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 9일 월요일 아침, 창밖이 환하게 밝아있다. 아직도 코스타에서의 열띤 찬양과 기도소리는 귓가에 쟁쟁한데, 희미하고 몽롱한 정신으로 감지되는 햇빛, 그 햇빛이 창으로 들어오는 각도와 강도를 보아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앗! 시간은 아홉 시 삼십 오 분, 여섯 시로 맞추어 놓은 알람 시계의 snooze 단추가 눌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늘 아침에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 큐티를 하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늦었다! 코스타에 가려고 지도 교수님에게 눈치밥 먹으며 겨우 휴가를 받아 냈었는데... 오늘은 월요일, 지도 교수님이 실험실에 나오시기 전에 먼저 갔어야 했는데... 후다닥! 일어나 옷은 주섬 주섬, 아침 식사는 대충 건너 뛰고, 자동차 시동을 걸고 학교 실험실을 향해 마구 밟아댄다.... 어느덧 하루의 일과가 정신 없이 대충대충 지나가고... 저녁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피곤함으로 초죽음이 되어 있다.
왜 이렇게 공부와 연구는 재미 없는 것일까? 코스타의 열기는 내 마음 속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매일 코스타 같은 집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공부 다 때려치고 신학교에나 갈까? 그러면 매일 성경보고 찬양하고 전도하고 할 수 있을텐데... 아님, 이번 가을에 확 선교사로 나가서 일생을 선교지에서 살다 그렇게 그냥 죽어 버려? 왜 이렇게 공부가 재미 없지? 논문을 쓰려면 아직도 2년은 더 실험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학위 마치고 나서 나는 어디로 가지? 한국에 Job 사정도 어렵다는데... 그리고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과 나의 인생에서 내가 가야 할 길들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자, 나는 이제 마치 각개 전투를 하는 군인처럼 느껴지는 냉혹하고 고독한 현실 가운데로 돌아온 것일까? 나는 이제 또 한 해를 날마다 순간마다 그 수 많은 결정들을 홀로 내리면서 살아야 한다. 마치 두 갈래 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존재로 서게 되는 두려움을 항상 갖고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Savior)으로 모시면 그 분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Lord)이 되신다던데, 도대체 나는 이 "홀로 서기"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란 말인가?
2.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구약의 지혜서인 잠언 3장 5절에서 6절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축복된 삶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서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는 말씀은 가야할 길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 이상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실 때에는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그리고 높은 곳은 깎고 깊은 곳은 돋우어 평탄하게 만들어 주시는 동행하심의 의미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발 앞서 가시면서 가야 할 길을 "예비해 주심"의 의미가 더 강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동행함"의 축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면에서 주님께 의지적인 순종을 해야 함을 이 말씀은 아울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나의 "감성, 지성, 의지"의 모든 면을 다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성과 지성과 의지적인 면이 별로 성숙되어있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인격을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초청에 응답하는 일, 즉, "의뢰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기대감"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 기대감을 갖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동행하시기를 원하는 그 초청의 은혜를 기대하는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그 동행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의 지적인 활동을 통해 알아가게 되기를 기대하는 모든 지식적인 "탐구(연구)활동"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적인 활동은 성경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전공분야에서 나에게 주신 지적 활동의 수행까지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참고: 본지에 계속 연재된 "이일형"의 글을 참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내가 "순종"할 의지적인 결단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원리들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능력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만으로도 매우 괜찮아 보이는 일들을 이룰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할 때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절대적인 위치에 놓게 되고, 성경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하나님의 저주하시는 삶"(예레미야 17:5)을 살게 되어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삶이란, 삶의 기저에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신 창조주이심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사물의 원리들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능력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면 결국에는 나의 생각과 삶의 방식들이 하나님의 그것들과 비교하여 매우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인식은 결국, 다음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 무한한 가능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처험하게되는 진정한 축복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
셋째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범사"란 나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의 삶의 모든 영역을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이란 나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자원과 기회들이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기꺼이(감성) 탐구하며(지성), 그 알게 되고 느껴진 것들을 하나 하나 적용하며(의지)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치기 쉬운 것은, 이 "범사"의 개념은 나 한 개인의 삶에만 국한된 것이라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 이 때에 내가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알게 모르게 관련된 다양한 공동체들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코스타 기간 동안 열광하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번 뒤집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력한 감성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의 삶이 하나님 없이 홀로 서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무기력 속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지성적인 면과 의지적인 면의 성숙을 위해 나의 삶을 점검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대로 사는 법을 말씀 속에서 탐구해 나가고 내게 주어진 학문 활동을 진지하게 수행하며, 지식으로 알게 된 말씀의 원리에 나의 삶을 복종시키는 작업을 해 나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삶의 정황에 주어진 작고 큰 공동체의 모습들도 동일한 원리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데이트, 가정, 연구실, 캠퍼스 소그룹, 교회, 그리고 한민족 등등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대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각오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삶의 점검과 성숙은 강력한 헌신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적 자아가 뒤집어지게(?) 열광한 것보다도 더 강력한 강도의 헌신을 요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뤄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마십시다. 이 길은 매우 즐겁고 흥분되는 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나의 인생의 여정에 앞서 가시는 주님의 흔적을 기적과 같이 날마다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기독 유학생의 열 두 가지 다짐을 위한 기도 제목
우리는 코스타의 마지막 날 밤에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갖고 헌신의 기도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이 기도 제목들은 "헌신"의 시간을 위한 기도 제목들이었지만 사실은 앞서 언급한 잠언의 약속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축복"의 기도 제목들입니다. 이 잠언에 약속된, 주님의 앞서 가시는 동행하심의 축복은 이 기도들이 나의 삶 가운데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경험되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적 체험의 폭이 넓어짐과 더불어 지식의 자라감과 의지적 순종이 다음 일년 동안 우리의 삶에 경험되어지기를 바라십시다. 이를 위해 이제 다음의 다짐들이 날 마다 나의 삶에 더 성숙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또 한 해의 경주를, 기도하며 같이 시작하십시다.
1) 주 되심(Lordship)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개인적인 구주(Savior)일뿐 아니라 내 삶의 주인(Lord)이신 것을 고백한다. 또한 그분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인 것을 고백하며 살 것을 다짐한다.
2) 경건의 시간(Quiet Time) … 우리는 매일 일정 시간(30분 이상)을 떼어 놓고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갖기로 다짐한다.
3) 중보 기도(Prayer) …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조국, 교회, 민족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수행할 것을 다짐한다.
4) 성경 연구(Bible Study) … 우리는 성경 말씀을 우리 삶의 좌표로 삼고 순종하기 위하여 매 주 일정 시간을 떼어 놓고 성경 연구에 투자할 것을 다짐한다.
5) 가정(Family) … 우리는 가정을 허락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준비를 할 뿐 아니라 이미 주신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6) 교회(Church/Community) … 우리는 매 주일 정기적으로 캠퍼스 혹은 지역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7) 학문과 신앙(Study and Faith) … 우리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성을 훈련하며, 지혜롭게 사용할 것을 다짐한다.
8) 복음 전도(Evangelism) … 우리는 복음 전도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인식하고 매 학기 1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여 크리스천 공동체로 인도할 것을 다짐한다.
9) 해외 선교(Mission) … 우리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문인 선교사 혹은 보내는 자로서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10) 이웃 사랑(Social Action) …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사회의 불의한 분야를 밝히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11) 통일 한국(Unification) … 우리는 곧 현실화될 통일 한국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전공 분야에서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12)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 … 우리는 섬기는 리더십이야말로 주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알고, 캠퍼스와 앞으로 진출할 사회에서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을 다짐한다.
