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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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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저희 가정에도 아이들이 다섯 있지만, 아이들이 많은 가정에 보면 아이들 중에는 좀 똘똘하고 뭐든지 잘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좀 상대적으로 좀 못하고 약하고 부족한 아이도 있잖아요. 그리고 심지어 어떤 가정에는 정말 특별한 장애와 아픔을 가진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가정에서 아이들 중에 정말 똘똘하고 잘하고 정말 가정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아이를 언제나 가정의 무대에 올려놓고 그 아이를 다 바라보게 하면 그게 정말 좋은 가정일까요? 정말 좋은 부모일까요? 정말 좋은 가정,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아이들 가운데 가장 아픔과 연약한 아이가 중심에 있게 될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를 바라보며 모두가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고 도울 수 있도록 하고 그럴 때 정말 그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고 정말 진정한 샬롬이 있는 가정이 되는거죠. 제가 고등학교 때 늘 아는 이웃집이 하나 있었는데, 담벼락 너머니까. 근데 어느 날 이웃집 담을 넘어보니까 거기 갑자기 제 또래 어떤 여자 아이가 바닥을 기고 있더라구요. 중증 장애인이었어요. 그런데, 저를 마주치는 순간 엄마가 이 아이를 막 집 안으로 밀어넣었어요. 그 아이는 사실은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바깥에 나와보지 못한 그 가정의 secret인거죠. 그 아이를 그렇게 그 부모가 그 안에다 둔 이유가 뭘까요? 어쩌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데 아이가 바깥에 나가면 그 아이가 혹시 조롱과 모욕 당할까봐, 그리고 자신들도 사람들의 눈총들을 받을까봐, 그것이 싫고 그것을 가정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숨겨두고 키웠던 거죠. 그런데, 우리 잘 알지 않습니까? 레나 마리아나 그리고 우리 한국에도 이지선 자매같은 사람들. 어쩌면 수치로만 생각하고 숨겨야 될 그런 아픔과 약함인데, 오히려 그것을 당당하게 빛 가운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드러냄으로 오히려 정상인들과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 우리 송명희 시인의 어떤 이야기도 알잖아요. 나 가진 재물 없지만, 나 가진 지식 없지만, 나 가진 것 없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것을 갖게 하셨다는 것. 사실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보화와 같은 것을 주셨고 또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성공 스토리들을 무대와 사람들의 중심에 올린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다시 한번 돌아봐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꾸 중심이 되도록 해야되는 게 아니라, 혹 우리 가운데 더 소외된 사람, 우리 가운데 돌봄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운데로 오도록 도울 수 있어야 되겠죠. 그 때 우리가 함께 서로를 더 도울 수 있는 샬롬의 관계들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공하는 삶하고 열매맺는 삶은 다르죠. 성공하는 삶과 열매맺는 삶의 차이가 뭘까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성공하는 삶은 마치 꽃이 활짝 예쁘게 피어나는 것과 같다면 열매맺는 삶은 정말 열매가 맺는 것인데, 우리가 잘 알듯이 열매는 언제 맺히죠?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을 때 맺히나요? 그것이 다 져야지만 맺히는 게 열매잖아요. 그 꽃잎이, 아름답던 꽃잎들이 낡고 시들어 다 땅에 떨어져 죽을 때 그 다음에 생겨나는 게 열매라는 것.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과 야심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땅에 떨어질 수 있을 때, 그 때 정말 우리가 주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아시죠? 어떤 거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예, 그 아홉 가지 열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 열매 자기 좋으라고 있는 거 하나도 없어요.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옆사람들이 그 사랑 받는 거 아녜요? 기쁨이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기쁨이 옆사람들을 격려해주는 거고, 평화가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주변 사람들이 거기서 쉼을 얻는 거죠. 오래 참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인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거고, 자비로운 사람 때문에 그 주변 사람들이 자비를 얻고, 선한 양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선한 손길의 도움을 얻는 것이구요. 근데 열매도 실제로 그렇잖아요. 우리가 열매는 나무에 아름답게 탐스럽게 달려있거나 그릇에 탐스럽게 담겨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사람들의 음식이 되는 거죠. 근데, 그렇게 될려면 이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양 자체가 부서지고 사라지는 것인데,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음식이 되고 먹이가 되는 거겠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이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우리가 샬롬이라는 것을 이제 가져다 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소중한 가족 관계에서도 그렇게 서로의 음식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가정에서 꽃이 되고 싶기보다는 열매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 그 때 그 가정이 얼마나 샬롬의 가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믿음의  경주가 있죠. 우리도 달려가야 될 믿음의 경주가 있는데요, 우리 믿음의 경주가 경쟁 사회의 경주랑 정말 다른데, 경쟁 사회의 경주는 라이벌과의 경쟁이잖아요. 경주. 옆에 뛰는 사람이 있기에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는 라이벌이 있어서 뛰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부르심이 있기에 그 소명 때문에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는 것이지, 옆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다면 이 땅에 필요가 있기 때문에 달려가는 것이지, 누군가 옆에서 뛰기 때문에 뛰는 거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 앞서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있기에 우리가 그 뒤를 따를 경주가 남은 것이지, 옆에 있는 라이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우리가 competition이 아니라 compassion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늘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북미의 native indian에서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어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근데 한 마리의 wolf는 아주 경쟁심, 이기심, 탐욕, 분노, 상처, 그래서 공격하고 먹으려는 그러한 wolf가 한 마리가 있고 다른 한 마리의 wolf는 이제 긍휼, 사랑, 자비, 온유, 나누고 싶어하는 그런 wolf가 있단다. 근데 이 두 마리의 wolf가 우리 속에서 싸우고 있다고 했어요. 한 마리 wolf는 competition의 wolf고 한 마리는compassion의 wolf고. 손주가 물었어요. 할아버지, 어느 쪽 wolf가 이겨요? 뭐라고 답했을까요? 니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 어느 쪽에 먹이를 주느냐에 달려있다는 거죠. 우리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의 흐름과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마음을 쏟고 살아간다면 이 competition의 wolf는 점점 더 살이 찔 것입니다. 더 강해지겠죠. 우리 안에 있는compassion의 wolf는 맥을 못출거예요. 우리에게도 그게 있긴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또 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이렇게 코스타 집회를 선택하고 오는 것처럼 사실 이런 시간들은 우리에게 색다른 힘을 주는 거잖아요. 바로 이competition의 wolf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compassion의 wolf에 먹이를 제공하는 선택을 하는 거죠. 이런 선택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얼마나 다른지는 우리가 알잖아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어느 쪽에 먹이를 줘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치열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깨어서 이 쪽의 wolf가 먹이를 먹기보다는 정말 compassion의 wolf가 계속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의 흐름으로부터는 좀더 자유로와질 수 있고 그리고 오히려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샬롬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정말power를 사용하는 길이 아니라 power를 다 내려놓는 길이었잖아요? power of powerlessness라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우리도 경쟁 사회 속을 살아가다보니 그리고 이 경쟁 사회에서 결국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킨 사람들이 다 power를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 논리가 ‘우리가 힘이 있어야된다. 우리가 주류 사회에 들어가야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있어야 된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우리가 더 전문인이 되어야 된다. 우리가 전문성을 가져야 세상을 우리가 더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 논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맞죠? 여러분들도 동의하세요? 그런 이야기들은 아주 자연스러워졌어요. 당연히. 그런 이야기의 함정은 ‘우리가 힘이 없으면, 우리가 결국 위에 서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면, 우리가 주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우리는 별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라는 그런 동일한 논리인거죠.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한번 다시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셨지만, 그 권세를 이 땅을  변화시키는데 사용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으로,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으로 그렇게 무력한 모습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이잖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높아지라고 하신 게 아니라 낮아지라고 하셨고, 올라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려가라고 하신 거죠. 대접받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대접하라고 하신 것이구요. 진정 우리가 오히려 power를 가지려고 하기보다 내려놓을 때 진정한 power가 나타난다는 것. 로마서 15장 1절과 2절에 보면 그런 바울의 고백이 있어요. ‘우리 강한 자가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다 내게 미쳤다 함과 같으니라’. 그 표현을 가만히 보면은요. 우리 강한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이 연약한 자들의 약점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리고 비방과 모욕은 내가 받고 그런 것인데요. 우리가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 세상에서 소위 물질과 안정된 지위와 많은 것들을 갖고 있어서 강해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는가? 우선 강한 사람들,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줘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수고를 대신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둘째, 자기들의 인생의 어떤 재미와 편안함을 정말 끊임없이 추구해가요. 그리고 또 하나 어려운 위기의 시기를 잘 넘어갈 수 있는 안전 장치들을 다 갖고 있어요. 보험도 들어놨지만 때로는 심지어 대신 감옥에 갈 사람도 갖고 있어요. 그 정도로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사람의 어깨에 올려놓고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 위기에서 안전한 거죠.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우리가 함께 아주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함께 행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죠. 함께 먼 산 길을 같이 걸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생기냐 하면, 도저히 이제는 지쳐서 주저앉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죠. 더 이상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 강한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그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거죠. 그래서 자기 짐이 더 무거워진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할 때, 자기를 기쁘게 한 게 아니라 그 약해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제 다리가 풀려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해서 앞서서 가서 위험 요소들을 다 제거합니다. 먼저 위급한 상황들을 다 처리해주는 거죠. 잘 걸을 수 있도록. 그러고보면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고 오히려 위급한 상황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예요. 그러고보면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사실 가장 약한 사람들인거죠. 정말로 강함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짐이 내 어깨에 올라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위험을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려 놓으셨고 단 한번도 자신을 기쁘게 하신 게 아니라 다른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하려고 사셨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모욕과 비방, 십자가의 고통을 다 받으셨으니깐요. 그래서, 이 땅에 샬롬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powerlessness죠. 어느 누구 앞에서도 가장 힘없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고,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바로 이 땅에 샬롬을 가져오는 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올라서는 길이 사실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정말 내려갈 수 있을 때, 진정 샬롬이 오는 것이고, 우리가 가질 때가 아니라, 우리가 내려놓을 때, 우리가 오히려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그때 진정 샬롬이 찾아온다는 것을 좀 생각해봅니다.  

