도 그가 우리들을 향한 사랑이 변함 없는 것처럼 우리들 역시 다른 이들에게, 나와 별로 친하지 않는 이웃들에까지도 변함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겠습니다.

"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 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 하시고 축복 하시니라." (마가복음 10: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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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01 22:38 책이야기/eKOSTA 서평

영적 리더십

어 디를 가던 리더쉽에 대한 책, 세미나, 강연등이 넘쳐난다. 작년 한국 월드컵의 주역이었던 히딩크 열풍을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리더다운 리더에 목말라 했는 지 우리는 이미 실감한 바 있다. 그의 리더쉽을 분석한 책들이 출간되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논의도 인터넷에 한동안 맴돌기도 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여관까지도 등장했다고 한다. 한가지 질문이 있다면 이러한 세상적 리더쉽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단답형의 대답은 No! 이겠지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것은 성경적 리더쉽, 즉 구체적 대안이 필요하다.나는 최근 이러한 세상적 리더쉽에 대해 대안이 될만한 책을 발견하고 내심 기뻤다. 이미 성경적 리더쉽에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특별히 존 맥스웰 목사의 책들), 이번에 소개하려는 책은 헨리 블랙커비 목사의 "영적리더십" (원제: Spiritual Leadership, 두란노, 2002)이다. 그의 또 다른 책,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많은 교회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채택해서 쓰이고 있다.

그 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인 "제자를 만드는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영적리더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자신이 제자가 되어감과 동시에, 주위에 영향을 미치는 생활은 미룰 수 없는 일이다. "리더쉽은 곧 영향력이다"란 말 만큼은 성경적 리더쉽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검증될 수 있다.이 책은 이러한 영적 리더를 위해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리더"의 정의가 세상적인 책들과 다를 수 밖에 없다. 세상적인 리더는 기업의 CEO 처럼 여러사람을 이끄는 사람으로 자신 또는 이익집단의 목표와 야망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로 일반화 될 수 있겠으나,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영적리더가 추구해야할 5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 하고 있다. (1) 영적 리더쉽은 사람들을 움직여 현재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로 가게한다. (2) 영적리더는 성령께 의지한다. (3) 영적리더는 하나님께 책임진다. (4)영적리더는 하나님의 사람들 뿐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5) 영적리더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한다.

이 책은 어떤 리더쉽 테크닉을 전하는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야곱이 그의 생의 갈림길마다 벧엘로 돌아갔듯이, 영적리더가 되려는 이들에게 기본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따라서 성과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노력보다는 기도가 강조 된다. 결과물을 빠른 시간안에 완성할것을 요구받는 시대에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계획을 정말 주님께 드렸다면 그 결과조차도 주님께 드려야 할 일이다. 나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린 뒤에, 그 빈 자리를 채우시는 주님의 은혜는 정말 버린자만이 느낄 수 있는 주님의 상이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리더(leader)는 하나님을 따르는 추종자(follower)이므로."예수님이 제시하신 영적 리더쉽에서 열쇠는 리더가 자기 조직의 비전을 만들고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리더는 하나님 아버지이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의 비젼은 그분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은 리더들에게 당신대신 큰꿈을 꾸라거나 당면한 문제를 알아서 해결 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다만 당신과 친밀하게 동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보여주실때 즉각 그 분의 뜻대로 자기 삶을 조정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말이다. 오늘날 기업리더는 고사하고 종교리더들 조차도 따르고 있지않은 성경적 리더쉽의 모든 것은 바로 이것이다." (p46)

사 족1. 리더쉽 씨리즈로 유명한 존 먝스웰 목사의 책 중 하나를 고르라 한 다면 나는 "실패를 딛고 전진하라" (두란노, 2000,원제:Failing Forward)를 택하고 싶다. 수많은 실례를 통해, 실패를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을 볼 수있는 책이다.

