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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또다른 줄기, 열린 신론(Open Theism)이 주는 도전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복음주의 진영 안에 수년에 걸쳐 뜨거운 감자와도 같이 논의가 되고 있는 신학적인 논쟁을 소개한다. Open Theism, 이른바 열린 신론으로 불리우는 신학적인 주장이다. Facebook에 존재하는 열린 신론을 논의하는 이들의 페이지에 가보면(http://www.facebook.com/group.php?gid=2257680371&v=wall) 다음과 같이 열린 신론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1) God and creatures enjoy mutually-influencing relations
2) the future is partly open and God does not fully know or settle it
3) love is uniquely exemplified by God and is the human ethical imperative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많은 이에게 논쟁의 물꼬를 터준 것은 2번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일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

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하시고 미래의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인간사의 미래를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 미래의 결과가 결정될 수 있도록 미래의 결과를 아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이제껏 이해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하나님의 성품과는 맞지 않는 새로운 주장이었기에 많은 신학자들의 반론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의 D.A. Carson 교수가 쓴 What does God know and When does He know it?이란 책이 대표적일 것이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시각으로 보면 아직까지 열린 신론은 우리가 미처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어쩌면 지나치게 인간적인 각도에서 편의를 따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않은지 주의와 경계를 띄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전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신학자들의 논쟁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각기 나름의 성경적 밑바탕을 제시하면서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에 각각의 주장과 성경적인 예시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양쪽의 주장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인 견해로 이전까지는 그저 막연하게 교리적인 틀에 갇힌 하나님에 대해 암기하는 수준으로 살다가, 이제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저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할 수 있겠다.

 

여전히 저는 열린 신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지난 311일에 일본 동부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의 피해현장을 지켜 보면서, 하나님은 거대한 재난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고통을 당하는 인간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들이 열린 신론이 말하고 있는 주장들을 깊이 살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 중에 그렉 보이드라는 사람이 쓴
 어느 무신론자의 편지라는 책이 있다. 저에게는 복음 전도의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이제는 신학자이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이 29번 동안 서신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마침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감동적인 책이다.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에게 선물할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http://www.yes24.com/24/goods/2142711?scode=032&OzSrank=1)

 

오늘은 그 책에서 한 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무신론자인 아버지가 갖고 있는 질문을 접근하는 아들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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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지진과 기근을 일어나게 하시는 게냐?

 

그렉에게

 

너와 무슬림 학자와의 토론회가 잘 끝났다니 매우 기쁘구나. 할 수 있으면 테입을 하나 구해 보내주렴. 비디오테입을 보내주면 더 좋겠다. 꼭 보고 싶구나.

 

너의 지난번 편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주 여러번 읽어야 했단다. 네가 말하는 것은 내가 가톨릭교회에 다니던 시절에 하나님에 대해 배운 많은 것과 반대되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견해는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는 성경의 권위자가 전혀 아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미래를 아는 분으로 나와 있지 않느냐? 네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단 인정하마. 그 전통적 견해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너의 견해가 그저 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하구나.

 

어쨌든 너는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하지 않도록 미리 보장할 수 없는지 상당히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에는 자유에 대한 너의 견해로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견해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또다른 심각한 난점이 있다. 어떤 악들은 사람들의 자유스러운 결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나님이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직접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인데 왜 기근, 지진, 산사태, 에이즈, 기형아 등등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시지? 분명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자유의지에도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제외하고는- 비난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오직 사랑이시라면, 자신의 피조물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1989 511

너를 매우 사랑하는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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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버지께

 

지난번 편지에 늦게 답장을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이곳 베델대학에서 학기말을 지내느라 정말로 정신이 없었답니다. 먼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악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려 볼께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에 따라 결정하는 미래의 일과 행동에 대해 모르신다는 견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니며, 상당히 많은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사람들이 내릴 자유로운 결정들에 대해 미리 알지는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들에 의해서건 하나님 자신의 뜻에 의해서건 미래의 어떤 일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자유로운 행동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하나님에게도 완전히 공개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만 공개되어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창조에는 감수해야 할 모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견해가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신학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하기로는 이 견해는 매우 성경적이에요. 세세한 것들을 이야기하여 아버지를 따분하게 해드리지는 않겠지만 저는 성경속에서 하나님이 미래를 어느 정도 개방적인 것으로 여기시면서 사람들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보게 되지요. 미래는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심지어는 새로운 상황들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을 바꾸시기까지 합니다(32:14; 삼상 15:11;  18:7-10; 26:19를 보세요). 하나님이 미리 모든 사건들에 대한 고정된 청사진을 가지고 계셨다면 물론 이런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방적인 견해는 보다 인간적인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그것이 보다 성경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더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미래 전체를 알고 통제하는 하나님이라는 견해는 제가 판단하기로는 성경적인 것이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의 산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자연재해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재앙들에 대해 직접 책임이 있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세가지를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첫째로, 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통과 고난은 자연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로 인한 결과이며, 심지어 대부분의 자연 재해들로 인해 일어난 고통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더라면 최소화되거나 제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기근에 대해 생각해 보지요.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면 굶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식량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들이 필요한 양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한 이상의 많은 식량을 쌓아놓고 있는 것뿐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인들은 세계 인구의 7%밖에 안되지만 세계 자원의 절반 이상을 소비합니다. 평균적으로 후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덜 소비하는 반면, 선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더 소비한다고 합니다.

 

또 정치적 전쟁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자연적 악이 예방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세요(이디오피아의 비극은 분명 예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군비 경쟁이 없었다면, 세계 자원이 평등하게 분배되었다면, 돈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투자할 만큼 충분히 마음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방글라데시의 홍수들조차 환경과 복지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저는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중 많은 것이 언제나 자연적인 악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악한 마음들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둘째로, 우리가 이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모두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보다 못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여러가지 한계와 불완전함이 있어 보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를 받쳐주는 바위는 발끝이 채여 넘어질 정도로 단단하고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우리가 그것을 뚫고 떨어질 정도로 얇아야 하고,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물은 그 안에서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아져야 합니다. 세상은 이처럼 각각의 특성에 의존하여 유지되게끔 되어있기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존재들이 그 안에서 살 수 있지만 어떤 환경에서는 그러한 긍정적인 특성들이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합니다. 실로, 어떤 피조물의 긍정적인 특징이 다른 환경에서는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특징이 되는 거지요.

