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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서론

Living out My Dream

2010년 시카고 의대 MD PhD 통합 과정을 20세의 나이로 졸업한 쇼 야노군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지금 서른이 넘은 나이로 병원에서 전공의로 일하고 있지만, 그는 이제 갓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전공의로 일하고 있다. 시카고에서 자란 그는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밑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홈스쿨링을 하고 9세에 로욜라 대학에 입학하고 12세에 시카고 의대에 입학해서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2세에 쇼팽을 연주하고 3세부터 작곡을 했다는 믿기지 않는 신동이라고 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가 인격적으로도 참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 뇌 연구를 통해 인류에 공헌하고 싶다고 하면서, 앞으로 어떤 꿈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I am living out my dream now.” 이 말이 상당히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자기 꿈을 살아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남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 청년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주변의 관심은 차지하고서라도 그를 극성 아시아계 부모의 희생양으로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과 그를 외계인 취급하며 인터뷰 때마다 노벨상이 목표가 아니냐고 다짜고짜 묻는 미디어의 냉소적인 태도 때문에도 참 힘들었겠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일까? 오프라 윈프리 쇼나 제이 레노 쇼의 거듭된 출연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 모든 세간의 관심 속에서 그 청년은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꿈이 실현되면 행복할까? 과연 나에게는 그런 꿈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나에게 행복이 어떻게 찾아올까? 꿈이 있다면, 그 꿈은 어떻게 생겼는가? 여러 가지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지금도 매 주 고전을 몇 권씩 읽으며, 고전 중의 고전, 성경은 어려서부터 이미 여러 번 완독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크리스천인지는 모른다. 그가 말하는 그의 꿈, “my dream”은 과연 무엇일까? 꿈을 단순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정의해도 좋은 것일까? 꿈을 살아내긴 하되 ‘어떤 꿈’을 살아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할 지 모른다. 또 ‘누구의 꿈’을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본론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청소년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면 그들을 고민을 어느 정도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공부 잘해?”, “여자친구, 남자 친구는 있어?”, 그리고 “앞으로 뭐 할거니?” 가 그 질문들이다. 설명할 필요도 없는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 한창 이성에 대한 관심이 넘치는 시기이니만큼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진로에 대한 걱정이 이 세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 돈이 곧 힘이 되는 미국 이민사회에서 또 한가지 질문을 추가해본다. “너희 집 잘 살아?” 자신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외제차 몇 대 정도되는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투자하는 기러기 부모님도 계신 반면, local business를 하시며 어렵게 자녀들을 뒷바라지하시는 이민자 부모들도 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이 ‘부모님의 우상’이라는 것도 청소년들은 안다. 미국 땅에서 자식 농사 잘 지어 남 부럽지 않은 멋진 가문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보모님의 부담스러운 기대를 모르는 청소년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도 한참 더 철이 들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부러워할 모든 것을 가진 청년 쇼군의 이야기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보다 어느 별나라 이야기로, 아니면 잘못하면 부모님이 인용할 ‘짜증나는’ 예화 소재거리로 인식되기 쉬울지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되고, 맘에 드는 이성친구가 생기고, 넉넉한 부모님의 후원 아래 보장된 미래가 있는 진로가 결정되면 나는 과연 행복해질까?

고민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위의 질문들에서 드러나는 현재 내 고민들의 근본 뿌리가 무엇인지 생각 보자. 계속되는 고민은 결국 우리를 우울의 숲으로 인도한다. 고민을 더 한다고 해결책이 보일 것 같지 않다. 단언하건대, 우리 고민의 원인은 ‘자기 사랑’에 있다. 내 자신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만큼 더 큰 상처가 생길 수 있다.  컷트라인이 있을 때 합격과 불합격이 있기 마련이다. 목표가 없다면 좌절도 없다.  그런데 목표, 기준치, 컷트라인이라는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기에 생긴다. 내 안에 내가 정해놓은 목표가 무엇인가? 내 성적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내 여자친구는, 내 남자친구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내가 성공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집안 배경은 있어야 하는데, 내가 좋은 대학 가려면, 이 정도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내가 나중에 성공하게 되면 적어도 이 정도 차를 사고, 이 정도 집에서 살아야 하는데, 등등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고생을 많이 하면, 내 손해이다. 누구나 고생을 최소화하여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을 선망하게 된다. 꼭 내가 만든 목표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부모님이 우리에게 심어준 목표일 수도 있다. 우리 아들, 우리 딸은 적어도 미국에서 이 정도 대학은 들어가주어야 한다. 부모님의 기대치가 내 기대치로 나도 모르게 바뀌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많은 경
우, 내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내 꿈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이제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 꿈은 어디서 온 것인가? 내 꿈이 세상이 불어 넣은 것인지, 주님이 주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또는 미디어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꿈이 있을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없는 것을 친구는 가졌을 수 있다. 내게 없는 미국 시민권이 친구에게 있다.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 한다. 나보다 학교에서 인기가 있고, 나보다 학교 성적이 좋다.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부러워하면서, 우리의 꿈이 자라났었을 수 있다. 내가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형성된 방어기제적 꿈도 있다. 연예인이 되고 싶은가? 억대 연봉을 받고 싶은가? 이렇다 할 꿈이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자라서 막연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마음껏 세계 여행을 하고 싶은가? 좋은 옷을 입고 멋진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예쁜 핸드백을 유행에 맞게 구입해서 들고 다니고 싶은가?  좋은 독일차를 몰고 다니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품격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싶은가? 그런데, 현실을 보니 부자들이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은 마음대로 다 하면서 편하게 사는 것 같은가? 그래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내 적성에 크게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어떤 직업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지금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생각해보자. 물론 이 답은 각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고 싶은 모든 일들 가운데,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를 묻고 싶다.

꿈인가?  본성인가?

이제 ‘꿈’을 막연히 하고 싶은 일 정도로 정의해도 좋을지 생각해보자. 적어도 ‘꿈’이라고 한다면, 내 본성이 하고 싶은 대로 내 맡기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마음껏 먹고, 놀러 다니고 싶은 곳을 거침 없이 다는 것을 꿈이라고 하기엔 미안하지 않은가? 예쁜 사람, 잘 생긴 사람을 만나 사귀고 결혼하는 것을 꿈이라고 하지 않는다. 꿈이라면, 적어도 꿈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 꿈과 본성을 구별해보자. 꿈은 나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다. 공부가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느껴지는가? 너무 쉽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공부를 하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고, 계획을 짜고, 의지를 가지고, 늘 열심히 하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누가 나에게 불쾌한 일을 하면, 그 사람 험담을 하고 싶어지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기도하게 되는가? 크리스천인 우리들은 꿈을 이야기할 때, 적어도 우리의 본능에 우리의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걸, 그 이상의 가치를 말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꿈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정체성에서 꿈이 생긴다.

