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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복음

사역이냐 고역이냐

1980년대만 해도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 목회할 곳을 찾는 일이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은 오히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를 찾는 일이 더 어렵다. 비공식통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 소위 목회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무임목회자는 약 2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매년마다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이 1년에 약 3000명에 이른다고 하니 앞으로 목회지를 구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교 졸업자들이 이처럼 많은 것을 두고 부정적으로 말하며 웃지 못할 대안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떤 분은 신학교를 10년간 일시적으로 문을 닫아버리면 목회자의 수급 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군소 신학교나 무인가 신학교를 정리하라, 농촌 목회지로 가라, 신학교에 간 저의가 의심스럽다, 통일이 되면 해결된다 조금만 기다려라,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는 등 참으로 뼈있는 대안들도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분들도 많다. 사고의 틀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 사역할 곳이 왜 꼭 교회이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신학교 졸업한 후 병들어 가는 이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한 10여년 일을 한 후 다시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훈련을 하고 전담 사역자로 목회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강변한다. 나이드신 목회자들은 이제 물러나신 후 다시 세상에 들어가서 일하시고 젊은 분들에게 사역을 맡기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다. 평신도들로부터 이런 의견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 성도들의 의식도 많이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회지도자들로 이런 평신도들의 의식의 변화에 맞추어 변해야 겠다.

신학교 졸업생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결국 목사들이 넘쳐서 무임 목회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학교 졸업생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동기야 어찌되었든 간에 믿음을 전파할 수 있는 잠재력 역량이 그만 큼 많아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결코 손해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부모들의 강요에 의해 들어갔던지 일반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없어서 들어갔던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쌓이는 것은 신앙과 신학지식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손해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사역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다고 본다.

보통 그렇게 이해 하듯이, 사역이라는 개념을 교회안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교회 행정을 보고, 심방하는 그런 것에만 국한하고 세속 사회에서 땀을려 일하고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일해 돈버는 일은 사역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3000명 신학생 배출시대에, 그들 중에는 세상에서도 일하지 못하고 교회안에서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이와같은 사역에 대한 개념을 바꾸라는 것이다. 사역은 교회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사회에서도 훌륭하게 사역을 할 수 있다. 세속사회에서 전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땀흘려 일하는 것이 사역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역이라는 것을 교회안에서의 일로 국한시켜 버리고, 세속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며 이 또한 훌륭한 사역이라는 생각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역에 대한 반쪽의 진리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일하는 것이 사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말이다. 사역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다. 현대교회도 사역에 대한 개념이 교회안에서 일하는 것 또는 좀 더 넓게는 세상에서 전도하는 것 쯤으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사역이 세상에서 일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조금 남아있는 곳은 그래도 군대 뿐이다. 군대에서는 노동할 사람을 선발할 때 "사역병" 선발이라고 한다.

폴 스티븐스 교수의 사역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사역이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모두 교회안에서 일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일하는 것도 사역이 될 수 있다. 교회안에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참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역(使役)이 아니라 사역(死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속가운데 땀흘려 일하는 그리스도인도 참으로 하나님과 동역한다는 믿음으로 한다면 그것은 사역(死役)이 아니라 사역(使役)이다. 성경에 나오는 텐트 메이커인 바울 사도는 칭찬하면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사역자로 여겨주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다. 무임 목회자들이여! 신학교 나온 사람이 세상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소명감이 좀 부족한 사람으로 여길 것 같아 세상에서 일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사역할 목회지도 없어서 고민하는가. 그것은 고역자(苦役者)들의 몫이라고 여겨라. 만약 자신을 사역자로 여기거든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흩어져라. 신학교 졸업생의 자격으로 그렇게 하라. 신학교 졸업하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말아라. 그곳에서 신학교 졸업생의 자격으로 사역하라. 교회가 재정적 보조를 하여 줄 수 없다면 그렇게 흩어져 일하면서 자립하라. 이제 현대교회는 세상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사역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존경해 주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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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복음

기독교 교도소운영, 우리 모두의 책임

기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한 민간교도소 설치를 위한 법률 제정 필요성 강조와 정부 당국자들의 인식 전환으로 말미암아 2000. 1. 28. 법률 제6206호로 민영교도소등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1. 7. 1.부터 이 법은 시행되었다. 이 법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이 주축이되어 기독교 민영교도소 운영을 위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고 이 법인은 법무부에 민영교도소 수탁신청을 하였다. 법무부는 지난달 이 법인을 민영교도소 수탁자로 최종 승인하였다고 한다.

이제 기독교가 교도소를 운영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이 법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택한 운영모델은 민간위탁형 모델이다. 그러니까 어느 민간 단체가 민간교도소 운영수탁자로 지정이 되면 그 단체는 격리 뿐만 아니라 격리를 위한 시설까지 건축하여야 하고 물론 교화도 책임을 져야한다. 이제 기독교 교계는 교도소 시설을 지어야하고 격리에 필요한 물적, 인적자원을 갖추어야 한다. 교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모델은 많은 재정적 부담을 져야한다. 약 300억원의 자금이 소요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시설 설치 비용일 것이다.

