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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01 03:00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2월호

추한 기독교

  • 금란교회 김홍도목사,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교회재산 유용과 감독회장 불법선거, 여신도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에 대한 내용으로 '길 잃은 목자'로 보도됨. 당시 MBC사옥 앞에서 금란교회 신도들이 시위를 벌이고, 김홍도목사는 몇 차례의 주일설교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사탄의 음해'이라며 성전(聖戰)을 선포함. 그 후 금란교회 김홍도목사 측과 MBC 측이 서로 더 '문제를 삼지 않는 선'에서 매듭지음.
  • 신동아그룹 총수의 부인이자 여러 기독교 선교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던 이형자씨와 검찰총장의 부인이자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연정희씨, 그리고 그 외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주역'을 맡아 열연했던 이른바 옷로비사건. 국회에 나와 성경에 손까지 얹고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서로 열변들을 토했으나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지지 못한 채 이 시대 '지도층' 기독교인들의 추한 모습을 널리 알리는 결과만을 초래함.
  • 충현교회와 광림교회를 비롯한 대형교회들에서 일어난 목회세습. 기독교윤리 실천운동과 월간지 복음과 상황이 공동으로 목회세습에 관한 포럼을 개최하려 했으나 광림교회 측의 난동으로 무산됨으로 말미암아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된 사건. 많은 언론에서 이를 보도하면서 대표적으로 곪아있는 한국 기독교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부각됨.
  •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의 교회재산 유용문제. 아들 조희준이 운영하는 일간지 스포츠투데이를 불법으로 지원하고 교회재산을 개인명의로 등기해 놓는 등 투명하지 않은 재정문제로 주목을 받음. 한 월간지에서 조용기목사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행위'라고 주장해 빈축을 사기도 함. 문제의 스포츠투데이는 스포츠신문들 가운데에도 가장 음란하고 선정적인 기사를 많이 다루는 것을 알려져 청년학생신문 새벽이슬 등에서는 안티스투(Anti Sports Today) 인터넷사이트를 개설하기도 함.

그냥 생각나는 대로 최근 1-2년 사이 한국에서 주목을 받은 기독교관련 사건들을 정리해 보자면 대충 이렇게 될 것 같다. 이외에도 기독교인들이 단군상의 목을 잘라 빈축을 산 일, 비록 이단으로 선언되기는 했지만 이재록목사의 만민교회 신도들의 MBC사옥 난입사건 등 기독교가 언론의 부정적 주목을 받은 사건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identity)은 사람들 앞에서 도무지 내어 놓을 수도 없는 부끄러운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도올 김용옥의 노자강의를 통해 끊임없이 내뱉어지는 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하겠다. 비록 그 내용이 지극히 자유주의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부 내용은 곡해된 것도 있으나, 그 비판에 통쾌해 하는 이 시대의 많은 '반그리스도인'들을 대하며 근본적으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바울의 고백이 도무지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반기독교적 분위기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2-3년 전에 자주 가던 한 인터넷공동체가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관심분야별 보드가 마련되어 있어서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곤 하였는데 그곳의 크리스천보드는 반기독교인들의 성토장이었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기독교가 없어지는 그 날을 꿈꾼다는 사람도 있었고, 기독교의 잘못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헬라어와 히브리어까지 공부하며 연구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의 병폐가 기독교 자체가 갖는 근본적 모순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놓은 글들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매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람들과 시대와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인하여 그들은, '믿어라, 돈내라, 집짓자'만을 외치는 기독교를 더 이상 참고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어떤가. 여러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Bush 행정부 법무장관 지명자인 Ashcroft가 'Jesus is the only King'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 미 법무장관으로서 부적절한 것이었다고 여겨지는 사회 아닌가. 성적순결의 문제에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더 근본적으로 인생의 목표와 행복의 기준에서 미국사회가 복음으로부터 너무 많이 벗어나 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일부 예외가 있지만, 복음이 미국사회에 소망과 비전을 주고 있지 않는 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와중에 미국에 와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복음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없는 골동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추잡한 뉴스나 만들어내는 종교에 자신의 인생과 젊음을 바치기가 너무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외치는 목소리가 필요한 때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벌을 내릴 때에, 그들이 모두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8:12, 표준 새번역)