선교 목적으로 기독교 단체에서 설립한 초·중·고등학교에서 창조 과학에 근거하여 집필된 생물책을 교과서로 선정하여 가르칠 수 있는가? 교회나 기독교 단체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설립할 때는 그 설립 목적이 기독교적 교육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가르칠 때 진화 과학을 비평할 수 있어야 하고 창조 과학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여 주어야 그 설립 목적에도 부합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조 과학에 근거한 교과서를 자유롭게 집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고 기독교적 교육을 목표로 설립한 학교는 그런 교과서를 자유롭게 선정하여 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초·중·고등학교용 교과서의 '집필'과 '선정'의 자유는 원천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다. 대통령령 제8660호로 된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초·중등학교에서 학교의 장(長)은 교과용 도서를 선정함에 있어서 재량으로 교과서를 선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1종 도서 또는 2종 도서 만을 교과용 도서로 선정하여야 하는 의무를 부담한다(동규정 제3조 제1항). 동규정의 모법(母法)은 초·중등 교육법인데 동법 제29조에 의하면 학교에서는 국가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거나 교육인력자원부 장관이 검정 또는 인정한 교과용 도서를 사용하도록 의무 지워져 있어 초·중등학교는 국가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거나 검정 받은 교과서 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1종 교과서라 함은 교육부가 저작권을 가진 교과서를 말하고, 2종 교과서라 함은 교육부 장관의 검정을 받은 교과서를 말한다. 보통 국어 교과서는 1종 교과서에 해당하고 기타 생물 교과서 등은 2종 교과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어느 학자들이 진화론을 비판하는 생물학 교과서를 집필 하였다 하더라도 그 책이 초·중등학교에서 교과용 도서로 선정되어 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교육부의 검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을 비판하는 교재를 집필한 후에 교육부에 검정을 신청하면 이것은 100% 불합격된다. 검정에 불합격된 교재를 초·중등학교에서는 교과용 도서로 선정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법이라고 이미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적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학교라도 생명의 기원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부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용 도서를 선정하여야만 하고, 그 결과 진화론 일색의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밖에 없다. 만약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교과용 도서만을 선정하도록 학교의 장에게 의무를 부과한 위 규정이 폐지되거나 개정이 된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겠는가. 초·중등학교의 장들은 교육부 검정 유무에 관계 없이 교과용 도서를 선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선교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의 장은 창조 과학에 근거한 교과서를 비록 교육부의 검정을 통과하지 않았더라도 자유롭게 선정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된다. 교과서를 집필하는 사람들도 교육부 검정을 통과하기 위해서 교과서를 집필하지 않을 것이다. 교육부 검정을 통과하지 않더라도 자기의 책을 사용하여 줄 학교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적이고 신앙적 양심에 근거하여 교과서를 집필하게 될 것이다.
과연 이 교과용 도서의 검정 제도는 필요한 것일까? 초등학교에서 국정 교과서나 검정 교과서 만을 사용하게 하거나 국어과 과목에 대해서 국정 교과서를 사용하게 한 규정은 획일적교육의 필요성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초등학교 이상의 학교에서 국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에 대해서도 모두 검정 교과서만을 고집하는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국·공립학교에서 국정 또는 검정 교과서를 채택하도록 의무 지우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사립학교, 특히 선교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에까지 검정 교과서를 선택하도록 의무 지우는 법은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제 교과용 도서를 국가가 통제하려는 자세를 바꾸어 자유롭게 집필하고 자유롭게 선정하도록 개인과 학교에 돌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획일적 사고를 조장하고 창조적 사고를 방해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국가가 획일적 기준을 정해 놓고 교과서를 진단하려는 생각을 바꾸어 각 개인의 자율에 맡겨 두면 위와 같은 비판의 소리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집필과 교과서 선정의 자유를 각 개인에게 맡겨 두면 터무니 없는 교과서의 출현도 막을 수 없고 결국 그 피해는 학생들이 진다는 우려를 국가로서는 피할 수 없다 하겠으나, 그것 역시 기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런 교과서용 저서가 출판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학교에서 그런 것을 교과서로 선정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 학교 교과서 선정 위원회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와 그들의 학문적 식견을 믿어야 한다. 이 규정의 전체 폐지가 어렵다면 최소한 사립학교에서는, 특히 특수한 목적을 위해 설립된 사립학교에서는 교과용 도서를 그들의 재량에 의해 선정할 수 있도록 개정하여야 한다. 검정 교과서 만을 사용하도록 의무 지우는 우리나라의 법은 기독교적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학교에 대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위헌의 소지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검정 제도만 폐지되거나 개정이 되면 누구든 기독교적 가치와 진리에 근거하여 교과서를 집필할 수 있고 선교 목적 학교의 장은 그의 재량에 의해 그런 교과서를 교육부의 검정에 불구하고 교과용 도서로 선정할 수 있고 결국 창조 과학도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다.
편집 주 이번 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를 가지고 이코스타의 독자 여러분과 함께 큰 은혜를 나누었으면 한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대전에 가면 서대전 사거리라는 곳에 새서울 내과라는 병원이 있다. 그곳에는 주로 대덕 연구 단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는 한다. 특별히 연구 단지로 새로 부임한 사람들이 많고 그 중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상당수로, 찾아오는 사람마다 증세가 거의 똑같다고 한다. 속이 더부룩하면서 소화가 안되고, 약간의 통증이 있는 그런 증세인데,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처방해 주는 알약이 누구에게나 같다. 빨간색 한 알, 초록색 두 알, 흰색 세 알. 이 병의 이름은 신경성 위염, 흔히 속병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주로 심적인 압박(pressure)을 많이 받고 신경을 많이 쓸 때 발생하는 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인 압박감은 왜 느끼게 될까? '환경적인 어려움', '인간 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장래에 대한 불안감', 대충 이렇게 세 가지 정도로 그 원인을 진단할 수 있겠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어려움은 지금 이 시간 바로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 아닌가?
먼저 환경적인 어려움을 보자. 환율도, 학비도, 아파트세(rent)도 모두 오르는데 딱 하나, 생활비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결혼한 자매들을 보면, 아이들은 지겹게 달려드는데 남편은 그야말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연구실에 박혀 있는 학생들은 또 어떤가. 해도 해도 안 나오는 것이 연구(research) 결과요, 그나마 열심히 해서 학술 잡지(journal)에 보낸 논문은 실격(reject)이 되어 돌아 오곤 한다. 인간 관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자꾸 천적(天敵)들만 늘어가는 것 같다. 장래에 대한 불안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고생해 봐야 졸업하고 나서 과연 백수나 면할 수 있을까? 미혼 남학생들은 이렇게 결혼이 늦어지다 연로해져서 결국 장가도 못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그래도 교회 안에서는 성경 공부다 기도 모임이다 찬양 모임이다 하여 열심을 내 보기도 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걱정하다 비참해지고, 그러다 성질까지 내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의 믿음과 교회 밖의 행동은 과연 무관한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기쁨과 감격을 느끼며 역동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이제 성경의 한 인물을 클로즈업(close-up) 해 보자. 그도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도는 훨씬 심했던 것 같다. 그는 바로, 빌립보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이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곧 서신서이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서 처음 세워진 교회로 사도행전 16장에 그 탄생이 잘 나타나 있다 - 바울이 환상을 본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 달라고 말하는 환상을 보고 바울은 빌립보로 간다. 이후, 염색업을 하는 루디아와 그 가족이 주님께 돌아오고 지하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과 그 가족들도 주님께 돌아온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빌립보 교회인 것이다. 출발부터 그래서였는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특별히 사랑하고 아꼈던 교회처럼 보인다. 글에도 '표정'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어조(tone)라고 말한다. 나는 빌립보서를 읽을 때마다, 마치 친정 어머니가 출가해서 반듯하게 살고 있는 딸을 사랑스러워하고 또 그리워하는 표정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제는 친구 같아진 딸을 대견스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1장 3-11절).
마찬가지로 빌립보 교회도 바울을 아낌 없이, 꾸준히 돕던 교회였다. 이번에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에바브로디도라는 신실한 형제 편으로 선교 헌금을 보냈을 뿐 아니라 노약한 바울을 그에게 직접 시중들게 하였다. 아마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에바브로디도로부터 들어 잘 알게 된 것 같다. 나중에,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함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이다. 그 편지에다, 걱정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안부를 전하고, 보내 준 도움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참에, 그 교회의 문제점을 두고 호소하고 촉구하는 권면의 말까지 전하려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의 본문은 바울이 자기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도들에게 무언가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내면의 비밀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으며 사물을 보는 그의 시각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평범한 이야기들이 직접적으로 권면하는 것 못지 않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 가지 어려움을 바울도 똑같이 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환경: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당하는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된 사실을 여러 분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곧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 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므로,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 가운데 서 많은 사람이 내가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확신을 얻어 말씀을 겁없이 더욱 담대하 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1장 12절-14절)
인간 관계: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 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 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 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 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5절-18절)
삶과 죽음: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 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 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 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 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 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 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 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 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감으로써 여러분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 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9절-26절).
내가 바라기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바울은 어떤 태도로 극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이 본문을 통해서 함께 보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하는 은혜를 누렸으면 한다.
환경의 어려움
먼저 환경의 어려움에 대한 바울의 자세를 보자. 13절에 '나의 감옥에 갇힌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울이 감방에 있다는 말이다. 감방이란 어떤 환경인가? 한 번 가정을 해 보자. 직장에서 정리해고 당하고 퇴직금으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빚 잔치를 하게 된다. 집 팔고, 사글세를 들게 되고, 하는 일마다 안 되어서 전락을 거듭하던 끝에, 맨 마지막에 다다른 곳이 바로 달동네의 단칸방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밑바닥 인생이 바로 감옥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정죄되고 격리된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호적 등본에 빨간 줄 가고 나면, 자기를 포기하게 되고, 속된 말로 막 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아귀다툼하는 곳이 바로 감방이다. 그래서 감방에 한 번 있어 봤던 사람들은 다시는 안 가려고 기를 쓴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어떤가? 그냥 투옥만 된 것이 아니라, 24시간 4교대로 붙여지는 감시병과 함께 사슬에 묶인 채로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바울은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신세 타령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내가 당하는 일', '감옥에 갇힌 일' 정도로 간단히 말하고 넘어간다. 그는 오히려 다른 일로 신이 나 있고 흥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에 그토록 흥분했던 것일까? 그는 12절에서 자기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이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며 기뻐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이어지는 13절(믿지 않는 사람에게 준 영향)과 14절(믿는 사람에게 준 영향)에 나타난다.
