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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2002 KOSTA/USA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주제로 강의한 손봉호 교수의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이다.


세계관이란 말을 자주 들어보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세계관은 분명한 개념이 있는게 아닙니다. 19세기 독일철학가들이 철학의 일부로 이야기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 도이벨트라는 사람이 세계관 이야기를 조금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일반화된 신학적, 철학적 개념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월드컵에 대해서 온 사회가 열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모두 기독교인입니다. 뉴스앤조이라는 온라인 신문 인터뷰에 월드컵에 대해 비판을 했습니다. 월드컵이 너무 상업적이고 스포츠정신에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혼자만의 생각인가 했었는데 기독교방송국에 방송할 일이 있어서 가보니 그곳 기자들이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MBC방송국에서도 월드컵에 대해 토론을 하는곳에 가서 한참 비판했더니 다음에 나오지 말라고 하더군요. 같은 사건에 대해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면 어느 장로님이 딸이 셋인데 음악을 잘했습니다. 장로纛?박정희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불러서 청와대에서 연주를 하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은 기뻐서 이야기를 전했는데 딸들은 왜 가냐고 하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라는 소리를 어려서부터 들었더니 대통령은 시시하게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월드컵을 보는 눈이나 권위에 대한 시각이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 따로 따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어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일관성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문화마다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사회를 어떻게 보는가?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신을 어떻게 보는가? 가치기준은 어디에 두는가? 이런 것은 모두 연관이 되어있고 이것을 세계관이란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아직까지는 문화가 종교에 의해서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 전세계 문화가 세속화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종교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신비로운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화를 분류하는데 기독교권, 이슬람권, 유교권, 불교권이라고 나눕니다. 그렇게 나누어 놓으면 상당한 현상이 설명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나눕니다. Huntington이란 사람이 문명의 충돌이란 책에서 종교를 중요한 결정요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문화를 분류하고 문화에 따라서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다면 세계관은 종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철학사상이나 이념같은 다른 것, 종교외적 요소가 세계관을 결정하는데 작용할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세계관이 많이 달라져 온 것을 보면 보고서도 알수 있구요. 그리고 앞으로는 그 정도가 심해 질 것으로 추측을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다르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관성없게 신앙 생활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기독교적으로 사회를 보고 인간을 보고 자연을 보고 우주를 보지 않고 불교적으로 본다면 문제가 될 겁니다. 불교가 세계를 보는 눈은 기독교와 다르니까요. 이런 것이 구체적인 가치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월드컵. 어떤 사람들은 월드컵이 우리나라에 큰 공헌을 미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한국만 잘되어서 좋아해야 하겠느냐면 기독교적인 올바른 세계관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16강에 가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위해 기도를 할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면 나라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애국은 다른 사람들의 애국과 달라야 합니다. 불쌍한 나라를 돕고 문화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우리나라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좋지만 다른 나라를 짓누르고도 애국을 부르짖는 다면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주위에 휩쓸려서 가치관이 같아질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세계관이 무엇이고 우리는 어떠한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신학적 배경은 칼빈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의 니오칼비니즘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지 않은 영역은 하나도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을 월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주일날만 기독교인처럼 산다면 일관성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집에도, 학교에도, 정치판에도 계시고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교회를 개척했을 때에 강대상에 신을 신고 올라가느냐, 벗고 올라가느냐에 대해 논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을 신고 올라가자고 주장을 했습니다. 신을 벗고 올라가자는 사람들의 많은 생각은 출애굽기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신을 벗으면 강대상위는 거룩하고 강대상 아래는 덜 거룩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 예배당 마당은 조금 덜 거룩하고 시장바닥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라리 그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한곳을 거룩하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특강할 때에 예배당은 거룩할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예배당은 예배 드리는 처소지 거룩할 필요가 없다. 들판도 두세사람이 모여 예배하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라 부르면 안된다. 왜냐하면 성전은 제사 드리는 곳이었고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실 때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누구나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어느 곳에서나 제사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성전은 없어졌다. 그렇게 특강을 했더니 노회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손봉호가 이단을 가르친다고 총회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올려야 할지 판단을 내려야 해서 박윤선 목사님께 여쭈어봤는데 손봉호 말이 맞다고 해서 이단이 안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보면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고 강조가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지어놓고 솔로몬이 기도한 것을 보면 천지를 지으신 분이 성전 안에 계시겠느냐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인 가치판단, 행동구조가 성경과 일관성이 있으면 올바른 기독교인으로서의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문화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잘못 된거냐라고 반문이 들어오면 기독교 세계관은 모든 종교적 세계관중에 가장 옳기 때문에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손해보게 된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만드신 것은 이를 선전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힌두교에 과부를 화장시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같이 화장시켰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고 나서 보니까 힌두교전통을 많이 인정하려 했지만 이것만은 안된다고 금지시켰습니다. 네루수상도 안된다고 금지해왔는데 최근 인도의 지성 여인들이 그것이 영국의 법안이라고 바꾸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했답니다. 고유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풍속이 과연 옳은가? 요새 다원주의라고 해서 모든 문화의 요소를 용인해야 한다. 관용이라는 것은 미덕이라 해서 받아 들어야 한다는데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 세계관이 옳고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아직도 여자 할례가 있습니다. 케냐 박물관에도 할례에 사용되는 돌칼이 가장 많았습니다.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들은 문화에서 독립 되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수용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누리고 가치를 누린다고 보기 때문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 세계관을 결정하는 요건이 무엇인가? 다른 세계관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고 나머지는 자연종교라는 것입니다. 자연종교는 사람의 경험과 지혜로 만든 종교(불교, 힌두교, 유교)이고 계시종교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기독교, 이슬람교). 키에르케고르라는 덴마크 철학자가 쓴 책 중 ”스승으로서의 예수와 스승으로서의 소크라테스”라는 문단에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교육시킨다. 플라톤은 인간은 태어날 때에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 있지만 영혼이 육체를 입어서 다 잊어버린다. 교육을 통해서 잊었던 것을 다시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이 자극을 하면 알게 된다고 하고 이런 교육방법을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노예가 대화를 하는데 가르쳐주지는 않고 질문만 합니다. 가르쳐 주지 않고 질문으로 자극을 하니까 노예소년이 삼각형의 세각의 합은 두 직각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불교도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계속 돕니다만 고승들은 부처로 직행이 됩니다. 니체가 기독교는 천민종교라고 했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구원 받는 것입니다. 스승으로서 예수는 제자가 완전무식해서 모두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집어 넣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찾을 능력이 없고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려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증거하라고 하면 성경이 말하기를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니까 그런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로마의 교구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이 I believe because it is illogical. 논리적이지 않아서 믿는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이거 아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 다 논리적이면 사람이 만들어 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전도사님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생각이 내 생각이랑 똑같다고 좋아한다고 하는데 과연 하나님 생각이 한낱 사람의 생각과 똑같은 것인지…다른 예를 들어보면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였는데 원본은 없고 사본만 남아있습니다. 사본과 사본을 대조해보면 대부분은 같지만 조금 다른 곳이 있을 때에 규칙이 하나 있는데 두 텍스트를 비교해서 문법에 맞지 않는 것이 더 원본에 가깝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설명 못하는게 더 많습니다. 어떤 것들은 그냥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는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관을 결정짓는 것 중에 하나는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느냐? 에 관한 대답입니다. 원래 있었다 or 만들어졌다. 성경만이 무에서 유로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Bang theory 가 천문학에 있다고 하는데 전파가 계속 들리는데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포착했다는데 언젠가 우주가 폭발되어서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기독교의 창조론과 너무 가깝다. 재미난 말 하나 중에는 과학자들이 연구를 열심히 해서 가니까 신학자들이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자연종교는 우주를 살아있는 생물체로 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물질입니다. 자연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Generation vs fabrication. 생물학적으로 낳는 것을 generation이라 하고 손으로 만드는 것을 fabrication합니다. 기독교의 창조는 fabrication입니다. 고대사상들은 유기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도, 불교도 그렇습니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에 따라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기독교에서의 인간관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이야기하기를 인격이라는 말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도 자유의지가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유 의지란 원인없이 결정을 내릴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임회피 할 때에 안할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고 잘하면 자기가 했다고 하는데 자유 의지란 것은 원인 없이도 자기가 결정을 내리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람을 반박하기 위한 우화가 하나 있습니다. 당나귀가 있는데 두쪽에 풀이 있는데 질과 양이 똑같아서 오른쪽을 보니까 똑같아서 구지 먹어야 할 이유가 없고 왼쪽을 보니가 역시 먹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양쪽을 보기만 하다가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결정론이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고 합니다. 자유의지는 이유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게 인격체이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가 있고 그래야 책임을 질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인격의 존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잘못했을 때에 벌한다는 것은 그만큼 존재에 대해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에 아이들이 잘못했다고 했다고 했어도 잘못에 해당하는 벌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인간관을 가져야 인권을 가지게 되고 인격을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국제 보편인권선언이라는 것을 했는데 왜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가? 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거기에 대한 근거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기 때문에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수단화하지 마라라고 했는데 역시 거기에 대한 근거도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연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중 한명이 오늘날 환경오염의 문제는 기독교가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자연을 비신격화했다. 신성을 제거해 버려서 사람들이 자연을 착취해서 자연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오염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은 인간의 욕망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 대해 여기에 책임을 지려면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국에 기독교 실천운동은 정직과 절제를 강조합니다. 생활을 단순하게 해야 하고 에너지도 적게 쓰고 음식도 적게 먹어야 합니다. 에어콘도 덜 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물도 절약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본래 선한가? 에 대한 질문. 유교, 불교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기독교는 성악설을 가르칩니다. 로마서 3장 이하에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보면 무섭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스스로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누가 구해 주어야 합니까? 누군가 구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민주주의와 연결을 시키면 칼빈주의에서 장로교 제도가 나왔는데 장로교 제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힘의 분산입니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삼권분립이 나온 것입니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절대부패를 믿기 때문에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도 살펴보면 인간이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이 착하다고 보아서 필요한 것만 사용하고 능력만큼 일할 줄 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입니다. 목사님들이 중요한 결정을 혼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의 요건 중에 하나는 힘을 나누어 책임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집사로 교회에서 설교를 하니까 노회가 반대를 합니다. 그러자 교회가 노회에서 탈퇴하자고 하니까 제가 탈퇴하면 손봉호 교회가 되고 내가 잘못되면 완전히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고 치명적인 부분을 드러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베드로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성경에서 볼수 있습니다.

