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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자, 신념과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몇 안되는 정치인으로 일컬어지는 김근태 씨의 죽음이 많은 이들에게 추모열기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편, 김근태씨의 죽음앞에 눈물흘리면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지금은 목사가 된 이근안 경감입니다. 많은 분들이 고문기술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런 사람이 어떻게 기독교 목사가 되었냐고 황당해 하며 분노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동시에 저는, 기독교인이 되고 목사가 되면서 오히려 이근안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뻔뻔해진 부분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이근안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나쁜놈을 넘어서 상당히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관련자료: 김근태 '예술고문'한 이근안, 지금은 목사?
http://blog.donga.com/sjdhksk/archives/10028


예를 들어 2005년 여주교도소에 면회를 온 김근태씨에게 그는 용서를 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 상임고문은 당시 사죄하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씨를 보고 진정성이 의심돼 차마 “용서한다”고 말하지는 못한 채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6년 11월 복역이 끝나고 출소하면서 이근안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분명한 회개나 진정성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합리화하지는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2008년 이근안은 목사안수를 받고 이후 간증집회를 다니면서 보다 뻔뻔하게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 하는 발언들을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해 한 보수 단체가 주최한 외교 안보 포럼에서 그는 "내가 직접 조사해 간첩 혐의로 형을 받은 범죄자들이 버젓이 국가 기관에 의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돼 한없는 좌절감을 느낀다"며 "나 자신이 한 사람의 피해자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2010년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시대 상황에선 고문이 애국이었다"고 밝히면서,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했고, 김근태씨에 대한 전기고문에 대해서도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 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이라 하며 부인했는데, “두 시간 넘게 말로 겁을 주고 건전지로 찌릿찌릿한 감각만 느끼게 해서 실토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김 상임고문을) 신문해서 단 몇 시간 만에 노동계와 학원에 침투한 조직을 캐내 전원 검거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김근태씨는 1985년 20여일간 8차례의 전기고문과 2차례의 가혹한 물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평생 비염과 축농증을 앓았고 2007년 파킨슨병 진단도 받았습니다. 이근안은 이미 재판을 통해 확인된 고문에 대한 사실마저도 왜곡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의 윤리적 판단은 주변사람들이나 자신의 준거집단의 반응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세리 삭개오의 만남에서 그가 자신의 사회적 악행을 돌아보고 배상을 하겠다고 한 것은 사람들의 ‘수군거림’ 이후였죠. 저는 이근안이 이렇게 대담해 진 것에는, 그가 분명한 사회적 회개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목사안수를 준 교단의 책임이 있고, 또한 주변에서 그의 행위를 ‘간첩과 좌파를 때려잡은 애국 행동’으로 합리화 해준 기독교인들의 영향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무고한 민주인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 이근안의 죄 보다, 더 무서운 죄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신학대학원 졸업을 앞둔 이 씨에게 대학 총장은 목사 임직을 시켜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고, 신학교 내부적으로 토론을 벌여서 “목사 임직 허가였지만 정치 활동을 안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하며, 이 씨 스스로도 교정선교회 활동에만 충실할 것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근안 아니라 그보다 더한 죄인도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고, 목사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혁명성이죠. 그러나 그 전에 분명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기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에게는 사죄하고 할 수 있는대로 배상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회개이며, 교회는 이것을 가르치고 점검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정치 활동을 안하는 조건을 달았다고 하는데, 문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분명한 회개 – 개인적 회개 뿐 아니라 사회적 회개- 를 하지 않은 이근안에게 목사안수를 주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선언(즉, 기독교는 사회정의에 전혀 관심이 없고 독재정권하의 고문행위를 죄로 보지 않는다는)이라는 것이고, 이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하는 이근안의 발언들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종을 키워낸다는 신학교와 교단에서 이런 사회적 상식조차 없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근안은 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측 총회신학교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옥중에서 밟았고, 현재 예장 합동개혁(총회장 정서영 목사) 소속 목회자, 그리고 한국교정선교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화된 복음의 문제와 사회적 차원의 결여, 그리고 그 결과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기독교의 회개와 복음을 개인의 윤리적 차원, 그리고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만으로 축소시킨 현재 보수기독교의 신학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원죄사건을 보면 죄의 결과는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아담과 하와),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아담과 땅) 모두를 파괴시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 하나님 과의 관계 차원 뿐 아니라, 인간관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 모두에서 회개와 회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온전한 용서와 회개에 관해, 김영봉 목사(워싱턴한인교회)는 다음과 같이 설교한 바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성서를 바탕으로 가르쳐온 용서는 그렇게 값싼 것도 아니고,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온전한 용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회개의 3R(Three R’s of Repentance)이라고 부르는데, 첫째가 Repentance(회개), 둘째가 Restitution(보상), 그리고 셋째가 Reformation(개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repentance이며, 자신이 끼친 잘못에 대해 어떻게든 보상하는 것이 restitution이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고치는 것이 reformation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온전한 회개입니다."

 
영화 ‘밀양’은 이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주인공 신애는 자신의 아이를 유괴해서 죽인 범인이 옥중에서 예수를 믿고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며 환하게 웃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 밀양과 몰트만의 강의를 다룬 글을 하나 추천합니다. 특히 첨부된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에 대한 몰트만의 강연내용은 꼭 읽어볼 만 합니다.

박치현, 영화 <밀양>의 질문에 세계적 신학자는 뭐라고 대답할까?
http://blog.daum.net/ursangelus/8484652

중요한 것은 4영리식의 단순화된 복음은 개인적 차원의 영적 회개만으로 가해자에게 쉽게 면죄부를 주고,피해자에게 너도 똑같은 죄인이니 아무말 하지 말아라 하면서 정의의 회복을 무시한다는 것이죠.

한번은 미국 TV에서 살인죄로 복역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한 죄수의 인터뷰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다른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그는, 성경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한다 하면서,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죄나, 평소에 거짓말 하는 일반인들의 죄나 다르지 않다고, 아주 대담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일견 복음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만일 거짓말 한 사람이 회개하면서 내 죄가 살인죄나 다르지 않다고 하면 이해가 가지만, 살인한 사람이 내 죄가 거짓말한 사람의 죄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이건 미친소리이기 때문이지요.
최근에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여성성희롱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강용석 의원을 변호하면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이 말이 감동을 주기는 커녕 코메디 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시대 가장 낮은 성매매 여성을 불쌍히 여겨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힘과 권력을 가진 국회의원의 성희롱을 무마하자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이지요. "이 정도 일로 제명한다면 우리 중에 남아있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라는 말도 했다는데, 이는 마치, 우리 정치인들이 다 썩은걸 몰랐냐, 이정도 일로 왜 놀라고 그러냐라는 윤리의식의 실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단순화 된 왜곡된 복음은 죄에 대한 깊은 회개가 아닌, 오히려 뻔뻔함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단순화된 신학 뿐 아니라 역시 역사의 무게가 실려 있는데, 일제시대 신사참배의 죄와 군사독재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했던 보수교회의 죄를 감추고 합리화 하기 위해,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거세해 버린 교회의 역사가 그 뿌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가르치는 회개나 구원은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의 보다는, 중세시대 면죄부에 훨씬 가까운 것이죠.

중세시대 면죄부가 교회가 윤리적 경제적 권력을 갖기 위해 남발 된 것처럼, 이러한 값싼 용서가 보편화 된 것은, 권력에 밀착하려던 보수교회의 욕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것처럼 교회 자체가 신사참배와 군사독재협력의 죄가 있어서 뒤가 구릴 뿐더러, 교회가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이들을 흡수함으로서 영향력을 갖고 싶어 했던 것이죠. 동시에 권력을 잡고 있는 친일파와 군사독재세력은, 보수교회가 제공하는 종교적 장치를 통해 세상의 부귀영화 뿐 아니라, 양심의 가책으로부터의 자유, 집사 장로등으로 상징되는 종교적 권위, 그리고 내세의 구원까지 누리게 되어 양자의 필요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 이지만 한홍구 교수의 글에 따르면 이근안의 고문기술은 일제시대 악질 경찰로, 독립군을 고문했던 노덕술에게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다음 글 참고.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http://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1/05/021075000200105220360052.html )

결국 왜곡된 신학과 사회적 죄들은 상호작용하며, 정의를 배신한 자들이 교회안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이제는 교회의 주류가 된 것이죠. 그리고 이들이 가진 ‘친미반공 자본주의 정신’이 예수의 복음을 대체해 보수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와 원리가 되어버립니다. 이른바 '고소영 강부자’의 종교가 되어 버린 '기득교’의 탄생입니다.

 
물론 ‘친미반공 자본주의’가 반드시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반미용공 반자본주의’가 좋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세상의 다양한 현상들을 이 두가지로 재단할 수 있다고 보는 그 '단순무식성', 그리고 친미반공자본주의로 판단되는 것은 무조건 옳다고 우기고, 반대로 반미용공반자본주의라고 낙인 찍은 것은 무조건 악으로 몰아세울 수 있는 '마녀사냥적 태도'가 엄청난 문제를 야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미국에서 살고 있는 교포 몇분과 대화를 한 적 있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는 교회 장로, 집사님들이었고, 인품도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뜸,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은 빨갱이다'라는 무지막지한 말을 하셔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보시냐 했더니 복지예산을 펑펑 써서 나라가 망할 거라는 거였습니다. OECD 30개국가중 복지예산이 거의 최하위를 달리는 대한민국인데, 복지예산을 올려서 나라가 망한다는 얘기도 황당할 뿐더러, 서울시민 다수가 뽑은 시장을 너무나 쉽게 빨갱이라고 하는 발언도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는 곧 망해아 맞겠죠. 한미FTA반대나 촛불시위도 무조건 빨갱이라고 해서, 여쭤보니, 반미, 반자본주의기 때문이랍니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도 ISD 문제 등, 현재 진행되는 한미FTA는 문제가 많다고 하고, 국익 차원에서도 득보다 실이 많다는 비판이 있는데, 반대의견을 단순히 '빨갱이'라고 매도할 수 있다는 그 ‘사고 프레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친미반공 자본주의로 판단 되는 것은 무조건 선이요 아닌 것은 악이라는 단세포적 사고가 아무런 문제 없이 표출될 수 있는 것이 보수기독교인들의 논리라는 것이지요. 이런 얘기를 밖에서 하면 단순 무식하다는 얘기를 들을텐데, 보수 교회안에서 얘기하면 놀랍게도 '아멘'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근안이 연결되는 지점도 이것입니다. 이근안의 행위는,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간첩으로 지목된 무고한 사람들을 불법으로 고문한, 기본적 민주주의와 인권을 무시한 악행이라는 '상식' 보다도, 간첩이나 좌파를 때려잡기 위해서는 그정도도 괜찮다는 친미반공 자본주의의 프레임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그의 행위는 ‘애국’이 되며 국민들의 비난으로 가졌던 약간의 반성이나 수치심 마저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보수기독교의 프레임이 이근안에게 뻔뻔함과 용기를 주는 것이죠.