앞으로 인건비도 조달하여야 하는데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될 것이다. 물론 기독인들이 자원봉사를 하면 되겠지만 그러나 필수요원들에게 까지 자원봉사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법무부장관과의 구체적인 위탁계약을 통해서 수탁자에게 지급되는 위탁비용등이 정해 지겠지만 국가예산 절감의 차원에서도 민영 교도소 설치를 법으로 통과시켰는데 국가로부터 충분한 위탁대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런면에서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민간교도소와는 그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탁자로 지정된 기독교계에서 충분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공은 우리 믿는자들에게 넘어왔다.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은 교도소를 믿음으로 운영할 수 있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을 관리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만약 처음으로 시행되는 이 기독교 교도소 운영이 우리의 관심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민영교도소운영에 관심을 갖는 다음 세대는 참으로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기독교 교도소 운영문제를 놓고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시험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한국교인들이 얼마나 연합할 수 있느냐를 시험하고 계신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연합 할 수 있느냐를 시험하고 계신다. 기독교 교도소 운영 문제는 어느 특정인이(사람이든 교단이든 교회든) 주도권을 잡고 힘 자랑의 방편으로 삼아서는 아니된다. 한국교회 전체의 연합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물질적으로도 연합되어야한다. 인적자원으로도 연합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처럼 연합하여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몇몇 대형교회, 교단만 참여하도록 하면 안된다.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작은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모든 교인, 교회들을 설득하여야 한다. 단지 몇 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거두는 것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은 것을 거두는 것이 훨씬 좋다. 범기독교인 모금운동이라도 펼쳐야 한다. 인적자원을 쓰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특정교회, 특정교단에 소속된 사람들로 편중되면 안된다. 범교단적으로 인물을 골라야한다. 그렇게해야 교정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운영하는데 있어서도 균형잡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보수니 자유니 따지면 안된다. 참으로 준비된 전문가라면 교단에 상관없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동안 기독교계 인사들이 기독교 교도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소리쳐 왔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이미 수탁자로 선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기독교인들이 옳은 일에 단합된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교회건물 하나 건축하는데 몇 백억 씩 들이는 실력이 있다면 우리가 단합하여 교도소 한 동 지어 많은 죄수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을 주는 일인들 왜 못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단합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기독교 교도소운영의 문제는 어느 개인, 어느 단체의 일로 끝나서는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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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복음

양심적 병역거부

최근 특정종교인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병역거부의 당부문제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KNCC에서 개최한 종교.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관련 토론회에서 찬반양론의 열띤공방이 벌어졌다고 한다. 특이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병역거부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을 신봉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이다보니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여기는 기성교회에서 이를 반대하면 합리적인 연구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쳐질 우려도 있다.

주로 기독교계 인사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도외시하고 이를 빙자한 병역기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특히 이단을 비호하고 양성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있어 막아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여호와의 증인교리를 반박하면서 국가를 마귀로 보고 병역을 포함, 수혈과 학업조차 거부하는 교리에 협조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경우 이는 병역 거부의 기피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면에 양심적 병역거부 지지자들은 세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허용되지 아니한 나라는 거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종교간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을 따르는 소수자의 인권문제라고 주장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공론화 될 수 조차도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닫혀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그 주장 자체가 터부시 될 정도의 폐쇠된 시대에 우리가 살았던 것을 고려하여 보면, 이런 문제를 공론화하고 자유롭게 찬.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이 되어 있고 또 그 나름대로 합당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어 필자가 어느 편을 든다하더라도 양편의 무게는 그리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어느 편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보다도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문제점들을 짚어 보는 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는 우리 헌법상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다. 우리 헌법 제 19조에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양심의 자유는 내면적인 사상과 양심을 외부에 표현하도록 강제되지 아니할 자유와 자기의 사상 및 양심에 반하여 어떤 행위를 강제 당하지 아니할 자유를 그 내용으로 한다. 이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와 함께 인간내심의 자유로서 정신적 자유의 근본으로 인정된다. 이 양심의 자유에는 양심의 형성의 자유와 양심의 유지의 자유가 포함된다. 예컨데, 국가가 어떤 특정한 사상과 도덕만의 홍보에 노력한다면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강제적인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국민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로운 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이는 양심의 형성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유지의 자유에는 어떤 사상 및 양심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는데 만약 직접적으로 양심을 표명하도록 강제하는 것도 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지만 간접적으로 충성선서나 십자가 밟기등 행위를 통해 내면의 양심을 드러내도록 강요하는 행위도 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즉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강제당하지 않는 자유도 이 침묵의 자유에 포함이 된다.

