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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교회생활

회중기도는 이렇게 하십시오

eKosta 독자라면 신앙적으로 앞서 있는 분들이라 회중 기도를 인도할 기회가 많을 것입니다.

사실 기도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생각을 언어로 하나님께 표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기도의 경우입니다. 회중 기도를 인도할 때에는 유의해야 할 사항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회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개인 문제를 언급하거나 자신만의 관심사를 놓고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둘째는 짧아야 합니다. 공중 기도가 길어지면 공감도가 낮아집니다. 회중 기도를 인도할 때에 회중들이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다가 기도가 길어지면서 “아멘” 소리가 점점 약해지든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집중이 흩어졌다는 뜻입니다. 공중기도는3분을 넘겨서는 안됩니다.

셋째는 계제에 합당하여야 합니다. 식사 전 기도라면 식사에 관해서만, 기도회에서 드리는 대표 기도라면 기도를 위하여서만, 봉헌 기도라면 헌금에 관해서만 기도해야 합니다. 헌금기도를 드리면서 투병하시는 분들을 위한 기도를 곁들인다든가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주일 예배나 공식적인 집회에 기도 인도를 맡았을 때에는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첫째,준비하십시오. 회중 기도 인도를 부탁 받았으면 며칠 전부터 어떤 내용을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준비하여야 합니다.

둘째, 기도의 주제를 두 세개로 한정하십시오. 교회의 모든 필요를 다 아뢰려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은 개인 기도 시간에 아뢰면 됩니다. ‘개인 기도는 길게! 회중 기도는 짧게!’ 이것이 기도 원칙입니다.

셋째, 연습하십시오. 설교자는 미리 설교를 연습해서 제한된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도록 설교를 다듬습니다. 기도하는 분들도 3분 안에 마칠 수 있도록 기도를 다듬어야 합니다. 네째,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회중을 향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회중 기도를 처음 드리는 분들은 하나님이 앞에 앉아계시다고 생각하고 그분에게 말하듯이 기도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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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1 20:20 삶과 신앙/Joy의 편지

Joy의 편지

어머니를 닮은 딸내미

미국에 살다보니... 한국의 명절이나 공휴일은 잠시 방심하면 지나쳐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나마 교회에서 떡이나 맛난 음식들이 풍성하게 등장하면 설인지 추석인지 알 수 있지만 이렇다할 특징이 없는 삼일절이나 식목일과 같은 매우 심심한(?) 공휴일의 경우, 지나갔다는 사실 조차 뒤늦게 아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엔 식목일이 공휴일이었는데 요즘도 그런가요?!?!
믿을 수 없는 제 흐릿한 기억에 의하면 식목일엔 흐리거나 비가 내리곤 했던 것 같습니다. 나무 잘 자라라고 그런 것이라고 나름대로 이유를 붙였던 기억도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식목일 하면... 저는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봄철이면 어머니는 화원에서 한바탕 봄꽃들을 사다가 베란다 가득 꾸며놓곤 하셨어요. 꽃도 좋아하고, 나무도 좋아하고, 죽어가는 식물도 다시 살리는 마애스터 울엄니. ^^ (물론 그 열심이 아버지께로 전염이라도 되었는지 근래에 들어서 아침에 물주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 되었습니다만...)

가까스로 살려놓은 식물을 딸래미에게 맡겨놓고 여행이라도 며칠 다녀오시면 저는 그 잠깐 사이에 그 풀들로 하여금 다시 사경을 헤매게 만들어 놓곤했습니다만... 베란다인지 식물원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온갖 화초들을 골고루 채워놓고 자식키우 듯 아니 때로는 자식보다 더 정성껏 키우시는 울엄니를 저는 꽤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화초없이 지낸 적이 없다는 사실.
봄철이면 어김없이 좋아하는 하얀 데이지 한 묶음을 사다가 화병에 꽂아두는 게 연례행사가 되었고 방학이면 집에 다녀오는 친구들의 온갖 화초를 맡아서 키워주는 이른바 plant sitter가 되었죠. 수퍼마켓에 가도 제일 먼저 눈길을 주는 곳은 구석에 있는 꽃과 화분 코너이고, 특히 야외 꽃시장을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습니다.
어쨌거나 제 방엔 대개 꽃이든 풀이든 식물이 하나쯤은 꼭 있곤합니다.

제가 그렇게 나무를 좋아하는지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나무 냄새, 풀 냄새, 꽃 냄새...
오늘도 캠퍼스를 오가며 킁킁거리는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나무를 심지않고 지나쳐 버린 식목일이 어쩐지 자꾸만 마음에 걸리네요.
나도 모르는 사이 울엄니의 화초사랑하는 마음이 전염이라도 된 건지...

사실 어디 이것 뿐이겠어요. 저도 모르게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들, 닮은 것들... 끄적끄적 글쓰기 좋아하는 것, 비평하기 좋아하는 것,
구경하기 좋아하는 것, 음악 좋아하는 것, 커피 좋아하는 것,
처음 만난 사람과도 금새 친해지기, 남의 이야기 들어주기, 속눈썹 짧은 것도 닮고, 눈물 많은 것도 닮고, 웃는 모습도 닮고, 합창을 하면 알토 음을 내는 것도 닮고, 화장 진하게 하는 걸 싫어하는 것도 닮고, 이것저것 죄~ 다 닮고, 닮고, 닮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닮은 것들,
나도 모르게 어머니 품 안에서 자라며 저절로 배운 것들이죠.

그래요.
어머니 품안에 있으면 저절로 배울 수 있는 것들, 저절로 따라하게 되는 것들이 있었군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도 모르는 사이 몸에 익힌 것들.

음...

문득 하나님의 품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머물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그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자라면서 부모님의 모습을 어느 새 닮게 된 것 처럼
그 분의 마음을 나도 모르게 닮게 되면 좋겠습니다.
일부러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술술 흘러나가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분의 품안에 거하는 삶으로 인해...

주 안에서 행복~*

sAN frANcIsCO,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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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기쁨

Holocaust를 주제로 한 영화가운데 <Sophie's Choice> 라는 영화가 있다. 두 아이를 가진 유대인 엄마, Sophie가 포로수용소로 가족과 함께 실려가던 중 나찌의 무자비한 총구 앞에서 두 아이 중 한 아이만을 계속 데리고 갈 수 있으며 다른 아이는 사살당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는다. 그 엄마는 가슴을 찢는 고통과 숨막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 중 한 아이, 아들을 택해야만 했다. 그 영화는 엄마의 고통스런 절규를 화면 가득히 채운다.