따라서 실재가 지니는 한계들은 실재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것을 본래적인 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저 매사가 그렇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을 뿐이지요. 저는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만물의 제한되고 독특한 특성과도 아주 조화롭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피조된 세상의 제한적인 특징 때문도 아니고 사람들이 원래 창조된 대로 완벽하게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닌 듯이 보이는 몇몇 자연적 악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요. 예를 들어, 기형아들은 어느 것으로도 설명이 안됩니다. 유신론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제 세번째 사항을 살펴볼께요.

 

아버지! 성경대로라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진 것만은 아닙니다. 우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영적인 존재들은 사실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보면 말이지요. 이런 생각이 아버지에게는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라는 것은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셔야 될 거에요.

 

이런 존재들을 성경에서는 천사들 혹은 마귀들이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흰옷을 입고 하프를 연주하는 날개 달린 존재나 붉은 뿔이 달리고 쇠스랑을 들고 있는 괴물을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성경에는 그런 바보같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답니다. 그들은 또한 정사권세라고도 불리지요. 그 말은 구체적인 실체이기 보다는 영적인 세력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줍니다.

 

어쨌든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이해는 이러한 실체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이고 자유로우며, 또한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자유를 악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영적 세력들, 굳이 말한다면 마귀들은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선한 것에 대적하는 전쟁 상태에 있으며, 지구는(아마 다른 곳에서도 역시) 그들의 전쟁터입니다. 성경에는 이들의 사랑할 수 있었던 잠재력이 인간의 잠재력을 훨씬 능가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뚜렷한 증거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여 그들이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력 역시 훨씬 더 컸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들어 보셨겠지만 사단은 한 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루시퍼였습니다. 그 말은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희석되지 않은 악입니다. 그는 우주적인 규모의 히틀러입니다! 그의 영향과 또다른 마귀들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견해로 보면, 세상은 외부의 세력에 의해 문자 그대로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는 셈이죠. 오늘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전한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더이상 창조주만이 유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은 한 편으로는 그처럼 아름답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점차 더 악몽과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선과 악의 충돌 한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란 무관심한 채 내버려 둔다고 해서 그냥 아름다워지지는 않지만 우리가 선한 계획을 좇는 한 악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악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저의 주장은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르망디작전처럼 사탄의 일제공세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전쟁터에서는 온갖 종류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요.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은 잠재적인 무기가 되고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희생자가 됩니다. 그래서 전체 우주는 혼란 상태에 빠져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8).

 

저는 이러한 마귀적 세력들이 자연을 어떤 식으로 왜곡시키고 압박하는지를 다 알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 진상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필연적인 한계들 또한 사람들이 악한 의지에 호소함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악은 이와 같은 존재들의 의지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확신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인 셈이지요.

 

아마 이 마지막 주장은 소화하기 다소 어렵다고 생각하셨을 줄로 압니다. 저도 분명 한 때 그런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에게는 성경이 참이라고 생각할만한 무수한 이유들이 있거든요. 하나님과 대적하는 악한 영의 세력만 봐도 오직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자연적 악이 함께 양립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저에게는 또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이 있답니다. 언젠가 아버지의 질문들에 대답할 뿐 아니라 이러한 긍정적인 사항들 역시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반응을 기대할께요.

 

1989 529

소망을 가지고, 그렉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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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6년 3월

교역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 거나하게 만나 진중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화요일 아침 교역자회의 시간. 나에게는 일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시간이다. 함께 동역하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어린 2세 고등부 전도사님이 진지한 표정과 어투로 내게 질문해 온다.

‘요 즘, 주일 영어고등부 예배에 성가대 가운을 입은 성가대의 찬양시간이 뭔가 어색해서 예배에서 어떻게 순서를 배치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나의 조언을 구하는 눈치이다. 내심 충격적인 말이다. 예배에서 성가대의 위치가 위협을 받는 시대가 드디어 찾아온 것인가?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냐고 물어보는 그의 진지한 질문 앞에서, 말은 안하고 표정을 애써서 잠재우고 있었지만 나의 뇌리에서는 쉴 새 없는 질문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예배담당 목사라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 착각인데… ‘음, 일단 성가대의 역할이 예배에서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나의 질문에 본인도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였는지 쉽게 답변하지 못하는 우리 전도사님… 성가대의 역할이 축소되고 찬송가가 사라진 예배에 이미 익숙해진 세대와 직접 대면하는 일은 무척이나 생경하다.

그 사이에 나의 생각은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샛별성가대’에서 자줏빛 가운을 입고 솔리스트로 어린이 예배에서 활약하던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양떼들아 양떼들아 바람 타고 들려온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내 주는 반석이시니…’ 목청껏 힘껏 부르며 친구들과 어울리며 교회당을 누비던 어린 시절. 어린이 찬송가는 우리들에게 학교 음악시간에 부르는 동요가 줄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장르였다. 동요보다 조금 더 세련된 듯 한 화성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 어린 시절 주일학교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런데 어린이 딱지를 떼고 중고등부로 올라가면 이야기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린이 찬송가는 그야말로 ‘초딩’들이나 부르는 동요 수준의 찬송가이지 머리 큰 사람이 동요 찬송가를 부를 수 있나? 드디어 부모님이 끼고 다니시는 바로 그 찬송가가 우리 예배의 주요 찬양 목록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558곡의 통일찬송가를 살펴보면 그 많던 어린이 찬송가의 익숙한 멜로디는 다 사라지고 어린이 관련 찬송가는 달랑 4개. 청년에 관한 주제의 찬송가는 더해서 달랑 2개뿐이다. 그나마 청년 헌신예배 같은 때나 부를 수 있는 그런 찬송이다.

아 직은 경배와 찬양 운동이 활성화되기 전에 교회 중고등부 시절을 보냈던 내게 주일예배 시간의 이러한 찬송가들은 그야말로 어색함 그 자체였다. 이제 어른의 세계에 입문하는 듯 그런 마음으로 찬송가를 배우고 부르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복음성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런 찬양들로 주일예배 이외의 다른 예배모임에서 기타 들고 엄청나게 부르면서 위안을 삼던 그런 시절이었다. 최덕신이라는 이름이 세인에게 알려진 ‘주찬양 1집’ 테이프를 물리도록 들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 래서인지 몰라도 이젠 중고등부를 비롯한 모든 젊은 세대의 예배에서 찬송가의 위치는 그야말로 옹색하기가 그지없다. 우후죽순처럼 밀려든 새로운 찬양들이 이젠 ‘복음성가’라는 이름이 아니라 어엿한 예배음악으로 자리를 잡은 지 이미 오래인지라 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너무나 자연스럽고 호흡하기에 편안한 그런 새 찬양들이 이들의 예배를 가득 채우고 있다. 힐송, 호산나, 패션 등등의 외국의 찬양음악들이 나오기가 무섭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서 음반과 악보로 시장에 등장하고 곧바로 교회의 예배음악에도 진입해 오는 시대이다.

