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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늘 푸른 나무, 비탈에 서다.

용혜원 시인이 학교를 방문하여 <시와 음악이 흐르는 밤>이라는 문화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그 행사 준비를 하느라 아내와 더불어 내가 지도하는 <늘푸른 나무> 써클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 낭송을 처음 해보는 아이들인지라 아름다운 선율에 감정을 넣어 서정적인 시를 읊조리는 모습이 어설프다. 그러나 그 서투름 속에 이곳 아이들의 소박한 심성들이 묻어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1)

"선생님, 큰일 났어요......"
내가 지도하는 서클의 남녀학생 둘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어도 그저 낙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그들 중 얼굴이 하얀 한 여학생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힘없이 내뱉는다.
"이제, 우리 서클은 끝장이야요."
평소에 서클 활동에 적극적이고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던 그 여학생은 아예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글줄이나 좀 쓴다는 아이들을 모아서 문학 서클을 만들었다. 생각이 깊다고 자부하며 자존심과 개성들이 강한 아이들이었다. 그만큼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면들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순수함이 그 모든 것들을 감싸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모아서 내면의 응어리진 것들을 글로 표현시키며 다듬어가려고 했다. 걸음마를 시작한 대학 문화를 정신적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포부들도 있었다.

학교에 심어놓은 어린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늘 푸른 나무>라고 이름을 짓고 문집을 내기 시작했다. 푸르름을 잃지 않는 모임이 되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처음에는 아주 소박하게 시작했다. 한 학기에 한번씩 겨우 겨우 자신들이 틈틈이 모아놓은 소품들을 발표하는 형편이었다. 첫 문집을 내었을 때에는 모두들 좋아했다. 두 번째에는 외부에서 작품 공모를 받아서 좀 더 세련되게 다듬었다. 편집하는 기술도 늘었고, 약간의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학교 내 다른 동아리들에 비해 유달리 단결도 잘 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동아리에 대한 사랑이 날이 갈수록 불붙는 것을 느꼈다.

대학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문학의 밤'을 개최했다. 도무지 문학의 밤이라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취지와 형식을 대충 설명해 주고 맡겨두었더니 아이들끼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문도 구하고 밤을 새워 끙끙거리며 작품을 만들어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대 성공이었다. 국제대학의 면모를 살려서 한국시, 중국시, 영시, 불란서 시들을 섞어 가며 시를 낭송하고 계절의 감각을 드러내는 수필을 빔 프로젝터를 동원하여 대형 스크린에 영상을 비추며 함께 낭독하기도 했다. 한국 대학생들도 미처 생각지 못한 장르들도 등장했다. 문학 작품 중 한 토막에서 발췌한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멋진 해설과 함께 극화로 만들어 올리기도 하였다. 자신들의 캠퍼스 라이프를 코믹하게 엮어서 스크린 상에서 영상 드라마로 연출하기도 했다. 열렬한 박수 갈채를 받으며 문학의 밤이 막을 내렸다.

그런데 그 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늘푸른 나무> 동아리를 주도하던 두 학생이 있었다. 둘 다 문재(文才)가 있고 개성이 강한 아이들이었다. 그 중 U라는 학생은 사색적이면서도 언변이 뛰어나고, 행동이 약간 괴팍하며 야심이 있는 아이였다. M이란 학생은 이미 연변 일보의 신춘문예에도 당선될 정도로 시적 감수성이 탁월하며 미술에도 조예가 깊은 예술적 끼를 지닌 아이였다. 미남형의 U에 비해 M은 체격도 왜소하며 말주변도 없었다. 반면에, 학업 성적이 뛰어난 M에 비해 성적이 밑바닥을 돌고 있던 U는 평소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문학의 밤을 통하여 언변이 뛰어난 U가 사회를 맡으며 대중 앞에서 멋진 연기를 보이자, 마침내 전교적인 히로로 등장하였다. 어쩌면 뒤에서 실질적인 총 연출을 하며 더 많은 수고를 한 것은 M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인기가 오른 U가 자신감을 얻으며 총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평소에 U를 얕보던 M은 크게 반발하며 반대편 후보의 참모로 뛰어들었다. M의 주장인즉, U는 결코 학생회를 이끌만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서클 내부도 곧 두 패로 나뉘었다. 그렇게 친하던 아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안겨주기 시작했다. 선거전을 치르면서 양 진영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졌다. 상대방에 대한 심한 인신 공격이 오가는 속에서 자신들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면의 치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거는 결국 U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누구도 진정한 승자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오욕과 수치의 상처들이 깊이 남았다. 두 학생 모두 비로소 자신들의 추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아연할 만큼 충격들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며칠 후 학교 기숙사에서 살인 사건이 날 뻔한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선거전에서 분노를 품은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머리를 칼로 세 번 찌른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선거를 치르면서, 선거전을 민주주의의 훈련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아직 미성숙한 학생들에게 완전히 맡겨 두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자유 경선에 의한 직접 투표를 진행하는 동안에 상대와 공대의 대표로 나온 두 후보자를 서로 지지하던 측근에서 심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 투표일을 앞두고 선거전이 더욱 혼미해지기 시작하자 양 진영에서 심한 감정적인 대립까지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근소한 차이로 한쪽이 패하게 되자 평소 술만 마시면 거친 성격이 튀어나오던 한 학생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대방 진영의 한 학생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었다. 다행히 칼날이 빗겨 나가는 바람에 표피만이 크게 찢어지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랑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기숙사에서 생겨난 이 사건을 앞에 두고 우리 교직원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바로 가르치고 다스리지 못한 자신들을 회개하며 크게 반성하는 계기를 삼게 되었다.

연변에 있는 조선족이나 한족들은 무서운 문화 혁명의 회오리바람을 통과하면서 심성이 거칠어진 탓인지 한번 싸움이 일어나면 으레 폭력을 행사하며, 일단 증오심을 품게 되면 끔찍한 연쇄 복수극을 벌이는 것을 예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길에서도 칼을 휘두르는 장면들을 더러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강력 사건들이 빈번히 일어나는 연길시의 다른 곳에 비하여 연변 과학 기술 대학만은 그 동안 한 번도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연길시 공안국에서 조차 신기하게 생각하며 매년 감사를 표시하는 특별 구역이었던 것이다. 진리, 평화, 사랑의 교훈 아래 선생과 제자 사이가 다정한 부모 자식과도 같고 학우들 사이에 사랑과 우정이 깊기로 자부하던 우리 학교에서 발생한 일종의 살인 미수 사건이었기에 더욱 그 충격이 컸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사건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그들의 대립 양상이 단순한 단과 대학의 대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연히도 두 대표 중 한 학생은 믿는 학생이었고 또 다른 학생은 믿지 않는 학생이 출마를 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 학생들을 지지하는 학생들조차도 은연중 믿는 학생들과 믿지 않는 학생들로 갈라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믿는 학생의 승리로 끝나고 말자, 평소에도 믿는 학생들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던 상대편 학생들이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던 것이다.

우리 교직원들은 이 사건을 돌이켜 보면서 믿지 않는 학생들에 대하여 소홀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기 시작했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 나름대로 학생들에 대하여 예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더러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소외된 학생들이 있어 왔으며 비록 고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편애로 인한 아픔과 상처를 안겨준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카인의 잘못을 두둔할 수는 없다.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여 최초의 살인자로 성경에 기록된 불행한 사람 카인의 경우는, 흔히 오해되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편애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것이 절대 아니다. 카인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받았으나 그 마음속에서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반발하고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살인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성품을 지닌 우리 인간이 편애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공평한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사랑을 주는 자나 그것을 받는 자가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편애로 인한 불씨를 일으킬 소지가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비책은 한가지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그 방법대로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자부터 먼저 사랑하고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에게 선대하며 우리를 죽이려 하는 그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는 길일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학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살인 미수 사건이기에 마땅히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비록 그 행위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한번 우리 학교에서 받은 학생은 끝까지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그에게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대립되었다. 결국은 일단 학교에서는 제적시키되 계속 돌보아서 그가 참으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고난 주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기에 우리 교직원들은 십자가 앞에 모두 모여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2)

그 사건에 깊이 관여했던 <늘 푸른 나무> 써클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도 선거라는 일종의 정치바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정치권에 몸담았던 경력이 있으신 어떤 교수님은 정치 마당에서 편이 한번 갈라지면 다시는 합치기 힘든 우리 민족의 근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평하면서 그들 사이의 우정은 이제 끝났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늘 푸른 나무>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떻게 할까? 이들을 그냥 해체시켜야만 하나? 심히 고민이 되었다.

마침 그 날은 예수가 돌아가신 성금요일이었다. 그 날 저녁,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조차 바라보기 힘들만큼 어려운 자리였다. 한참 만에 말문이 열리면서 다시금 분노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학생 몇몇은 과거에 멋모르고 상대방을 잘못 판단하여 좋아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치를 떨며 분개하기도 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고개들을 내저었다.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차가운 무덤 속에 함께 모여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기도하다가 갑자기 용기를 얻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예수 십자가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그 이전에는 의식적으로 써클 아이들을 앞에서 한 번도 기독교에 대해 설명해 본 일이 없었다. 써클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중국 법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의 가로막힌 담장을 허물 다른 어떤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던 그 사람들과 그 여인을 용서한 예수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 가운데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심히 반발하는 학생들도 섞여 있었지만, 그 시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심을 느꼈다. 모두들 숙연히 듣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면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대방을 용서해야만 하는 그 아픔에서 오는 설움의 눈물이었다. 한참 후에 아이들의 얼굴에서 평온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자신들끼리 그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그 다음날 늘 푸른 나무의 어린 가지들이 다시 만나서 자신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아픈 절차들을 밟았다. U와 M이 다시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부활의 주일 아침, <늘 푸른 나무>가 밝은 햇살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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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산 위에 있는 동네 - 선구자의 땅

(1)

연변과학기술대학은 연길시 가장 북쪽의 북산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다. 앞에는 시가지가 한눈에 나지막이 내려다보이고 뒤에는 시원한 들판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어서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학교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연길 시에서는 시내 중심의 좋은 땅을 주려고 하였으나 김진경 총장이 당시 공동 묘지였던 이 언덕바지 땅을 극구 고집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묘지 터를 요구하는 김 총장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여 고개를 내 저었지만, 이제 학교가 완성되고 나서 이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과연 이곳이 명당(?) 중의 명당이라며 김총장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에 감탄을 하곤 한다. 더구나 오목한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연길 시는 여름에는 먼지와 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겨울에는 굴뚝에서 내뿜는 매캐한 석탄 연기 때문에 온 도시가 안개 속에 잠겨버리기 때문에 학교에 올라와야만 비로소 숨통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학교를 단장하는 분들이 학교 안팎에 온통 꽃길을 만들어 놓아서 계절마다 화사한 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서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소나무로 일체 조경을 이루어 학교를 처음 찾는 분들도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이곳은 중국 속의 섬처럼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교정 바로 앞에는 푸른 잔디로 카페트를 깔아 놓았고 그 위에 멀리 두만강에서 옮겨다 놓은 큰 바위가 카메라를 의식하며 점잖게 놓여 있다. 연길시 어디에서도 아직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녹색 공간이기에 휴일에는 산책을 위해 학교를 일부러 찾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띈다.

이 학교를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잡게 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회주의 나라 중국에 기적과 같이 세워진 학교---,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의 물결을 타고 최초의 중외 합작 대학으로서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세운 이 학교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는지, 이 곳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이 앞으로 중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낼는지 중국 사람들은 예의 주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에 봉사하러 온 외국인들이 모두 크리스천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의 판단들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학교를 중국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학교로 키워나가야만 한다. 이곳에서 진정한 의미의 진리, 평화, 사랑의 교육이 실천되고 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중국 다른 어떤 대학의 졸업생들과는 다르다는 좋은 평가를 받는 길만이 이 학교가 세워진 참 목적을 달성하는 길이 될 것이다.

만주 벌판의 강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학교 내의 모든 건물을 연결통로로 길게 이어놓았다. 이름하여 연변과기대의 만리장성이다. 그 복도마다 온통 조선의 정취와 풍습을 느끼게 하는 골동품과 장식류가 진열되어 있다. 장소도 절약할 겸 방문자 누구나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열린 박물관인 셈이다. 미술을 전공하신 총장 사모님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분의 본업(?)은 식당 앞 슈퍼마켓 점원 아줌마이다. 총장 사모가 슈퍼에서 일하는 것을 미처 몰랐던 방문자들이 종종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일손이 부족한 대학의 구석구석마다 자원봉사자로 돕는 사모님들의 손길들이 이 대학을 만지고 있다.

아직은 도서관다운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여서 임시 도서관의 열람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밤에는 식당을 자습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저녁 식사만 끝나면 학생들이 식당의 빈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밤 열두 시까지 조용히 공부하는 모습은 정말 대견스럽기만 하다. 중국의 사회주의 교육 체제 내에서는 일단 대학에 합격하기만 하면 졸업 후에 국가에서 책임지고 학생에게 직장을 분배시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모습은 중국 대학에서는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든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북산가 언덕에 높다랗게 세워진 학교---,
깜깜한 밤중에 환하게 불을 밝힌 도서관---,

갑자기 말씀 한 구절이 생각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2)

언젠가 활빈 교회의 김진홍 목사님이 조선족 사기 사건의 대책 마련을 위하여 우리학교를 방문하신 차에 교직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다. 당신이 찾아오신 곳이 바로 선구자의 땅임을 의식한 그 분이 자기가 바로 선구자라고 하시며, 선구자의 뜻은 "선천성 구제불능성 자아도취증" 환자를 뜻한다고 하여 한바탕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 와보니 김진경 총장님을 비롯하여 모두 자기보다 중증(重症)인 선구자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다시 한번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북산가 언덕의 광활한 벌판을 바라보며 바로 이곳이 과거 우리 민족의 한과 쓰라림의 역사를 담고 있는 만주 벌판임을 실감하곤 한다.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역사적인 배경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라를 빼앗겼던 근대사의 뼈를 에는 아픔들이 스며있는 땅이 바로 이곳이다. 그 시절 일본의 학정을 피해 개나리 봇짐을 지고 압록강 두만강을 넘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개간했던 땅들이 지금의 만주 곡창을 이루었던 것이다. 일본에 항거하여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고향산천의 부모 형제를 내버려둔 채 일신의 고초를 무릅쓰고 찾아 나선 독립투사들은 또 어떠하였던가?

