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일주일간 평안하셨는지요? 바쁜 일정과 사역에도 시간 구별하여 준비해주시고, 열정으로 섬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쉬움과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평신도들이 처음으로 준비한 컨퍼런스라는데 의미를 두고, 여러 리더들이 너무 좋았다고 평가를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너무 찬양팀에 초점이 맞추어진 건 아니었나 조심스럽기도 했는데, 성가대와 평신도들도 좋았다고 하시니 다음에는 좀 더 짜임새 있게 준비해야겠다고 다짐도 해봅니다. 그동안 목사님의 찬양 곡으로 많은 은혜를 나누고 있었는데, 목사님을 직접 뵙고 함께 찬양하고 간증도 듣고, 예배회복, 사역 원리, 본질적인 면도 배우게 되어 참 감사했어요. 준비하고 계신 예배앨범과 예배사역연구소의 출발에도 큰 감사와 기쁨으로 기도 드릴께요. 목사님, 힘내세요!! 오직 주 만이 우리의 반석이시고, 구원이시기에 다시 한 번 그 은혜와 만남의 축복에 감사를 올립니다. 목사님, 자주 연락드릴께요.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방문했던 LA 아름다운교회 찬양팀으로부터 온 메일이다. 예배와 찬양사역으로 봉사하는 성도들이 주축이 되어 예배컨퍼런스를 개최한 것이다. 그 모습 자체가 큰 감동이었다. 필자도 섬기는 교회에서 주최한 예배컨퍼런스를 여러 번 해보았지만 이민교회에서 기획, 홍보, 진행, 재정에 이르기까지 순수하게 평신도 중심으로 이런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름다운교회는 필자가 신념처럼 갖고 있는 평신도가 왕 같은 제사장(벧 2:8)임을 증명해준 모델교회이다. 8년 전까지만 해도 전문 찬양인도자를 초청해서 예배사역을 했는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사이에 리더십이 바뀌는 것에 회의를 느낀 고승희 담임 목사가 직접 총대를 메고 평신도 중심 체제로 사역을 전환시켰다.
고승희 목사에게는 소박한 꿈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최 진사댁 프로젝트”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사는 최 진사가 자신의 이웃이 잘 살아야 자신도 잘 산다는 신념아래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는 삶을 실천했다. 그로 인해 최 진사 집은 물론 그 마을 전체가 잘사는 복을 누렸단다. 최 진사댁 프로젝트는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와 예배의 축복을 반경 몇 십 마일 안에 있는 작은 교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각 예배마다 2개의 찬양팀을 세우고 한 팀씩 타 교회를 섬기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 꿈대로 현재 주일출석 장년 350명 사이즈 교회에서 1,2,3부 각 예배마다 2개의 찬양팀과 2명의 워십리더가 세워져 있다. 수요찬양팀, 새벽찬양팀까지 총 8개의 찬양팀에 10명의 평신도 워십리더가 헌신하고 있다. 향후 총 12개의 찬양팀을 세워서 지역교회는 물론 선교의 현장에서 예배를 회복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직장을 가진 평신도로써 회중예배의 워십리더로 섬기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헌신한 만큼 영적 축복을 체험한지라 즐겁게 헌신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특이한 것은 매일 새벽마다 30여명의 성가대가 새벽예배 찬양으로 섬긴다. 그뿐 아니다. 찬양팀이 찬양인도도 한다. 처음 새벽성가대, 찬양팀 모집 광고가 나갔을 때 교인들이 무모한 시도라며 고개 저었지만 요즘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오히려 헌신한 대원들이 수많은 기도응답을 체험하며 이 자리를 사모함으로 새벽을 깨우고 있고, 이들의 희생적인 섬김이 교회성장의 영적 진원지가 되고 있다. 물론 이런 열매의 배후에는 담임목사의 기도와 영적리더십이 뒷받침하고 있다. 어떤 목회적 아이디어라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결재를 받은 후 움직였을 때 6개월에서 1년 뒷면 실재로 그 꿈이 현실화되는 것을 이미 교인들도 다 알고 있다.
지난 9년간 섬기는 교회는 물론 북미, 남미를 다니며 수천 여명의 평신도 예배사역자들을 만나서 훈련하고 세우는 사역을 해오면서 점차 분명해지는 신념이 하나 있다. 21세기 예배갱신의 키워드는 “목회자에서 평신도로”라는 것이다. 이는 제2의 종교개혁에 준할 만큼 중요한 개념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가 말씀을 회중에게 돌려주는 것(Returning word to the people)이었다면 21세기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모토는 예배를 회중에게 돌려주는 것(Returning worship to the people)이다. 평신도 중심의 예배사역으로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는 아름다운교회가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지금 세계는 유례없는 경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실물경제는 바닥을 경험한지 오래다. 노재현은 기성세대의 바닥을 이렇게 평했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Been there, done that’ 세대다. 현장을 가보았고 온 몸으로 겪어 보았다는 뜻이다. 식민지에, 전쟁에, 산업화 시대 일중독에, 민주화 열망에, 게다가 10년 전 혹독한 외환위기까지 현장마다 가 있었고 빠지지 않고 체험한 세대다. 만만치 않은 내공이 몸에 배어 있다. 문화재급 유물에서 시작해 첨단 제품까지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바닥도 두렵지 않다.”
