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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5월호

바이올린 경연대회를 하루 앞둔 딸아이가 열심히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특한 마음에 음료수를 들고 방에 들어가니 딸아이는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고등부 찬양팀에 가입한 이후로 우리 집에는 늘 그 애가 연주하는 찬양이 흐르고 있어서 무척 감사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선율에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긴장했거나 예민했던 신경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자주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바로 대회 전날이라서 저는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잔소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회 출전곡을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딸아이는 주일날 연주할 찬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저는 그날 딸아이와 모처럼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와 편협한 사고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 많은 크리스쳔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자신이 이룩한 성과라고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에 대한 감사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좋은 것, 귀한 것을 구했을 때, 남들 보다 앞서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소중함과 기쁨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귀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가끔 저는 선뜻 동감할 수 없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한 느낌에 빠지곤 합니다. 과연 우리가 빛나는 자리에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다지 뛰어난 점도 없어서 남의 주목을 받기는커녕 어느 자리에서나, 있는지 없는지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모든 것이 평균적인 기준에 못 미쳐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소외 당하는 사람들, 병들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난과 무지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없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존재들인 걸까요? 하나님의 전존재가 영광 그 자체임이 확실하다면, 아름답고 뛰어난 존재만이 그 영광의 한 부분을 반사하고 있는 걸까요?

주변의 모든 부모님들이나 제 자신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 오거나 무언가 재능을 발휘해서 상을 받거나 남들에게 칭찬 받을 때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자랑스러움과 기대감으로 벅차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 경우 가장 행복하고 오래가는 기쁨은 아이들의 사랑을 확신하고 교감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비록 아이가 조금 부족할지라도, 말썽을 부릴지라도, 남들에게 칭찬 받지 못할지라도 자식을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어서 생활을 힘들게 할지라도 다만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그 존재가 귀한 것이 모든 부모의 사랑일 것입니다. 자식 앞에서 모든 부모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강함과 한없이 양보하고 용서하는 약함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그 모든 힘은 '나의 피와 살을 나눈 나의 존재의 일부!'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할 때,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할 때 더욱 깊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하나 자랑할 것도 칭찬받을 것도 없는 존재이지만, 그 얼굴을 바라볼 때 내게 반사되는 빛이야말로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모습, 내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의 오묘함과 살아가는 일들의 질서와 모든 관계와 모든 느낌들의 총체적인 주권이 내게도 있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과 속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느낄 때,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찬양은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에 대한 감사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 그 영광을 나누는 감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상황과 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값진 선물이기에 어느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려하지 않고, 매 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주어진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충만하려는 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음의 모든 행위와 느낌들이 우리의 찬양이고,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딸아이와 이야기하면서 찬송가를 연주하는 것 만이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곡을 연주하던, 그 연주 실력의 깊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연주는 모두 찬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나무에 활짝 핀 꽃들 만이 아니라 발에 밟히는 잡초들도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며 자기 몫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그 성과의 크고 작음을 견주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의 사랑을 주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목소리에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공평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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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4월호

06년 6월 6일 밤에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났다. 전 세계는 핵폭탄에 의해 가루가 되었고 핵미사일이 태양의 중심을 타격했다. 지구는 완전한 어둠과 추위 속에 빠져버렸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까미유가 잠든 사이에 일어났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세상은 암흑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가 어둠 속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오직 그의 손에 있는 검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괴물들이 지구를 점령했기 때문에 까미유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을 내리치며 거리를 다닐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괴물들을 먼저 공격하는 법을 익혀가면서 그는 자신을 지켜갔다. 어느 날 아침 몇 명의 강도들이 그를 공격해서 난투를 벌였지만, 결국 그는 납치당하여 낯선 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에테르 냄새를 풍기는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삼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태양도 지지 않았으며 다만 까미유가 시력을 잃었을 뿐임을.

그가 싸웠던 괴물들은 그가 차에 치거나 건물에 부딪치지 않도록 도우려는 손길들이었으며

그의 검은 양로원에서 준 지팡이였음을 설명해준다.


위의 내용은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암흑'이라는 짧은 소설을 요약한 것입니다. 짧은 내용 속에 함축된 의미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 까미유는 아마도 늘 핵전쟁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늘 그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어서 언젠가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갖게 했고, 그가 시력을 잃은 밤, 꿈속에서 전쟁을 경험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환상을 실제로 일어난 일로 믿은 그에게 세상은 암흑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 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 근심을 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그에게서 보입니다. 때로 그 걱정, 근심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우리를 덮치고 스스로 만든 그물 속에 갇히게 만듭니다.

