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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OO 자매님께,

자매님이 가지고 계셨던 의문과 고민들에 관하여 지난 번에 나누어주신 이야기들이 그후로도 참 많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어려운 여건들 가운데서도 헌신과 봉사로 섬김의 수고를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애처로우리만큼 감동적이었고, 일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제 자신을 돌아보며 채찍질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잘못아닌 잘못과 나아지지 않는 상황들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계신 점에는 참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이토록 주님 앞에서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애쓰는 자매님인데,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계신 것인지 모르겠다는 물음만 스스로 되뇌어보기도 했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이 아름다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 주님 앞에서마저도 마음이 계속 상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공연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답니다. 자매님이 치열하게 struggle하며 살아가는 것과 병행하여 주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 또한 그 마음 안에서 나날이 더욱 커져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던 중 문득 본회퍼의 고뇌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항거하다 체포된 본회퍼는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연상시키듯 따뜻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오히려 간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처형되어 순교하기 얼마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를 한 편 지은 것이 사후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격적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는지,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연약함과 두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그리고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겸허함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여기까지 믿음으로 달려와 이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고 있는 그의 감회와 눈물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픈 마음에 제 나름대로 한 번 번역해본 것으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  디트리히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때로 말하기를,
나는 감옥의 갇힌 공간을 나설 때에
침착하고, 활기차며, 담대하다고 한다.
마치 자기 집 문을 나서는 유력자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에
자유롭고, 친절하며, 분명하다고 한다.
마치 내 자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내는 가운데에도
한결같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기품이 있다고 한다.
마치 늘 승리하는 자의 모습처럼...

그럼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단지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피곤하고 갈망하며 병들어있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름다운 색들과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을 그리워하고 있는,
친절한 말 한마디와 이웃과의 정다운 삶에 목말라하고 있는,
가혹함과 사소한 모멸감에 대한 분노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기적같은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는,
머나먼 곳에 떨어져있는 동료들 걱정에 힘없이 떨고 있는,
기도하기에, 생각하기에, 무언가 만들어내기에 지쳐 공허해져 있는,
기진맥진하여 이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나는 누구인가? 이편인가 저편인가?
오늘은 이편이었다 내일이면 저편인 것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스스로는 비겁하고 수심에 찬 나약한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도 내 안에는 패잔병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다 얻은 승리 앞에서조차 뿔뿔이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내가 누구이든, 그분은 아시리라.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1944년 6월, 나치의 수용소 감방 안에서)

"WHO AM I?" (from “The Cost of Discipleship,” pp.19-20)
by Dietrich Bonhoeffer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would step from my cell’s confinement
calmly, cheerfully, firmly,
like a squire from his country-house.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talk to my warders
freely and friendly and clearly,
as though it were mine to command.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bear the days of misfortune
equably, smilingly, proudly,
like one accustomed to win.

Am I then really all that which other men tell of?

Or am I only what I myself know of myself,
restless and longing and sick, like a bird in a cage,
struggling for breath, as though hands were compressing my throat,
yearning for colors, for flowers, for the voices of birds,
thirsting for words of kindness, for neighborliness,
trembling with anger at despotisms and petty humiliation,
tossing in expectation of great events,
powerlessly trembling for friends at an infinite distance,
weary and empty at praying, at thinking, at making,
faint, and ready to say farewell to it all?

Who am I? This or the other?
Am I one person today, and tomorrow another?
Am I both at once? A hypocrite before others,
and before myself a contemptibly woebegone weakling?
Or is something within me still like a beaten army,
fleeing in disorder from victory already achieved?

Who am I? They mock me, these lonely questions of mine.
Whoever I am, thou knowest, O God, I am thine.

(June 1944, in the prison cell of Nazis camp)

저에게도 어려움과 고민으로 채워졌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큰 힘이 되어주었던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이는 자”를 뜻하던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신 그 드라마틱한 장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들이 종종 한 사람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간추려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주목한 점은 나중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이름이 되는 그 이름이 “거룩한 자”나 “복받은 자”와 같은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씨름(struggle)하는 자”의 의미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과 더불어 씨름(struggle)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약하고 게으름과 죄에 미혹되기 쉬운 나이기에 그분께서 맡기신 소명을 어떻게든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struggle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그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하고 이루실 주님이건만, 그분의 도우심 앞에 내 자신을 내어드리기까지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struggle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 없는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담아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감당해야할struggle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struggle이 그러하였고 본회퍼의 struggle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매님께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며”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들 또한 어쩌면 자매님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전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고 있는 순간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허락지 않으신다 하셨으니, 아마도 주님께서는 그 정도의 난관을 감내할 만한 삶의 실력과 성숙함이 자매님에게 이미 있다고 인정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길을 또한 마련하셔서 능히 감당하도록 도우신다 하셨으니, 말과 경주하여도 능히 이기고 요단강의 창일한 가운데서도 안전할 수 있게 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혹 조만간 고백하게 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일이 혹시 있으시다면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 품 안에서 존재 자체의 안식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가장 이루고 얻기 원하시는 것은 자매님을 통한 그 어떤 것이기 이전에 자매님 자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찬양곡의 가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Savior on a hill, dying for my shame, could this be true? ... For you so loved the world, you gave your only Son to say “I love you so. Oh, how I love you so...” (Hillsong, “Saviour”)

그 사랑이 자매님을 어디든 쫓아가서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놀라게 하시며 만족케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매님은 귀중한 “하나님의 소유”이시고, 그 사랑이야말로 자매님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분 품안에 머물도록 하시는 진정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OO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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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5년 8월호

2005년 4월 한달간 몽골국제대학(MIU)에서의 강의 사역을 마치면서, MIU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강의 사역을 마친 소감을 소개하고자 한다.

* MIU 설립 배경

몽골은 13세기경 징기스칸에 의해 세계 곳곳을 정복할 정도로 강대국이였으나, 그 이후 오랜 청나라의 지배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특히 14세기경 징기스칸의 손자이자 원나라 시조인 쿠빌라이가 교황청에 100명의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라마 불교를 받아 들임으로써, 라마 불교와 샤머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몽골은 위치적으로 중앙아시아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서, 다른 나라로부터 접근이 힘든 러시아 남쪽의 여러 자치 공화국들에 대한 좋은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몽골 국가의 잇점을 고려하여, MIU는 국제화를 지향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춘 몽골 및 주변나라의 지도층 리더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2002년 9월 설립되었다. 특히 몽골과 인접 여러 국가들의 유수한 인재들을 유치하여 국제적 수준의 학부 및 대학원 과정을 영어로 교육하면서 재생산이 가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함으로써 이를 성취하고자 한다.