바닥은 끝이다. 끝의 다른 의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표현으로 이제 시작할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바닥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래서 슬픈 일이 아니다.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 이상 그런 실패는 겪지 않을 확률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은 영혼의 바닥에서 시작된다. 그곳에 간절함이 있고, 갈망이 있다. 이 굶주림이 예배의 강력한 기대감이다.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굶주림은 배고플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영적 굶주림은 영적 양식에 대한 갈급함이다. 성경은 회중예배가 세상에서 채워질 수 없는 하늘 양식이 채워지는 원색적인 현장임을 뒷받침 해준다. 바울은 헛된 것에서 만족을 찾던 영적 거지인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 된 교회를 통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예수의 충만을 채우신다고 증거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3) 여기에서 fills everything in every way라는 표현을 주시하라. 예수는 모든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도 채우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자신의 몸인 교회라는 유기적인 몸을 통해 채우신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몸은 예수의 충만(which is his body, the fullness of him)이다. 그러므로 회중예배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부요함이 깨어진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채워지고 회복되는 위대한 현장이다.
문제는 예배드리면서 나 자신이 깨어진 존재인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배고프지 않다. 영적인 굶주림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이다. 내 안의 죄, 상처, 아픔, 연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하나님께 나아가라. 남들보다 떨어지는 IQ, 배경, 재력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리고, 학벌, 실력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차별 때문에 상처입고, 사춘기 자녀들이 무시해서 온통 썩어버린 가슴, 그 모든 ‘내 정직한 모습’을 쓸어안고 하나님께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하나님께 활짝 열라.
“하나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욕심, 욕망, 야망, 비교의식, 경쟁의식을 제 의지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에 찌들은 저를 주의 형상으로 빚어 주옵소서.” 이것이 굶주림이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기대감이다. 시편 42편은 이 굶주림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 42:1,2)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일주일을 집중해서 살면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게 된다. 주일 예배를 향하는 발걸음에 간절한 기대감이 살아 있을 때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게 된다.
지난 8월 초에 갓스이미지 디렉터 연례모임차 브라질을 방문했다. 주일에 리오 데자네이로에서 특이한 경험을 했다.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리오에 한인교회는 유일하게 리오동양선교교회 하나 있다. 작고 아담한 교회이다. 이곳에서 1부 브라질 현지어 예배와 2부 한어예배를 찬양과 설교로 섬겼다. 6개월 넘게 담임목회자가 공석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교회 내부적으로는 일종의 부흥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부흥의 주체는 놀랍게도 브라질 현지인이다.
1부 예배는 고등학생 밴드가 현지어로 예배를 인도한다. 찬양인도자와 싱어, 드럼, 피아노 모두 여학생이다. 이들이 인도하는 찬양을 뜨겁게 따라 하는 현지 청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배 참석한 30여명의 반이 현지 청년들이다. 찬양과 말씀으로 메시지를 전할 때 한국에서 온지 2년 반밖에 안 된 고등학생이 통역을 하는데도 현지인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이 났다.
"오직 주 만이" 찬양의 작곡 배경에 관한 퀴즈를 냈는데 현지인 자매가 정답을 맞혔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현지 청년 몇 명이 다가와서 자신이 느낀 은혜를 표현했다. 내가 작곡한 찬양에 감동했단다. 브라질의 음악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이다. 그 땅의 젊은이들이 한국인이 만든 찬양과 멜로디에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언어를 초월한 성령의 역사이었음이 틀림없다.
예배 후 마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는데 현지 청년의 대부분이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눈다. 특별히 전도를 하지 않아도 브라질 젊은이들이 교회에 몰려오는 이런 현상에 대해 당황해하고 있는 눈치이다.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한인 자녀들로 운영되고 있는 Gods Image가 브라질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오디션에 200여명의 브라질 현지인 청소년들이 몰려왔단다. 이것이 최근 6개월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주말에는 박지웅 선교사가 섬기는 선교공동체 쿰에서 브라질 상파울로 현지인을 대상으로 프레쉬 페스티발이라는 음악잔치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한인 청소년들에게는 한국의 다양한 음악 문화를 소개하고 브라질 현지인과 타국 이민자들에게는 한류의 현장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제법 큰 규모의 행사였다. 브라질 God's Image, 브라질 전국 댄싱경연대회에 전국에서 몰려든 1만여 팀을 제체고 준결승까지 올라 한류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힙합 댄스팀 리본(Reborn), 한국에서 온 크리스천 가수 별과 토니 안 등이 출연했다. 무대 앞 자리에서 진귀한 모습을 보았다. 상당수의 브라질 젊은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전 HOT 멤버였던 토니 안이 등장했을 때는 뛰면서 열광했다.
브라질에서 한류가 일어나고 있다. 때 맞춰서 한국의 대기업 지사들도 입성하고 있다. 삼성과 LG의 대형 간판들이 곳곳에 붙어있고, 한국 차, 한국 드라마, 케이팝(Korean Pop),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K팝 열풍이 유럽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다. 한류의 실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없지 않지만 전후 60년 만에 한국은 경제, 스포츠, 문화, 예술 등의 영역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이 작은 나라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무시했던 선진국들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 60년 만에 이룬 한류를 주시하고 있다.
K-팝 가수들의 곡이 인터넷상에서 1억 회 유료 다운로드 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기사도 있다. 영어도 아닌 한국어 노래에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한다는 사실... 과거엔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다. 인터넷과 SNS로 전 세계가 하나 된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문화적 코드의 주도권을 거머쥘 날이 다가오고 있다.
한류를 등에 업은 디아스포라 사역은 블루 오션이다. 그 선교적 잠재력이 대단하다.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언어적 장벽이라는 핑계는 더 이상 안 통한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한국을 주목할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디아스포라 교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준비해야 한다.
9년간 정든 한빛지구촌교회 예배사역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2002년 7월, 처음 루트 7 캠퍼스에서 사역을 시작한 이래 정확하게 9년 동안 찬양과 예배사역으로 섬겼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사람이 참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문득 지나간 삶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90년대에 한국컨티넨탈싱어즈와 CCM 남성듀엣 좋은씨앗 사역으로 한반도 구석구석을 방문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배회복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부어주셨습니다.
