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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7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선교한국 상임총무인 한철호 목사의 '하나님 나라란?'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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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한국의 상임총무로 일하고 있는 철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정의와 의미가 무엇인가 잘 이해하고 있으면 강의를 들을 때 정확한 이해와 적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디즈니랜드에 다녀왔습니다. 각 나라가 모형으로 되어 있는 곳에 갔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는 그런 세상을 추구해온 역사입니다. 철학, 문화, 이런 것들도 가장 이상적인 세상을 달성하려고 한 것이겠죠. 플라톤이 좋은 요소를 모아서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고 이름을 유토피아로 붙였습니다. 그런 나라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헤로도토스는 미래를 위해 걱정해야하는 현재가 지속되는 한 희망은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래학자들의 고민의 결론, 결국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이 그들이 가장 많이 쓴 단어입니다. 그런데 성경도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기도합주를 설명하면서 성경을 종말에 관한 약속과 기록이라 설명했습니다. 성경도 하나님이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핵심입니다. 이 세상을 만든 분도 하나님이고 종말도 하나님이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의 주제도 이런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마지막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천국이 오면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드는 모든 나라가 평화롭고, 자연도 평화로운 그런 나라가 올 거라는 것입니다. 자연도 더 이상 악이 존재하지 않고 행복과 안녕과 화평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가 첫마디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느니라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거입니다. 천국의 비유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원입니다. 승천을 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해가는 과정이 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 항상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죠. ‘This is good’ ‘와 너무 좋다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내적인 속성을 따라서 인간을 거룩하게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양심있는 이런 형용사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인간이 자연만물과 조화롭게 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세상,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이를 낳으면서 제가 그런 것을 느꼈는데요, 자연분만이 뭔지 아십니까?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뭐 하는지 아십니까?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진통이 있는데, 아이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위험해진 것입니다. 죽느니 사니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아이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겨우 나오면서 제 품에 안겼습니다. 20초간 너무 감동스러웠습니다. 나중에 저와 똑 같은 아이를 보면서 감동했던 일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이 죄에 빠져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건이지요. 이후 원래 창조 질서로 회복하는 과정이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나라를 쓸 때, 통치자, 영토, 사람이 있어야겠죠.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나라를 말할 때 보통 통치권, 신약에서도 통치권, 영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어떤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권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영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리가 미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왕위, 다니엘의 환상 중에 영원한 나라를 말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통치권에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는 사람의 선택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우리의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야하는 이유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자의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날, 이 통치권에 들어가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죄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벗어나는 때도 있겠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하겠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갖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합니다. 비밀 mystery 감춰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드러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바울 사도도 사용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이 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합니다. 왕 중의 왕이 이 땅을 다스리겠다는 말이죠. 뜨인 돌이 여기서 나오죠. 영원한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다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할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보죠.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아주 흥분한 것이죠. 마지막 때가 되니 겁먹고 회개하려고 요한에게 몰려든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오면 심판이라는 톤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면서 시험 당하십니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군사력을 동원해서 로마를 쳐들어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그리고 제자 12명을 부르시죠. 사람을 수 만명을 모아야 하는데, 겨우 12명의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죠.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이런 질문인데,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냐면, 요한은 예수님이 힘을 갖고 군사력을 동원해서 로마를 쳐부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새로운 윤리를 알려주고 이런 일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요한은 혹시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 것 아닌가요? 이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이런 말을 전해줍니다. 바로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부터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줍니다. 천국은 메시아가 칼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온다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은 것이고,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천국은 아주 작은 것으로 시작하지만 아주 커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같지만 나중에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 속에 말씀 하나가 떨어졌는데, 내 삶이 바뀌고, 내 가정이 바뀌고, 동료가 바뀌고 부모님이 바뀌는, 그런 형태로 천국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또 마지막 날에 가르침도 밭에 감춘 보화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만났을 때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이것을 사죠. 가장 좋은 보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에는 어떻게 되는가를 마태복음 24장 이후에 설명합니다. 환란이 있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결정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마치 겨자씨처럼.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완성되냐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복음이 이땅에 오게 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이 완성됩니다. 초림으로 예수님이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초림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 극복 못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왜곡된 나라에서 사탄이 통제하는 방법이 죄를 짓게 하고 그 결과 죽게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사시므로 사탄을 물리침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완전히 괴멸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는 요소를 제거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나라가 오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까지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면 심판이 오십니다. 구원받는 자와 심판받는 자가 구별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도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법대로 살도록 스스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아이를 키울 때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키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러나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있는 것입니다. 결혼문제, 직장문제, 가정 문제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성경에서 봐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언제 완성되냐면, 이 복음이 온 땅에 퍼져야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선교와 천국은 밀접히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와 전도에 힘써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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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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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2002 KOSTA/USA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주제로 강의한 손봉호 교수의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이다.