잘 아시다 시피, 이러한 프레임은 미국내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에도 유사하게 작용합니다. 무식한 발언들로 웃음거리가 된 사라 페일린을 하나님이 이 시대의 에스더로 세웠다는 예언이나, 오바마는 이슬람교도 혹은 사회주의자이고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근거나 상식이 무시된 주장들이 아주 잘 통하는 것이 미국의 근본주의 보수기독교이지요.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이나 언론(한국으로 치면 한나라당과 조중동, 미국은 공화당이나 티파티, 폭스뉴스 등)도 이렇게 단순무식한 논리를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물론 생각은 다르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논리를 만들어서 사용하지요. 하지만 보수 기독교가 보이는 이러한 단순무식한 입장은, 보수 정치세력과 보수 언론에 가장 큰 지지와 동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 세력의 특징이 바로 인간의 삶과 사회적 현상의 복잡성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주 조악한 신학적, 사회적 프레임을 가지고서 타인의 삶과 사회를 판단하려 들고, 나는 답과 진리를 알고 있다라는 태도로 접근하기에 세상의 조롱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역시 충격적이면서 상징적인 사건 하나가 2010년 한국에선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6월 22일 개최된 평화 기도회에 간증 강사로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부시'를 초청한 사건입니다. 이라크 전쟁은 그 명분이 되었던 대량살상무기와 테러조직과의 연계성은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것 외에는 그 결과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미군과 다른 연합군에서 사망자가 7500명 이상 발생했고, 최근 참전 미군들 중 전쟁후유증으로 많을 때는 하루에 18명씩 자살 한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이라크 측에서는 자그만치 백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통계가 있고 180만명 이상이 난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충분한 증거도 없이 그러한 전쟁을 밀어붙여 이러한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부시를 평화기도회에 주 강사로 초대한 것은, 개인적으로 마치 한편의 '거대한 부조리극', 혹은 슬픈 코메디를 보는 듯 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러 갔던 기독청년들은 "당신의 평화에는 너무 많은 피가 흘러"라는 팻말을 들고 갔는데,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평화라는 것이 내가 십자가를 져서 화해와 용서를 가져오는 예수의 평화가 아닌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희생자를 만들어 유지되는 로마의 평화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스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again Christian)이라고 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우리의 회개에 대한 관점도 잘 보여주고, 또한 친미반공 자본주의의 틀로 얼마나 세상을 단순하게 보는지도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생으로서, 그리고 미국에서 6년정도 체류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안타깝게도, 사회에서 가장 지적 수준이 떨어지고, 정치적 사회적 분별력이 가장 낮은 집단이, 바로 한국과 미국의 근본주의 보수기독교인들이라는 점입니다. 보수 기독교의 사회적 죄악을 합리화 하고, 또 교회 안에서 목사의 절대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우민화 정책의 결과, 이것이 이제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무지와 독단의 사회적 동력'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결국 상식을 가진 일반인들이 볼 때, 말도 안통하는 기괴한 집단, 즉 “괴독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선배는, 최근 페이스북에서 이근안과 관련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그 책에서 아렌트는 2차 대전중 유태인 학살주범으로 1962년에 처형된 아돌프 아이히만이 알고 보니, 개인적으로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악의 일상성’을 설명하는데, 개인의 도덕만을 다루고 사회적 분별력이 없는 인물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지적해 주었습니다.

비슷한 인물로 박정희 시대에 '차지철'이라는 사람은 아시다시피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 충성을 다했는데, 그는 개인적으로 교회 집사였고,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아서 자신이 충성해 마지 않는 박정희가 주는 술도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술 마시지 말라는 기독교의 개인윤리에 충실한 사람이 독재정권의 오른팔 노릇을 하다가 총맞아 죽었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전두환의 오른팔이었던 '장세동'이라는 인물은 청문회때 자신의 가방에 늘 성경을 가지고 다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고 교도소에 있을 때도 교도관이 감동할 정도로 매일 성경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광주 학살의 주범중 하나였고, 박종철 사망사건, 그리고 한 가족을 억울하게 파멸시킨 수지김 간첩 조작사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목사가 된 이근안 경감이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교회 장로인 ‘그분’까지, 결국 이들은 권력과 결탁하고 복음을 왜곡시킨 보수교회가 낳은 '괴물'들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 그리고 기본적인 사회 정의에 대한 의식도 없는 집단으로 이해 받는 보수 기독교는 이제 ‘개독교’로 불리웁니다.


결국 오늘의 문제는 보수 교회가 사회참여에 관심이 없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리고, 빛과 소금으로서 사회의 어둠과 악을 정화하는 역할을 못한다는 문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일부 근본주의 보수 교회들이 뿜어내는 오염이 사회를 심각하게 어지럽히는 수준이 된 것입니다. 저의 지적이 과하다고 생각하시거나 불편하신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현실은 이런 제 표현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입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보수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프레임인 ‘단순화된 복음’과, '친미반공 자본주의'를 금과옥조로 하여 세상을 마녀사냥하는 정치적 프레임’을 깨고 나가지 않으면 기독교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 보수기독교회의 행보가 언제나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길을 고민하고 사회의 개혁과 정의를 바라는 교회들 모두가 싸잡아서 “개독교, 괴독교, 기득교”로 치부되고 있고, 이러다가는 역사와 국민들로부터 버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선한영향력을 소망했기에 우리가 잘하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었다면, 이제는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가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역시 동일하게 우리만 잘해도 세상이 바뀔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적이었고 원칙을 지키려던 또 한명의 바보정치인 김근태의 죽음과,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 경감의 뻔뻔함을 보면서, 오늘의 교회를 다시한번 고민해 봅니다.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웬만한 분들은 한번 쯤 생각해 보았을 부분이지만, 답답한 마음에 2011년이 저물어가는 이시간에 긴 글을 남겨 봅니다.
2012년은 새로운 희망의 해,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받으시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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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제경 2012/01/01 23:20  Addr Edit/Del Reply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이근안 세 글자만 생각하면 분노에 휩싸입니다.
    한나아렌트의 '악의 일상성' 논의는 며칠 전 제가 트윗에 올린 글인데...흠...

  2.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글을 시작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몇달동안 업데이트를 못했습니다. 내용은 머리속에 있는데 자료가 많고 글이 무한정 길어지다 보니 마무리를 못하고 있네요. 조만간에 글을 올리겠 습니다. 대신 최근에 쓴 두개의 글을 올립니다. 이 게시판은 국제정치에 대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적인 사회관에 대한 고민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서 올려봅니다만, 다소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최근에  페이스북에 올린 김동호 목사님의 ‘나는꼼수다’비판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못 보신분들도 있겠지만 이 글은 기독인들 안에 상당한 논란을 가져왔는데, 저도 김동호 목사님의 글을 읽고 나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인엽] 나꼼수 열풍과 기독교

먼저 이 글은 나는 꼼수다(나꼼수)에 대한 분석을 목적으로 하는 글은 아닙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나꼼수 비판글을 본것이 이 글을 쓰게된 계기였지만, 나꼼수를 반드시 옹호해야 겠다거나 김동호 목사님을 비판하고 싶은 의도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인들의 태도나 신학에 대해, 몇가지 생각을 던져보자고 한다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김동호 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대학시절 기연사역(대학 기독인 연합)에 참여했을때, 김 목사님이 상당한 지원과 관심을 보이셨던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고, 최근 기독인들안에서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청어람이 현재와 같이 자리를 잡는데도 김목사님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교회 개혁에 애를 쓰시기도 했고, 높은 뜻 숭의 교회를 분립하신 것만 봐도 김 목사님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목사님중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의 ‘청부론’이나 나꼼수에 대한 이번 글에서 보듯이 ‘현재의’ 김 목사님이 보이시는 사회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글을 한번 소개해 봅니다.

김동호

‎1. 요즘 '나는 꼼수다'가 대세인 것 같다.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2. 우리 아들 놈도 팬인지 내 아이패드에 '나는 꼼수다'를 심어(?) 놓았다. 나도 보고 세상과 소통하라는 뜻인가보다.
 
3. 그러나 나는 '나는 꼼수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말, 내 페이스 북 친구 절반 이상 잃어버릴 각오하고 하는 말이다.
...
4. 나는 왜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나는 꼼수다'에 열광하는지 안다.
 
5. '나는 꼼수다'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옳다고는 생각하지만 감히 용기가 없어서 혹은 게을러서 뒤에서만 숨어 울분을 토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용감하게 대놓고 그것도 아주 속시원하게 해대고 있기 때문이다.
 
6. 오늘 새벽 일찍 잠이 깨어 페이스 북을 보다가 어느 페이스 북 친구들의 글을 통하여 최근 '나는 꼼수다' 방송을 들었다. 오늘 아침에 구속되는 정 아무개 전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짧은 방송이었다.
 
7.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그 방송에 있었다. 그것은 빈정거림이었다.

8. '나는 꼼수다'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진실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파헤치려고 하는 거칫에 대하여 개인적인 입장이지만 대부분 동의한다.
 
9. '나는 꼼수다'가 이야기하는 것과 주장이 다 옳다고하여도그것을 그런식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 내가 오늘 처음 들은 '나는 꼼수다' 방송은 '이 나쁜 새끼들아'로 끝을 맺었다.
 
10. 나는 개인적으로 정 아무개씨가 용기있게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다가 감옥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
 
11. 아무리 화가나고 분통이 터져도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저들이 가두고 싶어하는 거짓만큼이나 옳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저들은 모르는 것 같다.
 
12. '나는 꼼수다'는 악을 악으로 이기려고 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는데 말이다.
 
13.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7절에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여 주신다.
 
14.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15. 빈정거림과 욕은 이에서 지난 것이다. 옳지 않은 것이다. 좋지 않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악한 것이다.
 
16. 옳지 않은 것으로 옳지 않음을 지적하고, 나쁜 것으로 나쁜 것을 판단하고, 악한 것으로 악한 것을 고발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17. 나는 '나는 꼼수다'가 세상을 또 다른 모습으로 병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8. 오늘 한 번 죽어보자.


간단히 요약하면 김목사님의 글은 ‘나꼼수가 왜 그러는지는 대략 알겠지만, 나꼼수의 말에서 나오는 빈정거림과 욕은 세상을 병들게 하는 또 하나의 악이다’라는 주장인것 같습니다. 사실 나꼼수를 많이 들으셨거나 깊은 고민끝에 나온 글은 아닌것 같고, ‘페북 친구 반을 잃을수도 있다’거나 ‘한번 죽어보자’ 하실 정도의 사안은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김 목사님의 이 글은 짧지만 기독교인들안에 있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태도의 문제’와 ‘신학의 문제’라 하겠고, 이 두가지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먼저 태도의 문제.
우리 한국의 기독인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저항, 비판, 문제제기’는 곧 비기독교적이라는 태도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특히 기성세대로 올라갈 수록, 데모, 촛불시위, 노조, 전교조, 그리고 최근의 나꼼수처럼, 무언가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은 곧 나쁜 것이라는 강한 선입견이 있지요. 반대로, 바람직한 기독교인 상은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고 인내하며 불손하지 않은 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온누리교회에 오래 다녔던 친구에 따르면, 고 하용조 목사님이 무척 자주 하신 말씀이 ‘비판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십시오’ 였다고 합니다.

결국, 무엇에 저항하는가 그리고 왜 저항하는가를 묻지도 않은채, 저항적인 태도만 보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것이 기독인들인 것 같고, 이는 신학적 이념적 차원을 넘어 일종의 ‘기질’로 굳어진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 어떤 신학적 입장 보다도 무서운 것은, TV보고 밥먹으면서 던지는 부모님(주로 장로님 혹은 권사님이신)의 한마디, 그리고 매주 설교를 통해 나오는 목사님의 직간접적 사회적 발언들을 통해, 수십년간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체화되어 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교회안에서 벌어지는 모순이나 비리를 볼 때, 그리고 명백한 사회적인 악을 보고 한마디 하고 싶을 때에도, 우리안에 잠재된 이러한 태도는, 순간적으로 우리의 목을 조르며 자문하게 만듭니다. 이런 비판이 혹 비신앙적 비기독교적인 태도는 아닐까 뭐 이런식의. 저는 김동호 목사님의 글에서도, 그러한 비판적 태도(욕이나 빈정거림으로 표현된)에 대한 알레르기를 느꼈습니다.