교회성장의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찬양, 교회마다 우후죽순 생겼던 찬양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현상, 찬양을 준비 찬양으로 여기고 끝나면 전통예배로 다시 시작하는 기현상, 찬양사역의 본질인 예배에 대한 얕은 이해 등등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보였지요. 새로운 찬양운동의 지역교회 정착을 위한 성경적, 신학적 작업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CCM 1세대인 제가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1999년 7월, 구도자의 자세로 도미했습니다. 소위 잘 나가던 찬양사역을 내려놓고 유학생활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리버티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동역할 교회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학위를 마치자마자 바로 귀국해서 부임하려던 한 대형교회 대신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럽게 한빛지구촌교회로 방향을 바꾸셨고, 2002년 7월부터 이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찬양팀 10여명, 미디어 멤버, 성가대 16명이 예배사역 인원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9년 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평신도 예배사역자 170명, 평신도 예배인도자 10명, 30여개의 팀과 리더 등 평신도 중심의 예배사역의 가능성을 확인케 하는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처음 부임 시 평균출석 400명 규모에서 예배사역에만 전념하도록 해주신 장세규 목사님의 혜안과 결단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전해드립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찬양팀, 미디어팀, 성가대, 중창단, 이벤트팀, 프로덕션팀 등에 속한 모든 언투유 예배팀 단원들, 회중을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기위해 섬겨온 10명의 평신도 워십리더, 가까이에서 함께 동역했던 8명의 사역팀 디렉터 여러분,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섬겨주신 어시스턴트 디렉터 등,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은 하나님만이 온전히 아실 것이며 그 상이 클 것을 확신합니다.
그동안 평범한 음악 아티스트인 제가 지역교회 부교역자로 섬기면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 힘들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의 40대를 한눈팔지 않고 한 교회에 쏟은 것은 제 평생 가장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6월 마지막 주일, 교회에서는 제 사역을 교우들에게 알리고 파송하는 아름다운 시간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향후 제가 펼칠 사역과 한빛지구촌교회의 예배사역이 연계될 부분이 있기에 교회를 떠나지 않고 협동목사로 남게 되었지요. 이젠 한국교회를 포함한 전 세계 디아스포라 교회를 향한 사역을 시작할 때라는 확신이 듭니다.
당분간 3가지 일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먼저 한국교회 예배사역의 친절한 파트너인 예배사역연구소를 최지호 목사와 공동대표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소에서 예배목사 양성과정의 디렉터로 섬기게 되었구요. 이곳에서 개발된 훌륭한 프로그램을 북미주 한인교회에 보급하기 위해 북버지니아 지역에도 예배사역연구소를 오픈했습니다. 이를 통해 이민교회의 예배부흥을 위한 각종 세미나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예배 컨설팅, 컨퍼런스, 세미나, 워크샵 운영은 물론 찬양학교, 연주자학교 등을 차츰 오픈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의 예배부흥은 물론, 다음 세대 찬양과 예배사역자를 양성하고 일으키는 사역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두번째는 예배 관련 저술활동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것입니다. 현재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8주 예배훈련교제 '하나님을 경험하는 7가지 예배습관' 외에도 3종류의 예배관련 서적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현재 예배훈련교제 '하경예습'을 원하는 분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일차로 이 예배훈련교재를 출간하려고 합니다.
세번째는 음반제작입니다. 20대부터 창작한 180여 곡을 중심으로 이유정 작곡 30주년 기념음반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이 음반은 김도현, 김수지, 구현화, 민호기, 송영주, 조재옥, 이강혁, 지명현 등 가깝게 지내는 후배사역자들이 피처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또한 90년대 한국 CCM계에 서정적인 통기타 포크음악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하여 30만장 이상이 판매된 좋은씨앗의 새로운 음반(9집)을 10년 만에 제작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지역교회 찬양팀에게 꼭 필요한 2~30분짜리 워십음반을 제작해서 지역교회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섬기려고 합니다.
솔직히 익숙해진 지역교회 예배목사 자리를 내려놓는 것이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익숙함이 성장을 방해할 때도 있습니다. 이번 결단을 통해 미지의 사역을 향한 모험어린 발걸음을 내딛으려 합니다. 이 결단이 이민교회와 한국교회, 그리고 선교지의 교회들을 향한 아름다운 동역의 첫 걸음이 되기를 독자 여러분의 기도 부탁드립니다.
최근 대중음악 프로듀서인 친구가 파리에서 개최되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 그룹 공연 차 함께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획사 스태프도 아닌 그가 함께 동행한 이유는 K-POP 시장에 자신의 곡을 계약 하려는 유럽 작곡자들과 퍼블리셔들을 위한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괜찮은 작곡자들을 픽업하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세상이다. 자존심 강한 유럽의 팝 시장이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손을 벌리는 시대가 도래 했다. 풍부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긍지로 타 문화에 배타적인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K-팝 신드롬이다.
지난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이틀 간 열린 SM타운 콘서트가 14,000석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샤이니, f(x) 등 SM 소속 아이돌 그룹의 공항 입국부터 공연장에 이르기까지 현지인들이 보여준 뜨거운 열광은 상상을 초월했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태극마크 머리띠를 두르고, 한글 셔츠를 입고, 한글 랩 가사를 따라 불렀다. 노래, 춤, 외국어로 무장한 K팝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열광케 하는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행사가 끝나자 마자 르 피가로와 르 몽드 같은 현지 유력 언론지 들은 이번 공연을 ‘한류, 파리 제니트 공연장 강타’ ‘유럽을 덮친 한류’ 등으로 표현했다. 세계적인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도 K-팝을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하나의 운동”으로 해석했다.