자신의 내면의 빛을 지워버린 것을 세상에 빛이 사라졌다고 공포에 떠는 모습.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만나는 괴물의 실체는 자신이 만들어 낸 공포와 죄의 형상일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내면의 등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지, 오해와 편견 때문에 사랑의 손길을 뿌리치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세상의 어둠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그가 휘두르는 검은 자신을 지키기 보다는 상처 입히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더 강한 검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명예의 검, 권력의 검, 물질의 검을 구하여 휘두를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은 점점 더 흐려져만 가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빛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려 우리는 빛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곤 합니다. 내 안에 환한 불이 켜 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불의와 정의로움, 선함과 그릇됨, 진실과 미혹의 분별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식견도 눈과 마음이 밝고 맑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따스하고 밝은 불빛은 다른 사람들과 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근심보다는 희망을, 불안보다는 평강을, 다툼보다는 이해와 화해를, 인내와 온유의 밝은 빛이 넓게 퍼져나가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환한 등불 하나를 켜주는 시대를 꿈꾸어 봅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정결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밝은 햇살 앞에 그대로 드러나듯이, 우리 안의 부정한 것들도 빛의 씻김을 받으면 더욱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투명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듯이, 자신의 안에 빛을 가진 자는 타인의 내부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처음 지음 받은 모습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지으신 분의 성품을 알아갈 수록 그 빛은 선명하고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빛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 그 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고난의 훈련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처음 빛을 바라볼 때 느끼는 통증과 혼란의 과정을 통해서 눈은 서서히 빛에 더 친숙함을 느끼게 되며, 이제는 감출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단단히 자신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에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검이 아니라, 어둠을 물리치는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나와 세상의 어둠을, 불의함을, 거짓됨을 잘라내는 검을 꼭 잡고 이 거칠고 오염된 세상을 걸을 때, 우리에게 더 이상 적은 없고 오직 사랑해야 할 이웃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 내민 손길이 서로에게 등불이 되고 지팡이가 되어주는 세상에서 빛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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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연극에서 배우가 자신이 맡은 인물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은 대부분 상상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그가 성장한 배경, 현재의 환경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심지어 그 인물의 외모, 성격, 가족, 친구 관계, 신앙, 특이한 버릇... 모든 것을 세밀하게 생각하고 그 연극에서 요구되는 인물과 가장 적합한 한 인물의 인격을 창조해내는 것이 배우의 몫입니다.


현실에서 연극의 한 부분을 이용하다 보면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연극을 통해서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거나 경미한 정신, 심리 질환에도 치료효과가 상당히 있는 것을 봅니다. 연극 속의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자신과 동일화하려고 노력하듯이, 일상 속에서도 타인에 대해 내가 그의 역할이 되어보는 것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지름길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그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룹 성경 공부를 할 때 저는 가끔 연극적인 방법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극화해서 각 사람에게 역을 맡기거나, 대화하는 장면을 대사 읽듯이 감정을 살려 읽어보라고 권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시키는데, 가장 솔직하고 미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설명이나 간증, 지식적인 주석 보다 가끔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고 참 감사를 드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 청소년들과 이성간의 교제와 결혼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창세기를 읽게 된 경험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18-25절까지를 즉흥적으로 연기해보라고 했을 때 학생들은 아무 어려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풍족한 자연을 즐기는 아담이 종일 아름다운 벌판을 거닐며 시간을 보낸다. 아담이 지나치는 곳마다 새로운 식물과 동물을 만난다.



아담 : 내가 너를 장미라고 부르겠다. 너는 장미가 되어 향기와 예쁜 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 내가 너를 사슴이라 부르겠다. 너를 호랑이라 부르겠다. .....

이것을 말하고 난 학생은 자신감에 넘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말 커다란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종일 먹고 즐기고 다니던 아담이 어두워지자 주변을 둘러본다)



아담 : 하나님, 다 좋은데요, 무지 심심하거든요. 누가 같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혼자 많은 일들을 하려니 힘들어요. 생각도 잘 안 떠올라서 누가 도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의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이브를 만드시고, 아침에 일어난 아담은 아름다운 이브를 발견한다)

아담 : 앗 ! 당신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요 !

내게 와주어서 너무나 고맙소 (몹시 기쁘고 감격하여 펄쩍 뛰면서 춤을 춘다)



이브 : 나는 당신을 돕고 함께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두 몸이지만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번성하라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 :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 없어야하고 서로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 해요.


그 날의 공부는 스스로 깨닫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기쁘고 감사한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과,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를 맺고 서로 존중해야한다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명, 남녀의 역할에 대해 어렴풋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학습과 토론을 통해 분명한 가치관을 정립하기까지 확실한 기초 작업을 한 셈이지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짧은 삶도 어쩌면 하나님이 기획하신 커다란 연극 무대에서 한 배역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결코 우연함이 없는 완벽한 대본과 연출에 따라 자신이 맡은 인물을 최선을 다해서 표현하는 것 말입니다. 언제 등장해서 무대 어느 쪽에 서야하고 언제 퇴장해야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연출가의 몫일 뿐입니다.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되어 각광을 받거나 조연이나 단역을 맡거나, 영웅이 되거나 악당이 되거나 상관없이 그 연극이 완성되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역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인물도 추한 인물도, 완벽한 성품과 지혜를 가진 인물도 어리석은 인물도, 부자도 걸인도 우리의 커다란 드라마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훌륭한 배우는 더 근사하고 멋진 역할을 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 이 기피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주셨건 하나님의 무대에 초대받았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 아닐까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통해서 연출가의 의도와 목표가 잘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배우야말로 트로피를 손에 쥐고 웃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겠지요. 연출가의 마음과 배우의 마음이 일치할 때의 기쁨은 서로가 늘 가까이 있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어떤 역을 맡았는가 보다는 얼마나 아름답고 진지하게 나의 역을 감당했는지를 연출가는 눈여겨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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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2월호

