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ecent Trackback

Archive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구원의 자아상

2002년도 코스타집회의 주제였던 "하나님의 나라"와 "자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코스타가 기획한 연재물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이번호는 그 두번째로 "구원의 자아상"이다. 필자인 조경호목사는 2002년 코스타집회의 새벽설교를 통해 "하나님나라"와 "자아상"이란 주제를 균형있고 심도있게 다루어준 바있다.

닐 앤더슨 목사가 쓴 책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에는 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술주정뱅이 남편으로 인해 절망하고 괴로워하던 부인은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해 좌절하고 있었다. 목사는 그 부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구원의 말씀이 적힌 종이를 주며 큰 소리로 읽으라고 권면했다. 절반쯤 읽다가 부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저는 제가 그렇게 영광스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대한 거룩한 자각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낼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을 '구원의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과거의 자아상과 현재의 자아상을 깊이있게 설명한다. 구원이 가져온 자아의 변화 곧 '이전 것'과 '새것'의 차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거룩한 제단에 드릴 수 있다.

자아상의 모형(엡1:20-23)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20-23)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재창조되었다. 성령의 권능이 먼저 그리스도를 '알케고스' 구원의 창시자로 만드셨다. 구세주가 되신 단계를 5과정으로 묘사한다. 죽음과 부활에서 최종적으로 구원의 완성과 절정이 교회의 머리에서 실현된다.

● 성령하나님의 사역....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1:20-23)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된 구원의 전체 계획 1:20-23
죽음
부활
승천
만물의 주
교회의 머리
신자 안에서 진행되는 구원의 전체 계획 2:1-22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실현은 교회였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 땅에 세우고자 하셨던 하나님나라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 공동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신 5단계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을 재창조하셨다. 요즘 세계적으로 윤리문제가 되고 있는 '복제인간'의 시초는 하나님나라였다. 에베소서 2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5단계가 어떻게 재창조의 과정이 되는가를 살펴보자. 2장의 핵심단어는 "만드시고"(10,14절)이다. '포이에마'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 손으로 만든 예술품이란 뜻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복제한 위대한 창조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재창조하신 과정을 세밀하게 말씀으로 보이셨다.

구원의 제 1변화(엡2:1-10)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10)

구원받기 전....구원받은 후

● 자아의 본질: 구원받기 전 자아의 본질을 바울은 3가지로 정의한다.

(1)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2:2 그 때에 너희가 ...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2:3 전에는 우리도 다 ...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죄-죽음-불순종-진노'는 인간 타락의 원인, 과정, 결과를 보여준다. 죄의 시작은 불순종이었으며,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 우리는 모두 '3중의 타락의 본질성'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 자아의 본성: 죽음의 세계는 3중의 노예적 세계다. 인간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시체가 되기 전까지 탈출할 수 없다. 로버트 벨라는 현대인의 삶을 정의하기를 "개인주의의 전성시대, 자기 왕국에 영광 돌리는 시대, 얻는 것에 매달리는 시대"라고 표현했다. 죄인의 왕국에서 사람들은 어떤 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지 '죄'가 만들고 지배하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자.

(1) 첫번째 본성: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엡2:2)

세상 유행을 따라 사는 삶이 죄의 본성이다. 현대사회는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유행이 된 시대라고 정의했다. 죄는 거짓말, 술, 사기 등 기초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도덕성을 무너뜨리는 더 깊은 원인은 '유행 따라 사는 삶'의 구조에 숨겨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한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젊은 여성들의 미국원정출산 러시. 한국 성인 10명중 1명이 성형하는 성형중독 증상. '뇌물'은 정치 뿐 아니라 마케팅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한국 연예계비리. 아시아 중에서 가장 섹스비율이 높은 나라로 한국을 지목하고, 한국의 인터걸의 실태를 보도함으로써, 한국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는 수많은 유행들이 사람들의 삶을 무차별적으로 정복하고 인간성과 삶의 가치관을 잔인하게 지배하고 있다. 지금 자신을 한번 둘러 보라. 세상 유행의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는지를 하나씩 점검해 보면 유쾌한 기분이 사라질 것이다.

(2) 두번째 본성: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사단의 세계는 '외모, 학벌, 계급'으로 지배되는 세상을 의미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사단의 거대한 조직은 외모주의, 학벌주의의 세계로 외모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이 죄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

한국의 제일기획에서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여성의 70%가 "외모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대답해 충격을 주었다. 여성들은 외모에 신경 쓰고 외출하면, 사람들이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준다고 대답했다. 같은 또래의 여자를 만나면 먼저 외모부터 비교하고, 피부나 몸매를 보면 그 여자의 생활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외모 가꾸기를 위해 하루에 53분을 투자하고, 거울은 8.3회 본다. 여자들은 흰 피부, 잘 뻗은 종아리, 늘씬한 팔다리, 탄력있는 몸매, 작고 예쁜 두상을 갖고 싶다고 대답했다.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사회 전반에 안개처럼 깔려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8월 한달 동안 두번에 걸쳐 총리임명이 부결되었다. 학벌 위조와 부동산투기, 재산증식 의혹, 자녀들에 대한 위법이 동일하게 청문회 내내 긴 공방전을 가져왔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아직도 죄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라 산다면 그의 구원은 거짓이다. 허상의 종교를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고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대상임을 알기 때문이다.

(3) 세번째 본성: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베이컨은 "인간에겐 세 가지 유혹이 있다. 거친 육체의 욕심. 저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교만. 졸렬하고 불손한 이기심. 이 세 가지로 인해 모든 인간의 불행이 과거에서 미래까지 인류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욕심과 교만과 이기심이 없었다면 완전한 질서가 인간을 지배했을 것이다." 육체와 마음의 욕심은 악의 본래의 얼굴이다. 세상은 거대한 섹스시장이 되어가고, 섹스가 인간을 지배하는 인류의 신이 되었다.

인류학자 언윈은 "인류가 걸어온 88개 문명의 흥망사의 공통점은, 어느 문명이나 성도덕이 건전할 때 문명이 일어나고, 성도덕이 문란할 때 문명이 쇠망했다"고 역사를 해석했다. 미국아동의 10%가 13세에 섹스를 경험하고, 혼외정사를 부도덕하지 않다고 여기는 성의식의 세상에서 문명의 존폐위기가 경계선에 서있다. 구약시대의 모든 우상숭배는 거대한 섹스파티가 동반된 타락한 성의 역사였으며, 우상숭배는 오늘도 바뀌지 않았다.

● 구원의 자아상: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4-5)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을 때 과거의 세계와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졌다. 옛 세상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겨졌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재창조하셨다. 과거의 삶의 구조와 가치관에서 해방되고, 구원받은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에 나타난 기본적인 사실들은 아래와 같다.

(1) 구원의 세요소 긍휼. 사랑. 은혜
(2) 구원의 세단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미국 남침레교에서 발행하는 'BP뉴스'는 전 세계에서 영화 "예수"를 관람한 사람이 지난 7월1일 현재 51억6483만6643명이라고 발표했다. 전 세계에 743개 언어로 번역되어, 236개 나라에서 상영되었으며, 2초에 한사람씩 예수 영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1978년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구원했다. 워너브러더스 제작자 중 한 중역도 개봉전략회의에서 영화를 보고 중생하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는 삼중의 자아실현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신분은 영원하며, 구원의 자아상은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구원은 얼마나 놀라운 경험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다음달에 계속 에베소서 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디자인하신 구원의 자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재된 글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우리 연변에서는

(1)

얼마 전 MBC TV에서 탈북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방영하여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탈북 여성들이 중국 공안과 결탁한 중국인들에게 이리 저리 팔려 다니며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유린을 당하며 그 일에 일부 조선족들도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분개한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을 향해 질타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게 되었고, 또 그에 반박하는 조선족의 글을 함께 읽게 되었다. 문제의 사이트에 올라온 한 조선족의 글을 한번 옮겨보자. (참조: http://www.unikorean.net)

한국 사람은 한국에 있는 조선족을 어떻게 했는가? 또 지금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님 글 쓴 것을 보니 한국 사람이 분명한데 당신이 그렇게 입을 벌려 말할 자격이 있어요? <북한 사람을 구해 줘야 하는 이는 조선족>이라고 말이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이 어떤 개고생 다하면서 살아가는 지는 알긴 하는가! 우리도 너네한테 팔려봤고 당했었다. 비록 우리 중에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대부분의 북한형제들에 대해 감싸주고 있다. 만약 중국에 조선족이라도 없었더라면 30만 탈북자가 이보다 더 비참한 짓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 살고 있는 곳이 어디고 그들을 먹여주고 탈북 동포들을 살려주느라 중국 공안에 붙들려 가는 이들 또 누구더냐? 바로 조선족이다. 북조선 사람들이 건너올 때도 그나마 한 가닥에 희망이 조선족이다. 우리들은 한국보다는 못 살지만 우리들은 우리 힘있는 대로 돕는다. ...(중략)... 자기들이 그런 짓을 할 때는 모르겠더니만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니까 그렇게 참혹하게 여겨지는지..... 하지만 나는 그런 짓을 한 우리 조선족도 용서 못한다. 아무튼 우리 민족은 서로를 생각해야할 자태가 필요하다.

"우리 연변에서는...." 으로 시작하는 한창 유행했던 개그 프로그램이 있다. 그로인해 상처 받은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에 대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는 글이 같은 사이트에 올라 와 있어 재차 인용해 본다.