홍보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유럽에 일어나는 한류 돌풍의 원인을 파리의 이상언 특파원이 5가지 이유로 설명했다. 첫째, K팝이 사랑, 우정, 이별 등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을 경쾌한 멜로디로 현대화 한 것이 적중했다. 둘째, 국경을 초월한 인터넷 문화(YouTube, SNS 등)가 주요 동력이다. 셋째, 한국영화가 K팝 확산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넷째, SM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대형 기획사들의 매니지먼트 전략도 한류 붐을 일으키는 힘이다. 다섯째, 다른 유럽 국가보다 프랑스에서 한류 열성팬이 많은 것은 팬들이 조직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문화 동호회 ‘코리안 커넥션’ 정회원은 3300여 명이다. 이들이 한국 가요와 드라마를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같은 K팝 열풍이 유럽을 넘어 남미와 아프리카까지 미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류의 실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없지 않지만 전후 60년 만에 한국은 경제, 스포츠, 문화, 예술 등의 영역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이 작은 나라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무시했던 선진국들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 60년 만에 이룬 한류를 주시하고 있다.
관련 기사 가운데 K-팝 가수들의 곡이 인터넷상에서 1억 회 유료 다운로드 되는 때가 올 것이라는 문구에 눈이 멎었다. 영어도 아닌 한국어 노래에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한다는 사실... 과거엔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다. 하지만 꿈꾸는 자에게 이 기적이 실현될 것이다. 인터넷과 SNS로 전 세계가 하나 된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문화적 코드의 주도권을 거머쥘 날이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천 음악인들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 날을 대비해야 한다. 언어적 장벽이라는 핑계는 더 이상 안 통한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한국어 찬양을 주목할 날이 올 것이다. 이제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은 탁월한 노래를 준비해야 한다. 한 곡이 1억 회 조회 수와 수천만 회 다운로드를 기록할 날이 오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날을 꿈꾸고 지금부터 10년을 준비하자. 그때 대한민국의 CCM(기독교 대중음악)이 제2의 전성시대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90년대 찬양 열풍은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울타리와 mp3 등으로 참담하게 무너졌지만 2020년의 부흥은 차원이 다른 글로벌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즉 세계화된 음악성, 세대를 포용하는 예술성, 유통의 혁명은 물론 탄탄한 신학적 기초, 통합적 영성과 복음적 삶, 교회와의 긴밀한 상생의 토양, 그리고 선교단체와의 유기적인 연합을 바탕으로 강력한 영적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도시선교는 물론 세계 선교를 앞당길 수 있는 새로운 영적 무브먼트를 주도할 그 날을 꿈꿔본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완전하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첨언을 드리면, 요즘 커뮤니케이션쪽에서도 "한류"와 관련된 연구들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만...한국학자들 내에서도 부정적 견해가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연 소위 "한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근본적 질문에서부터, 어쩌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일종의 피해의식의 발로는 아닌가하는 우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고, 시사하는 바가 분명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잉해석은 현실을 왜곡시킬 우려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소위...아이돌이라는 친구들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안타깝기도하고, 이런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천착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점에서 현상에 대한 즉자적 대응보다는 좀 더 긴 호흡과 반성적 사고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주제넘게 말씀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하긴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있구나 정도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 주, 멕시코 휴양지인 캔쿤 인근의 리비에라 마야를 다녀왔다. 섬기는 교회의 평신도 워십리더들과 후배 가족이 9년 동안 수고했다며 모든 비용을 지원해서 함께 휴가로 다녀온 것이다. 10여년 만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인터넷도, 전화도, 시계도 없이 4박 5일을 지냈다. 처음엔 적응이 안 되었지만 차츰 이 원시적인(?) 삶에 익숙해졌다. 핸드폰이 없으니 오히려 상대방을 더 생각하고 미리 챙기고 묵묵히 기다리기도 한다. 인터넷이 없으니 세상사는 어둡지만 눈앞의 사람과 관계에 더 집중한다. 시계가 없으니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루가 더 여유롭다.
돌이켜보면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빠른 정보소통은 없어도 느긋한 여유로움에 사는 맛이 있었다. 그러 요즘은 이 편안함이 문명의 편리함에 의해 제거 당하고 있다. 어른들이 대화하는 한켠에 자녀들이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는 모습은 흔한 일이다. 저녁 식사 마치고 가족이 함께 대화할 시간에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인터넷 서칭과 페이스북 하는 모습은 일상사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들 방에서는 TV, 컴퓨터를 아예 못쓰도록 못 박았다.
최근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게임 그리고 텍스팅(texting) 같이 점차 그 양이 늘어나는 테크놀로지의 자극이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테크놀로지 세대의 산물 가운데 하나가 멀티족(multi-tasker)이다. 이들은 노트북에서 영화를 보며 공부하고, 인터넷 서치하며 커피를 마시고 텍스팅 하는 등 동시에 두세 가지 행동에 능숙하다. 요즘 청소년, 젊은 세대의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멀티태스커들이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난 2009년 뉴욕타임즈에 보도된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는 이 상식을 뒤집는다. 이 자료에 의하면 멀티태스커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산만한 사람들”이었다. 즉 멀티태스킹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주위가 산만하고 맡겨진 일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가설을 뒤엎는 충격적인 결과이다.
UC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한 연구 결과도 멀티태스킹의 해악성을 지적했다. 스마트폰이나 쇼셜 네트워크에 의한 주의산만이 두뇌활동과 장, 단기기억(long-term, short-term memory)에 장애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빈번한 자극과 멀티태스킹은 우리의 두뇌를 손상시키며, 더 나아가 다양한 최신 테크놀로지의 유혹에 저항할 힘을 잃게 만든다. 그 결과는 테크놀로지 중독이다. 그래서인가? 최근 테크놀로지 다이어트를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휴가 마지막 날 이른 아침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몸은 피곤했지만 내 발걸음은 바닷가를 향하고 있었다. 나무 그늘 밑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수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소리도 귀에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박한 문명에 짜든 영혼에 안식을 주었다. 그 자연의 소리들이 내 심장에 그림을 그렸다. 이때 떠오른 시상이다.
