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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십 년만이다. 친정어머니, 언니, 그리고 조카와 함께 온 가족이 한 달 반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는 일은 남편이 유학길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내게 다가온, 그래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내가 미국길에 오를 때 갓 태어나 두 주밖에 안 된 조카를 헤어지고서 가까이서 함께 생활을 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힘겨울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다른 모습으로 자라왔다는 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삶의 이런저런 모습 속에 배어 있는 가치기준이나, 어린이로서의 관심 영역, 어른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며 이해하는 태도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자란 탓일까, 늘 경쟁의식 속에서 자란 탓일까, 아니면 유복한 환경에서 독자로 자라왔기 때문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정신없이 치고 들어오는 이 어린 조카를 파악하며 연구하는 데에 근 두어 주를 보내야 했다.

제일 먼저 부딪힌 어려움은 어른으로서 주의를 주는 것에 아주 불쾌해 하는 것이었다. 잘못을 바로잡아 주려는 조언에 대한 거부감이 아이를 통해 느껴질 때면 난감해지곤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주의를 주며 지내왔어도 아이들을 통해서 그렇게 불손한 모습을 본 일이 없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또 다른 큰 어려움은 순식간에 자신의 기분이 천국과 지옥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정서적인 급변이었다. 아이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듯하다가도, 아주 사소한 일로 쉽게 버럭 화를 내고, 우리 아이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아이를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오, 주님,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이 오게 된 것일까요? 너무도 사랑스럽기만 해야할 조카를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며 함께 지내야 하는 것일까요? 밤마다 남편과 함께 아이의 천하무적같은 일과를 나누며 지나간 10년의 세월을 통해 접해온 환경의 차이를 절감해야만 했다. 더 어려운 점은 아들의 모난 부분을 받아들이는 엄마의 생각이었다. 30년 가까이를 함께 자라온 언니인데도 아이를 키우는 태도가 어떻게 이토록 다른 것인지, 한국의 엄마들이 자기 아이들을 기죽지 않게 키운다더니 정말 우리 언니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인 것인지, 이토록 서로가 너무 힘겨워 한다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좋으신 분이시기에 우리 자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서로의 생각을 털어놓으며 어떻게 다듬어가야 할 지에 대해 지혜를 주셨다. 언니 입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곳 기준으로는 매사가 고쳐야할 투성이인 조카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름만 이모인 사람이 느닷없이 자신의 살아온 틀을 바꾸려고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으리란 생각에 미치자, 내가 또 다시 아이를 바르게 키우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사랑을 느끼게 하지 못한 우를 범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은 우리를 인내하시고, 믿어주시고, 마음의 평안을 회복시켜주시며, 깊은 상처까지도 어루만져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나는 환경과 말과 모든 것이 어설프기 만한 이곳 생활을 하는 조카가 빨리 다듬어지기 만을 조급하게 바랬던 것이다. 우리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무조건 틀리다는 것으로 간주되었었고, 어린 시절 다른 사람 손에서 자란 깊은 상처가 어떤 것인지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조카를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언니와의 대화가 진지하게 이루어진 세째주가 되어서였다. 갓 태어나서부터 다른 사람 손에서 자라온 조카는 자기를 돌봐준 이러저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을 배워간 것 같았다. 엄마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자신이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 먼저 터득한 것은 아닌지... 정서적인 기복이 큰 것이나, 쉽게 놀라고 불쾌해 하는 것, 자동차에 대해 심하게 애정을 보이는 것, 자기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판이하게 다른 것, 등등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아이의 과거를 조금이나마 알아가면서 그 근본 원인를 깨닫게 되었고, 아이가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 그럴수록 나는 그 아이에게 사랑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하는 진짜 이모임을 알게 되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어떻게 자라왔는지조차 몰랐던 무심한 이모가 이제야 제대로 조카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황야의 무법자처럼 우리 집안을 휩쓸고 다니는 그 아이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안게 된 우리 아이들을 더 이상 피해자로 바라보지 않고 이것도 가족이 되어가는 귀한 과정임을 주님께 고백하며 감사하게 되었다.

어느덧 일주일 후면 조카와 친정 가족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삶의 곳곳에서 아이는 부딪히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제는 이모가 야단치는 이모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이모임을 알아가는 것 같아 감사하다. 또 언니도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더욱 감사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어린 나이에 억울한 상황을 수시로 부딪히면서도 조용히 견뎌가고 있는 우리 아이들과 그런 모습을 함께 지켜보면서도 조카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나의 가족으로 허락하신 주님이 감사하다. 십 년을 떨어져 지낸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의 거리감보다 삶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태도의 거리감이 더 큰 관문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낀 지난 시간들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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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코스타 첫날 광고 시간에는 항상 통계 발표가 있다. 어느 주에서 가장 많이 왔는지, 어느 나이대가 가장 많이 왔는지, 평균 연령이 얼만지, 남녀 성비, 기혼자와 미혼자의 비율 등등… 그런 통계 가운데 꼭 등장하는 코스타에 가장 많이 참석한 숫자도 공개 된다. 작년 코스타에서 나는 드디어(?) 기록을 세웠다. 10번을 참석한 나로서는 이시간이 꼭 영광스럽진 않다. 강사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면서, 뚜렷한 직장도 없는 나는 남들은 평생 한번 가볼까 말까 하는 코스타를 10번이나(?) 다녀온 것이다. 세번은 싱글 시절, 네번은 유학 시절, 그리고 나머지 세번은 남편이 미국에 직장을 잡은 후다. 두번은 바쁜 남편 덕에 남편도 없이 아이들 데리고 혼자 다녀 오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한마디로 코스타 팬이다.

10번을 다녀온 코스타 팬으로서 그 소감을 말하라면 나는 한마디로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고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10번을 갔는데 늘 은혜만 거저 받아 먹고 돌아온 발걸음이었다. 중보 기도 팀에 들어가 봉사 한 것도 아니고, 자봉도 거의 신청을 못했고, 또 조장도 작년에 딱 한번 섬겼다. 그런데 그때마저도 정작 조장을 맡아서 섬긴다고 했지만 오히려 부끄럽게 다른 조원들에게 도전을 더 많이 받고 도리어 섬김을 받고 왔다고나 할까? 그러니 내가 코스타에 기여한 바가 전무하다. 이렇게 난 아무것도 안한채로 뻔뻔하게 열번을 코스타에 다녀 왔노라고 공개할 입장도 아니다. 참으로 부끄럽다.

5년전 남편이 유학 시절을 마치고 이제는 코스타에는 발걸음을 못하게 될거라고 단정 했었다.그런데 친구의 권유로 다시 남편도 없이 만용을 부리며(?) 주부로서 처음으로 두 아이들을 데리고코스타에 4년전부터 발길을 돌렸다. 이제 7번도 모자라 아이들까지 떠 맡기는 참 한심한 코스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편 없이 간 코스타에서 나는 가장 많은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는 코스타 폐인이(?) 되고 만 것이다.내가 꼭 코스타에 가야하는 이유 중에 또 하나가 있다. 코스타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가지 않을 수 없는 우리 가족의 여름 휴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열살, 여섯살짜리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더 지독한 코스타 팬이 되고 말았다. 피는 못 속이나? ㅎㅎㅎ

아이들은 여름이 다가오면 코스타를 손꼽아 기다린다. 세상에 어떤 훌륭한 캠프를 가도 코스타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올 여름에는 공교롭게도 시아버님 칠순이 겹쳐져서 5년 만에 한국에 방문하는 계획이 잡혔다. 11번째 코스타를 가게 될 계획이 무산 된 것이다. 이 소식을 아이들에게 전하자 아이들은 몹시 실망하면서 한국에 안가고 코스타에 가겠다는 어이없는(?) 반항까지 하는 사태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을 사로 잡는 코스타…. 우리 가족이 꼬박 일년을 기다리는 영의 휴가다. 세상의 휴가가 줄 수 있는 편한 잠자리, 입맛에 꼭 맞는 음식, 재미있는 볼거리등이 없어도 언제나 그런 세상적인 휴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주는 코스타…

내 자신 아무것도 코스타를 위해서 한 것은 없지만 가장 많은 기록을 세운 코스탄으로서 나는 맘껏 코스타를 자랑하는 것도 귀한 일일 것 같아 용기내어 이 자리에 처음으로 코스타를 공개적으로 홍보 하기로 맘 먹었다. 10년 코스탄으로서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라고 느끼기에…그리고 그이상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기에…

지금은 우리 교회에서 코스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나는 누구보다도 침을 튀기며 열성적으로 코스타를 홍보한다. 평생에, 그것도 나이 마흔을 넘기면 좀 다녀오기 쑥스럽기 때문에 (하지만 은혜의 자리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 누구에게라도 나는 단한번의 여름 휴가라도 코스타에서 보낼 것을 권면한다.