세계관이란 말을 자주 들어보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세계관은 분명한 개념이 있는게 아닙니다. 19세기 독일철학가들이 철학의 일부로 이야기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 도이벨트라는 사람이 세계관 이야기를 조금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일반화된 신학적, 철학적 개념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월드컵에 대해서 온 사회가 열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모두 기독교인입니다. 뉴스앤조이라는 온라인 신문 인터뷰에 월드컵에 대해 비판을 했습니다. 월드컵이 너무 상업적이고 스포츠정신에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혼자만의 생각인가 했었는데 기독교방송국에 방송할 일이 있어서 가보니 그곳 기자들이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MBC방송국에서도 월드컵에 대해 토론을 하는곳에 가서 한참 비판했더니 다음에 나오지 말라고 하더군요. 같은 사건에 대해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면 어느 장로님이 딸이 셋인데 음악을 잘했습니다. 장로纛?박정희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불러서 청와대에서 연주를 하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은 기뻐서 이야기를 전했는데 딸들은 왜 가냐고 하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라는 소리를 어려서부터 들었더니 대통령은 시시하게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월드컵을 보는 눈이나 권위에 대한 시각이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 따로 따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어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일관성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문화마다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사회를 어떻게 보는가?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신을 어떻게 보는가? 가치기준은 어디에 두는가? 이런 것은 모두 연관이 되어있고 이것을 세계관이란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아직까지는 문화가 종교에 의해서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 전세계 문화가 세속화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종교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신비로운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화를 분류하는데 기독교권, 이슬람권, 유교권, 불교권이라고 나눕니다. 그렇게 나누어 놓으면 상당한 현상이 설명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나눕니다. Huntington이란 사람이 문명의 충돌이란 책에서 종교를 중요한 결정요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문화를 분류하고 문화에 따라서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다면 세계관은 종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철학사상이나 이념같은 다른 것, 종교외적 요소가 세계관을 결정하는데 작용할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세계관이 많이 달라져 온 것을 보면 보고서도 알수 있구요. 그리고 앞으로는 그 정도가 심해 질 것으로 추측을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다르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관성없게 신앙 생활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기독교적으로 사회를 보고 인간을 보고 자연을 보고 우주를 보지 않고 불교적으로 본다면 문제가 될 겁니다. 불교가 세계를 보는 눈은 기독교와 다르니까요. 이런 것이 구체적인 가치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월드컵. 어떤 사람들은 월드컵이 우리나라에 큰 공헌을 미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한국만 잘되어서 좋아해야 하겠느냐면 기독교적인 올바른 세계관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16강에 가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위해 기도를 할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면 나라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애국은 다른 사람들의 애국과 달라야 합니다. 불쌍한 나라를 돕고 문화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우리나라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좋지만 다른 나라를 짓누르고도 애국을 부르짖는 다면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주위에 휩쓸려서 가치관이 같아질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세계관이 무엇이고 우리는 어떠한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신학적 배경은 칼빈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의 니오칼비니즘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지 않은 영역은 하나도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을 월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주일날만 기독교인처럼 산다면 일관성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집에도, 학교에도, 정치판에도 계시고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교회를 개척했을 때에 강대상에 신을 신고 올라가느냐, 벗고 올라가느냐에 대해 논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을 신고 올라가자고 주장을 했습니다. 신을 벗고 올라가자는 사람들의 많은 생각은 출애굽기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신을 벗으면 강대상위는 거룩하고 강대상 아래는 덜 거룩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 예배당 마당은 조금 덜 거룩하고 시장바닥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라리 그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한곳을 거룩하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특강할 때에 예배당은 거룩할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예배당은 예배 드리는 처소지 거룩할 필요가 없다. 들판도 두세사람이 모여 예배하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라 부르면 안된다. 왜냐하면 성전은 제사 드리는 곳이었고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실 때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누구나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어느 곳에서나 제사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성전은 없어졌다. 