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 소개하는 양서는 오스 기니스의 <소명>이다. 비교적 최근에 쓰여진 책으로 미국에서는 1998년에 발간되었으며, 우리 나라에는 2000년에 IVP에서 번역하였다. 이 <소명>은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탁월한 책이라고 단언한다. 그 주제의 중요성과 총체성도 그러하지만, 주제를 전개해 나가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그 낱낱의 지식들을 깊은 묵상과 사색으로 마치 진주들을 실에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 듯이 잘 엮어낸 책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게 한다. 인생의 다양한 경험과 명쾌한 통찰력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여러 글들을 접할 때마다 내 인생에서 이러한 책을 접하고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복으로 느껴지고는 하는데, 이 <소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너무 좋아서 단숨에 읽게 되는 책도 있고 또 너무 좋아서 두고 두고 조금씩 읽고 싶은 책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내게 후자에 속한다. 단숨에 읽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읽을 때마다 한 장씩, 혹은 두 세 장씩 읽다 보니 다 읽는데 거의 3개월이나 걸렸다.
이 책을 처음으로 소개받은 것은 작년 10월경, 학교 신앙단체에서 대학원생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학 캠퍼스로 부르신 소명에 대한 세미나를 하셨던 어떤 분을 통해서였다. 그 분은 이 책의 몇 문장을 그대로 옮겨 자료로 준비해서 말씀하셨고, 그 때 접한 몇 문장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책을 구입하고 읽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2001년 코스타를 통해서, 참으로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책도 읽고 세미나도 들어가며 고민했음에도 정리되지 않았던, 신앙과 학문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그 의미와 중요성이 처음으로 내 마음 속에서 소화되고 정리가 되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코스타 이후 학교에서 있었던 그 세미나와 이 책 <소명>을 통해서 역시 이 문제들이 좀더 명확해졌기에 이 책이 더 귀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책의 부제가 바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면에서 이 책이 내게 어느 정도 주요했고, 보다 더 종합적이고 성숙한 새로운 시각으로 내 생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책이다.
책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책 겉장 뒷면에 간략하게 나와 있는 추천서들을 읽어봐도, 이 책에 대한 이러한 평가와 느낌이 나만의 치우침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중요한 주제, 진지한 목적, 생생한 문체, 오스 기니스는 분명한 식견을 갖고 역사, 문학, 성경, 경험, 전기 등을 넘나든다. 본서는 분명 수십 년에 걸친 묵상의 열매이다"라고 하였고,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나는 지난 35년이 넘도록 이 하나님의 행진 명령에 기초해서 살려고 애써 왔지만 <소명>을 읽고 나서야 그 의미에 대해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라고 했으며, 옥한흠 목사는 "한 줄 한 줄이 마음을 울리는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은 분량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용이 워낙 알차고 깊은 묵상의 열매로 나온 값진 명언에 해당되는 문장들이 많기 때문에 정리하기가 쉽지 않고, 또 정리하더라도 그 부분적인 정리가 이 책 전체를 이해하고 접하는데 오해나 편견을 심어줄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선은 나 스스로가 이렇게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을 묵상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이코스타 독자들이 이렇게 정리된 글을 보고 짧지만 이 책의 맛과 진수를 살짝 맛보아 알아 이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며, 전체 26장 각 장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형식을 취하되 가능한 한 본문에 실린 주옥같은 문장들을 큰 수정 없이 거의 그대로 옮기는 방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저자는 1장에서 '소명이란, 궁극적인 존재 이유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고 정의한다. 저자의 25년 간의 저술 생활 중에 이 책만큼 자기 속에서 오래도록 뜨겁게 타오른 책이 없다는 고백과 함께 자신이 전임 목회자가 될 뻔했던 경험을 나누며,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소명의 진리는 예수님이 주신 어떤 복음의 진리 못지 않게 중요한 진리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소명이야말로 인간 경험 중 가장 포괄적인 방향 전환이요, 가장 심오한 동기를 유발하는 것, 곧 모든 역사에서 삶의 궁극적인 이유가 되는 것으로서, 믿음의 시대와 믿음의 삶을 시작하고 끝맺으며 인생의 중심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이라고 하며 글을 시작하고 있다.
2장에서는 추구자(seeker)들의 4가지 관점들을 구분하는데, 추구 자체가 전부이고 발견은 중요하지 않다는 현대 지식인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관점, 그리고 욕망 자체를 근본적인 악이나 문제로 보는 동양 철학의 관점과, 갈망하는 목표를 향한 인간의 '위대한 상승'을 추구로 보는 '에로스'의 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구에 담긴 비밀을 '위대한 하강'으로 보는 '아가페'의 관점이 그것이다. 그는 이 마지막 '아가페'의 관점만이 궁극적인 길이며 예수님이 소개하신 길이라고 하면서 추구의 대상은 바로 예수님이며, 진정한 추구자와 진정한 추구를 위한 특별한 시대가 열렸다고 보고 있다.
3장은 소명(call 또는 vocation)이라는 개념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의 기반과 인감됨 자체를 이해하려는 현대인의 추구와 연관되기 때문에 우리 각자에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을 '속박된 존재', '용기있는 존재', 인생을 숙명론적으로 보는 '체질화된 존재'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부름받은 존재'는 자유와 미래를 강조하며, 참된 인간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본다.
4, 5장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누군가(하나님)에게 부름받은 것이지, 무엇인가(어머니의 역할이나 정치나 교직)로나, 어디엔가(도시 빈민가나 몽고)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이차적인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일차적인 소명이 항상 이차적인 소명 앞에 오도록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일차적인 소명이 이차적인 소명으로 반드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총체적인 소명이 종종,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채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영적 이원론에서 비롯된 '카톨릭적 왜곡'과, 영적인 것을 희생시킨채 세속적인 것을 격상시켰을 뿐 아니라 후자를 전자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킨 세속적 이원론의 '개신교적 왜곡'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그 '카톨릭적 왜곡'의 결과로 '전임 사역', 수도원 제도로 인한 계층주의와 영적인 귀족주의, 고차원-저차원, 성-속, 완전한-허용된, 관조적인-활동적인, 일등급-이등급의 구별을 낳게 했고, '개신교적 왜곡'으로 일, 거래, 고용. 직업 등의 단어들이 '소명'을 대신한 소명의 세속화와, 일에 신성을 부여하여 일 중심이나 인간 중심적으로 흐르게 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는 6장에서 8장까지 조금 세부적으로 재능과 직업에 대해 다루면서, 하나님은 보통 우리의 재능에 부합되게 우리를 부르시는데, 재능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재능의 소유자는 '청지기'이며 재능의 목적은 그 재능으로 타인을 섬기는 것이지 자기의 이기심을 위한 것이 아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소명을 발견하는데 우리 각자가 창조될 때 부여받은 재능을 분별하여,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에 걸맞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직업 선택의 기준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직업 소개인이 아니기에 우리의 재능에 맞는 자리를 찾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선택한 자리에 맞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재능을 만드신 것이기에 우리는 그 자리에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본연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8장 이하 13장까지에서는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고 다른 모든 청중을 밀어냄으로 단 한 분의 유일한 청중이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 삶에서 가장 깊은 성장과 최고의 영웅적 자질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열쇠인 하나님의 소명, 그 소명을 통해서 책임성을 지니고 약속(언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법, 개인적인 소명 뿐 아니라 공동체적 소명에 헌신해서 살아간다는 의미, 도달한 자가 아니라 이 생애 동안 항상 '그리스도의 추종자'요, '그 도를 따르는 자'로서 인생의 여정을 걷는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소명의 사람이라고 각 장별로 풍부한 예와 구체적 실례를 들어가며 총체적인 소명의 의미를 다룬다. 그리고 뒤이어 14장부터 17장에서는, 소명의 왜곡된 열매인, 자만심의 유혹, 질투의 유혹, 돈과 탐욕의 문제, 죽음에 이르는 죄인 나태함을 각 장별로 다루며 그 문제의 심각성과 이러한 점들을 극복하는 방법들을 은혜와 참된 소명과 연결해서 제시한다.