두번째로 신학의 문제.
얼마전 MB의 내곡동 의혹이 불거진 후, 나꼼수의 김용민 교수가 찬송가를 패러디해 ‘내곡동 가까이’로 개사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 때 ‘한국교회언론회’라는데서 이를 ‘종교모독’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 간절한 신앙고백을 담아 부르는 찬송가를 잡담거리로 삼아 기독교인 전체를 모독했다는 것이죠. 이 역시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보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에 분노하는가’가 우리의 가치와 신학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판단은 나꼼수가 분노하는 시대악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꼼수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저는 여기서 나꼼수의 태도에 대한 김목사님의 민감함 보다, 나꼼수가 지적하는 사회 악에 대한 무감각, 혹은 무관심을 봅니다. 즉, 나꼼수가 지적해 온, 디도스 공격, 내곡동 사건, BBK 사건, 장자연 사건, 삼성의 문제, FTA 문제, 저축은행 사건, 맥쿼리 의혹과 론스타 먹튀 문제, 인천공항 매각 문제 등등 수없는 비리 의혹과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가졌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이해했다면, 이런 말을 꺼내기는 상당히 어렵지 않았나 싶은 것이지요.

예를 들어 나꼼수의 김어준 총수가 처음 제기한 선관위 홈피와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 후보 홈피에 대한 디도스 공격 의혹은 이미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의 비서관과 박희태 국회의장 비서관이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개입의혹이더 윗선으로 올라가는 상황입니다. 집권 여당이 선거 조작을 위해 선관위홈피를 공격한 초유의 사건이 되는 것이지요. 내곡동 땅 문제도 역시 나꼼수의 주진우 기자가 처음 터뜨렸는데,  부동산 실명제 혹은 편법증여 혐의가 짙고 대통령의 직접 개입에 대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봉주 전 의원은 BBK 저격수로 불릴 정도로, 당시 이명박 후보의 BBK 관련 의혹을 폭로해 왔고, 그로 인해 최근 구속까지 되었지요. 중요한 것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선후보도 경선시에 거의 유사한 폭로를 했었고 그에 대한 동영상이 요즘 인터넷에 자주 올라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안만으로도 메가톤급인 비리들이 연달아 확인되면서, 집권여당이 스스로 재창당 수준의 변화가 없으면 다음 대선에 희망이 없다고 할 정도의 상황이 된 것이죠.   

현재 한국의 언론의 자유가 상당히 제약된 상황에서 (국경없는 기자회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를 노무현 정부시기의 31위에서 69위로 강등했고, 미국의 보수인권단체인 프리덤 하우스 마저도 2011년 한국을 언론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강등했는데, 그 이유를 검열 및 언론매체의 뉴스와 정보콘텐츠에 대한 정부 영향력의 개입 확대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나꼼수가 우리 사회의 비리나 의혹을 폭로해 왔고, 그 상당부분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나꼼수의 태도나 스타일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서 이렇게 나꼼수의 말투만을 가지고 나꼼수를 사회악으로 까지 평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완벽할 수 없겠고, 상황의 경중을 가려 상대적인 최선을 찾아가야할 경우가 많습니다. 김용민 교수를 빼고는 이 사람들이 기독교인들도 아닌데, 거의 자기 목숨을 걸고 누구도 하지 못한 비리를 폭로하는 사람들에게, 말투가 불손하다고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적 맥락을 제대로 읽지 못한것은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반응처럼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적 가치는 개인윤리 수준, 개인전도와 선교의 차원을 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상정하는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들이 모여있는 조직 교회와 동일 시 되는 것은 아닌가 싶구요. 만약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억울하게 욕을 먹는다던가, 어느 나라에서 전도와 선교가 금지되거나 교회와 선교사가 핍박을 받았다면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분개했을 것입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이나 북한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김목사님이 사회악이라고 칭한 ‘나꼼수의 욕이나 빈정거림’을 훨씬 넘어서지 않습니까?


젊은 기독교인들 중에는 장로 대통령이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보다, 한반도를 대결 정책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리 강산을 잘 관리하기는 보다, 소수의 측근 수혜자들을 위해 4대강이라는 사업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기 보다, 고소영, 강부자라 불리는 기득권측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지는 않는가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수 교회나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이에 대해 비판하거나 적어도 고민한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곡동 사건만해도 편법증여, 혹은 부동산실명제 위반이 거의 확실시 되는데 여기에는 반응이 없다가, 그것을 풍자하기 위해 찬송가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분연히 일어서는 사실은, 이 시대의 보수 기독교가 과연 무엇에 분노하는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는 것이지요. 즉, 기독교의 명성이나 권익이 침해될 때 보이는 분노에 비해, 사회적 악이나 부정의, 그리고 약자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3:23-24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위선자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 가운데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저버렸다. 그러나 십일조도 바치고 이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


엄밀히 말하면 오늘의 기독교는 아합왕과 이세벨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빼앗긴 나봇의 가족에게, 너의 태도가 왜 불온하냐고,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인데 왜 공손하지 못하냐고 묻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사회정의의 측면이 제거되고, 기득권을 가진자에게 복무하는 기독교가 된 것은 아니냐는 질문이지요. 아마 오늘 세리 삭개오가 교회에 온다면,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손실을 끼친 자에게 배상할 필요 없이, 그냥 혼자 영접기도 한번 하고, 하나님이 나를 용서했다 선포한 후, 목사한테 잘 모이고 십일조 잘 내서, 교회 장로가 되지는 않을까 싶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군사독재의 하수인으로 김근태를 고문했던 이근안이 제대로 된 회개는 커녕, 자신을 합리화 하며 목사가 되게 해주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지적하듯, 여기에는 역사의 무게가 있습니다. 일제의 제국주의에 복무하고 신사참배한 교회의 죄, 그에 이어 군사독재정부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한 죄, 그리고 6.25와 분단의 경험과 월남한 신도들이 주도해서 이끌어 온, '친미반공 자본주의'를 금과옥조로 믿는 한국교회. 진보와 보수의 갈등과 분열, 교권투쟁, 교단 분열.

결국 사회적으로는 친일과 군부독재 지지의 역사를 합리화 하거나 감추기 위해 국가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쳐 왔고, 교회 안에서의 교권과 목회자들의 편리를 위해 순종만을 가르쳐 온것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기질’을 만들어 닌 것은 아닌가, 그리고 반공친미 자본주의 이념이 기독교의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보수기독교와 진보기독교가 분열하면서, 아예 사회정의라는 부분은 잘라내어 버리고, 개인경건과 복음전도만을 가르치고, 그러한 프레임으로 성경을 보고 해석하고 설교한 결과가 오늘의 기독교가 아닌가 질문하게 됩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멘토는 한경직 목사님으로 알고 있는데, 훌륭한 일도 정말 많이 하셨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시기와 군부독재시기 그분이 보이신 행보는, 현재 기독교의 모습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적 권위와 사회적 권위는 필요하고 존중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와 정의에 위배 될 때는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 하는 것도 기독인이어야 하겠죠. 침묵은 마치 중립처럼 느껴지지만 악이 횡횡하는데 침묵하는 것은 사실 간접적인 지지와 묵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보수 기독인들은 저항 하면 바로 폭력혁명 같은 것을 떠올리는데, 마틴루터 킹 목사가 발전시킨 비폭력 저항이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실천방식이자 기독교의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약자에게는 자비로우셨지만, 불의한 강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을만큼 혹독하셨습니다. 풍자와 욕이 나쁘다면 우리는 “독사의 자식들아(우리말로 가장 가까운 표현은 아시다시피, “이 개자식들아”겠지요)”라고 하신 예수님 부터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 권위, 사회적 권위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면, 예수님은처음에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했던 바리새인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못견딜 정도로 몰아세울 필요도 없었고,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한 헤롯이나 빌라도를 그렇게 냉정하게 무시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의 친구였던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헤롯, 빌라도와 친구가 되시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곧 그들의 죄를 못본척 하는 것이 되는데요.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빈부귀천을 떠나 모든 죄인을 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는 세리와 창녀를 안아주셨죠. 그러나 회개하지도 않는데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죄를 못본척하고 무마해주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는 과연 누구의 친구입니까?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일에 우리도 분노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죄 뿐 아니라 사회의 죄에 대해서도 잘못 된것은 잘못됬다고 이야기 해야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분노가 무엇을 향하는가를 알아야 하겠지요. 대학시절 사회참여나 하나님나라에 대한 궁금증으로, 그리고 당시 이슈가 되었던 ‘부흥’에 대한 고민으로, 도서관에서 이사야 서를 읽던중에 만난 하나님은, 개인의 도덕적 타락과 종교적 타락 뿐 아니라, 사회적 악과 약자에 대한 억압에 처절하게 분노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교회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세계 열방의 하나님이셨고,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정의의 하나님이셨지요. 정말 하나님이 이런분이셨을까 싶을 정도로, 폭포수와 같은 그 말씀속에 보여진 정의의 하나님은, 그동안 교회에서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다음의 몇 구절만 살펴보아도, 하나님의 분노를 오늘 우리시대의 정의의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1:23-24
너의 지도자들은 주님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이사야 3:14-15
주님께서 백성의 장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을 세워 놓고, 재판을 시작하신다. "나의 포도원을 망쳐 놓은 자들이 바로 너희다.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해서, 너희 집을 가득 채웠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의 백성을 짓밟으며, 어찌하여 너희는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마치 맷돌질하듯 짓뭉갰느냐?" 만군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말씀이다.

아모스 2장 6-8절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인 선지자를 통해 대언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자신의 분노를 공유하는 자를 통해 말씀을 주신 것이고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또한 선지자들이 구약시대에 이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것이 때로는 왕과 권세자들을 비판하는 것이었고, 잘 아시는 대로 모든 거짓선지자들이 나라의 평안과 번영을 말할때 기득권층의 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예레미야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웅덩이로 집어 던져집니다(렘38). 그리고 역시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를 외쳤던 선지자 이사야는 악한 왕 므낫세에 의해 톱에 켜 죽음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고 믿는, 그리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 마저 비난하는 이상한 기독교를 봅니다.

우리는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잘 안읽기도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를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무게가 실려있는, 개인구원의 차원에만 집중하고 복음의 사회적 차원이 거세된 ‘구시대적 프레임’으로 성경을 듣고 보고 가르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정의에 민감하신 분이신가도 모르고, 정의가 어긋나도 이것이 우리가 마음아파 해야 할 문제인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다행인 것은, 점점 더 이러한 프레임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독인들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머리가 있고 가슴이 있는 자들은, 이 시대의 악독한 현실을 보고, 또한 그것을 개혁하기보다 기득권세력에 영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수 기독교를 보면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저에게 있어서의 변화는, 성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게 된 것, 그리고 좋은 선배들의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존의 프레임을 깨고 나가서 새롭게 성경을 보고 교회와 사회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를 냈던 선배들. 만일 그분들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모르거나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만해도 교회안에서는 사회참여나 사회 정의에  관심갖는 사람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영성과 사회성, 신앙과 삶 모두에서 신뢰를 주었던 선배들이 용기있게 구시대적 프레임을 깨고 나간 것이, 저에게도 용기를 주었고 또 저 스스로도 새롭게 성경을 읽고 고민하고 글을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페이스북 같은 SNS가 좋은 것은 물리적 거리를 넘어 소통과 상호작용을 원활하게 해준다는 점이지요.이런저런 말이 길어졌지만, 많은 이들이 김동호 목사님의 글에 반응을 했고, 김목사님도 그것을 잘 이해했다고 표현하셔서 보기가 좋았습니다. 이러한 토론이 김동호 목사님께도 더욱 개혁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해봅니다.