선택이란 삶의 순간마다 주어지는 부담이며 많은 경우에 그것은 마음의 갈등과 고통을 수반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이란 날마다 순간마다 선택이라고 하는 두 갈래 길에서 한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선택은 대단한 용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겨우 용기를 내어 한 길을 선택한 순간, 우리는 많은 경우에 마음에 큰물처럼 밀려오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 불안감은, 그 두 갈래 길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한 길이 만일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길이었다면 나의 인생의 발걸음은 이제 실패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다. 이 순간에 우리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불안한 갈등과 고민 속에서도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시며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우리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의 의문이 즉각적으로 제기된다. 첫째는 어떤 어려운 결정의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나의 의지를 '고통스럽게' 쳐서 복종시키는 이 순종하는 삶이 도대체 어떻게 기쁨이 충만한 삶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이 물음들에 답하기 전에 이 물음들 앞에 서 있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참다운 실존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가 이전의 존재가 아닌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완전히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according to)'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아버지의 자녀'로서(as)'의 삶을 사는 것을 먼저 의미한다. 이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실존을 바로 이해하는 순간, 앞서 제기된 난해한 질문들이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다. 그 구체적인 해답이 로마서 11장 이후에 나와있다. 로마서 11장까지에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하나님의 심판(condemnation),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그리고 선택하심(sovereign choice)을 통해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로 보여졌는가가 조목조목 설명된 후 이제 성경은 이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말씀하기 시작한다. 로마서 12장의 서두, 1절과 2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service of worship. And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renewing of your mind, so that you may prove what the will of God is, that which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여기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성경의 중요한 약속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 즉 그 삶이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이 아닌, 새롭게 태어나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transform, metamorphsis) 삶이라면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의가 그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prove by testing (dokimazein)' 즉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약속이다. 이 선언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너무나 많다고 불평하는,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전의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얼마나 자유케 하는 은혜의 말씀인가? 아버지의 의로운 뜻이 순종하는 자녀들의 삶을 통해 내가 경험할 수 있도록 드러나게 된다는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자녀된 우리들이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의 순간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주신다는 은혜의 약속의 말씀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 위한 열쇠는 먼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의 삶을 명도하는 순종함의 믿음에 있다. 바로 나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충만한가 하는 데에 있다. 나의 가슴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는가 하는 데에 있다. 나의 마음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으로 얼마나 가득 차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위대한 전도자 Moody선생이 그의 생전에 쓰시던 성경책에는 "T, P" 라는 두 글자가 깨알같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그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try" 하였더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대로 자신의 삶을 통해 "prove" 되었다고 하는 유명한 간증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기 위해 먼저 드러나기보다는 오히려 순종하는 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드러날 수 있다고 하는 놀라운 간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의 선택과 결정 속에서 발견되어지고 이루어지는 삶의 진정한 기쁨은, 나의 노련한 판단과 재빠른 기회포착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어떤 결정으로 인한 결과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기대하는 믿음과 그 인도하심이 보일 때에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려는 결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있는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의 경험에서 이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시리아의 안디옥을 떠나 육로로 에베소가 있는 서쪽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고 길을 떠났으나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신다. 결국 그들은 북쪽에 있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갈라디아의 북쪽에 위치한 비두니아 땅으로 가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 길을 다시 막으신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어 북서쪽, 에게해의 동편에 위치한 드로아 항구로 가게 된다. 결국 그 곳에서 그들은 마게도니아의 한 사람이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와 우리를 구해달라고 청하는 환상을 보게된다. 마침내 그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로 건너가 그 곳의 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사역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분명한 목적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순간순간 자신들의 마음의 확신이 주는 선택으로 방향을 결정하고 행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순종에 대한 의지와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을 보시고 그들을 최적의 목적지로 인도하시기로 결심하신 주님께서는 적절한 순간마다 그들이 결정하고 가는 길의 다른 방향들을 막으시고 가야할 방향은 열어놓으시면서 결국은 그 최적의 목적지까지 인도하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동일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남을 잊지 말자! 먼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길을 떠나야한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지로 기꺼이 가고자하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 길을 떠나자! 그리고 지금은 비록 확실히 보이지 않는 그 목적지라 할 지라도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에 흔들리지 말자! 때로는 우리가 그 가는 길에서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두 갈래 길들로 계속 전개되는 것 같이 느껴졌던 우리의 인생이 고통스러운 선택의 연속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나의 삶 속에서 하나하나 체험해나가는 신나는 'wonderpath'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내리는 우리들의 결정들 앞에서 우리는 자유하자!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약속의 말씀이 증거 하듯이, 우리의 중심에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열망이 있었다면,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결정들을 내렸다면 그 결정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으로라도 하나님의 의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예정하신 뜻이 우리의 순종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흥분되는 기쁜 경험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심각한 인생의 결정을 놓고 방황하며 절망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회복되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되도록 기도하자. 그러면 주님께서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보이시고 이루시기 위해, 혹 우리의 연약함으로 내린 결정으로 초래될 지 모르는 위험한 길과 굽은 길을 막으시고,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기뻐하자. 먼 광야와 같은, 미래가 아득하고 잡히지 않는 우리들 유학생의 때야말로 이 순종의 믿음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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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기쁘게 해드리는 환한 오월에도
우리들의 뒷골목은 여전히 어두웠습니다.

가난한 삶의 구제는 나라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 계절에 만났던 '내미는 손'들과 눈빛은 내 말과 생각들을 막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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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1 20:17 책이야기/eKOSTA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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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크랩의
<결혼 건축가>

