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민이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저 군대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군대 이야기를 처음 해 주었던 동네 아저씨에게서 들은 군대는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낄만한 고된 훈련, 아주 열악한 생활환경, 끊임없는 구타 등이 군 생활의 일상이었다. 그 허풍쟁이 아저씨가 해준 무용담은, 높은 절벽에서 병사들을 무작위로 떨어뜨려 살아남은 사람만 제대하게 했다든가, 정기적으로 산에 가서 곰이나 호랑이와 같은 야생짐승을 맨손으로 잡은 사람들이 진급하게 된다든가, 맨손으로 독사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날로 먹도록 훈련을 받는 다든가 하는 살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아저씨는 큰 악의 없이 8살짜리 꼬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꽤 나이가 들어서까지 군 복무에 대한 비합리적인 두려움은 동민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는 현재 상황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당장 매우 급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두려움이 그저 8살짜리 꼬마의, 군 복무에 대하여 잘못된 두려움과 같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8살 꼬마의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없을까. 그 아이가 가진 두려움이 ‘실체’ 혹은 ‘진실’을 잘못 파악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영적 실체’에 대한 바른 지식이 그들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할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만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들을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된다.
“우리에게 과연 안정(security)을 가져다주는 궁극적 실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질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얼마나 다를까?
KOSTA-2009의 주제문의 일부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그를 통한 ‘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두려움이, 허풍에 속은 8살짜리 꼬마가 가지는 수준의, 가벼운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소망이 외부로부터 (extra nos)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늘과 땅이 만났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Shalom)를 주셨고, 그 평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2,000여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가 바로 그 평화와 용기로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선포하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이번 KOSTA/USA-2009 집회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소망한다.
첫째, 참된 평화(Shalom)을 만들어낼 근거가 우리 안에 없음을 가슴 시리도록 깨닫게 되기 원한다.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어떤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이 우리가 노력해서 세상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없음을 발견하기 원한다. 우리 안에 소망의 근거가 없다는 간절한 목마름 속에서, 그 평화의 근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오게 되기 원한다.
둘째, 예수의 평화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이 세상이 잃어버렸던, 그러나 예수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 원한다. 마치 참된 보석 앞에서 모조품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참된 예수의 평화를 보게 될 때, 우리가 의지하고자 했던 거짓 평안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 평화의 감격에 흠뻑 적시길 원한다. 세상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평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함께 모여 우리 모든 힘을 다해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그 큰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감사하길 원한다. 우리가 흘리는 감사의 눈물과 함께, 우리가 기대고자 했던 거짓된 안정에 대한 환상도 함께 씻겨져 나가게 될 것이다.
넷째, 내 삶, 내 가정, 내 결혼, 내 진로, 내 꿈, 내 소유, 내 직업 등에 매달려 자기중심적 삶을 살고 있던 천박한 모습에서 벗어나, 세상에 주신 예수의 평화라는 거대담론(Meta-Narrative)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게 되길 원한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의 이야기에 생명력이 없음을 발견하고, 이제는 예수의 평화라는 새로운 이야기전개(Storyline)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길 원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향한 참된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한 놀라운 용기를 가질 근거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발견하고 그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로 헌신하게 되기 원한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수준의 삶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평화와 용기가 바로 예수 안에 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밝히 드러내겠노라고 함께 목청 높여 선언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지난 24년간 KOSTA/USA를 통해서 일하셨던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가 선포되고 선언될 천국 잔치를 기대해본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그렇다면,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초월해서
영원을 갈망하며 살고, 한편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비복음적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그 길’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해답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
거시적 관점에서의
헌신은 옛날 얘기?
한 달 남짓 전에 미국 서부의 어느 지역에 사는 한 동역자가 직장일로 필자가 있는 동네를
찾았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저녁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요즘 젊은 학생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제는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서정적인 신앙만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의 추세 속에서 신앙도, 헌신도 모두 개인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그러한 현실에 깊이 동의하며
안타까워했다.