온전한 꿈은 내 정체성이 분명해질 때 생긴다. 정체성이 먼저이고 꿈은 나중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면 애국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대한민국에 대한 통렬한 역사의식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불과 50년 전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변방 국가였던 한국이 이제는 G20 세계 정상 회의의 의장국이 되었다. 세계에 유래 없는 기적의 주인공 대한민국,  전 WHO 사무총장(Secretary General)도, 현 UN 사무총장도 한국인이다. 인터넷 인프라와 모바일 통신 기술에서 대한 민국을 따라올 국가가 없다.  한번도 본선 진출, 아니 1승을 올려본 적이 없는 한국 축구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의 신화를 이룩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렁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고,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
모국을 떠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내가 10살 때 델라웨어의 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 한국을 아는 미국 친구들은 한국에서 입양된 친구 빼고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 그 때는 그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 쇼핑몰에 가면, 나를 보고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던 때였다. 내가 아는 친구는 벽에 큰 태극기를 걸어놓고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 친구들의 유창한 영어에 주눅이 들었을 때는 속으로 ‘너희들 한국말로 하면 다 죽었어.’라고 되뇌이며,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우며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혼자 고생하면서 공부할 때, 내가 잘 못하면 대한민국이 욕먹는다는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나와 대한민국을 동일시 할 때, 대한민국이 나의 자랑이 될 때, 나 역시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길 원하게 되다. 적어도 미국 땅에서 대한민국의 망신이 되길 원치 않게 된다.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부모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다면, 부모님의 기대가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기 보다, ‘행복한 부담’이 될 수 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내 어버지의 아들, 내 어머니의 딸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면, 그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최선을 다하게 된다. 누가 내 욕을 하고 다니면 참을 수 있어도 아버지 욕을 하고 다닌다면, 그것만은 참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버지와 당신을 동일시 하고 있다. 아버지 아들, 딸이라는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속에서 꿈이 태동한다.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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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핵심으로 들어가서 여태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리를  가르쳐 드렸는데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상대편이 나에게 상처준 것을 생각하면 절대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용서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입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를 보면 예수님의 아픈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offend한 거 아십니까? 우리가 모든  죄를 졌을 때 그 모든 offend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용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한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은 자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기억 안하고 용서하려고 한다면 참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김철수 선교사님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얼마나 큰 대가을 치르셨나요? ‘Passion of Christ’에서 그려진 하나님의 모습은 그 육체의 고통을 잘 표현해 줍니다. 육체의 고통도 너무 아프지만 제가 더 가슴이 아픈 것은 하나님이 외로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한번도 외로운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지만 항상 예수님이 여러분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둘째치고 하나님께서는 유아독존으로 유일하게 혼자가 되어보신 분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완전하게 separation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보신 분은 어떤 기분인지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게 일시적이라도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독생자를 완벽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내 상처가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에 절대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대가를 치르시고 여러분을 용서하셨는지 먼저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용서의 첫번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계가 없으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할 수 있듯이 용서를 받아본 것이 머리에만 있고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 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시면서 용서의 단계를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안되면 용서가 여러분에게 너무 큰 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지,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괴로움을 주었던 존재였는 지 기억하시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달은 후 해야할 것은 상대편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cool’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적으십시오.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나 망신을 주었는지, 자매 같은 경우에는 사랑한다고 해서 순결을 주었는데 어떻게 날 버릴  수 있는지. 그 모든 것을 다 적으세요. 그렇게 아픈 것까지 종이로 다 적어서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상처가 다 빛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상처가 치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픈 감정들을 다 적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raw feeling’을 전부 다 적으시고, 그것을 잘 소각하고 버리시길 바랍니다. 정말로 여러분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 지를 정확하게 드러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하면 많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모든 쓴 뿌리들을 하나님 앞에 다 적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죄를 짓는 것이 무서운 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raw feeling’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이 일이 정말 힘들지만 우리가 용서의 원어에 담긴 의미처럼, 탕감해주고, 던져주고,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만큼 아팠으니 나에게 보복의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게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저지른 행동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알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 용서를 실천하시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주고 복수할 권한을 포기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수할 권한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나에게 빚을 진 형제가 나에게 ‘백만 불’을 주어야 되는데 그 백만 불을 찢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시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이 용서했을 때 여러분을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교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만큼 중요한 것이 나에게 잘못한 상대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그것을 내려 놓았고, 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상처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서 담대하게 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는 이 일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다시 첫 번째 단계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날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용서를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자녀라 하고 싶지만 그래도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머뭇거릴 것입니다. 정상입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그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죄할 권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권리만 주셨지 정죄할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정죄는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다보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blind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죄권을 안주시는 것은 즐거운 복수를 혼자 하려고 하시게 아니라 복수의 과정에서 상처받는 게 우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신에게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결과적으로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내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하나님이 더 나은 ‘just maker’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공평하게 할 수 있도록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 용서했으니 봐 주세요’하더라도 그 사람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just maker’로서 일을 하십니다. 물론 상대편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이 잘 되는 방향으로 하시겠지만요. 모든 죄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했기에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예수님도 저희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처음 용서를 시작할 때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이 좀 더 자라면서 좀더 성숙한 이유로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한 분이십니다. 얼마나 정확한 분이신지는 물리적인 법칙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으셨을텐데 지구의  상태가 약간만 달라져도 지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리적인 세상도 굉장히 섬세하게, 정교하게 만드셨는데 여러분이 받은 상처를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여러분도 용서받고 싶은 것처럼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죄를 더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만약 사람들이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셨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죄가 아니라고 할 만큼 정신이 이상한 분도 아니었고, 다른 길도 있었는데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실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리다면 하나님이 복수해 주시는 것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숙하게 될수록  내가 받은 용서때문에 남을 용서하게 되고 내가 감사해서 용서를 하게 됩니다. 내가 일억의 빚을 졌는데 그게 탕감되었다면 누가 나에게 일 불을 탕감해 달라고 한다면 안 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감사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었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용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better ‘just maker’라는 믿음에서 하셨으면 좋겠고, 그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이 용서하시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도 용서를 해야 됩니다. 용서는 믿음의  행위이고, 선택하는 것이며, 복수할 나의 권한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이며, 여러분을 위한 일입니다. 용서의 유익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신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으시길 원하십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백만 달란트,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백 일과 천 오백 년의 노동의 차이와  같습니다. 용서를 안하겠다는 것은 일억 갚음을 받은 사람이 일 불을 안 주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제삼자와 가해자에게도 할 일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아픈데 주위에서 부채질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넌 크리스천인데 왜 용서 못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그 상황에 있으면 펄펄 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조심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제 삼자로서 도와야하고 곁에 있어주어야 한다면 기억하세요. 절대 쉽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정말 당한 사람에게는 큰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제 삼자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도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픔을 다 받으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대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시고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쉽게 해결점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상대편이 해결점을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들어주시고 아픔을 공감하고 기억해 주시는 것이 너무 필요합니다. 가해자로서 중요한 일은 사과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과를 받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사과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주고 회복을 시작시켜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실수로 상처를 주었고 사과를  하면 상대편의 상처의 치유가 굉장히 빨라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해자일 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하고 넘어가지 마시고 그 사람의 상처치유를 위해서 사과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아름다운 일이고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사과를 안 하는 것은 내가 상처를 주어도 나는 상관없다는 냉정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사과할 때 기억할  것은, 상대편에게 아픔을 준 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많이 싸우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이 의도를 하지 않았는데 당한 나만 바보가 되었다는 생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도하였던 그렇지 않던 상처를 받았다는 게 아픈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표현하고 정확하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나쁜 예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상대가 무엇이든지 잘못한 것 같으면 용서해 주세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잘못 안 했다는 말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상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집어주지 않으면 상대는 잘못한 것도 모르면서 ‘왜 용서를 해?’ 하는 식으로 나와서 여러분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모든 것은 실수다’라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고의건 아니건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상처를 주었다면 막연하게 화해를 청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저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에요.’하는식으로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상처는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라기 보다는  그 행동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기에 이 말은 올바른 사과가 아닙니다.  고백은 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부분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훨씬 축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고, 그것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 안에서 용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 놓으시고, 모든 일을 종이에 자세히 다 적으십시오. 그리고 내 안에 용서의 마음이 없는 것조차 고백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십니다. 용서할 힘도 구하십시오. 용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 마음과 힘도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감정과 분노를 생각나게 하세요. 상처가 곪으면 정말 아프기 때문에, 그것을 터트려야 합니다. 이 일은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과 아픈 고통들을 다 적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에서만 맴돌다가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들을 성령님께 드러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다  드러나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릴, 던져버릴, 그리고 뒤돌아갈 힘을 구하십시오.  
이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진정으로 믿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 어려움과 아픔을 통해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하기 힘듭니다. 한 번 용서하면 끝난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 받은 상처는 오래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이 과정을 반복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끝없이 축복하십시오. 그것이 진짜 여러분이 용서를  한 증거입니다. 축복을  하라고 하니, 정말 화가 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람을 용서할 때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 때에는 축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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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용서라는 말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어원을 보면 ‘나사’, ‘아피에미’ 즉, ’보내는 것’, ‘던져 버리는 것’이고 , ‘살락', ‘카리조마이’ 즉, ‘자비를 베푸는 것’,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을때 그 상처를 안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것을 던져 버려서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용서의 어원입니다. ‘던져버리는 것’, 그 어원을 기억하세요. ‘자비를 베푸는 것’은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상처를 주었는데 용서하는 것은 불쌍한 내가 당하고, 착한 내가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받으면 세상의 눈으로는 여러분이 복수할 권리를 갖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굉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보내 버리고 던져 버리는 것이고, 그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믿음가운데 그 담대하게 자신감을 가질 만한 일인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moving on’하는 것입니다. 뒤돌아서서 잊어버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처와 배신 이런 것들을 밑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저도 상처를 받고 용서하는데 일 년 반이 걸렸습니다. 지금도 자다가 그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일 년 반이 걸렸던 게 지금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아니까 5분이 걸립니다. 원칙을 생각하며, 날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니 5분 안에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부터 용서가 쉽지는 않지만 점점 더 좋아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일기장에 써 놓고 계속 묵상을 하게 되는데 그러지 마시고 던져버리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꾸 생각을 끄집어 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생각을 끊어버리는 게 필요한대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수 있지만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혹이 어디로 들어오느냐면 생각으로 들어옵니다. 과거가 자꾸 묵상의 주제로 올라오면 생각의 주제를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삼 분만 “초콜렛 초콜렛” 해보십시오. 초콜렛에 알레지가 있는 사람이 아닌 한 생각나는 건 초콜렛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처를 ‘잊어야지 잊어야지’하면 상처밖에 생각나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러분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속죄양이라고 해서 양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광야로 보내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의 상처들을 버리고 속죄하는 것처럼 양에게 그 상처들을 묶어서 다시 오지 못하게 보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여러분이 진, 큰 빚을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당하고 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진 빚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보내주고 과거를 잊어주고 잘못을 잊어주고 상대편을 자유케 해주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보내주는 것입니다.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 주고, 빚을 없는 것으로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용서하지 않을 일을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내가 혼자 조금 ‘오버’한 것인데 무조건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면 안 되지만, 용서했을 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만 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처를 받은 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이유는 ‘은혜’, 또 다른 표현으로는 ’용서’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용서가 다른 게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그 악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용서 안에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하나님꼐서 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서해야 할 때 너무 힘들지 않나요? 만약 상처를 준 사람이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여러분은 괜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할 때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당신이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용서는 선택입니다. 감정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감정은 한참  뒤에 오기에 용서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가 짚고 넘어갈 것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 중에 하나인데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는 그 사람의 input과 상관없이 던져주고, 버려주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해는 박수를 치는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한 사람이 용서를 하고 싶어도 상대편이 계속 상처를 주면 그 관계는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 주어야 하지만, 화해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고 돌아와야만 가능합니다. 남편이 부인을 때리면 부인은 남편을 용서해야 하지만 abuse하는 관계로 들어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화해는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때 관계를 끊으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나를 보여주고 상처를 주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예수님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 번을 확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사랑하느냐?” 본인이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가르쳐 주어야 상대방이 돌아설 수 있습니다. 화해에는 공평과 정의가 바탕이 되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강한자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하면 무언가 져준 것 같지만 강하지 않은 자는 결코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자만이 가능합니다. 용서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의가 없는데 무조건 친한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가 먼저 나와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는 의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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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용서를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둔한 분이면 잘 못 느끼실 수 있지만 민감한 분일수록 상처받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다니면서 훈련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다녀오면 머리를 뜯고 싶은 적이 있지 않으세요? ‘왜 그 사람은 나에게 그 말을 했을까? 정말 싫다.’한 적이 참 많습니다. 못 느끼시는 분이면 다행인데 여러분이 생각이 많은 사람이면 인간관계에 있는 한 그런 상처들을 받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게 되면, 한 번 찔리는 것도 아픈데 계속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성격 나쁜 사람으로 찍히고 싶지도 않고 여러분 모두 사랑 받고 싶지요? 모든 인간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삶이 풍성해지고 인간관계 안에서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용서의 원칙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것은 꼭 성경의 말씀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용서의 개념이 기독교의 개념이지만 대기업에서도 기업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은  그것의 실효성이 있기에 맞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합니다. 세상 학문도 용서가 얼마나 인간관계와 건강에 영향을 주는 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의 암발병률이 정말 높습니다. 암환자들이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서,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참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코스타에 오시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오시는 것 일텐데, 여러분이 용서를 하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서 힘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따르지 못한 우리들의 말을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능력있는 일 중 하나가 용서입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데 용서를 하면 내가 큰 일을 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용서가 정말 힘들 때 용서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정말 힘든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일을 하셨을 때 스스로 칭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상처 한 번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용서 받아서 행복하다면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아파하면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서하는 것이 나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며, 세상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사명감을 가질만한  일인데 왜 용서하기가 어려울까요? 