그 시절을 향한 역사적 향수감에 젖어 한번씩 시간을 내어 찾게 되는 곳이 또한 인접해 있는 용정시(龍井市)이다. 연길에서 시골길을 삼십 분 남짓 차를 타고 가다보면 거대한 사과배 농장을 지나게 되고 올망졸망한 용정시 한 복판에 옛 대성 중학(지금은 용정 중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터를 찾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아로새겨진 시비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에 대한 의미를 한참 묵상하다가 발길을 돌려 오르는 곳이 일송정(一松亭)이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뽑아버리기 위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미 제거되고 말았다는 역사 속의 소나무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산꼭대기에 솟아있는 초라한 정자 옆에는 어느덧 새로 심은 작은 소나무가 한 그루 미래의 소망을 키워가며 자라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일송정에서 사방으로 광활하게 내려다보이는 만주 평야와 그 속을 가로질러 흐르는 해란강을 굽어다보고 있노라면, 조선인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장을 요동쳐 흐르는 한줄기 감개를 억제치 못하여 선구자라는 노래, "일송정 푸른 솔은---" 을 한바탕 외쳐 불러야 속이 후련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그와 같은 조선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 만주 벌판에 대한 옛 향수를 자꾸 느끼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정작 중국인들은 만주(滿洲)라는 말 자체를 과거 자신들이 일본에 의해 겪었던 치욕의 역사를 돌이키는 말로서 생각하여 듣기 싫어하며 쓰지 않는다. 더욱이 한국인들이 이곳이 바로 우리 조상 고구려 사람들의 영토였다는 것을 내세워 "만주도 우리 땅"이라는 등의 눈치 없는 소리를 하게 되면 비록 우리는 그것을 반 농담 삼아 하는 말일지라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며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55개의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있는 다민족 국가로서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이 국가의 존립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강 위구르족과 티벳족을 위시한 정치적 독립을 꾀하는 소수민족과 더불어 역사적 배경 속에서 향수를 느끼는 한국인들에 의해 조선족들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는 것이다. 비록 소수 민족의 인구 비율은 한족에 비해 10% 미만이지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민족의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중국 정부의 입장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 학교로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조선족 학생들 앞에서 내세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를 세운 목적 자체가 민족 운동을 하여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자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 곳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 의미를 신앙의 눈으로 승화시켜 재해석하게 된다.

중국 지도를 보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언젠가 우리 졸업생 중 하나가 중국과 한반도 지도를 보여주며 닭이 젖통을 물고 있는 형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다시 말해 한반도는 중국이라는 닭에게 복음의 젖을 먹이기 위해 하나님이 물려주신 젖통이라는 것이었다. 때때로 닭 주둥이에 매달린 먹이처럼 느껴지는 한반도가 조금은 처량하게 보이던 나는 기발한 설명에 귀가 번쩍 뜨이며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실로 이곳은 선구자와 독립투사의 땅이다. 어찌하여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사람들만이 선구자이겠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보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 미래의 대륙에 먼저 들어와 새 시대의 일꾼들을 양성하고 있는 이 학교의 교직원들이야말로 선구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찌하여 지난날 일제 치하에서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만이 독립투사이겠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상실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신의 안일함을 버리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묵묵히 일하고 있는 우리 교직원들이 바로 독립투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를 위시한 지난날의 선구자와 독립투사가 모두 그리하였던 것처럼 이들의 가슴속에도 고향 땅을 떠나올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아야했던 손가락질과 조롱의 남모르는 아픔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땀과 피에 의해 나라가 회복되었듯이 그리고 그 후에야 그들을 회고하는 시비가 세워진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지는 그날 천국에서 이들을 위한 기념비가 찬란하게 세워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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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

중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때때로 공산당에 가입한 학생들과 친해지는 일이 종종 있게 된다. 자라면서 공산주의자라면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의식 교육을 받아왔던 반공 세대인지라, 처음에는 마음 한 구석에 그들을 향한 왠지 모를 거부감과 배척 심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러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교회 언저리를 배회하는 얄팍한 학생들보다는 신실하게 공산당에 충성하는 학생들이 오히려 정직하며 믿음성이 가는 재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더러는 공산당에 평생을 바쳐온 나이 든 중방 영도 중에는 도무지 예수 믿는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인격과 합리성을 지닌 존경스러운 분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위해 봉사하며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살아가기를 가르치는 공산주의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윤리적 가르침과 결코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세운 마르크스 자신이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었으니 그 뿌리가 맞닿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공산당원이었던 인물로서 소학교에서부터 가르치며 숭상하는 뢰봉(雷鋒), 열악한 산간지역에서 티벳인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숨진 공번삼(孔繁森)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 희생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상적인 공산주의자의 교과서적 인물로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세워져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기준을 능가하도록 삶으로 부딪혀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그들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살 수만 있다면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1)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 일로 길림성의 수도인 장춘(長春)시에 출장을 갔다가 K 대학에 있는 조선족 교수 S씨를 방문했다. 그는 일전에 여름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우리학교에서 계절학기 과목을 한 과목 맡아 강의를 한 적이 있었던 분이었다. 마침 내가 방문한 그 시각에 S 교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기계공학과의 교직원들을 상대로 매주일 있는 공산당 정치학습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무실과 같이 여러 교수들이 함께 쓰는 사무실에서 따끈한 중국 차를 마시며 한참을 기다리니 S교수가 들어왔다. 그는 깜짝 놀라며 마치 오랜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출장에 관련된 도움을 잠시 받은 후, 우리는 곧바로 저녁 식사를 위해 함께 시내로 나왔다.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식당에서 푸짐한 진짜(?) 중국 요리를 시켜놓고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대부분의 조선족 학자들이 그러하지만 그들에게는 험난한 민족의 역사를 지켜온 선조의 후예라는 강한 자존심이 있다. 그러나 한편 그들도 약한 인간인지라 한국에서 찾아온 우리들에게는 선진국에 대한 동경심과 더불어 경제적 열등의식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에 여간 해서는 진심을 털어놓는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S교수는 성품이 소박하고 일단 우리학교에서 한달 이상을 한솥밥을 먹었던 과거가 있는지라 비교적 격의 없이 대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술이 한두 잔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요즈음 자신이 가정에서 처한 가장으로서의 딱한 처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S 교수는 중국이 개방되기 이전에는 교수로 평생을 공산주의에 헌신하며,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세우며 비교적 단란한 가정을 꾸려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개방 이후에 아내가 밖에 나가 장사를 하더니 대학 교수인 자신보다 돈을 더 잘 벌기 시작했고, 점차 자신의 위치가 돈밖에 모르는 자식들 앞에서 손가락질 받는 못난 가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괴로움 때문에 요즈음 자신이 심한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며칠 전 자기와 가까운 친구가 느닷없이 성경책을 한 권 가져다주며 읽어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그 책을 만지는 것도 겁이 났는데, 차츰 궁금한 생각이 들면서 과기대에서 만났던 교수들의 얼굴이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그들이 다니던 교회에서 도무지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지 궁금했었는데, 내친김에 자기도 교회를 한번 나가볼까 고민을 하고 있던 중 때마침 내가 찾아오자 너무 놀라고 반가웠다는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하나님이 오늘 이 사람을 나에게 붙여주셨음을 깨닫고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런데, 술기운이 조금 더 오르더니 그는 우리 학교를 방문하던 시기에 자신이 받았던 충격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한달 간 가르치는 동안에 중국에 그런 대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마음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의 표정과 웃음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중국 아이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자신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지나다니는 학생들이나 외국서 온 교직원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심지어는 자신보다 한참 연배가 위인 노교수들 조차도 자기를 보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도무지 중국의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처음 며칠간은 S교수는 이미 습관처럼 굳어진 대로 피우던 담배꽁초를 복도에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다녔는데, 가만 살펴보니 복도가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하더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다른 교수가 허리를 굽혀 담배꽁초를 주워 휴지통에 버리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난 이후에 이분이 마침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본질상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공산주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과도 현상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종교 역시도 인간의 발전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종의 결핍 현상이며, 공산주의 세계가 도래하면 자연히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S교수는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그토록 열렬히 신봉하고 배웠으며 지금까지 가르쳐 오고 있는 공산주의 이념이 바로 이 학교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다. 또한 이 학교를 움직이고 있는 외국 교직원들이 모두 자원 봉사자로서 중국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온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 놀라움은 가중되었다. 자신이 우습게 여기고 비판하여 왔던 기독교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교직원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항상 기쁨과 웃음에 찬 생활들을 하며 서로 돕고 아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바로 자신이 지난날 그렇게 꿈꾸었던 공산주의 사회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부패한 공산당의 모습에 염증과 회의를 느껴오던 그가, 자신의 청춘을 바쳐 신봉했던 공산주의 이론이 실천되고 있는 현장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S교수는 집으로 돌아온 후, 과연 자신들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의 신념과 공산주의 이론이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그가 도달한 한가지 결론이 있었다. 취중에 그가 고백한 내용은 이러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있고, 공산주의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것밖에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날 우리는 늦게까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차 시간이 되어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2)

연변 과학 기술 대학에서 북한을 돕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관련되어 북한 과학자들이 대여섯 명씩 방문하여 학교 기숙사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가는 일이 더러 있었다. 북한이 바로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비극적 분단 역사의 족쇄를 찬 채 건너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슴에 안고 지내던 우리 교직원들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스스로 찾아온 그들을 향해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 체제가 다르고 사상이 다른 세계에서 온 그들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다. 잘못하면 그것이 모처럼 바깥 세상으로 나들이한 그들의 입장을 어렵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편하게 대화할 방법을 찾아 전전긍긍하다가 김진경 총장의 제의로 시작한 것이 "밥 먹이기 릴레이 작전"이었다. 더러는 보름씩 또는 한 달씩 머물다 가는 그들에게 교직원 가정에서 돌아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식사를 초대하여 풍성한 음식으로 융단 폭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그 첫 스타트는 우리 집에서 시작되었다. 즉흥적으로 일을 잘 벌이는 김 총장이 북한 손님들에게 남조선 동무 집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의를 하고서는 돌연 우리 집으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두 시경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으니 "당신 말고 애인동무 바꿔."하는 김총장 특유의 카리스마가 튀어나왔다. 귀한 손님들을 모시고 갈 터이니 저녁상을 잘 차려 놓으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내가 시장으로 이리저리 총총걸음을 오가며 황망히 움직여 겨우 저녁상을 마련하자 곧이어 김총장 내외와 함께 빼빼 마른 북한 사람 다섯이 들이닥쳤다. 학자들 사이에는 항상 그들을 감시하는 지도원 동무가 한 사람 끼어 있기 마련이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약간은 겁먹은 표정으로 우리 집에 들어오던 그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남조선 괴뢰 집에 오니 기분이 어때요? 하하하..." 하며 긴장된 분위기를 일부러 흩뜨리는 김총장의 유머에도 여전히 조심스레 숟가락을 움직이며 말이 없던 그 얼굴들...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식사 후에 아내가 오르간으로 고향의 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르간의 페달을 신기한 듯 웃으며 구경하던 그들이 귀에 익은 가락이 흘러나오자 곧 얼굴이 풀어져서 함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까지 부르는 감격을 맛보았다. 김진경 총장은 북조선 동무들이 아무 격의 없이 우리 남한 형제의 가정을 방문하여 이렇듯 화기애애하게 함께 식사를 나누며 즐긴 것은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라며 감개무량해 하였다.

손님이 떠나고 난 후 뒷정리를 하던 우리 부부는 집안에 걸어놓았던 십자가가 사라진 것을 알고 순간 깜짝 놀라 긴장하였다. 알고 보니 북한 손님이 온다니까 그 당시 소학교 2학년 짜리 아들 다니엘이 겁을 먹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내어 자기 침대 이불 속에 감추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였었다. 그러나, 분단의 오랜 장벽도 같은 민족의 언어를 타고 흐르는 촉촉한 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바늘구멍 같은 틈새를 타고 얼어붙은 감정의 실낱같은 물줄기가 녹아 흐르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서로 간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결국 함께 어울러져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쳐 부르는 감격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제3국에서 남한 사람과 접촉만 하여도 큰일 나는 줄로만 알던 그들이 우리의 가정들을 속속들이 방문하여 함께 웃으며 음식을 나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통일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딛게 한 민간 외교의 쾌거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특별히 오간 이야기조차 없다. 그냥 우리의 전통적인 예절로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였고 우리가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을 뿐이다. 아마 사모님들은 쌀을 씻으면서도 기도를 했을 것이다. 말은 안 하였을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사는 모습을 통하여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매끼마다 기도하며 식사하는 우리들을 통해 어쩌면 식탁 가운데 함께 하신 예수를 그들이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학교 기숙사에 머무는 동안 그들이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벽이면 교수와 학생들이 어울려 운동장을 뛰는 모습들..., 활짝 핀 얼굴로 웃으며 지나가는 복도의 학생들..., 매일같이 뷔페 식으로 누구나 마음껏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 그곳에서 교수와 학생이 항상 함께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웃고 이야기하며 식사하는 식탁의 풍경들..., 그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부러움과 충격의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정해진 한 달이 지나고, 돌아가야만 하는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사랑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기숙사 식당에서는 그들을 위한 마지막 환송 만찬이 베풀어졌다. 사모님들이 정성껏 마련한 선물들을 한아름씩 받고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들은 인사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간 후에 뜻밖에도 그들 중 한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진 고백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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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시온의 대로(Pilgrimage)

얼마 전 우리는 학교 내에 새로 지어진 교직원 숙사로 이사를 했다. 중국에서 벌써 세 번째 집을 옮긴 셈이다. 아직 건물 주변이 정리가 되지 않아 흙길이고 어수선한 가운데 있지만 집안만은 아내의 억척스런 손 맵시로 단장되어 깔끔하고 아담하게 꾸며졌다. 우리 학교 건축과 교수님들의 설계와 시공으로 직접 지어진 아파트이기에 연길시에서는 보기 드문 세련된 구조가 마음에 든다. 큰 아이 다니엘은 이사 온 날 자기 방을 둘러보며, "아빠, 이 집은 한국 아파트랑 비슷하다. 그지?" 하며 좋아했다. 중국에서 아주 눌러앉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워 이사가는 것을 반대했던 아내도 막상 이사를 하고 보니 새집이 무척 좋은가 보다. 프로판 가스로 온수기를 연결하여 부엌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하였더니, 설거지하는 것이 마냥 신나고 즐거워 보인다. 그 동안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드는 찬물에 손을 담그게 하여 거칠어진 손등을 때때로 펴 보이며 "오르간만 치던 손을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어..." 라며 눈을 흘기던 것이 생각난다. 새로 마련한 소파가 너무나 좋은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일부러 앉아보며, "야, 참 좋다. 여보 나 소파 잘 바꾸었지?" 하며 눈치를 보며 내 동의를 구한다.