우리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 같은 각종 보도를 통해 이 시대의 교회가, 특히 한국교회가,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한국사회 전체가 얼마나 부패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복음의 절대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것보다는 교세확장에 치중하는 등의 교회의 모습은 교회에서 '영광스러움'을 빼앗아 버렸다. 이는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외치는 것을 중지해 버린 결과다. 최소한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정확하게 잘못된 것으로 지적할 통찰력과 용기만 있었다면, 이처럼 교회가 처참하게 되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교회의 권위와 영광스러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십자가를, 복음을 주목하게 하였을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사람들이 루터를 '왕따'시키며 정죄하였다고해서 만일 루터가 그 뜻을 물리고 말았다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세우셔서 그 일을 행하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진리를 모르는 채 살아가야 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마다 외롭게 외쳤고, 그 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볼 수 있다. 부정과 부패의 자리마다, 술과 춤과 방탕함이 있는 곳마다, 음란함과 더러움과 탐욕이 가득한 곳마다 소위 '교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세대에서, 한국과 미국의 오피니언리더가 될 우리 기독지성인들이 이 일을 포기한다면 복음의 영광스러움은 영영 역사의 유물과 같이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교회가 영광스러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버린 책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무어라 대답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근본적으로 기독지성인들의 몫이다. 이는 시대정신에 대한 분석과 진단, 복음의 정확한 처방으로 깨야하는 문제이다. 복음이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이라는 달란트를 사용하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중세에 신실한 음악가가 있었다고 하자.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회현실에서 말씀과 시대정신에 대한 통찰이 없이 그저 '감격'에 넘쳐 사역을 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다 쏟아 면죄부를 찬양하는 음악을 지었을 것이다. 철저히 우리 안의 비뚤어진 세계관을 분석해서 고쳐나가지 않으면 감정적 격양만으로 사역에 뛰어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찬양하기 보다는 비뚤어진 시대정신을 더욱 견고히 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요즈음 '신세대' 기독지성인들이 갖는 일반적인 경향이다. 일반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조금 위험할 수는 있으나 그들은 매우 감성지향적이다. '부흥'을 소리높여 노래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지만 정작 그들에게 '부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명확한 대답을 얻기 어렵다. 자신의 신앙은 종교적인, 개인적인, 그리고 감성적인 영역에 가두어 놓고, '고지를 점령하라'는 메시지를 곡해(曲解)해 가며 자기 삶의 다른 영역은 세속적 성공이념으로 채운다. 복음이 젊은 세대들에게 함께 흔들 깃발이요, 함께 부를 노래가 되기보다는 점점 그저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 정도로 전락해 버린 느낌이다.

많은 교회들은 이러한 신세대의 취향에 부합하는 목회전략을 편다. 뜨거운 기도를 '조성하기' 위한 찬양예배용 악기를 장만하는 데에는 신경을 쓰면서 정작 구체적으로 삶을 깊이 나누어가며 제자도를 삶에서 삶으로 전달하는 것은 뒷전에 두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실 목회자 입장에서는, 그 열매를 보는 것도 힘들고 효율도 떨어지는 성경연구, 헌신에의 초청, 일생을 통한 성화를 강조하는 것보다는 '뜨거운' 찬양과 뒷받침되지 않은 감정적 격양을 통해 반짝 뜨겁게 달아올라 교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훨씬 더 달콤한 유혹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삶을 깊이 나누는 훈련을 받은 경험이 없거나 복음으로 사회와 역사와 민족을 바라보는 시각을 공급받은 적이 없는 목회자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저 자신의 영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버거운 경험들을 하고 있다. 지난해 김연종 교수께서 <이코스타>를 통해 지적하신 대로 세상의 문화는 끊임없이 '진보'하여 그 반복음적 모습을 점점 더 심각하게 형성하고 있는 와중에, 다음 시대를 책임질 신세대 기독지성인들, 우리 유학생들의 이러한 비이성적, 개인적 성향은 지극히 우려가 되는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정신에 의해 점령당한 복음