그 래서인가?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오 놀라운 구세주 내 주 예수…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여…’ 같은 찬송가들이 완전히 잊혀지는 일을 예감하는 것은 매우 두렵다. 우리 속담에 있는 말이던가?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일이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본인도 이미 기성세대에 진입하기 시작한다는 그런 징조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우 리가 잘 알다시피,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558곡의 찬송가에는 수준이 좀 떨어지는 그런 찬송가들도 꽤 있다. 그래서인지 새롭게 준비되는 찬송가에는 대대적인 찬송가의 개편이 있을 거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21세기 찬송가’를 찬송가편찬위원회에서 준비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인데 20세기가 훌쩍 지나버린 지금에도 이 새로운 찬송가는 나올 줄을 모른다. 출판에 관한 독점권으로 인한 정치적인 입김이 세서라고는 하는데… 하여간 걱정이다. 어쨌거나 이 찬송가… 그 안에는 1800년대 말의 부흥집회에서 사용된 전형적인 미국식 찬송들도 많지만 교회사의 보석처럼 빛나는 간증과 역사를 가진 그런 고결한 찬양들도 수없이 존재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작사한 시적인 찬양의 가사들과 함께 아름다운 멜로디들로 끝없는 영성의 신선한 자극을 제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찬양들이 있다. 이런 찬양들은 포기하면 안 될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이 모두 탁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Chris Tomlin이라는 걸출한 예배자가 후렴만 따로 만들어서 편곡한 The Wonderful Cross라는 찬양이 여전히 이 새로운 세대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큰 증거가 아닐까?

The Wonderful Cross (Chris Tomlin 편곡)

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

On which the Prince of Glory died

My richest gain I count but loss

And pour contempt on all my pride

See from his head, his hands, his feet

Sorrow and love flow mingled down

Did ever such love and sorrow meet

Or thorns compose so rich a crown

“O the wonderful cross, O the wonderful cross

Bids me come and die and find that I may truly live

O the wonderful cross, O the wonderful c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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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12월

진정한 찬양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열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찬양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가 부르는 찬양을 아무런 의미가 없이 흥얼거리면서 부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이 찬양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찬양을 드리는 대상보다 찬양을 받는 대상이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찬양을 드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에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성 경에서 찬양이 어디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욥기서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기초를 세울 그 때,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욥기서 38:7) 하였다고 이야기한다. 시편 136편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감사의 찬양이 적혀져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함께 한다. 그들이 찬양하고 예배를 드릴 때는 전쟁에 이길 수 있었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지 않을 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거나, 영적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찬양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구절이 거론된 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않을 때 그들은 교만해져 갔다.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찬양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메트 레드맨이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라는 책에서, 찬양의 반대는 찬양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이야기했다. ‘교만은 자신을 보라’고 하지만 찬양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야 43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역시, 그 분께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이유가 이렇게 명확한 말씀으로 있기 때문에 찬양을 드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딱딱한 모습이 될 수 밖에는 없다. 반대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크나큰 잘못을 범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열정은 찬양을 온전하게 이끌어 가는 자세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가는가? 항상 무의미하고 건조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하나님은 싫증이 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국에 있는 동안 ‘피정의 집’이라는 곳에서 침묵 기도의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3일동안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훈련을 하는 곳이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만을 묵상하고 생각하면서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낀다는 것은 나에게 참으로 큰 특권이었다. 나같은 성격의 타입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저녁 강의 시간에 수녀님이 말씀하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기도’란 주님이 저를 바라보시고 저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정의해 주셨는데, 결국 기도를 통해서 내면 세계의 질서가 올바르게 서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을 나오면서 느끼게 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란 우리의 올바른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이자 목적인, 우리의 존재됨을 근본적으로 인식함으로 행하는 당연한 현상이 찬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삶을 살면서, 그 분을 경배함으로 그 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찬양인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찬양은 우리 삶의 고백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나 자신에게도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현 대의 멀티미디어 시스템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나 할리우드의 영화들을 보게 된다면, 이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안 되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대리 만족으로 느끼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경험들은 우리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가 듣는 앨범들이나 좋은 영상들을 보면서 그것들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양으로 대처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참여하라. 삶의 고백을 나누고, 같이 있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이 받은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라. 하나님은 여러분의 고운 소리와 여러분이 연주를 잘 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하지만 칭얼거리며 여러분의 속 마음이 담긴 한 마디에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신다. 삶의 고백이 있는 찬양을 늘 생활 가운데서 만들기 시작하라. 여러분의 찬양은 하늘에 울려 퍼지는 산 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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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11월

예배안에 나타나는 찬양의 모습에는 여러가지의 종류가 있다. 아직도 어떤 분들은 찬양을 단순하게 노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사실 찬양은 노래를 하는 것 이상의 표현이다. 예배라는 단어에는 사실 찬양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배라는 단어의 원어인 “프로스케네오”라는 단어는 “경배”와 “찬양”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찬양할수 있는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방법을 살펴 보도록 하자.

많은 모습들이 특별히 시편에 많이 나왔있지만, 시편 149편에는 찬양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4가지 방법으로 나와 있다. 첫번 째는 ‘주님을 찬양하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목소리로만 찬양하는 방법을 이야기 한다. 함성이나,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을 이야기 한다.우리가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시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주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는 고백하는 것 이상을 이야기한다. 즉, 선포하고 외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백’이라는 것은 한 대상에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선포’라는 것은 여러 대상에게 자기의 뜻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포’하는 것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자 위에 계신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포 할 때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자라날 수 있게 된다.

