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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출간된 책 한권을 소개한다. CCM 아티스트인 마이클 카드의 ‘애가’(A Sacred Sorrow)이다. 번역은 ‘많은물소리’ 편집자인 황병구씨이다. 다음은 그 책의 일부이다. 

“주일 아침 나는 회중 가운데 서 있다. 방금 시작된 예배는 곧 ‘무르익는다.’ 내 곁에선 내가 알고 또 신뢰하는 사람들이 경배의 경험 속으로 ‘들어간다.’ 몇몇은 손을 든다. 모든 회중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니기에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눈을 감는다. 나를 둘러싼 이 사람들은 모두 내 친구이자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이다. 이들은 내가 도달해 보지 못했고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깊은 곳까지 달 수 있는 이들이다. 20분쯤 지나면 경배의 시간은 마무리된다. 내가 느낀 것은 너무 오래 서 있어서 생긴 다리 통증뿐이다. 우리는 모두 앉아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한다. 

지금 이런 사실을 독자들 앞에 시인하는 것이 내겐 참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주일 아침마다 역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비로소 자리에 앉을 때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아무에게도, 특히 하나님께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반갑게도 이제야 끝났군!’ 여전히 다리에 통증을 느끼며 좌석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사막에서 혼자 한참을 헤맨 느낌이다. 군중 한가운데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예민한 외로움이다. 그 사막은 역설적으로 파릇파릇하다. 다른 이들의 예배로 인해 새순이 돋아났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동일하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치밀한 교제를 함께 나누었던 이들 한가운데서 나는 혼자 격리된 느낌이다. 그들은 내 주위에서 기뻐하며 생수를 마시지만 나는 암당하고 좌절스러운 갈증 속에 남겨진다.”

이 글은 경배와 찬양에 대한 마이클 카드의 예배 경험담이다. 동감이 되기도 하지만, 게 중에는 "마이클 카드 같은 훌륭한 CCM 찬양사역자에게 어떻게 경배와 찬양 시간이 지루할 수가 있지?"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종종 백발이 성성한 어른들이 오히려 젊은이들 보다 더 신나게 찬양한다. 그런가 하면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모던 워십보다 전통 예배의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이나 조용한 찬송가를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마이클 카드는 나중에 자신의 실수를 고백했다. 

“나는 속으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꾸며내고 있다고 정죄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런 친밀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던 것이 죄라는 것은 물론이고, 내 판단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많은 이들이 깊고 진정한 예배에 들어가고 있었다.”

인간은 진실, 가치와 같은 본질의 문제에는 의외로 관대하면서 외형, 스타일과 같은 비본질의 문제에 목숨을 거는 경향이 있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진정성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가의 이슈가 아니다. 형식과 스타일의 문제도 아니다. 흑백 논리로 따질 수 없는 본질의 문제이다. 스타일과 형식, 음악과 문화를 뛰어넘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예배의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에 타 없어져도 끝까지 남는 것, 아무런 예배도구가 없고, 아무런 형식, 심지어는 음악이 없어도 붙잡아야 할 마지막 한 가지 본질,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장엄하고 거룩한 형식의 전통예배라 할지라도, 첨단 멀티미디어와 완벽한 음향, 미디어 시스템을 갖춘 현대예배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었다면 헛것이다. 예배 후 그날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 싶은 아무런 열망이 없다면 죽은 예배다. 기독교 최고 가치인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한지 10분도 안 되서 식당에서 먼저 좋은 자리 잡으려고 다툰다면 영적 분열 증세이다. 하나님보다 찬양팀의 화장, 옷맵시, 설교자의 억양, 머리 스타일, 성가대의 곡 스타일, 재미있는 광고만 더 머리에 남는다면 장례의식에 불과하다. 그날 회개한 죄 문제에 대해 결연한 의지로 돌아서겠다는 열망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가짜 예배이다. 예배 때 열정적으로 부른 찬양 가사와 6일간의 생활이 전혀 다르다면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는 결단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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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다 2009/07/29 1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배 때 열정적으로 부른 찬양 가사와 6일간의 생활이 전혀 다르다면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는 결단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아니다." 너무나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최근에 어노인팅 대표 박철순 간사가 안식월을 맞아서 저희 집에서 1주일 정도 머물
습니다. 덕분에 한국에 있을 때도 갖지 못한 진한 교제를 10년 만에 누렸습니다.
지난 20년간 예배사역의 현장 밑바닥부터 오직 예배 하나로 달려온 그의 삶이 오늘의
어노인팅을 있게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한국의 예배찬양 운동이 지역교회 현장보다는 패러 처치 중심인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늘 있었니다. 예배신학은 지역교회 예배의 특징을 공동체적 영성으로 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예세미나, 컨퍼런스 주제들이 예배자의 개인적인 삶이나 예배의 본질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7년간 언투유 예배사역은 공동체적 영성과 사역의 체질을 회복하는데 주력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박철순 간사와의 만남을 통해 개인, 공동체를 포괄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예배 언어에 눈을 떴습니다. 그 이후 제가 쓴 예배 곡의 가사들은 예배의 본질에 다가선 언어들로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곡이 오늘 소개하는 ‘주의 성로 가는 길’입니다.
 