커플들과 결혼 상담가들을 위한 결혼청사진

5월은 교파를 초월해 한국과 미국(아마도 전 세계)의 교회에서 가정의 달로 지키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등이 있으며, 미국 교회에서는 어머니 날(Mother's day)과 아버지날(Father's day)이 각각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가정의 달인 5월을 맞아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원하시는 가정의 원리와 본질을 알려주는 로렌스 그랩의 <결혼 건축가>로 양서를 선정해 봤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적인 교회들조차도 무의식중에 받아들여왔던 네 가지 잘못된 결혼에 대한 성향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성경을 즉석 처방 혹은 어떤 공식처럼 사용하여 결혼 문제에 대한 신속하고 간단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사고를 들고 있으며, 그것은 현대의 결혼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을 인간의 죄에게서 그 원인을 찾기보다는 심리학의 복잡한 이론들로써 문제의 초점을 파악하여 설명하려 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저자는 개인의 책임을 경시하는 사고(思考)노선이라면 일단 반대하고, 사람에겐 자신의 인생의 각 결정과 삶의 순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견해 쪽이 옳다고 생각하며, 순종을 경시하는 심리학적 이론들을 거부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을 강조하되 행동의 선택과 결과를 중시하는 외적인 변화보다는 내적 마음의 변화를 통한 순종을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사고와 목표와 감정까지 바뀌어야하는 영적 성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바라보고 있으며, 이 모든 이해의 기반에 인간의 전적 타락과 깊은 죄성을 전재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인간 중심의 행복과 만족에 관한 매혹적인 강조와, 세 번째는 심리적인 필요들이 결혼문제의 초점을 차지하고 있으며, 네 번째로는 가정문제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라고 문제를 진단한다. 그래서 이 책은 극적으로 신속하게 변화된 삶과 결혼관계를 보장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으로 쉽지만은 않은 길고 긴 과정으로서 결혼 문제를 바라보며, 긍극적으로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살 때 그로부터 책임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동기와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씀대로 사는 삶이란 좋은 기분만을 쫓는 삶과는 다르고 고통스런 순종이냐, 편안한 타협이냐를 결정해야 할 순간에 직면해서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알려준다. 개인의 경건한 삶을 산다고 해서 반드시 결혼생활까지도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결혼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성경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며 나의 필요에 대한 최상의 충족책이라고 생각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성경을 문화화하고 성경의 결혼관을 제한시키는 문화적인 해석들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하나님의 결혼계획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와 구체적인 행동원리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결혼의 목표를 완전한 연합(창2:24)에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체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뜻하신 바대로 살고 관계를 맺는데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인 안전감(Security)과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느낌인 중요감(Significance)이라고 바라본다. 그래서 이 두 가지 필요는 반드시 먼저 채워져야 책임감 있는 삶을 살수 있고 성경적인 행동이 가능하다고 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안전하게 하셨고 그분의 계획속에서 중요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두 필요는 완전히 채워졌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배우자나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 그러한 완전한 연합의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간단하지는 않고, 타락한 인간 본성의 속성들과 대립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어렵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권위를 바탕으로 이 책 전반에 걸쳐 답을 해 나간다. 구체적으로 연합의 개념을 영적연합, 정신적 연합, 육체적 연합으로 나누어서 각 장에 걸쳐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게 설명하고 이 것을 건축가의 청사진에 비유하였고, 이러한 인격적인 완전한 연합의 목표를 지향하는데 필요한 세 가지 선결 조건들, 즉 은혜, 헌신, 그리고 수용을 건축용 블록에 빗대어 설명하며 우리에게 결혼의 완성된 건물 모습, 즉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결혼제도와 결혼 생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해 준다. 각 장들이 아주 명쾌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으며, 적절한 그림을 삽화함으로 쉬운 이해와 지속적으로 기억해서 그 원리들을 적용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진리의 평균대, 낭떠러지와 하나님께 매달려 있는 사랑의 밧줄, 조작과 섬김, 목표와 갈망, 감정의 수용과 거부, 흥미를 쫓는 성관계와 육체적 연합의 차이 등의 다양한 면들을 살핌으로, 우리의 모든 안전감과 중요감의 인격적인 필요들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채움 받을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배우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가치를 더욱 깊이 인식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섬기고, 인격적인 관계의 표현과 연장으로서 육체적 연합 즉 성적인 만족을 즐기는 것이 결혼의 목표라고 설정한다. 계속해서 절망적인 상황이나 자신의 어떤 실패나 낙심이나 비극도 우리의 결혼을 치료하실 수 있고 우리를 더욱 성숙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충만하고 온전한 은혜에 대한 절대적 확신에 기반을 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초한 참된 헌신과, 온전한 믿음을 바탕으로 수용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사건, 즉 배우자의 행동에 대해 개인의 선택에 따라 섬김이냐 조작이냐를 결정 할 수 있고, 사건이 낳는 반응으로서의 일차적인 감정은 유쾌함과 불쾌함이 있는데, 각각의 감정 상태를 필요나 갈망으로 그 사건을 평가함으로 이차감정의 반응, 즉 의존심과 만족감, 악독함과 실망으로 나타나는데 궁극적으로 완전한 용서를 하겠다는 결정을 통해서 섬김으로의 결정과 친절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순기능적인 순환을 통해 결혼의 궁극적인 전인적인 연합을 할 수 있음을 아주 쉽게 도표화 시켜 설명해 주고 있다. 더불어 구체적인 사건의 예와 많은 대화법 등도 아주 실제적으로 도움을 준다.

데이트와 결혼에 대한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은 결혼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와 구체적인 행동원리의 추출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은 점에서 가장 탁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성경의 무오성과 초문화적인 권위를 인정하면서 이 책을 썼으며, 더불어 인간 중심적이고 자신들의 필요와 만족 중심적인 가정에 대한 생각을, 하나님 중심,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이해와 믿음에 뿌리를 두고 가정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안전감과 진정한 중요감의 원천으로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과 성경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만, 우리의 단편적인 결혼관과, 배우자나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나 요구, 좌절과 실망,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여러 감정적인 상처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됨을 알려준다. 이 책은 결혼 생활에 대한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이코스타 독자들 중에 혹시 지금까지도 이 책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이 있다면, 독신자이건 결혼을 앞두고 있건, 아니면 지금 현재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건, 모든 분들이 꼭 읽어보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집에 사서 두고 때때로 다시 보면서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을 점검하고 있으며, 실제로 아주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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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산 위에 있는 동네 - 선구자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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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과학기술대학은 연길시 가장 북쪽의 북산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다. 앞에는 시가지가 한눈에 나지막이 내려다보이고 뒤에는 시원한 들판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어서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학교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연길 시에서는 시내 중심의 좋은 땅을 주려고 하였으나 김진경 총장이 당시 공동 묘지였던 이 언덕바지 땅을 극구 고집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묘지 터를 요구하는 김 총장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여 고개를 내 저었지만, 이제 학교가 완성되고 나서 이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과연 이곳이 명당(?) 중의 명당이라며 김총장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에 감탄을 하곤 한다. 더구나 오목한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연길 시는 여름에는 먼지와 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겨울에는 굴뚝에서 내뿜는 매캐한 석탄 연기 때문에 온 도시가 안개 속에 잠겨버리기 때문에 학교에 올라와야만 비로소 숨통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학교를 단장하는 분들이 학교 안팎에 온통 꽃길을 만들어 놓아서 계절마다 화사한 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서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소나무로 일체 조경을 이루어 학교를 처음 찾는 분들도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이곳은 중국 속의 섬처럼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교정 바로 앞에는 푸른 잔디로 카페트를 깔아 놓았고 그 위에 멀리 두만강에서 옮겨다 놓은 큰 바위가 카메라를 의식하며 점잖게 놓여 있다. 연길시 어디에서도 아직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녹색 공간이기에 휴일에는 산책을 위해 학교를 일부러 찾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띈다.

이 학교를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잡게 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회주의 나라 중국에 기적과 같이 세워진 학교---,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의 물결을 타고 최초의 중외 합작 대학으로서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세운 이 학교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는지, 이 곳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이 앞으로 중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낼는지 중국 사람들은 예의 주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에 봉사하러 온 외국인들이 모두 크리스천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의 판단들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학교를 중국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학교로 키워나가야만 한다. 이곳에서 진정한 의미의 진리, 평화, 사랑의 교육이 실천되고 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중국 다른 어떤 대학의 졸업생들과는 다르다는 좋은 평가를 받는 길만이 이 학교가 세워진 참 목적을 달성하는 길이 될 것이다.

만주 벌판의 강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학교 내의 모든 건물을 연결통로로 길게 이어놓았다. 이름하여 연변과기대의 만리장성이다. 그 복도마다 온통 조선의 정취와 풍습을 느끼게 하는 골동품과 장식류가 진열되어 있다. 장소도 절약할 겸 방문자 누구나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열린 박물관인 셈이다. 미술을 전공하신 총장 사모님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분의 본업(?)은 식당 앞 슈퍼마켓 점원 아줌마이다. 총장 사모가 슈퍼에서 일하는 것을 미처 몰랐던 방문자들이 종종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일손이 부족한 대학의 구석구석마다 자원봉사자로 돕는 사모님들의 손길들이 이 대학을 만지고 있다.