Power에 대한, 둘째날에 유진소 목사님이 잠깐 언급한 말에도 나와있지만, power에 대한 헬라어 두 가지가 있는데, 두나미스와 엑소시아라는 두 단어에요. 두나미스는 거기서 다이너마이트가 나온 것이고, 엑소시아는 엑소시스트 이제 그런 것처럼 사실은 다른 의미가 나오는 것인데요. 똑같은 power인데, 하나의 power는 힘, 강력, 타율적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 복종케 하는, 그런 보이는 어떤 power같은 것이라면, 엑소시아는 보다 원리, 가치, 그런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죠. 근데, 하나님은 두 가지 power를 다 가지신 분이죠. 예수 그리스도도 두 가지 power를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나미스를 사용하실 때가 있어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power를 사용하실 때가 있는데, 그땐 어떤 때만 사용하시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바로의 철권 통치에 대하여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그리고, 때로는 마귀에 사로잡혀서 거기에 묶여있는 사람을 해방하실 때, 그 마귀의 권세를 쫓아내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따를 사람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고 이 땅을 변화시킬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을 이제 불러서 제자가 되라고 하실 때, 절대로 두나미스를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 예수님은 엑소시아를 통해서 그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신 것이죠. 결코 타율적으로 따라오지 않도록. 자발적으로만 오게 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과 의욕이 있다면, 우리도 어떤 보이는 power를 가지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말 섬김이 오히려 더 power라는 것. 내려갈 수 있는 것이 더 power고 포기하는 것이 더 power라는 것.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세상을 더 새로운 길로 안내하고 이제 초청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한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제 그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순례자라고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이 순례자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한번 표를 통해서 잠깐 잘 정리해보고 싶은데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면 하나는 잘 정착해서 살아가는 정착민들, 그리고 온갖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관광객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순례자들이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걸맞는 단어는 어떤 걸까요? 정착민입니까, 관광객입니까, 순례자입니까? 우리 순례자라고 고백하죠. 히브리서 11장에도 있는 표현처럼 그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어떤 표현이 그거잖아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되, 땅에서는 그 약속을 따라 받지 못하였지만, 스스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구요. 그들이 또한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본향을 사모했다면 되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는데, 이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고백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듯이, 우리는 순례자라는 찬양도 부르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순례자는 이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떠남이 있는거죠. 그리고, 여행은 뭔가 목표가 있기에 추구하면서 여행합니다. 그리고, 여행의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되는 게 있죠. 그리고, 여행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근데,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정착민과 관광객과 순례자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완성해보고 싶은데요. 정착민은 떠나는 사람들인가요? 전혀 아니죠. 떠남이 없죠. 그리고, 떠남, 버림, 그리고 내려놓음이 사실은 없는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정착민이죠. 관광객은 떠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떠나죠. 그러나 관광객들은 얼마만큼이나 떠나는 걸까요? 관광객들은 자기 문화를 다 내려놓고 떠나나요? 사실 그렇지 않죠. 우리가 아무리 관광 여행이 좋아도 나 고추장, 김치 없으면 안돼 하면서 챙겨가잖아요. 관광 여행에서는 떠나긴 떠나지만 사실은 부분적으로면 떠나는 거죠. 적당히 떠납니다. 하지만, 순례자의 떠남은 어떤 걸까요? 순례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거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믿음의 여행을 할 때도 사실은 모든 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그런 떠남의 부름이 있었던 것.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름받았을 때, 그들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다 버려두고 떠나게 됬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의 부름, 순례자로의 부름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안전 장치들조차도 실은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구함, 정착민은 뭘 추구할까요? 정착민들이 추구하는 것은 우선은 안정이구요. 그리고, 또 하나 붙인다면 번영, 형통을 추구하는,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죠 당연히. 그럼 관광객들을 뭘 추구할까요? 관광객들을 즐거움, 만족을 추구한다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세 가지 만족, 요한일서에 있는 표현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실제로 우리 관광 상품들을 보면 알 수가 있잖아요. 관광 상품에서 중요하거든요. 사실 몸이 즐거워야죠. 먹거리, 잠자리가 나쁘면 사실 관광객 모으기 어렵잖아요. 그리고, 몸만 즐거우면 뭐합니까? 볼 거리가 정말 중요하죠. 볼 거 없으면 왜 가겠어요? 다 눈요기 때문에 가는건데. 또 하나 이생의 자랑두요. 우리 관광 여행가면 제일 많이 하게 되는게 뭐냐하면 사진을 찍어오는 것인데요. 그 사진 많이 찍어서 이제 가져오죠. 근데 그 사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누구예요? 나. 관광지의 유적, 사람, 문화, 그것은 다 나를 위한 들러리고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게 중요하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랑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관광객은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하지만, 순례자는 뭘 추구하는 사람일까요? 그 Kingdom seeker 잖아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죠. 정착민은 뭘 받아들일까요? 다르게 얘기하면, 정착민들이 잘 못 받아들이는게 뭐죠? 외부인, 또 변화. 정착민들은 변화 싫어하잖아요. 또 바깥에서 오는 거 싫어하고. 그 얘기가 뭐냐하면,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는 거죠. 익숙한 것만. 관광객은 뭘 받아들일까요? 새로운 거 받아들여요, 받아들이지 않아요? 받아들이죠. 그런데, 단서가 있어요. 마음에 드는 것만. 새로운 거라고, 아무리 새로운 음식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왜 받아들이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죠. 순례자는 어떨까요? 순례자는 이 믿음의 여정, 순례 여정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받아들이는 거죠. 싸움이 있는데, 정착민은 주로 누구랑 싸울까요? 정착민의 싸움은 그 주변 정착민과의 싸움인데요. 왜냐하면, 그 마치 나라와 민족도, 국경이 붙은 나라와 민족치고 사이좋은 나라가 없어요. 이유는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고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니 경계선 분쟁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 사람도 살지 않는 독도까지 가지고도 사실은 으르렁거릴 수 있는 게 관계잖아요. 근데, 그런 거처럼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정착민으로 살아갈 때는 언제나 주변 정착민들과 어떤 영토 분쟁처럼 경계선 자리싸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죠. 그러니까 주변 정착민과 싸웁니다. 그럼 관광객은 누구랑 싸울까요? 관광객은 주로 가이드랑 싸웁니다. 왜냐하면, 관광 여행을 나선 이유는 좋은 관광 상품을 소개받았기 때문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가이드에게 있는 거죠. 불만족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나서서 모세를 뒤따라갈 때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좋은 관광 상품으로 소개된 거죠. 그러나, 아무리 가도 가도 먹을 것, 마실 것, 잠자리, 불편한 것 밖에 없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나타나지도 않고. 누구 책임입니까? 모세 책임이죠.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출애굽기 19장에서 들은 것처럼 ‘이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명령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그리고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제 그런 비전을 주신 것이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진 거는 그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그래서, 그 백성이 광야길을 관광객의 마음으로 걸었으니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랬던 거죠. 순례자는 누구랑 싸울까요? 순례자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죠. 우리 교회도 한번 생각해봅니다. 정착의 교회, 정착의 교회는 사실은 어두움을 갖기 쉬운 거죠. 때로 어떤 교회들은 전통과 옛날 것을 절대로 벗어버리지 못하는 교회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원래 마음들이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보면. 우리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 아마 그 사람들도 젊었을 때 처음 거기에 입문할 때는 굉장히 순수했을 거예요. 다른 유대인 어떤 사람보다 더 말씀을 사모하고 또 주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리로 들어갔겠죠. 하지만, 거기에 오래 정착하다보니 완전히 정착민이 되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결국은 이제 정말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도 정착의 교회가 될 때, 그 세상 안에서 잘 정착하려고 할 때, 이러한 어둠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것. 교회가 생각보다 정착의 교회는 언제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기 쉽고, 그리고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려하고, 그러다보면 그 안에서 참 갈등과 다툼을 많이 겪게 되고, 교회와 교회들 사이도 경쟁 관계가 되기 쉬운거죠. 그런가하면 관광객의 교회, 어쩌면 오늘은 좀 그런 모습도 많이 보여지는 것 같애요. 오늘 우리 시대가 customers’ satisfaction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소비자 만족 시대. 정말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게 정말 중요하잖아요. 정말 많은 교회들도 성장하고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많은 성도들도 소비자처럼 모든 조건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를 선호하게 되었어요. 우리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가 좋죠. 마치 우리가 mall에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mall이 쇼핑하기 좋은 것처럼, 사실 오늘의 교회는 정말customers’ satisfaction과 많이 이제 가까와져버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다시 회복되어야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우리는 정말 순례자의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그렇겠죠. 여러분들은 누군가요? 정착민인가요, 관광객인가요, 순례자인가요? 아마 섞여있다고 고백하게 될 거예요. 내 안에는 정착민의 모습도 보이고, 관광객의 모습도 보이고 순례자의 모습도 보이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우리를 또 너무나 더 먼저 사랑해주신 예수님께는 정착민의 모습이 전혀 없었고, 관광객의 모습도 전혀 없었잖아요. 오직 순례자의 모습만 있었죠.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는 이유가 있겠죠. 예수님은 우리가 정착하는 거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만족을 누리는 거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개인보다 주님께서 정말 사랑하시는 모두를 위한 것이죠. 저도 저희 아이들이 다섯이지만, 아이들이 이제 처음에는 같이 먹을 것을 분배해 주잖아요. 어렸을 때. 그럼 각자 자기 것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다가 어떤 애는 빨리 자기 것을 먹어치워버리고, 어떤 애는 잘 보관해둬요. 그러면 이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관해둔 애가 그것을 먹으려 그럴 때, 먹었던 애가 나 좀 달라 그러죠. 그러면 안 줄 권리가 있죠. 당연히. 안 줘야 더 공평하죠. 그런데, 그 때 그 아이가 안 주고 절대로 안 준다고 지키고 있을 때 부모가 볼 때는 ‘아이, 그래도 그거 좀 주지’ 그런 마음 드는게 사실이예요. 그렇잖아요? 설사 잘 보관해놓고 지킨 아이가 자기 것을 먹는 게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정말 언제나 sharing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어요. 하나님은 이 땅에 진정한 샬롬, 조화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우리가 서로 아끼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나누려고 할 때, 우리가 나를 위해서 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이 세상에는  크리스챤들 중에서 참 이 샬롬을  위해서 특별히 헌신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저는 제가 몇 가지를 예로 들고 이제 마치고 싶은데, 혹시 여러분, 떼제 공동체라고 들어보셨어요? 떼제라는 크리스챤 공동체가 있는데, 한국에도 이제는 떼제 음악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근데 이 떼제 공동체는 프랑스의 떼제라는 아주 시골 벽지에 있는 곳인데요, 거기는 이차 대전 끝날 즈음에 어느 한 청년이 혼자서 중보 기도하러 산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 거주하게 되면서 생겨났어요. 그런데, 거기를 지나가던 어떤 다른 청년도 같이 중보 기도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다가 이제 거기에 형제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게 됬는데, 지금은 매년 유럽의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찾아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근데 그 공동체가 헌신하는 거는 뭐냐하면 화해와 일치예요. 화해와 일치, 정말 샬롬이 이땅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개신교 청년들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남자 형제들인데, 그런데 이 떼제 공동체에서는 언제나 하루에 세 번 예배가 드려지는데, 그리고 그 예배는 다 라틴어로 이루어져요. 프랑스 마을에 있는데도. 라틴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유럽은 아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후에 계속해서 기독교 세계였잖아요. 그렇지만, 나중에는 개신교와 캐톨릭 사이에, 또 프랑스와 독일, 프랑스와 영국, 이태리, 모든 나라들 사이의 전쟁의 역사예요.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인 전쟁이죠. 그 전쟁의 역사 속에서 서로 다 싫어합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 싫어하고 그러듯이 유럽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긴장과 그 갈등이 많아요. 근데 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함께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회복하고 하나될 수 있도록 그래서 중보 기도하는 곳이고 또 모든 언어,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의 모체가 라틴어잖아요. 그래서, 라틴어로 선택해서 찬양을 부르는 거죠. 거기가 정말 샬롬을 위해서 참 아름다운 헌신을 한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고. 그리고 또Christian Peacemaker 팀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우리 한국에는 또 다른 단체지만, 혹시 여러분들 프론티어즈라고, 개척자들이라고 들어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 단첸데요. 이Christian Peacemaker들이나 개척자들은 어떤 사역만 하냐면 세계 분쟁과 전쟁이 있는 지역으로만 사람을 보냅니다. 거기에 그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서 갈라진 사람들 사이에 이제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 헌신하는 거죠. 상처입는 쪽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거기의 아이들을 위해서 사역하고 가능하면 그것이 다시 복수와 분노로, 복수로 나가지 않도록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샬롬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그 샬롬이 나로부터 나의 가까운 가정과 이웃, 또 교회, 또 직장, 또 학교, 또 심지어 나의 민족을 넘어서서 다 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샬롬에 대한 정말 진지한 이해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 멀리까지 갈 이유는 없다 하더라도 정말 샬롬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고 또 우선 내가 가정 안에서도 샬롬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하늘에서와 같이 또 이 땅에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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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고  무엇보다 한편 평화, 샬롬을 누리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샬롬을 누리신 분인데  그러나 한편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슬퍼하셨던  분인 것 같기도 해요. 슬픔과 평화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예수님은 왜 슬퍼하셨나? 예수님의 슬픔을 성경에서 좀 본다면 특히 누가복음 19장 42절에 보면 예루살렘성을 보며 우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네가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것이 너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구나.’ 평화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하신 거죠. 예수님은 하늘의 평화가 뭔지 아시고 누리시는 분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셨다는 것.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서 샬롬을 위해 헌신하신 분인데요.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은 함께 이 땅에 샬롬, 평화를 위해 헌신할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고 그래서 찾아오셨고 부르시기도 한 거죠, 제자들을. 근데, 제자들이 얼마만큼이나 이 샬롬을 위해서 잘 준비되었었는지 우리가 성경을 보더라도 제자들은 참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이었음을 우린 성경에 있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많이 보게 되잖아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까지 대동해서 한 번 청원을 한 적이 있죠. ‘주님 나라에서 우리 두 사람, 우리 두 아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 뭐라고 하셨냐하면 ‘너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구하는지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렇게 물으셨어요. 그때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은 ‘예, 마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죠. 근데 그 잔은 원래 어떤 잔이죠? 고난, 죽음의 잔인데, 그 의미도 모르고 ‘마실 수 있습니다’ 했죠.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래, 너희도 언젠가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나에게 구한 것,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예비되었든지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부탁하는 것이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나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그렇게 세도를 부리고 위에 서려고 하지만 너희 중에는 정말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되겠고 대접을 받으려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러 왔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근데 그 에피스드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청원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어땠어요? 다 제자들이 분이 났다고 했어요. 그러고보면 그 제자들이 함께 동역자고 친구들이고 정말 가족이 되었었는데, 그 제자들 중에 헛된 야망과 꿈을 가진 제자들의 이야기가 결국 관계들을 갈라놓게 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샬롬을 이루고 샬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꿈을, 어떤 야망을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먼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샬롬이  무엇이냐 라는 샬롬의 의미에 대해서  세미나를 할 때 샬롬은 다름아닌  조화이고 관계의 회복이고 그리고 sharing이라고  표현했었는데요.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를 한번 이제 어떻게 다른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사람이라면,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인데요. 여러분들은 Empire builder 입니까, Kingdom seeker 입니까? 어떻게 다를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는 사람인데, 자기 왕국을 세우는 사람은 스스로 통치하죠. 왜냐하면 나의 왕국이니까 내가 다스립니다. 하지만, Kingdom seeker는, 즉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또한 신뢰합니다. 그분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아는거죠. 스스로 통치하는 사람은 자기가 통치하지만, 언제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다스려지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한 거죠. 통치할 수 있지만, 통치 안 되는 영역이 있으니까.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의 통치를 신뢰하기에,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영토가 분명해야할 필요가 있어서 울타리를 세우고 자기 편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내 통치의 영역이 안정되고 확정될 필요가 있으니까, 분명할 필요가 있어서이지요. 그러나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갖고 있던 울타리도 걷고 그리고 자기 편 만들지 않죠. 자연히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참 다른데요. Empire builder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가 다스리니까. 그리고 사람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나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 통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싫으니까요. 하지만,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을 따라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섬기려 하고 또 이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세우려 하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풀어줍니다. 자연히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차이가 나타나는데Empire builder로 살아갈 때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이 많이 생기죠. 왜냐하면 내가Empire builder일 때 지금은 내 밑에 있고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이 사람도Empire builder로 보이기에 언제 나를 치받고 올라올지 모른다는, 사람에 대한 불신과 긴장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관계 속에서도 긴장이 아니라 평화와 신뢰가 있습니다. Empire builder로 살아간다면 친구와 이웃은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경쟁자와 적은 늘어나게 되겠죠. 그러나, Kingdom seeker로 이렇게 살아간다면 오히려 친구와 이웃들이 늘어나게 되고 경쟁자와 적은 사라져가게 되는 거죠.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와 이렇게 다른데요,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주님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할 때,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 같았지만 스스로, 사실 그들 안에는Empire builder의 야심을 그대로 갖고 있었던 거죠.  

근데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요? 목회자들이나 오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도Empire builder가 될 수  있을까요? 예, 좀 안타깝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대단한 헌신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더라도, 내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생각한다 하더라도 만약 나의 삶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이런 부분들이 있다면 내 마음이 뭔가 불안하고 내가 스스로 다 control해야 마음에 좀 안심이 생기고 그리고 자꾸 나의 분명한 울타리를 만들고 내 사람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자꾸 지배하려고 하고 그리고 이용하려고 하고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라면, 함께 있는 동역자의 관계 속에 자꾸 긴장과 불신이 생겨난다면, 자꾸 소중한 관계들이 경쟁자와 적이 되어간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단해보이는 사역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Empire builder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사실 기독교도, 교회도 Empire 일 수 있다는 것을 교회 역사를 통해서도 보게 됩니다. 만약 기독교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다스리려고 할 때,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고, 그리고, 울타리를 세우고 배타적으로 자기의 세력들을 결속시키려고 할 때, 기독교가 다른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배하고 이용하고 또 묶어두려고 할 때, 그리고 바깥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들을 만들어낼 때, 사실은 기독교 세계도 Empire가 되고 마는거죠.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때 그 당시의 기독교는 사실은 Empire였지 하나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주변 민족들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그래서 어두운 역사를 남겨놓게 되었던 거죠. 사실 이 Empire builder냐, Kingdom seeker 냐는 우리의 작은 관계 속에서도 늘 이제 왔다갔다 하기가 참 쉬운 거잖아요? 우리 부부 관계에서도 사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만났지만, 서로 영역 다툼하기가 참 쉽고 사실은 지고 싶지 않은 것이고, 내가 주도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나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할 때, 우리는Kingdom seeker가 되기보다는Empire builder가 되서 결국은 샬롬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내기 쉽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 좀 생각해봤는데요.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가 굉장히 많이 공격과 모욕을 당하고 있잖아요. 개독교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데, 근데 도대체 이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좀 생각해보면 저는 이렇게도 표현하고 싶어요. 안타깝게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요. 어떤 의미냐 하면 저도 기독교 가정에서 이제 몇 대째 자랐는데요.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그리고 교회에서 때로는 목사님이 오셔서 심방을 해서 축복해주시고 기도해주시잖아요? 또 교회 장로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부모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잖아요. 제일 많이 들었던 기도가 어떤 기도냐 하면 ‘하나님, 이 아이가, 우리 다음 세대가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해주시고, 꾸는 자가 되지 않고 꾸워주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 들어보셨어요? 그 기도를 하나님이 그래도 들어주신 거 같애요.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대통령도 되고 사실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어느 영역을 가든지 위로 가면 갈수록 크리스챤 비율이 높잖아요. 크리스챤들이 리더가 된 영역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들 안에 정말 섬기려는 마음,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려는 마음, 으뜸이 되기보다는 종이 되려는 마음이 너무나 배우지 못했고 없었기에 단지 위에만 섰을 뿐 결국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결국은 바깥으로부터 멸시와 모욕을 받게 된 것 아닐까요? 만약 우리의 윗 세대의 신앙의 부모들이 이렇게 기도했더라면 어떨까요? ‘하나님, 우리 아이가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되어도 좋으니 정말 섬길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이 세상에서 대접받는 아이가 아니라 정말 대접할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정말 이 땅에서 우뚝 서는 아이들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섬길 줄 아는 아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들이 드려졌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는 정말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전히 오늘도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처럼 동일한 기도들이 계속 올려지고 있는 것 같애요.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너희가 정말 무엇을 구해야 하는 줄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하겠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정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 길을 잘 보여주셨잖아요.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단 한번도 땅에 있는 어떤 영광을 얻으려고 하신 적이 없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오직 Kingdom seeker로만 사셨는데, 그 Kingdom seeker로 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고 기다려주신 거죠. 그런데, 우리가 알 듯이 제자들도 나중에 변했잖아요. 그렇게 엉뚱한 야망을 가졌던 제자들도 나중에는 다 달라졌습니다. Kingdom seeker가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도 부르고 계시는데, 우리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되기를, 우리의  나라, 나의 empire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하실 때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하시죠.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너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있지 않냐고. 하늘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신다’라고요. 그러니, 너희는 그런 것들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셨죠. 그러면서 그때 예로 드신 것이 너희가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시고 입히시지 않냐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정말 한번 그렇게 생각해보죠. 공중에 나는 새가 하나님께서 먹이시나요,  스스로 먹이를 찾아서 사나요?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 스스로 그렇게 이제 피어나는 건가, 하나님께서 다 입혀줘서 그렇게 아름답게 된 건가요? 우선 새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새가 열심히 먹이도 찾아서 먹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먹이시는 게 아니라. 그래서 심지어 early bird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 그러니까, 경쟁, 땀흘리고 노력해야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보다 근면해질 것을 말하기 위해서 생겨난 속담이죠. 그런데, 실제로 새들 중에 더 먹이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알듯이 새들은 우리가 갖지 않은 눈과 날개를 갖고 있는데,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먹이를 참 잘도 찾아요. 그리고,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잘 가는 거죠. 근데, 그것이 노력일까, 선물일까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갓난아기들이 태어나서 엄마 젖을 쪽쪽 빠는 것은 노력일까요, 본능인가요? 빨라고 해서 빠나요, 저절로 빨게 되나요? 저절로 빨게 되는 것이죠. 그거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거는 노력도 아니고 땀도 아니라구요. 저절로 하게 된 것.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니까,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거고 기르신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너무 스트레스받고 살지 말라는 면에서 어떤 사람이 재밌는 도전을 했어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는 말에 대해서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먼저 잡아먹힌다’. 똑같은 논리겠죠. 만약에 정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 거라면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먼저 잡아먹히니까. 자연의 세계는 스스로 땀흘리고 노력하고 노력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늘이 주신 그 선물, 은사, 본능을 따라서 그 축복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그 자그만한 씨앗에서 실같은 뿌리가 내려오는데, 참 멀리도 잘가요. 물도 잘 찾아가잖아요. 그것을 어떤 눈으로 보면 노력인 것 같지만, 그러지 않는 씨앗들이 있는게 아니잖아요. 안에 생명만 충분히 있으면 다 찾아가요. 그냥 그러면서 하늘이 주신 선물을 따라 꽃을 피워내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백합화를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입은 그 모든 영화도 이 들꽃 하나만 못하였다’ 하셨죠. 솔로몬의 영화와 들꽃의 영화. 어떤 게 더 영광스럽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솔로몬의 영광처럼 대단해보이는 게 없는 거 같은데, 왜 예수님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이 들꽃의 영광이 더 크다고 하셨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곰곰히 묵상하면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된 기회가 있었는데요, 가만히 보면 이 솔로몬과 들꽃을 비교해본다면, 솔로몬의 영광은 소유로 인한 영광이라면 들꽃의 영광은 존재의 영광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우리에게 영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솔로몬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아니라 그에게 덧입혀진 것들이예요. 그가 가진 지혜와 지식, 그가 갖게 된 인기와 명예, 그가 가진 물질과 권력, 그것이 솔로몬을 영광스럽다 보는 거죠. 만약 솔로몬에게 그런 모든 게 없다면, 지혜와 지식도 없고, 인기도 없고, 권력도 부도 없다면 누가 솔로몬 영광스럽다고 말하겠어요? 우리가 말하는 솔로몬의 영광은 그가 가진 소유에 대한 영광이죠. 그러나, 들꽃은 덧입혀진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창조주가 자신에게 준 몸뚱아리 그 자체로 창조주의 아름다우신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거죠. 또 하나 차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달랐습니다. 솔로몬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멀리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까지 구경하러 올 정도로 부러움도 사기도 했죠. 그런데 솔로몬은 잘 몰랐던 거 같애요.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아들 르호보암이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간청을 하죠. ‘임금님, 선왕 솔로몬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의 어깨에 얹어준 멍에와 짐이 너무나 무거워 이젠 더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짐을 좀 내려놓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이 통치할 때 7년 동안의 성전 건축과 이어서 13년의 왕궁 건축을 하면서 백성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시켰던 거죠. 근데, 그때 그 말을 들었던 르호보암은 왕궁에 있는 신하들 중에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따라서 강경책으로 나갔었죠. 그래서 더 강하게 나가니까 백성의 마음들이 떠나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열 지파가 떼어서 나가면서 이스라엘이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르호보암의 정치력의 부재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원인 제공은 누가 한 겁니까? 솔로몬이 한 거예요. 솔로몬이 왕궁에서 편한 잠을 잘 때, 백성들은 허리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었고, 솔로몬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만족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눈물 뿌리며 고통하고 있었다는 것. 솔로몬의 영광은 백성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담보로 얻은 영광이었죠. 하지만, 들꽃은 어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잖아요?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또 남기고 가는게 달랐어요. 솔로몬은 뭘 남기고 갔나요? 한편 솔로몬은 안정된 국가와 모든 부와 권력을 아들에게 다 고스란히 물려줬어요. 보통 솔로몬을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솔로몬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예요. 아버지 다윗은 역경도 많이 겪고 고난 많았잖아요. 사울 왕의 시기 때문에도 참 고생고생했지만,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또 피난 생활했어야 됬고, 정말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는데,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안정된 국가를 물려줬거든요. 그래서 요람에서부터 정말 형통하게 시작했어요. 그리고, 왕위에 있는 동안에 외적의 침략을 받아본 적도 없고 안에서 내란이 있지도 않았어요. 죽을 때 아들에게 다 물려주고 갔어요. 그러니, 복지 사회의 구호라고 말할 수 있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 사실 솔로몬이죠. 근데, 솔로몬은 다 잘 물려준 것 같았는데, 사실 솔로몬이 뿌려놓고 간 어둠의 씨앗들이 있었어요. 그 하나는 앞서도 얘기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이 두 쪽으로 날 어둠의 씨앗을 남겨놓고 간 것이고, 또 하나 솔로몬이 왕위에 있을 때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품에 안게 되면서 우상 숭배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이후에,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왕들은 거의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 거죠. 솔로몬은 어둠의 씨앗들을 가득 남겨놓고 갔습니다. 그게 솔로몬의 영광이예요. 하지만, 들꽃은 뭘 남겨놓고 갈까요? 자기 생명의 씨앗들을 남겨놓고 가겠죠. 그 씨앗들은 또 들꽃들이 되어서 창조주의 정원을 아름답게 할 것이구요. 솔로몬과 들꽃, 뭐가 더 영광스럽습니까? 네, 그러면 솔로몬 되고 싶으세요, 들꽃 되고 싶으세요? 주님은 솔로몬의 영광을 꿈꾸고 살아가고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우리, 그래서 보다 더 필요를 더 채우고 갖고 싶어하는, 그래서 무엇을 더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는 거죠. 너희가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결국 너희의 모든 관계들은 전쟁터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더 위에 서려고, 더 가지려고 아귀 다툼을 하다보면 모든 관계들은 깨지고 만다는 것. 너희에게는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느냐고. 그 아빠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다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고. 그러니,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하신거죠.  