기독교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적 자연관, 인간관, 사회관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당하며 사실을 잘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세계관을 의식적으로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면 공동체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삶이 올바르게 될 뿐만 아니라 문화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신학자가 Christ and culture라는 책에서 칼빈주의 문화관을Christ as the transformer of culture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허무주의로 가고야 마는 물질주의, 쾌락주의, 상대주의를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가 그대로 두면 망하게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논리는 재미있잖아요 입니다. 재미있는 것 계속 해보세요 재미가 있는가? 마약이나 성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에 문화를 구원하기 위해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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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미나는 2003 KOSTA/USA에서 한국 라브리 성인경 목사의 세계관 강의인 '세계관 전쟁'을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전쟁중입니다. 범죄와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 사스와의 전쟁. 이렇게 전쟁의 연속이지만 진정한 전쟁은 영적 전쟁이고 영적전쟁의 최전선에는 세계관 전쟁이 있습니다. 이라크전쟁도 종교간의 전쟁이라고도 하고 문명간의 충돌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세계관 전쟁입니다. 미국 제국주의와 이라크의 국수주의간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관의 전쟁은 우리의 삶속에 매일 일어나는 심각한 전쟁입니다. 하지만 세계관 전쟁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와 문화 배후에는 세계관의 전쟁이 있습니다. 실제로 국가와 개인간의 전쟁을 살펴보면 그 국가과 개인의 가치관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정당성이라는 가치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누가 참이냐 거짓이냐 누가 선이냐 악이냐를 구분짓는 전쟁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3절에 보면 마지막 때가 올 때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영어로는 prepare your minds for action, 영적인 전쟁이 다가오는데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세계관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이시대에 여러분은 얼마나 준비되었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왜 필요한가입니다.
아내와 시장을 보러 가는데 어떤 아줌마가 아이손을 잡고 가다가 “얘야, 너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아저씨처럼 된다.”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환경미화원 아저씨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봤더니 우리 교회에서 믿음 제일 좋다고, 기도많이 한다고, 전도 제일 잘 한다는 아주머니였습니다. 믿음은 좋은지 몰라도 세계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사고방식, 직업귀천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믿음이 좋은지 몰라도 아주머니는 잘못된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서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는 것을 믿습니까? 청소부가 청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공부 열심했는데 나쁜짓 해서 감옥에 가있으면 어떻게 된 겁니까? 공부 잘 못했는데 지금 이웃을 도우며 훌륭한 삶을 살아가면 어떻게 된 걸까요? 그리고 이때쯤 고려대학교 총장 홍일식 박사가 쓴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라는 책에서 한국 사람은 일상생활은 유교식으로 하고 사고방식은 불교식을 하고 신앙생활은 무당식으로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평생을 유학자였던 그가 지적한 이내용은 저에게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믿음만큼 그 사고방식이 하나가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을 잘 가르쳤을지 몰라도 사고방식이 변화되고 세계관이 바꾸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을 보면 너희가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뜨거운 마음, 친절한 마음이 아니라 예수의 사고방식, mind,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라 라는 말입니다.

저는 라브리 선교회에서 청년대학생들을 돕고 가르치는데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었는데 고등학교때부터 성경의 이적기사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사람인데 부모나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토론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학원에서는 더이상 이렇게 살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한달을 방학을 줄테니 해결하고 오라 했답니다. 어느 전도사님을 찾아갔더니 전도사님이 기도얼마나 하나하고 물었습니다. 십분도 못합니다 그랬더니 그러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더 기도하고 와라 했답니다. 그렇게 해도 의심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또 찾아갔더니 성경을 얼마나 읽어라고 물어서 하루에 한장도 못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성경 더 읽고 와라 그랬습니다. 라브리에 와서 치밀하게 공부를 하면서 의심이 풀렸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도 앞에서 이야기한 아주머니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것과 아는 지식이 하나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청년은 세상에 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은 학교에서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자연의 법칙과 초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배우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이 세상이 Closed system, 자연의 법칙만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나 개입할수 없다는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open system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자연법칙이 멈출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신비성과 합리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청년은 그렇게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합리성의 반대개념은 비합리성입니다. 신비적인 것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정리하면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무기력과 영적 혼돈 상태를 극복하고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가치관의 혼돈을 극복할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바른 정신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혼돈을 가지기 쉬운때가 청년의 때입니다. 얼마전 동성애는 불법이라는 법률이 인권을 유린하는 위헌이라고 대법원에서 통과를 했습니다. 불법으로 내린 동성애 법안이 인권을 무시하는 법안이라고 판결이 되었기 때문에 동성애의 문제가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가치관의 혼돈, 윤리의 혼돈 이런 시대에 기독교인으로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는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세계관 전쟁에 대처하고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를 할 때에 세계관을 사용하지 않다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느낌의 시대이니까 감각적으로 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지만 어느 사람이든 세계관을 가지고 접근하고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방해하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객관주의입니다(Objectivism). 성경은 성경이고 학문은 학문이다 성경은 신앙적인 문제에서는 진리다 내가 공부하는 학문분야에서는 성경이 권위가 없고 전문가가 권위를 가진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과 전공분야를 분리해내는 것입니다. 아까 아주머니처럼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라고 분리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아주 좋은데 사고방식은 유교적, 불교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원론자가 됩니다.

두번째는 성경주의입니다(Biblicism). 성경을 너무 사랑해서 세상의 지식은 필요없다. 오직 성경만 공부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경건주의자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성경만 진리고 세상의 지식은 배설물이다라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지성주의에 빠지게 되어 학문세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지적자살을 감행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고 믿음만 좋으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주의라고도 하는데 특히나 유학생들에게는 공부가 잘 되지 않을때에, 시험에 떨어졌을 때에 더 큰 유혹이 됩니다. 바울이 배설물이라고 할때에는 이성에 기초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초된 바른 지식까지 다 내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번째는 혼합주의입니다(Synchretism). 세상의 지식과 성경을 적당하게 섞는 것입니다. 우리 유학생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비빔밥, 섞어찌게처럼. 로렌스 클레이드라는 사람은 야채샐래드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야채를 여러가지로 섞고 성경으로 드레싱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융합이라고 합니다(Harmonization). 혼합주의의 문제는 절대성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 되는 것이고 다원주의적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공부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가 무엇일까? 공부하는 방법을 이야기할때에 internal 원리라고 하는데 공부할 때에 사용되는 머리(이성)와 경험(감각)을 말합니다. External원리는 공부하는 대상을 말하는데 물리는 세상과 우주, 사회학은 사회의 현상, 체육은 인간의 몸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자연과 세상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인 종교적인 원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와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원리는 공부의 원리에 신앙의 원리를 더해야 합니다. 이성과 감각에 Internal원리인 영성과 성령이 더해져야 합니다. 자연과 세상에External원리인 하나님과 성경, 교회를 더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한쪽만 가지면 세속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 나머지만 가지면 신비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종합을 해도 안되고 혼합을 해도 안되고 통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통용되는 것이 종합입니다. Synthesis 종합은 정과 반을 통해 합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두번째 혼합은 다 섞어 놓는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세번째Integration 통합은 기준이 있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있어서 기준을 가지고 옳은 것은 다 받아들이고 옳지 않은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통합은 성경에 나와 있는데 에베소서 4장13절을 보면 믿는것과 아는것에 하나가 되어라고 나와 있습니다. Unit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남녀가 한몸이 되었다고 할때에 unity,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unity가 된다라고 합니다. Unity원리는 믿는 것과 학문하는 것에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이 통합의 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통합한 사람을 mature한 사람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고방식, 가치관이 예수님의 것으로 바뀌어지지 않기때문에 기독교인이 한국인구의 절반이 되어도, 국회의원의 절반이 되어도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원리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잘때까지 생각하는 화두들이 있습니다. 돈, 섹스, 권력. 세상사람들에게는 이 세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도이벨트라는 사람은 기독교인은 창조, 타락, 구원의 세가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폭넓게 설명하기를 존재론적인 원리, 도덕론적인 원리, 인식론적 원리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존재론은 신이 있나? 내가 누구인가?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존재론을 다룰때 가장 기본적인 설명방법은 세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신과 인간과 우주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모른다 (nothing nothing). 두번째 설명방법은 비인격적인 것(impersonal)에서 세상, 신, 인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진화론이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인격적인 것(personal)에서 인격적인 것이 나왔다. 성경적인 존재론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중에 인간을 만드셨을 때는 자신의 모습대로 만드셨으나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지 않았지만 그속에 하나님의 신성과 솜씨가 나타나도록 만드셨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다. 제한적이다. 제한적이지만 사는데 문제가 없다. 자연은 자연법칙도 있지만 초자연적인 법도 있는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셨다. 이것이 Open system을 믿는 것입니다. 매트릭스는 기본적으로 closed system이지만 closed system을 깨고 open system으로 갈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은 영화입니다. 근대과학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이성과 합리성을 닯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과학활동을 할수 있는 동기부여를 주었다고 하고 오펜하이머는 근대과학의 어머니는 기독교라 했습니다. 현대과학은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 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더 홈즈, 휘튼의 철학교수는 창조는 세가지 과학을 가능하게 했다. 첫째, 하나님이 만드신 재료, 공간, 시간은 실험과학이 가능하게 했다. 실험과학의 데이터를 가지고 합법칙성과 인간의 이성을 이용하여 두번째 이론과학의 근거를 만들었다. 세번째 이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응용과학의 근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도덕론적 원리. 인간이 창조되었지만 타락했다. 인간이 왜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하는가? 왜 죄를 짓는가? 를 묻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기에 대해 수백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관념론에서는 고통과 악과 죄는 환상과 관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원론에서는 세상은 처음부터 악과 선이 있었다. 처음부터 병과 고난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다라고 합니다. 사회주의자의 결정론에서는 환경이나 교육방식, 경제수준에 의해서 악이 정해진다라고 합니다. 동양사상을 보면 불교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 도교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악의 근원이다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이론은 도덕적 타락은 죄에서 왔다는 범죄론입니다. 범죄론은 세상의 고통과 죄는 실체고 비정상이고 쓰라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래 병과 죽음이 없이 지음을 받았는데 죄로 인해서 타락하고 비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덕과 싸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식론적 원리는 우리가 바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성의 능력을 믿던지 이성을 극단적으로 믿지 않고 체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비판적 실제론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것은 옳은 것도 있지만 틀린 것도 있다.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초인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식론적인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성경말씀입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사고하면 판단오류를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혜와 말씀의 도움을 받아야지 제대로 이해하고 공부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교의 인식론은 이성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꽤가 많아서 이기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순수감정에 의해서 결정하라고 합니다. 합리적 인식론은 서양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성에 의해서만 결정하고 판단하고 진리가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의 기반하에서 이성을 사용하고 직관들을 사용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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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강의는 2003 KOSTA/USA '기독교 세계관' 세미나에서 서강대 강영안 교수가 한 '피자와 짜장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저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강영안입니다.

