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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세상 읽기

외모 지상주의 (Lookism) (2)

우리 안에 이 '외모 지상주의'(lookism)- 모든 평가의 기준을 외모에 두는 것 -처럼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쉽게 인식되지 못하는 사회적 우상이 또 있을까? 사실 한국사회의 물질만능주의나 지역이기주의, 학력/학벌 중심적인 사회구도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성토하는가? 이에 비해 외모 지상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사의 한 본능적 차별형태로 자리잡아 버린 것 같다. 얼마 전 타계한 한국 코메디계의 대부 이주일씨도 그 옛날 80년대 초에 이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지 않았던가? 못생긴 것이 죄송하고 웃길 정도로 우리사회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풍토로 인해, 외모를 노골적으로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경향을 그 어떤 '지상주의'보다 더 경계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의 사회 안에 은근히, 그러나 당연하게 침투해 있는 이 외모 지상주의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가?

먼저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 외모란 과연 어떤 것인가? 혹 나는 획일화된 외모로 내 스스로와 이웃을 평가하는데 익숙지는 않은가? 나는 외모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신경을 쓰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진지한 평가를 내린 후,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관점과 성경적 세계관을 비교하면서 나의 사고를 반성하고, 개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찾아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아닐까?

1. 성경이 이야기하는 외모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새번역성경 야고보서 2:1)

성경은 우리가 '외모(appearance)'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에 아주 익숙한 존재라고 증거 한다. 심지어는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구별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까지 표현한다.(신 10:17, 삼하 16:7, 벧전 1:17) 그만큼 우리는 외모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는 연약함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말씀들이 곧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외모로 사람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성경이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외모(appearance)로 사람을 차별(favoritism or partiality)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외모 지상주의의 대한 성경의 명확한 배척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바로 외모에 대한 각 사람의 반응과 평가, 그리고 이로 인한 의식적, 무의식적 차별대우로 인해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 안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외모(appearance)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미적(美的)인 외모만을 항상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에서 사용된 외모는 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외적으로만 그럴듯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나, 아니면 가진 자나 권력 있는 자들을 그렇지 못한 자들과 차별대우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욥 34:19, 요 7:24, 벧전 1:17, 골 3:25, 약 2:1-10 등등).

성경에서 외모가 순수한 미적 의미로 우리를 교훈 하는데 사용된 경우는, 사무엘상 16장 6절에서 13절의 '선지자 사무엘 이야기'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6절의 '베드로의 권면' 등에서 볼 수 있다(이 외에도 미적인 의미로 외모가 사용된 경우가 있긴 하나, 이는 주로 사물이나 성경인물의 외관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서 해석학에 충실하게 이 두 구절의 말씀에만 집중해서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제시함에 있어 앞서 주장한 외모 지상주의 형성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우리의 '보아주고', '보여주는' 자세의 변혁을 촉구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람들을 보아주고, 또한 자신을 보여주는 삶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에 역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 글이 단순하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추상적인 넋두리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옮겨지기를 소망하는 필자의 바램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나의 제안들이 독자들에게 그리 특별하거나 신선하게 다가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별 특별한 이야기 없이 당연한 말들을 늘어놓는 넋두리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언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어떻게 보아주고 또한 스스로를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 몰라서 문제였던가? 세상의 흐름에 생각 없이 파묻히는 우리의 무심한 자세가 문제이지.…

2. 하나님의 백성답게 보아주고, 보여주는 삶

(1)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보아주라'고 말씀하신다. (사무엘상 16:6-13)

그러나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새번역성경, 사무엘상 16:7)

하나님의 마음이 이미 떠난 사울 왕의 후계자를 위해 베들레헴의 이새를 찾아온 선지자 사무엘은, 그의 아들 중 유난히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한 엘리압을 보고,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기를 원하는 자로 판단한다. 사실 우리는 여기서 왜 선지자 사무엘이 그렇게 중요한 일을 분별하는데 있어 외모를 그 기준으로 삼았는지 사뭇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무엘이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여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처음으로 만나게 했던 때를 기억했을 것이다.(삼상 9, 10장) 용모가 매우 준수하며 또한 큰 키의 소유자였던 사울을 기름 부으며,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자들은 다들 그 용모와 키에 있어 어떤 "수준"의 사람들이여야 한다는 고정화(conventional)된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화된 생각으로 인해 그는 엘리압을 보자마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외모를 소유했다는 생각에 그만 하나님의 뜻을 그릇되게 판단한 것이다.

사실 우리 또한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인물들의 외모에 있어 비교적 고정된 성경의 관점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인물 중에 웬만해서는 못생긴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가끔씩 엘리사나 사도 바울처럼 썩 출중하지 못한 외모를 소유한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전반적으로 성경의 인물들은 거의 다 잘 생겼다. 사라를 필두로 해서 리브가, 라헬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창세기의 여성들은 다 한 미모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거기다가 다윗의 부인 중 한 명이었던 아비가일,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 에스더 등, 꽤나 많은 성경의 여인들이 미모를 갖춘 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또 어떠한가? 자신의 멋있는 '외모'로 인해 유혹까지 받아야 했던 요셉으로부터 갓 태어났을 때 꽤나 준수했다던 모세, 키가 크고 용모가 출중했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부자(父子)지간이 다 한 외모 했다던 다윗과 압살롬에 이르기까지, 남성들 또한 멋있는 자들이 꽤나 등장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고정화된 성경의 인물론을 뒤집어엎으시는 권면을 사무엘에게 하시는 것이다.

그럼, 그분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사람을 볼 때, 외모에 집중하지 말고 중심을 보아주라는 것이다. 사무엘은 엘리압의 큰 키와 준수한 용모만을 보고 그를 평가했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도 이러한 시각을 가지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실생활 속에서 사람의 외모에 지나치게 연연하고, 또한 끌려 다닌다. 한마디로 외모로 인해 우리의 판단이 흐려질 때가 많다. 그래서 '외모가 능력이다' '예쁘고, 잘 생기기만 하면 된다' '딴 건 몰라도 못 생긴 것은 용납이 안 된다'는 등의 우스운 말들이 우리의 생각을 은연중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이 말씀에 쉽게 순종하지 못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무슨 이유로 인해 우리는 마땅히 보아주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허탄한 것에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이에 연연해하는 것일까?

첫째, 나는 그 이유가 미적 외모에 눈이 어두워 사람의 '중심'을 봐줄 줄 모르는 우리의 조급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사람의 중심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중심은 어떤 존재의 '진심'이나 '참된 실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밝히 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우리는 사람의 중심을 보는데 있어 신중하고 차분해야 한다. 단순히 외모만 보고 그의 실체(중심)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외모가 사람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외모만을 가지고 사람을 제대로 '보아준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보려면 그 사람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시며 우리의 중심을 판단하시듯, 우리 또한 미적 외모에 바탕을 둔 값싼 평가와 차별은 던져버리고,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중심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중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을 처음 소개 받은 자리에서, 사귀자 거나 결혼하자는 말을 한다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것 또한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가 아니고서야, 이는 상당히 즉흥적이고 사람을 인내하며 바라볼 줄 모르는 조급한 자세라 생각한다. 이는 마치 TV나 영화, 아니면 여러 사람들과 마주치는 길가에서, 멋진 얼굴과 몸매를 자랑하는 남녀들을 은근슬쩍 바라보며 그들의 중심까지 순식간에 과대포장해 버리는, 우리의 미련하고 가벼운(shallow)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습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항상 얼굴, 몸매, 화장법, 옷맵시 등을 보고 평가하는데 익숙해진 나의 눈이 막상 이런 말씀 한 구절 읽고 묵상한다고 해서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다. 이미 우리 안에 익숙해진 시선은 성경에서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말한다 치더라도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절제되고 훈련되지 않는 한 쉽사리 습관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 때의 경험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을 잘못 분별한 경우를 보았다. 이처럼 일단 우리 안에 습관화되고 고정화된 시선은 쉽게 우리를 떠나지 않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주장하는 것이다.