문제를 정확히 보기 위해 문제들을 일반화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의 일반화를 돕기 위해 최근 에 나타난 한국교회의 취약점을 정리해 보자. 우선 재정적인 투명성의 문제이다. 목사 개인이 교회 돈을 유용하거나 목사 개인소유로 소장하고 있는 문제, 그외 여러가지 투명하지 못한 교회의 재정은 많은 사람들의 의혹의 눈초리를 받아왔다. 이기적으로 돈을 숭배하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기본적 반복음적 요소라고 할 때, 이는 교회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문제라기 보다는 비뚤어진 비성경적 시대정신인 배금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잘못 규정지워진 목사의 권위 문제이다. 목사가 마치 하나님과 일반신도들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던가, 목사의 잘못은 비성직 평신도들이 다룰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생각되는 것, 목사의 명령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자신이 '피땀' 흘려 이룩한 대형교회가 하나님의 것이라기 보다는 목사 자신의 소유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한국사회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교회문화 특유의 경직성을 바탕으로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물량적 성공주의이다. 교회와 목사의 성공은 얼마나 복음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승리했는가 하는 것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기준은 흔히 얼마나 많은 신도가 모였는가, 얼마나 많은 헌금이 걷혔는가에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세확장에 열을 올리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며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한 비성직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성공이념과 자신의 신앙과의 연결을 시도해 보지도 않은 채, 성공하고 돈 벌어서 헌금 많이 한다는 식의 지극히 이원론적인 신앙행태를 흔히 보이고 있다. 이 성공이념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교회주의이다. 함께 복음 안에서 일하는 것을 서로 격려하고 연합하기보다는, 더 많이,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 모든 자원과 인력과 재정을 우선적으로 자신의 지역교회, 자신이 속한 모임에 사용하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흔히 모임의 구성원 혹은 평신도들은 지도자 혹은 목회자의 사역도구로 전락하기 마련이고 성숙하고 풍성한 교제보다는 끊임없는 프로그램과 행사 등으로 지치게 된다. 이 문제의 핵심도 역시 비복음적 성공이념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사역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를 비롯한 리더들의 자질 문제이다. 삶과 신앙을 통합하는 노력, 삶을 통한 제자도의 전수, 복음의 역사성 등과 같은 소중한 개념들은 불행하게도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생소하기까지 한 개념들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균형잡힌 복음적 훈련을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채 경험의 한계에서 오는 제한으로 인해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성장을 쉽게 이루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비복음적 전통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치 그것이 복음의 일부 혹은 핵심인 양 전수하는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많은 경우 자신의 제한된 경험,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한 소양 등에 대한 열등감으로 외부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 스스로 차단해 버린 채, 자신이 경험해 왔고 생각해 왔던 비복음적 전통에 대한 도전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행위'로 규정하고 배척한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교회 전반에 편만해있는 사제주의, 권위주의와 결합해 더욱 견고한 진(stronghold)를 형성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한국 교회 문제의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으나, 위의 문제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일관된 것은 로잔언약의 표현을 인용한다면 "교회는 세상에 없고 세상은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교회는 점령당한 반면 복음적 가치관은 세상 속에서 빛을 잃고 영향력을 상실한 현상이다.