두번 째의 방법은 노래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우리가 많이 아는 것처럼 현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여지는 방법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이기에 굳이 이야기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노래로 찬양하는 것에 수반되어지는 것은 ‘새로운 노래’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노래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새로운 노래’는 성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노래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에베소서에는 ‘신령한 노래’라고 표현되어 있는 때로는 예언적인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세번 째는 춤추며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빼앗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바로 지난 주에 이스라엘분으로 예수님을 믿는 한 목사님의 설교중에 말씀하신 부분이기도 하다. 춤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대 교회에서는 춤이라는 것이 어느 사이에 불경건한 모습으로 인식되어 진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들이 어쩌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방해의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 한번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발레선교단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실 예배인도자인 나 역시 춤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선입관이 없었기에(내가 전에 만났던 춤을 추는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순서가 진행되면서 선교발레단의 몸으로 드리는 찬양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만약에 춤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가깝게 될 수 있다고 믿어지면 그렇게 행하라.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안에서 수반되어 진다면 하나님앞에 올바른 행위가 될것이다

네 번째는 소고와 수금으로 찬양하도록 되어 있다. 즉, 악기와 기구를 동원하여서 찬양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성서적인 방법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격려가 되는 것이다. 사실상 성경안에서는 악시 사용에 대한 제한이 되어 있지 않다. 다만 악기를 사용할 때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연주하는 가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다윗이 악기를 연주할 때 악신이 떠났다고 말하는 구절배경에는 다윗이 공교하게 악기를 다루었다는 말이 숨어 있다. 연주를 시끄럽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어려워질 수 있다. 오히려 연주를 준비된 마음으로 절제해서 연주한다면 악기 연주를 통해 예배를 드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다. 일전에 중, 고등부 아이들과 예배를 같이 드린 적이 있었다. 드럼치는 아이가 드럼을 치는데, 이것은 연주도 아니고 찬양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가진 모든 스트레스를 드럼에 퍼붇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조용히 그 형제에게 볼륨을 줄이라고 말했지만, 듣지 않았기에 그 날 그 형제를 세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 형제가 어려움을 가졌겠지만, 예배안에서 악기 연주가 예배 전체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예배에 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악기 연주는 하나님안에 있는 성도들을 시험거리로 만들 수 있다. 조용하게 치고 크게 치는 것은 차 후의 문제이다. 얼만큼 준비된 마음을 갖는냐 하는 것이다. 준비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악기 연주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편을 통해서 우리는 찬양의 방법을 알아보았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았는데, 그것은 바로 조화(Harmony)이다. 사실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께 향하는 하나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때로 우리의 찬양은 연주자들이나 회중의 기호에 맞게 낮추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령한 찬양은 결코 싫증나지 않으며, 하나님을 향해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 모든 방법들이 설령 옳다하더라도 때와 장소를 구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면서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억지로 실행한다면 오히려 역 효과가 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이 훌륭한 ‘예배인도자’ 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감옥에서 ‘설교’를 하지 않고 ‘찬양’을 했을 때 옥문이 열렸던 것은 찬양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가끔 젊은 예배인도자들의 불평소리를 듣는다.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나의 가르침은 항상 동일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되 다 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대상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개인예배를 회중 예배에서 착각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올바로 받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모든 것들이 진리이지만 진리를 올바르게 진리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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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10월

현대 예배에 있어서 찬양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서는 찬양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을 했었지만 그 일들이 실제적으로 지금처럼 일어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린 것에는 틀림이 없다. 물론 아직도 그러한 교회가 있겠지만 처음 찬양인도를 하던 한국의 90년대 초에만 해도 기타를 들고 본당에서 찬송을 인도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드럼같은 악기는 보이는 곳에 놓을 수 있을만한 거룩한 악기가 아니였다.

허 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어느 교회를 가도 드럼이 없는 교회는 거의 없을 정도로 이러한 악기에 대한 생각들과 상황이 바뀌었다. 만약에 내르가 이러한 이야기를 지금의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한다면 거의 비웃음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시대와 생각들이 많이 달라졌다. 기독교인들이 듣는 음악역시 장르가 다양해졌다. 이전에는 클래식한 분위기의 찬양들이 주도하였는데, 지금은 클래식 뿐만 아니라, 락스타일과 모던한 워십 스타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말 많이 변하고 달라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이 정말 좋은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오랫만에 한국을 방문해서 여러 군데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은 늘 인도자로 있었기에 다른 인도자들이 예배인도를 하는 것도 잘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다른 예배에는 어떤 식으로 찬양이 드려질 까 하는 직업의식 비슷한 소명을 가지고 예배를 참석했다. 특히나 미국에 있기에 한국의 예배가 변형되고 있는 것을 건너서 듣기는 들었지만 실제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이번이 정말 좋은 기회였다. 놀라운 것은 한국의 예배가 전체적으로 엎그레이드가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건방지게 일개 사역자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지만, 내가 한국을 떠날 때와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불과 4년정도밖에는 안 된 시간이지만 한국교회의 예배는 참으로 수준이 높아져 있었다. 찬양역시 이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특히 좋은 젊은 예배와 찬양인도자들이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세대를 예배와 찬양을 통해서 일으키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많은 곳에서 예배와 찬양에 대한 학교와 컨퍼런스를 열어서 이제는 예배와 찬양이 올바르게 교회들안에 보급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좋 은 점이 있듯이 역시 아쉬운 점들도 있었다. 예배와 찬양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다 아시는 것 처럼 최근에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셔서 사용하시는 호주에 있는 힐송교회를 알고 계실 것이다. 이 교회는 최근에 많을 앨범과 찬양을 보급하고 있다. 호주 뿐 아니라 현재는 이 힐송교회의 찬양과 음악들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호주의 힐송교회의 찬양곡들을 한국의 웬만한 교회나 예배 모임에 가면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찬양을 따라 하는 수준이 아니라 곡을 완전히 카피해서 그 곳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좋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교회가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웬만한 밴드를 가진 찬양팀은 힐송의 앨범에 나온 곡을 카피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그러다 보니, 한 앨범에서 나온 찬양을 여러 교회에서 똑같이 연주를 한다고 생각을 해 보라. 물론 성도가 많지 않고 조그마한 교회에서는 똑같이 연주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배 부른 소리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 정도의 밴드와 팀의 구성이라면 충분히 자기것으로 소화를 시켜서 자기 스타일로 만들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모방은 창조를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으로 더 좋은 예배와 찬양 음악이 한국안에 흘러갈 것을 기대한다.