사 족2: "번역은 반역이다" 란 말이 상징하듯이 번역서의 단점은 때로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 지 모를때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적 리더쉽"의 경우는 안심하시라. 문장이 매끄럽기 때문이다. "영적 리더쉽"을 번역한 역자 는 전문 번역가 윤종석이다. 그의 번역서를 대할 때 마다 감탄 하는 것은 그의 번역의 유려함과 아울러 책 선택의 탁월함이다. 몇가지 에를 든다면 "놀라운하나님의 은혜", "심플 라이프", "영혼의 창"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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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

- 고결함 (Integrity): Christ Inside & Love Outside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마가 9:50)

들어가며

평소 존경하던 김인수 장로님께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故人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원칙을 소중히 여기셨고, 타협과 관용을 철저하게 구별하셨고, 늘 진지했던 장로님의 선한 청지기 같았던 삶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 깊이 살아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미주 코스타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셨던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고자 노력하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지금도 그리고 이후에도 살아 숨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로님은 세상의 소금으로 늘 우리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소금" (halas)이라는 단어는 4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의 조건들을 열거하신 후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언급하신 부분이 그 첫번째 경우입니다 (마태 5:13). 누가복음 14장 34절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가기 전에 갖추어야할 인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주인되시기를 늘 소망하는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고후 13:16).

하나님의 사람 (Divine Individuality)이라는 주제에 이어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나머지 두 경우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경우들은 하나님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야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가지 경우들은 관계 형성의 원칙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원칙들을 고결함 (integrity)이라고 압축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묵상의 결과를 나름대로 Christ Inside & Love Outside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Christ Inside

고결함은 영어로 Integrity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integer로부터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전체(entirety), 완전함(completeness), 또는 흠 없는(blameless) 조건이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어떤 사람이 삶에서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켜나가는 태도를 나타내거나 또는 이런 사람의 도덕적 순결함(purity)을 지칭합니다. '높다'(高)와 '깨끗하다'(潔)는 의미가 합성된 고결이라는 한자어와 마찬가지로 영어의 integrity도 구별되는 삶과 이런 삶의 기준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을 나타냅니다.

고결은 오만이나 거만과는 다릅니다. 오만이나 거만이 우월함을 고집하는 태도라면, 고결은 비교 우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동일시 되는 어떤 원칙들을 지켜나가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때 고결은 안팎의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목적한 바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이때 고결은 열 사람이 옳다고 우겨도 원칙에 기초해서 틀리면 틀리다고 주장하는 소신있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즉 고결은 자기존중이며 자기완성임과 동시에 구별됨입니다. 이 구별됨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도 있는 용기도 포함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이 어떤 원칙들 위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 가지 사건들과 연관시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며 토론한 사건입니다 (마가 9:33-37). 제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를 구별된 사람들로 생각한 이유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자기자신들이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다툼은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까지 예수께 가져간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 18:1-5). 이에 예수님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의 질문이 그들에게 더 시급한 문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질문에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을 구성하는 첫번째 원칙 '겸손'이 있습니다. 성경은 겸손은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이 가져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마가 9:37). 바울의 말을 빌자면, 성도의 구별됨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구별됨을 자랑치 못하며, 이런 은혜를 기억할 때 성도들은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10). 겸손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Indwelling Christ)의 은혜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인의 고결의 첫번째 원칙은 구별됨으로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역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Love Outside

마가복음에서 소금과 관련된 두번째 사건은 제자들이 자기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않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빌어 귀신을 쫓을 수 없도록 금지한 것입니다 (마가 9:38). 이와 같이 제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남용하자 예수님께서는 기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런 이유에서 "반대하지 않는 자"는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가 9:39-40). 이것이 고결함의 두번째 원칙 관용입니다.

