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교회의 모습과 역할, 그리고 진정한 교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변화, 그러한 변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이 시대의 고민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교회에게 제기하는 엄중한 물음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던 세계라는 시대적 환경에 대한 민감성과 성경적 원칙들이 갖는 절대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의 균형을 이루는, 살아있는 교회의 특징들을 고찰하고 있다. 먼저 교회의 본질을, 배움, 돌봄, 예배, 그리고 전도라는 4가지 요소로 제시한 후, 이 비젼을 7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풀어나간다: 예배, 전도, 사역, 교제, 설교, 연보, 그리고 영향력.
전통적인 교회의 핵심요소들의 중요성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예배, 회중예배, 지역교회를 통한 전도, 목사와 감독의 역할, 그리고 강해 설교)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이머징 교회들의 특성들 (영적 초월성과 올바른 삶이 수반되는 예배, 세상 속으로의 침투, 교회중심 활동 탈피, 소모임의 중요성, 성속의 분리 거부, 설교의 호소적 감성적 요소)이 교회에서 균형을 이루어가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교회가 실제로 교회 자신만을 위해, 즉 자신의 생존과 편의 그리고 특권 유지를 위해 조직되어 있는가? 아니면 하니님과 사회를 섬기기 위해 조직되어 있는가? 교회를 지역 사회로부터 불필요하게 분리시키는 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교회의 건물, 예배 의식, 조직, 프로그램, 그리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점검하기를 촉구한다.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가운데 ‘시각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화석화되고 시대와의 소통에 닫혀있으며 그래서 교회 자신을 섬기는 교회에 대한 냉엄한 비판이자, 포스트 모더니즘적 요구에 대한 교회의 시대적 적실성에 대한 촉구이다. 교회가 지녀야 할 문화적 민감성에 성경적 원칙을 결합한 탁월함이 엿보인다.
제 8장에서, 저자는 소금과 빛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므로, 세상과 다르되 세상으로 스며들어서, 비기독교 세상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이 부패를 막고,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만약 사회가 부패하고 어둡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완전함을 목표로 하지 않고(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만 가능하므로), 개선에 머무르겠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우리가 헌신할 만한 목표이며 또한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변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무기고를 열어보인다. 중보 기도, 복음 전도(사회적 양심을 개발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비젼과 용기를 얻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때이므로), 모범, 고난(인기가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도덕적 기준들을 위해 기꺼이 받는)과 같은 전통적인 무기에, 논쟁과 행동이라는 법제적 정치적 방법이 더해졌다. 법과 정치를 통한 사회변화는 통상 진보적인 성향을 띠며 종종 기도나 복음 전도에 중점을 두는 진영과 긴장을 이루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성향을 한데로 묶어서 서로의 보완성과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 기도나 고난의 영향력에 대한 저자의 확신이 견고한 만큼이나 법과 정치를 통한 사회변화의 방법의 한계에 대한 저자의 보수적인 관점도 확고해 보인다.
사회변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급진성은, 우리가 기독교적 독특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우리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사회 속으로 침투할 뿐 아니라 사회에 순응하기를 거부해야 하고, 우리의 기독교적 확신,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기준, 그리고 생활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164쪽).
200쪽에 조금 모자란 작은 책에 살아있는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길 것을 기대할 수는 없고, 많은 부분은 독자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채워가야 할 여백으로 남겨진 것이겠지만, 그래도 가려운 곳이 없지는 않다. 저자의 교단적 배경에서 비롯된, 교회력에 상응하는 성구집인 일과표를 매 주일 예배 마다 읽는 것에 대한 언급은 조금 낯설게 다가오고, 기독교의 연보가 균등화에 기여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다른 사람들과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피차 환대하는” 삶의 기준으로서의 균등화)은 적용에서 자의적일 수 있다는 면에서 아쉽다. 또 기독교적 독특성이 어디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논증과 설명이 좀 더 깊이있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남는다.
저자가 90세에 이르러, 이 시대와 교회를 바라보며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담긴 아래의 두 토막 글을 적어본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나는 무엇인가 할 수있다.
내가 할 수있는 것을, 나는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할 것이다” (Edward Everett Hale의 글, 167쪽)
자신이 평생을 몸담아온 영국 성공회 교회에 대한 그의 태도, 순수성을 좇아 탈퇴하거나, 하나됨을 위해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타협하지 않는 포괄성’을 선택함. (문제가 많고 불완전한) 교회안에 머물면서 진리를 지키는 영속적인 긴장상태 가운데 살아왔음에 대한 그의 고백은 곧 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에게 저자가 보내는 초청장인 듯.
(p.s.) 부록 II를 꼭 읽어볼 것. 1974년에 쓰여진, 존 스토트의 ‘살아있는 교회에 대한 꿈’인데 2011년에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십자가와 칼 The Myth of A Christian Nation> by Gregory A. Boyd
<십자가와 칼>이라는 제목은, ‘칼의 힘’ 즉 ‘위에 서는 힘’ ‘세상 나라’와 ‘십자가’ ‘아래에서 섬기는 힘’간의 contrast를 강조해준다. 통상, 이 두 가지 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양자택일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잘 융합해서 균형있게 사용할까인 것 같다. ‘칼’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 ‘칼’을 허락하시고 ‘십자가’를 위해서 사용하시는가의 원리를 찾아서, 세상 권세에 빼았겼던 ‘칼’을 ‘십자가’로 되찾아 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합리적인(?) 접근을 철저히 비판한다. 저자의 세계관에서, ‘칼’과 ‘십자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칼’은 ‘십자가’를 위한 도구일 수 없고, 도구여서도 안 된다. ‘칼’은 이 세상과 세상 나라의 ‘위에 서는 힘’을 상징하는데, 이 세상의 권한은 현재 일시적으로 사탄에게 부여되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국가와 정부에게 권위를 주어서 – 악한 왕과 나라를 통해서도 – 선한 가치들을 이 땅에 구현하는데 이용하신다는 것, 세상 국가나 정부의 선기능을 성경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는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판단하기에 상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한 나라와 정부와 통치자라 하더라도 사탄의 강력한 권세와 근원적인 죄의 문제아래 있기 때문에 세상 나라는 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첩경이 될 수 없다. 악한 나라와 사람들를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시지 않고, 자신의 나라(좀 더 선한 나라)를 ‘하나님의 군사’로 삼으셔서 ‘칼’의 힘을 쥐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악한 나라를 심판하게 하신다, 이것이 좀 더 선한 나라, 혹은 교회, 혹은 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나라의 힘을 맡기신 이유이다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이 세상 나라의 힘과 권력, 세상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뜻을 이 땅에 이루려’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며, 그리고 세상 나라의 도덕적 수호자를 자처하는 것에 대하여, 저자는 단호하게 “NO”라고 외친다.