일 전에 한국에 예배앨범이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그 때 당시에는 앨범을 구입할 수 조차 힘들어서 가끔 나왔던 호산나의 앨범들을 구입하면서 카피해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면서 이렇게 한 번 연주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소원이라는 생각했던 것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마 지막으로 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 있어서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눌 까 한다. 그것은 우리가 드리는 찬양의 볼륨에 관한 것이다. 찬양은 볼룜을 가지고 승부하는 것이 아닌데 많은 분들이 보통 귀에는 과다한 데시벨을 사용해서 예배와 찬양을 이끌어 가려고 한다. 악기 사용을 제한 하는 것이 아니라, 악기를 성경말씀처럼 공교히 연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 역시 아는 분에게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지적받은 적이 있다. 찬양인도할 때 너무 시끄럽다는 지적을 받고,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한 적이 있었다. 요즘 예배는 이렇게 드리는 것이 아니야라는 말이 입까지 튀어 나왔지만 그 날 순종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인도한 적이 있었다. 그 날 나이가 지긋한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통해서 그 분들이 은혜를 받으시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 날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내가 그 말을 언급할 때인 것 같다. 정말 그렇다. 너무나도 연습이 안 된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와 찬양은 시끄러울 수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공교함이 사라지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예배와 찬양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안테나를 돋우고 민감함을 가져야 하겠지만, 가끔 너무나도 소란스러운 찬양은 하나님을 향해서 나가게 하는 데 오히려 방해를 가져다 줄 때가 너무나 많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다 음악적 찬양방법에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법은 어떤가? 오늘 지는 석양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묵상하는 것은? 혹은 길가에 있는 아름다운 가을의 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음과 섬세하심을 묵상하는 것은? 아니면 푸르른 바다를 보면서 창조주의 위엄과 영광을 생각해 보는 것은 더 깊은 찬양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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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9월

최 근의 경배와 찬양의 물결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 중심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사람들 중심이라는 것이다. 즉, 지나친 “우리”와 “나”의 강조로 말미암아 찬양 본래의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찬양에 쓰여지는 가사들이 너무나 자극적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지는 단어들로서는 부적합한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비추소서(Shine, Jesus shine)외에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양을 작곡한 그레함 켄드릭은 자신의 강의 중에 이러한 말을 하였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서 적극 권유하고 있다. 하지만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현대의 경배와 찬양은 너무나 대중을 위한 곡들을 남발하고 있다. 때로는 노래 안의 가사에서 전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편의상 나누는 CCM과 경배와 찬양의 개념이 이미 미국 내에서는 무너진 지 오래이다. 90년대의 호산나 뮤직의 탐 브룩밴드는 기존의 경배와 찬양을 넘어서 일반 음악가들도 놀라워하는 앨범들을 만들어 내 놓았다. 수많은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사운드, 거기에다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즈 뮤지션들이 만들어 낸 앨범들은 보통 사람들은 따라 하기에는 엄두도 못 내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일반 콘서트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이들의 앨범을 들으면서 감탄을 자아내곤 하였다.

허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뮤지션을 동원하는 경배와 찬양 스타일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일단, 실제적으로 웬만한 교회에서 따라 부를 수가 없고, 같이 한다고 해도 일단 사람들에게 매스미디어, 즉 비디오와 음반을 통해 확산된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보통 사람들은 따라 할 수 없는 너무나 훌륭한 경배와 찬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국 역시, 아직 지역 교회의 현실은 성가대의 전통 클레식과 경배와 찬양이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숙제로 남아있는 교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례로 탐 브룩같이 클레식 배경에 재즈연주를 하면서, 오케스트라 편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미국 내에서도 몇 사람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크리스챤 음악이라는 장르에서는 말이다.

결국 이러한 “우리” 중심의 기성 세대의 찬양에 새로운 찬양의 방식이 접근되었는데, 90년도 후반에 젊은이와 youth그룹으로 확산된 모던 락의 예배 스타일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 모던 락의 음악적 색깔들은 기존의 호산나의 경배와 찬양 스타일과는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음악적 감상을 많이 추구하던 스타일에서 같이 노래하고 따라부르는 젊은 세대의 절대적인 호감을 얻었다. 밴드와 악기 역시, 일렉기타, 드럼, 베이스, 키보드 이 4명만 구성된다면 바로 할 수 있는 이러한 모던 락은 패션(passion)이라는 모임을 통해서 확산되어져 갔다. 모던 락은 “우리”중심에서 “나”중심의 예배로 바뀌어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에 찬양들이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개념에서 모던 락은 “우리”보다는 “내”가 하나님께라는 개념을 가진 찬양들을 많이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모던 락 스타일의 경배와 찬양은 지금까지도 젊은 층에는 폭발적인 반응이 있어서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앨범들은 모던 락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허나, 모두가 알다시피 이 모던 락 음악의 경배와 찬양은 처음 지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쉽게 쓰여진 가사들,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강조한 나머지 실제로 하나님을 위한 찬양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적인 요소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과연 찬양일까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게 찬양이구나 하는 곡들도 있다. 그 전까지는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혹은 연인들끼리 서로 노래하는 러브송으로 생각할 정도로, 착각할 수 있게 하는 가사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곡의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지나친 자신의 표현은 상대적으로 ‘거룩’이라든지 ‘순결’ 혹은 ‘신령’과 ‘진정’ 이런 단어들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는 반응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가 찬양을 드림에 있어서 더욱 하나님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변함없는 단순한 사실이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오고 가고 있는 것이다. 찬양이 예배의 전부가 아니지만, 프로그램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Donald Gee라는 오순절 교파의 교사가 1929년에 쓴 논설에 있는 글을 잠깐 소개하고 글을 마치겠다.
“우리가 찬송가(Hymn)나 복음송을 부름에 있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단점은 자신이 경험한 느낌과 소망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나타낸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께’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또는 ‘우리’끼리 노래하기 쉽다. 성경에 언급한 꿀이 약속의 땅에서 한가지 실제적 양식이 되듯이, 찬송하는 것은 아름다운 기독교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완벽하고 정당한 방법이다. 그러나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에는 ‘꿀’이 없어야 하며, 우리는 부흥적 즐거움의 감정과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참된 예배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경우에든 꿀은 절제되어야 한다. 달콤한 형태의 찬송가나 노래를 너무 많이 부르는 것은 나중에는 영적인 구토 증세를 일으킨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와 찬양은 결코 실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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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8월