“이른 아침 넘실대는 파도 소리 / 지저귀는 열대 새소리 / 귓가에 오가는 바람의 여유로움 /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속삭임 / 파라솔에 홀로 누워 / 흐르는 소리에 심취한다 / 아무런 조직도 프로그램도 / 편곡 악보도 없이 / 다양한 피조물이 저마다 노래하지만 / 불협화음 하나 없는 자연의 향연 / 그 신비에 묻어있는 / 창조의 DNA가 보이듯 하다 / 그 노래에 실려 있는 / 태초의 소리가 들리듯 하다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훌륭한 시는 아니더라도 등 떠밀려 떠난 이번 휴가의 가장 값진 깨달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소리까지 들었으니 테크놀로지 다이어트 4일의 효과가 대단하다. 제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테크놀로지가 진화해도 인간의 행복은 결국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친밀함에 있다. 올 여름, 휴가를 계획할 때 ‘테크놀로지 다이어트’ 해봄 직하지 않겠는가? 혹 휴가를 꿈꿀 처지가 못 되더라도 이 새로운 다이어트로 단절된 가족 간의 대화를 회복해보길 강력 추천한다.
모 신학교 교수가 한국교회 성장의 하향곡선의 원인을 열린예배로 단정하며 새로운 예배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한 글을 잡지에서 우연히 보았다. 눈이 의심스러웠다. 찬양운동이 시작된 이래 한국교회 안에서 열린예배를 제대로 드린 교회는 거의 없다. 아마도 열린예배라는 명칭을 그 본래 뜻인 구도자예배가 아닌 ‘문화적으로 전통예배에 비해 열린’의 의미로 사용했으리라 본다.
실재로 한국교회는 현대예배와 열린예배를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찬양운동 4반세기가 흐른 시점에 아직 용어조차 정의되지 않고 사용되는 우리의 현실이다. 열린예배는 시카고 인근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구도자예배를 한국적으로 해석, 번역한 이름이다. 즉 비신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의도된 예배형식의 집회이다. 이에 비해 성가대 대신 찬양팀이 인도하는 예배의 바른 명칭은 ‘현대예배’(contemporary worship)이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은 동시대적 예배라는 의미의 ‘현대적 예배’이지만 전통예배와 대비되는 명칭으로 ‘현대예배’가 더 일반화되어 있다.
여전히 남는 의문점은 이 글에서 주장한 교회성장 하향곡선의 주범이 ‘열린예배’라는 관점이다. 글쓴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본의 아니게 ‘주범’의 범주에 연루된 대상은 찬양운동을 온 몸으로 주도해 온 386세대이다. 과연 그럴까? 80년대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찬양운동 열풍의 결과는 한국교회 마이너스 성장의 주범으로 씁쓸하게 그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 물론 찬양운동의 부작용도 없지 않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크다. 무엇보다 이 운동을 통해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거룩한 예배의 열망을 회복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으며, 그 가운데 적어도 수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헌신의 열매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 중고등부 사역이 얼마나 힘들어졌는가? 주일에 학생들이 교회보다 학원에서 산다. 대학가의 학생선교단체들마다 젊은이 전도가 예전 같지 않아 위기감이 돈다. 그러나 찬양운동이 한반도를 뒤덮을 당시 교회마다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CCM 찬양집회, 화요찬양, 목요찬양 같은 찬양모임마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역사가 있었다.
이때 기름 부음 받은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곡들이 한국교회 안에 흘러들어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은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 그 결과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직종, 새로운 산업, 새로운 예배, 새로운 찬양 등 한국교회와 기독교 산업 전반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지난 10여 년간 교회, 미디어, 방송, 음반 산업, 선교지, 심지어는 소셜 네트웍(SNS) 온라인 현장에서도 당시 찬양을 통해 만난 하나님 때문의 자신의 삶과 목표가 바뀌고, 직업이 결정되고, 하나님께 헌신해온 수많은 청장년들을 만났다. 나이 40이 넘도록 거친 야전에서 예배회복과 부흥에 목숨 걸고 한반도, 동남아시아, 미국은 물론 북한, 중국, 실크로드를 가슴에 품고 뛰는 중견 찬양사역자, 예배인도자, 선교사들이 곳곳에 살아있다. 놀랍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이 부흥의 현장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한다.
미국 60년대에 일어난 독특한 부흥운동이 있다. 히피문화에 젖어있던 젊은이들이 예수를 만난 뒤 자신에게 익숙한 록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때 수많은 젊은이가 하나님께 돌아왔다. 미국교계는 이 젊은이 부흥운동을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라 명명했고, 미국 근대 기독교 부흥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자리매김했다.