이 “NO”의 근거는, 첫번째, 역사에서 발견된다. 기독교가 국가종교화되어서 국가 권력과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과 손잡을 때 나타났던 폭력과 억압,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국가및 종교 이기주의,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고 방해를 받았는지의 사례는 4세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서 시작해서 2005년의 미국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저자는 ‘십자가를 앞세운(혹은 그에 기초를 둔)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을 myth라고 부른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시점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발 성전Holy War이 이슬람발 성전과 한판 승부를 벌이던 2004년 무렵이다. 무슬림 테러리스트를 소탕하기 위한 전쟁은, ‘미국을 하나님께 되돌려 바친다’라는 기독교적 슬로건 아래 보수적인 기독교 그룹으로부터 윤리적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 국가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이렇게 미국 vs미국에 대적하는 세력을 하나님 vs 사탄, 빛 vs 어둠, 선 vs 악으로 양분하면서 미국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군사력과 힘’으로 이 적대세력을 심판하는 일이 정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여기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미국과의 전쟁에서 피해자가 된 국가와 사람들은 미국을 적으로 여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종교와 미국을 수호하는 신, 곧 기독교와 기독교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적으로 여기게 됨으로 세계 선교에 회복불가능한 해를 입혔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심판하고 개종시키는 것이 성스러운 소명이기에, 폭력도 마다하지 않은 Christian Nation의 역사를 저자는 아래와 같이 평가한다:
“그리스도에게 세상을 바치겠다는 명목 아래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되었다” (116p)
이 “NO”의 또 다른 더 핵심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신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인간 세상의 문제가 더이상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사안들이 얽혀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들의 옳은 답이 무엇인지, pragmatic solution을 주시는데 관심이 없으셨고, 더우기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취하실 수있는 정치적 군사적 힘과 세상에서의 그 분의 왕국을 세움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시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셨다. 분명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식은, 세상이 생각할 수있는 여러가지 해법중 하나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고 철저하게 세상의 방식과 차원이 다른 궁극적인 어떤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독립과 민주화를 이루는 방법(eg. 돌이냐 기도냐),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중 무엇이 맞는지에 대한 속시원한 답, 이혼과 낙태, 동성애를 어떻게 법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 답을 주시지 않았다(그랬다면 오늘날 교회와 신학자들의 고민을 많이 덜었을텐데 말이다). 대신, 그 분은 곧 배신할 자의 발을 씻기시고, 세상 나라에서 소외된 그리고 세상 나라가 보살필 생각도 준비도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계셨고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명 하나만을 남기셨다. ‘내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엄청난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무조건적 사랑을 하라는 계명.
빠른 해법의 유혹
세상 나라의 방식, ‘위에 서는 힘’이 불완전함, 그 부정적 파급력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이 방식에 매료되고 어떻게든 이 방식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어쨋든 ‘위에 서는 힘’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이룰 수있는 선이 상당하지 않는가라며 –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는 속담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What did Jesus do?
공생애 시작전 광야에서 예수님께 나타난 사탄은 천하 만국과 모든 영광을 주겠다며,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사탄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쥐고 있는 자이고 예수님은 천하 만국과 영광을 하나님께 되돌려 놓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예수님께서 소기의 (선한) 목적을 달성하는 쉽고 빠른 (= 효율적, 효과적, 합리적) 방법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즉, 고난과 죽음 없이도 예수님은 손쉽게 온 세상 나라를 취하실 수 있었다.
저자는 사탄의 제안이 선한 것을 담고 있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유혹이나 시험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이루는 쉽고 빠른 해법의 유혹을 받으신 것이다. 이 유혹을 뿌리치신 예수님께서 대안으로 선택하신 방식은, 느리고 무기력하며 매우 ineffective해보이고 그래서 이 방식으로 어떤 변화를 꾀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방식, 자신의 힘과 권력의 포기(하나님의 아들로서)하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본으로 행하셨고 우리에게 ‘따르라’고 명령하시는 이 사랑의 방식은, 세상 나라의 ‘위에 서는 힘’과 정면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재적 특성이며, 하나님 나라가 부흥하고 완성되는, 궁극적인 승리로 반드시 귀결될 방식, ‘아래에서 섬기는 힘’이다.
Following Christ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imitate하는 사람들이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모방해야 할까? ‘아래에서 섬기는 힘’ 즉 세상을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의 삶을 살되, 그것이 윤리적 행동강령 준수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헛갈릴 수가 없고, 적어도 4권(복음서)의 메뉴얼마저 제공된 이 부르심앞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세상의 방식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일까?
첫째,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방식과 세상 나라의 힘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봉할 힘은 국가종교로서의 기독교나, 기독교 국가로서의 통치 권력이 아니라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수있는 세상에 대한 희생적인 섬김의 행위다(167p). 국가의 운명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를 했느냐 안 했는냐에 달려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랴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168p).”라는 주장에 우리는 얼마나 동의하는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현재화’하는데 ‘아래에서 섬기는 힘’ ‘무조건적인 희생적인 사랑’ 그리고 ‘기도’를 사용하자는 생각이 너무 순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세상 나라의 힘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지를 보면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 힘을 기독교가 취해서 이 세상을 ‘맞는’ 방향으로 변화시켜 가자라고 열정을 불태울 수도 있다.
법과 제도로 권력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를 명문화하고 상벌을 규정해 두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한 국가(보통 내가 속한 나라다)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가치에 다른 나라보다 더 가깝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판단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나라에 덜 가깝다’고 판단하는 다른 나라들에게 ‘위에 서는 힘’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이 힘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상관없는 혹은 반하는 어떤 국가적인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선한 나라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정당화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하신 방법을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한 국가뿐아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세상 나라의 힘을 업은 기독교가 그 힘으로 복음을 강요하고 도덕을 수호하고자 할 때, 정작 하는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으로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권리를 위해서 죄인들과 싸웠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을 정복한다’는 논리는, 세상의 방식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아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믿음이 없이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둘째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궁극적인 해답이며 반드시 승리할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선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이루려는 동기는 이기적인 속성을 갖는다. 선한 목적의 성취와 그로 인한 혜택의 가운데 자신이 서 있고 싶은 욕구(기여를 하든, 혜택을 받든, 혹은 역사적 증인이 되든)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초라하고 치욕적인 것이었지만, 그 죽음으로 인해 그 이후의 세계와 시대는 영원히 달라졌다. 예수님은 이것을 바라보셨고 그래서 빠른 해법의 유혹과 자신이 발휘할 수있는 힘을 포기하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과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하셨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신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빠른 해법에 매달릴 수 밖게 없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에 대한 영원의 관점과 믿음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조급함없이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음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신 희생의 길을 갈 수있다.
세째로는, 세상 나라와 권력자들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일부를 떠넘김으로써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을 경감시키는 편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와 영적 필요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셨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방식으로 소외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필요할 것이고, 지금의 우리의 생활방식은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이다. 만약 정부가 저소득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행동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고 저자는 묻고 또 묻는다.
우리가 기독교를 국가에 접붙이는데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의 ‘물질적 요구’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 넘겨버리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영적 요구’만 걱정하면 되기 때문에. 정부가 사람들을 돌보고 정의로운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일은 분명 선하지만, 세상의 희망이 정부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선하고 합리적인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보이는 나라와 정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따라야 할 ‘사랑’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결언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나라의 권세를 가진 위치로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하게 행동하고 또 자신의 권세아래 있는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담아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 최선은, 자신의 삶과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뤄가는 희생적인 사랑의 의무를 대체하거나, 감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의 명령에 예외가 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도 없다. 그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다. ‘사랑’의 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다양성과, 힘과 권위의 차등성에 구애받지 않는 근본적인 삶의 방식이다.