오늘 제목이 ‘피자와 짜장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죠. 형편대로 피자가 있으면 피자 먹고 짜장면있으면 짜장면 먹으면 되겠죠.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피자나 짜장면을 따질 수 있는 것은 선택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부부사이에 한 사람은 짜장면 먹고 다른 사람은 피자 먹자고 할 때 어떻게 설득하겠습니까? 맛있으니까, 피자가 맛있으니까 혹은 짜장면이 맛있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맛있지만 나는 맛이 없다 이럴 수 있기 때문에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피자보다 짜장면이 맛있다고 할 때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음식 문제뿐만 아니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할 것인가, 혹은 주거 형태 – 아파트에서 살 거냐 주택에서 살거냐- 이런 문제까지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뿐아니고 결혼을 하면 어떻게 결혼할 거냐, 타인종과 결혼할 거냐, 결혼식을 하고 살거냐, 결혼식하지 않고 동거형태로 살 거냐, 유럽의 경우는 동거도 가능하고 동거자들도 결혼한 사람과 같은 법적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변호사를 통해서 재산 등록하죠, 헤어질 때 재산문제 생기지 않도록 하고 있고, 심지어는 동성애자들도 결혼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가서 네덜란드의 경우 입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 여자 결혼 한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피자와 짜장면이라고 하면 지금 뭘 먹을까의 문제, 음식의 취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황상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까지도 선택할 문제가 된 거에요. 나아가서 종교에 관련된 문제에도 여러가지 종교들 간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과거에 유럽에서 기독교는 주도하는 종교였습니다. 1052년 기독교가 분열된 적이 있죠. 동방교회와 분열되었고 서방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개신교가 생겼죠. 개신교 안에도 수없이 많은 종파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다원주의문제가 서양의 전통에서는 종교적 분열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었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서 종식되고 이때 각 지역에 각각의 종교를 인정한다는 원칙이 정해졌습니다. 이렇게 루터란도 인정되고 칼빈주의도 인정되었습니다. 하나의 카톨릭이 지배하던 보편교회, 코푸스 크리스찬이라는 보편교회가 없어졌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주도적 종교가 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지금 무엇을 먹을거냐하는 것은 취향 taste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김치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쇠고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죠. 야채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먹을 갖다대며 폭력을 이용하여 고기를 먹게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각자의 취향을 인정해야겠죠. 취향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아라라는 금언이 생겼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취향의 문제는 어떤 음식이라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어떤 옷을 입는다는 지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은 어떻게 살것이냐 하는 문제, 어떤 방식으로 살것이냐, 동거 상태로 살거냐 제도권 안에 들어가 결혼을 하고 살거냐 이런 것도 일종의 취향이 된 것입니다. 정치적인 취향도 공화당을 찍을거냐 민주당을 찍을거냐는 문제도 정치적 취향의 문제로, 요즘은 당보다 개인에 대한 선택, 종교도 하나의 취향의 문제로 인정되는 상황입니다. 왜 그런가에 대한 질문없이 취향의 문제다라는 풍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의 의도는 이런 다원주의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고민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야할까에 대한 강의는 아닌 것이죠.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과거와 달리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이런 것에 대한 기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실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문제가 된 사건 가운데, 김인규 교사라는 서천에 있는 중학교 미술교사가 자신의 아내와 찍은 누드 사진을 자기의 홈페이지에 걸어둔 것이 문제가 되었고 학부모들이 문제를 삼았는데 본인은 거부를 했고 사이버경찰수사대에 신고되어서 그 분을 구속하였습니다.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었고, 검찰이 기소하니까 교육청에서 직위해제를 하였습니다.
혹시 보신 분 계십니까? MBC에서 100분 토론에서 토론하자고 해서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대표로 나가면서 알아보게 되었는데요, 저는 사진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5년 전 사진인데, 제왕절개 수술한 표지까지 다 보이고 가슴도 다 드러나 보이고 전혀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고 성적 자극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교사는 예술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술가로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과 교육의 영역이 있는 것이고, 예술가로서 기대하는 방식이 있고 교육자로서 기대하는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의 충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검토하면서 한국 사회가 그 사이에 엄청나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이버 투표를 했거든요. 교사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투표가 더 많이 나왔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대화를 해보았을 때는 반대의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교사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 않겠다 이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미적 영역이고 옳고 그름은 윤리적 물음인데, 요즘 그런 구별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옳고 그름이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성경말씀으로 이사야서 5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을 흑암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으며 쓴 것을 단 것으로 삼은 자는 화가 있을진저’
이렇게 완전히 가치를 뒤집어 버린 사람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시켜보면, 그리스도인은 악은 악하다고 하고 선은 선하다고 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특별히 그리스도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을 보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라, 빌립보서 1장 27절을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리고 에베소서4장 2절을 보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라.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가치에 어울리도록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하다는 말이 악시옴인데, 여기서 axiom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Axiom 그리스도인의 가치에 어울리도록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이런 위치에서는 이럴 수 있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럴 수 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자는 될 수 없습니다. 가치 상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는 우리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라들도 있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간혹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할까, 이 문제가 바로 다원주의의 문제입니다. 다른 생각, 다른 방식, 다른 세계관이 공존하는 상황이 될 때, 다른 세계관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다원주의가 문제가 됩니다.