바로 우리의 주제인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이 침묵의 자유와 직결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된다는 내심의 양심이 형성되어 있고 만약 그들에게 법으로 병역의무를 지운다면 총을 드는 행위는 필수적이 되고 바로 이 법으로 부과된 의무행위가 바로 자신들의 침묵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서 특히 양심형성이 진실이냐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제는 이미 법원의 도마위에 올라온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1969.7경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신도들의 양심의 결정으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행위는 응당 병역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판시하면서 소위 양심상의 결정은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았었다. 이제 이 문제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의 종전 결정과 반드시 함께 갈 필요는 없으므로 이제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려 보아야한다. 대법원에서 합헌결정을 한 것을 헌법재판소에서는 위헌으로 결정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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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다름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을 보여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고 죄인들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고 우리와 생각이 같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팔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발까지 씻기셨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조건없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저들이 누굽니까. 예수님을 배반한자들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서도 조건없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하여야 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사랑하기 쉬운데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종교가 다르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타 종교 중에도 가장 기독교를 핍박하는 회교도인을 향하여는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의 테러사건 이후에는 더욱 회교도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닫히게 됩니다. 최근에 경험하였던 작은 이야기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언젠가 회교도인 한 여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기 남편이 강도상해죄로 교도소에 갇혀있는데 변론을 맡아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외국근로자들입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회교도인들을 위해 크리스챤이 변론을 하여준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 제 생각이 단견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회교지역에서 핍박받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 사람들이라도 잘 대해주면 귀국해서 최소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론을 해주겠노라고 승낙하고 교도소에 찾아가 그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남편은 부인보다 더 열렬한 회교도인이었습니다. 교도소내에서도 하루 5번씩 기도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친절하게 법적인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그를 신뢰한다는 태도로 접근하였습니다. 그를 위해서 변론을 하여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다니는 이슬람사원의 지도자가 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을 위하는 일이라면 만나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공통의 장 (commom ground)이 있으면 누구와도 만나서 함께 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공통의 장은 섬김과 정의와 사랑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그를 위하여 변론하였습니다. 그가 구속되어 있는 중에 그의 아내는 출산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돌보아 줄 크리스챤 자매를 붙여주었습니다. 통역도 하여 주고 병원도 데려가 주었습니다. 병원비가 없는 것 같아 회사에서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사랑의 헌금도 전달하였습니다. 지금은 잘생긴 아들을 순산하였습니다. 마지막 선고하는날 그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판사가 남편을 불쌍히 여겨서 석방을 하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주목사님, 감사합니다"라며 울먹이면서 말합니다. 그의 알라신이 도와 주셨는지 우리 하나님이 도와 주셨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랑과 정의를 위해서는 기독인도 회교도인도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부는 아들을 안고 자기 나라 특산물인 선물을 손에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도 기뻣습니다. 그 즈음에 한국에서 상연하고 있던 영화 한편을 감상하였습니다. 천국의 아이들이란 제목의 영화입니다. 역시 회교국가에서 만든 영화입니다. 가난한 어느 회교도인의 가정에 어린 남매가 있었는데 너무 가난해서 아이들의 신발도 사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오빠의 걸레같이 생긴 운동화 하나로 여동생과 함께 나누어 신게 됩니다. 오전에 여동생이 오빠의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다오면 오후에 오빠는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닙니다. 이어 달리기에서 바톤체인지 하듯이 운동화를 나누어 신다 보니 오빠가 학교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여동생도 뛰어서 집에 와야하고 오빠도 뛰어서 학교에 가야합니다. 이 달리기가 반복이 되다보니 오빠는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날 운동화가 부상으로 걸린 어린이 마라톤에 출전하여 일등을 한다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가슴이 찡하게 저려오는 영화였습니다. 우리에게 공통의 장이 있으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공통의 장, 사람과 인간애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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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법

크리스천과 선거

올해는 대통령선거를 비롯해 중요한 선거들을 치루게 되는데, 벌써부터 예상후보자들이 자신이 적격자라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대체로 부정적이다. 정치가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소리만 크고 실천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정치가들은 입법과 법의 집행을 통해 국민들의 생활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정치나 정치가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 모를 일이다. 정치가 잘 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훌륭한 정치가가 선출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훌륭한 정치가가 뽑히도록 노력하는 행위는 애국하는 일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정치가들이 선출되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잘 뽑아야 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막상 유권자들은 후보자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 결정이 그리 쉽지 않다. 그렇다고 교회에 다닌다는 조건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을 택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정당만 보고 사람을 택하는 것도 반드시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후보자들에 관한 여러 정보들을 모으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 후보자의 됨됨이를 알아보자. 열심히 일한 흔적이 있는가 보자. 땀 흘린 흔적이 없는 사람은 우리의 지도자가 되기에 부족하다. 고통 가운데 있어 본 사람들이야말로 서민들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가 제시하는 정책과 비전을 살펴보자. 그가 내세우는 정책들은 실현가능성이 있는가. 대다수의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는 내용인가. 전혀 새로운 것을 주장하여 신선감이 있는 정책이라면 더욱 실현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과거의 것을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분쟁만 일으키기 쉬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개혁자가 아니다.