그렇게 특강을 했더니 노회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손봉호가 이단을 가르친다고 총회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올려야 할지 판단을 내려야 해서 박윤선 목사님께 여쭈어봤는데 손봉호 말이 맞다고 해서 이단이 안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보면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고 강조가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지어놓고 솔로몬이 기도한 것을 보면 천지를 지으신 분이 성전 안에 계시겠느냐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인 가치판단, 행동구조가 성경과 일관성이 있으면 올바른 기독교인으로서의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문화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잘못 된거냐라고 반문이 들어오면 기독교 세계관은 모든 종교적 세계관중에 가장 옳기 때문에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손해보게 된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만드신 것은 이를 선전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힌두교에 과부를 화장시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같이 화장시켰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고 나서 보니까 힌두교전통을 많이 인정하려 했지만 이것만은 안된다고 금지시켰습니다. 네루수상도 안된다고 금지해왔는데 최근 인도의 지성 여인들이 그것이 영국의 법안이라고 바꾸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했답니다. 고유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풍속이 과연 옳은가? 요새 다원주의라고 해서 모든 문화의 요소를 용인해야 한다. 관용이라는 것은 미덕이라 해서 받아 들어야 한다는데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 세계관이 옳고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아직도 여자 할례가 있습니다. 케냐 박물관에도 할례에 사용되는 돌칼이 가장 많았습니다.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들은 문화에서 독립 되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수용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누리고 가치를 누린다고 보기 때문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 세계관을 결정하는 요건이 무엇인가? 다른 세계관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고 나머지는 자연종교라는 것입니다. 자연종교는 사람의 경험과 지혜로 만든 종교(불교, 힌두교, 유교)이고 계시종교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기독교, 이슬람교). 키에르케고르라는 덴마크 철학자가 쓴 책 중 ”스승으로서의 예수와 스승으로서의 소크라테스”라는 문단에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교육시킨다. 플라톤은 인간은 태어날 때에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 있지만 영혼이 육체를 입어서 다 잊어버린다. 교육을 통해서 잊었던 것을 다시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이 자극을 하면 알게 된다고 하고 이런 교육방법을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노예가 대화를 하는데 가르쳐주지는 않고 질문만 합니다. 가르쳐 주지 않고 질문으로 자극을 하니까 노예소년이 삼각형의 세각의 합은 두 직각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불교도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계속 돕니다만 고승들은 부처로 직행이 됩니다. 니체가 기독교는 천민종교라고 했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구원 받는 것입니다. 스승으로서 예수는 제자가 완전무식해서 모두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집어 넣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찾을 능력이 없고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려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증거하라고 하면 성경이 말하기를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니까 그런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로마의 교구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이 I believe because it is illogical. 논리적이지 않아서 믿는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이거 아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 다 논리적이면 사람이 만들어 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전도사님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생각이 내 생각이랑 똑같다고 좋아한다고 하는데 과연 하나님 생각이 한낱 사람의 생각과 똑같은 것인지…다른 예를 들어보면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였는데 원본은 없고 사본만 남아있습니다. 사본과 사본을 대조해보면 대부분은 같지만 조금 다른 곳이 있을 때에 규칙이 하나 있는데 두 텍스트를 비교해서 문법에 맞지 않는 것이 더 원본에 가깝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설명 못하는게 더 많습니다. 어떤 것들은 그냥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는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관을 결정짓는 것 중에 하나는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느냐? 에 관한 대답입니다. 원래 있었다 or 만들어졌다. 성경만이 무에서 유로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Bang theory 가 천문학에 있다고 하는데 전파가 계속 들리는데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포착했다는데 언젠가 우주가 폭발되어서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기독교의 창조론과 너무 가깝다. 재미난 말 하나 중에는 과학자들이 연구를 열심히 해서 가니까 신학자들이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자연종교는 우주를 살아있는 생물체로 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물질입니다. 자연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Generation vs fabrication. 생물학적으로 낳는 것을 generation이라 하고 손으로 만드는 것을 fabrication합니다. 기독교의 창조는 fabrication입니다. 고대사상들은 유기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도, 불교도 그렇습니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에 따라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기독교에서의 인간관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이야기하기를 인격이라는 말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도 자유의지가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유 의지란 원인없이 결정을 내릴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임회피 할 때에 안할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고 잘하면 자기가 했다고 하는데 자유 의지란 것은 원인 없이도 자기가 결정을 내리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람을 반박하기 위한 우화가 하나 있습니다. 당나귀가 있는데 두쪽에 풀이 있는데 질과 양이 똑같아서 오른쪽을 보니까 똑같아서 구지 먹어야 할 이유가 없고 왼쪽을 보니가 역시 먹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양쪽을 보기만 하다가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결정론이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고 합니다. 