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주년을 맞이한 KOSTA/USA이지만, ‘KOSTA가 도대체 무엇을하는 모임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어떤 이들은 KOSTA를 일년에 한번 열리는 부흥 집회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유학생 선교단체라고도 한다. 이제 KOSTA/USA 25주년 2010 연차수양회를 마무리하면서 코스타는 어떤 운동인지,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간략하게 나누어보자.
KOSTA/USA 웹사이트 (http://www.kostausa.org)에서 ‘코스타 소개’를 클릭해 보면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 하나님 나라 백성(Kingdom of God within Korean Student Diaspora)’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KOSTA/USA의 mission statement이다. KOSTA/USA가 어떤 운동을 하는 모임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한 문구인 셈이다. 이 mission statement에 의하면, 첫째, KOSTA/USA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다. 미국에서 KOSTA/USA가 열리지만, 언어가 한국어인 이유도 바로 그 대상이 ‘한인 청년’이기 때문이다. 또한 KOSTA/USA는 더이상 고국으로 돌아갈 한인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게 될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 둘째, KOSTA/USA는 전세계에 흩어지게 될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운동이다.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여 풀어 놓은 것이 바로 vision statement이다. KOSTA/USA의 vision statement에는 세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다. 첫째,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운동’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만이 왕이 되셨다는 기쁜 소식을, 한인청년 디아스포라에게 선포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말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대 가운데, 또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마저 대담하게 이용하는 세대 가운데, 하나님만이 왕이 되심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애쓰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연차수양회이다. 둘째,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운동’이다. 세상을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이미 소유한 선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 하지만, 완전히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더라도,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성경적이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돕는 운동이 바로 KOSTA/USA이다.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미 성경적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시는 선배들의 삶을 책이나 직접적 만남을 통해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또 함께 한다. 셋째,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살게 하는 운동’이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저 멀리있는 어떤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완성될 샬롬이며, 예수님을 통해 이미 이 땅에 들어와 우리가 맛보고 사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직 미치지 못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선포하는 삶을 살도록 돕는다. 그곳이 직장이 될 수도 있고, 가정이 될 수도 있으며, 교회가 될 수 있고, 또 해외 선교지가 될 수도 있겠다. 코스타에 자주 오시는 한 강사님은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신다: “예배자가 사는 삶이 예배다”. 그렇다. 예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사는 모든 삶의 모습이다. 특정한 장소에 모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예배도 참 소중하지만, 진정한 예배는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될 때, 바로 그 예배자된 우리가 숨쉬고 사는 모든 삶이 예배가 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KOSTA/USA는 미국에 있는 한인 청년 학생들로 하여금 진정한 예배자가 되도록 돕는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25년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어온 KOSTA/USA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견지하면서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나라의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모습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KOSTA/USA는 스스로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가려는 오류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어떤 특별한 계획을 짜고, 효과적으로 그 계획을 추진함으로 앞당길 수 있는 것이 하나님나라가 절대 아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묵묵히 한걸음 한걸음을 떼어 놓기를 원할 뿐이다. 그래서 몇가지를 염두에 두고, 세상의 가치에 거슬러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살아가는 KOSTA/USA가 될 것을 기대하며 다음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KOSTA/USA는 성과와 결과를 추구하지 않고, 소외된 한사람에게로 다
가갈 것이다. 예수님도 때로는 많은 군중과 함께하시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결국 소외받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사역을 하셨다. 세상에 버려진 자들 - 가난한 자, 병든자, 창녀, 어린아이, 과부 등 - 을 찾아 가셔서 그들과 함께 있어 주시고, 그들의 아픔을 회복시켜주셨다. KOSTA/USA도 그럴 것이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많은 군중 가운데 있겠지만,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있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 그들을 만나고 함께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당장의 성과와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그런 성과와 결과의 책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그저 그들에게 다가가 머물 것이다. 때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게 될지라도, 우리의 이런 ‘끙~’하는 신음조차 기도로 받아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조금씩 움직여 나아갈 것이다.
