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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6. 한국 목회의 남성 중심성

이제 마지막으로 저는 한국의 목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피터슨은 목사입니다. 그의 저술과 번역은 다 목회 활동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사의 목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가 했던 목회를 한국 사회에서 실현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한국 사회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제가 꼽는 이유는 바로 한국 목회의 남성 중심성입니다.
「이 책을 먹으라」에서 피터슨은 캐슬린 노리스의 이 글을 인용합니다. “나는 진정한 일상의 신비가는 격리된 채 거룩을 관상하는 사람들, 고요한 침묵 가운데 신과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소음으로 가득 찬 삶, 자신을 소진시키는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끝도 없는 의무들로 가득 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해 내는 삶들이라고 믿게 되었다.”(188쪽)

이것은 바로 여성의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엄마를 부르며 이것저것 요구하는 아이들, 세탁, 요리, 청소 등으로 늘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 ‘살림’을 하는 여성의 삶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목회는 남자들의 잔치입니다. 유교 문화는 남자와 여자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남자들의 세계와 여자들이 세계가 분리되고, 여자들의 세계는 남자들의 세계에 가려지고 종속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은 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일상의 대부분의 일은 여자들의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여자들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돌봄 노동의 태반을 여자들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회 현장에 여자들이 들어올 때는 철저하게 유교적인 방식으로 들어옵니다. 여자들은 늘 뒤에서 거드는 일을 할뿐 자신의 경험을 목회에 통합시키지 못합니다. 일상과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목회 안에 자연스럽게, 피터슨의 표현대로 하면,유기적으로 하나가 되는것이 아니라, 목회와 삶이 따로 놉니다.

「현실:하나님의 세계」에서 피터슨은 자신의 ‘임신’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418-419쪽) 무슨 말이냐 하면, 자신이 첫 손자를 볼 때, 아내와 주변 사람들은 다 흥분하며 기다리는데,자신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미 자기 자식을 세 명이나 낳았는데, 이번이라고 뭐 특별히 다르겠나 싶었다지요. 자신만 너무 감흥이 없는 게 좀 그래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가 “그건 당신이 임신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에요.”라고 했답니다.
이 말 앞에 남자는 벽을 느낍니다. 생물학적으로 임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터슨이, “아니,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라고 했더니, 아내가 요람을 하나 만들어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도서관에 가서 요람 사진책을 찾아서, 원하는 디자인을 골라, 스케치를 하고, 목공소로 가서 꼼꼼하게 목재를 고른 후에, 교회 마치고 집에 오면 매일 한 시간씩 요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사포로 거듭 문지르고, 수세미로 다듬고, 여러 차례 동유를 바르고 했지요. 일일이 모양내고, 다듬고, 문지르고 또 문지르면서 그는 그 요람에 누울 아기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드디어 임신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출산 이전에 열 달이라는 임신 기간을 통해서 그 생명을 물리적으로 그리고 상상력으로 품습니다. 그러나 남자 입장에서는 하룻밤 자고 난 것이 전부인데, 자식이 생기지 않습니까? 피터슨은 요람을 만드는 기간이 자신에게는 여자의 임신 기간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 요람에 누워 자라 갈 아기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점점 불러오는 며느리의 배에 있는 그 생명에 대한 감사와 기대가 생긴 것이지요.