우리는 샬롬을  위해서 정말 기도할 필요가 있는 거 같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이 올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애요. 최근에 한국에도 소개된 다음에 몇 해 전 부터 꽤 인기가 있었던 기도가 있죠. 야베스의 기도. 근데 이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거였죠? 내게 복에 복을 더하셔서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또 환란이 없어서 근심도 없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잖아요. 근데 그 기도가 아주 인기가 있게 되서 마치 심지어 부적처럼 어떤 사람들은 차에도 붙이고 집에도 붙여놓고, 또 많은 크리스챤 집회의 어떤 제목으로도 많이 등장하게 되었어요. 근데 저는 이 기도에 대해서 좀 아쉬운 마음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그 주기도문과 한번 이렇게 비교해보고 싶어요.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해달라 기도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시잖아요. 야베스는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있구요. 야베스는 어떤 환란도 근심도 없기를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유혹과 싸우고 악을 이기는 그런 거룩한 근심을 담은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것. 남미의 우루과이에 있는 어느 한 성당에 붙어있다는 주기도문에 대한 글을 제가 접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도전이 됐었어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 거 같은데, 제가 한번 읽어드릴께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평생 먹을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일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굉장한 도전이 되는 표현이죠. 저는 주님의 기도가 그렇게 어려운 기도인지 몰랐어요. 우리가 늘 외워서 하는 기도. 그 기도는 정말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주님의 진정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드려져야될 기도인거죠. 야베스의 기도를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야베스의 기도가 사랑받기 보다 정말 주님의 기도가 사랑받게 되기를 바라고, 주님과 함께 이런 진정한 기도를 이 땅의 샬롬을 위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이제 그렇게 헌신하는 마음을 좀 더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 고아와 같은 마음들을 갖고 있어서 자연히 경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애요. 하지만, 경쟁하는 것이 아주 익숙해져있고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에 대해서 주님은 우리를 서로 사랑의 자리로 초청해주신 거잖아요. 근데, 그 경쟁을 competition이라는 단어로 우리 알고 있는데, 발음이 약간 비슷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그 마음은 compassion인데, 우리가compassion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보면 com 은 with 함께 한다는 뜻을 갖고 있고, passion은 suffering인데요. suffer with 함께 고통받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compassion을 갖는다는 것은 로마서 12장 15절에 있는 말씀처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그런 정말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그런 마음으로 이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죠. 그런데 우리가compassion을 갖고 살 때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이 거대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이competition에 의해서 사실 움직여지고, 그렇게 끌려가고 결국 우리도 competition의 마음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기가 참 쉽다는 것.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현재 모든 세계는 치열한 경쟁 관계고, 국가와 국가 간에도, 민족과 민족 간에도, 그리고 한 민족 안에서도 이념 사이에, 그리고, 어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그리고 더 작게는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리고 가정 안에서도 계속 competition이 있는 거잖아요. 심지어 아이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 관계에서도 얼마나 competition이 많이 있어요? 근데, 그런 competition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는 아들 딸이라는 생각이 있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나 뭔가 갈증, 채워지지 않은 마치 고아와 같은 심정을 갖고 있어서 자꾸 더 갖고 싶어하고 이기고 싶어하고 경쟁하게 되는 거죠. 근데 우리가 한편 치열한 경쟁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르게 살아가야지만, 정말 하나님의 샬롬, 조화를 위해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도전,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은 어둠을 많이 갖고 있죠. 때로는 어떤 사람들은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표현하기까지 해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자연의 세계를 우선 다시 한번 돌아보면 자연의 세계가 경쟁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일까 하면 정말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있는 모든 초목들이 경쟁자가 더 많아서 더 잘 자라는 걸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혼자 벌판에 홀로 떨어진 씨앗도 잘 자라요. 경쟁자가 많든 적든, 상황이 좋든 나쁘든, 사실 초목들은 정말 자기 자신이 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멋있게 자라나요. 그런데, 그것을 보면 그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나게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이라구요. 그 생명력이 그들 자신이 되게 하는 것이지,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이 그들을 만들어 내는게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의 인생은, 경쟁 사회는 굉장히 비교 중심이잖아요. 모든 것을 비교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게 하는 것인데요. 근데 비교는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진정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자꾸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고 자꾸 평가하고 판단하고 또 판단받고 그래서 상처를 주고 받고,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얼마나 부조화를 만들어내는지. 아마 어려서 성장할 때, 가정에서 비교당하면서 자라신 분이 있다면 얼마나 그게 아픈 것인지 알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어려서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면서 살았다면 얼마나 그게 싫은 것인지. 우린 비교당하고 싶지 않으거죠. 하나님은 어느 생명도, 우리 어느 누구도 비교하지 않으시는데, 모두가 존귀한데, 우리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자꾸 비교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며 관계들을 파괴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은 참 결과 중심이라서 성과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다보니까 자꾸 성과, 결과에 목매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compassion은 정말 결과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데요. 우리 예수님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이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이런 가정을 해보죠. 오늘로 말하면 어느 언론의 인터뷰 기자가 예수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이 땅에서 사역하면서 얻은 결과가 뭐가 있냐고’. 그때 예수님께서 아마 보고하실 수 있는 결과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 나를 따랐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나를 따르던 제자들도 다 떠나고 없다고. 그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줄 수 있는 결과는 제로, 0 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을 맞이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 하셨어요. 도대체 뭘 이루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루어낸 게 도대체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부르심, 그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내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될 걸음을 끝까지 성실하게 걸었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내가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결과가 있어서 이룬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나의 걸음에 신실했다는 점에서, 나의 마음의 동기와 그 과정을 변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결과가 있어서 다 이룬 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너무 결과에 의해서 평가하고 평가받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거죠.  

저는 이제 그 선교사들을, 선교 단체도 보내고 교회도 파송하잖아요? 그러면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이제 후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사역하는데, 근데 정기적으로 선교 보고를 해야되죠. 근데, 후원 교회에서는 어떤 보고를 받고 싶어할까요? 좋은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거죠. 그러니, 이제 대개 선교 보고를 써야 되는데, 결과가 없으면 선교사들은 불안해져요. 그래서 자연히 때로는 후원이 끊길까봐 과장 보고의 유혹을 받게 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현지인 서로 끌어당기기 선교사들 사이에 경쟁도 생겨나게 되는거죠. 근데, 선교 본부나 파송 교회가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에게 결과 보고를 기대하지 말고 그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갈 때 그 순수한 초심, 그 마음의 동기가 혹 바뀌어지지 않도록, 그들이 선교지에 가서 혹시 잘못된 어떤 관계를 만들어서 empire builder가 혹 되지는 않도록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그들이 결과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을 support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선교사들도 그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정말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냥 내가 이 땅에서 걸어야 될 그 걸음에만 신실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은 어떤 선교사가 한 민족 가운데 가서 십 년 이십 년 동안 살다가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쩌면 그 사람의 죽음 이후에 거기 복음의 싹이 트고 나중에 교회가 세워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상하게 하고 우리의 관계들을 무너뜨리는 것인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 사회는 굉장히 성공 스토리를 보고 싶어 하잖아요? 성공 스토리가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오르죠. 그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도전도 받고 또 격려 받고, 동기 부여도 돼서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기도 하죠. 꿈을 갖게 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성공 스토리를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나는 사실 그렇게 될 수 없다’라는 사실 때문에 더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도 사실 있어요. 그런데, 교회들도 보면 교회의 간증 집회나 무대 위에 대개 성공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오르죠. 좋은 결과를 가진 사람들이죠. 물론 귀한 믿음과 헌신을 따라 살다가 결국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무대 위에 올라서 많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도전도 하고 또 꿈도 주고 변화의 계기도 많이 만들어줍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 교회의 올라오는 성공 스토리들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 낙심과 아픔을 가져다주기도 해요. 근데, 한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무대 위에 올릴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무대 위에 올리신 적이 있었나요? 예수님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라는 자리 다툼이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누구를 세우셨냐면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셨어요. 너희도 이 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셨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이 위에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 뭔가 더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 제자들의 눈이 오히려 어린 아이에게 가고 또 그 당시에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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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의 의미'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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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의 역사를 우리가 구약을 읽어가다보면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up and down 있었잖아요? 그런데, up and down 가만히 돌아보면 가장 두드러진up and down 어떤 제도의 변화였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우리가 알듯이 백성들에게는 왕도 없었고 사실 군대도 없었죠. 사사시대까지는 왕도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는 하나님 안에서 샬롬을 누린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놓치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다른 민족들의 침략을 받아서 이제 고통을 겪었죠. 그러나, 다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셔서 다시 이제 그들을 회복시켜준 그런 계속 반복되는 스토리가 사사시대의 이야긴데요. 그러나, 그때 사사기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되심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런 시기였음을 우리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 인간의 눈으로 때는 사사시대는 어쩌면 무정부상태였어요. 정부 조직이 없는 거예요. 지파들의 느슨한 연합체였잖아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지파 대표들이 그때 와서 함께 의견을 나눠야되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이 같이 하나되기 어려운 시대였어요. 우두머리가 없는 시대, 그리고 군대도 없어서 자신들을 방어할 어떤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시대였죠. 그래서, 때로는 왕이 없었으므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으로 혼란하고 무질서스러운 시대였지만, 사사시대를 말하는 성경의 표현은 그들이 왕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문제를 겪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언제나 그분의 통치 아래서 안전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을 만나면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오죠. ‘우리도 다른 민족들처럼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그렇게 요청합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죠. ‘이 백성이 왕을 세워달라는 것은 나를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라고. 그렇지만, 사실 어느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 버린다고 생각했겠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아니라, 안전장치를 갖고 싶다는 거죠. 다른 민족들은 왕도 있고 군대도 있고 조직이 정비되어있는데, 이거 우리는 아무 그런게 없으니까 너무 불안하다는 거죠. 그러니 계속 주변 민족들한테 당했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한거죠.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하나님이 이제 경고하시면서 세워주시죠. 너희가 왕을 세우게 되면 어떤 결과가 있을 아느냐고. 왕을 세우면 왕이 너희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신하로, 너희 딸들은 데려다가 시녀로 부리게 거다. 그리고 너희가 땀흘려서 밭에서 얻은 소산들을 세금으로 거둬다가 왕과 주변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고 너희는 가난해질텐데 그때 가서는 나에게 울부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 하시죠. 그러면서도 고집은 꺾지 않고 결국 세워지게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고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는 하나님의 design 아니라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의견을 하나님이 한번 그래 겪어보라고 해서 허락해주신 거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처럼 이스라엘의 사사시대까지와 이후 시대는 굉장히 많이 달라졌는데요, 가장 달라진 두드러진 것은 바로 이런 sharing 관련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광야를 살아갈 때나 사사기를 살아갈 때는 그들 가운데 리더가 있었어도 리더들에게 어떤 특권도 없었어요. 모세나 혹은 여호수아나 갈렙이나 혹은 사사들이 좋은 음식을 먹거나 좋은 천막에 거하거나 특별한 특혜를 가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어떤 특별한 시기에 부르심을 따라 사역했을 뿐이었던 거죠. 특별히 우리가 광야를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을 읽어보면 그런 사건을 하나 알고 있죠. 정탐꾼을 보내고 정탐 보고를 듣는데, 사람이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자연히 보고를 들은 백성 전체가 불안해하면서 나중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죠. 그래서 때문에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사십 년의 광야길을 걷게 하는 징계를 내리셨는데, 근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보고를 했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도 사실 사십 년의 광야길을 같이 가게 하신 거죠. 근데, 오늘을 사는 우리 현대인들 같으면 그런 질문을 해볼 있을 같애요.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면, ‘하나님, 우리 둘은 먼저 들어가게 하시고, 나머지만 사십 돌리시지. 우리까지 사십 년을 돌아야 됩니까?’ 그렇게 질문할 있잖아요?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잖아요. 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을 각각 개인 개인으로 것이 아니라, 어떤 body 지체로 본거죠. 운명 공동체로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무엇이든지 함께 share하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함께 share하는 사람들이었다는 . 그런데, 그렇게 함께 기쁨과 아픔을 나누던 이스라엘 백성이 왕정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주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왕과 주변에 있는 귀족들은 특혜를 받게 되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고통받고 소외된 백성들이 생겨나게 거죠. 전에는 리더는 전쟁의 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면, 나중에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만 특권층들은 안전할 있는 그런 시대로 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떤 리더쉽의 차이도 보면 사사 시대의 리더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있는 리더들이었어요. 하지만 왕정 시대의 왕들은 하나님께 귀가 먹은 것처럼 오히려 왕과 주변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야인이라고 있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계속 도전을 받게 거죠. 그래서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의 차이는 하나님의 주도 아래서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겉보기에는 제도가 정비되고 안전장치를 가진 국가 체제를 가졌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의 뜻과는 멀어진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 그런데, 그것을 우리 신약 시대 교회사의 역사에서 보고 싶은데요. 예수님의 공동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한 공동체에 누가 특권을 가졌겠어요? 모두가 함께 어떤 것이든 함께 share하는 모임이었죠. 예수님께서 나은 잠자리를 가지신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시작된 초대 교회의 이야기들을 우리 읽어보면 그때 초대 교회 성도들은 때로 심지어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이 모든 것을 함께 공유했던 그런 공동체까지 이루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는 삶의 축복과 아픔들을 나눌 있었던 거죠. 그러던 이스라엘이, 그런 교회가, 하지만 교회 역사속에서 크게 바뀌게 되는데, 바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변화였어요.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 그것은 한편 고난과 박해 속에서 기도하던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된 거죠. 황제로부터 로마의 모든 시민들이 하나님을 알게 것이니까 기독교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곳에서 예배가 되어지게 됐으니까,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됐으니까, 황제부터 모든 로마의 시민들이 세례를 받았으니까, 이제는 정말 기독교의 승리로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한편 정말 교회가 많이 바꼈어요. 전에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의 교회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고난받고 박해받던 교회였는데,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니까 황제의 특혜와 사랑을 받는, 총애를 받는 기독교가 것이고, 자연히 고난을 앞서 받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특권층과 귀족들이 되게 된거죠. 그래서, 로마의 시스템이 교회 안으로 그대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로마에도 황제로부터 귀족 계급이, 수직적인 계급이 있었던 것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도입되어서 교회 안에도 교황 제도와 그런 제도들이 생겨나게 거죠. 전에는 건물도 없이 가정에서 주로 모였던 교회가 이제는 거대한 성전 건물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교회는 부유한 교회가 거죠. 한편 교회는 성공한 같았고 로마를 정복한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 완전히 무너진 것이 있었다면 그리스도 인들 사이에 sharing 이제 더이상 가능해지지 않게 거죠.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가게 되면서 평평했던 곳이 이제 높은 산과 골짜기가 세워지게 것처럼 다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나눔의 관계는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귀족 계급과 천민 계급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수직적인 교회들을 만들게 것이고 이제는 더이상 함께 삶의 기쁨과 아픔을 나눌 없게 교회가 것이죠. 그런 점에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것은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것인가요? 아니면 기독교가 로마에게 삼켜진 것인가요? 한편으로 로마는 기독교라는 옷을 입었어요. 그래서 기독교라는 무늬를 완전히 갖게 됐지만, 그러나 로마는 사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로마의 모든 시스템은 그대로 있었고, 로마의 꿈은 그대로 있었고, 로마의 영광도 그대로 있었던 거죠. 하지만, 교회가 많이 달라졌어요. 교회는 한편 기독교를 로마에 전한 어떤 승리의 기쁨을 갖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시스템은 로마의 것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교회가 정말 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로마가 기독교를 정복하게 거죠. 그래서 이후에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주변 민족들을 약탈한 사건들,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는 다른 정말 어리석은 죄악들을 저지르게 Christendom, 그리스도와 세상 왕국이 통합된 모델의 어둠을 극명하게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 하나님께서 땅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샬롬이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을 우리가 그런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서도 한번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같애요.  
 
Upside down kingdom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다시 upside down 필요가 있다는 .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계에 있고, 조화에 있고, 그것은 sharing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 거기에 있는 같애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라는 것을 놓칠 , 우리에게 어떤 불안함과 두려움이 찾아올 , 자연히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안전장치들이 좋아보이고 그것이 나를 보호해줄 같고 나를 지켜줄 같으니까 그런 것들을 유혹으로 찾아가게 되고 선택하게 되는 거죠. 그런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교회도 언제나 교회는 역사 속에서 약하고 작았었지만, 그러나 주변 세상 속에 있을 ,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너희는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말고 섞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과연 세상 속에서 다르게 살아갈 가능성이 사실 너무나 없었다고 말할 밖에 없는거죠. 동일하게 교회도 우리가 거대한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세상 속에 들어가지만, 정말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일까. 오늘의 우리의 교회들은 우리의 교회가 정말 세상을 바꿔가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있는 것들이 교회를 변화시켜가는 것일까. 질문 앞에 우리가 고민하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어지기보다 세상에 의해서 바뀌어지는것이 많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운거 같애요. 바벨탑을 세우게 인간의 역사는 여전히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흔들려왔고 교회의 역사 속에서 크리스챤들이 세상 속에서 흔들려 왔던 것처럼 우리도 계속적으로 흔들리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의 뜻을 어긋나게 된다는 , 그것을 계속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원하지 않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교회 안에서도 수직적인 시스템이 생겨나게 되기 쉽고, 교회 안에서도 상처를 주고 받게 되고,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방어와 공격의 무기를 만드는 경향들이 생겨나는 이유가 도대체 어딨을까, 정말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샬롬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이제 돌아보게 되는 거죠.  
 