그 이유는 참  많이 있습니다. 용서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받은 만큼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후에는, 용서라는 것이 내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갚아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용서가 자연스럽다는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진짜 상처 받은 사람들 중에서 용서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죄된 성품과  우리가 받은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원하지 않습니다. 받은만큼 갚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포도원지기’ 예화에서,  한 시에 간 사람, 두 시에 간 사람, 세 시에 간 사람, 여섯 시에 간 사람이 똑같이 일당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여섯 시에 간 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돈을 받고, 또 일찍 온 사람은 더위에 오랜 시간 일했기에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화를 보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스스로를 아침부터 일하러 온 사람과 동일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여섯 시에 온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 오셨지 의인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말이 싫었는데, 죄인을 위해서 오신 건 좋은데 “나 같은 의인은 어떡하라고?”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요지는 너희에게 조건없이 선물을 주려는 것인데 우리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면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원지기가 여섯 시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당을 준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인데, 우리는 아침 7시부터 온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잘못된 개념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에 용서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무마시켜주고, 무조건 변명해주고 나쁜 사람이 아니야 하고 넘어가고 당한 사람만 불쌍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편이 때리면 맞아주고, 맨 마지막으로는 모든 것을 참고 절대 화내지 않기도 합니다. 용서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이런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 여러분과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용서에 대한 잘못된 개념 중 하나가 우리 가슴이 터지고 속이 뒤집히는데도 용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위장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좋아하신 사람은 ‘good person’이 아니라 ‘real person’입니다. 속은 그런 게 아닌데 기뻐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정말, 용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아프게 보시는데 공평함이나 정의가 없는 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못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아닌 척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가 싫다고 합니다. 분명히 잘못 됐는데 자기가 잘못하면 대충 넘어가고 남이 잘못하면 그렇지 않은 모습도 싫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우리 아빤 술을 조금 하셔” 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하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을 원하시지 죄를 죄라고 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이 혼동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과 죄를 죄라고 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가 아닌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것은 공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악을 선하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악을 선하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죄는 그 사람의 성품에 관해 뭐라고하는 것이지 죄를 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용서는 상대편을  위해 변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데도 불구하고 용서해주는 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화가 났을 때 솔직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다루겠지만 여러분의 감정을 마구 표현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진실한 감정에 대해서 창피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 악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가 알콜 중독자인데 “아빠 기분이  조금 안 좋으신가봐”,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여자친구가 성격이 좋아서 그런 거야”라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잘못된 일이 일어나서 그런 일을 지적하면 정죄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거짓 평화를 참 좋아합니다.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숨기는 것은 언젠가 다 터지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싸움을 일으키면 안 되지만, 감정에 솔직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문제가 있는데 없다고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침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회사업에서도 그렇지만 문제를 모르면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인식하면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문제를 인식하지 않으면 정말 고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흡연이나 마약 중 어느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보통은 마약이라고 합니다. 마약이 미디어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통계를 보면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흡연 문제를 더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약 문제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으면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절대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상처를 받고 부정한 일을 당해도 절대 화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이면 항상 순한 양 같아야 한다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엡 4:26-27 말씀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목하실 것은 하나님께서 분을 내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어원을 보면 “화내라, 하지만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말은 permissive imperative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분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 선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정당한 분노를 허락하셨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노하심과 우리의 노함과 차이가 있을 때가 많지만, 우리가 노할 상황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악한 상황을 봤을 때 노하셨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진노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진노는 분노보다 훨씬 더 intensive한 감정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일을 당할 때 분노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여러분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된 일을 당하고 화를 낼 때 ’나는 크리스천이 아닌가봐”하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정당한 분노는 잘못된 일에 대해서 한계를 정하는 것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노예를 만드는 것에 분노해서 평화적이지만 싸움을 해야 되는데, 정당한 분노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당한 분노는 다른 사람이 더 이상 죄를 짓게 않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의 문제 중 하나가 가해자도 문제가 있지만 맞아주는 부인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분노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계속 때리면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시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봐가면서 괴롭히거든요. 그게 여러분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 있을 때 stand up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노라는 감정을 주셨지만 우리가 죄된 인간이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낼 때 성경적인 화냄인지 아닐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 안에서 해야 됩니다.  상황에 따라 화냄의 정도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화를 적게 내야 할 때도 있고 화를 크게 내야 할 때도 있는 것이지 무제한 화를 내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뜻 안에서 분노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정당한 분노는 죄가 아닌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냥 “쟤 생긴 게 맘에 안 들어 뭐.”와 같은 식의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분노가 아닙니다. 그래서 화가 날 때 한 번 기도해 보세요. 이런 감정 느끼실 때 이 감정이 과연 하나님께 받은 감정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용서를 힘들게 하는 잘못된 개념 중에 하나가 ’그 일만 아니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내 성격을 망가트리지 않았다면 인생이 괜찮을텐데’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내 삶의 행복을 빼앗은 사람 때문에, 억울함 때문에, 상실감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심장을 주시고 사신 분들이기에 여러분의 고통을 절대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그것을 체험하실텐데 제가 성경의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분도 있겠지만, 요셉도 만만치 않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형제들이 그를 팔았고, 종으로 열심히 살고 있을 때 보디발이 강간범으로 감옥에 보냈고,  감옥에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무시당하고. 억울한 것, 속상한 걸로 따지면 요셉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행해진 일은 악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좋게 바꿔주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힘을 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의 고통을 통해서 그것을 선하게 바꾸시지 절대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용서를 안 할 때 ‘내가 싸움에서 이겼다’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 안하고 너를 꽉 쥐면서 너를 나쁜 놈으로 보고 있을거야’ 라는, 약간은 masochistic한 즐거움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 안 한 것이 웬지 싸움에서 이긴 것이라는 생각에서 용서를 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를 안 하면 ‘내가 희생자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즐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상처 받았기 때문에 나는 불쌍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용서를 안 하는 경우도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안 하게 되는데 문제는 용서를 안 할 때 오는 불이익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에 들어갈 수 없기에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 못하고 미워해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기뻐하기가 힘듭니다. 교회 안에서 그 사람 얼굴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어떻게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상처를 받은 것도 힘든데 하나님이 주신 기쁨까지 놓치는 것은 두 번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 위해서 용서를 생활화하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용서하지 않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않습니다. 

네 번째로, 다시 상처 받지 않으려고 용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사람의 관계 안에 들어가지 않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용서를 안 하는 것인데,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예전에 받은 상처와 같은 상처를  연속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예전의 기억이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게 내버려 두는 것과 같습니다. 지속적인 갈등과 괴로움에 힘들고 고민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를 감정적으로 지치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실제적인 이유 때문만이라도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quote중에 하나인데 ‘사람이 주는 고통에서부터 완벽하게 보호 받을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사랑하게 되고 관계 속에 있으면 상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면 사랑 밖에 있어야 합니다. 지옥에 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옥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라 무섭습니다. 여러분 싫어하는 사람과 있어본 적 있으십니까? 거기가 지옥이지 않습니까? 지옥은 하나님이 인간을 정말 존중하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니까 보내 주는 곳. 하지만 정말 무서운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완벽한 선인데, 하나님이 빠지시니까 모든 선이 빠지고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아픔이 따르지만 그것을 안 할 때 더 큰 문제가 오기에 우리가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시 상처 받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많은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정리를 하겠습니다. 용서에 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는 괜찮은  척 하는 것 아니고, 무조건 자제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쳤다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안 한 것이 이긴 것이 아니고,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신 말의 의미를 같이 찾아보면  좋겠어요.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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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왜 용서가 힘든지,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내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과연 용서하기는  쉬운가?
1. 매우 쉽다
2. 쉽다
3. 어렵다
4. 매우 어렵다
5. 하기 싫다
6. 요나처럼 Just kill me.

답은 6번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면  여러분 상처의 정도에 따라 다를 수가 있습니다. 친구가 펜을 하나 훔쳤다고 하면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줬다면 요나가 힘들었던 것처럼 굉장히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많이 안 받아보신 분은 1, 2, 3 중 하나라고 답하실 수 있지만, 여러분이 상처를 많이 받으셨다면 4, 5, 6중 하나라고 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상처를 안 받으셨다면 굉장한 축복인데, 제가 예언을 할 텐데 여러분은 앞으로 살면서 반드시 상처를 받으실 겁니다. 이것은 저주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연약한 인간이고 나도 실수를 하고 남들도 실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고난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보면 기정 사실입니다. 상처를 안 받아보신 분은 내가 왜 이 세미나를 듣나 생각하실 수 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시던지 남을 돕기 위해서 이것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C.S. Lewis가 말하기를 용서하기가 쉽고 아름답다고 하는 분들, 본인이 용서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정말 용서할 상황이 될 때까지는 참 아름다운데 내가 직접 하게 되면 정말 죽기까지 싫다는 말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을지 모르겠지만 ‘복수 가이드’라는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들어있는 시디를  팝니다. 이런데 은혜 받고 찾으시면 안 됩니다. 가짜 티켓을 판다든가, 차 옆에 생선을 넣어 놓는다든가, 칫솔을 변기에 담갔다가 다시 놓는다든가 하는 방법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마음이 아프게 되면 그것을 갚아주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복수 대행 웹사이트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용서가 힘들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용서를 하기 힘든 이유 중에 복수를 하면 속이 시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수는 참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달콤해서 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용서가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부모님, 친구, 애인을 통해서 상처받은 부분을 해결하지 못해서 여기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크리스천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는데 왜 용서하지 못할까 자문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안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해 본 사람은 알지만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죽기보다 힘든 일입니다. 압사당한 개미 보이죠? 아픈 사람들은 어둠에 눌리듯이, 압사당한 사람처럼 아주 힘듭니다. 용서는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고 아주 정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기억하실  것은 제가 상담을 하면 “어쩌면 제 친구가 이럴 수 있어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용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괴롭히는 것은 금방 잊혀집니다. 그런데 용서가 필요한 사람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상처를 주지 못합니다.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은 교회 안이나 가족 안이나 나를 사랑해줘야 하는 사람들, 나와 친한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나를 사랑해 줘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이야기 한 것처럼 적보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 훨씬 힘듭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든 것 같습니다. 용서가 필요한 사람은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의 교회 안에 있거나 가정 안에서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친한 사람만이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힘든데 여러분이 용서를 진짜 실천하려고 하실 때 큰 돌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프고 당한 것도 어려운데 왜 하나님이 용서하기를  원하시는지 굉장히 의문이 생길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기억하셔야  할 것은 용서는 보통 우리가 남을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을 많이  하는데 앞으로 한 시간 반 동안  설명을 드릴텐데 용서는 정말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걸 기억하시면서 이 세미나를 듣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결국에는 여러분을 돕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원하실 때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가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용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용서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고 아파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정상적으로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참 힘든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닮기 원합니다”라는 내용의 찬양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찬양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쁜 찬양이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인데 기억하셔야 할 것은 예수님의 성품 자체가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다른 도덕성이 아니라 내 자녀가 나를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힘들어도 용서를 실행하셔야 합니다. 근데 제가 느끼는 것은 용서가 진리라는 것을 알고 나니 죽기만큼 싫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제가 상처를 받으면서 배운 것들이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기억할 실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라고 하면 친절하게 웃어주는  것 정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랑은 희생입니다. 내가 편하고 싶고 더워서 에어컨 앞에 앉고 싶은데 친절하기 때문에 더운 곳에 앉는 마음과 내가 용서하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 모인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닮기도 해야 하겠지만 또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겠다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결국 죄이거든요. 크리스천이라면 죄짓고 싶지 않잖아요. 성경에서는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마음에 당한 것도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여러분 조금 더 생각을 잡아 두시고 저와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죄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야한 생각을 하는 것과 같이 뭔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픈데 내 일 아니라고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제일 어려운 게 이 말씀일 것 같은데요. 하나님이 조건을 다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거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의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에서도 반복하셨습니다. 반복하실 때에는 중요하다는 말씀인데, 내가 안하는 것은 괜찮은데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보니 그림이 확 달라보이죠. 함정에 빠졌다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이 다음 생각과 갈등이 됩니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았는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지 헷갈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죄인되었을 때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럼 이 두 말씀이 갈등관계가 되는데 잘 생각을 해보면 이게 그 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남이 싫은 마음을 꽉 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선물을 드리려고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여러분이 상처와 아픔을 잔뜩 들고 있으면 아무리 드리려고 해도 받을 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도 용서 받을 수 없겠다”는 말씀은 너희가 받을 손이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조건으로 두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손이 없어지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날 위한 것이고, 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도 해야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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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2) - 김현회