저자는, 제한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세상 나라의 선택사항을 받아들여 투쟁을 일삼기 보다는 ‘상자 밖에서’ 생각하는 지구상 유일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도전한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을 다음의 질문을 항상 기억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종종 물리적으로 강해지고 커지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습이 우리가 믿는 것과 하는 일의 도덕적 우월성과 정당성의 신적 증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의 resources가 집중되고 축적되는 기독교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 개인과 교회의 이런 모습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정반대의 것이어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가짜라고 생각하던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짜, 심지어 둘 다 가짜라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개인과 교회로부터 resources가 무조건적으로 한계없이 대량 방출될 때이다(그래서 본인들은 죽을 정도로). 그래서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우리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지?’라는 의구심을 들게 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를 본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런 비세상적인 모습을 비난하고 이를 갈며 죽이려고 달려들면, 우리는 목숨을 내주면 된다. 나의 죽음을 비웃고 기뻐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들은 우리가 행했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부흥되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며 우리가 따라가야 할, ‘구원’의 길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태도는 ‘위에 서는 힘’을 신봉하여 승리하느니 순진한 갈보리 언덕의 방식을 따라 패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적용할 수있는 무엇이 아니라 믿음이다”(265p)
이렇게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이미 당면한 현재 안에서 보여”주어야 한다(98p).
이 책의 context는 미국이지만,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만큼이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들을 떠안고 가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넘치고 있는 것인지, 문제의 본질과 근원적인 해답에 대한 고민에 clue가 되어준다. 책장을 덮을 때에, 모든 생각과 글이 다 사라지고 질문 하나만이 떠올라 맴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 바로 여기서!”. 무척 긴 리스트가 될 것같다. 감사하다.
<After You Believe: Why Christian Character Matters> N. T. Wright
서평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끄러운 사실을 자백해야 겠다. 우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배경지식으로서 톰 라이트의 신학사상에 대하여 무척 무지한 상황에서,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고민과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질문과의 우연한 일치에 힘입어 이 책을 만나고 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톰 라이트의 심중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는 독자라면 나의 책읽기가 그가 제시하는 큰 그림의 핵심을 용케 비껴가고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근거하여 편식하고 있음에 불편해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수준에서 쉽게, 바로 적용가능한 단답형으로 찾아내는데 몰입되어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미성숙의 소치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집중력이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쓸 자격이 없는 자가 용감하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냉면 요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맛난 냉면 한 그릇의 행복을 나눌 수있지 않을까라는 소박한 마음에서임을 양해해 주시기를.
문제 제기 – James의 고민
James는 20대의 청년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고, ‘요한복음3장16절’의 역사가 그에게 일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 희생과 사랑,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의 약속에 대해서 배웠다. 기도와 예배의 생활을 하며 성경을 읽는다. 이전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잘 하지는 못하고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한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What am I here for now? What happens after I believe?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 – 즉 전임목회자, 선교사, 교사나 의사와 같이 특정한 Christian service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 은 그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James는 computer science의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는 중이고 앞으로의 진로 또한 전도유망하지만, 위에 나열된 career는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도대체, after we believe 와 before we finally die and go to heaven사이의 시간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저 시간을 보내며 “죽어서 천국에 가는 날”을 기다릴 뿐인가? 컴퓨터 공학자로서 James의 지식과 삶의 기회들은 이러한 “영적인” 문제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What being a Christian is all about?)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1장에서 밝히고 있다.
James의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있는가라는 질문으로 rephrase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후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있는가?
Christian Character, the Transformation
Faith와 final salvation사이의 bridge, 그리스도인됨(being a Christian)의 의미를 규명해줄 이 bridge를 저자는 character라고 제시한다. Christian character를 핵심개념으로 붙잡고 character란 무엇이며, 어떻게 character가 형성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Aristotle의 접근법과 비교대조하면서 저자는 논증을 진행해나간다. Aristotle이 인간의 character의 이상, 목표와 구현에 대해서 무엇을 설파했는지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틀을 이해하는데에 약간의 노동이 필요했고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마저 불가능하다. 그러나, Aristotle의 철학에 대한 내용을 건너뛰어도 저자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So, let’s continue.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do와 don’t를 분별할 수있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우리는 통상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도덕률(rules)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spontaneous self-discovery)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일련의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규칙들은 우리가 속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가 부여하는 규칙들에 각자의 신앙과 가정배경, 개인의 양심에 따라 더하거나 감해지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하지만, 이 규칙들은 많은 부분 context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공간과 개인의 uniqueness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후자의 ‘True to yourself’식의 접근법이 우리 시대에 매우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자기 마음에 원하고 좋으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되는 이 자기 중심적 사고는, 사회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잠식되고 객체화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자못 바람직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로 인해 삶의 guidelines이 없이 제 멋대로 사는 방종마저 허용되는 문화와 체계를 형성하는게 기여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부여된 마음에 내키지 않는 어떤 rules를 지키도록 권면을 받는 일에 불편해한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내쳐두고, 예수님의 새 계명을 붙잡고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새 계명에 따라 산다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어가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이며, 어떻게 이 새 계명을 지키면서 살 수있는지를 잘 모르는 무지함 가운데 있는 것이 솔직한 진단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위의 두 가지 접근법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통합 완성하는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해주는데, 그것이 바로 Christian virtues(그리스도인의 미덕)를 습득함을 통한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인격의 변화)인 것이다.
저자는 “믿은 이후after you believe” 그리스도인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인격(character)에 회복reflect하고 worship과 mission을 감당하는 authentic/genuine한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이 과정의 핵심은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라고 말한다. 죄로 물든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으로 새롭게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의식적이고 반복적인 선택과 연습/훈련practice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자리잡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골프선수에게는 골프근육이 발달하고, violinist는 악기연주를 위한 최적의 체형을 갖추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Christian virtues가 편안하게 자신 안에서 발현되도록 지속적인 옳은 선택의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는 일이 무척 ‘부자연’스럽고 ‘나답지’않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연습이 반복되다보면 이러한 미덕이 ‘나의 일부처럼 편안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쓰신,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철야기도와 오랜 고민과 이를 악무는 결단이 없이도 새 계명에 합한 선택과 행동을 하고, 겸손과 온유, 평강과 희락, 자비과 긍휼, 오래 참음과 절제, 충성이 죄된 품성을 밀어내고 대신 나의 character가 되는 일, 그것이 being a Christian의 의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감의 의미인 것이다.