최근 우연히 2005년 1월에 쓴 ‘기쁨’이라는 시를 찾았습니다. 주일 찬양 프로그램 디자인을 하면서 쓴 시였습니다.
 
“주의 성소로 가는 길, 주께 예배하는 시간, 주께 다가가는 시간, 주의 말씀 듣는 시간,
주를 묵상하는 시간, 주가 베푸신 잔치에 참여하는 시간, 그 날개 그늘아래 거하는 시간...
(중략) 이 모두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의 기쁨입니다.”
 
지나간 시를 묵상하며 문득 지난 10여 예배사역의 현장에서 경험한 예배의 기쁨들이 하나 피어올랐습니다. 보통 곡을 쓸 때 제 영혼을 뒤흔든 말씀 또는 경험에 의해 영감이 떠오릅니다. 이번에는 시의 첫 줄인 ‘주의 성소로 가는 길’ 한 문장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기쁨이 새로운 예배언어로 물 흐르듯 흘러 나왔습니다.
 
최근 미국 경기침체가 갈수록 심화되면서, 한인들의 재정적 압박감은 어느 때보다 무거워졌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실물경제는 교우들의 삶의 현장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교회도 함께 힘겨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이 주는 무거운 짐과 개인적인 고뇌의 마음을 모두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곡이 이틀 만에 탄생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이나 사역 현장에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의 사귐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예배 언어들이 풍성하게 개발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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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속에서
영주권 분실로 귀국 일정이 한 두주 늦춰진 붕뜬 상황에서
사랑하는 교회와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10년의 세월이 주는 단절감에 어디를 가나 낮선 건물과 도로,
새로운 시설들이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방문 2주째 화요일, 대사관에서 기대했던 출국 일자 답변을 듣지 못해 낙망해 있던 날...
정신없이 바빴던 지난 2주 만에 저녁 약속 전 두 시간 넘는 여유가 있었고
허탈한 제 발걸음은 인근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재미있는 영화 제목들이 눈에 띄었으나 다 바람 같았습니다.
 
무엇을 볼까 10여 분간 씨름하다가 표사는 줄에도 섰지만
결국 마음이 내키질 않아 포기하고 바로 옆에 있는 영풍문고로 향했습니다.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이다가 아주 작은 책 하나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인재연습"이라는 고전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주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수 많은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로렌스 형제의 편지 내용입니다.
이 책을 들고 서점 안에 있는 작은 커피전문점 구석에 앉아 읽어 내려갔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보통 삶이 최고조에 있을 때나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만
분주한 집안 일, 지친 사회 활동,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
심지어는 교회 사역이라는 종교적 활동 속에서도
일에 파뭍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렌스 형제는 수도원 한구석에 있는 허접한 주방일을 십 수년 하면서
바로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주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 시간이 다른 시간과 다르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나 일상의 모든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읽어 내려가다 제 마음을 때린 구절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을 시작할 때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철저하게 살피고 돌아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모든 멸시를 받아 마땅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도 없으며
온갖 불행과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해도 마땅한 존재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는 건강을 잃고 내적, 외적으로 몹시 괴롭겠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케 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차후에 사람들로부터 괴로운 일이나 유혹, 반대
그리고 반박을 당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 오히려 순수하게 그 일들을 감수하고 감당해야 한다." (p. 52,53)
 
허탈감에 정신줄 놓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선택한 영화관람 발걸음...
한국 오면 영어의 스트레스를 벗어나 편하게 한국 영화 하나 보고 싶었던 작은 바램...
그것 마저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께서 제 영혼에 맺혔던 앙금 하나를 풀어주셨습니다.
 