한국 사람들이 이램다. 너무 기차서 한번 그대루 옴겨 봄다. 아이구 기차지..., 그럼 시작하겠슴다. 와땀다. 우리 연변에서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는 여우 축에두 못감다. 꼬리 스물이 넘어야 여우라구 부름다. 꼬리 스무 개씩 달린 여우는 그 꼬리를 빗자루로 씀다 한번은 꼬리가 팔십 개 달린 여우를 봤슴다. 궁둥이가 이만함다~~


난 그 <<봉숭아학당>>한번 보구 다신 안 본다. 한국 사람들이 개그한다구 뭐 대통령두 갖구 놀 정도긴 하지만 이건 그 사람들 내부 일이고, 우리 교포들의 가뜩이나 예민한 감정을 왜 이렇게 건드리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 그 사람들은 그저 한번 가볍게 웃고 넘기지만 그게 우리들에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는 생각지두 않는다.

중국에서두 한국에서두 대접받지 못하구 사는 우리 어정쩡한 위치, 중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에 와서 그 아픔과 설움을 겪어보지 못했다면.... 이런 설움과 아픔 때문에 여기 있는 대부분 교포들이 한국이 4강에 들었을 때에도 그 희열을 느끼지 못하고 담담하게 지나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한국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니까....한국 사람의 눈엔 동포보다도 중국사람으로 보이는 우리들이니까....

연변에서 장기간 일하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아픔 중 하나는 조선족들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상처들과 그로 인한 왜곡된 심성들을 보게 될 때이다.


(2)

"우리 살아가는 날 동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스런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라고 시작하는 용혜원 시인의 시가 있다.

지난 월드컵의 감동과 감격은 아마 우리 민족이라면 세월을 두고 그 기쁨을 반추할 만한 사건이었다. 특히, 이태리와의 대 역전 드라마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짜릿한 명승부로 기록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일전이었다. 밴쿠버 코스타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그날 새벽, 경기가 끝나고 중심가로 뛰쳐나온 교민과 학생들 사이에 코스타 강사진들이 함께 섞여 환호하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될 것만 같다.

나는 이번에 캐나다와 미국 코스타를 참석하느라 우연찮게 중국, 한국, 캐나다, 미국의 4개국을 거치면서 월드컵을 관전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이 한마음이 되어 목 터져라 응원하던 그 순간에.... 그러나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그 함성에서 제외되고 소외되어 있는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과...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장 가까워야할 우리 연변 조선족들이 캐나다와 미국에 있는 동포들보다 한국을 응원하는데 소원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조선족들이 품은 마음은 두 갈래 마음이었다. 한국 축구에 대해 편파보도를 하는 중국 CCTV에 항의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연변대학의 모 교수처럼 더러는 목숨을 걸고 응원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관심은 있으나 짐짓 외면하고픈 마음으로 멀찌감치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누구인가? 오히려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났던 우리 선조들의 후예들이다. 민족심과 자긍심이 누구보다도 더 강한 사람들이다. 가장 큰 소리로 소리 질러 응원해야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올해는 한중 수교 1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양국 간의 괄목할만한 경제 교류의 표면적 성장 뒤에는 지난 10년간 이곳 연변의 조선족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로부터 받아야했던 많은 수모와 상처들이 있다. 어쩌면 심중 깊은 곳에서 그리던 모국이 올림픽을 치른 잘사는 나라로 갑자기 눈앞에 부상한 이후, 그들이 가졌던 기대와 장밋빛 꿈들이 서서히 시들어가며 그리고 마지막에는 산산이 분노로 찢겨져 버린 그런 세월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월드컵이 시작하기 얼마 전부터 나는 새벽마다 옆방에서 기도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갑작스레 한국 축구를 위해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상시에 스포츠나 특히 축구에는 전혀 관심도 없던 사람인지라 조금 의아스럽기도 했다. 하루는 이상하여 "당신 요즘 왜 축구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해?"라고 물어보았더니 "나도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기도를 시키시는 것 같아요. 그냥 기도만 시작하면 이번 월드컵에 기대를 걸고 있는 불쌍한 우리 민족이 생각나서..."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이 있는 날이면 아내는 가슴이 떨려서 제대로 응원도 못하고 안절부절 다른 방을 오가며 기도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한국이 게임 도중 잠시 패했을 때에는 통곡을 하고 울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던 중 내가 문득 깨닫게 된 것은 이번 월드컵이 단순히 축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지난 세기 갈가리 찢기고 나뉘어 진 우리 민족의 상처들을 싸매 주며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한 마음으로 뭉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떠올랐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아내의 기도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독일과의 4강전이 치러지던 날은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상잔과 분단의 뼈아픈 상처의 기억을 담고 있는 비극의 날 6.25의 기념일이었다. 그날 우리는 통일된 독일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경기의 패배는 나에게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의 커다란 상징처럼 다가왔다. 분단된 이 민족... 고통받는 저 백성들을 남겨두고... 우리가 기쁨의 환성을 지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였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3)

지난 코스타의 세미나 제목을 전체 주제에 맞추어 <치유와 회복의 신학>이라고 붙였더니... 내가 어느새 신학을 공부했는가 하고 묻는 분들이 있었다. <치유와 회복>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썰렁한 제목인 것 같아 단지 운율을 맞추기 위해 붙인 것이었는데... 그게 좀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보니 과연 신학이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평신도는 신학을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인가? 라는 질문도 생겼다.

신학(theology)도 일종의 학문인가? 학(學)자가 붙었으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학(biology)이나 심리학(psychology)과 마찬가지로 학문의 대상을 신(神)으로 두고 이성적으로 반응하며 앎을 추구하는 그런 행위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일 게다. 아니 그렇다면 생물이나 인간의 심리처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 할수록 신(God)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난센스다. 만일 인간의 이성적 사유로서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신이라면 그것은 이미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독교의 신관은 철저하게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초월적 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로마서 3장 11절에서 말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다.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으며, 인간은 도무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어떤 분인지 찾아갈 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관이기도 하다. 오직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를 계시(啓示)할 때만 우리 인간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물(즉, 신에 대해 알아낸 결과들)을 판단하고 그것으로 학위를 주고 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타종교의 신이라면 몰라도 기독교의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학이란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는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성육신 하신 예수였다.

상처받고 왜곡된 우리 인간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분이 오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으며 또 만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예수야말로 모든 신학의 시작이다. 우리가 부서지고 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분이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상처들 또한 신학의 전적인 대상이요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상처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예수... 그렇다면, 신학이란 다름 아닌 "예수를 통한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라고 정의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에겐 상처들이 너무 많다. 개인의 상처, 가정의 상처, 사회적 상처, 민족의 상처, 그리고 온 인류가 짊어진 상처와 그로 인해 피폐해진 피조계의 우주적 상처에 이르기까지.... 그 상처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예수를 따라가는 우리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곧 신학이요 신학함이 되어야할 것이다.

갈라진 겨레의 상처를 아파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중적 마음을 표현한 연변의 한 무명 시인의 시 한 수를 소개한다.

겨레

다섯 손가락을 보니
흩어진 겨레의 모습 같다.

꽉- 으스러지게 틀어쥔다.
주먹을....

나는 이렇게 밖에
사랑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고파 주먹을 쥐는데
펴보면 또 다섯 손가락이다.

몸은 서로 떨어져 멀리 있어도
마음은 하나가 되여 살아가는 사람들...

쥐면 주먹
펴면 다섯 손가락

쉼 없이 반복한다.
이 사랑의 손짓을

다섯 손가락을 보니
언제나 운명을 같이 할
겨레의 모습이다.

(최진성, 1999년 1월 연변문학)

흩어진 우리 겨레... 상처 입은 연변의 조선족들... 그리고 그들이 또 돌보아야할 죽어가는 북한의 형제들... 그러나 그들의 상처 속에서 우리는 피 흘리는 예수를 발견한다. 그리고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우리 민족의 치유와 회복의 소망을 느낀다.

"우리 연변에서는... 평신도도 신학을 함다. 일 없슴다."

지금까지 연재된 글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행복한 교회 생활

목회자 사례 책정 원칙

휴스턴 서울 침례 교회에 1993년 1월 1일에 부임하였습니다. 담임 목사 직은 수 개월 공석이었고 사역자로는 중고등부 전도사 한 분만 있었습니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것을 알았기 때문에 청빙 직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초청장에 사례비가 얼마인지 표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례비가 없어도 올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사례비를 많이 주어도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임하여 첫번 사례를 받고 보니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받던 액수보다 적었습니다.

목회자 사례비 책정에 관한 원칙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 같아서 다음과 같은 컬럼을 써서 주보에 실렸습니다. 거의 10년 전에 쓴 칼럼이지만 EKOSTA 독자들도 알아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조금 수정하여서 아래에 옮깁니다.


내년 예산이 확정되었습니다.

청소년 전도사님 생활비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어서 년 $18,000에서 $24,000로 올렸습니다. 사무원,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사례도 6% 인상 하였습니다. 제 생활비는 동결시켰습니다. 아내가 일을 하기 때문에 생활에 큰 문제가 없고, 교역자 사례 책정에 관한 원칙을 말할 때에 행여라도 “최 목사가 사례비를 많이 달라는 모양이다” 생각할까 싶어서 입니다.

성경은 교회가 교역자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 9:13, 14). 교역자의 생활비는 가능하면 후하게 책정하는 것이 좋습니다.목사는 구제, 선교, 손님 대접… 등등 남 모르게 돈을 써야 할 곳이 많습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당신의 일군을 접대할 때에 보상이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마태 10:41-42).

