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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후반기부터 써온 ‘최주희의 사랑이야기’를 이제 마무리하려 한다. 코스타 홈페이지 담당자로부터 ‘사랑’에 대한 글을 요청받은 후 처음에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혼전 성관계가 독버섯처럼 퍼지고 불륜과 욕심으로 가정이 무너지는 심각한 현실 앞에서,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 결혼과 가정의 기초가 무엇인지 강조하였다. 이제 마지막 글을 쓰려고 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누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건전하고 건강하게 만들며 주님 나라 위해 이 땅에서 선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신앙생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균형이 많이 깨어진 것 같다. 기도만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만 하면 그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된다. 삶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넉넉함도, 섬김도 없는데 기도는 몇 시간 한다. 기도의 내용은 고난 극복, 물질 채움, 욕심(비전 혹은 꿈이라고 표현하지만) 성취가 주를 이룬다. 우리는 주인이고 하나님은 종이 되셔서 부지런히 우리를 섬기셔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사랑과 은혜가 넘치셔서 우리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 주셔야만 하고 이 일에 급급한 분이라고만 생각한다. 기도는 하는데 삶은 이기적이고 얌체 같다. 그런데도 믿음은 좋아 보인다.

신앙 좋다고 간주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 즉 ‘거룩과 사랑’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구체적인 결정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인 거룩과 사랑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고 희생을 요구하지만, 개인적인 삶의 선택 기로에서는 하나님이 결정해 주시면 안전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종종 확신에 차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의 본질은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 음성 듣기’가 아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fear & respect)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공경하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시되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며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신 권세와 능력의 하나님을 우리는 공경해야 한다(사40:26). 그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의 죄악에 진노하시고 심판하셔도 마땅한데, 인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시고 친히 우리 죄악을 담당하신 그 큰 사랑을 공경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는 은혜로 거저 주시는 구원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진 고난 다 겪으시고 생명까지 버리신 엄청난 희생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단순화시키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애써 늘 기억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구원받은 우리들도 이 땅에서의 삶을 놓고 하나님과 반드시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인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고 권면하셨다. 더욱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행위가 숨김없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전12:13-14, 눅12:2-5; 롬14:11-12, 고후5:9-10, 벧전1:1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만큼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눅12:5)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장 중요하고 기본 되는 본질임은 성경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다(창22:12). 행함 있는 믿음의 출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호렙산에 선 모세에게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다(신4:10). 우리가 즐겨 인용하는 시편 103편 말씀의 내용을 보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심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적용되기 위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어야만 한다(13, 13, 17절).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에는 관심이 없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뉘우치고 돌이킴)라는 조건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이나 교회를 받으신다(행9:31, 10:2, 22, 35).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만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엡5:21).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치유의 광선을 발하신다(말4:2).

지금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많이 찾고 존경하는 것 같은데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막7:6). 오히려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고 수단으로 삼으며 우습게 본다. 그저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성격대로, 자기 가치관대로 신앙생활 할 뿐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세계는 이중생활 속에서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믿음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우울증, 강박증, 망상, 불안증을 겪고 있다. 온갖 성적인 범죄와 투명하지 않은 돈 문제 그리고 욕심이 그리스도인들을 침몰시킨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되었고, 교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며,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우리의 모든 삶과 생각을 드러내어 점검 받는 것부터 시작하자. 두려움 가운데 이 일을 이루자. 그리고 그분을 마음으로 공경하며 말씀하시는 교훈에 순종하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이 본질 위에 가정이 있고 직업이 있고 사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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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생기는 순간부터 부모들은 많은 에너지와 노력을 자녀양육에 둔다. 잘 키우고 싶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런데 그 노력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실수나 실패 혹은 방황이나 혼돈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자들은 교육의 목표를 크게 두 가지로 둔다. 하나는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을 가지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인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있다. 바로 ‘거룩’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품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녀들의 교육목표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볼 때 이 두 가지 목표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중요하다.



먼저 첫 번째 교육 목표인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 즉 ‘거룩함’은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수년 전 출강하는 학교에서 ‘현대사회가정’이라는 과목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때 강의준비를 위해 연구하면서 발견한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이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살도록 자극하고 유혹하고 있다는 것이며(제1특징), 다른 하나는 그렇게 본능적 충동에 의해 살다가는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힘들게 만드는 신용 및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회(제2특징)라는 것이다.

제1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리는 거리에서나 TV에서나 맛있는 먹을거리를 쉽게 접한다. 입고 싶은 예쁜 옷들도 엄청 많다. 핸드폰, 스마트 폰 정신이 없다. 세련되고 성능 좋은 멋진 차들도 너무 많다. 뿐만 아니라 Sexy 한 몸매와 차림으로 다니는 여자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법만 없다면 마음껏 가지고 싶고 만지고 싶다.

문제는 제2특징이다. 이렇게 감각적이고 유혹적인 상황에 대책 없이 일단 반응부터 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규모 없이 돈 쓰다가는 신용불량자 되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가도 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덕적 하자가 생기면 추락하게 되어 있다. 과거에는 어느 정도의 불륜은 그 사람의 힘이었고 부정한 돈은 능력이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냥 추락이다. 특별히 지금은 비밀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돈의 흐름은 통장와 카드에 고스란히 기록되고 어떤 대화도 핸드폰에 녹음시킬 수 있다. 움직임과 행동은 손안의 핸드폰과 곳곳의 CCTV에 그대로 살아있다. 네티즌의 고발도 한몫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으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이다(마10:26, 눅12:3).