예배안에서 우리는 많은 현상과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예배안에 찬양과 경배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리 낮설지 않은 모습이다. 2주 전에 새들백에서 열리는 워십컨퍼런스를 다녀 왔다. 6월말에는 칼리지 코스타를 섬기고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 그 후에 열린 이 워십컨퍼런스는 나로 하여금 예배와 찬양에 대한 새로운 마음을 불어 넣기에 충분했다. 첫 날 들어가는 순서부터 마지막 모든 순서까지,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준비되어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찬양팀들이 와서 예배와 콘서트(Festival)로 드려졌다. 전 세계에서 모인 3500여명의 사람들은 이들을 통하여 예배안에 깊숙히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보았다. 헌데 둘째 날, 기대치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젊은 대학층과 Youth들에게 인기있는 한 밴드의 시간이었다. 미국내에서 앨범을 5백만장이나 판매한 이 밴드를 편의상 J 밴드라고 하자. 개인적으로 나 역시 많이 좋아하고, 기대했던 시간이었다. 둘 째 날 저녁시간, 그리고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잡혀있는 이 J 밴드의 첫 멘트는 이것이었다. “내가 듣기에 너희들이 노래를 좀 한다는 데, 얼마나 하는 지 한번 들어보자”. 순간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갑자기 썰렁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순서에 있던 다른 S 밴드의 멘트가 아직 사람들의 귀에 생생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 선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저희는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허나,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같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S밴드의 멘트와 전혀 다른 J 밴드의 첫 멘트는 곧장 회중의 반응으로 이어졌다. 워십컨퍼런스에 참석한 반 이상의 사람들이 순서가 끝나기 전에 나가 버렸던 것이다. 나 역시, 거기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곡들, 자기들만 아는 곡들을 연달아서 해 대는 이들에게 이미 겸손한 마음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세상에서 보여주는 한 공연뿐이었다. 우연하게 컨퍼런스에 참석한 한 미국인과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날 J 밴드만 유일하게 자기들만의 곡을 불렀던 밴드였다는 것이다. 다른 밴드는 회중들과 함께 하고,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했는데, 이 날 이 밴드의 태도는 교만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사 역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일로서 부담감으로 찾아 올때가 많이 있다. 늘 하는 것이기에 준비하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아직도 찬양인도를 하기 전에는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 해야 할 정도로 긴장을 한다. 내 나름대로 예배와 찬양인도를 그만 두어야 할 때라고 할 그 시기는 두 가지 현상을 늘 생각하는데, 하나는 스테이지, 즉 예배를 드리는 무대에 익숙해져서 연예인처럼 행동할 때 나는 예배와 찬양인도를 그만 두어야 하고, 끝나고 나서 짐 정리를 할 때 하기 싫어서 도망다니기 시작할 때 나는 찬양인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내게 처음 예배와 찬양인도를 가르쳐 주신 좋은 선배들은 항상 그 일들을 마다 하지 않으셨다. 예수전도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찬양인도를 가르쳐 주셨던 고형원선교사님은 늘 허리에 통증이 있음에도 항상 무거운 것을 나르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그 분은 예배를 계속해서 드리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 배안에서 찬양의 역활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부작용들이 많이 있다. 일단 나 자신부터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예배안에서 찬양이란 한 가지의 필요요소이지 절대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10년이 걸렸었다. 그 전까지 찬양인도자였던 나는 찬양을 인도하면서 가졌었던 모든 자존심이 한 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순서를 위해서 예배가 존재한다고 믿는 분들이 계신다. 허나, 이러한 착각이 있는 이상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예배를 받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자의 예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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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6월

지난 주에 새들백 교회를 갔었다. 나중에 알은 사실이지만 우리 집에서 불과 1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는데, 불행히도 캘리포니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리에 익숙지 않은 지라 몇 번이나 간다고 했었지만 가지 못하고 이번에 토요일 찬양 팀 연습을 마치고 갈 수 있었다.

좋은 예배를 드리고 나면 정말로 나의 영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내 자신이 예배의 감격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신학적인 논의를 떠나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리고 나의 반응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그러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부자동네에 돈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전에 내 눈은 자연스럽게 새들백 교회의 예배인도자인 릭 무쵸를 보면서 그가 인도하는 찬양을 보면서 도전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사십이 넘어서 예배와 찬양인도를 한다는 것은 한국적인 사고방식에는 이제 예배와 찬양인도는 그만 두고,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그 자리에 아직도 기타 통을 매면서 찬양을 인도하는 모습은 나에게는 도전이었다. 예배와 찬양인도를 잘 한다고 하는 것 보다 “릭 무쵸”는 찬양인도를 할 대상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회중을 위한 배려와 그리고 회중 역시 인도자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물론 한 번 가 본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릭 무쵸”의 새로운 앨범이 나온 것을 광고할 때, 소개해주시는 목사님이나 회중이 정말 축하해 주는 것을 보고 처음이지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많은 목사님들이 내게 조언을 해 주는 말씀이 있다. 기타 통은 30대까지 메고(예배와 찬양인도하는 것을 소위 딴따라식으로 표현해서), 그 이후에는 말씀을 선포해야 장래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뒤 돌아서 보게 되면 그렇게 말씀하신 그 교회에서는 정말 예배와 찬양인도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대 부분의 교회의 예배와 찬양인도자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영성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실력이라고 말한다면 물론 노래를 잘 하는 것과 요즘은 밴드를 이끌 수 있는 음악적인 능력을 이야기 할 것이다. 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자주 우선권이 바뀌지만 하여간 예배와 찬양을 인도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 요소이다. 결국 자연스럽게 세 번 째는 그에 따른 결과로서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예배와 찬양인도를 해야 한다. 남녀 노소에 관계없이, 어느 상황에서든 예배와 찬양인도를 해도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그런 사람이 정말 몇 명이나 있을 까 생각한다. 그런 기준으로 예배와 찬양인도자를 뽑는다면 나는 아마 첫 번 째로 짤리지 않을 까 생각된다.