교역자 생활비는 교인들의 평균 수준에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교역자의 연령이나 생활 형편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 다니는 장성한 자녀를 가진 목사님들은 교육비 등 가외 지출을 고려해서 사례를 책정해야 합니다.

가장 못사는 교인 수준에 맞추어서 담임 목사의 생활비를 책정하는 교회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선교비가 우선이라고 담임 목회자에게는 최저 수준의 생활비를 책정하는 교회를 보아도 마음이 아픕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고아원에 많은 기부를 하면서 노부모는 굶기는 불효 자식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성도는 교역자에게 잘 해 드리려 애를 쓰고 교역자는 받은 것을 감사하며 사는 것이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겠습니다.

어떤 교인은 사례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는 목회자를 이상적인 목회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개척 당시나 특수 상황 하에서 잠정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정상은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모시는 교역자들에게는 여기 적힌 사례비 책정 원칙을 적용할 것입니다.

(현재 서울 침례 교회에는 담임 목사인 저를 포함하여서 4명의 목사와 1명의 여자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모두가 담임 목사인 저와 똑 같은 액수의 사례비를 받고 있습니다. 부임했을 때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매년 저의 사례비를 동결하고 인상액을 다른 교역자들에게 나누어 주니까 7년 만에 같아졌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eKOSTA 갤러리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게 하찮아졌어
두 번씩이나 접하는 내 크고 고운 날개도
더 높이 날아서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지도
그래, 이름 석자를 위해 퍼덕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신천옹(信千翁), 내 이름만큼이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난 자주 여기서 살아
날개를 접고 부리를 땅에 박고 있을 때 조차
난 이 곳에 떠 있지
약해진 두 발목을 노리는 올가미로도,
약 먹인 낟알로도
단 한 발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총알로도
날 여기서 끌어 내릴 순 없어
난 이미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내 안에 넣어뒀거든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뉴질랜드 남섬에 서식하고 있는 새 알바트로스를 만났다.
우리 말로 신천옹이라 불리는 새.
한 번의 비상으로 대륙을 가로 지르는 알바트로스.

그 새를 보들레르는 이렇게 노래한다.
마치 시인과 비교되는 크리스챤처럼.


알바트로스( L’albatros)-샤를르 보들레를(Charles Baudelire)

흔히 장난 삼아 뱃사람들은
거대한 바다 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심연(深淵)을 미끄러져가는 배를 따라다니는
항해(航海)의 이 게으른 길동무를.

갑판(甲板)위에 한번 몸이 놓이기만 하면
이 창공(蒼空)의 왕자(王子)는, 서투르고 수줍어
불쌍하게도 그 큰 하얀 날개를
질질 옆구리에 노처럼 끈다.

이 날개 돋친 항해자(航海者). 얼마나 어색하고 맥없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처럼 아름답던 새
어쩌면 그다지도 우습고 흉칙한가!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지지고
어떤 사람은 절름 절름 하늘을 날던 이 불구자(不具者)의 흉내를 낸다.

시인(詩人)은 닯았다.
폭풍우(暴風雨)속을 넘나들고 사수(射手)를 비웃는 이 구름의 왕자(王者)와
지상(地上)에서 추방되면 야유와 함성 가운데서
그의 거대한 날개는 오히려 걸음을 방해할 뿐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유학생의 삶

당신은 누구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4-8, 10)

유학생의 삶을 흔히들 "광야"의 삶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힘들고 외로워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광야는 두려운 곳이다. 불확실하다. 위험하다. 나를 보호하고 있는 모든 보호의 장벽이 제거되어 있는 것 같은 곳이다. 내가 편안해 하고, 내가 익숙해 하던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한세대가 통채로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광야이다. 광야는 물이 없고, 음식이 없으며, 위험한 야생 짐승들이 나의 생명을 노리는 곳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광야는 또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깝게 느끼는 곳이 광야이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공급하는 만나와 생수를 마시며, 그분의 인도하심이 없이 생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광야는 그분이 나의 삶에 한 가운데 와 계신 곳이다. 모세가, 다윗이, 바울이 광야를 통해 그들의 삶을 준비했다. 예수님이 광야를 통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다. 그래서 광야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그야말로 삶의 "위기"이다.

유학의 광야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유학생들이 이 유학의 광야에서 죽어가고, 아니면 겨우 겨우 삶을 연명하며 그것으로 자족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고민한다. 열등감과 우월감의 미묘한 교차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 방황하며 갈등한다. 그러한 그들로 인하여 그들의 배우자와 가족이 고통하며, 함께 두려워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유학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체험한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며,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함을 듣는다. 지도교수의 질책으로 나의 자존심이 어그러질 때, "내가 너를 지었노라"는 약속을 발견하며, 나의 장점으로 나보다 못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

광야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광야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가가 문제가 아니며, 나의 지도교수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현재 소속해 있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그곳에서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글을 통하여, 유학생으로 21세기의 미국에서 (아니면 그외의 다른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삶의 현실의 광야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을 만나는 삶을 사느냐에 관하여 함께 생각하기를 원한다. "유학"과 "신앙"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유학=신앙"이라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유학의 삶에 대한 건전하고 건강한 성경적인 시각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래서 보다 많은 유학생들이 유학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들의 삶의 방향과 행동의 내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자아상과 identity이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무리 많은 부를 가지고 있어도 그 부를 누릴 주를 모르고 가난한 삶을 살게 된다. 스스로 노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황과 관계없이 노예의 모습을 가지고 그 삶을 살게 된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은 인간을 "이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부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받은 우리들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며, 그분이 우리들에게 부여한 본연의 임무를 담당하며 살아가야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외국땅에 나와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들은 어떤 identity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권리와 책임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인가?

위의 본몬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70년 바벨론으로 "종살이"를 하러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하고 자리잡고, 평생 살 것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살으라고 명하신다. 더 나아가서,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 땅은 무슨 땅인가? 원수의 땅 바벨론이다. 그런데, 그 땅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10절에는 내가 너희를 70년 후에는 다시 귀환시키리라고 약속을 하신다.

이 말씀은 처음 얼핏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다. 첫째, 7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떠날 그 땅에서 왜 정착을 하라는 것인가? 하나님의 70년의 기한은 상징적인 숫자도 아니고, 조건적인 약속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확한 그리고 일방적인 "선한 약속"의 선포이다. 이와 같은 귀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그리고 주인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면, "바벨론에서는 70년이라는 한정적인 시간을 살꺼니까, 그곳에서 대충살아라"라고 충고할 것 같으다. 혹은 "그곳은 너희들이 영원히 살곳이 아니니까 정을 주지 말아라" 하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충격적이다.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다. 그곳에서 터를 잡고 주인으로 살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해서, 이제는 "그땅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단순히 그 땅에서 정착해서 그 나라가 제공하는 편의만을 누릴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를 종으로 부려먹는 그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5년 내지 6년의 유학생활이 지나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계획하고 소원하며 공부를 한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이 어쩌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약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그곳에서 사는 기간이 얼마이던 간에 그곳에서 영원히 살 주인처럼 유학생활을 하기를 요구하신다. 더 나아가서, 내가 공부하고 있는 그 나라, 그 도시, 그 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지 묻고 싶다.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종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노예같은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를 노예처럼 부리는 나의 지도교수의 잘못이 아니라, 나 스스로 "종"으로 아니면 "손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의 생각의 잘못이다. 하나님은 내가 살고 있는 그 땅에서 주인으로 그리고 정복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아무리 우리가 그곳에 거주하는 기간이 짧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곳에서 "복의 근원"으로 영향력을 끼치면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그 나라의 평안과 영적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그것은 어떤 특별한 사명을 받은 소수의 이민자들만이 감당할 부분이 아니라, 그땅을 잠시 지나가는 유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되어지는 부분이다. 물론 두고 온 한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그 땅을 위해서도 기도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땅을 알아야 하고, 그 땅을 사랑해야 하며, 그 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은 그 땅에서 태어나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나의 선택이 나의 identity를 결정하고, 그것이 나의 삶의 모습과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조국을 버리고, 내가 살고 있는 땅만을 사랑하는 매국노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바벨론에 종으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하신다. 당신은 유학생으로 이땅에 오지 않았는가? 당신의 선택으로 이땅에 온 당신은 타의로 끌려온 종의 신세보다 훨씬 낳지 않은가? 만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면,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라. 호주에 있다면, 호주의 영적부흥과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땅을 사랑하게 되고, 바로 그 때, 그 땅의 주인으로 정복자로 삶을 살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주와 도시를 위해서 기도했는가 묻고 싶다. 그곳의 주지사와 상원의원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영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놓고 기도해 보았는가? 내 주변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들을 나의 "이웃"으로 생각하고 기도해 보았는가?

내가 공부하고 있는 학교와 학과를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그 곳의 총장과 학장에게 지헤를 달라고 기도해 보았는가? 학교의 영적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그 학교의 영적인 역사와 현재의 영적인 기상도를 그려보았는가? 그 곳에 와있는 다른 유학생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아니면,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만 받고, 어떻게 하든 최소한으로 일하면서, 스스로 "이곳은 어차피 남의 나라, 남의 학교니까"라고 우리들의 책임을 피하고 있는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그곳의 "손님"으로 나가고 있는가? 많은 유학생들이 자신의 "본교회"는 한국에 있는 아무개 장로교회, 아무개 감리교회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나가고 있는 그 교회가 나의 본교회라고 말하신다.