그 저녁의 대화 이후 필자의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이제 그러한 세대는 지나갔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함께 부를 노래도, 함께 외칠 구호도, 함께
흔들 깃발도 잃어버린 그런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인가.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이 세대를 움직일 그 무엇은 개인적,
서정적 신앙 이외에 대안이 없는가.
미래의 꿈은 정규직?
얼마 전 본 한국의 어느 TV 드라마에서 본,
대학을 가기 싫어하는 어떤 고등학생과 그 학생에게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는 부모의 대화가 생각난다.
학생이 대학을 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모는 대학을 가서 네 꿈을 펼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느닷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째 취업 준비생으로 있는, 옆에
있던 삼촌에게 미래의 원대한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취업 준비생 삼촌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자신의 꿈은 ‘정규직’이라고 답했다. 그 고등학생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나더러 대학졸업 후 장래 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대화를 더 극적으로 그리고자 과장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캠퍼스와 지역교회에서 만나는 학생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의 꿈도 이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좋은 배우자 만나고, 좋은 직장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 하는 것.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꿈을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결국은 그 꿈이 ‘정규직’인 것이다.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는 일,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장래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약간 세련된
표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규직이 되거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을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 때문에 그것을 얻고자 하느냐, 그것을 얻고자 하는 뒤에 숨어
있는 동인(motivation)과 세계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잃어버릴 수 없는 꿈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세대가 정말 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럼 이제는 그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언급하는 일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하나님과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을 서정적, 개인적 영역에만 제한시킨 채 그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만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자 했을 때 처음 이야기했던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선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 아닌가. 그 핵심가치를 위해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헌신, 희생하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를 붙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만나는 젊은 학생들에게서, 바로 그들의 삶 전체를 꿰뚫어 통합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목마름을 여전히 볼 수 있지 않은가. 20세기에 만났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과 인생을 던질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함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 나라는, 포기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우리 모두의 궁극적 꿈이자 희망이 아닌가.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같은 핵심 가치가 더는 이야기되지 않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대해 본다.
첫째, 삶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통합하여 살아갈
가치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음을 깊이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이미 가진 삶의 길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심하게 비뚤어져 있는가 하는 내용을 보며 함께 애통해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둘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길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 안의 거짓되고 어그러진 가치관들이
상대적으로 더 초라하게 드러날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된 궁극적 삶의 가치들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목마름이 우리 안에 생길 것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되는 삶의 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아직 그 가치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궁극적 삶의 길을 내 것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고, 이미 그 가치를 알고 있으나 삶 속에서 통합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새롭게 정리하고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유일한 삶의 바른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변화가 있기 원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세대에서 유일한 삶의 바른길을 선포하고 전하는 일들에 많은 이들이 함께 헌신하기 원한다. 세상이 그토록 목말라
보고 싶어 하는 올바른 삶의 길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고, 이제 우리에게 함께 부를 노래가,
함께 외칠 구호가, 함께 흔들 깃발이 있음을 선언하기를 원한다.
KOSTA/USA-2008 집회를 통해 큰 감동을 하고, 집회가 성황리에 마쳐지는 것은 분명히 이 집회를 준비하고 참석하는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집회를 통해 부어주실 큰 은혜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KOSTA/USA-2008 집회 이후 하나님께서 미국
내 한인 청년 학생 디아스포라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그로 말미암아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선포되고 확장될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우리를 흥분시킨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허락하시며, ‘그 길’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2008 KOSTA의 주제가 'The Way to Live: Thy Kingdom Come, 이 시대에 바른 길로 - 주의 나라 임하옵시며'로 결정되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지만, 결코 담아내지 쉽지 않은 내용인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선택한 이유와 이를 통해 2008 코스타를 통해 기대하는 바 등을 미주코스타 권오승 총무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았다.
1.2008 KOSTA 주제를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KOSTA 2008의 주제는 “이 시대를 바른 길로 ?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The Way To Live ? Thy Kingdom Come)” 입니다.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이야 말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할 궁극적 가치이자 삶의 원리가 된다는 것을 담고자 택한 주제입니다.