나침판은 그 침이 움직일 때에만 정확히 북쪽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지만, 세상은 계속해서 변하고 우리의 당면 과제와 시대악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구시대적인 태도와 신학을 깨고 나가지 못하는 기독교는 개혁의 원천이 아닌 개혁의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목사님은 나꼼수 현상을, 고통받는 약자를 위해 권력자에게 정의를 외쳐야 할 교회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자 "돌들이 소리지르는" 현상으로 설명하셨는데 참 공감이 갑니다.
나꼼수는 MB 정부와 관련된 의혹과 비리에 집중해왔고 2012년에 정권이 바뀔때까지만 방송을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는 나꼼수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정권이 바뀐다고 천국이 오지 않을거라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김동호 목사님은 나꼼수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있고 (즉 사람들이 무서워서 말하지 못하는 권력자의 비리를 용감하게 폭로하고 있고), 정봉주 전 의원이 용기있게 진실을 파헤치다가 구속된 거라는 점은 인정하셨죠.
그런데 많은 기독인들은 지금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잘 모르는건 아닌가, 권력자가 힘을 남용하고 약자들이 고통받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그분의 마음을 근심케하는 거라는 것에 대해 인식은 있는건가 궁금할때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꼼수의 김어준이 한 “쫄지마!”라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스 북 상에서 어떤 분은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 “내니 두려워 말라”를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깊이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모두가 두려워 하던 악독한 권력자들에게 목숨 내놓고 “이 개자식들아”라고 정면 대결을 하셨고,
하나님 나라는 ‘정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이들의 것’이라고, 오늘도 우리를 독려하십니다.
그분의 뒤에서 떨고 있는 우리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쫄지 말아라”라고 용기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 시대의 악과 목숨까지 바쳐 싸워야 할, 그리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죽어도 산다는 예수의 ‘부활 신앙’을 가진 자들,
어둠이 짙어오는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의 ‘최종 승리’를 믿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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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leb 2012/01/01 22:43  Addr Edit/Del Reply

    먼저 묻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정의의 기준이 성경입니까 상식입니까? 나꼼수가 비판입니까 비난입니까? 님의 글에서 김동호 목사님이라는 분의 논리에 대해 성경적인 반박은 찾기 힘듭니다. 그리고 성경은, 옳고 그름을 판단함을 넘어 남을 비난하고 인격을 모독하는 것에 대을 분명히 금하고 있습니다.
    태도의 문제를 논하셨죠. 그럼 묻겠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라는 분이 하신 말씀이 성경적입니까 비성경적입니까?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정확하게 성경적인 말을, 그것도 목사가 강대상에서 한 것이 왜 문제입니까? 기독교인을, 혹은 목사를 비판하시려면, 그들이 어떻게 성경을 거스르는 것을 믿거나 가르치는지를 비판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님이 인용하신 이사야서는, 저도 동일한 시각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어디에서도 그러한 불의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저항해야 될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가이드라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저질러진 모든 악에 대해 당신께서 직접 갚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묻고 싶습니다. 나꼼수를 들으며 맞장구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대한민국의 정부를 위해, 예레미야가 그랬듯이,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목숨을 걸고 기도할까요?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리더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입니다.

    • Won 2012/01/23 22:44  Addr Edit/Del

      The way I see it is that, not only the Korean politics, but the organizations who call themselves `churches' are unable to reflect on themselves to correct the corruptions. They have become pigs of greeds. If you ask me `on what basis do you say such things?', then I would say 'it doesn't require to justify my basis', because the corruptions are more or less consequential facts. BUT, THE CHURCHES AND PASTORS ARE REFUSING TO ACCEPT THE FACT BECAUSE THE CHURCH GOERS ARE THEIR PIGGY BAGS.

  2. 이제경 2012/01/01 23:13  Addr Edit/Del Reply

    위에 Caleb이란 형제님 참 어이가 없군요. 현재 한국교회의 암적인 존재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목숨을 걸고' 기도하고 있나요? 리더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니요? 권력은 국민에게 있는 것인데, 부패하디 부패한 지도자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요?
    김동호 목사가 잘못한 것은, 여전히 자신은 '선'이라는 테두리에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그런 때에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올 한 해 선으로 악을 이긴 사람은 300여일만에 고공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씨라고 생각합니다. 값싼 은혜, 값싼 도덕으로 같은 기독교인까지 욕먹게 하지 마세요.

  3. P 2012/01/01 23:41  Addr Edit/Del Reply

    위에 분이 더 어이가 없네요 영업방해하면서 고공크레인에 올라간게 선으로 악을 이긴거라고요? 나꼼수가 한 말은 다 맞나요? 그러면 희망버스가 한 짓은 잘한거나요? 동네 사람들 피해 줘가면서 한게 선으로 악을 이긴거나요? 한국 보수도 문제지만 진보도 거기서 거기네요 누가 누굴 판단하고 누가 더 의롭고 선하고 할 수 있나요?

  4. Caleb님,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하신 질문에 제가 질문을 하고 싶네요.
    저는 성경과 상식이 둘다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인들은 상식적이면 안됍니까? 이건 질문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군요.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이지 않으니 잘못됐다고 하고 싶으신 건가요?
    또 비판과 비난의 뜻을 확실히 아십니까?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비판: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힘.
    비난: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
    인데, 나꼼수는 비판이라고 느껴지네요.
    여기서 나꼼수가 비난이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나꼼수의 존재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김동호 목사님이라는 분" 이나 "하용조 목사님이라는 분" 이런 말을 사용하셨다면,
    높은뜻 숭의 교회의 김동호 목사님과 온누리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을 전혀 모르신다는 뜻인가요?
    그럼,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이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했다는건 어떻게 아셨나요?
    제가 성경에 무지해서 그러는데, 혹시 성경을 모두 외우고 있다면 당연히 알 수 있는 건가요?
    또, 원글에는 깅동호 목사님의 논리에 대한 성격적이 반박이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잘 모르시겠다면, 난독증이 있으시거나 대충 읽으신게 아닐까 싶네요.
    다시, 제가 성경을 다 외우지 못해서 그러는데,
    성경의 어느 부분이 "옳고 그름을 판단함을 넘어 남을 비난하고 인격을 모독하는 것에 대을(?) 분명히 금하고 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이부분은 나꼼수랑 그닥 연관이 없다고 "저에게는" 느껴지는 부분이군요.
    혹, 나꼼수와 연관이 있다고 느껴지시고, 성경에서 확실히 인격을 모독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금하고 있다고" 알고 계시면, 제가 정말 유치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살인하지 말라" 라는 부분이 있다는건 아시겠죠.
    그러면 전쟁터에서 적군을 (또는 아군을-요즘은 아군의 의한 사망도 상당합니다) 죽인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가는 것인가요?
    또, 구약시대에 인물들은 모두 지옥에 갔을까요?
    게다가,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나요?
    어째서 "기독교인을, 혹은 목사를 비판하려면, 그들이 어떻게 성경을 거스르는 것을 믿거나 가르쳐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그냥 내밷는다고 다 논리 있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성경 구절을 가지고도 수많은 설교말씀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그 중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무조건 성경에 "反" 해야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나꼼수를 듣는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기도한다" 는 아이디어를 받으셨는지 통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다른 글을 읽고 오셔서 여기에 실수로 답글을 다신게 아닐까 하는군요.

    여기까지는, Caleb님의 전혀 앞뒤 말이 안되는 답글에 대한 "비판" 이였습니다.

  5. 여기서부터는 제가 이인엽 형제님과 나누고 싶은 말이니,
    맘에 안 드시면 읽지를 마시던지, 읽고나서 맘에 안든다고 태클 걸지 않으시면 좋겠네요.

    사실 eKosta의 글들이 모두 같은 성향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Kosta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성향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이런곳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어진 지 한참 되었기 때문에,
    이 글의 서두를 읽고나서, 본문을 읽기전에 먼저 포스팅을 보고 왔습니다.
    거기에 달린 수백개의 답글들을 거의 대부분 읽었고,
    그 뒤로 올리신 관련된 포스팅도 읽었습니다.
    든 생각은 간단합니다. "아직도 여전하시구나."
    그 분은 변함이 없으신거 같군요.
    작년 시카고 코스타에 홍정길 목사님이 오신다는 말씀에
    오시기로 한 일정을 취소하신 그 분이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사역이 쉬웠다고, 그 분이 쉽게만 사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이 한국의 다른 목사님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행보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김동호 목사님은 거기까지인듯합니다.

    달을 가리키니,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꼼수를 비판하는,
    또, 방금 위에 글을 올리신 이름조차 밝히시지 못하는 저분과 같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신 분들을, 영업방해니, 동네 피해니 라고 하는
    그런 분들 때문에 참 어렵고 걱정이 됩니다.
    나꼼수가 왜 있을까요. 왜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라가서 300일을 버티셨을까요.
    그 이유를 알아아죠. 그 원인을 해결해야죠.
    F4를 비롯해, 나꼼수를 지지한다면, 모두 알고 있죠.
    지금 상황이 이렇게 만든 것인 것을.
    오늘도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이들이 왜 그러는지,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들어보려하지도 않고서,
    한밤중에 "도둑이야!" 외치며, 주변 사람들 잠을 깨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란거, 아니 개신교인이란거.
    참 씁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뒤에 쓰신 글과도 연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도 얼마전에 깜짝 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끼는 교회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저한테 물어보더군요.
    박원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왜 그러냐 했더니,
    한국에 아는 형한테서,
    "박원순이 시장이 되면, 대통령 출마하고 한국이 망한다고, 빨갱이라고 했다"며,
    선거전에 기도를 부탁받았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박원순 시장님은 대통령 출마하실 생각은 없고, 아주 훌륭하신 분이야.
    그런데 아까 내가 말했듯이, 너가 주변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너의 부모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내가 알 수 없기 떄문에 너한테 함부로 이야기를 하지는 못하겠어.
    다만, 너가 정말 한국 정치에, 지금 상황에 알고 싶다면, 다시 나한테 물어보렴.
    그러면 내가 시간을 내서, 최대한 알려줄 수 있으니."

    이게 저에게는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교회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른들.
    교회의 아끼고 사랑하는 형,누나,동생들.
    이들이 그동안 받아온 영향(혹은 쇠뇌)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기에,
    함부로 말을 하기 힘듭니다.
    혹여나, 저랑 같은 의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남들이 관심이 없더라도, 일부러 더 이야기를 합니다.
    혹시나 저희의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배울 수 있을까 하고...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유학생,이민학생들은, 한국정치에 무관합니다.
    아니 진실에는 무관하지만, 거짓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도저히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진실을 알려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부끄럽거나, 제가 창피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들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볼 지 모르는 이 곳에,
    저의 페북 주소를 적고, 본명으로 글을 올릴 정도로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관심없는 지체들에게,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또 그들의 주변사람들이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을 확율이 더 높다는 사실이,
    저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그래도, 아무도 보지 않을지는 몰라도,
    페북에 꾸준히 포스팅을 하고 있습니다.
    꼼수에서 그랬죠. 콘서트가 대성공이였던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인지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갖는 이러한 느낌과 생각을, 수많은 다른 누군가가 같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점점 자신감이 생기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추가 포스팅에 이런 말씀이 있더군요.
    "말과 일이 모두 중요하다. 둘 다 하기는 힘들다. 나는 일을 한다. 그들은 말을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들에게 일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 않겠다고.
    그러니 앞으로 나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 말아달라고."
    그냥 김동호 목사님 이신거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거기서 만족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이 영향력이 있으시니, "말"을 해주시면 더더욱 좋겠지만,
    "일" 이라도 열씸히 해주시니, 그냥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앞으로 "말"은 안하셔도, "실언"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밤이다 보니, 감정이 복받쳐서, 두서 없이 떠들어 댔습니다.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6. 존쌤 2012/01/02 16:07  Addr Edit/Del Reply

    저는 김동호 목사님의 말에 찬성합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상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상함은 불의를 참는 다든지 도움을 더디한다는 고상함을 의미하는 것이아니고 '화를 내기 더디하며' 삼가 말하는 것에서 조심해야한다는 의미에서의 고상함입니다.