너무나 많은 유학생들이 손님으로 종으로 유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다. 스스로 정해놓은 시간표와 계획에 따라, 2년후 혹은 5년후 조국에 돌아갈 것을 기정사실화 할 뿐만 아니라, 그 것이 자신의 현재의 삶의 모습을 제한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한국의 경제, 한국의 정치, 한국의 교회들, 한국의 직장들이 그들의 생각과 삶의 대부분을 지배한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유학생활 속에서 주인으로 그리고 정복자로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예측치 못한 풍성한 은혜를 맛보지 못한다.

이와 같은 자세는 유학생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 큰 영향력을 준다. 수많은 유학생들이 엄청난 시간을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소식을 찾아보는데 소비하는 모습을 봤다.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니면 세계의 정치, 경제, 과학, 기술의 동향에 민감하기 보다는 한국의 정치와 교계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례한 소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삶의 모습이 지속되면, 이땅에서 정복자의 삶은 커녕 그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로 퇴보하게 된다. 지난 여름, 미국의 정치, 사회, 과학을 흔든 토론의 주제는 "Stem Cell"연구였다. 많은 미국 교회들도 이 토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를 했다. 우연한 기회에 생명과학과 관련된 분야에 공부를 하고 있는 형제가 있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 놀라운 것은, 그 형제는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올 봄에는 또한 회계학을 공부하고 있는 형제가 Enron 사태의 내막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모르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몹시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또한, 미국에 유학을 온 많은 유학생들의 관심은 절대적으로 한국에 있는 직장에 있다. 97년 처음 Case Western 대학에 교수로 갔을 때 일이다. 이곳에 있는 MBA학생들 중에 한국에 돌아갈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이곳에서의 공부보다는 골프와 교제에 중점을 두고, 한국의 직장에 "길을 잘 닦아놓는 데"에 모든 총력을 기울인 학생들이 있다. 그러던 중, IMF사태가 터지고, 갑자기 한국으로 귀국할 길이 막혔다. 그들 중에 몇 학생이 내가 전공하고 있는 경영정보시스템이 미국에서 취직이 잘 된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내가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었다. 한국 직장에 모든 전력을 기울인 터라, 이곳 학교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취업의 기회를 대부분 놓쳤을 뿐만아니라, 이곳에서의 학업을 게을리해서 언어의 장애로 그들을 고용할 회사는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현실적인 눈으로 보아도 더 우월한 계획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해 보자. 2년 석사과정 내내 한국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느라고 미국의 사회, 경제, 언어, 역사를 전혀 공부하지 못한 후보자와, 미국에 평생 살 것처럼 전력을 다해서 미국을 공부하여 미국의 대기업들이 탐내는 또다른 후보자 사이에서, 과연 어떤 후보자를 한국의 대기업이 선호할 것인가? 그들이 만일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한 후보자를 고용한다면, 그것은 차후에 미국의 기업들과의 관계에서, 자신들 한국 기업을 대표해서 미국회사를 주무를 그런 사람을 선호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땅에서 평생살 것처럼, 주인으로 정복자로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이 세상의 기준으로도 더 매력적인 후보자가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고국에 돌아가서 고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몇가지 제안을 하고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당신의 살고 있는 그 지역에 대하여 알기위하여 노력하라. 그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경제와 사회에 관심을 자지고 그것을 기도제목으로 삼으라. 둘째, 당신이 공부하고 있는 그 나라의 교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라. 만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면, 미국의 대표적인 교계 지도자들과 교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라.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곳을 방문해 보라. 중서부에 있는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음식을 먹고 장을 보기위해 시카고를 방문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 미국의 대표적인 교회인 윌로우크릭 교회이나 무디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린 형제들은 극히 제한된 숫자이다. 셋째,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라. 스포츠를 통해서, 영화와 연극등을 통해서 그 나라의 흐름을 파악하라. 그 문화의 모임에 참여하라. 박물과, 미술관, 음악회에 가보라.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 가서 쇼핑만을 하고 올 것이 아니라, 그곳 브로드웨이에서 펼쳐지는 문화를 살펴보라. 넷째, 그 나라의 대표적인 신문이나 잡지를 구독하라. 뉴욕타임즈, 워싱톤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등과 같은 신문을 구독하라. 타임즈, 뉴스위크, 비즈니스 위크, 혹은 Fortune 같은 시사지를 읽어보라. 최소한 한국의 인터넷 신문을 보는 대신, 그들 신문들의 인터넷을 읽어보라. 그리고 그들의 시각과 그리고 그들의 탁월한 영어문장력을 익히라. 미국 보수와 자유주의의 논쟁속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라. 다섯째,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라. 그것을 위해서 투자하라. 고급언어를 배우라. 그러기 위해서 정치 토론 프로그램을 시청하라. 학자들의 토론의 자리에 참여하여 그들의 영어를 익히라. (영어 청취력을 늘리는 방법을 한가지 소개한다. 많은 유학생들이 야구, 농구, 미식축구를 볼 때, TV소리를 줄이고 그림만 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것을 거꾸로 하라. 스포츠 중계를 라디오로 들으면서, 머리속에 공이 어디 있는지를 그리도록 노력하라.) 마지막으로, 그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 정치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 도시를 위해서 기도하라.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안건을 놓고 기도하라. 학교를 놓고 기도하라. 그 학교가 나의 모교라는 마음이 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C.S. Lewis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시간속에서 두가지 초점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첫째는 영원이요 둘째는 현재이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현재 (Now)만이 영원히 존재한다. 유한한 우리들이 그 영원을 맛볼 수 있는 창문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현재이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들에게 두려움을 가져온다. 미래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현재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충성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미래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서 고민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영원의 소망가운데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원하신다 (잠 9:7-10).

유학생으로 살고 있는 당신에게 현재는 "유학생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은 한국이 아니고 그곳, 당신이 유학하고 있는 그 나라, 그 도시, 그 학교, 그리고 그 교회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당신이 정복자로, 주인으로, 그리고 복의 근원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코스탄의 소리

아가페의 정신으로

영적 성숙이란 무엇일까. 가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는 영적 성숙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우리는 각자의 체질과 성격이 다르고, 또 하나님이 주신 저마다의 재능과 다양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저마다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time)과 방법(mode)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성숙에 이르는 과정에는 어떤 단일한 기준이 있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낙심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쉽게 속단하는 실수를 범하는 우리 스스로를 보게 된다. (특히 나는 이런 실수를 범하는 내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이러한 실수를 가장 많이 저지른 사람의 하나다. 그는 행동주의자요, 모든 일에 자신을 던지는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경의 구석 구석에서 전하는 베드로의 성격과 행동은 그가 누구보다 자신의 열심을 통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자 했던 제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의 거침없는 열정, 대담하리만큼 솔직한 허풍과 폭풍 같은 성미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셨다. 그러했던 베드로가 베드로후서에서 전하는 영적 성숙에 대한 내용은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각자의 개성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행동을 통해 영적 성숙의 길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베드로는 이미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버린 제자가 되어 있다. 아니,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제자가 되어 있다.

첫째, 베드로는 영적 성숙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의 약속으로 시작한다고 고백한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후 1:4). 원어로 살펴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됨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별되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는 소중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형제요 자매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 영적 성장의 기초요, 교회의 내용이다.

둘째, 베드로는 믿는다는 신앙의 기초 위에 두 가지를 더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 두 가지란 도덕적인 탁월성(moral excellence)과 지식(knowledge)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베후 1:5). 우리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 15세기, 16세기에 흑사병과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납득하기 힘든 체벌과 강요를 일삼던 부패한 로마교회에 저항하며 일어난 종교개혁의 주인공들이 죽음 앞에서 외쳤던 표현으로 우리에게 잘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큼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결단의 내용이지, 오로지 믿음(faith)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사회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잘못된 행위까지도 정당화 시켜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믿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고개가 숙여지는 도덕적인 참됨과 사려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이러한 두 가지가 함께 하는 믿음은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후 1:2).

보통 우리는 지식을 하나의 장식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즉, 지식은 곧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이거나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여 지식 없는 사람을 차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지식이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선물을 우리가 잘 관리할 때 나타나는 부지런함의 결과다. 원어로 보면 "에피그노시아"라는 말은 단순히 안다는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정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말한다. 즉, 인식하고 확인하여 깊이 있게 마음속에 각인된 내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덕이라는 말은 원어로는 "아레테," 즉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행동의 결과를 의미한다. 따라서, 믿음에 "덕"과 "지식"을 더한다는 말은 단순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믿음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의 모습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믿음 없는 세상을 향해 무례하지 않다. 그리고 공격적일 이유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솔로몬의 충고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언 11:10).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과 대립되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감싸는 덕목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 knowledge of God)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

세째, 베드로는 여기에 절제, 인내와 경건을 요구한다. 절제는 곧 우리의 욕망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이런 절제는 현대사회를 끝없는 경쟁이나 비극적인 다툼으로 보는 이른바 Agonistic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절제란 하나님이 주신 이성(reason)으로 다스릴 수 없어 보이는 자신의 순간적인 욕심들(eros)을 하나씩 억제한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약함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 이러한 한탄 속에 하나님을 통해 용기를 얻고, 이 용기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용기는 절제와 인내를 함께 가져오고, 이러한 용기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구태여 처세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경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얻어지는 실제적인 결과는 "유세베이아," 즉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경건함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관대할 수 있는 마지막 끈이 나와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한없이 부끄러운 우리 스스로라면, 경건은 이러한 믿음을 가진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스러운 덕목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이러한 내용이 오랜 시간동안 행동으로 나타난 자기수련의 결과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7)고 권고하고 있다. 우애란 "필라델피아," 즉 형제에 대한 믿음과 기다림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자신의 것이 항상 옳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역사에 몇 안 되는 선견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서로가 필요하고 또 그러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귀 기울이면서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가장 기독교적인 덕목인 사랑, 즉 "아가페"가 필요하다. 아가페가 보여주는 덕목의 가장 큰 내용은 자신의 행위의 보상이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을 통해 보상이 없는 일에 조용히 자신의 방식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경쟁적일 이유가 전혀 없다. (Agape requires virtue without return, save in the eyes of God. Arete is an agonistic virtue, in that those who possess it must outdo others in the eyes of the world.)