둘째, KOSTA/USA는 우리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정말 성경적이며,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전달되고 있는지를 점검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받아들인다고 진리는 아니다. 현대 교회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많은 사람이 진리라고 외친다고 해서 그 진실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KOSTA/USA는 우리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진정 성경적인지를 늘 겸허하게 점검할 것이다. 현대의 흐름에 편승한 어떤 거짓된 가르침에도 단호하게 No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 가름침이 비록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고 받아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성경적 진리는 현대를 사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하지만 그 ‘적절한 방법’은 ‘효과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다. 어느 누군가 소외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을 인격이 아닌 도구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점검을 스스로 계속해 나갈 것이다.
셋째, KOSTA/USA는 외부의 어떠한 위협과 어려움에도 절대로 힘으로 대항
하거나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강산이 두번 하고도 반이 더 돈 세월을 지내온 KOSTA/USA. 이제 제법 유명해졌다는 사실이 반갑지만은 않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KOSTA/USA는 내부 혹은 외부로부터 적잖은 위험과 어려움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KOSTA/USA는 그 어떤 역경에도 절대 힘으로 대항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어려움 가운데 굴복하거나 타협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힘으로 대항하지도 않고 타협도 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택할 것이다. 즉 KOSTA/USA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질 것이며, 언젠가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릴 것이다.
이제 KOSTA/USA-2010 연차수양회를 뒤로하고, 예배자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땅끝이기도 한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나아간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24년 전 코스타를 시작하시고, 섬겨주고 계신 홍정길, 이동원 목사님을 코스타 보이스가 만나 보았습니다.
25주년을 맞는 코스타가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평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이하 존칭 생략): 한국의 학생운동이 다 힘들어하고 학생운동이 부흥하지 못했습니다. 유학생들이 해외에 나와있으면 마음이 가난해지는데 그런 면에서 코스타가 유학생 전도에 기여하였습니다. 센서티브한 청년기이기에 신앙이 무엇인지 자기들의 가치관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결정적 영향을 많이 주었고, 적지 않은 분들이 한국 여기저기서 리더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코스타가 지속성 있는 기관은 아니지만, 코스타 운동을 통해 자연스러운 영향을 끼친 것을 감사합니다.
홍정길 목사님(이하 존칭 생략): 세계적인 선교학자인 패트릭 존스톤이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사에 남을 만한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새벽기도와 코스타운동이라고 말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보스톤에서 1980년부터 5년간 성경공부를 했는데, 1983년부터 30명의 노스캐롤라이나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이 목사는 워싱턴에서 젊은이들과 성경공부를 했는데 그게 커져서 유럽으로, 세계 각처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의 유학생이 확장하는 시절에 하나님이 준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youth들이 굉장히 잘 모이게 되었습니다. 또 KOSTA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있는 중국 유학생들이 추석 기간에 CHISTA로 모입니다. 그리고 미국 내 중국 유학생들도 위튼에서 이런 집회를 엽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코스타 집회에 중국, 일본 학생들이 함께하고 유럽 코스타의 경우에는 독일학생들이 동시통역으로 집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코스타의 모습이 여러 모양으로 진화하고 있지요. 코스타의 대표적인 특징은 모든 강사가 사례를 받지 않고, 때로는 헌금도 한다는 것입니다. 코스타가 이런 모임을 최초로 시작하였습니다. 1회와 지금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이동원: 5회까지는 눈물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한국 대학가가 군부독재하에서 투쟁하면서 분실 자살도 많았고, 경제도 열악했습니다. 거의 그 당시에는 강사들이 와서 많이 도와주었는데, 김치도 강사들이 다 실어다가 참가자를 먹이고 그랬습니다. 특별히 2회 코스타는 통곡 그 자체였습니다. 1987년 6.29 이전에 집회를 했었는데, 코스타가 끝나고 얼마 후 6.29가 있었는데, 그때 잠도 안 자고 울었습니다. 한국의 근세역사는 유학생들에 의해 리더십이 세워진 역사입니다. 유학생들을 복음으로 무장시켜 조국으로 돌아가게 하면 그게 조국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복음이 없이 돌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강조했던 것이 신앙과 학문의 통합입니다. 코스타 때마다 빼놓지 않은 게 복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해마다 10~20%의 비그리스도인이 참여합니다. 그 복음 위에서 학문을 통합하고, 민족을 섬기고, 또 개인의 영성을 위해 QT 이야기를 했지요.