또한 18장부터 20장까지에서 소명은 세속화를 지향하는 거대한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영적인 훈련에 정진하고초자연적인 실제를 경험하며 사는 것이며, 삶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갈라놓고, 사적 영역을 개인의 자유, 성취, 믿음이 작동하는 특별한 장으로 강화시키는 과정인 사유화(privatization)를 강요하는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사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서구 그리스도인의 문제점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곳에서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사유화와 더불어, 정치화(politicization), 기둥화(pillarization)의 문제를 지적하며, 사유화는 신앙의 총체성을 부인하고, 정치화는 신앙의 긴장성을 부정하며, 기둥화는 신앙의 변혁성을 약화시킨다고 진단한다. 더불어 소명은 신앙의 총체성을 주장함으로써 사유화에 저항하며, 인간적인 충성과 인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정치화에 저항하며, 사회 속에서 계속적으로 관여하여 사회 변혁을 일으키게 하는 태도와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기둥화에 저항하기에, 소명을 재발견함으로 자발적인 협회의 정신을 재발견하고, 공적인 철학을 분명히 정립해 현대사회에 온전하고 효과적으로 침투해야할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코스타에서 자주 제기되는 고지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개인화된 신앙을 극복하고, '조국 사회의 복음적 변혁을 위한 미래의 크리스찬 지도자들을 세우려는 우리 코스타의 목적'을 생각할 때 많은 점을 시사해 주며, 깊이 연구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21장에서 26장까지에서는 소명은 다원화를 강요하는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해서 광적으로 되지 않고도 일편단심으로 살게 도와주고, 몽상이나 공상, 잘못된 분파에 빠지는 경향, 그리고 적극적 사고와는 구별된, 참된 비전을 갖고 '한낮에 꿈꾸는 자'로서 살아가도록 해 주며, 일상적이고 비참한 일에도 삶을 변혁시켜 평범함의 광채를 부여해 준다고 한다. 그리고 소명은 인생의 어떤 것도 당연시해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함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논의할 때 은혜를 제거함으로 모든 문제를 도덕적인 차원으로 축소시켜 그 도덕적 판단으로 타인을 공격하고 자신의 우월감을 합리화시키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대한 죄와 적대감을 강화시키는,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도덕주의에 빠질 위험성을 극복하게 해 준다. 그리고 소명은 자아를 버리고, 고난받고 배척 당한 예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제자도의 대가를 치루며,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로 살아가고 '거룩한 어리석음'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게 해 준다. 소명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여, 그 때를 맞추기 위해 부적절한 방법을 포기하며, 깨어서 준비하며, 결단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명은 인생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함으로, 이미 도달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미성숙함에서나, 여정 자체가 생활 방식이 되기에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적 과실로 여기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비상한 균형을 이루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적의식을 갖고 살게 해 주고, 또 직업상의 종결을 소명의 종결로 혼동하지 않게 도와주며,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김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돕는다. 그래서 경망스럽고 유창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했다고 하는 교만함과, 자신의 중요성을 유지하려고 피곤함과 절망으로 치닫는 삶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의 재능과 소명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아를 성취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모두 거짓말쟁이로 단정하며, 자신의 비전과 자신이 성취한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 때문에 좌절을 느끼거나, 인생의 이력서에 타협과 실패와 배신과 죄로 얼룩져 있어서 우울함에 빠지게 될 때임에도, 역사의 장막이 걷히고 당신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 그리고 당신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부름 받았는지를 - 알게 되기까지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말고, '부름받은 존재'로 숭고한 비전에 합당하게 살아감으로, 최후의 부르심이 우리 각자에게 올 때 우리가 완전히 소명에 응답했고, 그 도를 좇았으며, 유종의 미를 거둔 상태로 발견되길 바라며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진리의 용사'와 같이 마지막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기를 기원함으로써 책을 맺고 있다.
이 책은 본래 묵상의 열매이기 때문에 하루에 한 장씩 읽도록 기획되었고, 각 장마다 묵상 질문들이 있어서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토론해 나갈 수도 있게 해 준다. 이 책은 전체가 26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장 한 장이 독립적으로 묵상해도 좋을 만큼 여러 예화와, 잘 짜여진 논리 전개와 더불어, 깊은 묵상의 열매들로 이루어진 소명에 대한 여러 정의와 소명의 다양한 각각의 측면들을 세부적으로 다루지만, 그 각각의 장이 마치 퍼즐의 조각과 같아서 책 전체를 읽어 나가다 보면 소명의 총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게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각 장에 걸쳐 수 많은 사람들과 책, 심지어 영화들까지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아주 절제되어 적소에 적절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참고서가 없다는 점이다. 나는 무지하고 제한되고 한정된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이나 책들의 반 정도 밖에 알지 못하는데, 나와 같은 독자들의 진지한 진리 탐구에 필요한 참고서적이 없다는 점은 참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꼭 집에 소장을 해서 두고 두고 읽고 인용하고 묵상해 보고 싶은 책이며, 무엇보다 기회가 되면 꼭 함께 토론하며 더 깊이 소화해 보고 싶은 책이다. 나를 비롯한 이코스타 독자들도 이 책을 통해 인생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하고 성취하며, 자기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살아가는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한다.
중학교 다닐 무렵 우리 가족이 살던 집 안뜰에는 여러 가지 화초와 꽃나무들이 많이 심겨져 있었다. 봄이 되면 개나리와 진달래는 물론이거니와 백목련과 적목련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어서 라일락과 백일홍 등이 여름철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피어나 저들의 자태를 자랑하곤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꽃들이 피어나곤 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뜰 가장자리 한 구석에서 피어나던 모란꽃을 잊을 수가 없다.
모란꽃은 장미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장미꽃보다는 꽃송이가 조금 크다. 특별히 모란은 꽃은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모란을 뜰에 심는 집이 많지 않다고 들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의 주인이 왜 모란을 화단에 심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모란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다. 그 이유는 중학교 2학년 초여름 무렵에 어머니가 모란꽃 옆에 다소곳이 앉아 사진을 찍으셨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는 어머니가 그 꽃을 특별히 좋아하셨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자형에게 카메라를 잠시 빌릴 기회가 있었는데 돌려 드릴 때쯤 뜰 안에 모란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서 기념으로 찍었던 것 같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떠나올 때 그때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확대한 후 코팅을 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늘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쳐다보곤 하였다.
그 사진 속의 어머니는 신기하게도 모란꽃을 많이 닮으셨다. 작은 체구에 둥근 얼굴을 가지신 어머니는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분이셨다. 어머니는 한평생 힘겨운 삶의 무게를 거의 홀로 감당하시면서 살아오시느라 이렇다 할 여인으로서의 향기는 없으셨지만 모란꽃이 가졌던 기품만은 결코 잃지 않으셨다. 그때 사진 속의 어머니는 지금의 내 아내보다 5살쯤 많은 나이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5살 이상은 더 들어 보였다. 이마와 눈가에 드리워진 주름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회상하니 왜 이렇게 마음이 아파 오는 것인가? 어머니는 90년 초 갑상선 암으로 인해 큰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히 수술 후 경과가 좋아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잘 지내고 계신다. 수술을 받기 위해 마취실로 들어가시기 전에 착용하고 있던 틀니를 빼야만 했는데 그 모습을 막내인 나에게조차 보이시기를 부끄러워하시며 입을 가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도 한 분의 여인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한 후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은 잘 맺혀지지 않았다. 한번은 어머니가 서울에 있는 나의 집으로 오셔서 한동안 머무르셨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강제로라도 복음을 증거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요약해서 거의 1시간 동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설명하고, 천국과 지옥 그리고 구원에 관해 말씀을 드렸다. 내 자신은 꽤 조리 있게 말씀을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네가 한 말을 지금은 잘 이해하지는 못 하겠지만 네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어야겠지"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철이 들고 나서도 여러 차례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고 하나님까지도 영접하시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너무 송구스러웠다.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교회 권사이신 숙모님과 함께 아버지 몰래 교회에 나가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를 눈치 채신 아버지의 만류로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의지를 접고 말았다. 나는 그때 이후로 어머니가 지난 해 말(2001년) 이곳 미국 아이오와주 에임스로 오실 때까지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지만 좀처럼 상황의 반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년이면 고희의 나이가 되신다. 지난 해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어머니를 뵈었을 때 고령의 나이에 긴 비행시간에서 오는 피로 때문인지 어머니는 예전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때 어머니는 챙이 있는 모자를 깊이 눌러 쓰시고 등에는 낡은 배낭하나를 지신 채 출구로 걸어 나오셨다. 그러나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25년 전 내가 살았던 집 뜰에 피어있던 모란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시카고에서 아이오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연신 미국 땅이 크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다가 피곤하신 지 미시시피강을 지나 아이오와주로 들어올 무렵 잠이 드셨다가 차가 에임스에 거의 다다를 무렵에 잠이 깨셨다. 그리고는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신 후 집이 왜 이렇게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느냐고 의아해 하셨다. 내가 미국에서는 이 정도 거리가 별로 먼 거리가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 에임스에 도착하신 후 한 달 정도 우리 가족과 함께 머무시는 동안 별로 잘 해 드린 것이 없었다. 학기 중이라서 늘 지친 모습을 보여 드린 것이 못내 죄송스럽다.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동물원에 갔다 온 것과 귀국하시는 길에 시카고에서 미시간호를 훌쩍 구경시켜 드린 것 외에는 미국에 대해서 보여 드린 것이 없다. 내가 좋은 곳을 못 보여 드려 죄송하다고 말씀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에임스가 너무 조용하고 좋았다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다.
어머니는 에임스에 도착하신 후 처음 맞이하는 주일에 우리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셔서 집에 남아 계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간곡히 부탁하시자 마지 못해 함께 교회에 출석하셨는데 그 날 이후 미국을 떠나시기 전날까지 금요찬양모임과 주일예배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다. 아내는 어머니를 위해 교회 도서관에서 김진홍 목사님의 자전적 소설인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시리즈와 원종수 권사의 간증집, 서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LA 사랑의 교회에서 인도하신 부흥회 비디오테이프 시리즈 등을 빌려 드렸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어머니가 꼭 주님을 영접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를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어머니는 김진홍 목사님의 책을 통해 당신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상하시면서 재미있어 하셨다. 그리고 원종수 권사의 책을 읽으시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어머니에게 왜 눈물을 흘리시느냐고 물어 보니까 "이 사람이 어려운 가정에서 고생하며 공부하던 모습이 네가 자라면서 공부하던 모습과 너무 똑 같아 너에게 너무 미안하구나" 하시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시기에 내가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래서 "어머니, 저 때문에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이렇게 미국까지 와서 박사 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는데요" 하고 위로해 드렸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김삼환 목사님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시고 많은 도움을 받으셨다. 하루에 한 개씩 아껴 보시면서 재미있다고 좋아하셨다. 목사님의 구수하면서 시원시원한 설교가 예수님을 잘 모르는 분에게도 꽤 재미있었는가 보다. 어머니는 아내의 이와 같은 노력에 힘 입어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셨다.