2.이번 주제를 선정할 수 밖에 없었던 현대의 시대상이랄까요? 코스탄을 비롯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 문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요즘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빠지기 쉬운 두가지 큰 오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세속화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정서적인 영역에만 가두어둔채 성공과 정복의 이념으로 혹은 생존과 번영의 몸부림으로 삶의 나머지를 채우는 자세입니다. 자신의 꿈은 늘 “비전”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는 하지만 이땅 너머의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자꾸만 세속화되는 청년들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보다는 세상이 제공하는 편리와 안락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이원론적 삶의 자세 입니다. 종교생활의 영역에만 하나님께서 계신 것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속된 것으로 여겨 등한시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종교적 신념때문이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경우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두려워서 기독교를 정서적 도피처로 삼기도 하는 모습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 두가지가 교묘하게 결함되거나 적절하게 배합된 형태의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KOSTA에서는, 과연 이 세대의 청년들이 처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르게 지적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을것인가 하는 고민들을 해 왔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세속화나 이원론의 문제들을 꼬집에서 비판하고 우리의 잘못된 모습들을 고쳐나가는 접근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렇다면 “올바른 삶의 길”일까. 그것을 KOSTA에서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서 그 해결점을 찾으려 해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이땅에 임했고 (already),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not yet)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이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 답게 우리가 살아 낼 수 있다면 이원론적 도피로 부터 우리를 바로 잡을 수 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우리 안에 품고 산다면 세속화된 모습을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3. 이번 주제가 예년 코스타의 주제였던 'Entrusted Reconciler'나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등과 어떤 연결 선상에 있는지요?
KOSTA가 시작한지 20주년이 되었던 지난 2005년, “Korean Student Diaspora”라는 주제는 KOSTA가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소 자민족중심적인(ethno-centric) 민족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우리가 우리의 한국인됨을 다시 생각해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더 넒은 영역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 “Entrusted Reconciler”,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등의 주제는 모두 바로 그러한 Korean Student Diaspora로서의 삶의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의 차원에서 등장한 주제들이었습니다. 2008년의 주제도 역시 그러한 연장선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한글 번역이 '이 시대에 바른길로 -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이 시대를 바른길로'도 아니고, '이 시대가 바른길로'로 아닌 '이 시대에 바른길로'라는 어귀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 시대에 바른길로”라고 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른 길로 살아가야 한다는 부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시대를 바른 길로”, 혹은 “이 시대가 바른길로” 라고 쓴다면 그것은 ‘이 시대를 바른 길로 이끌자’ 라거나 ‘이 시대가 바른길로 살도록 섬기자’는 식의 강조가 이루어 질텐데, 우선 이 시대에 바른길로 살도록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더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5. 주제문을 보면, 이번 하나님 나라의 통치영역이 상당히 개인적인 부분으로 제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코스타를 통해 기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은 어느정도가 되나요?
하나님 나라는 분명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2008년 KOSTA 주제에서는, 다소 개인적인 부분에 많은 강조를 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에 근거한 ‘가치관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다루기 위해 더 기초적인 면을 다져야 한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KOSTA 2008을 통해서 선포되길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개인적인 영역에만 제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시대정신이 더욱 절망적으로 되어 가는 이 때에,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편견, 편가름, 이기주의, 개인주의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지금의 시대를 살아 갈 수록 참 소망과 화해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간절해지는데, 우리가 이러한 수렁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과연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던 일에 주목하게 된다. 스스로가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고,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막힌 담들을 헐어버리신 주님의 모습에서 가슴벅찬 소망을 발견한다. (KOSTA/USA-2006 주제문에서)
작년 20주년을 맞았던 KOSTA/USA는 “Korean Student Diaspora” 라는 새로운 파라다임(paradigm)을제시한바 있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지난 20년동안 KOSTA/USA는 복음, 민족,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세가지 핵심 가치(core value)로 미국내 한국 학생들을 섬겨왔다. 이제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면서 하나님께서 KOSTA/USA를 통해서, 미국내의 한국 학생들을 통해서 어떠한 일들을 하기시 원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자 고민하며 도출해 낸, 새로운 화두였다.