지난 10여일간 한국 땅의 예배회복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면서 드러난 열매들을 보면서
제 안에 의로운 삶, 거룩한 삶에 대한 일종의 영적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토록 주께 헌신하는 나름 '의인'의 간절한 바램을 외면하시고
왜 이런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있었는데
로렌스 형제의 이 평범한 문구 하나에 제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높아졌던 제 마음을 겸손케 하시는 성령의 깊은 터치를 경험했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추구처럼, 소란스럽고 복잡한 일상의 한 커피전문점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채워진 눈물의 은혜를 겸험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바쁘고 급한 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색다른 은혜의 시간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CCM 듀엣 좋은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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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 가을이면 교우들의 당면 과제, 교회의 필요 등을 고려하여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들이 특새의 주제를 고르기 위해 고심합니다. 특별히 올 가을은 ‘전 세계 증시 공황상태’, ‘금융공룡 리먼 브러더스의 부도’, ‘1930년 미국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한국 상황도 ‘환율 폭등’, ‘코스피, 코스닥지수 연중 최저점 경신’, ‘주가 18년 공든 탑 1년 만에 무너지다’, ‘실물경기침체’ 등 연일 최악의 보도가 미디어를 장식해 왔습니다. 그 영향으로 미주 한인교회들 마저 헌금이 급감하는 등 ‘불황 찬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맞은 특새의 주제는 의외로 쉽게 결정되었습니다. 처음 이 주제가 추천되었을 때에 예년과는 달리 모두들 이견 없이 찬성했습니다. 주제는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근거로 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입니다.

보통 한빛지구촌교회 특새 주제는 잘 알려진 찬양 곡 제목과 연결되어 결정되곤 합
니다. 예를 들어 “너는 내 것이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약한 나로 강하게”, “주만 바라볼지라” 등 모두가 잘 알려진 찬양곡 제목들과 동일하지요. 매일 새벽마다 통일된 주제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동일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교우들은 일주일 내내 진한 은혜의 감동에 젖어 들곤 한답니다.

이번에도 ‘부르짖으라’는 주제의 곡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적당한 곡이 없었습니다. 70년대 옛 복음성가인 “부르짖으라 내 응답하리라”는 곡이 그나마 알려져 있었으나, 너무 옛 스타일의 조용한 곡이라서 특새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또 뜨인돌과 최덕신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라는 곡은 말씀을 그대로 표현한 수준 있는 곡이지만 이른 새벽 교우들이 소화해 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바로 곡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주변의 몇몇 사람에게 기도부
탁을 했습니다. 본래 강한 영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곡을 쓰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든든한 기도의 후원이 필요했습니다. 하루 정도 예레미야 33:2-4절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다녔습니다.

다음날 찬양 준비하던 늦은 저녁, 후렴 부분의 멜로디가 떠올랐습니다. 평소 제가 쓰는 화성이나 멜로디 스타일이 아니어서 쓰고 나서 무척 생소했고, 또 불러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멜로디가 맴돌아서 후렴을 중심으로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로마서 8:35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극한 상황이더라도 예수의 사랑을 끊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말씀을 근거로 1절 가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내게 닥쳐와도 나는 쓰러지지 않네.
누구도 우리를 주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네.”


이는 어찌 보면 다급하기까지 한 주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의 현대적 상황을 표현하는 가사였습니
다. 수천 년 전의 텍스트(text)를 오늘의 콘텍스트(context)화 하는 것이 설교론의 핵심 이슈인 것처럼, 곡을 쓰는 저에게 성경구절의 현대적 적용은 작곡할 때마다 항상 우선적인 과제입니다. 곧 2절이 흘러 나왔습니다. 조금 더 적극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날 배반하여도 예수는 변치 안네.
우리도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승리해.”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인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를 중심으로 후렴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후 문맥을 묵상해보니 사실 이 말씀을 더욱 권위 있게 하는 말씀은 2절이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이 말씀을 여러 번역본으로 비교정리해서 “땅을 만드신 주, 세상의 주관자, 통치하시는 왕, 그 이름 여
와”로 정리되었고, 이 가사를 강조하기 위해 브리지(bridge)로 표현했습니다. 브리지 부분의 음악 양식은 행진곡 풍으로 했습니다. 이 브리지의 가사 초본을 보신 장세규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아이디어로 동일한 멜로디에 가사 “나를 지으신 주, 내 삶의 주관자, 다스리시는 왕”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러면브리지는 자연스럽게 “주가 말씀하시네~” 고백으로 전조 되어 한층 고조된 후렴으로 연결이 되도편곡을 했습니다.

결국 많은 분들의 도움과 관심, 기도로 완성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주제곡에 대한 반응이 의외로 좋습
니다. 특히 가사에 큰 힘을 얻는다는 반응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렇게 힘든 때에 이 찬양이 한국교회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모 집사님의 격려도 감사했습니다. 아무튼 이 곡으로 이번 특새는 주제 찬양도 없는 썰렁한 특새로 남지 않아도 되었고, 더 나아가 많은 분들의 기도로 우리의 고백과 상황에 맞는 찬양으로 매일 새벽을 깨우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지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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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코스타에서 자주 들었던 문구 중 하나가 '영적 낭비'이다. 30명이나 되는 많은 강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영적 포텐셜에 비해 일주일 동안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주강의 한번, 또는 강의 몇 번에 상담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것도 사례를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비, 가족 등록비까지 책임지고 자비량으로 섬기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일리가 있는 말로 들린다. 실제로 한국, 연변,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오신 강사들의 경우는 거의 10일 정도가 강의 몇 번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이것을 낭비가 아닌 거룩한 투자로 본다.