관용 (tolerance)은 무원칙이나 무분별한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먹어야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옆에 있는 사람의 의사를 따라 음식을 시킨 것을 관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 바로 이것이 관용입니다. 원칙이 없는 관용은 타협이나 무관심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상식 밖의 불의가 반복되는 가운데 묵묵히 서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 관용은 무원칙과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관용은 고결함 그 자체이자 곧 고결함의 한 원칙입니다. 기독교적 관용은 주는 은사 (the gift of giving), 즉 사랑(Agape)에 기초합니다. 양보하고, 용서하고, 인내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을 결국에는 바꾸는 것이 관용입니다. 타협은 요령이나 처세를 가르쳐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은 관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 가치관이나 삶의 궁극적인 목표의 변경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예수의 이름의 고결함을 지키려는 제자들의 마음 뒤에는 자신들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향유하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마가 10:38).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킴으로써 자신들만을 돋보이게 하려 한 행위와 결코 다르지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금으로는 너를 깨끗게하고" (have salt in yourselves), "다른 사람과는 평안과 기쁨을 나누어라" (have peace one with another)는 두 가지를 명령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에게 철저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워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얻어지는 평화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충고하고 이어 "너희 말을 은혜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Let your speech always be with grace, seasoned, as it were, with salt)"고 부연하고,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4:5-6). 다시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토론에서 격론으로, 격론에서 격분으로 치닫을 마음을 억누르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성의를 다하고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절과 존중(respect)하는 마음을 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은 모두와 화목할 수 밖에 없는 책임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간단하게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고결함 (Christian Integrity) 오만함 (Arrogance)
존귀함의 원천 하나님의 은혜 (grace)에 기초한 자기존중 (self-esteem)과 자부심 (pride) 자기자신의 노력에 기초한 자기 중요성이나 지나친 우월감 (self-importance or overbearing pride)
내적 열쇠원칙 내재하시는 그리스도 (Indwelling Christ)로부터 나오는 겸손 (humbleness)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만족 없는 욕구 (insatiable desire)
외적 열쇠원칙 주는 은사 (the gift of giving, Agape)와 관용 (tolerance) 획득(acquisition)과 투쟁 (struggle)

마치며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소모임을 이끌 때, 불신자들과 토론을 할 때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독재자처럼 성경공부를 인도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떨어진 이야기로 공전하는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재자가 되어있는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역으로 갈등을 피하고 부담을 줄이는 관계를 선호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워 할 때도 있습니다. 제직 수련회나 인도자 교육을 가서 마피아식, 교통순경식 등의 이름들이 붙은 경영학적 원론들을 반복해서 들을 때면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기본적인 원칙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유대인의 배타적 선민의식이 아니라, 내재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고결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매일 이렇게 돌아가다 보면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 속의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故 김인수 장로님의 소천소식을 접하며 오늘 다시한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는 말씀을 좌우명처럼 여기신다던 故人처럼 매일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갈등에대해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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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3월호