* MIU Vision

  • 몽골 및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여
  • 21세기형 세계적 인재로 육성하기위해 영어로 대학 및 대학원 과정을 교육하고
  • 또한 신앙적인 회심과 영적 성장을 도모하여
  • 해당 국가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갖춘 영향력있는 지도자로 봉사하도록 한다.

* MIU의 학과 구성

  • IM(International Management) 학과
  • IT(Information Technology) 학과
  • BT(Bio-Tech. & food science) 학과
  • TESOL(국제 영어교사 교육) 학과
  • FD(패션 디자인) 학과(2년제)
  • 교양학부

-   한 학년 정원이 총 150명(증원 예정)임

* MIU 특징

  • 글로벌 지도자 양성을 위해 모든 강의는 영어로 강의함
  • 몽골을 비롯하여 러시아(야쿠츠 공화국, 투바 공화국, 부리야트 공화국, 학카스 공화국, 알타이 공화국), 카자흐스탄, 중국, 내몽골 자치국, 한국 등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음
  • 각 학과 우수 입학생에게 장학금을 제공하며, 몽골 외지 및 중앙아시아 국가의 학생에게 기숙사 제공
  • 기독교 세계관에 바탕을 둔 전인적 교육을 제공하며, 5차원 교육법을 적용한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있음
  • 우수 학생 그룹을 매년 2월 중에 한국 및 미국에 단기 비젼 트립을 보냄으로써, 학생들에게 비젼 심기와 글로벌 리더쉽 교육기회를 제공
  • 한국인 전임교수들 모두 선교 헌신자로서, 우수한 강의 제공과 더불어 학생들의 복음화 및 제자 양육에도 사역자로 헌신하고 있음

* MIU에서의 강의사역 소감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기독교적 지도자 양성을 돕고자하는 사명감을 갖고 MIU에서 4월 한달간 한학기 분량의 강의를 제공하기 위해 떠나기는 했지만, 막상 도착한 몽골 땅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4월이건만 녹색 잎은 전혀 보이지 않는 매서운 날씨, 수도 울란바토르의 절반 이상인 게르(몽골 전통식 천막 가옥)에서 피워대는 석탄 연기냄새, 매일 3시간씩 영어로 강의와 면담을 해야하는 강행군으로 인해 며칠간은 코피를 흘려야 했다. 그러나, 막상 수업을 들어가면 의외로 해맑은 표정들과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눈초리들로 인해 새로운 힘을 얻고, 최선으로 이들을 잘 가르쳐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1-2주 정도 강의가 진행되면서, 몽골 학생들에게는 최신 학문을 전해 주는 일과 더불어 하나님을 통한 새로운 영적 변화와 기독교적 삶의 기본 정신들(진정한 사랑, 남을 배려함, 성실과 최선, 정직 등)을 확실하게 가르쳐야 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 학생들은 오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열심을 내는 것이 부족하고, 또한 남을 배려하는 마음들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MIU가 다른 몽골대학과 달리 기독교적 가치관을 갖춘 지도자 양성에 비젼을 두고 교육을 통한 개인의 변화와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는 이유라 생각이 들었다.

주일날과 수요일 저녁에는 한국 선교사들이 개척한 몽골 현지인 교회들을 많이 돌아보았다. 특히 수요예배에 참석한 어느 몽골인 현지교회는 몽골 대학생들이 엉성한 건물안에서 100여명 정도나 참석하여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마지막주 수요예배 시간에는 선교사님 부탁으로 내가 특강식 설교를 하였는데, 말씀을 들을때에 대부분이 노트를 꺼내서 열심히 받아적는 모습을 보고 이들의 영적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몽골 학생들을 재생산이 가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잘 양육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는 노력들이 필요한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식적으로는 전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였지만, 의외로 다양한 통로들, 특히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많은 가능성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특히 몽골 학생들에게는 한국이 꼭 가고 싶은 선망의 나라임으로 인해, 이들의 마음을 얻기에는 그리 어렵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의 크나 큰 가능성에 비해, MIU에서 강의나 학교 행정으로 섬길 수 있는 교직원 헌신자가 적은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연변 과기대가 초창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우리 KOSTA 모임을 통해 많은 헌신자들이 연결되어 지금은 중국땅에서 매우 성공적인 모델의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이제 몽골 땅에 새로운 선교적 차원의 대학이 세워졌는데, 제2의 성공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이 사역에 동참하는 헌신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한 달간의 짧은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120년전 한국땅에 처음 들어와 연세대학교를 세웠던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씨의 기도문이 떠올랐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그루 시원하게 자라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중략) 보이는 것은 고집스러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중략)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나라에 과연 이런 때가 있어나 싶은 상황이였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전세계가 놀라워하는 은총의 땅이 되었다. 이제 몽골땅이 영적 징기스칸들을 많이 배출하는 21세기 새로운 은총의 땅이 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많은 교직원 헌신자들이 동참하기를 도전하는 바이다.

* 기도 요청 제목

  1. 우수한 학생들을 잘 유치하여 우수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도록
  2. 입학생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 영적지도자로 잘 양육할 수 있도록
  3. 졸업생들의 취업 및 진학등이 잘 연결되고, 장차 사회 지도자로 성장케
  4. 우수한 교수요원들과 행정직원들이 헌신하여 동참하고, 몽골 현지 직원들의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5. 안정적인 재정적인 후원을 위해
  6. 필요한 건물 공간들이 적절히 마련되어 좋은 교육공간이 제공되게
  7. 현재 헌신하고 있는 교직원 및 후원자들이 영적으로 늘 충만하도록

* MIU 후원 동역자가 되어 주십시오

1. 기도 동역자(기도제목 참조)

  • 몽골/중앙아시아 및 MIU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 정기 기도모임에 참석하여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매달 4번째 수요일 저녁 8시 30분, 서울 목동 제자교회)

2.교수/직원 동역자

  • 전임교수(석사학위 이상 선교 헌신자), 방문교수(1개월 1년), 여름 단기강사(2주-4주, 학사이상 가능)로 강의를 해 주실 분
  • 행정 직원으로 학교 운영을 섬기실 분

3. 재정후원 동역자
1) 학교 운영비 지원 (목표: 3천 구좌)

  • 월 일정구좌 후원을 통해 학교 운영 지원(개인 1구좌:월 1만원, 교회: 월 정액)
2) 장학생 지원(목표: 학생의 30% 지원)
  • 귀하의 이름으로 우수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합니다.
  • 전액장학생 (월 5만원 또는 년 60만원)
  • 반액장학생 (월 3만원 또는 년 35만원)
3) 석좌교수 지원
  • 귀교회/귀하의 이름으로 석좌교수직을 개설하여 우수교수를 초빙합니다.