    나꼼수는 분명히 악을 악으로 푸는 방법이고 그것이 사회를 분열로 이끄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장큰 이유는 100%신뢰할 수 없는 내용, 출처를 알수없는 정보들입니다. 이것을 듣고 흥분하는 것은 옆집 아주머니가 옆옆집 아주머니를 욕하는 '카더라뉴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어느정도 사실이고 어느정도 맞는 말이지만 혼자서 남의 사정을 모르고 떠드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만일 나꼼수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정말 사실이라면 그것은 온라인에서 열심히 말하는 것보다 검찰에 신고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이건 꼭 이인엽씨를 비롯 그분을 찬성하는 모든 분이 읽었으면 하는데, 왜,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예수님, 하나님과 비교해 비판과 분노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지금 현정부에 불만이 있으면 실컷 욕하시기바랍니다. 하지만 절대로, 단 1초도 하나님도 분노하셨으니 나도 해도 된다, 예수님이 비판하셨으니 우리도 해야된다는 논리는 하지 마시기바랍니다. 그건 인간으로 할수있는 최고의 자만이고 아주 심각한 오류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옳지만 우리는 그럴수없습니다. 욕하는 것은 젋은 당신의 자유지만 그것을 절대로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심판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습니다.

  7. 존쌤님.
    기독교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상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 하시는 만큼,
    "~하지 마시기바랍니다." 라고 말씀은 안하셔야 하지 않나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가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성경 어느 부분에서 존쌤님의 "생각"과 같은 내용을 주장하나요?
    그냥, 더 긴말 필요 없이 그 부분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네요.

    또, 나꼼수의 어느 부분이 악인지도 좀 같이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처럼 "욕" 하는게 "악" 이라고 생각하시는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악"을 알고 계시는지 말이죠.

    마지막으로, 검찰에 신고해서 먹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신고 하고 있습니다.

  8. BlogIcon eKOSTA 2012/01/03 17:11  Addr Edit/Del Reply

    많은 관심과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이곳이 미국 코스타의 공식입장을 전하는 곳이 아니라 코스탄의 다양한 삶과 생각을 나누는 곳이기에 다른 입장을 가지신 분들의 의견을 환영합니다. 답글도 가능하고, 의견을 기고하시면 (ekosta@kostausa.org) 검토 후에 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신공격적인 발언은 삼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임수빈 2012/01/05 01:48  Addr Edit/Del

      저도 더 많은 분들의 의견이 좋다고 생각하고,
      대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미국 코스타의 공식입장을 전하는 곳이 아니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데,
      혹시 저의 댓글 중에, 코스타을 연상 시키는,
      또는 어느 부분이 인신 공격적인지 알려주신다면,
      수정하고, 삭제하고, 앞으로 조심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9. BK 2012/01/03 19:43  Addr Edit/Del Reply

    공감되는 부분도 있지만, 나꼼수가 주장하는 내용이 거의 진리급으로 상승되어 말씀하시는 것은 옳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 중에는 유언비어도 꽤 섞여 있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정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꼼수가 정말로 한국 사회의 병폐를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오히려 더 혼란만 가중시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과는 두고봐야겠죠...

    • 임수빈 2012/01/05 01:58  Addr Edit/Del

      나꼼수와 관련된,
      또는 보수에 대한 비판이 너무 강한 어느 기사나 사설을 볼 때,
      항상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정말 이것이,
      우리를 현혹시키려는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한 거짓이 아닐까.
      정말 나는 이 말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가지를 생각해보면,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하더군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지를 늘리자고 하셨을까,
      아니면 포퓰리즘이라고 무시하셨을까.
      미혼모에 대한 도움과 지원을,
      미성년자들의 성적타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거부하셨을까,
      아니면 하나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시며 보호하셨을까.
      억압받고 있는 북한의 동포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빨갱이, 독재주의자라며 남한의 경제를 혼란시킨다고 욕하셨을까,
      아니면 그들과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셨을까.

      짧은 저의 생각으로는,
      어느 쪽이 '사랑'을 실천하는지 너무나 '편파적'으로 보입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더 깊은 믿음이 있다면, 다르게 보일지.

  10. 한때기독교도였다 2012/01/04 06:41  Addr Edit/Del Reply

    난 예전에 기독교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교다.

    왜인줄 아는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은 곧 목사의 좋은 핑계거리로 사용된다.

    믿음, 소망, 사랑중 사랑이 제일이다라는 말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즉 관용과 자애를 포함하는 말이건만..

    이들의 독선은 그러한 예수가 그토록 강조했던 중요가치인 기독교 제1가치인 사랑을 무색하게 만든다.

    자신들의 적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편하게 사탄으로 규정하고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편협한 모습과 천당과 지옥이라는 말을 꺼내 겁박을 하는 모습, 언론에서 보도되는 목사들의 행태를 보면서 실망만 쌓여갔다.

    난 예수를 좋아하지만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예수와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거하시며 꼭 교회에만 거하시는것이 아님을 알고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내가 확신하는 것은 현재 대형교회 먹사들이 그토록 부르짖고 있는 천국에는 너희들의 자리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하자면 김동호목사는 본질은 무시한채 수단만을 딴지거는 모습을 보며 교언영색하면서 남을 거꾸로 떨어뜨리는 것보단 수단은 비록 거칠지라도 본질을 꿰뚫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다.

  11. 소심이 2012/01/04 07:02  Addr Edit/Del Reply

    오늘의 기독교는 모든 것을 빼앗긴 나봇에게 태도가 불손하다고 말하는 모양이다라는 말이 참으로 와닿습니다.
    나꼼수의 "태도"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평범한 일인으로서, 방송 매체들이 외면하는 진실들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매우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나꼼수가 욕설과 말태도를 고치길 간절히 염원하기보다 그 진실이 묻히지 않고 지금의 용기를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런 마음이 드네요.

  12. 괴독교 2012/01/14 20:34  Addr Edit/Del Reply

    공의 없는 복음과 값싼 용서: 이근안과 두란노 아버지학교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6707

  13. 답답 2012/01/18 16:35  Addr Edit/Del Reply

    Caleb님/ 기독교인의 기준은 성경이죠. 그런데 성경은 상식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어요. 많은 경우 상식이 무너지면 성경적 기준은 볼것도 없죠. 지금 나꼼수가 비판한 의혹들에 따르면, 성경의 엄격한 기준은 고사하고, 정직하고 비리를 저지르면 안된다는 일반적 ‘상식’도 무너지는데 왜 Caleb 님 같은 분은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으신지 궁금하네요.
    하용조 목사님 말씀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권세에 복종해야겠지만, 그 권세가 하나님의 정의를 거역하면, 불복종하는게 성경의 정신입니다. 정치권위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면 로마시대 초대교회는 황제에 복종해 절해야 했었는데 그래도 복종을 말하시렵니까? 이렇게 문맥을 무시하고 로마서13장’만’을 강조하는 입장은, 보수기독교가 국가권력에 복종해 신사참배하고 군부독재에 굴복한 사실을 합리화 하기위해 성경의 한쪽만을 강조하는 겁니다. 위에 '괴독교'님이 올려주신 글 보세요. 이근안 같은 사람이 두란노아버지학교에서 간증할 수 있다는걸 보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불의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없다뇨? 위의 글에서도 지적이 되었는데 안읽으셨나보네요. 이사야 선지자가 그런 예언을 하고 왕의 죄를 지적하는 자체가 목숨을 건 저항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목숨 걸고 기도하지 않으면 리더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얘기는 더 황당하군요. 쓰신 글의 논조는 비판 자체가 나쁘다는건데, 목숨 걸고 기도하면 나쁜걸 할 자격이 생기는건가요? 당연히 기도는 해야겠지만, 남이 기도하는지 안하는지 추궁하듯 따져묻는 그 태도도 이해가 안가고, 명백한 악을 지적하는 당연한 의무에 대해, 무슨 목숨걸고 기도하느냐를 조건으로 내세우는것도 황당하군요.

    존쌤님/ 기독교인들은 고상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거 동의하는데, 나꼼수는 멤버 한명 빼고는 기독교인들이 아니에요. 근데 김동호 목사님은 그 사람들이 목숨걸로 비리를 폭로하는데, 고상한 태도가 없다고 비난한 거구요. 정황상 많은 사람이 여기에 황당해 한겁니다.
    그리고 나꼼수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고 했고 사실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말고 검찰에 신고하라고 했는데, 정말로 한국 뉴스를 안보시나봅니다. 내곡동 사건, 디도스 공격 등 상당주장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고 수사도 진행되고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고 사회악에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위에 글 쓰신 '한때 기독교도였다' 같은 분이 교회를 떠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정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14. ㅁㅁ 2012/02/03 23:49  Addr Edit/Del Reply

    솔직히 개인 블로그가 아니고 코스타 이름이 붙은 웹사이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위에 댓글들 보면서도 확실히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이분화가 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어 착찹합니다.
    위에 임수빈님이 쓰신 글 보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고 하면 진보진영측을 지지하는 글을 쓰셨는데,
    저의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지금 현정부도 나꼼수측도 모두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세상을 풍조를 따라가지 않는 크리스쳔으로써는 현정부에 대해서도
    나꼼수에 대해서도 둘다 견제하는 입장을 가져야한다고 봅니다.

    글쓴이가 김어준씨와 예수님을 평행에 놓고 말씀하신 것은 죄송하지만
    정말 잘못된 것 같고요. 그에 대한 걸로 제가 분노하지는 않겠습니다.

    너무 사회 정의 이론에 빠져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오신 가장 큰 이유가 사회악에서
    사람들을 구하려고 왔다는 식의 논리에 빠지신 것 같아요.
    특히 다음 부분에서 그런 느낌이 강하게 납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모두가 두려워 하던 악독한 권력자들에게 목숨 내놓고 “이 개자식들아”라고 정면 대결을 하셨고.."(에서 글 마지막까지)
    정말로요?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신 앞에 하나님이 있으면서도 모르는 소위 "영적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던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것의 가장 큰 목적이 사회 정의를 위해서 였을까요? 저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영적권위를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데요.

    저도 제가 맞다고 확신할 수 는 없지만 이런 장문의 글을 쓰시기전에 자신의 관점에서 한발 물러서서 냉철하게 생각하시면 좋겠네요.