자유의지는 이유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게 인격체이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가 있고 그래야 책임을 질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인격의 존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잘못했을 때에 벌한다는 것은 그만큼 존재에 대해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에 아이들이 잘못했다고 했다고 했어도 잘못에 해당하는 벌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인간관을 가져야 인권을 가지게 되고 인격을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국제 보편인권선언이라는 것을 했는데 왜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가? 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거기에 대한 근거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기 때문에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수단화하지 마라라고 했는데 역시 거기에 대한 근거도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연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중 한명이 오늘날 환경오염의 문제는 기독교가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자연을 비신격화했다. 신성을 제거해 버려서 사람들이 자연을 착취해서 자연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오염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은 인간의 욕망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 대해 여기에 책임을 지려면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국에 기독교 실천운동은 정직과 절제를 강조합니다. 생활을 단순하게 해야 하고 에너지도 적게 쓰고 음식도 적게 먹어야 합니다. 에어콘도 덜 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물도 절약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본래 선한가? 에 대한 질문. 유교, 불교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기독교는 성악설을 가르칩니다. 로마서 3장 이하에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보면 무섭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스스로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누가 구해 주어야 합니까? 누군가 구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민주주의와 연결을 시키면 칼빈주의에서 장로교 제도가 나왔는데 장로교 제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힘의 분산입니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삼권분립이 나온 것입니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절대부패를 믿기 때문에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도 살펴보면 인간이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이 착하다고 보아서 필요한 것만 사용하고 능력만큼 일할 줄 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입니다. 목사님들이 중요한 결정을 혼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의 요건 중에 하나는 힘을 나누어 책임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집사로 교회에서 설교를 하니까 노회가 반대를 합니다. 그러자 교회가 노회에서 탈퇴하자고 하니까 제가 탈퇴하면 손봉호 교회가 되고 내가 잘못되면 완전히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고 치명적인 부분을 드러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베드로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성경에서 볼수 있습니다.

기독교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적 자연관, 인간관, 사회관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당하며 사실을 잘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세계관을 의식적으로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면 공동체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삶이 올바르게 될 뿐만 아니라 문화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신학자가 Christ and culture라는 책에서 칼빈주의 문화관을Christ as the transformer of culture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허무주의로 가고야 마는 물질주의, 쾌락주의, 상대주의를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가 그대로 두면 망하게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논리는 재미있잖아요 입니다. 재미있는 것 계속 해보세요 재미가 있는가? 마약이나 성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에 문화를 구원하기 위해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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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2003년 KOSTA/USA에서 김영봉 목사가 '기도의 삶을 위한 인간이해'라는 세미나를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2007년 집회에서도 멋진 세미나로 섬겨주실 김영봉 목사님의 강의를 기대합니다.


뉴저지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김영봉 목사입니다.(지금은 DC지역에서 목회하고 있다 - 편집부)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냈는데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주 영적생활에 대해서 질문을 해올 때 상담을 해보면 상담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상황에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상담후 돌아가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신앙생활 안내서를 주고 싶어서 이 책을 썼습니다. 어제 소개된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란 책중에 기도는 훈련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삶이라면 기도가 잘못되면 삶 전체가 잘못된다는 것이고 기도가 어려워지면 삶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가 즐거워지면 삶이 즐거워지고 또 기도가 왜곡되면 우리의 삶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항상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딸아이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성경구절을 보고서 무슨 뜻이냐고 묻길래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냐고 되물었더니 기도하다 쉬지 말라는게 아니냐고 그랬습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더니 어떻게 24시간 항상 기도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겠는가? 기도가 어렵지 않고 즐거운 일이 되겠는가? 찬송중에 ‘내 기도하는 이시간 그때가 정말 즐겁다’고 하는데 저는 오랫동안 기도하는게 힘들었습니다. 물론 기도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랬지만 노동처럼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의무감에서 벗어나면 기도를 쉬었습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하나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기도의 상태에서 하루종일 삶을 사는 것. 이것을 늘 즐겨하고 사모하는 상태로 바뀔 수 없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을 쓰게된 동기입니다.