코스타의 중요한 변화는 20주년까지는 이들이 돌아와 조국의 리더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 나라에서 디아스포라 한국인으로서 사는 게 하나님 나라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5년 전에 수용했습니다. 이것도 바람직한 애국의 헌신입니다. 몇 번 코스타가 발전적인 진화를 했습니다. 코스타의 ‘A’가 처음에는 ‘America’를 뜻하다 나중엔 ‘Abroad’, 지금은 ‘All Nations’을 뜻합니다.
“민족”의 주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홍정길: 한국 교회가 앞으로 주도적으로 해야 할 국가적 책무는 통일입니다. 통일엔 다양하게 헌신하는 주체가 필요하고,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교회가 해야 합니다. 윤영관 교수 등이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이었는데 통일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모금하여 독일, 베트남, 예멘, 마카오에 가서 통일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교회가 해오고 있습니다. 민간단체 싱크탱크로 한반도평화연구원 같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성장을 하다보니 운동성이 줄고, 조직화되면서 운동성이 줄 수도 있을텐데요.
이동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있어야 할 사람들은 모두 다 자원 봉사자입니다. 당분간은 조직으로 존속하기보다는 무브먼트로 존속할 것입니다. 몇 년 후에 코스타가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니 하나님의 때에 계속 쓰실 거라 고 생각합니다.
홍정길: 최초의 10년에는 이사장도 없었습니다. 의논을 위해서 하다 보니 이사장이 된 것입니다. 젊은 세대가 맡아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사분들도 학생들과 끊임없이 활동을 함께하는데, 예전의 학생들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홍정길: 예전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관심이 많았다면, 요즘에는 인간관계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동원: 지금 젊은이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똑똑합니다. 헌신이 부족하고, 고민을 직면하는 강인함, 야성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목회자, 선교사로의 치열한 헌신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실의 이해타산이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청년의 매력은 야성인데요.
해외 곳곳에 강의를 많이 다니시는데 코스타의 젊은이와 국내 젊은이를 보고 어떤 차이를 느끼시나요?
이동원: 해외에 있기에 마음이 가난하고, 진지합니다. 한국에서는 너무 바쁘고, 일상적인 면에서 종교에 대한 관심을 잃고 있습니다. 해외에 있는 젊은이에겐 구도적 자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코스타에 한국의 학생 운동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선교의 터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지만, 이 기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코스타를 섬겨주지 않으면 코스타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복음, 민족, 땅끝 중 아무래도 젊은 세대에게 “민족”이 낯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반면, 다른 측면으로는, “땅끝”으로 나아가는데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동원: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것,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입니다. 국수주의가 아닌, 우리에게 강한 정체성을 주는 ‘민족’을 바탕으로 세계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는 같이 가야 합니다. 코스타가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게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갔습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과거에 섬김을 받아왔던 민족이 다른 민족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초기 코스탄에게 ‘조국’이라는 개념은 강렬했는데 지금은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코스탄들은 영어세대인데도 참석하였습니다. 한국말 설교를 잘 이해 못 하지만 코스타에 와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코스탄들을 만나보았습니다.
