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시고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우리 주님의 사역의 핵심 사상이요 관심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신약적인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오류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시리시는 분이심을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은 창세기부터 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써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신학적인 사상이다. 구약 중에서도 다니엘서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여러가지 차원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신약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서 흐르고 있는 주된 주제이면서 또 신약 시대에 주님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하나님 나라를 예언적으로 암시해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서 특히 다니엘서를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깊다.

 

토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 어떤 사람도 그가 가진 종교보다 높이 올라선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영적인 역사는 어떤 종교도 그것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 이상 커 본 적이 없다고 말하여 주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하여 교회 앞에 가장 중대한 질문은 항상 하나님 그 자신이었다.  어떤 시점에 그가 말한 것이나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의 깊은 마음 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비밀스런 법칙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Knowledge of the Holy, p. 1)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지가 우리 삶에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면 다니엘은 과연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할까? 그의 삶과 사역 그리고 그가 남긴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제시하고 있는가? 다니엘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매우 다양한 이름과 표현을 쓰고 있다. 연구에 의하면 다니엘은 약 26가지의 다른 칭호를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많이 나오면서 그의 하나님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표현이 지극히 높으신 자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자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다스리시는 주권자, 즉 왕이시라는 뜻이다.  다니엘은 그의 경험과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로 부터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자이고 모든 자 위에 주권자라는 사상을 펼치고 있다.

 

다니엘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은 개인의 삶 속에서 주권자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삶의 여러가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결국 다스리시는 자이심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로 하나님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 속에서도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을 개인의 주권자로 모시고 있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삶 가운데에서도 결국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자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위기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줄로 믿었지만 동시에 그리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풀무불에 던지움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그들 가운데 보내어서 그들을 지키시고 결국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다. 세째로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지 않고 있는 세상의 왕의 삶에서도 주권자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느브갓네살왕은 자신이 당시의 초대 강국의 왕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왕이고 주권자이고 자신 마음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짐승처럼 광야를 배회하기를 3년하는 경험을 통하여 사람을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시는 이는 바로 다니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은 신앙인들 속에서만 주권을 발휘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는 세상도 실상은 그에 속하였고 그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다. 네번째로 다니엘은 왕의 꿈의 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증거한다. 인간의 왕국들의 흥망 성쇠가 지속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든 인간의 왕국들을 대체할 날이 올 것임을 두 가지의 꿈을 통하여 예언하고 있다. 결국 다니엘의 하나님은 개인과 공동체, 세상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자, 왕이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니엘서는 다니엘에 관한 책이 아니라 다니엘의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주권자로써의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다니엘은 예수님 오시기 전 수 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믿고 그에 합당하게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의식을 가지고 살았고 신앙의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고 살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하나님이 주권자되심을 알아갈 수 있게 하였고 역사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선포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왕되심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삶을 산 것이다. 이런 모든 면에서 가장 핵심되는 것은 우리도 하나님을 주권자로 왕으로 생각하는 가이다. 우리의 개인의 삶의, 그리고 우리 공동체 삶의,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도 고백하지도 못하는 세상 속에서도 아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인류의 역사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삶과 입술로 고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니엘서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도전이다.

 

2008 코스타가 이제 눈 앞에 다가오고 있다. 올해는 이 시대에 바른 길로 주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주제로 열리게 된다.  이번 집회를 통하여 다니엘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발견하고 고백하는 집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Paul Shin

댓글을 달아 주세요

최근에 한 교수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자신이 그 전에 수업을 듣는데 달라스 월라드 교수가 특강 강사로 오셨는데 얼마나 차분하고 조용하면서도 편하게 하시는지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월라드 교수의 글을 직접 읽어보니까 아마도 하나님 안에서의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충분히 갖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영성 훈련으로써 고독침묵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하던 일을 멈추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걱정과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홀로서서 침묵하면서 하나님께 촞점을 맞추는 것이다. 월라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독 하기란 장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취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손을 떼는 것이다. 고독 하기에서 걸음 나아가서 우리는 침묵하기를 배운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고요함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독과 침묵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의 그분의 소유로 족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영혼이 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며 세상이 아버지의 세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세상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힘들지만 시간 속에서 고독하고 침묵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에서도 우리는 분주하게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인가 말을 주고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고독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촞점을 맟추기보다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침묵 속에 거하기 보다는 많은 말로 시간을 채우려는 때가 있다. 하나님 안에서 고독의 시간을 갖기보다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우리를 내려놓음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여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하시는 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의 임재 속에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것이 고독이요 침묵이다.

 

달라스 윌라드 교수는 사람들이 홀로 있기와 침묵 하기를 어렵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인상깊게 읽었다. 그가 파스칼의 팡세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 없다는 가지 사실에서 비롯된다. 연약하고 유약한 인간 조건으로 타고난 빈곤으로 너무 비참해서 깊이 생각하면 아무것도 위로가 안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대신에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끄럽고 바쁜 것을 지독히 좋아한다. 그래서 고독의 즐거움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다른 은밀한 본능, 원래 좋았던 본성의 잔재가 있어서 실제로 행복이란 바쁜데 있지 않고 오직 안식에 있음을 알고 있다. 본능이 앞에서 말한 분산 욕구와 충돌하고, 그로 인한 생각의 혼란 때문에 사람들은 흥분 속에서 안식을 얻으려 한다. 그리고 닥쳐오는 난관을 모두 이겨냄으로써 안식의 문이 열려야만 지금 내게 없는 만족을 얻을 것이로 생각한다. 말들을 쉽게 표현하면 사람들은 안식을 구하면서도 안식을 주는 고독하고 침묵하기를 두려워하고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안식을 구하고 있기에 바쁜 일들을 빨리 극복하고 다음에 안식을 갖겟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있으면 다른 바쁜 일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고독의 시간을 갖고 침묵하고 있는 사람은 어찌 보면 공동체와 사람들과의관계를 피하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회피하는 사람같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이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안에서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정한 관계와 의사소통을 만든다. 아이러니컬하지만 고독할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누릴수있고 침묵할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첫째, 우리는 고독을 선택함을 통하여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 있기를 배운다. 우리는 고독을 통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고독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가 모든 껍데기를 벋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진실되게 만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고독하여 자신을 직면할 때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게 되고 만나게 된다. 고독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을 갖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만날 있다. 자신 안에 안식과 평안이 있기에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있는 힘과 용기가 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대하고 만날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고독 속에서 대면하지 못한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감당할 힘이 없기에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만 머문다. 홀로 있을 없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없다.

 

둘째, 우리는 침묵을 선택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한다.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 속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가 하는 중에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침묵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말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신의 말이 정리되었을 때에 비로서 하나님께 대화로 나아갈수가잇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침묵을 통하여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정확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나와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침묵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