Anticipating the Kingdom of God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Christian character를 develop한다는 것은, 이미 임했고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anticipate”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language와 그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미리 배우고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anticipate”이란, 일어날 일에 대하여 단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지금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외야수가 공이 어디로 날아올 지를 “예상”하고 공이 떨어질 장소에 “미리 가있는 것”처럼 말이다. 외야수의 예상은 틀릴 수 있다. 공이 다른 곳에 떨어질 수도 있고 본인이 잡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anticipate”하는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임하고 반드시 우리에게 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천국이 가까왔다”로 시작하여 “나를 따르라”로 귀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자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인 것이다. (chapter 2)
A Royal Priesthood, rulers and priests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우리가 서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저자의 관점, 즉 already but not yet의 개념으로 조명해볼 때 단순히 개인적인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소명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receiver에 그치지 않고 agent로 부르심을 받았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창조세계와의 관계가운데서 “a royal priesthood”로 정의한다. 하나님 나라된 백성의 vocation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영광과 통치를 모든 창조세계에 exercise/reflect하고(“rulers”), 온 창조세계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priests”) 것이다. 저자는 worship과 stewardship을,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소명으로 요약한 뒤,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이 소명의 현재적인 구현은 거룩holiness과 기도prayer라고 제시한다. (chapter 3)
Jesus’s Call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삶을 풀어내어도, 여전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의 질문이 남는다. 저자는 일관되게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How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follow me였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있는가에 대한 시작이요 완성이면서 또한 확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대신 다른 어떤 계명을 우리에게 얹어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과 완전한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moral example이 되신다고 하면, 통상적으로 이해하듯 타이거 우즈의 스윙 비디오를 보고 초보자도 그렇게 따라할 수있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새로운 morality를 제시해주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fullness of human life는 그 전까지의 율법과 도덕의 세계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new creation을 개시하심으로써 인간이 본래의 창조의 모습, 즉 완전하고 충만한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창조세계 가운데 royal priesthood로서의 인간이 어떤 것인지를 그의 존재와 삶과 사역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Christian virtue를 practice함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만들어나갈 때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르게 될 지향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chapter 4).
저자는 바울의 서신서들을 통찰하면서 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moral effort를 필요로 하는 일임을 강조해준다. 즉, 옷장에서 적절한 옷을 골라서 입는 일이 mind를 통한 “through thinking”에 의한 것인 것처럼 (옷이 저절로 옷장에서 튀어나와 내 몸에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sinful character를 벗고(put off), Christian character를 입는(put on)하는 것은 생각없이 충동적으로 혹은 자동반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를 받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인 반면, 구원 이후의 삶, 예수 그리스도같은 완전한 존재로 지어져가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책임이요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현재화하는 소명적 여정인 것이다. (chapter 5)
소결
완성될 그리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을 오늘 연습하고 나의 second nature로 빚어가는 moral effort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새 창조 새 언약, 새 생명의 증거sign라는 관점은, 은혜로 얻은 구원 이후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reward나 payment”를 받으려고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rules of conduct”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줌으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겪는 혼란, 결국 예수님의 새 계명은 또다른 율법이 아닌가라는 부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거룩함사이의 도덕적 긴장을 해소해주었다.
이제, 보다 실제적인 연관 질문들을 고민할 차례다. 이와 같이 Christian virtue를 생각함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 혹은 ‘gifts of Spirit’의 자리는 무엇일까? 또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연습/획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context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바울은 왜 수많은 미덕중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나의 인격이 될 수있는가라는 점에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존재라는 점과, 성령님의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6장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평 Part 2에 계속)
<The Call to Conversion: Why Faith is Always Personal But Never Private> Jim Wallis
이 책은 IVP에서 2008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했고, 영문판은 2005년에 출간되었지만, 원래는 1981년에 쓰여진 책이다. 1981년이면 필자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이니, 30년의 세월을 견뎌낸 ‘고전’의 재발견이다.
이 책이 한 세대 전에 쓰여졌음을 감안할 때, 현 시대의 세상과 교회를 조명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제자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최초의 부르심”으로 이끌어내는데 이보다 더 명료하고 시의적절할 수는 없다는 점은 경이롭기만 하다. 동시에, 이미 한 세대 전에 제시되었고 예견되었던 도전과 경고에 대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무심하였고 무지하셨고 또 무방비상태로 지난 30년을 지나왔고, 그래서 이 책의 엄중한 지적앞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는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에, 좋은 책을 만난 기쁨이 철저한 고통으로 다가오는 독서였다.
이 책의 영문 원제목은 저자가 ‘그리스도인의 회심(conversion)’에 대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매우 분명하게 담아낸다. 즉,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개인적personal이고 인격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한 개인에게 일어났을 때 필연적으로 ‘사적인private’ 영역을 넘어서는 역사적인 현실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심의 본질을 저자는 ‘역사 속의 회심 conversion-in-history’라고 명명한다. 저자는 ‘공적인 생활과 개인적 신앙’간의 유리 혹은 이원화의 결과, ‘신앙이 역사로부터 갈라져 나옴’으로 인해 오늘날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있다고 진단한다.
회심은, ‘어디인가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에서 ‘어디인가를 향해 나아가는 신앙’으로 나아간다. ‘어디인가로부터’의 영적 특징은 죄이며, ‘어디로’의 본질은 구원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회심이 하나님없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것이라면,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identity를 부여받은 사람은, 그가 속한 역사의 현실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에 따라 새롭게 정의하고 그 질서에 따라 살게 된다. 결국, ‘회심’은 존재의 새로와짐과 삶의 새로와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에, 반드시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관찰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이 죄와 우상과 자기 중심성이라는 구조에서 ‘회심하여’ 구원과 하나님 그리고 이웃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면, 가난과 불의, 불평등과 부조리, 분쟁과 환경파괴의 문제에 대하여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초기 교회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회심’은 이렇게 역사적인 사안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특정한 삶의 형태, 분별 가능한 생활방식을 따르는 사람들’, 즉 그들이 믿고 전파하는 복음을 “실제로 사는” 사람들로 인식했다. ‘회심’이 갖는 이러한 역사성은, ‘(회심을 통해 떠나온)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이 (회심을 통해서 속하게 된) 하나님 나라의 그것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무형의 진리가 ‘새로운 방식의 삶’이라는 모습으로 incarnation된다는 관점에서 역사의 일부이지만, 시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동일하게 작용하는 복음의 능력이기에 역사를 뛰어넘어 영원으로 향한다.
저자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하여 세상이 알고 있는 바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세상의 관찰사이의 불일치, 결여된 연관성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의 능력이 상실되었다고 지적하고, 이것을 “배반” (2장의 title)이라고 부른다. ‘예수가 구원자시다, 예수가 주인이시다’라는 구호와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시적인 사례가 개인과 역사속에서 실종되었을 때,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세대가 되었고, 우리의 질문은 ‘예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까?’로 천착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임하는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등에 업는’ 방식으로 우상화되었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회심의 역사성,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 그리고 회심의 사회적 의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이 세대의 배반에 대한 일반론을 토대로, 가난, 전쟁, 교회, 예배에 대한 3장에서 6장까지의 각론을 통해 ‘회심’의 구체적인 영역을 제시한다.
‘회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철저히 수동적이며 따라서 ‘생명을 얻는 사건’이지만(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므로), 그 부르심의 결과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 한 개인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은 생명을 건 전투가 아닐 수 없다. ‘회심’이 세상의 불의와 불완전을 드러내기 때문에 세상은 ‘회심’을 싫어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으로 이 회심을 살아내라고 권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될 승리에 대한 확신없이, 우리의 삶을 통째로 건 ‘회심’의 길을 세상을 거슬러 걸어가기는 어렵다.