해마다 새해가 되면 지난 일들을 돌아보며 한 해의 소망이나 계획을 나름대로 열심히 세우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리라 다짐을 하곤 합니다. 해마다 비슷한 결심을 하였건만 얼마나 성실히 계획을 실천했는지 반성하는 일도 언제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가족들, 친구들과 서로의 계획을 나누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마음 아픈 일 한 가지가 떠오릅니다. 제게 엄격한 스승이면서 따뜻한 친구로서의 역할을 함께 해주시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시인으로서는 대 선배이시고, 신앙적으로는 멘토의 역을 기꺼이 감당해 주시던 그 선생님으로부터 작년 설날에 긴 편지를 받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후배에게 거는 기대와 지침, 한국 문학에 대한 본인의 소명, 개인의 비전과 세계관등... 그동안 늘 나누었던 가치관을 느낄 수 있는 참으로 가치 있는 글이었고 선생님의 자상한 인품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긴 글 속에서 제가 지킬 수 있는 몇 가지를 흔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성실한 습작생활과 독서 생활, 신앙의 훈련 글을 쓰는 자세와 소명 등... 선생님도 여러 가지 약속을 제게 하셨습니다. 가령 맛있고 멋진 식당을 발견했으니 귀국하면 점심이라도 나누자는 등의 사소하고 재미있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그런 글을 보내신 이후 두어 달 만에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소에 워낙 건강하시던 분이라 본인이나 주변 누구도 병이 그리 깊은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었지요. 한동안 저는 우울하고 믿어지지 않는 마음에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지냈습니다. 다음에 귀국하면 다시 뵙고 인사를 나눌 것도 같고 편지를 드리면 답장을 주실 것도 같은 착각을 아직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시 새해를 맞아 여러 분들께 카드를 보내면서 선생님께도 카드를 써보았습니다. 그렇게 다양하고 확신에 차있던 모든 계획들과 소망과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지나간 한 해에 대해서, 부치지도 못하는 긴 편지를 써 보았습니다.

지난 늦여름 어떤 자매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던 그녀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습니다. 항암 치료로 이미 머리칼을 다 잃었고 창백한 피부는 심한 부종으로 혈관이 다 비칠 정도로 얇아져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성실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이기에 그 모습은 더욱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앉아있기도 힘든 상태에 있던 그녀가 힘겨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산책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 부탁을 하였기에 무리가 되는 줄 알면서도 부축을 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산책이라고 해야 기껏 집 주변을 간신히 서성거리는 정도였지만 그 짧은 시간이 무척이나 긴 여행길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온 힘을 실어야하는 힘든 상태에서도 그녀의 얼굴에 번져나가던 미소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집 앞의 뜰을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경이에 가득 차 오르던 눈빛과 탄성도...

옆 집 뜰에 핀 봉숭아꽃을 보다가 내년 봄 자신의 뜰에도 심고 싶다며 씨를 받던 손길과 자두 만한 배 열매를 바라보며 과연 저 배를 먹을 수 있을까하고 묻던 일들이 영상처럼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다음 여름에 봉숭아 꽃 물을 제 손톱에 들여 주겠다는 약속과 다음 주에 만나면 조금 더 멀리 산책을 나가보자는 약속조차 우리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변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며, 사진을 찍듯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라보던 눈길과 아직 다하지 못한 일들,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말하던 떨리던 목소리가 뚜렷하게 기억나는데도 그 사소한 약속을 지킬 만큼의 시간은 허락되지 못했습니다.

몇 해전 강도를 만나 짧은 순간 동안에 죽음과 삶의 경계를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예고도 없이 우연한 길에서 우연하게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 단 몇 초안에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경험은 제게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하였습니다. 제가 세운 인생의 계획이나 목표라는 것이 물위에 쓴 글자나 바람에 세운 집처럼 허망한 것임을 느꼈을 때 무척 참담하고 외로웠습니다. 그 이후 저는 항상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순간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 바람에 실려온 꽃향기처럼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순간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구속과 한계를 벗어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개념이며 연! 속되는 순간, 연속되는 현재가 영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순간을 살고 있기에 영원을 살수 있다는 역설적인 생각으로 범위를 넓혀도 봅니다.

게으름이나 고의적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만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지킬 수 없었던 약속들을 기억하면 사람의 신념이나 맹세는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한번의 오류도 없이 신실하게 지켜지는 약속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구원의 약속은 어제도 오늘 이 순간에 지켜지고 있고, 내일에도 영원토록 지켜질 가장 확실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무슨 일들을 해야 할 지 생각하다가 그만 하루를 보내버릴 것 같습니다. 아직 갚지 못한 청구서와 누군가에게 진 빚을 기억하려 할 것이고,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여러 곳을 찾으며 정다운 얼굴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애쓰겠지요. 지난 일기들을 정리하며 용서해야 할 일들과 용서 받아야할 일들을 떠올리고 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라는 상상은 마음을 한없이 초조하게 만들기도 하고 한없이 너그럽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을 향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값지고 향기로운 말들이 넘쳐나는지, 지켜야할 귀한 것들과 무한한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도 무거운 삶의 짐들을 벗어버리고 가볍고 자유롭게 한 순간 순간을 호흡하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확실하게 지켜질 약속을 기다리며 생의 슬픔을 지우고 싶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가치 있고 진지한 의미를 갖게 되고, 신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인격을 갖게 되며 진정한 소망의 빛을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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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1월호

도자기 하나를 굽기까지 여러 과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흙을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고 안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손으로 주무르고 두드리며 다져 줍니다. 그리고 모양을 내기에 적당한 수분을 더해주며 물레를 돌리며 형태를 잡아갑니다. 이 때 너무 건조한 흙은 단단해서 기포를 없애기가 힘들고 너무 습한 흙은 모양이 잘 변형되기 때문에 적당함을 유지하면서 작업하는 요령을 터득해야합니다. 물레를 돌리기 전에 어떤 그릇을 빚을 것인가 계획을 가지고 시작할 때도 있지만 무작정 시작하고서 마음가는 데로 손 가는 데로 만들기도 합니다. 마치 즉흥연주를 하듯이 그 때의 기분이나 흙의 기초 작업이 되가는 정도에 따라 계획 없이 만드는 과정은 미지의 완성품을 기대하게 하는 즐거움을 줍니다 .