출장을 다녀오던 날, 연길 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가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전전긍긍하더니, 내게 상의도 없이 소파를 바꾸었다고 마침내 실토를 하는 것이었다. 근 10년간 포항서 가지고온 세간사리를 그대로 지니고 살다보니, 여기저기 낡고 고장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냉장고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TV 화면도 찌그러지기 시작하고, 소파는 여기저기 다 떨어져서 보기 싫은 속살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소파를 바꾸자고 그녀가 몇 번 운을 띄웠지만, 아직 앉는데 지장없는 걸 왜 바꾸냐고 일축했었다. 깔끔하기로 유명했던 아내의 눈에 그 소파가 얼마나 보기 힘이 들었을까? 그 동안 참아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집안 정리가 끝난 후, 아내가 아끼는 오디오 세트와 CD들을 마저 정리하고 새로 단장된 거실에서 아내가 틀어주는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스트레오로 듣고 있으니 정말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을 정도로 아늑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10년 전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후, 나는 힘들어하는 아내를 데리고 서둘러 여기저기 중국에 관련된 단기 훈련을 받으러 다녔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강사로 등장한 중국 사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중국은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나라이니 짐을 많이 가지고 갈 생각을 말고 양손에 가방 두 개만 들고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기가 아끼던 살림들을 모두 버리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한숨만 쉬고 있었다. 자기의 손때 묻은 가구며 주방기구 오디오 세트 피아노 오르간을 모두 두고 가야 한다니... 그녀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저녁때만 되면 그녀는 가장 센티멘탈한 음악을 골라 틀어놓고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생활과 음악들을 즐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다가 마침내 엉엉 울음을 터뜨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서 사역을 한다는 어떤 분이 우리가 중국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소문으로 듣고 우리 집을 갑자기 찾아왔다. 아내의 고민을 듣더니, 무슨 말이냐? 가방 두 개만 가지고 가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니 중국을 사랑할 수 없다. 중국을 모르고 그저 허튼 소리들을 하는 사람들이니 신경 쓰지 말고 이 집에 있는 물건은 모두 싸들고 가라. 쓰레기통 하나도 중국에서는 다 쓸모가 있으니 버리지 말고 전부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아내는 힘을 얻어 열심히 이삿짐을 싸게 되었는데, 나중에 중국에 도착해 보니 바쁘게 짐을 싸다가 정말 쓰레기통 안의 쓰레기까지 몽땅 가져왔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의 약한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로하시려고 친히 보내신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오랜만에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

1994년 7 월 11일, 이삿짐 컨테이너가 중국을 향해 떠나갔다. 그 안에는 지난 결혼 10년간 아끼며 가꾸고 쌓아 왔던 우리 가족의 애틋한 살림살이들이 전부 실리어 있었다. 밤 열시나 되어서 끝난 작업 후 차가 막 떠나려고 할 때, 빈집을 한바퀴 둘러보던 우리는 발코니 한구석에 큰 더미로 쌓여진 빈 상자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언젠가 이사갈 때 쓰려고 보관하여 오던 미국서 가져온 온갖 가전 제품들의 오리지널 박스들이었다. 시간에 쫓긴 일꾼들이 미처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모든 이삿짐을 새로 포장하여 실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상자들을 보는 순간 아내는 갑자기 그것들을 모두 싣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중국서 돌아오려면 그 상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삿짐을 가득 실은 차에는 더 이상 짐을 실을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직감했다. 이 빈 상자들이 그녀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 . 떠나려던 차의 문을 도로 열고 나는 이미 실린 물건들 중 몇 박스를 끄집어내리고 빈 상자들을 싣게 하였다. 일꾼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빈 상자 안에 담긴 아내의 울음 섞인 소망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우리는 깨어났다. 넓고 환한 사각의 빈 공간 안에 갑자기 남겨진 우리 세 식구는 망연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다니엘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더니 갑자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것이 배고픔의 울음이 아니라 아이에게 밀어닥친 어떤 불안감의 표출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이를 달랜 후, 주스 한잔을 먹여 학교에 보냈다. 사방을 둘러보던 아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린 이제 몸뚱이 셋과 가방 세 개만 남았군요."

그날은 다니엘의 마지막 등교일이라 우리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들고 아이의 학교로 향했다. 포항제철 서 초등학교의 교정은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꾸벅꾸벅 졸며 평화로운 자태로 우리들을 맞이했다. 아름다운 교정과 깨끗한 편의 시설들이 시야로 파고들며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천진 무구한 어린이들이 법석대는 책상 사이를 누비며 과자를 나누어 준 후 작별 인사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교정을 나섰다. 담임 선생이 귀띔하길 다니엘이 줄곧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자기가 4학년이 되면, 서 초등학교로 다시 전학 올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자동차로 아이와 아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사무실로 향하려 하자, 참고 있던 눈물이 사정없이 쏟아지며 운전대의 핸들을 가리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안겨다 준 내 자신이 하염없이 미워졌다.

하루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우두커니 책상에 앉아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의 목소리가 의외로 평화스러웠다. 아내는, 오후 내내 심한 상실감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강하게 역사하시며 위로하셨다는 사실을 내게 알리고 싶어 전화를 한 것이었다. 마음의 고통 가운데도 입 속에서 "목마른 사슴"의 찬송이 이상하게 끊이지 않아 그 가사의 귀절이 담긴 성경을 찾아보던 중 시편 42편 5절의 말씀을 주시면서 말할 수 없는 평강으로 채우시더라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그 구절을 찾아보고 싶어서 옆에 놓여 있던 성경을 무심코 펼치는 순간, 할렐루야! 어쩌면 이럴 수가---, 바로 시편 42편이 단번에 펼쳐지면서 과거에 줄쳐 놓았던 5절이 내 눈에 튀어 오르듯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나는 눈물이 쏟아지며 하나님의 강한 손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강하고 깊은 위로가 파도처럼 출렁이며 내 영혼 깊숙이 밀어닥쳤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기에 한 순간도 우리를 놓치시지 않으시고 돌보시며 이렇듯 등뒤에서 함께 동행하고 계시지 아니한가? 이런 생각과 함께 그분의 임재하심이 피부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이 구절이 이제 중국을 향해 떠나가는 우리 가족에게 주님께서 친히 주신 위로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다. 앞으로 어떤 고통과 실망의 순간들이 닥쳐오더라도 오직 이 말씀 하나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라는 주님의 애정 어린 당부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날... 포항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 부부는 빈집에서 평화로 가득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이삿짐 콘테이너가 학교에 도착하던 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세간에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동역자들이 "아니 M으로 온 사람들이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왔느냐?" 며 나무라듯 말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내는 자기는 필경 이런 곳에 올 사람이 못 되는데 잘못 왔다며 금새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힘들어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창세기 12장 5절의 말씀을 읽던 중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떠날 때,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났다는 대목을 읽으며 크게 위로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아브라함과 사라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과 고민들이 마치 우리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그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 이삿짐이 많다고 반문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대부분 이곳을 떠나고 말았지만 아내와 나는 아직 중국에 남아있다. 아내는 자신이 아끼던 그 살림들이 볼모가 되어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지난 세월을 힘들게 그러나 기특하게(?) 살아내었던 것이다.

처음 정착 당시, 그 동안 살았던 쾌적한 환경을 버리고 조금이나마 열악한 환경 속으로 들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부에게는 행운이었고 좋은 훈련기간이었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히기 쉬운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주님께서 강제로 다스리시며 참 영원한 것을 사모할 수 있는 마음으로 조금씩 변화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 시절의 뜨겁고 순수했던 마음이 오히려 그리울 때도 있다. 어떻게 그 시절의 아픔과 어려움을 통과했는지....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일 뿐이다. 중국에서 처음 살던 집과... 94년 겨울을 회상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걸어 내려오면 약 30분쯤 걸리는 '뻬이따'라는 곳에 아파트를 얻었다. 연길 시내에서도 가끔 택시 값을 더 달라고 하는 변두리지만, 아파트들이 비교적 새로 지은 곳이 많고 시장도 새로 생기고 집 앞에 버스 종점도 있어서 주거지역으로는 오히려 적당한 곳이다. 저희 학교는 인적이 드문 언덕바지에 우뚝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학교 버스로 학생과 교직원들을 수송하는데, 교통편이 여의치 않을 경우는 걸어서 내려오곤 한다. 저녁 무렵 학교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짙은 안개에 싸인 연길시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다. 연길 시는 맑은 날은 먼지와 바람이 많아 호흡을 곤란케 하고, 비만 오면 온통 진창으로 변하여 보행을 어렵게 한다. 가장 힘든 것은 수도만 틀면 뻘건 흙탕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데, 그나마도 자주 끊어져서 아내를 낙담케 한다. 아내는 지난여름 내내 물과의 전쟁을 치렀다.

이곳의 겨울은 한국에 비하여 한달 가량 빨리 찾아와서 한달 늦게 끝이 난다. 매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운데 단층 벽돌집들마다 달린 굴뚝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다. 겨울만 되면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 연기가 가득 차서 연길시가 '연기시'로 바뀌고 만다. 집 근처에 다다르면 길가를 따라가며 시장 바닥의 온갖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양고기 꿰어서 꼬치를 굽는 사람들과 모락모락 향긋한 연기를 뿜는 만두집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조선말을 모르는 한족에게 손짓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하여 만두를 한 봉지 산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길에 군것질거리를 사 가지고 들어오시던 생각이 난다. 한국서 차를 몰고 다니다 보니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옛 기억들이다. 습관적으로 혹시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뒤를 살핀 후에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다. 이곳은 한국서 온 사람들을 전문으로 터는 강도들이 많아서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에는 늘 조심해야만 한다. 현관 앞에 늘어선 자전거 숲을 헤치고 5층까지 칠흑같이 캄캄한 계단을 더듬어 올라간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면 반가운 두 얼굴이 나타난다. 아파트 문이 뒤에서 철컹 닫힐 때 비로소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빛의 세계로 들어선 것을 깨닫고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개화초기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문화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며 편한 생활을 하였던 기록을 읽으며 비판하였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이해할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먼저 오신 어떤 분이 이곳에서의 생활은 이론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이곳에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은 자기 집뿐이니 최대한 편안하게 꾸미라고 충고하신 뜻도 이제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맡겨진 직분 때문에 더러는 편안한 생활 공간조차도 가슴속의 찔림이 되어야하는 심령을 우리의 연약함을 내려다보시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새 집에서 첫 날 밤을 지내고자 침대에 누우니, 집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아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치 집안에 갇혀 지내다가 10년만에 외출을 한 여자의 기분인 듯 싶다. 새 집으로 이사만 와도 이렇게 좋은데 나중에 천국에 가서 우리가 느끼게 될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다. 뒤척이던 아내가 불안한 듯 입을 연다. "여보, 우리 너무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아니에요?" 아내에게는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안심을 시키며, 비천에 처하든 풍부에 처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이든 일체의 비결을 배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었지만, 내심 어쩌면 아내의 말이 옳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안락함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믿는 자들의 인생을 나그네길이라고 말한다. 크리스천은 이생의 장막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거할 주의 장막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하신 것이 생각난다. 오직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사셨던 분... 그분에게는 이 세상에는 마음둘 집이 없었다. 어디로 가든 그를 따르겠다고 나서는 제자들마저도 그분의 마음을 위로하여 빼앗지는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나그네길에는 항상 눈물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을 통과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오직 성령만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 이후에는 반드시 천국의 영광이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주님, 이 밤에 오직 주의 궁정에 거하기를 사모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저에게도 주시옵소서.(2002.2.2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pilgrimage)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편 8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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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옛 술과 새 술

(1)