0. 들어가며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913일 뉴욕에서 개막한 제 66회 유엔총회에서, 194번째 회원국으로 승인 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미국의 주도하에 여러 협상 시도가 있었지만, 1967년 이래 팔레스타인 인들이 살고 있는, 가자 지구(Gaza district)와 서안(West Bank)은 이스라엘 군에 의해 식민지에 가까운 점령상태로 남아있고, 팔레스타인의 테러공격과 이스라엘의 군사공격이 계속 되어 왔는데, 예를 들어 2008년의 가자 공습에서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비무장 민간인이었던 138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이스라엘측 사망자 13), 이스라엘은 민간인과 유엔학교, 유엔 구호트럭, 비무장 국제 구호선까지 무차별 공격함으로서, 미국을 제외한 국제 여론의 심각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도 이스라엘은 분리장벽을 세우고 정착촌을 늘려나감으로서, 평화 협상은 최근 1년여간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압바스 (좌), 오바마와 네탄야후 (우) 

결국, 이스라엘과의 협상에 진전이 없고, 미국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은 유엔에 직접 독립국 승인을 요청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언제나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해온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할것을 확고히 했으나, 팔레스타인 측은 유엔 회원 192개국 가운데 140여 개국에서 독립을 지지한다는 지지를 얻어냈다고 밝힐 정도로, 대다수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에 지지를 보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의 안보리 거부권으로 독립국가 자격은 얻지 못하겠지만, 만일 유엔 안보리 15개 회원국 중 최소 9개국이 승인하고, 유엔총회에서 193개 회원국 중 3분의2 찬성을 얻으면 팔레스타인은 `표결권 없는 비회원국 옵서버 단체(entity)'에서 `표결권 없는 비회원국 옵서버 국가(state)' 지위로 승격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엔 산하 국제사법재판소(ICJ)등에 이스라엘 관련 문제를 제소할 권한을 갖게 되어 이스라엘에게 위협이 될 수 있고, 이렇게 팔레스타인 독립문제가 유엔에서 논의되고, 대다수의 국가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 만으로도, 중동 정세에는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i]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지난 5 1일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된 후, 19일에 있었던, 오바마 대통령의 대중동연설(Middle East Speech)과 이에 대한 반응입니다. 오바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해결과 평화 정착을 위해서 합의에 따른 일부 영토교환을 전제로 한 1967년 이전 경계(the 1967 lines with mutually agreed swaps)’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협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언급 했습니다. 사실 이 주장은 과거 조지 부시나 힐러리 클린턴 등 다른 정치인들도 언급한 바 있고,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새로울 것 없는 내용입니다. 사실 오바마의 개혁적 성향을 보고 뭔가 팔레스타인 문제의 진전을 위해 과감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기대했던 팔레스타인과 아랍국가들은, 내실없는 오바마의 발언에 큰 실망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연설이 끝나자마자, 미 공화당 의원들을 비롯한 보수 인사들은 오바마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차기 공화당 대선주자인 미트 롬니(Mitt Romney)오바마가 이스라엘을 달리는 버스 아래 던져 넣었다(President Obama has thrown Israel under the bus)’고 했고, 역시 대선주자인 미셸 바크만은 오바마는 또 한번 우리의 친구이자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배신했다(Once again, President Obama betrayed our friend and ally Isael)’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비난여론을 의식했는지, 오바마는22일에 유명한 이스라엘 로비단체인 AIPAC(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를 방문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철통같은 지지는 변함 없다며, 발언의 파장을 진화하기에 바빴습니다.[ii]

AIPAC을 방문하여 연설하고 있는 오바마

 

또한 미국을 방문한 벤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오바마 연설 바로 다음날인 20일 오바마와의 대담에서 거의 두시간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와 현실을 강의하듯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은 1967년 이전 경계로 돌아갈 수 없고 그것은 방어가 불가능하다(indepensible)’고 주장해, 그 전날 오바마의 발언을 대놓고 반박하기도 했으며, 오바마가 유럽을 방문중이었던 524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도 오바마의 발언을 거듭해서 비판했는데, 놀랍게도 공화당 민주당을 막론하고, ·하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의 주장을 반박하는 네타냐후의 발언이 끝날때마다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31번이나 보내서, 마치 선채로 연설을 듣는 듯 보였고, 마치 네타냐후 지지집회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합니다. 결국 오바마의 발언으로 인한 파장은, 미국의 국내정치를 고려한 공화당의 오바마 때리기이기도 하지만, 전임자인 조지부시와 같이 이스라엘에 충성에 가까운 일방적 지지를 보내지 않으면 즉시 이스라엘에 대한 배신자로 비난을 받는 이상한 미국 정치 상황을 통해, 공화당과 민주당 상관없이, 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강한 어조로 오바마의 중동연설을 반박하는 네탄야후 


그렇다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1967년 이전 경계’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또한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이길래, 그 총리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에게 두시간동안 훈계하듯 이야기 할 수 있고, 미국의 국회의원들 조차 자신들의 대통령이 아닌 이스라엘 총리의 편을 들고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게 만드는 것일까요? 미국의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지난 번 글에서는
, 빈 라덴의 죽음과 관련해 과거 미국의 대 중동정책의 문제점들을 소개했었는데, 글을 읽은 몇 분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어느 정도 심각하길래, 다른 중동국가들이나 이슬람 테러조직들이 언제나 그 문제로 미국을 비난하는지 궁금하다고 물어오시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세계의 화약고인 중동문제의 뿌리에는, 언제나 석유문제와 함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전폭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의 뒤에는, AIPAC으로 대표되는 미국내 유대인들의 로비가 있고, 또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보수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미국과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 상당수가, 팔레스타인의 역사나 현실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글에서는 가능한 알기쉽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현실, 그리고 미국내 이스라엘의 로비와 그 문제점을 소개해 보고, 성경적 입장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1.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슈를 생각하면, 먼저 기독인들은 우리에게 친근한 구약성경의 역사를 기억하고, 또한 홀로코스트와 같은 유대인 박해의 역사를 떠올립니다. 성경의 백성이라는 친근함, 그리고 안네프랑크의 일기나 쉰들러스리스트와 같은 영화를 통해 유대인들이 겪은 비참한 역사가 잘 알려져 있기에, 심정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건국과 그 이후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의 역사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바마가 언급한 ‘1967년 이전 경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iii]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중동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전쟁이 있었고, 그에 따라 영토와 경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붉은색은 이스라엘의 영토, 파란색은 팔레스타인 영토로 표시된 다음의 지도는 이스라엘 영토가 팔레스타인에서 지속적으로 확장되가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1948 5 14일 건국 되었는데, 이스라엘 건국 하면, 마치 빈 땅에 나라를 세운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거의 2천년 전에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되었고, 그 땅에서는 아랍인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은 1차대전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아랍인들의 군사협력이 필요했던 영국은 이들에게 맥마흔 선언을 통해 독립을 약속합니다. 동시에 전쟁을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시오니스트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영국은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또 다른 약속을 한 바 있었습니다. 지킬 수 없는 두가지 약속을 한 셈이고, 한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이지요. 이후 유럽과 러시아로 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고, 결국 유엔은 1947 11월 팔레스타인의 약 56%를 유대 국가에, 43%를 아랍 국가에 할당하라고 결정했는데, 아랍인들은 분할안을 거부하고 유대인들은 받아들여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인들은 영토의 대부분인 87.5%를 소유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6.6%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팔레스타인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56대43으로 땅을 나누라는 유엔의 결정은 팔레스타인들의 땅을 떼어 유대인들에게 주라는 것과 같았다는 점입니다.

2천년간 세계 각지에서 수난을 당한 유대인들이 구약성서의 땅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그 땅에는 이미 2천년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고, 이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살고 있던 자기들의 땅을 이스라엘과 나눠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된 것이지요. 굳이 비유를 하자면, 갑자기 내일 일본이 임나일본부설(고대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정벌해 식민지를 세웠다는 주장)을 주장하면서 남한 영토의 절반을 요구하고 거기에 일본인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지금 고구려 역사를 근거로 중국에 만주땅을 요구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한다면 중국이 가만히 있을까요?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이러한 심각한 상황이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유엔의 결정에 분노한 주변의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해 이스라엘 건국 직후 1948년에 1차중동전쟁이 발생하는데, 여기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유엔에 의해서 할당된 영토보다도 훨씬 많은 팔레스타인의 78%를 장악하게 되고, 나머지 22%는 가자(Gaza)와 서안(West Bank)으로 나눠져서, 각각 '가자'는 이집트의 통치하에, '서안과 동 예루살렘'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1967 64일까지 놓여있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양측에 이스라엘의 서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동예루살렘으로 분할됩니다. 결국, 이것이 바로 오바마가 언급한 ‘1967년 이전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뉴스에서 자주 언급되는 가자와 서안(웨스트 뱅크)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가 궁금하셨다면 아래 지도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가자'지구는 우리가 잘 아는 삼손과 들릴라 이야기의 배경이 된 성경의 '가사'이며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도 블레셋에서 기원합니다.
 

이 전쟁으로 약 75만에서 100만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전쟁을 패해 주변 아랍 국가들로 피신했는데, 이때 이스라엘은 부재자 재산법을 만들어 손쉽게 이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할 수 없게 해버립니다. 동시에 귀환법을 만들어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스라엘로 돌아올 권리를 가지고 시민권을 받는다고 선포합니다. 결국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주민의 상당수는 토지와 재산을 잃고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고, 반대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만 증명하면, 팔레스타인에서 시민권과 주거지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그 결과로 2차중동전쟁이 발발하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에 파병하고 이집트와 숙적이었던 이스라엘도 파병하는데, 이 결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집트의 주도하에 아랍 국가들이 단결해, 다시 1967 3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6일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이스라엘이 또다시 승리하여, 이제는 가자와 서안 모두가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결과 약 43만 명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추가로 쫓겨나고 남은 약 100만 명은 이스라엘의 군사점령하에 생활하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영토 전체를 이스라엘이 통제하게 된 것이지요. 유명한 아라파트는 1969년 이후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결성하여 투쟁을 하는데, 큰 진전이 없자, 이제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이스라엘을 내어 쫓고 팔레스타인만의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이상은 완전히 포기하고, 1967년 이전 경계, 즉 가자와 서안에서만이라도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도록 해 줄것을1976년 유엔총회에서 요구합니다. 이것이1967년 이전 경계를 기반으로 독립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상호 인정하자는 두 국가건설 해법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것 마저도 거부합니다. 이것이 오바마가 언급한 ‘1967년 이전 경계이며 유엔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지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973년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르는 4차 중동전쟁이 터지는데, 욤 키푸르(속죄날)을 맞아 이스라엘 군이 금식 등으로 병력 동원에 어려움이 있으리라 에상한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초반에 우세한 상황이 되는데,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겨우 아랍군을 몰아내게 됩니다. 나중에도 다루겠지만, 이스라엘은 굳건한 애국심과 단결력으로 수많은 아랍국가들에 맞서 승리를 거둬왔다고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승리에는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충격으로 이스라엘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중동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1978년 지미카터가 주도하고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서명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입니다. 이는 숙적이었던 이집트와 이스라엘 관계에 화해를 가져오고, 이집트는 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 반도를 되돌려 받는 대신, 가자지구에 대한 개입을 중지하고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으며,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권리와 독립을 인정하고 점령지역에서 철군하기로 약속을 합니다. 나세르와 그 후임자인 사다트 같은 아랍민족주의 지도자들 하에서, 이집트는 아랍의 반이스라엘 진영 지도자 역할을 했으나, 사다트는 캠프 데이비드를 통해 전격적으로 이스라엘과 화해하게 된 것입니다. 

캠프 데이비드협정에서 좌로부터 사다트, 지미카터, 베긴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의 두 리더였던 사다트와 베긴 모두, 협정이후 자국의 강경파에게 암살되고 말았으니 팔레스타인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잘 보여줍니다. 이후 이집트는 평화협상의 대가로 미국으로 부터 매년 20억 달러를 받게 되며, 사다트가 암살된 후 권좌에 오른 무바라크는 미국의 지지를 업고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자그만치 30년간 독재정치를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집트는 협상의 약속을 지켰으나, 이스라엘은 아직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바라크는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묵인해,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통치를 인정한 셈이 되어 버렸고, 아랍국가들로 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결국 최근 민주혁명 초기에 무바라크가 축출 위기에 처했는데도, 미국이 쉽게 무바라크를 포기하지 못하고 민주시위를 지지하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던 전임자들(나세르와 사다트)과 달리, 그가 독재자이지만 이스라엘과 평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해 독재자 무바라크를 필요로 했던 것이지요.