‘회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그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사는 회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적대적이고 극단적이고 급진적이고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어지럽히며 또한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인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분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당대의 반응이었고, 그 분을 따랐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태도였다. 21세기라는 역사를 소명으로 부여받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회심’를 다시 배우고 ‘회심’을 살기 위해 모든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기를 각오해야 하는 이유다.
책을 덮으며, 이 ‘회심’의 길을, 삶으로 실재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누군가를 만나고픈 그리움과 나는 이 분명한 부르심앞에서 얼마나 생명을 쏟아붓고 있는지, 어떤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에 대한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역사 속의 회심’이 겨우 이제 내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성경적 회심의 목표는 역사와 별개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그 폭발적인 힘과 함께 세상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회심은 개인에게서 시작하지만 세상을 위한 것이다” (1장 부르심, p41)
올 봄에 내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과 소명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고민하며 여러 책들을 읽던 중에 <하나님의 뜻: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 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소명에 대한 책을 더 구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10년 전에 씌여진 책인데, 왜 이제서야 내 손에 들어왔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문제에 대해 속시원하게 답해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좀 찬찬히,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했지만, 구체적인 답을 주시지 않아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저자는 책의 2부에서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른 책들에 비해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 내용들이 많아서 구체적으로 와 닿는 점이 좋았다. 저자는 소명이라는 화두를 꺼내면서 가장 먼저 직업과 소명을 구분하고 있다.
첫째, 소명은 직업을 초월한다. ...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차적 소명은 능력과 지위와 기회와 배경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그분을 섬기는 삶이며 특별한 헌신과 에너지와 방향으로 투자되는 것이다."... 둘째, 소명이 결코 직업으로 격하돼서는 안되지만 종종 소명에는 직업이 사용된다. 인근 의대 레지던트 프로그램에서 병리학을 가르치는 친구가 있다. 그는 직업 의사지만 그의 소명은 직업보다 크다. 의사라는 직업을 사용해 그는 세상 의사들이 대부분 간과하는 목표들을 이루고 있다. ...
셋째, 소명은 전통적 직업이 가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를 보낼 수 있다. 최근 나는 친자녀 여섯에 입양 자녀 열 네명, 도합 스무 명의 자녀를 둔 분을 만났다. 집안이 난장판이 돼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기는 커녕 그녀의 말에는 침착함과 기쁨과 활력이 배어있다. 무대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무희처럼 말이다. 스무 자녀의 어머니 노릇은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그녀에겐 전통적 의미의 직업은 없었음에도 자신의 소명을 이루고 있었다.
끝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소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 단어의 사용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의 소명은 단일 직무인 경우가 드물다. 그 직무가 수사의 직분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의 소명-경우에 따라 단수든 복수든-을 발견하는 길과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이루는 길은 깔끔하고 질서정연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 여정이 시작부터 끝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pp. 90-92)
그리고나서도 부족함이 느껴졌던지, 저자는 다시 독자들이 소명과 직업을 분명히 구분하도록 돕기 위해 직업에 대해서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모든 소명이 다 구체적 직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자신의 가장 깊은 관심이나 동기와 별 상관없는데도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일하는 경우가 있다. ... 보람이나 소명의식을 별로 못 느끼는 일을 평생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먹여 살릴 가족들과 다달이 갚아야 할 돈이 있기 때문이다. ...
둘째, 때로는 직업이 오히려 소명의 발견이나 추구를 방해할 수 있다. ... 직업은 협력보다는 경쟁을, 나눔보다는 부를, 봉사보다는 권력을, 진실보다는 이념을 강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직업은 사리사욕의 수단이 될 수 있다. ...
셋째, 어떤 소명은 결코 공식적 직업이 될 수 없다.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은 때로 자신이 '한지로 밀려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대 사회가 직업 특히 그 직업이 가져다주는 권력과 지위와 수입에 집착하다 보니 무직을 택하는 이들은 그만 주변으로 밀려나고 만다. (pp.98-101)
저자는 소명이 직업 이상이며 우리의 존재와 세계관과 인생 목표의 연장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명과 직업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인간은 직업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소명도 직업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을 규정하고 그 인간에게 소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럴 때 인간은 자유로이 직업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룰 수 있다. (p. 104)
저자가 말하는 소명은 이런 것이다.
소명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뭔가 긍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그분을 높인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구원하려 일하고 계시고, 언젠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에 그 나라를 세우실 때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 소명이란 유독 종교적 직업을 가진 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 불신자 할 것 없이 의, 진, 선, 미를 창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분은 세상을 위해 세상 속에서 유익한 일을 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심으로써 그 사랑을 표현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일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 - 미를 창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의미있는 일을 제공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깨어진 세상을 고치는 것-을 이루어 가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는 소명의 자리는 독특하다. 소명이 있는 이들은 더 높은 목표 의식을 갖고 더 큰 그림을 본다. (pp.102-103)
저자가 제안하는 대로 직업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세상의 필요를 보는 내 마음의 눈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갈 때 나의 소명이 발견되어지리라 기대한다. 소명에 이르는 여정 자체가 소명의 필수 부분이라고 강조한 저자 덕분에 나는 용기와 위로를 많이 얻었다.
5장에서 소명을 직업으로부터 구별해내는 데 애썼던 저자는 6장에서 소명을 발견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을 여정에 비유한다.
길가며 만나는 경험들의 효과가 누적되어 우리를 장래 일에 준비시켜 준다. .. 우리가 삶의 소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경험 자체를 통해서다. ... 시도와 실험과 실행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 경험은 우리를 가르치고 준비시키고 단련시켜 다가올 미래를 잘 맞이하게 해준다. 이 현 순간에 하나님께 귀기울일 때 그 영광스런 발견의 과정은 시작된다. 우리는 여정 중에 배워서 미래를 맞을 준비가 되어 간다. 성품과 신앙이 자라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며, 전체적으로 성숙해진다. 그러다 때가 되면 소명의식이 싹튼다. (p. 110)
...우리는 10년 전에 미리 인생을 계획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순간 당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명을 발견해 간다. 산길을 오르는 등산객에게 점차 경치가 펼쳐지듯, 시간이 가면서 우리의 소명의식은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앞에 뻗은 등산로를 단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로는 다음 발을 내딛을 만큼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 틀림없이 도중에 아리송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런 상황에 부딪칠 것이다. 그러나 계속 가야한다. 계속 가면서 계속 찾아야 한다. (pp.114-117)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 중에 많은 시도와 숱한 실험들을 해보면서 실패도 하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상황에도 처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런 소명찾기의 일부이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라고, 소명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주는 저자의 격려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저자는 그 다음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소명을 분별함에 있어 우리가 귀기울여할 하나님의 음성이 내면의 동기, 재능, 삶의 경험, 기회, 공동체, 마음의 기쁨을 통해 들려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종의 신호들이지 공식처럼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요히 앉아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길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소명에 대해 또 다른 별개의 장을 할애하여 우리 인생에 단 하나의 소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명이 있기 때문에 그 소명들 간의 충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얘기해주고 있다. 저자는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이 장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단 하나뿐이고, 그것은 그의 직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이를 돌보는 책임은 아내에게 있다고 여겼고 아내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세 아이와 함께 남겨진 그는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야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야심이 많았던 자신이 차츰 변하여 이젠 하루종일 아이들과 가정을 마음에 품고 다니며 아이들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아버지가 되기까지 그 바탕에는 실패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했던 기도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면서 그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그는 현재 교수이면서 작가이기 때문에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정주부의 소명까지 감당하는 것이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분주함과 압박 속에서도 소명의 복수성에 잘 대처하기 위해 단순성, 균형, 유연성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래서, 그는 첫째 것을 첫째로 삼고 인생에 하나의 최고의 관심사-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를 잃지 말고 그 하나의 초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면서 내면의 단순성을 연습하고 실천할 것을 권하고 있다. 또,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느껴질 때, 가장 중요한 일을 구분해내고 자신이 가장 전념하는 것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는 연습에 힘씀으로써 선한 우선순위에 바탕을 둔 삶의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균형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끝으로, 자신의 통제권 밖의 상황에 대해 유연하고 홀가분한 자세로 임할 것을 충고하고 있다. 인생이 우리가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 실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바라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이다.