중외합작 대학으로서 중국측 조선족 교직원과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 학교의 형편상, 대내외적인 행사 때마다 만찬 석상에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그런데 그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술잔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외국에서 건너온 우리 학교의 외방 측 교직원들은 한결 같이 지독한(?) 예수쟁이들이니 술을 입에 댈 리 없고, 추운 지방에서 독한 술을 입에 달고 생활하던 조선족 분들은 으레 끼니 마다 반주를 곁들여야 하는 것으로 풍습을 지키고 있으니 양 진영의 문화적 이질감이 심각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곳 조선족들의 술 습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예전에 술꾼으로 행세하던 경험이 있는 나에게도 가끔씩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이 연출되곤 한다. 보통 조선족 사회에서는 대략 점심시간에 식사하러 나가서 얼근히 취한 후에는 집에서 한 두 시간 휴식을 취하고 들어오거나 내키지 않으면 아예 샤발(중국말로 퇴근이라는 뜻)을 해 버린다. 그러니, 우리 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한국식으로 점심시간을 정확히 지켜가며 일을 하는 풍토 자체도 그들에게는 쉽게 받아 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자기들끼리 식사하러 나갔다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들어오던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일과 시간에 술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또한 느끼기에 그 버릇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차차 고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처럼 만에 함께 하는 저녁식사 모임이 있을 때에는, 그 동안 억눌렸던 술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 외국인 교직원들에게 술잔을 마구 권해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녀 평등의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익숙해진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술잔을 돌려가며 차례로 한 마디씩 인사말을 하는 것을 술자리의 예절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호의에 한사코 거절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얄밉고 도무지 되먹지 못 한 족속들로 비쳤으리라는 것도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일단 한잔을 받기 시작하면 옳다구나 덤벼드는 그 술 세례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외방 측 교직원들은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고 모질게 거절하기 일쑤이다. 그러니 개교 초창기에는 술로 말미암아 서로 얼굴 붉히고 좌석이 서먹서먹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별히 중국측 부총장이나 당 서기와 같은 나이 많은 영도급(중국에서는 지도자를 영도자라고 함) 인사들이 건네주는 술잔은 거절하기도 민망하여 속으로는 미안한 감정이 여간 쌓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들을 해소라도 할 요량으로 가끔 집에 초대라도 할라치면 또 걸리는 것이 그놈의 술이었다. 이곳의 풍습을 따르자면 손님을 초대해 놓고 술을 내놓지 않는 것과 주인이 술잔을 비워 대접하지 않는 것은 전혀 예의에 어긋난 것이라 하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중국측 부총장과 더불어 타지에서 온 조선족 교수들을 몇 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데, 밥상을 앞에 두고 술 내놓으라고 몇 번 고집을 피우더니만 기분이 상하였던지 식사가 끝나자마자 횅하니 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우여곡절 가운데 몇 년을 지내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들이 들어가며 결국은 우리의 술 안하는 습관을 그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요즘은 억지로 권하는 일도 기를 쓰고 거절하는 일도 별로 없는 걸 보면 쌍방이 술 문제에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셈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나에게 이렇듯 술을 마시기 싫어할 뿐 아니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 것이 놀랍고 감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독히도 술을 좋아했던 과거를 가진 나로서는 가끔은 분위기를 맞춰주기 위하여 중방측 영도들이 강권하는 술잔을 받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그들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그들을 대하며 그들 역시 속히 술을 끊을 수 있는 힘을 얻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할 뿐이다.

몇 년 전 결국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신 중방 측 부총장 강의석 선생이 생각난다. 고령에다 혈압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던 그 분을 대할 때면 안쓰러운 감정이 몰려오곤 하였는데.... 언젠가 그 분과 함께 상해로 출장간 일이 있었다. 늦은 밤 단 둘이 남게 된 후, 틈을 타서 내가 어떻게 술을 끊을 수 있었는가를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신앙 간증을 하고 만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참 놀라운 것은, 술잔을 기울이며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양반이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술자리에서 내게 대한 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외부 인사와 더불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될 경우, 내가 또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미리 알고서는 아예 예비지식이 없는 제 삼자들을 향해 웃으며 "저 친구는 우리가 몇 년 동안이나 먹이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독종이야, 독종---. 그냥 우리끼리 하세" 하며 다른 이들이 나에게 술을 권하지 않도록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 주는 따뜻함을 보였던 것이다. 상해에서 그에게 전한 복음이 과연 그의 영혼에 어떻게 비추었는지.... 하나님만 아실 일이다.

(2)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깝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세월들이었지만, 나의 학창 시절을 회상해 보면 텅 빈 강의실의 창가에 서서 데모대의 외침과 최루탄 연기에 휩싸인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다가 어둠이 깔리면 학교 근처의 싸구려 주점에 삼삼오오 몰려 앉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무리들 가운데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어두운 모습만이 떠오른다. 캠퍼스 내에서는 내 삶을 전부 바쳐 외쳐댈 만한 어떤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짙은 안개 속에서 휘날리는 연 꼬리를 바라보듯 진리와 사랑의 끝자락을 찾아 허공을 헤매는 생활을 하며 술잔만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10.26에서 5.18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시국에 대학 생활을 해야했던 사람으로서 술꾼들이 항상 토로하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시대적 변명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나의 음주 행각은 그 이상의 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 같다. 선천적으로 아무리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 끝까지 남아서 마지막 술잔까지 다 비우고야 일어나는 습성이 붙다보니 결국 온 몸이 알코올에 깊이 찌들어 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더구나 술이 어느 이상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 속 깊숙이 감추어 놓았던 날카로운 비수들이 내 입술을 통해 쏟아져 나오곤 하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것을 즐기며 찾아오는 술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술좌석에서는 항상 인기가 있었고, 그것이 내가 술을 탐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술 행각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가 '선험적 술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마셔도 알코올에는 무감각한 이상체질의 소유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는 자신의 주량을 제대로 측정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술기운이 가져다 주는 일시적 흥분을 그가 미처 맛보기도 전에, 그의 앞에는 팔방으로 기울이고 엎드린 채 무절제한 쾌락 이후에 들어가야만 하는 침묵과 고통의 세계로 침잠해 버린 시체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면, 그는 술자리에서 방금 전까지 침 튀기며 오가던 온갖 종류의 사회정의와 철학사상과 민중해방의 부서진 말 부스러기들을 어지러운 탁자에서 쓸어 모아 쓰레기통 속으로 처 넣으며 전우의 시체들을 유가족에게 운구하는 힘겨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축 늘어진 시체를 어깨에 매고 호송 차량으로 운반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보름달이 휘영청 드리우고 있던 자정 녘의 대문 앞에서 탈춤을 추는 기묘한 자세로 엎드려 취면(醉眠)에 빠진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간신히 집안으로 끌어들인 후, 어머니로부터 어렴풋하게 들었던 한탄 섞인 이야기의 내용을 기억해 내었다.

그의 가계(家系)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이 나는 그런 족보를 지닌 가계였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는 - 그 이전은 그냥 미루어 짐작토록 하라 - 온 동네가 알아주는 모주꾼으로서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취해서 다니다가 말년에 술기운에 실족하여 동네 다리에서 떨어진 후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그를 이어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말 국운이 기우는 것을 한탄하며 망국 이후에는 일체 문밖 출입을 안하고 술만 퍼 드시다가 마침내 술독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는 그 대목을 특히 좋아했는데, 술독에 빠졌다는 표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퍼내기 위해 큰 항아리 속을 거꾸로 더듬다가 처박히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비유적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표현이 지니는 이중적 묘미를 상실할까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종의 돌연변이가 발생했는데, 그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나타난 두 분의 형제가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분이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본즉, 그 형제는 어린 시절 당신들의 어머니가 - 그러니 그에게는 증조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 지아비의 술 행각 때문에 너무나 고생하는 것을 뒤에서 눈물겹게 바라보다가, 우리 형제는 평생 입에 술을 대지 말자는 비장한, 일종의 도원결의(桃園結義) 같은 것을 했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 그 두 분은 술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하여 국내외 학계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이 되셨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대목에서 그의 어머니는 그러니 너도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를 통해 흐르는 술의 계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윗대에서 한 박자 쉬었던 여세를 몰아가며 4형제가 사회 각층에서 알아주는 거포로서 맹활약을 벌이게 된다. 물론 그의 아버지 역시 당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당신이 학자의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술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뼈 아픈 시대 상황, 즉 6.25 전쟁과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변명을 술기운이 오름에 따라 벌겋게 늘어 놓곤 하였다. (자전소설 중 발췌)


그 당시에 나는 일주일에 닷새 가량을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되니 거의 체력이 닿는 데까지 마셨던 것 같다. 그나마 며칠씩 건너뛰는 날은 평소에 폭음을 하던 연고로 술병이 나서 쉬었을 따름이다. 그런 동안에도 나는 끊임 없는 술의 예찬가였을 뿐 아니라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내가 그토록 술을 퍼부어 대었던 것은 내 마음 가운데 커다랗게 뚫려있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때 교회 생활을 통해 천국의 안식을 맛보았던 나에게는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의 마음처럼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가슴 속의 텅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한 무렵에도 이미 나는 알코올 중독의 초기적 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매일 저녁 술을 마셔야만 정신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오히려 온몸 구석 구석에 퍼져 있던 알코올 기운이 빠져 나가면 갑자기 찾아 오는 무력감과 초조감이 엄습하였고 손이 떨려서 커피 잔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체력의 소진으로 인한 불면증에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고통이 교만할 때로 교만해져 있던 나를 절망이라는 벼랑 아래로 내몰아 치기 시작하였고, 망각 속에 까마득하게 밀려나 있었던 하나님의 이름을 어슴프레 다시 떠올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도 생각된다. 어찌 되었건 예수 믿는 아내를 만나 내 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회복되어가던 무렵, 나는 지독하게 술 권하는 한국 사회를 떠날 수 있는 행운을 잡게 되었고 그것을 아쉬워하는 술꾼들의 마지막 고별주의 세례를 온 몸에 뒤집어 쓰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던 내가 미국 생활 3년 만에 완전히 예수쟁이로 돌변하여 돌아오니, 과거의 추억을 싸 짊어지고 내가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하던 술친구들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때로는 실망을 너머 조롱과 분노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을 떠올리면 곧바로 술을 연상하던 그 친구들이 한결 같이 의아해 했던 것은 어떻게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안 마실 뿐 아니라 아예 마시고 싶은 생각조차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더구나 내가 단순히 술을 마시기가 싫어진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강권함에 못 이겨 조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내 몸이 전혀 그것을 받아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역시 변해버린 내 자신의 모습이 그저 놀랍고 신기하여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술을 안 마시게 된 것이 내가 믿게 된 종교의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마시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도 참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도행전을 읽던 중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세례를 받고 거리로 몰려나온 성도들의 갑작스런 변화를 보고 사람들이 새 술(new wine)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장면을 접하고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결국 내가 술을 못 마시는 체질로 바뀌어 버린 것은 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새 술에 취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예수 안에서 성령 세례로 완전히 취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과거에 그토록 목 말라 하던 옛 술이 필요치 않을 뿐 아니라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할 수도 없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제 내가 마신 새 술은 취기가 없어질 때 마다 자꾸 마셔야만 하는 옛 술과는 달리 내 뱃 속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취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보니 문득 다시 한 번 깨달아지는 사실이 있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나는 오직 술 취한 상태에서만 온몸에 열이 날 뿐, 술이 깨고 나면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마치 냉혈동물처럼 다시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것이 내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온몸의 체온까지도 따뜻하게 바뀌어 버린 것을 늘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그것은 이제 내 안에 오셔서 항상 함께 계신 성령께서 새 술의 기운으로 더운 열기를 늘 발하고 계신다는 물리적인 증거를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장 18절)는 말씀처럼 세상의 좋다하는 어떤 술도 채울 수 없었던 내 영혼의 갈증을 예수라 하는 새 술이 완전히 채워 주었으며, 내 몸 속에 쌓여 있던 옛 술의 온갖 노폐물들을 다 몰아내고 진정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치유해 주셨던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도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던 이방인들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 옳았던 것이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말하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장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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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우리들의 사랑으로

지난 12월 15일 저희 대학 모든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함께 모여 찬치를 벌인 YUST 가족 연말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 공연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장장 3시간이나 진행된 공연이 숨죽이며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교직원 자녀들의 깜찍한 중국 경극 춤에서부터 대학생들의 현란한 현대무과 조선무용, 창작극, 합창, 난타, 기악 밴드부, 한국 교환학생들의 감동적인 워십 댄스와 우즈벡-카작-러시아에서 온 고려인 유학생들의 놀라운 스텝 댄스, 영어권 회화 선생들의 기발한 ㅎㄴㄴ 찬미 스킷과 중방 교직원들의 공산당 찬미 혁명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마침내 가장 인기를 끌었던 교직원과 사모님들이 함께 어우러져 연출한 쇼킹한 댄스무대, 등... 국제화 대학의 특색과 21세기의 퓨전 감각을 최대한 살린, 어느 하나도 놓치기 아까운 절목(프로그램)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특별히 이번 공연은 그 동안 매년 진행되던 학생회 주최의 세속 축제와 아내가 주도하는 조금은 성스러운(?) 작은 음악회가 하나로 어울어져 성과 속의 만남을 이루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무대도 학교 강당에서 벗어나 연변 예술극장의 큰 무대로 옮겨서 전체 교직원과 학생들이 한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계획이 되었습니다.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보이지 않는 많은 영적 어려움들이 숨죽이는 기도 가운데 해결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공연 전체가 아내의 작품(결국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지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뒤에는 프로그램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고 연출한 그녀의 손길이 닿아있었습니다. 축제의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공연이 끝나고 난 뒤 학생들과 교직원들로부터 격려와 감사가 가득한 연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신입생 중에서는 그날 밤 자신들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황홀한 분위기 속에서 마치 천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문화의 황무지와 같은 이곳에 찾아와 개간을 시작한 지 8년만에 그 열매들이 이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아내의 남모르는 수고와 눈물들이 서려 있었습니다. 아내의 첫 수업의 충격과 답답함...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아도 묵묵부답... 음표는 한번도 본 일이 없고, 소학교 때 도레미파솔 대신 1,2,3,4,5 숫자로 표기된 노래를 배운 기억밖에는 없다는 아이들... "우리는 골(머리) 속에 음악 세포가 없어서 안돼요." 라고 고개를 흔들던 그들을 붙들고 도레미를 가르치기 시작한 이래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이 유행가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의 비참한 심정... 그러나, 바하를 치던 손으로 과거에 한번도 쳐본 일이 없던 찔레꽃, 소양강 처녀 같은 흘러간 유행가를 피아노로 치기 시작했을 때 아이들의 얼굴에서 조금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힘을 얻던 일...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 노래가 해바라기라는 가수가 불렀던 "사랑으로"라는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부르다 보니 그 노래의 가사가 마치 연변으로 찾아간 우리들의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아 그 노래를 무슨 복음성가나 되는 것 같은 심정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일...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노래에 감정을 실어서 피아노로 치기 시작하자 닫혀있던 아내가 먼저 마음이 열리면서 감동을 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네...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이 가사를 부르며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칠 때 아내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감동과 은혜로 결국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마음이 학생들에게 전달이 되자 아이들의 얼굴에서 감정이 일어나고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이 노래는 연변과기대의 모든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제 2의 교가처럼 불려지며 모든 행사 때마다 한번은 불러야만 하는 마침의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 연말 축제도 마지막에 전 가족이 다함께 일어나 손에 손을 마주잡고 흔들며 "사랑으로"를 부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던 것입니다. 올 해 2002년에는 개교 10주년을 맞이하는 큰 잔치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제 연변과기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게된 "사랑으로" 노래를 기념하며 해바라기를 초청할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눈물이 서린 지난 8년... 특별히 많이 힘들고 가슴이 아팠던 중국에서의 첫 겨울을 회고해 봅니다.