한국교회 80년대에 일어난 이 독특한 부흥 현상도 단순한 찬양운동을 넘는 ‘젊은이 부흥운동’, 또는 ‘예배회복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난 사반세기 넘도록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이 운동에 대한 교회사적, 예배학적 자리 매김을 하루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 그럴 때 음악 양식에 대한 진부한 논쟁에 마침표를 찍고 부흥을 향한 다음 단계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말을 기점으로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복음주의 진영 안에 수년에 걸쳐 뜨거운 감자와도 같이 논의가 되고 있는 신학적인 논쟁을 소개한다. Open Theism,이른바 열린 신론으로 불리우는 신학적인 주장이다. Facebook에 존재하는 열린 신론을 논의하는 이들의 페이지에 가보면(http://www.facebook.com/group.php?gid=2257680371&v=wall)다음과 같이 열린 신론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1) God and creatures enjoy mutually-influencing relations 2) the future is partly open and God does not fully know or settle it 3) love is uniquely exemplified by God and is the human ethical imperative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많은 이에게 논쟁의 물꼬를 터준 것은2번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인간의 일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
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하시고 미래의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인간사의 미래를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 미래의 결과가 결정될 수 있도록 미래의 결과를 아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주장은,이제껏 이해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하나님의 성품과는 맞지 않는 새로운 주장이었기에 많은 신학자들의 반론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대표적인 예로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의D.A. Carson교수가 쓴“What does God know and When does He know it?”이란 책이 대표적일 것이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시각으로 보면 아직까지 열린 신론은 우리가 미처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어쩌면 지나치게 인간적인 각도에서 편의를 따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않은지 주의와 경계를 띄게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전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신학자들의 논쟁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각기 나름의 성경적 밑바탕을 제시하면서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짧은 지면에 각각의 주장과 성경적인 예시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양쪽의 주장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인 견해로 이전까지는 그저 막연하게 교리적인 틀에 갇힌 하나님에 대해 암기하는 수준으로 살다가,이제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저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할 수 있겠다.
여전히 저는 열린 신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아니다.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지난3월11일에 일본 동부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의 피해현장을 지켜 보면서,하나님은 거대한 재난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고통을 당하는 인간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들이 열린 신론이 말하고 있는 주장들을 깊이 살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 중에 그렉 보이드라는 사람이 쓴“어느 무신론자의 편지”라는 책이 있다.저에게는 복음 전도의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이제는 신학자이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이29번 동안 서신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마침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내용이 담겨있는 감동적인 책이다.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에게 선물할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오늘은 그 책에서 한 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무신론자인 아버지가 갖고 있는 질문을 접근하는 아들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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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지진과 기근을 일어나게 하시는 게냐?
그렉에게
너와 무슬림 학자와의 토론회가 잘 끝났다니 매우 기쁘구나.할 수 있으면 테입을 하나 구해 보내주렴.비디오테입을 보내주면 더 좋겠다.꼭 보고 싶구나.
너의 지난번 편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나는 그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주 여러번 읽어야 했단다.네가 말하는 것은 내가 가톨릭교회에 다니던 시절에 하나님에 대해 배운 많은 것과 반대되더구나.하나님에 대한 너의 견해는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보다는 훨씬 더‘인간적인’것처럼 보인다.물론 나는 성경의 권위자가 전혀 아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미래를 아는 분으로 나와 있지 않느냐?네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단 인정하마.그 전통적 견해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하지만 너의 견해가 그저 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하구나.
어쨌든 너는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하지 않도록 미리 보장할 수 없는지 상당히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하지만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에는 자유에 대한 너의 견해로도,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견해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또다른 심각한 난점이 있다.어떤 악들은 사람들의 자유스러운 결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나님이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느냐?하나님은 직접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인데 왜 기근,지진,산사태,에이즈,기형아 등등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시지?분명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자유의지에도–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제외하고는-비난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하나님이 오직 사랑이시라면,자신의 피조물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1989년5월11일
너를 매우 사랑하는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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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버지께
지난번 편지에 늦게 답장을 드려서 죄송해요.하지만 저는 이곳 베델대학에서 학기말을 지내느라 정말로 정신이 없었답니다.먼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악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려 볼께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에 따라 결정하는 미래의 일과 행동에 대해 모르신다는 견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니며,상당히 많은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다만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사람들이 내릴 자유로운 결정들에 대해 미리 알지는 못하신다는 것입니다.현재의 상황들에 의해서건 하나님 자신의 뜻에 의해서건 미래의 어떤 일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실 것입니다.하지만 미래의 자유로운 행동들은 그렇지 않습니다.그러므로 미래는 하나님에게도 완전히 공개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만 공개되어 있는 셈이지요.심지어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창조에는 감수해야 할 모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견해가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신학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제가 확신하기로는 이 견해는 매우 성경적이에요.세세한 것들을 이야기하여 아버지를 따분하게 해드리지는 않겠지만 저는 성경속에서 하나님이 미래를 어느 정도 개방적인 것으로 여기시면서 사람들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보게 되지요.미래는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심지어는 새로운 상황들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을 바꾸시기까지 합니다(출32:14;삼상15:11;렘18:7-10; 26:19를 보세요).하나님이 미리 모든 사건들에 대한 고정된 청사진을 가지고 계셨다면 물론 이런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방적인 견해는 보다‘인간적인’것입니다.저의 견해로는 그것이 보다 성경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더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처음부터 미래 전체를 알고 통제하는 하나님이라는 견해는 제가 판단하기로는 성경적인 것이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의 산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자연재해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재앙들에 대해 직접 책임이 있다는 의미일까요?저는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세가지를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첫째로,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통과 고난은 자연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로 인한 결과이며,심지어 대부분의 자연 재해들로 인해 일어난 고통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더라면 최소화되거나 제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예를 들어,기근에 대해 생각해 보지요.아버지는 모든 사람이‘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면 굶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그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식량이 있다고 합니다.다만 자신들이 필요한 양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한 이상의 많은 식량을 쌓아놓고 있는 것뿐이지요.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미국인들은 세계 인구의7%밖에 안되지만 세계 자원의 절반 이상을 소비합니다.평균적으로 후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덜 소비하는 반면,선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더 소비한다고 합니다.