제가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Need greed 차이가 뭘까요? Need 대해서 여기까지가 need라고 누가 규정할 있을까요? 사실 구별하기 어렵다고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need ‘나 이것까지 있어야 된다’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나 더이상 있어야 된다’생각하니까. 하지만, need greed 구별할 있는 있어요. 어떻게 구별할 있냐하면, 예를 들어서 재난과 기근이 있어서 어느 지역에 이상 사람들이 먹을 없어서 굶주리고 있었는데,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거기에 구호물자가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대여섯 사람에게 조각이 던져졌어요. 그런데, 조각은 사람의 굶주린 배를 채울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한 거죠. 근데, 사람이, 첫번째 빵을 손에 사람이 빵을 자기 속에 넣어버렸다면 사람은 자기의 need 채운 건가요? Greedy 해진 건가요? , greedy 한거죠.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왜냐하면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실종된 것이니까요. Need greed 차이는 관계 문제라는 . 예를 들어서, 풍년이 일어나서 마을 사람 모두가 배터지게 먹었다고 사람들더러 greedy하다 하지 않거든요. 그거는 하늘이 축복을 모두가 함께 나눈 것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가진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만의 것이 되고,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면, 아무리 나의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해도 그것은 나로 하여금 greedy하게 만든 것이라는 . 그래서 우리가 훨씬 어떤 필요가 무엇이냐를 보기보다 우리의 언제나 함께 있는 관계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우리 속해있는 믿음의 공동체들, 교회를 생각해볼 때도, 아니면 작은 우리 가정을 생각해볼 때도 가정 안에서 sharing 충분히 일어날 가정은 조화롭고 행복할 있지만, sharing 문제가 생기면 사실 가정도 아프고 정말 상처가 많은 곳이 되잖아요. 우리가 성경에서도 보지만, 이삭과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었지만, 편애 때문에 결국 원수 만들고 말잖아요. 야곱도 아들이나 있었지만, 결국 요셉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다 보니까, 그것이 결국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그런 아픔을 겪게 것이고요. 아무리 가정이라 하더라도 가정 안에 있는 축복과 아픔을 share하지 않게 되면 서로 결국 상처를 주고 받게 되기 쉽고 샬롬은 더이상 있지 않게 된다는 . 샬롬은 정말 sharing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저희 가정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은데요. 저희는 아이가 다섯인데, 그중에 저희는 넷을 입양해서 양육했는데, 처음에 저희는 아이만 낳고 하나만 입양해서 키우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를 입양해서 남매를 키우다가 군포 공단 지역에서 소외층 사역을 하다가 공부방에서 만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알게 됬어요. 부모가 없고 할머니가 양육하는 아이들이었는데, 할머니까지 건강이 좋지 않게 되고, 위암 수술을 받으셨지만 의사는 일년 밖에는 사실 없다고 해서 아이들 양육에 대해서 저희도 걱정하게 됬고 그것이 계기가 되서 93년도에 아이를 입양하게 됬었어요. 아이는 5학년, 4학년, 3학년이었고, 저희가 낳은 아이가 2학년, 그리고 밑에 밑에 막내, 그렇게 다섯을 키워오게 됐는데요. 그런데, 저희 다섯 아이들이 가족이 있는 뭘까. 사실 만약에 어떤 핏줄이나 특별한 인연 관계를 생각한다면 우리 위의 아이는 집안 아이들이라 남다른 친밀감과 결속력을 갖고 있었어요. 근데,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이 밑에 있는 아이에게는 때로는 위협이 되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아이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셋이서 편드는 거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그럼 밑에 아이는 솥밥 먹고 컸으니 둘이서 편들죠. 그런 갈등 관계를 해결하는게 초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사실 저희가 낳은 아이에게는 기라성같은 응원부대가 있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 등등. 그리고 위의 아이에게는 할머니가 계시다면, 막내는 저희가 입양 기관을 통하여 갓난아이 데려왔으니 아무런 응원부대가 없는거죠. 그런데, 예를 들어서 만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싶을 분명히 저희가 낳은 아이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며 사람들이 선물을 얘한테만 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있잖아요. 그리고, 아이의 할머니는 아이에게만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 가만 나눈다면 우리 다섯 아이는 가족 되기가 정말 어려울 거예요. 근데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선택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아이들을 입양해서 우리의 자녀를 삼기로 언약을 맺고 약속을 했기에 모두에게 우선 감정적으로는 같지 않더라도 정말 공평해야될 이유가 있었다면, 공평을 주변 사람들의 협조를 필요로 했어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친척들이 선물을 준비한다고 하면 다섯 개씩, 그래서 모두에게 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는 . 그리고, 하나 아이들의 할머니가 굉장히 아프실 아이들 셋은 할머니에 대한 걱정을 갖고 있죠. 그러나, 밑에 있는 아이는 할머니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가정예배를 드릴 , 밑에 있는 꼬마 아이들이 위에 있는 아이들의 할머니를 건강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고, 아이들이 입술로 그런 기도를 하게 , 자연히 아이들은 이제 우리가 각각 남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에게 있는 축복들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아픔도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시작하고 배우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감사하게도 어려운 시간들, 사건들, 에피소드들은 많았었지만, 커서 지금은 장성해서 첫째랑 셋째는 결혼도 하고 딸들도 하나씩 낳아서 저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됬고, 막내는 대학 3학년 들어가요. 이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우리는 함께 가정을 이루면서도 정말 샬롬이라는 것이 어떻게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정한 조화, 샬롬은 우리의 삶의 나눔에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의 기쁨과 아픔을 충분히 sharing 있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설사 피를 같이 나눈 관계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나의 것을 지키고 나만이 누리려고 그것은 설사 그게 나의 need 하더라도 그건 greedy하게 되는 것이고 관계들이 부서져 가게 된다는 .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의 샬롬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울타리가 점점더 넓어져갈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예수님께서 평화를 말씀하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도 말씀하시고 주심을 선포하기도 하셨지만,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내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줄로 생각지 말라’. 주러 오셨다 했어요? ‘검 주러 왔다’. 샬롬을 주러 오시지 않고 검을 주러 오셨다 했어요. 그런데, 검을 어디다 사용하시겠다 했어요? 검으로 모든 가족 관계를 부수겠다고 하셨어요. 그렇잖아요. 아비와 자식이, 형제와 형제가 원수되게 하시겠다고. 도대체 말씀이 무슨 말씀일까요? 말씀도 sharing 관점에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사실 우리의 모든 가족, 가정, 우리는 사랑하지만,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거고, 어쩌면 이기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라는 알고 있습니다. , 민족 이기주의도 있는 거죠. 모든 민족과 국가도 사실 이기적이죠. 세상에 이타적인 민족이 어딨겠어요? 이타적인 국가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리고 이타적인 가정이 정말 있을까요? 우리는 태생적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랑을 갖고 있고, 그런 점에서 이기적일 밖에 없기에 우리의 sharing 때로는 배타적인 sharing이고, 우리는 그래서 defensive하게 되고, 자연히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competitive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자꾸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니까 정말 하나님의 샬롬은 땅에 오는 자꾸 미뤄지고 부서져 가게 되는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그런 도전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관계를 넘어선 관계로 우리를 초청하는 거겠죠. 우리가 절대적으로 없다고 생각하는 관계보다 우선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고, 뜻은 우리의 울타리가 넓혀져서 우리의 사랑이 흘러가게 되는 . 근데 제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타율적인 분배예요. 절대로 하나님은 땅에 샬롬을 가져오시고자 하시지만, 타율적인 분배를 명령하신 적도 없고 그것을 기대하신 적도 없다는 . 저는 저희 아이들 얘기했지만, 때로 초기에 위의 아이가 덩치도 컸지만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을 깨고 싶은 마음이 때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언뜻 생각해보면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아이가 입양될 각각 다른 가정으로 입양됐다면 아이들은 얼마나 사실은 불행한 아이들일까요?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인데, 그래서 형제가 됐는데, 아이들이 가정에 같이 들어오게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축복이잖아요. 근데 문제는 축복은 하늘이 주신 것인데 축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이 문제가 되는 거겠죠. 우리가 축복의 통로라는 많이 하잖아요? 근데, 통로는 뭐가 쌓여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통로에 뭐가 쌓여있으면 문제쟎아요. 통로는 지나가게 하는 거죠.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게 축복의 통로겠죠. 우리 아이들에게 있는 소중한 친밀감과 결속력이 동생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과제지, 그것을 뺏어서 갈라놓는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 그래서, 샬롬은 늦기도 같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기는 ‘하나님, 세상에 있는 모두 모아서 딱딱 갈라서 쫙쫙 나눠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때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번도 그런 아이디어를 말씀하신 적도 없고 지시하신 적도 없죠.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 안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저절로 이제 우리가 선택해서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   
 
계속 잠깐 남아있는 부분들을 다루고 싶은데요. 하나님은 샬롬을 위해서 계속 일해오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많이 보죠. 제가 요셉과 요셉의 형제들이 갈라져서 이산 가족이 얘기를 잠깐 언급하게 됐었는데, 근데 어떻게 형제 관계가 다시 회복되게 되었나 한번 보면요, 사실 이산 가족이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어요. 왜냐하면 요셉의 부모, 야곱과 요셉의 어머니는 아들들이 요셉의 옷에다 짐승 묻혀 와가지고 요셉이 이렇게 됐다 했으니 때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겠지만, 어떻합니까 죽은 자식, 세월이 지나가면서 잊어갔겠죠. 이집트에 있다고는 상상을 수가 없으니깐요. 형들, 요셉 미워서 팔았는데, 찾겠습니까? 그러니 요셉을 찾는 마음을 가진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담, 요셉. 요셉은 특이한 인물이었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상처받은 마음으로 고향 그리워하면서 억울한 마음을 쏟으면서 울면서 지낼 같은데,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정말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갔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도, 품고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 거기서도 충성스러워요. 그런데,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야 자유의 몸이 아니니까 어쩔 없다 하더라도 이후를 생각해보면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되었는데, 총리 대신이 되면 우리 같으면 왕에게 재가 얻어서 고국의 소식도 들어보고 방문도 해볼만한데 실제로 보면 요셉은 거기서 9년이 지나도록 그냥 거기만 있어요. 그러고보면 요셉이라는 인물은 어쩌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고 그냥 어디에 있든지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같애요. 만약 그런 요셉이라면 어떻게 요셉과 요셉의 가족들이 다시 만날 있을까요? 정말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듯이 7 동안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의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거는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내리신건데, 하나님께서 하필 이집트와 가나안에 7 풍년과 흉년을 계획하셨을까요? 사실 흉년과 풍년 사건이 없었다면 가족들이 만날 가능성이 사실은 없었다고 보여져요. 우리가 알듯이 이집트에는 곡식이 준비됐는데 가나안에 곡식이 떨어지고 나니까, 흉년 2년째에 가서 곡식이 이집트에는 많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아들들을 보내게 거잖아요. 그것이 계기가 되서 이제 요셉이 어느 총리 자리에 앉아있을 , 멀리서 곡식을 찾아온 사람들을 보니 몰골이 형들인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거죠. 어렸을 때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산 가족의 화해 상봉의 스토리는 누구 작품이예요? 정말 하나님 작품이라고요. 사람은 깨고 부수지만, 하나님은 주선하는 상봉의 자리를 주선하셔서 다시 화해와 회복을 이루게 하셨다는 . 그런 관점에서 성경의 스토리들을 읽어보면 많이 있습니다. 나눌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는 땅에서 관계를 실패하고 깨고 결국 샬롬을 잃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화해케 하시고, 회복되게 하셔서 정말 하늘의 샬롬을 누리게 하신다는 .   
 
샬롬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번 주먹을 한번 불끈 쥐어 보죠. 불끈 주먹, 우리가 어떤 불끈 주먹을 쥐죠? 불끈 주먹을 우리의 마음이 안에 담겨져 있는 거죠. 여러가지 생각과 마음이. 근데 한번 손을 펴보세요. 우리가 어떤 손을 펴나요? 근데, 불끈 주먹과 손에는 전혀 다른 대조된 것들이 담겨져 있는데요. 우선 우리가 상대방을 거절할 불끈 주먹을 쥐죠. 하지만 손은 상대방을 welcome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끈 주먹을 때는 내가 더이상 기다릴 없다는 조급함, 서두름이 있다면, 손은 잠잠히 기다리는 마음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주먹은 이제는 주먹 밖에 없다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담고 있다면 손은 그래도 희망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주먹은 나의 뜻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면 손은 섬기고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주먹은 상대방을 때릴 , 상처를 사용한다면 우리 언제 펴죠? 맞을 펴쟎아요. 근데, 불끈 주먹과 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불끈 주먹으로 다가오시는 아니라 손으로 다가오시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허물과 투성이지만 우리를 welcome 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결코 절망하지 않으시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분이시지만, 사실은 아까 제가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고집을 꺾지 않으시고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하도록 허락해주시는 분이시고, 그분의 뜻을 고집스럽게 끌고 가는 분이 아니시라고요.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맞으시는 분이시죠. 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샬롬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배울 있게 하시는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도 동일한데요, 우리가 하나님께 불끈 주먹을 쥐고 있겠죠. 때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 선대하시기보다는 나를 너무 힘들게 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하여 더이상 기다릴 수도 없고 그래서 뜻을 이루려고 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계속 원망하는 마음으로 달려갈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때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몸부림일 수는 있어도 우리도 알듯이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됨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때겠죠. 하나님을 우리가 welcome 하고 그분에 대하여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기다릴 ,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을 , 그리고 나의 뜻을 이루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려고 ,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yes 하지 않고 no라고 응답하시는 매맞음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손으로 그분을 만나고 다가갈 , 우리가 진정 하늘의 샬롬을 얻게 된다는 . 그것은 동일한 우리 인간 관계도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간 관계는 서로 주먹을 쥐기가 쉬운 같애요. 우리가 서로를 환영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지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조급해지기 쉽고,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제는 내려놓게 되고, 그리고 나의 뜻을 성취하려고 하게 되고 상대방을 아프고 상처를 주게 때가 많은거죠.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의 평화 샬롬을 땅에 전하고자 한다면 길은 우리의 쥐어져 있던 주먹을 펴는 밖에 없다는 .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함께 있는 이들을 심지어 나를 아프게 하고 공격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welcome하는 마음으로 손을 펴고 그리고 결코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서로에게 기다려줄 있고, 사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리고 나의 뜻이 있지만, 오히려 상대방의 뜻을 꺾으려고 하기보다 섬겨주려는 마음을 갖고, 때로는 상대방 때문에 내가 아픔과 고통을 겪지만 그것을 묵묵히 인내로 받아들일 , 우리는 정말 샬롬을 알고 이해하고 전하고 누리게 하는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말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고요. 우리의 관계는 contract 되기 쉬운 같애요. 심지어 결혼 관계도 우리가 사랑의 언약을 맺지만, 상대방에게 달려있다는 거죠. 상대방이 잘해준다면 나도 잘해줄 있지. 하지만, 상대방이 전혀 잘해주지 않는다면 나도 잘해줄 이유가 없다. 사실 그런 관계라면 인간 관계는 거래가 되고 것입니다. Contract 맺은 거겠죠. 그러나 contract 관계 속에 진정한 샬롬은 있을 없다는 . 어렵지만, 진정한 샬롬은 covenant에서 이루어진다는 . 우리의 상태와 관계없이 변함없는 사랑을 갖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샬롬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도 땅에 진정 샬롬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covenant 마음을 갖고 서로의 관계들에 신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이제 마무리하는데요. 자연을 다시 한번 잠깐 엿보면서 생각해보고 싶어요. 우리에게 정말 주되신 그분의 통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Be under God’s control’로 살아가는 너무 중요한 같애요. 그리고 정말 ‘Be yourself’ 우리 스스로가 되는 너무 중요하다는 .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의 역할에 충실한 . 그러면서도 ‘Be patient’ 우리 서로에게 정말 인내할 있을 , 그때 우리는 샬롬, 자연의 세계에 있는 샬롬을 우리의 관계 속에서도 이룰 있고 샬롬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 전체까지 확장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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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의 의미'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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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가장 평화로왔던 때가 인생에서 언제일까 이렇게 질문을 해본다면 아마도 엄마 뱃속에 있었을 같애요. 안처럼 안전한 때가 없고, 그리고 안에서 있을 때처럼 만족스러운 때가 없을 테니깐요. 우리 인간이 가장 마음에 편안함을 얻을 때는 안전할 때고, 그리고 만족스러울 땐데, 안전과 만족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추구하는데, 샬롬이라는 것이 안전이나 만족과 얼마만큼 관련이 되는 것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가하면 한편 우리는 조화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데요. 안전과 만족이라는 것과 샬롬이 가까운 것일까요? 조화와 가까운 것일까요? 샬롬은 정말 조화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지, 조화를 추구하는 존재는 아닌 같애요. 그런데, 우리는 예외없이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는데, 그런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거기서 분쟁이 생기게 되죠. 그러다보면 결국 우리의 관계 속에 문제가 생기고, 더이상 진정한 샬롬이라는 것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고 보면 샬롬이라는 것을 알고 누리기 위해서는 조화라는 것에 대해서 필요가 있을 같은데요. 우리 인간은 relational 존재죠. 관계를 통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우리 인생을 돌아보아도 우리 인생이 가장 행복할 때와 불행할 때를 생각해본다면 행복과 불행도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수가 있어요. 만약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가족 관계가 정말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정말 존중히 여기고 사랑이 충분히 나누어지고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때가 없는 거고, 반면에 우리의 소중한 가족 관계에 긴장이 있고 나눔도 없고 뭔가 벽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처럼 불행하게 느껴질 때가 없는 거죠. 인생의 행복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어떤 완벽한 안전장치를 갖고 있을 때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모든 필요를 내가 갖고 있을 평화로운 아니라, 오히려 관계에 있다는 . 설사 안전장치는 되어있지 않고, 필요한 것도 넉넉지 않아도 우리의 관계가 정말 사랑스러울 때는 우리는 거기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거죠. 그런 점에서 샬롬은 정말 관계에 있다는 것을 먼저 전제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에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를 통한 샬롬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데, 샬롬은 다름아닌 관계 회복이고 깨어진 사이들이 다시 화해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있을 것입니다. 근데, 샬롬은 분명 누구나 원하는 것일 것입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인데, 사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진정한 샬롬이 뭔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샬롬은 결코 우리 개인의 어떤 안전이나 만족과 관련되지 않는다는 , 전적으로 우리의 관계에 달려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지킬 필요가 있는 같애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지만, 샬롬은 기도로도 이루어지는 같지 않습니다. 만약 기도로 이루어지는 거라면 이미 이루어졌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기도하셨고, 우리도 정말 샬롬을 위해 기도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샬롬은 기도를 통해 저절로 응답받는 것만은 아니라는 . 그리고 또한 선포하기도 하죠. 평화가 너희에게 임할지니라 주님 말씀하셨잖아요? 그리고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보내시면서도 너희가 어느 집에 거하든지 집에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포하고 제공하지만 그렇지만 거기에 평화나 샬롬이 이루어지지 않죠. 전제가 있습니다. 평화를 진정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일 때만 주어진다는 . 그것을 단지 선포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 샬롬은 기도나 선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샬롬이 무엇인지 알고 샬롬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마음들이 모아질 가운데서 조화가 경험되고 거기에 샬롬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실 , 바리새인들이 물었었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 거냐고, 언제 임하느냐고 물었을 ,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수도 없고 어디 있다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너희 안에 있다라는 것을 우리 마음 안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너희 안에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단어의 의미는 ‘안은’ “among you” 너희들 사이에 있다, 너희들 가운데 있다. 너희들이 땅에서 무언가 합심하여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너희들의 관계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는 바로 너희들의 관계 속에 있다.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 23절에서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있어요. 너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어떻게 하라 그랬죠? 예물 거기 두고 먼저 가서 사람과 화해한 다음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오늘로 적용해본다면 너희가 예배드리러 나가다가 주일 교회에 출석하려다가 누군가와 관계가 깨어지고 원망들을 만한 사이가 되었으면 멈추고 돌아가서 사람과 화해한 다음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는 거죠. 그런데, 말씀 그대로 적용한다면 어쩌면 교회들마다 주일 출석율이 떨어질지 모르겠어요. 사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관계가 여전히 뭔가 문제가 있고 깨져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계속 나아가는 예배는 계속되는 거잖아요. 근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그렇게 도전하신 것일까? 거기에 주님의 진정한 뜻이 담겨있겠죠.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헌신이나 예배보다 어쩌면 우리의 관계를 원하신다는 .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보다 우리 서로간의 진정한 회복 관계를 원하신다는 .   
 