<중국이라뇨>

중국이라뇨? 나 같은 사람이 중국에 가다니요? 하나님, 세상에 이런 법이 다 있습니까? 우리보다 훨씬 더 믿음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우리가 가야 합니까? 더구나 저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는데... 교회에서 반주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제가 왜 그곳에 가야합니까?

매일 아침 눈물로 외쳐대며 부인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어느새 나는 이곳 중국에 와 있다. 그리고 흰 눈으로 뒤덮인 이 황량한 시골길을 덜컹거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몇 시간을 이렇듯 하염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기도로써 그분께 항거하려 했던 내 자신의 모습이 가련하게 떠오른다. 애초부터 승부가 뻔한 게임이었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힘겹게 버티려 했는지..., 그분의 내려치심을 당하기까지 고집을 부렸던 얍복강가의 야곱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 그토록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으면, 나 역시 고집을 꺾지 못했으리라. 지금도 힘이 들 때마다 이곳에 오게 한 책임을 물어 남편에게 퍼붓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주님께서는 나를 친히 부르셨다는 사실을... 내가 단지 부르심을 받은 남편을 따라만 와야 했다면, 아마 나는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허물어지고 나서...,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한동안 오히려 후련하였다.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애쓰던 것들을 그분의 힘에 의존해서지만 잠시라도 놓고 보니 홀가분하기까지 하였다. 남들이 놓지 못하는 것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약간은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놓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순전히 착각에 불과했다. 사역지에서는 조금은 무뎌질 줄 알았던 내 자아가 내 욕심이 내 이기심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만 같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왜 이리 힘들게 반항하려 하는지?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조금씩 죄여 들어오는 포위망을 느끼면서,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게 주어진 일이며 내가 이곳에 온 까닭임을 알면서도 오히려 나는 제발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정말 가기가 싫었다.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싫었고 더욱이 그렇게 먼 곳으로 혼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다니엘을 핑계삼아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가지 말게 해 달라고..., 그런데 나는 또 져서 이렇게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이다. 차창밖에 보이는 눈 덮인 벌판이 너무나 시려서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희뿌연 서리가 시야를 가렸다.

처음 그 곳에 가던 날, 그 전날 하루종일 치마고리를 붙들고 울며 따라다니며 가지 말라고 졸라대던 다니엘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사내 녀석이 왜 그리 눈물을 짜냐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내심으로 불쌍한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아직 이곳에 적응도 채 못한 아이를 두고 하루종일 타지에서 보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기도 했다. 그런데 웬 주책인가? K부장을 따라 W교회에 들어가자 내 격한 감정은 사정없이 나를 휘몰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를 기다리고 모여있는 수십 명의 예비 반주자들 앞에 세워지고 누군가가 내 소개를 하는 동안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 없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나님 어쩌자고 이 못난 사람을 이곳까지 부르셔서 사용하시나이까?

동북 3성의 처소 처소에서 교회 반주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그들.., 내가 치는 피아노 건반의 한음 한음에 감격하며 내 말을 경청하는 이들.., 나는 그들로 인하여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내 못된 감정이 비비꼬이며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쯤이면 한창 크리스마스 프렐류드 준비로 바쁘고 연말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지낼 때가 아닌가? 힘들었던 교회 성가대의 연말 행사 준비도 마냥 그립기만 하다.

그 무렵이었다. 작년 2월 세종 문화 회관에서 화려한 독주회를 마치고 포항으로 돌아온 직후, 남편을 내게 첫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떠나자고..., 그 때가 아마 내 생애에서 가장 절정의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하필 그때 남편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로 나를 당황케 했었다. 그리고 설마 했던 그의 말이 현실이 되어 나는 지금 피아노의 '도' 음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딩동거리며 목청을 돋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주님! 당신이 진정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나에게 오르간 음악을 배우게 하시고 그토록 자랑스럽게 당신을 위해 봉사하게 하신 후에 왜 나를 이곳까지 끌어내리시는 것입니까? 아마 나는 다시는 옛날 그 자리고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와 같은 상상이 현실 자체보다도 더욱 나를 무섭게 짓누르며 힘들게 만든다.

교회에서 전도원들과 함께 하는 식사, 불결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식생활에 속으로 눈살을 찌푸려 보지만, 그들의 티 없이 묻어나는 정성과 사랑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움츠러든 나는 얼굴에 헛웃음을 가득 채운 채 감사하게 밥술을 뜬다. 혼자만 깨끗한 체 온갖 깔끔을 떨며 유난을 부리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마 이 장면을 보면 까무러칠는지도 모른다. 구토가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말로만 듣던 그들의 화장실 문화를 체험한 후, 인력거를 타고 논두렁길을 빠져나온다. 사람이 다 채워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온갖 생각들이 오고 간다. 어제 산을 넘는 눈길에서 버스가 낭떠러지로 떨어질뻔 하였던 순간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아찔해진다. 정말 중국이란 곳은 내가 싫어하던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추고 있는 곳이다. 평소에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샘통이다 하고 놀려대기 딱 알맞은 곳이다. 누더기를 걸친 냄새나는 남자들이 하나 둘씩 올라타서 옆자리를 빽빽이 채워가더니, 마침내 버스가 떠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은 버스만 떠나면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이 담배를 붙여 물고 꾸역꾸역 매운 연기를 뿜어대는 것이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무릎을 시리게 하는데, 창문은 어떻게 연단 말인가? 아예 눈을 감고 있자니 통곡을 하고픈 심정이다.

침대에 누워 하루의 일을 돌이켜 본다. 이렇게 안락한 침대에 내가 누워 있다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가지 않는다. 이곳은 바깥과는 무관한 별세계인 것만 같다. 한국서 쓰던 물건들은 거의 다 싸들고 왔고, 몸살이 날 정도로 오기를 부려가며 한국서 살던 집과 유사하게 꾸미려고 안간힘을 쓴 덕분에 집안에만 있다보면 잠시 잠시는 중국에 와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도 한다. 다 버리고 왔다고 하였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안팎으로 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듯 안식할 수 있는 것은 이 편안한 침대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분께 감사한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의 품에 돌아올 수 있도록 매순간 동행하신 그분의 자애로운 숨결을 비로소 느끼며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져든다. 부활의 새 아침을 고대하면서....(1994.11.30)

중국에서는 아내를 "애인동무"로 부릅니다. 한국이나 미국서 계속 살았다면 아내를 그저 "집사람" 혹은 "wife"로 생각하며 그렇게 살았을 나에게 중국으로 오는 바람에 이제 평생을, 마치 연애할 때 서로 다투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지만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아내를 "애인"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하신 것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내가 돕는 배필에서 이제는 동역자로 함께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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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 했네.

코스탄 현장 이야기

아바의 지팡이

한 가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지로 떠날 때까지 겪어야 하는 어려움들은 첩첩이 싸인 고개를 넘는 산행이며, 한편으로는 가로 막힌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기적의 체험이기도 하다. 부르신 이가 친히 인도하신다는 믿음 없이는 견디기 힘든 고비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하기에, 어려운 산행을 위해 반드시 든든한 지팡이가 필요하듯이, 그 지팡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 지팡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1)

영혼을 사랑하는 훈련을 통하여 새벽에 매달려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 주신 것은 광활한 만주 벌판이었다. 날마다 중국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게 하셨고, 만주에 지어진다는 대학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도가 달아 올랐다. 그러나, 중국... 그곳은 여전히 나에게는 오르기가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태산처럼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주위 환경, 전혀 믿지 않는 가족들, 어디를 둘러 보아도 내가 중국으로 갈수 있을 만한 조건들이 없는 것만 같았다.

새벽 제단을 통하여 중국을 향한 부르심의 음성을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 내가 넘어야할 고개로 처음 떠오른 것은 아내였다. 그 무렵 아내는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로, 대학의 강사로 활약하며 한창 전문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추구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 시키고 무작정 중국으로 떠나자고 말을 꺼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에 반 농담 삼아 중국에서 한번 살아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속셈을 감추고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떠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무슨 낌새라도 맡았는지 펄쩍 뛰면서 아예 말도 꺼내지 못 하도록 가로 막는 그녀의 태도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말문이 막혀 버리는 것이었다.

1993년 2월 아내는 서울의 세종 문화회관에서 기대 이상의 성황리에 파이프 오르간 독주회를 마쳤다. 어쩌면 조만간 자신의 전공인 오르간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할 그녀를 위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은 배려이셨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아내는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전공인 오르간을 최고조로 만끽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한 아내의 심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최소한 오르간 독주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채 기도로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독주회가 끝나고 서울서 다시 포항으로 내려온 후 아내가 약간의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나는 기회를 타서 마침내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꺼내었다. 비로소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내는 긴장하여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그 같은 반응을 바라 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아무리 서로가 사랑하는 부부지간이라 할 지라도 이 일은 설득하거나 강요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움직이시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다가왔던 것이다. 더불어 만일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분이 친히 이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2)

그 시절 곧바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소설 '아바'를 쓰도록 밀어 붙이기 시작하셨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아내를 설득하는 일을 지속하지 않고 오로지 글 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4월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K일보의 문학상 공모가 출근길 내 발에 밟혔다. 그러자 지난 날 학창 시절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던 글쓰기에 대한 내면의 욕구가 갑자기 치솟아 오르면서 그날 저녁 컴퓨터를 마주하고 첫 문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 역시 글 쓰는 일이 중국행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도 모른 채 시작한 작업이었다. 내가 더 이상 중국 이야기를 꺼내지 않자 아내는 내가 중국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고, 나의 글쓰기 작업에 대해 희망을 품고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글이 중반의 고비를 넘기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의 윤곽이 잡혀가자 나는 곧 이 일이 우리를 중국으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철저하신 계획 속에서 진행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고된 하루의 일과 후에 시작되었던 한밤의 깊은 대화 속에서 주님은 어김 없이 나를 만나러 찾아 오셨고,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이 컴퓨터의 단말기 속을 헤매면서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 분의 자애로운 눈길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고야 마는 지난 날의 추한 단상들을 생각하며 매일 밤 나는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내게 질문을 던지셨다. "아직도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모르겠느냐?" 글쓰기를 시작한 후 하루에 평균 4시간의 수면을 취하면서도 내가 새벽마다 일어나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내도 곧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었다.

그 당시 나는 새벽 기도 시간에 모세 오경을 다시 보게 되었다. 출애굽기를 통하여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이 곧바로 나에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들고 있는 지팡이 곧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아바'가 바로 모세가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께 받았던 그 지팡이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하고 반문하는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하고 말씀하심으로 나에게 말씀의 징표를 주시기 시작하셨다. 장남으로서 퇴직하신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문제 등 현실을 돌이켜 보며 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싸인 채 "주여, 정말 이것이 당신의 뜻이 분명합니까?" 라고 재삼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가르는 장면 앞에서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라는 말씀을 통하여 내게 주신 지팡이가 무엇인지 우리 가족이 건너야 할 바다와 육지가 어디인지 분명히 살펴보게 하셨다.

그 시절, 나의 질문 섞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이 얼마나 강렬하였던지 나는 새벽마다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기쁨과 황홀감이 파도처럼 몰려와서 내 심령과 온 방안을 가득 채우는 체험을 하곤 하였다. 또한 그 당시보다 내가 깊고 넓은 중보기도를 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직장 동료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위해 새벽마다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눈물로 매달리는 중보 기도를 하였다.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도 제목들이었지만 결국은 그 기도의 열매들을 거두시고야 마는 하나님을 후일 경험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오히려 그 분에게 "당신의 뜻일진데..., 이러이러한 것을 해 주십시오" 라는 식으로 여러 가지 요구를 하게 되었다. 그때 미리 받았던 확실한 기도 응답 중 두 가지가 부모님들의 구원과 약속의 자녀로서 우리 부부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둘째 아이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또한 아내의 마음을 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쓰고 있는 소설 '아바'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책으로 출판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아내에게 보여 줄 분명한 징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성령님의 반응은 너무나도 즉각적이고 확실하여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한 기쁨과 확신으로서 그 요구를 들어 주시겠노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3)

소설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나는 한 가지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강형수라는 한 젊은이를 통하여 마치 나의 지난 날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갈등과 방황 속에서 아바 아버지를 발견하기 위한 긴 여로를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려 가는 동안, 나는 가능한 한 신앙적 메시지의 무절제한 표출로 인하여 믿지 않는 독자들의 반발 심리를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작품의 문학성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흔히 신앙적 메시지를 앞세우다 보면 작품성이 떨어지기가 쉽다는 것을 신앙 소설들을 읽어 오면서 평소에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형수가 천신만고의 고통 가운데 회심하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과연 구원의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여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지닌 모세의 지팡이로서의 의미를 생각할 때, 복음을 과감하게 선포하고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이끌림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K일보사의 기독교 신앙적 배경을 생각할 때 그와 같은 점이 크게 문제시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 끝에 마침내 문학성을 약간 양보하더라도 복음의 메시지를 직접 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그 같은 생각 가운데에는 K일보사의 문학상 공모라면 복음 선포가 하등 문제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는 심리도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은 K 일보의 문학상 공모는 종교부가 아니라 문화부에서 주관한 행사로서 기독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출애굽기가 끝나고 소설이 완성되자 나는 당선을 확신하며 그 원고를 프린터로 뽑아서 K일보사로 보내었다. 6개월간 신들린(?) 듯이 써 내려가던 원고지 2,600매 분량의 장편 소설을 탈고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성령님께 약속 받은 글이었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원고가 내 손을 떠나고 더 이상의 숨 가쁜 집필 작업이 없어지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침 기도 시간에 이전과 같은 기쁨과 확신에 찬 성령님의 응답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히려 머릿 속에는 자꾸만 소설 당선의 상금이 오락 가락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잡념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먼저 응당 십일조부터 해야 할 것이고, 분명 하나님께서 부모님들도 책임지신다 하셨으니 부모님 부양비로 얼마를 떼어 놓자. 그리고 아내가 이전부터 말해 오던 대로 좋은 전자 오르간을 한 대 사서 중국으로 가지고 가자. 그러면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위로 받겠지. 그래 틀림 없이 약속을 하셨으니, 아마 당선금을 통하여 내가 당면한 여러 가지 현실적 난관들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실 것이다 등등....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생각들이 한 번 머릿 속을 스치기 시작하자 불붙었던 중보 기도의 문이 막히기 시작하였고, 기쁨도 점차 사라지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며칠간을 그와 같은 상태로 보내던 중 나는 출애굽기에 연이어 읽기 시작한 레위기 말씀을 통하여 내가 쓴 소설 '아바'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지팡이일 뿐 아니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레위기 2장에서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라는 대목에서 문득 내가 드린 제물 속에 어느새 누룩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매일 아침 레위기를 읽을 때마다 등장하는 흠 없는 수컷, 흠 없는 수양, 흠 없는 수송아지...들을 태워서 바치는 제사를 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길이 얼마나 순결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다.