4) 건축 지원

  • 제2강의동, 기숙사, 채플강당/체육관 건립을 지원시 귀교회/귀하의 이름으로 건물명을 정합니다.
  • 건축비 일부를 부담시 특정 교실 및 건물 기증명패에 기증자 이름을 부착합니다.

- 여러분의 후원이 MIU 비젼 성취의 밑거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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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5년 6/7월호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복음과 민족 1

미국에 이민 온 1.5세나 혹은 2세 그리스도인들이 미국 땅에 살면서 꼭 돌아보게 되는 질문이 있다. 미국유학 후 미국에서 취직할지 아니면 한국에 돌아갈 지를 결정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장기적으로 당면하게 될 질문이 있다. 한국 땅에 살면서, 혹은 외국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을 제기하면 어떤 사람은 당연한 것을 왜 새삼스럽게 묻느냐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복음의 보편성을 넘어서 쓸데없는 민족주의를 자극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분들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이나 선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느 하나의 입장을 취하게 되면 반드시 논쟁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내가 고민해 온 주제일 뿐 아니라 또 앞으로 내가 사역하고자 하는 방향과도 관계되기에, 독자들도 기존의 선입관을 내려 놓고 기초부터 함께 생각해 수 있기를 바란다.

성경에는 모든 신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한 하나님에 속한 자임을 말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롬 10: 12),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한 마디로 모든 신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이 사실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이 땅에서의 신분이나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란 한 특정 민족을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얻게 될 구원의 한 모델로 선택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 그 특수성은 사라지고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임할 구원의 복음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가와 민족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국가간의 분쟁이나 이해관계에 있어서 전쟁의 위험을 무릎쓰고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는 것인가?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한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미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일본인이 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 동일한 것이 아닌가?

사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고 나 역시 한 때는 이런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읽다 보면, 미묘한 부분들이 발견된다. 바울은 주안에서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한 바로 그 로마서에서 자신의 민족과 혈육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들을 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2) 그는 얼마나 자신의 동족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하고 있다고 자신의 양심을 걸면서 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서 10:1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나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복음안에서 한 자손임을 믿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골육과 친척에 대한 우선적 책임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당위적 명령이 아니라 바울이 가졌던 애정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곧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구절들을 가지고 '민족주의는 성경적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실(IS)에서 당위(OUGHT)를 추론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도 바울이 그랬다는 것은 우리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 수는 있다.

그러면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말하는 직접적인 명령은 없는가? 사실 성경, 특히 신약에서 이 부분에 대한 명시적인 구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시사해 주는 구절을 찾을 수는 있다. 바울은 과부나 나이 든 부모를 봉양할 우선적 책임이 그 가족과 친족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즉 신자일수록 자기 가족과 친족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이 있으며 더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과 친족에 대한 의무는 구약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것이다.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 25:25) 즉 형제가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으면, 그의 친척이 그것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심지어 형의 아내가 과부가 될 경우에는 동생이 그 형수와 그 재산을 책임질 의무까지 부여하고 있다(신 25:5-10). 이러한 친족에 대한 의무는 바울의 말을 통해 신약에 와서도 형태는 다소 변해도 신자의 공동체 내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가족이나 친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적 관계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만 유효할 뿐 하늘나라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제도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결혼제도 자체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천사와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마 2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족이나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에서만 유효한 제도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하면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민족과 국가는 엄밀히 말하면 동일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처럼 단일민족 국가에서는 동일시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족과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이 있다면, 그 관계가 가족보다는 상대적으로 느슨해 졌을 지라도 민족과 국가도 혈연적 유대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한,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 적어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면,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좋든 싫든 한국민으로 살아야 하며 동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여러 사람가운데서 일차적으로 부모를 전도할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동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것은 성경적인 정신이 부합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국가와 개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각 개인들은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면 국가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함께 가지는 공동체적 운명을 갖는다. 나는 내가 목회를 하기 전 한 때 철학을 공부하면서, 코넬대에서 박사후 과정으로 집단윤리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 집단윤리의 핵심은, 국가와 같은 집단은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을 넘어선 어떤 공동체이며, 이 집단의 행동에는 그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이나 일본이 이웃나라를 침략했다면 그 집단행동에는 그 나라 모든 국민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든 국민들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행동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에 대해 책임있게 결정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할 때는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징계의 채찍을 그 국가 전체에 함께 내리셨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행동을 했을 때, 비록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40년동안 광야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유다왕국의 말기에 예레미야나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은 그 자신은 비록 의인이었을지 몰라도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도 국가에 대한 징계의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국가 전체의 책임을 묻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경제적 위기나 전쟁의 채찍을 맞는다면, 비록 그 가운데 의인이 있고 참 신앙인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사람도 그 운명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 책임은 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국가적 형벌의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가와 개인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국가와 민족에 대해 더더욱 우선적 책임감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더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라와 민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니 신앙인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나라와 민족을 보면서 안타까와 하며, 울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인들을 찾고 계신다. 예레미야나 다니엘처럼, 나라와 민족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고 금식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우리 모두 이러한 부름에 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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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5년 4월호