13절을 좀더 자세히 보면,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저들이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믿지 않는 '친위대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끼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감시병들과 24시간 함께 묶여 있다 보니 바울의 생활이 완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시병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는 바로 나사렛 예수를 전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고, 그러면서 '도대체 예수가 누구 길래, 이런 사람이 그 인생을 송두리째 던졌을까?' 궁금해졌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그분에 대해서 알고들 싶어하게 되자, 그것을 보고 흥분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믿는 사람들에게 준 영향'이 어떤 것인지는 14절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이 갇힌 것 때문에 믿는 자들이 더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도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피가 끓지 않는가? 우리도 몸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지 않는가? 바로 이런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변화를 보고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전해진다는 사실에 오히려 신이 나 있는 모습을 본다. 거기에 비하면 현재의 고통은 아예 말할 가치 조차 없다는 듯, '내가 당하는 일', '감옥에 갇힌 일'로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환경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는 통쾌한 KO승을 거두고 있다.
환경의 어려움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경제적으로 유난히 힘든 상황이어서 늘 돈이 없다보니 은행 잔고는 항상 한 자리 수와 마이너스(minus)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당시 12년 된 스테이션 왜건(Station wagon)을 몰았는데, 차 천장의 비닐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솜 같은 단열재가 눈송이 같이 내리던 차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려면, 창피하다고 학교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 달라며 사정하곤 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온 손님에게 라이드(ride)를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약간은 창피스럽기도 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뒷자리에 둔 (야외요리용) 숯(charcoal)이 흘러 나와서 볼썽 사납게 바닥에 널려 있는 게 아닌가. 몇 달 뒤에 한국에서부터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농담도 섞여 있었지만) 우리가 몰고 다니는 차가 석탄차라는.... 학교 생활도 참 힘들었다. 숙제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박사자격) 종합시험(General Exam)도 어려웠고, 연구에 대한 부담(pressure)도 대단했다. 왜 심적인 부담을 많이 받으면 체질이 산성이 되어 딸을 많이 낳는다는 학설이 있지 않은가. 그 당시 한국인 부부들이 19명의 자녀를 출산했는데 그 중에 딸이 17명, 아들이 2명으로, 그 학설이 잘 맞는다고 모두가 '호!', '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그리스도 없이 지날 때, 사람이 망가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처음 보스톤(Boston)에 도착해서 먼저 왔던 선배에게 인사를 하러 기숙사로 찾아 갔는데, 나는 사람이 바뀐 줄로만 알았다. 선배는 살벌한 표정에 흉칙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로는, 주 중에 스트레스(stress)를 엄청 받고 나면 금요일 저녁 차이나 타운(China Town)으로 달려가 쿵푸(Kung-Fu) 영화 보고, 거나하게 취해서 있는 대로 지도 교수 욕하고,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밤새 카드로 지새우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주일에 연구실로 나가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사람이 완전히 황폐해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절을 예수님과 함께 보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MIT 학생들이 중심이 된 Gate Bible Study(GBS)라는 모임이 있다. 금요일 저녁, 믿지 않는 학생들이 차이나 타운으로 달려갈 때, 우리들은 GBS에서 함께 모여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GBS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들이 모두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남자들은 신수가 훤해지고, 아줌마들은 (원래 약간 젊기도 했었지만) 피부가 고와지고 얼굴이 달덩이같이 환해지는 것이었다.
모두에게나 다 똑같은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을 누가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여러분, 지금 처한 형편이 정말 견디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자.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열정이 나를 사로잡도록 하자. 그러면, 환경이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인간 관계의 어려움
인간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은 때로는 그 어떤 어려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바울에게는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본문을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빌1:15-18)
본문의 뉘앙스를 보면, 다른 사람들로 인한 어려움이 투옥의 어려움 보다 더 컸던 것 같다. 감옥의 어려움은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간 것에 비해 인간 관계의 어려움은 15절과 17절에 걸쳐 두 번씩 이야기하고 있다. 하물며 '시기'와 '다투는 마음'(15절)을 언급하며 갈등의 동기까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투는 마음(경쟁심)과 시기심으로,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17절) 전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고약한 것은 17절에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바울에게 고의적으로 고통을 가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별 것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말을 흘리고, 자기들의 추종자를 만들어서 그런 평판을 퍼뜨리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뜨거운 것에 데어 진물이 흐르는 부위에다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과 같은 잔인한 짓이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열심이 있어 보이고 영적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실제로는 정말 야비하고 악질적이며 가장 비성서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상처나 시험받는 부분은 밖에서 오는 박해나 불이익보다는 믿는 사람들의 악의적 수근거림인 경우가 많다. 기도 제목 낸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설교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공공연히 건드리는 예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바로 내 안에 그런 성향을 너무 강하게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자. 높아지고 싶어하고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DNA 안에 이런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 어느 문화에 가도 우리는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적인 정서는 이런 경향이 좀 더 심한 것 같다. 유난히 비교 의식이 강하고, 오기가 많은 한국 문화를 흔히들 '게' 문화라고 한다. 장독 안에 게들을 넣어 놓으면, 혼자 힘으로 너끈히 기어 나올 수 있는데도 나오지를 못 한다. 나오려고 하면, 다른 게들이 밑으로 끌어 내리기 때문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날 속담처럼, 남 잘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인정 안 하고, 조금만 잘못하면 '거 보라고, 그럴 줄 알았다'고 고소해한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상처를 받고 나면, 상대방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은 어떠한가? "그렇지만 어떠냐?"고, "그게 무슨 문제냐?"(What does it matter?)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나의 쓰라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은(The important thing is) 저들이 시기심으로라도 전도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이라"며 기뻐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로 그냥 끝내지 않고,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적으로 뿐만 아니라, 의지적·감정적으로 그것을 기뻐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힘든 문제인 인간 관계의 문제를 극복하는 순간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주위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매가 하나 있다. 그런데 가끔 견디기 힘든 모욕을 당하거나, 왜곡된 소문(rumor)에 시달리고는 한다. 주로 주위의 시기심과 경쟁 의식의 결과이다. 그런데도 며칠만 지나면 다시 밝은 얼굴로, 그 아픔을 줬던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게 된다. 속이 없는 여자같이 보인다. 그 비결을 물어 봤더니, 자기는 견디기 힘들 때는 혼자 방에 들어 앉아 몇 시간이고 생각을 한다는 대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던 구속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되씹고 되씹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감격이 가슴을 가득 채워서, 이런 고백이 나온단다. "나의 자존심과 긍지, 정말 중요해. 그러나 더 중요한 것 있어. 주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어.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해야지." 바로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 관계의 문제는 다음 9월호에서 좀 더 깊이 살펴 보도록 하겠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말한 환경의 문제나 인간 관계의 어려움보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아마도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26절에서 그 문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 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감으로써 여러분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빌1:19-26)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갇힌 것에서 결국 풀려 나는데(19절), 그의 간절한 기대와 바램은 "내 몸을 통해서, 살아있을 때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드러나고 죽음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20절). 바울은 여기서부터 삶과 죽음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해서 26절까지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그의 평소 속 마음이 잘 드러난다. 그가 죽음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나, 그가 살았던 이유들이 선명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아직도 나와는 멀다고 생각되는가? 실감이 나지를 않는가? 그러나 죽음은 정말 멀지 않았다. 초등학교의 1년과 요즘의 1년은 다르다. 점점 가속이 붙어서는, 사십대 말의 1년은 정말 바람이 지나가듯 간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물론 육십대의 어른들은 그냥 웃으시곤 한다. 얼마 전 정년 퇴임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요즈음은 죽음의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이고 그 벽을 향해서, 마치 열차가 봉우리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듯 무섭게 질주하는 것 같다고. 전에는 봉우리 반대편에 있어서 그것이 안 보였던 것 뿐이라고.
혹시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경험이 있는가? 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 기를 쓰고 깨려고 하는 것. 바로 우리가 무의식중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당장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TV의 건강프로가 점점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실직을 두려워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우리가 가진 이런 두려움을 히브리서 2장 15절이 잘 말해 주고 있다 -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히2:15). 한 마디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죽기 싫어서 질질 끌려 사는 삶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는 끌려서 살아가는 삶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삼십대에 이 문제의 해답을 얻은 사람은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요, 더 나아가서 이 해답에 부합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축복받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21절). 말이 좀 어렵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맥 가운데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죽는 것이 어떻게 유익이 될 수 있는가? -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23절).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죽음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망의 공포가 간단히 해결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Powerful'하게 극복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을 만나고 싶어서 죽음이 기다려진다는 말이다.