결국, 이 마지막 한 마디 속에 베드로의 참회가 들어있다. 예수님과 요한복음에서 서로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베드로는 Agape라고 말하지 못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한21:17). 이러한 참회의 내용이 곧 그의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소금과 빛인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영적 성숙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은 바로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 속에 들어있다. 참된 믿음은 때로는 강하게 저항하는 용기도 필요하고, 또 때로는 감싸주는 사랑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의 대립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있지만은 않는지, 우리의 영적 성숙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을 세상과 비극적이고 Agonistic한 대립의 연속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곳곳의 부패와 납득하기 힘든 내용들이 매일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현재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는 길을 전하는 기독교적 실천덕목들은 무엇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는지를 Agape의 내용으로, 그리고 훈훈한 공기로 전할 수 있는 용기가 더없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영도자, 지도자, 가르치는 교사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시대에 살고있다. 즉, 상대방이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상호관계의 끈 속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눔은 상대방이 우리 스스로에게서 참된 기쁨과 여유를 맛 볼 때, 자발적으로 따라가고 싶다는 소망을 가질 때에 비로소 내가 가진 무엇인가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나눔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없이 우리의 생각을 전할 때에는 결국 Agonistic한 관계에서 나오는 종교적 갈등과 상호 반목의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17세기에 관용(tolerance)의 정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먼저 제시한 덕목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말할 수 없을 때, 반목과 질시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 제시한 성서적인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 덕목은 자기부정(self-negation)과 상대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에 대한 존중(respect)을 내용으로 하는 Agape의 정신이었다. 이런 사랑의 정신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상호관계에서 가져야 할 덕목일 것이다. 부패한 도시의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칼빈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육체가 나의 영혼을 통해 순화되고 훈련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바울을 따라다니며 적은 기록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전했던 누가도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아가페의 정신이 가장 필요한 때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런 용기를 일컬어 영적 성숙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생각한다.

곽준혁
고려대학교를 나왔고, 2002년 여름 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정치철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현재 동대학에서 박사후과정에 있다. 아내가 University of Illinois에 박사과정에 있는 이유로, Urbana-Champaign에 있는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 출석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2/09/01 22:08 유학생 사역

유학생 사역 리포트

시카고의 F2 기도모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18:20)'

내가 대학부에 다니고 청년부에 다닐 땐 '모임'이란 것은 너무도 당연히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모임의 종류도 다양하고 모여야 할 팀도 많았다. 교회 안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이 모임 저 모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모임들 모두 서로에게 가르침과 도전과 격려를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내가 그런 모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교회라는 배경(Background) 혹은 울타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모임과 함께 한 사람들을 떠나서 온 이 곳은 상황이 달랐다. 물론 이 곳도 이민교회가 있고 나이에 따른 선교회도 있으며, 나 자신이 꿈꾸던 머릿속의 큐티모임도 항상 존재해 왔었다. 하지만 이민교회의 선교회는 친교도 공부도 충분히 할 수 없는 실정이었고, 내 머릿속 큐티모임은 현실로 승화되기 참 힘들었다. 그랬지만 마침내 동네 유학생 아내들과 함께 한 기도모임을 시작하여 1년 간 지낸 이야기와 그 모임의 결과로 얻어진 많은 것들을 써보려고 한다.

한 유학생과의 결혼으로 시카고에 오기로 결정한 후 난 결혼에 대한 기대와는 또 다른 어떤 감격으로 벅찼었다. 마치 선교사라도 된 양 시카고를 위해 기도하는 한 자매와 함께 시카고를 향한 중보기도를 하며 시카고를 마음에 품었다. 또한, 남편될 형제가 중보를 부탁한 한 비기독교인 부부를 위해서도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기도하였다.

시카고에 와 보니 내 주변의 이웃은 유학생 배우자(아내)들이었다. 처음 하는 살림을 익히느라 남편이 학교에 간 후 에는 느릿느릿 집안 일을 하고 도시락 싸서 남편이랑 함께 식사하고 돌아온 오후 시간이면 나 자신도 누군가 만나서 티타임(tea time)을 갖고 싶었고, 이웃에서도 전화가 오곤 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대상이다!" 무턱대고 생각하며 좀 친해진 사람들에겐 성경공부를 같이 하겠느냐, 예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다...하며 무조건 말해 보았다. 결과는 나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오기전 기도한 대상이든 친하게 된 자매이든 별로 관심 없었다. 섬김에 앞서 말로 전도를 해보고자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나 자신이 영향력 있는 훌륭한 전도자가 되기 위해선 노력해야 할 부분이 무척 많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한참 멀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도, 일대일이든 성경공부 모임이든 모임을 만들고 싶었던 소망은 가시지 않았다.

이 곳은 예수님 이름으로 모이는 어떤 모임이든 필요한 곳이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유학생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교회가 친교의 중심이 되는 여느 캠퍼스도시(Campus town)과는 달리 이곳, 특히 우리 아파트의 한인 유학생들은 정말 교회와 상관이 없었다. 또한 모두가 알듯이 유학생의 아내들은 낮에 만나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다. 특별한 직업이나 일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육아를 하는 때이기 때문에 서로 도움을 주는 티타임은 좋은 것이다. 다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사람의 얘기가 주제가 없을 땐 한도 끝도 없이 바람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시카고에 온 지 반년쯤 지났을까, 이 곳으로 이사온 한 유학생 배우자가 기독교인임을 알고 정말 반가웠다. 통할 것 같았고, 신앙 안에서의 얘기 상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잔뜩 기대가 되었다. 잘 알게 되고 친하게 되면서 왠지 일대일 제자 양육으로 만나면 좋을 것 같아 기도도 하고 프로포즈도 해 보았다. 역시 별로 내켜 하지 않아서 할 수 없었지만 그 친구를 만난 지 6개월만에 그 친구에 대한 내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그 친구와 일대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 친구를 위해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할 때마다 나 자신의 부족함과 나 먼저 해결하지 못한 유학생 배우자로서의 이 곳 생활의 어려움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게으름으로 힘들었다. 일대일을 하면서 양의 인생이 말씀으로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양은 자신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 보려다 넘어지는 일을 반복했고, 많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력함을 보며 좌절과 기도를 함께 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반가운 일이 생겼다. 2001년 코스타의 어느 저녁 집회 때 집회 장소에서 같은 동에 사는 한 부부를 만나 우리 이웃에 코스타 집회에 나오는 가정이 있었구나 하며 반가웠는데 며칠 후 그 아내되는 언니가 나를 만나서 아파트 내 기도모임을 함께 만들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 언니도 어떤 모임이든 모임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나를 코스타에서 만난 후 동역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음을 생각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 내 양과 시카고 오기 전부터 기도했던 자매에 관해 얘기했고, 그 두 사람에게 프로포즈했을 때 둘 다 모임에 나오기로 해서 고대했던 한 모임, 기도모임이 시작되었다.

모임은 무겁지 않게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우선 구도자(seeker)들인 자매들은 사람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생각이나 고민을 나눌 수도 있고 이것을 말씀에 조명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맛보게 된 것 같다. 자매들은 먼저 이야기의 주제를 교회에 두었다. 교회를 믿음의 출발이라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있었기에 교회에 가는 것, 남편을 교회에 데려가고 적응시키는 것 등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였다.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 우리는 매주 3장씩 말씀을 읽어 와서 모임 때 토론을 하기로 하였다. 구도자들은 말씀 읽기를 거의 처음 해보거나 읽었어도 전혀 뜻을 생각하지 않아 왔던 터라, 말씀을 읽은 후 나오는 질문도 많았고, 차츰 이해해 가면서 말씀이 우리 삶과 결코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면서 함께 감동 받는 시간들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지며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또한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에 대해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서로가 해 주는 기도 가운데 힘을 얻었고, 응답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맛보며 함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모임을 마친 후 가진 식사교제는 우리 관계를 더 묶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섬김의 실천이었고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겨울에는 우리를 위해 자원하여 영어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신 어떤 한인 1.5세 자매분을 통해 영어 성경공부도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의 결과로 나의 시카고 오기 전부터의 기도 대상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그의 남편 또한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또한 늦게 우리 모임에 참여한, 서울에선 남편은 다니지 않았지만 혼자서 시댁의 종교인 기독교를 따르고자 교회에 다녔던 한 자매님은 남편이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남편이 교회에 잘 적응하고 교회성경공부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었다. 이외에, 말씀에 재미를 붙인 일과 말씀을 깊이 이해하려 한 노력은 말씀이 결코 경전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연관이 있고 가까운 분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해주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 교회에 나가기 위해 한 발짝 씩 내딛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격려해주고 힘이 되어주는 모임이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었다. 모임을 가지고 싶어했고, 어떻게든 예수 믿는 삶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던, 하지만 너무나 부족했던 나에겐 정말 소중한 경험이다. 사람을 섬기기 위해선 아주 많이 겸손해져야하며 많은 나의 시간과 힘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짐하게 된 것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것들로 어디든 내가 다른 곳으로 갔을 땐 더 성숙하게 이웃사역을 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우리 모임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위로하신 하나님, 한 명 한 명 관심 가지시고 보살피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당신의 손길을 따뜻이 보여주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한다.