그러므로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도덕과 윤리의식을 의도적으로 심어주는 것은 이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한 기본이 되었다. 사회질서와 인간관계에 대해 너무나 짧고 간단명료하게 명령하신 십계명의 내용이 우리 자녀들을 살리게 한다. ‘부모를 학대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으로 폭행하거나 성적인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내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않으며 거짓말로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부모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생활가운데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설명해주어야 할 것이다.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 요즘 부모들은 그들이 태산을 넘을까 험곡에 갈까 노심초사하며 앞길을 평탄케 해 주느라 정신이 없지만, 그보다 ‘빛 가운데 걸어가라’고 강하게 가르쳐야 한다. 아들에게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진호야, 엄마 아빠가 인생을 살아보니 태산도 험곡도 피할 길이 없더라. 정말 중요한 것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삶이야. 그리고 세상에 비밀이 없음을 기억해야 해. 네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네 행동, 네 말 심지어 네 생각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훤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편하단다. 너 자신을 누구 앞에서든지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들테니”

두 번째 교육목표를 보자.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은 너무 교과서적이다. 그래서 현실감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 또한 학습이란 관점과 현대사회의 흐름 가운데 살펴본다면 얼마나 현실적이고 중요한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 학습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학습의욕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동기 부여가 바로 ‘세상의 필요’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웃과 세상의 어려운 점을 보고 내가 무언가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보며 후에 사업가가 되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 공부하고, 장애우 친구를 도와주다가 특수교사의 꿈을 가진다. 시각장애인 강영우 박사의 아들이 안과의사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우리 아들은 건축설계를 전공하는데, 십여 년 전 침례교단 선교훈련센터를 짓다가 건설회사가 부도나 고생하던 아빠를 옆에서 보고 건축사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대학교들 중 실력과 인격 면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한동대학의 교육목표는 ‘Why not change the World?'(세상을 한번 변화시켜 보지 않겠습니까?)이고, 미국의 필립스 아카데미는 'Not for Self'(자기 자신만을 위하지 말라)이다.

현대사회의 흐름이란 관점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대가 강조하는 리더십이 바로 섬김의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많은 리더십 아카데미에서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섬김이다. CEO 들이 사내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밥을 먹거나 손수 화장실 청소하는 모습들은 이런 면에 매우 의미 있는 상징이다. 또한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실력, 영어, 창의성 뿐 아니라 ‘인성’이 추가되었다. 아무리 실력과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겸손하고 섬김의 성품이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것을 대기업들이 알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중학교에서 반장을 뽑는데 어느 학생이 똑똑하고 말 잘하고 비전 있고 열정 있어도, 만약 잘난 척하거나 친구를 무시한다면 결코 반장에 선출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실력과 의욕이 있어도 그 아이가 영향 미칠 수 있는 대상은 한 반의 20여명도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세상의 필요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그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섬김의 자세를 가지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도와야 할 것이다.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 이것은 부모가 자녀의 손을 잡고 늘 바라보고 향해 가야하는 너무나 중요한 교육목표이다. 또한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도 잘 살게 하는 귀중한 푯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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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하나님의 것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자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도는 머리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삶 가운데 “하나님, 이 아이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경우는 몇몇 상황일 뿐이다. 자녀가 심각한 병에 걸려 많이 아파할 때 “이 아이는 당신의 것이오니 고쳐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수능을 앞두고 새벽기도하며 “이 아이는 당신의 것이오니 머리가 되게 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옵시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당신의 귀한 종 되게 하옵소서.” 외친다.

그런데 우리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때에만 부르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녀가 나의 소유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귀한 손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분이 아이를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두기를 원하시든 그대로 내어드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 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를 향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양육하겠다는 결단과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결단한다고 해도 저절로 순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녀의 소유권에 대한 인식과 자녀를 향한 욕심으로 인한 끊임없는 갈등을 경험하면서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 필요하다(고후10장5절).

나의 경우 이런 결단을 연습하는데 도움을 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아들 진호를 출산할 때의 일이다. 분만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듯한 통증과 의사선생님의 수고에도 아이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님들도 숨 가쁘게 움직이다 결국 과장 선생님을 부르게 되었다. 다행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아이는 출산하였으나 도무지 울지 않는 것이다. 산소 호흡기를 낀 채 여러 생각이 오갔다. 한참 만에 아이가 겨우 숨을 쉬기는 했다. 그러나 동생이 중증 뇌성마비였고 특수교육을 전공했고 특수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아이의 뇌에 산소공급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길지 가늠할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낙심이나 절망감이 아닌 이상한 소명감이 생기는 것이다. ‘주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저에게는 동생을 돌보며 겪었던 경험과 특수교육을 전공한 지식이 있습니다. 또 특수학교 교사로서의 경력도 있습니다. 열심히 키우겠습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다만 또다시 아픔을 겪게 되는 불쌍한 저의 친정 부모님은 당신이 위로하셔야 합니다...’ 그 당시 내 판단과는 달리 아이는 다행히도 건강하게 자랐다.