피터슨의 이 이야기는, 목회 안에 생명과 인격과 일상이 들어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좋은 은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의 목회가 남성 중심성에서 벗어나야 저는 인격성과 일상성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터슨의 글을 보면 여성의 경험을 자신의 글에 많이 녹여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냐 여성이냐 보다는 어떠한 경험들을 자기 삶으로 가져오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격적 관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일치의 삶, 그리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 이러한 것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토양을 가장 잘 가꿔주는 경험이 남자냐 여자냐를 떠나 중요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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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5. 한국의 맥락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했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첫 번째 글에서 텍스트 포지셔닝을 했는데요, 피터슨의 책이 한국 사회에 들어오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피터슨은 미국사회의 맥락에서 책을 썼습니다. 그는 미국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한국 사회와 공통되는 부분이 있지만, 구체적인 맥락은 서로 다릅니다. 인격성, 일상성, 인내 그리고 기다림은 미국사회에서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실현되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은 미국사회의 것과 다릅니다. 바로 그 지점을 이해해야 비로소 이 텍스트를 우리의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번역가의 입장에서 저는 우리 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우선은 한국어 어법의 문제입니다. 한국어의 열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와 관련된 우리 언어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의 기초는 I-You관계입니다. 그런데 한국어 용례에서는 안타깝게도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일컫는 2인칭 대명사인 ‘너’가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상대방을 일컫는 대명사는 다 ‘you’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2인칭 대명사를 쓸 수 있는 사이는 동갑내기밖에 없습니다. 한살만 차이가 나도 ‘너’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게다가 나중에 사회에 진출하면 다 사회적 직함으로 부릅니다. 번역할 때 이 부분이 문제가 됩니다. 영어로 2인창 대명사 ‘you’를 그냥 ‘너’ 혹은 ‘당신’이라고 그대로 번역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 서열, 직함 등을 찾아서 확인한 후에 그것을 써줘야 합니다.
한국사회는 사람을 이름으로, 나와 대등한 ‘너’로 알려 하지 않고, 즉 인격적으로 알려 하지 않고, 직함에 따라, 기능에 따라, 역할에 따라 알려하는 문화적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와 문화와 인간관계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유교질서입니다. 이러한 서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른 도리와 같은 것이 우리의 외피를 단단히 감싸고 있어서,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고, ‘자기’로서 자기를 알지 못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나와 분리된 고유한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나와의 관계에서 이 사람이 나보다 위냐, 아래냐, 높냐, 낮냐, 이런 것을 계산한 후에 관계 설정을 합니다. 이것은 아주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이러한 서열 관계는 우리가 ‘인격성’을 이해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됩니다.
호칭과 직함이 세분화된 것은 그만큼 그 문화가 위계적이라는 뜻인데, 한국어의 화법은 또한 청자 중심의 화법입니다. 이 말은 화자가 말을 정확하게 전달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청자가 알아서 그 말을 해석할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오늘 날이 좀 덥네.’라고 하시면, 같이 사는 며느리는 이 말을 그냥 날이 덥다고 하신 걸로 이해하면 안 되고, ‘오늘은 그럼 시원한 콩국수라도 만들어 드려야 하나.’ 뭐 이런 고민을 하면서, 윗사람의 ‘의중’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서로가 아주 깊이 통하는 사이에서는 이러한 화법이 다소 시적이고 멋있게 들릴 수도 있지만, 늘 윗사람의 의중을 헤아려야 하는 아랫사람은 적잖은 억압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됩니다. 관계의 피로가 커지는 것이지요.
두 번째 한국 사회의 특징은 ‘탈식민성’입니다. 말이 좀 어려울 수 있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우리 것으로, 우리의 ‘현실’로 보느냐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1세계 국가들은 이런 고민이 없습니다. 이 고민은,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의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시절을 보낸 국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저항하는 ‘우리’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기 위해서 더 ‘우리’다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해외에 나가면 서구 나라를 갈 때랑, 다른 아시아 국가를 갈 때랑 좀 다릅니다. 서구에서는 우리 자신을 서구 앞에서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너희는 왜 우리와 다르냐’, ‘너희는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대답할 필요를 느낍니다. 서구는 존재 자체로 정당하다면,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설명해야 합니다. 한국 문화는 이렇다, 한국 사람은 이렇게 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시아 국가를 방문할 때는 다르지요. 특히 동남아 국가 같은 경우, 오히려 우리가 존재 자체로 정당하고, ‘너희는 왜 그러냐’라고 묻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우리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 설 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다름’을 나타냅니까? 우리가 우리로서 설명하는 ‘한국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국이라는 것을 외국에 알리려고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 한복, 농악, 김치, 한옥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람들은 한복도 안 입고, 농악도 일상적이지 않고, 저는 결혼 16년차지만 김치 담글 줄도 모르고, 한옥은 한옥 마을 가야 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를 설명할 때,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전형화합니다. 이때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 하나님의 세계」에 보면,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맞이하는 아침의 풍경을 이런 말로 묘사합니다. “베이컨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 이제는 버터를 바른 토스트와 스크램블에그 그리고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자바 산 원두로 새로 내린 커피를 기대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의 일상을 한국 사람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상황을 끌어올까요?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구수한 냄새?” 이럴 때 바로 전형화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사실 저희 집도 아침에 빵을 먹는 날이 많고, 커피는 매일 원두를 갈아서 내려 마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인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와 현실에서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전형화에 빠지면, 우리는 현실의 온갖 다양한 ‘결’과 그 ‘울퉁불퉁함’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가 ‘변명적’으로 민족주의를 사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때그때 편리하게, 그건 한국적이지 않다, 서구적이다, 하는 식으로 변명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사용한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합리적인 것이 반드시 서구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합리적인 사람을 우리는, 서구적이다, 정이 없다, 은혜롭지 않다, 하는 말로 비판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미국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서, 미국 것은 다 좋은 것이고,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압축적 성장’입니다. 서구에서 몇 백 년에 걸쳐서 이루어낸 것을 우리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몇 십 년에 걸쳐서 이뤄냈습니다. 피터슨이 미국 사회가 아무리 ‘속도’를 지향하는 사회라고 비판해도, 우리만큼 ‘속도감’을 느끼지는 못할 겁니다. 박민규씨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보면, 유명한 인디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압축적 성장을 이룬 우리 문화의 특징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야미도, 6년 사이에 지도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지금 대야미는 제가 처음 살던 10년 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한번 속도에 빠지면 속도를 늦추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지금도 늘 쫓기듯 삽니다. 지금은 절판된 책인데, 김진경 시인의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잃은 채 경쟁과 성장에 쫓겨서 앞으로만 달리는 것이 지금 우리 삶의 특징입니다.
피터슨이 35년에 걸쳐서 쓴 책들을 우리는 10년 안에 다 번역했습니다. 물론 번역은 필요합니다. 일본의 근대화에 번역이 기여한 바는 책으로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도 어떻게 보면 압축적 성장입니다. 자신의 토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는 시간보다 번역이 빠릅니다. 피터슨이 성경을 현대 미국어로 다 번역하는 데에 10년이 걸렸습니다. 박상익 교수는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에서 ‘출판사 사장 대학 총장론’을 이야기하는데요, 좋은 책을 내는 출판사가 학문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말입니다.
피터슨이 메시지 성경을 내는 데에는 출판사의 편집자 공이 컸습니다. 출판사의 후원 하에 현대 미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나왔습니다. 만약에 한국에서도, 메시지를 수입해서 번역하지 말고, 출판사가 믿을만한 학자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을 주면서 이 작업을 한국어로 수행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압축적 성장은 구호와 동원에 익숙합니다. 사람과 세상을 찬찬히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구호가 많습니다. 뭘 자꾸 이루려고 합니다. 압축적 성장은 인격성, 일상성, 인내가 자라기에는 너무도 좋지 않은 토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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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앞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4. 영성생활의 요소들: 인격성, 일상성, 인내와 기다림