이제 바울에게 죽음에 대한 입장이 분명한 만큼, 그의 삶의 이유도 분명해졌다 -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1:24-25). 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24절), 그들이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기 위해서 산다고(25-26절) 말한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 빨리 귀국하고 싶지만,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충분히 공부를 해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해 보자. 바울이 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죽고 싶지만, 막상 죽자니 겁이 나서 할 수 없이 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분 때문에 죽는 것이 훨씬 기다려지지만, 그분이 맏긴 소명 때문에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자세로 하루를 살 때 그 삶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못할 일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맡기신 일을 마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앞의 두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이기게 한 능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감옥의 문제였을 때는 "지금 힘들지만, 곧 주님을 볼 거야. 그때까지 그분을 열심히 전하자" 라며, 그것이 인간 관계의 문제였을 때는 "힘들지만, 이까짓 것 뭐 중요해. 그분 맡기신 사명을 마치고 주님을 만나 뵙자" 라며 그는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겨내었다.
그리스도와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인 것이다.
맺는 말
이번 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안부의 글을 통해 그의 삶의 모습(lifestyle)과 비결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처해 있던 어려움은 정말 힘든 것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환경의 문제를 능히 극복하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인간 관계의 아픔을 전혀 문제도 안 되는 것으로 이겨내게 만들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또 교회는 나가지만 예수님을 오늘 본문과 같은 수준에서 만난 적이 없는 분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교리 체계가 아니며, 교회 생활이 곧 기독교도 아니다. 기독교란 바로 한 분과의 사랑의 관계이며, 그분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이 분을 만나서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큰 감격인지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믿는다고 하는 분들도 함께 다짐했으면 한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먼저 죽음의 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삶의 새로운 이유와 동기를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하기를 바란다. 그때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학교 생활에서 환경의 문제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능히 이길 것을 확신한다.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확신과 능력의 삶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다시 확인하였다(1장). 앞으로 9월호를 통해서는 복음 안에서 서로 섬기고 하나되는 것을 우리가 회복했으면 한다(2장). 10월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신앙 인격의 성장에 대해서 방향성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3장). 그럴 때 우리는 다시 이 사회를 향해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2001년 코스타 수련회 이후로, 캠퍼스 현장과 지역 교회 내에서의 유학생 사역의 현황을 파악하고 지원하는 사역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호부터 시리즈로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유학생 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글은 한국 유학생 사역의 컨텍스트(context, 배경)가 되는 미국 내의 '외국인 학생 사역'(international student ministry)의 중요성에 대해 고찰해 보자 한다. 우리 사역의 장(場)인 미국 캠퍼스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 이를 선교학적, 전략적 관점에서 재조명해 봄으로써, 한국 유학생 사역을 자리 매김하고 이 사역의 중요성을 되새김해 보고자 한다.
코스타 사역이나 지역 교회 내에서의 유학생 사역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 '외국인 학생 사역'의 일부이다. 현재 미국 내에 있는 50만 명이 넘는 유학생들을 위해 ISI (International Student Inc.)와 IVF(Inter Varsity Christian Fellowship), CCC(Christian Campus Crusade), Navigators 등에서 수 백 명의 간사들이 전적으로 유학생 선교를 위해 전임(full-time)으로 캠퍼스(campus)와 지역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고 중국 학생들과 교수들 선교를 위한 전문 연구 기관이 있는데, 중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은 (코스타와 비슷한 형태의) 자국 학생들을 위한 수련회를 매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대적 조류와 필요에 맞게 이 사역들이 효과적으로 되어지고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네트워킹(networking)을 하는 ACMI(Association of Christian Ministry among Internationals)라는 사역도 있다.
2. 미국의 캠퍼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 증가하는 유학생들
지난 44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56년의 약 30,000명에서 1999-2000년도 학기에는 190개 나라의 514,723명으로 증가했다. 한국 유학생은 중국 (54,000명), 일본(46,000명), 인도(42,000명)이어 4번째인, 41,191명으로 파악되어 있다(자료: 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환 교수들, 정부 관료들, 해외 파견 근무자(지상사), 전문인들(J, H비자 소지자)이 미국에서 수 개월에서 수 년까지 머무르고 있다.
IMF 이후 한국 유학생 숫자가 줄다가 최근에 와서 다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던 전형적인 유학의 패턴에서 벗어나 단기 언어 연수와, 조기 유학, 만학 유학이 붐을 이루고 있고, 학부 유학생도 꾸준히 늘고 있다. 이 외에도 박사후 과정(Post-Doc)과 교환 교수, 그리고 정부와 기업에서 파견된 유학생과 연수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유학생의 경우 졸업 이후 미국에서 직장(job)을 잡고 정착하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교환 교수나 연수로 왔다가 자녀 교육 문제로 엄마와 애들은 미국에 남고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돈을 벌어 송금하는 일명 '펭귄족'(다른 말로는 '기러기족', '한총련'(한시적 총각들의 연합))들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2) 외면 당하고 있는 선교의 장
미국 내 외국인 학생 사역(international student ministry)은 세계 선교에 있어서 가장 외면 당하고 있는 영역중의 하나이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0.5%만이 유학생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학생들의 0.5% 정도에게만 효과적으로 복음이 전하여지고 있다. 외국에 나가서 선교 사역을 하는 것만 선교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미국 교회 내에 편만해 있는 것이다. 이는 90년 초반에 한국에 밀려 들었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외면하고 외국으로만 선교사를 보내려고 했던 한국 교회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 교회에가 복음을 전도한 외국인 유학생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외국인 유학생에게 지속적인 접근하는 그리스도인의 숫자도 극소수이다. 평범한 미국 가정에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못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유학생도 허다하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민 교회에서 유학생들을 위한 사역은 항상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 담임 목사님은 주로 1세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교회의 역량이 될 때 1세 이민자의 자녀들을 위한 2세 영어권 사역을 시작한다. 유학생을 위한 전문 사역자나 전임 사역자는 아주 드물고, 유학생의 삶의 장인 캠퍼스를 무시하고 지역 교회 안으로만 학생들을 끌어 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학생 사역이나 선교의 개념이 부재하고 유학생들은 한국어권 청년부나 청장년부로 편성되어 자체로 운영되거나, 주변에 신학교가 있으면 파트타임(part-time) 사역자를 배치하는 정도이다. 유학생은 있다가 떠날 사람이라는 심리가 팽배하여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위한 전도와 양육의 사역은 부재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운영을 위한 봉사나 열심히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민 교회에서 한국 유학생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적 대상이 아니라 개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많은 유학생들이 감히 내뱉는 한탄이다.
3. 유학생 사역의 중요성
1) 선교학적 고찰
잘못된 선교의 개념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선교를 지정학적 개념으로 생각하여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 선교 개념은 지정학적 개념이 아닌 '사람'(people) 중심의, 사람을 향한 개념이다. 오늘 날의 미개척지 선교(Frontier Mission)는 티벳, 몽고, 사우디 아라비아, 파푸아 뉴기니에 제한되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서 유학생들이 몰려 있는 미국의 캠퍼스와 도시들도 미개척 선교지역이다.
선교 메카니즘(Mechanism) - 선교학자들은 선교의 메카니즘을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로 구분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로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참 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구심적 선교이고 포로기에 이방인 가운데 흩어져서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증거한 것은 원심적 선교에 해당된다. 이 메카니즘은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병행하여 이어져 왔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모으기도 하시고 흩으시기도 하신다. 구심적 선교에 의해 약 190개국에서 50만 명이 넘는 유학생들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타문화 선교에 직접 동참하게 되었다.
선교 유형(Type) - 선교학자 Ralph Winter는 선교의 유형을 HM(home mission)과 FM(foreign mission)으로 나눈다. 그리고 각 유형을 다음과 같이 3개의 그룹으로 나눈다.
Home Mission (1) HM1 - 본국에서 동일한 문화와 언어 집단 전도 (미국 학생→미국 학생) (2) HM2 - 본국에서 유사한 문화와 언어 집단 (미국 학생→아일랜드 학생) (3) HM3 - 본국에서 완전히 다른 문화 언어 집단 (미국학생→중국 학생)
Foreign Mission (1) FM1 - 외국에서 동일한 문화 언어 집단 (미국에서 한국 학생→한국 학생) (2) FM2 - 외국에서 유사한 문화 언어 집단 (미국에서 대만·홍콩 학생→중국 학생) (3) FM3 - 외국에서 전혀 문화와 언어가 다른 집단(미국에서 한국 학생→중국 학생)
이를 통해 보면 미국 내 한인 교회에서의 유학생 사역과 코스타 사역은 FM1 유형에 해당되고, ISI 사역은 HM3 유형에 해당되며, 한국 유학생 중 중국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은 FM3 유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2) 미국 내 복음 전도의 장점들
미국 내에서 유학생 사역은 복음 전도상 여러 면에서 장점들을 갖고 있다. 첫째로, 유학생들은 본국에서보다 훨씬 더 복음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다. 그들은 언어적·문화적 장벽과 경제적 압박, 학업의 스트레스로 인해 정서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들이 필요하고, 영적으로 갈급한 상태에 있다. 둘째로, 미국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학생들과 학생이라는 공통된 신분과 관심사가 있고 많은 시간을 강의실과 기숙사, 도서관과 식당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기 때문에,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전인격적으로 '특유의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복음주의 사역'(Lifestyle Evangelism)에 동참할 수 있다. 셋째로, 구심적 선교지에서는 언어나 비자나 음식과 기후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 넷째로, 유학생들은 2-5년 정도의 기간 동안 미국에 머무르기 때문에, 복음 전도와 양육을 위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
한국 유학생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유학생 중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학생들이 전체 유학생 출석자의 25% 이상이 된다. 실제적으로 믿지 않는 한국 유학생들의 상당수가 실제적, 정서적, 영적인 필요로 갈급해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보다 복음에 대해 열려 있다. 많은 수의 한국 유학생 구도자(seeker)들이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 한국 교회 문을 넘나 들고 있다.