먼저 다원주의가 뭔가를 생각해보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생각해보죠. 다원주의를 영어로 무어라고 합니까? Pluralism이라고 합니다.
어떤 한 개념을 알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개념과 반대되는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Pluralism의 반대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형이상학적으로 Monism 또는Uniformism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plural이란 문법에서 복수를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복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조금 쉬운 말로는 many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onism은 희랍어로 Monus에서 나온 것인데 one이니까 형이상학적으로 단일주의, 유물주의에서는 오직 물질만 존재한다, 또는 Spiritualism 정신주의에서는 물질은 정신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정신만 존재한다 이렇게 주장하면 monism이 됩니다. 정치형태에서 정치형태는 하나만 존재한다고 할 때 monism 다양한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할 때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숫자를 생각해보면 무, 하나, 여럿, 또는 모두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정치제에서 Monarchy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고 몇 사람이 다스릴 때 aristocracy, 많은 사람이 다스릴 때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스리는 것을 democrac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수주의는 여러가지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다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많다는 것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양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종류가 많다는 것이죠. 음식이 많으면 좋겠죠. 색깔같은 것은 많을 수록 좋겠죠. 성도 남자만 있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있다는 것이 좋겠죠. 각각의 종류대로 여러가지를 지었다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세상에 많은 종류가 있는 것이 창조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신학자 중 God dislikes uniformity 하나님은 다양하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잘못된 결론으로 흑백이 일부러 하나로 되어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정당화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하나님이 지은 세계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세계이고, 다양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미국에서 놀란 점이 반샌 노블에 가보면 영어책만 있습니다. 저는 유럽에서 공부했으니까 서점에 가면 영어책, 불어책, 독어책, 화란어책 등 다양하게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용하고요.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렵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획일적인 것보다는 많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 이렇게 많아졌는가, 이것을 생각해보죠. 예를 들어보죠. 노량진에 100년 한 아가씨가 있었다고 생각해봅니다. 한 아가씨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아마 십중팔구 노량진에서 태어난 대로 부모 밑에서 살다가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고 그렇게 살았겠죠. 지금 노량진에 살고 있는 한 아가씨를 생각해보면, 그 아가씨가 선택할 여지가 아주 많습니다. 결혼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도 선택할 것이고, 결혼하면 어떤 사람과 할 것인가도 알 수없고, 공간적으로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무엇을 할 지도 모릅니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선택 가능성이, 옵션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아파트가 없었지만 지금은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것이죠. 수없이 많은 직업도 사라지고 생겨나고 있죠. 선택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15세기 한국에 살았던 사람이 선택할 종교는 무속 또는 불교나 유교가 될 거에요. 지금 와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불교신자가 될 수도 있고 기독교 신자도 될 수 있고, 한창 한국에서 전도 많이 하는 증산도 신자도 될 수 있고요. 선택의 가능성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촉진하고 기술적 발전으로 선택가능성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의 생각해봐야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본적인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16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몇 가지를 다원주의와 관련된 몇 가지를 이야기 해보죠. 성에 관한 문제, 정치적인 성향의 문제, 종교적인 문제, 즉 신앙의 차이와 관련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크게 세 가지를 알 수 있는데요, 첫번째로 ‘너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 바울 사도가 살던 시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비슷한 정도로 다원주의의 시대입니다. 우리시대만 다원주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테네는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던 곳입니다.
아테네 이야기 데살로니가에 가기 위해서 잠시 머문 곳이에요.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왜 아테네에서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의문이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무른 것으로 나옵니다.
도시를 둘러보고 거기에 우상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 가서는 유대인들과 아고라에 가서 아테네 사람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과 에피큐리안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에피큐리안들은 쾌락을 즐기되 작은 자연적 쾌락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친구들과 담소하고 소박하게 삶을 즐기며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은둔주의자였습니다. Hidden Garden에서 조용히 은둔하는 삶을 이상으로 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면서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다양한 사상과 접촉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다는 것은 말했습니다. 여러분 주로 삼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또 어떤 것의 주인입니까. 어디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입니까? 가장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삶의 주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삶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추상적인 질문이 되겠지만 삶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하는 것은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일터로 나가거나 학교로 가거나 공부하거나 말하거나 일하고 물건 사고 팔고 결혼한 사람은 부부생활하겠죠.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기뻐하고, 이런 삶의 주인이 그리스도이다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라는 것이 어떤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성의 주인, 우리의 노동의 주인, 우리의 삶의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는다, 먹고 마시는 것이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 욕심대로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바라시는대로 산다는 것이지요. 내가 생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한다라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내가 아내와 성생활을 하는데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성을 감사히 누리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즐기는 것도 옳지 않고 너무 금기시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입니다. 잠자는 것, 음식을 먹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는 것은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누리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첫번째로 삶의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감사하면서 그것을 누리는 것 그것이 Lordship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베드로서가 말하는 두번째의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어떤 태도로 하면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유라는 말은 원어로는 logos입니다. 영어로 logic의 어원입니다. 그 이유라는 뜻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도록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대답이라는 말이 apologetic, 변론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신자가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성에 대한 너의 태도가 왜 그런가 하고 물었을 때 그 것에 대해서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왜 기독교인이냐 라는 질문에 대답할 태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이번 주제인 다원주의와 관련된 것인데, 베드로서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영어 성경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면 한번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RSV에서는 With Gentleness and Respect이라고 번역하고 있죠. 그러니까 아주 젠틀하게, 온유하게 그리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강연을 할 때 대학교 1학년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카톨릭, 불교 신자에게 어떻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단의 종교를 믿는 사람을 어떻게 존경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서강대에 있으니까 개강 미사가 있거든요. 지금은 개신자 신자들은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만 초창기에는 미사에 참석을 했어요. 사실 저는 유럽에서 공부할 때 미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곧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미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같이 참여하는 것이 서로 이렇게 힘든 것 같습니다. 역사를 보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큰집과 같은 것인데요, 물론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교황무오설이니 무오수태설 이런 것은 사실 200년도 안 된 것입니다. 그렇더라고 사단의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도 불교가 사탄의 종교인가 이것 잘 모르겠어요.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견성성불이거든요. 내가 깨달아서 구원을 얻어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인간의 방법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방법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불교철학을 공부해보면 그 생각이 참 깊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파고들면 결국 파악이 되고 이해가 되요. 성경말씀은 그렇지 않거든요. 결국 불교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종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한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죠. 성경 말씀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때로는 논리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가 성육신인데,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고통을 당할 수 있냐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인데,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꺼리는 것이 된다고 했는데, 사람의 생각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헤겔이 그리스의 종교 사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이런 뜻인데요, 그만큼 신앙을 갖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 핵심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는 기본적은 논리적 구조로 되었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논리를 뛰어넘는 거에요.
그런데 불교 교인을 대할 때 힘으로 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입니다. 가서 주먹쥐고 대할 수 있는가, 아니거든요.
동국대에 있는 교정에 있는 불상을 훼손해서 소란이 난 일이 있었죠. 노량진에 장승을 베어버린 사건이 있었고, 단군상을 부셔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신소속 장로인데, 교단 소속 목사님, 관련된 목사님이 감옥에 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 논리적으로 따져서 그것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지적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것은 Gentle한 방식으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존경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온유와 존경으로 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져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 영어 성경 한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SV에 따르면 Pursuit peace with everyone 하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라는 것이고, 두번째가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품이나 삶이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로서는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종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같은 생각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요즘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얼마전에 6집을 냈는데, Sex is Game이라는 곡을 발표를 했습니다. 지난 2,3주 미디어에서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기윤실을 아예 지목을 했습니다. 결혼 전에 섹스를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있냐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상물 등급위원회에 18세 이하 판매 금지를 주장했는데, 기각 당했습니다. 이 조직은 업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업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매운동을 인터넷을 통해서 하고 있거든요.
불신자들에게 그렇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다만 문제는 대개 음반 소비자들이 중학생들이거든요,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고 즐길 수 있는 것이지만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주장하는 것은 왜곡된 성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에 가장 친밀성을 주는 것이거든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성적 관계보다 더 친밀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없거든요. 다만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는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사들에게 얘기하는데, 세상과의 관계에서 꼭 이기겠다고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권유했습니다. 젠틀하게 그리고 왜곡된 인격이지만 그 인격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진영을 한번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보자, 박진영을 위한 기도모임을 만들자, 그래서 좋은 음악, 좋은 글을 만들 수 있도록 하자,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른 생각,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의 확신은 분명하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확신을 갖되, 다른 믿음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행동할 때는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젠틀한 방법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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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배낭 한 개만 달랑 매고 심산유곡을 헤매거나 유명하다고 하는 사찰이나 공동체를 순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유(LIBERTAS)’와 ‘진리(VERITAS)’를 찾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길을 떠난 사람은 많으나 자유와 진리를 찾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대부분은 길을 잘못 접어들었거나 가던 길을 멈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오늘, 구도의 길에 오른 모든 순례자들을 위해 남겨놓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말씀이며, 저는 이 말씀의 함축적 의미를 세 가지만 풀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진리를 알기 전에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마음껏 추상적 세계를 날아다니지만 자기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있습니다. 유명하다는 종교인들은 과거의 짐은 훌훌 벗어 던졌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관습과 전통의 쇠사슬에 꽁꽁 얽매여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진리가 없어도 자유롭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치지만 진리없는 자유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아직 깨닫?못하고 있습니다. 탈 현대주의湄湧?“진리는 일종의 장난이야.”라고 냉소를 보내지만 게임이나 장난 같은 세상에서는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맛볼 수 없어 어둠 속에서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필수적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라는 의미에서는 매일 먹어야 하는 밥만큼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에프스키는 그의 [카라마조프 형제]에서 “우리를 마음대로 일 시켜도 좋소.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오.”라고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적, 정치적 부자유(不自由)는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모든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간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매몰되어 시류대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온갖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올가미와 같은 법의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법이 있는 한 불법과 형벌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또한 육체로부터의 자유도 없습니다. 아무도 육신의 정욕과 질병,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찾다가 종종 깊은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아 세상을 정처 없이 유랑해 보기도 하고, 자유를 찾아 결혼을 안 하거나 늦게 해 보기도 하며, 자유를 찾아 세상을 멀리하고 염세적으로 살아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아 “될 대로 되라.”며 세상의 법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보거나 제멋대로 신나게 초법적으로 살아봅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아 엄동설한에 거죽 떼기 하나만 걸치고 움막 속에서 몸을 학대하며 금욕적으로 살아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자유를 향한 다양한 몸부림들입니다.

오늘날 영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유가 수도사적인 고행에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쾌락을 단절하고 자기 몸을 학대해 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옛 영지주의자들처럼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Do not handle! Do not taste! Do not touch!).”는 모토를 외치며 사는 것과 같은 금욕주의입니다. 요즘 이런 자유를 향한 몸부림은 불교의 수행 방법이나 요가, 단학 등과 맞아 떨어져서 신비주의로 통하는 첩경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방법으로는 죄를 어느 정도 억누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죄를 이기지는 못하며, 오히려 자기숭배의 교만에 빠져 자학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골로새서 2:16-22) 잘못된 자유, 가짜 자유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참된 자유는 ‘진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자유의 출처는 진리이며, 자유의 독특한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자유는 수행이나 일탈이나 금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공짜로 그저 주어지는 선물이지 노력이나 수행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크테투스(Epictetus, 스토아철학자)가 “제우스가 나를 자유케 했다.”라고 한 말을 인용했거나 변형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치더라도 그가 말한 ‘진리’라는 것은 ‘관념적인 진리’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나친 상상이고 억설입니다.