어머니는 특별히 금요찬양시간을 좋아하셨다. 비록 가사의 내용과 곡은 잘 몰랐지만 찬양이 주는 은혜가 어머니의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예배시간보다는 찬양시간을 더 좋아하셨다. 나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함께 금요찬양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다. 철이 들고나서 지금까지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늘 가시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꼈어야 했었다. 어머니의 연배에 한국 땅에서 많은 고생을 겪으면서 살아오신 어머니들이 어디 한 두 분이겠는가? 그러나 그 분이 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안타까움은 특별한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드린 금요찬양시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었다. 불혹의 나이에 고희를 앞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아름다운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귀한 은혜를 받았으니 나의 기쁨은 참으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남은 생애 동안 그 추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많은 기억들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그 시간은 모란꽃처럼 선명히 내 마음에 남아 언제나 하나님과 어머니의 크신 사랑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주일 예배시간에 어머니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목사님의 말씀이 끝나고 헌금을 드리기 전 성도들과 함께 찬양을 드리고 있는 중에 갑자기 어머니가 고개를 의자 밑으로 떨구시면서 울먹이기 시작하셨다. 나는 그 순간 매우 당황하여 어머니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어 보았으나 어머니는 대답을 하시지 못 하고 예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소리를 죽여 가면서 울먹이고 계셨다. 나는 그때 어머니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신 것을 깨달았지만 무엇 때문에 은혜를 받았는지 알지 못 했다. 예배가 끝나서 모든 성도들이 친교실로 나갈 때 어머니에게 "이제 일어나 가시죠" 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중에 갈 테니 먼저 가 있어라"고 말씀하시고 계속 그 자리에 앉아서 울고 계셨다. 후일에 어머니를 한국으로 배웅하고 돌아와서 아내에게 어머니가 그때 왜 우셨는지 물어 보았다. 어머니는 나보다 아내와 속 깊은 이야기를 더 잘 나누곤 하셨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예배시간에 갑자기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온 70 평생이 너무나 아쉬워 하염 없이 눈물만 흘리셨다고 한다. 짧은 한 달 간이지만 우리 가족과 함께 주의 몸된 교회를 오고가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그리고 그분을 믿는 것이 얼마나 기뻐고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되신 것이다. 예수님을 진작 알았더라면 어머니가 지고 오셨던 인생의 무게가 지금보다 훨씬 가볍고, 이 세상이 주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하셨을 텐데 70의 고개를 지나고 나서야 그 진리를 깨달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원통한 것이었을까? 진작 주님을 알았더라면.........
어머니와 에임스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보내는 날 저녁에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오늘밤은 어머니와 함께 자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부모가 비록 나이가 들고 자식이 장성했을지라도 부모 마음에는 자식이 언제나 어린애와 같아서 함께 자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일텐데 어머니는 의연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어 하셨다. 대신 어머니는 "떠나기 전에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이 시간에 기도를 해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자식인 제가 어떻게 어머니를 앞에 두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렸다. 그때 나는 머릿 속으로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다른 많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그 후손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어서 자식이 부모를 앞에 두고 안수 기도하는 것이 예의상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어머니에게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나서 온 가족을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불러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다. 찬송가를 부르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은 후 막내 윤재부터 윤진이, 아내를 거쳐 마지막으로 내가 어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을 위해 기도 드렸다. 어머니께서 이곳에서 받은 은혜를 귀국하신 후에도 변치 마시고 잘 간직하시라고 온 가족이 함께 기도 드렸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거의 석 달이 지났다. 한국에 전화를 드릴 때마다 어머니의 신앙생활이 궁금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곳에서의 나의 학업도 끝나고 우리 가족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때가 되면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시간 어머니를 위하여 또 주님을 믿지 않고 있는 모든 젊은이를 위해 이렇게 기도 드린다. "하나님, 저의 어머니가 이곳 에임스에서 하나님 앞에 흘린 회한의 눈물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개인적인 주님으로 영접하지 못 한 젊은이들이 이제라도 주님을 영접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그들은 저의 어머니와 같이 인생의 황혼에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에필로그
나는 앞으로 언젠가 다시 뜰이 있는 집에 살고 싶다. 그리고 그 뜰에 어릴 때 내가 보았던 여러 화초들과 꽃나무를 심을 것이다. 계절마다 제각기 다른 꽃들이 아름다운 향기와 자태를 뽐내면 그들 가운데 서서 온 몸으로 저들을 느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몇 그루 모란을 뜰 가장자리에 따로 심어 정성 드려 가꿀 것이다. 그리고 모란꽃이 탐스럽게 필 때면 나의 어머니를 생각할 것이다. 나는 특별히 미국 에임스 반석장로교회에서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고 주님께 찬송을 드리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와 함께 그날 저녁 함께 있었던 사랑하는 여러 교우들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쓸 것이다. 비록 나이로 인해 기억이 쇠퇴해져 그들 중 겨우 몇 명의 이름을 떠올릴 수 밖에 없겠지만....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
중외합작 대학으로서 중국측 조선족 교직원과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 학교의 형편상, 대내외적인 행사 때마다 만찬 석상에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그런데 그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술잔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외국에서 건너온 우리 학교의 외방 측 교직원들은 한결 같이 지독한(?) 예수쟁이들이니 술을 입에 댈 리 없고, 추운 지방에서 독한 술을 입에 달고 생활하던 조선족 분들은 으레 끼니 마다 반주를 곁들여야 하는 것으로 풍습을 지키고 있으니 양 진영의 문화적 이질감이 심각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곳 조선족들의 술 습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예전에 술꾼으로 행세하던 경험이 있는 나에게도 가끔씩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이 연출되곤 한다. 보통 조선족 사회에서는 대략 점심시간에 식사하러 나가서 얼근히 취한 후에는 집에서 한 두 시간 휴식을 취하고 들어오거나 내키지 않으면 아예 샤발(중국말로 퇴근이라는 뜻)을 해 버린다. 그러니, 우리 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한국식으로 점심시간을 정확히 지켜가며 일을 하는 풍토 자체도 그들에게는 쉽게 받아 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자기들끼리 식사하러 나갔다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들어오던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일과 시간에 술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또한 느끼기에 그 버릇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차차 고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처럼 만에 함께 하는 저녁식사 모임이 있을 때에는, 그 동안 억눌렸던 술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 외국인 교직원들에게 술잔을 마구 권해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녀 평등의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익숙해진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술잔을 돌려가며 차례로 한 마디씩 인사말을 하는 것을 술자리의 예절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호의에 한사코 거절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얄밉고 도무지 되먹지 못 한 족속들로 비쳤으리라는 것도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일단 한잔을 받기 시작하면 옳다구나 덤벼드는 그 술 세례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외방 측 교직원들은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고 모질게 거절하기 일쑤이다. 그러니 개교 초창기에는 술로 말미암아 서로 얼굴 붉히고 좌석이 서먹서먹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별히 중국측 부총장이나 당 서기와 같은 나이 많은 영도급(중국에서는 지도자를 영도자라고 함) 인사들이 건네주는 술잔은 거절하기도 민망하여 속으로는 미안한 감정이 여간 쌓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들을 해소라도 할 요량으로 가끔 집에 초대라도 할라치면 또 걸리는 것이 그놈의 술이었다. 이곳의 풍습을 따르자면 손님을 초대해 놓고 술을 내놓지 않는 것과 주인이 술잔을 비워 대접하지 않는 것은 전혀 예의에 어긋난 것이라 하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중국측 부총장과 더불어 타지에서 온 조선족 교수들을 몇 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데, 밥상을 앞에 두고 술 내놓으라고 몇 번 고집을 피우더니만 기분이 상하였던지 식사가 끝나자마자 횅하니 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우여곡절 가운데 몇 년을 지내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들이 들어가며 결국은 우리의 술 안하는 습관을 그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요즘은 억지로 권하는 일도 기를 쓰고 거절하는 일도 별로 없는 걸 보면 쌍방이 술 문제에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셈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나에게 이렇듯 술을 마시기 싫어할 뿐 아니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 것이 놀랍고 감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독히도 술을 좋아했던 과거를 가진 나로서는 가끔은 분위기를 맞춰주기 위하여 중방측 영도들이 강권하는 술잔을 받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그들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그들을 대하며 그들 역시 속히 술을 끊을 수 있는 힘을 얻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할 뿐이다.
몇 년 전 결국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신 중방 측 부총장 강의석 선생이 생각난다. 고령에다 혈압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던 그 분을 대할 때면 안쓰러운 감정이 몰려오곤 하였는데.... 언젠가 그 분과 함께 상해로 출장간 일이 있었다. 늦은 밤 단 둘이 남게 된 후, 틈을 타서 내가 어떻게 술을 끊을 수 있었는가를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신앙 간증을 하고 만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참 놀라운 것은, 술잔을 기울이며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양반이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술자리에서 내게 대한 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외부 인사와 더불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될 경우, 내가 또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미리 알고서는 아예 예비지식이 없는 제 삼자들을 향해 웃으며 "저 친구는 우리가 몇 년 동안이나 먹이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독종이야, 독종---. 그냥 우리끼리 하세" 하며 다른 이들이 나에게 술을 권하지 않도록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 주는 따뜻함을 보였던 것이다. 상해에서 그에게 전한 복음이 과연 그의 영혼에 어떻게 비추었는지.... 하나님만 아실 일이다.