레위기 10장에서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려던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멸망을 당하는 장면을 통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생각하나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는 제사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 11장에 이르러서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내시는 참 이유는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무슨 특별한 사명을 감당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 가운데 건지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참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시는 가장 본질적인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고 엄숙하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묵직하게 내 심령에 다가오자 결국 우리가 떠나는 이 길이야말로 내가 거룩하게 되기 위한 길임을 알게 되었다.

레위기 20장을 통과하면서,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는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우리를 구별하여 불러내신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날은 그와 같은 상념 가운데 휩싸이며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당치 못 하는 심정을 토해 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십자가 위에서 나를 굽어 보시는 예수님의 자애로운 얼굴이 떠올랐다.

제사장의 세족(1993년 11월 25일 아침 QT)

주여 저의 발을 씻겨 주옵소서
저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내어 주옵소서
주의 성소를 밟아 더럽힐까 두렵사오니
주여 저를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

내 마음은 주가 거하는 성소
먼지 묻은 발자국으로 얼룩이 질 때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찰 때
예수님 수건을 두르시고 다가 오시네

그가 물을 받아 내 발을 씻기시네
주여 내 발을 씻기지 못 하시리이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주여 그리 하오면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느니라

나는 다시 성소로 들어가네
휘장을 젖히고 지성소로 들어가네
기다리시던 주님과 마주치네
보고픈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네

그 순간, 내 눈가엔 기쁨의 이슬
주님의 입가엔 수정 같은 웃음
주가 내 눈물을 닦아 주시면
내 입가에도 환한 웃음

(4)

내가 다시금 회개의 기도를 통해 회복되고 정결한 마음을 품기 시작한 후, '아바'를 통한 증거를 보고서 중국행을 결정짓겠다고 하던 아내에게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그 무렵 나는 아내 역시 매일 아침 기도로 매달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 차리고 있었다. 아내의 힘들어하는 모습 속에서 그저 중보로써 말 없이 도우며 지나던 어느 날, 퇴근 후에 돌아와 보니 아내의 모습이 환하게 빛나며 광채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 후에 느닷 없이 아내가 웃으며 다가 앉더니 내게 줄 좋은 선물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어리둥절하며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 확실한 증거를 받았다며 중국으로 떠날 것을 순순히 제의하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물론 그 이후에도 여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감정의 기복을 겪으면서 계속 힘들어하였지만, 한 번도 중국으로 떠나는 것에 대하여 철회하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만큼 하나님은 아내에게도 철저히 역사하셨던 것이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의 기도 가운데 같은 날 동시에 <믿음의 글들>을 출판하는 홍성사를 떠올려 주셨고 그것이 바로 소설 '아바'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아내의 결단으로 한 고비를 넘기자 우리 부부는 이제 중국으로 떠나는 것을 기정 사실처럼 여기게 되어 버렸고, 그 다음 넘어야 할 고개인 교회와 부모님들을 향해 기도의 포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승낙을 받아 내기 위해서 한 달 이상을 기도로 준비한 후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반주자로서 고등부 반사로 제각기 한 몫을 담당하던 일꾼들을 놓치는 아쉬움으로 목사님과 당회에서는 절대 반대 의사를 표하였다. 꼭 기독교 교육이 받은 소명이라면 곧 포항 근교에 개교하는 기독교 대학인 한동대학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시며 당장 한동대학의 지원서를 써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부부의 결심과 그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 때마침 소설 '아바'의 출간 소식 등과 더불어 결국 우리 부부의 중국행이 철저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 차리고, 교회에서도 결국 허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경륜이 짧은 양가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은 더욱 난감한 일이었다. 내가 미국서 신앙 생활을 다시 시작한 이후, 거의 강제로 이끌다시피 하여 얼떨결에 교회 생활을 시작하신 본가의 부모님도 그럴 것이었지만, 더욱이 처가의 부모님은 아직 교회도 나가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그 같은 결정을 양가에서 절대 받아 들이지 않으리라는 걱정이 앞섰고, 아마도 이 고비를 넘기기 위해서는 설득과 투쟁을 동반한 장기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94년 구정을 기하여 단단히 마음의 무장을 하고 찾아간 양가의 부모님은 너무나 뜻밖에도 단번에 우리의 중국행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이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차를 몰고 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오히려 어리둥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함께 자리를 같이 했던 동생들을 통하여 나중에 들어 알게 된 사실은, 양가의 부모님이 모두 내가 마치 그 동안의 닦아 왔던 전공을 모두 포기하고 신학으로 다시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선전 포고를 하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싸인 추측들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중국 대학으로 간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안도하는 착각(?)을 하셨다는 것이었다. 미국서 돌아온 이후 내가 너무 교회 일에 빠진다고 내심 거리껴하던 그분들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자세한 진상을 파악하고 섣불리 허락한 것을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아무튼 부모님들의 눈을 살짝 감겨주신 일 조차도 하나님이 친히 하신 일이요 그 동안 우리 부부의 끈질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깊이 깨닫고 있다.

(5)

중국행을 결정하고 난 후, 비로소 사역지의 상황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고려하신 하나님의 세심하신 배려였다. 한국의 60년대에 해당한다는 말을 듣고 최소한 공해 없고 물 맑은 시골이 아니겠는가 하고 막연히 추측하던 중, 현지에서 잠시 귀국한 분의 보고를 들어보니 웬 걸..., 여름철에는 수시로 수돗물이 끊어져 고생하고 그나마 나오는 물은 뻘건 흙탕물이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겨울철에는 섭씨 영하 25도의 맹추위와 온 도시를 자욱이 덮는 유연탄의 매연으로 시야를 가린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곳에서 고생할 아내와 아이의 가련한 모습이 떠올라 가슴을 솜뭉치로 틀어막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함께 떠나기로 결단한 아내야 어차피 자신의 믿음으로 극복해 나간다 치더라도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 나서야 하는 아이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한단 말인가? 막 학교에 입학하여 아름답게 단장된 아파트 단지를 누비며 활기 찬 생활을 하고 있는 철 모르는 7살짜리 아이에게 과연 부모의 이 같은 결정이 받아 들여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 후로 아이에게 가능한 한 중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넣어주기 위하여 만리 장성이 그려진 그림 화보를 보여 주기도 하고,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 대하여 동경심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에게 최대한의 과장된(?) 설명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평소에 쾌활하고 말이 많던 아이가 중국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일체 입을 열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충격을 줄까 보아 중국행에 관한 일은 일체 비밀로 붙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우리 부부 사이의 대화들을 조금씩 엿들어 분위기를 짐작하고 있었던지..., 미루어 짐작컨대 그 무렵 부모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통하여 어느 정도 눈치를 채어 가고 있던 아이는 혼자만의 두려움과 고민에 싸여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주일 예배가 끝난 후, 교회의 담당 장로님이 다가오면서 마침내 우리 가족의 중국행을 둘러싼 이야기를 했다.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아빠, 정말 우리 중국으로 가는 거야? 난 안 갈래...." 하며 얼굴이 하얗게 되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돌아서서 찻길을 향해 막무가내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너무나 당황하여 아이를 붙잡으려고 내쳐 달려가 손목을 낚아챘다. 울먹이는 아이를 겨우 끌고 와서 차에 밀어 넣고 무작정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살아온 동안 그때처럼 당황했던 적이 없었다고 회고될 만큼 그 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아이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특별히 우리 아이가 평소에 아빠인 나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감을 보여 왔으며 한 번도 그 아이가 내게서 도망치는 것을 상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운전을 하는 동안 줄곧 입술이 바싹 말라 오고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뒤를 힐끗 돌아보니 아이는 물기 있는 눈을 껌뻑이며 달리는 차창 밖의 거리를 처량하게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침대 머리에 앉혀 놓았다. 어떻게든 잘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훌쩍이는 아이는 완강히 고개를 내저으며 좀체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눈 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무작정 아이의 손을 붙들고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시작했다. 내가 무엇이라 기도했는지 잘 떠오르지도 않지만 그저 성령께서 아이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만을 눈물로써 매달려 간구했던 것 같다. 아멘, 하고 기도를 마치자 아이가 따라서 작은 목소리로 아멘을 하였다. 한참 만에 눈을 떠보니 아이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평안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기도하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는 줄곧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침묵이 잠시 흐른 후에 아이가 말했다. "아빠, 그럼 우리 꼭 다시 돌아올 거지?" 나는 아이를 품 속에 깊이 껴 안았다. 그 순간 위로의 성령께서 우리 두 사람을 어디론가 사정 없이 휘몰아 가시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허락하신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이 임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희망의 불씨로서 자식을 고대하게 한 이후로 자식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향한 통로가 되어왔다. 자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식이 받는 고통을 바라보는 아픔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이해한다. 이 고통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치밀하게 계획하신 것이며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그 절정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중국으로 보내실 때 겪게 하신 이 모든 일들조차도 처음부터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신 일이었다고 지금도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이 체험과 믿음이 우리를 중국 생활의 어려운 고비 고비에서 지켜 주었다. 직장 선후배들의 반대와 교회 어른들의 반대들(대부분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들이었지만....), 더러는 믿는 분들 가운데도 "아니 당신 나이가 몇인데, 지금 직장을 그만 둔단 말이야? 노후 대책을 생각해야지?"하며 극구 말리던 분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생각하면 할 수록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고, 마침내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비록 우리는 연약했지만 우리 가족의 걸음 걸음을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준비해 주신 아바의 지팡이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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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한 영혼, 사랑할 수 있나요?

내 안에 과연 타인을 사랑할 만한 능력이 있는가? 특별히 고통받고 있는 이웃을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영혼들을 사랑하겠다고 달려온 사역지에서도 종종 회의에 빠져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결론은 "없다"이다. 인류를 사랑하겠다고 박애정신을 외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인류애를 향한 철학 사상을 전개하고 위대한 저술을 남기는 일도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힘 없고 고통 받는 소자를 사랑하기 위해 내 자신을 지속적으로 희생하는 일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아원과 학교를 운영하며 더러는 영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많은 기독교인조차도 쉽게 빠지는 실패와 오류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1)