이제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피터슨이 말하는 영성의 내용 혹은 특징은 무엇이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피터슨 자신이 이것이 특징이라고 짚어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번역할 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개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기독교적 삶을 이야기할 때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특징으로 저는 인격성과 일상성 그리고 인내와 기다림을 꼽았습니다. (인내와 기다림은 인격성과 일상성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먼저 인격성입니다. 피터슨의 영성신학 시리즈를 번역하면서 이 단어를 정말 많이 접했습니다. 인격성, 관계성, 이 말이 안 나오는 데가 없습니다. 「그 길을 걸으라 」서문에서는 “인격성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복음”(14쪽)이라고 말합니다.「현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은 단연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언제나 관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격적 관계를 맺는 분으로 계시하신다.”(28-29쪽)라고 말하고,「이 책을 먹으라」에서는 “계시의 모든 부분, 모든 양상, 모든 형태는 인격적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시든, 무엇을 계시하시든, 우리가 무엇을 받든 간에 그것은 인격적이며 관계적이다.”(57쪽)라고 말합니다.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상은 탈인격화된 하나님, 탈관계화된 하나님이다.…우상 숭배의 핵심은 탈인격화다.”(「현실: 하나님의 세계」, 563쪽)(여기에서 밑줄 친 부분은 제가 한 것입니다.)

다음은 일상성입니다. 일상성은 종교성과 대립되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삶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피터슨의 회고록에 보면 ‘Charity’라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을 방문한 외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할머니가 계시는 동안에는 우리 하나님 얘기(godtalk) 하지 말아요, 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나는 믿어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살아요.” 이 아이의 말을 통해 피터슨은 “하나님이 하나님 얘기로 비인격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일상생활에, 말에서나 행동에서나, 하나님과 삶이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는 그러한 일상생활에,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분’으로 이해되는 관계를” 이 아이가 요구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는 이 아이의 말에서 ‘우리 그냥 살아요’가 참 많이 와 닿습니다. 다시 한 번 솔기의 이야기로 돌아가게 됩니다. 존재와 행동이 분리되지 않는 자연스런 일치의 삶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내와 기다림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인격성과 일상성의 특징 혹은 속성입니다. 인격성과 일상성은 서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두르면 인격성과 일상성을 놓치게 됩니다. 성급하게 목적에 도달하려고 할 때, 사람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동원할 숫자로만 보고,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만 보게 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인내하기보다는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기를 좋아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일에는 흥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밀어버리고, 갈아엎고, 만날 새로 시작만 하는 삶은 기독교적 삶이 아니라고 피터슨은 말합니다.
“미국 교회는 새로운 출생이 주는 희열과 흥분에만 빠져 있다. 사람들을 교회로, 하나님 나라로, 큰 목적으로, 운동으로, 프로그램으로 끌어들이기에 급급하다.…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에 순응하는 삶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이란 조용하고, 명확하지 않고, 인내해야 하고, 인간의 통제와 관리에 종속되지 않는 환경이다. 미국 교회는 그러한 환경에 처하면 불안해한다.”「부활을 살라」서문에 나오는 말입니다.(밑줄은 제가 그은 것입니다.) 비단 미국교회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숫자 올리고, 동원하고, 사람을 잠시도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것은 g한국교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인격성, 일상성, 인내와 기다림. 너무도 상식적인 말들입니다. 영성은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피터슨이 기도에 대해서 한 다음의 말이 저는 영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신비스럽거나 무슨 비법과도 같은 영성이 아니다. 기도는 평범한 행위다.…그것은 우정의 행위처럼 간단하다.…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그리고 가족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비유로 말하라」,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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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3. 유진 피터슨과 번역

아시다시피 유진 피터슨을 유명하게 해준 것은 ‘현대 미국어로 번역한’「메시지」성경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성경을 번역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번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번역은 목회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고대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본이 가지고 있는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를 우리 교인들이 평생을 사용해온 미국어의 어휘와 은유와 통사로 전달하기 위한 현장의 목회 활동”(「유진 피터슨」, 475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번역 활동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지는 30년간의 목회 토양에서 자랐다.…나는 두 언어의 세계에서 살았다.성경 언어의 세계와 현대 언어의 세계다. 나는 언제나 그것이 같은 세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회중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그래서 나는 필요에 의해 ‘번역가’가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내가 번역가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날마다 두 언어의 경계에 서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축복하시고,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데 쓰시는 성경의 언어를, 우리가 잡담을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길을 안내하고 사업을 하고, 노래를 하고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데 쓰는 오늘의 언어로 번역했다.”(「유진 피터슨」, 476-477쪽)

여기에서 피터슨은 ‘오늘의 언어’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쓰는 일상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피터슨은 “진정한 번역은 그 쓰인 글, 전해진 말에 대해, 눈물과 웃음, 가슴과 영혼으로 전인을 참여시키는 이해를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먹으

라」, 207쪽) 그렇게 눈물과 웃음, 가슴과 영혼으로 전인을 참여시키려면 듣는 사람이 잘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데에 쓰는 일상적인 언어를 써야 합니다. 피터슨은 「메시지」를 번역할 때,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하박국 2:2) 하기 위해서 번역했다고 합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으려면 말이 쉬워야 하고 바로바로 와 닿아야 합니다.