이런 적도 있었다. 아이가 5살 쯤 되었을 때다. 그 당시 우리는 Southwestern 침례신학교에 유학중이었는데 학교 기숙사에 아들 또래가 많이 있었다. 한번은 최 목사님 딸 효영이가 나에게 다가와 “사모님, 저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할 수 있어요. 사랑은 오래참고...” 너무나 기특하고 부러웠다. 그날 밤 성경책을 들고 진호에게 말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에 대한 너무너무 좋은 구절들이 있는데 우리 한번 읽어볼까?” “싫어싫어 너무 어려워, 그냥 그림 성경 읽을래~” 그런데 그 순간 그림이 하나 떠올랐다. 아들이 기술고등학교 제복을 입고 씩씩한 얼굴로 땀을 흘리며 기계를 만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 속으로 ‘이 녀석은 그리 똑똑한 것 같지도 않은데 책도 잘 안 읽고... 게다가 친구와 놀 때도 남자로서의 리더십도 없이 그저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하는 편이고 욕심도 없으니, 어디 대학이라도 가겠어?’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그림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성격 착한 마음이어도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눌려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같은 기술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가치를 일깨워 주며 새로운 소망과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면 너무나 의미 있고 귀한 일이었다. 물론 좋은 대학 나와 남들 부러워하는 사회적 지위에 있으면서 영향 미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과 같은 지독히 경쟁적이고 사람을 학벌로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이 또한 너무나 중요한 사역이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님, 그것 참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기 원하신다면 마음껏 진호를 사용하시옵소서. 그러면 저는 진호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나요?’ 그때부터 성경적인 자녀교육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심 가지게 되었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결혼 문제, 직장 및 장래 문제, 자녀의 문제, 경제 및 건강 문제 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여러 문제들을 들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며 그 응답을 체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신앙 좋은 사람하면 먼저 떠오르는 특징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물론 기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기도가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자녀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가치로 돈을 평가하며, 하나님의 눈으로 장래와 직장을 생각하는 것이다.

가치관의 변화, 관점의 변화, 그리고 변화된 가치관과 관점이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중에서 가장 어렵지만 기본적인 것이 바로 ‘자녀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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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이혼 사유로는 많은 사람들이 ‘성격 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 배우자의 부정행위, 경제적인 문제, 성격차이로 표현되는 대화단절 및 거짓말 등 이다. 사실 우리 주변을 돌아다보면 이혼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외도, 낭비벽, 너무나 많은 부채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이 많이 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다. 믿는 가정이나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가대원 끼리 눈이 맞아서, 혹은 목사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시중들다시피 하는 여성도와 목회자가, 대학부 담당 장로와 대학생이 불륜관계에 있기도 하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규모가 없이 새로 나온 기계는 일단 사고 보고, 타고 다니는 차가 고장 나지 않았음에도 몇 년 되면 다른 차로 바꾼다. 자녀 사교육비 과다 지출, 분수에 넘는 비싼 옷, 습관적인 외식도 사소한 것 같지만 가정 경제를 뒤흔드는 요인들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사랑과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는 요인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남편과 아내가 아닌 다른 이성과 불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도덕성을 지키며 오해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성(性) 관리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성과 단 둘이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직장에서 야근 한다며 이성과 단 둘이 있거나, ride 를 준다고 이성끼리 차 안에 단 둘이 있지 않는다.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 가 반문할지 모르나 이는 회색지대여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죄’가운데 빠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빌미가 된다. 실제로 이성끼리 단 둘이 있는 환경에 자주 접하게 되면 정들게 되어 있다. 실례로, B 집사님이 새벽에 교통사고 났는데 그 옆에 여직원이 타고 있음이 발견되었고 불륜이 들통 나 회사를 사직하였다. 반면 미국에서 훌륭하게 목회하고 계시는 A 목사님은 “혹 비가 올 때 내가 빈차로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우리 교회 여자 성도를 만나도 태워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단에서 선포하셨다고 한다.

둘째, 이성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 성도의 교제 혹은 친밀감이라는 명분하에 이루어지는 도에 넘는 개인적인 친절이나 관심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위에 언급된 교회 안에서의 다양한 불륜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들이 과다한 노출패션을 삼가야 한다. 패션은 자신의 취향과 유행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 특히 남성들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성충동을 느끼게 하여 어려움을 준다면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몸가짐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가슴이 많이 드러나도록 패인 옷, 엉덩이가 보일 듯 말 듯 한 짧은 치마, 진한 향수, 야한 눈짓과 몸짓은 남성들이 유혹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아동성폭력은 범죄자들에게 전자 팔찌와 발찌를 채움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동성범죄를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 중 중요한 것이 바로 여성들의 노출패션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과다 노출 패션으로 인해 받은 성적 자극을 해소할 길이 없을 때 연약하고 힘없는 아이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장과 거리 그리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취향과 만족만 생각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여성으로 인해 유혹을 느끼는 남성들이 불륜행각을 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편과 아내는 반려자의 성적 필요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적극적인 태도로 아름답고 즐거운 성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 반려자가 잘해줄 때만 상 주듯이, 귀찮지만 할 수 없이 해야 하니까 반응해서는 안 된다. 부부 안에서야 말로 최대한 야하고 매력적으로 꾸며야 한다. 은은한 향수와 sexy한 속옷, 다양한 방법, 구체적이고도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은 부부간의 사랑과 성의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도울 것이다.

성 관리 뿐 아니라 돈 관리도 부부의 사랑과 가정을 지키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돈 관리를 위해서는 다음의 원칙을 가지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자족과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딤전6:6-10). 안타깝게도 수입이 적은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주어진 재정에 대해 감사하고 자족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좀 더’라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끝도 없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자족과 감사의 마음은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

둘째, 분수에 맞는 생활 규모를 가진다. 수입이 적으면 우선순위에 따라 알뜰하게 절약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을 구입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필요하지만 덜 좋은 것을 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중고차면 어떻고, 냉장고가 좀 적은 용량의 크기면 어떤가? 비싼 옷이 아니어도 내 스타일에 맞는 깔끔한 것이면 어떤가?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 만약 지금의 수입이 생활하는데 어려울 만큼 부족하면 일을 더 해야 한다. 계속 불평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속상해 하는 것보다는 일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고 생산적이다. 시간 당 액수가 적다고 우습게 봐서도 안 된다. 적은 액수라도 노력하고 땀 흘려 번 돈은 가장 신성하고 보람 있는 일이다.