[2] 성령 세례
중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점은 무엇이냐면 그 결과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점을 강조하냐면, 다음 주제가 성령 세례인데, 성령 세례와 중생을 다르게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믿고 중생했지만 아직 성령을 못 받을 수 있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오류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모두 성령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하고 예수님의 영이시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는 것은, 즉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로 믿고 주로 시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가능한 것이고, 내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내 안에 성령님을 모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 ‘다’, ‘우리가’가 반복되는데 이 말은 성령 세례를 말하는데, 바울이 이 성령 세례를 말할 때 바울의 의도, 요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일이 오히려 교회를 둘로 나누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고,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뉩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을 하였어도,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중생과 또 다른 사건으로 보는데, 어떤 신비적인 체험, 대표적으로 방언을 염두에 둡니다. 성령의 뜨거운 진동이 왔고 방언을 받았고 이런 체험을 받으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이렇게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중생을 했지만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 거듭났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지체가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마셨다는 말은 내가 성령을 소유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이지, 일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접근할 수 있겠습니다. 신약에 세례에 대한 본문이 7군데 있습니다.  모두 종합해 보면 세례에는 4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주는 자, 세례받는 자,  세례의 매개체, 그리고 세례의 목적. 이것을 요한의 물 세례에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의 물 세례에 있어서 주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받는 자는 요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 세례의 매개체는 물, 세례의 목적은 죄사함.  그래서 죄사함을 받기위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 세례입니다. 종종 우리는 성령 세례를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배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에서 주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받는 이는 믿는 우리 모두이며, 세례의 매개체는 성령, 그리고 세례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며 성령 세례와 중생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적어도 동시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은 성삼위 하나님이 다 함께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어떤 측면에선 예수님이, 어떤 측면에서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부르심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함께하시는 일인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일하거나 동시적 사건이고  같은 사건을 다르게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마치 성령세례가 중생과 별개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로 오순절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제자들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제자이기에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오순절까지는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중생과 성령 세계가 두 단계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후에 성령을 받았다는 오순절 성령사건은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한 번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성령이 아직까지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강림이 있자 술취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합니다. ‘때가 제 삼 시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선지자 요엘로 약속한 것을 성취한 것이다 - 말일에 내가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다.’  남종과 여종이란 말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란 뜻입니다. 남녀 차별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그 예언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앉으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너희가 보는대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이것이 너희가 보는 현상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성령을 보내주신 사건입니다. 그전에는 성령이 임재하셔서 사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는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는 어찌할꼬’하며 마음에 찔림을 느낍니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에 대한 찔림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날 오순절날 3000명이 예수를 믿고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인 것을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즉 예수를 영접하면 성령을 받으리라"고 선포합니다.  그 중간에 어떤 다른 것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날 3000명이 세례를 받고 나서 오전에 있었던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을 받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성경엔 그 기록이 없습니다. 그 3000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join을 합니다 - 오순절이 교회의 출발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증거는 무엇이냐면 기쁨의 충만이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다 함께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떡을 떼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 받은 그룹은 2그룹입니다. 첫째로 사도들, 그리고 3000명. 그런데 두 그룹의 모습은 다릅니다. 하지만 똑같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님이 오셨으니깐 우리는 3000명에 해당되면 생각하면 됩니다.

성령강림과 중생이 다르게 보이는 듯한 다른 본문은 사도행전 8장, 10장, 그리고 19장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고 많은 사람이 믿자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거기에 세례를 받았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그들이 정말 예수 믿은 것을 확인 하고 나서 사도들이 안수하매 성령이 저들에게 임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도 분명히 오순절과 비슷하게 두 단계죠.  빌립이 전하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사도들이 안수했을때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그런 여러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보는것이 옳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는 같습니다, 다 유대인들이기에. 이 유대를 넘어서 제일 먼저 복음이 전파된 곳이 사마리아입니다. 먼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다는 원수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사마리아까지 전파되면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받아드려야 하는데, 그러면 어떤 현상이 있어야 하면, 오순절이 한번 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행 8장에서 나오는 사마리아판 오순절입니다. 그런 현상이 똑같이 일어나야만 ‘이들도 똑같이 성령을 받았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비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경건한 자’라고 했습니다.특별한 용어로써 Godly man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기도하는 가운데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불러 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어 그곳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가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엔 부정한 짐승이 잔뜩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그럴수 없다고 대답하였고, 하나님께서 ‘내가 정케한 짐승을 네가 부정타 하지 말라’ 라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을 하여, 그들을 따라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듣는 중에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임하는데 오순절 사건과 같은 형태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과 이들도 똑같이 받았으니 누가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도 오순절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유대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사마리아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이방인에게 넘어갈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유대인들이 너무나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민족적인 장벽, 유대인과 사마리아 관계에 장벽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때 거기 몇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에 제자들의 반응이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몰랐다’였습니다. 바울이 조금 의아해하여 ‘그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물세례만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 합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인데 아직 성령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잘 보면 2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1. 믿을 때 성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2.믿을 때 당연히 성령을 받는다.  저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상했던 건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않았던 제자들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이전 18장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 있는 아볼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볼로는 열심히 말씀을 전했지만 요한의 물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 하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 주의 도를 자세히 일러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냐면, 오실 메시아를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요한이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그가 메시아며 구세주라고 해던 것까지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셨던 것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이 문제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성령의 인치심.

(엡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주시는데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실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의 소유라고 도장을 찍으신 것이며,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앞으로 우리가 장차 얻을 기업 – 상속 –하나님의 상속자, 얻을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라는 뜻입니다. Deposit/보증금으로 성령님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인치심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예수 믿는 자 안에 불꽃이 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자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거듭난 사람, 성령 세례를 받은사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령님이 무슨 의미냐면, 마치 자동차를 살때 downpay를 하고 사는 것처럼 앞으로 나머지 것을 주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그 새로운 세상을 상속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속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증하기 위해 우리안에 세로운 세대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3가지 - 중생, 성령 세례, 인치심- 모두는 예수를 믿는 출발점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출발점 사건의 공통점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사신다, 곧 내주하신다고 말, 즉 In dwelling Holy Spirit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요즘 성령세례에 관하여 그릇됨들이 있어서 자꾸 예수를 믿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고 second class Christian인것처럼 그렇게 구분하는 건강하지 못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때 체험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모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것입니다. (계속)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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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 김현회


서론 :
‘그리스도인’의 삶은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삶을 계속 사실 때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일은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 진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성령님의 바른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다락방 설교’ 혹은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가지신 장소가 다락방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요14:16).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인데, ‘우리 옆에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comforter(위로자)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original 보혜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original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상에 오셨을 때 육체를 입고 오셨기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으셨고, 그 때문에 오직 제자들과만 함께 있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영’이시기 언제, 어디서나 계실 수 있고 모든 믿는 자 옆에 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을 생각할 때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는, 우리가 성령님이 없이는 살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1)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며, (2)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알고, (3)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체험입니다. 성경과 체험은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를 보면, ‘오직 성경’을 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령파’ 교회는 체험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과 체험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그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성경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관해 배울 때 일단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체험 속에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체험은 매우 다양하며,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방언, 입신, 신유 등의 체험이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체험을 보고 “이것이 진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읽은 힌두교 신자의 글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명상’, ‘참선’의 기쁨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명상을 깊이 하다보면 내면 깊이 샘 솟듯이 기쁨이 끊임없이 솟아 오른다.’ 제가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은혜 받을 때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가 힌두교 신자라는 이유로, 우리가 ‘당신의 체험은 가짜야’라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체험은 진짜일 것입니다. 그 사람도 기쁨이나, 내적인 평화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은 성령님으로부터 온 체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준이고, 체험은 기준이 아닙니다. 체험은 성경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고, 분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그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성경이 어떤 체험이 있다고 가르치면 우리는 그 체험을 우리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체험에 관계를 여러분이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오늘 강의를 진행해보겠습니다. 체험으로 인해서 가지고 있는 질문이 있다면 성경에 비추어서 그 체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 중생, 성령세례, 인치심

[1] 첫째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사역은 중생입니다.

중생, 거듭남, 영어로는 re-generation인데 무슨 의미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요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대화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선생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모습을 유심히 보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니고데모가 만일 오늘날 교회에 찾아온다면 교회에서 굉장히 환영할 것 같습니다. 당신같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니고데모 정도의 background를 가졌다면 교회에서 금방 장로도 되고 높은 직책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네가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있구나’.  또는 ‘네가 나를 알아보는 눈이 있구나’. 이렇게 칭찬하시는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볼 수 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하고 율법에 통달했다. 하지만 너는 영적인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너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도, 예수님의 평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질문을 합니다: “나처럼 늙은 사람이 어찌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  니고데모의 말 자체가 영적인 것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거듭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과거에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하여 물은 물 세례, 성령은 성령 세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물 즉 성령’ 물과 성령은 같은 것으로 혹은 물은 말씀, 성령은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에스겔서 36:25-27에 있습니다.

(겔 36:25-27)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상태에 있는데, 이들을 본토로 돌려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주신 약속입니다.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본토로 돌아와도 포로가 되기 전의 영적 상태,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우상 숭배하고 타락한 그대로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본토로 돌아가는 외적인 회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물이 나옵니다. “내가 물로 모든 더러운 것을 씻겠다. 그리고 새 영을 주고, 나의 신을 –성령님을-주겠다.”  다시 말하면 속에서부터 새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 너희가 성령님에 의하여 내면으로 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변화되어야 한다,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기 전 영으로 죽었었기에, 죽은 영을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인해서 하나님과 영으로 분리되어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말씀이며,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맞지 않습니까? 이제 니고데모의 현대판 인물을 생각해봅시다.  Richard Dawkins을 아십니까?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진화론자입니다.  ‘God Delusion’이란 책에서 얼마나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책이  best seller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 책을 부분적으로 읽어봤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도덕이 어디서 오는지, 인간에게 있는 옳고 그름의 의식이 어디서 오는지 그런 부분을 관심있게 봤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 논리적으로 헛점이 많고, first class 책이 아니라 삼류 책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학자, 지식인들은 그 책이 무신론에 복음이나 되는 것처럼 환영합니다. 그것을 보고 깨달은 점은 역시 영적인 것은 육신의 눈으로 분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적이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며,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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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6 17:10 코스타 사역/tmKOSTA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지구/환경/해양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KOSTA 2009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Task-Major KOSTA

GTM1300: 지구/환경/해양 분야

 

유상준

 

개요

 

새천년의 막이 오른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인류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등의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환경오염문제는 국지적인 영향을 지나서 지구 전체 생태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가 되었다. 특히 대기오염의 경우를 보면, 1950년대에는 핵전쟁으로 인한 방사능 피해 정도만 전체 지구를 오염시킬 수 있는 물질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성층권 오존, POPs (Persistent Organic Pollutants), 수은등을 비롯한 많은 오염물질들이 지구지역으로 골고루 이동되어 영향을 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1).

 

 


Figure 1. Evolution of the perceived spatial scale of air pollution problems in the United States. (Keating et al, 2004)

 

 

해양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육지에서 유입된 폐기물이 바다의 곳곳을 오염시키고 있다 (Figure 2). 특히 태평양에 떠있는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Great Pacific Garbage Patch)의 경우 그 규모가 텍사스주의 넓이보다도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 이 물질이 분해되어 정화되기까지는 수백년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계산된.

 

이렇 인간활동에 의해 지구환경으로 배출된 오염물질은 Environmental Fluids인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고, 이들은 다시 기권 (Atmosphere), 수권 (Hydrosphere), 암권 (Lithosphere), 그리고 생물권 (Biosphere)까지 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환경오염문제는 지구의 전체 시스템 오염시키는 Global Problem이 되었다.