너무 인도자 쪽으로 치우쳐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찬양은 인도하는 사람에 따라서 많이 좌지 우지 되어 진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용하셔서 사역하시기 때문에 예배와 찬양인 도자는 찬양을 올바르게 소개하는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이다. 기름부으심은 예배와 찬양 인도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곡을 해석하는 능력과 개인의 영성이 노래를 통해서 흘러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찬양은 상한 심령을 회복시키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며 하나님 아버지앞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된다. 찬양이 일반음악과 다른 것은 이 부분이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음악회나 좋은 콘서트에 가서 여러분의 상한 심령이 치유받은 적이 있는가? 아니면 회개하면서 자기의 삶을 돌아볼만한 음악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가? 좋은 음악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고 감정을 풍요롭게 하지만, 진정한 찬양은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역할을 한다. 작년에 칼리지 코스타에서 예배드릴 때 “내 이름 아시죠-He Knows my name-Tommy Walker지음-천관웅역)라는 찬양을 할 때, 한번도 가르치지 않고 처음 연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회중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좋은 악기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악기를 연주한 사람을 통해서 흘러가는 영적인 요소이다. 다윗이 하프를 연주할 때 악신이 떠났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을 인도하는 자는 찬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참 쓸데없는 데 관심이 많다. 찬양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찬양을 하는 대상이다. 허나, 우리는 찬양을 할 대상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아니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가지는 근심걱정을 더 경배한다. 시편을 자세히 읽어 보게 되면 사실 시편기자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지만 결국은 찬양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맞추고 끝을 맺는다. 이번 코스타 기간도 그러한 진정한 배와 찬양이 드려졌으면 한다. 미국 각지에서 모인 훌륭한 연주팀이 연주를 해서 찬양이 훌륭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제 거품을 좀 빼자. 단지 찬양팀만 기도해서는 부족한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는 모든 코스탄이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합당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한다면 이번 코스타기간은 어느 때보다 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번에 찬양과 중보기도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을 때, 나에게 한 분이 보내 준 메일을 소개하고 이번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Worship Intercessor(예배 중보자)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시편 149:6

예배 중보자는 그들이 부르는 찬양과 노래 자체가 중보기도이다
예배 중보자는 한절의 노래를 계속해도 지루해 하지 않는다
때로는 같은 노래지만 가사를 조금 바꿔서 할 수도 있다
같은 노래를 반복할 때 그 가사가 실제로 사람들의 삶 속에 역사 한다

원수의 척추를 끊을 수도 있는 파워가 있다
이 예배 중보는 치유와 축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온다
단순히 화음을 만들어내는 성가대식이 아니라 군대의 강력한 노래를 만들어내어서 어둠의 영을 물려내고 치유를 가져오게 한다. 악한 영에 대한 제사를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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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5월

미 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교회의 예배 흐름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어느날 한 신문 기사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 기사의 제목은 “젊은층 중심의 미국교회에서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식 예배.” 포스트모던 이라는 단어와 예배라는 단어가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 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는 대신 관자놀이나 가슴에 손을 갖다대는 중세의 명상적 기도를 한다. 이른바 ‘떠오르는(emerging) 교회’로 불리는 포스트모던 세대의 교회들 일각에서 전통적 방식과는 다른 명상적 형태의 기도와 예배방식이 유행하고 있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교회들은 비제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기성교회로부터 ‘젊은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는 찬사와 함께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지 금껏 미국 교회가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의 모델을 따라 교회가 주는 구세대적인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80년대 이후 계속해서 추구했던 모델, 그것을 편의상 구도자 중심의 예배(Seeker-sensitive worship)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런 흐름에서 무엇인가 다른 하나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2,30대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겨우 교회에 데리고 간다고 치면 이들에게서 나오는 첫 반응은 ‘교회가 교회처럼 생기지 않았다. 무슨 교회가 마치 월마트 같다’고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세대가 형식화된 교회의 예배와 종교적인 형상들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가지고 극도로 제도화된 것(established religion)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떠오르는 새로운 세대는 오히려 종교적이고, 영적이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교회로부터 기대하고 나아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7,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에 비해 200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세대들이 영적인 문제, 초현실적인 문제에 관해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갤럽 조사는 이러한 현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2004년 2월25일 크리스찬 투데이에 실렸던 이 기사를 좀 더 인용해 보면 어떤 미국 교회의 예배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의 젊은 교회 ‘블루어’에서 열린 최근 토요예배. 대부분 20,30대인 교우들은 의자와 촛불로 채워진 공간 주위에 둥글게 둘러앉아 있고 한가운데는 존 뮤직 목사(37) 가 드럼세트 곁에서 3명의 음악목회팀과 함께 앉아 예배를 이끈다. 여기저기 각종 파이프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등불 아래의 벽들엔 옛 돌십자가와 석상들을 담은 슬라이드와 비디오 등이 비쳐진다. 탈색한 티셔츠와 블루진 차림에다 무스를 바른 머리 모양의 뮤직 목사는 설교 대신 회중들을 3대의 ‘임시제단’으로 초청한다. 제단 위엔 기도제목을 적은 카드뭉치가 놓여 있다... 이들의 일부는 교단에 소속돼 있고 전통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복음적이지만, 동방정교회나 중세교회, 수도원 등의 고풍을 답습, 중세기도문, 기도 미로, 렉티오 디비나, 고대 성시, 명상문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브라이언 매클러렌 목사(48세, 시 더리지 커뮤니티 처치)는 아메리카의 광대한 젊은층 인구를 겨냥한 선교적 목회를 “모국어와 모국문화를 사용하는 외국선교”에 비유한다.”