홍정길: 미국에는 이런 열정이 없습니다. 과거에 선교에 참여했던 국가들은 식민지 정책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린 약소민족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전 선교국가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비참할 정도로 가난해 본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경험은 어떤 경험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교 현장에서 불가능한 것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주신 장점입니다. 코스타를 통해 양질의 선교사들이 많이 헌신하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KOSTA/USA 집회 후 layoff 통보를 받고 맘 고생하던 A 형제는, 고민 끝에 한국의 한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접한 한국의 현실은, 어떤 이의 말처럼 ‘신앙의 진검 승부처’였다. A 형제가 몸담게 된 회사가 대기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업무 자체보다는 인간 관계에서 갈등에 처하기 일쑤였다. 경력사원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탓에, A형제는 주위 동료로부터 환영보다는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다른 사람을 밟아야만 앞으로 갈 수 있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A 형제가 신앙의 진검 승부를 해야하는 또 다른 곳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교육 현실이었다. 승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정글이 한국의 학교이다. 가정, 직장, 교회, 문화, 학교 등 모든 곳이 어그러저만 보이는 곳,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어떻게 이루어질까하는 의문이 드는 이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곳이 ‘하늘’이며,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곳이‘땅’이다. 하지만, 이‘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버림받은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이 땅을 회복시키시겠다고 계속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그 약속의 신실하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가 이 곳에 들어오게 되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모든 곳이 하나님나라이며,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곳(그곳이 어디던 간에)이‘하나님의 나라’인 반면,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모든 곳(그 곳이 어디던 간에)이‘땅 끝’이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오게하신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종족을 우리가‘땅끝’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땅 끝’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모든 곳이‘땅 끝’이라면, 그‘땅 끝’은 우리 주위에서 참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다.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도구만으로 여기고 기능적으로만 취급하는 직업의 현장이 바로‘땅 끝’이다. 아이들에게 숨쉴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어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돌게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이‘땅 끝’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집중하기 보다는, 각종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게 하는 교회가 바로‘땅 끝’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도록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는 분명 ‘땅 끝’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다시 말해, 아직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창조세계 곳곳에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복음을 선포하고,”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고후 10:5)”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땅 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떤 이처럼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 하에 전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무참히 죽이는 일을 우리가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세상의 논리로 ‘땅 끝’을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땅 끝’으로 나아가야 할까?
예수님과 바울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보자.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8~9a) 고린도 후서에는, 바울이 하나님께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번씩이나 간청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다는 유명한 고백이 나온다. 너무도 익숙한 내용이고, 또 자주 듣고 보는 구절이지만, 그 때마다 이 내용에 대해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든다. 고린도후서가 쓰여진 배경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바울이 과연 사도냐’는 것이었다.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자이여야 하는데, 바울은 뒤늦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기에, 그에게는 늘 그의 사도권의 진위에 대한 논쟁이 따라다녔다. 고린도후서에서는, 바울이 글은 잘 쓰지만 말이 어눌하고 큰 이적도 보이지 않는 것을 트집잡아 바울의 사도권을 공략하는 거짓 사도들이 등장하고, 바울은 이에 대해 절규하듯이 고린도교회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황 가운데서 나라면 어떤 논리를 전개할까? 아마도, 12장 초반에 나오는 바울이 세번째 하늘에 올라갔었다는 이야기를 좀 더 크게 이야기할 것 같고,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여러 병고침의 사건들을 증거로 제시할 것 같다. 그리고 ‘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크게 부풀릴 유혹을 이겨내야만 할 것이다. 아니, 나는 적어도 ‘내가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만하면 됐다’고 하시더라’는 경험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냥 말하지 않고 넘어가겠지, 그걸 떠벌릴만큼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말 바보다.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에 가시가 있다고, 그래서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고 대놓고 떠드는 이가 바로 바울이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내용을 내어놓으면서 바울이 스스로 바보가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며, 자신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된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문제삼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땅 끝’에 대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 자신의 지위를 능력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약할 때 일하시는 하나님의 참 능력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애썼다. 