 

 

Figure 2. Great Pacific Garbage Patch. (oceans.greenpeace.org/en/ the-expedition/news/trashing-our-oceans/ocean_pollution_animation)

 

 

인류의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은 기후변화와 자원고갈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종이 인류보다 앞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이를 정지시키지 못한다면 인류 전체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해마다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북극권에 사는 북극곰은 먹이사냥을 위해 조오련이 횡단했던 대한해협보다도 먼거리를 매일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산화탄소등 온실가스의 배출량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며 (Figure 3),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장서야 할 선진국과 강대국들은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4). 이처럼 기후변화문제 역시 환경오염과 더불어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고 말할 수 있다.

 

 


Figure 3. Recent Global Monthly Mean CO2. The dashed red line with diamond symbols represents the monthly mean values, centered on the middle of each month. The black line with the square symbols represents the same, after correction for the average seasonal cycle. (www.esrl.noaa.gov/gmd/ccgg/trends/)

 

Figure 4. Carbon Tracker shows Atmospheric Concentrations of CO2. (www.esrl.noaa.gov/gmd/ccgg/carbontracker/)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에너지 사용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Figure 5). 전세계 인구수 또한 증가하는 추세여서 에너지 사용량의 증가 추세는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의 기술로 미루어 볼 때 석유는 앞으로 30, 석탄은 120여년의 여유분이 남아 있는 상황이고, 각국이 앞다투어 청정 및 재생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에너지를 포함한 자원고갈문제 역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 할 수 있겠다.

 

 


Figure 5. World Marketed Energy Consumption, 1980-2030.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이렇듯 지구는 인간의 무절제와 탐욕에 의한 자원남용으로 인해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태계가 생존의 위협에 쳐하게 되었다. 결국 지구환경문제가 가장 먼저 세계화를 달성한 분야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문제해결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토의주제를 다룰 것이다.

 

(1) 지구환경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 지구환경문제에 세상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3) 지구환경문제해결을 위한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근본원인

 

그렇다면 이런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환경오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 모두 인류의 탐욕과 무절제함이 초래한 결과이고 국제사회를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팽배한 무한경쟁에 따른 비협조적 태도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 (Figure 6). 자원을 무분별하고 경쟁적으로 발굴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생태계를 위협하는 오염물질이 자연정화능력을 초과하여 배출되었, 오염물질은 아니지만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조절하는 온실가스대기중 농도가 한계농도를 초과함으로 극심한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18~19세기의 철학 및 사상조류를 주도한 모더니즘적 세계관에서 발로되었다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유토피아의 달성이 가능하다는 논리로서, 진화론과 같은 논리로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인간의 능력만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사상결국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와 같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등이 팽배해진 가운데 인류는 지구환경 전체에 걸친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다.

 

 


Figure 6. 지구환경문제의 근본원인

 

 

 

해결방안

 

그렇다면 위기의 지구환경에 대하여 세상이 제시하는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절제와 협력 통해 문제의 근본원인인 무절제와 비타협의 문제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Figure 7). 실제로 세상 리더쉽은 소비와 생산의 구조적 변화와 기술개발등을 통한 자원남용 절제, 그리고 그로 인한 환경오염물질과 온실가스의 배출 저감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 글로벌 협력 필수요소로 제시고 있다. 이미 국경을 넘은 지구환경문제는 Global Agenda가 되었고, 이는 Global Collaboration을 통한 Global Solution에 의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논리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만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모더니즘 시대의 결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와 같은 위기가 초래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국가와 같은 기존의 질서와 지성 혹은 윤리와 같 절대적 사회기준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되었. 이는 모든 기존의 질서와 기준 부정하고 해체하 그로 인해 다양화 된 것들을 새롭게 혼합하여 새로운 글로벌 질서를 세우려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현재 정치, 경제, 문화등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구환경문제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새로운 글로벌 리더쉽에 의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리더쉽은 지식/정보화 사회에 걸맞는 과학기술을 보유한 형태가 될 것으로 예된다. 결국, 남보다 앞선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개인 또는 집단이 글로벌 리더쉽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이 리더쉽은 모더니즘의 시대보다 좀더 글로벌화되고 강화된 권력인 동시에 지성과 윤리보다는 감성적이고 쾌락적인 면을 띄게 될 가능성이 높다.

 

 


Figure 7. 지구환경문제에 세상이 제시하는 해결방안

 

 

그렇다면 이들이 세상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지구환경문제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모든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건져내기 보다는 글로벌 리더쉽을 중심으로 협력 세력들만이 혜택을 누리게 되나머지는 소외되며 오히려 핍박받는 구조 재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글로벌 리더쉽은 감성적으로 친화력은 높이겠지만, 비윤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리더쉽이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Figure 8과 같이 이런 리더쉽의 형태와 시대의 조류를 성경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우선 창세기의 바벨탑 시대를 살펴보자. 하나의 언어를 가진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 건설이라는 구심점 아래에 모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열방으로 흩으셨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침묵의 시대를 보면, 모든 길을 연결한 로마의 토대위에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려는 그리스 철학을 중심으로 세계가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로마가 닦고 연결한 이 길을 따라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날, 인류는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터넷, 휴대폰등의 네트웤을 통해 연결되고 있다. 여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가 세상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고 있다. 결국 시대에 따라 얼굴을 바꾸어 세상을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이끄는 글로벌 리더는 사탄인 것이다. 어떤 개인, 집단, 혹은 국가가 글로벌 리더쉽으로 나서더라도 결국 그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사탄이다. 이런 사회에서 절제와 협력을 통한 인류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제와 협력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바벨탑모델로는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구할 길이 없다.

 

 


Figure 8. 지구환경문제 해결의 세상적 모델: 바벨탑 모델

 

 

 

성경적 대안

 

그렇다면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여기에서는 노아의 모델을 통해 살펴보았다. 노아의 시대는 대홍수라는 지구환경의 격변으로 인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놓이게 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류와 생태계는 이미 멸망하여 없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인류와 생태계 또한 멸망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노아의 방주와 같은 대안을 제시하여 인류를 멸망에서 건질 노아와 같은 글로벌 리더만 있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노아의 리더쉽 모델을 잠시 살펴보자. 노아의 모델을 전문성 (Specialty), 영성 (Spirituality), 그리고 글로벌 리더쉽의 세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다. 첫째, 노아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Figure 9).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 수 있었고, 방수재로 역청을 사용하였으며, 생물종의 (Seed) 역할을 할 수 있는 짐승을 분류할 수 있는 생물학적 전문성이 있었다. 성경적 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각 육식과 채식을 하는 새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지표면의 상황을 모니터링하였다.

 

 


Figure 9. 성경적 대안: Specialty

 

 

둘째, 그에게는 영성 (Spirituality)이 있었다. 그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 (6:8) 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미리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에 대해 알려주셨다. 그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홍수는 시작되었으며 (7:1), 그가 제사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8:20-22). 영성이 있는 사람은 문제의 본질 혹은 핵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있. 그리고 영성이 있는 사람만이 자신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셋째,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었다. 비록 여덟명이었지만 모든 인류모든 생태계를 하였던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방주를 예비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11:7). Global Leader라는 단어는Global + Lead + er로 분해할 수 있으며, 이는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즉 글로벌 리더는 전체 (Big Picture)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올바른 방향 (Vision)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영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리더쉽이다. 코스타 강사이신 앤아버대학촌교회의 박상춘 목사님께서 리더쉽 훈련셨던 말씀을 잠시 인용해 보면,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여 눈이 밝아지게 했다. 바로 세상을 보는 눈, 세계관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 눈을 다시 타락 이전의 눈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가치관과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전체를 보고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이 없는 사람 영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글로벌 리더쉽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리더쉽을 생각할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명성 또는 직위에 의한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작은 요소라는 것이다. 노아는 홍수가 시작될 때까지 최소한 무시당하는 존재였다는 사실 (24:38-39)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글로벌 리더쉽은 세상적인 명성 또는 신분을 통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는 Global Heart, 즉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 자를 의미한다. 진정한 글로벌 리더쉽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성과 세상을 구하려는 열정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머리 (Specialty), 주님의 눈 (Spirituality), 그리고 주님의 심장 (Global Leadership) 시고 노아처럼 사용하신다고 확신한다.

 

 


Figure 10. 세상모델과 성경모델의 비교

 

 

 

도전

 

지구환경문제에 직면한 위기의 인류에게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새로운 비용편익분석 (Cost-Benefit Analysis)을 해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비용편익은 “Cost from Me, Benefit to Me”이다. 하지만 세상을 품는 글로벌 리더쉽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Follower of Christ)가 가져야 할 비용편익의 새로운 개념“Cost from Me, Benefit to the World”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세상을 따라 결국은 침몰할 타이타닉호 건조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감당못하는 믿음의 용사로 서서 또 한번의 노아의 방주를 만들것인지 말이다.

 

 

 

참고문헌

 

Bible

Keating, West, and Farrell (2004), Prospects for International Management of Intercontinental Air Pollution Transport, The Handbook of Environmental Chemistry, Vol 4 Part G, Springer-Verlag, Berlin p 295-320.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International Energy Outlook 2009, U.S. Department of Energy, Washington, DC.

International Energy Agency (2007), Renewables in Global Energy Supply: An IEA Fact Sheet, OECD.

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me (2009), UNEP 2008 Annual Report, 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me (2009), UNEP Year Book 2009, New Science and Developments in Our Changing Environment, UNEP.

Day, Shaw, Ignell, and Steven (1988), Quantitative distribution and characteristics of neustonic plastic in the North Pacific Ocean. Final Report to US Department of Commerce, National Marine Fisheries Service, Auke Bay Laboratory. Auke Bay, AK, pp. 247–266.

 

 

Sang-Joon 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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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eKOSTA 2010/04/14 14:50  Addr Edit/Del Reply

    관리자가 욕설, 비방의 이유로 댓글을 삭제하였습니다.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ekosta@kostausa.org 로 문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2009/08/06 12:17 코스타 사역/tmKOSTA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경제학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Capitalism in Christian Perspective (2): Practice

현대의 경제학과 자본주의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창조된 인간의 capability 함께unlimited resources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일그러진 인간의 실존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경제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가능성을 타진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역사적으로 인정된다는 점이, 오늘의 가운데서 이러한 가능성을 사실로 구현해내는 것의 용이성을 조금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짊어진 신앙과 학문/직장의 통합과제는 그만큼 힘겹고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체계로 변화될 있다면 혹은 되어야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것인지 성경에서 guideline 찾아보기로 하였다. 또한, 기업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책임 사례로써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한 시대의 practice 간략하게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체계혹은 구조 논하고, 객관적인 비평가로써 거시적으로 경제문제를 고찰하던 관점을 바로잡아, 모든 논의를 1인칭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A. Tower 말한대로 엄밀히 말해서 사회라는 것은 없다. 내가 사회이고 당신이 사회이고 이웃사람이 사회이다. 사실, 사회는 개인이다.”([ 자아를 버려라], p.260) 만약, 사회구조가 변해야 한다면, 그것은 변해야 함을 의미한다. ‘로부터 이루어지는 샬롬의 경제원칙과 기독교적 경제구조를 도전하고자 한다.