(2)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깝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세월들이었지만, 나의 학창 시절을 회상해 보면 텅 빈 강의실의 창가에 서서 데모대의 외침과 최루탄 연기에 휩싸인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다가 어둠이 깔리면 학교 근처의 싸구려 주점에 삼삼오오 몰려 앉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무리들 가운데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어두운 모습만이 떠오른다. 캠퍼스 내에서는 내 삶을 전부 바쳐 외쳐댈 만한 어떤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짙은 안개 속에서 휘날리는 연 꼬리를 바라보듯 진리와 사랑의 끝자락을 찾아 허공을 헤매는 생활을 하며 술잔만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10.26에서 5.18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시국에 대학 생활을 해야했던 사람으로서 술꾼들이 항상 토로하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시대적 변명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나의 음주 행각은 그 이상의 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 같다. 선천적으로 아무리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 끝까지 남아서 마지막 술잔까지 다 비우고야 일어나는 습성이 붙다보니 결국 온 몸이 알코올에 깊이 찌들어 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더구나 술이 어느 이상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 속 깊숙이 감추어 놓았던 날카로운 비수들이 내 입술을 통해 쏟아져 나오곤 하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것을 즐기며 찾아오는 술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술좌석에서는 항상 인기가 있었고, 그것이 내가 술을 탐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술 행각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가 '선험적 술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마셔도 알코올에는 무감각한 이상체질의 소유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는 자신의 주량을 제대로 측정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술기운이 가져다 주는 일시적 흥분을 그가 미처 맛보기도 전에, 그의 앞에는 팔방으로 기울이고 엎드린 채 무절제한 쾌락 이후에 들어가야만 하는 침묵과 고통의 세계로 침잠해 버린 시체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면, 그는 술자리에서 방금 전까지 침 튀기며 오가던 온갖 종류의 사회정의와 철학사상과 민중해방의 부서진 말 부스러기들을 어지러운 탁자에서 쓸어 모아 쓰레기통 속으로 처 넣으며 전우의 시체들을 유가족에게 운구하는 힘겨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축 늘어진 시체를 어깨에 매고 호송 차량으로 운반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보름달이 휘영청 드리우고 있던 자정 녘의 대문 앞에서 탈춤을 추는 기묘한 자세로 엎드려 취면(醉眠)에 빠진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간신히 집안으로 끌어들인 후, 어머니로부터 어렴풋하게 들었던 한탄 섞인 이야기의 내용을 기억해 내었다.
그의 가계(家系)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이 나는 그런 족보를 지닌 가계였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는 - 그 이전은 그냥 미루어 짐작토록 하라 - 온 동네가 알아주는 모주꾼으로서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취해서 다니다가 말년에 술기운에 실족하여 동네 다리에서 떨어진 후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그를 이어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말 국운이 기우는 것을 한탄하며 망국 이후에는 일체 문밖 출입을 안하고 술만 퍼 드시다가 마침내 술독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는 그 대목을 특히 좋아했는데, 술독에 빠졌다는 표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퍼내기 위해 큰 항아리 속을 거꾸로 더듬다가 처박히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비유적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표현이 지니는 이중적 묘미를 상실할까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종의 돌연변이가 발생했는데, 그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나타난 두 분의 형제가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분이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본즉, 그 형제는 어린 시절 당신들의 어머니가 - 그러니 그에게는 증조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 지아비의 술 행각 때문에 너무나 고생하는 것을 뒤에서 눈물겹게 바라보다가, 우리 형제는 평생 입에 술을 대지 말자는 비장한, 일종의 도원결의(桃園結義) 같은 것을 했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 그 두 분은 술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하여 국내외 학계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이 되셨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대목에서 그의 어머니는 그러니 너도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를 통해 흐르는 술의 계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윗대에서 한 박자 쉬었던 여세를 몰아가며 4형제가 사회 각층에서 알아주는 거포로서 맹활약을 벌이게 된다. 물론 그의 아버지 역시 당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당신이 학자의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술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뼈 아픈 시대 상황, 즉 6.25 전쟁과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변명을 술기운이 오름에 따라 벌겋게 늘어 놓곤 하였다. (자전소설 중 발췌)
그 당시에 나는 일주일에 닷새 가량을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되니 거의 체력이 닿는 데까지 마셨던 것 같다. 그나마 며칠씩 건너뛰는 날은 평소에 폭음을 하던 연고로 술병이 나서 쉬었을 따름이다. 그런 동안에도 나는 끊임 없는 술의 예찬가였을 뿐 아니라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내가 그토록 술을 퍼부어 대었던 것은 내 마음 가운데 커다랗게 뚫려있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때 교회 생활을 통해 천국의 안식을 맛보았던 나에게는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의 마음처럼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가슴 속의 텅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한 무렵에도 이미 나는 알코올 중독의 초기적 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매일 저녁 술을 마셔야만 정신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오히려 온몸 구석 구석에 퍼져 있던 알코올 기운이 빠져 나가면 갑자기 찾아 오는 무력감과 초조감이 엄습하였고 손이 떨려서 커피 잔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체력의 소진으로 인한 불면증에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고통이 교만할 때로 교만해져 있던 나를 절망이라는 벼랑 아래로 내몰아 치기 시작하였고, 망각 속에 까마득하게 밀려나 있었던 하나님의 이름을 어슴프레 다시 떠올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도 생각된다. 어찌 되었건 예수 믿는 아내를 만나 내 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회복되어가던 무렵, 나는 지독하게 술 권하는 한국 사회를 떠날 수 있는 행운을 잡게 되었고 그것을 아쉬워하는 술꾼들의 마지막 고별주의 세례를 온 몸에 뒤집어 쓰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던 내가 미국 생활 3년 만에 완전히 예수쟁이로 돌변하여 돌아오니, 과거의 추억을 싸 짊어지고 내가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하던 술친구들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때로는 실망을 너머 조롱과 분노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을 떠올리면 곧바로 술을 연상하던 그 친구들이 한결 같이 의아해 했던 것은 어떻게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안 마실 뿐 아니라 아예 마시고 싶은 생각조차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더구나 내가 단순히 술을 마시기가 싫어진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강권함에 못 이겨 조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내 몸이 전혀 그것을 받아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역시 변해버린 내 자신의 모습이 그저 놀랍고 신기하여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술을 안 마시게 된 것이 내가 믿게 된 종교의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마시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도 참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도행전을 읽던 중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세례를 받고 거리로 몰려나온 성도들의 갑작스런 변화를 보고 사람들이 새 술(new wine)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장면을 접하고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결국 내가 술을 못 마시는 체질로 바뀌어 버린 것은 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새 술에 취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예수 안에서 성령 세례로 완전히 취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과거에 그토록 목 말라 하던 옛 술이 필요치 않을 뿐 아니라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할 수도 없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제 내가 마신 새 술은 취기가 없어질 때 마다 자꾸 마셔야만 하는 옛 술과는 달리 내 뱃 속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취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보니 문득 다시 한 번 깨달아지는 사실이 있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나는 오직 술 취한 상태에서만 온몸에 열이 날 뿐, 술이 깨고 나면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마치 냉혈동물처럼 다시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것이 내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온몸의 체온까지도 따뜻하게 바뀌어 버린 것을 늘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그것은 이제 내 안에 오셔서 항상 함께 계신 성령께서 새 술의 기운으로 더운 열기를 늘 발하고 계신다는 물리적인 증거를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장 18절)는 말씀처럼 세상의 좋다하는 어떤 술도 채울 수 없었던 내 영혼의 갈증을 예수라 하는 새 술이 완전히 채워 주었으며, 내 몸 속에 쌓여 있던 옛 술의 온갖 노폐물들을 다 몰아내고 진정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치유해 주셨던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도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던 이방인들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 옳았던 것이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말하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장 12-3)
이 글은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The Korean Church of Champaign-Urbana)를 중심으로 쓰인 것이다.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는 지명도 높은 일리노이 주립대학(university of Illinois)이 있는 미국 일리노이주 샴페인-어바나(Champaign- Urbana)라는 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인구는 약 2000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본교회의 교인은 아이들을 포함하여 매 주일 약 500명 이상이 출석을 한다. 본교회의 금년도 교회표어는 "선교에 열심인 교회"이다. 이 표어를 가지고 필자는 새해 첫 주일과 둘째 주일에 설교를 했다.(kc-cu.org 교회홈페이지 참조) 설교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눅10:25-37)이다. 본글에서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베푼 사랑의 전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를 통해서 필자는 본교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유학생 정착 도움 사례를 중심으로 교회의 선교 사역을 소개해 보겠다.
1. 주막인 교회로 데리고 오라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는 유대 광야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광야길로서 매우 가파르고 험난하다. 또 강도가 자주 출현하는 곳으로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이 광야길을 여행하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어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그 때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를 광야길에 있는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영적인 의미에서 그 주막은 교회이다.
유학생들은 공부와 연구라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서 날마다 이 광야길을 걸어 다닌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참으로 피곤하다. 나그네요, 외국인이 된 유학생들이 이 광야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필요한 것은 주막이다. 그들이 걸어가는 목적지까지 잘 가기 위해서는 이 주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 주막은 우리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와 같다. 작년 한 해에 이 주막인 우리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의 숫자는 아이들을 포함해서 약 230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교회는 주막과 같이 매 년 떠나가는 사람들과 새로 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
교회는 어떤 곳인가? 이 세상에서 강도 만나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쉬게 하는 곳이고, 치료하는 곳이다. 강도 만난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그들은 죽게 되는 곳이다. 살리는 곳이 교회이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다. 유학이라는 어려운 광야길에는 많은 강도들이 숨어 있다. 이런 저런 강도를 만나서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자들을 도와 주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인 교회로 데리고 가는 일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광야길에 내버려 두면 죽기 때문이다. 광야길에서 강도 만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는 전 과정을 우리 교회는 선교라고 정의한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선교에 있다. 이 선교가 본 교회의 사명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학원목회하는 목회자의 철학이기도 하다. 광야길에 강도 만난 자들을 주막인 교회로 데리고 오는 전 과정을 우리는 열심히 하려고 한다. 그래서 2002년도 본 교회의 표어를 "선교에 열심인 교회"라고 정했다.