무궁 무진한 간증 거리가 평생에 남게 되고, 아이들에게서 맘껏(?) 자유로울 수 있고, 아이들도 부모를 떠나 영 육으로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얻고, 한국에서도 뵙기 힘든 좋은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교수님들, 그리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같은 자리에 공짜로(?) 맘껏 만나고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코스타는 나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신앙의 대선배들을 만나게 되고, 동역자들을 만나 위로 받게 되고, 신앙이 어린 형제 자매들을 세워주는데 한 몫을 할 수 있다는 것... 교만일 수도 있지만 10번의 코스타와 함께 감히 나는 내 신앙 인격도 성숙해져 감을 느낀다.

작년에 열번째 코스타를 다녀 오면서 다시 코스타에 갈 수 있을까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내가 은혜 받자고 남의 자리를 (학생 신분도 아닌데..) 빼앗는 건 아닌가하는...10번을 가서도 선교사로 헌신한 적도 없는 부끄러운 내 모습과 만나면 괴롭기도(?) 하지만…어린이 코스타에 헌신하는 분들께 죄송해서 아이들이 얼른 자라서 칼리지 코스타에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기도 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 이민 생활에서 코스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부분을 차지해왔다. 믿음을 알게 했고, 섬김을 배우게 되었고, 은혜의 도가니에 빠뜨려 주고, 내 영적 생활의 기둥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내 주변의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나는 코스타 수다를 멈추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감히 열한번째 코스타에 꼭 가겠다는 말을 선뜻 할 수가 없다. 우리 가족 때문에 행여 더 은혜 받을 한 가족이라도 이 은혜의 잔치에 못오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내년 이맘 때에 코스타에 가겠다고 조르면 나는 또 슬그머니 맘이 약해질지도 모른다. ㅋㅋㅋ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돌을 던져도 난 여전히 코스타의 신기록을 세워갈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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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물로 만난 두 아들이 문득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시기 위한 도구같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금 처음 첫 아들 대인이를 만나게 된 시간들을 되돌아 보곤 한다. 온몸이 온전한 아기의 첫울음을 듣게 되던 그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며 매달렸었는지, 믿음의 첫발을 내딛는 나의 간절한 기도를 귀히 보신 주님의 선한 손길에 감사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된 첫 아이 대인이는 자라가면서 늘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서 엄마인 나를 당황하게 했다. 동생 솔인이가 태어나고도 시샘 한번 하지 않는 너그러운 아이, 늘 엄마, 아빠의 훈계를 달게 받는 순종적이고 온유한 아이, 잘 울지 않고 떼를 부리지도 않던 그 아이의 어른스러움이 실상 단순한 조숙함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대인이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학교생활 속에서의 어려움이 단지 언어소통의 문제 때문이리라 일축하며 의도적인 느긋함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던 세월이 한해 두해 쌓여가던 중 문득 대인이가 왜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다른 아이에게 안 좋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믿을만 했지만, 어째서 친구들을 가까이 사귀지 못하는지,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이런저런 내용을 어려워하기보다는 왜 그렇게 일상적인 생활의 틀을 익히는 데에 어려워 하는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예를 들면 방에 있는 어떤 물건을 가져오라든가, 지금 서 있는 곳의 오른쪽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든가 등등...-을 제대로 못할 때 반복에서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느린데다 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마는 아이를 보면 나는 늘 인내심의 한계에 부딛히곤 했다. 작은 잘못을 바로잡아주려는 좋은 의도는 온데간데 없고 늘 필요이상의 야단을 맞고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를 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이가 평범하리라는 기대(착각) 속에서 늘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엄마의 무지함에 있었는데도 늘 피해는 아이에게로 돌아가곤 했다. 자기 반 안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들에 그리 관심이 없고, 자신이 뭘 챙겨야하고,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지내는 대인이를 보며 이 아이를 위한 새로운 대안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은 수십번 마르고 닳도록 보는 아이, 좋아하는 것은 읽는 순간 다 외워지는 아이, 누군가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에 따라가는 것을 즐기지도, 잘하지도 못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 시작한 일은 너무도 집중해서 오래 할 수 있는 아이, 자기가 만든 만화책을 읽으며 좋아라 키득거리고 함께 보기를 원하는 아이,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을 전혀 읽지 못하는 아이, 그래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하고 야단 맞지 않을 상황에 스스로 매를 버는 아이… 남편과 종종 대인이를 놓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대인이는 너무도 사고가 자유롭고 틀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창의적인 아이이며, 주변 상황에 대해 무관심하다 할 만큼 자기세계에 쉽게 빠져드는 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너무도 긴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대인이를 대하는 태도와 방향이 달라져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대인이의 독특함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기까지 둘째 솔인이의 몫이 아주 컸다. 갓 태어나서 솔인이는 참 많이 울었다. 그때 대인이는 이렇게 울지 않았는데 솔인이는 왜 그러냐며 남편에게 푸념을 하는 순간, 솔인이가 보통의 아기이고, 대인이가 독특한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말을 익혀가는 속도도 오히려 솔인이가 빠르고 발음도 정확했다. 옹알이와 자기식의 표현이 많았던 대인이와는 달리 솔인이는 일부러 연습을 시키며 가르친 적이 거의 없었는데도 스스로 말을 익혀갔다. 솔인이가 프리스쿨을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아이의 상반된 모습은 물과 불처럼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솔인이는 학교생활에 대해 모르는 게 거의 없다. 학교 친구들간에 일어난 일이며, 누가 어디가 아파서 학교에 못 오고, 누구의 아빠가 하는 일은 뭐고… 시시각각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흡수되는 것이다. 심지어 차 안에서 남편과 나누는 대화 속에도 순식간에 끼어들어 참견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늘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형이 야단을 맞으면 스스로 조심하며 눈치있게 굴고, 자신의 잘못한 정도보다 늘 덜 야단 맞는 길을 잘도 찾아내곤 한다. 온 몸의 감각이 밖을 향해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깨어있는 듯 솔인이는 잠을 자다가도 너무도 분명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로 즐겁게 놀 수 없는 아이가 솔인이이다. 텔레비전을 봐도 혼자서는 재미가 없어 금방 꺼버리고 마는 이 아이는 너무도 사교적이고 주어진 과제는 틀에 맞게 잘 해내지만, 방향이 제시되지 않은 일은 금새 울상이 되어 엄마나 아빠의 도움을 요청하곤 한다. 그렇게 뭔가 창의성을 요구하는 일에 대해 막막해하는 걸 보면 나 자신을 보는 기분이 든다. 반면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에 두려움이 없는 대인이는 아빠를 많이 닮은 아이이다. 주변에 대한 관심의 양극단을 보이는 것도 우리 부부를 각각 닮았기 때문이다. 생김새나 식성부터 성격, 성향, 재능까지 모두 놀라울 만큼 대인이는 아빠를, 솔인이는 엄마를 닮았다. 하나님은 자녀가 물려받는 수많은 부모의 특성을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하며 사랑도록 만드신 걸까.

초보 엄마 시절,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의욕으로 어설프게 엄하기만 했던 나는 아이들이 주님의 아들로 잘 자라게 해달라고, 주님의 지혜를 구한다고 기도는 했지만 정작 늘 판단의 중심에는 내가 있곤 했다. 아이가 엄마를 우습게 아는 듯한 태도나, 똑바른 대답을 하지 않을 때면 쉽게 분을 드러내게 되었고, 겉으로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아이를 위해 정한 듯했지만 때때로 나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영 다른 반응을 보인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두 아이를 재우고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어리고 귀여운 아이들을 참 많이 야단치며 키웠었다. 그 시절 내 머릿속에는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강하게 박혀있었기에 나 스스로 얼마나 잘못 흘러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는 회개의 간구는 한참 후에서야 나 자신을 바꾸게 해 주었다.