아직은 도서관다운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여서 임시 도서관의 열람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밤에는 식당을 자습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저녁 식사만 끝나면 학생들이 식당의 빈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밤 열두 시까지 조용히 공부하는 모습은 정말 대견스럽기만 하다. 중국의 사회주의 교육 체제 내에서는 일단 대학에 합격하기만 하면 졸업 후에 국가에서 책임지고 학생에게 직장을 분배시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모습은 중국 대학에서는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든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북산가 언덕에 높다랗게 세워진 학교---,
깜깜한 밤중에 환하게 불을 밝힌 도서관---,

갑자기 말씀 한 구절이 생각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2)

언젠가 활빈 교회의 김진홍 목사님이 조선족 사기 사건의 대책 마련을 위하여 우리학교를 방문하신 차에 교직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다. 당신이 찾아오신 곳이 바로 선구자의 땅임을 의식한 그 분이 자기가 바로 선구자라고 하시며, 선구자의 뜻은 "선천성 구제불능성 자아도취증" 환자를 뜻한다고 하여 한바탕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 와보니 김진경 총장님을 비롯하여 모두 자기보다 중증(重症)인 선구자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다시 한번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북산가 언덕의 광활한 벌판을 바라보며 바로 이곳이 과거 우리 민족의 한과 쓰라림의 역사를 담고 있는 만주 벌판임을 실감하곤 한다.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역사적인 배경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라를 빼앗겼던 근대사의 뼈를 에는 아픔들이 스며있는 땅이 바로 이곳이다. 그 시절 일본의 학정을 피해 개나리 봇짐을 지고 압록강 두만강을 넘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개간했던 땅들이 지금의 만주 곡창을 이루었던 것이다. 일본에 항거하여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고향산천의 부모 형제를 내버려둔 채 일신의 고초를 무릅쓰고 찾아 나선 독립투사들은 또 어떠하였던가?

그 시절을 향한 역사적 향수감에 젖어 한번씩 시간을 내어 찾게 되는 곳이 또한 인접해 있는 용정시(龍井市)이다. 연길에서 시골길을 삼십 분 남짓 차를 타고 가다보면 거대한 사과배 농장을 지나게 되고 올망졸망한 용정시 한 복판에 옛 대성 중학(지금은 용정 중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터를 찾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아로새겨진 시비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에 대한 의미를 한참 묵상하다가 발길을 돌려 오르는 곳이 일송정(一松亭)이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뽑아버리기 위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미 제거되고 말았다는 역사 속의 소나무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산꼭대기에 솟아있는 초라한 정자 옆에는 어느덧 새로 심은 작은 소나무가 한 그루 미래의 소망을 키워가며 자라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일송정에서 사방으로 광활하게 내려다보이는 만주 평야와 그 속을 가로질러 흐르는 해란강을 굽어다보고 있노라면, 조선인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장을 요동쳐 흐르는 한줄기 감개를 억제치 못하여 선구자라는 노래, "일송정 푸른 솔은---" 을 한바탕 외쳐 불러야 속이 후련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그와 같은 조선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 만주 벌판에 대한 옛 향수를 자꾸 느끼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정작 중국인들은 만주(滿洲)라는 말 자체를 과거 자신들이 일본에 의해 겪었던 치욕의 역사를 돌이키는 말로서 생각하여 듣기 싫어하며 쓰지 않는다. 더욱이 한국인들이 이곳이 바로 우리 조상 고구려 사람들의 영토였다는 것을 내세워 "만주도 우리 땅"이라는 등의 눈치 없는 소리를 하게 되면 비록 우리는 그것을 반 농담 삼아 하는 말일지라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며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55개의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있는 다민족 국가로서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이 국가의 존립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강 위구르족과 티벳족을 위시한 정치적 독립을 꾀하는 소수민족과 더불어 역사적 배경 속에서 향수를 느끼는 한국인들에 의해 조선족들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는 것이다. 비록 소수 민족의 인구 비율은 한족에 비해 10% 미만이지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민족의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중국 정부의 입장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 학교로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조선족 학생들 앞에서 내세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를 세운 목적 자체가 민족 운동을 하여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자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 곳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 의미를 신앙의 눈으로 승화시켜 재해석하게 된다.

중국 지도를 보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언젠가 우리 졸업생 중 하나가 중국과 한반도 지도를 보여주며 닭이 젖통을 물고 있는 형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다시 말해 한반도는 중국이라는 닭에게 복음의 젖을 먹이기 위해 하나님이 물려주신 젖통이라는 것이었다. 때때로 닭 주둥이에 매달린 먹이처럼 느껴지는 한반도가 조금은 처량하게 보이던 나는 기발한 설명에 귀가 번쩍 뜨이며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실로 이곳은 선구자와 독립투사의 땅이다. 어찌하여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사람들만이 선구자이겠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보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 미래의 대륙에 먼저 들어와 새 시대의 일꾼들을 양성하고 있는 이 학교의 교직원들이야말로 선구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찌하여 지난날 일제 치하에서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만이 독립투사이겠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상실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신의 안일함을 버리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묵묵히 일하고 있는 우리 교직원들이 바로 독립투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를 위시한 지난날의 선구자와 독립투사가 모두 그리하였던 것처럼 이들의 가슴속에도 고향 땅을 떠나올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아야했던 손가락질과 조롱의 남모르는 아픔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땀과 피에 의해 나라가 회복되었듯이 그리고 그 후에야 그들을 회고하는 시비가 세워진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지는 그날 천국에서 이들을 위한 기념비가 찬란하게 세워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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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유학생 이민자의 여리고성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수6:20)"

여호수아서에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그곳 거민과 가축까지 진멸하고서, 여리고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놀랍기도 하지만, 때론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서 여리고를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따라 타국에 정착해야 하는 유학생 이민자들은 그곳 거민을 여호수아에서처럼 진멸해야 될 것인가? 물론 그런 말씀은 아니다.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눈앞에 나타나게될 여리고성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될 것인지를 본 컬럼을 통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여리고성은 어디에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에서 새삶 일구기는, 새로운 간척지로 이주해간 철거민의 새삶 일구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이방 족속과의 수 없는 전투를 감내하며, 새삶의 터전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앞에 둔 두려운 삶이었던 것이다.

10여년전에 나와 함께 공부하던 유학생동료들은 거의 모두가 고국에서 직장을 얻고 돌아가버렸는데, 나만 홀로 미국에 이민자로 남게되었다고 생각이 되었을 때 가졌던 그 불안함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갓 학위를 끝내고, 아직 영어로 말하고 듣기도 자유롭지 못한 그때에, 대학의 조교수로서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학부 Senior 강의를 첫강의로 맡았다. 그 첫 강의 시간에 나 자신이 들어도 잘 이해가 안되는 영어로 횡설수설 한시간을 떠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이 난다.

미국이라는 새땅에서 가족과 함께 새 삶의 터전을 잘 일궈야된다고 굳게 다짐하며 나아갈 때마다, 언어의 장벽, 문화와 관습의 이해부족 및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의 결여는 나를 가장 괴롭히던 장벽이요 넘기 힘든 견고한 성처럼 보였다. 뿐만아니라,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이 장벽과 견고한 성들은 틈만나면 나를 공격하여 낙심하게 만들곤 하였다. 오늘날 이민생활을 시작하는 유학생들이 넘고, 극복해야 할 첫 번째의 여리고성이란 바로 새땅에서 새삶을 일굴때에 우리를 낙심케하는 이런 문화와 환경의 장벽이 아니겠는가? 미국땅에서 새 삶의 터전을 일구는데 있어서, 생업 속에서 극복하고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성은 지금도 수없이 존재하는 셈이다.

뿐만아니라, 뉴에이지 운동과 종교의 다원화 현상으로 여리고성에 살던 거민들이 보여주었던 영적 혼탁함이 이민자들이 사는 곳마다 넘쳐나고 있으며,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사회가 불문율처럼 받아드리고 있는 동성연애의 합법화, 이혼의 범람, 마약의 홍수, 성적타락, 종교의 다원화 및 뉴에이지 운동으로부터 우리와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지키며, 어떻게 저 혼탁한 것들로부터 이땅을 자유롭게 할 것인가? 이제 우리가 파해야 할 견고한 두 번째 여리고성은 바로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께부터 멀어지게 할 수있는 이런 영적인 혼탁함이다. 신명기 20장 16-18 말씀에서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이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신20:18)"라고 하셨다.