유학기간: 선교적 사명을 준비하는 기간
- 몽골국제대학에서의 강의를 준비하면서

지난번 글에서 나는 유학 기간 동안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 것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중요함을 언급하였고, 특히 이것이 차후 타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하게 되는 귀한 준비임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문화적, 직업적 사명과 더불어 일생 동안 선교적 사명에 대해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은 부활후 승천하시기 전에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말씀을 통해, 바른 소명 인식을 깨달은 주님의 제자들은 온 민족에게 나아가 그들을 새로이 제자 삼는 사역에 동참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어떤 형태로든 동참해야 하는 또 하나의 소명임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후, 신앙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선교에 대한 사명을 깊이있게 깨닫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하였었다. 그때 우리를 지도하시던 옥한흠 강도사(지금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께서 “앞으로는 선교사라는 신분보다 평신도로서 자신의 직업을 통해 선교하는 기회가 더 많아지고, 또 선교에 더 효과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라고 조언해 주셨다. 이 조언으로 인해, 나는 평신도 특히 나의 은사로 여기던 가르침의 직업을 통해 이 사회도 섬기고, 또 기회가 되면 선교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 속에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유학 생활을 하는 중에 섬기던 교회에서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 함으로서 교회가 해외 선교를 지원하게 하였고, 이때 성경번역 선교회 (위크리프 선교회) 소속 선교사를 한 가정 지원하게 되었다. 지원 선교사와 소식지를 주고 받으며 선교 현장의 어려움과 더불어 오랜 준비의 기간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 귀국하여 섬기던 교회에서도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목사님과 함께 선교사 지원사역(재정적 및 기도의 후원)에 열심히 동참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한 옛적 직장 동료가 선교사로 나가게 되어 개인 후원자로 자청하여 섬기고도 있다. 그러나, 이전에 가졌던 결심처럼 내 자신이 선교지에서 얼마간이나마 직접 섬길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1년전, 학교로 부임한 후 처음 갖는 연구년(안식년)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선교적 사명에 동참할 기회를 찾던 중, 한국 교회들이 몽골에 선교적 차원에서 대학을 세우고 여기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 요원들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해 단기적 기간밖에 되지 않지만, 해당 학교들(몽골 국제대학과 후레 정보통신 대학)에서는 너무나 반기는 상황이다. 이제 4월 한 달 동안 주당 15시간 이상을 영어로 강의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서 학생들에게 비젼을 심어주고, 또한 저녁시간에는 영어 성경 공부반을 통해 몇 명이라도 가난한 심령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유학생들이 차후에 이러한 상황을 위해 준비하는 좋은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첫째로, 유학중에 섬기는 미주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들리게 되는데, 이런 기회를 선교지의 현장 상황을 좀 더 상세히 접하는 기회로 삼아보도록 권하고 싶다. 선교가 단순히 열정과 기도로 준비하는 것 외에 선교지의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기간이 필요하고, 유학기간은 이것을 위한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나도 이 기간 중에 태국 선교사님, 성경번역 선교사님, 인도네시아 선교사님,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님 등 여러 곳의 선교적 상황을 많이 듣고, 실제적 환경에 대한 좋은 이해의 기간이 되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대해 막연한 형태의 상상적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를 보면서, 실제 사람들의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형태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다.

둘째로, 유학 기간은 나의 직업적 업무를 수행하면서, 영어로 복음도 전할 수 있는 준비 기간이라 생각한다. 사실 내 자신은 이 면에서 부족함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유학을 마치고 뉴욕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중에, 한국 대학생 CCC 모임에 특강 세미나로 몇번 초청을 받았었다. 그런데, 한국말이 편한 유학생 중심모임에서 신앙 특강을 하면 나름대로 상당한(?) 반응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1.5세 대학생들을 위해 영어로 특강을 해달라고 해서 오래고 힘든 준비과정을 거쳐 전했지만, 전하는 나도 언어적인 제약으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함을 느꼈고, 듣는 학생들에게도 별 감흥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들을 겪으면서 이 부분에서 준비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지난 년도에는 학교가 학부 강의를 영어로 가르치는 것을 적극 장려하는 기회에 용기를 내서 영어 강의를 진행하였다. 이는 이번에 몽골에 가서 영어로 강의해야 하는 좋은 준비의 시간이 된 것이다. 또한 저녁시간에는 영어 성경공부 그룹을 만들어 복음을 위해 준비된 자들을 만나 마음 문을 열어주고자 하는데, 이러한 사역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자세로 영어로 전하는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셋째, 유학 생활중에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조리있게 전하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전도 훈련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보면, 교회생활을 오래했거나 훈련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도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면 준비되지 못한 측면으로 인해 오히려 복음에 거부감만 심어주는 경우가 꽤나 많다. 복음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싸구려 물건 팔듯이 전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각 사람의 상황이나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담대함이란 명목하에 거부감만 전달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마10:16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핵심을 전하되,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는 방식처럼 지혜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라는 것을 말해준다. 즉, 지혜롭고 조리있게 잘 준비하여 증거하여야 함을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함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선교를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나 사명으로 여기는데, 이것만으로 선교를 하기보다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나를 선교의 현장으로 이끌어 가야 지속적이고 쇠하지 않는 선교의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가 마침 고난 주간이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다시 새겨보는 귀한 기회인데, 내 마음도 이전 같지 못함이 부끄러워진다. 유학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우리가 경험했던 주님과의 첫 사랑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고, 이 감격이 선교의 터를 준비하는데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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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5년 2월호

유학기간이 우리에게 주는 색다른 경험중 하나는 미국인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 또는 다양한 타 민족의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대학들의 대학원생중 미국인은 절반 이하이고, 절반 이상은 비영어권에서 온 다양한 민족의 학생임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유학기간 중에는 미국, 캐나다, 호주등의 영어권 학생들을 접하는 기회도 많지만, 비영어권의 유럽인 학생, 인도권 학생, 아라비아권 학생, 중국계 학생, 동남아시아계 학생, 중남미계 학생등 우리가 평소 접하기 힘든 민족의 학생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기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별한 이유와 목적을 위해 마련해 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만약 한국에 있으면서 선교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경우, 이런 나라들중 하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접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더더구나 그들의 문화를 접하면서 그들의 생활 습관이나 방식, 언어적 특징이나 사고적 특성, 사상이나 종교적 특징들을 파악하려면,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어야 가능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기회는 일부러 만든다고 해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오랜기간 접하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최근들어 동남아 지역의 값싼 노동력 활용을 위해 많은 동남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우리가 큰 관심이 없다면 문화적 접촉을 하기에는 기회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꼭 선교사로의 헌신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 민족에 대한 복음 전파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고 내 전도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이 전혀 생각지도 않은 기회에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이것은 곧바로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복음 전파의 시초가 되었음을 보게 된다. 지난 가을에 이집트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집트에 기독교 인구가 8% 정도되는데, 대부분이 바로 2천년전 사도시대에 시작된 콥틱교도에서 유래되었음을 보고 매우 놀랐었다. 빌립의 이방 민족에 대한 전도가 이렇게 놀라운 결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바울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택된 자가 아니더라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여러 타 민족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기회가 점점 많아질 것이다. 앞으로 세계는 점점 국제화가 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민족들을 만나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럴 때, 이럴 기회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현상으로만 남을 것이다.