아직도 가끔씩 그런 나쁜 옛 습관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이성을 잃지는 않는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해야 할 정도로 마음 아픈 실수는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각각에 맞는 도움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을 조금씩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너무도 다른 두 아이를 같은 방법으로 키워왔던 옛 모습도 버려가고, 원인 모르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대인이를 대할 때에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여전히 그 아이의 깊은 세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르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내 마음과 생각을 채우게 된 것이다.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아이들은 바르게 자란다는 걸 뒤늦게사 깨닫게 된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길만이 우리에게 맡겨진 귀한 영혼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키우는 길이라는 걸 알기에 이제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늘 느끼기를 구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아이들이 내게 있음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며 내게 속한 물건처럼 다루지는 않도록,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느껴지는 사랑을 나 스스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날마다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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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내게 맡긴 두 아이.. 성영이와 서영이…

이름만 떠올려도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두아이...그러나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아이들을 왜 낳았을까 후회 해본 적은 없다. ( 다 자라지 않아 장담 할 순 없지만.. ^^*) 아니 요즘은 오히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점점 진짜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 때문에 참 많이 가슴 앓이를 하지만 또 그 아이들로 인해 나는 인생이 깊어져감을 느낀다.

큰 아들 성영이는 산만한 아이다. 그 나이 또래 남자 아이들이 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내가 보기엔 때로 지나칠 정도로 좀 많이 산만하다. 매사에 자기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딴청을 부려서 선생님들 속을 꽤나 태우는 모양이다. 그래서 성적표를 받아 올 때 성적보다는 난 매번 성영이의 행동 평가서 때문에 맘이 많이 상한다. 좀 크면 나아지겠지 하지만 아이는 늘 같은 문제로 몇년째 지적을 당해왔다. 그럴때마다 아이를 때리고, 타이르고, 혼도 내보고, 으름장과 협박, 심지어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못하게 하는 벌을 오랜 기간 내려 보지만 그 행동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교회에 아주 모범생, 솔직히 말하면 내 맘에 쏙 드는 성영이 또래의 아이가 새로 오게 되었다. 그 아인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여러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였다. 공부는 물론, 미국에 온지 6개월도 되지 않아 별 문제 없이 미국 학교에 적응하는 듯 하고, 또 예배 시간 이외의 시간에도 늘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어른들에게 인사성 밝고, 또래 아이들을 배려하고, 또 다른 아이들처럼 심한 장난을 치기보다는 있는듯 없는듯 자기 할일을 하는 아이였다. 볼때마다 난 어쩜 어쩜 하며 탄성을 연발했다. 그 아이의 부모님도 그런 아들을 무척 자랑스러워 하는 듯하다. 늘 주변의 칭찬을 받는 그 아이를 보며 언제부턴가 난 그 아이와 우리 아들을 비교하며 맘이 많이 속상해지기 시작했다.. 매번 같은 상황에서 우리 성영인 내 눈살을 찌프리게 하고 모범생인 그 아이는 늘 나에게 안타까운 미소를 안겨주었으니까..

며칠전 성영이 때문에 또 맘 상하는 일이 있었다. 성영이가 또 한번 선생님의 지적을 받게 되는 일이 생겼다. 교회에서 특별 과외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에 성영이가 많이 산만하고 집중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영이가 흥미를 느낄거라 예상은 안했지만 첫시간 부터....으흑 마음이 무너지는듯했다. 매일밤 아이가 잠들기전 그리 기도를 하는데... 밥 먹을 때마다 식탁에서 아이에게 "PAY ATTENTION"을 매번 반복하게도 해보았는데...

성영이 땜에 맘 고생을 하면서 난 그 원인을 전적으로 아이에게 돌리기 보다는 하나님께 "제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하며 묻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자책하게 되었다.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걸까?"

"나의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는걸까?"

모든 부모에게 첫 아이는 항상 시험 대상이다.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할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온 육아가 버겁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물론 모든 부모가 첫 아이 때문에 맘 고생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처음 키워보는 아이라 실수를 하게 될 확률도 높고, 그러면서 의도와는 상관 없이 부모 자식 간에 상처를 주기 쉽다.

친구와 이 문제로 서로의 맘을 내어 놓고 고민하다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아이들이 내가 원하는데로 잘 자라주는 부모는 정말 행복하고 축복 받은 부모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럲게 완벽한 아이는 드물다는 것이다.

아이 때문에 맘 고생을 하면서 진짜 인생을 배우는 것 같다..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 같다.

아이들을 인내하면서 내 자신도 인내를 배우게 되고, 아이들의 미 성숙함을 바라보면서 내 자신의 부족함을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또 아이들이 저지른 실수를 용서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게 된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부모는 그 잘못을 그리 맘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하룻밤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맘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다시 샘솟는다. 어쩔땐 아이를 혼낸 그날 밤부터 맘이 쓰리고, 아이가 가여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흐느껴 울 때도 있다. 하나님도 나의 허물을 이렇게 용서만 하실뿐 아니라 내 곁에서 날 위해 맘 아파 울고 계시고, 거기에 더하여 결국은 완전히 잊어버려 주신다는 믿음을 아이를 양육하면서 배우게 된다.

성경 공부 시간에 성영이 때문에 아픈 마음들을 토해 놓았다. 모범생 아이와 비교한 내 자신을 꺼내 놓고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했다. 같이 성경 공부를 하는 멤버 중에 한 엄마가 날 이렇게 위로해 주었다. "모범생인 그 아이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 착하고 좋은 아이지만 그 아인 절 웃게 해주지는 못해요.. 근데 성영이는 날 웃게 해줘요.. 그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이 성영이에게 있쟎아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많이 울었다. 다른 아이와 비교하면서 내 아이의 장점을 그 누구도 아닌 엄마가 이렇게 모르고 있었다니...아이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맘이 들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의 단점을 알고 계실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장점을 더 높이 인정해 주시고 놓치지 않으실텐데 난 성영이의 해맑은 웃음을 한번도 감사하지 못했었다.

우리 작은 딸 서영이는 오빠와는 반대로 아직까지는 내가 생각하는, 바로 내가 원했던 자녀의 모습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팔불출 엄마라 나를 놀릴지 모르겠지만 여러면에서 늘 나를 행복하게, 기쁘게 해주는 참 고마운 딸이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보면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성영이는 날 많이 울린 아이다. 기뻐서도 날 울렸지만 상한 맘 때문에 날 참 많이 울렸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성영이가 더 감사하게 느껴진다. 만약 나에게 서영이 같은 아이만 둘 있었으면 나는 감사하기 보다는 교만한 엄마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속 썩이는 아이를 둔 엄마를 이해 하지도, 위로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런 아이를 둔 부모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런 엄마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난 그런 성영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 아이 때문에 내가 얼마나 더 겸손해질지, 얼마나 더 인내를 배우게 될지,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할지, 얼마나 많은 엄마들을 위로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그럴때마다 난 성영이 땜에 힘들어 하지 않고 성영이의 "해맑은 웃음"을 떠올릴 것이다. 그 아이로 인해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가 지금보다는 깊어질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렇게 너무도 부족한 나에게 "부모의 면류관"을 씌우시고 청지기의 역할을 맡기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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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년 때부터 25년간의 신앙생활을 통해 내가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성경이 잔인하리 만큼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인정사정 없이 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은 나의 숨겨놓은 비밀, 숨은 동기를 파헤쳐 빛 앞으로 가져오게 한다.