최근 무바라크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진 후, 지난 9 9, 카이로 시민 수천명이 개혁 가속화 시위를 하다가 그중 수백명이 인근 이스라엘 대사관에 몰려가 방어벽을 부순 뒤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치외법권 지역인 대사관에 난입한 사건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근본 원인을 생각해 보면, 아랍 시민들의 관점에서 같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의 비참한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무바라크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분노가 곪아터진 사건인 것이지요.

 

캠프데이비드와 유사하게 1994년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클린턴의 지원하에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조약을 맺는데, 이 결과로 요르단이 서안을 사실상 이스라엘의 영토로 승인하는 대신, 미국은 요르단의 부채탕감과 군사원조 2억달러를 포함 매년 5억달러의 원조를 약속합니다. 요르단도 후세인 국왕이 통치하는 친미 독재왕정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이 평화조약들은 미국의 주도하에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의 갈등을 어느 정도 방지하게 되었으나, 가자지구와 서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지상태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PLO와 협상을 하는 동시에, 가자와 서안, 그리고 동예루살렘에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이주시켜 영토를 확대해 나갑니다.

 

1982년에는 5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레바논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스라엘은 민간인 정착촌을 미사일로 폭격한 레바논 거주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추격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침공하고, 그 결과 한달만에 2만명의 팔레스타인 인과 레바논 인들이 사망하게 됩니다. 특히, 82 9 16레바논의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의 학살은 이 전쟁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으로 오랜 기간 내전을 겪어온 나라이고, 당시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군부는 수도 베이루트를 점령해, 레바논의 기독교도 수장인 바시르 제미엘을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앉히려 했는데, 그가 이슬람측의 폭탄테러로 살해당합니다. 그러자 광분한 레바논의 기독교 팔랑헤 민병대 150여명은 이스라엘 군이 포위한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사브라와 샤틸라로 기습해, 사흘동안 절반이 부녀자와 어린이였던 3천여명의 난민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이스라엘 출신 감독인 아리 폴만의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2008)’입니다. 학살을 다룬 이 영화는 기독교 민병대들의 학살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모호하게 다루었지만, 사실 그 배후에 이스라엘 군이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것이, 학살극이 벌어지는 동안 이스라엘 군은 샤론의 명령에 따라 난민촌을 탱크로 둘러싸고 밤새도록 조명탄을 쏘아 올려 학살을 방조하거나 도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비난이 급증하자 샤론은 국방장관에서 물러나지만 20년 후 2001년에 이스라엘 총리에 당선되어 다시 팔레스타인의 탄압에 앞장섭니다. 그리고 이 결과로 레바논에서는 반 이스라엘 투쟁이 중심인 헤즈볼라(Hezbollah)가 결성됩니다. 역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Hamas)와 함께 이스라엘과 미국이 테러조직으로 비난해 마지않는 헤즈볼라가 레바논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선거에서 승리하고 있는 배후에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학살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2006년 여름에도 레바논은 34일 동안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겪으면서 11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바 있습니다.[iv]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 포스터 (좌), 실제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 장면 (우)
 

특히 1987년 말의 1차 팔레스타인 민중봉기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의 참혹한 현실과 이스라엘의 억압정책을 폭로해,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1988 PLO의 부패와 무능에 신물이 난 팔레스타인 인들을 중심으로 보다 과격한 하마스가 창설되어 PLO와 경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92년 이후 PLO와 협상을 시작하는데, 8년여간의 협상기간 동안 예루살렘과 서안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두 배 이상 증가해서 40만명이 넘게 됩니다. , 협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정착촌을 늘려나가는 이중적인 정책을 쓴 것이지요.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착촌 정책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판결되었을 뿐 더러, 미국의 관료들조차 비판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들은척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난 2008년에는 제 6차 중동전쟁이라고도 불리는 가자전쟁(Gaza War) 발생했는데,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휴전이 종료되고 이스라엘 군이 하마스 무장대원 3명을 사살하자,  하마스가 그 보복으로 이스라엘 영토에 70발 이상의 로켓을 발사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가자지구에 대한 대규모 공습과 침공을 시작해 1380명이 사망하고 (이스라엘측 사망자 13), 이스라엘은 민간인과 유엔학교, 유엔 구호트럭, 비무장 국제 구호선까지 무차별 공격함으로서, 미국을 제외한 국제 여론의 심각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 지구 한편에서 문명국가 군대의 공격으로 민간인이 대부분인 천명 이상이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은 이런 현실에 눈을 감거나, 알면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008년 가자전쟁의 참혹한 희생장면.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던 1380여명의 사상자 발생 

이스라엘 군의 한 티셔츠 디자인. 과녁안에 팔레스타인 임산부 그림이 있고 "총 한발로 두명 사살"이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다음의 지도는
, 녹색으로 표시된 팔레스타인 지역이 어떻게 축소되어 나가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첫번째 지도는 이스라엘 정착 초기, 두번째 지도는 유엔의 분할 결정안, 그리고 왼쪽에서 세번째 지도가 1967년 이전 경계이고, 현재는 서안의 상당 지역을 이스라엘 정착지가 침식해 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40만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 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2000
년 최종 협상에서 이스라엘은, 정착촌 제거, 1967년 경계 회복 등, 팔레스타인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거부하여 협상을 실패하고, 자살폭탄테러를 동반한 팔레스타인의 2차 민중봉기가 발생합니다. 테러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이스라엘은 2002년부터 서안 지역에 총 길이 800㎞이상 높이 8미터의 콘크리트 분리 장벽을 건설해,이스라엘 정착지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시켜 나가고,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분리시키며, 지역 전체에 검문소를 설치해, 팔레스타인 인들은 출근하기 위해서 매일 몇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분리장벽으로 인해 엄청난 거리를 돌아서 다녀야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건설하고 있는 분리 장벽(좌), 서안 곳곳을 차단하고 있는 검문소 (우)

 

2004 7월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는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인 동 예루살렘, 서안, 가자지역은 국제법을 위반한 점령지이며 이스라엘이 이들 지역에 건설한 정착촌과 분리장벽도 국제법 위반이이라고 판결한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의 22% 1967년 이전 경계에 기반한 서안과 가자, 그리고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민족국가를 설립하겠다는 요구마저 이스라엘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고, 그것을 언급한 오바마의 연설조차 미국 내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는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팔레스타인은 결국 유엔에 독립국 승인을 신청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펴본대로,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세계 여론을 생각할때, 대부분의 보수 기독교인들이 팔레스타인 이슈에 대해 가진 생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는 주장이 얼마나 역사나 현실에 무지하고 단순한 생각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결국 위에서 살펴본 역사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입장을 살펴 보았을 때, 누가 강자이고 약자이며, 누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천년간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들은 이제 22%남은 땅에서 준 식민지 상태로 이스라엘 군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 지역에서만이라도 독립국가를 인정해달라는 주장을 이스라엘은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다. 1967년 라인마저도 인정할 수 없고,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세력이 테러공격을 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기에완전 비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고, 하마스 같은 조직이 이스라엘의 존재를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미 1948년에 국가를 수립하고, 핵무기를 포함한 중동 최고의 군사력을 갖추고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준 식민지 군사점령상태에서 독립국가수립도 못하고, 인구 상당수는 해외에서 난민생활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게,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지 않으면 독립 승인은 물론 평화협상도 할 수 없다고 강요하는 현실입니다. 물론 하마스 같은 팔레스타인 강경파 중에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이스라엘의 존재는 이미 기정사실이고, 협상 과정에서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협상하기도 전에 그걸 인정하는건 미련하다고 밖에 말할수 없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먼저 그런 선결조건들에 굴복하지 않으면 협상은 불가능하고, 기본적으로 1967년 경계는 받아들일 없다고 말하며, 지속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과 동예루살렘에 불법적으로 이스라엘 정착지를 늘려나가 이스라엘 영토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테러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안은 이해가 가지만, 양측의 갈등이 계속되고 이스라엘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사황에서 팔레스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완전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독립은 없다라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결국,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정책을 살펴보면, 과연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을 하거나, 궁극적으로 독립을 승인할 생각이 있는가 심각한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강경파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국가는 없다라고 여러번 언급한 바 있고, 과거 PLO가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던 시절에는 PLO를 테러조직이라고 협상을 거부해 오다가, 이제 PLO의 후신인 파타가 인기를 잃고 강경한 하마스가 등장하자, 하마스를 테러조직으로 비난하면서 협상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볼 점은, 팔레스타인의 비참한 상황을 생각했을 때, 이들의 독립요구나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등장을 단순히 테러리즘으로만 비난 할 수 있냐는 점입니다. 테러리즘과 관련해, “당신의 테러리스트는 나의 자유 투사일 수 있다(Your terrorist is my freedom fight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제 식민지 시대 독립투쟁을 보아도, 안중근 의사가 잡혔을 때 그는 자신을 독립군 중장이라고 주장했고, 일제는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했다는 것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한 리비아 인들의 투쟁을 다룬 영화 사막의 라이온(Lion Of The Desert, 1981)’이나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저항을 다룬 영화 알제리 전투(La Battaglia Di Algeri, 1965)’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지배국이 독립을 향한피 식민지배 국의 저항을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고 진압해온 것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그런데, 훨씬 강력한 군대를 가진 점령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과 살인에는 테러리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군사작전같은 용어를 사용하지요. 그래서 국가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협상하는 것은 미국에게 알카에다와 타협하라는 것과 같다며, 하마스의 테러리즘을 근거로 평화협상과 독립승인을 거부하고 있습니다만, 하마스를 알카에다와 동일시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먼저 알카에다는 특정국가와 상관없이 '반미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목표로 하는 다국적 테러단체이지만, 하마스는 과격무장세력인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정치세력이기도 합니다. 특히 하마스는 선거에서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고통받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교육과 의료 등 사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서 민심을 얻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마스는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 참여해 62.6%의 득표율로 총 132석 중 74석을 장악하며,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파타를 제치고 제 1당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제는 하마스조차도 현재 22%안에서의 독립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며, 압바스의 유엔독립국지위 신청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구체적인 평화협상과정이 진행된다면, 하마스 마저도 보다 현실적인 타협에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이를 빌미로 협상에 나오지 않고 정착촌건설만 지속하는 이스라엘이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사력이나 사상자의 규모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많은 언론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에게 폭력을 중단해야한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마치 양측이 똑같이 공격을 하고 비슷한 사상자가 발생하거나 이스라엘측 피해를 더 과장해서 묘사를 하는데 (예를 들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 보도의 정확성 :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사례 연구"라는 논문을 보면, 어린이와 청소년 사망 관련 언론기사를 비교해 볼 때, 팔레스타인 보다 이스라엘 어린이 사망에 대한 보도기사가 30배 정도 많다고 함), 실제로 사상자의 비율을 보면 대부분 팔레스타인 측이 수십배에서 수백배까지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동 최강의 군사력으로 최첨단의 전투기, 탱크를 갖춘 이스라엘과, 피지배 상태에서 기껏해야 총과 로켓으로 무장한 팔레스타인이 비교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예를 들어 하마스의 로켓 공격도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 사망한 이스라엘인은 8년동안 20명에 불과한 반면, 이스라엘 전투기가 하루 공격으로 3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흔한일이라고 합니다.