우리의 실제적인 절망감은 이러한 외적인 영적 타락함을 우리가 쉽게 고칠 수도 또 극복할 수도 없다는데 있다. 물론 끊임없이 이 세상이 이러한 타락함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되며, 하나님이 언젠가는 꼭 회복시켜주시리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영적 혼탁함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내면세계를 어떻게 지킬것인가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생각해보면, 첫 번째 여리고성과 달리, 이 두 번째의 여리고성과 그 거민은 결국 우리 안에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의 혼탁함에 물드는 것을 막기 위해, 여리고성의 모든 거민을 진멸하시도록 요구하셨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영적 혼탁함과 죄악의 여리고성과 그 거민들을 진멸하기까지 내몰아야 할 것이다.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서 여리고성의 모든 것을 네 손에 붙였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군사는 여리고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세동안 돌았다. 제 칠일에는 성읍을 일곱번 돌고,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며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도 만반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을 여리고성의 거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이적이 무엇인지 꿈도 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 크신 권능으로 드러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식과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여리고성은 무너졌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의 무너짐을 위하여 육체로 싸우지 아니하고, 그들이 싸웠던 병기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었다(고후10:4-5). 즉 모든 이론과 세상의 지식을 파하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새로운 이민생활 속에서 만나게되는 문화와 환경의 외부 변화에서 오는 두려운 여리고성과 외적 영적 혼돈과 혼탁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리고성은 오직 하나님의 강력으로만 무너뜨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이민생활속에서 참 자유와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을 소유하는 길은 오직 유학생활과 이민생활 중에 부단없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에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면,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갖게되는 문화와 언어의 장벽에 대한 두려움은 곧 무너지게 될 것이며, 주님의 말씀안에서 내면세계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어 질서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 그분이 여리고성의 진을 파하는 우리의 강력이요, 꿈(vision)이시기 때문이다.

아간의 Integrity의 부재

여리고성 함락의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유다 지파의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취하지 말라고 한 여리고성의 함락과 함께 바친 물건을 취하는 범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된다. 이는 곧 쉽게여겼던 아이성의 첫 공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패하고, 삼십육인이 죽는 징벌을 받게된다. 이 패배는 단순한 것 같으나, 앞으로 다가올 수 없는 이방족속의 도전을 생각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심히 낙심케하고 근심스럽게 하기에 족한 돌발적인 사건임이 분명하였다.

아간은 외투한벌과 은과 금덩이를 보고 탐내어서 그 물건을 장막에 가져다 감추었다. 광야를 지나며 입었던 옷들은 비록 헤어지지는 않았지만, 맵시나 모양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멋있게 장식된 아름다운 외투 한벌을 보는 순간 너무도 입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은덩이와 금덩이를 보는 순간에, 가나안 땅이라는 새로운 이민처에서 새 삶을 일구며, 자녀를 길러야될 가장으로서 아간은 새 출발을 좀더 넉넉하게 해보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몰래 가져다가 자신의 장막안에 숨겨둔 그 귀한것들을 누가 알 것인가? 장막에 머물때마다 수없이 가나안 이민생활의 아름다운 모래성을 쌓고 허물면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아간은 하나님의 베푸시는 기적의 역사를 광야를 건너며 몇번 보긴 하였지만, 다 그건 우연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혹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또 멸시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파를 여호와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나님께 범죄한 지파와 족속을 찾기위하여, 지파를 뽑고 또 족속을 뽑을 때도, 아간은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를 뽑으리라고 끝내 생각지 못하였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지파 뽑기가 시작될 때에 선뜻 내가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자복하고 나섰더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끝내 아간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탐욕의 죄로 양심의 눈이 멀어버린 탓이었을까? 아간은 끝까지 하나님의 실패를 기다렸다. 하나님이 실수하시기를 말이다. 그러나, 결코 실수하거나 실패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결국 아간은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숨겨둔 것들과 그의 아들과 딸 모든 가족 및 그의 장막의 모든 것들과 함께 아골 골짜기로 끌려가서 불사름과 함께 돌무더기 속에 가나안 이민의 꿈을 허망하게 묻어야 했던 것이다.

탐욕은 죄악에 이르는 디딤돌이요, 멸망으로 이르는 지름길이다. 미국 직장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정해진 법과 규범을 준수하며,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을 얻는 것이든지 승진이든지,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이루어가야 하는 사회이다. 복권에 당첨됨이 없이는, 누구도 부정한 방법으로는 일확천금을 얻기가 어려운 사회이다. 아무리 능률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역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법칙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동일하다. 특별히, 미국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제일 중요한 성품이 있는데 바로 "integrity"이다. Integrity라는 의미에 꼭 부합되는 한국말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 의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성품으로서 지, 정, 의가 조화를 이룬 성품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아마도 미국에서 integrity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이는 미국 땅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세상에서의 삶이 일치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틀림없이 그들이 일하는 직장과 사회에서 integrity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불법과 편법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권모술수로 살아남고자 하는 자는 분명히 미국직장에서 결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정직하지 않으며, 진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며, 바닥이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대학에서도 자기이득에 부합하면 어제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검은 것을 희다고 우기는 미국 교수를 여럿 보았다. 모두가 우둔하며 속아주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integrity가 결여된 사람이라고 주위의 동료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다. 물론 그런 사람은 언젠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쓸리움을 받는 것을 볼 것이다.

아간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삶속에서 신앙의 integrity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뽑힐때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integrity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온 가족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평가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integrity를 통해서이지 결코 크리스천의 신앙심을 통하여서가 아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자는 다짐은, 즉 세상의 삶속에서도 integrity를 갖자는 말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믿지 않는 자들이 크리스천의 integrity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 아니겠는가? Integrity는 미국 직장과 이민생활에서 필요한 크리스천의 빛과 소금이요, 균형있는 예배와 삶의 열매인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에 더하여, 유학생은 학업에 충실해야하고, 이민자는 이민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이민목회자는 이민자의 영혼을 돌보는데 충실해야 할 것이다. 이 integrity의 결여 때문에, 이민사회와 이민교회,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마도 이 시대에 한국이민 크리스천에게 가장 요구되는 삶은 바로 integrity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까지 단창을 잡아라