또 정치적 전쟁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자연적’악이 예방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세요(이디오피아의 비극은 분명 예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만약에 군비 경쟁이 없었다면,세계 자원이 평등하게 분배되었다면,돈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투자할 만큼 충분히 마음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심지어 방글라데시의 홍수들조차 환경과 복지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저는‘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중 많은 것이 언제나 자연적인 악은 아니라고 봅니다.그것은 악한 마음들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둘째로,우리가‘악’이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모두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보다 못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여러가지 한계와 불완전함이 있어 보이지요?
예를 들어,우리를 받쳐주는 바위는 발끝이 채여 넘어질 정도로 단단하고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우리가 그것을 뚫고 떨어질 정도로 얇아야 하고,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물은 그 안에서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아져야 합니다.세상은 이처럼 각각의 특성에 의존하여 유지되게끔 되어있기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존재들이 그 안에서 살 수 있지만 어떤 환경에서는 그러한 긍정적인 특성들이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합니다.실로,어떤 피조물의 긍정적인 특징이 다른 환경에서는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특징이 되는 거지요.
따라서 실재가 지니는 한계들은 실재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그렇다고 제가 이것을 본래적인 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그저 매사가 그렇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을 뿐이지요.저는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만물의 제한되고 독특한 특성과도 아주 조화롭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피조된 세상의 제한적인 특징 때문도 아니고 사람들이 원래 창조된 대로 완벽하게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닌 듯이 보이는 몇몇 자연적 악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요.예를 들어,기형아들은 어느 것으로도 설명이 안됩니다.유신론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요?이제 세번째 사항을 살펴볼께요.
아버지!성경대로라면,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진 것만은 아닙니다.우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영적인 존재들은 사실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적어도 우리가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보면 말이지요.이런 생각이 아버지에게는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이것이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라는 것은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셔야 될 거에요.
이런 존재들을 성경에서는‘천사들’혹은‘마귀들’이라고 부른답니다.하지만 아버지께서 흰옷을 입고 하프를 연주하는 날개 달린 존재나 붉은 뿔이 달리고 쇠스랑을 들고 있는 괴물을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성경에는 그런 바보같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답니다.그들은 또한‘정사’와‘권세’라고도 불리지요.그 말은 구체적인 실체이기 보다는‘영적인 세력’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줍니다.
어쨌든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이해는 이러한 실체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이고 자유로우며,또한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자유를 악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이러한 악한 영적 세력들,굳이 말한다면‘마귀들’은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선한 것에 대적하는 전쟁 상태에 있으며,지구는(아마 다른 곳에서도 역시)그들의 전쟁터입니다.성경에는 이들의 사랑할 수 있었던 잠재력이 인간의 잠재력을 훨씬 능가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뚜렷한 증거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여 그들이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력 역시 훨씬 더 컸습니다.아버지께서도 들어 보셨겠지만 사단은 한 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루시퍼’였습니다.그 말은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하지만 이제 그는 희석되지 않은 악입니다.그는 우주적인 규모의 히틀러입니다!그의 영향과 또다른‘마귀들’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견해로 보면,세상은 외부의 세력에 의해 문자 그대로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는 셈이죠.오늘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전한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더이상 창조주만이 유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분이 아닙니다.바로 이 때문에 세상은 한 편으로는 그처럼 아름답지만,다른 한 편으로는 점차 더 악몽과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선과 악의 충돌 한가운데 살고 있습니다.세상이란 무관심한 채 내버려 둔다고 해서 그냥 아름다워지지는 않지만 우리가 선한 계획을 좇는 한 악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악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저의 주장은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르망디작전처럼 사탄의 일제공세를 받고 있습니다.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전쟁터에서는 온갖 종류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요.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은 잠재적인 무기가 되고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희생자가 됩니다.그래서 전체 우주는 혼란 상태에 빠져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롬8장).
저는 이러한 마귀적 세력들이 자연을 어떤 식으로 왜곡시키고 압박하는지를 다 알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성경이 이 진상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하지만 세상의 필연적인 한계들 또한 사람들이 악한 의지에 호소함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악은 이와 같은 존재들의 의지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확신합니다.결국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인 셈이지요.
아마 이 마지막 주장은 소화하기 다소 어렵다고 생각하셨을 줄로 압니다.저도 분명 한 때 그런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지요.그리고 저에게는 성경이 참이라고 생각할만한 무수한 이유들이 있거든요.하나님과 대적하는 악한 영의 세력만 봐도 오직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와‘자연적 악’이 함께 양립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저에게는 또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이 있답니다.언젠가 아버지의 질문들에 대답할 뿐 아니라 이러한 긍정적인 사항들 역시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버지의 반응을 기대할께요.
총체적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살 길은 예배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예배에 실패해서 망했다. 14세기 종교개혁은 그 핵인 예배개혁(returning worship to the people)을 통해 중세 암흑기에서 탈출했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서구교회의 세속화와 더불어 예배의 강단을 무참히 훼파시켰지만 1960년대부터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예배갱신(worship renewal) 운동으로 교회의 생명력을 되찾았다. 한국교회도 지난 20여 년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찬양운동으로 예배갱신의 불이 점화되었다. 덕분에 화석화 된 예배에 생명이 흘러들어 역동성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본질보다 형식과 트렌드에 매몰된 타락의 조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정작 먹을 수 있는 물을 구하기 힘든 것처럼 요즘 예배는 많지만 정작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의 열정에 불붙는 예배가 부족하다. 예배의 위기는 좋은 악기, 최첨단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유창한 설교, 뛰어난 성가대, 실력 있는 찬양팀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의 생명을 경험하며, 성령의 감동이 살아있고, 본질의 변화가 일어나며, 존재의 혁명을 가져오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결과 우리의 눈과 행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전쟁과 기근에 고통 받는 나라와 미전도 족속들을 향해 구체적으로 결단하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급한 때이다. 알렉산더 슈메만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표현들이 궁극적 ‘준거’를 부여받고 그것들의 최고 깊은 의미가 계시되는 것은 다음 아닌 예배 안에서, 예배를 통해서이다. 예배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규범의 위치이다. 그래서 예배가 무너질 때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진다. 지엽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복음에 전율하며, 삶의 관점이 바뀌고, 차가운 지성이 불타오르며, 구체적인 결단이 일어나는 그런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지구촌에는 과거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던 현상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지구 한 쪽에서 부르는 찬양이 지구 반대편에서 동시에 불리고 있다. 한 지역교회의 메시지가 인터넷과 글로벌 위성 시스템, 스마트폰 등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각 나라의 크리스천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누가 지시하지 않았어도 예루살렘 회복의 열망이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이루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로컬(local)과 글로벌(global)의 경계가 사라진 글로컬(glocal)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말세에 일어날 대부흥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인프라일지도 모른다.