2)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전서 3:1-6)

"Don't be concerned about the outward beauty that depends on fancy hairstyles, expensive jewelry, or beautiful clothes. You should be known for the beauty that comes from within, the unfading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s so precious to God" (NLT, 베드로전서 3:4, 5)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하면, 패션의류나 명품시장을 제외한 '순수 미용' 분야의 연간 시장규모가 미용성형 5천억원, 다이어트 1조원, 화장품 5조 5천억원 등 무려 7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제는 외모가 자본이 되는 세상을 넘어 자본이 외모를 만드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느냐는 문제에 매우 민감하다. 단순히 이왕 자신을 보여줄 거 깨끗하고 단정하게 보여주자는 선을 뛰어넘어, 이제는 자신의 존재가치와 성공을 위해 필사적으로 외모를 가꾸고 꾸미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근데 이러한 세상물정도 모르고 사도 베드로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권면(벧전 3:4, 5)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고 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본 서신서의 전체적인 배경과 그 주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의 말씀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경고의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기 이전에, 타지에서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었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사도 베드로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실제적 권면을 그 핵심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며(1:1, 17, 2:11), 그리스도인 노예로서(2:18-25), 그리스도인 아내로서(3:1-6), 또 그리스도인 남편(3:7)으로서 각자 자신의 처소에서 어떻게 믿는 성도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 믿기가 어렵고 힘든 시대이니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자는 논조가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고난의 시대일 수록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을 온전히 드러내자는 존재론적(ontological)인 가르침을 편지에 담고 있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위의 말씀(3:1-6)을 통해, 결혼한 여성 그리스도인이 불신자 남편에게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정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은, '외면의 미'(outward beauty)를 통해서가 아닌, 순종을 바탕으로 하는 '내면의 미'(inward beauty)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여성 그리스도인이 가장 지혜롭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는 방법은 이 시대와 같은 외모 지상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값진(precious) '내면의 영성'(inner spirituality)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영적인 시련과 핍박이 많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헤어스타일과 옷, 액세서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포장하지 말고, 오히려 믿는 성도답게 경건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말없이 보여주자는 것이다.(3:1, 2)

사도 베드로가 결혼한 여성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하는 신앙을 보여주라고 촉구하면서, 가꾸고 꾸미는 미적 외모를 이에 반대하는 예(counterexample)로 삼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치 베드로는 현 시대의 외모 지상주의를 빗대어 말하듯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는 것 같다. 참된 능력이 없는 허탄한 것에 집중하지 말고,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줄 것을 보여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행동하는 경건하고 순결한 속 사람을 통해,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외모와는 수준이 다른, 신앙인의 '불변하는 미'(unfading beauty)를 보여주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부스스한 머리모양과 꾀죄죄한 옷차림을 보여줄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7조원에 이르는 '순수 미용' 분야에는 빠짐없이 소비자의 한 몫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참되고 값진 내면의 훈련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상 문제가 있는 처사다. 스스로를 아름답고 멋있게 가꾸기 위해서는 철저한 다이어트와 피부관리, 세련된 헤어스타일과 옷, 액세서리, 화장품 등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멋과 빛깔을 내지 않는다면 이거야말로 외모 지상주의가 아닌가?

우리가 우선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예쁘고 멋진 얼굴과 늘씬하고 우람한 몸매, 세련된 옷과 액세서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드러낼지 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내면의 미(inner beauty)를 통해, 자신이 누구의 백성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글을 마치며...

앞에서도 주장했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에 외모 지상주의가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외모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는 면에 있어서는 자신도 남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도, 최소한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누이 이야기 하지만 외모 지상주의는 보아주는 사람과 보여주는 사람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습관화된 외모 중심적인 시선과 평가가 -의도를 했든 안 했든- 다른 사람들이 외모 지상주의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하게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타인의 외모에 대해 평하고,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지체나 장애우들을 어색한 눈빛이나 행동으로 대하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가, 곧 변형된 외모 지상주의인 것이다. 거기다가 그리스도인다운 정체성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자신의 외모만을 가꾸는 것 또한 외모 지상주의에 동참하는 행동일 수 있다. 나의 무분별한 과시(showing off)와 드러냄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의 여파가 이 땅에서 계속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바라볼 때, 그들의 외모보다 먼저 중심을 바라보고자 노력해야한다. 은연중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자 지속적인 세안(洗眼)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외면의 미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기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마음의 참 주인 되심을 지속적으로 가꿈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미적인 외모, 그 자체를 아름다움 안에 가두는(?) 훈련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외모가 사람의 중심과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게, 나의 존재가치를 흐리게 하는 우상이 되지 않게, 아름다운 외모는 그냥 '아름답다'는 표현 그 자체에 머물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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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구원의 제2변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충돌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자살 테러단원 중엔 10대 청소년들이 죽음으로써 조국과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데, 자살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가져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폭탄이 터지면서 피해자들의 몸에 박힌 뼛조각에서 치명적인 질병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스라엘과 기독교인들은 어떤 관계일까? 아브라함의 혈통적 언약 자손들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언약 자손들은 누구일까?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구원이 가져온 새로운 피조물의 자아상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구원의 제1변화(2:1-10)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삼중의 연합을 이루었다. 구원의 제2변화(2:11-18)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함께" 삼중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의 새로운 연합을 성취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을 '구원의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과거의 자아상과 현재의 자아상을 깊이있게 설명한다. 구원이 가져온 자아의 변화 곧 '이전 것'과 '새것'의 차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거룩한 제단에 드릴 수 있다.

자아상의 모형(엡1:20-23)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20-23)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모델로 재창조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성령의 권능이 먼저 그리스도를 '알케고스' 구원의 창시자로 만드셨다. 구세주가 되신 단계를 5과정으로 설명한다.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된 구세주의 단계가 최종적으로 "교회의 머리"에서 구원의 완성과 절정이 실현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성취는 교회이셨다.

● 성령하나님의 사역....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1:20-23)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된 구원의 전체 계획 1:20-23
죽음
부활
승천
만물의 주
교회의 머리
신자 안에서 진행되는 구원의 전체 계획 2:1-22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신 5단계 중 '죽음-부활-승천'의 세 단계를 통해 구원의 첫번째 변화가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만물의 주-교회의 머리' 두 단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합하여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신다.

구원의 제 2변화(엡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割禮黨)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의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和平)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1-18)

구원받기 전....구원받은 후

● 구원받기 전(2:11-12)

구원받기 전 죄인의 실상은 "이방인"과 "무할례당"이라 불리어졌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관점에서 인류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류된다. 피부 색깔, 문화, 언어, 민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직 두 부류의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끌어왔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허상의 존재들일 뿐이다. 탈무드에 이런 글이 나온다. 한 랍비에게 유대인이 질문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이방인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랍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옥불에 땔감이 필요해서지...."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절). 바울은 이방인의 버림받은 실체를 다섯 가지가 없는 자로 묘사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이방인과의 접촉과 교제를 금지했다. 길거리에서 인사만 나누어도, 시체와 문둥병자를 만진 것과 동일한 정결예식을 치러야만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 이방인들은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의 구속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놀라운 일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셨다.

인류의 역사는 이방인과 유대인 간에 벌어진 오랜 증오와 피의 살육의 역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스실에서 살육당한 600만의 유대인 대학살이 그 대표적 사건이었으며, 최근에까지 그 증오와 반목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중심에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9.11 테러 1주년. 희생자 2801명의 이름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호명되었으며,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 현수막도 건물에 걸려있었다.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한 언론인은 미국의 테러전쟁을 이렇게 말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유령과의 전쟁이다. 그것은 빈곤, 마약과의 끝없는 전쟁과 같다. 끝도 없는 전쟁을 통해 미국은 자국의 우월감을 세계에 보여주려 할 뿐이다." 현대 평화학 창시자 유럽평화대학 요한 갈퉁 교수는 [평화 심포지움]에서 "지금 자행되는 보복의 악순환의 핵심에 미국의 패권주의가 있다. 미국의 태도변화 없이는 평화는 어렵다. 갈등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고 갈등이 해결되면 폭력도 사라진다. 갈등을 푸는 열쇠는 미국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중동의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전쟁, 문명의 충돌로 묘사되는 테러와 전쟁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얼마나 "멀리 있는" 민족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멀리 있던 두 민족을 가깝게 만드셨다. 어떤 평화정책으로도 하나로 연합될 수 없는 증오와 적대감의 민족을 하나로 만드셨다. 복음의 능력은 바로 그 화평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되는 곳마다 화평의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화평이시기 때문이다. 국가와 이념, 갈등을 이겨내는 진정한 평화가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다.

● 구원받은 후(2:14-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그 피로 이루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중간에 막힌 담,'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 '원수된 것'을 "헐어 버리시고," "폐하시고," "소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셔서, 새로운 제3의 인류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창조하셨다.

2:14 둘로 하나를 만드사
2:15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2:16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새로운 인류다. 초대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은과 납을 녹여 금을 만들어내듯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새로운 민족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던 인류의 종족 구분은 이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나사렛 예수 안에 있는 자와 나사렛 예수 바깥에 있는 자로 나뉘어졌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절). F.F 브루스는 "한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정의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한 새사람은 기독교 공동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 제3의 종족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절 신약교회가 탄생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민족 곧 교회공동체로 만들어졌다. 아브라함은 혈통적 언약의 백성과 믿음의 언약 백성 모두의 조상이 되었다.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2:18-22)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성전으로 주를 섬기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이 땅엔 하나님의 성전이 계속 지어져가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는 12m의 크고 단단한 기초석 위에 세워졌다. 새로운 종족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기초석이 되셔서 오늘도 계속 건물이 완공을 향해 건축되고 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새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보이지 않는 장소다. 전 세계에서 구원받은 인간공동체가 하나님의 새 성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두가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먼저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도록 복음전도의 사명에 전념해야 한다. 릴리전(Religion) 뉴스는 유럽의 집시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전도의 열풍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100만-3800만으로 추정되는 유럽 전체 집시 가운데 50만-100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랑스 내에 210개의 집시교회가 세워졌으며, 1300명이 목회자로 헌신하여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다. 회심한 집시들은 복음으로 삶이 변화되어 싸움, 음주, 절도를 찾아볼 수 없다고 전한다. 스페인에도 500여개의 집시교회가 있으며 2천여명이 목회자가 사역하고 있다. 유럽의 집시교회들이 하나 하나의 벽돌이 되어 하나님의 새 성전을 짓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를 이루는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지금은 이방인의 때라고 불린다.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회복의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들을 어떤 신학자들은 7년 대환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7년 대환란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날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요한 섭리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고, 그 날에 완성될 교회의 영광과 위대한 성취를 바라보며,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민족으로 이루어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날을 기다리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조각품 중에 예수상이 많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예수상이 월드센의 작품이다. 월드센이 예수상으로 유명해지자 프랑스 르부르 박물관에서 그에게 '비너스상' 조각을 의뢰했다. 조각가에겐 최고의 영광이었으나 월드센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내가 이 손으로 주님의 성상을 조각했는데, 주님께 드린 손으로 어떻게 신상을 조각할 수 있겠는가?" 그가 신상을 조각할 경우 자신에겐 명예로운 일이며, 영원히 기념될 일이었으나,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손상이 더 크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비밀, 복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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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월미도와 이승복