사도행전 8:26이하를 보면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신다. 명령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사막 길로 무작정 떠나라는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고 있었고,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고, 아직 회심 이전의 사울은 보이는 교회마다 파괴하고 성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기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의 복음전도 사역은 점점 확장되고 있었으나,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대의 위기였다. 그런 긴급한 상황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사막 길로 무작정 떠나는 것은 시간낭비는 물론, 뻔뻔스러운 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태풍으로 교회가 침수되어 정신없을 때 교회의 지도자가 갑자기 성령께서 지시하신다고 먼 시골로 떠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빌립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다. 사막 길에서 당시 에티오피아 여왕 밑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큰 권세를 지닌 내시를 만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까지 주게 된다. 이 내시는 분명 에티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평신도 선교사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빌립도 나타나, 카이사랴에 이르는 모든 고을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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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에 못 미친다. 이사야 55:8,9에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고 했다. 코스타에서는 4번의 저녁집회가 있다. 미주에서 경험하기 힘든 천여 명의 예배자들이 드리는 감격적인 예배의 향연이 매일 저녁 드려진다. 1,000여명이 뛰면서 드리는 열정적인 찬양과 선포되는 복음의 메시지를 상상해보라. 그 안에는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직업과 소명, 평신도와 목회자, 교파와 교회, 세대와 문화를 초월한 진정한 찬양과 예배의 축제가 드려진다. 진정 천국의 모형 아닌가? 이 예배를 통해 올해도 100여명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200명 넘게 2년 이상 단기선교에 헌신했다. 그뿐이 아니다. 성인 참석자 반이나 되는 500여명의 학생들이 강사들과의 일대일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 최고의 상담실이 코스타 내내 운영된다. 우리 인간 편의 '낭비'가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결실'로 바뀌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 유학생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 이처럼 1세대가 자신의 재정과 시간을 낭비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눈물과 땀과 사랑을 투자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결과,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포기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미지의 땅을 향해 회중의 5분의 1 자리를 박차고 무대 위로 나아가는 장엄한 광경을 상상해보았는가? 2006 현재 전 세계 16 지역 , 남미, 러시아, 남유럽, 북유럽, 토론토, 밴쿠버, 시카고, 인디아나 폴리스, 북경, 상해, 동북차이나, 일본, 대만,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에서 '거룩한 영적 낭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23 ,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영적 낭비'를 감히 꿈꾸고 이를 실행에 옮겼던 우리의 1세대 영적 선배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영적 축제는 지금까지 이 땅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그분들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이유정 목사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좋은씨앗(C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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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윌로우크릭교회?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평가는 지나친 감정적 대응 아니면 무비판적인 수용 등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옥성호의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 교회를 전형적인 마케팅교회로 정면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이 책에 대해 비평의 잣대로 반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가 ‘마케팅에 물든 교회’로 규정하는 기준이 ‘부족한 포스트모더니즘 이해’를 근거로 한다는 아쉬움도 크게 반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용감한 지적이 최근 윌로우크릭교회와 네트워크 교회들이 그들의 사역 철학과 프로그램에 대해 수년간 연구한 결과를 세상에 발표한 ‘Reveal: Where Are You?’(2007)라는 책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교회가 수많은 재정과 열정을 들여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봉사활동을 잘 만들어(create) 놓으면 회중은 여기에 참여(participate)함으로 성숙해질 것이라는 이 교회의 사역 철학이 회중의 삶의 현장에서는 생각만큼 열매가 없었다는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이러한 비평의 시각에 대해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이 책(Reveal..)의 의도는 윌로우크릭교회의 핵심 타겟 회중인 ‘해리와 매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크리스천이 된 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숙 프로그램에 대한 전략적인 방향전환일 뿐, 이 교회의 존재기반인 구도자예배 사역 자체를 뿌리 채 부인하는 ‘실패’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안타깝게도 옥 형제의 비판의 목소리에는 30년 목회 현장에서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눈물과 피땀흘려가며 회중과 씨름해온 한 탁월한 리더의 헌신적인 열정에 대한 존경과 격려는 없고, 실수하고 부족한 리더에 대해 비난하는 태도만 배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했다”>
한편, 부끄러운 교회의 치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급비밀 내부문서를 백일하에 드러낸 윌
로우크릭교회의 핵심 리더십(그렉 허킨스와 콜리 파킨슨)의 결단도 놀라운데, 이 연구 결과에 대한 빌 하이벨스의 반응은 더더욱 존경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 보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인정했습니다. 작년 리더십 서밋(Leadership Summit)에서 전 세계 교회지도자 수만 명 앞에서 “우리가 실수했다(mistake)”고 겸허하게 고백했습니다. 중년의 자신은 물론 교회를 향한 자명종(wake-up call)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한국 인터넷 언론은 이를 ‘실패’로 보도했는데 지나친 과장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초대형교회 담임 목사가 이러한 고백을 진실되이 할 수 있다는 것, 실수를 인정하며 과거를 지워버리고 근본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윌로우크릭교회의 열린 태도를 보면서 적어도 그동안 이들이 성장을 위해 일부러 마케팅 수법을 이용함으로 거짓된 가설(assumption)에 물든 비난받아 마땅한 교회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고 확신합니다.
 
