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ecent Trackback

Archive

오래전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자동차에 작은 이상이 생겨서 교회에서 알게 된 한 집사님이 경영하는 카센터에를 갔다. 교회 밖에서는 처음 뵙는데도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자동차의 문제도 잘 지적해 주셨다. 역시 크리스챤이라 다르구나 싶었다. 자동차 수리가 다 끝난 후에 돈을 치르려고 하는데 저를 보고 목사님이니까 디스카운트를 해드린다고 했다. 이런데서 목사가 된 덕을 보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청구서를 받아 보았다. 거기에는 여러 조목과 함께 총액이 나와 있고 마지막에 디스카운트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이렇게 써 있었다. "Jesus Discount".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풀어보면 예수님 때문에 할인해 주는 액수라는 것이다. 싸구려 부품을 넣었기 때문도 아니고 정비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좋은 부품을 사용하고 최상의 서비스를 했지만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할인을 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받는 혜택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 표현이 인상적이어서 좀 더 깊이 묵상을 하게 되었다. 그 분이 나에게 해 준 "Jesus Discount"는 크리스챤의 한 사람으로 목사를 대접해 주는 표현이었다. 그 분은 아마도 자기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와 비슷한 디스카운트를 해 줄 것이다. 그 분이 예수를 믿는 덕분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디스카운트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문득 크리스챤들이 이런 식의 디스카운트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보여 줄 수 있다면 정말 우리 주님이 영광을 얻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상수훈은 바로 이런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보여줄 수 있는 Jesus Discount를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직장생활에서 실천한다면 정말 멋진 크리스챤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첫 째로 대인관계에서의 Jesus Discount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5:39)" 오른편 뺨을 맞게 될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뺨을 때린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 왼 뺨을 돌려댄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내 잘못도 아닌데 큰 소리로 욕을 해대는 상관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기가 쉽지 않다. 일은 제대로 못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동료를 보고 웃는 얼굴을 보여 줄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챤 직장인들이 보여주어야 할 Jesus Discount이다.

둘 째로 물질문제에서의 Jesus Discount이다.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요즈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법을 이용하든지 아니면 다른 술수를 써서 내게 손해를 끼치려는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정말 어렵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라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Jesus Discount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는 것은 물질 문제에서 자유로울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바울처럼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빈궁에 처할 줄도 알아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게 될 때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가능해 진다.

셋 째로 일 문제에서의 Jesus Discount이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 직장생활에서 가장 짜증이 나는 일은 남보다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는 경우이다. 다들 퇴근하는데 나만 남아서 일을 하게 될 때 기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어떤 핑계를 대서든지 억울한 일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 일이 아닌 일도 기꺼이 떠맡으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직장에서 Jesus Discount를 실천하는 길이 된다.

바 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는데(고후3:3) 아마도 오늘날 우리들에게 다시 말한다면 아마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계산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우리들 생활 속에서 여러 종류의 계산을 보고 우리를 평가한다. 아무리 신앙인임을 자처해도 우리의 삶이 이기적인 계산으로 가득 차 있으면 예수님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 계산서에 Jesus Discount난이 있고 그 난에 적어 놓은 액수가 풍성할 때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풍성한 삶이 된다. 직장은 우리가 Jesus Discount를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내 삶의 계산서의 Jesus Discount는 얼마나 될까?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리의 전통적인 말 중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다. 우리 옛사람들의 직업관과 재물 관을 보여주는 말이다. 지금도 종종 사용하는 말로서 얼핏 들으면 멋진 말인 것 같지만 성경적으로 따져 보면 양면성을 지닌다. 