이스라엘의 회개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아이로 올라가라 하시며, 아이성에서의 승리를 보장하여 주신다(수8:1).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이성의 교훈은 아무리 우세한 힘과 전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땅을 그들의 손에 붙이지 않는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우수한 실력과 전문성을 가지고 새로운 이민생활을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이민하는 그 땅을 하나님께서 저들의 손에 붙이지 않는 한 이민생활의 승리는 결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고, 또 아이성 정복의 전략을 다시 세운다. 전략은 성공하였고, 이스라엘이 거짓 패하여 광야길로 도망할새, 성문을 열어놓고 모든 아이와 벧엘족속이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키라 내가 이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수8:18)"하신 말씀에 따라, 단창을 든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일어나 성읍을 점령하고 불을 놓았다. 이에 놀란 아이성 사람들이 돌이켜 왔으나,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수8:26)"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키라"는 말씀은 복병이 일어나도록 하라는 신호일수 있기에, 여호수아는 그저 한번의 신호로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켰어도 무방할뻔 하였다. 이미 복병은 일어나 아이를 공격 할테이고, 하나님께서 승리는 약속해주신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거민을 진멸하기 까지 단창을 잡아든 손을 거두지 않고 아이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출애굽 후에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때와 비슷하다. 그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울때에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그래서 아말렉을 쳐서 파할때까지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게 한후, 그 둘이 모세의 손을 들어 올려서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였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출17:14)"라고 하셨으니, 지금 아이성을 공격하며 여호수아는 그 때 모세에게 보여주었던 "여호와 닛시" 와 끝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모세가 보여주었던 "최선의 노력"의 신앙의 모범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여호수아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말씀에 따라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이 성취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이민생활과 직장생활의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며, 여호수아처럼 최후의 승리가 있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에 있다고 하겠다. 육신적으로는 아프게 저려오는 단창을 든 손을 거두고 싶었을 여호수아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결코 편안함과 안일함에 안주할 수 없었던 여호수아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일을 조금만 하다가도 안되면,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버리며, 쉽게 포기해 버리는 크리스천의 태도는 여호수아가 보여주었던 진지한 삶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여기서 예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꼭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결과가 보장된다는 식의 "성공의 공식"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크리스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들의 삶에서도 유익한 결과를 언젠가는 얻는다는 것은 말씀에 의지하여 장담할 수 있다(히11:6).

이민자로서 주어진 직장의 업무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예배생활에만 열정적인 크리스천이 있다면, 균형있는 신앙생활을 해야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의 중심과 최우선의 위치에 주님을 모시고 또 인정하는 것이야 필수적인 크리스천의 기본신앙이다. 어떠한 상황과 여건하에서도 최선을 다한 후에 얻어진 일의 결과와 응답에 대하여는, 만족할 만한 것이든 아니든간에 주님의 결정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이미 선포되었는데도, 이의 성취를 위한 전략도 없고, 최선을 다함이 없이 게으르고, 또 시간을 아낄 줄 모르는 크리스천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런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크리스천은 무슨 일이든 주어진 사명에 끝까지 단창을 잡았던 여호수아처럼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얻어진 결과가 무엇이든간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충고는 아무리 권면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심은대로 거두기

심지 않으면 거둘수가 없다. 생명의 씨앗 뿌리기가 그렇고, 세상의 삶이 그렇다. 미국은 다민족이 함께 모여사는 melting_pot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누구도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은 유럽의 백인들이 먼저 이민와서 개척정신을 주장하며 기득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흑인은 노예로 팔려온 선조들의 눈물과 회한과 땀으로 얼룩진 곳에서, 끝내는 인권운동을 통하여 쟁취한 자유와 번영을 주장하며 살고 있다. 중국인은 미국의 동서를 잇는 철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예처럼 팔려온 선조들의 기득권 속에서 곳곳에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거의 모든 미국의 이민자의 삶속에는 그들만이 주장하는 기득권이 있고,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이민자는 무엇을 가지고 미국의 번영을 누리고 나누며 살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기득권이나 권리가 있는가? 백년전의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은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긍지요 자랑일 따름이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목사 주도하에 일어난 인권운동의 결실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도 유색인종 분리정책은 많은 동양계 이민자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미국에 사는 minority들이 그 인권운동에 참여하여 자신들을 희생하며 싸울때에, 우리 한국이민자는 거의 참여함이 없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미국땅에서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득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굳건한 신앙외에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별로 심은 것이 없는 곳에서 지금 당장 우리가 풍성함으로 거두길 원하는가? 모든 언론은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거의 없다고 쓰고 있으며, 또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관한 극단적인 발언은 어느 곳에서든지 생존을 즉각적으로 위협하는 폭탄과 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시안계 이민 유학생들이 직장에서,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인종차별의 벽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유학생 이민 가정들이 넘어야하고 정복해야할 여리고성과 아이성이 수없이 산재해 있음을 본다. 진급에 누락되어 분노하고, 열심히 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너무 쉽게 해고되어서 낙망하는 동양계 유학생 이민자를 지금도 본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여호와로 말미암는 것이지,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여호수아처럼 끝까지 단창을 잡고 최선을 다하여 살기로 한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는 이민자 가 깊게 생각해야할 선택이다. 심지 않은데서는 결코 거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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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1 20:14 유학생 사역

유학생 사역

미시간 앤아버 지역
Unity Praiser and Prayer (UPP) Meeting 소개

지난 eKOSTA 11월호의 배헌석 목사님의 글 "Beauty of Oneness, Beauty of Unity" 에서 미시간 앤아버 지역의 연합기도모임이 소개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모임의 시작과 지금까지 3년여간의 과정, 앞으로의 방향등을 모임에 함께했던 유학생, 코디네이터의 입장에서 정리하고 함께 나누고자 한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모임

1999년 봄, 지금은 A국에 선교사로 가있는 부부를 비롯한 몇몇 청년 및 집사님들이 모여 앤아버 지역에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중보기도 찬양 모임을 시작하자는 제안을 했다. 준비모임이 한번, 두번 계속 되면서 이러한 연합모임이 생기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계셨던 분들이 있으셨다는 사실에 다들 놀랐고, 목사님을 모시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각자의 마음에 흥분과 열심을 주심을 서로 확인했었다. 당시 모였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 모임이 코스타에까지 소개될 줄은 몰랐을 것 같지만, 각자 마음 한쪽에서는 우리가 뭔가 이 작은 커뮤니티에 변화를 가져오는 역사적 순간에 함께한다는 막연한 느낌은 있었던 것 같다.

또 한가지 우리에게 연합모임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주셨던 부분은 이 작은 커뮤니티에 있는 한인 교회들의 분열의 역사를 우리세대, 우리 다음세대 부터는 이를 반복하지 않고, 이전의 아픔과 죄악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올해로 백년을 맞는 한국 이민의 역사가운데, 이곳 미시간 앤아버지역에도 한인들이 정착을 하셨고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었다. 처음 시작되었던 한 교회로부터 현재의 10여개의 교회까지는 서로간의 분열과 다툼이 그 배후의 한 부분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감사했던점은 이런 과거에 대해서 우리에게 품안고 기도할수 있는 마음들을 주셨다는 점이었다.

앤아버 지역에서는 다섯 한인교회 목사님들께서 정기적으로 한달에 한번씩 모이시는데, 목사님들께서도 연합기도 모임에 대해서 전적인 지지를 보여주셨고, 각 교회를 돌아가면서 격주로 한번씩 모이기로 결정하고 기도모임은 시작되었다.

기도와 찬양이 끊이지 않는 모임

어떠한 모임이든지 모임이 처음에 시작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중요한 부분이지만, 더 중요한점은 모임의 방향성을 잃지 않으면서 꾸준하게 연속되야 하고 그 안에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과 실라가 사역중에 감옥에 갇혔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와 찬미를 드리기를 감옥안에서도 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착고가 풀린 후에도 간수에게 복음을 전한 점은 이 연합 기도모임이 결국 크리스챤 라이프의 핵심인 기도와 찬미, 전도에 초점을 맞춰야 함을 알수 있다. 우리 연합모임에도 up and down 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가 기도와 찬양에 얼만큼 포커스 되어있었는가가 당시 모임의 집중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최근 이 연합모임에 좋은 영향을 받아서 근접한 디트로이트, 랜싱 지역에서도 연합 찬양 집회등 연합 모임이 생겨나고 있는점은 너무도 감사할 일이다. 이전에도 이러한 연합회 성격의 모임은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이들 모임이 하나의 모임 (organization) 으로서만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앤아버 지역의 연합기도모임은 organization 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유기체 (organism) 로서 존재해 왔던 것 같다. 기도와 찬양이 주된 모임, 다른 다섯 교회 형제 자매들이 모인 다이나믹한 모임이면서, 그안에 경쟁보다는 나눔과 격려가 있는 모임이 되고자 했던것이다.