저는 공동체에 관심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있어서, 한번 한국에 있을 때도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도 많이 가봤었지만, 유럽에 있는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독일에 다름슈타트에 마리아 자매회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실레아 슈링크 라는 분에 의해 시작된 곳인데, 거기를 한번 방문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었어요. 그런데, 자매들이 공동생활을 오래하면서 기도해온 있었대요. 언제나 놓치지 않고 기도해온 것은 ‘하나님, 우리의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하는 일이 안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같이 농사도 짓고 거기는 출판도 하기 때문에 인쇄를 위한 윤전기도 돌아가는데, 어느 인쇄를 위한 윤전기가 돌아가다가 멈추면 우리 상식적으로 보통 사람같으면 기계를 손보거나 아니면 고칠 있는 기술자를 불러야죠. 그런데, 자매들은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하던 일손을 멈추고 각자 방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관계를 점검하는 거죠. 그러다 어떤 자매가 다른 자매에게 뭔가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을 이제 알고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청하는 편지를 써서 상대방 자매의 방에 밀어넣고 자매도 자신이 용서를 청하는 편지를 이제 주고 받고 그렇게 화해가 이루어지면 멈춰있던 윤전기가 저절로 돌아가게 그런 기적을 많이 갖고 있더라고요.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자매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있을까 하는 반문도 해봤어요. ‘하나님, 우리 가족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 가족이 하는 사업이고 뭐고 안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교회의 형제 자매들 사이에 관계 문제가 있으면 교회가 하는 사역이고 뭐고 제대로 안되게 해주십시오.’ 사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우선순위가 많이 바뀌어버린 거죠. 우리는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해져 버린게 생긴 아니겠습니까? 일이 중요하든지, 돈이 중요하든지,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다른 것들이 우선 순위가 되어버렸기에 우리는 관계들은 어렵고 망가져있어도 자꾸 뒤로 미루게 되는 거죠. 그런 우리가 그대로 살아간다면 땅에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샬롬이란 이루어지기가 요원할 것입니다
 
샬롬은 관계에 있다, 조화에 있다’전제할 , 샬롬을 우리가 가장 느낄 있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자연의 세계인데요. 종종 우리는 스트레스 받고 많이 지치고 피곤할 , 대개 훌쩍 자연에 가서 많이 쉬잖아요? 그리고, 자연에서 우리는 정말 특별한 위로와 쉼을 많이 얻게 됩니다
 
근데, 우리가 가는 자연도 어떤 자연이냐 하면 어떤 존재가 모든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자연이 아니예요. 우리가 가서 쉼을 누리는 자연은 여러 가지 생명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자연이고, 거기에 물이 넉넉하고 모두가 어떤 풍성한 초록빛을 나타내는 자연 거기서 쉼을 얻는 거지, 황량한 사막에서 얻는 것도 아니고 어떤 가지 짐승이나 식물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 평화를 누리는 아니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자연, 조화, 그리고 샬롬을 느낄 있는 자연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볼 , 자연이 어떤 상태이기에 우리가 거기서 샬롬,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인가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먼저 우리 보통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를 한번 생각해보면, 탁월한 오케스트라 악단들이 이제 음악을 연주해낼 , 우리는 연주가 이루어지기 위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있습니다. 우선 아무리 탁월한 연주자들이라 하더라도 만약 그들 가운데 지휘자도 없고 공동으로 주어진 악보가 없다면 과연 그들이 함께 아름다운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 있을까요? 불가능하다는 우리가 알아요. 그리고, 만약에 그들 모두가 나름대로 솜씨가 있더라도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쯤이야 하면서 군중 속에 숨으려고 하거나 나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경쟁한다면 함께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 있을까요? 그것도 사실 어렵다는 알거예요. 그리고, 하나 굉장히 거기서 중요한 것은 우선 어떤 주도권이 필요한 거죠. 내가 아닌 어떤 지휘자가 필요하다는 . 그리고 하나는 내가 나의 역할에 굉장히 충실해야한다는 . 다른 사람의 역할과 관계없이 나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 그리고 하나 굉장히 중요한 것은 연습할 때부터 필요한 태도인데요. 나는 연습이 됐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연습이 되지 않았으면 같이 기다려주면서 연습해야 되는 거죠. 서로를 인내하면서 견뎌주어야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중에 이제 함께 아름다운 조화로운 오케스트라 음악을 연주해내게 됩니다. 근데 그것을 자연에다가 한번 생각해봅니다. 정말 자연이 그렇거든요? 우리가 알듯이 자연은 스스로 주도권을 갖고 있기보다 정말 창조주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있어요. 자신들의 계절을 자신들이 통제하지 않잖아요. 전적으로 창조주에게 의존되어 있어요. 창조주가 주신 계절, 창조주가 주신 , , 비를 맞으면서 움직여가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들의 삶을 스스로 control하고 있지 않다는 . 그러면서 우리가 자연에서 있는 것은 어떤 존재도 서로 비교하지 않아요. 단지 자신됨에 충실할 뿐이지. 종종 우리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는 나무들이나 풀들을 어떤 씨앗들은 운명적으로 나쁜 떨어졌어요. 예를 들어서 계곡, 절벽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나무들이나 정말 황량하고 건조한 땅에 홀로 자라게 나무들이나 풀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만약에 본다면 너무 환경이 좋아요. 근데 만약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런 상황을 다른 좋은 곳에 떨어져 있는 생명들과 비교한다면 얼마나 사실 서럽고 원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자연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생명됨에 충실한 거죠. 군중 속에 숨지도 않고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정말 자기 자신이 되는 거죠. 그러면서도 하나, 자연에 있는 생명들을 보면 서로를 정말 견디는 것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아름다운 여러가지 씨앗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들판을 가보면 거기 어쩌면 씨앗들은 혼자만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자라고 싶겠죠. 그러나 예외없이 이런 저런 씨앗들을 옆에 와서 같이 자랍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사실은 불편하고 성가시고 그리고 어쩌면 없었으면 하는 마음들이 들겠죠. 우리 인간이라면. 그러나, 우리가 이제 집에 정원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잔디밭에 민들레가 자라고 토끼풀 자라는 보기 싫어서 자꾸 뽑거든요? 그건 사람 눈에 그런거지. 잔디밭도, 잔디들도 다른 존재가 오는게 환영하는 마음이 별로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조화로운 들판은 어떤 가지가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아니라,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이런 저런 손님들을 모두가 함께 결국은 견디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우리가 아름다운 거죠. 결코 독점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이런 저런 모든 존재들이 어우러져서 서로를 견디고 있는 아름답다는 . 그래서 자연에게서 우리가 있는 하나님의 샬롬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우리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비춰볼 있는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주도권을 정말 갖고자 하지 않을 , 오직 우리 인생의 주도권은 그분께 있음을 언제나 놓치지 않을 , 그리고 그분의 지휘에 민감하여 움직일 있을 ,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악보라고 말할 있는 말씀에 보다 신실할 있을 , 그리고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에게 맡겨진 나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있을 ,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들이 때로는 불편하고 나를 힘들게 수도 있지만 견디고 그걸 소중히 여겨줄 , 그때 우리가 함께 조화라는 것을 만들어 있는 것이겠죠. 우리가 개인적으로 속해 있는 가정이든, 믿음의 공동체든, 부분에서 약할 , 사실은 조화가 깨지고 결국은 샬롬은 사라지고 더이상 우리의 마음에 평화도 있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 사회만이 자연의 세계와 달리 부조화의 연속이라는 것을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 속에서도 동일하게 수가 있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세계에는 어떤 질서와 조화가 있는데, 우리 인간 사회에는 그것이 사실 없습니다. 이유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도권을 놓쳤기 때문이겠죠. 근데 주도권과 관련해서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우선 주도권을 서로 잡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마치 고아들의 싸움터라고 말할 있을 거예요. 아버지없이, 부모없이, 어떤 누군가의 리더쉽없이 각자 그냥 고아가 되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결국 아귀다툼이 일어날 밖에 없고, 거기서는 조화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 우리 충분히 상상해볼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 관계는 높고 낮음이 생겨났죠. 자연히 거기서 보다 경쟁력이 있고 힘있는 사람들은 위에 서게 되고, 상대적으로 약하고 결국 당하는 사람들은 이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원망과 분노들이 쌓여지게 되고 그리고 이제 자연히 그러다보니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고 어쩌면 이기기 위한 무기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근데 그렇게 해서 샬롬이 더이상 있지 않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 구약의 예언자였던 이사야가 환상으로 보게 샬롬에 대한 그림이 있어요.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은 어떤 변화들이 있을까라는 그림인데, 강의안에도 있지만, 크게 가지 그림을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모든 높은 산들, 언덕들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서 이제 평평한 곳이 것이다. 그리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이리와 양이 함께 뒹굴고 그리고 사람들이 칼과 창을 부수어서 그것으로 보습과 낫을 만들고. 어떤 변화들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근데 변화들은 관계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요. 사실 변화는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알지 못하고 고아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갈 , 우리의 인생 안에도 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높은 언덕과 산이 있는가 하면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어떤 수치의 골짜기들을 우리는 갖고 있다고 말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통치를 알지 못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언제나 긴장하는 마음도 갖게 되고, 상처도 받지만, 주게 되고, 자연히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방어와 공격을 위한 무기들을, 칼과 창을 만드는 에너지를 쏟게 되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통치를 알고 나니까 이제 안에서도 그렇게 잘난 것이 사실 잘난 것도 아니고, 안에 수치스러운 것도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 그래서 모두가,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그분의 은총 아래 평평해지게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도 사라져가게 되고, 상처를 받지도 않지만 주지도 않게 되고, 나아가서는 인생의 에너지를 이제는 방어와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 사용하게 되는 그런 변화들을 그림으로 통해서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함께 아름다운 관계를,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 바로 샬롬이라고 말할 있을 것입니다.   
 
근데 샬롬을 우리가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가지의 대조된, 성경에 나오는 건축을 통해서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성경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 찾아보시면 좋겠는데요. 에베소서 2 20절부터 22.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세워져 가는 것인지. 그런가하면 대조가 있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대조된 건축이 있는데요. 창세기 11 1절부터 9절에 나오는 바벨탑. 세상을 대표하는, 상징하고 있는 하나의 건축이라고 수가 있는데, 에베소서 2장만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어떤 건축되어져가는 그림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에 있는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벨탑 사건인데요. 사람들이 어떤 아이디어가 생겼죠. 우리가 함께 성과 대를 높이 쌓아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래서 그들은 아이디어가 좋아 보여서 시날이라는 평지를 선택하고 거기에다 성을 쌓기 시작했죠. 그런데, 성을 쌓다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기에 그들의 언어를 통하지 않게 하셨죠. 자연히 대화가 가능하지 않게 되고, 대화가 단절되니 협력도 불가능해진거죠. 자연히 성쌓기를 그치고 지면에 흩어져버린 이야기입니다. 나름대로 연합을 시도했지만, 나름대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하나되고자 하는 성공과 연합을 추구하는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지만, 오히려 결과는 분열로 끝나고 그런 건축입니다. 근데, 건축을 우리가 건축할 중요한 것이 보면 건축은 어떤 위에 것인가, 터가 굉장히 중요하고요, 그리고 누가 설계하며 누가 건축할 것인가, 설계자와 건축가가 누구인가가 굉장히 중요하겠죠. 건축하려고 하는지, 건축의 목표, 목적이 무엇이냐도 중요한 요소겠고요. 다음에 건축의 과정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것입니다. 근데, 가지 영역에서 개의 건축이 어떻게 대조가 되는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이 선택한 터는 시날 평지였죠. 근데 시날 평지는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누가 설계하고 건축하고 있었냐면 이렇게 말했잖아요. ‘자, 우리가 성과 대를 높이 쌓아’. 그러면 누가 설계하고 건축한 거죠? 사람이 설계하고 건축합니다. 목적이 있었어요. 목표는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 이름을 낸다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는 거죠. 근데, 건축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결국 대화가 단절되고 협력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결과로 결국은 분열되고 흩어져 버리고 만거죠. 근데, 지금 에베소서에서 읽은 성경구절을 보면 어떤 터를 소개하고 있죠?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 사도와 선지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이 전해진 것이죠. 구약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은 사도들을 통해서. 사도와 선지자의 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터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설계자와 건축가가 누구인가? 지금 함께 읽었었지만, 성경구절에 보면 너희는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다. 성전이 되어가고,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수동형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능동형의 표현이 하나도 없죠. 이야긴 뭘까요? 우리가 설계하고 건축하는 아니라, 우리는 그분의 주도권 아래서 지어져 이라는 . 설계자와 건축가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는 것입니다. 목표도 다르죠. 지금 읽었지만,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의 모임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기뻐 거하시는 그런 곳이 되기를 원해서 그들은 지어져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과정에서도 보면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그리고 함께 지어져 간다고 했죠. 건축의 가지 요소에서 아주 뚜렷하게 대조되고 있는 것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추구한다고 , 샬롬은 어떻게 그러면 가능한 것일까? 한번 건축에 비추어서 점검해 있을 같애요. 우리의 가정이든, 우리의 교회든, 아니면 어떤 우리의 시도든간에, 우리의 인생이든 간에 우리의 터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터를 잘못 선택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터를 삼기 시작하면 우리의 기대는 사실 실패하기 쉽다는 .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서는 결코 우리가 조화를 이루어낼 수가 없다는 . 그분의 control, 그분의 주도 아래 있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모임 안에 관계 속에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께서 기뻐 거하시는 곳이 되도록 우리는 부름받았다는 . 우리의 관계, 연결과 함께 지어져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 그것을 소흘히 여기지 않을 우리는 조화와 샬롬을 얻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소흘히 여기면 마치 바벨탑의 의도는 그럴 해보였지만 실패하고 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되고 싶지만 실패하고 분열될 밖에 없다는 것을 수가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아주 고대에 있었던 어떤 physical 건축으로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어쩌면 사건은 인류의 문명, 민족과 국가,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하나의 메세지를 담고 있게 돼요. 그리고, 분명 바벨탑은 고대의 건축이라기보다 여전히 오늘도 계속 건축되고 있는 거라는 . 오늘의 모든 민족과 국가, 모든 인간의 시도들이 사실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의도는 그럴 하지만 실패할 밖에 없다는 것을 어쩜 우리에게 메세지로 던져주고 있는 아닐까? 그렇게 돌아보고 싶은 거고요. 그리고,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의 심리를 생각해보고 싶어요. ‘자, 우리가 성과 대를 높이 쌓아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런 마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안에 있는 심리는, 어떤 심리들이 있냐하면 우선 배타적인 심리가 있어요. Exclusive, 그리고 하나 굉장히 defensive 심리가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성과 대를 높이 쌓아서 하나되지 않으면 흩어질지 모른다. 그런 불안한 심리를 피하기 위해서 보이는 거라도 세워서 뭉쳐보자는, 우리 가만히 있다가는 흩어질지 모른다라는 그런 불안한 심리를 방어하기 위한 defensive 마음이 있는 거죠. 그리고 하나 이들에게 competitive 심리도 있어요. 우리 이름을 내자. 그리고 하나 덧붙인다면 take initiative 한거죠. , 우리가 해보자는 거죠. 그런데, 이제 가지 심리를 체크해보고 싶은데요. 만약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방어적이고, 경쟁적이고, 주도적인 마음을 갖고 함께 모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우리 인류가 정말 하나될 가능성이 가지 있어요. 언제냐 하면 외계인이 침략할 . 외계인이 침략하면 모든 민족과 국가는 연합할 가능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때 공동의 적이 생긴 거니까. 그렇지만, 연합은 사실 잠시뿐이라는 우리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생각하더라도 2002 월드컵 모두 붉은 옷을 입고 정말 다같이 모든 광장들을 메우며 열광할 분명 우리는 하나였어요. 우린 하나였는데, 그때 우리의 하나됨은 exclusive 건가요 아닌가요? 굉장히 exclusive 거죠. 그때 defensive한가요 아닌가요? 굉장히 defensive해요.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 팀이 경기하는데 어느 심판이 불리하게 우리 편에 불리하게 판단한다면 다같이 그냥 굉장히 방어적이 되는 거잖아요. 그때 competitive한가요 한가요? 정말competitive하죠. 그때 얼마나 주도권을 가질려고 하는지, 다들 감독과 코치가 되서 선수 빼고 선수 넣어라 이렇게들 한마디들 하잖아요. 그런 심리들이 모여있지만, 때는 하나인 같았던 거죠. 그런데, 하나됨은 깨질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있는데, 예를 들어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배타적인 사람들끼리 함께 뭔가를 만들면 배타적인 심리는 안에서도 파당을 형성할 밖에 없다는 언젠가는. 그리고, 방어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는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서로 돌리게 되고 책임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는 . 그리고, 경쟁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자연히 주도권, 자리싸움을 하게 된다는 . 그리고, 각자 주도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모여있으면 서로 자기의 주장, 목소리를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 대화가 더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는 . 그래서,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됨은 우리 안에 있는 심리들을 사실은 우리가 극복할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축이라고도 있을 같애요. 저는 건축을 어떤 physical 건축이 정말 아니라, 우리가 땅에 기대하고 있는 샬롬이라는 것이 오지 않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있는지를, 정말 샬롬이 무엇인지를 보게 해주는, 대조가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예를 들었습니다. 사실 성공과 연합이라는 그럴듯한 아이디어였잖아요. 바벨탑은. 성공과 연합이라는 그럴듯한 아이디어였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끼리라는 어둠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 저는 샬롬을 무엇으로 말하고 싶으냐하면 ‘샬롬은 sharing이다’ 말하고 싶어요. 샬롬은 나의 어떤 배타적인 , 울타리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welcome하고 exclusive 자리에서 inclusive 자리로,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어떤 위기를 느낄 때마다 나를 방어하려는 defensive 그런 마음에서 자꾸 나를 위한 방어장치들을 만들려고 하기 보다 때로는 오히려 내가 짐을 지려는 그런 인내하고 견디려는 그런 마음을 갖고, 경쟁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compassion, 어떤 긍휼의 마음을 서로에게 제공해주고, 그리고 주도하려고 하기 보다는 정말 그분의 주되심을 놓치지 않고 그럴 우리가 함께 경험해 있는 것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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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코스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말씀해달라고 부탁받게 되어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개념적인 정의를 내릴 있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어떤 것을 정의하는 문제를 얘기해보겠습니다. 어떤 것을 정의할  “A A이다.”라고 수도 있지만 “A B 아니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같습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LA에서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여러분 나이쯤 되는 여학생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그다음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에도 자리가 비어 있어서 속으로 여학생이 그리로 가길 바랐습니다. 그러면 편하게 가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뜨기 직전에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자리를 지나쳐 가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다시 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에 각자 책을 보면서 가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아가씨에게 뭐라고 하는데 아가씨가 아줌마에게 쏘아붙였습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할까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주머니 또한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불을 켜고 책을 보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제가 아래서 책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분은 모녀지간이었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갈등이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고 어머니는 딸에게 어떻게든 얘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갈등과 마디 마디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느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줄 수가 없었고, 상담할 수도 없었고, 아픔만을 내가 느끼면서 너무 아프겠다, 힘들겠다하는 생각을 하며 왔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모습들이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관계에도 있고, 제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반대에는 사단의 나라가 있고 사단의 나라는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사단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도 피해자입니다. 인간관계와 모든 속에서 사단은 어떻게든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죄의식을 일으킵니다. 그것 때문에 바른 사랑을 못하게 하고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사랑이 죄로 물들어 있기에 남에게 아픔을 주고, 아픔을 받으면 내가 밀쳐내고 더한 아픔을 줌으로써 자기가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아픔과 힘듦과 갈등이 사단의 나라가 아닌가 합니다. 원래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과 화평과 기쁨과 평안함이 있는 나라였는데 어느새 사단이 인간의 태초인 아담으로부터 인간의 삶에 들어오고, 인간의 삶에서 자신이 노릇하고, 인간의 삶을 다스리면서 사단의 인도함을 받게 하고, 사단의 원칙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결과로 많은 고통을 가지고 살게 것이 사단의 나라의 모습이고 그런 것이 인간  삶의 현재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구약에서 다니엘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는데 오늘은 얘기는 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데 사단이 인간의 삶을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훈련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회복하도록 계획 하시고, 추진하신 것이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들입니다. 다니엘서를 간단히 설명 드리면 다니엘서는 하나님이 왕이시다, 주권자이시다는 주제를 가지고 쓰인 책입니다. 책을 보면 다니엘과 다니엘의 삶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 다니엘의 친구, 신앙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이 세상의 왕이신 것이 세상으로 대변되는 느부갓네살왕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무엇이든지 있는 왕에게 정신병이 들게 하고, 왕은 동안 들판에 나가서 잠을 자고 풀을 뜯어 먹으며 지내다가 하나님이 정신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왕은 내가 왕이 아니고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기독교 공동체만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는데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 , , , 흙으로 동상이 뜨인 돌에 의해서 부서지고 가루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빌론과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 인간의 왕국을 상징합니다. 예언을 푸는 사람들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인지 풀려고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왕국이 계속 바뀌며 지속하는 가운데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해서 모든 인간의 왕국을 폐하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왕들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여 다른 왕국을 멸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자신이 왕이 되는 그런 역사가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삶의 왕이시고, 신앙 공동체와 세상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고백하지 못하지만, 속에서 하나님은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다니엘서에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왕국이 계속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예언대로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가져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서 죄의 값을 지불해 주시고, 부활을 통해서 생명을 처음으로 가지시고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셨던 평화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죄의 해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고 선포하시고, 우리가 이러한 선물들을 구원자 예수님 안에서 받고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원래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삶의 모습들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속에 평안함이 생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낮아짐과 섬김의 삶을 살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배우면서 부분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학생과 식사를 함께 했는데 학생이 자신은 고난을 선택해서 있는 용기가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있었나 봅니다. 구주로 예수님을 받아 드렸지만,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받아 누리기를 꺼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임하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평안을 주시고, 예수님을 우리가 구세주로 영접함을 통해서 자녀의 관계가 회복되었는데, 그다음으로 우리에게 낮아지는 , 섬김의 , 희생의 삶을 살라고 예수님께서 삶과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려고 하면,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굉장히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벽을 넘지 못하고 갈등 속에 있습니다.