피터슨에게 일상 언어는 중요합니다. 아니, 기독교인에게 일상 언어는 중요합니다. ‘단절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그러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언어도 일상과 유리되지 않은 언어여야 합니다. 성경도 일상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우리는 언어를 ‘상향 모독’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상향 모독은 “언어가 추상적으로 부풀려지거나 레이스처럼 엮인 거미집처럼 비실체적인 것이 될 때 일어난다.”고 피터슨은 말합니다(「이 책을 먹으라」229쪽). 이것은 곧 언어를 인격적 관계와 구체적 맥락을 떠나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만드는 것인데, 성경과 관련해서는 하향 모독 보다는 이러한 상향 모독의 위험이 큽니다. 왜냐하면 상향 모독이 간파하기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서 ‘빌어먹을 하나님!’(God dammit!)하고 내뱉는 말과 같은 공공연한 신성모독은, 예를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존귀하고 높으시며, 거룩하고 비길 데 없는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읊조리는 아첨 떠는 경건보다 훨씬 더
이목을 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후자가 오히려 전자보다 더 심하게 언어를 모독하는 것일 수 있다.”(「이 책을 먹으라」, 230쪽)

설교할 때나 대표 기도를 할 때 그리고 교회 사람들과 대화할 때, 우리는 얼마든지 이러한 상향 모독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거룩해 보일 거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터슨은 말합니다. 상향으로 부풀려진 말은 “마음에 뿌리를 두지 못한다. 인간의 일상성에 기초하지 못한다. 그런 말은 더 이상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데 유익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번역은 “상향 모독에 대항하는, 그러니까 우리의 평범한 삶을 표현하는 방식과 더 이상 맞지 않는 과정과 술책으로 언어가 부풀려지는 것에 대항하는 최우선 방어 중 하나다. 그리고 과장은 언제나‘ 틈을 노리며’ 언어의 문 앞에 웅크리고 있기 때문에 번역가들은 그들의 언어가 우리가 자녀들이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일상어의 울림을 잃지 않도록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이 책을 먹으라」, 232-233쪽)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전하는 설교자들에게만 국한된 말이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과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해내는 하나님의 번역가들입니다. 따라서 부풀려지지 않고 일상어의 울림을 잃지 않는 번역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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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2. 유진 피터슨과 영성
 
지난 번 글에서도 말했지만,피터슨이라는 작가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는‘깊은 영성의 소유자’ 혹은 ‘영성의 대가’입니다. 그렇다면 피터슨이 말하는 영성은 무엇일까요? 우선 영성이라는 용어부터 좀 살펴보면, 영어로 ‘spirituality’는 기독교만의 용어가 아닙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자기를 넘어서는 어떤 대상을 찾는 모든 탐색과 추구와 과정들을 다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한국어로 ‘영성’이라는 단어는 주로 기독교 계통에서 씁니다. 불교에서는 영성이 깊은 사람을 ‘불심’(佛心)이 깊다고 하지 영성이 깊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아마 영어로 하면 ‘불심’도 Buddhist ‘spirituality’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영성에 대한 관심을 피터슨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에겐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한 갈증과 갈망이 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받고 있고 공공연히 표현되고 있다. 자신의 삶이 직업 역할과 시험 등수로 축소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태도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맞는 영성을 스스로 만들어낼 것을 권유받고 있다는 점이다.”(「현실, 하나님의 세계」, 25쪽)

‘자신에게 맞는 영성을 스스로 만들어’내다보니 필연적으로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그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피터슨은 곰돌이 푸우의 이야기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북극(North Pole)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북극을 찾아 나선 곰돌이 푸우와 그 일당들. 그들은 한참을 우왕좌왕하다가 푸우가 들고 있는 막대기(pole)를 보고 드디어 북극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리더 격인 크리스토퍼 로빈이 선언합니다. “이제 탐험은 끝났어. 네가 북극을 찾을 거야!” 피터슨은 이 이야기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보았던’ 것은 모호하게 정의된 영성(북극)을 찾아다니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살고 있는,내가 속한 문화였다.이따금씩 그러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집어 들면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바로 저거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정말로 ‘저것’처럼 보인다. 그러고는 누군가가,대개는 영적 권위를 가진 어떤 인물(크리스토퍼 로빈)이 거기에다가 팻말을 단다. ‘영성’. 그리고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 탐험이 제안될 때까지.”(「그 길을 걸으라」, 343쪽)

이러한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피터슨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영성 신학’을 제안합니다. “문화에 의해 규정된 역할이나 기능을 넘어서는 삶을 살려는 열의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그러나 이러한 열의는 결국,문화가 정해놓은 한계들에 갇힌 영성을 낳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 때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산 경험과,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풍부한 이해와 실천을 다루려는 뚜렷한 기독교적 시도를 일컫는 말로서 ‘영성 신학’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현대 세계의 초점 없이 산만한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속에서 뚜렷한 기독교적 경험을 일컫는 말로서 말다.”(「현실, 하나님의 세계」, 25-26쪽)

그는 이어서 ‘영성’과 ‘신학’이라는 단어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울이는 주의,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자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을 가리킨다.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 계시하시는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영성’은 ‘신학’이 하나님과 멀찍이 거리를 둔 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으로 타락하지 않게끔 해준다. ‘신학’은 ‘영성’이 그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이 되지 않게끔 해준다.이 두 단어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현실, 하나님의 세계」, 26쪽)