기독교적 경제구조

성경,특히 구약은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다양한 경제원칙을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이것을 현대의 경제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본래의 복음적 의미를 21세기 version으로 살려낼 있다면 기독교적 가치를 담아낸 경제구조는 어떤 모습이어야 것인가에 대한 구상에 기초를 마련할 있을 것이다.  

      성경적 토지론

레위기 25 10절에서 28절까지의 내용은 땅의 희년제도 대한 규정이다. 내용을 현대어로 요약하자면, 모든 땅은 50(=’희년’)마다 자기 본래 소유자에게 돌아가는데, 거래가격은 땅에서 나는 소출의 양과 소출을 얻을 연수의 길이에 준한다. 토지는 영구히 팔지 말게 되어있는데 토지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토지를 나누어주신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또한 가난하여 어쩔 수없이 토지를 팔았던 경우라도, 형제의 도움이든지 자력이든지, 혹은 다시 되살 부가 없는 경우라도 희년에는 소유자에게 토지가 돌아오도록 하였다. 

땅이 생산의 유일한 input이었던 시절에 토지공개념 성립되어 있어서, 비록 필요에 따라 일정 기간 토지가 거래되고 특정인에게 토지가 집중되었더라도, 50년마다 토지의 distribution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다시 돌아가도록 하여, 토지로 인한 빈부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방지했던  것인데, 이를 사유재산에 대한 신성불가침한 권리가 철저하게 보장되는 오늘날의 경제구조가운데 도입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radical change 아닐 없다.

공시적 통시적 특수성을 감안하여 땅의 희년제도를 제도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하더라도, ‘희년제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경제구조에 심어두신 가치들은 반드시 짚어보아야 것이다.

첫째, 모든 사유재산(토지뿐만 아니라 모든 )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땅의 어느 것에 대하여도 영구히 나의 이라고 주장하거나, 어느 누구도 나의 침해할 없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내가 벌어 내가 모으고 쓰는데 누가 뭐라고 하랴라는 태도야 말로 자본주의를 왜곡시킨 숨겨진 원동력이 아닐까. 벌고 모으고 쓰는 모든 경제적 활동에 대하여, 모든 재물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에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가난에 처하게 하고 더욱 깊은 가난에 머물도록 하면서 특정인의 부유함이 불균형적으로 배분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자본주의가 전혀 구축되지 않았던 레위기 시절에도 부한 자는 땅을 사들여 더욱 부해지고, 가난한 자는 땅을 팔아야 함으로 소출이 줄어들고 더욱 가난에 처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고보면, 빈부격차는 비단 자본주의라는 특정 경제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재산에 대한 보호가 이루어지는 어떤 사회에서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아브라함도 부유한 였던 것을 상기해보면, 사유재산 자체가 성경적으로 부인되어야 하거나, 성경의 핵심가치에 위협을 가하는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땅의 희년제도는 사유재산에 대한 한계선 지정해준다고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한계선은 공동체의 샬롬 지키는 것이다. 50, 세대정도의 토지거래와 그로 인한 부의 unequal distribution 허용하지만, 빈부격차의 영구화, 대물림은 막아야 하는 것이다. 부한 자는 땅을 원주인에게 팔아야 하고 그것도 자기가 정한 가격이 아니라 땅의 사용가치에 따른 가격만 받고 가난한 자는 설령 땅을 사들일 능력이 없어도 땅을 돌려받을 수있다. 모든 사람이 다시 원점에서, 평등한 경제적 기회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A. Carnegie, H. Ford, 그리고 Rockefeller 같이 천문학적인 부를 일구었던 사람들이 부유한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교육, 문화, 복지, 의료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것은 참으로 귀감이 만하다.

세째, 토지의 가격은 사용가치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토지 가격 설정에 대한 레위기의 꼼꼼한 지침은, 부동산 가격이 전국적인 문제로 정권교체의 실마리마저 되는 한국의 경우에나, 금융위기로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대공황이래 최대의 경제위기 가운데는 지나는 미국의 경우에서나 진정 껄끄러운 부분이 아닐 없다.

경제학에서는 사용가치 효용가치 구분된다. ‘사용가치 재화를 사용(소비, 생산)함으로써 사용자에게 가져오는 실질적인 이익을 포괄한다. ‘효용가치 재화를 사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누리게 되는 효용(utility, 혹은 satisfaction) 반영한 가치이다. 유행이 한참 지난, 다소 낡았지만 신고 다니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검정 구두가 있다고 가정하자. 사용가치(발의 보호, 보온, 편안함) 으로만 따지면, 최신 유행의 명품 브랜드 구두 못지 않겠지만, 효용가치로 따지자면 garage sale에서도 찬밥신세일 것이다. 왜냐하면, 소비자는 최신 유행’ ‘명품 브랜드그리고 구두라는 점으로 인해 추가적인 만족감을 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높은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구두를 원하게 된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이러한 지불의사결정의 원리를 감안하여, ‘새롭고 신선하고 좋다 marketing하면서 높은 가격에서 자신의 제품을 판매하게 된다. 이것이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원리이다. 우리는 이제, 재화의 사용가치와 효용가치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며, 시장에서의 가격결정이 효용가치에 의해 주도됨을 쉽게 짐작할 수있다. 

토지의 가격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철저하게 사용가치이다. 토지가 다음 희년에 원주인에게 되돌아갈 때까지 얼마만큼의 소출을 내어줄 것인가가 토지 가격의 산정기준인 것이다. 은행이자가 낮아서, 금융상품이 불안하니까, 혹은 앞으로 인구가 많아질 것이라든가 재개발에 대한 기대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토지를 직간접으로 사용해서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는 목적이나 주거목적외에 토지를 이용해서 많은 부를 누리게 된다는 것은 레위기에 의하면 불가능하다. 희소성에 의하여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경제체계하에서, 주거나 경작에 특별히 선호할 만한 조건을 갖춘 토지가 사용가치보다 조금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을 완전히 금지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운 문제이지만, 적어도 가난한 자의 필요와 어려움을 외면한 , 토지를 이용해서자신의 부유함와 안락함을 도모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히 해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부동한 투기는 물론, 투자까지도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앞에서 행할 바를 다시 점검하여야 한다.

      성경적 금융론

tmKOSTA 참석했던 코스탄은 금융계에서 일하는 증권맨이었다. 돈을 투자하여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은 목적으로 금융상품을 다루는 업종에서 이를 기독교적 가치와 통합하는 문제는 요원하다고 느끼고 있는 했다.  다른 코스탄은 자본이 자본을 낳는 경제활동 과연 성경적으로 용납될 수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예적금은 물론, 주식과 펀드, 보험, 연금등 넘쳐나는 금융상품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번쯤은 주식 대박을 꿈꾸거나 혹은 실제 수혜자가 되어본 적도 있고, 두개의 펀드 계좌를 갖는 것은 그저 평범한 재테크고 받아들여지며, 재테크의 달인이 되는 법에 대한 넘쳐나는 책과 정보에 모두가 함몰되어 있는 때에, 성경은 과연 이러한 금융활동에 대하여 어떤 원칙을 제시해주고 있는가 짚어보는 일은 참으로 흥미로왔다.

이자, 저당, 채무와 같은 금융행위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들은 출애굽기, 신명기, 레위기등 구약의 율법서에서 찾아볼 수있다( 22:25-27; 23:1; 25:35-37). 이러한 말씀들을 요약하자면,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저당잡은 경우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한다. 채권자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빚진 자의 가난을 이용하여 나의 이익을 추구하지 말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울부짖으면 들으시는 자비로운 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 22:27). 만약, 내가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거나, 저당을 잡고서 그에게 채권자노릇을 해서 그가 하나님께 울부짖으면 하나님께서 이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채권자인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실지 생각만해도 가슴이 오싹해온다.

에스겔 선지자는 변리를 위하여 꾸어주지 아니하고 이자를 받지 아니하는것을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 예로 언급하고 있다 ( 18:5-9). 더불어,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 일을 행하는 자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 금융산업은 반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순진한 어리석음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규례를 정하신 깊은 뜻을 살펴보자. 위의 말씀들은 공통적으로 가난한 에게 돈을 빌려줌에 있어서 어떤 형태의 이자도 받지 말고, 나의 이익을 위하여 돈을 꾸어주지 말라고 가르친다. , 가난한 이웃이 가난으로 인해 돈을 필요로 , 하나님의 자비한 마음으로 것을 도우라는 말씀이다. 이웃의 가난이 나의 부를 증대하는 조건으로 이용되어서는 되며, 그러한 동기를 갖지 말라는 뜻인 것이다. 가난에 처하여 다른 사람의 돈을 빌리게 자에게 이자를 요구하여 그를 더욱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다. 우리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는 것과 같이 필요한 자에게 돈을 꾸어줄 뿐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해진 자의 마땅히 행할 바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마음이 좋아 쉽게 가족이나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는 커녕 원금도 갚으라는 마디 못한 , 어렵다고 연락오는 친지에게 돈을 빌려주고 마는 사람을 명은 발견하게 것인데, 그런 행동은 인간적으로는 어리석고 답답해보이지만, 악착같이 이자를 챙기는 행위보다는 성경의 원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돈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 상습적으로 남의 돈을 끌어다  헛되고 쓰고 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에게 내주었을  이야기다. 또한, 돈을 빌린 사람이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수반되는 것이 중요한 요소이다( 25:36).

오늘날처럼 금융산업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돈이 필요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고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꾸어주며, 희년이 되면 원금도 탕감해주는 규례만으로도 금융활동을 적절하게 운영할 수있었겠지만, 저축-예금-대출-투자라는 돈의 흐름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고 시대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느낌은 종교개혁자들도 공유했던 것으로, 특히 중상공업자의 활동이 경제의 주축을 이루었던 지역에서 사역했던 칼빈은, 가난한 자에게 이자창출을 전제로 대출은 금지한 반면, 산업에 대한 대출은 허용함으로써 상공업의 발전을 도왔다고도 한다. , 필요에 의한 대출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대출과 그에 대한 이자는 허용했다는 것이다. 대출을 받은 산업은 많은 투자와 생산을 통해서 이익을 남길 것이고, 따라서 이자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것이다. 잉여의 자본을 가진 자도, 잉여자본을 빌려서 생산에 참여한 자도 모두 상호혜택을 누리고, 이에 더하여 사회 전체가 많은 부를 누리게 되는 자본의 virtuous circle 허용했다는 면에서, 칼빈의 통찰력이 엿보인다.