어떤 때는 머릿속에 완성된 그릇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스케치까지 해놓고 시작하지만 중간에 실수를 하기도 하고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서 중간에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릇을 빚는 과정 외에도 건조, 다듬기, 문양 넣기, 초벌구이, 유약 채색, 재벌구이의 여러 과정과 긴 시간을 걸쳐서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도자기가 탄생됩니다. 이중 어느 과정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굽는 과정에서 균열이 일어나기도 하고 유약이 골고루 입혀지지 않거나 예상과 다른 색을 나타내기도 하고... 한 과정 과정마다 최선을 다하고 신중하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나 정직하게 드러나 버립니다 .

모든 과정이 다 그렇게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물레를 돌릴 때 흙의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빠른 속도의 전기 물레를 돌리다 보면 조금만 중심이 기울어져 있어도 흙이 밀려 나가기도 하고, 억지로 계속 만든다 해도 그릇의 균형이 맞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간신히 마무리지어 놓아도 그릇의 두께가 고르지 않게 어느 한쪽 면이 두껍거나 입구가 너무 넓어지게 되어 흉한 모양이 되거나, 바닥이 기울어지는 불안정한 그릇이 되어버립니다. 수분의 정도는 조절할 수도 있고 물레의 속도나 건조 정도도 조절이 가능한 것이며 채색이 맘에 안 들면 다시 칠을 할 기회도 있습니다만, 중심이 잘못 잡힌 그릇은 나중에 어떤 노력과 재주를 부려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높이가 좀 있는 그릇을 만들려면 더욱 중심의 정확성이 요구됩니다. 높고 커다란 그릇을 아름답게 균형 잡히게 만드는 가장 필요조건은 정확한 중심점을 찾는 것입니다.

중심만 확실하게 잡히면 그 이후의 과정, 즉 모양을 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일사천리가 됩니다. 그런데 도자기를 만들 때마다 가장 힘들고 좀처럼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중심 잡는 일입니다. 경험이 있으신 분은 아마 빙그레 웃으시며 동감하실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도 역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 건조하지 않게, 너무 습하지 않게 적당하게 부드러운 흙을 만지듯이, 마음의 상태도 너무 강퍅하지 않게, 너무 감상적이지 않게 온화하고 적응력 있는 상태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든 판단에 있어서도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지키는 일이나, 요즘 같이 기존의 윤리나 도덕개념이 파괴되는 시대에 가치관을 정립하는 일은 스스로 늘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어렵고 민감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럴싸한 이론으로 위장한 거짓 진리가 만연하고, 인간보다는 물질이 가치를 더 부여받는 이 혼란한 시대, 빠르게 변하는 각종 이론의 충돌과 지나친 인본주의의 주장으로 모든 것이 무가치하거나 모든 것이 수용되는 극단적 모순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현기증을 느끼곤 합니다. 어디에 내 삶의 중심을 세울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중심을 잡고 다양한 삶의 현장에 적응할 것인가, 바로 그것이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살면서 실패도 하고 뜻하지 않은 곤경을 겪으며 계획과 꿈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될지라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중심점이 확실하다면 좌절과 포기 없는 성실한 삶을 살게 되겠지요. 자전거를 탈 때 중심을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듯이 말입니다.

중심을 잡는 일이 어느 순간 예리한 직감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중심점에 다가가는 것일 것입니다. 감정의 통제에서 번번이 실패하고 어떤 판단 앞에서 망설이고 이리 저리 휩쓸릴 때마다 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이념도 확실한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고 공허한 사념의 고민을 갖게 하곤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고민은 지적인, 정신적인 성숙을 하게 해주는 가르침을 주었기에 귀한 것이지만, 실제적인 삶의 지혜나 영적인 깨달음이나 성숙한 자아를 갖게 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에 조금씩 다가가고 매일의 큐티를 통해서 말씀을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 어디에서 중심점을 찾아야 할 지 조금이나마 깨달아 가는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그 중심에 조금 더 가까이 가기를, 매일 매일의 삶이 확실한 중심에서 빚어지는 아름다운 그릇으로 변해 가는 모두의 모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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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화려하고 무성했던 잎새들이 다 떠난 나무들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낍니다.

갈색으로 변한 잎새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채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계절의 바뀜을 무척 아쉽게 합니다.

한 때 푸르렀고 단풍 들었던 기억들을 접고 숙연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삶의 한 자세를 깨닫기도 합니다.

 

옷을 다 벗어버린 나무는 겸허함과 삶에 대한 의지와 힘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우고,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잎새를 다 버리는 것은 내일의 풍성함을 약속하기

위한 헌신으로 보여집니다.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잎새들을 보다가 한 시인의 시에 담겨 있는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돌이켜 보며 나의 혀는 어떤 모습의 나무를 그려내었는가

자문해 봅니다. 푸르고 싱싱한 잎새로 다른 이들을 축복하고 위안을 주었는지,

아름답고 진실한 잎새로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는지,

검게 시들은 잎새처럼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했는지..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들어서 혀를 감추고 싶어집니다.

 

얼마 전 모 전시회에서 본 작품들 중 관심을 끌던 조각이 있었습니다.

나무 기둥 위에 분홍색의 커다란 혀가 달려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분의 다른 작품을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 있는 몇 점의 작품을 통해서

그 작가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 깊은 관심과 통찰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작품을 통해 모든 관계의 교량이 되는 언어 소통에 대한 반성과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무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처럼 보이는 혀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그 나무를 쪼개는 칼처럼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몸의 아주 작은 부분인 혀가 몸과 영혼을 쪼개거나 두터운 관계를

순식간에 파괴하는 칼로 작용할 때가 얼마나 많은 지요.

거대한 숲을 불사르는 불씨가 되기도 하고, 배의 방향을 정하는 작은 키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야고보서 3) 혀라는 출구를 통해 천국을 경험하기도

지옥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미움과 시기, 그릇된 판단과 교만한 생각들이

험담과 자랑의 언어들을 통해 밖으로 나와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고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또한 그 칼은 그럴 수록 자신의 몸 깊이 박혀서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어둠의 세력을 불러옵니다.