나는 유학기간이 타 민족과 이방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개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다. 우리는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해주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삶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우리의 전도 방식은 뱀같이 지혜로 와야 함을 성경은 말해주지 않는가!(마10:16)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유학생들이 유학기간동안 타 문화 이해와 그 나라 민족의 복음화 사역 준비를 위해 다음의 몇가지 측면에서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첫째, 학교에서 만나는 다양한 민족의 학생들을 적극적인 자세로 사귀고, 같이 교제하는 기회를 마련하거나 international festival을 같이 개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권하고 싶다.
내 경우에는 당시에 이러한 생각이 부족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訣?못해 아쉽지만, 나름대로 내 주위에 있었던 미국인 동료를 비롯해서 중국인 학생들, 인도인 학생들과 교제하기 위해 도서관 카페에서 함께 어울리고, 또 테니스 클럽에도 일부러 가입해서 같이 시합도 하면서 지내곤 하였다. 또한 international festival에 자주 참석하거나 같이 개최하면서, 그들의 문화적 특징들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었다. 요즘에는 이러한 기회가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행사로 여기기 보다, 이를 통해 타 민족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구체적인 교제의 기회로 삼으면 매우 좋을 것이다.

둘째, 졸업후에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때에도 서로 연락하면서 지낼 수 있는 정도로 사귀고, 연락관계를 계속 유지하라고 적극 권하고 싶다.
이것은 추후 여러 사업이나 학회, 또는 여행이나 선교적 목적등으로 그 나라를 방문할 경우, 해당 나라에 대한 훌륭한 접촉점이 될 수 있다. 나는 지난 가을 연구년을 맞아 유럽과 소아시아 지방을 돌아보면서, 이러한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였었다. 예로서, 터키를 방문할 기회가 되어 그 나라의 지인을 만나 현재 문화적, 복음적 상황과 그들에 대한 선교적 접근을 파악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알았던 1-2명의 터키인과 접촉이 끊어짐으로 인해 접촉할 사람이 없다는 것에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그동안 알았던 여러 외국 친구들에 대해, 내가 좀더 적극적인 연락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있다. 내 자신이 이 후에라도 국제 학술대회나 여러 회의에서 이러한 지인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로 임해야 겠다고 다짐해 본다.

셋째, 외국인들에게 복음적 접근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해보도록 권하고 싶다.
우리가 선교적 마음으로 다른 나라를 방문했을 경우, 실제로 이들에게 접근하고 이들에게 복음 전파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두려움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유학생으로 온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는 들어주려는 마음도 있고, 또 복음 전파를 위한 시도를 해 보기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회에 각 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고려하여 몇가지 접근을 시도해 보고, 영어로 복음적 내용을 전할 수 있는 준비를 갖는 기간이 되었으면 한다. 많은 경우에 보면, 각 나라나 민족별로 사람들의 마음을 닫히게 하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되는 대화가 있는 것을 본다.

유학기간 동안 타 민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우리가 일생동안 다양한 직업속에서, 또는 지교회에서 주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귀한 경험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러한 것은 한국교회들이 엄청난 비용과 별도의 시간을 투자해서 겨우 얻는 기회들인데, 유학생들에게는 공짜로 자신의 주변에서 곧바로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된다. 이러한 기회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나름대로 사용하시고자 마련한 것이라 여기고, 타 민족 학생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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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5년 2월호

희랍신화에 보면 야누스란 신이 나온다. 이 신은 앞과 뒤에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신체적 특성에 맞게 도시나 집의 출입구 등 문을 지키는 수문장 신이 되었다. 그런데 문은 일반적으로 시작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야누스 신은 또한 출발점의 신이라 생각되었고, 신들 가운데 최고의 지위가 주어졌다. 모든 시작은 언제나 그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져서 12개월 가운데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래서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는 의미에서 라틴어로 'Januarius'라 불렸고, 여기에서 1월을 의미하는 영어 'January'가 나오게 된 것이다.

영어 January처럼,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나 상표 가운데 많은 것들은 희랍신화에 그 기원을 가진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카시오페아, 안드로메다, 오리온 성운 등 모든 별자리 이름들은 희랍신화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희야신스 등 상당수 꽃이름들도 또한 희랍신화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제품이름들도 상당수가 희랍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예를들면, 박카스는 로마신화의 술의 신 박카스(희랍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에서, 무기 가운데 발칸포는 로마신화의 대장장이 신 불카누스(희랍신화에서는 헤파이스토스)에서, 타이탄 트럭은 희랍신화의 힘센 거인족 티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문학작품과 예술작품들이 이 희랍신화에서 그 소재를 빌어오고 있다.

오늘날 희랍과 로마의 신들은 더 이상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현대인들은 희랍신화에 대해 그다지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만 해도 이 종교는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었고, 복음전파에 큰 지장을 주었다. 행 19장에서는 아데미 여신(아르테미스)을 섬기는 에베소 지역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란 사람이 자신들의 신을 경홀히 한다하여 바울을 핍박한 적이 있었다. 또 루스드라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쓰스(제우스 신)와 허메(헤르메스 신)라 하여 섬기고자 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인들이 이 희랍신화에 대해 완전히 경계를 풀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러한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 January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것을 성경적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알파요 오메가며 처음과 나중이라고(21:6)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생각하면 야누스가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시작의 신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1월은 야누스의 달이 아니라 예수님의 달이 되어야 한다. 즉 January가 아니라 Jesuary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만 그 언어를 이렇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미적으로는 그렇게 되게 할 수 있다.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하는 달이 된다면 1월은 곧 Jesuary, 즉 예수님의 달이 되는 것이다. 1년 가운데 첫 달인 1월을 맞으면서 이 달이 예수님의 달이 되도록 해보자. 예수님과 함께 시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시작하며, 예수님의 주신 힘으로 시작해보자.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1월은 내용적으로 예수님의 달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1년을 예수님의 달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달로 마칠 수 있도록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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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5년 1월호

성경적 가치관에 관한 문제는 KOSTA나 eKOSTA에서 여러 강사님들이 많이 다루는 내용이라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나 역시 이 문제를 한번은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이 문제로 직장생활 중 심각한 고민을 했던 사람이고, 유학기간중 중요한 핵심을 파악하고 나서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이슈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학시절이 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느라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다양한(?)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오히려 simple한 생활 패턴으로 인해 자신의 삶과 가치관의 문제를 생각하고 새로운 시각의 변화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기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대학시절 예수님을 영접한 후 철저한 제자훈련 과정을 받고,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늘 나의 주업은 복음 전도이고 직장 생활은 생계 유지를 위한 부업으로 여기고 있었다. 졸업후 나의 첫 직장이 경북 구미에 있던 정부 연구소였는데, 나름대로 주어진 일은 성실히 하였지만 늘 내 마음은 복음 전도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과 관계에서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복음 전도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일하는 것은 최소한의 의무 수행 정도가 되었고, 문제가 생기지 않는 정도까지가 한계선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내 직장이 점점 복음화되어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직장과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 내 직장은 점점 발전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일하는 사람들만 많아져서 점점 퇴보할 것이고, 종국에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해 직장 문을 닫는 경우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모습일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해 가야 할 방향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중에도 직장생활과 유학 준비중이라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다룰 시간은 없었다.