전에 제가 LA에서 목회하시는 미국 목사님 스웬들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계시는데, 그분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맞는 얘기구나 생각했던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LA에서 뉴욕을 가려고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계를 가져오지 않아서 옆에 시계를 사람에게 지금이 시인지 물었습니다. 사람은 뉴욕의 시간뿐 아니라,  온도와 기상 상태까지 말해주었습니다. 사람이 궁금한 것을 시계를 보면서 얘기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시계에 웬만한 정보가 있다는 것에 감동해서 시계 주인에게 시계를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원한다면 드리죠. 오천 불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비록 값이 비싸지만 원하는 정보들을 얻을 있다면 얼마나 좋은 시계인가 하는 생각에 오천불을 주고 시계를 샀습니다. 시계를 받고 떠나려는 시계를 사람이 잠깐만요하고 부르더니, 시계를 쓰기 위해 필요하다고 개의 이민용 가방을 주었습니다. 컴퓨터가 작동하려면 이것을 들고 다녀야 하고 시계만 가지고는 동작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이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기독교로 들어오면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이 자녀 삼아 주시고 모든 것이 은혜로운 것으로 인식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하고 교회에 갔더니 매일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시계를 가지려 했더니 이민 가방 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계를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구원의 부분은 좋은데 Lordship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있어서 매일 같이 주저함이 있는 것이며, 그런 갈등 속에 코스타에서 가야 한다고 하니 것이고 집회 동안 고난의 , 십자가의 길을 가야지 하고 결심했다가 집에 돌아가면 결심은 단지 은혜 충만할 것이고, 그렇게 없다고 돌아서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의 성격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lordship 짐이라고 생각하는 구원이 선물인 만큼 lordship 선물입니다. 사실 구원도 선물이지만 십자가의 삶은 선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것을 가르쳐주시면서 높아지는 삶보다는 낮아지는 , 지배하는 삶보다는 섬기는 , 받는 삶보다는 주는 , 원수를 갚는 삶보다는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들입니다. 원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지만, 안의 원리들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역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역설(paradox)입니다. 파라독스가 무슨 뜻입니까?  파라독스는 언뜻 보면 모순이고 말이 되지만 거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높아지기 보다는 낮아지는 , 지배하기보다는 섬기는 , 받기보다는 주는 , 이것을 처음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선물을 주신다면서 어떻게 이것이 길입니까. 말이 안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바른길입니다. 우리가 높아지면 행복해질 같지만, 사실 행복은 높은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하면 좋을 같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지배자는 사람들을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원리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길을 가라고 하신 것은, 내가 좋은 선물을 주었으니 이제 힘든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행복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진리를 주신 것입니다. 진리는 언뜻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지만 진정한 의미의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역설의 삶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자 운동을 많이 하는데, 운동 자체는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운동을 합니까? 고난을 거친 후에 건강한 때문에 힘든 운동을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선택하는 자체만 보았을 때는 말이 되지만 그것이 건강한 삶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면서도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가끔 있고, 공부가 가끔은 재미있지만, 기본적으로 공부는 힘들고,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필요가 없는데도 공부를 선택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Lord라는 것이 우리가 무조건 명령에 순종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lord)라는 사실이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 구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정말로 깊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까 말씀드린 비행기의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는데 중에 누군가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그들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딸이 엄마가 나를 불행하게 한다는 이유로 엄마를 원망하거나, 혹은 엄마가 딸의 삶을 계속 조정하려고 하는 것은 사탄이 원하는 삶의 원리이다. 그런 사탄이 원하는 삶의 원리들을 따라서 산다면 어떻게 보면 제가 보았던 둘의 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르지만, 삶에는 계속 사탄이 일으키는 아픔과 상처가 계속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원리대로 딸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엄마를 용서하기로 선택할 있다면 그런 선택이 당장에는 말이 되어도 그런 용서를 통해서 둘의 관계가 회복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관계 속에서 가정 속에서 임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낮아지고 섬기는 삶이 우리에게 도전되고 힘이 들지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의 원리를 주신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나, 좋은 것을 주었으니 정도는 해야지 하는 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깊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입니다. 명령으로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원리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약속된 축복이 있기에 기쁨으로 선택하는 것이며 죽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고난을 선택하려 하지 마십시오. 작은 고난, 작은 낮아짐, 작은 양보로부터 그런 삶의 맛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이렇게 실제적이구나 하는 느끼십시오. 그러면 그런 가운데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을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질문 있으신 계십니까?

질문: 사탄이 생겼고, 하나님이 사탄의 행동을 저지하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모두 궁금해하지만,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같습니다. 굉장히 신학적인 질문인데, 하나님이 사탄을 허용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하는 사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유혹을 선택했습니다.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가장 신학적인 질문이지만 아무도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모범과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임했고, 우리가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함을 받고, 양자 됨을 가지고 살아가고, 때로는 주저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원리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성숙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으로 사단의 권세가 멸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의 삶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영향력은 아직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한 것을 모르고 의식하지 못하며 사탄이 조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크리스천들의 선교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적 사명은 성경의 요나서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요나에게 느니웨는 비유로 말하자면 한국사람에게 일본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원수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빨리 멸망 받아서 자신의 나라가 행복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요나가 가기 싫어했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습니다. 그때 요나는 풍랑을 만나서 바다로 던져졌고 고래 배속에 들어갔는데 고래가 요나를  니느웨에 토해 놓습니다. 요나는 없이 다시스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나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을 즐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서의 진정한 교훈은 4장에 있습니다. 많이 얘기되지 않는 주제가 4장에 있습니다. 요나는  짜증이 났습니다. “그것 봐요. 하나님,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용서해 아니었습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 화가 있다가  담벼락 아래서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호박 덩굴이 위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보내서 덩굴의 줄기를 먹어서 마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늘이 없어졌습니다. 이미 화가 났던 요나는 하나님, 잠도 자게 합니까? 나를 괴롭히십니까? 내게 그늘을 주는 덩굴은 없애십니까?” 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있는 수십만의 사람들과 수만 마리의 소와 양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소유인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사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앞뒤를 분간 하며 사탄의 저주에 이끌려 사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너는 호박 덩굴 하나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데, 많은 사람과 양과 소를 향한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니?”하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왕이시고, 세상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귀한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탄의 조정을 받는 삶을 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시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요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나의 창조물인데 나의 안타까움을 몰라 주느냐? 너희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해주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나의 사랑을 확신시켜주기 위함인데 그것을 모르느냐?” 이것은 이슬라엘에게 주어진 음성이며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는 축복과 하나님 나라의 깊은 의미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선교를 향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 임했는데 아직도 사탄의 조정 속에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도 사단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번째 어려움은 위협입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산다고? 세상에서 너의 삶이 한심해지고 비참해지고 거야!” 파라독스의 삶은 역설이기에 당장에는 말이 되고 세상의 기준으로도 설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길을 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믿음인데 사탄이 여러 가지 경로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위협이 아니면 유혹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사탄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씁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이 당면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때로 넘어집니다. 그러한 삶을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땅에 온전히 성취하게 된다고 했고, 다니엘서에는 인간의 나라가 교체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했다고 말하고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중적으로 임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것과 신약에서 말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예배 드리는 본당을 때에 다니엘은 본당은 여기 있습니다.”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당에 가서 앞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본당의 뒷문은 다른 쪽에 있습니다.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멀리서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가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에는 앞문과 뒷문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나라의 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의 완성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번째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임했듯이두 번째 하나님 나라의 완성 또한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지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의 유혹과 고난을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과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만, 넘어지고, 유혹에 빠지고, 때로는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것으로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에서 약해질 , 사탄의 원리가 우리 삶을 지배할 우리는 삶의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 속에 살아야 함을 다짐하며 고난의 순간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고난이 없을 때에는 세상에 만족하며 삶에 안주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과 인간관계의 갈등을 통해서 만족은 삶에 없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소망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소망함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른 질문 있으십니까?

질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되고, 재림으로 완성된다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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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너무 좋은 글입니다.
    이번 뉴질랜드 코스타에서 간사로 섬기는 김하영입니다.
    이 글을 저희 싸이월드에 올리고 싶은데요.
    스크랩을 할 수가 없네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에 들어가도
    그 라이선스에 대한 설명뿐.
    어떻게 스크랩해야하는지 알려주시겠어요?
    그럼,

    김하영올림

다음은 2007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선교한국 상임총무인 한철호 목사의 '하나님 나라란?'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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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한국의 상임총무로 일하고 있는 철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정의와 의미가 무엇인가 잘 이해하고 있으면 강의를 들을 때 정확한 이해와 적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디즈니랜드에 다녀왔습니다. 각 나라가 모형으로 되어 있는 곳에 갔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는 그런 세상을 추구해온 역사입니다. 철학, 문화, 이런 것들도 가장 이상적인 세상을 달성하려고 한 것이겠죠. 플라톤이 좋은 요소를 모아서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고 이름을 유토피아로 붙였습니다. 그런 나라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헤로도토스는 미래를 위해 걱정해야하는 현재가 지속되는 한 희망은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래학자들의 고민의 결론, 결국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이 그들이 가장 많이 쓴 단어입니다. 그런데 성경도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기도합주를 설명하면서 성경을 종말에 관한 약속과 기록이라 설명했습니다. 성경도 하나님이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핵심입니다. 이 세상을 만든 분도 하나님이고 종말도 하나님이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의 주제도 이런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마지막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천국이 오면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드는 모든 나라가 평화롭고, 자연도 평화로운 그런 나라가 올 거라는 것입니다. 자연도 더 이상 악이 존재하지 않고 행복과 안녕과 화평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가 첫마디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느니라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거입니다. 천국의 비유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원입니다. 승천을 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해가는 과정이 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 항상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죠. ‘This is good’ ‘와 너무 좋다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내적인 속성을 따라서 인간을 거룩하게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양심있는 이런 형용사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인간이 자연만물과 조화롭게 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세상,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이를 낳으면서 제가 그런 것을 느꼈는데요, 자연분만이 뭔지 아십니까?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뭐 하는지 아십니까?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진통이 있는데, 아이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위험해진 것입니다. 죽느니 사니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아이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겨우 나오면서 제 품에 안겼습니다. 20초간 너무 감동스러웠습니다. 나중에 저와 똑 같은 아이를 보면서 감동했던 일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이 죄에 빠져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건이지요. 이후 원래 창조 질서로 회복하는 과정이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나라를 쓸 때, 통치자, 영토, 사람이 있어야겠죠.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나라를 말할 때 보통 통치권, 신약에서도 통치권, 영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어떤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권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영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리가 미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왕위, 다니엘의 환상 중에 영원한 나라를 말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통치권에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는 사람의 선택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우리의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야하는 이유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자의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날, 이 통치권에 들어가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죄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벗어나는 때도 있겠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하겠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갖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합니다. 비밀 mystery는 감춰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드러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바울 사도도 사용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이 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합니다. 왕 중의 왕이 이 땅을 다스리겠다는 말이죠. 뜨인 돌이 여기서 나오죠. 영원한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다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할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보죠.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아주 흥분한 것이죠. 마지막 때가 되니 겁먹고 회개하려고 요한에게 몰려든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오면 심판이라는 톤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면서 시험 당하십니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군사력을 동원해서 로마를 쳐들어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그리고 제자 12명을 부르시죠. 사람을 수 만명을 모아야 하는데, 겨우 12명의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죠.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이런 질문인데,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냐면, 요한은 예수님이 힘을 갖고 군사력을 동원해서 로마를 쳐부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새로운 윤리를 알려주고 이런 일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요한은 혹시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 것 아닌가요? 이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이런 말을 전해줍니다. 바로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부터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줍니다. 천국은 메시아가 칼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온다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은 것이고,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천국은 아주 작은 것으로 시작하지만 아주 커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같지만 나중에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 속에 말씀 하나가 떨어졌는데, 내 삶이 바뀌고, 내 가정이 바뀌고, 동료가 바뀌고 부모님이 바뀌는, 그런 형태로 천국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또 마지막 날에 가르침도 밭에 감춘 보화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만났을 때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이것을 사죠. 가장 좋은 보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에는 어떻게 되는가를 마태복음 24장 이후에 설명합니다. 환란이 있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결정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마치 겨자씨처럼.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완성되냐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복음이 이땅에 오게 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이 완성됩니다. 초림으로 예수님이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초림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 극복 못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왜곡된 나라에서 사탄이 통제하는 방법이 죄를 짓게 하고 그 결과 죽게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사시므로 사탄을 물리침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완전히 괴멸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는 요소를 제거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나라가 오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까지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면 심판이 오십니다. 구원받는 자와 심판받는 자가 구별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도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법대로 살도록 스스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아이를 키울 때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키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러나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있는 것입니다. 결혼문제, 직장문제, 가정 문제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성경에서 봐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언제 완성되냐면, 이 복음이 온 땅에 퍼져야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선교와 천국은 밀접히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와 전도에 힘써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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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2002 KOSTA/USA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주제로 강의한 손봉호 교수의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이다.