바울은, ‘강해야 효율적이다’ 혹은 ‘로마를 정복해야 하나님나라가 온다’고 생각했던 세상에 대해 무기력하게 죽으심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신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한 자일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바보같은 삶’을 몸으로 살아낸 자가 바로 바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의 약함이 드러나는 대상이 다름아닌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그 유명한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비유에서의‘왕’)과의 관계성은 다름아닌 보잘 것없는 한 사람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고는 말이다. 이 세상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그나마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도, 그 사람 자체로 대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기능으로 대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기능을 잘 활용하는 사람을 유능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늘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한 사람을 그 자체로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20세기 유대 랍비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예배다”. 우리는,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되지 않는 세상의 곳곳에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해야한다.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서도 철저하게 예배자여야 한다. 세상의 논리인‘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는 없다.만일 힘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려 한다면, 비록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세운 ‘인간의 나라’이지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철저히 십자가로 대표되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 가신다.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그의 강함을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는 말이다. KOSTA/USA-2010을 통해, 우리의 약함을 자랑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고, 이를 통해 세상의 모든‘땅 끝’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A형제는 초등학생 두 아들이 있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가끔 성경을 펴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선 아이들에게 성경본문을 읽고 ‘본문에서 하나님을 누구라고 하나?’,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 그리고 ‘본문은 우리 자신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나?’ 등의 질문에 미리 답하게 하고, 그 후에 함께 앉아 본문을 살피며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주부터 로마서를 보기 시작했다. 로마서 1장 5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거 어디서 보던 구절 아니니?’라고 물었지만, 아이들은 두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이사야에 나오는 구절과 비슷하지 않니?’ 그리고는 이사야 60장 3절을 펴서 읽어 주었다. -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 아이들의 반응은, 아니나 다를까 ‘정말 비슷하네’였다. ‘근데 아빠. 유대인들이 그렇게 특별해요?’ 큰 아이가 A형제에게 물었다.
유대인들이 정말 그렇게 특별할까? 특별하다면 어떤 면에서 그럴까? 구약의 유대인들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신약시대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민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보면,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동료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유대인의 정체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할례를 강요하고 정결의식을 치룰 것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정말로 할례 등의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의에 기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애굽 땅에서 벽돌을 구우며 바로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찾아오셔서,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그들의 왕이 되셨음을 하나님께서 확인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땅을 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의 모습이 어떠함을 알리시려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가? 자신들의 공로와 관계없이, 그들을 먼저 찾아와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도 잘 아는 유대인들이기에, 그들이 몇가지 율법의 조항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고 했다고 결론짓기는 다소 성급해 보인다. 어쩌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시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그 증거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율법’을 차라리 ‘은혜’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그렇게 은혜로 이르게 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아니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켜 나갔을는지 모르겠다.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이방인에 대해 철저하게 배타적인 본문들이 있는가 하면, 요나서나 이사야같이, 유대인들의 존재 목적이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이방인에게 빛이 되어 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는 본문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관점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언약백성인 유대인을 통해 이 세상을 회복하신다’는 점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유대인들은 자기 유대민족만이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반면, 다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유대인이 됨”으로써 회복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신약의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적어도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후자의 의견, 즉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는데, 단 그 조건은 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믿은 듯 하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왕이심을 고백하면서도,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인 유대인이 되라고 권유할 수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되는 길이 할례요 정결의식이기에, 초대교회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라고 강요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지만, 그 길에 들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바울은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불러 백성 삼으신 이유는 다름아닌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통로가 되기를 기대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첫 내용도 ‘너로 인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창조 세계 전체를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의 증표였다. 