이것 이외에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다. 그가 도덕적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보자. 이것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것은 사람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정당에서 미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을 공천해 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체크해 보자. 우선 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보자.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부족하다. 그가 정말 거듭난 사람인지 보자. 거듭난 후에 그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였는가 보자. 그가 그 직업을 기꺼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인지 보자. 이런 사람은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아도 큰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욕심을 부린다면 소문으로라도 그의 가정생활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자. 부부관계는 원만한가. 자녀와의 관계는 좋은가. 가정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반드시 좋은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가정생활에 실패한 사람은 우리의 정치적 지도자로 세우기에 흠이 있는 사람이다.

정당과 후보자들은 미사여구로 유권자들을 설득시키려하지 말고 진실과 정직함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거짓으로 유권자들을 설득시키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만약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선거운동을 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업무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보라. 유권자들은 움직일 것이다. 상투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책제시로 유권자들을 속이려 하지 말고 유권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선만을 목적으로 법을 어겨 가면서 선거운동을 한다면 그런 사람은 당선된 후에도 반드시 법을 어길 가능성이 있다.

특히 크리스천 후보자들은 단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믿는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난 신앙인인지 점검하여 보고 만약 당선이 된다면 어떻게 그 직을 하나님께 드리겠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상위의 법(the higher law)인 하나님의 법이 이 세상을 지배하여야 한다는 신앙이 있는가. 그 상위의 법에 합당한 법을 이 세상에 남기기 위해 준비되었는지 점검하여 보라. 그 상위의 법이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어떻게 이 세상의 법을 집행하겠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이런 비전을 믿는 유권자들에게 제시한다면 믿는 자들은 그들의 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좋은 지도자들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때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 무망하며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이 많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때다. 하나님은 이 땅의 정치제도, 법제도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라면 믿는 사람들도 마땅히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지켜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좋은 일꾼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날을 기대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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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NGO

얼마전 기독 시민사회연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참여불교 재가연대 등 종교단체들이 연합하여 개혁을 위한 종교NGO 네트워크 발족식을 갖고 종교 바로 세우기를 선언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종교가 황금의 노예가 되어 물량주의와 기복주의를 신앙생활의 기본으로 받들고 있으며 종교지도자들의 부정부폐와 신자들의 근시안적 신앙행위로 말미암아 대내외적인 비판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하면서 5대 목표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교단재정의 투명성 확보와 바른 목적에의 사용, 성직주의를 타파하고 모든 구성원이 함께 진리의 삶을 사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교역자의 헌신, 가부장적/반생명적 종교문화를 척결하기 위한 활동전개, 약한 자와 소수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교단내 법제도 개선, 교단개혁을 위한 지속적인 대안 모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 등 종교단체들이 스스로 자신을 개혁하는 자정능력을 잃게 되자 이제 시민단체들이 그 동안 성역시 되었던 종교문제에까지 바른 소리, 쓴 소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대 목표실현 중 눈에 띄는 것은 돈에 관한 것과 성직주의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와도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종교 단체들이 헌금을 잘 거두어 들이기는 하였으나 헌금의 사용이 투명치 못해 내외적으로 비난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또 헌금이 인재를 길러 내거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 보다는 경쟁적으로 더 큰 건물을 짓는데 사용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어떤 교회들은 성전건축을 교회목표로 삼았다고 하면서 교회 주보에까지 실어 홍보를 하기도 하였다. 성전건축은 교회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교회의 목표는 사람을 데려다 예수님 믿게 하고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다시 이 세속사회에 들어가 거룩한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헌금은 올바른 방법으로 거두어야 한다. 헌금은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헌금사용은 투명해야 한다. 앞으로 성도들은 목사의 헌금하라는 설교를 듣고 헌금하기 보다는 연말 결산보고서를 보고 헌금을 하는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다. 성도들은 연말 결산보고서를 볼 것이다. 연말 결산보고서를 통해 헌금이 옳게 사용되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데 헌금이 사용된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은 헌금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자기가 기부한 헌금이 이렇게 잘 쓰여졌으니 왜 더 많은 헌금을 하지 않겠는가. 반대로 연말 결산보고서가 헌금이 올바르게 사용되었다는 흔적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성도들은 더 이상 그곳에 헌금하지 않을 것이다. 헌금을 많이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반협박조의 설교를 듣고 헌금하는 성도들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을 확신한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라고 설교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이제 한편의 설교로써 헌금을 거두어 들이는 시대는 지났다. 헌금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가르쳤으면 이제 예산 결산보고서를 성도들에게 보여 줌으로 자발적으로 헌금하도록 하여야 한다.

다음으로는 성직주의의 타파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띈다. 성직자란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직자는 평신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국교회가 성도들에게 주입시켜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많은 부작용이 있었다. 성도들은 성직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었다. 성직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게 되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 앞에서는 늘 주눅이 들었고 그들에게 바른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 성직자들의 말에는 감히 의문을 달지 못했다. 성직자에게는 감히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전인적 회복을 이룬 바른 영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직자는 목자이고 평신도들은 양이므로 양이 새끼를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양으로서 모두 성장해 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직자는 양무리 가운데 조금 성숙한 양으로서 미성숙한 양들을 돌보기 위해 보냄 받은 선물에 불과하다. 성직자와 평신도 간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모두 하나님 앞에 양이다. 모두 함께 고민하며 성장해야 할 양들이다. 모두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될 양들이다. 선한 목자는 한 분 뿐이시다.