넷째, 한 단계 낮추는 삶을 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자신들만 돈 문제 안 일으키고 잘 살면 되는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우리는 물질을 사람들과 나누며 사랑의 섬김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십일조만 했다고 우리의 몫을 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구약에 나타난 여러 종류의 십일조를 합치면 결국 십의 3조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다. 가난하고 어려움을 겪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려면 돈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수준대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 단계 낮추는 삶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 우리 부부는 한심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바로 우리가 가장 잘 살게 될 때의 상한선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 상한선은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수준으로 볼 때 충분히 그렇게 살아도 되는 수준에서 한 단계 낮추는 것으로 했다. 결론은 30여 평의 아파트, 중고차로 소형, 수입의 30%는 헌금을 비롯해 선교 및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 온지 18년째 되었다. 집은 32평 아파트, 차는 중고 소형차이었는데 3년 전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대전에서 고속도로를 오가는 기회가 많아 중고 중형차를 사용한다. 수입의 30%는 아직은 지켜지고 있으나 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학비와 생활 및 주거비가 만만치 않아 힘이 든다. 용돈은 아들이 아르바이트하며 스스로 번다고 해도 버겁다. 어쩌면 아들이 공부하는 동안에는 잘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삶의 절제를 가져다주는 돈에 대한 우리의 원칙이고, 그 원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대로 순종하며 살고픈 우리의 마음이다. 어떤 분들은 ‘당신들은 돈을 잘 버니까?’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연습을 가난할 때부터 해왔다. 2만원 있을 때 만원을 어려운 형제 성경책에 몰래 넣기도 하고, 유학 시 한 달에 식생활비로 120$ 지출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위해 매달 60$을 지출했다. 돈이 없을 때, 가난할 때가 나눔의 연습을 할 절호의 기회이다.

마지막으로 재산 증식을 위해 불법이나 무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주변을 보면 남들 다 하기에, 아니면 법을 지키다가는 너무 세금이 많아서 편법과 불법을 자행한다고들 말한다. 또한 욕심을 내어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오히려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이 본다. 특별히 부동산이나 주식거래가 그렇다. 이것은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정 경제의 뿌리를 크게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본능과 욕구를 철저히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이는 가정을 지키기 어렵다. 그래서 성 관리와 돈 관리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의 성 관리와 돈 관리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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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을 의미한다(마19:4-6; 고후6:14-16). 그런데 너무나 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정의를 마음먹고 깊이 묵상해 보면 결코 그냥 단순하게 언급할 내용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하나님 안에서”라는 의미는 교회에 다니거나 거듭난 그리스도인 이상의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라는 의미이다. 가정에 대한 구체적인 축복이나 교훈을 언급하는 성경구절을 보면 그 앞에 반드시 조건이 있는데 “경외”라는 단어이다(시128:1, 4; 엡5:21). 사실 이 “경외”라는 단어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중요한 기대이자 명령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 됨”이라는 것은 결혼과 동시에 부부가 저절로 완벽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셨으니 부부가 전 인격적으로 100% 하나 됨을 만들어 가는데 헌신하겠다는 의미임을 이해해야 한다. 가정생활 전문가들은 부부가 서로 깊이 있게 하나 됨을 느끼며 친밀해지는데 약 27년이 걸린다고 한다. 즉 이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심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데 헌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결국 결혼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 됨을 만들어 가기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 됨을 위한 헌신”은 바로 가정의 기초이기도 하다. 기초가 든든하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너끈히 견딘다. 하지만 기초가 든든하지 않으면 겉보기에 아무리 모양이 멋있고 화려하며 비싸게 보여도 비바람이 몰아치면 쉽게 무너질 뿐이다. 이제 결혼의 의미이자 가정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 됨을 위한 헌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을 두려워하고(fear) 공경한다는(respect)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그분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쓰던 달던 상관없이 말씀대로 순종하려 애쓴다. 또한 말씀을 읽는 목적은 은혜 받고 응답 받고 위로 받기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순종하기 위함이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취사선택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런 취사선택적인 태도는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언급한다할지라도 결코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본인은 믿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믿음으로 착각할 뿐 제멋대로 종교생활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귀하게 여기며 그것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본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가치관을 교정하며, 숨겨져 있는 내면의 욕심을 드러내 회개한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교훈과 명령은 자기 몸을 쳐서라고 복종코자 노력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런 삶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삶이 그들에게 분명한 목표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목표를 향해 가는데 필요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대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재정적으로 다른 통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비밀리에 물건을 사지 않는다. 하루의 일과나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거짓말 하지 않는다. 더욱이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이성과의 만남을 개인적으로 가지지 않는다. 다른 이성과 유혹이 될 수도 있는 회색지대 조차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가정에 대한 재정적 책임과 가사 일에 대한 책임을 기쁨으로 감당한다. 반려자의 욕구 충족에도 성실하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주님께 의지하며 그리스도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도록 늘 힘쓴다. 또한 그분을 경외함으로 서로에게 복종하고 사랑한다.