이러한 영성 신학이 삶에서 나타나면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형용사로, ‘seamless’를 꼽습니다. 피터슨은 자기 아내의 부모님, 즉 장인 장모를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그분들의 기독교 신앙은 삶에 철저하게 통합되어 있었다.…어쩌면 기독교 신앙이 그분들의 삶에 통합된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이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에 통합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분들의 삶과 신앙은 서로 단절 없이 이어져(seamless) 그분들의 존재에 진정성을 더했다.”(「유진 피터슨」, 308쪽)

‘seam’은 아시다시피 솔기입니다. 우리가 입는 옷에는 솔기가 있습니다. 옷의 앞판, 뒤판, 소매를 이은 자리입니다.솔기는 도로의 과속방지턱처럼 거치적거리는 부분입니다.매끄럽지가 않습니다.단절이 느껴집니다.그런데 그러한 솔기가 없는 매끄러운 옷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자신이 믿는 바와 아는 바가 하나 된 모습,존재와 행함에 아무런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움.피터슨이「현실,하나님의 세계」에서 제러드 맨리 홉킨스의 시를 빌어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사지의 움직임으로, 아름답게 나타나시는데, 그게 인위적이지 않고, 그 시에 등장한 물총새와 잠자리와 돌과 현악기와 종처럼,자신이 하는 일이 곧 자신인,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피터슨은 그러한 일치의 삶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
면서 살고자 하는 삶의 모습이고,우리의 목적지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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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앞으로 총 5회에 걸쳐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1. Positioning of the Text
 

‘깊은 영성의 소유자’로 종종 소개가 되는 유진 피터슨의 책이 한국에 처음으로 번역, 출판된 해는 1999년입니다. 텍스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텍스트를 받아들일 만한 토양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등장합니다. 1999년에 그의 책이 처음 소개가 된 후로 약 10년에 걸쳐서 그의 거의 모든 저서가 국내에 번역, 출간됩니다. 독자들이 피터슨의 책을 그렇게 환영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1989년에 ‘경배와 찬양’이라는 곳을 통해서 처음 ‘영성’이라는 말을 접했습니다.(‘경배와 찬양학교’ 1기는 1987년에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찬양 집회나 대학부 생활에서 접한 영성의 느낌은, 율법주의에 반하는 것,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일었던 찬양의 바람은, 경직되고 폐쇄적인 율법주의에 대한 반항과도 같았고, 복음이 가져다주는 ‘자유’라든가 ‘영혼의 회복’이라든가 하는 내면적 가치를 많이 추구했습니다. 기존 교회에서 율법주의처럼 지키던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봉사와 같은 활동들, 소위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보다, 큐티, 침묵기도와 같은, 내면을 살피는 일들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전두환 정권 이후 학내가 조금 안정되면서 대학교 내에 있던 선교단체들의 활동도 더 활발해졌습니다. 그 결과 선교단체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선교단체와 같은 parachurch를 교회의 범주 안에 넣을 것이냐의 문제였는데요, 선교단체들이 커지면서 주중에 학교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그러한 충돌이 생긴 것입니다. 역으로 청년부나 대학부가 큰 교회의 경우, 교회가 오히려 선교단체화 되면서 주중에 대학 캠퍼스에서 자체적으로 모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도 이 무렵부터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리차드 미들톤과 브라이안 왈쉬가 지은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라는 책이 1987년에 출간되었고,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이 1992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 기독교 세계관 책으로는 필독서였습니다.
 
한편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사랑의 교회에서는 평신도 운동인 제자 훈련이 본격화됩니다. 1984년에 두란노에서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였던 고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인 「평신도를 깨운다」를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부터 사랑의 교회는 ‘평신도를 깨운다 제자 훈련 지도자 세미나’(일명 CAL세미나)를 시작했고 이 세미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변화의 이면에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 혹은 원동력은, 어떠한 식으로든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의 표지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일요일에 하는 일이 주중에까지 확장되게 하려는 노력이었는데, 거기에는 개인 큐티가 아주 중요한 몫을 했습니다. 주중에도 늘 말씀과 기도를 함께 할 수 있는 길로서 성도들이 직접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요. 겉으로 보이는 행위보다, 날마다 큐티로 주님과 대화하고 내면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종교적 행위가 아닌, 개인의 ‘영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피터슨의 책은 이러한 배경에서 소개가 됩니다. 피터슨이 소개되기 이전에 한국에서 사랑받은 영성 작가들이 있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헨리 나우웬이 그 예이지요. 그러한 작가들을 거쳐서 피터슨이 국내에 소개가 되었고, 한국 교회 안에 이러한 토양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터슨의 책은 환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피터슨의 책이 더 일찍 소개가 되었더라면, 예를 들어 그러한 토양이 한창 형성 중이던 80년대나 90년대 초에 소개되었더라면, 현재와 같은 호응은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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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위로나 격려는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약자를 향한 compassion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고 세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생존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대비시켜 보면 이들은 참 멋지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소위 '개혁적' 젊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는,
약자들 (사회적 약자 뿐 아니라, 정서적, 신체적, 영적, 경제적 약자들을 모두 포함)을 향해...
기운을 내, 우리가 함께 하고 있잖아, 저기 고지가 보이잖아...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들을 자주 발견한다. (나도 매우 자주 그런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약자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딛고 나올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자체가 무겁고 힘들어서 주저앉아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해볼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힘을 내라, 꿈을 키워라, 비전을 봐라는 식의 선동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망을 빼앗아 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이지,
인간이 제공해주는 '으쌰 으쌰'(너는 할 수 있어) 가 아니라는 것이 요즘 내가 많이 하는 생각이다.