여기의 “진리(αληθεια, veritas)”는 문자적으로는 ‘믿을만함’, ‘신뢰할 수 있음’, ‘진실’, ‘참됨’ 등을 의미하지만,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에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그리스인들이 그토록 찾고 찾던 “로고스(λογο??, 말씀)”로서의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신 은혜와 진리가 되신 분입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14:6) 2)그 분의 계시, 즉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7:17)

어느 것을 의미하던, 예수님 자신이 참 진리이시며 그 분의 계시 말씀이 진리입니다. 참 진리는 관념적인데 머물지 않습니다. 참 진리는 상대적이지도 않습니다. 참 진리는 인격적이며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참 자유를 얻는 길은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진리와 권력을 해체하거나 진리를 일종의 게임으로 치부하는 일탈 행위도 결코 아닙니다. 참 자유의 출처는 오직 성경 계시의 핵심이시고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그 자유는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일방적인 선물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진리는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참 진리요 자유요 생명입니다. 자유와 진리를 찾아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구도자들이 발을 멈추어 서야 하는 곳이 바로 예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진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의 “안다(Υνωσεσθε)”는 것은 경험적이고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로 사랑하는 처녀 총각이 아무리 서로를 잘 안다고 하더라도 결혼해서 성생활도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안다”는 것은 부부간에 서로를 전인격적으로 깊이 아는 그런 앎을 말합니다.

이런 앎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에 의한 궁극적 실체에 대한 관념적 발견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앎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경지 혹은 대각(大覺)이나 신유학에서 말하는 마음을 비우므로 깨닫는 것과도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앎은 느낌과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경험적으로만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앎은 합리적으로 진리의 내용과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인격적으로 믿고 감정적인 결단과 행동이 동반되는 앎을 의미합니다. 즉 진리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그 분과 그 분의 말씀을 전 인격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진리는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 진리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참 진리는 대부분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하는 중에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토론과 논쟁 중에 깨달아지기도 합니다. 혹은 직장이나 부엌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진리는 깨달아집니다.

그러나 한 번 진리가 깨달아질 때는 마치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꼬였던 모든 문제들이 술술 풀리는 전 인격적인 변화의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앎은, 부처님이 열반 한 후에 도를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으로 불렀던 [마하박가]에서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다.”고 외친 것과 다릅니다. 이런 앎은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부력’을 발견하고는 “휴레카((ευρηκα, 찾았다, 이거다)”라고 함성을 질렀던 것보다 더 감격적이고 가슴에 사무치는 변화입니다.

이런 앎은 옛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가에서 빛 가운데서 들려오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인생을 바꾼 바울과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만남이며, 빌립보 성의 루디아가 전도자 바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열려”, 즉 세계관이 바뀌어 인생의 참 주인을 만난 참된 앎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안팎에서 진리를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을 더 중시하는 실존주의적이고 탈현대적인 경향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그 위험이 우려할 만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내가 느끼는 것이 곧 진리이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물론 신앙은 지성이면서도 동시에 체험적이기 때문에 실존적인 느낌을 도외시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독교는 지성적이며 동시에 체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느 날 우연히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에 대한 신앙이 진리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인지 찾고 두드리다가 그것이 진리의 기준에 맞고 사실이라고 판단되면 인격적으로 믿고 맡겨야 합니다. 믿되 단지 지식적으로나 감정적으로만 신뢰할 것이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고통을 다 아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므로 당신이 전 인격적으로 반응하시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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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예수님을 잘 믿던 학생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를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적 기사들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 속에 꾸준히 제기되었던 종교와 과학, 신비와 지성, 그리고 계시와 철학이라는 두 개념 사이의 갈등과 의심입니다. 이것을 보통 ‘신앙과 이성의 문제’ 혹은 ‘믿음과 지성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기독 지성인들과 구도자들에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기독교에 지성을 무시하자니 신앙이 맹신으로 전락할 것 같고, 신비를 무시하자니 사색이 신앙으로 둔갑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의 관계와 긴장은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테마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지성이 왜 신앙에 중요한지 그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지성은 성도의 성화에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로마서 12:2)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은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혁해야, 즉 기존의 세계관을 뒤집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야 가능합니다. 기존의 신념과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념과 의식의 변화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의지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단회적인 혁명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를 촉구 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4:23-24)

그리고 ‘성도(聖徒)’가 된다거나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에 지성의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골로새서 3:10) ‘회개 한다’는 것은 단지 죄를 몇 마디 뉘우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한바 실재의 본질, 인간의 본질과 그의 반역 그리고 역사 속의 하나님의 목적 등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머레이(J. Murrey)가 이점에 대해 잘 지적했습니다. “성화(그리스도인의 삶)는 인간 의식의 중심, 즉 사고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혁명적인 변화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의식과 사고가 바뀌지 않고는 성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종종 예수를 오래 믿어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데, 혹시 사고와 신념 그리고 의식의 변화는 하나도 없는 거짓 성화를 좇고 있는 것 때문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 신앙과 지성이 통합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신앙과 지성이 따로 놀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앞의 학생과 같은 지적 의심에 노출된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생각하고,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 되게 하라”(에베소서 4:13)고 부탁했는데, 여기의 ‘하나 되게(unifying)’란 말은 1)부부가 한 몸이 되듯이 2)그리스도와 성도가 하나로 연합하듯이 우리의 신앙과 지성도 주님의 말씀 위에서 통합하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된 사람을 두고, 비록 그 사람이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장성한 사람” 즉 성숙한 신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 믿은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따로 노는 사람을 “어린아이 같은 사람”, 즉 미성숙 신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요동하고 흔들거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지성이 하나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성은 의심의 파도를 이기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의심의 파도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의 신비성(神秘性)이 합리성(合理性)과 대립된다거나, 기독교의 초월성이 과학적 사고와 충돌한다고 생각하거나, 신앙에는 완벽한 합리적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내적인 영적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꼬인 문제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기 전에는 파도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 의심의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을 돕는 지도자들은 제일 먼저 합리성의 반대 개념은 비합리성이지 신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기독교의 신비성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성에 반대되거나 거스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합리성과 신비성이 공존하는 진리인데 그것은 기독교 복음 자체가 지성적이며 동시에 체험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7; 사도행전 26:15)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지 표적이나 능력 때문도 아니요 지혜나 지식 때문도 아니라 표적과 지혜, 능력과 지식 그 둘이 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린도전서 1:22-25, 표준새번역)

물론 여기에는 신앙과 지성 사이의 선행(先行) 문제, 즉 어느 것이 앞서느냐 하는 것은 토론의 여지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믿음이 지식에 선행한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요한복음 6:69),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이 믿음에 선행한다.”고 말할 것입니다.(요한복음 16:30; 18:8) 프란시스 쉐퍼는 “구원론적으로 볼 때 지식이 신앙에 선행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비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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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저는 개신교를 믿다가 천주교로 개종한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그 여학생은 다른 청년들도 들어보라는 말투로 “나는 개신교 예배가 너무 시끄럽고 경박스러워서 영적 무게가 느껴지는 천주교 예배에 참석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여학생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없었고, 개신교에 계속 남아 있으라고 설득할 면목도 없었지만 개신교를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만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개신교 영성이 너무 천박해졌기 때문에 떠난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양양의 모 귀부인이 주선해서 만난 한 도사님은 알고 보니 과거에 장로교 안수 집사였습니다. 그 분은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교회를 떠난 이유를 말하기를, “교회에서는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 진리를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찾은 진리는 삼라만상의 근본 진리인데 일정 기간의 훈련 코스를 밟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체험적 진리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떠난 이유는 기독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배우긴 했지만 영적 체험이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버드에서 화계사로]란 책을 쓴 현각 스님(폴 뮌젠)은 “자신의 오래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주교를 믿는 가정과 학교에서 영성에 눈을 뜨고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까지 진리를 찾았던 정직한 구도자였는데, ‘인간의 고통과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교회에서 그에게 들려 준 대답은 고작“병도 악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는 신정론(神正論)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영성과 진리를 찾는 구도자였다는 것은 존경할 만 합니다. 또한 그는 미국에 흔해빠진 마약이나 섹스에도 빠지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고 특히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과 악의 문제를 안고 오랫동안 씨름한 보기 드문 지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행한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은 매우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는 하버드 교수님들로부터는 들을 수 없는 대답을 숭산 스님에게 배웠습니다.

-  뮌젠:“내가 누구입니까?”
-  숭산:“아직 모르는 게 좋습니다. 자꾸 머리로 따지지 마세요.”
-  뮌젠:“인생이 무엇입니까?”
-  숭산:“차나 한 잔 마시세요.”

비록 이런 어처구니없는 화두로 그가 지적 자살을 감행했다고 하지만 사실 현각은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과 진리에 대해 정직한 질문을 가진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화석화된 기독교가 주는 대답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이 시대의 깨어있는 종교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던 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대답에 불시착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첫째, 숭산 스님이 준‘무심(無心)’, 즉 ‘모르는 마음(don't know mind)’은 그의 심오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버리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무심’은 참 편리한 도구입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신과 진리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꼭 찾아야 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아집과 집착’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태워버리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주기 보다는 질문 자체를 포기하게 함으로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논리적 비약인데도 불가에서는 이것을 석가가 깨달은 “무아(無我, 자기를 버리다, anatman)의 각성”이라고 하거나, “열반(涅槃, 번뇌를 꺼버리다, nirvana)”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현각의 정직한 질문은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며 미궁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현각 스님이 깨달은 대각(大覺)이라고 하는 것의 내용을 알고 보면 “신과 진리가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말했듯이, “어릴 때부터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신과 진리라는 정직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내재 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예일과 하버드에서 그가 오랫동안 추구하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식 방법론에 일대 혁명을 가져 온 것입니다. 두 가지 혁명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그는 신과 진리는 “자기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나 이제 신과 진리는 “자기 속에 주관적으로 존재한다.”믿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지금까지 그는 신과 진리를 아는 방법도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이 최선이었으나 이제는 심미적이고 실존적인 방법보다 실체에 접근하는 가장 용이한 방법이라는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예상치 않는 개종이 일어날까요?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요즘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보다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여기에서 논외로 하고,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주된 이유만 몇 가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요즘 많은 지식인들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서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인’의 표시 중에 하나가 “종교는 다 같은 거야.” 혹은“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 사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대 지성인 사회에 불문율이 하나 있다면 “종교 간에 우열을 논하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여학생도, 현각도, 도사도 대부분의 현대 지성인들이 걸어가는 다원주의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는 부처님을 믿지만 예수님도 존경한다.”는 식입니다.