2005년 KOSTA/USA에서는 시카고와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두개의 연례 수양회 (annual conference) 뿐 아니라, 코스타 집회의 조장 훈련 프로그램인 jjKOSTA, 웹진(webzine) eKOSTA 등 다양한 사역을 통해서 그 내용들을 나누고 선포하고 고민하였다. 지난 1년 동안 하나님께서 드러내어 보여주셨던 것들은 참 가슴 벅찬 것이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와서, 학업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 교회와 사회를 섬긴다는 기존의 섬김의 凋응?뛰어넘어, 현재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Korean Student Diaspora 들이 조국과 미국, 선교지 혹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어느 곳이든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내는 나그네 (sojourner)로서 살아간다는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서 우리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사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부르심을 향하여 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부르심을 성취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어떤 것일까. 어쩌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러한 질문들이 다시 던져졌고, KOSTA/USA를 섬기는 사람들은 그것이 화목케 하는 것 (reconciliation) 이라는 생각을 구체화 하게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았을때 우리의 모습은 결코 건강하지만은 않았다. 이기적 배타적 본성에 빠져 타민족에 대한 멸시와 배척, 이데올로기적 편가름, 관용과 사랑을 상실한채 화석화되어버린 우리의 신앙, 기득권에 안주하는 혹은 기득권만을 추구하는 성공주의등은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며 우리고자 했던 화목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번 KOSTA/USA-2006 집회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길 소망한다.
첫째, 우리에게 화목의 근원이 될만한 그 어떤 것도 있지 않음을 발견하고 애통해하는 눈물이 있기를 바란다. 세상의 성공주의 배금주의적 가치관에 오염되어 있는, 철저하게 이기적이 되어버린 우리의 신앙의 천박함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망가진 모습을 보며 함께 가슴을 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이 일은, 우리의 적나라한 현재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시면서까지 그리스도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화목의 모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조명할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복하게 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치루셔야 했던 값(cost)가 얼마나 큰 것이었나 하는 것, 얼마나 하나님께서는 그 화목을 이루기 간절히 원하셨던가/원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둘째, 우리가 화목케하는 사람(reconciler)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 전제되어야함을 실제적, 구체적으로 깨닫기 원한다. 우리안에 존재하지 않는 화목의 근거를 찾아 헤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치루신 그 위대한 사역앞에 철저히 우리 자신이 엎드려져야 할 것이다. 혹시 아직 그 화목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다 성취된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바로 그 화목의 장으로 나아올 수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매년 수많은 귀한 청년-학생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오는데 하나님께서 이 집회를 사용해 오셨듯이, 금년에도 바로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길 기도한다. 단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수 많은 자원과 물자를 사용해서 그 사람을 위해 이 사랑의 메시지를 외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셋째, 우리가 화목하지 못하고 쌓아왔던 많은 벽들을 발견하기 바란다. 작게는 우리 가족, 친구등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된 벽들로 부터 크게는 우리가 타민족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편견과 오해, 다른 정치적 사상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정죄등에 이르기 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 많은 벽들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길 소망한다. 특별히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우리 유학생들과 이민청년-학생들이 특별히 가지고 있는 벽들을 발견함과 동시에, 우리를 타문화에 흩으신 하나님의 뜻이 이러한 벽들을 허물기 위함이 아닌지를 묻는 시간이 되기 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에의 사명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임을 깨닫고 그 앞에 헌신하는 일들이 있기 기도한다.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나아가기로 결단하는 모임이 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이 집회를 통해서 발견하게 하신 우리 안의 벽들을 가슴아파하며, 그것들을 허물기로 결심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그리고 이 화목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전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기위한 헌신이 있기를 원한다.