<무너지는 구도자와 신자 사이의 벽>
이들은 이미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회중의 변화를 감지하고 예배의 방향을 조정하기 위한
내적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부터 이 교회 뉴커뮤니티 워십리더 섬겨온 커트 코필드(Curt Coffield)에 의하면, 실재로 현재 윌로우크릭교회에서도 '구도자 예배' 참석자들과 주중 '신자들의 예배' 참석자들 사이의 벽이 차츰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참석하는 회중의 분포도가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교회에 대한 실망과 상처가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 구도자에서 교회에 대해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포스트 베이비부머 세대 구도자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에 따라 윌로우크릭의 예배 정책이 향후 수년간 어떤 형식으로 바뀔지 매우 기대가 됩니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예배 회중의 구성원을 말할 때, 우리의 회중 스펙트럼은 과거와는 명백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는 온전한 신자만이 가능하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비신자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구호는 복음전도를 가로막는 말로써 위험수위가 높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들이 절대로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예배당 문 앞에서 저지하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모겐달러(Morgenthaler), 던(Dawn), 올슨(M. Olson), 웨버(R. Webber) 암스트롱(R. Armstrong) 등 많은 예배학자들이 ‘진정성 있는 예배에 비교인들이 더욱 관심을 갖는다’는 의견을 지지합니다.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 디렉터, 좋은씨앗(C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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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애틀 평강교회 집회를 마친 다음날, 오승현 전도사와 함께 후배 피아니스트 안선 집을 방문해서 오랜만의 반가운 회포를 풀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숙소가 넓은 만 건너편에 있는 관계로 페리호를 타고 건너 야 했습니다. 가는 길 앞차들이 속력을 내지 않아 겨우 제 시간에 도착했는데 이미 만 차(boat is full)였습니다. 코앞의 뱃길을 포기하고 먼 길을 돌아와야 했지요. 문득 시애틀에 사는 모 교회 선배 원순이 전도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선배는 1년 전에 폐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시애틀에 오면 문안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돌아가는 길목 인근에서 15분 즈음 남쪽에 살고 있었습니다. 스케줄 상 이날이 아니면 방문이 불가능했기에 바로 달려갔습다.
 
금만 캐라
마중 나오신 선배 아버님의 갑작스런 접대로 저녁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저의 모교회인 서울 문화촌 소재 홍성교회에서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다고 자식들까지 집에서 내 쫓는 무서운 분이셨지요. 그런데 그 분이 91년도에 미국에 와서 너무 심심해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3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까지 만도 여전히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셨는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딸의 아픔을 가까이 겪으면서 신앙이 연단되셨는지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말도 안 되는 목사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장로들도 있어. 성도이건 목사이건 자기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러나 이런 것에 좌우될 필요는 없어. 목사님이 설교를 못해도 불평할 필요가 없어. 금을 캐러 갔으면 금만 캐야지 돌까지 캘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설교를 엉으로 해도 그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금이 있거든.”
 
머리에 망치를 한 대 맞는 듯 했습니다. 그토록 복음을 핍박하던 과거의 모습은 온대간대 사라졌습니다. 암 투병 중인 딸의 아버지로 보기에는 그 고백이 너무 건강하고 힘찼습니다. 70대 노 성도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씀마다 제 심부를 찔렀습니다.
 