그런의미에서,
은혜로만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삶,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은... 
정말 중요한 개념들인 것 같다.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은, 약자들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약자의 (하나님의) 복음은, 그들을 은혜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약자가 아니면서,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강남좌파'와 다를바 없는 것이 아닐까.

(갈라디아서 1장을 나름대로 연구해보면서.... 이런 묵상들을 해 보았는데, 나를 참 아프게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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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후반기부터 써온 ‘최주희의 사랑이야기’를 이제 마무리하려 한다. 코스타 홈페이지 담당자로부터 ‘사랑’에 대한 글을 요청받은 후 처음에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혼전 성관계가 독버섯처럼 퍼지고 불륜과 욕심으로 가정이 무너지는 심각한 현실 앞에서,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 결혼과 가정의 기초가 무엇인지 강조하였다. 이제 마지막 글을 쓰려고 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누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건전하고 건강하게 만들며 주님 나라 위해 이 땅에서 선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신앙생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균형이 많이 깨어진 것 같다. 기도만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만 하면 그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된다. 삶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넉넉함도, 섬김도 없는데 기도는 몇 시간 한다. 기도의 내용은 고난 극복, 물질 채움, 욕심(비전 혹은 꿈이라고 표현하지만) 성취가 주를 이룬다. 우리는 주인이고 하나님은 종이 되셔서 부지런히 우리를 섬기셔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사랑과 은혜가 넘치셔서 우리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 주셔야만 하고 이 일에 급급한 분이라고만 생각한다. 기도는 하는데 삶은 이기적이고 얌체 같다. 그런데도 믿음은 좋아 보인다.

신앙 좋다고 간주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 즉 ‘거룩과 사랑’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구체적인 결정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인 거룩과 사랑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고 희생을 요구하지만, 개인적인 삶의 선택 기로에서는 하나님이 결정해 주시면 안전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종종 확신에 차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의 본질은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 음성 듣기’가 아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fear & respect)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공경하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시되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며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신 권세와 능력의 하나님을 우리는 공경해야 한다(사40:26). 그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의 죄악에 진노하시고 심판하셔도 마땅한데, 인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시고 친히 우리 죄악을 담당하신 그 큰 사랑을 공경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는 은혜로 거저 주시는 구원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진 고난 다 겪으시고 생명까지 버리신 엄청난 희생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단순화시키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애써 늘 기억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구원받은 우리들도 이 땅에서의 삶을 놓고 하나님과 반드시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인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고 권면하셨다. 더욱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행위가 숨김없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전12:13-14, 눅12:2-5; 롬14:11-12, 고후5:9-10, 벧전1:1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만큼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눅12:5)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장 중요하고 기본 되는 본질임은 성경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다(창22:12). 행함 있는 믿음의 출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호렙산에 선 모세에게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다(신4:10). 우리가 즐겨 인용하는 시편 103편 말씀의 내용을 보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심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적용되기 위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어야만 한다(13, 13, 17절).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에는 관심이 없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뉘우치고 돌이킴)라는 조건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이나 교회를 받으신다(행9:31, 10:2, 22, 35).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만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엡5:21).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치유의 광선을 발하신다(말4:2).

지금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많이 찾고 존경하는 것 같은데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막7:6). 오히려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고 수단으로 삼으며 우습게 본다. 그저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성격대로, 자기 가치관대로 신앙생활 할 뿐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세계는 이중생활 속에서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믿음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우울증, 강박증, 망상, 불안증을 겪고 있다. 온갖 성적인 범죄와 투명하지 않은 돈 문제 그리고 욕심이 그리스도인들을 침몰시킨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되었고, 교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며,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우리의 모든 삶과 생각을 드러내어 점검 받는 것부터 시작하자. 두려움 가운데 이 일을 이루자. 그리고 그분을 마음으로 공경하며 말씀하시는 교훈에 순종하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이 본질 위에 가정이 있고 직업이 있고 사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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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생기는 순간부터 부모들은 많은 에너지와 노력을 자녀양육에 둔다. 잘 키우고 싶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런데 그 노력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실수나 실패 혹은 방황이나 혼돈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자들은 교육의 목표를 크게 두 가지로 둔다. 하나는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을 가지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인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있다. 바로 ‘거룩’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품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녀들의 교육목표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볼 때 이 두 가지 목표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중요하다.



먼저 첫 번째 교육 목표인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 즉 ‘거룩함’은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수년 전 출강하는 학교에서 ‘현대사회가정’이라는 과목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때 강의준비를 위해 연구하면서 발견한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이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살도록 자극하고 유혹하고 있다는 것이며(제1특징), 다른 하나는 그렇게 본능적 충동에 의해 살다가는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힘들게 만드는 신용 및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회(제2특징)라는 것이다.

제1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리는 거리에서나 TV에서나 맛있는 먹을거리를 쉽게 접한다. 입고 싶은 예쁜 옷들도 엄청 많다. 핸드폰, 스마트 폰 정신이 없다. 세련되고 성능 좋은 멋진 차들도 너무 많다. 뿐만 아니라 Sexy 한 몸매와 차림으로 다니는 여자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법만 없다면 마음껏 가지고 싶고 만지고 싶다.