우리의 준비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이 집회에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난 21년간 신실하게 코스타를 통해서 청년-학생들을 불러모으시고 일깨워오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금년에 또다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 앞에 순종하는 또 한번의 축복의 잔치를 기대하며 나아가자.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
금란교회 김홍도목사,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교회재산 유용과 감독회장 불법선거, 여신도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에 대한 내용으로 '길 잃은 목자'로 보도됨. 당시 MBC사옥 앞에서 금란교회 신도들이 시위를 벌이고, 김홍도목사는 몇 차례의 주일설교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사탄의 음해'이라며 성전(聖戰)을 선포함. 그 후 금란교회 김홍도목사 측과 MBC 측이 서로 더 '문제를 삼지 않는 선'에서 매듭지음.
신동아그룹 총수의 부인이자 여러 기독교 선교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던 이형자씨와 검찰총장의 부인이자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연정희씨, 그리고 그 외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주역'을 맡아 열연했던 이른바 옷로비사건. 국회에 나와 성경에 손까지 얹고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서로 열변들을 토했으나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지지 못한 채 이 시대 '지도층' 기독교인들의 추한 모습을 널리 알리는 결과만을 초래함.
충현교회와 광림교회를 비롯한 대형교회들에서 일어난 목회세습. 기독교윤리 실천운동과 월간지 복음과 상황이 공동으로 목회세습에 관한 포럼을 개최하려 했으나 광림교회 측의 난동으로 무산됨으로 말미암아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된 사건. 많은 언론에서 이를 보도하면서 대표적으로 곪아있는 한국 기독교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부각됨.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의 교회재산 유용문제. 아들 조희준이 운영하는 일간지 스포츠투데이를 불법으로 지원하고 교회재산을 개인명의로 등기해 놓는 등 투명하지 않은 재정문제로 주목을 받음. 한 월간지에서 조용기목사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행위'라고 주장해 빈축을 사기도 함. 문제의 스포츠투데이는 스포츠신문들 가운데에도 가장 음란하고 선정적인 기사를 많이 다루는 것을 알려져 청년학생신문 새벽이슬 등에서는 안티스투(Anti Sports Today) 인터넷사이트를 개설하기도 함.
그냥 생각나는 대로 최근 1-2년 사이 한국에서 주목을 받은 기독교관련 사건들을 정리해 보자면 대충 이렇게 될 것 같다. 이외에도 기독교인들이 단군상의 목을 잘라 빈축을 산 일, 비록 이단으로 선언되기는 했지만 이재록목사의 만민교회 신도들의 MBC사옥 난입사건 등 기독교가 언론의 부정적 주목을 받은 사건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identity)은 사람들 앞에서 도무지 내어 놓을 수도 없는 부끄러운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도올 김용옥의 노자강의를 통해 끊임없이 내뱉어지는 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하겠다. 비록 그 내용이 지극히 자유주의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부 내용은 곡해된 것도 있으나, 그 비판에 통쾌해 하는 이 시대의 많은 '반그리스도인'들을 대하며 근본적으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바울의 고백이 도무지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반기독교적 분위기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2-3년 전에 자주 가던 한 인터넷공동체가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관심분야별 보드가 마련되어 있어서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곤 하였는데 그곳의 크리스천보드는 반기독교인들의 성토장이었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기독교가 없어지는 그 날을 꿈꾼다는 사람도 있었고, 기독교의 잘못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헬라어와 히브리어까지 공부하며 연구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의 병폐가 기독교 자체가 갖는 근본적 모순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놓은 글들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매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람들과 시대와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인하여 그들은, '믿어라, 돈내라, 집짓자'만을 외치는 기독교를 더 이상 참고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어떤가. 