“개 같이” 버는 것을 부정한 일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부정하게 번 돈은 아무리 좋은 일에 사용해도 깨끗해지지 않는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

크 리스천으로서 떳떳하지 않은 일을 해서 번 돈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도 그 돈이 거룩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더구나 떳떳하지 않은 일을 포장하기 위한 헌금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적으로 돈을 세탁하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떳떳하지 않은 일”이 어떤 일인가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는 애매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우리 사회의 법적에도 저촉이 되는 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해당된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크리스천의 양심에 거리끼거나 덕이 되지 못하는 일들도 해당이 될 것이다. 유흥업이나 도박 등과 관련된 일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좀 더 예민하게 따져본다면 로또에 당첨된 돈이라든가 투기를 해서 번 돈 같은 것도 그런 범주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크리스천 직업인들에게 “정승같이 쓰라”는 말을 성경적으로 적용해서 헌금을 잘하도록 가르치는 것 못지않게 그것이 “개같이 번 것”인지를 지적해 줄 책임이 있다.

그 러나 “개같이”버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이른 바 “3D업종”에 종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말은 아주 성경적인 말이 된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4:12)” 크리스천들이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책임을 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이 비록 사회에서 별로 존경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라도 괜찮다는 말이다. 크리스천들에게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런 일도 주께 하듯 성실하게 임해서 돈을 번다면 그 돈은 이미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한 돈이 된다. 물론 그 돈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면 당연히 정승같이 쓰는 것이 되겠다. 사실 할머니가 김밥을 팔아서 번 돈을 장학금으로 기탁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할 때마다 그 분이야 말로 정말 돈을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셨다고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요즈음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청년 실업”인데 엄밀히 따지면 이 말은 청년들이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안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들 돈 많이 버는 일,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 장래에 안정이 보장되는 직업들에 몰리다 보니까 할 일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돈을 덜 벌더라도, 조금 불안정하더라도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고, 경제적인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일에 일단 뛰어 들었으면 좋겠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크리스천들도 사회의 보편적인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제 교회는 크리스천 젊은이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개같이 벌라”는 도전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렇게 이 말의 양면성을 생각해보니 크리스천의 자세가 분명해진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결코 개같이 벌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나 사회의 통념적인 면에서는 개같이 벌어야겠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어린아이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질에 따라 관심의 방향은 차이가 있지만 모두가 다 사람들의 관심을 원한다. 어린아이뿐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관심을 써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이렇듯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복잡한 생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반면에 요즈음 사람들은 남의 간섭을 귀찮아한다. 특히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사사로운 일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요즈음 아이들도 어른들의 간섭을 귀찮아한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할 때 자기의 삶을 지키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도 이웃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관심과 사람들이 귀찮아하는 간섭이 혼동될 때가 많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인관계의 갈등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하거나 둘 사이의 균형을 찾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실천하는 것이 대인관계를 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우선 관심과 간섭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막의 수도사에 관한 책을 읽다가 이 둘 사이를 아주 잘 구별해놓은 글을 보았다. “관심과 간섭은 다르다. 관심은 남의 연약함과 상처를 치료하려는 마음에서 생긴 배려이지만 간섭은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배려에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간섭에는 아픈 상처와 갈등이 남겨진다. 수도사들은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간섭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경계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관심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며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유익을 끼치는데 비해 간섭은 자기 욕심에서 나오며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해악을 끼치게 된다. 관심과 간섭은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비슷해 보이지만 동기나 결과가 정반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때 항상 사랑으로 하는 것인지,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에게 유익을 끼치게 될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원치 않는 간섭을 하지 않고 사랑의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 리고 관심과 간섭의 균형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사랑의 관심을 가지면서 그것이 간섭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반대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마도 크리스천의 이웃사랑은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부 부간에 서로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자. 그러나 아무리 부부라 할지라도 개인의 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도록 하자. 자녀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자. 그러나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해서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도록 하자. 교회 성도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자. 혹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나 돌아보는 사랑의 관심을 갖자. 그러나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사람을 향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관심의 폭을 넓혀서 그들을 돕고 위해서 기도하자. 그렇지만 남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가지고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Simon 2008/04/14 02:55  Addr Edit/Del Reply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고민했던 문제에 대한 답변이 여기 실려있어서 고마움의 뜻을 표시하고, 다시 찾아볼 수 있도록 댓글을 남깁니다.

직장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역시 자네밖에는 없네. “지난 번 그 일은 정말 잘했어” 등으로 표현되는 칭찬이다. 그래서 직장에서 윗사람들이 멋진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부하 직원을 잘 칭찬할 줄 알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칭 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바로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힘든 모양이다. 사실 아랫사람들에게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칭찬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칭찬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크리스천들에게 칭찬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귀한 사역이 될 수 있다.