2. "그를 보고"
광야길을 여행하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죽도록 맞아 길가에 버려져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강도 만난 사람의 이미저리(Imagery)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교회는 강도 만난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보게 된다. 이곳으로 연구나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이 매년 엄청나게 많이 오는데 다 그들은 교회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필자는 우스개 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은 다 미국이라는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차가 없으니 앉은뱅이요, 듣지 못하니 귀머거리요, 동네에 사람들을 볼 수 없으니 양로원에 온 것이다"
매년 가을에 일리노이 주립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숫자는 약 200이 된다. 이 200명의 명단을 한인학생회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입수을 한다. 이 학교는 매년 이 정도의 숫자로 입학허가서를 내어 주었다. 먼저 학원선교하는 교회는 이 명단을 입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강도 만난 사람이 이뿐인가? 학위라는 목적지를 행해서 열심히 걷다가 원치 않게 강도 만나 신음하고 있는 여러 학생들을 보게 된다. 강도 만나 가정이 깨어진 가정, 강도 만나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사람, 강도 만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신음하는 사람, 강도 만나 시험에 떨어진 사람, 강도 만나 교수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신음하는 사람.... 많이 보게 된다. 길가에 버려진 강도 만난 사람을 내버려 두면 죽게 된다. 여기의 선교의 긴박성이 있다. 선교의 의식을 가지고 보면 온통 주변에 강도 만난 사람들을 보게 된다.
3. "불쌍히 여겨"
입학 허가를 받은 명단을 입수하면 우리는 작전을 짠다. 즉 불쌍히 여기는 행위로 옮겨간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에 들어간다. 정착도움위원회가 가동이 된다.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기도하는 가운데 지혜를 얻는다. 그래서 편지를 쓴다. 그 편지의 전반적인 모토는 이것이다 - "도움은 기쁨이다." 이렇게 기도하면 한 영혼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따르는 교회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이다. 지금은 디지털 세상이다. 아날로그 시대는 감성 분할의 시대였다. 그러나 현재의 디지털 시대는 감성융합의 시대이다. 즉 사운드와 이미지, 텍스트, 데이타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는 시대이다. 이렇게 인간의 감성들이 융합되어 극대화되고 있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접근방법도 이런 면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감성지수를 높이는 방법은 기도이다. 우리 교회의 기도훈련은 이렇다. 1) 성경공부가 끝나면 중보기도를 한다. 이것이 구역의 활성화의 힘이 된다. 2) 새벽기도회를 강조한다. 매일 평균 20명 정도 참석을 한다. 또 금요 중보기도 모임이 있다. 새벽기도회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만을 더 언급을 하겠다. 이코스타에서도 코스타 강사들의 세미나를 요약해서 웹진에 올린 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가 몇 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일이었다. 그 일을 우리는 '새벽광야훈련 60일 작전'이라고 명명해서 실시하고 있다. 방법은 코스타 테이프 60개를 선정하여 60명의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배부한다. 그러면 이 테이프를 받은 학생들은 정한 날짜에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들은 말씀을 나눈다. 말씀 나누는 시간은 15분 정도로 제한한다. 전하는 방법은 세미나테이프를 요약하거나 테이프를 듣고 은혜받은 것을 나누든가, 맡은 이가 자유롭게 말씀을 나누게 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은 프로그램에 대하여 하나 같이 좋다는 평가를 하였고, 또한 그들이 많이 은혜를 받았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작은 코스타가 본 교회에서 또 열린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또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기도회에 참석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게 되고 나아가 리더십 훈련을 시키는 좋은 기간이 된다.
4. "가까이 가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고 가까이 갔다. 선교를 하려면 선교의 대상에게로 가까이 가야 한다. 우리 교회는 도움 요청을 받은 사람들이 곧바로 달려간다. 이것이 중요하다. 본인이 못 갈 경우에는 정착도움위원회에 연락을 한다. 이 일을 신속하게 한다. 그래서 정착도움위원회는 핸드폰을 항상 켜놓고 있다. (정착도움위원회는 도움을 효율적으로 주기 위해서 구성되었고 그 위원회를 통해서 지시를 받도록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실제로 도움을 주는 맨파워(Man Power)는 각 구역이다. 대학생 그룹은 대학생 그룹에서, 대학원생 싱글 그룹은 그 그룹에서, 대학원생 기혼 그룹은 그 그룹에서, 방문 교수 그룹은 그 그룹에서 도움을 주도록 짜여져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할 것인지를 당장 파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까이 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구세주를 만난 격으로 반가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도움을 원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도움을 주고자 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여기서 한 모토는 이것이다. "용기있는 자가 빨리 정착한다." 빨리 도움을 청하라는 뜻이다. 강도 만난 사람은 모든 면에서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옆에서 상황을 알려 주는 것이 선교하는 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샴페인 어바나 지역에 교회가 여섯이다. 참고로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 새생명교회, 예수사랑감리교회, 한우리 교회, CFC 교회(한인영어회중), 천주교 등이다. 이 교회들이 연합으로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바나 샴페인 교회 협의회다. 그래서 이 교회 협의회 이름으로, 입학허가서를 받은 학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주겠다는 우리들의 마음을 전한다. 각각 다른 도움의 손길을 주겠다고 각각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한 봉투에 각 교회가 준비해 온 도움정착에 관한 안내지를 넣는다. 이 편지를 받는 입장에서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좋은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도 가까이 가는 전략 중에 아주 좋은 일이다. 이 일을 교회들이 매년 같이 하고 있다. 참고로 하나를 더 언급을 하면 이곳에서는 샴페인 지역 목회자들의 모임을 일 년에 두세 번 갖는다. 모여서 나누는 안건은 부활절행사와 정착도움을 주기 위한 일과 친목도모이다. 그리고 매년 부활절 행사는 같이 힘을 합해서 치루었는데 그때마다 북녘동포를 돕기 위해 헌금을 모아 보내는 일을 하였다.
5.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자기 돈을 썼다는 의미이다. 선교하는 일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했다는 뜻도 된다. 자기의 시간, 자기의 재능을 쓴다. 이렇게 할 때에 선교의 불은 활활 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새로 오는 사람 정착을 우리가 도와준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가지고 몇일 희생하면 모두가 다 탄복을 한다. 그래서 도움을 준 구역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인간 관계회복이 싑게 이루어진다. 타주에서 이사를 왔다면 이사 오는 그날 맡은 구역이 이사짐을 날라 준다. 이러면 100% 확실한 교제와 만남이 이루어진다. 성경공부 몇 달 한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모토를 만들어 낸다. "자기 것을 나누어 주면서 하는 것이 선교다" 같은 유학생들이 도움을 주니 더욱 친근해진다. 정보도 쉽게 주고 받을 수가 있어 좋다. 핸드폰 값이 200불이나 들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열심히 교회에 나오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자동차로 집을 구하거나 차를 사주거나 그로서리를 가게 하거나 할 때에 차로 가기에 거기에 드는 기름값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감수하고 도움을 주고 있다. 여기서의 모토는 이것이다. "정착일체를 도와준다" 여기에 들어가는 시간, 재능. 헌신....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리라 믿는다.
6.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을 데리고 갔다."이것을 우리 교회는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 쉽게 말해서 자기 자가용에 태워서 교회에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 "오세요"라고만 해서는 오지 않는다. 처음 온 사람에게는 차도 없다. 강도 만나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자기 발로 오겠나. 힘이 없다. 여기에서 착안을 했다. "가서 모시고 오라"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교회 밴으로 주일마다 기숙사에 찾아간다. 그리고 자기가 도와 줄 형편이 못되면 얼른 정착도움 위원회에 연락을 하게 한다.
7. "돌보아 주고"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무엇을 했는가? 돌보았다. 여기서 '돌봄'이란 단어가 시선을 끈다. 어떻게 돌보았는가? 강도 만난 사람의 상태를 보아가면서 음식도 먹이고, 약을 먹이고 하면서 돌보았을 것이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영양 섭취를 잘 해야 한다. 육체의 건강은 음식물에서, 정신의 건강은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먹어야 한다. 영혼이 건강하려면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이처럼 강도 만난 유학생들에게는 "말씀"으로 잘 먹이는 돌봄이 매우 필요하다. 이들이 졸업을 하면 장래에 사회에서 지도자 그룹에 속하여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의 위치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에 이들을 신앙으로 잘 훈련시킨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이 신앙의 훈련을 잘 받게 되어 앞으로 평신도 지도자가 되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사역을 잘 감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신도를 신앙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본 교회의 사명이요, 목표이다. 이 사역은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필자가 지난 7년 동안 학원목회(campus ministry)의 경험을 통해서 느낀 것은 공부하는 유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성훈련이라는 것이었다. 유학생들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경공부의 방법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지적인 방향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성경공부의 상황에서 그들은 영적으로 메마를 수 밖에 없다. 또 유학생들의 사고방식은 매우 합리적이다. 합리적이란 무조건 수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해할 수 있어야만 수용한다는 뜻이다. 유학생들은 납득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성경공부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의 경향을 간파한 필자가 늘 생각하여 온 것이 있다. 이 유학생들의 소그룹 성경공부는 지식 위주의 성경공부가 아니라 영성적 성경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지성적인 성경공부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라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성경공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즉 성경을 통전적인 시각으로 보며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이런 목표와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필자는 소그룹 성경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그 결과 본교회의 소그룹 성경공부는 현재 활발하게 잘 운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교회에는 양육프로그램들이 있다. 먼저 양육훈련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 1) 영접/확신 프로그램 2) 서바이벌 프로그램 3) 사역자 프로그램 4)제자훈련 프로그램. 이 밖에 주 중에 모이는 모임은 30개가 넘는다. 그 중에 말씀 위주로 모이는 소그룹 성경공부 그룹은 다음과 같다 - 대학부 8개 그룹, 제1청년회(대학원생 싱글) 4개 그룹, 제2청년회(대학원생 기혼그룹) 12개 그룹, 방문 교수 1개 그룹, 일반인 4개 그룹. 그리고 그 공부를 효율적으로 잘 운영하기 위해서 대략 다음과 같은 방침을 만들었다. 1) 성경공부 인도자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한다. 2) 토요일 오전 10시에 모여서 2시간 공부한다. 인도자는 목사가 한다 3) 구역장도 6개월 단위로 돌아간다. 4) 각 가정에서 매 주일 모임을 갖는다. 5) 구역장은 매주일 구역의 상황을 자유롭게 목사에게 이메일로 보고한다.