여러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Bush 행정부 법무장관 지명자인 Ashcroft가 'Jesus is the only King'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 미 법무장관으로서 부적절한 것이었다고 여겨지는 사회 아닌가. 성적순결의 문제에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더 근본적으로 인생의 목표와 행복의 기준에서 미국사회가 복음으로부터 너무 많이 벗어나 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일부 예외가 있지만, 복음이 미국사회에 소망과 비전을 주고 있지 않는 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와중에 미국에 와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복음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없는 골동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추잡한 뉴스나 만들어내는 종교에 자신의 인생과 젊음을 바치기가 너무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외치는 목소리가 필요한 때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벌을 내릴 때에, 그들이 모두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8:12, 표준 새번역)
우리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 같은 각종 보도를 통해 이 시대의 교회가, 특히 한국교회가,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한국사회 전체가 얼마나 부패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복음의 절대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것보다는 교세확장에 치중하는 등의 교회의 모습은 교회에서 '영광스러움'을 빼앗아 버렸다. 이는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외치는 것을 중지해 버린 결과다. 최소한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정확하게 잘못된 것으로 지적할 통찰력과 용기만 있었다면, 이처럼 교회가 처참하게 되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교회의 권위와 영광스러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십자가를, 복음을 주목하게 하였을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사람들이 루터를 '왕따'시키며 정죄하였다고해서 만일 루터가 그 뜻을 물리고 말았다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세우셔서 그 일을 행하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진리를 모르는 채 살아가야 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마다 외롭게 외쳤고, 그 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볼 수 있다. 부정과 부패의 자리마다, 술과 춤과 방탕함이 있는 곳마다, 음란함과 더러움과 탐욕이 가득한 곳마다 소위 '교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세대에서, 한국과 미국의 오피니언리더가 될 우리 기독지성인들이 이 일을 포기한다면 복음의 영광스러움은 영영 역사의 유물과 같이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교회가 영광스러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버린 책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무어라 대답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근본적으로 기독지성인들의 몫이다. 이는 시대정신에 대한 분석과 진단, 복음의 정확한 처방으로 깨야하는 문제이다. 복음이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이라는 달란트를 사용하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중세에 신실한 음악가가 있었다고 하자.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회현실에서 말씀과 시대정신에 대한 통찰이 없이 그저 '감격'에 넘쳐 사역을 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다 쏟아 면죄부를 찬양하는 음악을 지었을 것이다. 철저히 우리 안의 비뚤어진 세계관을 분석해서 고쳐나가지 않으면 감정적 격양만으로 사역에 뛰어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찬양하기 보다는 비뚤어진 시대정신을 더욱 견고히 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요즈음 '신세대' 기독지성인들이 갖는 일반적인 경향이다. 일반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조금 위험할 수는 있으나 그들은 매우 감성지향적이다. '부흥'을 소리높여 노래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지만 정작 그들에게 '부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명확한 대답을 얻기 어렵다. 자신의 신앙은 종교적인, 개인적인, 그리고 감성적인 영역에 가두어 놓고, '고지를 점령하라'는 메시지를 곡해(曲解)해 가며 자기 삶의 다른 영역은 세속적 성공이념으로 채운다. 복음이 젊은 세대들에게 함께 흔들 깃발이요, 함께 부를 노래가 되기보다는 점점 그저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 정도로 전락해 버린 느낌이다.