그 러나 칭찬을 억지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자기가 자기를 칭찬해서도 안 된다.(잠27:22) 크리스천 직장인들은 칭찬을 받도록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칭찬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크리스천 직장인 개인에게 기쁨이 되며 동시에 하나님께는 영광이 된다. 빛 된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마5:16) 그렇다면 칭찬을 받는 삶을 사는 것도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는 중요한 사역이 된다.

그 러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항상 칭찬을 받지는 못한다. 오히려 책망을 받거나 심지어는 모욕을 당할 때도 있다. 그것도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별 이유 없이 모욕을 당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직장인들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 그것 때문에 직장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급기야는 직장을 떠날 생각들도 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어 느 날 사막의 수도사들에 대한 책을 읽다가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모욕을 당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훈련이라는 것이다. 모욕이 훈련이 되는 이유는 모욕을 참을 수 있는 마음에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 수도사는 훈련을 위해서 자기에게 모욕을 주며 화를 내게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칭찬은 오히려 영혼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수도사들이 그렇게 모욕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렇게 생각하면 직장 속에서 생활하다가 종종 모욕을 당하는 것이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는 아주 귀중한 영적인 훈련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나아가서 모욕을 참을 뿐 아니라 자기에 모욕을 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크리스천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사역이 되겠다.(마6:28)

우 리 주님도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셨지만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셨고, 사람들이 자기를 거역한 것을 참으셨다.(히12:2-3)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직장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의 본을 따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직 장에서 크리스천들은 남보다 많이 칭찬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동기부여에 가장 효과적일 뿐 아니라 성도의 사랑의 표현이 된다. 물론 직장에서 칭찬 받도록 행동하자. 그것이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그러다가 칭찬 대신 모욕을 당할 때가 있으면 영적인 훈련의 기회로 생각하자. 아마도 그것이 크리스천들이 주님을 닮아 가는데 가장 효과적인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돌이켜 보면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당시는 악몽 같은 일이 기억난다. 대학시절에 연애를 하다가 몇 번 여자들에게 채인 것이다. 그때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어서 혼자 끙끙댔다. 아마 그때 술을 마실 줄 알았다면 엄청 술에 취했을 것이다. 순간적이지만 자살까지도 생각했으니 말이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옆에서 조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떤 말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지내던 어느 날 내가 알고 있던 성경구절이 하나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일어난 일들이 불행한 것 같아도 나중에는 그 일 때문에 혹은 그 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유익한 일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절망에 빠져있는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던 말씀인데 그것이 내 마음에도 다가왔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떠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현재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일이 나중에는 오히려 합력해서 유익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었다. 당장 내 마음의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때부터 당한 현실을 새로운 각도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나중에 누군가 만나게 될 텐데 그 여자가 내게 훨씬 적합한 여자일 것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에 나를 찼던(?) 그 여자와 다시 만나서 지금까지 25년간 잘 살고 있다. 그때와 지금의 나를 보면서 그 말씀이 내 생애에 그대로 적용이 된 것 같다. 지금 내 아내가 내게 가장 어울리는 여자이며 그 아내와 한번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더욱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를 위기 가운데 구해준 말씀이 그 후에도 여러 번 그 효력을 발휘했다.