좀 쉽게 풀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은 내가 회복할 땅이야’라고 약속하시면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심으로써 ‘찜’하신 것이다. “지금은 비록 어그러져 있지만, 난 반드시 이 세상을 회복 시킬꺼야”라는 증거로 유대인들을 자신의 백성삼으셨다는 말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세상의 빛’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오해하고, 이방인에게 유대인으로의 개종을 요구했던 것이 참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톰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제 해결을 위해 불러낸 유대인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문제 자체가 되어 버린’ 형국인 셈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 인류와 맺은 언약에 끝까지 신실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그 약속을 완성하신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셨다. 바로 유대인들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셨던 그 약속을 친히 성취하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유대민족에게 하신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겠다’는 약속이 이제는 교회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하심으로써,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하신 약속을 갱신하신 것이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로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청년학생인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우리를 어그러진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된 교회를 세우신 이유일 것이다. 한민족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와지는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한민족 교회의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청년 학생 디아스포라를 통해 이 땅에 진정한 교회를 세우시고, 어두운 이 땅에 빛이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KOSTA/USA-2010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09년 KOSTA/USA 집회를 마친 직후, A 형제는 지난 몇년을 다니던 회사로부터 layoff 통보를 받았다.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라는 주제로 열렸던 KOSTA/USA-2009를 통해 깨닫고 확인한 감격이 너무도 컸기에 layoff의 충격 또한 클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우리의 죄로 인해 어그러진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그럴지어다’의 상태, 즉 ‘샬롬’을 회복하실 것임을 이야기했던 집회였다. 더 나아가, 비록 지금 세상은 실직, 질병 등 각종 어려운 일들을 통해 우리를 집어 삼킬 듯 달려들지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으시고 그 육신을 다시 입고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음을 나누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완성인 샬롬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음을 깨달으며 참 많이 울면서 감사했던 A 형제였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 몸을 입고 이 땅에 회복된 하나님나라를 살아갈 수 있기에, 실직이나 질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고 외쳤었다. 하지만, layoff의 통보를 받은 A형제가 기도 가운데 외친 한마디는 ‘하나님, 살려주세요.’였다. 세상의 힘은 여전히 강하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의 논리가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 같더라도, 이 세상의 왕은 예수님이시다. 이토록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서도 ‘예수는 왕이시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이다. 유대인들이 인류 역사에서 상상하기 조차 힘든 민족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희망 가운데 감사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시며 왕이시다’라는 <복음>이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왕이라고 외치는 자들이 늘 있고, 그 힘이 너무도 커 보여 두렵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가 유일한 왕이시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모든 만물의 왕이신 한분 하나님의 백성임을 잘 알았기에, 언젠가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회복될 것임을 믿고 감사할 수 있었다. 그런 힘이 바로 다니엘에 사자굴에서도 꿋꿋할 수있는 이유였으며, 예레미야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이 기쁨의 소식은, 예수님이 오시면서 그 의미가 더욱 확실해졌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 세상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지배력은 너무도 강대해서, 로마의 가이사만이 유일한 왕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인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셨다. 그것도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강한 힘을 통한 정복이 아닌,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돌아가심으로 이루셨다. 세상의 논리를 뒤짚는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으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는 이렇게 외쳤다. “예수는 왕이시다” 초대교회의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외침은, 지금처럼 종교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그 고백은 “가이사가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주인이시다”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외침이었다. 초대교회는 이 고백에 목숨을 바쳤고, 그에 대한 엄청난 댓가를 치루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세상 지배자들의 힘이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왕이신 예수님께서 어그러진 세상을 회복하실 것을 신뢰하고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이 세상을 회복시키 시기로 작정하시고, 여전히 딴길로 가는 우리를 믿어 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믿음에 반응하여, 감사함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하나님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만이 왕이 되셔서 어그러진 이 땅을 회복시키실 것임을 선언한다. ‘나’라는 한 개인이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간다는 단순한 고백을 넘어,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회복시키시고 예수님만이 왕이 되신다는 <복음>이 이번 KOSTA/USA-2010을 통해 선포되고, 우리는 그 고백에 내 모든 것을 걸게 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코스타 상담실에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가상의 코스탄과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실린 의견은 멘토님 개인의 의견이며 코스타와 소식기관의 의견은 아닙니다.