8.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었다는 말은 치료의 기간이 많이 걸린다는 뜻이다. 한 사람을 살리는 데에는 많은 희생과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이것이 없으면 학원목회가 힘이 든다.
9. "....내가 돌아 올 때에..."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돌보고 나서 그 이틀날에 떠나가면서 주인에게 돈을 더 준다. 그리고는 "만일에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올 때에 다 갚아 주리라" 말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선교에 있다고 본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선교를 해야 한다. 그 선교의 내용은 마태복음 4장 2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3대 사역이라고 본다. 그 사역은 어떻게 하는가? 1) 두루 다닌다. 2) 가르친다. 3) 전파한다. 4) 고친다. 이렇게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셨다. 예수님이 하신 이 일이 교회가 해야 하는 교회의 본질이다. 이 세 가지를 잘 감당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여기서 신앙의 행복이 시작된다고 본다.
이제 결론을 맺어본다. 본교회는 "광야"라고 하는 단어를 즐겨 쓴다. 본교회에서 광야를 언급할 때에 즐겨 쓰는 문구들이 있다. "광야는 지나가는 곳이다. 광야는 훈련의 장소다. 광야는 힘들고 어려운 곳이다. 광야에서 비전(가나안)을 보아야 한다...." 본교회가 있는 도시 '샴페인'도 '대평원, 대초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 본교회 회지의 이름도 "광야에서"이다.
필자의 목회 장기목표(long-term goal) 중 하나가 평신도 사역훈련 프로그램이다. 그 프로그램 중에서 소그룹 성경공부(Small Bible Study)가 가장 핵심적인 프로그램인데 그렇다면 유학생들의 소그룹 성경공부는 어떤 경향과 성격의 성경공부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영성적인 차원에서 성경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현재 목회 상황의 도전이다. 그래서 필자는 삶의 변화에 영향력을 주는 차원의 성경공부가 교회에서 이루어지도록 최대한 열심을 쏟고 있다.
이 말씀 훈련을 잘 받은 자들은 광야에서 강도 만난 자들을 도와줄 수가 있다. 도움을 베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보고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사랑의 실천은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베푼 사랑에는 조건이 없었다. 이런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되도록 교회가 훈련을 한다면 분명 하나님의 나라는 크게 확장될 것이다.교회의 목적은 선교에 있다. 그런데 그 선교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의 동기로 모든 신앙활동을 하게 되면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의 인식의 폭이 넓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크게 두 가지 장벽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마음의 우둔함"입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원죄에 가려져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죄성에 이끌려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거나 감소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진리에 대한 명암(brightness) 을 감지할 수 있는 인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구원받은 자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의 경우 이 감지 능력은 전적으로 마음의 순수성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결정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생각의 폭이 좁은" 결과입니다. "생각의 폭"은 어떤 현상의 넓이와 깊이를 보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생각의 넓이"는 한 현상의 원인에 대한 이해와 또 그 현상의 파장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생각의 깊이"란 그 현상을 원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폭은 세상적 공부를 통해서만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많은 생각/묵상을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만의 세상을 넘어설 때야 비로소 진리를 진리로 볼 수 있게 되지만 이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의 폭을 확장하는 데 있어서는 물론 외부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이는 결국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끊임 없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 즉 묵상과 기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고정관념이 너무 깊게, 또 오래 간직되어질 때 점점 더 생각의 폭이 제한을 받게 됩니다.
진리는 유일하며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고 해서 진리가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의 우둔함과 생각의 폭의 차이 때문에 성경을 여러 가지로 풀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이라고 해서 꼭 진리에 더 가까워지거나 생각의 폭이 넓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생각 없이 사상의 유행을 따라가는 자들의 생각을 진보적인 생각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릴 때 일찍 받아들여 자신의 생각이 형성되는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며 습득하는 것이 한 사람의 생각이 올바로 정립되는데 가장 귀중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동물들의 이름을 물어보신 하나님의 모습은 아담과 참된 인격적 교제를 원하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궁금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인격적 교제는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미리 정해 놓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타락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모든 구원 얻을 자들을 "예정"해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30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구원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의 표현인 "예정론"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은 위 두 가지 가르침이 다 "진리"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잠시 살펴본 것과 같이 성경은 자유의지와 예정론 두 가지를 다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하지 않게 생각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의 폭"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생각이 시간에 대하여 자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십니다. 시간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모든 것, 모든 상황을 활용하십니다.
Optimum Combination of Sequences of Human Decisions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시간에 구속받으며 계속되는 흐름으로 보지 않고 "짧은 토막의 시간들의 종합체"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짧은 토막의 시간들 안에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을 한다고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자유의지의 온전한 표현을 위해서는 각 토막까지 이르는 모든 과거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토막의 시간에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모든 토막 안에 있는 인간의 지식이 동시에 바뀌게 됩니다. 또한 한 인생의 토막 토막이 이와 같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토막도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됩니다. 바로 이런 토막의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외부적 요소의 자극을 최대한 가하므로 그 토막의 시간의 종합체인 한 인간이 매 토막마다 올바른 판단하기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combination 이후 가장 최고의 combination이 결정될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역사로 굳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외부적 가능한 방법들과 토막들의 최고의 combination 을 통해서도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도록 예정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굳어진 역사의 토막 토막을 연결하여 통과하는 "의식"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대한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예정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전도서 11장9절에서 청년들에게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모든 일을 하되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판단은 올바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가 심판 받을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매 순간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달려 있고 바로 그 결정에 따르는 행동에 의하여 우리가 심판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매 토막 토막마다 긴장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돌이킬 수 없는 역사로 굳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는 누군가의 간섭이 없는형태, 즉 타자의 간섭이 없는 의지의 결정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정과정에 있어 누군가의 간섭이 들어간다는 것은 자유의지라는 개념자체가 성립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만.. 신이라고 해도 인간과 타자라는 거리는 벗어날 수 없다고 보여집니다. 게다가 그 타자가 존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품고가는데 큰 모순점이 생겨진다고 보여집니다.
올해는 대통령선거를 비롯해 중요한 선거들을 치루게 되는데, 벌써부터 예상후보자들이 자신이 적격자라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대체로 부정적이다. 정치가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소리만 크고 실천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정치가들은 입법과 법의 집행을 통해 국민들의 생활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정치나 정치가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 모를 일이다. 정치가 잘 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훌륭한 정치가가 선출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훌륭한 정치가가 뽑히도록 노력하는 행위는 애국하는 일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정치가들이 선출되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잘 뽑아야 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막상 유권자들은 후보자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 결정이 그리 쉽지 않다. 그렇다고 교회에 다닌다는 조건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을 택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정당만 보고 사람을 택하는 것도 반드시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후보자들에 관한 여러 정보들을 모으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 후보자의 됨됨이를 알아보자. 열심히 일한 흔적이 있는가 보자. 땀 흘린 흔적이 없는 사람은 우리의 지도자가 되기에 부족하다. 고통 가운데 있어 본 사람들이야말로 서민들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가 제시하는 정책과 비전을 살펴보자. 그가 내세우는 정책들은 실현가능성이 있는가. 대다수의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는 내용인가. 전혀 새로운 것을 주장하여 신선감이 있는 정책이라면 더욱 실현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과거의 것을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분쟁만 일으키기 쉬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개혁자가 아니다.
이것 이외에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다. 그가 도덕적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보자. 이것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것은 사람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정당에서 미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을 공천해 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체크해 보자. 우선 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보자.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부족하다. 그가 정말 거듭난 사람인지 보자. 거듭난 후에 그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였는가 보자. 그가 그 직업을 기꺼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인지 보자. 이런 사람은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아도 큰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욕심을 부린다면 소문으로라도 그의 가정생활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자. 부부관계는 원만한가. 자녀와의 관계는 좋은가. 가정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반드시 좋은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가정생활에 실패한 사람은 우리의 정치적 지도자로 세우기에 흠이 있는 사람이다.
정당과 후보자들은 미사여구로 유권자들을 설득시키려하지 말고 진실과 정직함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거짓으로 유권자들을 설득시키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만약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선거운동을 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업무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보라. 유권자들은 움직일 것이다. 상투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책제시로 유권자들을 속이려 하지 말고 유권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선만을 목적으로 법을 어겨 가면서 선거운동을 한다면 그런 사람은 당선된 후에도 반드시 법을 어길 가능성이 있다.