둘째, 사실과 내용보다는 체험과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철학과 신학의 인식론적 결론은 비합리주의 혹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앙의 비약”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을 따져보면 동양적인 인식론인 “직관”이나 “무심”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요즘 동서양의 인식론이 상대주의적이고 의미론적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현각의 경우에도 종교 간의 교리적 내용보다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실존적 체험을 중시하는 하버드의 신학을 따른 것이며, 그렇다면 불교나 동양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도 신앙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갈등이 그리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틀릴 수 있는데, 단지 그의 마음을 책으로만 읽었기 때문이고 또한 개종의 변이나 장황설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짐작할 따름입니다.

셋째, 기독교가 매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나 기독교의 매력을 크게 세 가지만 말한다면 하나님과 갖는 신앙적인 실체와 지성적인 교리 체계 그리고 공동체의 아름다운 교제 등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이런 독특한 본질적인 매력들이 급속도로 상실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이 부각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 모범이 되기보다 욕이나 얻어먹고 있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매력 상실이라는 것이 여학생에게는 개신교의 영성에 실망했다는 것이고, 현각은 대답에 실망했다는 것이고, 도사님은 체험이 없는 깡마른 교리 공부에 진력이 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실체와 매력을 둘 다 상실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 이것이 제일 큰 문제인데, 정직한 구도자라고 하더라도 분명한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 즉 ‘크라이테리아(criteria)’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도를 위해 신발과 배낭이 다 헤어지도록 오늘은 세상 이쪽을 뒤지고 내일은 세상 저쪽을 헤매면서도 구도의 기준, 즉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기준이 없으면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게 됩니다. 보통 비행기는 정해진 활주로에 안전 착륙을 하지만 폭풍우를 만나면 아무데나 비상착륙(非常着陸)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준도 없이 구도의 길에 나섰다가 다행히 진리를 만나 안전 착륙을 하게 되면 생명을 얻지만, 급하면 비진리에 비상착륙 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불시착도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진리의 기준을 제시하기를, “어떠한 이론이 진리가 되려면 그 이론의 내적인 정합성이 있어야 하고(Coherency), 그 이론이 인간의 내, 외적인 경험과 부합해야 하며(Relevancy), 인간이 그 이론을 가지고 실제로 살 수 있어야 한다(Practicality).”고 했습니다.

그 여학생이나 뮌젠이나 도사님이 불시착하게 된 것은 이런 간단한 수준의 진리의 기준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기준이 없으면 ‘자기’가 기준이 되든지, ‘재미’가 기준이 되든지, 아니면 ‘여론’이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상의 여러 가지 이유로 비 진리에 불시착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라면 여러분은 어떤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요즘 청년들의 기준은 첫째도 재미, 둘째도 재미, 셋째도 재미라고 합니다. “재미있으면 최고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정직한 구도자라면 누구나 ‘어떤 세계관과 종교가 참 진리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기준에 의해 새로운 진리를 판별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교회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도 별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데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교회가 비게 됩니다. 더구나 교회를 떠나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기독교의 수치입니다. 대체로 교회를 떠나기 전에 사람에 따라 몇 달 혹은 몇 년씩 고민을 합니다. 그 기간에 붙잡지 못하면 놓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까? 더 늦기 전에 진리를 만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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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릭 2011/12/22 00:09  Addr Edit/Del Reply

    가슴에 와닿는 글..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라브리에 찾아온 한 학생은 종교다원주의에 심하게 노출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법당에도 들랑거리고 도교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마치 ‘자동차 보험’처럼 ‘영혼보험’을 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될 수 있으면 여러 개의 종교를 믿어두는 것이 내세에 대한 확실한 투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현대인들이 너도 나도 다원주의의 독주에 취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교다원주의’의 술통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 오후에는 법당에도 기웃거리고 조상 제사에도 참여합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향교에서 제를 올리던 사람들이 오후에는 성찬식에도 참석하고, 아침에는 요가 수련을 정진하던 사람들이 오후에는 교회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갑니다. “종교는 다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나 석학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앞 다투어 종교 간의 대화를 한다며,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약 2년 전쯤에,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로 알려진 달라이라마와 특별 면담을 가진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철학자이며 한의사이기도 하고, 현재는 교수로 일하고 있는 석학 도올 김용옥 박사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만나서 의기투합한 것은 “기독교가 종교 간의 대화에 가장 비협조적인 종교다.”고 한 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기독교와 대화하기 힘든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문제는 신(神)에 대한 해석입니다. 불교처럼 신(神)을 추상적인 진리체계로 말하면 대화가 쉬워지는데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주장하기 때문에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건너가 버립니다.” 김용옥은 기독교의 역사성이 불편하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으며, 하물며 불교에서도 구원을 기대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인류의 모든 고전을 탐색하고, 모든 종교의 성전을 이해하려는 뜻은, 바로 경전의 진정한 이해를 통하여 인간이 경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신념에 있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종교 간의 대화를 하려면 신의 인격성이나 역사성을 논하기보다는 진리체계나 영성훈련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까지 나누었습니다. “불교는 창조주도 구세주도 초월자도 없습니다. 무신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신이 없어도 인간에게 무한한 영성을 줍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단지 영성의 개발이나 제고를 위하여 불교를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불도(佛徒)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고도 기독교의 영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는 겉으로는 “자기 종교의 고유한 신앙을 지키면서도 서로 배울 수 있다.”고 말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어디에도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가 있다고 말하면 배타적이라고 몰아붙입니다.

둘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종교마다 구원에 이르는 각기 다른 길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구원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기독교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셋째, 종교는 단지 과학이거나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과학’, 즉 심리학이며, 기독교는 ‘서양 철학의 산물’ 즉 그리스 신화와 같은 것이며 예수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부 지식인들 중에 종교의 배타성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뜻에서 주장하는 단원적 다원주의(monistic pluralism)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는 달라도 결국 신은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산에 오르는 길은 달라도 정상은 하나뿐이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다원주의자는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는 개인성, 다원성을 자랑으로 여기는 현대인들이 주장하는 다원적 다원주의(pluralistic pluralism)가 번창하고 있는데, 종교마다 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산에 오르는 길도 여러 가지이고 정상도 여러 가지이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앞의 두 입장과는 다르게 길도 하나이고 정상도 하나뿐이라고 하는 절대주의, 즉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믿습니까?

그러면 절대주의를 믿으면서도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든 사랑으로 양보하고 넓은 마음으로 대화하고 관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안별로 정책 연합도 하고 사회 활동도 같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를 양보하거나 타협하면서까지 타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거나 연합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바울사도가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진리를 지키되 사랑으로 지켜나가는 지혜, 즉 바른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은 다원주의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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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다 2008/03/11 23:48  Addr Edit/Del Reply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합니까?

  2. 2008/06/02 00:31  Addr Edit/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세계관 단상

때로는,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싶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말은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이런 말을 듣는 목사님이나 신학생들은 아마도 크게 분개할 것이다. 목사가 된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단순한 일이냐며,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며 나를 크게 꾸짖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고,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일은 부르심(Calling)이 없이는 절대로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다른 모든 일도 그렇지만.)

미국에 유학오기 전 약 1년 반 동안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 생각할 때, 대학교 3학년 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약 3년 여의 '훈련'기간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학교생활과(대학원에서의 실험실생활은 반쯤 직장생활이었다) 교회생활에서 체득한 경험이 내 자신에게 있어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분명히 훌륭한 직장인이 되어 직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에 차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직업, 직장생활에 관한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책도 읽고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면서 멋진 직장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부딪혀야했던 직장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해서 직장에서 좋은 결과를 내고 주위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직장 내 신우회에(직장 내에서의 그리스도인 교제모임을 보통 한국에서는 신우회라고 부른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생각했던 내 계획과 생각들은 여지없이 무너져갔다.