가정의 기초가 되는 두 번째 요소는 하나 됨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려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에게 적응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기쁘게 해주려 노력하며 그를 위해 구체적으로 희생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결혼하면 반려자가 자신을 위해 정성껏 맛있게 만든 요리를 식탁위에 올려놓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그 요리를 즐기면서 맛있게 먹게 되리라 예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남편과 아내가 오늘 저녁 무엇을 먹을지 함께 상의하여 결정하고, 어느 마트에 가서 장을 볼지 또한 어떤 재료들을 구입할지 정하여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함께 다듬고 씻으며 양념을 적당하게 넣고 요리를 마친 후, 멋있는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 두고 함께 즐기며 맛있게 먹는 이 전 과정이 결혼 생활이다.

이 과정에서 양보와 의견의 조율과 상대방에게 나를 맞추는 노력들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어렵기도 하다. 남편의 권위적인 태도, 말이 없음, 냉정함, 자기중심적인 태도... 아내의 예민함, 좁은 마음, 오해... 이런 것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며 시시비비를 따지고 논쟁할 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 반려자를 용납하고 받아줄 때 해결의 실마리가 생긴다. 죄가 아니라면 반려자에게 나 자신을 맞추고 무조건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런 노력을 할 때 세월이 흘러 어느 새 긍정적으로 변해 있는 반려자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 됨을 만들어 가는데 반려자의 좋은 점을 의도적으로 찾아 칭찬해 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큰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이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데 큰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성숙한 관계는 성숙한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다. 반려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로 만들어져 갈 때 깎이고 부러지고 다듬어지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이것은 자신의 인격적 결함 때문에 생기기도 하지만 반려자를 위해 희생할 때 생기기도 한다. 때로 사람들은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훌륭한 전문가가 되었을 텐데...’, ‘내가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을 텐데...’라며 억울해 한다. 하지만 억울해 할 일이 아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런 하나 됨의 과정을 겸손하고 즐겁게 거치는 사람들은 가정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껏 누린다. 서로에게서 누리는 편안한 쉼, 재미있고 즐거운 웃음, 사랑받고 있고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는 든든한 울타리,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 교회와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는 사랑과 섬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결혼한 부부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축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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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칼럼은 지난 달 칼럼 “혼전 성관계에 대한 오해와 진실” 후속 편이다. 혼전 성관계에 대한 진실을 올바르게 인식했다면, 이제는 이미 혼전 성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는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즉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혼전 성관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 "사랑하기에... 유혹적인 환경에서 실수로... 잘못인지 알지만 그 사람의 요구가 너무 강하고 거절하면 떠날 것 같아서... 결혼을 약속하였기에 조금 일찍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서... 몸을 함께 했습니다"가 아니다. 단순하지만 명백하게 “하나님 앞에 간음죄를 범했습니다”라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으로, 십계명을 비롯하여 구약과 신약 구석구석에서 죄로 선포하고 있다.

간음죄를 비롯하여 여러 죄악들을 행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엡4:18-19)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치대로 자기 성격대로 말씀을 해석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믿는다. 다음 단계는 마음이 굳어진다. 이렇게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게 만들며 영적인 감각을 잃게 한다. 결국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모든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fear and respect)하지 않았음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대로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았음을 먼저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악한 길, 불의한 생각 가운데 있지 말고 거룩하고 도덕적인 삶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사55:7, 시103, 요일1:9)

두 번째는 혼전 성관계를 가지게 된 원인을 분석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약점을 고치고 보완하여 또다시 죄를 범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원인으로 내실 있는 이성교제가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부족했는지(이성교제가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며 건전하고 성숙한 관계가 되도록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자의 지나친 노출 패션이 남자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지 않았는지, 만나는 장소가 은밀하거나 고립되어 있어 유혹적이지는 않았는지, 자기조절능력이 부족한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섬세하고 예민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다시는 제공하지 않도록 한다.

세 번째는 성 에너지 관리를 위해 적당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며 야한 동영상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분하에 폭력적이고 음란한 게임을 즐기며 심지어 사이버 섹스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고 오히려 스트레스를 만드는 일이다. 운동과 자연을 많이 접하는 산책은 우리의 정신건강을 좋게 하며 성 에너지도 건전하게 관리해 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음란물에 중독되어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영적 싸움으로 단정하고 그저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 소리만 높이 부르짖고 돌아서면 다시 음란물을 접한다. 그러고는 사단이 너무 강하여 자신은 무기력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며 자포자기이다. 혹은 자기 조상의 죄 때문에 자기가 그럴 수밖에 없다며 묶는 기도, 끊는 기도에 몰두한다. 사람들이 이런 식의 접근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옳지 않은 행위를 사단이나 조상에게 책임전가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인 잘못된 교리이다.