또한 꾸준이 이어졌던 기도모임 이외에도 매학기 한번정도 연합으로 준비하는 찬양집회가 각 교회별로 순서를 정해서 또는 주변의 대학들인 University of Michigan,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캠퍼스 강당을 빌려서 행해져 왔다. 처음 캠퍼스 생활을 하게되는 신입생들, 타지로 오게된 유학생들이, “아, 이곳에도 크리스챤들이 이렇게 함께 하나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구나.” 느끼며 함께 참여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특히 지난 두번의 찬양집회는 캠퍼스 강당에서 행해졌는데, 학생들이 직접 생활하고 공부하는 곳에서 울려퍼지는 찬양소리와 말씀에 이 캠퍼스 또한 주님의 주권아래 있음을 알리는 자리였다. 기도모임이 계속되는 가운데, 자칫 작은 모임으로 안주하기 쉬운데, 이런 식의 찬양, 전도 집회를 통해서 각 교회별로 달란트가 있는 부분들이 함께 연합해서 더욱 강하고 하나일 때 더 아름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하나됨

각 교회별로 획일적인 하나됨, 즉 우리가 똑같은 색깔과 모양의 다섯 모임을 단순히 하나로 묶어놓고자 했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서로 다른 섬기는 부분이 있는 한 유기체로서의 하나됨과는 정반대의 모습일 것이다. 앤아버 지역의 10여개의 교회중에서 먼저 목회자 정기 연합회의 다섯교회가 모였는데, 서로다른 역사와 배경의 교회들이다 보니, 각 교회 청년부 크기와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교회들이었다. 이중에는 청년부가 최근 몇 년동안 숫적으로 급격히 증가한 교회도 있었고, 또 그 반대의 교회도 있었는데, 이런 다른 상황들이 자랑이나 부끄러움이 아닌 현재 각 교회의 상황 있는그대로 나누어 질 수 있는 그런 성숙한 모습이 우리 모임에는 절대적이었다. 어느 한 교회라도 연합기도모임에 나왔는데, “우리가 여기에 있을 모임이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면, 이런 모습은 정말로 그 모임에서 서로 무릎꿇고 회개하고 고쳐나가야 할 모습인 것이다.

실제 지난 몇 년간 청년부 회원들의 급격한 숫적 감소와 교회내 사정으로 힘들어 했던 한 교회가 우리 연합모임 가운데 있었다. 각 교회별로 서로 소식을 나누고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에 그 교회 형제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모임안에서 전할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교회의 기도제목과 소식을 나누었는데, 서로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기도했고, 이것이 약점을 잡히는 순간이 아닌, 어려움을 나눔으로서 그 무게가 덜어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감사한 일은 그 교회가 최근 청년부의 부흥의 싹이 보이며,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된 것들을 풀어놓으시는 것들을 다들 목격했다는 점이다. 만일 이렇게 각기 다른 모습들이 아름다운 다양성 가운데 나누어지지 못한다면, 연합모임은 비슷한 색깔을 띤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밋밋한 모임이 되고 말 것이다.

한인사회를 넘어서는, 1세와 2세가 함께 모이는 연합

작년 4월 앤아버가 속해있는 와시테나 카운티에서는 정말 가슴 벅찬 이벤트가 있었다. 60여개 지역 교회들이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체육관에 모여서 종려주일을 함께 기념하는 자리였다. 인종과 배경, 언어가 각기 다른,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이름아래 하나가 된 2천 5백여명이 무대를 중심으로 반으로 나누어진 체육관의 절반을 채우고 함께 주를 찬양하면 말씀을 나누는 자리였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룹으로 모여서 손을 잡고 커뮤니티가 그리스도 앞에 돌아올것과 미국 전역을 놓고 함께 기도하는 순간 넘치는 감격으로 전율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연합가운데 분명히 주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이 커뮤니티에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미 전역에서 대학 축구 경기장으로는 제일 큰 미시간 대학 스태디엄에서 열리는 크리스챤 대회를 꿈꾸고 있다. 대학이 바뀌면, 그 사회를 이끌 지성인들이 바뀌고, 결국 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수 있는데, 미국내의 이런 대학타운들이 바뀌고 그 안의 크리스챤들이 힘차고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 사회가 분명히 그리스도 앞으로 무릎꿇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곳 앤아버 지역은 학교타운이기 때문에 한인 유학생 및 교포의 숫자가 약 2천 5백여명 되는, 도시의 규모에 비해서 한인들의 숫자가 어느정도 있는 지역이다. 한인 학생들도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으로 유학온 학생 및 가족들, 한국에서 대학으로 유학온 학생들, 교포 대학생, 교포 대학원생등, 다양한 부류의 한인학생들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결코 작지 않은 학생 그룹이지만, 실제로 학교내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함께 모아 내었던 적은 거의 없는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런 집단이었던 것이었다. 이런 한인 커뮤니티에 최근 3-4년간 음주와 관련된 한인 학생들의 죽음이 대여섯 차례 있었다. 한인 사회에는 충격이었고, 우리 연합기도모임에서도 이제는 우리도 이들을 품고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어렵고 힘들어 하는 그들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게 되었다. 그들중에 몇몇은 교회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었던 학생들도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고 순응하는 한인사회가 아닌, 우리도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더 이상의 안타까운 생명을 잃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교회 목사님들을 비롯한 커뮤니티 리더들이 한인사회의 우려를 학교에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대응에 고심하던 학교측은 마침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받은 한인 P 선생님에게 학교안에 포지션을 만들어서 학생들과 관련된 일, 특히 한인 및 소수민족 유학생들에게 관련된 사안들이 있으면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 9월에는 한인 학생들 환영의 밤 행사가 학교측 후원으로 학교 부총장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교포, 유학생 할 것 없이 다양한 한인학생들이 모여 서로에게 이러이러한 한인 단체들이 있고, 도움이 필요하면 줄 수 있는 여러가지 모양들을 나누는 자리였다.

행사 자체도 중요하고 아주 성공적으로 치뤄졌지만, 이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포와 유학생, 학교간에 서로 준비모임들을 통해서, 우리안에 이러한 문제와 어려움이 있음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소득이었다. 연합기도모임에서도 참석해서 우리의 의견을 반영하고 함께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커뮤니티에 관련된 모임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우리가 도울 수 있음을 알리고, 각 교회들의 목소리를 모아서 전달하는 것이다.

연합안에서의 성장

지난 3년여를 돌아보면서 이곳에서 10년넘게 신앙생활을 한 어느 자매는 우리 커뮤니티, 즉 한인 사회가 많이 바뀌었음을 몸소 느낀다고 하였다. 특히 한인 교회들간에 서로 부흥회나 세미나같은 행사가 있으면, 서로 가능한 범위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찬양팀 같은 경우에 몇몇 교회가 연합하여 한 팀을 이루어서 준비하는등, 눈에띄게 서로 협조하고 돕는 모습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나누어 졌지만, 그간에 많이 어려워졌던 한 청년부가 연합모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고, 서로 중보하는 가운데, 회복해가는 과정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연합, 어려울때 돕는 연합을 몸소 보게 된것에 너무 감사하다.