그가 소명의 복수성으로 인한 어느 정도의 긴장과 충돌이 오히려 건강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인상깊었다. 그때 야기되는 불안이 우리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겸손한 종과 청지기의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끝)
올 봄에 내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과 소명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고민하며 여러 책들을 읽던 중에 <하나님의 뜻: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 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소명에 대한 책을 더 구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10년 전에 씌여진 책인데, 왜 이제서야 내 손에 들어왔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문제에 대해 속시원하게 답해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좀 찬찬히,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했지만, 구체적인 답을 주시지 않아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의 2장에서는 우리가 행해야할 하나님의 뜻은 미래보다 현재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래는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현 순간에 하나님께 충실하게 순종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건강하게 성장하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특히, 우리가 매 순간 붙들어야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저자는 산상수훈 말씀을 짚어준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그분은 우리에게 현재의 상황이나 미래의 문제에 대해 불신자들처럼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대신 그분은 이렇게 명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바로 하여 첫째 것을 첫째에 놓을 것을 요구하신다.
... 우리는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할지 그 선택 과정을 하나님이 정확히 일러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구는 단순하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고 동기가 순수하며 기본 방향이 옳은지 - 즉 '하나님 나라'라는 '정북'을 가리키고 있는지 - 그것만 확인하면 된다. 여러 바람직한 대안들 중 선한 양심으로 아무 길을 선택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놀라운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배우자도, 우리의 직업도 정해놓지 않으셨다. 나 자신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한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길들이 우리의 삶에 대한 그분의 뜻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풍성한 자유함을 누리는 동시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있고자 애쓰게 되는 것을 경험한다. 사는 게 진짜 재미있어졌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놀라운 자유를 사용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지 궁리하고 하나씩 시도해보는 건 신나는 모험이다. 물론 나에게는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건강과 재화가 모두 부족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닮기 위해서, 나의 부족함을 아뢰고 그분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은 저항할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직전에 제자들에게명하여 칼을 뽑아들고 싸우게 하실 수도 있었다. 한 무리의 천사들을 소환하실 수도 있었다. 예수님이 ‘승리’하실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목숨을 지키고 적군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자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 돕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힘센 천사들이 휘두르는 칼의 힘조차도 결코 누군가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내 결국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 책의 원제는 ‘The Myth of a Christian Nation’이다. 우리는 때로 크리스천이 지도자가 되는 정부가 세워지면 하나님나라가 이루어 지지 않을까하는 환상을 가진다. 혹시 크리스천이 사장이 되거나 교수가 되면, 회사나 학교가 하나님나라가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곤한다. 정말 그럴까? 미네소타 세인트 폴의 Woodland Hill의 담임목사이자 기독 변증학자인 그레고리 보이드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나라를 혼돈하곤 하는 현대 교회에 대해 진정 성경적 하나님나라는 무엇인지 설명한다.
‘십자가와 구원’
브루스 데머리스트, 부흥과 개혁사, 2006
우리가 자주 빠지는 오류 중의 하나는 ‘내가 아는 건 신앙고백이고, 내가 모르는 것 교리다’는 신화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모르는 성경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펼치면 ‘저건 교리적인 내용이니 나와는 상관없어’라는 태도를 취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인식하고 있던 그렇지 못하던간에,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의 대부분은 교리의 형태를 띤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인지, 성령은 어떤 역할을 하시고 계시는지, 죄인인 우리는 어떻게 구원되는지, 등등은 어쩔 수 없는 교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이 다른 사람의 신앙고백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정립된 것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가진 신앙은 옳고
다른 사람의 것은 틀렸다’는 독선에 빠지거나, 혹은 ‘어떤 것도 괜찮아’라고 하면서 거짓 가르침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브루스 데머리스트의 ‘십자가와 구원’은 십자가와 구원에 관계된 몇가지 교리들, 즉 은혜-선택-속죄-소명-회심-중생-연합-칭의 등의 교리의 핵심과 교회사적 발전 배경 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객관적으로 보는 귀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십자가와 구원’은 다소 두껍고 쉽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기독교 지성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살아가려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인 코스탄들이 한번쯤은 꼭 읽어 보았으면 하는 좋은 책이다.