많은 교회들은 이러한 신세대의 취향에 부합하는 목회전략을 편다. 뜨거운 기도를 '조성하기' 위한 찬양예배용 악기를 장만하는 데에는 신경을 쓰면서 정작 구체적으로 삶을 깊이 나누어가며 제자도를 삶에서 삶으로 전달하는 것은 뒷전에 두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실 목회자 입장에서는, 그 열매를 보는 것도 힘들고 효율도 떨어지는 성경연구, 헌신에의 초청, 일생을 통한 성화를 강조하는 것보다는 '뜨거운' 찬양과 뒷받침되지 않은 감정적 격양을 통해 반짝 뜨겁게 달아올라 교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훨씬 더 달콤한 유혹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삶을 깊이 나누는 훈련을 받은 경험이 없거나 복음으로 사회와 역사와 민족을 바라보는 시각을 공급받은 적이 없는 목회자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저 자신의 영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버거운 경험들을 하고 있다. 지난해 김연종 교수께서 <이코스타>를 통해 지적하신 대로 세상의 문화는 끊임없이 '진보'하여 그 반복음적 모습을 점점 더 심각하게 형성하고 있는 와중에, 다음 시대를 책임질 신세대 기독지성인들, 우리 유학생들의 이러한 비이성적, 개인적 성향은 지극히 우려가 되는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정신에 의해 점령당한 복음
문제를 정확히 보기 위해 문제들을 일반화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의 일반화를 돕기 위해 최근 에 나타난 한국교회의 취약점을 정리해 보자. 우선 재정적인 투명성의 문제이다. 목사 개인이 교회 돈을 유용하거나 목사 개인소유로 소장하고 있는 문제, 그외 여러가지 투명하지 못한 교회의 재정은 많은 사람들의 의혹의 눈초리를 받아왔다. 이기적으로 돈을 숭배하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기본적 반복음적 요소라고 할 때, 이는 교회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문제라기 보다는 비뚤어진 비성경적 시대정신인 배금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잘못 규정지워진 목사의 권위 문제이다. 목사가 마치 하나님과 일반신도들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던가, 목사의 잘못은 비성직 평신도들이 다룰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생각되는 것, 목사의 명령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자신이 '피땀' 흘려 이룩한 대형교회가 하나님의 것이라기 보다는 목사 자신의 소유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한국사회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교회문화 특유의 경직성을 바탕으로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물량적 성공주의이다. 교회와 목사의 성공은 얼마나 복음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승리했는가 하는 것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기준은 흔히 얼마나 많은 신도가 모였는가, 얼마나 많은 헌금이 걷혔는가에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세확장에 열을 올리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며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한 비성직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성공이념과 자신의 신앙과의 연결을 시도해 보지도 않은 채, 성공하고 돈 벌어서 헌금 많이 한다는 식의 지극히 이원론적인 신앙행태를 흔히 보이고 있다. 이 성공이념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교회주의이다. 함께 복음 안에서 일하는 것을 서로 격려하고 연합하기보다는, 더 많이,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 모든 자원과 인력과 재정을 우선적으로 자신의 지역교회, 자신이 속한 모임에 사용하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흔히 모임의 구성원 혹은 평신도들은 지도자 혹은 목회자의 사역도구로 전락하기 마련이고 성숙하고 풍성한 교제보다는 끊임없는 프로그램과 행사 등으로 지치게 된다. 이 문제의 핵심도 역시 비복음적 성공이념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사역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를 비롯한 리더들의 자질 문제이다. 삶과 신앙을 통합하는 노력, 삶을 통한 제자도의 전수, 복음의 역사성 등과 같은 소중한 개념들은 불행하게도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생소하기까지 한 개념들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균형잡힌 복음적 훈련을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채 경험의 한계에서 오는 제한으로 인해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성장을 쉽게 이루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비복음적 전통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치 그것이 복음의 일부 혹은 핵심인 양 전수하는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많은 경우 자신의 제한된 경험,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한 소양 등에 대한 열등감으로 외부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 스스로 차단해 버린 채, 자신이 경험해 왔고 생각해 왔던 비복음적 전통에 대한 도전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행위'로 규정하고 배척한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교회 전반에 편만해있는 사제주의, 권위주의와 결합해 더욱 견고한 진(stronghold)를 형성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한국 교회 문제의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으나, 위의 문제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일관된 것은 로잔언약의 표현을 인용한다면 "교회는 세상에 없고 세상은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교회는 점령당한 반면 복음적 가치관은 세상 속에서 빛을 잃고 영향력을 상실한 현상이다.