유학을 와서 2년 정도 지나면서 내 생활이 simple life 상태에서 틀이 잡혀가자 이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는 중에 “Your work matters to God (D. Sherman & W. Hendricks)”, Why work?”이란 책들을 접하면서, 내 마음에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점을 찾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직업과 소명”, “세상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젼“ 등의 국내서적들과 또한 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당시 KOSTA 강사 목사님들을 통해 새로운 성경적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실제로 그 이후에 있어서의 나의 직장의 생활과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내가 갖게된 성경적 가치관의 핵심요소를 정리하면 다음 3가지 정도라 하겠다.

첫째, 인생의 방향과 삶의 자세에서 성경적 비젼과 성공관을 갖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인생에 대한 꿈을 계획한다. 목표가 늘 내가 최고가 되어 섬김 받는 것이고, 내가 남에게 드러나는 것이고, 나의 만족과 영광을 좇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이라 생각하다보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가 중요한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에서 발동하여, 주님의 인생 목표(막10:45), 즉 섬기는 것을 자신의 인생 목표로 삼는 사람이다. 즉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삶을 인생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평가하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온전하고 의로운 방법으로 모든 일을 수행하고자 해야 한다. “못가도 좋으니 바로 가자”가 삶의 모토이어야 한다. 성공의 잣대는 남에게 드러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얼마나 섬기는 삶으로 살아왔는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성경적 노동관/직업관을 갖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노동이나 직업을 생계 유지의 수단이나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일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이요(창1:26-28, 엡2:10),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6일동안 하셨던 천지창조도 일(노동)이였고, 이것은 기쁨이였다. 인간 삶에서 노동은 삶의 핵심 요소이고, 이웃을 섬기는 방법이며, 기쁨의 근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노동이 힘든 고통으로 바뀌게 되었을 뿐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노동은 다시 새로운 사명으로 회복되었다. 우리의 모든 일상 업무를 주님의 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골3:22-24절에 보면, 당시의 종(노예)들에게 상전을 섬기는 일상의 하찮고 허드레 같은 일들을 성심껏 수행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 말씀하셨고, 이에 대해 유업의 상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 업무와 직장의 일들을 주께하듯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직장을 나갈 때 예배드리러 가는 것도 동일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매일의 삶의 현장이 곧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신령한 산 예배의 장소인 것이다.

로마시대 노예들이 주인에게 예수의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모든 일상 일에서 주를 섬기듯 주인을 섬기는 노예들의 삶의 모습이 결국에는 주인들을 감동시켰고,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공인되는 핵심 요인이 되었다. 지금 이 시대는 온갖 말들로만 전달되는 복음보다는 우리들 삶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향기가 전달되어야 하는 시기라고 본다.

셋째로, 부와 보상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갖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의 노력의 결과로 또는 행운으로 얻어진 보상에 대해 당연히 자신이 누리고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을 최상으로 여긴다. 부를 자신만의 만족과 축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성공의 결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부를 이루는 과정이 중요하며, 또한 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다. 재물은 자신의 필요와 더불어 이웃의 필요를 함께 채우는데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원리라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삶의 모습에 대해, 주님은 유업의 상을 주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보상과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며, 바울도 이러한 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임을 밝히고 있다.

유학기간은 시간적으로 매우 바쁜 일정이면서도, 자기 인생의 방향과 삶의 원칙/가치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결단할 수 있는 좋은 기간이다. 우리 코스탄들이 이 세상 가치관과 풍조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가치관 정립을 통해 새로운 풍성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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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12월호

유학 생활에서 가장 힘든 문제 중 하나는 아마도 재정적인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어느 정도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유학생들도 많아졌지만, 그래도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는 유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편안하고 풍족할 수 있었으나, 유학으로 인해 궁핍함으로 처지가 바뀐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학의 특수한 상황을 통해, 우리는 일생의 중요한 시기에, 재정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좋은 훈련을 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재정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좋은 경험을 가졌었다.

내가 유학하던 80년대 중반에는 대부분의 결혼한 유학생들이 1500$-3000$ 정도의 6-8년 정도된 중고차를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내 자신도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5년 정도 했기에 어느 정도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중에 유학의 길을 떠나면서 퇴직금과 부모님이 마련해주신 것을 합쳐 총 1만$정도(당시 850만원)만 갖고 유학의 길에 올랐었다. 이 금액은 오직 1학기만의 등록금과 생활비에 해당했고, 1학기 후에는 장학금을 받든지, 아니면 다시 돌아오든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를 마다하고 내가 꼭 전공하고 싶은 교수를 찾아 학교를 선정했고, 재정적인 긴축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둘째 아이(당시 2살)는 장모님께 맡기고 떠나는 가슴 아픈 처지였다.

첫 학기에 최소한의 등록금을 내고, 차도 1700$의 중고차를 구입하고, 추운 겨울에 창문과 문틈을 비닐로 여러 겹 밀봉해야 하는 제일 값싼 기혼자 아파트(월세 230$)에서 3명이 월 생활비 800$정도의 최소한의 생활로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겠지 믿으면서도, 어떤 밤이면 내 마음은 짓눌리는 고통과 악몽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든 다음 학기에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내가 전공하고 싶은 분야의 교수를 뻔질나게(?) 찾아갔다. 지도교수가 나의 발길에 감동했는지, 박사자격시험(QE) 합격까지 기다리지 않고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나의 성적과 행동을 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매일 연구실에 출근하여 연구실의 내용을 열심히 익혔고,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 다음 학기부터 장학금을 받게 되어 등록금과 최소한의 생활비는 걱정을 덜게 되었다. 떨어져 있던 둘째 아이도 미국으로 와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감사했다.

그러나, 장학금만으로는 최소한의 생활비에서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부모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 모자람을 채워주시도록 기도하는 중에 교회에서 청소하는 일거리를 얻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 2-3시간 잔디를 깎고, 주일 예배를 마친 후에는 2시간 정도 교회 청소를 하는 것으로 100$(추후 150$)을 받게 되었고, 나는 이것으로 십일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는 맥도날드 햄버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청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4명의 식구가 음료수 한 컵만 주문해서 먹는 처지였다. 이듬해 지도교수가 여름방학 2달 동안은 등록금 비용대신 생활비를 좀 더 주는 덕분에 여름 방학 중 단거리 여행도 다녀올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내가 유학을 마친 34살의 나이에, 내 수중에는 일전의 돈도 남아있지 않은 빈털터리였지만, 그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모자람이 없었던 것에 대한 감사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쁨이 넘쳐있었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요한 내용을 배웠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고 본다.