3) 전략적 중요성
미국에서의 유학생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유학생들이 갖고 있는 영향력 - 유학생들은 본국이나 미국, 혹은 다른 나라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미래의 지도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3세계에서 온 유학생의 경우에 더 확실하다. 전통적으로 선교사들은 제3세계로 파송되어, 그곳에서 의료나 기술, 또는 교육의 도움이 필요한 중하층을 상대로 많은 사역을 하였다. 그러므로 제3세계의 유학생들은 본국에서는 복음에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집단 출신인 셈인 반면, 가까운 미래에 정치 경제와 교육과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칠 인물들이다. 매년 12월 콜로라도에서 미국 IVF가 주최하는 외국인 학생 수양회(International Students Conference)에 참여한 한 아프리카 학생은 유학 후 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이어 차기 대통령이 될 학생이었다. 내가 지금 교제하고 있는 이디오피아 유학생 아저씨는 그 나라에서 도시 개발을 책임지고 있던 장관급 인물이다. 내가 대학 3학년이었을 때 나에게 학생 사역과 유학생 선교에 헌신하도록 도전을 준 IFES의 Eli Lau 간사의 말이 떠오른다. "등소평이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였다면 중국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평생의 유일한 기회 - 수많은 유학생들이 복음에 문을 닫고 있는 10/40 Window 나라들에서 왔다. 실제로 많은 유학생들에게 있어서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평생 의 유일한 기회가 된다. 미국의 전체 유학생 중 14%가 회교권에서 온 학생이다. 이들이 본국에서 복음에 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학교 아파트 왼쪽 옆집은 이란에서 온 유학생 부부인데, 출석하는 미국 교회에서 작년에 세례를 받았다. 몇 달 전에 이사 온 위층 오른쪽 집은 이라크에서 유학 온 부부이다. 말 그대로 "The world is at your door step"인 것이다. 10/40 Window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들을 본다는 것,은 수십 년에 걸친 그들의 사역 동안 정말 드문 일이다. 이것에 비하면 미국에서의 유학생 사역은 바로 선교의 '노다지'라 말할 수 있다. 일례로, 아이오와 대학교(University of Iowa) 중국 학생들의 캠퍼스 성경 공부 모임에는 매주 100명 이상의 본토 중국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매년 20명 정도가 세례를 받고 있다.
많은 수의 한국 학생들이 유학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있다. 주일 학교나 중고등부에 다녔던 경험이 있거나, 성탄절에 친구 따라 교회 갔던 일이 있거나, 군대에서 의무 종교 행사의 일부로 세례를 받은 적이 있는 유학생들은, 유학 시절에야 비로소 진지한 마음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거나 유학생 성경 공부 모임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들에게도 이러한 기회가 복음을 듣고 말씀으로 양육될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이들은 가까운 장래에 한국 사회와 미국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지역 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서, 제3세계에서 선교사로 섬기게 될 잠재된 일군들이다. 또한 정부 관료로서, 대학 교수로서, 대기업 간부로서, 의사로서,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오던 사람들도 있다. 고지론이든, 저지론이든, 미답지론이든, 그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들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대단한 것이다.
4. 나가는 말
현장과 컨텍스트를 무시하는 사역이자 성경적 전략이 없는 사역은 실제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제 한국 유학생 사역을 지역 교회나 코스타 수련회의 좁은 관점에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미국 전역과 더 나아가 전세계에서 열방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유학생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안목을 가지고 전략을 짜고 구조를 만들고 내용을 담아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절실히 요구되는 바는 지역 교회와 코스타가 동역자의 관계로서 현장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 내 외국 학생을 위한 목회(International Students Ministry)를 하는 기관들과 Jama, Urbana 선교 대회, 해외 선교 기관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원복음화 협의회나 선교 한국과 같은 단체들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효과적인 사역 방안들을 모색하고 협력 사역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코스타 사역도 일회성 부흥회의 성격에서 벗어나 지역 교회와 현장의 유학생 사역을 지원하고 실제적으로 섬기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헌신과 순종을 통해 이 일을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언어의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시적이고 표피적인 외형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이고 개인적인 내포적 의미이다. 가령 '개'라고 말할 때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개는 네 다리가 달린 짐승을 말하지만 개인에게 새겨지는 의미는 '냠냠'에서부터 '자식'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경험이나 이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하여 앞의 의미를 객관적인 의미, 뒤의 것을 주관적인 의미라고 한다. 뉴스나 영화를 보면서도 여러 사람이 각자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비추어 의미를 달리 새기게 되는 것은 바로 언어가 지닌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언어의 의미를 따져보게 되는 까닭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데 있다. 신문에 난 기사도 믿을 수 없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다 보니 정말로 나의 사고나 판단조차도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헤아려 보게 된다. 언론사 세무조사 발표가 있고 난 뒤, 조선일보 같은 신문은 아예 정부에 대한 저항을 선언하고, 언론탄압 음모에 맞서 의연히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이번 일을 저질렀으며 조선일보는 얼마나 억울한 지를 여러 기사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언론개혁에 초지일관 앞장 서 온 한겨레신문은 이러한 조선의 행위를 부끄러움도 잊은 후안무치적 행위라고 비난한다. 한 사건을 두고도 이토록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은 언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 대로 편집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자기 식으로 세상을 조립하는 방법은 대개 뉴스 거리의 선택, 축소 또는 확대, 그리고 재구성을 통해서이다. 즉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하거나, 확대하고, 불리한 정보는 축소함으로써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조선과 한겨레 두 개 신문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왜곡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지루한 싸움이 언제 어떻게 끝을 맺을지도 궁금해진다. 언론사 세무조사에 정부의 의도와 계획이 없었을 리 없고, 반대로 언론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한 것도 사실이고 보면 언론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데 정부의 조처가 합당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요즘 언론의 자사 이기주의는 해도 너무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찌 국민을 담보로 신문을 사유화하고 지면을 제 멋대로 자사의 이해를 위해서 함부로 도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론이 보여주는 폭력적 행태를 보면 권력의 전횡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의 주제는 언론의 전횡이 아니다. 요점은 이러한 전쟁이 어떻게 결론을 내릴 것인가 이다. 내년이면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정부는 언론의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쨌든 여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길목에서 언론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적인 이유로 나는 언론개혁이 정말 순수하게 언론개혁으로 마무리될 것이냐는 의문을 갖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 정말로 순수한 개혁이 있었으며 그것이 성실하게 매듭 지어졌는지, 이에 대한 기억 조차 없다는 것도 나의 생각을 뒷받침 한다. 짐작컨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론과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손을 잡게 될 지 모른다. 서로의 이해를 위해서 지금도 어는 곳에선가 물밑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고.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이러한 기만 행위에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신문기사 한 토막에 흥분하고 분노하며 안위하는 내 스스로가 웃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모르면서 흥분하고 모르면서 분노하고 모르면서 절규한 일이 얼마나 되었을까. 정치도, 사회도, 학교도, 교회도 고개 들어 어느 곳 하나 기댈 데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케 한다.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도 언론이 궁극적으로 개혁되는 데까지 이르지 못 할 것이라는 점에 더 답답함이 있고 절망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도 우리의 눈을 가린 채 권력의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야합과 담합과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을까. 언론은 민중의 편이며 검찰은 과연 중립이며, 판사는 과연 법의 공정한 심판자일까. 의사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답게 아픈 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는 인류의 선행자일까. 교수는 정말로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치며 헌신할까.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 대로 바로 서 있으며 목사는 과연 그 삶이 우리의 생각 만큼 투명하고 맑을까. 혹 교회에도 내가 모르는 일이 목사님들이나, 교회 간이나, 총회 간에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담합이 판을 만들고, 자신의 이해를 위해 모든 것이 조작되는 한, 오늘 세상을 사는 일은 정신 차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알 수 있게 되어있지 않다. 정보는 흐르는 길이 따로 있고, 그것에 소외되면 끝 없이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어떤 일에도 수 많은 루머와 가십과 뒷 이야기가 많은 걸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 있고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근거로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이 있을까.