강정현
단국대 작곡과 졸.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에서 화학(Chemistry)으로 박사과정 중인 남편과의 결혼으로 도미. 현재 McCormick Teological Seminary에서 MATS 과정 중에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고독의 세상 읽기

외모 지상주의 (Lookism)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

1.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나 7, 8월은 교회의 여름행사들로 정신이 없는 것 같다. 군대가려고 온 모국에서도 하나님의 그 어떤 섭리가 있으셨는지 계획했던 군 입대는 연기되고, 현재 나는 모(母)교회의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인해 지난 7, 8월은 여러 수련회들로 정신이 없었다. 특히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갖게 된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는 정말이지 신경이 많이 쓰였다. 모든 사역이 그렇겠지만, 아이들과의 친밀감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중·고등부 사역이 아닌가? 그래서 이번 중·고등부 수련회는 나에게 학생들의 신앙수련 못지 않게 아이들과 잘 놀아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닌 수련회였다.

수련회 기간 중,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과의 거리감을 서서히 좁혀 가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등부 안에 끼리끼리 뭉치는 소그룹들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다른 아이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들은 자연스레 나의 주 목표대상이 되었다. 쫄래쫄래 중2 여자아이들을 따라 다니며, 이런 저런 추파(?)를 던지기도 하며 접근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이들의 멋쩍어 하는 분위기에 나는 차일피일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과 나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좋은 이야기 거리를 찾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외모'였다.

중2 여자아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영주라는 아이는 자칭 '폭탄파'라고 불리는 중2 조직의 보스(?)다. 별명이 '핵폭탄'인 영주의 왼팔과 오른팔은 '다이너마이트'와 '지뢰'라 불리는 혜수와 정원이. 그리고 이 세 아이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중2 여자아이들은 쉽게 말해 이 '폭탄파'의 조직원들인 셈이다. 여하튼 이러한 중2 아이들의 재미있는(?) 조직 분위기를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던 나는, 아이들과 일단 친해지고 봐야겠다는 간절한 소명의식 속에, 결국 이렇게 접근하게 되었다.

"야 내가 이 폭탄파 고문을 맡으면 안 되겠냐?" ^^;

충격스럽게도 아이들은 그 흔한 오디션이나 인터뷰도 생략한 채 너무나 당연한 듯이 나의 고문직을 수락해 주었다. 뭐, 나이에 안 어울리는 나의 여드름과 촘촘하지 못한 머리카락 분위기를 볼 때, 고문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나? 여하튼 고문이 된 기념(?)으로 나는 7명의 자칭 폭탄파 멤버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나중에 돈 생기면 성형수술하고 싶은 사람?"

"저요~~~!"
"저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들 손을 들었다.

"야 이유가 뭐냐?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 다 이뻐 보이는데..." ^^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다양한 제스처 - 멀쩡한 머릿결을 한번 쓰다듬거나, 예쁜 표정을 지으며 -와 함께 모두 공주가 되었다.

"저도 알아요~"
"당연하죠~"
"전도사님이 사람 볼 줄 아시네요. 제가 한 미모 하죠!" ^^;

그리고 나서 몇몇 아이들은 14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답변들을 늘어놓았다.

"전도사님이 뭘 모르시네.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여자는 얼굴이 예뻐야 능력이 있는 거예요~"
"나중에 취직할 때도 미모가 돼야 취직이 된다니까요~"
"일단 수술을 해서라도 이쁜게 중요해요"

글쎄... 그날 아이들과의 즐거운 대화를 마친 후, 아이들과 손쉽게 친해졌다는 성취감 뒤에 왠지 모를 허(?)한 기분과 찜찜함이 느껴진 것은 왜일까? 과연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나도 얼굴 예쁜 여자를 보면 솔직히 눈길이 가고 보기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형수술까지 해야되나? 과연 14살의 어린 중학생들이 벌써부터 이렇게 난리를 칠 정도로 '외모'란 대단한 것인가?

2.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

광고대행사 제일기획은 지난 8월 11일, 13-40세의 우리나라 여성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전화면접 결과를 언론에 공개했다.

간단하게 조사결과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 사회의 13-43세 여성 68%가 외모가 인생의 성패에 크게 영향을 끼치며, 78%는 외모 가꾸기가 멋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외모 가꾸기에 하루 평균 53분을 투자하며, 거울은 평균 8.3회를 본다고 한다.

조사자 중 69%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외출하면 타인이 더 친절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으며, 56%는 또래의 여성을 보면 외모부터 비교하게 된다고 답해 외모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정서에 반하는 이러한 시티은행의 대출정책은 학력, 학벌 중심적인 한국사회의 병폐를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 함으로써 오히려 잘못된 흐름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란이, 네티즌 사이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이번 대출 관련기사(하나리포터)에 실린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연령층별로는 13-18세의 경우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외모에 신경을 쓰며 용모보다는 운동화, 가방, 장신구 등에 치중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19-24세는 다른 세대에 비해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추구하며 정체성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25-34세의 여성들은 외모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겨 헬스, 피부관리, 성형수술, 다이어트 등을 통한 외모 관리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35-43세의 중년여성들은 외모를 부의 상징,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제일기획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외모에 대한 높은 관심이 미국사회의 '루키즘'(Lookism:외모 지상주의)을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연합뉴스 8월 11일자 기사 )

고독의 세상 바라보기

먼저 '외모 지상주의'(lookism)에 대한 나의 넋두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나는 외모가 갖는 개인적 가치와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심지어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특정한 이해관계에 의해 자본을 창출하는 것까지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넉넉함(?)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외모 지상주의다. 마치 외모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대적인 가치기준인 것처럼 은근히 우리 안에 권력화 - 성공과 차별의 수단으로 - 되고 보편화되는 작금의 현실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으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다.

외모가 출중한 남녀를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 설레고, 또 그들의 그 아름다움에 '멋있다' '야~ 예쁘다!' 라고 평하는 그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리고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가꾸려고 노력하듯, 나름대로 자신의 외모를 멋있게 가꾸고 챙기는 일 또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외모 지상주의는 하나님이 아닌 외모를 우상화하고 숭배하며, 또한 획일화된 외모로 하나님이 창조한 다양한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평가하고 차별하는 사회현상이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 아닌가? 성형수술을 패키지(package)로 하거나, 친구들을 3명 이상 소개해서 데려오면 수술비를 싸게 해 주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외모가 안 따라온다고 직장면접에서 노골적인 거부를 당했다는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것도 외모와 전혀 상관이 없는 영어학원 면접에서 말이다) 요즘에는 외모를 비관해서 자살하는 경우는 뉴스거리도 안 된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한 방송작가 선생님을 통해 들은 적도 있다.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어쩌면 더 가슴아픈 일은 바로 이러한 사회, 문화적 흐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염된 사람들이, 결국에는 자신 스스로와 남들까지도 이런 기준에 의해 평가하며, 차별하게 되는 현실이다.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더 당당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부족하다고 믿게 하는 것. 내면의 아름다움과 그 깊이를 알고자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자신의 눈에 비춰지는 상대방의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눈에 불똥을 튀기며 '외모의 우상'을 쫓아다니는 남자, 여자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병폐가 아닐까? 나는 바로 이러한 사회현상에 관해서,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민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둘째, 현대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는 결코 여성이라는 어느 한 특정한 성이나, 아니면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위에 소개된 '세상 돌아가기'의 이야기들이 다 여성들을 그 주체로 삼고 있고, 또 일반적으로 외모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주된 관심거리라는 편견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결국 외모 지상주의라는 것은 '보아주는 사람'들과 '보여주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어떤 한 남성의 외모에 같은 남성이나 여성이 호감이나 반감을 표하고, 또 반대로 어떤 한 여성의 외모에 동성이나 이성이 반응을 보이면서, 평가되고 가치화하는 것이 바로 외모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외모라는 것에 별다른 관심과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내가 주변사람들의 외모를 평상시 어떤 자세와 관점으로 보는지, 또 스스로의 외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present)데 있어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지가 모여져서 현시대의 '외모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모 지상주의는 단순히 여성들이라는 특정한 성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외모에 아주 관심이 많다고 여기는 소수 사람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외모에 대한 획일화된 반응과 평가 속에서 형성된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손쉽게 한국의 길거리에서 엿볼 수 있다. 아리따운 용모와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성들이 지나갈 때 이들을 뚫어지게(사람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쳐다보는 것이 단순히 우리네 중년 아저씨들과 젊은 청년들뿐이던가? 여성들도 남성들 못지 않게 지나가는 미모의 여성들을 쳐다보며 그들의 화장법, 옷차림 등을 살펴본다. 한마디로 '보아주고', '보여주는' 역할에 있어 성별이나 사람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아주는' 쪽과 '보여주는' 쪽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바로 외모 지상주의이다. 그러므로 성별이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외모 지상주의의 문제나 책임을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자세이다. 게다가 이제는 여성들 못지 않게 적지 않은 수의 남성들이 자신들의 외모를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지 않는가?

마지막 셋째, 다른 많은 사회, 문화적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외모 지상주의 또한 우리가 속한 지역, 사회, 문화권에 따라 각각 다른 경향과 입장을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외모 지상주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면서도, 더불어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경계하는 사회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한국의 외모 지상주의는 이에 비해 '상호비교'에 의한 차별적 양상을 지나치게 띠고 있는 것 같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보여주기 위한 '과시적 경향'과 이를 통한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들로 인해 외모에 대한 관점이 미국보다 더 공개적(or 노골적)이고, 또 차별의 기준으로 오용되기가 쉬운 사회구조라 보여진다.