유 학시절에 신학교 공부를 마친 후에 박사코스를 공부하기 위해서 몇 학교에 입학신청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이유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일이지만 모든 학교에서 거절 내지는 다음 해로 연기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 정말 충격이 컸다. 더구나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장학금까지 준다고 했는데 나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니 기가 막혔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다른 학교들에 입학을 신청하기에는 시간도 늦어져서 정말 앞이 캄캄했다. 그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내게 다가온 것이 바로 이 성경말씀이다. 이 말씀을 생각하는 순간 절망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기대를 하게 되었다. 이 말씀을 따라 기도하면서 교수 한 분과 의논했다. 그 교수가 딱하게 생각하면서 입학신청마감시간이 아직 남아있는 몇 되지 않는 학교 중의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사실 그 학교가 내가 먼저 입학신청서를 냈던 학교보다는 한 등급 위의 학교이기 때문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어서 그곳에 입학신청서를 내고는 정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기를 기도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어느 날 그 학교에서 입학이 허가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 기쁨이란. 그 교수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날보고 행운아라고 했다. 처음 신청한 학교에서 거절당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좋은 학교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이 롬8:28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이 말씀은 종종 작용을 했다.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또 한 번 위력을 발휘했다. 귀국해서 기독교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 너무 즐겁게 또 보람 있게 일했는데 단체 내부의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그만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처음으로 실직이라는 것을 경험했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거부될 수 있다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그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하러 기도원에 올라갔었다. 내 딴에는 무언가 해결책을 찾으려고 기도원엘 갔는데 일주일 동안 기도했지만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했다. 미래를 생각하면서 답답해 할 때 다시 한 번 이 말씀이 찾아와서 내 마음을 두드렸다. 물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의 내 삶을 돌이켜 보면서 롬8:28의 약속은 결코 헛소리가 아닌 것을 실감한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 리 집의 큰 아이가 요즈음 취업준비로 정신없이 바쁘다. 여러 기업을 찾아서 입사지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고 면접을 하느라고 힘들어한다. 그렇게 해서 취직이 되면 다행인데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대학입시를 위해서 기도했던 것처럼 입사를 위한 기도회를 열기도 한다. 걱정거리를 기도로 해결한다는 면에서 필요한 사역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젊은이들에게 먼저 직업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가르쳐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요 즈음 젊은이들이 직업을 택할 때 기준을 보면 아주 간단하다. 돈, 안정, 인정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기본적으로 돈 많이 버는 직업, 돈 많이 주는 기업을 찾는다. 그러니까 어느 한쪽으로 몰린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안정된 직업을 선호한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데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직업이나 기업을 찾는다. 그러다보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따라주지 못한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구인난을 겪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다들 취업난이다. 그래서 취업의 문제는 경기회복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젊은이들이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들이 조금만 의식을 바꾸면 현재의 상황에서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 저 돈보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 돈을 얼마 더 버느냐보다 자신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것이다. 현재는 재정적으로 조금 아쉽지만 그 일이나 기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있다면 그것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다. 내 경우도 예전에 직장에서 돈을 많이 받았던 적도 있고 아르바이트로 열악한 임금을 받았던 적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느 경우든 그때 받은 돈보다 그곳에서의 경험이 지금 나에게 훨씬 더 유익한 것을 느끼게 된다.

둘 째로는 안정을 추구하기보다 모험적인 것을 시도하는 것이다. 지금 안정적인 직업이 20년 30년 후에 계속 안정적이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 모험을 하면 어떤 상황이 닥쳐도 미래를 개척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믿음으로 모험의 길을 아브라함처럼 남들이 안가는 길에 발을 내딛을 수 있어야 한다.

셋 째로는 세상에서의 인정보다는 세상의 필요를 채우도록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알아주는 일들은 아무래도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다보니 현재 꼭 필요하지만 그다지 인기가 없는 일은 사람들이 모자라다. 심지어는 같은 의사들 중에도 조금 힘이 드는 전공에는 지원자가 모자란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크리스천들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길을 택한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교회가 취업을 놓고 걱정하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이런 가치관을 가르쳤으면 좋겠다. 그렇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걱정하는 취업의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해 주실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신6:24-25, 마7:12, 잠28:19-20)

어느 날 운전을 하며 가다가 경찰이 붙여놓은 경고판을 보게 되었다. 그 경고판에 중앙선, 정지선, 차선을 제대로 지키라는 경고가 있었다. 교통질서가 무너지고 교통사고를 일으키는데 세 가지 선을 지키지 않는 것이 중요한 원인인 모양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우리의 인생의 길에도 이 세 가지 선이 있으며 이것들을 제대도 지키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선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1.중앙선을 넘어서지 말라.
인도 캘커타에 가면 중앙선이 없는 도로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자동차들이 마구 달리는데 때로는 맞은 편 차가 내가 탄 자동차로 마주보고 달려올 때는 정말 아찔했다. 중앙선이 없으니까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금방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중앙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중앙선을 무시하고 뛰어든 차 때문에 대형사고가 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도로의 중앙선은 생명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도 생명선과 같은 중앙선이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양심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신6:24-25) 성경이 가르친 십계명은 그것 중의 대표적인 내용이다. 이 계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이 그 역할을 한다.(롬2:14-15)