가슴이 터질 일이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과 한계로 인해 시대정신에 의해 점령당했고,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가슴을 치며 울며 외쳐야 하는데 우리 주변에서는 여전히 값싼 복음만이 울리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며,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잠깐 참회 기도를 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누가 외칠 것인가. 누가 소리 높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알릴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다면 어떤 대상을 향해 우선 목소리를 높일 것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이다. 대형부정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과연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일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접하는 교회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비복음적 시대정신에 의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복당한데서 나타나는 것이고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이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잘못을 바라보며 내 안의 비뚤어진 가치관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죄를 나의 죄와 동일시하며 눈물 흘리는 일은 진정한 개혁의 출발점이자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비뚤어지고 어르러진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가 보여야할 첫번째 자세는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비판은 때로 즐겁다.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자신의 상처를 들추어내는 것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비판을 하지 않으면 비판은 그 생명력을 잃게 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즐기는 오류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는 비판이 자주 이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눈을 돌려 보아야 할 곳은 바로 내가 속한 지역교회와 캠퍼스모임이 될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 같은 문제들을 우리 현장으로 확장시켜 그 그림자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교회재정의 대부분이 교회건물을 건축/구입/수리/확장/유지하는데 사용되는 등 교회 내부적으로 쓰여지는 일, 교회의 의사결정이 목회자 단독으로 이루어지며 목회자의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 이를 견제하고 수정할 방법이 없는 일, 다른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에 대한 시기로 은연중에 다른 모임에 대한 비난이나 비방이 나누어지는 일, 잘 훈련된 사역자를 다른 모임/교회 등으로 파송하는데 인색한 일 등이다. 비록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 캠퍼스모임에서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것 같은 심각한 대형부정이 현재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적 가치관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고 싸우는 일들이 중단된 채 타협/후퇴/양보/항복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 문제의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도 이를 위해 복음적인 시각으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비복음적 시대정신에 오염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 한계를 넘어 우리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한 작은 모임에서부터 우리는 세상에 대항하는 작은 시도들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비뚤어진 메시지를 참된 복음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을 나누며 서로 격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문제로 인해 세상이 거룩한 복음을 추한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시도들을 지역교회와 캠퍼스모임에서 행할 때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건강한 영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때로 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눈에 힘을 주고 '악에 받혀' 목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에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개혁' 혹은 '변화'이지 '비판' 그 자체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현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칫 무조건적인 비판과 비난으로 흐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사랑'과 '겸손'의 자세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교회와 캠퍼스모임에서 '권위'에 순종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비복음적 전통을 깨는 일은 때로 자신을 더 희생해 가면서 '체제(system)' 안에서 권위를 존중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러나 비복음적 전통과 권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그러나 사랑과 겸손의 마음으로 맞서되, 복음 안에서 용납되는 권위와 전통은 존중하고 따르는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특히 어떤 체제의 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일수록 그 체제에 대한 겸손한 섬김을 계속해야 한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높이고 사라지는 일은 자신과 공동체 모두에게 매우 파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잘못을 깨닫게 되는 과정의 핵심은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사람의 변화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의 한계를 쉽게 뛰어넘지 못한다. 오랜 세월 비복음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잘못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잘못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많은 진통이 따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개혁과 변화의 주권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개혁자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자신이'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체제를, 그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고 겸손히 그분의 도구로서 남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연구와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나와 같이 마음이 굳은 사람'이 변화되었듯이 바로 그 사람도, 그들도, 성령님의 비추심으로 인해 자유를 얻도록, 이 모든 과정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맡으시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그리고 물론 전체 한국교회, 한국사회를 향한 외침도 그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이러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각종 단체들을 지원하고,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일을 해야한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이 일을 어떻게 분담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동역자들과 대화하며 끊임없이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해야한다.
세상으로 복음의 영광을 주목하도록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복음이 우리 삶과 사회와 역사와 시대의 유일한 소망이 됨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시대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점점 십자가는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채 복음적 세계관으로 무장되지 못한 '교인'들이 마치 기독교의 대표인 양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서, 주 안에서 나와 함께 형제된 다른 이들의 잘못을 눈물을 흘려 참회해야하지 않겠는가. 내 살을 깎아내는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우리 안의 잘못들을 소리높여 이야기하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 이제 진정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모습을 회복하겠노라고 다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로 말미암아 다시 세상으로 복음의 영광을 주목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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