1990년 코스타의 부르심을 뒤로하고, 1991년 초 서둘러 포항에 정착한 나는 곧바로 교회 고등부 교사로 자원하여 젊은 영혼들을 향한 복음의 열정(?)을 불태우는 한편, 보스톤의 Gate Bible Study에서 훈련받은 대로 포항공대와 연구소 박사들이 몰려 사는 교수 아파트 단지에서 몇몇 가정들을 규합하여 부부 성경공부 모임을 조직했다. 주로 믿지 않는 가정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에 사역의 초점을 맞추었다. 고등부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들로 하여금 헌신케 하는 일은 정말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었고, 그 당시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 벌써 사역자로 헌신한 열매들이 있을 정도이니, 무던히도 열심히 가르치고 또 배웠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서부터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고 가장 뜨겁게 준비하며 기도하였던 프로젝트 팀의 선후배들은 시작 초기부터 거센 반발과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술좌석에서 세상 철학을 논하며 그토록 가깝고 서로 말이 통하던 친구도 예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색이 변하고 금새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술자리나 일반적인 대화에서조차 예전과는 판이하게 변해버린 나의 태도가 그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더러는 불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내가 소속된 팀은 그 당시 포항제철이 일본의 신일본 제철과 회사의 사활을 걸다시피 하며 서로 경쟁하는 차세대 신기술 개발을 위해 구성된 특별 프로젝트 팀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과 함께 일에 대한 많은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MIT에서 특별히 스카웃이 되다시피 한, 두 사람의 대학 선배와 더불어 주로 자존심(?)이 강한 S대 출신의 선후배 박사들로 구성된 이 팀원들은 출발 당시부터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는 일 중독(workaholic) 증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과연 저들이 100여 년 동안이나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꿈의 기술을 그것도 종합 엔지니어링의 경험이 전혀 없는 풍토에서 시험공장(Pilot Plant) 규모의 대형 프로세스 개발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업무지향적(task oriented)이던 팀원들은 심리적인 압박 속에서 더욱 일에 사로잡혀 갔다. 연간 예산이 100억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모든 팀원들은 주말도 없이 매일 밤 자정을 넘어 퇴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각 가정들은 점차로 남편과 아빠를 잃어버린 가족들의 원망과 한숨 속에서 점차 병들어 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내가 그들에게 교회를 나가자든지 성경공부를 같이 하자고 말을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이 우상이 되어버린 가운데 한 팀 안에서조차 다른 사람에게 서로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리가 서로를 붙잡고 있었고, 모든 팀원들의 마음이 영적으로 강퍅하게 닫혀있었다. 나는 직장에서 맡겨진 내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일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을 지키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깊이 깨달았던 한 가지는 내가 만일 미국서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면 분명히 그들과 함께 동일한 모습으로 일에 중독되어 경쟁적으로 치달았을 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든 일을 중단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예배라는 안전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예배는 죄의 욕망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영적 보호막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무튼 그 시절 나는 새벽마다 팀원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매달려 기도를 하면서도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고 의심이 자꾸만 일어나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만 같은 답답함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 군데도 영적인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M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S대 금속과에서도 항상 수석을 달리던 사람이었고, MIT에서도 함께 있어 잘 알고 지냈던 선배였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에, 나보다 1년 먼저 이 팀에 합류했던 그 선배는, 집안 배경이 불교 쪽에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일에 대한 남다른 강한 집착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적으로는 기독교에 오히려 반발심리(?)까지 지닌 사람이어서, 기도를 하면서도 마치 이 팀에서 예수를 믿게되는 가장 마지막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QT 노트를 돌이켜 훑어보면 항상 그 선배를 위한 기도가 첫 자리에 올라가 있었던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첫 1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그 같은 인간적인 생각을 산산이 무너뜨리는...,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방법을 통해 마침내 이 팀에 구원의 문을 열고 계셨다. 일이 우상이 되었을 때 가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매달려 춤추듯 희비의 쌍곡선을 오르내리던 우리 팀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사건이 발생했다. 성악을 좋아하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M선배의 부인이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병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 가정은 갑자기 산산이 깨어져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부인이 병원에 입원하자 두 아이를 각기 본가와 처가로 보내고 홀로 남게된 그 선배는 이 일로 인해 큰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며 치달아오던 그가 강제로 발걸음을 멈추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아내를 낫게 하려고 여기 저기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지쳐서 주위의 권유를 따라 부인을 데리고 기도원을 찾게 되었다. 거기서도 아내의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선배가 예수 십자가 앞에 세워지면서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던 죄악들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심령이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기도원에서 돌아온 후, 후배인 나에게 찾아와 교회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던 그 선배의 떨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동안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던 후배를 찾아와 부탁을 했을까? 교회 문을 함께 들어설 때 마침내 그동안 쌓여있던 온갖 죄악이 눈물을 통해 하염없이 흘러나오며 회개에 회개를 거듭하던 그 선배는 결국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면서 통곡을 하였다. 그렇게 견고해 보이던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손길에 힘없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일은 비단 M선배만의 일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던 우리 팀은 전원이 깊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려가던 발걸음들을 제각기 멈추고 자신들의 인생을 뒤돌아 보게끔 되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유학을 위해 그리고 또 학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가? 좀 더 나은 위치와 직장을 위해 달려왔던 지난 시간들.... 가정과 주변의 많은 것들이 내 앞에 놓인 앞날의 영광(?)을 위해 유보되었고 희생되어 왔었다. M선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학 생활 시절 이국 땅에 홀로 데려가 유학생 기숙사에 댕그라니 남겨진 아내를 희생하며, 오직 박사 학위를 위해 밤낮으로 실험실에서 밤을 지새웠고, 그 아내 역시 학위만 끝나면 모든 것이 풀리고 행복한 장밋빛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로 생각하며 참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유학 시절보다도 더 영적으로 힘들고 암담했으며, 남편들은 더 큰 욕망에 휩싸이며 날이 갈수록 가정에서 멀어져만 갔던 것이다. 비록 프로젝트에는 성공하여 우리 팀의 업적은 신문 지상과 TV의 온갖 매스콤을 타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상처투성이의 영광이요 쓰러져 가는 가정들 뿐이었다. 과연 무엇을 위해 우리는 질주했던가? 마치 이상의 시 <오감도>에 나오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질주하던 13인의 아해들처럼(그 때 우리 팀이 어쩌면 바로 그 13인의 아해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뛰는 줄도 모르면서, 남이 뛰니까 무작정 함께 뛰는..., 안 뛰면 불안해서 달려나가는 그런 인생들을 살아가던 우리 팀에게 마침내 빨간 정지(Stop) 사인이 걸리고 만 것이다. 퇴근 시간이 저녁 6시로 정상을 되찾았다. 각 가정이 주말에 남편과 아빠를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2)

고난 가운데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묵상해 본다. 폭풍우가 지나간 것과 같았던 그 시점에, 나는 조심스럽게 몇몇 동료들을 향해 함께 성경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하였다. 마침내 어느 월요일 저녁 일과 후, 4명의 팀원이 처음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펴 들었고, 꿈에도 그리던 직장에서의 첫 <월요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 후로 한 명 두 명씩 그 모임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반 년 후에는 10여명으로 늘어나 그 팀의 연구원 대부분이 창세기 성경공부를 같이 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파일롯 플랜트를 세우는 현장 사무실에서, 그 바쁜 일과 속에서, 월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함께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나누며 또 기도까지 하는 놀라운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이 형성되었다. 팀장이었던 K선배는 M선배의 일로 충격을 받은 후, 비록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 성경공부 모임을 위해 항상 월요일 저녁 시간을 비워주는 배려를 해 주었다. 거의 대다수가 한번도 성경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그들 가운데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면서 창세기에 감추어진 복음 앞에서 점차 드러나는 자신의 실존들을 깨달아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세기가 끝나고 마태복음이 시작되자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모임을 인도하면서 나는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던가?

한편, 나는 이제 막 신앙의 걸음마를 시작한 M선배와 더불어 매일 새벽 QT를 시작했다. 유난히 아내를 사랑했던 그 선배가 병원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죄책감으로 더러는 원망으로 힘들어할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홀로 남은 그의 곁에 있어주는 일이었고 함께 그 아픔에 동참하는 일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 시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다가 오셔서 가르쳐 주신 것은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아픔과 안타까움이었다.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에는 마음이 빨리 움직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무디고 더딘 나에게, 그 선배를 통하여 상처 입은 한 영혼을 어떻게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다.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일 조차도 자신의 영적 만족을 채우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가 되기 쉬운..., 그런 위선 속에 쉽게 빠져드는 그런 사람에게, 정말 고통받는 한 영혼을 사랑하며 돕는다는 것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그저 동정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으로 그의 마음에 들어가 하나됨을 확인하는 순간 그 영혼을 향한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쳐 흐르는 참 아픔의 눈물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자리로 찾아가고 내려가 그의 마음 속까지 들어가기까지...,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하였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깊이 탄식하시는 그 소리를 들었다. 어두운 새벽, 자명종 소리에 벌떡 일어나 먼저 기도를 드린 후, 그 선배의 집을 찾아갈 때의 심정....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초조히 발걸음을 옮기는 안타까움의 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아파트의 문을 두드려 잠든 선배를 깨우고, 함께 앉아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나눌 때마다 성령의 손길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어루만져 주었으며, 우리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었고 부르짖어 하나님 앞에 함께 매달렸던 것이다.

그 선배와 더불어 새벽 QT를 시작한지 약 반 년 만에 맞게된 92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우리 두 사람은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을 각기 하였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마무리 짓고 연휴를 보내야겠다는 심정으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날 퇴근 무렵, 그 선배가 내 옆에 다가와 "정 박사 퇴근 안 해?" 라고 두 번쯤 물었고 나는 일에 빠져 건성으로 "예, 곧 할게요."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 나 홀로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설레임은, 믿는 자건 믿지 않는 자이건 마찬가지로 다가온 듯, 다른 날은 찾아볼 수 없는 정적이 복도에 흐르고 있었고, M선배의 오피스는 이미 잠겨 있었다. 나는 그제야 M선배가 어디로 갔을까 하는 걱정이 와락 들어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보다가, 무작정 차를 몰고 나가 그를 찾아 온 시내를 헤매기 시작했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고 반겨줄 가족이 없는 이 거리를 홀로 헤매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혹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유혹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이전에 잘 다니던 술집까지 찾아보았으나 허탕이었다. 주님이 맡기신 한 영혼도 제대로 책임을 못 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놓쳐버린 내 자신을 생각하니 너무나 한심하고 속이 상해서 가슴이 저리기 시작했다.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그가 혹 나쁜 곳으로 가지 않기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친히 그의 곁에서 지켜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했다.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오니, 크리스마스 식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M선배는 어디다 두고 혼자 들어와요?" 혹시나 연락이 올까 해서 한참을 더 기다리다가 결국 우리끼리 맞이한 쓸쓸한 크리스마스 식탁에서 나는 첫술을 뜨다말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밤 열시가 지났을까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더니, 마치 산타클로스나 된 것처럼 선물 보따리를 한아름 안고 M선배가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 집은 갑자기 축제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홀로 북적대는 거리에 나서니 처음에는 어디로 가야할지 정말 막막하고 형언키 어려운 외로움이 몰려왔다고 한다. 음식점에서 쓸쓸히 저녁을 먹으며 흩어진 가족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선물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예수 믿은 후 처음으로 맞는 의미 있는 성탄절에 가족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산다고 생각하니 기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백화점을 오르내리며 아내와 두 아들에게 줄 선물,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줄 선물과 카드까지 고르며 사는 동안에 조금 전까지 그를 감싸고 있던 외로움은 사라지고 마치 온 몸이 두둥실 떠가는 듯한 이상한 기쁨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시간, 누군가가 자신 옆에서 바싹 붙어서 뒤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면서, 예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기 위해 바로 옆에서 친밀히 동행하는 듯이 느껴지는 이상한 체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체험이 있고 난 이후, 나는 새벽 말씀 속에서 형수(선배의 부인)가 나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때 아침마다 한 단락씩 함께 보고 있던 고린도 전후서가 끝날 때 형수가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93년 새해에 들어서면서 그때까지 전혀 차도가 없던 그녀가 갑자기 기적처럼 낫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 해 봄 부활절 무렵, 그녀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이 퇴원하여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우리는 말로 표현키 힘든 감사와 기쁨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성악가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던 그녀가 마침내 교회에 발걸음을 하면서, <월요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한 형제의 결혼식에서 찬송가 288장 <완전한 사랑>으로 축가를 불렀던 것은 두고 두고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날 성경공부 모임 가족 전원이 함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계획해 놓셨네...> 하는 찬양을 교회에서 올려 드림으로써, 교회의 믿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결혼식에 참석하였던 믿지 않는 많은 직장 동료들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며 영광을 돌렸던 것이 지금도 생생한 감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같은 기쁨의 선물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고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느껴졌던 그 가정은, 몇 년 후 형수가 다시 병이 재발하여 그 선배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고 결국 먼저 하늘 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지금도 나는 그 선배 가정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리고 안타까움에 휩싸인다 - 이제는 교회에서 칭송받는 집사로 변하여 새신자들을 섬기는데 앞장서는 분이 되었고, 나에게는 둘도 없는 형제요 신앙의 동역자요 후원자가 되었지만....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 그렇게 아쉬워하던 그 선배와 형수의 모습.... "정 박사! 자네가 가고 나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 하며 조용히 눈물을 글썽이던 그 선배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가족이 중국에 와 있는 동안 그 선배는 다시 이전의 모습처럼 일에 빠져 들어갔고, 하나님이 주신 회복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형수의 죽음을 통해 그 선배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대속의 피를 직접 체험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가 구원을 얻는 축복도 함께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과 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 분께서 앞으로 그 선배에게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지......

그러나, 그 무렵 나는 그 선배 사건을 통해 새벽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이미 중국을 향해 부르시는 그분의 강한 음성을 듣고 있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게 맡기실 또 다른 영혼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후기 : 이 글은 유학 생활 후 곧바로 한국에 돌아와 직장과 가정을 함께 섬겨야할 코스탄 후배들을 위해 기도하며 썼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 글로 인하여 사랑하는 M선배의 마음에 다시금 옛 상처를 기억나게 하여 아프게 할까봐 무척이나 조심하고 고민하였습니다. 부디 성령의 위로하심이 그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만져주시고, 또 새로운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이 선배의 가정과 두 아들에게 나타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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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부르심의 현장에 다시 서서....

내가 갑자기 <코스탄 현장 이야기>를 쓰기로 한 것은 사실 돌발적인 결정이나 다름 없었다. 지난 1년 간 <지성과 영성> 컬럼을 연재하면서 숨가쁜 현장 생활 속에서 한달에 한번씩 무언가 생각하는 글을 떠올려 보낸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을 뿐 아니라, 이론적(?)인 이야기로만 채우기에는 무언가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코스타에 참석하는 후배들을 위하여 지난 90년 코스타 이후로 내 인생 속에서 일어난 엄청난 변화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간섭하셨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고민했는지에 대한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면 그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던 것이다. 사실은 지나간 일들을 엮어서 쓰는 일이 머리 속에서 생각을 짜내는 일보다는 훨씬 쉽지 않을까 하는 속셈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또 과거의 글을 쓰려하니, 또 다른 고민이 다가왔다. 만일 단순히 과거의 정체된 이야기만을 나열한다면 잠시 동안의 흥미를 일으키는 감상거리나 감추어진 자랑거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죽은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는 이 시대를 짊어질 고민하는 코스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하여 1년 동안 이코스타와 함께 달려가며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논하였고 <문화와 복음>의 통전성을 역설했건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었겠는가? 나는 해답을 주느라고 애쓰고 있는데 여전히 그들은 같은 궤도를 그리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느낀 괴리감은 어쩌면 진리의 역사성(?)을 도외시한 데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타락한 이성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단순한 원리와도 맥을 같이하는.... 다시 말해, 내가 발견하고 깨달은 문화와 복음의 관계가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적 담론으로는 결코 바르게 전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 더러는 이론적으로, 머릿속으로는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지라도 그 글이 나타내게된 배경과 그 글을 쓴 정진호라는 한 개인의 역사를 간과하고서는 체험적 깨달음에 동참하기는 거의 힘들다는 말이다.