이 책에 다섯부분중 첫부분은 한국에서 가르치는 기도방식의 잘못된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산타크로스냐? 이것은 헨리나우엔이 지적한 것인데 어린 아이들이 선물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기도의 촛점을 다른곳에 두고 나를 잊기 때문에 기도의 경험이 문제가 되고 응답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세상이 우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내 시야가 변하고 내 생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촛점이 다른 사람,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째는 기도는 하늘보좌를 움직인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기도를 요청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의 요청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앞에 나열하는 것은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직책을 맡았을 때가 있었는데 학생이 임원에게 왔을 때에 요구사항만 나누면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의 과정이지 요구조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티즈 목사님의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의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받습니다 라는 책에서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junk mail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기도의 대부분이 버려지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다 얻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에 그런 말이 있지만 그 앞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면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설정이 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초신자의 경우에는 가끔 그럴 경우가 있지만 그런 일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의식을 수정하고 기도의 방법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숙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잘못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생각할 때에 율법적인 하나님으로 생각을 해서 우리를 못마땅해하고 우리에게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걸복걸 부르짖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시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상을 우리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 신관으로 자꾸 돌립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은 유대인이 생각하기에 유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선의를 가지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멀리 계신, 율법적인 하나님 상을 바꾸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상으로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두번째 기도가 잘못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막연히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게 되면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찾아보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실 정답을 낼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물이 아니라 인격체이기 때문에 전체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격은 개개인이 다르고 그 개인도 지금과 나중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정답을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두번째는 인간이해는 인간이 주체이며 객체이어야 하는 모순이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세번째는 인간에 대해 이해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축소될수 밖에 없습니다. 칼융이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단순화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언어로 표현을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다르게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근거로 한 가설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말씀드립니다.

바울의 인간이해를 보면 인간 안에 세개의 자아가 있습니다. 헬라어를 우리말로 풀면 영, 혼, 육. 세 자아가 하나가 되어 활동하는 것을 몸이라 합니다. 바울이 많은 경우Body(몸)와 flesh(육)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를 통합하여 삼분법의 제 삼의 인간이해를 만들어 냈습니다. 히브리 사고에서는 인간을 분리될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로 이해했고 헬라적인 사고로는 인간의 영과 육이 분리가 된다고 이해했습니다. 영이 육속에 갇혀 있어서 구원은 영이 육에서 해방된다는 것이고 영혼불멸설로 발전을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이 분리되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이 새롭게 되어서 전체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헬라적인 이원적인 이해를 극복해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전체가 새로운 차원으로 구원된다는 삼분법으로 이해했습니다. 영이라는 자아를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육을 겉사람이라고, 혼을 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육(ed), 혼(ego, self), 영(superego, the self)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동양전통 유교에서는 육을 수성이라 하고 혼을 인성, 영을 천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안의 세가지 자아에 대한 개념을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육은 주로 본능적인 욕구를 이야기합니다. 육적인 성향을 부정적으로 많이 보아왔지만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선할수도 악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 관찰하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욕구가 나를 이끌어 간다고 알고 그것에 육체적인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둘째로 혼에 대해 살펴보면 태어났을 때에는ego가 없습니다. 자라면서 자기보존의 욕구에 의해 자기를 만들어 갑니다. 혼의 자아는 우리에게 본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자아관을 형성하는 것이 엄마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가 엄마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거부될 때에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혼의 자아는 예수님을 믿기전, 믿은후. 혼의 자아상은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자아상은 버려야 합니다. 세번째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기 위해 주신 접촉접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해 명제적으로 진술한 것에 세가지인데 요한복음에 영이시다. 진리다. 사랑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했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심산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길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디나 존재하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재할 수 있는 영역으로 주어진 것이 영입니다. 그래서 인간안에는 세가지의 자아가 활동하고 있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세자아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정신질환은 세자아가 갈등하는데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세 자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동심원 세개가 있고 맨바깥쪽에 영에 해당하는 것은 점선으로 되어있습니다. 동심원의 크기는 영향력을 말합니다. 제일 작은 동심원은 육, 그다음은 혼, 그리고 영이 가장 큰데 이 순서로 영향력의 크기가 되어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과 교제하면 진리를 영이 깨닫게 되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전이받게 되어있습니다. 육과 혼으로는 하나님을 만날수 없고 참된 진리를 알수 없으며 참된 사랑을 할수 없는 것입니다. 영향력이 미치는 방향이 영이 혼과 육을 통제하게 됩니다. 이러면 자아가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존재가 영과 혼과 육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창세기 일장의 인간이 바로 이런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삼장의 인간은 타락한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었고 욕구가 생겼고 뱀과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뱀이 어쩌다 마주쳤는데 그냥 한번 만남에 넘어갔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엉터리 작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뱀과 꾸준히 사귐으로서 인간이 가장 많이 사귀어야 할 대상인 하나님, 배우자 그리고 동물인데 육적인 자아가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C.S Lewis의 책중에 사탄이 기독교인을 어떻게 넘어뜨릴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은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보면 인간은 신적인 존재로 솟아날수 있는 가능성과 동물적인 존재로 떨어질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와 사귀냐에 따라 신적인 존재로 될수도, 동물적인 존재로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들은 죄의 열매를 이야기하고 죄는 뿌리, 본질적인 상태, 하나님과의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사귐은 사귐은 사귐의 대상과 같은 성향이 커지게 되고 사귐의 대상과 다른 성향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영은 죽어버리고 육과 혼만 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육과 혼도 분열됩니다. 육과 혼이 싸워서 이기는 쪽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진리를 알수도 없고 사랑을 할수도 없습니다. 자연인은 이런 상태인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우리 안에 바울이 이야기한 속사람이 생겨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지만 속사람이 태어나게 된 후에 영이 주관하게 되는 완전한 통합이 될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태어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 더 생겨납니다. 두자아가 싸우다가 세자아가 싸우게 되기 때문에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요구하게 되는데 높은 차원의 부름과 낮은 차원의 부름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롬7장14절에 보면 영이고 속사람이 있고 속에 또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끌어내리게 되고 혼의 자아는 고통스러워 하게 됩니다. 차라리 안믿었더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25절 후반에 보면 영이 막 태어난 우리의 상태입니다.