그 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점차 그런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 그러면서 개인의 자유니 문화의 진보를 운운 한다. 그래서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가정이 와해되고, 생명을 경시하는 풍토가 생기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 그런 자유는 중앙선이 없는 도로에서 일시적으로 누리는 자유일 뿐이다. 금방 혼란스럽게 되며 결국은 위험으로 변해버린다. 아무리 급해도 중앙선을 넘어서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도 양심과 윤리의 선을 지켜야겠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정해 놓으신 선이며 그것이 우리 개인의 영혼과 가정과 사회를 지켜준다.

2.정지선에서 반드시 서라.
요즈음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통위반 딱지를 뗀다고 한다. 나도 가끔 정지선을 위반한 적이 있어서 마음이 쓰인다. 정지선은 중앙선처럼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지키지 않으면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진다. 정지선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네거리로 나온 자동차들 때문에 파란불이 켜졌는데도 지나가지 못해서 교통이 엉킨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그리고 정지선을 지키지 않으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된다. 그런 장면을 생각해보면 정지선은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지켜야 할 사랑의 선, 배려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우 리의 삶에도 그런 정지선이 필요하며 그 선을 지켜야 한다. 정지선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게 하는 선이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이나 생각을 절제하게 하는 선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마22:39)이나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마7:12) 이 바로 인생의 정지선이다. 이 정지선을 지키지 않을 때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지듯이 서로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인간관계가 어려워진다. 이 정지선을 제대로 지킬 때 교통질서가 지켜지듯이 우리들의 삶에서 인간관계가 제대로 유지된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행동을 할 때 정지선을 인식하자. 정지선을 넘어서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을 절제하도록 하자.

3.차선을 자꾸 바꾸지 말라.
언제가 외국의 어느 도시에서 운전을 하는데 내가 가는 차선이 밀려있고 옆 차선은 비어있는데도 차선을 바꾸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울 같았으면 나는 물론 내 앞의 차들이 벌써 차선을 바꿨을 텐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고 좀 답답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답답한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빨리 가기 위해서 차선을 자주 바꾸는 내 모습에서 그들이 누리는 여유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차선은 우리 삶의 여유를 지켜주는 여유의 선, 절제의 선이다. 

물 론 차선을 바꾸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차선을 바꿀 수 있는 선이다. 그런데 차선을 바꾸지 않고 여유 있게 달리는 모습과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차선을 바꾸는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보면서 우리 자신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진다. 물론 급한 일이 있을 때 차선을 바꾸면서 빨리 가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은 정말 아쉽다. 때로는 차선을 바꾸어서 열심히 갔는데 나중에 보면 그냥 한 차선을 따라 간 차보다 별로 앞서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럴 때는 정말 머쓱하기까지 하다.

우 리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다양한 차선이 있다. 사람들은 빨리 성공하려고 차선을 자꾸 바꾸려고 한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28:19-20)”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하면 그런대로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지면 그 차선만 따라가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자꾸 옆 차선을 보게 된다. 그래서 허황된 생각을 하게 되고 자기의 능력과 관계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하다가 오히려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리고 혹 돈을 벌게 되고 일이 잘 풀리더라도 삶의 여유를 잃고 살기 쉽다. 물론 꼭 차선을 바꾸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냥 한우물만 파는 것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차선을 바꾸고 싶을 때마다 정말 바꿔야만 할 상황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무작정 빨리 가려고만 하지 말고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자. 