나는 유학이라고는 생각도 못해 보던 평범한 (다소 뒤떨어진)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가담한 어느 선교회에서 하도 해외 선교사에 대한 대단한 선전을 하길래, 나도 해외에 한번 나가서 선교사적인 삶을 살면서 유학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의 이 생각은 곧 한국에 돌아와서 교수로 있으면서 캠퍼스내 성경공부를 인도하면 무척 근사하지 않겠느냐는 꿈으로 이어졌다. 비단 나만이 이런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님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뜻밖에도 유학할 장학금을 받게 되고 유학할 분야에 맞는 학교와 교수님까지 정해지자, 모든 것이 급속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도미하게 되었다. 컴퓨터 구조와 하드웨어를 직접 만들고 테스트하는 일이라 힘들었지만 (사실 아내가 더 힘들었음에 틀림없다 – 이 글을 아내가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8년 공부를 마치고 학교에 남아서 연구조교수로 3년 반을 더 보내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내 머리가 거의 반백이 되도록 (모자라는 머리니까 시간으로라도 때우려고 했었다) 말할 수 없이 바쁘게 지내었지만 결국 모자라는 능력으로 무리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기간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자는 마음에 마지막쯤 되어 여기저기 학교에다 일자리를 구했지만 실패하였다. 내게는 학교교수라는 꿈이 내가 원하는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꿈이 먼저인가, 현실이 먼저인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주셨지만, 특히 실패를 하게되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더구나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셨던가 생각하게 된다. 실패한 후에야 깨달았다는 반성은 마치 자기 합리화가 되는 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왠지 맥이 빠진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내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 실패를 거듭하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단 한번의 인생을 의미있게 보내려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었고, 이 고민은 나에게는 엄청 중대한 것이었다. 실패의 외형적 원인이야 능력 부족 및 게으름이라고 하며 끝낼 수 있겠지만, 실패의 고비에서 나는 내 인생의 항로에서 내가 아주 결정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사실 실패는 학교의 교수직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첫째 나는 내 인생의 꿈을 좇다가 현실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유학생이기에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항상 손님이었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일들에서 항상 수동적이고 책임감없는 존재였다. 연구실이나 학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지역사회나 학생 하우징에서 필요로 하는 봉사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의 참여가 당연히 우선순위에서 밑바닥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딱하게 된 것은, 신앙의 성장이 멈추어 선 데 있었다. 10여 년이 지나도록 학업이라는 미명하에 나의 지극히 수동적이고 성장없는 신앙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경말씀이 강조하는 바가 꿈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성실하고 충성하라는 데 있음을 발견하게 되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성경은 꿈을 꾸라고 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것보다 오히려 내가 처한 현실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한다.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몇 번이나 말씀 하셨지만, 묵시가 없으면 방자하다고 경고하시지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지만, 바울에게 로마를 보여주셨지만, 그리고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꿈을 보여주시지 나더러 꿈을 꾸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더구나 지금, 바로 현재의 시간이 의미없는 것이니까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처한 곳에서 심지어 고통까지 포함해서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하신다. 나의 삶은 학업이 끝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학생들만이 이 땅에서 손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특히 나같이(?) 젊은 사람들은 어느 한 곳에서 평생 살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곳이 직장이든, 학교든, 가정이 있는 집이든, 대부분 수년 내에 다른 곳으로 기회를 찾아 쫓기듯 이동해 간다. 그러기에 마치 직장에서 임시고용된 사람들 같이 아무런 책임의식없이 살아간다. 뭐 사회의 추세가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영원성을 추구하는 신앙과 나의 실제 삶이 삐걱삐걱한다는 데 있었다. 영원히 사랑할 것 같은 그룹의 형제자매들이지만 얼마 있으면 공부를 마치고 또는 직장이 바뀌어 다른 곳으로 가게 되니 나는 헌신하고 기여할 수 없게 된다. 영원히 아끼고 사랑하고 싶은 그룹이라도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점이 방관하는 자신을 매끄럽게 변명해 준다.

그러나 곧 떠나야 하는, 또는 떠날 지도 모르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나 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라면 나는 생각을 달리 해야했다. 내일 떠나더라도 오늘 영원히 이 그룹을 위해 살 것 같은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지극히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지만, 나그네의 삶은 나그네로 지내는 그 자체가 삶이지 어디에 안착한 뒤의 삶이 그의 이 땅에서 영위한 삶이 될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의 안착이란 결국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해 주는바가 아니던가.

탁월함의 추구, 성경적인가?

둘째 나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시대 유행의 희생자였다. 아니, 희생자가 되려고 자처하며 나섰던 것이었다. 이 시대의 성공적인 삶을 탁월함으로 이루고자 하였다. 물론 공부를 하고자 나섰던 것이니 나의 탁월하려는 노력은 논문쓰기와 특허출원, 그리고 펀드레이징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능력의 부족을 인식하게 되면서 과연 그리스도인의 세상적 탁월함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신명기 28:13)"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인가? 일등은 하나만 되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특히나 학교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두뇌들을 보면서 부족한 나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었지만, 감사하게도 첫번째 문제에 대한 반성으로 내 안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성경적인 관점의 그리스도인의 삶 - 즉 성실하고 충성하는 삶 - 으로 인해 새로이 조명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옳다. 그렇다! 성경 어디를 둘러봐도 일등하라고 하지 않는다. 신명기의 말씀은 순종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하심의 표현이다. 탁월함은 순종하고 충성하는 삶의 부산물이지 목표가 아니다.

탁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 느낀 그 자유함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탁월하지 않은 자신을 올가미를 씌어가며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약속을 또 한 번 체험하게 되었다. 최근에는C.S. Lewis가 이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표현한 것을 발견하였다:

"저는 '난 특별한 존재야"라는 느낌을 없애려고 애를 쓰는 편입니다. 그러나 '난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그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특별한 존재야'라는 느낌으로 그리하려고 합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않고서 탁월하지 못함을 안위로 삼는 일이 생길 수 있는데, 적어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성할 때를 가정하는 것이니만큼, 탁월하지 못함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은 더 이상 열등감이나 경쟁에 뒤쳐진 불안이 아니게 되었다. 더구나 발빠른 주변 사람들의 행보에 늘 뒤쳐지던 나는 이 씨애틀 땅에 쳐박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자족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씨애틀에 사는 동안 충성해야 할 것이 무엇이지 이미 몇 가지 눈 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나를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잃어버린 10년, 그 이후

성경이 나의 붕 뜬 생활을 지적하였을 때 나는 지나간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 미국땅에서 어떻게든 하루를 살든지 평생 미국에서 살 것 같은 마음으로 대하여야 함을 깨달았다. 물론 그 10년을 실패한 삶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렵게 생활하는 많은 분들에게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하는 농담이 될 까 두려울 정도로 나의 실패는 그분들의 어려움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 하나님께서는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10년을 통해 섬세하게 내 마음을 아주 낮추어 주셨고 그 10년을 되찾는 길을 열어 주셨다. 물론 처음부터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는 훨씬 더 그분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지만, 작은 일에, 현재의 일에 충성하는 진리가 주는 기쁨과 감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잊게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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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의 아내로 살아 온 지 벌써 8년이다. 아주 간단한 짐 꾸러미 네 개만 들고, 처음 미국에 발을 내려 놓을 때는, 마치 여행이나 소풍을 온 것 같이 홀가분한 기분이었었다. 그리고 한 삼,사년은 그런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연 수가 많아져 가면서 나에게 들기 시작한 생각은 이제 이쯤에서 이런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것이었다. 신혼 때의 군대생활, 그리고 연이어진 유학생활, 난 참 많이도 이사를 한 편이었다. 십일년 동안 아홉번을 이사했으니 말이다. 늘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 시작하는 기분은, 나쁘지 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새로 시작한다는 것에는 ‘적응’이라는 부담이 적잖이 있었다. 큰아이는 지금 겨우 4학년이지만, 공립학교를 4번이나 전학한 경험이 있다. 큰 아이에 대해 감사한 것은, 재미있는 성격 덕에 가는 곳마다 친구를 쉽게 많이 사귀었다는 것이지만, 미안한 것은 좋아하는 친구가 생길 적마다, 친구를 추억에 담아두고 이사를 해야 하는 일을 겪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착하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심하게 몰아붙일 때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신없이 달려온 유학생 가족으로서의 이곳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심정이 정점에 달할 때마다, 하나님은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도록 하셨다.