내 입 속의 검은 잎이 두렵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내 몸의 작은 한 부분인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화가 나고, 그 위력이 두렵기조차 할 때가 많습니다.

 

거짓과 위선,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미혹의 영, 추악한 욕망,

비수와 같이 날카로운 공격들이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밖으로 나올 때

나의 혀는 죽음과 절망의 검은 잎에 불과할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 진실이 담긴 조언, 지혜와 평안을 주는 대화, 마음을 드러내는

소박하고 정직한 표현들이 나의 입술에서 나와 누군가에게 빛을 주고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나의 혀는 아름다운 분홍빛의 꽃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희 이웃에 사는 한 미국인이 한국인 친구에게 배운 한국말을 자랑스럽게

저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할 줄 아는 모든 한국말들은

저를 무척 당황하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욕설에 가까운 언어나 어리석은 농담의

표현들만이 그가 아는 한국어였으니까요. 저는 그에게 새로운 단어를 몇 개 가르쳐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멋져요, 건강하세요...

무엇보다 중요하게 몇 번이나 반복시킨 표현은 “사랑해요“ 이었습니다. 

 

그가 알지도 못하고 내뱉은 언어들이 그 자신을 얼마나 천박한 인격체로

보이게 하는지, 언어는 한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저도 새롭게 언어를 익히고 싶습니다.

영혼을 더럽히고 다른 이를 상처 입히는 말들은 제 언어 창고에서 버려내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살아가는 일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혀,

기도하는 혀, 사랑한다고 외치는 혀를 갖고 싶습니다.

 

새들이 찾아와 다투어 노래하고 그늘에 쉬기 위해 나그네가 찾아와 머무는

푸르고 싱싱한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될 수 있기 위해 검은 잎새의 혀를,

칼 같은 혀를 버리렵니다. 한 해가 저물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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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10월호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나뭇잎들과 신선한 바람이 있는 초가을의 오후에 공원을 산책하며 온몸으로 맑은 공기를 호흡하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손에는 작은 물병과 책 한 권을 지녔을 뿐이지만 마음은 천하를 가진 듯이 우쭐해질 지경입니다. 하늘을 들어 마신다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하늘을 마시고 나면 몸은 구름처럼 자유롭고 가볍게 대기를 춤추며 다닐 수 있겠지요.

커다란 나무의 뿌리에 걸터앉거나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은 평화롭고 무언가 충만해지는 느낌이 밀려옵니다. 오늘 아침 도서관에서 무척 인상적이고 특별한 시집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빨리 읽고 싶은 생각에 빌리자마자 근처 공원에 가서 자릴 잡고 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 시집에는 오십 여 편의 시들이 실려 있는데 처음으로 시라는 것을 써본다는 사람에서부터 대부분 평소에 시 쓰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자작시들을 한 편씩 모아서 편집한 시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십 명이 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얇지만 그 내용이 두터운 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를 쓴 이들은 모두 나이, 종교, 직업, 가족 관계, 인종, 주거지역이 다른 배경을 갖고 있지만 유방암이라는 공통된 경험과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여성들입니다. 유방암으로 투병하면서 겪는 고통, 소외감, 두려움, 수술 후에 찾아온 극심한 우울증, 상실감등에 대한 진솔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미지의 그들과 마음이 닿는 것만 같아졌습니다. 수유에 대한 행복한 기억, 가족들의 섬세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 같아서 스스로를 가둔 경험, 더운 여름 가발을 벗고 외출했다가 경험한 따가운 시선, 수술대 위에서 숫자를 세면서 점점 아득해져 가던 의식의 공포... 한 명 한 명의 시들 속에는 전혀 다른 시각과 경험과 감정들이 녹아 있어서 읽는 저의 느낌도 다양하게!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과장이나 거짓 없이 체험한 진솔한 내용들에서 받은 감동이 물결처럼 서서히 제 안에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집의 뒷부분에는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위로 받고 상처를 극복하게 되었는지, 만난 적도 없는 타인과 고통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어떻게 격려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후담과 앞으로도 같은 질병으로 진단 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속적인 교류를 하겠다는 계획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 혼자 짊어진, 나만의 고통이라고 여겼던 일들을 타인들과 나누며, 그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동질 감을 통해서 슬픔과 어두움이 작아지는 신비한 경험을 그들은 공유한 것이지요, 슬픔과 슬픔이 만나면 더 큰 슬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작아지고, 기쁨은 몇 배가 되어버리는 법칙은 우리가 체험하는 작은 기적 같은 일 중의 하나 같습니다.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모임, 테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 장애 아를 가진 부모들의 모임 등 여러 종류의 모임을 통해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상처의 공유가 아닐까요? 우리가 지극한 비탄에 빠졌을 때 흔히 하는 말 중에 " 나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아픈 것인지, 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아무도 몰라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의 고통만이 절실하고 태산 만하고 나만 이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데 아무도 이해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더 괴로운 것이 대부분의 인지상정이니까요. 그런데 나와 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는 나의 아픔을 정확하게 이해 해줄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이해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감정은 본능적으로 무척이나! 강렬한 욕구이니까요.

우리가 삶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상처를 한 몸에 지닌 사내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결코 이해 받지 못했고 멸시 당했고, 가장 가까운 벗들로부터 배신당했으며 몇 푼에 팔려졌고, 온 몸이 찢기도록 매를 맞았고, 이 세상에서 가져본 것도 없이 누려본 것도 없이 가장 누추한 삶을 살다가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라면 여러 형태의 상처와 아픔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을까요?