폐암을 이긴 여장부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선배를 만났습니다. 처음 얼굴을 본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한 모습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처음 폐암을 발견해서 의사가 개복했을 때는 이미 폐의 좌우에 모두 번져서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까지 갔었습니다. 의사는 2달 안에 죽으니 집에 가서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선배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답니다. 그녀의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나는 살꺼야!”였습니다. 몇 번의 진단을 통해 의사는 폐가 돌처럼 단단해져서 더 악화 되었다는 말만 반복했답니다. 그러나 선배의 내면의 소리는 단호했습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나는 살아야 해” 그래서 24시간 찬양과 기도하는 IHOP이라는 곳을 찾아가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주위의 교회와 한국의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서 기도로 동참했습니다. 3개월 뒤, 믿음의 기도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의사들이 놀랐습니다. 아주 작은 혹 하나만 남고 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순간순간 써내려간 수기가 200페이지가 넘는다니 역시 죽음의 그림자는 선배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헤어질 때 오히려 방문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선배의 목소리는 정상인강인한 듯 힘이 넘쳤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
이날의 독특한 경험 때문인지 숙소로 돌아와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선배를 만나러 가면서 내심 예상했던 분위기는 어둡고, 자조 섞인 병실의 위로, 격려 모드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문안 갔던 우리가 도전받고 돌아왔습니다. 오 전도사의 말처럼 ‘페리호를 타지 못한 뜻’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거꾸로 사는 삶입니다. 편안한 뱃길 대신 돌아가는 길이 오히려 회복과 충전의 길이 되었습니다. 노년의 주름이라도 복음의 생명력에 젖을 때 오히려 청년보다 더 예리한 분별력을 발휘합니다. 죽음의 그늘도 기도의 집중력에 노출될 때 그 사기(死氣)를 잃고 정상인보다 더 활기찬 생기를 뿜어냅니다.
 