문제는 제2특징이다. 이렇게 감각적이고 유혹적인 상황에 대책 없이 일단 반응부터 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규모 없이 돈 쓰다가는 신용불량자 되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가도 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덕적 하자가 생기면 추락하게 되어 있다. 과거에는 어느 정도의 불륜은 그 사람의 힘이었고 부정한 돈은 능력이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냥 추락이다. 특별히 지금은 비밀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돈의 흐름은 통장와 카드에 고스란히 기록되고 어떤 대화도 핸드폰에 녹음시킬 수 있다. 움직임과 행동은 손안의 핸드폰과 곳곳의 CCTV에 그대로 살아있다. 네티즌의 고발도 한몫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으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이다(마10:26, 눅12:3).

그러므로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도덕과 윤리의식을 의도적으로 심어주는 것은 이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한 기본이 되었다. 사회질서와 인간관계에 대해 너무나 짧고 간단명료하게 명령하신 십계명의 내용이 우리 자녀들을 살리게 한다. ‘부모를 학대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으로 폭행하거나 성적인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내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않으며 거짓말로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부모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생활가운데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설명해주어야 할 것이다.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 요즘 부모들은 그들이 태산을 넘을까 험곡에 갈까 노심초사하며 앞길을 평탄케 해 주느라 정신이 없지만, 그보다 ‘빛 가운데 걸어가라’고 강하게 가르쳐야 한다. 아들에게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진호야, 엄마 아빠가 인생을 살아보니 태산도 험곡도 피할 길이 없더라. 정말 중요한 것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삶이야. 그리고 세상에 비밀이 없음을 기억해야 해. 네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네 행동, 네 말 심지어 네 생각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훤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편하단다. 너 자신을 누구 앞에서든지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들테니”

두 번째 교육목표를 보자.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은 너무 교과서적이다. 그래서 현실감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 또한 학습이란 관점과 현대사회의 흐름 가운데 살펴본다면 얼마나 현실적이고 중요한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 학습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학습의욕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동기 부여가 바로 ‘세상의 필요’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웃과 세상의 어려운 점을 보고 내가 무언가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보며 후에 사업가가 되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 공부하고, 장애우 친구를 도와주다가 특수교사의 꿈을 가진다. 시각장애인 강영우 박사의 아들이 안과의사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우리 아들은 건축설계를 전공하는데, 십여 년 전 침례교단 선교훈련센터를 짓다가 건설회사가 부도나 고생하던 아빠를 옆에서 보고 건축사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대학교들 중 실력과 인격 면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한동대학의 교육목표는 ‘Why not change the World?'(세상을 한번 변화시켜 보지 않겠습니까?)이고, 미국의 필립스 아카데미는 'Not for Self'(자기 자신만을 위하지 말라)이다.

현대사회의 흐름이란 관점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대가 강조하는 리더십이 바로 섬김의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많은 리더십 아카데미에서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섬김이다. CEO 들이 사내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밥을 먹거나 손수 화장실 청소하는 모습들은 이런 면에 매우 의미 있는 상징이다. 또한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실력, 영어, 창의성 뿐 아니라 ‘인성’이 추가되었다. 아무리 실력과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겸손하고 섬김의 성품이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것을 대기업들이 알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중학교에서 반장을 뽑는데 어느 학생이 똑똑하고 말 잘하고 비전 있고 열정 있어도, 만약 잘난 척하거나 친구를 무시한다면 결코 반장에 선출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실력과 의욕이 있어도 그 아이가 영향 미칠 수 있는 대상은 한 반의 20여명도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세상의 필요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그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섬김의 자세를 가지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도와야 할 것이다.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 이것은 부모가 자녀의 손을 잡고 늘 바라보고 향해 가야하는 너무나 중요한 교육목표이다. 또한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도 잘 살게 하는 귀중한 푯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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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준 
 “그땐 그랬지”

      군대에서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밤이 되어 자려고 누워  있는데 방의 한쪽 구석에서 고참  두 명이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학과 동기로 같이 입대하여 같은 부대에 배치까지 받아서 서로가 무척 친했던 그 두 고참은 그날 따라 꽤 진지한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몰라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듣지 못했지만, 유독 한 마디가 귀에 들어왔고 아직까지 그 고참의 말투 그대로 생생하게 기억에 납니다. 그 말은 “어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어” 였습니다.

      그  말이 왜 지금까지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같은  세대에 비해서도 상당히 ‘신세대’적인 문화 코드를 가지셨던 그 고참들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 신기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저와 한 살 밖에 차이 안나는 그 분들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오셨던 그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 말이 당시의 저에게는 ‘철이 들은’ 말처럼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대  중반에 들었던 그 말이 왜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를 거듭해 갈수록,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가 이제 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어가기 시작하는 삶의  ‘전환기’들을 겪으면서 그 말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의지적으로 부정하려고 하였던 그 말에, 이제는 조금씩 동감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 가끔씩 동의하게도 되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를  낳기 전, 결혼을 하기 전에는 (한국 사회의) ‘어른들’의 모습들 중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자식 교육을 위해 학군에 목숨을 거는 모습, 자식의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 백태만상들, 가정이라는 핵심적 가치의 물질적 표현이 되어야 할 ‘집’을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모습들, 대학 졸업과 함께 대학에서 외쳤던 자유와 평등과 정의도 그대로 졸업시키는 모습들…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면 항상 선배들로부터 돌아오는 교과서 대답은 “너도 결혼해봐 (혹은 애 낳아봐)” 였습니다. 선배도 옜날에는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자동판매기처럼 찍혀내오던 대답은 “그땐 그랬지”라는, 어느 가요 제목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단절될 수 있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아마 저만 가졌던 의문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물론  결혼 이후에는, 또 아이를 가진 이후의  삶에는 제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특히 이러한 이슈들에 있어서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도 하고 분노도 하며 때로는 (하지 말았어야 할) ‘판단’도 하였습니다. 
      