코스타 형제 자매들께도 각자의 속한 커뮤니티를 바꾸는 이러한 연합운동을 시작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단순히 보기 좋은 연합 단체가 아닌, 그안에 기도와 찬양이 끊이지 않으며, 다양성이 존중되면서, 1세와 2세가 하나되는 연합, 한인사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커뮤니티내의 전 그룹을 품는 연합. 그래서 미국 전역에서 또 대륙을 넘어서 기도로 연결되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넷트웍이 탄생되기를 소망한다.

김형민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후,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기계 공학으로 박사학위를 하고 현재 한국에 귀국하여 회사생활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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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복음

기독교 교도소운영, 우리 모두의 책임

기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한 민간교도소 설치를 위한 법률 제정 필요성 강조와 정부 당국자들의 인식 전환으로 말미암아 2000. 1. 28. 법률 제6206호로 민영교도소등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1. 7. 1.부터 이 법은 시행되었다. 이 법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이 주축이되어 기독교 민영교도소 운영을 위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고 이 법인은 법무부에 민영교도소 수탁신청을 하였다. 법무부는 지난달 이 법인을 민영교도소 수탁자로 최종 승인하였다고 한다.

이제 기독교가 교도소를 운영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이 법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택한 운영모델은 민간위탁형 모델이다. 그러니까 어느 민간 단체가 민간교도소 운영수탁자로 지정이 되면 그 단체는 격리 뿐만 아니라 격리를 위한 시설까지 건축하여야 하고 물론 교화도 책임을 져야한다. 이제 기독교 교계는 교도소 시설을 지어야하고 격리에 필요한 물적, 인적자원을 갖추어야 한다. 교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모델은 많은 재정적 부담을 져야한다. 약 300억원의 자금이 소요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시설 설치 비용일 것이다.

앞으로 인건비도 조달하여야 하는데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될 것이다. 물론 기독인들이 자원봉사를 하면 되겠지만 그러나 필수요원들에게 까지 자원봉사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법무부장관과의 구체적인 위탁계약을 통해서 수탁자에게 지급되는 위탁비용등이 정해 지겠지만 국가예산 절감의 차원에서도 민영 교도소 설치를 법으로 통과시켰는데 국가로부터 충분한 위탁대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런면에서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민간교도소와는 그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탁자로 지정된 기독교계에서 충분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공은 우리 믿는자들에게 넘어왔다.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은 교도소를 믿음으로 운영할 수 있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을 관리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만약 처음으로 시행되는 이 기독교 교도소 운영이 우리의 관심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민영교도소운영에 관심을 갖는 다음 세대는 참으로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기독교 교도소 운영문제를 놓고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시험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한국교인들이 얼마나 연합할 수 있느냐를 시험하고 계신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연합 할 수 있느냐를 시험하고 계신다. 기독교 교도소 운영 문제는 어느 특정인이(사람이든 교단이든 교회든) 주도권을 잡고 힘 자랑의 방편으로 삼아서는 아니된다. 한국교회 전체의 연합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물질적으로도 연합되어야한다. 인적자원으로도 연합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처럼 연합하여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몇몇 대형교회, 교단만 참여하도록 하면 안된다.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작은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모든 교인, 교회들을 설득하여야 한다. 단지 몇 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거두는 것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은 것을 거두는 것이 훨씬 좋다. 범기독교인 모금운동이라도 펼쳐야 한다. 인적자원을 쓰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특정교회, 특정교단에 소속된 사람들로 편중되면 안된다. 범교단적으로 인물을 골라야한다. 그렇게해야 교정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운영하는데 있어서도 균형잡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보수니 자유니 따지면 안된다. 참으로 준비된 전문가라면 교단에 상관없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동안 기독교계 인사들이 기독교 교도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소리쳐 왔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이미 수탁자로 선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기독교인들이 옳은 일에 단합된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교회건물 하나 건축하는데 몇 백억 씩 들이는 실력이 있다면 우리가 단합하여 교도소 한 동 지어 많은 죄수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을 주는 일인들 왜 못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단합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기독교 교도소운영의 문제는 어느 개인, 어느 단체의 일로 끝나서는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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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1 20:12 책이야기/eKOSTA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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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ssue of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Christian Faith and the Choice of Research Topic in the Natural and Applied Sciences

The Special Issue of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Journal of the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volume 53, number 4, December 2001, reports on the presentations from the conference, "Christian Faith and the Choice of Research Topic in the Natural and Applied Sciences," organized by InterVarsity Graduate and Faculty Ministries, held October, 2000, at the University of St. Mary's of the Lake, Illinois (asa@asa3.org).

It starts with the call, "Jesus, the Lord of science, invites you to reflect his grace and to build God's Kingdom through your research". Then it takes readers to several thought-provoking issues.

"Does God Care About Our Research?"
"How Can I Make Jesus The Lord Of My Research And Teaching?"
"How Does God Guide Our Decision?"
"How Does God Lead Us To Our Calling?"
"What Discipline Perspectives Guide Us: Bioscience, Physical Science And Applied Science?"

"What Is The Role Of Worship?" "What Are The Christian Foundations For Doing Science?"
"What Lessons From The Past Aid Our Choice?"
"What Are The Research Needs In Science?"

These issues are addressed by leading scientists. The presenters include John Suppe (Princeton University professor and authority on structural geology and plate tectonics), Brad Keister (National Science Foundation program director), Colin Russel (United Kingdom Open University professor and interpreter of science history), William Demski (Baylor University philosopher, mathematician and spokesperson of intelligent design), and Calvin Dewitt (University of Michigan professor and advocate of environmental ethics). The vibrant discussions with participants including graduate students, postdoctoral fellows and professors follow through discussion columns. The discussion session shares how to play wisely as a Christian within the system of the science profession. It also gives very practical advice on how to choose advisors and research topics. It can take you beyond graduate school to your profession of calling.

Christian graduate students will find many kindred spirits in this book and can obtain better understanding of their own struggles as Christians in the science profession as they watch these sincere Christian participants pray together, ponder and discuss issues, debate critical points, and listen to testimonies. Their thoughtful presentations will make readers gain new understanding, enlarge their perspectives and strengthen their faith in God who delights in us as we study science.

I was most touched by the testimony, "How does God lead us to our calling," by Charles Harper who is executive director and senior vice president of the John Templeton Foundation. He shares his spiritual and intellectual turmoil as God blocked his way to what he perceived to be his calling:

I thought that I had made a mistake in my calling, that I had been stubborn and foolish and stupid, and that God had just decided to let it crash for me.

Oh, that is precisely what I screamed when He led me into unimaginably difficult paths! The only difference was that I screamed in Korean. Do you feel as if you are left alone and isolated in the vast and secular field of science? Do you hear the small but clear voice that you may find friends who can share your love of God and science but in a different language? This book invites again, "Be aware of the larger community that carries many of the same concerns and passions that you do in your science work."

Open your heart to this challenge. Share their insights and enlarge your dialogue in the Christian community. You will be blessed.

* (편집주) 영어로 받은 원고의 원래 의도와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영어 원문 그대로를 싣습니다.

이은정
University Of Texas at San Antonio 기계공학과 교수. Northwestern Universtiy와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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