세계관이란 말을 자주 들어보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세계관은 분명한 개념이 있는게 아닙니다. 19세기 독일철학가들이 철학의 일부로 이야기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 도이벨트라는 사람이 세계관 이야기를 조금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일반화된 신학적, 철학적 개념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월드컵에 대해서 온 사회가 열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모두 기독교인입니다. 뉴스앤조이라는 온라인 신문 인터뷰에 월드컵에 대해 비판을 했습니다. 월드컵이 너무 상업적이고 스포츠정신에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혼자만의 생각인가 했었는데 기독교방송국에 방송할 일이 있어서 가보니 그곳 기자들이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MBC방송국에서도 월드컵에 대해 토론을 하는곳에 가서 한참 비판했더니 다음에 나오지 말라고 하더군요. 같은 사건에 대해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면 어느 장로님이 딸이 셋인데 음악을 잘했습니다. 장로纛?박정희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불러서 청와대에서 연주를 하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은 기뻐서 이야기를 전했는데 딸들은 왜 가냐고 하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라는 소리를 어려서부터 들었더니 대통령은 시시하게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월드컵을 보는 눈이나 권위에 대한 시각이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 따로 따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어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일관성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문화마다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사회를 어떻게 보는가?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신을 어떻게 보는가? 가치기준은 어디에 두는가? 이런 것은 모두 연관이 되어있고 이것을 세계관이란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아직까지는 문화가 종교에 의해서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 전세계 문화가 세속화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종교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신비로운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화를 분류하는데 기독교권, 이슬람권, 유교권, 불교권이라고 나눕니다. 그렇게 나누어 놓으면 상당한 현상이 설명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나눕니다. Huntington이란 사람이 문명의 충돌이란 책에서 종교를 중요한 결정요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문화를 분류하고 문화에 따라서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다면 세계관은 종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철학사상이나 이념같은 다른 것, 종교외적 요소가 세계관을 결정하는데 작용할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세계관이 많이 달라져 온 것을 보면 보고서도 알수 있구요. 그리고 앞으로는 그 정도가 심해 질 것으로 추측을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다르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관성없게 신앙 생활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기독교적으로 사회를 보고 인간을 보고 자연을 보고 우주를 보지 않고 불교적으로 본다면 문제가 될 겁니다. 불교가 세계를 보는 눈은 기독교와 다르니까요. 이런 것이 구체적인 가치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월드컵. 어떤 사람들은 월드컵이 우리나라에 큰 공헌을 미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한국만 잘되어서 좋아해야 하겠느냐면 기독교적인 올바른 세계관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16강에 가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위해 기도를 할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면 나라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애국은 다른 사람들의 애국과 달라야 합니다. 불쌍한 나라를 돕고 문화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우리나라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좋지만 다른 나라를 짓누르고도 애국을 부르짖는 다면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주위에 휩쓸려서 가치관이 같아질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세계관이 무엇이고 우리는 어떠한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신학적 배경은 칼빈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의 니오칼비니즘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지 않은 영역은 하나도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을 월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주일날만 기독교인처럼 산다면 일관성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집에도, 학교에도, 정치판에도 계시고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교회를 개척했을 때에 강대상에 신을 신고 올라가느냐, 벗고 올라가느냐에 대해 논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을 신고 올라가자고 주장을 했습니다. 신을 벗고 올라가자는 사람들의 많은 생각은 출애굽기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신을 벗으면 강대상위는 거룩하고 강대상 아래는 덜 거룩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 예배당 마당은 조금 덜 거룩하고 시장바닥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라리 그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한곳을 거룩하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특강할 때에 예배당은 거룩할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예배당은 예배 드리는 처소지 거룩할 필요가 없다. 들판도 두세사람이 모여 예배하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라 부르면 안된다. 왜냐하면 성전은 제사 드리는 곳이었고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실 때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누구나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어느 곳에서나 제사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성전은 없어졌다. 그렇게 특강을 했더니 노회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손봉호가 이단을 가르친다고 총회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올려야 할지 판단을 내려야 해서 박윤선 목사님께 여쭈어봤는데 손봉호 말이 맞다고 해서 이단이 안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보면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고 강조가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지어놓고 솔로몬이 기도한 것을 보면 천지를 지으신 분이 성전 안에 계시겠느냐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인 가치판단, 행동구조가 성경과 일관성이 있으면 올바른 기독교인으로서의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문화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잘못 된거냐라고 반문이 들어오면 기독교 세계관은 모든 종교적 세계관중에 가장 옳기 때문에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손해보게 된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만드신 것은 이를 선전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힌두교에 과부를 화장시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같이 화장시켰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고 나서 보니까 힌두교전통을 많이 인정하려 했지만 이것만은 안된다고 금지시켰습니다. 네루수상도 안된다고 금지해왔는데 최근 인도의 지성 여인들이 그것이 영국의 법안이라고 바꾸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했답니다. 고유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풍속이 과연 옳은가? 요새 다원주의라고 해서 모든 문화의 요소를 용인해야 한다. 관용이라는 것은 미덕이라 해서 받아 들어야 한다는데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 세계관이 옳고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아직도 여자 할례가 있습니다. 케냐 박물관에도 할례에 사용되는 돌칼이 가장 많았습니다.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들은 문화에서 독립 되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수용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누리고 가치를 누린다고 보기 때문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 세계관을 결정하는 요건이 무엇인가? 다른 세계관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고 나머지는 자연종교라는 것입니다. 자연종교는 사람의 경험과 지혜로 만든 종교(불교, 힌두교, 유교)이고 계시종교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기독교, 이슬람교). 키에르케고르라는 덴마크 철학자가 쓴 책 중 ”스승으로서의 예수와 스승으로서의 소크라테스”라는 문단에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교육시킨다. 플라톤은 인간은 태어날 때에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 있지만 영혼이 육체를 입어서 다 잊어버린다. 교육을 통해서 잊었던 것을 다시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이 자극을 하면 알게 된다고 하고 이런 교육방법을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노예가 대화를 하는데 가르쳐주지는 않고 질문만 합니다. 가르쳐 주지 않고 질문으로 자극을 하니까 노예소년이 삼각형의 세각의 합은 두 직각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불교도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계속 돕니다만 고승들은 부처로 직행이 됩니다. 니체가 기독교는 천민종교라고 했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구원 받는 것입니다. 스승으로서 예수는 제자가 완전무식해서 모두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집어 넣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찾을 능력이 없고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려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증거하라고 하면 성경이 말하기를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니까 그런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로마의 교구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이 I believe because it is illogical. 논리적이지 않아서 믿는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이거 아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 다 논리적이면 사람이 만들어 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전도사님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생각이 내 생각이랑 똑같다고 좋아한다고 하는데 과연 하나님 생각이 한낱 사람의 생각과 똑같은 것인지…다른 예를 들어보면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였는데 원본은 없고 사본만 남아있습니다. 사본과 사본을 대조해보면 대부분은 같지만 조금 다른 곳이 있을 때에 규칙이 하나 있는데 두 텍스트를 비교해서 문법에 맞지 않는 것이 더 원본에 가깝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설명 못하는게 더 많습니다. 어떤 것들은 그냥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는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관을 결정짓는 것 중에 하나는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느냐? 에 관한 대답입니다. 원래 있었다 or 만들어졌다. 성경만이 무에서 유로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Bang theory 가 천문학에 있다고 하는데 전파가 계속 들리는데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포착했다는데 언젠가 우주가 폭발되어서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기독교의 창조론과 너무 가깝다. 재미난 말 하나 중에는 과학자들이 연구를 열심히 해서 가니까 신학자들이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자연종교는 우주를 살아있는 생물체로 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물질입니다. 자연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Generation vs fabrication. 생물학적으로 낳는 것을 generation이라 하고 손으로 만드는 것을 fabrication합니다. 기독교의 창조는 fabrication입니다. 고대사상들은 유기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도, 불교도 그렇습니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에 따라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기독교에서의 인간관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이야기하기를 인격이라는 말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도 자유의지가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유 의지란 원인없이 결정을 내릴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임회피 할 때에 안할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고 잘하면 자기가 했다고 하는데 자유 의지란 것은 원인 없이도 자기가 결정을 내리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람을 반박하기 위한 우화가 하나 있습니다. 당나귀가 있는데 두쪽에 풀이 있는데 질과 양이 똑같아서 오른쪽을 보니까 똑같아서 구지 먹어야 할 이유가 없고 왼쪽을 보니가 역시 먹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양쪽을 보기만 하다가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결정론이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고 합니다. 자유의지는 이유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게 인격체이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가 있고 그래야 책임을 질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인격의 존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잘못했을 때에 벌한다는 것은 그만큼 존재에 대해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에 아이들이 잘못했다고 했다고 했어도 잘못에 해당하는 벌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인간관을 가져야 인권을 가지게 되고 인격을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국제 보편인권선언이라는 것을 했는데 왜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가? 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거기에 대한 근거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기 때문에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수단화하지 마라라고 했는데 역시 거기에 대한 근거도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연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중 한명이 오늘날 환경오염의 문제는 기독교가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자연을 비신격화했다. 신성을 제거해 버려서 사람들이 자연을 착취해서 자연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오염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은 인간의 욕망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 대해 여기에 책임을 지려면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국에 기독교 실천운동은 정직과 절제를 강조합니다. 생활을 단순하게 해야 하고 에너지도 적게 쓰고 음식도 적게 먹어야 합니다. 에어콘도 덜 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물도 절약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본래 선한가? 에 대한 질문. 유교, 불교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기독교는 성악설을 가르칩니다. 로마서 3장 이하에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보면 무섭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스스로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누가 구해 주어야 합니까? 누군가 구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민주주의와 연결을 시키면 칼빈주의에서 장로교 제도가 나왔는데 장로교 제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힘의 분산입니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삼권분립이 나온 것입니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절대부패를 믿기 때문에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도 살펴보면 인간이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이 착하다고 보아서 필요한 것만 사용하고 능력만큼 일할 줄 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입니다. 목사님들이 중요한 결정을 혼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의 요건 중에 하나는 힘을 나누어 책임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집사로 교회에서 설교를 하니까 노회가 반대를 합니다. 그러자 교회가 노회에서 탈퇴하자고 하니까 제가 탈퇴하면 손봉호 교회가 되고 내가 잘못되면 완전히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고 치명적인 부분을 드러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베드로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성경에서 볼수 있습니다.

기독교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적 자연관, 인간관, 사회관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당하며 사실을 잘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세계관을 의식적으로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면 공동체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삶이 올바르게 될 뿐만 아니라 문화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신학자가 Christ and culture라는 책에서 칼빈주의 문화관을Christ as the transformer of culture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허무주의로 가고야 마는 물질주의, 쾌락주의, 상대주의를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가 그대로 두면 망하게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논리는 재미있잖아요 입니다. 재미있는 것 계속 해보세요 재미가 있는가? 마약이나 성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에 문화를 구원하기 위해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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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2003년 KOSTA/USA에서 김영봉 목사가 '기도의 삶을 위한 인간이해'라는 세미나를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2007년 집회에서도 멋진 세미나로 섬겨주실 김영봉 목사님의 강의를 기대합니다.


뉴저지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김영봉 목사입니다.(지금은 DC지역에서 목회하고 있다 - 편집부)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냈는데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주 영적생활에 대해서 질문을 해올 때 상담을 해보면 상담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상황에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상담후 돌아가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신앙생활 안내서를 주고 싶어서 이 책을 썼습니다. 어제 소개된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란 책중에 기도는 훈련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삶이라면 기도가 잘못되면 삶 전체가 잘못된다는 것이고 기도가 어려워지면 삶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가 즐거워지면 삶이 즐거워지고 또 기도가 왜곡되면 우리의 삶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항상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딸아이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성경구절을 보고서 무슨 뜻이냐고 묻길래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냐고 되물었더니 기도하다 쉬지 말라는게 아니냐고 그랬습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더니 어떻게 24시간 항상 기도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겠는가? 기도가 어렵지 않고 즐거운 일이 되겠는가? 찬송중에 ‘내 기도하는 이시간 그때가 정말 즐겁다’고 하는데 저는 오랫동안 기도하는게 힘들었습니다. 물론 기도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랬지만 노동처럼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의무감에서 벗어나면 기도를 쉬었습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하나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기도의 상태에서 하루종일 삶을 사는 것. 이것을 늘 즐겨하고 사모하는 상태로 바뀔 수 없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을 쓰게된 동기입니다.

이 책에 다섯부분중 첫부분은 한국에서 가르치는 기도방식의 잘못된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산타크로스냐? 이것은 헨리나우엔이 지적한 것인데 어린 아이들이 선물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기도의 촛점을 다른곳에 두고 나를 잊기 때문에 기도의 경험이 문제가 되고 응답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세상이 우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내 시야가 변하고 내 생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촛점이 다른 사람,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째는 기도는 하늘보좌를 움직인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기도를 요청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의 요청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앞에 나열하는 것은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직책을 맡았을 때가 있었는데 학생이 임원에게 왔을 때에 요구사항만 나누면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의 과정이지 요구조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티즈 목사님의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의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받습니다 라는 책에서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junk mail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기도의 대부분이 버려지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다 얻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에 그런 말이 있지만 그 앞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면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설정이 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초신자의 경우에는 가끔 그럴 경우가 있지만 그런 일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의식을 수정하고 기도의 방법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숙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잘못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생각할 때에 율법적인 하나님으로 생각을 해서 우리를 못마땅해하고 우리에게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걸복걸 부르짖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시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상을 우리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 신관으로 자꾸 돌립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은 유대인이 생각하기에 유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선의를 가지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멀리 계신, 율법적인 하나님 상을 바꾸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상으로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두번째 기도가 잘못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막연히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게 되면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찾아보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실 정답을 낼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물이 아니라 인격체이기 때문에 전체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격은 개개인이 다르고 그 개인도 지금과 나중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정답을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두번째는 인간이해는 인간이 주체이며 객체이어야 하는 모순이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세번째는 인간에 대해 이해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축소될수 밖에 없습니다. 칼융이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단순화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언어로 표현을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다르게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근거로 한 가설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말씀드립니다.

바울의 인간이해를 보면 인간 안에 세개의 자아가 있습니다. 헬라어를 우리말로 풀면 영, 혼, 육. 세 자아가 하나가 되어 활동하는 것을 몸이라 합니다. 바울이 많은 경우Body(몸)와 flesh(육)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를 통합하여 삼분법의 제 삼의 인간이해를 만들어 냈습니다. 히브리 사고에서는 인간을 분리될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로 이해했고 헬라적인 사고로는 인간의 영과 육이 분리가 된다고 이해했습니다. 영이 육속에 갇혀 있어서 구원은 영이 육에서 해방된다는 것이고 영혼불멸설로 발전을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이 분리되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이 새롭게 되어서 전체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헬라적인 이원적인 이해를 극복해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전체가 새로운 차원으로 구원된다는 삼분법으로 이해했습니다. 영이라는 자아를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육을 겉사람이라고, 혼을 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육(ed), 혼(ego, self), 영(superego, the self)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동양전통 유교에서는 육을 수성이라 하고 혼을 인성, 영을 천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안의 세가지 자아에 대한 개념을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육은 주로 본능적인 욕구를 이야기합니다. 육적인 성향을 부정적으로 많이 보아왔지만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선할수도 악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 관찰하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욕구가 나를 이끌어 간다고 알고 그것에 육체적인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둘째로 혼에 대해 살펴보면 태어났을 때에는ego가 없습니다. 자라면서 자기보존의 욕구에 의해 자기를 만들어 갑니다. 혼의 자아는 우리에게 본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자아관을 형성하는 것이 엄마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가 엄마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거부될 때에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혼의 자아는 예수님을 믿기전, 믿은후. 혼의 자아상은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자아상은 버려야 합니다. 세번째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기 위해 주신 접촉접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해 명제적으로 진술한 것에 세가지인데 요한복음에 영이시다. 진리다. 사랑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했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심산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길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디나 존재하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재할 수 있는 영역으로 주어진 것이 영입니다. 그래서 인간안에는 세가지의 자아가 활동하고 있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세자아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정신질환은 세자아가 갈등하는데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세 자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동심원 세개가 있고 맨바깥쪽에 영에 해당하는 것은 점선으로 되어있습니다. 동심원의 크기는 영향력을 말합니다. 제일 작은 동심원은 육, 그다음은 혼, 그리고 영이 가장 큰데 이 순서로 영향력의 크기가 되어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과 교제하면 진리를 영이 깨닫게 되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전이받게 되어있습니다. 육과 혼으로는 하나님을 만날수 없고 참된 진리를 알수 없으며 참된 사랑을 할수 없는 것입니다. 영향력이 미치는 방향이 영이 혼과 육을 통제하게 됩니다. 이러면 자아가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존재가 영과 혼과 육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창세기 일장의 인간이 바로 이런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삼장의 인간은 타락한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었고 욕구가 생겼고 뱀과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뱀이 어쩌다 마주쳤는데 그냥 한번 만남에 넘어갔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엉터리 작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뱀과 꾸준히 사귐으로서 인간이 가장 많이 사귀어야 할 대상인 하나님, 배우자 그리고 동물인데 육적인 자아가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C.S Lewis의 책중에 사탄이 기독교인을 어떻게 넘어뜨릴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은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보면 인간은 신적인 존재로 솟아날수 있는 가능성과 동물적인 존재로 떨어질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와 사귀냐에 따라 신적인 존재로 될수도, 동물적인 존재로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들은 죄의 열매를 이야기하고 죄는 뿌리, 본질적인 상태, 하나님과의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사귐은 사귐은 사귐의 대상과 같은 성향이 커지게 되고 사귐의 대상과 다른 성향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영은 죽어버리고 육과 혼만 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육과 혼도 분열됩니다. 육과 혼이 싸워서 이기는 쪽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진리를 알수도 없고 사랑을 할수도 없습니다. 자연인은 이런 상태인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우리 안에 바울이 이야기한 속사람이 생겨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지만 속사람이 태어나게 된 후에 영이 주관하게 되는 완전한 통합이 될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태어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 더 생겨납니다. 두자아가 싸우다가 세자아가 싸우게 되기 때문에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요구하게 되는데 높은 차원의 부름과 낮은 차원의 부름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롬7장14절에 보면 영이고 속사람이 있고 속에 또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끌어내리게 되고 혼의 자아는 고통스러워 하게 됩니다. 차라리 안믿었더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25절 후반에 보면 영이 막 태어난 우리의 상태입니다.