(1)

지난 9월 16일은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세워진 10주년 기념일이었다. 황량한 북산가 언덕 무덤가에 첫 삽을 뜨고 기초를 놓기 시작한 이래 숱한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어엿한 신흥명문(?)대학의 모습으로 발돋움하였다. 1992년 첫 해에 대학이 세워지기도 전에 마음이 급하여 부설 산업기술훈련원생을 먼저 모집하였었다. 93년 4년제 대학으로 학생을 받을 때만 해도 다른 대학에서 떨어져 오갈 데 없는 학생들을 받아 시작한 무명의 사립대학이었다. 그러나 10년 만에 연변과기대는 동북 3성에 있는 조선족들의 희망이 되었고 해가 갈수록 우수한 학생들이 앞 다투어 입학을 하고 있다. 이제 재학생이 1,500명을 넘어섰고, 2,000명에 가까운 졸업생들이 중국 전역에 흩어져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날 나는 10주년 행사를 돕기 위해 서울서 합류한 16명의 부흥한국팀(Revival Korea)과 더불어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드문 날씨 속에서 청아하게 모습을 드러낸 초가을의 천지는 태초의 신비 그 자체였다. 그 장엄한 창조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백두산 정상에 서서 조용한 기도와 찬송으로 내일의 부흥을 위한 영적 조율을 먼저 맞추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끝까지...>라는 타이틀의 부흥 3집을 제작하던 도중에 오른 백두산 정상이었기에 부흥팀에게는 더욱 큰 의미가 있는 산행이었다.

17일 저녁 야외 무대로 펼쳐진 기념 <열린 음악회>에서, 지난 10년을 회고하며 3,000여명의 청중들이 운동장에 운집한 가운데 고형원, 이무하 가수(?)를 앞세운 부흥팀의 기념비적인 만주 공연이 펼쳐졌다. 그들이 만주 벌판에서 목 터져라 외쳐 부른 노래는 대부분 가요였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고, 사역의 지경을 넓히는 새로운 시도가 되었다. 무대 앞줄에는 공산당 영도들이 줄지어 앉아서 그들의 노래를 예의 주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전날에는 이미 가사 검열이 진행되었고 우리는 행여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가사들을 건전하게(?)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장 3시간에 걸친 그 음악회를 감독하고 연출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무대 앞 진행본부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실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2)

이곳 만주에서 일하는 동안 종종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 근대사의 격전지였음을 새삼 체감하게 될 때가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알았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와 역사 유적지들이 바로 인접지역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격전지가 바로 이웃한 화룡현에 있고, 그들이 근거지로 활동했던 북로군정서가 위치하던 곳이 연길에서 두 시간 남짓한 왕청현이다. 그러니, 이곳 조선족들의 가계를 들추어보면 바로 항일독립운동사와 우리 민족의 근대사의 피 어린 애환들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KBS 역사 스페셜에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추적 방영하는 것을 보며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1910년 만주로 건너간 이회영, 이동녕 등에 의해 교포교육과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길림성 류하현에 세웠던 신흥강습소가 나중에 통화현 합니하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무관 양성학교로 변신하게 된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10년간 무려 3,000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들이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상해 임시정부와 의열단 활동 및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해방 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만주로 모여들었던 지난날의 우리 선조들.. 그들 가운데는 한성에서도 가장 이름을 날리던 대 부호 가문의 이회영, 이시영, 이석영... 6형제의 헌신이 있었고, 일본 육사 출신의 직업 군인으로서 당시의 출세 가도를 뿌리치고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후진 양성에 투신했던 지청천 같은 인물이 있었다. 그들의 손에 키워졌던 제자들이 무릇 3,000명이나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들이었으며 광복군으로 마지막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다. 훗날 역사에 알려져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던 사람들과는 달리 신흥 무관학교 출신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항일 전쟁의 전선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이루었건만 국토는 허리가 잘리고 민족상잔의 잔인한 전화가 다시 한번 한반도에 몰아침으로 우리민족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어야 했으며 또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는지.... 그 이후 반세기 동안 한반도는 안타깝게도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형제를 원수로 생각하며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어야만 했으며, 그 비극은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남북한의 싸움으로만 알았던 6.25 전쟁이 사실은 이곳 만주의 조선족들까지 직접적으로 깊이 관여한 3국 전쟁이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이곳 작가협회 주석으로 있는 K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의 부친이 항미원조(抗美援助)전쟁(중국에서 6.25를 지칭하는 말)에 참여했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서 명성을 날렸던 팔로군(八路軍) 소속의 군인으로 장개석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남방의 해남도 최전선까지 배치되었던 그의 부친은 1949년 말 겨울, 갑작스런 상관의 지시로 기차에 올라 어디론가 하염없이 끌려가게 된다. 그가 내린 곳은 뜻밖에 귀에 익은 조선 말씨가 들리는 북한 땅이었고 그는 중공군에서 인민군 장교의 군복으로 갈아입게 된다. 그와 같이 6.25가 발발하기 직전 북한으로 전격 배치된 팔로군은 1개 사단 병력이 넘었으며, 결국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던 최전방 인민군들은 사실은 북한군인이 아니라 엄격하게 훈련받은 팔로군 정예부대 소속의 중국 조선족 군인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천 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이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자 중공군이 쳐들어와 1.4 후퇴를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중국 조선족 출신의 중공군은 처음부터 인민군 복장으로 6.25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인천 전투에서 숱한 동료들의 시체를 남기고 결국 퇴각해야만 했던 눈물의 역사를 반추하며 죽는 날까지 아들에게 두고 두고 입으로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을 알게되자 나는 다시 한번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영문도 모르고 전쟁에 참전해야했던 이곳 조선족들의 애환을 생각하며 더욱 뼈저린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 6.25의 민족상잔의 고통은 이곳 만주의 우리 조선족들에게까지 잊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아픈 상흔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3)

내가 처음 가르쳤던 1회 졸업생 중에서 한국의 고려대학교로 유학을 갔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언젠가 유학생들을 모아 수련회를 하는데..., 그 여학생이 앞에 나와 처음 한국에 와서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 혼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자기는 유학이 결정된 이후, 마음 속으로 한국에 도착하면 꼭 한번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도착한 첫 주말 부랴 부랴 길을 물어 신기한 전철을 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인천 앞 바다의 "월미도"였다. 무엇이 이 여학생을 그곳까지 이끌고 왔을까? 나는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녀의 어린 추억을 들으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소학교 시절 어느 날 학교에서 단체로 애국주의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 영화의 제목이 월미도였다. 항미 원조전쟁 시, 인천 앞바다에서 악랄한 미 제국주의 항공기가 폭탄을 비 뿌리듯 쏟아 붓는 가운데 끝까지 사투를 벌이던 인민군 장교의 장렬한 최후를 보며 그 어린 소녀는 너무나 안타깝고 속이 상해서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던 그 생생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말로만 듣고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천의 월미도는 그녀가 성장하는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가 마침내 한국 땅을 밟는 그 순간 그녀의 발길을 그 곳까지 이끌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월미도에서 두 가지 사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고 만다. 첫째는 영화에서 나왔던 그 비참하고 끔찍했던 전쟁터가 이토록 놀랍게 발전한 현대식 거리로 바뀌어졌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둘째는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며 증오하던 미국 군대의 괴수 맥아더의 동상이 월미도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 사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대다수가 맥아더 장군을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믿고 또 증오하던 그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한국 생활을 시작하는 그녀 앞에 던져진 첫 번째 질문이 되었다.

우리 역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죽어갔던 이승복 어린이를 교과서에서 배우며 더러는 눈물지었던 세대였다. 죽어가면서까지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던 애국소년 이승복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그 잔인한 공산당 간첩들이 미워서 치를 떨었던 그 시절이 있었다. 그 세대가 바뀌어 요즘은, 이승복 어린이가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콩사탕이 싫어요.'라고 말한 것을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라는 유머 개그까지 등장할 정도로 세월은 변했다. 그리고 그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나는 이곳 중국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당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이 간격.... <월미도와 이승복>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만 할까? 그 세월의 아픔과 거짓과 미움과 허위들을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지우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축제의 밤이 무르익어 가고 음악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에, 부흥팀이 기도하고 준비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음악시간을 통해 아내가 가르치고 또 아이들 속에서 퍼져나간 두 노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과 <보리라>를 함께 부르며 우리 안에 감추어진 사랑과 비전의 마음들을 안타깝게 표현했다.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태초부터 시작된 아름다운(수정가사임) 사랑은...