발렌타인 데이를 겨냥해 상점마다 예쁘게 포장한 여러 종류의 초코렛과 사탕들이 눈길을 끕니다. 그 예쁜 상품들에 현혹되어 나도 누구에겐가 선물을 하고 싶어져서 여러 이름과 얼굴들을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상업적으로 변모한 의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많지만, 평소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사람들이나 사랑을 주고받은 대상들에게 달콤한 언어를 보내는 날로 생각한다면 소박하게 사탕 하나, 초코렛 하나쯤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일지 너무나 많은 상상과 고찰, 경험담과 나름대로의 설명들이 있지만 쉽게 알 수도 없고 잡히지 않는 것이 사랑에 대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얼마 전 본 영화 한편이 떠오릅니다. 바로 이창동감독의 ‘오아시스’라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나 문제 의식을 제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보고 나니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깨닫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한마디로 쉽게 정의할 수 없지만 아! 하고 느낌을 갖게 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회 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 주인공 남자 종두는 좀 모자라는 청년이지만 순박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인물입니다. 가정과 직장이 있는 형의 교통 사고를 대신 뒤집어 쓰고 형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가족들이 이사해서 집을 찾지도 못해 동생을 통해 귀가하지만 가족들도 골치거리인 그를 그다지 반기지는 않습니다. 추운 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집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어머니에게 드릴 스웨터가 전부입니다. 자신을 달가와 하지 않는 가족들이나 자신이 대신한 옥살이에 대해서도 그는 별 불만을 토로하지 않습니다. 그가 유달리 희생적인 인품을 가졌다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챙길 만한 자의식이 없는, 생각이 단순한 인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가족들의 냉대와 모욕적인 말에도 실없이 웃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무심할 정도로 모자라지만 낙천적인 성품을 가진 것이지요.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자신은 가족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달팽이 집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피해자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딸을 만나게 됩니다. 종일 햇빛에 거울을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인 공주라는 아가씨이지요. 얼굴은 일그러지고 사지가 뒤틀리며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공주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종두는 공주에게 예쁘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섬세한 감정을 가진 어엿한 여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공주에게 호감을 갖고 지속적인 만남을 갖는 종두와 공주가 즐기는 데이트는 일반 정상인들의 만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갑니다. 영화 속에서 공주가 자신을 건강한 여자로 상상하는 장면들에서 그녀의 바램과 소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빠도 그녀를 버리고 이사가고 가정부는 그녀를 속이며 존재 자체를 무시하지만 종두를 통해서 그녀는 ‘여자’가 되어갑니다. 여기서 종두가 그녀를 선택하고 예쁘! 다고 말해주는 것이 그에게 높은 도덕적인 의식이 있거나 차원 높은 윤리관이 있기 때문은 절대 아닌 것 같습니다. “ 방금 전에 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마당에 나갔었답니다. 여기서 몇 시간씩이나 참아서 담배를 여러 개 계속해서 피고 있었는데 한나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하도 열심히 쳐다보기에 왜냐고 물었죠. 한나가 뭐라는 줄 아세요? 오, 세상에...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면 아줌마가 아프게 되지 않냐고 물으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거였어요. 정말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이죠.“ 그녀는 다시 울먹이느냐고 목이 메인 것 같았다우.

창밖에 있는 나무의 그림자가 벽에 걸린 그림에 비쳐서 무섭다고 공주가 말하자, 종두는 그림자를 지우는 마술을 걸어 줍니다. 종두의 서툰 주문에 그림자가 지워지면 공주는 행복하게 잠이 듭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은 마법에 걸리는 일’이라는 해법이 읽혀집니다. 객관적으로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공주의 외모나 서투른 언어가 종두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사랑은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종두에겐 공주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내겐 너무 예쁜” 아가씨로 보이는 것이지요. 종두에게 눈이 어떻게 되었냐 거나 판단력을 의심하며 따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는 흔한 말이 바로 이런 경우이겠지요. 친남매간에도 소통이 어렵건만 종두는 공주의 모든 의사 표현을 알아내는 것만 보아도 그들 사이엔 특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두가 걸어준 마술은 공주의 두려움, 그림자라는 어둠의 세력을 지워 줍니다. 사랑은 닫혀 있던 공주의 언어와 마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웅얼거림이 종두에 의해서 언어가 되었고, 밝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절실한 사랑은 세상사람들 눈에는 그릇되고 뒤틀린 관계로 보여지고, 사랑의 행위는 폭력으로 보여집니다. 종두나 공주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을 항변하고 표현할 능력이 없기에 세상의 편견과 오해에 무자비하게 습격(?) 당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방해와 강제력도 그들의 사랑을 막지는 못합니다. 종일 햇볕이나 바라던 공주는 종두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방 청소를 할 정도로 적극적인 생활을 하고 있게 됩니다.

종두는 편지에다 “공주님이 싫어하는 콩밥이 이젠 저도 싫어졌사와요”라고 써 보냅니다.

사랑은 닮아 가는 것, 같은 것을 즐기고 기뻐하는 마음인 것을 이렇게 알아 가는 것이지요.

사랑은 지독한 마법에 걸리는 일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 사랑해요”라는 단순한 주문만 외우면 엄청난 마술이 우리에게 벌어집니다. 어둠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빛이 들어와 불안과 절망이 기쁨과 희망으로 변합니다. 그는 우리의 외모나 조건도 상관없이, 추악하고 끔직한 죄에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우리에게 빠져 있는지, 늘 아름답고 귀하다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힐난과 비웃음을 보낼지라도 나와 그의 사랑만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오아시스를 찾은 것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대는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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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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