셋째 아기를 사산한 것이 벌써 이년 반 전의 일이다. 칠개월을 뱃 속에서 잘 자란 아기를 잃을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보질 못한 일이었다. 걱정 보다는 호기심과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걸어 들어 갔던 병원의 복도를, 사일 뒤에는 애기 대신 소국화만 한 다발 가슴에 안고 휠체어에 앉아 되돌아 나왔었다. 병원 밖은 막바지 가을의 단풍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내 아기가 죽었는데, 하나 변한 것 없는 사람들의 행복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하나님, 전 참 욕심 없는 사람이에요. 늘 하는 한 가지 기도는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족이잖아요. 근데, 왜 그것을 가져가세요?… 감사가 되질 않던 기도의 시간들이었다. 태어났지만, 한번도 떠 보지 못했던 눈, 소리 없던 입, 너무 조그맣던 손, 가만히 내 볼을 대 보았을 때 아직도 따뜻하던 작은 볼… 눈에 사진이라도 새겨 넣듯 그렇게, 죽은 아이의 모습을 열심히 보아 두었었다. 쉼표는 한번쯤 숨을 고르고 주위를 돌아 보라고 주셨을 터인데도,난 더욱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쉼표의 타격은 정말 마침표를 찍고 어딘가 정착하고 싶은 열망만을 더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채 일년이 지나기 전인 여름에, 한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유월까지도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지병의 악화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또 한번의 이사를 앞에 두고 있었던 난, 짐 꾸리는 일 대신 대기표를 들고 한국을 향했다. 언제 돌아가신다 해도 같은 생각이 들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다행이 아버지의 병은 고비를 넘기고, 호전되어져서, 일반 병실로 옮기셨고, 일주일 후에는 퇴원을 하게 되셨다. 병실에서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흘동안 하루종일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서, 참 좋았던 것 같다. 같이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성경도 같이 읽고, 산책도 모시고 나가고, 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실 때는 그 옆에서 나도 누워서 쉬곤 했다. 유교집안에서 자라셔서 표현하시는 일에 약하신 아버지는, 가쁜 숨을 고르시면서도, 내 이야기에 크게 소리 내어 웃으시곤 하셨다. 열흘 후 며칠만 더 있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대기표라서 다음의 가능한 탑승 날짜가 구월 십일이 지난 뒤라는 이야기에, 그때까지 미국에 돌아오지 않고 거기 있을 자신이 없었다. 새로 이사한 집의 짐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에 걸렸고, 애들이 새로 전학하는 학교에 처음 가는 날, 마음으로라도 의지가 되도록, 엄마가 거기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반년만 지나면,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는 삼월이 되면, 시댁의 행사로 온 가족이 한국에 다시 나올 예정이었고, 그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자고 그랬다. 아버지는, 내년 봄이면 나올 외 손주하고 체스를 같이 할 수 있도록 연습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실 때는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연장된 생명이 얼마인지는 모르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열심히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사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눈물로 드렸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연장해 주신 삶은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으셨다. 구월에 다시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아버지는 끝내 내게 유언 한 말씀 남기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왜 하나님은 아버지가 증거 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셨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셨을까? 그리 빨리 거두어 가실 거면서, 다시 살았다는 희망은 왜 주셨을까?… 한국을 떠난 세월동안, 부모님들은 늙어 가셨고, 함께 많이 시간도 보내지 못하시고는 돌아가시는 구나 하는 생각에, 날 한국을 떠나게 한, 공부하는 남편이 미워지기도 하고, 미국생활이 서러워지기도 했다. 이쯤에서 쉼표는 차라리 숨 막힘표 같은 것이 되어져 있었다.

셋째 아기의 일주년 날, 내 머리에는 아버지를 추도하는 흰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날 난, 의외로 우리 아이들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만져 보았던 뱃 속 아기의 움직임이 어떠했었는지, 그때마다 우리가 어떻게 웃었었는지, 어떻게 이름을 불러 주고, 노래를 불러 주었었는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동생이 지금도 얼마나 그리운지, 이야기들을 하였다. 추수감사절 프로젝트로 터어키 모양의 종이 위에 감사의 내용을 적고, 온 가족이 다 같이 털실을 짤라 꾸몄었는데, 그날이 금요일이었는데, 주일날 아기는 사산되었고, 월요일 날 그걸 들고 학교를 간 큰애는 ‘new baby’란 항목을 읽을 때 ‘in the heaven’을 덧붙여 말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을 기억했다. 외할아버지랑 한국가면, 같이 낚시 가기로 했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고 섭섭해 하기도 했다. ‘하늘나라 갔다’는 말을 ‘하늘 날아갔다’로 이해해서, 동생이나 외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날개 짓을 하던 둘째 아이는, 일년 새 많이 커서 ‘하늘나라’를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외할아버지와 동생이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기도 했다.

난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추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감사했다. 셋째 아이가 비록 뱃 속에 있는 동안이었지만,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생각하며 감사했고, 살아 태어나지 못할 만큼만 계획되어졌던 그 아기를, 이렇게 많은 것을 추억해 줄 수 있는 우리 가정으로 보내주신, 그 아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감사했다. 한 달도 채 안된 아버지의 연장된 삶이었지만, 그 허락해 주신 기간을 통해, 열흘이나 함께 지내며 기뻐할 수 있도록 해주신 사랑에도 감사했다.

버거웠던 쉼표들은, 마침표를 향해 정신 없이 달려 가고 있던, 정착을 향한 내 열망에, 감사의 눈을 띄워 주었다. 생명이 참으로 유한하다는 것,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 뒤에 ‘하늘나라’라고 하는 더 행복하고 큰 축복이 있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사랑하는 셋째 아이와 아버지가 계신 그곳이.

내 집에 도착해서 정착하기 전까지는 이곳은 뜨내기 삶 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의 삶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신 축복이라면, 지치고 힘든 삶이 아니라, 정말 여행이나 소풍 같이 여유롭고도 짧은 날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했던 천 상병 시인의 <귀천> 한 절이 떠오른다. 처음 시작하던 마음은 ‘어디든 보내시는 곳에 간다’ 였는데, ‘정착’하고 싶은 내 욕심이 그 동안 그걸 덮었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나를 힘들고 지치게 했었던가 보다. 정말 마침표를 찍는 날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날일 터이니, 그 전까지는, 난 쉼표를 자주 찍으며, 쉼표 때마다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겠다. 더 사랑하고, 더 감사하고, 그 곳이 어디든지 참 행복해 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과,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진정 내 집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내가 알아 가고 노력해 가야 할 나를 향한 계획과, 내가 누리고 기뻐하며 감사할 축복이, 이곳에 이미 예비 되어져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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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삶은 “이야기”로 표현되어질 수 있으며, 우리의 이야기는 또한 삶의 모습을 잘 조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는 삶에 의미를 가져다 주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야기를 아주 잘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참으로 위력이 있기 때문이다. eKOSTA에서 내게 글을 부탁할때도 “…. 몇몇 코스탄들의 이야기들을 실어 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 복음에 빚진자로서 … 이땅의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가정, 학교, 직장등에서 격게되는 고민과 갈등을 나누어 주시면…”이라고 하였다. 즉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라는 것이다. 내게는 예수님 때문에 할이야기가 많이 있음으로 쾌히 털어놓아 보겠다라고 답하였다.

나의 이야기

본래 나는 운동선수 였다. 강원도 원주가 고향인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2학년때 부터 빙상을 시작하여 한국체육대학졸업할때까지 앉아 있는 시간 보다 뛰거나, 자전거 타거나, 얼음위에 서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다른 운동선수들과 같이 수업을 거르거나 오전수업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특히 고등학교시절 학교에 나간 날 수는 한달이 채되지 않을정도로 운동만 하였다. 따라서 운동으로는 제법 유명해져서 나를 나로 정의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운동선수” 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분위기는 “운동선수=무식한이”로 정의되어 지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무식하다는 말만 내게 사용하면 상대방을 무조건 두들겨 패는 자존심에 큰 문제가 있는 젊은 이였다. 그 자존심의 문제는 운동선수로서 “1등 제일주의”로 남을 이겨야만 살아 남는 세계관을 형성 시켜 주었다. 그같은 정신으로 나는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많이 땄고, 그덕분에 예비고사 (지금의 학력고사)는 점수와 관계없이 빙상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은 별 불편함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고등학교 1학년때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에 따라 고3학년때에는 남들과 같이 시험은 보아야 했고 에비고사에서 나는 120점의 점수를 받았다. 그점수는 당시 그냥 아무거나 찍으면 나올 수 있는 점수 였던것 같다. 왜냐하면 매 과목당 2-3분 걸쳐 다 응답을 하여서 받은 점수 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나는 그렇게 소원하던 1980년 동계올림픽을 나갈 수 없게 되자 운동을 그만두고 갑자기 교수가 되고 싶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워낙 기초가 없었던 지라 나는 병원에 몇번 입원할 정도로 “무식하게” 공부하였다. 덕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체육학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원과정중 한번 더 입원했는데 고향인 원주 연세대학 병원에서 나의 병을 다룰 수 없다고 하여 서울대학병원으로 진급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서울대 병원에서 한달을 누워 있으며 젊음을 누워지내기가 너무 한심해 우연히 당시 지하실에 있던 교회에서 예배드리게 되었고 건강을 달라고 “무식하게” 기도 했다. 은혜로 수개월개월 후인 1984년에 미국의 University of Oregon으로 유학오게 되었다. 아름다운 Eugene에 도착하자 마자 주변에 “예수쟁이”들이 벌떼 처럼 달려 들었다. 특히 Nevigator아이들이 많이 못살게 굴었지만, 모국에서 처럼 사람을 구타할 수 없어 많이 참았다. 덕분에 예수님을 많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김치찌개를 아주 맛있게 끊여 대접하는 한국교회에 음식때문에 정기출석 하였다. 그당시 나는 교회 예배하러 간것은 결코 아니었고 한국식당쯤으로 생각 하였다. 제법 단골손님이 되자 교회에서는 나를 서리 집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직분을 제대로 감당해 보려고 성경공부를 부지런히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즈음에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던 아내를 여름방학중 모국에서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다. 집사라 믿음이 좋은줄 알고 결혼했던 아내는 결혼후 바로 내게 믿음이 없음을 알고 새벽기도를 하며 나를 위해 중보하였고, 나는 그런 아내를 심하게 핍박하였다 (핍박속에 구타는 없었음을 명시한다). 여하간 공부를 열심히 한덕분에 1990년초에 여가학 (Leisure Sciences)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국에서 직장을 빨리 잡아보려고 졸업도 하기전에 귀국하였다.