종교 내부의 문제를 밖으로 끄집어내 건강한 평가를 받게 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종교 NGO 네트워크의 발족, 그 자체가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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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법

사형제도와 기독교인

여야의원 155명이 사형폐지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형제 존폐 논쟁이 다시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존폐론자들이 주장하는 논거가 모두 일리가 있어 법조계 만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도 그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다. 사형폐지운동을 벌이는 사람들 중에는 특히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모두 사형폐지에 찬성하는 것처럼 보여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사형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법학자 중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형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형제도 존폐론에 관한 논쟁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사형존폐에 관한 이유들은 무엇인가. 이에 가세하여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종교인들도 저마다의 종교적 교리를 내세우며 사형제도의 존폐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사형제도에 관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의 논거를 살펴보고 사형제도 존폐에 관한 결론은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한다.

사형제도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형벌이다. 현재 각국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사형제도를 두고 있는 나라가 더 많다. 각국의 현황을 살펴 보도록 하자. 유럽은 35개국 중 27개국 정도가 사형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에는 영국, 독일, 오스르리아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는 사형제도를 폐지한 주는 약 14개 주에 이르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경우는 호주, 뉴질랜드 등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형제도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은 사형제도가 있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사형이 집행되는 예는 거의 없다. 사형집행 방법으로는 총살, 참살, 전기살, 교살 등의 방법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인에 대해서는 교살의 방법을 택하고 있다.

18세기에 접어 들면서, 사형집행 방법의 잔혹성, 오판 가능성 등을 이유로 사형폐지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베까리아인데 그는 '범죄와 형벌'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사형제도는 법률적으로나 효과적으로도 불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후 이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는데, 사형폐지론자들의 중요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사형은 야만적이고 잔혹하므로 인도주의의 견지에서 허용할 수 없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므로 사형제도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악이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여 그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없는 국가가 이러한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 사형집행이 오판의 결과로 기인한다면 영구히 구제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형은 일반사회인이 기대하는 것처럼 위협적인 효과를 가지지 못한다. 사형은 형벌의 주된 기능인 교육 및 개선기능을 전혀 갖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사형 존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거를 보면, 대개 사형제도가 가지는 위하력, 즉 범죄예방 효과로서의 범죄억제력을 강조한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그 자신의 생명도 박탈 당할 수 있다는 것은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법적 확신이다. "흉악범 등 중대범죄에 대해서 사형으로 위하하지 않으면 흉악범을 예방할 수 없다" 등이 사형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거들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사형제도 존폐에 관한 논거들은 무엇인가. 물론 기독교인들 모두 성경을 인용하여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사형존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명은 생명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것이 성경의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형벌권을 국가에 위임하였으므로 사형제도는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또 실제도 성경 어느 곳을 보더라도 사형제도를 폐지하라는 말씀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사형제도는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에 의하면 구약성경에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으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악을 제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 법을 어긴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형폐지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치론자들을 향해 구약성경에 따른다면 안식일을 어긴 자, 부모을 공경하지 않는 자, 간음한 자를 죽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런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지 않는 가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사형폐지론자들은 구약의 율법에서 그 논거를 찾는 대신 예수님의 정신에서 찾는다. 율법이 법을 어긴 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이유는 악을 없이 하고자 함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죄악을 제하는 길을 여셨다. 이제는 인간의 죄악이 그에 대한 응보형으로 제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제하여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는 그 근거를 잃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들이건 비기독교인들이건 우리나라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하여야 하는 가에 대하여 그들 간에 논쟁이 어느 때보다 뜨거워질 전망이다. 여러분은 사형 존치론자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사형 폐지론자들 편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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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법

상담과 법률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상담한다. 그 내담자들 중에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내담자들을 상대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그 내담자들이 자살 등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하였을 경우,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국에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례를 중심으로 상담에 얽힌 법률 문제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사례는 이렇다. 1970년 초에 UCLA에 다니던 넬리(Nally)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원래 천주고 신자였는데 기독교로 개종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맥아더 목사님이 시무하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교회 대학생부에도 참여하였으며 그 교회 부목사로부터 제자 훈련을 받기도 하였고 상담을 받기도 하였다. 그 부목사님은 넬리가 가끔 삶의 부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1978년 후반 넬리는 그의 여자 친구와 교제를 끊은 후 더욱 의기소침해졌고 또 다른 부목사와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 목사님은 넬리에게 자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넬리는 1979년 3월경 엘라빌이라는 약을 과도하게 복용하여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목숨은 건지게 되었고 퇴원 후 다시 담임 목사인 존 맥아더 목사와 상담을 하였으며 그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담임 목사는 넬리로 하여금 정신과 치료를 받아 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았다. 넬리는 다시 부목사와 상담을 하면서 자살하는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 부목사는 그리스도인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빙자한 자살은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후 넬리는 그의 새로운 여자 친구에게 결혼하자고 하였으나 거절 당한 후 자기 친구의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였다. 넬리의 부모는 그의 아들이 다녔던 그레이스 교회와 그 교회 목사 4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소장에서 성직자들이 그들의 아들이 자살하는 것을 방지해야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긴 과오로 말미암아 그 아들이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대해 손해를 배상하라고 하였다. 이 사건이 소위 캘리포니아 법정을 10여년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유명한 넬리 대(對) 그레이스 커뮤니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목회 상담자들의 역할·의무·한계 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케 하는 사건이었다.