내가 어둠 속에 숨어 울고 있을 때, 분노와 좌절로 비틀거릴 때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밉니다. 나의 아픔과 절박함을 이미 알고 있으며 , 나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려는 깊은 사랑이 전해지는 순간입니다. 그와 손을 잡는 순간 나는 그가 초대한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서투른 스텝이 어느덧 우아하고 경쾌한 왈츠의 스텝으로 바뀌어 가는 동안 나는 고통을 잊어 갑니다. 나 또한 상처 입은 한 영혼에게 다가가 감히 손을 내밀고 싶어집니다. 손을 잡고 발 동작을 익혀 가는 동안 마음이 하나되어 두려움이 없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럿이서 함께 추는 춤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치유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음악에 이끌려 서로에게 손을 내밀며 말하게 되겠지요.

"Hey, Shall we da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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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9월호

올 여름 많은 시간을 저는 바다에서 보냈습니다. 낚시에 재미를 붙여서 어쩌다 시간이 나면 선택의 망설임도 없이 간단한 도구를 챙겨서 바다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무척 더운 날 대낮에 햇볕을 그대로 받으며 서있기도 했고, 갑작스런 폭우를 만나 물고기처럼 젖은 채 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곳을 다니다보니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도 얻게 되더군요. 이를테면 가는 장소에 따라 잡히는 물고기의 종류가 다른 것과 물고기가 몰려드는 시간을 맞추는 것, 특정한 종류의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시간과 고기떼의 움직임으로 그 깊이를 가늠하는 것까지 익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손길이 분주할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기도하고, 어떤 날은 종일 허탕을 치면서 깜찍하게 미끼만 먹고 달아나는 피라미나 게 때문에 미끼 끼우기만 바쁜 날도 있고, 엄청난 대어를 만나 흥분하여 힘을 쏟으며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낚시 줄을 끊고 달아나는 놈의 꼬리를 바라보며 허탈해지는 경험도 몇 번했습니다.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면서 자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바다에 자주 나가게 되면서 점점 낚시하는 일, 고기를 잡는 일보다는 다른 것에 마음과 눈길을 빼앗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낚시 대를 던지기 위해 바람의 방향을 잡다가 바람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할 일을 잊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시간마다 변하는 바다의 색과 물결의 모양을 넋 놓고 바라보는 일이 더 많아졌지요.

넓은 평면의 바다는 자칫 단순한 경치 때문에 지루할 것 같이 생각되어지지만 종일 바라보고 있어도 바다는 얼마나 다른 얼굴과 표정을 보여 주는지 모릅니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 바다의 붉은 수면과 해가 지는 저녁의 붉은 수면이 얼마나 다른 색조와 분위기를 그려내는지, 가슴 벅참과 어떤 애상, 희망과 애잔함, 신비함, 쓸쓸함.. 큰 감정의 기복을 일으키게 합니다. 해가 뜨거운 날 일수록 잔잔한 바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혀주기도 합니다. 더위로 인한 짜증이나 불쾌감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지요.

깊은 밤이 되면 낚시하는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물결 소리와 뒤섞여 묘한 화음을 이룹니다.

조명등의 빛을 받아 윤곽을 드러내는 물결의 하얀 포말의 움직임이 마치 살아있는 동물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바다와 맞닿은 하늘엔 얼마나 많은 별들이 다투어 신호를 보내듯이 반짝이는지요 !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생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음성으로 들은 자는 얼마나 행복하고 가슴이 벅찼을지, 밤바다를 지키고 있는 제 자신이 최초의 인간이 되어 그 음성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바다의 전설 중에 싸이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끝없는 바다의 지루함과 오랜 항해로 지친 어부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유혹하여 배를 암초에 부딪치게 하는 아름다운 인어 아가씨들의 전설은 언제나 우리에게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망망한 바다를 지도도 없이 별빛에 의존하여 길고 긴 길을 가는 어부들의 불안하고 지친 마음에 섬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모든 것을 잊고 홀려 따라갈 정도였나 봅니다. 지혜로운 어부들은 싸이렌의 섬을 지날 때 귀를 막았고, 율리시즈는 부하들에게 자신을 밧줄로 묶게 함으로써 무사히 섬을 지나쳤다는 전설을 기억합니다.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그 변화와 느낌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있다보면 우리의 삶이 긴 항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내면서 때로는 잔잔하고 지루한 노젓기를 계속해야하고 때로는 거친 풍랑과 어둠을 견디어 내면서 자신이 가는 길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수없이 자문해야 하는 항해 말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자연의 섭리에 이끌려 가듯 운명의 행로에 순응해야하기도 하고, 순간마다 판단과 결단을 내리며 모든 상황을 극복하여야 하는 선장의 역할을 감당하며 내 삶의 배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야 하기도 합니다. 때론 지치고 절망하며 노 젓는 손길을 멈추고도 싶고 난데없는 풍랑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수고를 멈추! ! ! 고 평안의 섬에서 쉬어 가라는 유혹이 나를 흔든다면, 그 아름다운 노래 속에 숨어 있는 쾌락과 죽음의 검은 유혹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소리를 향해 가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막막한 바다를 건너는 우리에게 다행히도 지도 대신 빛나는 별빛이 있기에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담대하게 목표를 향해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폭풍우에 별빛이 가리워도 우리 마음 속에 등대가 되어주는 그 빛은 변함이 없습니다. 싸이렌의 노래에 귀를 막은 어부처럼 자신의 몸을 기둥에 묶은 율리시즈처럼 말씀에 귀를 집중하고 십자가에 나를 묶는다면 어떤 세상의 유혹도 그릇된 가치도 초연하게 지나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배가 영원히 귀착할 그곳을 향해 가는 동안 돛대가 되어주시는 분, 그 분을 믿고 평안한 마음으로 향해할 수 있으니 우린 얼마나 즐거운 여행을 하는 것인 지요.