영이 태어난 상태에서 이제 영이 성장해 가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부름을 위해서 경주해 가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과의 부단한 사귐를 통해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귐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많이 하고 있는 요구의 기도의 대부분은 혼에서 나옵니다. 사귐의 기도가 되지 못하고 요구의 기도가 계속되게 되면 문제는 자아가 변하지 못하고 강화가 됩니다. 요구만 하고 그러다가 가끔 되는 것이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영이 성장해야 하는데 영은 성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곤고한 사람의 상태에서 10년 20년 머무르게 됩니다. 진리의 자유함을 맛보지 못하고 진리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귐의 기도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유는 우리가 영을 키워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귐의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자아는 원래 자아보존의 원칙이 있기 때문에 죽어 사라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길 원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서 나의 자아는 사라져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내 기도가 혼에서 나오는 나의 요구만을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을 피하면서도 정서적으로 기도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욕구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 자아가 기도를 하는 것인지 영이 기도를 하는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 요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침묵도 하고 묵상도 하고 내 영의 사람과 하나님의 충만한 경지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성생활이 무엇이냐 생각해 보면 참된 영성생활은 영과 혼과 육 세가지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고 기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영성생활은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우리자아가 내놓는 요구의 기도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좋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변화하게 됩니다. 헨리나우엔은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참된 기도의 사람은 용기없이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무의식중에 하나님에게서 떠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변화하게 되는데 자아는 하나님이 변화시키게 하시기를 싫어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물을 던지라고 한곳에 그물을 던지고서는 나를 떠나달라고 고백하는데 이것은 변화되기 싫다는 자아의 고백입니다. 나는 고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부정합니다. 누구에게나 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가 깊은 기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100%열어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 삶의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전통적으로 요구하는 관습에 매여 기도하면 우리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가 행복해 집니다. 이렇게 기도가 바뀌어 우리의 삶전체가 바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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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미나는 2003 KOSTA/USA에서 한국 라브리 성인경 목사의 세계관 강의인 '세계관 전쟁'을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전쟁중입니다. 범죄와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 사스와의 전쟁. 이렇게 전쟁의 연속이지만 진정한 전쟁은 영적 전쟁이고 영적전쟁의 최전선에는 세계관 전쟁이 있습니다. 이라크전쟁도 종교간의 전쟁이라고도 하고 문명간의 충돌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세계관 전쟁입니다. 미국 제국주의와 이라크의 국수주의간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관의 전쟁은 우리의 삶속에 매일 일어나는 심각한 전쟁입니다. 하지만 세계관 전쟁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와 문화 배후에는 세계관의 전쟁이 있습니다. 실제로 국가와 개인간의 전쟁을 살펴보면 그 국가과 개인의 가치관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정당성이라는 가치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누가 참이냐 거짓이냐 누가 선이냐 악이냐를 구분짓는 전쟁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3절에 보면 마지막 때가 올 때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영어로는 prepare your minds for action, 영적인 전쟁이 다가오는데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세계관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이시대에 여러분은 얼마나 준비되었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왜 필요한가입니다.
아내와 시장을 보러 가는데 어떤 아줌마가 아이손을 잡고 가다가 “얘야, 너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아저씨처럼 된다.”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환경미화원 아저씨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봤더니 우리 교회에서 믿음 제일 좋다고, 기도많이 한다고, 전도 제일 잘 한다는 아주머니였습니다. 믿음은 좋은지 몰라도 세계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사고방식, 직업귀천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믿음이 좋은지 몰라도 아주머니는 잘못된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서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는 것을 믿습니까? 청소부가 청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공부 열심했는데 나쁜짓 해서 감옥에 가있으면 어떻게 된 겁니까? 공부 잘 못했는데 지금 이웃을 도우며 훌륭한 삶을 살아가면 어떻게 된 걸까요? 그리고 이때쯤 고려대학교 총장 홍일식 박사가 쓴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라는 책에서 한국 사람은 일상생활은 유교식으로 하고 사고방식은 불교식을 하고 신앙생활은 무당식으로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평생을 유학자였던 그가 지적한 이내용은 저에게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믿음만큼 그 사고방식이 하나가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을 잘 가르쳤을지 몰라도 사고방식이 변화되고 세계관이 바꾸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을 보면 너희가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뜨거운 마음, 친절한 마음이 아니라 예수의 사고방식, mind,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라 라는 말입니다.

저는 라브리 선교회에서 청년대학생들을 돕고 가르치는데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었는데 고등학교때부터 성경의 이적기사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사람인데 부모나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토론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학원에서는 더이상 이렇게 살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한달을 방학을 줄테니 해결하고 오라 했답니다. 어느 전도사님을 찾아갔더니 전도사님이 기도얼마나 하나하고 물었습니다. 십분도 못합니다 그랬더니 그러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더 기도하고 와라 했답니다. 그렇게 해도 의심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또 찾아갔더니 성경을 얼마나 읽어라고 물어서 하루에 한장도 못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성경 더 읽고 와라 그랬습니다. 라브리에 와서 치밀하게 공부를 하면서 의심이 풀렸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도 앞에서 이야기한 아주머니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것과 아는 지식이 하나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청년은 세상에 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은 학교에서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자연의 법칙과 초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배우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이 세상이 Closed system, 자연의 법칙만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나 개입할수 없다는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open system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자연법칙이 멈출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신비성과 합리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청년은 그렇게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합리성의 반대개념은 비합리성입니다. 신비적인 것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정리하면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무기력과 영적 혼돈 상태를 극복하고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가치관의 혼돈을 극복할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바른 정신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혼돈을 가지기 쉬운때가 청년의 때입니다. 얼마전 동성애는 불법이라는 법률이 인권을 유린하는 위헌이라고 대법원에서 통과를 했습니다. 불법으로 내린 동성애 법안이 인권을 무시하는 법안이라고 판결이 되었기 때문에 동성애의 문제가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가치관의 혼돈, 윤리의 혼돈 이런 시대에 기독교인으로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는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세계관 전쟁에 대처하고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를 할 때에 세계관을 사용하지 않다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느낌의 시대이니까 감각적으로 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지만 어느 사람이든 세계관을 가지고 접근하고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방해하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객관주의입니다(Objectivism). 성경은 성경이고 학문은 학문이다 성경은 신앙적인 문제에서는 진리다 내가 공부하는 학문분야에서는 성경이 권위가 없고 전문가가 권위를 가진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과 전공분야를 분리해내는 것입니다. 아까 아주머니처럼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라고 분리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아주 좋은데 사고방식은 유교적, 불교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원론자가 됩니다.

두번째는 성경주의입니다(Biblicism). 성경을 너무 사랑해서 세상의 지식은 필요없다. 오직 성경만 공부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경건주의자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성경만 진리고 세상의 지식은 배설물이다라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지성주의에 빠지게 되어 학문세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지적자살을 감행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고 믿음만 좋으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주의라고도 하는데 특히나 유학생들에게는 공부가 잘 되지 않을때에, 시험에 떨어졌을 때에 더 큰 유혹이 됩니다. 바울이 배설물이라고 할때에는 이성에 기초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초된 바른 지식까지 다 내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번째는 혼합주의입니다(Synchretism). 세상의 지식과 성경을 적당하게 섞는 것입니다. 우리 유학생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비빔밥, 섞어찌게처럼. 로렌스 클레이드라는 사람은 야채샐래드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야채를 여러가지로 섞고 성경으로 드레싱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융합이라고 합니다(Harmonization). 혼합주의의 문제는 절대성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 되는 것이고 다원주의적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공부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가 무엇일까? 공부하는 방법을 이야기할때에 internal 원리라고 하는데 공부할 때에 사용되는 머리(이성)와 경험(감각)을 말합니다. External원리는 공부하는 대상을 말하는데 물리는 세상과 우주, 사회학은 사회의 현상, 체육은 인간의 몸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자연과 세상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인 종교적인 원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와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원리는 공부의 원리에 신앙의 원리를 더해야 합니다. 이성과 감각에 Internal원리인 영성과 성령이 더해져야 합니다. 자연과 세상에External원리인 하나님과 성경, 교회를 더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한쪽만 가지면 세속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 나머지만 가지면 신비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종합을 해도 안되고 혼합을 해도 안되고 통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통용되는 것이 종합입니다. Synthesis 종합은 정과 반을 통해 합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두번째 혼합은 다 섞어 놓는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세번째Integration 통합은 기준이 있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있어서 기준을 가지고 옳은 것은 다 받아들이고 옳지 않은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통합은 성경에 나와 있는데 에베소서 4장13절을 보면 믿는것과 아는것에 하나가 되어라고 나와 있습니다. Unit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남녀가 한몸이 되었다고 할때에 unity,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unity가 된다라고 합니다. Unity원리는 믿는 것과 학문하는 것에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이 통합의 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통합한 사람을 mature한 사람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고방식, 가치관이 예수님의 것으로 바뀌어지지 않기때문에 기독교인이 한국인구의 절반이 되어도, 국회의원의 절반이 되어도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원리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잘때까지 생각하는 화두들이 있습니다. 돈, 섹스, 권력. 세상사람들에게는 이 세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도이벨트라는 사람은 기독교인은 창조, 타락, 구원의 세가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폭넓게 설명하기를 존재론적인 원리, 도덕론적인 원리, 인식론적 원리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존재론은 신이 있나? 내가 누구인가?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존재론을 다룰때 가장 기본적인 설명방법은 세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신과 인간과 우주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모른다 (nothing nothing). 두번째 설명방법은 비인격적인 것(impersonal)에서 세상, 신, 인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진화론이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인격적인 것(personal)에서 인격적인 것이 나왔다. 성경적인 존재론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중에 인간을 만드셨을 때는 자신의 모습대로 만드셨으나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지 않았지만 그속에 하나님의 신성과 솜씨가 나타나도록 만드셨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다. 제한적이다. 제한적이지만 사는데 문제가 없다. 자연은 자연법칙도 있지만 초자연적인 법도 있는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셨다. 이것이 Open system을 믿는 것입니다. 매트릭스는 기본적으로 closed system이지만 closed system을 깨고 open system으로 갈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은 영화입니다. 근대과학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이성과 합리성을 닯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과학활동을 할수 있는 동기부여를 주었다고 하고 오펜하이머는 근대과학의 어머니는 기독교라 했습니다. 현대과학은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 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더 홈즈, 휘튼의 철학교수는 창조는 세가지 과학을 가능하게 했다. 첫째, 하나님이 만드신 재료, 공간, 시간은 실험과학이 가능하게 했다. 실험과학의 데이터를 가지고 합법칙성과 인간의 이성을 이용하여 두번째 이론과학의 근거를 만들었다. 세번째 이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응용과학의 근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도덕론적 원리. 인간이 창조되었지만 타락했다. 인간이 왜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하는가? 왜 죄를 짓는가? 를 묻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기에 대해 수백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관념론에서는 고통과 악과 죄는 환상과 관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원론에서는 세상은 처음부터 악과 선이 있었다. 처음부터 병과 고난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다라고 합니다. 사회주의자의 결정론에서는 환경이나 교육방식, 경제수준에 의해서 악이 정해진다라고 합니다. 동양사상을 보면 불교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 도교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악의 근원이다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이론은 도덕적 타락은 죄에서 왔다는 범죄론입니다. 범죄론은 세상의 고통과 죄는 실체고 비정상이고 쓰라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래 병과 죽음이 없이 지음을 받았는데 죄로 인해서 타락하고 비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덕과 싸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식론적 원리는 우리가 바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성의 능력을 믿던지 이성을 극단적으로 믿지 않고 체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비판적 실제론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것은 옳은 것도 있지만 틀린 것도 있다.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초인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식론적인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성경말씀입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사고하면 판단오류를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혜와 말씀의 도움을 받아야지 제대로 이해하고 공부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교의 인식론은 이성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꽤가 많아서 이기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순수감정에 의해서 결정하라고 합니다. 합리적 인식론은 서양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성에 의해서만 결정하고 판단하고 진리가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의 기반하에서 이성을 사용하고 직관들을 사용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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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미나는 2002 KOSTA/USA에서 뉴저지 지구촌교회 김두화 목사의 '기독입문 - 교회'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무엇보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생활에서 실질적인 삶에 부딪칩니다. 왜 교회생활이 그처럼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난 크리스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으며 그것은 교회이며 한 가족이고 더 이상 손이 아니고 외인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교회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왜 중요한가, 어떻게 하면 건강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교회생활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에는 out of 클레아는 called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복음을 듣고 믿어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된 공동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증거하러 나가는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그리스도에 속한 백성들의 공동체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러냄을 받았고 속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천국의 시민으로 성도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칼빈이 “교회를 어머니로 받들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라고 했죠. 이 세상은 바벨론 문화, 바벨론 정신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전에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사탄의 자녀였습니다. 이 세상을 요람으로, 이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세상의 끝인 것처럼 살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머니이고 사탄이 아버지입니다. 이에 비해 구원을 얻으면 교회는 어머니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교회에 대해서 바른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회 건물이 교회는 아닙니다. 예배당, 장소이죠. 저희 교회는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것은 학교 건물이죠, 이 자체가 교회가 아니에요. 초대교회는 주로 내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둘째 교파가 아닙니다. 성경은 교파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침례교 목사인데, 우리가 폐교파주의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각 교파가 기여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지만 비본질적인 분야는 다양성을 인정해야할 것같습니다. 예를 들어 침례가 더 성경적이라고 저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교,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요,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을 주는 점이 있습니다. 한편 웨슬리안처럼 인간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셨다, 인격적인 책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균형을 이룰 때 신앙이 균형을 이루겠습니다. 서로 기여하는 것입니다. 서로 배워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교파자체가 교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교회는 의식은 아닙니다. 세례, 꼭 교회에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을 꼭 교회에서만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두 유형을 생각해보면, 우주적 교회와 지역교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구원받은 자들인데, 이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공동체, 비가시적인 공동체, 무형교회입니다. 지역교회는 불완전하지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누구나 올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민교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갈등, 불완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잘 보면 그렇죠. 우주적 교회는 승리한 교회입니다. 지역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에요.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상처받고 상처 입히고 넘어지고 그런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지역교회를 통해서 우주적 교회를 확장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 마태복음 16장1 3절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이 믿음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반석을 베드로를 가르킨다고 주장하는데, 헬라어 원어를 보면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작은 돌, 남성을 표현하는 단어가 쓰이고 반석은 큰 돌, 중성을 표현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다른 것이죠. 내용에서도 다음 사건에 베드로를 책망하는 표현이 나오죠. 이 전후 맥락을 볼 때도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에서 비슷한 표현을 쓰는데요, 베드로전서2장 4절,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와, 머릿돌이 되고, 반석이 되었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주님께서 직접 세운, 그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주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에서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등등은 지역교회에 보낸 편지죠. 일반서신이 있고 목회서신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집으로 그려보면 가장 아래 반석이 사복음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위에 교회가 서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중요성입니다. 첫째 성경이 지역교회를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꾼 된 것을 중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세례를 받고, 교회의 멤버쉽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미국교회는 신앙고백하고 세례나 침례를 받은 후에 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컬의 이름을 갖고 많은 서신이 로컬 교회에 보내진 것이며, 교회의 일꾼이라는 표현 등, 성경은 교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 교회는 성도들의 인격 형성에 중요한 장입니다. 혼자 신앙생활하면 성도의 인격이 향상될 수 없습니다.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지내시며 교제하면서 제자들을 빚으신 것이죠. 서로 맞지 않은 사람들을 묶어서 같이 지내면서 고쳐져 가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우리의 인격을 빚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배경을 갖고 모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있고 서로 용납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기 위해서 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 서로 돌아보아라,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의 중심기관입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 복음전파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복음전파는 다른 기관이 대신할 수 없지요. 교회에 있어서 선교는 가장 중요한 미션입니다. 교회의 생명이 선교입니다. 주님이 성육신의 연장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가 이제 그 역할을 해야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선교나 구제를 해야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면 자신이 드러나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파라처치는 지역교회를 지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에 중심은 지역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가정과 불가분의 관계인 유기체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삶에 가정과 교회에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처럼 가정과 교회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첫째로 지역교회는 교제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였다라고 나오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제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장, 성령의 하나되게 함을 힘써 지켜라, 말씀과 성령의 사역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에 분파, 갈등을 만드는 일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자기 사람 만들고 끼리끼리 지내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화평과 일치가 교회의 핵심입니다. 다양성 속에 unity, 연합 일치입니다. uniformity가 아니고 다양성 속에 연합입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개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번째 지역교회는 가족입니다. 교회는 사업체가 아닙니다.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모이는 분들 하나하나 구령하고 캐어하고 평신도 목자들로서 셀 사역하고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 믿음의 가족이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 형제로 서로 부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 33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서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몸된 교회, 골로새서는 주님의 머리되심을 강조합니다. 영적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써야 합니다. 교회는 유기적인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사역 중심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모두 사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은사에 근거하여 기능하는 유기적 구조이며 서로가 상관된 지체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역교회는 양무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아침에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때 주님은 양을 먹이라라고 부탁합니다.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 목사 모두 목자입니다. 교회는 양무리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 우리 밖에 있는 양 모두 쳐야 합니다. 교회는 목자들에 의해서 전도되고 양육되고 성숙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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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동관 2009/10/23 20:46  Addr Edit/Del Reply

    목사님, 저는 임순옥 집사 오빠입니다. 지난 9월에 한국에서 그곳에 들려 주일 에배를 함께 보았고 같이 점심식사를 했었지요. 사모님이 동생 순옥이가 항암치료하는데에 너무 신경을 많이써주시는 그 고마움에 정말 감사합니다. 먹을수 있도록 직접 채여서 갔다 주시고 주일에 차로 직접 교회로 데려다 주시고, 그 정성에 말로 표현 못하리 만큼 고마움에 이렇게 글로서 감사를 표현 합니다. 말씀으로 은헤 받고 점심까지 들고 왔지만 사랑이 넘치는 베품의 교회였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주안에서 평안을 기원합니다. 순옥이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지구촌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늘 새벽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 대구에서 임동관 드림 09/10/24(토)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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