전문가들이 그들의 전문적 지식을 사용함에 있어 과오를 저지른 경우 그 전문가들의 과오를 소위 전문직 과오(malpractice)라고 한다. 예컨데, 의사들이 과오로 환자를 오진하여 손해를 입혔을 경우라든지, 또는 변호사들이 소송을 잘못 진행하여 손해를 끼쳤을 경우가 바로 전형적인 전문직 과오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상담 전문가들도 미국의 경우 국가로부터 상담 전문 자격을 받기 때문에 상담가들이 상담을 잘못하였을 경우에도 바로 이 전문직 과오(malpractice)에 해당된다. 넬리의 가족이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목회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주장하였던 법 이론이 바로 이 전문직 과오였다. 즉, 넬리의 가족은 상담자를 선출하고 훈련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과실을 범하였으며 나아가 교회 상담자들은 자기 아들인 넬리로 하여금 더 전문가적 보호를 받으라고 격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의 종교적 교리 교육이 넬리의 천주교적 양육을 무시하였고, 넬리의 선재하는 죄의식, 염려 그리고 우울증을 악화시켰으며, 넬리에게 자살을 한다 하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넣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에서 주요한 쟁점은 "내담자인 넬리로 하여금 자살을 피하도록 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과연 교회에게 있는가"였다. 만약 교회에게 그런 법적인 의무가 있다면 그런 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과실에 대해 책임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그런 법적인 의무가 없다고 하면 윤리적인 책임은 별론으로 하고 법적 책임은 면한다 할 것이다. 법원은 어떻게 판결을 하였는가? 1심 판결은 교회의 편을 들어주며 교회에는 그런 법적인 의무가 존재치 아니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넬리 가족이 항소를 제기하였고 2심에서도 같은 쟁점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2심에서는 원고인 넬리 부모의 편을 들어주며 교회에 법적인 의무가 있고 교회는 그 의무를 다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항소 법원은 교회에 법적주의 의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넬리의 교회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심리적 의존도는 전문 상담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교회내 비전문 상담가에게도 인정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교회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대법원은 다시 교회의 편을 들어 주며 교회에는 책임이 없다고 항소심 판결을 뒤엎었다. 즉 교회 내 비전문 상담자와 그의 내담자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교회 내에서의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는 비상업적이고, 보호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자발적 성질의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 판결로 교회는 상담자 과오에 대한 짐을 덜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교회의 편을 들어주며 자살 위험성이 있는 교인들을 평가하여 병원에 가도록 하여야 할 법적 의무를 목회 상담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독교 상담 사역을 보호하여 주었다. 대법원은 만약 교회에 그런 법적 의무를 부여한다면 목회 상담자는 자살할 위험성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사역을 하기보다는 소송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역을 기피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수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그레이스 교회는 넬리에게 법적인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소수 의견도 경청하여야만 한다. 이유는 그 교회가 자기 자신들을 우울증과 자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유능한 전문가라고 넬리에게 소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자신들의 능력을 과장하여 넬리로 하여금 믿게 만들었다면 교회도 법적인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10여년의 송사 끝에 결국 교회의 승소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교회는 많은 고통을 감수하여야 했다. 이 사건은 또한 교회로 하여금 배워야 할 많은 교훈을 남겨 주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그레이스 교회는 스스로를 과대하여 자신들이 정신 심리를 다루는데 있어 유능하다고 광고를 하였다. 이것이 잘못이었다. 교회는 자신들의 능력을 솔직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떤 간질병 환자가 어느 교회를 찾아 갔다. 그는 간질병이 너무 심하여 가족들조차도 이제는 지쳐 관심을 갖지 않는 환자였다. 이 환자의 가족은 그를 교회로 안내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를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만 개척 교회로 안내를 하였다. 그 교회의 목사 부부는 그를 환영하였고 열심히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를 교회에 기거하게 하면서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때로는 잠을 자지 못하면서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목사 부부만 그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다 시시때때로 온 교인이 그 환자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목사 부부 뿐만이 아니라 교인들도 이제는 그로 인해 지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상황에 이르도록 교회에 속한 누구도 치료를 위해 그 환자를 전문 기관에 보내라는 말을 한 사실이 없었다. 오직 기도로 이 환자를 고칠 수 있다고 온 교인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새벽 그 환자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그 개척 교회의 목사는 그를 가볍게 때리면서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날 그 환자는 죽고 말았다. 그런데 사체 부검 결과 직접 사인은 외부의 충격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그 목사는 구속이 되었고 법의 심판을 받았다. 선한 일을 하다 구속까지 된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상담하는 도중 왜 그 환자를 전문 기관으로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 때는 우리가 어리석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예수님조차도 베데스타 연못가에 있는 많은 병자들 가운데 오직 38년된 병자만을 고치셨다. 그것도 그 치유라는 행동을 통해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치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교회나 교회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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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법