특히 크리스천 후보자들은 단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믿는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난 신앙인인지 점검하여 보고 만약 당선이 된다면 어떻게 그 직을 하나님께 드리겠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상위의 법(the higher law)인 하나님의 법이 이 세상을 지배하여야 한다는 신앙이 있는가. 그 상위의 법에 합당한 법을 이 세상에 남기기 위해 준비되었는지 점검하여 보라. 그 상위의 법이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어떻게 이 세상의 법을 집행하겠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이런 비전을 믿는 유권자들에게 제시한다면 믿는 자들은 그들의 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좋은 지도자들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때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 무망하며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이 많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때다. 하나님은 이 땅의 정치제도, 법제도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라면 믿는 사람들도 마땅히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지켜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좋은 일꾼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날을 기대하여 보자.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둘 :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5.1. 이슬람의 기본 믿음에 반영된 세계관의 내용들
(3) 선지자 무함마드
이슬람의 기본 신앙의 교리나 모든 행사를 살펴보면 무함마드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어떤 신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교리를 이슬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에게 어떤 신격을 부여하는 것을 중죄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의 신앙이나 삶 속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무슬림들의 사고의 중심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꾸란 24장 52절과 54절과 56절에 보면 알라에게 복종하는 것과 그의 선지자(무함마드)에게 복종하는 것이 같은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꾸란에는 "알라와 그의 선지자(곧 무함마드)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알라의 뜻이 가장 완벽하게 계시된 것이 바로 무함마드 선지자를 통하여서라고 꾸란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완전한 인간상으로 무슬림들의 정신 속에 어린 시절 때부터 각인이 된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옴으로 인하여 참 종교인 아브라함의 종교가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성을 향한 과정에 불과하므로 이러한 불완전한 것을 완성시킨 무함마드야말로 영웅 중의 영웅이며, 참 개혁가요 참 신앙인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특별히 이슬람의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에서 무함마드는 그 시조로 여겨진다. 수피즘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우주의 신비한 운행의 중심 축에 놓여 있는 이로 묘사되기도 한다. 꾸란에는 그를 완전하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알라의 모든 칭찬과 전권을 받아 알라의 뜻을 계시하는 데에 마지막으로 사용된 위대한 선지자이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완전한 인간(perfect man)으로 다가 온다. 그렇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순나"(Sunnah)(혹은 하디쓰(Hadith))는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항상, 꾸란 만큼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많은 경우, 실제로 꾸란보다도 더 많이 연구되고 가르쳐지기도 한다. 중세기 이슬람의 신비주의(Sufism)를 정통 이슬람의 경지로 승화시킨 대학자 가잘리(Ghazali)에 의하면 무함마드의 생애는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참 행복의 열쇠는 순나를 따르며 하나님의 사도[무함마드를 가리킴]를 모방하는 데에 있다. 그의 모든 출입과 움직임 그리고 조용한 시간들, 심지어 그의 식사하는 자세, 잠자는 일, 말하는 법까지 모두 그를 모방하는 것이다.... "[알라의] 사도가 너희에게 가져다 준 것들을 받으라. 그리고 그가 금지하는 것을 하지 말라"(꾸란 54:7). 그러므로 그대는 바지를 입을 때는 앉아야 하며 터번을 쓸 때에는 서야 한다. 그대는 신발을 신을 때는 오른 발부터 신어야 하며 먹을 때는 오른 손을 사용해야 한다.... 무함마드 아슬람은 멜론을 안 먹었는데 그 이유는 알라의 사도가 그것을 어떻게 먹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그에게 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Cragg의 책에서 인용, The Call of the Minaret. Maryknoll, NY: Orbis Books, 1985:92.)
무함마드의 일거수일투족은 이처럼 진짜 무슬림이라면 따라야 하는 삶의 모든 행동 규범이 되며, 따라서 모든 무슬림들의 무의식 속에 가장 중요한 세계관의 전제요 가치요 충성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꾸란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무함마드는 결코 무죄한 인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무함마드는 무죄하고 완벽한 상태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대다수의 모든 무슬림들에게 여겨져 왔다. 무함마드의 삶은 결국 알라의 뜻에 완전히 부합된 그러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이슬람의 핵심은 무함마드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무함마드를 욕하는 것은 무슬림 개인을 모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슬람 전체를 그리고 알라를 모욕하는 일이다. 중세기에 서구 교회가 무함마드를 모욕하였고 종교개혁시에 역시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무시하여 버림으로써 이슬람 세계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서방을 영원한 원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선교 현장에서도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슬람의 세계관의 내용을 잘 알지 못 하고 또 세계관이 얼마 만한 힘이 있는 것이며 중요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상태에서,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라고 나름대로 폭로하며 복음을 전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모든 경우 무슬림들의 분노를 샀고 목숨을 부지하지 못 한 경우도 꽤 있었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선지자인가 아닌가를 무슬림들과 따지기 전에, 선교사와 같은 외부인들은 먼저 무함마드가 무슬림 문화의 핵심이며 이슬람 정신 세계의 축이라는 현실과 그 정신적 역동성을 좀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작 전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지도 못 하고 그들의 세계관과 충돌만 함으로써 불필요한 소모전만 치른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실제로 역사적인 무함마드의 생애에 대한 탐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슬람의 학자들과 지성인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탐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 학문의 방향성 역시 무함마드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독교 진영에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나름대로 발견한 다양한 예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의 생애의 진위가 아니다. 모든 무슬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함마드의 순나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삶 속에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함마드는 그 절대적인 위치를 이미 지난 14세기 동안 확보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역사적인 과거의 인물로 끝나지 않는다. 특별히 수피 신비주의에 오게 되면, 무함마드는 사랑의 대상이 되고, 또 심지어 중보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론 기독교에서처럼 대속의 의미를 갖지는 않지만 무슬림들의 구원을 도와줄 수 있으며 무슬림들을 위하여 변호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성인으로 모든 수피들은 믿는다. 앞에서 언급한 중세 수피즘의 대학자인 가잘리는 무함마드의 사후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무함마드는 죽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바로 알라가 원하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할 수 있는 자이다." 그때 알라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오 무함마드여, 네 머리를 들고 말하라. 너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중보를 하여라. 그리하면 응답 받을 것이니라."(Andrew Rippin의 책에서 인용. Muslims: Their Religious Beliefs and Practices. New York: Routedge, 2001:52-53.)
이렇듯이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꾸란의 계시를 받고 그 메시지를 전달한 선지자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에 대한 무슬림들의 신앙과 존경과 사랑은 그들의 세계관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주 토속적인 이슬람의 현상을 관찰하면 (소위 민속 이슬람(folk Islam)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현상) 무함마드나 알라의 개념은 많이 약화되고 주로 정령숭배와 샤마니즘이 강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충정은 모든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자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나 비무슬림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무함마드에 대하여 과학적이고도 역사학적인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할 때에 알아야 할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바로 무슬림 사회의 타부를 건드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무함마드는 단순히 그들의 역사 속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만이 아니며, 또 신앙과 충성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만이 아니라,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투사(projection)한 그들의 자존심이며 궁극적인 자기 정체(identity)인 것이기 때문이다.
5.2. 기독교의 세계관의 핵심과 이슬람의 세계관의 핵심 비교
그러나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어느 한 인물이 그토록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에서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의 중심에 깊이 자리 잡아 온 것과 비견될 수 있다. 복음적이며 정상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세계관의 핵심인 믿음(assumption)과 가치(value)와 충성(allegiance)의 대상으로 모신 사람이다. 즉, 참 하나님과 참 중보자 예수가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참고로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오는 "영생"의 의미를 보라.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이,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슬람의 경우, 참 무슬림이란 shahadah, 즉 그들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다. 이 이슬람의 신앙고백 역시 기독교에서처럼 두 가지 신앙의 대상을 고백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혹은 진정한 무슬림이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알라)과 그분이 보낸 마지막 선지자에 대한 신앙고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이 갖는 세계관에 관련된 의미들과 적용은 다음 호로 미루도록 한다.
요즘 방학을 이용하여 그간 가르치던 학생들과 <Design With Nature >라는 책을 가지고 세미나를 하고 있다. 내가 학부시절 건축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 바로 이 책을 통해 생태적 환경계획에 눈을 뜨게 되었기에, 혹시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도해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성경의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구절이 환경파괴의 근본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수 차례 설파하고 있다. 저자인 Ian McHarg는 캘빈의 장로교가 융성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유대이즘은 물론 서양사상의 대부분이 위 구절에 근거하여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를 견지하고 무차별한 정복과 약탈을 자행해 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로서 모든 개발계획에 있어서 생태적인 계획방법을 이용하여 자연의 파괴를 최소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으로 인해 미국은 각종 개발계획에 있어서 환경적인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을 의무화한 환경정책기본법이 제정되고 환경영향평가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저자를 미국에서 아주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게 해 주었고 미국 환경운동에 새로운 동기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성경과 기독교를 마치 환경보존에 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고 심지어는 진화론적인 입장마저 고수하면서 생태적인 입장은 반 기독교적인 입장임을 암암리에 시사하고 있다. 그간 환경을 공부하면서 읽은 많은 책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면서, 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환경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조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창세기 1장에 근거하여 제기되고 있는 기독교의 창조신앙과 환경파괴와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권한이 있는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1장 26-28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이 환경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제공을 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다분히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자구해석에 깊이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이 구절의 앞 뒤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기자는 1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공중의 새와 땅 위의 것들과 바다에 사는 고기들을 다스릴(have dominion over) 수 있게 하실 계획을 기록하고, 27절에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1장 28절에서는 지으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창조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곧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며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할(subdue) 것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의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라고(have dominion over). 여기까지만 읽으면 앞에서 말한 대부분의 환경 학자들의 의견이 맞는 것처럼 들린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자연보다 우월한 지위를 주어서 잔인하게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게 한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본고는 창세기 1장 26절-28절, 2장 15절에 나타난 주요 단어의 어원과 전후문맥을 중심으로 한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본 고는 창세기 1장 26절-28절, 2장 15절에 나타난 주요 단어의 어원과 전후문맥을 중심으로 한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어원적으로 26절의 '다스리다'는 28절의 '다스리다'와 같은 단어로서 (radah)라고 하는데 미완료시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스리다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절대자의 지배나 통치의 개념보다는 전지하고 전능한 입장에서 사물을 통찰하고 그에 맞게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다 더 문제시 되는 단어는 바로 '정복하다'로 번역된 (kabash) 로서 단어 자체로만 보면 다분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보인다. 즉 우리가 흔히 보는 정복자들의 잔인함과 폭력성이 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장 문맥 전체와, 같은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2장 15절과 그 외 관련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위와는 좀 거리가 있는 시각을 볼 수 있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당신을 닮은 인간을 만드셔서 그로 하여금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고 하는 것이 그 주된 요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바로 이것이 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스스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잘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당신께서 지으신 세상을 잘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셨고,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세상을 구속하시기까지 하신 세상의 보호자이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간혹 구약에서 나타나는 냉정하고 몰인정한 것 같은 모습은 모두 다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결국 세상을 바로 다스리시기 위한 채찍의 손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존재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질문 자체가 다른 것으로서 창세기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성경의 잘못과 기독교의 잘못을 논해서는 안 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의 정복하다는 단어가 다분히 전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표현상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참된 평화가 있던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투적이고 잔인한 표현은 뭔가 원어적인 표현을 영어나 우리 말로 옮기는 데 어색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쓰인 다른 성경을 찾아 보니 이 말은 다른 민족과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무릎 꿇게 하는데 쓰이고 있다(역대상 17:10, 시편 47:3, 이사야 45:1, 다니엘 7:24). 바로 어그러진 관계, 즉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새롭게 하고 정돈하는 의미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향한 죄악을 이기고 주께 돌아가는 것을 촉구하는 장면에서 사용되기도 했다(미가 7:19). 즉 이 단어는 무언가 행위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권위적인 모습에 쓰이기 보다는 관계적이고 질서를 나타내는 데에 쓰이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보다 더 잘 뒷받침해 주는 곳이 바로 창세기 2장 15절에 설명된 에덴에서의 인간의 역할이다.