토지의 문제에서든 금융의 문제에서는 원칙은 이제 분명해보인다. 토지든 자본이든, 가난한 자를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된다. 또한, 아무 노력없이 많은 부를 누리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서 토지나 자본을 사용하는 것도 옳지 않다. ‘대박’, ‘투기같은 단어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멀리해야 용어들이다. 우리는, 기업들이 생산활동을 함으로써 좋은 일자리와 좋은 상품을 사회에 제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없이, 나의 가진 것을 투자하여 이익을 누리는 것조차 경계하여야 것이다. 가난한 이웃에게 나의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에 우리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난한 자는 [우리와] 항상 있을’( 26:11)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의 금융위기는, 가난한 자의 필요, 혹은 기업활동의 보조라는 기본 원칙에서 벗어서, 돈으로 돈을 벌어들이려는 인간의 탐욕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가 아닌가 가늠해본다.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

기독교적 경제가치의 현대적 적용사례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A. Carnegie, H. Ford, 그리고 J. Rockefeller 정신이 체계적으로 발전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대공황을 겪기 이전, 고전 경제학의 시대에 기업은 자본을 끌어다가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많고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파는 이윤창출기구에 불과하였고, 개인도 기업도 사회도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업의 성장이 반드시 고용된 개인이나 사회에의 혜택으로 직결되지 않음이 관찰되고, 이윤추구를 위해서 비도덕적 방법을 동원하는 일이 생겨나면서, 기업은 생산과 이윤추구라는 기본기능외에 사회적 책임이라는 새로운 기능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직면하게 되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포괄되는 영역은 대단히 넓다. 기본적으로는, 회계와 governance 투명성이 요구된다. Enron사태에서 바와 같이, 기업이 불투명한 회계운영을 통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주주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끼치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뇌물과 같은 불공정한 행위를 통한 기업운영, 지배구조의 공정성과 투명성도 중요한 요소이다. 이와 같이 기업의 내부운영에 대한 적용되는 corporate ethic 기업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의 축이라면, 기업이 자신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준 사회에게 이익을 되돌려주는 social contribution 다른 축을 구성한다. 사회가 없고, 정치과 체계가 없고, 열심히 일해준 피고용자와 물건을 사준 소비자가 없다면, 기업은 존재조차 없다. 따라서, 기업이 획득한 이윤은 기업만의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세금만으로 부족한가, 기업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목소리도 있으나, 이미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문화사업 (: 금호 아시아나), 장학 교육사업(: 삼성 장학재단), 의료사업, 지역사회 환경 개선 사업(: SK 울산대공원)등에 막대한 액수를 기부하거나, 직접 투자 운영한다. 미국에서는 유수의 기업들이 RED campaign 동참하여 [RED]라는 logo 부착된 제품을 판매한 수익금을 아프리카의 AIDS퇴치를 위하여 기부하기도 한다. Bill Gates 유명 연예인이나 기업가중  은퇴이후 자신의 이름을 재단을 만들어서 자선사업에 재산을 쏟아부은 사례는 열거하기 힘들정도로 많다.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여전히 경영학에서는 이윤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주체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마저도 Brand value 끌어올려 기업의 이윤에 도움을 주는 하나의 경영전략으로 이해한다. 이렇듯, 전통적인 경영학과 자본주의의 틀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제대로 품어 내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가 있기에, 최근에는 공동체 자본주의’(심상달 , 2008, KDI)라는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공동체 자본주의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용어로써, 기업의 본질을 규정한다. OECD 정의에 의하면, “사회적 기업은 기업적 방식으로 조직되는 일반활동 공익활동을 아우르며, 목적은 이윤 극대화에 두지 않고 특정한 경제 사회적 목적, 그리고 재화와 용역의 생산이나 사회적 배제 실업 문제에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두고 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윤극대화와 더불어 공익추구를 목표로 하는 기업이다. 사회의 문제라면, 기업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빈부격차, 실업과 같은 구조적 경제문제도 기업이 함께 해결해나가야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 기업 목적함수는 이제 나의 이윤극대 아니가 공익의 극대화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공헌을 목표로 하여 지속가능한 수준에서 이윤을 설정한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기업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수준을 제외한 모든 이윤을 사회에 되돌린다는 것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업의 정의에 비할 다소 낯설어 보이지만, 성경적인 가치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인정해야 한다. 개념이 낯선 만큼 현실화를 위해서도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론적 설명이 어떠하든,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이루어가는 것이 하나의 대세로 자리잡은 것으로도 우리는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삶으로 구현하는샬롬 경제구조

지금까지 우리는,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과제를 대하여, ‘경제학혹은 경제분야라는 전공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와 원칙이 갖는 의미와 역할을 다각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렇다면 나를 오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를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현재의 경제체계가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해 수있는 가능성과 구체적인 방향성, 그리고 실제 사례까지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경제환경은 불완전하고 심각하게 왜곡되어있다. 우리가 기독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경제구조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조에서 살면서 기독교적 경제원칙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갈등과 좌절의 연속, 그리고  실질적인 경제적 손실이라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감내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원칙과 현실이 괴리되어 있을 , 가운데 서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전쟁을 치를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 전쟁은 반드시 포기와 희생을 통하여 승리로 이어질 수있다. 우리가, ‘바로 지금 나의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단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나아가야 것인가? 사회구조가 그러하므로 개인인 나는 어쩔 없다고 말할 있는 타협의 경계선은 과연 있을까? 세상의 아들들의 지혜로운 방법을 취하지 않을 우리에게 닥쳐오는 직접적인 피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같은 패배감과 좌절을 이기고 우리가 끝까지 복음적인 경제원칙을 지켜낼 있는 힘은 어디서부터 얻어야 할까?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분별하는 것이 진정 어렵고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가 깨닫고 진리로 알게 원칙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majority 구성한 구조가운데서 실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한판 영적 전쟁이 아닐 수없다. 그래서 우리는 알고 믿는 것에 비해서 턱없이 초라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언제까지 환경과 구조, 가족과 생계를 방패삼아 힘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까?

 Bad news부터 말하자면, 물러설 자리는 없다. Good news 있다. 하나는, 의외로 나의 삶가운데서 샬롬 경제원칙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는 점이다. 또다른 good news,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사실이다( good news 무력하게 만한 bad news 없다!!)

기독교적 경제원칙을 비기독교적 구조가운에서 실천하는 방법이 쉽다고 하였는데, 과연 무엇이길래 쉬운가? 바로 나눔이다. 우리는 앞에서 세계적인 거부들의 나눔의 본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나눔 그토록 부유한 몇몇 사람만의 책임인가, 그들만이 수있는 것인가? 혹은 그렇게 많이 나누어야만 나눔인가? 우리는 모두 질문들의 정답을 알고 있다. 내가 가난한 과부라면 렙돈 헌신( 21:2)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것인데, 내가 부자 관원’( 18:18-23) 아직아니라는 것이 나눔 미룰 이유가 수있는가? 

나눔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숨이 멎을 같은 부담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나눔 차원보다 훨씬 높다. 나눔은 단어 자체로, 전체가 아니라 일부를 의미한다. , 일부만을 남에게 내어놓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부의 렙돈은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다.  부자 관원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였다. 따라서, ‘나눔 우리가 실천하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오히려 기준을 낮추어 우리가 쉽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수있도록 숨통을 틔어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근접하다.

과부와 부자 관원의 예화를 보고, ‘그럼, 재산을 교회에 바치란 말이야?’라고 놀라 반문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렙돈이든 재산이든 아쉬운 분이 아니시며, 예수님의 몸된 교회의 필요가 있다면 얼마든지 직접 채우실 있다. 원칙은 우리와 항상 함께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가운데 가난을 허용하시는가의 문제는 그것이 죄의 결과로 드러나는 악의 현상이라는 손희영 목사님의 설명으로 대신하고, 본고에서는 우리가 악의 현상 바로잡기 위해 해야 일에 집중하였으면 한다.

과부에게는 있었지만, 부자 관원에게서는 결여되었던 것은 재산의 헌납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과 순종이었다. ‘오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19:9) 기뻐했던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재산에 대한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으셨다. 부유함이라는 것이 어차피 하나님의 영역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기에, 부유한가 아닌가 자체는 구원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이 분명히 경고하는 , 부유함 자체가 구원의 걸림돌이 있으며, 부에 대한 탐욕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딤전 6:10). , 부유한 자가 부로 인해서 짓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행위를 선악간에 심판하실 ’( 12:14)이다.

자신이 온전히 그냥 통째로 예수님의 소유가 자에게 재산의 드려짐은, 예수님의 요구에의 힘겨운 부응이 아니라, 넘쳐나는 기쁨과 감사의 표현에 불과하다. ‘나눔 문제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첫번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통째로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는가? 예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에게 합당한 재물관과 소유의식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말이다. 재물에 대한 집착과 잘못된 소유관에 사로잡힐 , 그래서 수중의 재물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할 나눔은 우리에게 고통이 된다. 아깝고 억울한 마음에 밤잠을 설친다. 그러나, 진정 수중에 있는 것이 나의 것인가? 우리는 정답을 안다. 수중에 있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의 것일 아니라, 자신이 통째로 그리스도의 것이다. 주인되신 분께서 이렇게 사용하겠다 하시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면, 그로 인해 받은 구원과 얻을 영생에 대한 확신과 소망가운데서, 지금 사는 동안, 전부도 아니고, 일부 극히 적은 일부 예수께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라고 말씀하신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고통일 수는 없다.

기독교적 경제구조는 결국 안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잘못된 소유관과 부당한 주인의식을 철저하게 버리고, 맡기신 청지기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바로 서야 한다.  John Wesley 예화는 그가 가졌던 철저한 청지기 의식을 너무나 뚜렷하게 보여준다. 어느 , Wesley 자신의 집에 불이 나서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주님의 집이 타버렸구나. 나는 가지 짐을 덜었다!!!”. 이러한 Wesley에게 나눔이라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을리 만무하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있는가?

나눔 경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에서 흘러나와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나눔을 실천한 것인지에 우리는 많은 의문점을 갖게 된다. 일단 % 나누어야 할까? 마음으로는 100%이지만, 굶을 수는 없는 법이니, 10%? 50%? 우리는 계산에 참으로 민첩하다. % 말하자면,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이미 숫자가 떠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1%이든, 30%이든 중요한 것은 떠오른 숫자가 자신의 가계부에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1% 부끄러워서 믿음이 자라면 멋지게 많이 하리라고 말하지 말고, 30% 약간 부담이 되니 집을 사고 아이들 교육을 마친 후에 하리라고도 말하지 말자. 1% 시작해도 좋다. 하나님께서 키워나가실 것이다. 100% 내놓아도 자유롭고 오직 기뻐할 분량까지 직접 차근차근 가르치시고 인도하실 것을 확신한다. 100% 내놓으면 어떻게 될까는 우리는 너무 오래 너무 깊이 너무 심각하게 고민한다.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하고 신실한 약속을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유익하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우리의 경제생활에서 나누고도 넉넉히 지낼 수있다고 여겨지는 때는 그리 많지 않다. 불황의 시기를 살아가는 크리스챤 청년들이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적 궁핍의 문제가 문자적으로 굶어죽는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우리의 경제적 눈높이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넉넉함과 부족함의 기준은 아마도 4 가족 기준의 , , 여가 문화생활비, (세상 사람들 하는 수준의) 자녀교육, 의료비와 노후보장이 아닐까 싶다. 힘겨운 것을 사실일지라도 이런 눈높이를 예수님께 점검받지 않고 나눔의 어려움과 incapability 호소하지는 말아야 한다.

게다가, 누가보아도 확실히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넉넉하게 나눌 수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생활필수품이라고 여겼던 커피 잔을 일주일에 번만 절제할 수있다면, 결식아동의 풍성한 점심 도시락이 수있다. 정말 가진 것이 없다면 그냥 가진 것을 무엇이든 나누면 된다. 손으로, 마음으로, 우리는 이웃에게 나의 아니라 자신 쪼개어 나눌 수있다. 힘겨워하는 형제 자매에게 거는 따뜻한 전화 , 기도와 축복의 마디, 함께 끓여먹는 라면 개를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21:3) 인정하신다.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통째로 쪼개어 내어 주신 ,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분의 사랑과 나눔의 앞에 우리가 변명하거나 물러설 여지는 전혀 없다.