당시 여가학 박사가 참 드물었던 지라 쉽게 교수자리 잡을 수 있을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출신학교가 운동은 잘하지만 공부로 별로 유명세가 없는 지라 나는 모 여자전문대학교 야간 수업에서 교양과목 하나를 가르치며 나머지 시간을 집에서 아이를 보았다. 왜냐하면 집에서 아기를 키우고 밥만하던 아내는 귀국전부터 연세대학에서 강의자리를 여러개 받아놓은지라 나는 아내를 외조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놀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가면 아빠는 나 하나였고 엄마들의 눈총은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낮추심이 그곳에서 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을 그당시에는 몰랐었다. 낮추심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는 방법이었고, 그것은 아내의 기도 응답이었다. 당시 아내는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같은 미국으로 다시 보내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The University of Georgia로 Post-doc하러 오게 되었고, 그곳에 있던 몇몇 형제들의 열성어린 중보와 섬김, 아내의 기도 등으로 어느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마음 활짝 열고 영접하게 되었다. 캠퍼스 산책중 갑자기 그동안 귀로 듣고 간간히 성경공부를 통해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성경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무한한 기쁨을 체험하였다. 나의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죄송했던지,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나를 대신 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로 인해 나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어 울고 웃는 미친사람처럼 캠퍼스를 걷다가 결국은 창피하여 연구실에 들어와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기도를 한참드렸다. 학자로서 느낌보다는 사실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지만 성경의 내용들,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참으로 분명한 사건으로 깨닫아 지는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뒤 나의 세계관은 온전히 바뀌고 성경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계속 다듬어가고 있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의 성공을 무섭게 추구하던 사람이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기쁨을 서서히 체험해 가고 있었다.

그뒤 Florida International Univeristy와 Ohio University 에서 각각 3년씩 교수로 보냈다. 특히Ohio University에서는 이근상 목사님의 스파르타식 성경공부, 전도훈련, 새벽기도 등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처음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했고 훈련 받았다. Ohio University에서 2년째 되던해 지금 재직하고 있는 Indiana University에 교수채용 공고가 났었으나 새벽기도하던중 하나님께서 계속 남아있으라는 인도함 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자훈련을 계속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순종하였다. 인디애나대학은 사실 나의 분야로서는 미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라 이미 다른 사람을 채용했다라는 소식을 학회에서 들었을때는 순종을 잠시 후회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소위 내노라하는 좋은 학교는 기존의 같은 전공 교수가 은퇴하거나 그가 다른 대학으로 옮기지 않는한 다시 교수채용기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한학기에 3-4과목 가르쳐야하는 Ohio 대학이 주님께서 나를 있으라 한 대학이기에 그곳이 제일 좋은 대학이라고 믿으며 기쁘게 남아 있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즉 “좋은대학의 교수”라는 육신의 정욕을 믿음으로 포기한것이었다.

나는 계속 제자훈련 받으며 그곳 생활을 철저히 즐겼다. 성경공부와 새벽기도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었는지 모른다. 그러던중 3년이 다 채워지기도 전에 Indiana University에서 편지가 왔다. 지난해 오기로한 교수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였지만 오기를 거부해서 다시 교수채용을 하니 응모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시 기도하며 인디애가 가는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일까 여쭈는 가운데 평안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마침 구약과 신약을 개관하던 성경공부의 교제도 거의 끝나는 상태이기도 했다. 나는 지원 하였고, 인터뷰하자는 제의를 한달뒤 받았으며, 그뒤 학교로 부터 공식적인 Offer를 받았다. 그러나 제의를 그자리에서 수락하지 않고 기도할 시간을 가지려고 1주일의 시간여유를 부탁했다. 뛸듯이 기뻤지만 나와 아내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 하려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6일째 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나 7일째 여호수와 1장의 말씀을 통해 떠나도 된다는 하나님의 “결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뒤 이곳 인디애나대학에 와서 한인기독 학생회 (Indiana University Korean Christian Fellowship 혹은 “목요모임”)의 지도교수를 하며 매주 목요일 학생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매주 30-40분의 설교를 맡고, 그 설교를 위해 매주 10-20시간을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한다. 강의 준비는 몇시간 안해도 지난 여러해 동안 했던 것이고 평소 늘 책과 논문을 읽고 새로운 글을 늘 쓰고 있었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말씀준비는 늘 힘들다. 그러나 힘든 말씀준비는 교수로서, 미국에 사는 “이방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내는 귀한 방편이 되었다. 오하이오 대학에서 tenure를 받았지만 금년 이곳대학에서 다시 tenure를 따낼 수 있었던 것도 말씀준비하고 설교하며 받은 하나님의 은혜덕분이 었다.

지금까지는 나의 짦막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죄인이었던 때의 나의 모습이 있고, 구원 받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주변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구원 이후에 어느 목자의 헌신어린 제자훈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캠퍼스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죄인이었을때의 삶과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간단히 이야기를 하였지만 1984년 유학온 이후의 이야기는 20년간 이방에서의 삶에 대한 재빠른 요약이다. 나는 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eKOSTA에서 요청한 몇가지 주제를 다룸으로 나의 이야기를 좀더 정리해 보려 한다.

이방에서의 삶

삶의 환경 측면에서 보면 미국에서의 삶은 흘어진 나그네의 삶, 즉 이방 삶이다. 언어뿐만 아니라 사고 방식에 있어서 우리와 친숙한 한국의 삶의 환경과는 참으로 다르다. 뿐만아니라 백인중심의 사회에서 얼굴 색갈이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소수민족에 속한다. 따라서 이방의 삶은 소수민족의 삶이기도 하다. 물론 미래의 미국은 소수민족이 현재의 다수인 백인과 비슷해질것으로 추정하는 자료들이 많이 있지만, 과거와 오늘의 현실로 보면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살고 있는 우리는 소수에 속한다. 특히 유학생 시절 언어가 능숙치 못해 어려움 많던 시절에는 어른인데도 언어의 수준을 나이 수준하고 비슷하게 맞추어 대하려는 백인들을 대한적이 있다. 따라서 이방의 삶은 매끈한 삶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껄끄러운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낮설고 광야같은 이방의 삶은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는 훈련장소 같다. 평소 의지하던 부모, 형제, 친척이 이곳에 없으며,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친구들이 별로 없다. 즉 의지할 곳이 별로 없는 광야 같이 황량한 곳이다. 특별히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머리가 비상하지 않은 나같은 사람에게 학업이나 교수의 삶은 결코 안락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의 뒤에 서고 싶지 않고, 앞서자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능력이 부족한 나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광야의 삶을 살고 있다.

그뿐아니라 미국에서 학생으로나, 교수로서 다수인 백인을 섬기며 이끌어 나가려는 삶은 늘 편안 하지만은 않다. 지난해 이곳 캠퍼스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신 높은뜻 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님은 신앙생활을 “유격훈련장”으로 비유 하신적 있다. 나는 현재 매학기당 두과목씩 강의 한다. 그외 박사논문 지도 및 학생 상담, 여러 회의 등 분주한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성경을 보면서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두과목 강의 준비보다 거의 두배의 시간이 들때가 많다). 때로는 지역교회 및 다른주에 있는 한인교회에 수양회 강사 혹은 지역교회 목사님 출타시 가끔 말씀을 전하는 역할로, 그리고 내가 속한분야의 주요학술지의 편집장으로, 1,500명 교인이 나오는 미국교회의 장로로, 세아이의 아빠로, 지역사회에서 사업을 하는 아내의 동업자/동역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 적힌 모든 역할은 쉽게 수행할 수 있는 단순한 일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조금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김동호 목사님이 삶은 유격훈련장 으로 비유하셨을때 나는 크게 “아멘”하였다.