올 봄에 내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과 소명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고민하며 여러 책들을 읽던 중에 <하나님의 뜻: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 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소명에 대한 책을 더 구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10년 전에 씌여진 책인데, 왜 이제서야 내 손에 들어왔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문제에 대해 속시원하게 답해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좀 찬찬히,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했지만, 구체적인 답을 주시지 않아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의 원제목은 "The Will of God as a Way of Life: Finding and Following the Will of God"이고 저자는 Gerald L. Sittser이다. 그는 49년의 인생을 돌아보며 수많은 중간 지점에서 자신이 갈 길을 스스로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그와 다른 일을 하게 되었다고 얘기한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목사가 되었고, 서른 살에는 목회의 길에 남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만 알았던 길과는 다른 길로 들어서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미래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음주운전자의 중앙선 침범으로 한 순간에 어머니와 아내와 네 살난 딸을 잃는 비참한 고통을 겪으면서 그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현기증이 날 만큼 혼란스러웠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그 치명적인 아픔 속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의미를 성경을 묵상하며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발견하여 따라야 하는 미래의 길'로 언급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이 성경에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따랐던 '하나님의 뜻에 관한 전통적 접근'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통적 접근에서 보는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가 따라야 할 미래의 구체적 길로 규정된다. 하나님은 그 길을 아시며 우리가 따르도록 정해 놓으셨다. 우리의 책임은 그 길-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따를 수 있는 많은 길들 중 정작 따라야 할 한 길을 찾아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해 놓으신 그 길을 말이다. ... 그래서 우리는 갈 길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고, 표징을 바라고, 조언을 구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성경을 읽고,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하나님이 분명한 신호를 보내주실 거라는 희망 속에 기다린다. 하늘에서 분명한 음성이 들려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침내 선택을 피할 수 없는 시점이 찾아온다. ... 다른 모든 길을 거부한 채 유독 한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끈질기게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친다면? 내 선택이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끝난다면? 잘못된 결정의 결과에 갇혀 영원히 그 값을 치르며 살아야 한다면? (pp.21-22)
'하나님의 뜻에 관한 전통적 접근'은 우리 대부분이 가진 통념이라 너무나 익숙한데, 저자는 이 전통적 접근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이 접근은 날마다 내리는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결정 대신 미래의 중요해 보이는 결정에 마음을 쏟게 한다. ... 하지만 날마다 내리는 작은 선택이 누적되면 이따금씩 미래에 대해 내리는 큰 선택의 의미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때가 종종 있다. ...날마다 내리는 작은 선택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어느 길을 택하든 내가 내 삶에 진정 이루기 원하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에는 이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미래에 관해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전혀 안달할 필요가 없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능성 때문에 염려한 필요가 없다. 단순히 현재 이미 알고 있는 일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 반드시 분명히 밝혀야 할 부분에 관한 한 하나님은 이미 분명히 밝혀 놓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날마다 내리는 선택- 말다툼 후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 퉁명스런 직장 동료를 존중하면 대하는 것, 부엌에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 기분 내키지 않을 때도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 -으로 결정된다. (pp.22-25)
미래에 관한 어려운 선택도 중요하지만,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소명을 찾는데 집착하여 초조한 나날을 보낸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놓치는 허송세월을 살게 될거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내가 마음을 쏟아야 하는 것은 미래에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룰 것인지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이 오늘 하루동안의 나의 삶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 차분하고 정돈된 고요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하게 되어 정말 기쁘다. 비록 지금 내가 직장도 없이 파트타이머로 일하고 있어도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에 대한 전통적 접근에는 두 번째 문제가 있다. 하나님관이 잘못되어 있고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숨기시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다녀야 한다. ... 하나님은 분명해야할 부분에서는 언제나 분명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설득하시는 것만도 하나님께는 이미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 뜻을 숨기심으로 당신과 우리를 더 힘들게 하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 우리의 선택이 잘못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은 한번 '잘못'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당신의 선한 계획에서 끊으실 만큼 비정하신 분일까? ... 난관과 고난에 부딪칠 때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는 남은 인생을 '그때 다른 길을 택했어야 되는데'하고 한탄하며 보낸다. 아이러니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그 상황이 아무리 힘겨운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세워나갈 기회를 허송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통적 접근은 이런 어림짐작과 요행심리를 낳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그분의 은혜에 어긋나는 태도다. (pp.25-27)
나를 자녀삼으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을 지금 내 삶 속에서 실습하며 배우는 중이다. 고통과 어려움이 계속되고, 힘든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처음엔 쉽지 않지만, 점점 쉬워진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상황에 따라 슬픔과 아픔은 느껴질지라도 두렵지는 않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또한 바라며 매순간 그분께 의지하는, 가난한 마음...이것만을 나의 본분으로 알고 하나님을 꼭 붙들며 살아가길 소원한다.
엄연히 ‘냅킨전도’라는 번역제목이 있지만, 이 책의 원제목인 ‘True story’로 소개하는 편이 더 적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은 분명 안티 기독교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어떻게 그 샬롬을 파괴했으며, 또 하나님은 어떻게 이 어그러진 세상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사는 젊은이들은 ‘이야기(story, narrative)’로 소통한다. 더우기 성경은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사랑과 계획을 말씀하신다. 이 책은 바로 그 ‘이야기’, 다름아닌 ‘true story’를 말한다.
한국인 2세로 MIT 출신의 미국 IVF 간사인 제임스 정은, 자신이 고등학교까지 성장했던 시애틀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정리된 여러가지 갈등을 그들의 멘토인 존스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선을 위해 창조되다’ - ‘악으로 손상되다’ - ‘더 나은 모습으로 회복되다’ - ‘치유를 위해 함께 보냄받다’는 메타 내러티브를 간략한 그림으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에게 머무는 한계를 넘어서게 돕는 좋은 책이다.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장 바니에 & 스탠리 하우어워스, IVP, 2009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려면 먼저 모범이 되는 사례가 나타나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델을 제시하고 기존 전제들에 도전하며 새 패러다임이 실제로 가늠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줄 사람들과 집단이 필요하다. 라르쉬는 정확히 그러한 모범이 된다. 장 바니에는 1964년에 라르쉬 공동체를 설립했는데, 처음에는 중증 지적 장애인 두 사람과 공동 생활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후로 라르쉬 공동체는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서’라는 근본적 정신을 견지하며 지적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더불어 사는 국제적 공동체로 확대되었다. 그들은 돌보고 돌봄받는 관계가 아니라 책임과 필요를 공유하는 동료 인간으로서 함께 생활한다. 라르쉬 공동체는 심오한 카톨릭적 영성과 신학에 근거한 특별한 포용의 모델을 제공해 준다.
그들은 사회가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믿는 바를 거부한다. 참으로 이상한 공동체다” (서문 중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대형화하고 상업화하는 현대 교회의 모습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을 인격이 아닌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어그러진 상황 가운데,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그 대안으로 라르쉬 공동체를 소개한다. 중증 지적 장애우들과 그저 함께 있어 줌으로써 이 땅에서의 샬롬을 살아가는 라르쉬의 모습을, 창립자인 장 바니에가 이야기하고,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라르쉬의 모습을 교회의 모범으로 삼아 이론적인 해석하고 있다.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온유함의 영성 라르쉬를 말하다’ - 교회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하는 소중한 책이다.
2008년 첫번째 달. 내공없는 풋내기의 책읽기는 계속된다. 이번 달에도 생각의 지평의 넓혀주는 귀한 책들을 접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단지, 꼭 읽고 싶었던 책들을 그 두께에 지레 겁먹고 뒤로 미루어 놓은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 교회 그리고 세상', Howard Snyder (박민희), IVP, 2007
한사람 한사람이 변하기만 하면 정말 세상도 변할까?
아직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던 캠퍼스. 나도 대학 새내기 시절에는 선교단체라는 곳에 몸을 담았었다. 그 때에도 지금처럼 리더들에게 이것 저것 따지기 일쑤였는데, 그 당시 내가 따지며 대든 내용 중의 하나는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였다. 입학 초기 신입생을 위한 한 강의에서, 모 간사님께서는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데모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고, 난 그분께 '탈세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사람이 바뀌었다고 어떻게 탈세를 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발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마구 질문했었는데, 그리고 그 이후 이 문제는 많이 해결했다고 믿었었는데... 하지만,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의 정당성 여부는 아직까지도 내겐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1983년도에 저자의 강연을 정리했다고 하는 이 책을 통해 나는, 하워드 스나이더의 다른 책 - 참으로 해방된 교회, 교회 DNA 등 - 에서의 주장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워드 스나이더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생태계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이 좀 더 명확해졌다던가 하는...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특징들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되고 계시되었으며, 그 특징들이 신약에 와서 재해석되고 완성된 것임을 '샬롬', '도시', '가난한 자들과 함께함', '안식', '희년' 등의 분야로 나누어 살핀다. 그리고는 이런 하나님나라가 현재에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되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책 후반부에서는 그런 하나님나라가 개인을 넘어 교회와 세상까지 영향을 끼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하는 제안을 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던가, 국제 평화를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 등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 복음 전도 뿐 아니라, 사회 정의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님나라를 위해 동일하게 귀한 일임을 강조한다.