창조주, 만왕의 왕,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승리하셨으며 사단에게 전혀 영향 받지 않으신다.(욥1:6-7; 엡1:10-13, 20-22, 6:10-20; 야4:6-8; 벧전5:8-9...) 또한 아들이 부모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는다.(렘31:29-30, 겔18:20) 오히려 사단은 우리가 자기관리에 소홀하여 실수할 때 그 실수를 가지고 우는 사자처럼 삼키려 덤벼든다.(벧전5:8 ‘근신하라’는 영어로 ‘Be self-controlled'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절제를 통해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또한 믿음을 가지고 진리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이다.(엡6:14-17)

야하고 음란한 것들을 피하고 운동과 산책을 규칙적으로 하는 자기관리가 성적인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네 번째는 매일 주님께 자신의 약점을 내어 놓고 도우심을 구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자기를 관리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 물론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벗어버리기 위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인내해야 하는 우리의 몫이 있으나(히12장),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시다.(대하16:9) 더욱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려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넉넉하리라 믿는다.(고후7:1, 롬8:37)

하나님의 법도대로 결혼을 통한 부부관계 속에서 떳떳하고 자유롭게 성관계를 즐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매우 놀라운 축복이다. 하지만 혼전 성관계를 이미 가진 사람들도 철저한 회개와 위에 언급된 회복의 과정들을 온전히 거침으로 충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구세주(Savior)이시며, 동시에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인생의 주인(Lord)이 되신다. Praise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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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혼전 성관계에 대한 여러 설문조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2009년 알바천국 ‘성의식’ 설문조사에 의하면 대학생 10명 중 7명이 성관계 경험이 있고 그중 70%가 만난 지 한 달 이내 성관계를 가졌다. 2009년 학원 복음화 협의회 ‘전국 대학생의식 조사’에 의하면 10명 중 6명이 성관계를 경험하였고 기독대학생중 23.9%가 ‘혼전성관계 가능’이라고 답했다. 또한 2009년 죠이선교회 ‘대학생들의 성의식 조사’ 결과는 혼전성관계 ‘필요하다’가 67%이다. 동거 ‘반대’는 23%로 77%가 동거를 찬성하거나 인정한다. 또한 2010년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 없어서 못 판 품목이 김밥, 치킨, 그리고 콘돔이라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베이비’라는 신종어도 있다.

이런 현실 앞에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느낀다. 위의 언급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집단만의 통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 젊은이들도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엡4:18-19)

혼전 성관계의 명분은 이러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사랑을 마음껏 표현해 주고 싶다!’고 말한다. 혹 ‘결혼 후 떳떳하게 성관계를 가지자’는 여자의 반응에는 ‘넌 날 못 믿니?’라고 따지기까지 한다. 여자는 거절하면 남자를 끝내 믿지 못한다는 말로 여기고 남자가 화를 내거나 돌아설까 두려워 그저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만약 여자가 성관계를 거절했기 때문에 떠날 남자라면 진작 보내는 것이 낫다. 그런 남자는 결코 신뢰할 수 없다. 더욱이 평생을 믿고 삶을 나누기에는 너무나 불안하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널 믿지! 그리고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다 알지. 하지만 우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떳떳한 사랑을 나눌 때 까지 참자!”라고 말하며 빨리 밝고 사람 많은 곳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어떤 여자들은 야한 옷차림과 향수, 야릇한 몸짓으로 오히려 남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혼전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동기와 목적을 모두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절제할 수 없는 성 충동’ 때문이다. 남자는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자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또한 한번 성관계를 가진 여자에 대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육체적 욕구만 채우려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녀 관계는 성관계를 가지기 전과 가진 후가 정반대로 변한다. 성관계를 가지기 전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열애해왔지만, 성관계 후에는 여자가 남자를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는 격이 된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매력을 잃고 오히려 그녀를 헤픈 여자로 우습게보지만, 여자는 이미 몸을 주었기에 이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불안한 생각으로 오히려 지나치게 적극적이 된다. 그럴수록 남자는 여자가 귀찮아지고 짜증이 나며 슬그머니 관계를 끊는다. 실제로 혼전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결혼할 확률은 매우 낮다. 1달 이내 헤어질 확률이 21%, 1년 이내 헤어질 확률은 81%라고 한다. 결국 사랑은 깨어지고 서로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다.

혼전 성관계로 인한 결과는 이뿐 아니다. 남자 여자 모두에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 여자의 경우 더 심각한 아픔을 겪는다. 첫째, 자존감이 낮아지고 내면이 불안정해 진다. 도덕성은 자존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를 존중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혼전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늘 잔잔한 불안감 속에 우울해지기 쉽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어렵다.

둘째, 그들의 만남이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욕구 충족에만 급급한 만남이 되기 쉽다. 서로를 알아가며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전인격적 친밀감을 충족하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임신의 가능성과 낙태의 위험이다. 혼전 성관계는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임신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낙태를 한다면 이는 살인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생명체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낙태를 한 사람들은 불임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낙태 시 자궁벽을 긁어내는 작업은 후에 정자와 난자가 착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혹 임신하여도 유산의 가능성이 높다.

다섯째, 만약 결혼한다하여도 서로에 대한 존중감과 신뢰도가 낮다. 이것은 혼전 성관계 경험자가 그렇지 않은 부부의 이혼율보다 3배 높다는 연구 결과에도 나타난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로는 혼전 성관계를 가진 자의 특징이 관습에 덜 메이고 약속이나 언약을 적게 하며 그것을 지킬 개인적인 능력도 약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다툼과 불화를 일으키며 폭력과 음주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겉으로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며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감정적이며 책임감과 자기조절 능력이 약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과 계산할 날이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게 되어있다. 특별히 혼전 성관계, 즉 간음(십계명 중 제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에서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매우 엄하게 책망하시고 경고하심을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고후5:9-10, 고전6:9-10, 갈5:16-21, 골3:5-6, 데전4:1-5, 야4:4, 벧전1:15-17, 계2:19-23). 이것이야 말로 혼전 성관계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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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타 2010/06/20 21:23  Addr Edit/Del Reply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관계를 이미 경험한 젊은 이들에 대한 전언을 듣고 싶습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 또는 여러 이유로 이미 성경험을 한 젊은 이들이 이제부터 어떻게 순결함을 지켜야 할지에 대한 내용의 칼럼을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사랑 특별히 연인들의 사랑이나 부부의 사랑에 대해 논할 때, 사람들은 사랑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내리는 것을 종종 본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랑은 이런 것이야”라고 정의 내리고 그냥 그 정의를 믿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관계들을 오해나 곤경에 빠지게 하는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사랑은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내 의지로 컨트롤되지 않는 그 어떤 것으로 감정에 바탕을 둔 로맨스라는 것이다.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마구 솟아오르는데 나도 그 마음을 어떻게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커 그냥 그 감정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감정적인 열정으로 사랑에 빠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며 무책임하게 뒤돌아서버린다. 그간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때는 사랑했으나, 지금은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라는 답만 돌아올 뿐이다. 심지어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음에도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돌아선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잘못된 정의다.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사랑을 정의내리는 것은 자신의 감정적이고 현명하지 않은 처신을 합리화 하는 것으로 책임 없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부추기는 격이 된다.