필자는 유학생활 중에서도 방학을 맞아 한국만 방문하면 외모와 관련된 수많은 평가를 들어야 했다. '살이 많이 빠졌다', '피부가 안 좋아졌다'는 등의 평을 들으면서 확실히 한국과 미국사회가 외모에 대해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매 해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동료 유학생들의 옷차림과 외모를 통해서도 이러한 인식의 차이(difference)를 확인하게 된다. 학기 중에는 간편한 옷차림에 헤어스타일이고 뭐고 외모에 별 관심 없이 공부에 찌들려(?) 살아가던 사람들이, 새 학기를 맞아 오랜만에 학교에서 보게 되면 왜 이리 다른 사람들로 변신해서 나타나는지... 이는 아마도 미국사회의 실제적(practical) 생활관의 영향으로 외모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공개적이고 상호 비교적인 외모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돌아온 탓이리라. 하긴 때때로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매들이 '왜 이리 한국 여자 애들은 날씬한지 모르겠다'라고 투덜(?)대던 대학 때의 기억을 되새겨 보아도 한국에 있는 동안 그들이 받았을 '상호비교'의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

아무튼 이러한 지정학적, 세계관적 차이로 인해 이번 '고독의 세상 읽기'는 미국사회보다는 한국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주 논의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행여나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사는 미국동네는 안 그런데 하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어차피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고·독·의 '세상 읽기'가 아니던가? ^^;

자, 그럼 이 정도로 '세상 바라보기'는 이만 필하고, 그리스도인 고독의 '세상 읽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찬양을 이야기 하자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기도함에 들어온 어느 무명의 투서(!)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 전임 사역지로 부르심을 받아서 사역을 하게 된 교회는 이제 25년의 역사를 넘긴 매우 전통적인 장로교회이다. 그동안 젊은이 사역을 나름대로 하면서 '젊은 세대에 호흡을 맞추는 사역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던 나에게는 때로는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다. 교회에 부임한 첫번째 주일에 만났던 어느 권사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찬양사역' 담당 전도사라고 소개를 드리며 인사하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나는 도대체가 박수 치면서 찬양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불만을 털어놓으신다. '어디 하나님 앞에서 경건치 못하게 어린애들처럼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던 그 권사님은 조용한 중에 경건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시는 전형적인 분이시다. 지금도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그 삶 속에 녹아 있는 경건함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분들을 첫주부터 곳곳에서 만났던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으로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장년들을 위한 수요예배를 인도할 때는 혼자 조용히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 두곡을 메들리로 인도한다. 그리고 주일같은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인 '열린 예배'를 인도할 때면 찬양팀과 함께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한다. 하루에 남반구와 북반구를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잘 알고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중보기도함을 관리하는 그분은 기도함에 기도제목이 아닌 일종의 편지가 들어왔다며 내게 슬며시 내용을 알려 주셨다. 그 편지의 내용은 '수요예배를 인도하는 젊은이(!)가 찬송 부르는 중간에 가사를 불러주고 하는 것 때문에 예배 때마다 온 가족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집사님은 "저는 너무 좋은데..."라는 말을 나 들으라고 빼놓지 않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고 가신다. 그리고 애써서 전화통화를 나누는 나는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내 전화를 끊게 된다. '의사소통의 창구가 얼마나 없으면 기도함을 통해서 표현을 하시나'하는 당혹감과 서운함 때문에 그분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나 자신을 본다.

장래희망이 찬양 인도자?

찬양인도자/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용어이긴 한지 나는 질문해 본다. 찬양인도자 때문에 시험이 드는 분들에 의하면 찬양인도자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회중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잠잠히 하나님을 향해서 뜨겁게 찬양만 부르는 사람인가? '아예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서서 찬양을 할까?'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나는 '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고민이 많은 편이다.

Godpeople.com이나 hosanna.net 같은 기독교 포탈 사이트에 가보면 찬양을 좋아하고 예배를 좋아하는(?!) 10대 이상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네티즌들은 CCM 사역자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CCM 앨범이 나오는 족족 앨범에 대한 평가(주로 한 줄을 넘지 않는)나 얼른 사라는 등의 판촉을 하며, 주중에 있는 각종 찬양집회를 꼬박 꼬박 챙겨 다니며, 경배와 찬양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예배인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라고 목소리 높여서 말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느 선교단 찬양모임의 리더를 위한 팬클럽도 있고 '오늘은 집회에 가서 그분이 쓰시던 기타 피크를 받았는데 너무나 행복하다. 가보로 물려서 써야겠다'는 글도 올려져 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웹서핑을 멈추곤 한다. 예배인도자들이 연예인처럼 되는 현실이 무섭다. 예배인도자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Worship Servant vs. Worship Leader?

요즈음 아주 각광을 받고 있는 찬양집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물소리.org'라고 하는 찬양집이다. 지난 92년에 처음으로 '많은 물소리 1.0'이라는 찬양집으로 시작하여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이 찬양집의 산파역할을 했던 사람은 황병구라는 분이다.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황병구PD로 자주 불리운다. 부흥한국의 부흥콘서트나 선교한국 등의 굵직한 집회들을 기획하는 일을 맡았던 재주꾼이다. 황병구PD는 '많은 물소리.org'를 발간하면서 책 서문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찬양문화에 대한 걱정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신부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인의 언어로 번역하여 배포하고, 성가대에 독점되어 있던 찬양을 회중에게 되돌려주었던 것처럼, 이제 교회의 회중이 늘상 누군가에게 찬양을 인도 당하지 않고 찬양의 주체로 당당히 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에서입니다. 소수의 영적 자본가들에게 거듭 축적되어 부패될 수밖에 없었던 영적 자산을 교회 저변의 영적 민중에게 되돌려 생명을 불어넣었던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독점적인 예배인도자들에 대한 그의 걱정은 예배인도자(Worship Leader)라는 표현보다 예배섬김이(Worship Servant)라는 용어로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찬양문화의 '3P운동'이 조용히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 3P운동이란, "Personal Praise Perspective"의 약자이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개인의 삶 속에서 "찬양가사를 말씀에 비추어 묵상하고, 현실과 상황 속에서 조명하고 그 찬양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해 내는" 경배와 찬양운동의 조용한 개인화 운동이다. 전문가집단이나 매니아그룹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찬양문화를 넘어서서 이제는 음악적인 소양이 좀 없어도 하나님과 풍성한 영적인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 있는 찬양을 드리고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이다.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해 깊이 동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자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질문을 지우지 못한다. "찬양/예배 인도자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말씀 사역자는 1등, 찬양 사역자는 2등?

스스로가 찬양을 인도하면서 좀 튀는 편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황병구PD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사역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나의 부족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강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이렇게 질문해 본다. "그럼 목사는 왜 설교하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냥 잠잠하게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개역한글, 영어성경 등의 모든 버전으로) 그 말씀을 봉독한 후에 성도들이 스스로 주어진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지 뭐하러 애써서 그 어려운 말씀을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적용까지 갖다 붙이며 필요한 예화들도 양념처럼 곁들여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혼자 독점하는가? 너무 억지 주장인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중에게 선포되는 예배의 요소이고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요소이기 때문에 기준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런데 말씀 사역은 설교자 한사람이 좀 튀어도 되지만 찬양사역은 인도자가 절대로 튀면 안 되는 일인가? 그리고 왜 목사만 설교하는가? 평신도는 왜 설교하지 못하나? 나는 물론 만인사제설의 원리에 따라 은사를 받고 준비된 평신도 설교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목사들보다 훨씬 더 설교를 잘하는 평신도들을 나는 너무나 많이 만났다. 때문에 목사가 되려고 준비 중인 한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반면에 찬양 인도자에 대해서는 좀 다른 잣대로 이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귀한 사역이기 때문에 설교사역은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해석하는 방법을 훈련받고 준비된 사역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만 찬양사역에 대해서는 기타 좀 잘 치고 음악 잘하는 평신도가 하면 그래도 아쉬운 대로 된다는 생각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 때문에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즉석 멘트'로 예배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자기 간증 내지는 수다로 오히려 회중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문턱을 가로막고 있는 찬양인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을 짤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시험에 들고 고민한다. 그가 준비되고 훈련된 좋은 예배인도자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은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찬양인도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열악한 방식으로 그저 그들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각자 알아서 사역에 대한 원리를 체득하도록 방임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겸손한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찬양/예배 인도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셨는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찬양/예배 인도자들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게 다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성경의 역대상에 나타나는 말씀 등을 통하여 발견한다. 수천 명의 찬양대원들이 하나같이 성전에서 전임(Full-time)직원으로 채용되어 다른 일은 안 하면서 밥만 먹고 찬양준비하고 예배 때는 찬양인도자로 나섰던 일들은 요즘 교회의 현실에 빗대어 볼 때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말씀은 중요하고 찬양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으셨다.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에 힘써야 할 우리는 왜 준비되고 훈련된 찬양인도자가 훈련되도록 기도하고 지원하지 않는가. 연예인 비슷한 인기 있는 찬양 인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도전을 주고 겸손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채찍질하지 않는가 말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처럼 찬양/예배인도자들 역시 그들의 목소리와 평생에 갈고 닦은 음악적인 소양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써 올려지는 동시에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에게 주님의 임재하심을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예배인도자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은혜가 안된다'라든지 '그냥 아무도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고 드리는 찬양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한 생각을 똑같이 말씀사역에도 적용해 보았느냐고. 설교자들도 자기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도록 Voice Scrambler를 사용해서 말해야 하며 병풍 뒤에 숨어서 설교해야 한다면 그 억지 때문에 좀 우습지 않은가. 설교자 개인의 화술 능력과 말솜씨와 목소리와 모든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찬양 인도자들의 목소리와 모습과 삶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찬양인도자들은 자신이 예배인도자의 역할을 마치고 나면 주저하지 말고 무대 아래로 내려 와야 한다. 예배를 인도하는 순간 외에는 이들 역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하나님 자녀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이건 기도순서를 맡은 장로님이건 자기 순서가 되었을 때에 강단 위로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거나 기도를 인도하고 다시 내려오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우리의 예배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죄 많고 부족한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아픔 많은 목자들일 뿐이지 않은가. 겸손하게 사역하자, 우리 죄인들이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찬양을 이야기 하자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기도함에 들어온 어느 무명의 투서(!)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 전임 사역지로 부르심을 받아서 사역을 하게 된 교회는 이제 25년의 역사를 넘긴 매우 전통적인 장로교회이다. 그동안 젊은이 사역을 나름대로 하면서 '젊은 세대에 호흡을 맞추는 사역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던 나에게는 때로는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다. 교회에 부임한 첫번째 주일에 만났던 어느 권사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찬양사역' 담당 전도사라고 소개를 드리며 인사하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나는 도대체가 박수 치면서 찬양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불만을 털어놓으신다. '어디 하나님 앞에서 경건치 못하게 어린애들처럼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던 그 권사님은 조용한 중에 경건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시는 전형적인 분이시다. 지금도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그 삶 속에 녹아 있는 경건함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분들을 첫주부터 곳곳에서 만났던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으로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장년들을 위한 수요예배를 인도할 때는 혼자 조용히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 두곡을 메들리로 인도한다. 그리고 주일같은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인 '열린 예배'를 인도할 때면 찬양팀과 함께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한다. 하루에 남반구와 북반구를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잘 알고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중보기도함을 관리하는 그분은 기도함에 기도제목이 아닌 일종의 편지가 들어왔다며 내게 슬며시 내용을 알려 주셨다. 그 편지의 내용은 '수요예배를 인도하는 젊은이(!)가 찬송 부르는 중간에 가사를 불러주고 하는 것 때문에 예배 때마다 온 가족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집사님은 "저는 너무 좋은데..."라는 말을 나 들으라고 빼놓지 않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고 가신다. 그리고 애써서 전화통화를 나누는 나는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내 전화를 끊게 된다. '의사소통의 창구가 얼마나 없으면 기도함을 통해서 표현을 하시나'하는 당혹감과 서운함 때문에 그분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나 자신을 본다.