성경의 진리가 철학적 담론이나 논증의 형식을 띠지 아니하고 반드시 역사성을 띠고 기술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이 지혜와 깨달음을 추구하던 불제자나 철학자들이 아니라 숱한 시행착오 속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해 가는 평범한 인간들이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현재의 나는 10년 전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던 시절의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지닌 문화에 대한 개념이 조금은 급진적(radical)이라고 오해받을 만큼 달라진 것도 (사실은 문화와 유리되어 이원화된 복음의 올바른 자리 매김에 대한 노력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지난 10년의 궤적 속에서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갔던 그만한 역사가 있었기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10년 전 내가 고민하던 문제로 싸매고 있는 코스탄들에게 현재의 나를 바로 소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적 언어를 역사적 언어로 바꾸어 기술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독교에서 복음의 전달 매체로서 간증(testimony)라는 독특한 형식을 매우 중시하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여기까지 쓰다보니, 내가 이제부터 지적 논증을 가급적 피하고 역사적 논증 즉, 간증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겠다는 서두를 매우 지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셈이다. 나 원 참! 아마도 추측컨데, 새로운 시도가 될른 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가 뒤섞인 <퓨전 논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역사를 회고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에 있듯이, 과거의 사건들 속에서 역사하신 그분의 손길을 회상할 뿐 아니라, 그 당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놓쳐 버렸던 것들을 반성하며, 그 일들을 통해 오늘 나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그분의 뜻을 생각함으로 장차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가정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도 직접적인 유익이 될 뿐 아니라, 현재 비슷한 고민들을 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고 있는 기독 지성인들과 코스탄들에게 좀 더 생생한 목소리로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아무튼 종종 하나님은 뜻하지 않은 일들을 벌이게 하시고 더러는 우리를 코너에 몰아 넣으셔서 그 가운데서 당신의 음성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 또한 그 분이 시키시는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

성경 안에 흐르고 있는 성령의 역사는 끊임 없는 역동성을 띠고 있어서, 2천년 전에 발생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지금도 우리에게 수시로 흰 파도처럼 밀려와 미래 지향적인 산 비전을 제시해 준다. 내가 만난 기독교, 아니 그 속에 살아 계신 예수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내 인생의 역동성의 회복을 위한 전환점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대학 시절, 진리의 끝자락을 찾아 헤매던 그 무렵, 잡다한 철학 사상과 오히려 더 사변적인 듯이 여겨져서 매료되었던 노자와 불교, 인도 철학에 빠져 있었고, 지혜를 구한다 하며 오히려 어리석은 인생으로 치닫던 나에게, 예수의 발견, 아니 예수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어진 내 인생은 내가 그토록 고민하던 "진리를 따르는 통전적 삶"에 대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많은 생각하는(?) 코스탄들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바, 예수 안에서 깨달아지고 회복되어진 지성과 영성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풀어헤쳐 나갈 것인가에 관한 실천적 질문이 그 당시 나에게도 있었다. 그 간절한 기도와 소원이 나를 이 곳까지 끌고 온 것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90년 코스타에 참석하기 얼마 전, 나는 새벽에 기도하는 가운데 많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에 서원한 일이 있었다. 어리석었던 학창 시절의 방황을 되새기며 아파하고 있는 나를 향해서 주님은, 지금도 너와 같이 갈등하며 힘들어 하는 수 많은 젊은이들이 도처에 있으니 그들 앞으로 나아가 그들을 복음으로 일으켜 세우라는 분명한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타국으로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라는 선교적 명령이라고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비록 주님의 지상 명령이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임에는 분명하지만, 나는 코스탄들이 모두 해외 선교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으려니와 각자에게 구별되어 부르시는 부르심의 영역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주님의 선교적 삶을 향한 부르심이 제한적'이라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타문화권 해외 선교로 특별히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임할 아브라함의 축복은 모든 크리스천에게 열려 있지만, 부르심의 방법이나 방향을 정하시는 것 또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음에 대한 고백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선교적 삶에 대한 부르심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생소하고 두렵기 조차 한 것이었다. 연변 과기대에서 지금도 함께 일하고 있는 동역자 임형식 형제의 간증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있다. 예수를 믿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핀 결과,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따르라" 라는 내용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처음부터 예수님이 따라 오라고 말씀하실 것을 기다리며 어딘가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러울 만큼 너무나도 명쾌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와 같은 단순한 믿음은 없었던 것 같다. 90년 코스타에서 중국으로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때 나는 충격에 앞서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항상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이었으며, 최소한 다른 나라로, 그것도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공산주의 죽(竹의) 장막으로 들어가 삶의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부르심을 피하여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실체는 선교적 삶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 하면, 그 무렵의 나는 늦게 믿은 예수를 전하고자 하는 불붙는 열정에 이미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양육을 받았던 보스톤의 Gate Bible Study의 리더가 되어 새로 유학 오는 후배들을 거두어 섬기며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중이었고, 한시 바삐 고국에 돌아가 부모 형제 뿐만 아니라 과거에 내가 알고 지내던 술 친구들과 대학 선후배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안고 있었다 - 최소한 나에게는 술 좌석에서 사귄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간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느꼈던 두려움의 실체를 정직히 돌이켜 본다면, 그것은 낮아짐 혹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복음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는 되었지만, 현실 속에서는 여전히 육신의 정욕으로 남아 있는 부분들..., 다시 말해 높아지기 위해 치달아 왔던 지난 세월들을 한꺼번에 송두리째 빼앗길 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부인하고 외면하는 방법으로, 나는 선교지에 나가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각시킴과 동시에(모세형),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을 다른 곳에서 채우겠다는 자기 회피적 생각으로(요나형)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보스톤에서의 그 무렵 나는, 무중력 상태 우주 공간에서의 재료의 성질을 연구하는 NASA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고, 그 연구 결과가 신기하리만큼 잘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 교수는 내가 계속 남아서 자신과 함께 일할 것을 몹시 원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균형 감각을 상실할 정도로 영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결과가 그토록 잘 나왔던 것은 성령께서 지혜를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갖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빨아들이듯 한창 말씀의 젖꼭지를 물고 성장하고 있는 나를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배려(?)였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조용히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서 자신이 영주권을 내줄 터이니 학교에 계속 남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왔다.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던 J1 비자는 반드시 귀국을 하도록 되어 있는 비자였기에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에 말에 의하면 프로젝트의 중요성에 비추어 미국 정부(?)에 특별 신청을 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호의적인 제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바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예상치 못한 거절에 당황하며 이유를 묻는 그에게 나는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까지 당당하게(?) 붙였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대부분의 늦게 믿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복음에 대한 열정과 치기 어린 담대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어린 신앙을 세상의 핍박과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는 보호막이 되기도 하였다. 주 중에는 너무나 바빠서 학생들이나 박사후 과정들(Post-Doc)과 연구에 관한 토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지도 교수는 항상 주일에 수시로 우리를 불러내곤 하였는데, 내가 그 앞에서 그와 같은 신앙 선언을 한 이후로는 최소한 나에게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귀국한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나의 소명 조차 잠시 잊은 채, 서둘러 포항 제철에서 세운 RIST 연구소의 Strip Casting Project Team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연구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곳이 나의 마음을 끌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MIT에서 함께 지내던 두 사람의 대학 선배 뿐만이 아니라 대학 시절 동기, 그리고 내가 과거에 인간적으로(?) 가장 아끼던 후배가 줄줄이 한 팀에 소속되어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나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황금 어장과 같은 곳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3년 동안, 나는 마치 요나가 사흘 낮 사흘 밤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었던 것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과 대면하여 싸우며 내 자신의 감추어진 교만과 무능을 체험하였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 보내기 위해 철저한 훈련과 준비를 시키시는 기간을 갖게 되었다. 그곳은 나에게는, 모세가 갑자기 변해버린 자기 정체성에 너무 놀라 왕궁을 뛰쳐나간 후 40년 간 방황하며 낮아짐의 훈련을 받았던 미디안 광야와 같은, 아니 사도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이후에 그의 율법주의와 각종 헬라 사상을 복음 안에서 용해하기 위해 필요했던 3년 간의 용광로 길... 아라비아 사막길과 같은 곳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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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탄 현장 이야기

타임머신을 타고

1994년 8월 4일 오후 5시, 우리 가족은 마침내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시 공항에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황혼이 깔리기 시작한 활주로의 눈부심 속에서 트렁크를 잔뜩 실은 시퍼런 트럭이 좁다란 공항 출구를 빠져나와 시골 역사를 방불케하는 공항 청사 앞에 꾸물거리며 멈추어 서자 저마다 짐표를 흔들어 대며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우성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꿈꾸듯 아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풍경은 석양에 젖어 초콜릿 색깔로 빛나는 가운데 옛 기억을 더듬어 희미하게 되살아 나는 60년대 한국 거리의 모습이었다. 누추하고 생경한 붉은 간판들로 뒤덮인 거리, 먼지와 쓰레기 더미 사이를 오가는 새까만 얼굴들의 찌든 모습들이 가슴을 파고들며 잔잔한 설렘으로 젖어 왔다. 잔뜩 긴장하여 겁먹은 표정으로 낯선 거리를 내려다보는 아내와 볼에 홍조를 띤 여덟 살 짜리 아들의 옆모습을 틈틈이 훔쳐보았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생각했다. 그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이 모든 역사를 일으키신 그 분만을 의뢰하리라 하는 강한 기도가 저절로 입 속을 맴돌았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시가지를 벗어나 길 양편에 오물 쓰레기가 잔뜩 버려져 있는 언덕받이로 한참 올라가다 보니, 세로로 길게 붙은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이라는 흰색 나무팻말이 나타났다. 그러자 교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맞닿아 우뚝 세워진 연둣빛 건물이 와락 눈앞에 다가왔다. 건물 앞으로 연길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평선에는 황홀하게 타오르는 눈부신 저녁 노을이 붉게 펼쳐져 있었다. 버스에 내려서 건물 뒤편의 확 터진 벌판을 한 번 둘러보던 나는 지금 내가 내딛고 있는 이 곳이 우리 선조들이 세월의 모진 풍상을 뚫고 건너와 살던 만주 벌판의 바로 그 중국 땅이라는 사실이 채 실감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한 느낌에 싸인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학생 기숙사에 임시로 짐을 풀고 중국에서의 첫 밤을 맞이한 우리 부부는 감개와 두려움과 설렘에 젖어 엎드려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 여름인데도 오싹하는 한기가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왔다. 이국에서의 첫날밤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 기숙사 어디선가 은은한 하모니카의 선율을 타고 찬송가가 고즈넉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꿈결로 빠져들었다.

숙사(宿舍)에서의 첫 2주일 간은 마치 우리 가족이 꿈 속에서 어느 이상한 나라로 별안간 날아온 듯한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여러 가지 여름 행사로 분주한 학교 안팎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사 안으로 들어오면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내와 아이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기숙사 식당의 정해진 식사시간만 기다리며 세 식구가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아내와 아이의 감추어진 표정 속에서 행여 어떤 절망이라도 나타날까봐 노심 초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 안은 온통 진흙 창이 되어서 꼼짝달싹 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으슬으슬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숙사 안에서 창 밖을 달리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축축이 젖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해가 났다. 맥이 없어 나가기 싫다고 하는 아내를 두고서 아들 다니엘의 손을 잡고 산보라도 할 심산으로 기숙사 현관 앞에 나가 보았다.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려운 질퍽거리는 진흙땅을 어이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빠, 저것 좀 봐. 참 아름답다. 그지?" 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얼기설기 보기 싫게 헝클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색깔의 전깃줄 사이로 맺혀진 이슬이 환한 햇살을 받아 영롱한 무지갯빛을 비추이며 아름답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한 줄기 부끄러운 생각이 샘솟듯 스며 나와 아이를 향해 흘러 내렸다. "그렇다. 아들아!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 복되다."

한국서 부친 콘테이너가 도착하자 우리는 뻬이따라는 동네에 셋집을 얻어 학생 숙사에서 내려왔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우리의 그 많던 이삿짐이 하나도 빠짐 없이 전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안성맞춤의 층집(아파트)을 얻게 되었다. 내 아내(이곳서는 애인 동무로 불린다)는 도시 전체를 맴돌고 있는 먼지와 악취를 가장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 동안 우리가 무심코 살아왔던 깨끗하고 안락한 환경에 대해 얼마나 감사치 못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 함께 회개하며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적응하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 비밀된 방법들을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맑은 날, 5층 내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야산의 전원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끝없이 펼쳐진 구릉과 지평선을 너머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그 벌판 가운데 내가 홀로 서 있는 기분은 복잡한 한국에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자아내곤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내려선 거리에는 텅 빈 심령들의 찌들은 모습들과 쓰레기 먼지 냄새가 가득하다. 한국의 50년대에서 80년대까지를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소가 끄는 달구지와 인력거, 자전거의 홍수, 매연을 뿜어 대는 구 소련제 라다 택시, 더러는 값비싼 그랜저나 벤츠에 이르기까지 눈에 뜨인다.

하루는 학교에 있는데 밤톨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폭우가 내려 삽시간에 온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걱정이 되어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아내는 발코니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빗줄기를 물동이로 퍼서 밖으로 퍼내느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돌아오는 길에서 새까만 구정물로 잠긴 도시에 긴 장화를 신고 더러는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쥐고 물살을 헤치며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되돌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내 나이 서른 살 되었을 때, 미국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후 어느 날 새벽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다. "하나님! 헛되이 보낸 지난 세월들이 억울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90년 KOSTA에 참가한 이후, 중국에 대한 부르심을 받고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타임머신은 마침내 작동하고 말았다. (199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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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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