하지만 사랑은 통제 가능한 것이고 책임이 따른다. 즉 사랑은 절제와 책임을 포함한다. 절제와 책임이 따르는 사랑은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으며, 오히려 성숙하고 생산적인 관계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둘째, 사랑하면 서로의 생각이나 감정 심지어 욕구까지 무엇인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하게 행동하거나, 혹은 내 욕구가 무엇인지 몰라 눈치보고 있다면 우리는 쉽게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 화를 낸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한다하여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상대방에게 표현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특별히 여자들의 경우 굳이 말로 그것을 표현해야 하느냐며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이고도 잘못된 기대이다. 가정상담 전문가들은 부부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알게 되는데는 대략 27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물론 투명하고 성숙한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라면 시간이 좀 더 단축되겠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까지 알 수 있는 친밀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노력에 헌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노력을 하는데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

셋째, 사랑하면 서로의 생각이 늘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같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생각이 다르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갈등한다. 그렇지 않다. 사랑해도 생각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 MBTI 성격검사에 의하면 16가지의 성격유형이 나온다. 이는 내 성격은 단지 1/16에 불과하며, 나와 다른 성격의 유형이 15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만약 상대방이 모든 일에 늘 나와 생각이 같기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사회부적응이다.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평생 불만족과 불평, 그리고 갈등과 분노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랑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당신이 더욱 필요함을 고백하게 된다. 나와 남편은 서로 반대되는 성격이다. 나는 예민한 편이고 남편은 둔한 편이다. 나는 남편 덕분에 안정감과 여유를 배우게 되고 남편은 나로 인해 섬세함과 배려를 배운다. 나는 곱창전골과 돼지족발과 도가니를 좋아하지만 남편은 순 살코기를 좋아한다. 남편은 나에게 “무슨 여자가 술안주 감을 좋아하느냐?” 비난할 수 있고, 나는 “무슨 남자가 음식을 여자처럼 가리냐?”고 불평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닭 한 마리 사면 남는 것이 없다. 나는 닭의 날개와 연골을 먹고 남편은 퍽퍽한 흰살을 먹는다. 매우 경제적이다. 서로의 다름이 복으로 인정되는 순간이 많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한계가 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고백하였다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일관된 사랑의 감정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일 뿐이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지난 24년의 결혼생활을 뒤돌아보면 큰 갈등이나 다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늘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성격이나 관점의 차이로 서로 답답하기도 했고,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한때 중년 권태기로 무미건조한 시간을 보낸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때 마다 우리는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엎드려 사랑을 구했고 그분은 풍성한 사랑을 늘 공급해 주셨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사랑이 없을 때 곧바로 영원한 사랑의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는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사랑의 관계를 해친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 있거나 사랑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올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건강한 것인지 건강하지 않은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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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결혼을 위한 준비는 결혼할 대상이 있고 결혼날짜를 잡으면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결혼준비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에는 많은 돈을 들이고 계획을 세우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정작 진짜 해야 할 결혼준비에는 너무나 소홀 한 것을 본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가정들이 깨어지고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결혼준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안정감 있고, 책임감이 있으며, 진실한 사람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안정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안정감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며 외부환경의 변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다. 반대로 안정감이 없는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대안이 없는 충동적인 일을 벌이며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기 쉽다. 또한 상황과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만약 남편이 안정감이 없어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쉽게 옮겨 다니거나 혹은 이 일 저 일을 마구 벌이고 수습하지 못한다면 가정은 매우 불안할 것이다. 또한 아내가 불안정하여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할 경우 이는 교육전문가들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가장 좋지 않은 교육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깊이 있고 신중하게 사고하며 감정과 행동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여야 할 것이다.

책임감도 결혼준비를 위해 중요하다. 혼자 독신으로 산다면 부담 없이 자신이 원하고 즐기는 일만 선택하여도 크게 문제되지 않겠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하기 싫어도 힘이 들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만약 그것이 버겁고 억울하게 생각된다면 결혼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여러 책임감 중에서도 돈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혼하는 부부들의 실제 이혼 사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외도와 경제 문제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만약 남편이나 아내 중 어느 한쪽이라도 돈을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규모 없이 함부로 쓰거나 원하는 것은 일단 카드로 긁고 보는 것이 습관이라면 결혼 후 얼마가지 못하여 가정경제의 뿌리가 크게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입과 분수에 맞는 씀씀이와 부족할 경우 일을 통한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수입원으로 하는 책임 있는 재정관리가 연습되어져야 할 것이다. 나 자신도 결혼을 앞두고 가계부를 기록하며 돈을 아껴 쓰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그 당시 나는 급하면 택시 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을 절제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었다. 결혼 후에도 가계부를 기록하며 수입 범위 안에서 각 항목 별 예산을 세워 그에 맞게 지출하였는데 20년 동안 그렇게 하였고 지금은 몸에 밴 습관으로 가계부 없이 생활한다.