불신이 싹트는 사회에서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교사의 말에 신빙성이 없으면 교육이 불가능하다. 목사님이 불신을 받으면 말씀에도 신뢰성이 떨어진다. 신뢰를 잃으면 결국은 인간 관계도 깨어지게 되어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말의 번지르르 함에 하나를 보태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이라도 상대방이 믿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작은 말부터 행동하고 믿게 하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바라건대 나는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의 말을 다시 한 번 곰씹어 보고 뒤집어 보고 상상력을 동원하고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싶지 않다. 분명한 건 사람은 각자가 영민해서 누군가 자기를 속이려 하면 자신도 머리를 쓰게 된다는 점이다. 머리 쓰지 말고 말하고 머리 쓰지 말고 믿어 보자. 지금 우리가 이 사회를, 이러한 인간 관계를 치유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난 주일(7월 22일) 아침, 현재 서울에서 다니고 있는 '문을 여는 교회'의 수양회가 열리고 있는 용인 청소년 수련원에 뒤늦게 참여하기 위해 양재역 근처에 있는 서초 구청으로 향했다. 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수고하시는 전현철 목사님과 오전 7시에 만나 함께 가기로 약속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전날인 토요일에는 미국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던 형제와 자매들이 함께 하는 성경 공부에 참석했었다. 약간 늦게까지 뒤풀이를 한 후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는 PC 방에 들러 '미국'으로 이메일을 보내고 집에 들어가니 벌써 새벽 두 시가 넘고 있었다. 무더위에 흐른 땀을 씻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적어도 여섯 시 전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하는 염려와 함께....
주님의 도우심이었는지 새벽 5시 45분에 눈이 떠져서 적당히 씻고 짐을 챙겨 잰 걸음으로 지하철에 오르니 6시 5분. 양재역까지 가려면 약 한 시간은 잡아야 할 것 같아 일단 5호선을 탄 후 7호선과 3호선으로 갈아타고 양재역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대로 6시 58분. 부랴부랴 서둘러서 서초구청이라 쓰여 있는 출입구를 찾아 나섰다. 출입구에 나와 보니 방향 표지판이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인 오른쪽으로 되어 있었다. 약간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난 번에 한 번 와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착하니 7시 3분.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주위를 둘러 보니 전 목사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듯하여 마치 나는 정각에 도착한 양 핸드폰을 들고 약간의 여유를 곁들여 전화를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목사님은 오고 계시는 중이고 이제 약 삼 분 후면 도착할 예정이란다. 난 안심하고는 책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이것 저것 정리를 하였다. 계획도 세우고, 써야 할 페이퍼 스케줄도 정하고.... 시계를 보니 7시 15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도착하실 때가 됐는데.... 길이 막히나? 아니면 잘못 찾으시나?" 이런 저런 생각으로 다시 전화를 드리려다가 운전 중일 지 모른다는 생각에 (요즘은 운전 중에 핸드폰을 받으면 벌금이 많음) 좀 더 기다리기로 마음을 정하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기다리는 곳에는 여러 여행사들의 차들이 세워 놓고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여기가 구민회관이지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예, 맞아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까지만 해도 그 물어보신 아주머니께 가서 여기는 구민회관이 아니라 서초구청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었으나 그분이 금새 자리를 뜨시는 바람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동시에 대답하신 아저씨에게도 "그게 아닌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분도 기다리던 차가 도착하면서 막 떠나 버렸다.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비를 피해가며 지하철 안에서 읽던 페이퍼를 마저 읽다보니, 써야 할 페이퍼 제목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것을 수첩에 적어 넣고 나니 시간은 어느 새 7시 4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뭔가 잘못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드렸더니, 전화벨이 한 번 울렸는데 바로 목소리가 들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어디 있느냐고. 우리 둘 다, 서로, 지금 서초구청 앞에 있노라고 자신의 위치를 밝혔다. 이럴 수가 없었다. 둘 중에 하나는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다. 나는 확신있게 빨리 이쪽으로 오시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당신이 정확하게 서초구청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물 입구 쪽으로 걸어 가서 건물 이름을 확인해 보니 글쎄 '서초 구민회관'이 아닌가? 아뿔싸, 얼굴은 화끈 달아 오르고 어찌 해야 할 지는 모르겠는데 목사님께서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다. 전화를 끊고 나서 본능적으로 여러 생각이 스쳐가기 시작했다. 우째 이런 일이?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난 7월 6일에서 8일까지 녹색연합이라는 단체와 함께 국내에 있는 생태마을들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 때 출발하기 위해 만난 장소가 바로 서초 구민회관이었는데 그 곳을 서초구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초구청 안에 구민회관이 있는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이 스스로 만들어 낸 가설과 오해로 빚어진 실수임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쩌겠는가? 기왕 벌어진 일인 것을....
목사님과 '구민회관' 앞에서 7시 45분 경에 만나서 박장대소를 하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 기다리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나누었다. 목사님도 전날 바쁜 일 때문에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가 조금 늦게 일어나시는 바람에, 바삐 챙기고 나오다가 지갑도, 주소록도 다 두고 오셨단다. 그래서 나에게 먼저 전화를 하실 수 없었다고 아쉬워 하셨다. 내 전화번호를 알아 보려고 여러 시도를 해 보셨으나 아무도 이른 시간에 전화를 받지 않더라고. 나는 나름대로 마음에서 오갔던 (위에서 적은) 생각들을 이야기하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드렸다. 그랬더니 당신도 늦게 오셨고 중요한 것들을 챙기지 못한 잘못이 있다고 하시면서 위로하시는 것이었다.
수련회장으로 가는 길 내내 머리 속에서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길목마다 놓여진 표지판들을 무시하고 나름대로의 선입견이나 경험에 비추어 나의 길을 선택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과 두려움이 맴돌았다. 분명하게 표지판은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왜 나는 질문도 없이 왼쪽을 거침없이 선택했을까? 그리고 중간에 기회가 있었는데도 왜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얄팍한 경험과 기준(심지어는 망각의 늪에서 생겨난)을 절대적으로 믿는 아집과 교만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성경을 읽고 그대로 산다고 해도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의 신, 창조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본래적인 죄성을 벗을 수는 없는가 보다. 결국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가리키는 방향 표지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일진대 나의 이런 모습은 철저한 불신의 소치에서 온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참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분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지 애써 연구하고 알아감이 없이, 좁고 뒤틀어진 가치관과 오염된 생각들로 자신의 삶의 방향과 내용들을 결정하고 남도 훈계해 왔으니.... 쥐 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생각을 우리 주위와 한국교회로 넓혀서 어느 부분에서 이러한 현상이 가장 심각할까 점검해 보니 역시 종교적인 전통의 영역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제는 거의 상식적이거나 성경적인 질문마저도 할 수 없고 또 하지도 않는, '신학 지상주의'에 까지 다다른 기독교의 실상을 보게 된다. 신학을 최고로 아는 또 다른 '전통'이 이미 '우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각의 범주가 넓어지고 질문의 능력이 싹트기 전 이미 그러한 분위기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깊이 없이 생각이 고정돼 버린 것이 중요한 화근이라면 화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이야기 하는 것이 질문이나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버리는 형국임을 감안할 때 훨씬 더 그 위험의 수위가 높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교회당에서 시간을 보내며 일을 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하나님의 일이며, 선교라는 이름을 붙이면 무엇을 해도 괜찮으며, 전임 목회자가 되거나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헌신이며, 가족이나 이웃이 굶어 죽어도 십일조는 반드시 본 교회에 내야만 하는. 이런 국적 모를 전통들이 우리 신자들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다. 본인이 알든 모르든 구조적으로 교묘히. 어쩌면 구조적으로 숨통을 조이는 가해자들 조차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예수님을 죽일 때 손을 씻었던 빌라도는 그래도 양반 중의 양반이 아닐까?