이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내가 들어온 대학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신입생의 고백을 들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저들의 상처를 싸매어 줄 수만 있다면....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새로운 10년을 여는 비전 선언문이 낭독되면서 밤하늘을 아름다운 폭죽이 수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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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교회 생활

금식은 이렇게

한국 크리스천들에게는 금식이 상당히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 크리스천들은 금식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영적 성장과 훈련'을 저술한 리차드 포스터에 의하면 1861 년부터 1954년까지 거의 백 년 동안 금식에 관한 책은 단 한 권도 발간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 크리스천들에게도 이제는 금식이 생활화가 되었습니다. 금식에 관하여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금식이라고 하면 일정 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물만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는 것은 단식이라고 하며, 이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잠시 동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음식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40일 단식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로 되는 것이지 정상적인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특정 음식만 삼가고 금식하는 수도 있습니다(다니엘 10:3). 이것을 부분 금식이라고 합니다. 유동식, 즉 우유나 주스만 마시며 금식을 하는 수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분 금식의 예 입니다. 대학교 선교 협회 총재인 빌 브라이트와 같은 미국 분들이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보통 부분 금식을 합니다. 과일 즙, 주스들을 마시면서 합니다. 한국 크리스천처럼 물만 마시며 40일 씩 금식하는 것은 미국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합니다.

금식을 시작할 때에는 마지막 식사를 가볍게, 채소 종류로 드는 것이 좋습니다. 에너지를 비축한다고 음식을 많이 들고 시작하면, 금식이 더 힘듭니다. 금식이 끝난 후에는 채소 등 가벼운 음식으로 식사를 시작합니다. 배고프다고 음식을 갑자기 많이 들면 위장을 상합니다. 식사를 조금씩 자주 하고, 주스를 많이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크랜베리 주스가 산이 적어, 위장에 자극을 덜 줍니다. 금식을 오래 한 경우에는, 정상적인 식사량으로 돌아가는 기간을 금식했던 기간과 같이 잡으라고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금식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살 빼기 위해서, 혹은 정치 투쟁방법으로 안 먹는 것은 굶는 것이지 금식은 아닙니다. 금식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집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금식 중에는 기도와 묵상에 몰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성찰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저는 장기 금식을 못합니다. 몇 번 시도했지만 5일이 최장기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하루, 수요일은 정기적으로 금식을 합니다. 새해가 시작될 때, 집회 인도를 나가기 전, 교회 성경 공부 개강을 앞두고, 등등에도 하루씩 금식을 합니다. 부흥 집회를 인도할 때에도 저녁에는 금식을 하면서 인도합니다. 금식을 할 때에 신기한 영력과 통찰력이 나타나는 것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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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기 전에 달려야한다

자유스러움을 얘기할 때 우리들은 유유히 하늘을 나는 새를 떠올립니다.
지난호의 알바트로스의 사진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멋진 비행을 위해 알바트로스는 높은 벼랑위에 둥지를 틀고 깊은 절벽으로 몸을 던짐으로 날개를 펼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물새들은 이렇게 달려야 합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가 하나의 직선으로 보일 만큼 온몸을 긴장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마지막 깃털에까지 피를 보내 단 반차례라도 날개짓을 더해야 합니다.

이 물새들의 날개짓과 푸른 하늘의 알바트로스로 도피성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든지 하룻길(32km)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도피성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도피성을 향한 도로는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닦아 놓게 하셨으며,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실제적 시간과 거리는 아무리 길어야 하루이며, 아무리 멀어야32km라고 하나님은 보증하셨습니다.

단,

잡히면 죽게되는 상황에서의 뜀과, 성문을 두들겨 문을 열게하고, 그 안에 들어가 문이 닫힐 때까지의 긴장을, 우리는 날기 위해 달리는새의 몸짓에서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알바트로스의 할강처럼 그 분과 같이 날게 해 주심을 믿어야합니다.
비롯 외간 남자 보아스 발치 이불을 들고 그 곁에 누워야하는 룻의 떨림이 내게 있드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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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위로

지난 9월 19일, 911 참사 일주기를 맞는 시점에서 그의 Opera <Nixon in China> 로 잘 알려진 John Adams는 2002-2003 개막시즌 연주곡으로 뉴욕 필하모니를 통하여 그의 새 작품 <On The Transmigration of Souls>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911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고전적인 쟝르의 음악과는 달리, 희생자들의 이름들이 그들의 유가족들이나 친구들에 의해 읽혀지는 목소리, 도심 속의 여러 잡음들, 실종자들을 찾는 메모들을 가사로 해서 만들어진 합창곡들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들으면, 여객기가 타워에 부딪힌 직후 그 충격적인 순간의 혼돈감과 그 빌딩의 깨어진 창문들로부터 흩어져 내리는 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숨막히게 다가온다. 그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는 이교도적인 냄새는 일단 뒤로 하고, 사람들은 그의 이 작품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말들과 소리들의 원래의 의미가 현대적 매체들의 조작과 이기적인 상황화의 논리들 속에서 왜곡되어지는 이 때에, 그 소리들을 낸 사람들의 본래의 마음들이 그 작품에 그대로 표현되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또한 오랜만에 예술이라는 매체가 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 속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는 것을 보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올 연초에, John Adams 가 처음 그 작품의 작곡에 대한 요청을 받았을 때에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빌보드잡지의 기자가 묻는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Although I had absolutely no intention of writing such a piece, the day the request came through I knew immediately that I not only wanted to do the piece but that I should do it." 그리고 작품을 완성한 후에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 and I have done my best to create a piece that honors those emotions without exploiting them." 적어도 우리는 그에게서, 자신의 실험정신을 표현하는데에 그 작품을 이용하기보다는 사람들의 고통을 꾸밈없이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그 작품을 썼다는 그 "compassion"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의 이 "compassion"의 마음은 제쳐 두고라도, 사람들의 소리를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해 줄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도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한가?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좀 성숙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 같은 것을 갖기 시작한다. 그에게 충고와 조언을 해줌으로써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히고 마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믿음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의심을 제기할 때에, 정말 같은 마음(compassionate heart)으로 그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찢어놓는 충고와 경망스러운 조언으로 그들의 마음을 아주 닫히게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소위 "유명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게 되는 경우, 정말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상담사례들인데,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찾아왔던 내담자의 문제들을 소개하는 그의 마음 속에 내담자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깊은 위로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당혹감을 넘어서 분노의 감정까지 갖게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심지어 어떤 "전문가"들은 내담자들의 삶의 부족한 점들을 들추어 내어 강의에 온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는 것을 목적으로 강의를 진행해 나간다.

이것은 예수님의 방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이다. 누가복음 7장18-30절까지의 말씀은 의심에 사로잡힌 한 인간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침(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혀 곧 죽게 될 것을 느끼면서 그는 정말 예수라는 인물이 메시야이신가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답답한 심정은 자신의 겪고 있는 상황이 과거 수 세기 동안 유대왕국의 역사 속에서 펼쳐졌던, 선지자와 왕의 관계에서 진행된 보편적인 상황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에 대한 당혹감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많다. 헤롯에 대한 정직한 예언의 소리에 정치지도자가 심판받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자신이 무기력한 자리로 묶여져 이제 곧 죽음을 앞두게 된 상황에서 이러한 "의심"은 선지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요한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이러한 그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으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셨다. 주님은 고난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극한 상황의 요한이 충분히 그러한 의심을 가질 수 있음을 깊이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의 고통의 깊이를 같이 느끼셨다. 우리는 마태복음 4장12절부터 기록된 주님의 삶을 보면서 요한의 죽음 이후에 주님께서는 그에 대한 더 깊은 "compassion"을 갖게 되셨음을 느낄 수 있다. 요한의 죽음을 들으신 후, 갈릴리로 가셨다가 자라났던 정든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시기로 작정하시고 (12-13)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18)…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23)…. 극심한 고난을 받고 죽은 믿음의 동역자이며 형제인 침(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깊은 "compassion"으로 인한 감정의 교차가 주님의, 마치 방황하시는 듯한 다니심으로 나타났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에게 있어서 이 사랑의 마음은 "compassion"을 넘어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오히려 관용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닮는 "compassion"의 마음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연약한 사람을 향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숙한 믿음의 선배, 사도바울의 노년의 삶에서도 이와같은 위로와 관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날에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공동체 안에서 다시 세우기 위해 애쓰는 아름다은 삶의 모습을 우리는 그가 옥중에서 쓴 서신, 빌레몬서를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성경에 암시된 대로, 아마도 막대한 금전적인 손해를 끼치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로부터 도망친 오네시모가 믿음의 공동체에게, 특히 그의 옛주인 빌레몬에게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바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오네시모를 관용으로 받아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종이 아닌 동역자로서 그 옛종 오네시모를 받아줄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가 회복되어야하는 이유가 오히려 바울 자신의 영혼이 새롭게 되는 큰 위로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자신의 영혼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 그동안 정말 깊은 고통 가운데에 있었다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자는 자기 자신이 위로해야 할 사람을 위로하는 삶을 넘어서서 세상사람들이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자리로 갈 때 그 회복되는 삶의 모습들을 보고 스스로가 위로를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어서 이 관용과 위로의 과정이 자기 의지를 복종시켜 순종해야 할 과정임을 알고 있기에, 빌레몬을 향해서 다시 한번 순종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21절).