거대한 바다 속의 작은 물고기처럼 힘없고 보잘것없는 제 자신을 느끼면서 이렇게 작은 존재가 바다와 땅의 주권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격을 하곤 합니다. 그 넘치는 사랑이 물결처럼 내게 다가오기도 하고 바람결처럼 나를 어루만지기도 합니다. 깊고 아름다운 무한의 사랑의 바다에서 한껏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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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8월호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키 크고 잎새 무성한 나무들이 무척 많아서 여름이 되면 곳곳에 울창한 숲이 생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너편의 집들이 사라진 아침을 맞으며 드디어 초록의 시절이 왔구나하는 감각적인 시간을 느끼게 됩니다. 이른 아침 나무들 속을 산책하는 기분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는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숲 속엔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어 나름대로의 질서 있는 살림을 사는 존재들이 느껴집니다. 나무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식량을 구하는 작은 동물들,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노루 가족, 나무 밑둥에 기거하는 버섯이나 이끼류와 거기에 서식하는 곤충류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생물체들의 공동체를 목격하며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경이로운 세계를 바라보곤 합니다.

들 토끼, 오소리, 고슴도치등의 작은 동물들을 아주 흔하게 보곤 하지만 가장 흔하고 가깝게 대하는 것은 다람쥐들입니다. 저희 아파트 주차장과 뜰에는 늘 다람쥐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마치 이웃의 한몫을 차지하려는 듯 행동합니다. 하루에도 두어 번 아파트 테라스에 올라와서 집안을 기웃거리는 당돌한 모습이 애완견 같습니다. 끼니를 손쉽게 구하는 방법을 터득한 이들은 숫제 단골을 정해 놓고 내 집처럼 찾아와 먹이를 청합니다. 바구니 따위를 내놓으면 새끼를 치고 아가들이 자랄 때까지 기식하는 영리한 어미들도 있습니다.

저희 집에도 그런 다람쥐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이 땅콩을 가장 좋아하고 콘칩과 초코렛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늘 창가에 준비를 해두고 있습니다. 지난봄에 저희 집 테라스에서 새끼 세 마리를 출산한 어미와 아기 다람쥐들이 장난치며 노는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함께 여름을 맞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다 자란 아기 다람쥐들은 한 둘씩 어미를 떠나기 시작했고 어미도 다른 처소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요즘도 그 친구들은 끼니를 챙기러 거의 매일 저희에게 찾아옵니다. 어쩌다 오지 않는 날은 무슨 일인가 걱정도 되고 기다릴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데 야생해야할 그들이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면서 몇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주차장이나 차도에서 너무나 자주 발견되는 그들의 주검을 볼 때마다, 그들이 적응하기에 인간의 세계는 복잡하고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머물러야할 곳은 역시 안온한 숲의 세계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걱정은 그들이 그렇게 쉽게 주어진 음식에 길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힘들게 구한 열매 보다 사람들이 주는 고소하고 달콤한 먹이에 익숙해지고 나면, 거칠고 딱딱한 음식을 구하기 위해 애쓰려는 마음이 사라질까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자신이 속한 자연에 적응하지 못해 늘 낯선 세계를 기웃거리거나, 몸은 다람쥐인데 생각은 자신이 사람인줄로 착각하는 돌연변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됩니다.

얼마 전 시카고에서 타올랐을 열기가 그리습니다. 뜨거운 가슴과 정화된 영혼의 아름다운 모습들, 가슴 벅차게 밀려오는 소명감과 결의들... 지금쯤 사방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파송되었을 코스탄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지니고 있을 감격과 열의를 부러워합니다. 제 자신 신앙적인 나태에 빠질 때면 코스타 집회에서 보낸 시간들과 그 때의 영적 각성을 떠올리며 힘을 얻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합니다.

코스타에 다녀와서 그 감동의 시간이 얼마나 오래 내 삶에 영향을 주었고 신앙적인 결의를 지속시켰는가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실감에 빠지기도 했고 냉소적인 감정이 생기기도 했고,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각종 부흥회, 찬양집회, 간증회, 중보기도 모임등에 참여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곤 했습니다. 영적인 충만감과 다시 눈뜨는 듯한 기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이러한 상황에 스스로 자문하며, 신앙적 자립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 보곤 합니다. 혹시 제 자신이 스스로 찾고 구하는 신앙적 진리보다는 쉽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는 신앙의 열매에 익숙해져있는 것은 아닌가,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하는 신앙보다는 피상적이고 달콤한 감정에 더 매료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안에서 치열한 내적 전쟁을 치르며 얻어낸 말씀의 의미만이 내가 겪는 절망과 상처를 극복하게 해주며, 세상을 향한 힘과 비젼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단단한 신앙적 자아를 갖게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순간순간 들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랫동안 다진 흙으로 그릇을 빚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매일 밥을 먹으며 생활의 원동력을 얻듯 습관화된 큐티는 영적인 능력을 키워주며 늘 열려있는 마음과 감동을 줍니다.