이 를테면 기존 극장 스타일에서 밝은 조명과 현란한 무대장치를 곁들여 현대식 록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젊은이 예배 스타일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촛불과 향내음을 풍기며 고풍스러운 기도문을 청바지 입은 목사와 함께 명상하며 교회의 주위를 돌며 기도에 열중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대가 구세대와 어떻게 다른가,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하는가 묻는다면 쉽지 않은 답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 예를 들자면 구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극복하고 타도해야 할 정치적 인물의 표상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표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었다면 이 새로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허황된 패권주의로 똘똘 뭉친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 상징된다고 하는 차이라고나 할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던주의로 대표되는 모델이라고 한다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포스트모던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차이 정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로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 그리고 록음악과 댄스뮤직에 열광하며 머리에 무스를 바른 젊은이들에서 ‘싸이질’에 열중하며 개인홈페이지 파도타기에 매우 익숙한, 그러면서도 정치인들의 모습을 희화화한 시사합성 갤러리에 들락날락 하면서 낡아빠진 정치를 개탄하는 새로운 젊은이들의 출현을 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 런데 과연 붉은 악마와 함께 ‘대 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의 신화를 이루어낸 이 포스트모던 세대의 모습은 한국 교회 어디에 서 있을까? 이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IT 산업의 활황으로 대단히 발달된 문명의 이기를 즐기는 최고의 IT 강국 대한민국의 N세대들이지만 우리의 예배를 볼 때 아직 포스트모던 예배를 논하는 것은 좀 이른 감이 든다. 미국과 서구의 이 새로운 젊은이들처럼 촛불을 켜고 향내음을 맡으며 오래된 기도문을 따라하며 명상하는 예배를 즐기는 세대의 출현은 아직 우리의 현실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최선의 방어책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부활주일 예배,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색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기존의 전통적인 부활주일 성가대 칸타타를 하되 젊은이 중심의 열린 예배 현실에 맞도록 예배를 디자인해서 칸타타 중간에 다양한 차원의 시도를 선보였었다. 이른바 다감각적인 예배(multi-sensory worship)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장면을 성가대가 부르는 사이, 영화 Jesus Film의 한 부분을 편집해서 회중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200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한다. 동시에 음악이 끝날 무렵, 피가 잔뜩 묻은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쓴 예수가 채찍에 맞으며 뒤에서부터 앞으로 십자가를 질질 끌고 나아간다. 살을 에이는 채찍 소리와 함께 회중들은 강렬한 피의 색깔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가슴 아파하는 경험을 한다. 조용한 배경음악과 함께 예수를 군인들에게 넘겨주던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가롯 유다의 처절한 간증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가 들고 있는 오랏줄 하나, 그 줄을 가지고 곧이어 그는 자살하는 비운의 결말을 택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가롯 유다의 말 한마디에 회중은 동질감을 느끼며 눈물을 적신다. 동시에 새롭게 성가대의 찬양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뭐 그런 진행으로 예배를 구성해 보았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예배를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그런 예배의 자그마한 효시(曉示)가 되었다.

앞 으로 우리 이민 교회와 한국 교회의 예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며 단순히 듣는 예배에서 다양한 차원의 감각적인 예배로 변해갈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 밖으로만 나가면 이 새로운 세대들은 이러한 다양한 다감각적인 문화에 너무나도 익숙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도 사실상 냄새 맡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플래시를 보면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 한잔을 바라보며 조용한 피아노의 배경음악과 함께 순차적으로 아름다운 시 한줄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면서 그와 함께 나지막한 성우의 음성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종합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본다. 단순히 종이에 쓰여진 시 한편을 보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시대를 준비하며 새로운 세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요한 일서의 말씀은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이 외친 세대와도 같이 우리 역시이 말씀대로 우리가 받은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기를 꿈꾸는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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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4월

최 근에 탐 크라우터의 새로 나온 책 “예배자가 알아야 할 60가지 메세지”를 보면서 중요한 원리들이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몇 자를 적어 본다. 예배와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중보기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나 실제로 그 중요성을 알면서도 예배와 찬양팀에게 늘 부족한 것은 이 중보기도이다. 지난 몇 년간 코스타 찬양팀을 섬겨 오면서도 사실 가장 큰 부담감은 중보기도에 관한 문제이다. 어떨 때는 예배와 찬양을 인도하는 우리조차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인도를 할 때가 많은 것 같았던 것을 기억한다. 사실 찬양인도를 하는 팀은 중보기도를 위해 모였다기 보다는 음악적인 사역을 위해 모인 것이 오히려 더 가깝다. 그러기 때문에 중보기도는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지 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이 중보기도에 오랫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은사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은사차원이 아니라 날마다 꾸준하게 하므로 하나님앞에서 자라가게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중보기도가 은사라고 말하는 것은 찬양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있듯이 중보기도에도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서 미안하지만 오랫동안 나에게 중보기도는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예수전도단라는 선교단체에서 섬길 때에도 중보기도시간만 되면 나는 졸음의 영과 싸워야만 했다. 찬양을 인도하라고 하면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었지만, 중보기도를 인도하는 날이면, 어떻게든 빠른 시간 안에 해 치워야 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 중보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에 있는 동안 잠시 미국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한 교회의 영어권목사님과 교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마침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교회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내 마음속에 영적인 부담감이 일어나면서 내가 만나는 존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기도방을 찾아서 기도하려고 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찾아서 들어간 기도방의 이름은 성경에서 모세를 도와 기도했던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론과 훌 방이 있었다. 훌 방에 들어가서 이마에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열심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동안 몇 시간을 기도한 것 같았는데, 눈을 떠 보니 단지 1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목사님과의 약속시간이 되어서 올라가서 전화를 기다리는데 기도하는 동안 음성메세지가 들어와 있었다. 음성메세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약속시간에 맞춰서 오다가 한강대교에서 불법 유턴한 택시와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차만 부서지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라고. 사고가 난 그 시간은 내가 훌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던 시간과 일치했다. 나는 그 시간에 기도했다고 했던 이야기를 목사님과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내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시기 원했던 것이었다. 그 후에 내가 인도하던 모임에는 중보기도 팀이 생겨났다. 사실 이전에 간사들이 중보기도를 해 왔었는데 따로 모임을 위한 중보기도 팀이 세워진 것이다. 그들은 찬양팀이지만 악기나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모임시간 전부터 중보기도를 하면서 준비한다. 그 중보기도는 예배 안에서도 일어난다. 예배를 드리는 각 처소에서 그들은 중보기도의 사역을 한다. 그들의 찬양은 중보기도의 찬양이다. 우리의 모임은 이 중보기도팀이 생긴 이후로 모임 자체가 변화가 되었다. 단순히 찬양을 드리는 모임에서 찬양과 중보기도가 합하여 이루어진 온전한 예배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찬양팀 전에는 단순하게 모여서 기도를 하는 정도였지만, 중보기도팀이 같이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찬양팀이 가지는 고질병같은 기질들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우리 팀안에는 놀라운 간증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 찬양인도자는 먼저 하나님앞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단 1분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회중을 위하여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원수인 사단은 이 시간을 가장 싫어한다. 작년 여름의 시카고 코스타의 중보기도팀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났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전쟁에는 찬양과 경배, 그리고 중보기도,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반드시 함께 해야 승리를 할 수 있다.

말을 맺도록 하겠다. “기도를 통해 예배를 섬기라.” 탐 크라우터가 강조했던 것처럼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기도가 쉽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 의미를 가지지 않는 중보는 또 다른 무거운 짐에 불과할 것이다. 허나, 진정한 예배와 찬양을 드리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는 부족한다. 엎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나를 위해서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중보의 마음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예배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함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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