4 I thank my God always, making mention of you in my prayers, 5 because I hear of your love and of the faith which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toward all the saints; 6 and I pray that the fellowship of your faith may become effective through the knowledge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for Christ's sake. 7 For I have come to have much joy and comfort in your love,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brother. 8 Therefore, though I have enough confidence in Christ to order you to do what is proper, 9 yet for love's sake I rather appeal to you--since I am such a person as Paul, the aged, and now also a prisoner of Christ Jesus-- 10 I appeal to you for my child Onesimus, whom I have begotten in my imprisonment, 11 who formerly was useless to you, but now is useful both to you and to me. 12 I have sent him back to you in person, that is, sending my very heart, 13 whom I wished to keep with me, so that on your behalf he might minister to me in my imprisonment for the gospel; 14 but without your consent I did not want to do anything, so that your goodness would not be, in effect, by compulsion but of your own free will. 15 For perhaps he was for this reason separated from you for a while, that you would have him back forever, 16 no longer as a slave, but more than a slave, a beloved brother, especially to me, but how much more to you, both in the flesh and in the Lord. 17 If then you regard me a partner, accept him as you would me. 18 But if he has wronged you in any way or owes you anything, charge that to my account; 19 I, Paul, am writing this with my own hand, I will repay it (not to mention to you that you owe to me even your own self as well). 20 Yes, brother, let me benefit from you in the Lord; refresh my heart in Christ. 21 Having confidence in your obedience, I write to you, since I know that you will do even more than what I say.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그 허물을 전혀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같이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 이시기에 그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 서로 위로하는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세상의 깨어진 관계들을 볼 때에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 관계들이 회복될 때에 기뻐하는 평화의 자녀들로 살아드릴 수 있도록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작년 이맘 때, 911 사건이 지난 약 1주일 후, 직장 동료로부터 한 이메일이 포워드되어 날아왔다. 날아온 이메일에는 그림 하나가 어태치되어 있었다. 펜실바니아의 Bouwd라는 한 어린이가 그린 그림…. 그 빌딩 안에 있었을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있었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그러나 애타게 바라보기만 해야했던 그들의 가족들, 그들도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런 질문들을 들으며 마음이 착잡한 나에게 이 그림은 진정한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과 사랑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그 고통의 현장 가운데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함께 하셨던 주님의 위로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911참사를 제쳐 두고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911사건과 버금가는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다. 매일 설사로 죽어가는 1,4000명의 영아들, 매일 폐렴으로 죽어가는 7,500명의 어린이들, 15억의 무숙자들, 인권탄압으로 갖혀 있는 80만의 사람들, 6천만명의 고아들, 인종청소전쟁으로 어제밤에 학살당한 마을,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수백만명의 낙태아들…. 이 지구촌의 죄악 속에서 우리 하나님은 매일 울고 계시고 같이 고통받고 계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사는 그 곳에서 고치고 위로하라고.

(필자 주) 한국 선교 정보 원구원 http://www.krim.org 의 자료실에 가시면 지금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고통 가운데에 있는가를 자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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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의 삶

탁월함, 게으름, 그리고 신앙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 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단 1:19-20)

우리들의 인생의 가치와 질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진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다. '구별되어진 자들'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또한 "청지기"라고 불리운다. '무엇인가를 위탁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우리가 또한 "사도"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사도라함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사"(Ambassdors for Christ)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묘사하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흐르는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뚜렷한 삶의 방향과 목적을 위탁받고,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세상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지기로서의 삶은 타국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한 성도로서 타국으로 보내심을 받은 유학생의 삶의 가치와 질을 생각해 봐야 한다. 막연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유학생으로의 삶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삶이다. 이유없는 고국을 향한 향수와 이질적인 문화속에서의 갈등으로 인한 고독 속에 있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내심"을 받은 그 학교,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다니엘은 타의에 의해서 당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바벨론에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인물이다. 다니엘서 전체에서 보여지는 그의 삶의 모습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의 삶 그 자체이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도교수(1장에 나오는 환관장)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그의 유학의 생활을 보냈다. 그러한 그의 삶의 가치와 질은 "탁월함"이라는 단어로 요약이 되어진다. 성경은 그의 지혜와 총명이 다른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가 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섬겼던 느부갓네살왕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한 왕이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다니엘서 1장에 기록하고 있는 그의 탁월함은 어떤 종교적인 분야가 아님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다방면에 왕에게 남달리 탁월한 조언을 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탁월함은 "세상"과 "신앙"의 경계의 범주에 있지 않았다. 그의 탁월함은 그와 같은 이분론적인 세계관을 초월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이였다. 그의 "세상적"인 탁월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의 "신앙"의 결과도 아니요, 더더군다나 패배적인 타협의 결과도 아니다. 그의 탁월함은 바로 그의 신앙 그 자체였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모든 것을 100% 바쳐서 사는 삶을 말한다. 세상은 탁월함의 "결과"에 주목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탁월한 삶의 "과정"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탁월함의 반대는 게으름이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 없다. 게으른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본래 받은 달란트를 100% 활용한 두 종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부르신다. 그 두 종은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의 모델이다. 그들은 탁월한 경영으로 배가 하는 성공적인 투자를 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의 초점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원래 양과 관계없이 그것을 100% 총 사용하는 삶인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탁월함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을 100% 활용하는 삶인 것이다. 그와 같은 탁월한 삶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내가 보내어진 그 삶의 터전에까지 적용이 되어진다. 다니엘의 삶은 바로 하나님과의 철저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그가 왜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깨닫음으로 연결되어지고, 그것이 바로 그가 보내심을 받은 삶의 영역에서의 탁월함으로 연장되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보내시는 자와의 관계가 없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왜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깨닫지 않고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탁월함은 지극히 관계 중심적이다.

또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은 결코 이원론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하도록 기대되어지기 때문이다. 보내심을 받은 삶을 사는 유학생에게 있어서는 신앙과 학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도록 나의 전문영역에 보내심을 받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탁월하여야 한다. 그것은 나의 학문에 100% 나의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그것의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실 일이다.

오늘날 유학생들의 문화가운데 탁월함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특별히 신앙이 좋다는 유학생들 가운데 탁월한 유학생이 부족함이 안타깝다. 많은 신앙이 좋은 유학생들이 자신의 학문의 길을 "대충"한다. 학문의 길이 마치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한 "필요악"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는 주의 종의 길을 가고 싶으나, "부르심"(calling)을 받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학문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 안에서 제자 양육과 기도에 전념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학의 학문의 길은 보다 많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렇지만 매우 불편한, 중간 단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음악을 하는 유학생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갈등을 겪는 경우를 자주 봤다. 신앙에 대하여는 아무런 생각없이 유학을 왔는데, 막상 은혜를 받고 보니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는 데에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교수님이 주는 연습곡은 재미가 없고 지겹기만 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찬송가나 복음 성가를 연주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전문 목회자, 선교자로 혹은 전문 CCM 사역자로 부르신 형제, 자매가 그와 같은 고민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른바 "평신도"로 평생을 살아갈 형제, 자매들이 이와 같은 갈등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필요악"으로서의 직장과 "신앙"의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유학생활에 성과가 더디게 된다. 그러다 보면 유학생활 속에서의 공부는 점점 더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탁월함의 원리는 이와 같은 갈등에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전문음악가로, 미술가로, 학자로, 경영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것이 탁월한 삶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따라서 탁월함과 소명의 발견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다. 소명의 삶 가운데 있는 탁월함에는 더 이상 "신앙"과 "세상"의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소명을 발견치 못한 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게으름은 소명 의식의 결핍에서 나온다. 게으른 유학생들을 많이 봤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생각이 게으르고, 삶이 게으르다. 그들은 자신이 왜 유학을 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 공부해야 하는 유학생들에게 생각의 게으름이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아이디어를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하고 발전시키는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생각이 게으르다. 치밀하게 생각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를 아직 느끼지 못해서 그렇다. 소명의 결핍은 게으름을 가져오고, 게으름은 탁월함의 반대임을 명심하자. 나는 보내심의 소명의식이 없는 유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결코 탁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단지 유학을 왔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탁월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와 같은 지도자들은 결코 탁월한 자들을 참고 용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 가운데 이와 같이 탁월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한다. 금요일 철야기도에서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위한 중보기도를 많이 한다. 그러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은 그들의 삶 전체의 영역이 영적인 전쟁이다. 결코 그들의 영적 전쟁은 금요 철야기도에서 끝날 수가 없다. 연구실에서 컴퓨터를 켜고 연구 논문을 쓰고 제안서를 쓰는 과정이 치열한 영적인 전쟁의 과정이다. 그래서 게으를 수가 없다. 마귀는 우리가 대충 하기를 원한다. 마귀는 우리가 주어진 일을 하기 보다는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을 보면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만일 C. S. Lewis가 그의 소설 작품을 대충 썼다면 오늘날의 C. S. Lewis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날 모든 학문과 예술의 분야에 탁월한 기독교인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바란다.