복음의 차원에서 보면 이방의 정의는 갑자기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 믿지 않는 이들이 이방인이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된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삶은 믿지 않는 이들을 감싸주고, 사랑하고, 섬김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현장이다. 믿는 자들이 미국에서 유학하며 이방백성들, 즉 복음에 눈먼자들, 세상 성공과 물질의 욕심이라는 교도소에 같인자들, 상처로인해 억눌리고 삶을 절뚝거리며 사는자들은 복음으로 자유케 해야하는 귀한 사명을 가진 제자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다.

정체성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아이들, 특히 대학진학을 앞둔 큰 아들과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딸아이의 경우 한때 정체감의 혼돈으로 힘들어 한적이 있다. 영어는 미국아이들 같이 하고 미국에서 17년, 14년 살았지만 얼굴은 동양사람이기에 온전히 미국사람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닌 “between and betwixt” 혹은 “limbo”의 상태인 자신의 정체감을 놓고 고민을 털어놓은적 있다. 앞으로 결혼을 반드시 한국사람과 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묻는 아이들을 대하며 정체성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꺼내 놓았다.

나는 한국인이기에 앞어 “그리스도인”이다. 따라서 나를 나로 정의해주는 정체감은 그리스도인으로 표현되어 져야만 한다. 아이들에게도 그들이 민족적 차원에서는 한국인임을 분명히 인지 시키지만, 정체성의 문제에서는 그들이 Christian (두아이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임을 강조하였다. 결혼도 한국사람, 백인, 흑인과 결혼하지 말고 좋은 그리스도인과 하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같은 설명은 아이들을 자유케 한것 같았다. 다시는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감사히 여긴다. 예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현재의 삶속에 교만할 필요도 없고 비굴할것도 없어졌다. 교회에서 미국인 형제.자매들을 대할때도 인종을 먼저 보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혹 인종 문제로 인해 나와 벽이 있을지 몰라도 내가 그들을 대하는데는 큰 장애가 없다. 내게 있어 그들은 백인도, 흑인도 아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 첫날 학생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반드시 발표한다. 그리해야 믿는자로서 예수님이름 때문에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표해야 매번 강의를 철저히 준비할 수 있고 또 학생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 첫날에 이렇게 발표한지 약 10년이 되었지만 어느누구도 이같은 발표로 인해 시비를 걸고 나온이는 아직 한명도 없다. 오히려 나를 좋은 교수로 인정을 해주어서 금년에는 Trustee Teaching Award까지 받았다.

고민과 갈등

흩어진 나그네의 삶, 그리고 선택된 백성의 삶은 하나님과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안되는 긴박한 영적전쟁속에서 살아가는 삶 같다. 따라서 순간순간 기도하며, 말씀으로 온전히 서 있지 않으면 일시적 편함을 위해, 외로움을 달래기위해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려고, 혹은 잠시의 성공을 위해서, 잠시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혹은 세상에 속한 것에 예배하며 살아가려는 모습으로 변화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고 있는 중간에도 나는 이같은 영적전쟁을 체험하였다. 아내는 이곳 Bloomington지역에서 The UPS Store라는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고, 남편인 나는 동업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사업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고 있기에 동업자가 아니라 동역자라는 관점에서 서로를 대한다. 이곳 지역사회에서 사업을 하지만 우리들은 늘 캠퍼스로 들어오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이곳 학생회관에 있던 The UPS Store가 5년 계약을 마치면서 학교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인디애나 대학에서는 비슷한 업종을 계속해서 학생회관에 유치하려고 사업계획서를 받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기도하며 열심히 준비하였고 마감시간 2시간을 앞두고 있던 때에UPS본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간 아무말 없다가 갑자기 학교에 제출하는 사업계획서는 본사의 차원에서 허락을 내려야 지원할 수 있다고 무작정 통보하는 것이다. 우리는 준비한 것을 그대로 제출하였고, 그들은 약 30분 후에 응답을 하였다.

응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업계획서에 적힌 사명진술 (Mission Statement) 가운데 잠언 11: 25절 말씀인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는 말씀을 빼어야 사업계획서를 허락해준다는 것이다. 굳이 성경말씀을 그곳에 적지 않고도 말씀대로 살면 문제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는 이미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고 그 말씀을 사업의 근본 사명으로 하고 있는 터이라 말씀을 뺄 수 가 없다고 맞섰다. 당연히 UPS는 허락치 않는다라고 더 강하게 맞섰다. 말씀을 시키는 대로 빼버리고 그냥 말씀대로 사업을 하면 되지 않겠는냐 하는 유혹이 나를 엄습했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그같은 행위는 일본사람들이 한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했던 “신사참배”와 다를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순간을 영적전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는 사업계획서는 내지 않겠다라고 했다. 한편 하나님은 지혜를 주셔서 마감시간인 오후 5시전 대학의 담당자에게 전화로 문제의 진상을 설명함으로 제출날자를 하루 연장하였다. 바로 그때 UPS에서는 전화가 왔고,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삭제한뒤 우리를 대신해서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날 오후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간 우리의 계획서를 학교가 검토할것을 요청하며 제출하였다. 한편 학교측이 우리의 계획서가 아닌 UPS회사의 계획을 선택할 경우 우리는 학생회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통보하였다.

흩어져 살고 있는 선택된 백성들이 받게 되는 갈등은 배경만 다를뿐 나와 아내가 체험한 영적 전쟁과 별 다름 없는 비슷한 성격의 것이다. 돈을 하나님 대신 잠시 섬기는것, 학위를 하나님 대신 섬기는 것, 육신의 쾌락을 위해 하나님을 잠시 버리는것, 직장을 얻기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등지는것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잠시의 성공을 위해 세상과, 악한 세상의 영과 타협하고 만다. 복음을 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유학생활중, 나그네의 삶인 광야의 삶속에서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된다.

이야기를 마치며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모르는채 살던 운동선수의 삶으로 시작하여 미국에 유학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알게됨으로 이제 선택된 백성으로, 복음에 빚진자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로 마치고 있다. “쥐뿔도 가진것이 없으면서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살아가냐?”라고 묻던 어머니는 2003년 미국 방문중에 구원받고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1995년 나의집을 방문 하였던 여동생 역시 “오빠와 언니는 무엇때문에 저렇게 기쁘게 살지?”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가 귀국을 며칠 앞두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지금 지구촌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으로 섬기고, 자신의 시어머니를 전도 하여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그외 여러 학생 및 방문 교수들을 도처에서 만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지금 그리스도인이 된 형제.자매들이 여럿이 있다. 이들은 또 여러 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박사학위 마치고 교만의 어둠속에 살던 나를 하나님의 흩으심으로 조지아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제 대학 교수라는 직업을 주셔서 아직 은혜에 이르지 못한자를 향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높여드림으로 나의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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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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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빠가 우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에요.
하나님, 우리 아빠 대신 내가 대신 죽을수 있어요?
Daddy, I love you. Are you alright?

지난 내 인생 가운데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고 느꼈을때에, 내가 내 부모님들을 떠난후 이땅에 내게 허락하신 소중한 공동체인 내 가족들이 내게 들려준 위로와 사랑의 언어들이다.

Brian, our company need you more than you need.
You are our prayer.
God never ever give you up

조국을 떠나 이땅 미국에서 나의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며, 나의 삶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나의 직장 AT&T Office에서, 3달만의 오랜 병상에서 다시 돌아온 그날, 나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환영하던 동료들과, 그리고 세계 방방곡곡에서 나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 해준 분들의 그 사랑의 Message를 나는 오늘도 있을수가 없다.
또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랑하는 지체들과 청년들의 끊이지 않는 사랑의 기도가 내게 진정한 기도의 위력을 체험케하신 하나님의 인도 이셨다.

남의 신발을 신어 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속담에 있었던가.
많은것을 보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 부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앞으로의 나의 삶를 통하여 그 하실일을 기대해보는 과정이었을까? 4년전 갑작스런 뇌종양의 발견으로 살아있는것이 여기까지만 일수도 있다는 생각과 육신의 연약함과 그 어려움과 그리고 건강함의 축복, 또 과거 45년간 내가 누렸던 많은것들에 대한 생각을, 이제 내가 그 신발을 신어 보고서야 깨닫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내게 많은것을 알게한 내 조국 한국은 우리가 모두 겪었던 여러가지 어려움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것을 바라게하는 믿음을 갖게 하였고, 과정의 소중함보다는 결과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빨리 빨리라는 문화적 유산의 관습을 이 땅 미국에서는 삶을 통하여 인내와 기다림을 을 알게 하시고 과정과 정직의 소중함을 깨달아 변화의 성숙으로도 바꾸어 옮겨 주셨다.