가슴이 터질 일이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과 한계로 인해 시대정신에 의해 점령당했고,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가슴을 치며 울며 외쳐야 하는데 우리 주변에서는 여전히 값싼 복음만이 울리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며,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잠깐 참회 기도를 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누가 외칠 것인가. 누가 소리 높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알릴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다면 어떤 대상을 향해 우선 목소리를 높일 것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이다. 대형부정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과연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일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접하는 교회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비복음적 시대정신에 의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복당한데서 나타나는 것이고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이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잘못을 바라보며 내 안의 비뚤어진 가치관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죄를 나의 죄와 동일시하며 눈물 흘리는 일은 진정한 개혁의 출발점이자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비뚤어지고 어르러진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가 보여야할 첫번째 자세는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비판은 때로 즐겁다.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자신의 상처를 들추어내는 것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비판을 하지 않으면 비판은 그 생명력을 잃게 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즐기는 오류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는 비판이 자주 이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눈을 돌려 보아야 할 곳은 바로 내가 속한 지역교회와 캠퍼스모임이 될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 같은 문제들을 우리 현장으로 확장시켜 그 그림자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교회재정의 대부분이 교회건물을 건축/구입/수리/확장/유지하는데 사용되는 등 교회 내부적으로 쓰여지는 일, 교회의 의사결정이 목회자 단독으로 이루어지며 목회자의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 이를 견제하고 수정할 방법이 없는 일, 다른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에 대한 시기로 은연중에 다른 모임에 대한 비난이나 비방이 나누어지는 일, 잘 훈련된 사역자를 다른 모임/교회 등으로 파송하는데 인색한 일 등이다. 비록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 캠퍼스모임에서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것 같은 심각한 대형부정이 현재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적 가치관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고 싸우는 일들이 중단된 채 타협/후퇴/양보/항복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 문제의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도 이를 위해 복음적인 시각으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비복음적 시대정신에 오염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 한계를 넘어 우리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한 작은 모임에서부터 우리는 세상에 대항하는 작은 시도들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비뚤어진 메시지를 참된 복음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을 나누며 서로 격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문제로 인해 세상이 거룩한 복음을 추한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시도들을 지역교회와 캠퍼스모임에서 행할 때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건강한 영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때로 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눈에 힘을 주고 '악에 받혀' 목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에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개혁' 혹은 '변화'이지 '비판' 그 자체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현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칫 무조건적인 비판과 비난으로 흐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사랑'과 '겸손'의 자세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교회와 캠퍼스모임에서 '권위'에 순종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비복음적 전통을 깨는 일은 때로 자신을 더 희생해 가면서 '체제(system)' 안에서 권위를 존중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러나 비복음적 전통과 권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그러나 사랑과 겸손의 마음으로 맞서되, 복음 안에서 용납되는 권위와 전통은 존중하고 따르는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특히 어떤 체제의 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일수록 그 체제에 대한 겸손한 섬김을 계속해야 한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높이고 사라지는 일은 자신과 공동체 모두에게 매우 파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잘못을 깨닫게 되는 과정의 핵심은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사람의 변화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의 한계를 쉽게 뛰어넘지 못한다. 오랜 세월 비복음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잘못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잘못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많은 진통이 따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개혁과 변화의 주권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개혁자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자신이'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체제를, 그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고 겸손히 그분의 도구로서 남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연구와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나와 같이 마음이 굳은 사람'이 변화되었듯이 바로 그 사람도, 그들도, 성령님의 비추심으로 인해 자유를 얻도록, 이 모든 과정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맡으시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그리고 물론 전체 한국교회, 한국사회를 향한 외침도 그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이러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각종 단체들을 지원하고,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일을 해야한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이 일을 어떻게 분담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동역자들과 대화하며 끊임없이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해야한다.

세상으로 복음의 영광을 주목하도록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복음이 우리 삶과 사회와 역사와 시대의 유일한 소망이 됨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시대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점점 십자가는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채 복음적 세계관으로 무장되지 못한 '교인'들이 마치 기독교의 대표인 양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서, 주 안에서 나와 함께 형제된 다른 이들의 잘못을 눈물을 흘려 참회해야하지 않겠는가. 내 살을 깎아내는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우리 안의 잘못들을 소리높여 이야기하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 이제 진정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모습을 회복하겠노라고 다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로 말미암아 다시 세상으로 복음의 영광을 주목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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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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