세기 마다 일어났던 과거의 부흥과는 차원이 다른 지속적이고 글로벌한 부흥, 역사상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대한 부흥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것이다. 이 부흥의 쓰나미 현장에 쓰임 받으려면 김종필 목사의 언급처럼 “내가 서있는 그곳이 부흥의 진원지가 되어야 한다.” 대부흥은 바로 그 곳에서 자신을 깨뜨린 영적 거인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부흥을 꿈꾸고 준비하는 교회와 성도들마다 선행될 부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배 본질의 회복’이다.
이것은 전통예배, 현대예배, 열린예배(seeker service), 블렌디드(blended) 예배, 이머징(emerging) 예배와 같은 형식의 논쟁을 불식시킨다. 세대와 문화에 따라 형식이 중요한 매체의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어떤 형식이라도 본질의 중요성에 비하면 사소하다. 이 본질의 회복은 슈메만이 말한 것처럼 예배의 참된 의미와 능력의 재발견이고, 예배의 우주적, 교회론적 차원과 내용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죽은 전통과 관습을 포기하되 그 안에 있는 참된 본질을 시시때때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예배 회복은 제2의 종교개혁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가지 코멘트 하고 싶은 것은 형식과 본질을 너무 대립화 시켰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형식이란 원래 본질을 품고 있는 단어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본질이 더 잘드러나는 형식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더 맞지 않나 봅니다. 본질은 형식을 통하지 않고는 드러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슈메만의 sacramental theology 도 본질은 형식을 통해 드러남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봅니다.
1865년 런던의 여름은 무덥고 음습했다. 중국 선교에 전념하던 중 과중한 업무로 병을 얻은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서 6년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동안 의료 선교사 자격증도 획득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으로 편안한 영국에서의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도 수만, 수십만의 중국 영혼이 죽어가는 생각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급기야 건강에 다시 이상 신호가 왔다.
이를 알게 된 오랜 친구 죠지 피어스가 브라이턴에 있는 해변으로 그를 초대했다. 그는 바닷가를 거닐면서 하나님과의 단 둘만의 시간을 자주 가졌다. 어느 주일 아침,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다. 마침 그날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로 인해 감격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그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감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독하고 안타까웠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광활한 중국 대륙의 죽어가는 영혼들과 비교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 아침을 이렇게 회상했다.
“1865년 6월 25일 주일, 상심하여 축 늘어진 영혼을 붙들고 모래사장으로 나가 이리저리 홀로 거닐고 있었다. 주님은 그 곳에 찾아 오사 나의 불신을 압도하셨다. 나는 중국선교를 위해 내 한 몸 온전히 드리겠노라고 주님께 항복하고 말았다. 나는 주님께 모든 문제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주님께 내려놓겠다고 말씀 드렸다. 나의 몫은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것뿐이었다.
나와 나의 동역자들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었다. 수고로이 짐 지고 곤한 심령 속으로 평화가 밀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선교사가 없는 11개 내륙 지방에 각각 선교사 2명과 몽고 선교사 2명, 모두 24명을 동역자로 달라고 기도했다. 손에 들고 있던 성경책 귀퉁이에 이 기도 제목을 적어 두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평안한 마음속에 잔잔한 기쁨이 흘렀다.”
이 청년은 1849년 열일곱 살 나이에 중국선교사로 헌신한 허드슨 테일러이다. 투병 중이던 어느 주일 아침 예배를 통해 그는 중국에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강렬한 열망을 다시 한 번 회복했다. 바로 그때 앞날에 대한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재헌신했다. 아울러 아직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내륙 지방에 대한 선교전략도 세웠다. 바로 이때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태동되는 순간이었고, 그 작은 사건이 그의 선교사역에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그날 이후 그는 16명의 선교동역자들과 함께 중국선교 현장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를 통해 중국 내지에 100여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캠브리지 7인도 있고 그 중 한 명인 딕슨 에드워드 호스트가 나중에 그를 대신해서 CIM을 섬기게 된다. 그는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중국을 알리는 선교회를 조직하는 등 보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감당했고, 이후 중국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허드슨 테일러, 그를 통해 중국을 뒤덮은 복음의 발원지는 바로 예배의 현장이었다. 테일러가 예배 중에 본 것은 회심에 대한 천국 잔치뿐 아니라 그 기쁨을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잃어버린 영혼들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있는 현장이 있는가? 예배 순서와 형식에 너무 집중하느라 이웃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틈이 없지는 않은가? 마크 래버튼이 말한 것처럼 “예배드리다가 이웃을 잊어버리는 것,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품지만 그 열정으로 자기만족이나 자기 유익을 구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만난 바로 그곳에서 이웃을 만나는 것이 참된 예배이다. 예배드리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무너진 가정과 사회, 국가를 품게 된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땅, 족속과 방언들을 향한 비전을 갖고 위대한 꿈을 꾸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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