장래희망이 찬양 인도자?

찬양인도자/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용어이긴 한지 나는 질문해 본다. 찬양인도자 때문에 시험이 드는 분들에 의하면 찬양인도자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회중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잠잠히 하나님을 향해서 뜨겁게 찬양만 부르는 사람인가? '아예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서서 찬양을 할까?'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나는 '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고민이 많은 편이다.

Godpeople.com이나 hosanna.net 같은 기독교 포탈 사이트에 가보면 찬양을 좋아하고 예배를 좋아하는(?!) 10대 이상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네티즌들은 CCM 사역자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CCM 앨범이 나오는 족족 앨범에 대한 평가(주로 한 줄을 넘지 않는)나 얼른 사라는 등의 판촉을 하며, 주중에 있는 각종 찬양집회를 꼬박 꼬박 챙겨 다니며, 경배와 찬양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예배인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라고 목소리 높여서 말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느 선교단 찬양모임의 리더를 위한 팬클럽도 있고 '오늘은 집회에 가서 그분이 쓰시던 기타 피크를 받았는데 너무나 행복하다. 가보로 물려서 써야겠다'는 글도 올려져 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웹서핑을 멈추곤 한다. 예배인도자들이 연예인처럼 되는 현실이 무섭다. 예배인도자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Worship Servant vs. Worship Leader?

요즈음 아주 각광을 받고 있는 찬양집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물소리.org'라고 하는 찬양집이다. 지난 92년에 처음으로 '많은 물소리 1.0'이라는 찬양집으로 시작하여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이 찬양집의 산파역할을 했던 사람은 황병구라는 분이다.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황병구PD로 자주 불리운다. 부흥한국의 부흥콘서트나 선교한국 등의 굵직한 집회들을 기획하는 일을 맡았던 재주꾼이다. 황병구PD는 '많은 물소리.org'를 발간하면서 책 서문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찬양문화에 대한 걱정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신부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인의 언어로 번역하여 배포하고, 성가대에 독점되어 있던 찬양을 회중에게 되돌려주었던 것처럼, 이제 교회의 회중이 늘상 누군가에게 찬양을 인도 당하지 않고 찬양의 주체로 당당히 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에서입니다. 소수의 영적 자본가들에게 거듭 축적되어 부패될 수밖에 없었던 영적 자산을 교회 저변의 영적 민중에게 되돌려 생명을 불어넣었던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독점적인 예배인도자들에 대한 그의 걱정은 예배인도자(Worship Leader)라는 표현보다 예배섬김이(Worship Servant)라는 용어로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찬양문화의 '3P운동'이 조용히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 3P운동이란, "Personal Praise Perspective"의 약자이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개인의 삶 속에서 "찬양가사를 말씀에 비추어 묵상하고, 현실과 상황 속에서 조명하고 그 찬양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해 내는" 경배와 찬양운동의 조용한 개인화 운동이다. 전문가집단이나 매니아그룹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찬양문화를 넘어서서 이제는 음악적인 소양이 좀 없어도 하나님과 풍성한 영적인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 있는 찬양을 드리고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이다.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해 깊이 동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자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질문을 지우지 못한다. "찬양/예배 인도자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말씀 사역자는 1등, 찬양 사역자는 2등?

스스로가 찬양을 인도하면서 좀 튀는 편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황병구PD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사역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나의 부족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강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이렇게 질문해 본다. "그럼 목사는 왜 설교하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냥 잠잠하게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개역한글, 영어성경 등의 모든 버전으로) 그 말씀을 봉독한 후에 성도들이 스스로 주어진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지 뭐하러 애써서 그 어려운 말씀을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적용까지 갖다 붙이며 필요한 예화들도 양념처럼 곁들여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혼자 독점하는가? 너무 억지 주장인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중에게 선포되는 예배의 요소이고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요소이기 때문에 기준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런데 말씀 사역은 설교자 한사람이 좀 튀어도 되지만 찬양사역은 인도자가 절대로 튀면 안 되는 일인가? 그리고 왜 목사만 설교하는가? 평신도는 왜 설교하지 못하나? 나는 물론 만인사제설의 원리에 따라 은사를 받고 준비된 평신도 설교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목사들보다 훨씬 더 설교를 잘하는 평신도들을 나는 너무나 많이 만났다. 때문에 목사가 되려고 준비 중인 한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반면에 찬양 인도자에 대해서는 좀 다른 잣대로 이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귀한 사역이기 때문에 설교사역은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해석하는 방법을 훈련받고 준비된 사역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만 찬양사역에 대해서는 기타 좀 잘 치고 음악 잘하는 평신도가 하면 그래도 아쉬운 대로 된다는 생각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 때문에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즉석 멘트'로 예배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자기 간증 내지는 수다로 오히려 회중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문턱을 가로막고 있는 찬양인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을 짤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시험에 들고 고민한다. 그가 준비되고 훈련된 좋은 예배인도자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은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찬양인도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열악한 방식으로 그저 그들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각자 알아서 사역에 대한 원리를 체득하도록 방임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겸손한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찬양/예배 인도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셨는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찬양/예배 인도자들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게 다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성경의 역대상에 나타나는 말씀 등을 통하여 발견한다. 수천 명의 찬양대원들이 하나같이 성전에서 전임(Full-time)직원으로 채용되어 다른 일은 안 하면서 밥만 먹고 찬양준비하고 예배 때는 찬양인도자로 나섰던 일들은 요즘 교회의 현실에 빗대어 볼 때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말씀은 중요하고 찬양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으셨다.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에 힘써야 할 우리는 왜 준비되고 훈련된 찬양인도자가 훈련되도록 기도하고 지원하지 않는가. 연예인 비슷한 인기 있는 찬양 인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도전을 주고 겸손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채찍질하지 않는가 말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처럼 찬양/예배인도자들 역시 그들의 목소리와 평생에 갈고 닦은 음악적인 소양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써 올려지는 동시에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에게 주님의 임재하심을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예배인도자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은혜가 안된다'라든지 '그냥 아무도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고 드리는 찬양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한 생각을 똑같이 말씀사역에도 적용해 보았느냐고. 설교자들도 자기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도록 Voice Scrambler를 사용해서 말해야 하며 병풍 뒤에 숨어서 설교해야 한다면 그 억지 때문에 좀 우습지 않은가. 설교자 개인의 화술 능력과 말솜씨와 목소리와 모든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찬양 인도자들의 목소리와 모습과 삶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찬양인도자들은 자신이 예배인도자의 역할을 마치고 나면 주저하지 말고 무대 아래로 내려 와야 한다. 예배를 인도하는 순간 외에는 이들 역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하나님 자녀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이건 기도순서를 맡은 장로님이건 자기 순서가 되었을 때에 강단 위로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거나 기도를 인도하고 다시 내려오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우리의 예배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죄 많고 부족한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아픔 많은 목자들일 뿐이지 않은가. 겸손하게 사역하자, 우리 죄인들이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prev 1 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