이 세 가지 선은 교통질서를 위해서 지켜져야 할 선이다. 운전하면서 이 세 가지 선에 대해서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이 세 가지 선을 항상 의식해야겠다. 선을 잘 지키는 것이 도로에서 안전하게 운전하는 길이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나는 공대를 나와서 한 육년 동안 엔지니어 생활을 하다가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신학교를 졸업하고는 남들이 다하는 목회의 길로 가지 않고 문서사역을 헌신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직장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문서사역을 하고 있다. 그간의 삶이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직업의 변화가 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대학시절에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변함이 없다. 아니, 그 비전이 바로 이런 직업의 변화의 지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비전을 가지고 살게 마련이고 그 비전에 맞추어 직업을 선택한다. 돈버는 것이 비전인 사람은 어떤 직업이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그 직업을 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전과 직업의 선택은 인생의 중요한 요소이며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1.비전은 인생의 나침반이다.
과거에 모르는 곳을 여행할 때 반드시 가지고 다녀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나침반과 지도이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다. 그것이 있어야 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고 그래야만 지도가 제구실을 할 수 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아무리 상세한 지도도 제구실을 못한다.

인 생에서 비전을 발견하는 것은 마치 나침반을 가지고 바른 방향을 잡는 것과 비슷하다. 비전이란 어떤 특정한 직업을 말하거나, 특정한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직업이나 사역을 정하기 이전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 혹은 투자할 인생의 방향을 의미한다. 물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특정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비전은 직업을 선택하는 방향이나 기준을 정해줄 뿐 이다. 같은 비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얼마든지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대학 시절에 함께 비전을 나눈 친구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나눈 비전은 젊은이들을 키워서 장래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동역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시절에 후배들을 키웠고 졸업후에도 그 일에 헌신해왔다. 지금은 다들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비전에는 변함이 없다. 그 비전은 지금도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택한 직업은 다르다.

엔 지니어로서 그 비전을 이루려고 했던 나는 목사가 되었고 주로 문서를 통해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 한 때 신학교를 갈 것을 고려하기도 했던 박성수 형제는 기업의 경영자로 그 비전을 이루어가고 있다. 그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많은 직원들을 키우며 기업의 이윤을 하나님 나라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에서 그 사역을 하고 있다. 이들 친구들 외에도 대학부 후배들 중에 혹은 캠퍼스에서 교수로,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으로, 상사의 주재원으로 일하면서도 동일한 비전을 이루어가고 있다.

흔 히 세계선교의 비전이 있다면 다 신학교로 가거나 다 선교지로 가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 우리 중에 한정국 선교사는 학생시절부터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은 신학교엘 갔고 인도네시아로 선교사역을 떠났었고 지금도 선교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경우는 선교의 비전이 그대로 직업으로 연결된 경우지만 모두가 다 그럴 필요는 없다.

많 은 크리스쳔들이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데 사실상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인생의 비전이 없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 일은 그야말로 직업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그 직업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직업이라 할지라도 크리스쳔으로 신앙적인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일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직업을 잃어버리게 될 때 삶의 의미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비전이 있는 사람은 직업을 바꾸거나 혹 직업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미지의 목적지를 떠날 때 나침반을 챙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인생의 여행을 떠나면서 먼저 비전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2.직업선택을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하다.
흔히 선교의 비전을 가졌기 때문에 선교사가 되려고 한다는 말을 듣는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말은 나침반이 동쪽을 가리킨다고 무작정 동쪽으로 간다는 말과 같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했으면 그 다음에는 지도를 펴서 정확한 장소를 찾도록 해야 한다. 비전을 가진 크리스쳔이 직업을 택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지도를 펴야 한다. 물론 그 지도는 우리의 발의 등이요 길에 빛이 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다.(시119:105)

크 리스쳔으로서 직업을 선택할 때 기준은 물론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뜻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때로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개인을 향한 뜻을 보여주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일반은총을 허락하신 주님은 삶의 순리대로 인도하신다.