두 분의 삶은 거꾸로 사는 삶의 산 증거입니다. 선배의 아버지... 비록 병이란 병은 온몸이 다 지니고 있는 아내와 함께 넉넉지 못한 삶을 사는 노년의 나이이시지만, 복음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자유는 세상 누구보다 부요해 보입니다. 원순이 전도사님... 비록 폐암 말기를 선언한 의사들의 사형선고 앞에 무능력한 중년의 여인이었지만,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고백한 불굴의 투지는 이미 세상이 이길 수 없는 승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제 눈 앞에는 외로운 노년의 위기는 간대없고 신앙에 올인하신 어르신의 단호한 낯 빛, 가장 극심하다는 폐암의 고통을 참아내며 하나님의 치유의 강에 온 몸을 내어던진 선배의 여장부다운 패기, 그리고 이미 99%의 암을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꿈꾸는 그 생명력 넘치는 눈빛이 아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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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호 2009/02/14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이글을 읽고 많이 도전하고 모든폐암덩어리들이
    주님의 일을 하고 천국의 맛을 보여주기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실감하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한국 광우병 사태를 보면서 마음이 찹찹합니다. 우왕좌왕하는 정부도, 초등학생까지 참여하는 국민적 촛불시위도, 종교계의 대처 그 어느 곳에서도 가슴 시원한 해법이 보이질 않습니다. 생산적인 논쟁보다는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 ‘천민 민주주의’ 등 유희적 논쟁으로 매체가 들끓습니다. 비난을 위한 비난의 소리가 더 깊은 불신의 병을 낳을까 염려됩니다. 광우병을 둘러 싼 몇몇 입장에 묘한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시민들과 야당, 국민대책본부가 여당과 정부, 대통령을 향해 쏟아내는 성난 목소리, 그 속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졌습니다. 플래카드마다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비난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질책을 넘어 인격 모독입니다. 대통령을 무슨 길거리 촌부 취급합니다. 참여정권을 심판한다는 국민의 힘에 의해 압도적 표차로 뽑힌 대통령이 100일도 안 되어 그 국민에 의해 짓밟혔습니다. 국민의 권위가 국민에 의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국민의 생존권을 책임지는 나라의 권력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 생명이 담보가 될 소지가 있는 소고기 협상 과정에서 국민을 배려한 최선의 신뢰적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터지고 촛불시위가 일어났을 때 국민의 입장에서, 민초의 마음을 읽으려는 낮은 자세도 없었습니다. 국정의 책임자들이라면 적어도 국민들이 ‘국민의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을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느낌이 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 크리스천 정치인이나 목회자가 ‘사탄의 세력’ 운운하는 것도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비 신앙인도 인간의 생명 그 자체로 존엄합니다. 긍휼과 사랑의 언어로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의 모든 현상을 성속의 이분법적 태도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 어느 종교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100년... 최근 사회에 기독교 불신과 안티세력이 급속도로 커져가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반기련 등 수십 개에 달하는 안티 기독교 단체들이 ‘한국사회에 패악질을 일삼는 기독교를 박멸’하겠다고 도전합니다.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를 한국교회 총체적 난관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자정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 이것은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 철학이며, 교육의 핵심개념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인간의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존엄합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형수라도 형틀에서 마지막 죽기 직전의 순간만큼은 엄숙합니다. 바로 생명 그 자체가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80년대 민주화 운동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를 기치로 삼고 달려왔습니다. 이제 그 민주주의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성숙이 무엇인지 돌아볼 때 입니다. 80년대와 사뭇 달라진 좌파우파의 논쟁도, 물고 뜯기가 끝없는 국회의 야당과 여당도, 권력의 추가 정부에서 국민에게 이동하는 시국현장에서도, 노동자와 사주 사이의 협상 테이블에서도 인간존중의 언어와 소통의 미는 없고 비난과 반목질시만 난무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역행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12년간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당시에는 혈루증을 부정한 병으로 취급했기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생을 마쳐야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말합니다. “이제 당신은 안 돼요! 이 병은 더 이상 치료 불가능합니다!” 병자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끊임없이 괴로움을 주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말합니다. “당신은 부정한 여인이요!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마시오.” 종교적 기준으로 가차 없이 처단합니다. 이처럼 주변에서 들려오는 불가능과 절망, 비난의 소리에 갇혀 있던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문을 박차고 무리를 뚫고 예수께 가까이 가서 그 옷자락을 만진 순간 즉시 혈루병의 근원이 말랐고 병이 나았습니다. 근본적인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12년 동안 짓밟혀 있던 이 여인의 가치는 그 짧은 순간 예수 안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인간의 외형적 껍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살아있는 존재 그 자체로 충분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비난, 불신, 정죄, 절망의 소문이 아닌 예수의 소문이 필요합니다. 이름 난 대형교회의 소문이 아닌 예수의 소문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그 어떤 정치적 입장, 이데올로기, 학술적 권위, 종교적 허울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존재의 회복을 열망하는 솔직한 한 생명이면 충분합니다. 이 예수 복음은 개인과 사회, 국가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와 신념의 근본적인 회복과 변혁을 가능케 합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이번 광우병 사태의 위기가 오히려 실종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이유정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CCM 남성듀엣 좋은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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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렌 첵이라는 여성 예배인도자를 소개합니다. 현재 전 세계 예배찬양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호주의 힐송쳐치의 예배 담당 목사입니다. 그녀가 작곡한 “내 구주 예수님(Shout to the Lord)”이란 곡은 1993년 처음 발표되어 전 세계 50여개 이상의 음반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녹음되었습니다. 그가 속한 힐송교회에서 해마다 제작되는 경배와 찬양 실황 음반은 순식간에 전 세계 교회에 보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그녀의 젊은 시절이 문득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쓴 책을 뒤져보았더니, 달렌의 시작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단지 주님을 알기 위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커피를 타고, 심부름하고, 무슨 일이든지 할 일이 있으면 가리지 않고 하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힘을 다해 자신의 삶을 교회에 헌신한 한 자매에 불과했습니다. “내 구주 예수님”은 그런 그의 헌신의 여정에서 너무나 지쳐있던 상황에서 탄생한 곡이랍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그곳에 자신의 시간과 관심, 에너지와 돈, 그리고 사랑과 헌신을 쏟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달은 그녀는 결혼하고 2명의 자녀를 키우면서도 교회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원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는 오토바이 판매점을 하며, 라디오, 텔레비전 광고, 배경음악 등 닥치는 대로 노래하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런 삶에 지치고, 좌절을 느끼던 어느 날 아침, 은행에서 잔액 초과 고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드리기로 약속했지만, 내 꼴 좀 보세요. 하나님, 더 이상 하루도 살 수 없어요.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어요, 하나님 당신의 약속은 다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런 숨 막히는 좌절감 속에서 갈급한 심정으로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시편 97~100편에서 강력한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20분 만에 흘러나와 완성된 곡이 바로 "내 구주 예수님" 입니다. 당시 이 곡을 들은 담임 목사는 이 곡이 전 세계에 불릴 것을 예언했고, 결국 그렇게 실현되었습니다. 비록 달렌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과정에서 고통과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녀를 보석과 같이 연단하셨습니다. 결국 그녀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예배사역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제가 한빛지구촌교회에서 풀타임 예배디렉터로 헌신한 지 벌써 6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배사역에 헌신한 봉사자들도 30명에서 160명으로 늘어났고, 팀도 30여 팀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역에 뛰어든 각 사람이 어떠한 헌신을 주님께 드렸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항상 근본으로 돌아가자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매주 남보다 일찍 나와서 남보다 늦게 교회 문을 나섭니까? 교회 사역을 위해 평일에도 시간과 땀을 흘려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 때문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헌신은 허공을 때리는 것입니다.

달렌이 보여 준 주님을 향한 그 순순한 사랑처럼, 각자의 헌신의 모양은 달라도 제각기 사랑의 분량을 담아 드리는 거룩한 지역교회 봉사 사역의 현장마다 눈물과 땀방울의 증거들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노동자 1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발을 닦아 드렸을 때,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예수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막 14:9)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할 것이라며 자랑하셨습니다.