영이 태어난 상태에서 이제 영이 성장해 가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부름을 위해서 경주해 가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과의 부단한 사귐를 통해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귐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많이 하고 있는 요구의 기도의 대부분은 혼에서 나옵니다. 사귐의 기도가 되지 못하고 요구의 기도가 계속되게 되면 문제는 자아가 변하지 못하고 강화가 됩니다. 요구만 하고 그러다가 가끔 되는 것이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영이 성장해야 하는데 영은 성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곤고한 사람의 상태에서 10년 20년 머무르게 됩니다. 진리의 자유함을 맛보지 못하고 진리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귐의 기도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유는 우리가 영을 키워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귐의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자아는 원래 자아보존의 원칙이 있기 때문에 죽어 사라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길 원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서 나의 자아는 사라져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내 기도가 혼에서 나오는 나의 요구만을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을 피하면서도 정서적으로 기도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욕구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 자아가 기도를 하는 것인지 영이 기도를 하는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 요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침묵도 하고 묵상도 하고 내 영의 사람과 하나님의 충만한 경지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성생활이 무엇이냐 생각해 보면 참된 영성생활은 영과 혼과 육 세가지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고 기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영성생활은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우리자아가 내놓는 요구의 기도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좋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변화하게 됩니다. 헨리나우엔은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참된 기도의 사람은 용기없이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무의식중에 하나님에게서 떠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변화하게 되는데 자아는 하나님이 변화시키게 하시기를 싫어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물을 던지라고 한곳에 그물을 던지고서는 나를 떠나달라고 고백하는데 이것은 변화되기 싫다는 자아의 고백입니다. 나는 고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부정합니다. 누구에게나 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가 깊은 기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100%열어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 삶의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전통적으로 요구하는 관습에 매여 기도하면 우리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가 행복해 집니다. 이렇게 기도가 바뀌어 우리의 삶전체가 바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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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미나는 2003 KOSTA/USA에서 한국 라브리 성인경 목사의 세계관 강의인 '세계관 전쟁'을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전쟁중입니다. 범죄와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 사스와의 전쟁. 이렇게 전쟁의 연속이지만 진정한 전쟁은 영적 전쟁이고 영적전쟁의 최전선에는 세계관 전쟁이 있습니다. 이라크전쟁도 종교간의 전쟁이라고도 하고 문명간의 충돌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세계관 전쟁입니다. 미국 제국주의와 이라크의 국수주의간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관의 전쟁은 우리의 삶속에 매일 일어나는 심각한 전쟁입니다. 하지만 세계관 전쟁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와 문화 배후에는 세계관의 전쟁이 있습니다. 실제로 국가와 개인간의 전쟁을 살펴보면 그 국가과 개인의 가치관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정당성이라는 가치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누가 참이냐 거짓이냐 누가 선이냐 악이냐를 구분짓는 전쟁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3절에 보면 마지막 때가 올 때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영어로는 prepare your minds for action, 영적인 전쟁이 다가오는데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세계관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이시대에 여러분은 얼마나 준비되었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왜 필요한가입니다.