직 업을 선택하는데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이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주로 인기가 있는가? 잘 팔리는가? 수입이 괜찮은가? 이다. 물론 그런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왕이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쳔에게는 무엇보다도 그 일을 “주께하듯”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주께하듯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객관적으로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일이여야 하며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적성에 맞는 일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일이라면 아마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직업일 가능성이 많다. 물론 모세의 경우처럼 말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아론을 붙여주면서까지 지도자의 일을 맡기신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도 모세가 가진 지도력을 높이 샀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맡기셨으리라 생각된다.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실 때 각자에게 독특한 능력을 주신 하나님은 각자가 자기 속에서 그것을 발견해서 그것에 맞는 일을 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현대 사회에 유용한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유익했지만 현재 유용하지 않은 직업은 굳이 택할 필요가 없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회가 변하면서 직업의 종류도 많이 변한다고 한다. 이런 변화를 잘 알아서 현실적으로 유용한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인기있는 직업을 택하는 것과 혼동될 수 있지만 분명히 구별된다.

흔 히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에게 소명을 확인한다. 물론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소명은 비단 목사나 선교사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직장인들에게 다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소명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역을 맡을만한 은사가 지금 내게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우리교회, 사회가 과연 그 사역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별 생각없이 소명 하나만을 가지고 신학교로 몰려드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모르는 곳을 찾기 위해서 지도를 잘 살펴야 하듯이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할 것이다.

(결론)
지도를 가지고 원하는 장소를 찾았으면 그 장소가 정말 맞는 장소인지를 알기 위해서 나침반으로 확인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직장을 선택한 후에는 반드시 나침반(비전)으로 확인해야 한다. 비전 운운하면서 직장을 선택하는 폭을 좁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단 선택한 직업이나 직장은 비전으로 비추어보아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의 뜻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렇게 확인이 될 때 그 일을 주께 하듯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인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직장 일을 주께 하듯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업을 바로 선택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멋진 비전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비전은 그냥 멋있는 말만이 아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마포 로터리를 지나다가 모델하우스를 철거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곳은 벌써 몇 번째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분양광고를 했다가 그 일이 다 끝나면 철거하고 또 새로운 아파트 회사가 다른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똑같은 광고를 하는 것이다. 잘 지어놓은 모델하우스가 철거되는 광경을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허무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돈을 들여서 멋지게 꾸몄던 것들이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사람들이 모여서 아파트 내부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도 했겠고, 이런 집에서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거닐었을 그 공간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린 것을 보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델하우스가 아깝다고 그것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모델하우스를 짓고 철거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그 장소에 맡겨진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대사회의 일상사의 한 부분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주변에 있는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보았다. (조금 옆에 ‘아크로타워’ 라는 건물을 짓고 있다.) 그 건물들은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곳이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변에 있는 건물은 모델하우스처럼 자주 허물고 짓고 하지는 않지만 그 건물들의 자리에서도 지난 수백 년간 역사를 통해서 수도 없이 여러 건물이 지어졌고 또 철거되었을 것이다. 지금 서 있는 건물도 언젠가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서게 될 것이다. 지금은 멋진 실내 장식이 있고, 그 안을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고 있고, 일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그 건물도 수명이 다해서 철거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멋진 실내 장식들이 다 쓰레기가 되고 사람들이 왕래하던 그곳이 폐허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지금은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건물이 또 지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기간이 좀 길기는 하지만 모델하우스의 변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서 있는 건물도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이며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곳이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전체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영원히 이렇게 살게 될 것처럼 여기고 살고 있다. 그러나 모델하우스의 사용기간이 있듯이, 건물들이 사용되는 기간이 있듯이 사용기간이 있다. 언젠가는 철거가 되고 새로 지어질 것이다. 그 기간이 좀 길어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3:4).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개인의 생애가 끝나기 전에 그날이 오지 않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지금 세상이 철거되고 새로운 세상이 세워질 때가 있다고 한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의 진리이다. 다 허물어진 모델하우스를 보면서 나는 어느 회사가 또 멋진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짓게 될 것을 예상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도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가 시작되고 있다. 그 허허벌판이 된 공사장을 보면서도 나는 ‘아크로타워’라는 이름의 멋진 건물이 세워질 것을 예상한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무너져버리고 하나님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을 예상한다. 그곳에 입주할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KOSTA

댓글을 달아 주세요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