크리스천이 세상의 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세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정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인지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또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바보같아 보이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우리의 싸울 것은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것이니까...
"십계명 (The truth about God)", Stanley Hawerwas, 복있는사람, 2007
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문장 하나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참 순진해' 혹은 '그 사람은 너무 정치적이야' 등의 한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한사람의 평가가 동시에 상반된 두가지 방향으로 나오는 건 아무래도 좀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성향에 대한 서로 다른 두가지 평가가 나오는 경우 또한 흔치 않다. 그런데, 이번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십계명'을 보면서 이런 종류의 혼란을 겪었다. 하우어워스는 존 하워드 요더의 이론을 지지하는 윤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에 이어 한국말로 소개된 그의 두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십계명은 세상을 위한 윤리적 지침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할 기독교 선언문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의 소유인지를 알게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이 땅의 세속문화와 그 가치에 대항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하는 삶의 방식이다"라 단언한다. 계명 열가지를 하나씩 짚어가며 그 원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계명들이 단순한 윤리로 취급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이 결혼해야 하는 단 하나의 바람직한 이유라면, 독신일 때보다는 기혼일 때 세례에 따른 소명의 삶을 보다 훌륭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때문이다"라며 결혼을 공동체적인 삶과 연결시키는 다소 급진적인 성향을 보인다. 반면 십일조의 당위성을 지지한다던가 조직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면모 또한 엿볼 수 있다. 도대체 하우어워스는 정확히 어떤 성향의 사람일까? 아직은 공부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김기현 목사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의 해설에서 이야기했던 하우어워스에 대한 평가는 조금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는, 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심장부에서 자라나 재세례파인 존 요더 (John, H. Yoder)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자(pacifist)인 점, 그에 더하여 미국과 자유주의 양자에 대해 전투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실천적 성향, 거기다 자연신학을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칼 바르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수주의를 닮은 데가 있는지라,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에게 두루두루 통하는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됨으로써 딱히 절대 지지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는 것이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더 없이 절실하지만, 동시에 삼키기에는 쓰디 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이미 많이 진보화한 걸까. 그의 보수적인 성향이 적잖이 거슬리는 걸 보면서 나도 놀라고 말았다.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Eugene Peterson (홍병룡), IVP, 2003
우리는 때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뜻을 염두에 두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겪곤 한다.
몇 주전 토요일 아침 성경공부 모임에서 요한복음 3장을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서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신 '아노텐'라는 단어가 '위로부터' 혹은 '다시'의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고, '프뉴마'라는 단어도 '바람' 혹은 '성령'을 모두 나타낼 수 있다는 내용을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이란 단어를 왜 사용하셨을까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한 반면 다른 몇 멤버는 '세례'를 염두에 두신 것 같다고 하면서 토론이 계속되었다. 정말이지 한참을 이야기한 후에 알게 되었는데, 나는 '세례'를 '성례로서의 세례'로 이해하면서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고, 한 자매는 '거듭남으로써의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내 주장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같은 이야기를 왜 이렇게 힘들게 했는지, 그건 단어의 정의를 일치시키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똑같은 단어가 사용된 하나의 표현이 그 정의가 다를 경우, 정반대의 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진피터슨의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에서 사용된 '탁월함'이란 단어가 그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흔히들 '크리스천은 탁월함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할 때의 '탁월함'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감으로써 가지게 되는 탁월함을 이야기하곤 한다. 반면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탁월함'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써 "단조로운 도덕적 습관에서 깨어나고, 그저 하잘것없는 일로 바쁜 일과를 툭툭 털고 과감하게 최상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는 삶이다. 피터슨은 그런 대표적인 인물로 예례미야를 이야기한다. 예레미야의 삶 가운데 세상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탁월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데도 말이다. 요시야 개혁의 시기에 참 개혁을 외쳤던 선지자,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아스돗에 다시 땅을 구입하며 하나님의 회복의 메세지를 전했던 선지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늘 미움을 받았던 선지자, 그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일상속에 묻혀있는 삶을 딛고 일어나는 하나님의 탁월함을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초창기 작품 중의 하나인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는 이런 예레미야에 관한 이야기이다. 많지 않은 예레미야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 정황과 문맥에 대한 피터슨의 탁월한 묵상이 우리로 하여금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엿보게 한다.
유진피터슨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도 이런 묵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이미 여러 책들에서 주장했듯이 시와 소설을 즐길 줄 알아야 할텐데, 나에게 있어 시와 소설은 여전히 멀기만 하니 어찌하겠나...
"바울과 예수", F.F. Bruce (이길상), 아가페출판사, 1992
그냥 그렇다고 덮고 넘어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될 때가 있다. 음...
바울은 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 않았을까? 20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예수를 새롭게 구성했을까? -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주제같기는 한데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묵상하고 공부하면서 의아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자료가 상당부분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가 하나님나라를 향하고 있고, 예수님의 설명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바울의 서신들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주제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바울의 가르침 속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이 깊숙히 녹아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보수적 신학자로 알려진 F.F. Bruce의 "바울과 예수"를 손에 들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전문적인 책은 아니기에 나의 초기 궁금증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바울과 예수의 일치점에 대한 보수 진영의 주장을 어렴풋이는 알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바울과 예수의 차이점의 원인을 하나님 나라의 용어로 풀자면 이렇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인 긴장성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 'Already, but not yet'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두 봉우리 사이의 긴장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이 두 봉우리가 모두 도래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신 것이다. 반면, 바울은 그 중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봉우리는 넘어서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의 중간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과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는 어느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설명을 위해 바울이 받은 전승과 계시의 차이점, 예수와 바울의 칭의에 대한 공통적 가르침, 그리고 윤리적인 가르침에 있어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성경의 증거를 들어가며 차분히 설명한다.
아직 내가 가진 의문에 확답을 찾지는 못했다. 막연한 방향만 알았을 뿐... 이제 관련된 책들로 좀 더 여행해야만 할 것 같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Leslie Newbigin (홍병룡), IVP, 2007
레슬리 뉴비긴의 책을 읽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을만큼의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지만, 결론은 놀라우리만치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IVP에서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소개한 네번째 책인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은 이미 다원주의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진 그야말로 클래식이다. 이곳에서 더 이상의 요약을 적일 필요가 없을만큼 많이 알려진 다원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논리를 담고 있다. 이전의 매끄럽지 못했던 번역도 좋아지고, 편집마저 수려해져서 책을 읽는 재미를 더 해 주었다고 할까. 다원주의에 대한 대항논리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과 '가치'를 통한 설명 등 전형적이지만 명쾌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다원주의 사회의 대안으로써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내세우는 담대함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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