미국 CBS 방송에서 인기를 끌었던 "Touched by An Angel"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수년 동안 공전의 인기를 끌면서 많은 광고수익을 가져다 준 프로그램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진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작품 속에는 면면히 흐르는 성경적인 진리의 흐름이 있다. 매회 작품을 준비할 때 제작진이 기도로 준비했다고 한다. 그것을 아는 방송국에서는 여러번 그 프로그램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작품의 탁월함 때문이다. 악한 느부가넷살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이 특별히 좋아서 옆에 데리고 있지는 않았었을 것이다. 그보다 나은 사람이 있었다면 언제라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탁월함은 다른 사람에 비해 십배가 능가했다고 한다. 방송국 측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성실한 삶은 탁월함을 가져온다. 그러한 거룩한 탁월함에는 세상이 범할 수 없는 힘이 있다. 나는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기독교 연구자들이 그들의 탁월함으로 무기로 하여 무신론과 진화론 숭상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NIH나 NSF에서 연구프로젝트를 따오게 되길 기도한다. 창조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과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함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소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한 영적인 전쟁은 우리들의 연구실에 치열하게 치뤄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과학을 하는 유학생들로부터 무신론적인 관점에 바탕을 둔 지도교수와 학문의 조류가운데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보내심을 입은 자로서의 탁월함이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장래의 사회 지도자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유학생들이 그들이 속한 지역교회에서 탁월함의 운동을 일으키기를 소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는 "대충"(mediocrity)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예배도, 음악도, 교육도 대충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할 일은 많은데 자원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탁월하지 못할 바에 차라리 안 하는 용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오히려 소수의 적은 프로그램에 최선의 준비를 하여 탁월함을 보여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많은 교회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음악예배에 꼭 들어가는 것이 있다. 교회의 제직들 자녀들의 "누가 누가 잘하나" 프로그램이다. 물론 귀여운 모습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곳에는 탁월함이 없다.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세상의 권력자 앞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속에서는 이른바 "은혜"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용납되어진다. 신앙서적 혹은 신앙영화를 보게 되면 그 질(quality)의 조악함에 실망을 하게 된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만화영화와 우리 아이들이 집에서 보는 크리스천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면 그 수준의 차이가 많이 남을 볼 수 있다.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웹사이트와 그곳에 실리는 글들의 수준은 어떤 기업체의 웹사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수준인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탁월함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대충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탁월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빌1:10).

교회 안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것이 결코 비싼 것, 예쁜 것,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교회안에 있을 때 취해야 하는 당연한 자세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시대의 학문, 문화, 과학을 주도해 왔다. 보내심을 입은 자들이 소명감을 가지고 살 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그 영향력을 상실했다. 교회의 문화 가운데 탁월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탁월함의 상실은 바로 우리의 자존감과 소명감의 상실에서 비롯한다. 나를 보내심을 받은 자로 보고 사는 자, 그래서 그 소명감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자의 삶 속에는 언제나 거룩한 탁월함이 있다. 그리고 그 탁월함 속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유학생들의 문화 가운데 이와 같은 탁월함을 추구하고, 게으름을 배격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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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1 22:29 책이야기/eKOSTA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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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 책과의 만남을 통해 내 안의 속사람이 바뀌어질 수 있고, 그래서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바뀐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완악하고 강퍅한 나를 달래고, 어르고, 때로는 윽박질러가며 내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 우리 크리스찬의 일상사라면, 좋은 신앙서적과의 만남은 이 험난한 과정을 훨씬 순탄하게 만든다.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팽동국형제의 뒤를 이어 이코스타의 서평을 맡게 되었다. 이 서평(또는 책소개)가 우리의 고정관념들을 파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통로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10월에 고른 책은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송인규저, IVP출판) 이다. 코스탄이라면 아마 꼭 한번쯤은 숙독할 만한 책이다. 책 제목이 암시하 듯 저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기독청년들에게 한국 기독교가 넘어야할 숙제와 아울러 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책의 서술 방식이다. 자칫 딱딱할 수도 있는 내용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전개해 나간다. 주인공은 문희만 전도사 (그의 정체가 후반부에 드러난다) 와 그와 함께 소그룹 모임을 하고 있는 대학촌 사람들이다. 문희만 전도사의 목소리를 빌어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선 '개념의 확장'이다. 문희만 전도사의 강의를 통해 이 책은 우리에게 세상, 선교, 사명, 교회, 예배, 일, 소명 등의 개념들을 '현장 중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교를 살펴보자. 선교의 개념도 확장되어야 한다. 미전도 종족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 만이 선교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나에게 적용할때 내가 선 곳은 "땅끝"이 되며, 나는 선교사요 보냄 받은 사명자가 된다. 이런 개념 확장과 깨달음을 통해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결국 복음의 내면화이다. 여기서 잠시 문희만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내면화란 외적 원리를 자신의 인격과 삶에 받아드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처음에는 의식화 작업이 요구되지요."

이렇게 복음의 내면화 작업을 한 이후에 한국 기독청년에게 주어진 '외면화'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상 속에서 변질되지 않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이다.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 것인가? 저자는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모델을 제시한다. '침투조' 모델이다 - "우리는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죠....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죄악되고 세속적이며 사단적인 요소들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정화시켜 보겠다는 변혁적이상의 추구자들 입니다." 이는 문희만 전도사의 말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불완전하다. 우리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교회, 소그룹,찬양모임등) 역시 그러하다. 이런 불완전한 상황에서 '완전'이신 주님을 지향하는 몫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내면화된 개념을 외면화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강건해지지 않을까 싶다.

사족 1: 도대체 문희만 전도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의 정체를 풀어나가는 열쇠들(이메일,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등)을 추적하는 것도 쏠쏠한 즐거움이다.

사족2: 이 책과 흐름을 같이 하는 책들을 소개한다면 이승장목사와 이재철 목사의 책들이 되겠다. "다윗: 왕이 된 하나님의 종", "새로 쓴 성서한국을 꿈꾼다", "참으로 신실하게"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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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의 소리

한 사람의 힘(Power of One) - 누가(Luke)를 그리워하며

들어가며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누가복음 1:3-4)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이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Luke)다. 그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이유는 그의 꼼꼼한 문체나 직업이 의사라는 그만의 독특한 이력이 아니다. 진정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는 그가 해야할 바를 했고, 있어야 할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누가는 자신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을 오직 '한 사람'이 예수에 대해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또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데오빌로를 로마의 기관장으로, 그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한 사람'으로 이해했을 때 우리는 누가의 헌신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제자도의 본보기가 됨을 알게 된다. 오랫동안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고, 예수의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행실을 기록한 이유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가의 참된 성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한다 -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디모데후서 4:10-11). 모두가 병든 바울을 떠나 자신의 문제로 돌아갔을 때, 바울의 옆에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묵묵히 동역자를 보살피는 누가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누가의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그를 사랑하셨으리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곧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골로새서 3:12).

1. 새로운 일대일 패러다임: 문지기(Gatekeeper)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모습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만 드러내는 섬김을 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아니면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 양육이나 전도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피양육자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의무감에서, 아니면 피양육자가 "예수님"보다 눈 앞에서 헌신하는 양육자를 더 따르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빛을 가리는 섬김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누가는 이런 함정을 피해갈 수 있는 그에 대한 지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번 여름 우리 교회에서 인도자 수련회 때, 새로운 학기에 실시될 일대일 양육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루 전에 통보를 받았기에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프로그램은)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만들어가는 과정을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매일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참된 기독교인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그리고, 몇 주 후에 주일예배 광고에 이 글을 올릴 수 있는지 행정서기로 일하시는 집사님께서 물어오셨을 때도 그저 담담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내가 쓴 이 글을 보면서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과연 나는 어느정도 이를 위해 조심하고 노력했던가....

교수들이 학부생을 위한 정치철학 입문이나 고전 텍스트들을 읽는 수업을 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 "교수보다 저자들의 책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교수를 저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이용할 것. 교수로 인해 텍스트로부터 벗어나는 경우를 결코 허용하지말 것(You should not allow yourself to be diverted or distracted from the great books by the professors!!)." 한편, 이런 교육을 위해 강의자들에게 제시되는 공통된 충고는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말 것," "질문을 많이 던지고 가능하면 답을 주지말 것," 그리고 "주입(indoctrination)하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들이 자신들의 스스로의 생각과 방법으로 저자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식의 전달자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피교육자가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기보다 전달자의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따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2년 전 우리 교회의 양육프로그램을 도우면서, 이러한 소위 영혼 교육(soul care)의 문제와 아울러 일대일 제자양육이 소수정예 전사를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되거나, 혹은 어떤 '단일한 인간유형'을 재생산하려는 경향이 없는지 검토할 기회를 가졌다 - 단일한 인간유형이란 "예수님 안에서의 다양성"(diversity in Jesus)과 대립되는 교육방침을 의미한다. 제자훈련이 마치 80년대 독재 하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듯 은밀하거나 전투적인 각오로 진행되는 경우, 아니면 젊은 학생들이 목회자가 되는 길만이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버리는 경우나, 이러한 행동들을 방치하는 모습에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제자훈련과 교회의 양적 성장이 연결될 때,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헌신'이라는 이름 앞에서 개인주의나 집단화라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굳어졌다.