아내와 시장을 보러 가는데 어떤 아줌마가 아이손을 잡고 가다가 “얘야, 너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아저씨처럼 된다.”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환경미화원 아저씨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봤더니 우리 교회에서 믿음 제일 좋다고, 기도많이 한다고, 전도 제일 잘 한다는 아주머니였습니다. 믿음은 좋은지 몰라도 세계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사고방식, 직업귀천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믿음이 좋은지 몰라도 아주머니는 잘못된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서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는 것을 믿습니까? 청소부가 청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공부 열심했는데 나쁜짓 해서 감옥에 가있으면 어떻게 된 겁니까? 공부 잘 못했는데 지금 이웃을 도우며 훌륭한 삶을 살아가면 어떻게 된 걸까요? 그리고 이때쯤 고려대학교 총장 홍일식 박사가 쓴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라는 책에서 한국 사람은 일상생활은 유교식으로 하고 사고방식은 불교식을 하고 신앙생활은 무당식으로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평생을 유학자였던 그가 지적한 이내용은 저에게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믿음만큼 그 사고방식이 하나가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을 잘 가르쳤을지 몰라도 사고방식이 변화되고 세계관이 바꾸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을 보면 너희가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뜨거운 마음, 친절한 마음이 아니라 예수의 사고방식, mind,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라 라는 말입니다.

저는 라브리 선교회에서 청년대학생들을 돕고 가르치는데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었는데 고등학교때부터 성경의 이적기사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사람인데 부모나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토론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학원에서는 더이상 이렇게 살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한달을 방학을 줄테니 해결하고 오라 했답니다. 어느 전도사님을 찾아갔더니 전도사님이 기도얼마나 하나하고 물었습니다. 십분도 못합니다 그랬더니 그러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더 기도하고 와라 했답니다. 그렇게 해도 의심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또 찾아갔더니 성경을 얼마나 읽어라고 물어서 하루에 한장도 못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성경 더 읽고 와라 그랬습니다. 라브리에 와서 치밀하게 공부를 하면서 의심이 풀렸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도 앞에서 이야기한 아주머니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것과 아는 지식이 하나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청년은 세상에 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은 학교에서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자연의 법칙과 초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배우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이 세상이 Closed system, 자연의 법칙만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나 개입할수 없다는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open system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자연법칙이 멈출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신비성과 합리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청년은 그렇게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합리성의 반대개념은 비합리성입니다. 신비적인 것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정리하면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무기력과 영적 혼돈 상태를 극복하고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가치관의 혼돈을 극복할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바른 정신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혼돈을 가지기 쉬운때가 청년의 때입니다. 얼마전 동성애는 불법이라는 법률이 인권을 유린하는 위헌이라고 대법원에서 통과를 했습니다. 불법으로 내린 동성애 법안이 인권을 무시하는 법안이라고 판결이 되었기 때문에 동성애의 문제가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가치관의 혼돈, 윤리의 혼돈 이런 시대에 기독교인으로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는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세계관 전쟁에 대처하고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를 할 때에 세계관을 사용하지 않다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느낌의 시대이니까 감각적으로 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지만 어느 사람이든 세계관을 가지고 접근하고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방해하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객관주의입니다(Objectivism). 성경은 성경이고 학문은 학문이다 성경은 신앙적인 문제에서는 진리다 내가 공부하는 학문분야에서는 성경이 권위가 없고 전문가가 권위를 가진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과 전공분야를 분리해내는 것입니다. 아까 아주머니처럼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라고 분리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아주 좋은데 사고방식은 유교적, 불교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원론자가 됩니다.

두번째는 성경주의입니다(Biblicism). 성경을 너무 사랑해서 세상의 지식은 필요없다. 오직 성경만 공부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경건주의자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성경만 진리고 세상의 지식은 배설물이다라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지성주의에 빠지게 되어 학문세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지적자살을 감행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고 믿음만 좋으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주의라고도 하는데 특히나 유학생들에게는 공부가 잘 되지 않을때에, 시험에 떨어졌을 때에 더 큰 유혹이 됩니다. 바울이 배설물이라고 할때에는 이성에 기초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초된 바른 지식까지 다 내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번째는 혼합주의입니다(Synchretism). 세상의 지식과 성경을 적당하게 섞는 것입니다. 우리 유학생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비빔밥, 섞어찌게처럼. 로렌스 클레이드라는 사람은 야채샐래드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야채를 여러가지로 섞고 성경으로 드레싱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융합이라고 합니다(Harmonization). 혼합주의의 문제는 절대성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 되는 것이고 다원주의적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공부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가 무엇일까? 공부하는 방법을 이야기할때에 internal 원리라고 하는데 공부할 때에 사용되는 머리(이성)와 경험(감각)을 말합니다. External원리는 공부하는 대상을 말하는데 물리는 세상과 우주, 사회학은 사회의 현상, 체육은 인간의 몸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자연과 세상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인 종교적인 원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와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원리는 공부의 원리에 신앙의 원리를 더해야 합니다. 이성과 감각에 Internal원리인 영성과 성령이 더해져야 합니다. 