초코렛에 길들은 다람쥐가 도토리를 구하기 위해 벌판과 나무 위를 오르는 일을 게을리 한 다면 그것은 자연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적응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나무의 향내와 풀잎의 감촉에서 느끼는 기쁨을 잊은 다람쥐는 비록 벌판에 살고 있지만 이미 작은 틀 속에 갇혀서 사는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겠지요.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은 들판을 달리고 높은 산을 오르며 자신 안에 있는 소리를 들을 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깨달은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벌판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여 새로운 이름과 삶을 얻은 야곱을 생각하며 숲을 바라봅니다. 그가 끈질긴 씨름을 통해 드디어 하나님과 대면한 사건이 우리 모두의 삶에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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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3년 6/7월호

대부분의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자신들이 활동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인정 받거나 널리알려지지 못했고 어려운 길을 걸었던 것에 비해, 피카소는 매우 젊은 시절부터 그의 천재성을 인정 받아 명예와 부를 누리며 왕성한 활동을 한 대표적인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도 처음 파리에 와서 활동을 하던 이십대 초반에는 경제적으로 무척이나 빈궁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친구 막스 자코브의 좁은 방을 나누어 쓰던 이 년간, 먹는 것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서 밤새워 그림을 그리며 석유가 없어 한 손에 촛불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리의 뒷골목에 자리한 허름하고 더러운 건물에서 예술가, 행상인, 시인, 노동자 등의 온갖 직업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하던 몇 년 동안에 그 유명한 청색시대가 구축되었습니다.(1901-1904)

삶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와 열정이 넘치는 이 젊은 천재 화가에게 가난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슬픔과 고통은 삶에 대한 명상의 기회와 깊은 통찰의 계기가 되어 그의 예술에 토양이 되어주었습니다. 깊고 차가운 청색으로 표현된 그의 작품들 속에는 우울함, 고뇌, 허무, 빈곤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에서 바라보는 삶과 이웃들의 모습에서 발견한 삶의 느낌을 표현하는데 푸른색만큼 적합한 색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색 하나만으로도 그 명암과 톤을 달리함으로써 자신의 감정과 시각을 충분히 전달하는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의 청색은 다만 절망과 우울함의 상징만이 아니라 그가 바라 본 새벽의 깊고 아름다운 하늘의 색이었을 것입니다. 어둡고 칙칙하고 비좁은 방에서 이젤도 없이 밤새 바닥에 허리를 구부리고 작업을 하고 난 뒤 창 밖을 보았을 때, 푸르고 깊은 하늘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것을 바라보며 젊은 피카소가 느꼈을 감동을 상상해 봅니다. 가슴 깊이에서 서서히 번져 오르는 삶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벅차게 그를 사로잡았을 것 같습니다. 청색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관람하였을 때 제 자신이 느꼈던 감격은 "숨막힘"이라는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흐름, 삶과 죽음, 절망과 구원의 긴 서사가 한 화폭에 압축되어 있는 '삶'이란 작품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에 젖기도 했고, 비참한 현실을 대변하는 그의 청색 인물들을 보며 깊은 공감과 슬픔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빈 배 한 척만이 호젓이 떠있는 바닷가에 고개 숙인 여인이 어린 아이를 가슴 깊이 껴안고서 있는 작품 ' 바닷가의 여인과 아이'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암울하기만 합니다. 기도를드리는 듯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는 수심의 그림자가 있고, 작은 아이는 엄마의 품에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온통 푸르른 화면과 창백한 그녀의 얼굴과 손에 대비되는 붉은 꽃 한 송이가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그녀의 모아진 손에 들려 있는 붉은 꽃만이 푸른 계열의 색조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빈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여인의 상심과 슬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근심과 아이에 대한 간절한 소망..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기도가 깊고 푸른 우울의 바다에서 홀로 붉게 피어난 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삶의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삶에 대한 관조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막막하기 만한 어두운 바다와 같은 삶의 한 복판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둠과 완전히 구별되는 색조의 꽃을 피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시기에 피카소를 사로잡던 소재 중의 한 대상은 맹인이었습니다. 영양 실조와 질병으로 인한 실명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대상이면서 또한 화가에게 절대적인 시각을 내면적인 시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하기에 적합한 모델 이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어둠, 절망, 빛의 상실을 의미하는 맹인의 모습에서 화가는 삶의 다른 부분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 맹인의 식사'라는 작품 속에 그려진 맹인의 움푹 패인 눈두덩과 가느다란 손가락은 지치고 고달픈 하루의 끼니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맹인 앞에 놓인 한 덩이의 빵과 작은 물병이 전부인 초라한 식탁에서 그의 고난과 덧없는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는데, 그의 여윈 손이 닿아 있는 물병과 빵은 푸른색의 전체에서 일탈한 붉은 색과 황금색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 색과 노란 색을 통해 물병과 빵이 그에게 주는 의미를 이렇게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화가는 내면적인 시각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맹인은 손의 감각을 통해 빵과 물이라는 물질에서 생명의힘을 보게 됩니다. 그 맹인의 손길은 차갑고 우울한 세상에 색채를 더함으로써 생명의 끈을 잡게 하는 화가의 손길인 것입니다. 절망과 비탄으로 맞는 저녁 식사에서 더듬어 찾아 낸 물병과 한 덩이 빵은 그에게 생명을 약속하는 양식이기에 화가는 맹인의 손에 시각을 찾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림에 한해서 화가는 절대자이며 권능의 손길을 갖고 있습니다. 지치고 참담한 생활 속에서 상처 받은 인물들을 재현하고 그들을 통해 삶의 의미를 묻기도 하며, 그들의 삶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바닷가의 여인의 손에 아름다운 붉은 꽃을 그려 넣어 주거나 맹인의 가난한 식탁에 놓인 물과 빵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면서 화가는 작품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누군가의 손길이 닿으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아름답게 채색되어지거나 삶의 꽃 한 송이로 피어나는 것을 느낄 때가 없으신지요? 우리의 고난에의미를 부여하고 어둠에 빛을 주기도 하는 손길에 의해 내 삶이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슬픔이 감사와 감격의 순간으로 바뀌어 버리는 그 따스한 손길을 경험하신적이 있으신지요?

세상이라는 넓은 화폭에 우리를 그려 넣고 그림이 완성되도록 다듬고 있는 그 손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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