1. 직장상사와의 갈등

내 직속상사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술, 담배를 몹시 즐기는 것은 복음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용납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가치관은 가장 세속적인 출세주의였다. 그리고 그의 삶에서 복음의 능력과 빛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같이 식사를 할 경우 내가 식사기도를 하면 자신도 그렇게 식사기도를 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하여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 완전한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유일한 차이인 것처럼 보였다. '출세'라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엄청난 추진력으로 일을 하다보니 직장 내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유능한 연구자로서 인정을 받는 터였다. 그는 내게 그러한 자신의 '개똥철학'을 매일같이 강요하는 것 같았다. 나는 도저히 그 상사를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당시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내가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내며 공부할 기회를 많이 갖고 싶었는데, 내게 엄청나게 던져지는 일을 감당하면서 마치 내가 그 사람의 성공을 위하여 이용 당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내가 속한 연구부의 부장은 매우 권위적인 '비그리스도인'이었다. 내게 주일에도 일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였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밝히자 나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계속해서 회식이 있을 때마다 내게 술을 권하였다. 내가 정중하게 거부하자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는지 거의 강압적으로 술을 권하였다. 나는 직장상사의 권위에 앞선 하나님의 권위를 우선으로 두려고 노력하였다. (술 마시면 천국 못 간다는 식의 율법주의로 이 글을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결국 그 대가로 나는 매우 어렵고 힘든 직장생활을 감내해야만했다. 이러한 갈등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한 좌절이 나를 힘들게 했고,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영적침체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2. 시간의 문제

나는 한달 평균 300시간 이상 일할 것을 요구받았다. 평일에는 평균 12시간 이상 직장에 있어야 했고, 조금 바쁜 일이라도 있으면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연구실과 연구실 사이를 다닐 때에는 걷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항상 뛰어야 할 만큼 바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겨우 연구실에 가고, '죽어라' 뛰어 다니며 일을 하고, 저녁엔 녹초가 되어서 들어오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개인여가를 즐기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성경공부 인도하는 일, 다른 지체들을 돌보고(care) 훈련하는 일 등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QT와 기도 등 개인 경건생활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개인적으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GRE, TOEFL 등을 준비해야 했으므로 그러한 압박은 더욱 심했다. 하루에 4시간 여 밖에 잠 잘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직장에서의 일도 효율적이지 못 했고, 유학관련 시험준비도, 개인생활도 모두 다 엉망이 되었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Ordering your private world)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그러한 상황에서 "강요 당하는 자"(driven person)가 아닌 "부르심 받은 자"(called person)로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고, 역시 이로부터도 나는 심한 영적침체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3. 동역자의 문제, 교제(fellowship)의 문제

학교에 있으면서 학원(campus)에서 성경공부를 조직해서 인도한 경험이 있던 터라 직장에 가서도 그러한 일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었다. 마음에 맞는 사람을 두세 사람만 모을 수 있다면 QT를 나누는(sharing) 모임 같은 작은 모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나만 그렇게 바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게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터였고, 거기서 더 헌신하여 어떤 형태의 모임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당시 독신이었던 나도 그토록 버거웠는데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그나마 약간의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은 경우 수 년간의 직장 생활을 통해 그러한 소망과 열정을 다 잃어버린 상태였다. 자연히 나도 내가 막 시작한 직장생활에서의 어려움을 그리스도인 선배들과 효과적으로 나눌 통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해야 했다. 교제는 여전히 학교에 남아있던 친구들하고나 가능했지만 그나마 적당한 시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가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신우회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생활에서는 무능하거나 무기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고민과 비전과 생각과 삶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고 사역할 동역자를 만나지 못한 채 결국 미국으로 오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4. 부정한 체제(system)의 문제

가장 신참이었던 내게 가끔 주어지는 일은 '허위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학교에 있을 때부터 자주 했던 '가짜 영수증 만들기'는 이제 이력이 나 있었다.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했다며 그 전문가의 체제비, 강의비, 식비 등을 신청해서는 같은 팀의 사람들끼리 회식을 하는 일이 두어 달에 한 번 꼴로 있었다. 같은 자료(data)로 여러 학술잡지에 짜임새(plot)만 약간 바꾸어서 논문을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팀의 업적을 과대포장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과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신 에베소서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며 나는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한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되는 당위를 어떻게 설명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제일 신참이고 나이도 어린 내가... 내가 자주 선택한 길은 도망하여 숨는 것이었다. 화장실이고, 자료실이고 실험실이고... 이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숨어서 그저 내가 그 일을 맡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비겁한 일인가! 게다가 그렇게 얻어진 회식비로 나도 함께 가서 12만원 짜리 광어회를 맛있게 먹고는 하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큰 체제(system)와 싸워서 공의와 정의를 지키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아 보였다. '타협', '회피', '대립' 등 바람직하지 못한 반응 등을 보이던 나는 조금도 그들을 '변혁'시키지 못한 채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챙겨들고 연구소를 나왔다.

나의 이러한 경험들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지만, 내가 가졌던 교만한 '비전'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인정사정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역시 많은 부분 문제는 직장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던 나의 태만과 직장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의 무지에 있다. 그러나 한가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그리스도인이 한국의 반도체 관련 직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누군가는 가서 함께 살며 복음을 전하고, 한국의 반도체 업계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도록 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나는 다시 한국에 가서 직장생활을 할 것이 두렵다. 몸서리가 쳐진다. 사자굴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이런 식의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는 목사님들이 부러워진다. 그 좋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묵상하는 일이 '주업'이 아닌가! (아마도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의 어려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리라) 게다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왠지 더 거룩한 싸움을 싸우는 용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원론적인!) 생각에 나도 그런 소명(calling)을 받고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평신도로 부르신 것에 감사한다. 목사님이나 선교사들이 가지는 '영광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전 영역에서 (직장생활을 포함한 불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선포하게 하는 거룩한 평신도에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고 많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있지만 '훌륭한 평신도'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에서, 하나님에게 '더운 여름날의 시원한 냉수 한 사발'같은 사람이 될 기대 때문이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이 '병신도'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 평신도였던 집사 스데반, 빌립과 같은 기준을 되찾는 평신도 사역에의 부르심이 나를 몹시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때로는,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는 멋진 평신도가 되고 싶다. 그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기쁨과 감격이 몸서리치게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목사님, 선교사님, 혹은 그 지망/헌신자들의 기운을 빼는 글이 아니길 바랍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고 저는 그 모든 분들을 참으로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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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슬란 2011/08/07 05:50  Addr Edit/Del Reply

    저는 대학졸업후 바로 선교지에 나와서 잘은 모르지만,
    글을 읽어보니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인지 느껴지네요-
    힘내시고 정말 멋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시길 응원합니다!!

2001/11/01 02:00 기독교적 세계관

세계관과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3)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이번 호에서는 이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어떻게 역학적으로 기능을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용어들과 개념들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는 데에 필요한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본적인 용어들을 독자들이 잘 익혀 두었으면 한다.

세계관은 문화의 심층 구조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무의식적인 정신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철학적이나 역사학적 세계관과 달리,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세계관은 어느 사회든지 나름대로 공유하고 있는 "집단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러한 지식들은 구태여 증명할 필요 없이 당연히 믿고 있는 지식들이며, 모든 종류의 사회적 삶은 이러한 지식이 전제된 상태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곧,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 있는 세 가지 주요 내용들, 즉 믿음/전제(前提)들(beliefs/assumptions), 가치들(values), 그리고 충성/헌신(allegiance /commitment) 등이 세계관의 내용이 된다. 이 구분은 Fuller 대학의 Kraft 교수의 것인데 이러한 세 가지의 구분은 인간 "지, 정, 의"의 인격 부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제들이 주로 문화적인 지식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가치들의 부분은 사람의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충성 내지 헌신은 인간의 의지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세계관의 요소들은 따로 독립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인간의 한 인격 속에서 서로 섞여서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해 보자.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배운 대로, 즉 "문화화"된 대로 믿는데, 이러한 믿음들을 우리는 "전제(assumption)"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전제들을 기초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에는 이성적인 앎과 감성적인 느낌이 함께 포함된다.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이 얻게 되는 지식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떤 것이 바람직하고 어떤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를 배우게 되는데, 이때 바람직한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지 않은 감정들을 갖게 되는 것까지도 배움, 즉 문화화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들 혹은 사건들에 대한 이해는 그 인식의 대상에 대한 감정을 동시에 수반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 기준에 근거하여 그 나름대로 선과 악을 분류하고 대부분 선이라고 믿는 바들을 추구한다. 이렇게 자신들이 믿는 중요한 가치들 혹은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동원하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인간의 사고 역시 세계관 전제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Kraft 교수는 "충성" 혹은 "헌신"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충성의 대상이 무엇인지 역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배우게 되며, 그 대상들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인간의 내면 속에서 함께 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분리하여 생각해 온 경향이 크다. 특별히 지성과 감성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졌는데, 이러한 경향은 지난 약 이 백년 동안 서구 사회에 편만하였던 서구의 세계관의 영향에 기인한다. 1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한창 꽃을 피우고 20세기의 서구 정신의 기초가 되었던 실증주의 내지 과학 지상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우상화시켜 버렸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시키는 듯한 경향을 보였는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감성과 직관의 부분들을 소홀히 하고 인간의 이성을 현실 검증의 유일한 도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 결과 서구, 특별히 유럽의 여러 교회 전통들은 성경을 인간의 이성이라는 권위 아래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19-20세기 서구인들의 생각을 지배하였던 "이성주의"의 세계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은근히 감정을 무시하거나 감성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정의 영역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지식의 동반자라고 나는 주장한다. 이성으로 판단한 지식 곁에는 그 지식에 대한 느낌이, 자신이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함께 있는 것을 우리는 눈치채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갑돌이라는 사람이 어떤 개를 바라보면서 이 짐승이 개라는 사실만을 알거나 그 개에 대한 실존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갑돌이는 개를 바라보면서 어떤 애정을 갖게 되는데, 그 특정한 개를 기억함과 동시에 그 개에 대한 감정도 갖게 되고, 그 개에 대한 객체 인식과 함께 감정도 기억하게 된다. 반면, 무슬림들이나 아프리카의 유목인들에게 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어 보라. 그들에게 개란 동물은 그리 애정을 줄 만한 존재가 아니다. 개는 매우 천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다른 사람들을 욕할 때에 그들은 개를 들먹인다. 이것은 개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다른 것을 보여 준다. 똑같은 대상이지만 갑돌이라는 사람의 문화권과 무슬림들의 문화권의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다름으로 해서 그 사물에 대한 감정도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의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에 그 사회 구성원들이 주변 환경(자연 환경, 사회적 환경, 영적 환경)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갖는가하는 것을 조사하는 것 역시 그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감정은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후세에게 전수된다. 즉, 어떻게 감정을 가져야 하는가 까지도 배우게 되며, 이것은 습관이 되어 자신의 감정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각 문화권의 유머를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미국에서 오래 살고 영어를 잘 하는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백인들과 같이 어려서부터 성장하지 (즉 문화화되지) 않았다면, 미국 백인들이 박장대소하는 그들의 유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알기는 알지만, 느낌은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한 공동체가 - 이 공동체는 거의 항상 혈연 공동체가 기본인데 - 공유하는 지식들과 느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좋다고 믿어지는 것들,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헌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였을 때에 사람들은 기뻐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지식들과 가치들, 그리고 헌신의 대상들을 늘 전제하며 살아 가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전제들의 내용에 도전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거나 화를 내게 된다. 만일 외부인이 들어와서 그 동안 전통적으로 믿어온 전제들과 가치들과 충성의 대상들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 외부인은 그 지역에서 추방 당하거나 형벌을 받을 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의 세계관을 무시하거나 도전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타문화권에 들어갔을 때에 외부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문화권의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문화관 중심으로 행하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좀더 다른 차원이므로 "세계관의 변화"를 다룰 때에 자세히 언급하려 한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 서구 세계와의 충돌은 전혀 다른 세계관들의 충돌이며 이것은 굉장히 복잡한 인간 관계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대방의 세계관을 이해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서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선한 입장을 주입시키려는 행위는 평화를 가져오기가 매우 어렵다. 오늘날 일어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테러리스트들(사실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의 싸움은 그 동안 누적된 세계관의 충돌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 호에서 좀더 다루어 보고자 한다. 다음 호에서는 이슬람의 세계관과 서구의 세계관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이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입장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 지에 대하여, 이번 호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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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01 03:00 기독교적 세계관