창세기 2장은 천지창조사역의 완성, 안식일, 에덴 동산 완성, 인간 창조의 구체적인 과정 묘사 등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나서 인간을 에덴에 들여 보내시면서 일하고 돌보는 역할을 지정하신다. 그렇다면 동사로 되어 있는 이 두 단어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이 단어는 바로 창세기 1장 26절과 28절의 다스리다와 정복하다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기에 아주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첫번째 단어인 '일하다'로 번역된 단어인 (abad) 는 동사로서 serve, work, worship의 뜻으로 쓰이고, 명사로는 servant, worshippers, labor 등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 위의 예들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하신 첫번째 권한은 바로 에덴 동산에서 노동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편 하나님과의 관계는 섬기는 자, 즉 예배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를 규명할 때 사용되는 소중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 노동이 곧 예배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돌보다'로 번역된 단어인 (shamar)는 동사로써 keep, observe, heed 등의 의미로 쓰이고 명사로써는 keeper, watchman 등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용례에 근거하여 보면 두 번 째로 아담에게 부여된 직책은 에덴동산을 지키고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에덴동산의 관리를 위임 받은 아담은 후에 에덴의 모든 생물들의 이름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으니 가히 하나님을 닮은 제2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두 단어에 대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자연(세상)에 대한 권한이 혹자가 지적하는 파괴자로서, 폭압적인 전횡을 휘두르는 압제자로서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신 세상(환경)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원리 그대로 세상을 유지하고, 세상의 관리를 위임 받은 존재로서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노동을 함으로써 위임자를 예배하며, 자연과의 관계가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아닌 사랑과 헌신과 섬김의 관계임을.
내용이 이러할진대 인간이 과연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권한이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은 우문일 것이다.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면 이미 지배와 정복의 패러다임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더 더욱 성경의 창세기가 환경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은 아주 근시안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질서와 조화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신께서 애지중지 만드신 만물을 돌보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것은 아마도 자연과 인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의 섬김과 돌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인간은 자연을 돌보고 일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아버지 되심을 인정하게 되는 수직 수평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학 구도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자연의 중간에 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인간의 위치가 적어도 인간의 타락 전에는 잘 유지되었으리라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대로. 인간의 타락이 기록된 창세기 3장 이후에는 2장까지의 기록과는 상반된 내용들이 기록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과 자연이 관계가 깨어지고 자연과 자연의 관계도 역시 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으로 해석할 때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로서, 자연에 대한 관리자로서.
이러한 시각은 오히려 깨어진 환경을 보듬고 돌보는 데에 적극적인 자세를 제공해 준다. 자연을 사랑해야 할 대상, 섬기고 아껴야 할 대상, 아니 몸을 드려 희생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면 환경보존에 대해서 이보다 더 강한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사상이나 철학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렇다면 왜 이 문제가 기독교 국가의 후손에게서 지적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작금의 기독교가 처해 있는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사실상 성경 자체를 볼 때는 모순을 발견할 수 없으나, 현실적인 면에서 너무나 많은 모순과 괴리를 보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성경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 없이 남들이 한 얘기를 옮겨 적다 보니 이러한 우를 범하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에 대한 본질적인 책임은 문제를 지적한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오만과 불순종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좀 더 겸손히 성경이 말하는 진실과 우리의 상식과 이성이 밝혀내고 있는 사실들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고 고쳐가야 할 것이다.
Design with Nature를 읽고 난 후에 이야기를 하는게 맞겠지만 한 때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자연이 인간의 지배대상이기에 우리가 이러고 있나 싶더라구요. 예수님이 자신을 낮춰 우리를 섬겼듯이 자연도 우리가 잘 보존해야할 대상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작가 파트린느 쥐스킨스의 '향수'라는 작품을 읽고 나면, 괴기할 정도의 광기를 느끼면서 동시에 강렬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중세 시대가 배경인 이 소설의 주인공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향수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천하고 사랑 받지 못하는 추한 자신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빠지며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존재들의 미덕을 열망하게 됩니다. 결국 가장 사랑스럽고 순수하고 고결한 소녀들을 25명이나 살인하여 그들의 머리카락에서 얻어낸 체액으로 향수를 제조한다는 엽기적인 내용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악마적인 발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매력을 느끼고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얻고자하는 최상의 선과 미는 인간을 통해 얻어진다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왜소하고 추한 외모 때문에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그 천한 직업(가죽 세공)을 인해 경멸 당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떠나 새로운 일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의 천부적으로 뛰어난 후각은 향수제조업에 더 할 나위 없는 재능과 힘이 되어 줍니다. 비참한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존재들, 천진난만하고 발랄하며 아름답고 상냥한,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고 사랑스런 눈길을 받는 소녀들이 그가 열망을 품는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기형적으로 몸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악취조차도) 자신을 견딜 수 없어합니다. 향기를 발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가 만든 엄청난 향수를 뿌렸을 때, 그가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환호하고 사랑과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것이 자신의 본질적인 냄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다른 종류의 냄새를 자신에게 뿌리게 됩니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들, 곧 탐욕, 분노, 이기심, 질투, 음모, 온갖 사악한 본성들을 혼합해 만든 향수를 뿌리자 사람들이 달겨들어 그를 죽이고 맙니다. 자신의 실존이 악취의 근거임을 깨달은 그가 스스로 파멸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겉으로 보여 주는 모습과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최인훈 선생의 '가면고' 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인 왕이 거리를 지나가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들을 보면 그 얼굴 가죽을 벗겨내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무수한 얼굴들을 자신의 얼굴 위에 씌여 봤지만 모든 얼굴들은 다 녹아 내려 버리고 결국 자신의 얼굴에서 그 수많았던 얼굴들을 발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향수를 뿌리고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상냥함과 친절함, 고상함과 인자함의 향수를 뿌리고 우아한 말투와 경건한 몸짓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단한 향수도 영원히 지속되며 나의 실존의 향기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여전히 시기와 분노가 끓고 있는데, 조롱과 멸시의 감정이 고개를 내미는데 짐짓 사랑과 격려의 말을 늘어 놓는다면 이 위선은 스스로 금새 싫증나고 지치게 만드는 싸구려 향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사랑과 칭찬 앞에서 그르누이가 더욱 절망하고 비참함을 느끼게 된 것처럼, 맘에 들어 덧씌운 얼굴이 금새 녹아버려 낙담하는 왕의 심정처럼,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향수의 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뿐입니다.
평화를 위장한 평화가 시대를 다스릴 때 사람들은 숨 막힐 듯한 구속을 느끼며, 경건을 위장한 경건은 고인 웅덩이의 물처럼 언젠가는 악취를 발하게 됩니다. 위정자들의 구호나 미래에 대한 회색 청사진을 보며 희망을 강요 당하는 우울한 시대에도, 비록 고통스런 선택일지라도 진실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역사는 용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나의 실존을 직시할 수 있을 때 나는 허위와 가식을 벗어나 거듭나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됩니다. 나는 위악한 존재이며 동시에 선한 목적을 가진 존재이고, 내게는 악취를 지울 수 있는 의지와 지혜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세상에 향기를 더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나는 세상에 빛을 더하라는 소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거짓됨을 드러내고 더러움과 죄악을 드러내어 빛의 세례로 정결해 지기를 원하는 이의 권유를 받은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사랑은 흉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와 같은 것처럼(고전13:1), 공허한 모든 행위와 삶은 헛되고 헛된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무취 담담한 우리를 향기 나는 존재로 변화시켜,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게 만듭니다. 사랑은 공허한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나의 향기는 이웃을 감화시키며 우리의 향기는 시대를 변화시키는 힘을 발합니다. 사랑은 진실을 구하며 진리를 따르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향수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전 생애가 향기를 품는 존재가 되길 간구 합니다. 완전히 깨어진 질그릇처럼 다시 빚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즐거움과 기쁨의 미소가 절로 입가에 머무는 삶 속에서 온유함과 인내를 드러내는 인격들이 이루는 소망의 세상, 진정한 평화와 정의가 성취되는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 우리 하나 하나의 존재가 꽃나무처럼 그윽한 향기를 품는 그런 날을 기다리는 일이 저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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