이 처럼 매 주일마다 한 곡을 부르더라도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의 찬양, 주일학교 한 아이를 대할 때도 힘을 다한 사랑과 헌신의 봉사,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님께 드리는 자세로 임할 때, 그 상급이 하늘에 차곡차곡 쌓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헌신을 기뻐하신 예수께서 온 세상에 그 헌신을 자랑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화음이 아름답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훌륭한 교재를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질 좋은 음식을 준비했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헌신의 문제’입니다. ‘순종의 문제’입니다. ‘드림의 문제’입니다. 코스탄 여러분, 다시 한 번 기초로 돌아갑시다.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 목사, CCM 남성듀엣 좋은씨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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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4일간 수도권, 부산, 대구 등 빡빡한 일정을 뒤로하고 지독한 목감기를 휘감고 돌아 왔습니다. 너무나도 달라진 고국의 모습에 거대한 도시 속의 서투른 이방인처럼 모든 것에 어리둥절했지요. 인천공항에 1시간 일찍 입국해서 공중전화를 이용하기 위해 거의 30분을 허비했습니다. 컴퓨터 모니터 같은 화면에 전화 이외에도 각종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의 전화기인 모양인데, 나 같은 이방인들이 그 사용방법을 익히기 위해 머리 싸매고 공부를 해야 하는 한국의 공공문화가 무척 낯설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도 원색의 색감과 엄청난 양의 광고와 표지판으로 쏟아지는 정보들, 공간이란 공간은 온갖 고층 빌딩으로 채워버린 서울의 비 환경 친화적인 발전상, 서울을 중심으로 위성도시를 잇는 모든 곳마다 가득한 수 십층의 고층 아파트들, KTX 고속열차로 서울-부산을 3시간 반 만에 잇는 전국의 일일생활권화, 거미줄처럼 서울과 외곽도시들을 잊는 지하철의 위용과 그 안에서 하루 종일 쏟아내는 TV화면의 뉴스와 프로그램들, 빨강, 파랑, 초록으로 새롭게 규정된 도시 내, 도시 간 버스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들, 어느 곳을 가도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 그 속에서 어디론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들 모두가 생소했습니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부의 격차가 확연히 벌어진 작금에 서민 계급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은 신성한 공교육 현장을 무너뜨리고 무리한 사교육을 부추기는 부모들의 열기로 전국이 들끓는 현상을 보면서, 이곳이 불과 9년 전에 내가 숨 쉬고, 익숙하게 살던 바로 그 나라였나 싶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개척교회로부터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그 가운데 위성도시인 평촌, 산본을 중심으로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고 한때 제가 음악전도사로 섬겼던 새중앙교회(박중식 목사), 부산 해운대 신도시로 이전하면서 강남 이남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한 수영로교회(정필도 목사), 분당과 수지에서 수평이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불신자를 중심으로 고속 성장하고 있는 지구촌교회(이동원 목사)를 섬길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살아있는 교회성장의 생동감을 느끼면서, 다른 한 편 한국교회가 위성도시 초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신음하는 한국 사회에 미치는 교회의 영향력에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불과 3년 안팎으로 한국교회 영적 거인들인 1세대 목회자들이 대거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말은 세계적인 교회성장이란 영적 유산이 다음 바톤인 386세대에게로 넘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선배들이 본보인 희생과 공로를 인정하고, 후세를 위한 역사적 평가를 남기며,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지만, 더불어 풀어야할 숙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성장이라는 게토에 갇혀 세상과의 접촉점을 잃고 땅에 떨어진 기독교 리더십을 회복하는 일, 바로 다음세대의 역할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전망해 봅니다. 즉 우리 세대의 영적 리더십은 몇 명의 영적 거인을 재편하는 형태를 지양하고, 기독교의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미치는 가교역할을 감당할 각계각층의 다양한 전문 사역자들이 건강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할 일이 아니지요. 이것이 하나님 나라 회복의 진정한 모델이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거대 기독교 유산의 기득권 세력다툼에 휘말리지 않도록 겸허함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2주라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7년의 간격을 일순간 없애버린 고밀도 농축된 만남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감사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일가친족들, 찬양사역계의 선후배들, 디지털 컨텐츠로의 재편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크리스천 음반 비즈니스계와 일반 출판사에서 기독 출판물을 기획하는 후배들, 갑작스런 연락으로 만난 대학동창들, 중소형 교회에서 경험한 따스한 사랑과 예배의 깊이들, 그 무엇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고이 잠든 어머니의 묘소 방문과 그분께서 평소에 좋아하셨다던 음식점 방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만남들이 아직도 가슴 가득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이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봅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만남의 영향력을 회복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그날이 뼈에 사무치게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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