주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흘리신 동일한 눈물로 우리를 향해 외치시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모두 오른쪽으로 난 표지판을 거스르고 왼쪽으로 가고 있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예언서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외치고 있다(이사야 53장 6절). 구체적으로 예배, 헌금, 사랑을 베푸는 것마저 본래의 정신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거나, 아니면 형제들이 피폐해지도록 돌보지 않고 내어버려 두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을 어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습하고 장사터로 만드는 악행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으며 무슨 논리로 정당화 할 수 있겠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 모든 일들을 예언이라도 하듯 주님의 마음을 대변하여 어떠한 헌금이나 제사도 다 가증스럽고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이 주께는 무거운 짐이 된다고 선언하며 당시의 시대상을 통렬히 책망하고 있다. 종교적인 행위는 무성하지만 포도주에 물을 섞고, 뇌물을 받아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지 않을 정도로 공의가 없어져 살인자들만 난무하다고(이사야 1장 전체). 예수님도 당시 이스라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당시에 통용되고 있는 십일조에 대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 이 책망의 촛점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십일조가 형식에 빠져서 율법의 핵심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단언컨대 우리의 실상이 구약 이스라엘의 시대나 예수님의 시대 상황보다 그 타락의 정도가 결코 덜 하지 않다. 화려한 예배당과 그 속에서 연주되는 거룩한 음악, 세련된 설교, 그리고 어떤 지방 자치 단체들보다 풍부한 예산, 바쁘게 돌아가는 모임과 헌신의 약속들. 그러나 정작 교회 안에 참된 의와 인과 신이 있는가? 형제됨이 살아 있는가? 과연 크리스천 개개인들의 삶의 현장에서 정직과 공의가 실현되고 있는가? 대교회는 장사터로 변해 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지난 90년 대 초반부터 불거져 나온 교회의 부패와 사회 속에서 저질러지는 굵직 굵직한 해악의 중심에는 어김 없이 내노라 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음을 떠올리면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나 또한 그 악함에서 한 발짝도 멀어져 있지 않은 공범자임을 자인할 때, 많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꾸짖으며 외친 세례 요한의 음성이 무섭게 들려 온다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태복음 3장 7절-10절)
느헤미야는 성벽을 중수하고 나서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으고 학자 에스라를 모셔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게 한다(느헤미야 9장).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듣는 도중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회개가 일어나고 결국 그 회개가 이스라엘 전체의 공통된 삶의 전환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된다. 곧 이방 백성과의 통혼 금지이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 백성들과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율법과 그에 깃든 정신을 어그러 뜨렸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제사와 예배도, 동족 간의 사랑도 모두 저버리게 된 악한 현실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의 지도자로서 느헤미야의 업적은 성벽의 중수는 물론 더 더욱 백성들의 마음에 율법, 즉 하나님의 마음을 심어 놓은 것이 백미 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첨단 전자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모양과 형태는 다르지만 핵심은 전혀 다르지 않은) 우상 숭배의 악함이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회복하는 일, 이것 보다 더 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는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보여준 율법의 회복에 달려 있다. 곧 그 옛날 루터가 외쳤던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정신이 우리 개신교의 양보할 수 없는 근간이라면, 우리는 온 정신을 모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의 가르침을 성경 대로 연구하고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절대의 믿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로 말미암아 회복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해서만 인간과 자연의 참된 회복을 이룰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성경과는 다른 종교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십자가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으로 바꿔가는 참다운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단지 교회당과 종교 조직과 연관된 영역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숨 쉬는, 아니 우리의 생각이 닿고 노동하는 그 모든 영역들을 하나님의 신앙으로 되살려 내는 작업. 주께서는 그것을 우리로부터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 주께서 성령과 성경을 통해 오른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오른쪽으로 가는, 지혜롭고 순결한 신앙의 결과로서 드려지는 삶의 예배를....
지난 칼럼에서는 경건의 연습과 실제적인 대안으로, 주로 교회 안에서의 예배 생활, 말씀 훈련 및 기도를 통한 경건의 훈련에 관하여 나누었다. 이번 호에서는 어떻게 하면 훈련된 크리스천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서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균형있는 삶을 살며, 평안함을 유지할 것인가에 관하여 나누어 보고자 한다.
균형있는 삶 - 예배와 삶의 일치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와 한국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또 조롱을 당하는 것은 바로 교회 안에서의 뜨거운 예배 신앙을 그들의 세상의 삶 속에서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배와 삶이 불일치하는 위선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이 세상의 삶 속에서 참 소금의 기능을 잃어 버렸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는 쓸모 없는 소금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 생활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받고 기도를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었으면, 이제 세상으로 나가서 구원 받은 자로서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참 경건의 훈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교회에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 드리며,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었지만, 세상에서는 말씀과 전혀 다르게 살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인 믿음의 모습은, 미국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이민 교회의 한인 크리스천들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전 시카고와 뉴욕에서, 미국에 이민 온 50여 개국의 미국 이민자에 대해 앙케이트를 조사했는데, 미국 사회의 기여도가 가장 낮고, 불친절하고 무례하며, 신뢰하기 힘든, 인기 없는 이민자의 몇번째로 한인 이민자가 뽑혔다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가는 곳마다 한국 이민 교회는 많고, 날마다 예배는 열심히 드리는데, 무엇 때문에 이 미국 사회에서 한국 사람은 정직하지 않은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신실함과 정직성이 없는 사람으로 비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한인 이민자 중에 50%가 넘는 한인 크리스천들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이원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생애 동안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거하셨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죽어 가는 뭇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셨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은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도리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하기에 늘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의 삶이야말로 가장 실제적인 경건의 연습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의 삶 속에서의 경건의 훈련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연약한 심성과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는 세상 속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오직 주님을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란 바로 경건의 능력을 인정하는 삶이다. 몇 십년 믿음 생활을 하고, 또 철저히 예배와 말씀과 기도로 무장이 되었다고 한들, 세상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빛을 발할 수 없다면 저들의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삶은 세상에 동화되는 삶이 아니다. 세상을 누리면서도, 소금처럼 썩지 않는 삶을 말한다. 세상 가운데 살면서도 구별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구별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사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세상을 피하며 사는 것은 더욱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되, 주님의 사명을 받고 세상에 파송된 하나님의 대사처럼 산다는 것이다. 신학자인 존 켈빈은 "현재의 삶은 유혹적인 것들이 많이 있어서, 유쾌하고, 우아하고, 감미로운 하나의 거대한 쇼와 같다. 우리는 그것들을 절대로 경멸하지 말아야 되는 하나님의 선하신 선물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애호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에 거하는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기를 원하시며, 또 우리가 주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누리기를 원하신다(딤전 6:17).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주님이 주신 만물의 풍성함에 불편해 하거나 죄스러워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주신 것들을 즐거움으로 누리면서도, 그 즐거움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 하는 어리석음과 탐욕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거룩하게 된 후에, 다시 세상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거룩한 대사인 셈이다. 이리하여 우리 크리스천은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과감히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에서 은혜 받고 세상으로 나가서는 주님을 증거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자. 유학 생활 중에 여러분이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보여주고, 또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상을 섬기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유학 온 50만 명의 국제 유학생은 여러분이 섬겨야 할 귀한 대상이 아니겠는가?
자족하는 마음
성경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된다고 말씀하셨다(딤전 6:6).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잘 되고, 신앙적으로 성숙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그만큼의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의 연습에 큰 유익이 된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김집사 그릇은 저렇게 큰데, 내 그릇은 왜 이렇게 작습니까"라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내 그릇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경건의 훈련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여 결국에는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허락된 섬김의 자리와 위치,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적인 위치에 자족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자. 그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통하여 계획하신 모든 것이 온전하고, 아름답고, 최고 좋은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히 1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2)" 라고 하셨으니, 지금 당장 볼 수 있다면 그것을 믿지 못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느끼고, 갖지 못한 것을 가진 것처럼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믿음과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주님이 주신 것으로 자족하며 사는 크리스천들은 돈을 가지고도 유혹 못하고, 지위를 가지고도 협박 못한다. 이런 크리스찬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실 때도 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인가? 학위인가, 돈인가, 명예인가, 직장인가, 자존심인가? 주님 앞에 모두 내려 놓자. 순종함으로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렸던 여인처럼, 여러분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함을 누릴 때에 진정 자유함이 있을 것이다.
믿음은 있으되 자족할 줄 모르는 크리스천은 범사를 걱정하다가 밤을 새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으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가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진정한 복락은 평안함일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시사 하신 첫 말씀이 바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누려야 할 복락은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평안이다. 남보다 잘 되는 것도 아니요,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세상 지위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자족함을 가지고, 평안함을 누리는 것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크리스천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경건의 연습을 통하여 주시는 금생의 약속은 평안함이다. 주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이 세상 체제에서는 가장 낮고 보잘 것 없는 언덕을 점령하고 살아도, 사도 바울처럼 기쁨으로 높은 곳을 바라 보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안에서 평안함으로 살되 세상에 속하는 삶을 살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대사로 파송 받은 자로 살아 주님의 영광을 증거할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삶이 될 것인가? 오늘도 우리는 경건의 연습과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유학 생활 동안에 열심히 예배 드리고, 주야로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며, 부르짖어 기도하고, 세상 가운데에서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자로 살수 있기를, 또 주님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바울같은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하며, 유학생 경건의 연습과 약속의 칼럼을 끝맺고자 한다.