진로 및 직장생활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너무 제 적성과 맞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그렇다고 갑작스레 그만둘 수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기 전에 제대로된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같은데,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신앙적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진로에 대해서 상담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 그런 선택이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같습니다. 일을 시작한 이후 너무 적성에 안 맞아서 괴롭지만 그렇다고 다른 일을 찾는데는 한계가 있는 것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인으로 지혜롭게 행동하는게 뭘 의미할까요. 직장을 적성에 맞추어 찾는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적성에 맞는 직장을 찾을 여유가 없는 냉혹한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낭만적인 관념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일(노동)은 하나님이 창조세계가운데 저희에게 주신 축복이지만, 죄로 인해 왜곡된 세상속에서는 저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실제적으로 고민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더구나 노동이 생존에 위협을 주는 현장이 되어버릴 때 저희는 당황하고 불안하게 되며 또 세상에 편승하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노동 그 자체가 신성하고 또 소명이라는 말을 들어왔는데 노동의 현장에는 정작 저희 영혼을 병들게 하고 가치관을 비트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거대한 힘이 또아리를 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성에 맞는다 안 맞는다하는 조금은 개인적인 고민과 갈등을 조금 더 거시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직장은 왜곡된 이 세상에서 여전히 신음하는 인생들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직장은 또한 예수님을 닮아 새로 태어난 저희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함께 탄식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그루터기 씨가 그런 탄식 가운데서 자라나는 곳이 되기를 도모하는 신실함으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거룩한 땅입니다. 여기에는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용기가 필요한데요, 이 용기, 세상을 살아가는 용기는 세상권세를 세상권세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거스리고 이기신 예수님의 방법과 능력, 즉 샬롬에서 온다고 봅니다. 이 예수님의 방법과 능력, 샬롬이 저희에게 이 세상을 이기는 용기를 줄 것을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평화, 세상을 이기신 용기의 가시적인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평화, 세상을 이기는 힘, 여기에 신앙인의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개인적인 적성때문에 하는 고민이 심각하실 때, 또는 직장에서 여러가지 옳지 않아 보이는 일들을 인해 어려우실때, 그 고민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한 일군으로 소망가운데 살아가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으시기를 빕니다.
직업/진로의 선택에 적성을 고려하는 것은 상식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난 왜 적성이 맞지 않는 직장을 택해서 이고생일까 라는 고민은 어떻게 보면 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성과 무관한 직장에서 견뎌내며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인간적인 능력부족의 문제는 정말 고민이 됩니다. 우리는 전 인생을 걸쳐 능력을 극대화 하고 탁월해야만 성공이라는 인생관을 주입받아 왔거든요. 성경에 ‘크게 되어라’ ‘큰 꿈을 꾸어라’라는 명령이 없는데도 청년들을 위한 많은 조언들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청년들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쓰여진 ‘크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약속이지 명령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무슨 약속인가 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사는 삶에 대한 약속입니다. 직업/진로/배우자 선택이 저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A냐 B 냐 하는 것보다는 A 나 B 를 선택하는 나 자신의 가치관을 보시는 하나님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직업/진로 선택 (심지어 배우자 선택까지도 포함해서)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성경적 가치관이거든요. 마치 아이가 성숙한 성인이 되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게 되면 그 선택을 하도록 허락해 주시며 기뻐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읽은 책에 공감이 되는 이런 말이 있더군요 “믿음이 모든 문제를 분명하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믿음은 확실성이 아닌 신뢰의 문제이다.” 세상적인 능력의 탁월함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부산물로 보아야 능력과 그 결과만 원하는 무리함으로 인한 인생의 어려움과 갈등되는 마음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N. T. Wright, Surprised by Hope, 2008 톰라이트, 마침내드러난하나님나라, IVP, 2009
Surprise by Hope은톰라이트의하나님의나라, 부활, 교회의미션에대한설명이자, 새로운접근이제시해주는신약성서의전체에대한의미에대한설명이다. 전통적인입장의기독교가관심을가지고있는주제이지만, 좀더역사적인배경을염두에둔신학적인논증으로설득력이더해진설명을제시한다. Part 2의 6장부터 11장은저자의역사적기독교에대한설명이고, Part 3의 12장부터 15장은결론이자새로운시대의요청에부응하는교회의역할에대한함의에대한설명이다. 기존의기독교변증에비해새로운시각으로제시한기독교에대한설명은역사적기독교가근본적으로이원론을허용하지않는다는점을설득력있게논증하고있고, 교회의역할도기존의이원론적인태도와활동을넘어서는창조적인미션으로변화해야한다는점을강조하고있다. 한편개인주의적구원관이지배하고있는현대교회에대해서거시적인전창조질서차원의구원을강조함으로써전인류적인교회의미션을제시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