일대일 제자훈련에서는 '양과 목자'라는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다. 인도자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계설정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베드로전서 5:2-4). 그렇지만, 일대일 훈련에서 이런 설정이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느냐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인도자는 '목자'요, 피인도자는 '양'이다. 즉 인도자에게는 한 사람의 영혼과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이, 피인도자에게는 인도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미 주어져 있다. 인도자는 자신의 열매를 보고자 피인도자의 영혼과 인생을 '관리'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성도 없지 않고, 피인도자는 인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신앙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요한복음 10장 2-3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gatekeeper)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설정에서는 불러 내시는 이도 예수님이시고, 인도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다. 문지기는 원어로는 "뒤로로스," 즉 파수꾼이나 문 앞에서 손님을 주인에게 알리는 종이다. 즉, 문지기는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문을 지키고, 예수님을 찾아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열고,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동일한 역할이라도 예수님과 피교육자의 관계가 강조되고, 인도자는 이러한 관계의 형성을 도와주는 '문지기'의 역할에 그치는 것을 원칙으로 할 수 있다. 이 때 문지기의 성실성은 양육에 헌신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문"이신 예수님과의 거리, 즉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요한 10:9). 함께 일하던 분들과 이런 생각을 나누고, 우리 교회에서는 '문지기'라는 새로운 일대일 관계설정을 했다.

누가는 이러한 '문지기'의 훌륭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누가는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전달하기보다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전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둘째, 이러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의 노력의 결실을 스스로의 손으로 거두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원어로 보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한 사람'이 배운 바를 확신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 즉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한 사람의 영혼'을 맡기고 있다. 이와같은 누가의 태도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문지기의 소임과 자세를 보여주기에 너무나 충분하다.

2. 겸손과 관용의 손길

다음으로 눈에 뛰는 것은 누가의 겸손한 태도다. 누가는 자신의 기록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헌신보다 크게 뛰어날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 "우리 중에 ...내력을 기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나도"(누가 1:1-3) 신학자들이 인정하듯 누가의 문체나 꼼꼼한 기술은 사도 요한의 논리와 자신감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의 기술만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복음이 허탄한 소문들로 퇴색되어 갈 시점에 분연히 붓을 든 요한이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한 21:24) 하고 말했다면, 누가는 "한 사람"의 영혼이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기록은 많은 것 들 중 하나라는 말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배려와 아가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철저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함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할 때가 종종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 7:5).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에서 우리는 쉽게 정욕과 탐심과 다툼으로 들끓는 우리의 지배욕(desire of domination)과 주목받고 싶은 욕망(love of recognition)을 관리하는 것에 실패할 때가 많다. 서양에서16세기 르네상스는 이러한 지배욕에 휩싸인 부패한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정치와 인문학이 독립을 선언했고, 17세기는 이러한 욕망에서 끝이 보이지 않던 종교전쟁의 소용돌이를 절대왕정 국가라는 철퇴로 풀어가는 새로운 해법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관용(tolerance)이라고 하면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관용은 상대주의적 회의(relativistic skepticism)나 영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관용의 정신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잠언 1:7). 이는 "하나님이 내 뒤에 계신다"(God behind me!)는 선지자적 전투자세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감찰하신다"(God over us!)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거리낌 없는 온전함을 가지고자 하는 용기이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역대상 28:9)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실천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아 보일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도, 과부된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늙은 선지자도 이런 누가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경건한 눈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이 보였다는 누가의 차분한 기록을 읽으며, "데오빌로 각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누가 2:25-40). 유명한 마리아의 찬송에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라고 표현된 누가의 긍휼과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에서 데오빌로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였을까(누가 11:34).

결국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즐거울 수 있는 넉넉하고 부드러운 마음, 정죄하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는 '진정한 섬김'의 사랑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누가는 데오빌로가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잠언 6:7)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이런 누가의 손길은 참으로 따뜻했을 것이다.

마치며

며칠 전 대학부(Crossway) 담당목사님이 조장들 성경공부의 인도를 부탁하시면서 교재를 전해 주셨다. 누가복음이다. 과연 누가처럼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하나님의 소중한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의 조건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과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그분의 말씀으로 매일 매일 바꾸어 나가는 삶의 본을 보여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이들이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들의 소명(the Call)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문지기(Gatekeeper)가 되어야 할텐데 하는 걱정이 앞선 것이다.

이런 걱정들을 하다가 나는 이번에도 누가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부패와 악이 성행하던 시대마다 소리높여 부르짖는 의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소돔성이 멸망한 이유가 횡행하던 부패와 악이 아니라, 의인 10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오늘도 작은 일에 주목하는 열심을 가르쳐준다(창세기 18:34). 참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해야할 바를 묵묵히 했었던, 그럼으로써 믿음의 선한 싸움을 누구보다 잘 소화해 낸 누가(Luke)가 그리워지는 시대다(디모데전서 6:12). 왜냐하면 루터의 말처럼 기독교의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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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을 이야기 하자

찬양으로 쓰일 수 없는 음악도 있는가


사람이 거듭나면 문화조차도 구속되는가

지난 2000년 12월호와 2001년 1월호 이코스타에는 '오늘의 음악, 영원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CCM에 관한 하덕규씨의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그중에서 2001년 1월호에 실린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80년대 이후로의 기독교 음악 발전상을 돌이켜 볼 때, 크리스천 뮤지션들에게는 자기들이 지키는 '어떤 선'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사운드가 강력한 록(Rock) 음악도 '믹스다운(mix-down)'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반주보다는 노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도록 조절한다. 이것은 크리스천 음악이 메시지의 음악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크리스천 록이 주로 취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작업은 메시지 전달을 중시하는 복음 증거에 목적을 둔 기독교 예술가로서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리스천 음악들도 현대음악의 한 장르라고 볼 때, 관능적이라고 할 수 있는 힙합, R&B, 랩 등의 노래형식이 각광받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크리스천 음악이 이러한 주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클래식컬한 교회음악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형식의 크리스천 음악이 더 관능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크리스천 음악들은 이러한 형식들을 걸러내어 그들의 것으로 정착시켜왔음이 분명하다. 내 경우에도 그렇다. 나는 회심한 후 3년 정도는 그 동안 내가 좋아했고 영향을 받았던 많은 팝 음악을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한 복음전도자로서 내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셨던 것은 대중음악을 들으며 형성되어진 나의 그 음악 스타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전과는 달리 참으로 많이 기도하며 두렵고 떨리는 작업기간을 거치게 되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숲'이라는 음반은 그 이전의 다른 음반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 이전의 노래들은 대체로 자연을 소재로 하며 동화적인 노랫말에 어쿠스틱 악기를 주로 사용하여 서정적인 면을 많이 강조했었음에도, 내 노래를 좋아했었던 사람들이 이후의 음악과 확연하게 구분하듯이, 그 노래들은 전위적인 면을 포함한 형식으로 기존의 현실들을 냉소하는 메시지가 다분히 깔려 있었던 그런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변화된 이후의 노래들은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주신 영감으로 쓰여지고 걸러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이 거듭나면 그가 지닌 문화조차도 구속(救贖)된다."

개인적으로 하덕규씨의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게는 솔직히 요즘 하덕규씨의 모습보다는 예전의 '시인과 촌장'에서 통기타를 치며 조용히 노래하던 음유시인의 모습이 훨씬 더 기억에 남곤 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앨범 '숲'을 낸 이후 다음 앨범 '쉼'으로 거쳐가는 과정 중에 보여주었던, 한 사람의 '가수'에서 '기독교 문화사역자'로 변모되는 모습이 내게 여러 가지로 도전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길게 하덕규씨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윗글에서처럼 정말 '사람이 거듭나면 그가 지닌 문화조차도 구속(救贖)'되는가? 예를 들어서 하덕규씨가 말한 대로 심한 록음악이나 힙합, R&B, 랩 등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살게 되면, 그들이 활동하는 모든 작품 가운데 온전하게 변화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가 말이다. 질문을 다시 요약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한 음악인들은 무슨 음악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아무 음악이나 다 괜찮나