*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 칼럼은 본 회를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다음 달부터는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라는 칼럼 제목으로 IMF의 여파로 학위취득 후에 진로와 취업에 대하여 고민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공통된 관심을 몇 회에 걸쳐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1994년 8월 4일 오후 5시, 우리 가족은 마침내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시 공항에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황혼이 깔리기 시작한 활주로의 눈부심 속에서 트렁크를 잔뜩 실은 시퍼런 트럭이 좁다란 공항 출구를 빠져나와 시골 역사를 방불케하는 공항 청사 앞에 꾸물거리며 멈추어 서자 저마다 짐표를 흔들어 대며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우성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꿈꾸듯 아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풍경은 석양에 젖어 초콜릿 색깔로 빛나는 가운데 옛 기억을 더듬어 희미하게 되살아 나는 60년대 한국 거리의 모습이었다. 누추하고 생경한 붉은 간판들로 뒤덮인 거리, 먼지와 쓰레기 더미 사이를 오가는 새까만 얼굴들의 찌든 모습들이 가슴을 파고들며 잔잔한 설렘으로 젖어 왔다. 잔뜩 긴장하여 겁먹은 표정으로 낯선 거리를 내려다보는 아내와 볼에 홍조를 띤 여덟 살 짜리 아들의 옆모습을 틈틈이 훔쳐보았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생각했다. 그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이 모든 역사를 일으키신 그 분만을 의뢰하리라 하는 강한 기도가 저절로 입 속을 맴돌았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시가지를 벗어나 길 양편에 오물 쓰레기가 잔뜩 버려져 있는 언덕받이로 한참 올라가다 보니, 세로로 길게 붙은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이라는 흰색 나무팻말이 나타났다. 그러자 교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맞닿아 우뚝 세워진 연둣빛 건물이 와락 눈앞에 다가왔다. 건물 앞으로 연길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평선에는 황홀하게 타오르는 눈부신 저녁 노을이 붉게 펼쳐져 있었다. 버스에 내려서 건물 뒤편의 확 터진 벌판을 한 번 둘러보던 나는 지금 내가 내딛고 있는 이 곳이 우리 선조들이 세월의 모진 풍상을 뚫고 건너와 살던 만주 벌판의 바로 그 중국 땅이라는 사실이 채 실감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한 느낌에 싸인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학생 기숙사에 임시로 짐을 풀고 중국에서의 첫 밤을 맞이한 우리 부부는 감개와 두려움과 설렘에 젖어 엎드려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 여름인데도 오싹하는 한기가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왔다. 이국에서의 첫날밤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 기숙사 어디선가 은은한 하모니카의 선율을 타고 찬송가가 고즈넉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꿈결로 빠져들었다.
숙사(宿舍)에서의 첫 2주일 간은 마치 우리 가족이 꿈 속에서 어느 이상한 나라로 별안간 날아온 듯한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여러 가지 여름 행사로 분주한 학교 안팎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사 안으로 들어오면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내와 아이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기숙사 식당의 정해진 식사시간만 기다리며 세 식구가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아내와 아이의 감추어진 표정 속에서 행여 어떤 절망이라도 나타날까봐 노심 초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 안은 온통 진흙 창이 되어서 꼼짝달싹 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으슬으슬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숙사 안에서 창 밖을 달리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축축이 젖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해가 났다. 맥이 없어 나가기 싫다고 하는 아내를 두고서 아들 다니엘의 손을 잡고 산보라도 할 심산으로 기숙사 현관 앞에 나가 보았다.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려운 질퍽거리는 진흙땅을 어이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빠, 저것 좀 봐. 참 아름답다. 그지?" 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얼기설기 보기 싫게 헝클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색깔의 전깃줄 사이로 맺혀진 이슬이 환한 햇살을 받아 영롱한 무지갯빛을 비추이며 아름답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한 줄기 부끄러운 생각이 샘솟듯 스며 나와 아이를 향해 흘러 내렸다. "그렇다. 아들아!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 복되다."
한국서 부친 콘테이너가 도착하자 우리는 뻬이따라는 동네에 셋집을 얻어 학생 숙사에서 내려왔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우리의 그 많던 이삿짐이 하나도 빠짐 없이 전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안성맞춤의 층집(아파트)을 얻게 되었다. 내 아내(이곳서는 애인 동무로 불린다)는 도시 전체를 맴돌고 있는 먼지와 악취를 가장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 동안 우리가 무심코 살아왔던 깨끗하고 안락한 환경에 대해 얼마나 감사치 못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 함께 회개하며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적응하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 비밀된 방법들을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맑은 날, 5층 내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야산의 전원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끝없이 펼쳐진 구릉과 지평선을 너머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그 벌판 가운데 내가 홀로 서 있는 기분은 복잡한 한국에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자아내곤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내려선 거리에는 텅 빈 심령들의 찌들은 모습들과 쓰레기 먼지 냄새가 가득하다. 한국의 50년대에서 80년대까지를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소가 끄는 달구지와 인력거, 자전거의 홍수, 매연을 뿜어 대는 구 소련제 라다 택시, 더러는 값비싼 그랜저나 벤츠에 이르기까지 눈에 뜨인다.
하루는 학교에 있는데 밤톨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폭우가 내려 삽시간에 온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걱정이 되어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아내는 발코니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빗줄기를 물동이로 퍼서 밖으로 퍼내느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돌아오는 길에서 새까만 구정물로 잠긴 도시에 긴 장화를 신고 더러는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쥐고 물살을 헤치며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되돌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내 나이 서른 살 되었을 때, 미국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후 어느 날 새벽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다. "하나님! 헛되이 보낸 지난 세월들이 억울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90년 KOSTA에 참가한 이후, 중국에 대한 부르심을 받고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야베스의 기도(Prayer of Jabez)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지난 해부터 미국의 기독교 서점 베스트셀러로 올라선 뒤, 올해에는 USA Today나 Wall Street Journal과 같은 일반 매체의 베스트셀러가 되더니만,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이미 한국 기독 서점의 No.1 베스트셀러(7월 28일 현재 kbook.com No.1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Bruce Willkinson은 그가 신학교 시절, 교목인 Richard Seume 박사의 설교를 통해 역대상에 등장하는 야베스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이 '야베스의 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야베스의 기도는 계속 되고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이 책은 축복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그가 해온 30년 간의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그가 받은 축복(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경을 넓혀야 할 사역자가 받아 누려야 할 축복)과 깨달음을 간결한 필치로, 하지만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나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책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다. Amazon.com에 가보면 이 책에 관한 평을 볼 수 있는데 (7월 28일 현재 268개의 서평이 올라와 있다), 이 책에 대한 평가만큼 호평과 혹평으로 극하게 갈라진 경우를 나는 본적이 없다. 잠시 여기서 이 책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시선을 보도록 하자.
"Dangerous little book" (one star out of five) by Albert Cerussi ....However, the author goes way too far. He seems to indicate that if you pray this prayer then God will bless you. This sort of cosmic santa claus stuff is one step ahead of the infamous "name-it-and-claim-it" gospel. The author places way too much emphasis on this prayer and the words inside of it. The "Prayer of Jabez" is a classic case of over-reading into the Scriptures. Believers in Jesus who read this book should view it with caution.....
"A powerful book" (five stars out of five) by Doug Keating .....One concern I had about the book was the issue of praying for abundance. Luckily, the author "hit the nail on the head" with this topic by focusing on what God wants to bless us with instead of what we want from God. After all, if we put our faith in God, shouldn't we trust his judgement when it comes to his blessing our lives. I think that prosperity is one of the most misunderstood topics in the Christian community today, and hopefully this book will help solve that problem......
두 사람은 동일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볼 수 있다. Albert는 '위험한 책'(dangerous little book)으로, Doug은 '위력적인 책'(powerful book)으로 묘사한다 - 나는 Doug의 의견을 지지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 축복을 받아 들이는 입장은 Doug과 Albert의 경우처럼 천차만별이다.
미국에서 "name it and claim it" gospel이 성행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한때 기복 신앙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다. 기복 신앙의 눈에 보이는 해악은 하나님을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사다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악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퍼져 있는 일종의 "하나님의 축복(또는 성공)에 대한 거부감"이다 - 이는 위의 Albert의 글 행간에서도 언뜻 언뜻 비친다. 잘못된 기복 신앙으로 인해 생겨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거부감이야말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약화시키는 해악이 아닐까 한다.
아니 축복에 왠 거부감?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다. 이것을 만일 기도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나에게 세상적인 축복을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평생 하나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참 훌륭한 신앙 고백이지만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신앙 고백에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 지혜가 필요합니다, 물질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보내 주세요, 내 앞길을 열어 주세요." 우리가 간구해야 할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 맏겨진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 안타까운 것은 이 축복(또는 성공)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간구의 내용을 막는다는 사실이다.
축복에 대한 거부감에 관한 한 이것은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여기서 한참을 헤매었다. 일단 무슨 설교를 듣던지, 아니면 책을 읽던지, '축복'이나 '성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내 마음에는 Alarm이 울린다. '이거 뭐 또 기복신앙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귀를 쫑긋이 세우거나, 눈을 부릅뜨게 되었다.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전적으로 내면적인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의 세상적인 필요를 아뢰는 기도를 드릴때는 좀 창피한 생각도 들기도 하고 묵상 기도나 다른 기도가 수준 높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이런 일종의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생각의 중요성'을 깨닫고 난 뒤다. 강준민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간구하는 법칙은 우리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또한 간구하는 법칙은 우리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우리의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간구도 우리가 소원하는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입니다." (꿈꾸는 자가 알아야 할 21가지 믿음의 법칙, 78쪽)
우리의 간구가 씨앗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확을 거두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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