세계관과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2)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지난 호에서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실한 인간 이해에 기초한다고 하였다. 이 인간 이해라 함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이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개인 혹은 집단을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그들의 의식세계 저변에서 작용하고 있는 세계관의 구조와 내용들을 알 필요가 있다.

어느 공동체 혹은 집단이든지 문화는 표층구조와 심층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적 사고와 행동들과 부산물들을 문화의 표층구조라고 한다면, 이러한 문화적 현상의 저변에서 사람들의 습관적인 사고와 행동들을 창출해 주고 지배하는 잠재의식적인 믿음들(assumptions or beliefs)과 가치들(values)과 충성들(allegiances), 그리고 이에 부수되는 감정들(emotions)의 구조를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계관은 문화의 심층구조를 가리킨다. 이 세계관은 어느 한 사회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의 어린 시절에 형성되게 마련인데, 어린 시절에 내면의 사고의 구조와 외적인 행동의 양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가리켜서 "문화화(文化化, enculturation)"라고 한다.

3.1. 문화화(enculturation)의 내용

Piaget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perception)은 어린 시절에 그 기본적인 구조가 형성된다고 한다. 인간의 세계 인식이 곧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선천적인 지식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사고의 구조와 세계 인식의 카테고리(범주)는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그 외의 모든 세계에 대한 이해와 그 내용들은 후천적으로 습득되고 발전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인식하는 첫 번째 것은 "타자(Other)"를 통한 "자기(Self)" 인식이다. 일반적으로 아기는 태어나서 젖을 주는 어머니를 가장 편안하게 인식하면서 자기에 대한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자기를 인식하면서 아기는 "관계(Relationship)"라고 하는 개념을 자연적으로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다. 그리고 아기는 크면서 사회적 환경(사람들)과 자연적 환경, 그리고 나아가서 우주적 (혹은 영적) 관계들을 맺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어린아이가 홀로 맺어갈 수는 없다. 어린아이는 이제 지각이 자라면서 자기가 속한 사회의 선배(어른)들로부터 어떻게 이러한 주변 환경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가를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사회적 환경과 자연적 환경과 우주적 환경들의 구성 요소들을 "분류(Categorization/ Classification)"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관계를 적절하게 맺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분류인 것이다. 어느 사회 혹은 집단이 환경들을 어떻게 분류하는가를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그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과 논리들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하여 어린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약 12-14세 정도까지 이러한 세계인식의 기초를 기존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배우게 된다. 어떻게 사고하는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무엇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하여야 생존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배움으로써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세계관을 자기 것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관이 형성되는 이 기간 혹은 과정을 문화화(enculturation)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세계관의 내용들을 사람들은 대부분 의심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자신의 문화적 사고의 틀(frame of reference, or cultural lens)을 형성하게 된다.

앞에서 약 12-14세라고 하였는데, 이 나이는 흔히 말하여서 사춘기에 접어드는 연령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여서 어른이 되기 위한 신체적인 변화를 경험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어린아이의 의존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도기 기간(puberty)의 시작을 대충 13세 정도로 본다.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이 아직도 중요하게 여기는 통과의식(passage rites)들 가운데 하나인 "성인식"으로 불리는 initiation ceremony들도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바로 이 나이 때에 행하여진다. 다시 말하여서 enculturation의 졸업식 쯤 된다고나 할까. 신체적으로 성인이 되어감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그 사회의 정상적인 정식 구성원으로서 모든 문화적인 지식을 갖추고 성인들 틈에서 준성인(semi-adult)으로서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갓난아기에서부터 바로 이 성인식에 이르는 나이까지가 문화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며, 이 때에 사람들의 세계관의 골격과 내용들의 거의 대부분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화화 과정의 다름이 곧 세계관의 다름과 연결된다. 흔히들 말하는 성장과정이 달라서 갈등이 있다고 하는 말들은 세계관이 다르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3.2. 아프리카 세계관과 미국의 세계관의 비교

예를 들어보자.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세계관과 미국의 대도시에서 성장한 미국 백인들의 세계관을 비교하여 보자.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세계와 우주는 조물주가 창조하였고 세계 혹은 우주는 하나이며 사람들은 그 가운데 하나의 구성원이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자연" 혹은 "초자연"이라는 단어의 분류는 무의미하다. 그들의 우주관은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한 일원론이다. 물론 존재물들에 대한 여러 분류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이 분류는 대립적인 분류이기보다는 조화로운 분류이다. 아프리카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의 조화 및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며, 자연의 순리를 거스리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특별히 자연에는 온갖 영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로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문화권에 노출되어 자기가 믿는 바들이 도전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믿을 것이라고 은연 중에 믿고 있다.

자, 이제 미국의 대도시의 백인들을 보자. 이들은 유신론자들이건 무신론자들이건 간에 세속적인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세계와 우주는 자신이 개척하고 정복하는 만큼 차지할 수 있는, 열려 있는 개척지라고 배운다. 따라서 이들은 성취는 좋은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웠고 이를 위하여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우주는 조화로운 것이기보다는 기계적이라고 믿는다. 우주에는 어떤 과학적인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이 법칙을 알아내면 우주와 세계를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마음껏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주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고 믿는다. 영들과 같은 존재는 과학과 이성에 위배되는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연과 우주는 인간의 이성의 지배 대상이 된다.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신 성경의 문화위임명령을 특별히 강조한다. 미국 백인들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부모를 비롯한 미국 사회의 교육제도를 통하여 배워왔기 때문에, 자신들과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들의 생각에 도전을 받기 전까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또 아프리카 사람들의 전통적인 가치관은 집단주의이다. 함께 움직이고 함께 생각하는 것이 조화이며 선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자연과의 조화라고 하는 세계관과 의미적으로 연결이 되며, 따라서 조화를 중요시하는 이러한 관점은 대가족제도를 핵가족제도보다 우위에 둔다. 이에 반하여, 미국의 백인들은 개인의 차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은 다른 모든 가치들 위에 개인을 두게 되었고 이것은 개인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 믿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서 개인주의는 전체의 조화를 깨는 악으로 간주된다. 더 많은 예를 들 수 있겠지만 나중에 더 다루기로 하고 이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만나게 될 때에 일어나는 현상을 잠시 보기로 하자.

3.3. 문화충격과 자민족 중심주의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관의 배경에서 성장해온 아프리카의 흑인과 미국의 백인이 만났을 때 서로 불편해지는 현상을 가리켜서 문화충격(culture shock or culture stress)이라고 한다. 선교사들이나 해외 유학생 혹은 이민자들이 전혀 다른 문화권으로 이사해 갔을 때에 힘든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문화충격의 결과이다. 충격이라는 말이 주는 인상이 강하다면 "문화충돌에서 오는 스트레스"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문화충격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극복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삶의 그 다음 단계가 결정된다. (이에 대하여서는 문화변화 혹은 세계관의 변화를 논의할 때에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그 동안 자신의 enculturation의 결과로 형성된 세계관의 틀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을 목격하거나 직접 경험하면서,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자칫 잘못하면 현지의 문화를 정죄하기가 쉽다. 문화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관의 틀로써 다른 문화권의 내용들을 판단하는 경향 혹은 자세를 가리켜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러한 자민족 중심주의를 다 갖고 있다. 이를 극복한다 해도 백퍼센트 다 없앨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가 자신들 속에 이러한 경향이 다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여도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 즉 어느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의 한 부분이다. 특별히 자신을 깊이 이해할 때에 비로소,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대로,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정 가능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화화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우리의 자아상과 세계에 대한 인식들이 과연 얼마만큼 성경적인가도 한번 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세계관의 구조와 그 기능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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