자연과 세상에External원리인 하나님과 성경, 교회를 더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한쪽만 가지면 세속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 나머지만 가지면 신비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종합을 해도 안되고 혼합을 해도 안되고 통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통용되는 것이 종합입니다. Synthesis 종합은 정과 반을 통해 합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두번째 혼합은 다 섞어 놓는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세번째Integration 통합은 기준이 있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있어서 기준을 가지고 옳은 것은 다 받아들이고 옳지 않은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통합은 성경에 나와 있는데 에베소서 4장13절을 보면 믿는것과 아는것에 하나가 되어라고 나와 있습니다. Unit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남녀가 한몸이 되었다고 할때에 unity,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unity가 된다라고 합니다. Unity원리는 믿는 것과 학문하는 것에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이 통합의 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통합한 사람을 mature한 사람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고방식, 가치관이 예수님의 것으로 바뀌어지지 않기때문에 기독교인이 한국인구의 절반이 되어도, 국회의원의 절반이 되어도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원리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잘때까지 생각하는 화두들이 있습니다. 돈, 섹스, 권력. 세상사람들에게는 이 세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도이벨트라는 사람은 기독교인은 창조, 타락, 구원의 세가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폭넓게 설명하기를 존재론적인 원리, 도덕론적인 원리, 인식론적 원리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존재론은 신이 있나? 내가 누구인가?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존재론을 다룰때 가장 기본적인 설명방법은 세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신과 인간과 우주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모른다 (nothing nothing). 두번째 설명방법은 비인격적인 것(impersonal)에서 세상, 신, 인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진화론이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인격적인 것(personal)에서 인격적인 것이 나왔다. 성경적인 존재론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중에 인간을 만드셨을 때는 자신의 모습대로 만드셨으나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지 않았지만 그속에 하나님의 신성과 솜씨가 나타나도록 만드셨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다. 제한적이다. 제한적이지만 사는데 문제가 없다. 자연은 자연법칙도 있지만 초자연적인 법도 있는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셨다. 이것이 Open system을 믿는 것입니다. 매트릭스는 기본적으로 closed system이지만 closed system을 깨고 open system으로 갈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은 영화입니다. 근대과학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이성과 합리성을 닯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과학활동을 할수 있는 동기부여를 주었다고 하고 오펜하이머는 근대과학의 어머니는 기독교라 했습니다. 현대과학은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 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더 홈즈, 휘튼의 철학교수는 창조는 세가지 과학을 가능하게 했다. 첫째, 하나님이 만드신 재료, 공간, 시간은 실험과학이 가능하게 했다. 실험과학의 데이터를 가지고 합법칙성과 인간의 이성을 이용하여 두번째 이론과학의 근거를 만들었다. 세번째 이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응용과학의 근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도덕론적 원리. 인간이 창조되었지만 타락했다. 인간이 왜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하는가? 왜 죄를 짓는가? 를 묻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기에 대해 수백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관념론에서는 고통과 악과 죄는 환상과 관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원론에서는 세상은 처음부터 악과 선이 있었다. 처음부터 병과 고난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다라고 합니다. 사회주의자의 결정론에서는 환경이나 교육방식, 경제수준에 의해서 악이 정해진다라고 합니다. 동양사상을 보면 불교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 도교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악의 근원이다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이론은 도덕적 타락은 죄에서 왔다는 범죄론입니다. 범죄론은 세상의 고통과 죄는 실체고 비정상이고 쓰라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래 병과 죽음이 없이 지음을 받았는데 죄로 인해서 타락하고 비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덕과 싸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식론적 원리는 우리가 바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성의 능력을 믿던지 이성을 극단적으로 믿지 않고 체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비판적 실제론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것은 옳은 것도 있지만 틀린 것도 있다.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초인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식론적인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성경말씀입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사고하면 판단오류를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혜와 말씀의 도움을 받아야지 제대로 이해하고 공부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교의 인식론은 이성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꽤가 많아서 이기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순수감정에 의해서 결정하라고 합니다. 합리적 인식론은 서양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성에 의해서만 결정하고 판단하고 진리가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의 기반하에서 이성을 사용하고 직관들을 사용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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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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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미나는 2002 KOSTA/USA에서 뉴저지 지구촌교회 김두화 목사의 '기독입문 - 교회'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무엇보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생활에서 실질적인 삶에 부딪칩니다. 왜 교회생활이 그처럼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난 크리스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으며 그것은 교회이며 한 가족이고 더 이상 손이 아니고 외인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교회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왜 중요한가, 어떻게 하면 건강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교회생활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에는 out of 클레아는 called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복음을 듣고 믿어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된 공동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증거하러 나가는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그리스도에 속한 백성들의 공동체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러냄을 받았고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