첫째, 나는 재정적으로 궁핍함에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모자람이 없게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궁핍함에나 풍족함에 처하는 것을 배웠다고 고백한 것처럼, 나도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지혜를 주셔서 모자람을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과 환경을 주심도 배웠다. 유학시절은 이러한 배움과 훈련을 위한 좋은 기간이라 생각한다. 유학생들은 본인의 선택에 의해 궁핍함의 환경에 처해졌지만, 이러한 믿음과 희망이 있을 때 그 상황을 이겨냄으로 차후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둘째, 욕심이 아닌 재정의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단순한 성경적 진리를 체험함이 중요하다. 공부하는 유학생에게는 공부에 필요한 재정, 일상생활에 필요한 어느 정도의 기본 생활비, 그리고 어떤 목적을 위한 일에 재정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하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를 주시고자 한다. 내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 하나님을 체험하는 경험은 우리의 신앙을 더 성숙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셋째, 수입이 적을 때나 많을 때나 수입 중 일정비율을 구분하여 헌금과 사역에 드리는 것이 축복의 통로라는 것이다. 헌금의 비율을 정하고자 할 때, 수입이 적으면 적은 대로 힘들고 수입이 많으면 많은 대로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수입이 가능케 하신 주님께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내가 아는 어떤 초신자는 말라기서의 실입조에 관한 말씀을 읽고, 세상의 어떤 투자보다 가장 확실한 return이 있는 약속이라고 믿는다는 말을 하였다. 살아계시고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약속을 하셨다면, 이만큼 확실한 투자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것도 잘못된 내용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기쁨으로 드린 우리의 헌금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약속의 말씀을 따라 나에게도 다양한 축복이 주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유학 시절을 통해 부딪치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 공급해주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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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12월호

유학생 사회에 있어 보면 유학생들이 겪는 여러 가지 애환들을 목격할 수 있다. 공부에 대한 중압감, 경제적 어려움, 건강상의 문제들, 딸린 가족들에서 생겨나는 어려움들, 공부를 마치고 난 뒤의 진로 문제 등... 이 와중에 사고라도 당한다든가, 논문통과가 안된다든가, 그 학교에서의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옮겨야 된다든가 하는 일들이 생기면 이러한 어려움들은 더욱 가중된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

우리는 극심한 고통가운데 있을 경우에는 이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절망과 탄식으로 자포자기 하거나 혹은 그것을 다른 누구의 탓으로 전가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겸비하게 그것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아는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아는 또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에는 다 뜻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 하는 이유를 찾다 보니, 그 이유가 단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6가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경우는 어떤 사람의 죄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시는 경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채찍을 주신다(히12:6).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풍랑을 주시고 또 급기야 고기에게 잡아 먹히는 어려움을 당하게 해 주셨다. 바로 그를 회개시키고 다시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과거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학생이 있다. 그는 시험시간에 컨닝을 하다가 적발된 학생이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용서를 구하기에,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먼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므로 일주일 동안 회개기도하고, 나에게도 잘못했으므로 반성문을 써 보내라 그러면 다른 방도를 찾아 보겠다’고 말했다. 그 뒤 반성문을 보내 왔는데, 그 반성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내용인즉, 자기도 평소에 컨닝은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자기 옆에 친구가 책상에 글을 쓰는 것을 보고는 불안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몇 자 적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보지도 못하고 걸렸고 자기 친구는 보고도 안 걸렸기에 처음에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 옆의 친구는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다음에도 또 똑같은 죄를 지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바로 이러한 처벌 때문에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보고는 이 학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처벌이 참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죄를 짓고도 처벌당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것을 죄로 알지 못하고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처벌이 있을 때, 죄를 죄로 알게 되고, 그 죄를 회개할 뿐 아니라 고치려고 하게 된다. 나도 교통신호를 어겨 경찰로부터 딱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처벌을 받기 전에는 무심코 행동을 했다가 딱지를 받으면서 부터 ‘이게 잘못이구나, 조심해야 겠구나’하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다.

이처럼 처벌은 죄를 죄로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어려움과 고통을 주신다. 이런 고통의 순간에 사람들은 고통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회개하기 앞서 먼저 그 고통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안된다. 먼저 그 죄를 내어 놓고 하나님앞에 토설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실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신다.

두 번째 경우는 죄가 전혀 없는데도 그 사람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욥이나 아브라함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욥은 의인이었고 흠이 없었지만,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그의 믿음이 테스트당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반응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토스카 중에 보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남을 해친 일을 한번도 없소, 제단에 꽃을 바쳤소, 그런데 왜 이리도 어려워야 합니까?’ 라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당신을 위해 많은 것을 했는데 왜 이러한 고통을 주십니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욥처럼 고통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또 아브라함처럼 그 고통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그 믿음이 진짜인가 아닌가가 드러난다. 이럴 때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위대한 신앙인이다. 그리고 이 고통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그는 반드시 욥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더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다.

세 번째 경우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하고 큰 능력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그에게는 하나의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이 가시는 늘 바울에게 고통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간혹 어떤 신앙의 가정에 보면 신앙도 좋고, 직장도 좋고, 하는 일도 잘되고, 다 좋은데, 자녀가 문제가 있다든가, 혹은 다른 것은 다 잘 되는데, 어떤 하나가 문제가 되어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가운데는 간혹 그 사람을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문제를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문제가 없다면, 나태해지기 쉽다. 그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의 능력과 힘으로 사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으면 겸손하게 되고 또 기도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그리고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나 보다 하고 감사하면서 나가야 한다.

네 번째 경우는 그 사람을 연단시키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일 정도 걸리는 블레셋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의 길을 40년 동안 가게 하셨다. 신 8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들의 믿음을 연단시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 때로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신다. 욥도 그의 고난 후에 그의 믿음이 더욱 연단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 적어도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이처럼 영적인 연단과 승리를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

어떤 곤충학자가 나비 애벌레가 고치를 깨고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을 보고는, 그 발버둥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칼로 구멍을 내고 쉽게 나오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나비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새로이 발견한 것은, 고치를 깨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바로 그것이 그 나비를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준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지나면서 얻어진 힘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영적 전쟁을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이 된다.

다섯 번째 경우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경우이다.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면서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때문 입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9:3) 그리고 실제로 그를 고쳐 주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셨다. 이 소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는 고난을 겪은 것이다.