이상한  나라 속의 나

      시간이  흘러 저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내년이면 미국에서 kinder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고참들의 말을 어깨넘어 들은지 15년이 지나서 그 말의 의미와 무게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먼저 결혼하고 애를 낳았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봅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전에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어른들’의 모습들이 저에게도 보이게 되었을까요? 옛날에 그렇게도 이상하게만 보였던 ‘결혼 이후의 삶’으로 들어섰는데, 나에게는 그 ‘이상한 나라’가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도 이상해져서 그 ‘이상한 나라’가 더 이상 이상하지 않게 보이게 되었을까요?

      지금  저의 모습이 어떠한지, 어느만큼 그  ‘어른들’ 중 한 명처럼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대 때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 비판했던 그 부분들에 대해 이제는 점점 “그렇다면 나와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해야할 일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 갖고 있는 이상과 이 땅에서의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을 점점 더 많이 겪게 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비판했던 그 모습들에 동의까지는 못하겠지만, 왜 그런 모습을 갖고 사는지 ‘이해는 된다’며 한 발 물러서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제 철이 들어 세상과 현실을 알아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포기하고 세속화 및 (개인주의적) 가족주의화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결혼과  육아라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들을 새롭게  밟으면서 신앙과 현실 사이에 더  많은 고민과 혼란, 그리고 가치관의 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머리로는 한국적 가족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지라 나의 가족을 챙기고 보호하는 데에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한국 사회의 주요한 고질적 문제들은 대부분 과도하고 빗나간 자식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자식 챙기는 데에는 웬만한 고슴도치 부모와 같은 저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도를 이야기하시면서 가족 이야기를 꺼내셨구나 생각이 들다가도,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 앞에 있었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신 것은 피의 진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이렇게  고민과 혼란은 쌓여져 가는데, 이러한  고민과 질문들을 나눌 사람들은 더  적어져 갑니다. 아마 개인적으로는 결혼과 함께 유학생활을 하게되어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로부터 멀어진 것도 이유이겠지만, 그러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도 하고, 설사 있더라도 그러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기회가 부족한 것이 더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또한 공부를 하고 있든지 직장을 다니고 있든지, 그래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에는 좀 나을 수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이러한 고민을 나누기는 커녕 예배, 말씀, 기도, 독서 등의 기본적인 영성의 삶을 살기에도 벅차도록 바쁜 것이 많은 30-40대 기혼자들의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요일에 교회가는 것이 사치에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얼마전 인터넷에 올라온 초등학생의 시처럼 “냉장고는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강아지는 자기와 놀아줘서 좋은데 아빠라는 존재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오늘날 한국 아빠들의 현주소입니다.  

 KOSTA - 기혼자들의 새로운 기회?

      KOSTA 연차 수양회 참여자 중에 기혼자와 비청년층(‘청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호하지만)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운동으로서의 KOSTA의 정체성과 방향에 있어서나 집회로서의 KOSTA 연차 수양회의 운영과 구성에 있어 많은 도전과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KOSTA의 연차 수양회에 이들의 참여 비중이 높아졌는데, 그렇기 때문에 KOSTA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점점 깊어지고 진지해지는 것 같습니다. 과연 KOSTA가 이러한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KOSTA의 운동의 흐름에 있어서나 수양회의 운영에 있어 적극적으로 품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 KOSTA가 품고 있는 KOSTA의 핵심 가치에 부합하는가 조심스러우면서도 결단력 있게 고민하고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는 제가 이 자리에서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만약 KOSTA가 이 계층을 적극적으로 품고  나아간다면, KOSTA가 앞에서 짧고 무작위하게  언급했던 것과 같은 고민들이 함께  나누어지고,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도전이 주어지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라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현재의 KOSTA 수양회에도 기혼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세미나 중에 기혼자들을 위한  세미나들도 있고, 또 몇 년 전부터 기혼자 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조금 더 자유롭게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제들은 대부분 부부관계와 자녀양육, 그리고 소위 ‘F2 이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정체성 문제에 제한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고, 또한 저와 저희 가정을 포함해서 KOSTA에 오시는 가정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이 이슈들이 갖는 무게감이 얼마나 큰가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기혼자이기 때문에 ‘가정 안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기혼자이기 때문에 잊혀져 가고 있을 수 있는 ‘이 땅 가운데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기혼자의 특별한 상황과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하고 섬길 수 있는 도전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KOSTA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KOSTA는  ‘흩어진 나그네’로서 외국 땅에서 다른 민족을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한(Korean)민족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수 민족’이라는 특성상 경제·사회적 불안정성이 강하고, 따라서 자기 보호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웃을 돌아보기보다는 나와 내 가정의 안정에 더 집착하게 되기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미혼자, 기혼자 관계없이 나타날 수 있지만, 이러한 괴리는 ‘가정’이라는 변수에 의해 더 증폭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KOSTA가  기혼자들을 적극적으로 품는다면, 수많은  이 땅의 결혼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에서 위와 같은 괴리가 좁혀져가도록  때로는 힘과 용기를, 떄로는 자극과  도전을 던져주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 속의 답답함과 삶에서의 괴리를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그 답답함과 실망, 혹은 무력감을 함께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를 심어주는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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