주 5일 근무제와 교회

정부가 주 5일 근무제 시행을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다. 믿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 문제는 예외가 아니다. 최근 한국기독교 총연합회는 공식적으로 주 5일 근무제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 물론 한기총의 공식적 견해라 하더라도 이것이 한국 교회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교회 일각에서는 한기총의 의견을 반대하는 소리도 높다. 이런 문제에 대한 공식적 의견을 발표하려면 한국 교회의 의견들을 다각도로 수렴해 보았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기총이 주 5일 근무제에 반대하는 근거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이것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고, 주 5일 근무제의 시행이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주 5일 근무제를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이것을 이용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한번 살펴 보도록 하자.

한기총이 주 5일 근무제를 반대하는 이유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주 5일 근무제가 10계명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 중에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이레되는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에 의하여 주 5일 근무제는 엿새 동안 일하라는 계명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신앙인들에게까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제4계명인 안식일 명령보다는 창세기에 나오는 노동명령을 이곳에 적용하였더라면 더 설득력이 있지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제4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지 엿새 동안은 반드시 노동을 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인간에게 노동명령을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인 주일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노동하여야 한다. 왜 주 5일만 노동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설득하였으면 - 사실 이것도 그리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 더 좋았을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는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면 향락산업을 부추기고 소비성향을 크게 자극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에 부가하여 산업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한 후 단기간 동안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만간 이 제도가 정착이 되면 지금보다 크게 향락산업이 기승을 부릴 것 같지는 않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지 않더라도 어차피 향락산업은 발전될 수 밖에 없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이 되고 기존의 공휴일도 쉬게 되면 쉬는 날이 너무 많아 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것 같다는 견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점은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면서 기존의 공휴일 제도를 개선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연휴의 기분이 월요일까지도 계속이 되고 결국 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주 5일 근무제로 인하여 오히려 산업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연구조사 보고도 있다. 이와 같은 이유도 그렇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와 관련이 있는 이유로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는데 주 5일 근무제가 시행이 되면 교회에 신도수가 줄어들 것이고 신앙을 갖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가장 설득력이 있고 경청하여야 할 주장 같아 보인다. 특히 교회 안의 젊은 부부들은 토요일을 이용하여 양일 간 멀리 휴가를 떠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주일예배를 걸르게 될 경우가 많을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휴가를 가느라 교회에 갈 정신이 없을 것이므로 전도가 잘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가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더라도 그 제도로 인하여 사람들이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일을 게을리하게 된다면 결코 그것은 바람직한 제도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제도가 영적인 가치를 더욱 증진시키 위해 존재하여야지 영적 가치를 오히려 퇴보시키는 제도라면 결코 그 제도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도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라면 주 5일 근무 할 때건 주 6일 근무할 때건 예배를 걸르는 일은 없을 것이고, 신앙이 약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편의에 따라 주 5일 근무할 때건 주 6일 근무할 때건 예배를 걸르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 5일 근무를 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유익된 점이 있고, 그 유익한 점이 위와 같은 우려를 능가한다면 굳이 교회가 주 5일 근무제를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유익된 점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하여 보자. 공무원 시험등 각종 시험을 이제는 토요일에 치르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이제 우리는 주일시험 반대운동을 펼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주일날 시험을 치른다는 이유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험을 거부하는 고통을 안고 산다. 또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 온종일 교회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니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적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는 토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고 주일날 교회에서 헌신할 수 있다는 점도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교회에서 특별집회를 열 경우 평일날 집회를 하기 때문에 낮에 일터에 나가는 사람들은 낮집회에 참석할 수도 없었는데 토요일을 휴일로 하면 이제 금요일 저녁, 토요일 온종일, 주일 온종일 특별집회를 열 수 있을 것이고 이 경우 직장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핑계도 없어질 것이다. 이 점도 유익이 될 수 있다. 주 5일 근무제의 시행은 이제 대세인 것 같다.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장점을 잘 살펴서 긍정적으로 성도들을, 나아가 국민들을 계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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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법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행동 한계