이제 이런 소중한 삶의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하신 많은것들로 지나온 시간보다는 앞으로의 남은 삶을 이땅 미국에서 그리고 또다른 어느곳에서 나의 인생의 후반전을 어떻게 살것인가를 생각케 하여 주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땅에서의 삶의 목적과 하나님이 누리게 하여주실 이땅에서의 행복외에 또다른 소망과 축복을 을 어느곳 누구에게나 말할수 있게 하실줄로 믿는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과 함께 했던 25년간의 조국에서의 삶, 제한되었지만 익숙했던 많은것들이 나를 감싸고 있을때, 더 단단하여 깨어질수 없는 상황이 오기전 내 조상과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땅 미국으로 옮겨 흩어지게 하심을 경험 하였다. 그리고 또다른 그 햇수 만큼의 시간을 이땅에서 그리고 여러곳에서 보내게 하시고 내게 많은것을 보고 경험하게 하셨다.이제 돌아보면 내가 스스로 상상하고 계획할수 없었던 디아스포라의 삶의 여정 이었다.

부모님들을 통하여 믿음의 유산을 얻게하시고 하나님을 일찍 알게 하시고, 또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소중한 만남인 귀한 믿음의 선배들로 부터 양육 받고 도전 받게 하셔서 스스로 예수를 주라 고백케 하신 그 하나님의 계획이, 이곳으로 흩어 옮기신이후 이곳 이민교회에서 후배들을 사랑하며 가르치며 교회를 섬기게 하여 주심으로도 인도 하셨다.

내게 주신 가정을 통하여 예수를 섬기는 또하나의 가정 공동체를 이루어 내게 맡기신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양육케하시는 일도 맡기셨다.
이곳 미국에서 좋은 환경과 여건으로 인하여 자신이 소수민족인 한국인이라는 Identity와 우리가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고 성장하기엔 여러가지가 쉽지 않았다. 함께 예배하며 기도하는것을 소중하게 보여야 했고, 이곳에서의 삶가운데 나의 어려움과 실수와 직장에서의 모든 문제들을 자녀들에게 고백하고 도움울 구하는 일을 하여야만 했다.
자녀들에게 직장에서의 Meeting 때 준비할 Presentation material도 보여주고 교정도 받았고, Speech 연습도 아이들 앞에서 하곤 했었다. 신문과 잡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영어로 설명하여 주는 연습 대상이었고, 그들은 내게 Sports, Movie를 Update해주는 귀한 Entertainer 가 되어주어 어떤 모임에서도 내가 대화에 참여할수 있도록 하는 그런 도우미와 나눔의 대상들 이었다.
내가 교회에서 교사로 Mentor로 섬겼던 학생들과 청년들이 이제는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와 나와 함께 교제하며, 또 우리 자녀들의 선배로 Mentor로 아름다운 관계를 연장하는것을 보며나 실수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방정식을 보게하셨다.

미국이 아닌 다른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느낀점중의 하나는 미국에서 온 한국인에 대한 좋은 Respect를 경험한적 이 많은데, 이것은 미국이 강대국이며 영어의 상업적 가치뿐만 아니라,흩어져 있던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질수 있는 여러가지 소중한 복합적 가치임를 알수 있었다.
이곳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라나는 우리의 다음세대들과 이 곳에서 젊은 시기에 학업과 훈련을 받는 청년들이 이세대에 모세의 마지막 사역40년을 위하여 모세를 궁중과 광야에서 지내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하시며 하나님의 장막을 넓히시며,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쓰실 또하나의 목적 있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한다.

갈렙이 이산지를 내게 주시옵소서라고 가도하던 그 기도가 우리의 육신적 나이와 환경이 어디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청년들이 잊지말아야할 디아스포라의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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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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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남들도 다 그러는데 뭐

크리스천으로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를 생각하면 유학시절 코스타 96에 참가했을 때 세미나강사 중 한분이셨던 엄기영 목사님께서 하신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라는 강의에서 인상깊게 들은 부분이 떠오른다. 엄목사님은 교회가 금연, 금주운동이나 하고 바른생활 책에 나오는 삶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타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면서 크리스천의 다른 점은 내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여 그 분이 원하시는 삶을 찾아가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한 마디로 세상적인 기준이 어떻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이라는 것이다. 새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명령하신 삶을 살고 있는지 부끄러움만 가득하다.

소위 "바르게" 혹은 "떳떳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가장 걸리적거리는 종목이 "남들도 다 하는" 부분이다. 항상 지적되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불의와 뒷거래가 너무나 당연시되어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바보취급 당하고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순간에 정직하지 않고 떳떳하지 못한 방법의 유혹을 받게 되는지 모른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수를 써서" 조금이라도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에 대한, 속칭 잔머리는 누구나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다보면 몸에 배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실 이런 근성은 유학시절에 더 많이 나타나는데, 유학생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그곳을 만끽하고 일종의 혜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에 대해 이상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보다 앞선 경제와 문화에 대한 컴플렉스일까? 아니면 비싼 등록금을 내는 데 대한 분풀이일까? 그것도 아니면 남의 나라이니 나와는 상관없다는 단순한 무감각일까? 게다가 유학시절에는 한푼이 아까운 때이니 돈과 관계된 것이라면 서슴지 않고 거짓말과 불법을 저지른다.

유학시절 나는 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는 대학원생들이 어떠 어떠한 편법을 사용하면 세금면제를 받을 수 있다고 서로 가르쳐 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유학생들이 자동차보험료를 적게 내기 위해 심지어 미국에서 혼인신고를 하여 기혼자의 보험료를 적용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명백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소하게는 금지되어 있는 지역에 들어가 나물을 캔다든가, 어찌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실제로 큰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닌 불법들을 아무 감각없이 행한다. 실은 이런 일은 미국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한국인이 가는 곳엔 어디나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독일유학을 마치고 왔는데, 자기가 살던 지역은 야생동물들을 위해 베리(berry) 종류의 열매를 따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그것들이 강가에 잔뜩 열려 있었는데 그걸 따다가 과일주를 담곤 했다고 말했다. 따지 못하게 되어 있는 걸 따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다들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 다들이란 게 전부 한국사람들이죠?"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여 주었다. 마치 나는 매우 정직하고 똑바르게 산다는 듯이.

미국유학 마지막 무렵 어느날 나는 Kinko's에서 복사를 하다가 누군가가 복사기 옆에 내려두고 간 counting machine을 발견하였다-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내가 유학할 때만 해도 복사 체인점인 Kinko's에서는 이 counting machine을 복사기에 꽂고 원하는 만큼 직접 복사를 한 후 그것을 계산대(cashier)에 들고 가면 거기 나온 숫자대로 복사비를 계산하여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그 counting machine엔 숫자가 '4'로 나와있었다. 그걸 보면서, '어떤 양심없는 인간이 치사하게 넉 장 복사하고 돈도 안 내고 저걸 여기 내려두고 갔나' 하는 멸시의 마음이 생겼다. 다음 순간, 거의 책 한 권은 될 법한 많은 분량을 복사하러 간 내 머리에 번개같이 스친 부끄러운 생각이 있었다. 이거 다 복사하고 계산할 때 저거 가져가면 넉 장 값만 내겠네? 아, 나도 내가 비웃던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아니, 그는 넉 장 값을 떼어 먹었지만 나는 약 백장 값을 떼어 먹을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더 가증스럽다.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은 언뜻 명확하지 않아 보일 지도 모른다. 성경책에 인생살이의 모든 경우가 미주알 고주알 적혀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지표가 되는 거대한 원칙들을 성경을 통해 이미 가르쳐 주셨고 또 그의 속성을 아는 우리들은 순간 순간 냉정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선(善)과 그렇지 않은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분명 타지(他地)이고 미국의 법이나 상식에 우리는 민감하지도 못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네 나라에서만 착실하고 정직하게 살고 남의 나라에선 조금 맘대로 해도 된다"라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으실 거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큰 이득이 아닌 것들, 설사 큰 이득이라고 하더라도 워낙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좀 감소되어 줄까? 율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도 밝아지는 마음을 갖기 위해 조그만 일에도 하나님의 기준을 생각하고 자제하여 산뜻한 봄을 맞이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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