내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아더 홈즈의 책 제목처럼 "모든 진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라는 명제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덕규씨가 회심하고 난 뒤 처음 3년 동안은 전혀 팝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이, 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이후로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들"은 모두 헛되게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 안에서 핵심적인 일들을 담당하며 모든 공예배의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내게는 하덕규씨가 다시 이전에 좋아하던 "대중음악을 들으며 형성되어진 나의 그 음악 스타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사명임을 깨닫고 새롭게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는 말이 여전히 특별하게 들린다. 오늘 나의 이러한 고민은 주로 음악적인 장르에 대한 고민이다. 이렇게 글을 전개하려고 하는 이유에는 몇 달 전에 이코스타 '독자 오픈 포럼'에 한 분이 올렸던 질문에 미흡하나마 답을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지난 9월3일에는 '대일'님이 745번 글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올린 적이 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그런데 (개인의 취향을 일단 뒤로하고) 그런 생각 뒤에는 "every forms are neutral"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롹(rock)이든 hip-hop이든 뭣이든 그 자체는 중립적이며, 그걸 꼭 의심의 눈으로 볼께 아니라, 어떤 형식이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이면 (즉, 음악의 주제선정을 잘하기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입니다. 전, 이런 생각에도 그 뜻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subjects justify forms"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의문의 근원입니다. 연관되는 질문은, 과연 그렇다면 (if subjects indeed justify forms to use), 각 형식에서 (롹이든, 힙합이든, 메탈이든) 예배에 적합한 어떤 종류의 멜로디, 박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질문이 째째해지나요?^^] 즉 주어진 장르 안에서, 어떤 멜로디가 다른 멜로디보다, 어떤 박자가 다른 박자보다, 어떤 악기구성이 다른 악기구성보다 더 좋은(??), 맞는(??) 멜로디, 박자, 악기구성이 있나요? 아님, 이것마저도, 어떤 박자든, 멜로디든 상관없나요? 즉 모든 음의 흐름이 다 가치 중립적인가요? 즉, 'Hotel California' 원판 그대로에다가 가사(주제)만 바꾸어 부른 것과, '부흥' 찬양 두 곡을 놓고 볼 때, 음악만을 보고서,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나요?...."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와 '부흥'의 음악 자체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아마 똑같은 악기 구성에 하나는 미국의 록밴드 '이글스'(The Eagles)가 크게 히트시켰던 70년대의 대중음악이고, 하나는 고형원이라는 한국인 찬양사역자가 만들어서 크게 히트(?)했던 90년대의 찬양음악이란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아마 뚜렷한 구분을 짓는 것은 무리라고 하겠다. 그러나 '부흥'이 숱한 기도와 묵상 가운데 한 사람이 빚어낸 곡조있는 기도였다면 '호텔 캘리포니아'는 그 음악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팝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혹시 알고 있었는가? '호텔 캘리포니아' 앨범이 처음 출반 되었을 때 나왔던 앨범의 자켓의 속지 그림을 보면 호텔 안 2층에 있는 창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최초로 '사탄 교회'를 창설한 안톤 라비라고 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이러한 말들은 몇 년 전에 '록음악에 나타난 사탄의 상징', 혹은 '백워드 매스킹'(Backwards Masking)에 관한 주제들이 한참 우리 주변에서 시끄러울 때 자주 듣던 사실이다.) <각주>

자, 만일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실제 록음악과 헤비 메탈을 하는 음악인들의 일부가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팔아서 영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매를린 맨슨(Marilyn Manson)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은 사탄을 위해서 또 청소년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음악을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들이 만드는 음악에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는 던질 수밖에 없다. '호텔 캘리포니아'도 '노가바'만 잘 하면 좋은 찬양으로 만들어 낼 수 있나?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본다.

역사 속에 담긴 찬양에 대한 갈등들

새로운 음악적인 장르가 탄생할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어제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322년 요한 22세가 '아르스 노바'라는 새로운 음악적인 장르에 의해 쓰여진 모테트에 반대하는 칙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새로운 학파의 제자들이 멘수라 음표를 억제하고 새로운 음표형식에 기울어서 잘 전해져온 옛 것 대신에 자신들이 새로 만든 것을 연주한다. 교회노래들이 짧은 음표로 연주되고 작은 음표로 넘쳐난다. 노래하는 이들이 멜로디를 호케투스로 잘라놓아 디스칸트들을 통해 성부를 많이 만들어서 가끔 천박한 제3성부와 모테투스 성부를 강요하여 안티포날레와 그라두알레의 원곡을 무시하여 자기 음악의 기본이 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으며, 교회선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서 그 선법들을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혼합시켜버린다. 이는 음표로 범벅시키는 것이 성가선율의 절제된 상승과 온건한 하강을 통해 교회선법이 구분되어야할 것을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노래하는 이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경건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신에 청각을 마취시킨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몸짓으로 대신 표현하려고 한다. 그 결과, 본래의 목적인 경건심은 한쪽으로 물러나고 책망 받아야할 경망함이 펼쳐진다. 그러나 축일 또는 축제적인 미사에서는 옥타브, 5도, 4도 등의 선율적 협화음 사용을 금하지는 않겠다."

간단하게 말하면 14세기에서 15세기로 가면서 당시 종교음악에서 가장 큰 이슈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정통성이 점차 흔들리면서 단성부 음악에서 다성부 음악으로 가는 큰 흐름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멜로디만 있는 찬양이 몇 백년 이상 교회 안에서 불려져 오다가 점점 음악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화음이 찬양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예배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깨버리는 반동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멈출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을 두 손으로 막고 있는 일과 같은 것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옛 것과 새 것 사이에서 나타났던 세대와 세대간의 갈등과 저항은 역사 안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던 일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교회음악, 찬양이 늘 아주 경건하고 거룩한 것들 가운데에서 탄생되었다고 보는 것도 사실은 착각이다. '종교 음악'하면 바하의 미사음악을 떠올리고 잘 갖추어진 성가대의 아름다운 화음을 생각하는 것이 사실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예를 들어서 고난주간에 많이 불리는 '오 거룩하신 주님'(찬송가 145장)의 경우 그 찬양의 원래 멜로디는 '내 마음에 안정이 없네, 그 처녀 때문일세'라는 중세 당시의 대표적인 유행가의 멜로디였다. 여기에 중세의 수사 끌레보의 버나드 수사가 쓴 성시(聖時)가 덧입혀져 바하의 편곡을 통해 아름다운 종교 음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뭐 이러한 역사가 있는 찬양이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너무나 많이 담겨 있다. 당시에 유행하는 가요들의 멜로디를 따다가 가사를 붙이는 이른바 '노가바'를 통해서 거룩한 찬양으로 둔갑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빈번했던 것이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든지 '나같은 죄인 살리신'등의 찬양은 너무나 유명한 민요에다가 가사를 붙인 찬양들이다. 심지어는 'Battle Hymn of Republic'이라는 남북전쟁 당시의 유명한 군가는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놀라운 영적 전쟁의 찬양으로 바뀌지 않는가.

노가바만 잘 하면?

'노가바'의 역사가 이처럼 오래된 것을 보면, 모든 시대마다 온전하고 거룩한 것들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고민하고 갈등했던 모습들이 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찬양으로 드릴 곡조들이 없었으면 유행가 가요에서 멜로디를 따다가 그 찬양들을 곡조로 붙이겠는가. 처음 그 유행가 멜로디를 듣는 작사자의 참담한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그동안 교회 안에서 얼마나 찬양이라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를 회중들에게 주지 못하고 훈련된 성가대에게만 국한시켰었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었음도 깨달을 수 있다. 마틴 루터가 했던 큰 일이 있다면 '95개조 반박문'을 비튼베르그 성당에 내다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의 불씨를 당긴 것뿐만 아니라, 바로 이 찬양을 성가대의 몫에서 회중의 몫으로 돌려줌으로 인해서 엄청난 예배의 갱신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회중들은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로 찬양을 예배시간에 직접 올려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종교개혁자들 가운데는 구교(舊敎)가 남겨 놓은 이 음악적인 악습을 철폐시키기 위해서 쯔빙글리처럼 '앞으로 모든 공예배에서는 찬양 음악을 금지하고 오직 말씀 듣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 인해 오르간을 교회에서 내다 부수고 모든 음악을 금지시켰던 안타까운 모습도 있었다. 칼빈도 처음에는 다성부 음악이 예배시간이 불려지는 것을 금지했고 오직 시편으로 된 찬송만을 단성부로 부를 것을 권장했고 처음에는 예배 시간에 악기 반주도 금지시키지 않았는가. 물론 나중에는 그 의견을 수정했지만.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럼 '호텔 캘리포니아'도 '노가바'만 잘 하면 좋은 찬양 음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정신없는 랩음악이나 타악기로만 연주되는 음악도 가사만 잘 전달하면 얼마든지 찬양으로 쓰일 수 있는가? 시끄러운 슬래시 메탈이나 헤비 메탈 음악도 그 세대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니 더 뜨겁게 마음에 와닿게 찬양할 수 있으므로 한 20년쯤 지나면 교회의 주된 찬양 음악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음악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프리카나 피지 같은 데서 드리는 기독교인들의 찬양은 지금 19-20세기 서구 기독교 음악에 푹 젖어 있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충격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아마 다음 글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오늘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무슨 음악이건 찬양이 될 수 있는가? 음... 역사를 생각해 보면 아마 많은 논란 끝에 결국은 그 세대의 찬양으로 자리잡게 되겠지? 그런데 잘 모르겠다. 필자도 이미 귀가 찢어지게 시끄러운 록음악이 거북스러워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내게 한가지 드는 결심은 이것이다. 또 수많은 찬양들이 '노가바'로 때워져서 코메디처럼 되기 전에 미리 미리 좋은 찬양을 열심히 만들자는 결심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여, 좋은 찬양 시들 좀 많이 써달라. 곡을 쓰는 사람들이여, 제발 하나님께 드리는 좋은 찬양들 좀 열심히 써달라. 무슨 일을 하건 주께 하듯, 믿음과 삶이 일치된 사람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야 할텐데... 걱정이다. 가요계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그 사람들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로 잘 할지 몰라도 가요계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걱정된다. '노가바' 해도 은혜 안될 사람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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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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