때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최근에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이지선 자매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자매는 꽃다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어 전신이 이지러지는 아픔을 겪었다. 어떤 여자분은 쌍꺼풀 수술이 잘못되었다고 자살하기도 하는데, 젊은 여자가 얼굴 뿐 아니라 온 전신이 완전히 이지러졌으니 얼마나 큰 고난이었겠는가? 그러나 이 자매님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그것을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어떤 목사의 설교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감명을 주었다. 이 자매로 인해 고난받는 많은 사람들이 큰 위로를 얻었고, 또 모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고통은 자매에게는 너무도 큰 아픔이었지만,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 우리도 이런 고난을 당한다면 나의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 경우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다. 옛날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 역사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몰수 당하기도 하고, 감옥을 가기도 하고, 급기야는 죽임까지 당한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 그야말로 복음과 함께 당하는 고난이다.

우리도 내용과 정도는 다르지만,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다 보면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왕따당하기도 하고, 재정적 손실을 보기도 하고, 승진에 손해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직장에서 쫒겨나기도 하고, 집안에서 학대받기도 하고....

이처럼 믿음을 지키려다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는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상이 그 만큼 크기 때문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려다가 손해를 보고 힘든 고난을 당할 때는, 우리 앞에 놓인 상을 바라 보자, 그러면 고통을 참을 수 있다. 예수님도 장차 다가올 영광을 보고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에는 한가지 만의 상황이 아니라 적어도 여섯가지 경우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대해 각기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욥처럼 그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질책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일 것이다. 반대로 죄를 지어 책망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욥의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위로 한다든가, 믿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처럼 하늘의 복을 운운한다면 이것도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각각의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

물론 성경속에는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여섯가지 가운데 두 세가지가 한꺼번에 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욥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믿음이 더욱 연단되는 결과를 얻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된 까닭은, 그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범죄한 것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면서, 또한 그들을 겸비하게 하고 연단하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고난을 받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너희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약 5:13)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이 경우들 가운데 어떤 것인지가 불확실하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생활이 나태하고 범죄하고 있는데도 그것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고난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낫다. 아무런 고난없이 믿음이 나태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더 큰 축복이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 71)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나아갑니다’(찬 503장)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 한가지를 명심하자. 모든 고난에는 뜻이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는 복을 얻게 해 주는 축복의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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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나는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승리한 사무엘상 17장의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전쟁에도 나갈 수 없었던 청소년 나이의 다윗이 불레셋의 대장군을 물매질 솜씨로 무찌르는 장면은 늘 감동적이다. 특히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다윗의 믿음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는데 사용한 실제적 방법이 물매질솜씨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평소 사용하지 않던 솜씨였는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주여! 믿습니다” 하면서 물매를 던져 골리앗을 물리쳤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시편과 다른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돌보던 양떼를 사자나 곰 같은 동물들로부터 잘 보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 방편으로 물매질 솜씨를 익힌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힘센 동물들이 공격하여 양떼를 잡아가면, 모든 사람들에게 excuse가 될 수 있는 상황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스스로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즉 그의 물매질 솜씨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업무)를 최고의 수준으로 수행하기 위한 전공적인 기술이였다.
다윗은 이 물매질 솜씨를 연마하기 위해 따분한 들판의 시간들을 허비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하나님은 이러한 그의 전공적인 기술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것이다.

유학의 목적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전공분야에서의 실력 향상과 이를 통한 학위 취득임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유학기간이 우리의 전공 실력, 즉 물매질 솜씨를 향상시키기 위한 최고의 기간일 것이다. 하나님은 훗날 이러한 우리들의 기술과 은사를 사용하여 그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물매질 단련기간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 관점에서 새로이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무엇을 위한 실력 향상이고, 유학인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과 인정 받음,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이 드러나서 남에게 섬김받고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유학의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인생관을 나의 인생관으로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막10:45).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꿈과 유학의 목적도 하나님과 이웃을 더 크게 섬기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웃을 더 잘 섬기기위해 실력 향상을 도모하는 새로운 종족이여야 할 것이다.

나는 교수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교수라는 위치가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인해 내 일에 만족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그들이 미래 사회를 올바르고 멋있게 이끌어 나가도록 돕는 일을 위해 섬기는 자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요, 만족의 근원이다.

둘째, 섬김은 최고의 실력으로 할 때 훨씬 기쁘다.
우리가 비싼 레스토랑을 가는 큰 이유중 하나는 최상의 서비스를 받는 기쁨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상점에 가든, 어느 사무실에 가든, 어떤 음악을 듣든, 또는 어떤 제품을 사든, 그곳에서 최상의 서비스와 최고의 품질을 만날 때에는 정말 마음이 기쁘고 흐믓하다. 적당히 만들어진 제품이나 적당히 행하는 서비스에는 감동이 전혀 없다. 우리가 물매질 솜씨를 향상시킬 때에는 최고와 최상의 수준을 목표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윗은 죽음을 각오하듯 최선의 노력으로 양떼를 지켰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다(시78:70-72).

물론 최고가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더 쉽게 설명할 방도를 찾고, 더 잘 가르치기 위해 외국의 교수법도 공부하면서 다양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통해, 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기쁨으로 돌아가길 늘 소원한다.

셋째,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혜를 늘 간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유학을 성공리에 마치는 것은 50%의 자기 노력과 50%의 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50%의 운이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다. 나도 유학시절, 장학금만으로 생활비를 겨우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적절하였는지 모른다. 또한 중요한 어떤 실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나의 논문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는데, 실험기기가 계속 고장나고 실험용으로 만든 wafer는 거의 닳아 없어지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초초하였는지 모른다. 그런 순간순간마다 실험기기에 손을 얻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요청하였고, 결국 원했던 실험 결과치를 막 얻고 나서는 실험기기가 더 이상 손 댈 수 없게 고장이 나버렸다. 또한 논문 최종심에서도 까다로운 교수로 인한 어려움을 하나님이 적절히 인도해 주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미국의 불황으로 인해 취업의 문이 막히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분야의 논문 저자들에게 직접 편지를 띄우는 좋은 아이디어를 주셨다. 이 방법을 통해 내 관련분야의 논문 저자들에게 20여통의 편지를 보낸 중에서 5-6군데서 인터뷰 요청을 받았고, 첫 인터뷰를 했던 Bell Lab. 에서 곧바로 job offer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 학교와 유학생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충실히(?) 섬겼던 사람이 받는 축복이라고들 말해주곤 하였다.

우리 삶의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와 도우심을 간구하고, 또 이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축적될 때 우리의 신앙도 성숙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단련하고 준비해 놓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이제 당신의 물매질 솜씨 연마를 위해 이 유학기간을 잘 활용하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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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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