마지막으로 진실성이다. 진실성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신뢰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 모두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거짓이 없이 투명하게 서로를 대하며, 돈이나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 속이지 아니하고, 이성과의 만남에 있어서 오해가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진실성을 믿지 못하게 될 때 몰래 반려자의 핸드폰을 확인하거나 주머니를 뒤지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거짓말과 대화단절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두 가지가 부부갈등의 주요 원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므로 정직한 언어와 마음으로 하는 진실한 커뮤니케이션은 결혼을 위해 평소에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외에 특별히 자매들에게 몇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상냥함과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이다. 가정의 분위기는 아내가 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밝은 모습으로 현관문을 들어서는 가족들을 환영하며 그들이 가정에서 쉬고 에너지를 충전하도록 기본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눈치 없고 둔한 남성들의 행동에 만족하기가 어렵다. 뭔가 부족하고 섭섭하며 아쉽고 속이 상하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잘난 우리 여자들이 너그럽게 이해하고 참읍시다!” 희생정신에 있어서도 그렇다. 아무리 남성들이 도와준다고 하여도 여전히 가사 일은 여성의 부담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하고 희생할 줄 알며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면 결혼생활을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반려자가 없어도 결혼 준비는 가능하다. 오히려 행복한 결혼을 위해 더 든든한 기초를 다지는 좋은 준비 기간이 될 것이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상냥함,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 이러한 것들이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위한 진정한 결혼준비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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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쿠우 2010/07/14 21:15  Addr Edit/Del Reply

    마음에 새겨야겠군요~~^^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중요한 주제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늘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만 있어서 사랑을 마음껏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의 공동체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목사님의 설교나 좋은 책들, 또한 구역이나 셀 모임에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였건만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숙제들이 남아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 교회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기독교 상담의 좋은 영향을 받아 왔다. 그리하여 공동체 가운데 자기를 개방하고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며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또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결여된 것이 있다. 바로 ‘신뢰성(faithfulness)’에 대한 문제이다. 신뢰성은 믿을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타인의 믿음으로, 공동체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어느 공동체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섬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데, 어떤 사람이 거짓말로 이간질 하거나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더욱이 얌체처럼 말만 잘하고 이기적으로 자기의 실속만 차리며 져야할 공동체적 책임을 회피한다면 과연 그들이 깊이 있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신뢰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공동체는 시간이 가면 무너진다. 처음에 서로 잘해 줌으로 친밀한 모양새를 갖출 수는 있지만 얼마가지 못하여 곧 갈등과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신뢰성이란 무엇일까? 수업시간에 신학생들과 ‘신뢰할 만한 사람’의 특징에 대해 토론했는데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정직한 사람,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비밀을 지키는 사람,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 성실한 사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지는 사람,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 옳은 일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뒤에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사람, 자기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해롭게 하지 않는 사람, 겸손한 사람,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 모두 맞는 말 이다.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신뢰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뢰성 중에서도 특별히 정직, 성실, 진실은 으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직은 구체적으로 돈에 대한 정직과 말에 있어서의 정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돈에 대한 정직은 내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는데서 출발한다. 비록 남의 돈을 훔치거나 사기 치지는 않을지라도 공금을 개인 돈처럼 사용하거나, 마땅히 내야 하는 세금을 편법이나 여러 가지 옳지 않은 방법으로 내지 않는다면 정직하지 않는 것이다. 말에 있어서도 사실이 아닌 말을 하거나 혹은 내용을 빼거나 덧붙임으로 나의 목적을 위하여 본말을 왜곡시킨다면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 아들이 운전면허를 딴 후 몰래 아빠의 차를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들켰는데, 그 후 언어의 정직을 스스로 훈련하면서 깨달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었다. “엄마, 정직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것 같아요.” 언어를 정직하게 사용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언어에 정직하지 않았는지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을 경험하는 것 같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12:2)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성실도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중요한 덕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실함의 수준을 “사람을 의식하여 행하는 눈가림질”에서 “무슨 일을 하든 주를 두려워하여 주께 하듯”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다.(골3:22-24)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식하며 성실히 행하는 자의 자유함을 나도 평생 누리고 싶다.

진실은 거짓이 없이 참되고 말과 행동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 수년 전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오후 강의를 하였는데 그날이 찬양을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유학을 위해 마지막으로 섬기시는 날이었다. 그 목사님이 찬양인도를 마무리하면서 교인들에게 작별인사하신 내용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지금까지 찬양을 인도하면서 진실치 않았던 때가 너무나 많았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지금까지 찬양을 하며 많은 멘트를 했지만, 솔직히 제가 멘트 한 내용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너무 괴로워 눈을 감고 찬양을 하기도 했고... 그래서 20분이 2시간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진실을 향하는 그의 간증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진실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며 따르고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연약한 공동체를 세우며 나아가 그것을 사랑과 성숙한 공동체로 만든다. 하지만 돈이나 말에 정직하지 않고 맡은 일에 무책임하며 진실치 않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깨트리고 무너트린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서로 용납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도 매우 시급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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