절제함으로 탐욕을 이기고, 나눌 것들을 마련하려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누리고 싶은 것들을 하나도 추려내지 않고 나눌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유중, 나를 위해서 얼마만큼을 남겨두어야 할까를 겸손하게 고민한 후에, 남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고 나눌 ,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자유함과 풍성함을 만끽하게 것이다.

우리의 경제적 선택,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는가에 관련된 일상의 작은 선택들은,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인가,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샬롬 받은 자인가, 우리가 진정 샬롬 세상 가운데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인가에 대한 확실한 증거물이 것이다.

 John Wesley 말로 Closing 대신해본다. “Earn all you can, (근면)

              Save all you can, (절제)

                Give all you can.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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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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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6 12:10 코스타 사역/tmKOSTA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경제학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Capitalism in Christian Perspective (1): Principles

공산주의라는 역사적인 실험이 실패로 드러난 이후, 전세계의 경제체제는자본주의 아래에서 빠르게 진화해나가고 있다. 개인의 이익극대화 추구와 시장의 기능을 통해서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있다는 신념은 학문과 실물경제 모두에서 주류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를 견제할 만한 새로운 이념이나 체계는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효율과 혁신을 통해 더욱 살게 되는 메카니즘으로서 역사는 자본주의를 선택하였고, 세계가 이러한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고를 없이 전력질주 하고 있지만, 가운데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소외계층은 곳곳에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가간, 사회계층간, 지역간, 직종간의 빈부격차 문제, 식량 문제, 그리고 환경문제는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고, 이러한  자본주의의 한계점과 최근의 금융위기를 두고 마르크스의 예측을 다시 떠올리는 경향마저 나타난다.  

하나의 경제체계를 일컫는 사회과학적 용어로서 시대의 경제구조를 규정하는 자본주의 이제 특정 학문의 subject로서의 역할을 버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치판단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세력, 자본으로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시대에, ‘자본’,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학문이나 활동은 많지 않다. 순수 자연과학, 의학, 문화 예술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고려할 , 신앙과 학문, 그리고 삶을 통합하는 영적 과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기독교적 고찰은,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와 이웃에게서 이루고 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영광스러운 소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걸음이 아닐 없다.

KOSTA 2009시카고 conference에서, tmKOSTA참여한 코스탄들은  성경적 경제관을 바탕으로 경제구조와 흐름을 진단해보고, 성경적 경제관을 직업과 학문에서 구체화하는 사례를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나의 가운데서 구현가능한 형태로 발견해가고자 하였다.

다음의 글은 세미나에서 나누어진 의견들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Christianity and Economics 

참석자들은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사회학등 사회과학분야에서 공부하고 있거나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우리가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고 있는 이러한 활동들이 우리의 신앙, 혹은 성경적 가치관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우선 질문하였다.

하고 있는 혹은 학문의 영역에서 나름대로 균형있는 통합을 이룬 사례도 있었지만, 전혀 관계가 없어서 고민하는 경우도 있었고,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좌절한 경우, 서로 연계되어야 필요가 있는지를 묻는 코스탄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유형의 교회안에서 혹은 교회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활동, 개인의 묵상, 기도, 예배생활을 떠올리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6일동안 전심을 다하여 감당하는 학문과 직장생활은 우리의 신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가정, 학교 그리고 직장에서 맡은 바를 감당하고 있는 분리된 인격체일 없다는 ,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내주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인격적인주님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가지 영역이 일관성을 가지고 하나로 통합되어야 하는 본질을 가졌음을 인정하게 된다. ‘ 사람이고, ‘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힌바 되었다면, ‘ 관여하는 모든 활동이 신앙의 영역에 포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로 드리 것이 우리가 드려야 영적 예배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권면(12:1)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학문/직장생활에서 실현되어야 것인가의 질문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해답이 발견되어져야 하며, 일반론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임에 모든 참석자들이 동의하였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든 삶과 활동, 선택이 신앙을 축으로 하여 통합되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우리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적으로 구현될 있도록 우리의 지성과 영성이 깨어서 삶의 모든 영역을 성경의 가치관에 따라 분별하고 진단하는 일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일환으로써 우선 경제학에 담겨진 기독교적 요소를 살펴보았다. 더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과연 성경적 가치관에 준할 어떤 장점과 문제점을 가졌는지를 고찰해보았다.

Christianity in Economics?  

경제학이 해결하고자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제문제는 ‘limited resources and unlimited desire’ 요약된다. 부족한 자원과 제한없는 인간의 욕망은 에덴 동산 이후의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너무나 선명하게 묘사해주고 있어 오히려 놀랍기까지 하다. 경제학이 이렇게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타락한 인간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모든 참석자들에게 신선한 깨달음이었다.

욕망에 비해 자원이 부족할 ,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부족한 자원을 배분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고민이다. 최소의 투입으로 많은 자원을 생산해내야 하고(production efficiency), 자신에게 배분된 자원을 최대의 만족을 누리는 방식으로 소비하여야 하며(utility maximization under budget constraint),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욕망을 가능한 많이 충족시켜주는 방식으로 자원의 사회적 분배(Pareto efficiency) 이루어져야 된다. 결국, 모든 경제적 선택과 활동은 인간의 unlimited desire 기본조건으로 하여, 어떻게 이러한 desire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충족시켜줄 것인가에 목적을 둔다. 이러한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resource limitation 극복하기 위한 모든 수단이 동원되고 있다. 많은 다양한 자원의 생산을 위해서 과학기술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고, 전체 자원의 평화로운 그리고 파레토 효율적인 배분을 위해서 우리는 시장에 의지한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은 자율성과 창의성이 발휘되고, 죄로 인해 더해진 이기심마저 전체의 행복과 만족에 기여하는 요소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 시장메카니즘이기에, 인간의 unlimited desire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게 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대신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와 맥락을 함께 하는 현대 경제학이 역사의 승자가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경제학의 세계관과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오늘날의 경제학은 기독교적 경제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기독교적인 경제학은 가능할 것인가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없다.  

기독교적 경제학, 그리고 기독교적 자본주의

Christian Economics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역사를 잠시 거슬러올라가 보자.

막스 베버가 1904 출간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의하면, 산업혁명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발달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청교도 정신에 의해 가능해졌다고 한다. 산업화와 함께 지주와 계급 중심의 사회구조가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중심으로 개편되는 시기에 활동했던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평신도의 직업, 세상에서의 노동활동을 하나님께 부여받은소명이라고 생각하였다. 루터는직업노동은 이웃 사랑의 외적 표현이며노동의무를 다하는 것은 신의 이라고 하여, 평신도의 모든 활동에 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소명으로서의 노동 결과로 주어지는 , 혹은 부의 축적에도 종교적 합리성을 부여함으로 산업화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경제주체들에게 종교적 정신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직업이 소명이 요구되는 윤리는근면이었고, 결과 이루어주는 부의 축적은신의 선물이었으며, 이러한 부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으므로, 맡은 , 청지기로서 주어진 부에 대하여 가질 태도는절제였다. 일하지 않고 얻은 부를 탐욕과 쾌락의 도구로 일삼던 중세 영주와 귀족계급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던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Earn all you can, save all you can, and give all you can”라고 하며, 근면한 노동과 절제를 통한 부의 축적과 부를 나눔으로 풀어낼 것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의 태동과 발전은, 노동과 노동의 댓가로서의 부에 신성한 가치를 부여했던 기독교 정신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란직업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였다. 탐욕과 무한한 이윤추구와 같은 비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부를 축적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철저히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돈이라야 바로 자본주의 정신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부의 축적과 사용에 대하여 근면과 절제의 원칙이 전제될 ,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뒷받침해주는 최선의 메카니즘은 시장으로 이해될 수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유명한보이지 않는 기능을 제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인간이 각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에 의해서 경제활동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인간의 만족에 대한공감 대한 욕구가 있기때문에 시장기능이 원활히 작동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반균형론 개인의 최대이익추구가 시장을 통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루면서 사회전체에 최적의 자원배분과 활용, 그리고 최상의 만족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으로 아담 스미스가 철학적으로 접근했던 자본주의의 이상을 수학적으로 규명해낸 것이라 수있다.

부의 축적, 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구상했던 초기 학자들의 관점, 그리고 그에 기초한 현대 경제학에서 자본주의는 누구나 근면한 노동을 통해서 정당한 댓가로써의 부를 누릴 평등한 기회와 자유, 그리고 그것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활용하는 합리적인 동기에 기초를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부의 축적을 이룬 자들에게 청지기 의식과 절제의 윤리가 상실되고, 부가 부를 낳는 경제구조가 인간의 절제되지 않은 탐욕의 결과물로 진화되어 감에 따라, 자본주의는탐욕 경제구조로 일그러진 형태를 갖게 되었으며, 오늘날에 발견되는 수많은 문제점을 파생하게 것이다. 이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Keynes로부터 시작된 수정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을 탄생시키면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일으켰다. 정부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기구로써 어느 정도의 역할과 개입을 해야 하는가, 혹은 해도 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많으며, 경제상황에 따라 작은 정부, 혹은 정부를 지지하는 성향을 나타낸다.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문제 (공공재, 비대칭적 정보, 도덕적 해이등)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나, 종종 정부가 역할에 실패함으로써 시장실패보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는 또한 사실이다.

그리나 이러한 시장의 실패, 혹은 정부의 실패가 시장과 정부, 그에 기초를 자본주의의 불합리성, 대안적 경제구조에 대한 열등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3 이상적인 메카니즘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를 불완전한 체계로 왜곡되게 발전하게 만든 숨겨진 원인들을 온전히 밝혀내고 바로잡지 못한다면 경제체계의 실패는 반복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기독교적 경제원칙과 함께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인간의 잠재능력을 존중해주는 다양한 기제를 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 우리가 고민해야 첫번 과제는 자본주의와 시장, 그리고 정부라는 경제구조를 훼파하고 새로운 형태의 경제체계를 구축하는 혁명적 역할이 아니라, 다소 소극적으로 생각될 지라도 자본주의를 본래의 모습으로 바로잡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근면의 노동윤리를 회복하고, 부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어떻게 일이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질문앞에 성경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본질을 겸손히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공급으로부터 분리되어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 4:17-18)으로 내몰려서 살아 숨쉬는 동안 끊임없이 수고하면서도 자원의 부족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아갈 운명에 놓인 인간, 동시에 창조질서가운데에서 누렸던 샬롬 상실한 서로 비난하고( 3:12)  세상과 벗하여 정욕으로 인한 다툼과 시기(4:1-4)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실존이 바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고, 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의 본질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인간이라는 한계적 존재성에서 비롯되는 이기심과 탐욕의 문제를 해결해 내지 못하는 , 인간이 구상해 어떠한 제도와 체계도, 모든 인간이 넉넉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이상적인 경제구조를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혹은 어떤 형태의) 경제구조를 성경적 가치관에 따라 바로잡는 일이 학문적 제도적 접근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이 학문/직장의 영역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역할임에는 분명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이라는 원칙을 사람의 마음에 바로세우는 일이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중요성과 의미를 우리의 소명으로 마음에 새기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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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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