대법원은 지난 7월 13일 시민 단체 등의 공익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의 한계를 정하는 판결(98다51091)을 하나 내렸다. 그 판결 요지는 시민 단체 등의 공익목적수행을 위한 활동은 바람직하고 장려되어야 할 것이나 그러한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이라 하더라도 법령에 의한 제한이나 그러한 활동의 자유에 내재하는 제한을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판결은 곧 비록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시민 단체등의 활동에는 일정한 제한이 있다는 내용인 것이다. 지난 1996년 10월 당시 미국인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이 내한하여 공연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를 반대하던 시민 단체가 내한 공연을 개최한 공연 기획사와 공연입장권 판매 계약을 맺은 은행들에 대해 공연 협력을 중지하지 않으면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대법원은 이 시민 운동을 입장권 판매 대행 계약과 관련한 공연 기획사(원고)의 채권등을 침해한 것으로 위법하며 그 목적에 공공성이 있다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시민 단체들의 활동을 약간 살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마이클 잭슨의 내한 공연을 반대하던 시민 단체들은 위 공연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다수의 시민 단체 회원을 동원하여 문화 체육부 장관실, 문화 체육부 공연 예술과, 한국 관광공사 사장실 및 업계 지원부 국장실, 서울방송 문화 사업부 등을 상대로 위 공연 개최에 대한 항의 전화 걸기를 하고, 주식회사 금강기획과 현대그룹 본사 앞으로 위 회사가 공연 기획사와 위 공연에 공동 주관사로 참여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에 항의하여 위 공연에 대한 후원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면 위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문화 체육부는 조건을 붙여 공연을 허가하였고 시민 단체들은 계속하여 공연 허가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위 공연의 중계가 예상되는 방송사에 대해 항의하고 시청 거부 운동을 벌이겠다는 취지의 서한을 보냈으며, 위와 같이 입장권 판매 대행 계약을 체결한 은행들에 대해 입장권 판매를 즉각 취하할 것을 요청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장권 판매를 계속할 경우 전 국민 차원에서 은행의 전 상품 불매 운동에 들어갈 것이라는 서한을 은행 측에 보냈다. 이와 같은 시민 단체들의 서한을 받은 은행 측에서는 입장권 판매 대행 계약을 취소하였고 공연 기획사는 임시 직원을 직접 고용하는 등으로 입장권을 판매함으로써 공연은 예정 대로 개최되었다. 그리고 공연 이후 기획사는 시민 단체의 위와 같은 행위로 손해를 보았다며 소송을 제기하였다.

원래 이 사건에 대하여 고등법원은 원고 패소의 판결을 내려 시민 단체의 그러한 운동이 위법성을 띠지 않았다고 판결하였다. 즉, 시민 단체들의 이와 같은 행위는 통상 시민 단체가 취할 수 있는 전형적인 운동 방법의 하나로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불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위 각 은행의 의사 결정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침해 당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일반적으로 허용될 수 있으며, 이는 시민 단체의 행위 범위 안에 속하거나 적어도 상대방의 수인 범위 안에 속하므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고등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위 각 은행이 공연 기획사와의 계약을 취소하기로 한 것은 시민 단체들이 보낸 서한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내린 결정이었다기 보다는 독자적인 영업 판단에 따라 선택했다는 것에 근거한다. 즉, 스스로 입장권 판매 대행에 의한 이익과 시민 단체의 불매 운동으로 인한 영업 손실을 비교 교량하여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이를 뒤엎고 위 각 은행이 독자적으로 영업적 판단을 한 것인지 시민 단체로부터 서한을 받고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한 것인지 심리를 더 하라며 고동법원으로 돌려 보낸 것이다.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위 각 은행이 시민 단체가 보낸 서한에 따라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내렸다면 시민 단체의 행위는 위법하다는 판단이다. 생각컨대, 대법원은 각 은행이 시민 단체로부터 불매 운동을 할 것이라는 서한을 받은 후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 같다. 위 각 은행들이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내렸건 자발적으로 내렸던 간에,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공익을 위한 것이라도 시민 단체의 행동에서 위법성이 인정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판결로 말미암아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활동도 상당히 위축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통상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행동은 불매 운동, 시청 거부 운동, 항의 서한 발송, 항의 전화걸기, 항의 이메일 보내기 등 비폭력, 불복종의 방법으로 전개되는 것이 보통이고 이와 같은 행위는 일반적으로 위법하지 않은 행동으로 용인되어 왔다. 기독교인들도 이 정도의 행동은 불의에 대해 항의하는 최소한의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판시한 바와 같이 위와 같은 행동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위법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시민 단체등의 공익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면 건전한 공익 목적 수행의 운동이 위축될 수 밖에는 없다. 하지만 근래에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는 건전한 시민 단체들의 공익 활동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시민 단체들의 활동이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자 악한 의도를 가지고 건전치 못한 시민 단체를 만들어 선량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런 경우까지 그들의 활동을 보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건전한 시민 단체로 보편적으로 평가받은 단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법적인 보장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번 판결로 인해 건전한 시민 단체들의 공익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들이 크게 위축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더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사회 참여의 방법으로 시민 단체에 참여하여 공익적 활동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 판결을 주의 깊게 숙지하여 공익적 활동을 하면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지 아니 하도록 지혜롭게 행동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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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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