테러리즘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 팔레스타인 같이 절망적 상황에서 독립투쟁이 극단화 되는 것은 쉬운 일이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빌미로 협상을 거부하고, 다시 막강한 군사력으로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노암 촘스키는 자신의 책 해적과 제왕에서, 똑같은 악랄한 살인과 약탈을 해도 그것을 배한척으로 소규모로 하면 해적이 되지만, 대함대를 거느리고 대규모로하면 제왕이자 영웅이이 되는상황을 지적하며, 한쪽만을 테러리즘으로 비난 하는 입장에 문제제기를 한 바가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강경파는 팔레스타인 내부의 과격파를 문제삼아 분열시키는 동시에, 평화협상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 독립을 무한정 지연시키면서 지속적으로 정착촌을 확대하고 팔레스타인들을 학살하거나 해외로 쫓아내서, 결국 팔레스타인 영토 전체를 이스라엘화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50만명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먹어들어가고 있고, 이들은 법적으로 무장할 권리를 가지고 팔레스타인에게 신분증을 요구하거나 영장없이 체포할 권한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라 준 군사조직인 것이지요. 더불어 이스라엘은 분리장벽을 건설해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분리시키고, 이스라엘 정착촌들을 잇는 도로를 건설하고 팔레스타인 인들은 사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히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테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암 촘스키는, 자신의 책 숙명의 트라이앵글에서 이스라엘의 강경파는 PLO가 온건화 되고 평화협상에 나와서 이스라엘이 협상을 해야할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강경책을 써서 상대를 극렬화 하는 정책을 썼는데, 예를 들어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하여 팔레스타인 인들의 학살을 조장하여 갈등을 증폭시키고 피의 대결을 지속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PLO가 온건화하자, 1987년 이스라엘 정보부는 팔레스타인 사회를 분열시키기 위해 종교적 색채가 강한 무슬림 형제단을 이끄는 야신을 지원했는데, 그가 창설한 단체가 바로 하마스입니다. 이스라엘이 현재 비난해 마지않는 테러단체 하마의 창설에 이스라엘이 어느정도 개입했다는 사실이지요.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이제 지속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관련 유엔표결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의견을 보이고 있으며, 이제 팔레스타인의 참상이나, 이스라엘의 정책으로 자행된 인권유린과 학살이 세계여론을 통해 잘 알려져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여론과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지지하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중동에서 독재정부를 지원하거나(사우디, 요르단, 쿠웨이트, 이집트 등등), 분열을 일으켜 약화시키는 방식(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이란에도 무기를 팔았음)으로 아랍국가들을 제어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해 왔으나, 이제 시민혁명의 확대와, 근본주의 이슬람의 발흥으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이제 팔레스타인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해 온데 대한 결과가, 반미감정과 반 이스라엘 감정으로 폭발 직전에 이른 것이지요. 아래 표(출처: 매일경제 9월6일자 기사)에서 보듯이 중동은 이제 거대한 변화에 휩싸인 상태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요구도 더이상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중동에서 확산되어 가는 민주화의 물결을 적어도 원칙상 지지하는 오바마가,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독립권은 왜 인정할 수 없는가는 점점더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굳건한 지지 세력이 되고 있는 이들이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인데, 이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는 주장이 얼마나 역사나 현실에 무지하고 단순할 뿐더러, 성경적 근거도 빈약한 주장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번에 연재한 두개의 글들에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그에 기반해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장에,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현재 이스라엘의 폭압적인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급증하자, 오히려 보수 기독교인들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커녕,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고, 각국이 이스라엘을 대적한다는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 지고 있다며, 더욱 이스라엘 지지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과 역사에 대한 무지와 왜곡이, 얼마나 기독교인들을 바보로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정의와 정반대에 서게 할 수 있는지, 처절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스라엘이 왜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인종주의 군사국가가 되었는가, 그리고 미국은 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가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i]연합뉴스 914일자 기사, “카터,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승인 노력 지지

[ii] 다음 링크를 보시면 공화당 정치인들의 자세한 발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INSuFQhxLk

[iii] 이 글에서 설명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역사는 다음 자료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홍미정,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코리아 연구원 현안진단 25

[iv] 김재명, 2008 12 4일자 씨네21기사, 좌우갈등 속 모호해진 목소리: 학살현장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을 다녀와서 본 <바시르와 왈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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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남호 2011/09/26 06:37  Addr Edit/Del Reply

    좋은 글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평소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의 원인과 미국과의 관계에 관심이 없다가
    최근에 팔레스타인의 UN으로 국가의 인정을 신청한 기사를 보고
    관심을 갖다가 글을 찾게 되었는데
    정말 궁금했던 부분들을 모두 알기 쉽게 설명해놓으셔서 이제 어느정도 감이 잡히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글 부탁드릴게요

  2. 송송 2011/09/27 15:10  Addr Edit/Del Reply

    글 잘 읽고갑니다.
    많은 도움이 된거같아요

  3. 송송 2011/09/27 15:10  Addr Edit/Del Reply

    글 잘 읽고갑니다.
    많은 도움이 된거같아요

  4. 달봉이 2011/11/02 22:57  Addr Edit/Del Reply

    멋진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5. Dawn 2011/11/07 20:31  Addr Edit/Del Reply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확실히 이해한 같아요.

  6. 기현 2011/12/08 20:51  Addr Edit/Del Reply

    와, 이 글을 읽으니 정리가 되는군요.

    미국의 원조가 성경에서 기반되는 것 외에, 적용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도 알고 싶네요.
    언제 글한번 올려주세요~

  7. 여름날 2012/01/08 13:05  Addr Edit/Del Reply

    이런글이바로 펙트라고불려야죠.......

  8. 겨울여왕 2012/02/04 06:46  Addr Edit/Del Reply

    글 잘 보았습니다
    이해하기쉽도록 정리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되면 다른글들도 차근차근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빈 라덴의 죽음과 숨겨진 역사 2

 

     앞의 글에서는 빈 라덴의 죽음을 계기로, 과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진행된 미국의 비밀 작전의 역사와 영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역사의 의미와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함의의 살펴보려고 합니다. 냉전기 미국의 개입과 그 결과를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라는 정치학자의 '블로우백(Blowback)'입니다. 블로우백은 원래 CIA 내부 용어로, 비밀 작전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해로운 결과가 아군에게 미치는 것을 설명하는 단어였습니다. 찰머스 존슨은 이 개념을 통해, 비밀리에 진행된 CIA 작전이 결국 9.11테러와 탈레반, 알카에다의 형성을 가져왔다고 비판합니다. , CIA가 미국의 필요에 따라 훈련시키고 무장시킨 아프간 극단주의 이슬람세력이 결국 9.11테러와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는 일종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입니다.[i]

                                              찰머스 존슨과 그의 책 '블로우백'

     9.11테러가 발생한 후, 당시 부시 대통령은 그들은 왜 우리를 증오하는가 (Why do they hate us)?”라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증오한다 (They hated our freedom)”이라고 스스로 대답을 했습니다. , 9.11테러 공격은 선을 상징하는 미국이 누리는 번영과 자유를 시기한 악의 세력이 일으킨 사건이며, 테러와의 전쟁은 선악간의 투쟁이라는 말이지요. 이에 대해 찰머스 존슨은 앞에서 소개한 블로우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왜 우리를 증오하느냐구요?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 파월, 아미티지, 1980년대에 아프간에서 역사상 최대의 비밀 작전을 수행했던 그들이 아주 자세하게 답해줄수 있을 겁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노리에가나 후세인 처럼 한때 미국의 가까운 협조자로 있다가 이제 공공의 적이 된 인물들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ii]

     모션캡쳐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 베오울프(2007)를 보면, 영웅 베오울프는 괴물을 물리쳐 왕의 자리에 오르고, 외적과 괴물로 부터 왕궁을 지키는데, 결국 왕국을 위협한 최후의 괴물은 전쟁의 과정에서 베오울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를 비유로 사용한다면, 소련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죽이기 위해 미국은 작은 괴물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소련이 사라진 지금 이제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들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폭력의 역사(2005)는 과거 범죄조직의 일원이었다가 손을 씻은 후,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계속해서 과거의 인물들이 찾아오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다시 폭력을 사용해 악당들과 싸우지만, 그 과정에서 가정이 위기에 처하고 은연중에 자신의 아들에게 폭력성이 전염되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 역시 미국의 역사에 대한 은유로 읽을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베오울프(2007)'
                                                     영화 '폭력의 역사(2005)'

     물론 테러의 원인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고 모든 책임이 미국에게만 있다는 주장도 당연히 지나친 생각이겠습니다. 미국의 정책과 상관없이도 반미감정을 내세우고 테러를 일삼는 집단이 나타날 수도 있겠고, 헌팅턴이 주장 했듯이 지하드와 같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영향도 중요한 요소이겠습니다. 그러나 앞의 역사를 살펴보았듯이 테러와 반미감정의 일정부분은 과거 미국이 냉전기에 뿌린 씨앗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빈 라덴 사살 이후 미국의 한 복음주의 목사님이, 기독인으로서 누군가가 죽은 것을 기뻐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만,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빈 라덴은 자신이 뿌린 악의 씨앗의 열매를 거둔 것이며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쓴 글을 보았습니다. 빈 라덴이 수천명의 민간인이 살해된 9.11 테러의 주범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원리는 미국에도 동일하게 적용 될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오늘날 미국이 경험하고 있는 국제관계상의 문제들, 특히 테러와 반미감정은 상당부분 냉전기에 미국이 뿌린 씨앗의 열매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미국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는지 몰랐을 지라도 말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할 때의 일인데, 같은 사무실에 있던 나이가 많으신 미군 특무상사 (Sergeant Major) 한분이, 9.11테러 이후 아프간 전쟁이 한창이던 2002년 경 제대를 해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분과 우연히 함께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분은 자신이 80년대에 아프간에서 스팅어미사일 교관으로 무자헤딘을 훈련시켰었다고 하면서, 그 무기로 지금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미군을 공격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럴수가 있냐고 한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직접 말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그럼 극단주의 무슬림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킨후에, 소련에 맞서 싸우는 도구로 이용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손떼고 떠난 미국의 정책은 잘한 것인가 묻고 싶었죠.

 

     물론 이런 비판은 미국안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이고, 까딱하면 반미주의자나 극단주의자, 혹은 비미국적인 발언으로 공격받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내부 경선 주자 중 한명이었던 하원의원 론 폴(Ron Paul)은 미국 내에서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몇 안되는 정치인중 하나인데, 미국의 무분별한 해외 개입을 중단해야한다는 입장에서, 위에서 말한 찰머스 존슨의 블로우백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아프간전과 이라크 전을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뉴욕시장이었던 루디 줄리아니를 비롯해서 다른 후보들은 그렇다면 9.11 테러의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냐그런 발언은 비미국적이고 용납할수 없다고 펄펄 뛰며 론 폴에게 발언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iii] 

 

     조지 부시를 비롯해서 미국 보수인사들이 보이는 중요한 특성이, 반성적 사고가 부재하고, 쉽게 미국 스스로를 으로 미국의 적을 으로 등치시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기독교적인 수사들을 들으면 언뜻 기독교적인 냄새가 나지만, 결국은 성경적인 생각도 아닐 뿐더러, 복음전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가져옵니다. 사실 성경은, 외적으로 행해지는 악도 있지만, 내적 반성이 없이 스스로 선을 자처하며 문제를 외부로 돌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상대방만 변하라고 하는 태도 자체가. 더 심각한 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처절한 비판을 보면 이를 잘 알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미국 남부에서 상당수의 보수 기독인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미국 역사의 어두운 면들 인디언 학살, 흑인 노예제와 인종 차별, 베트남 전쟁과 최근의 이라크 전쟁 등등 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알아도 반성적 사고가 없이 무조건 미국은 옳았다라는 입장만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서 깊은 실망감을 느낀적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과 반성적 사고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는 것이 테러리즘을 대하는 미국의 정책결정에 결정적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많은 비판을 받은 것도, 결국 테러리즘을 포함한 국제 갈등의 원인을 문화와 종교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서, 이슬람 문화와 종교의 폭력성에 테러의 근본 원인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주장이 반드시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중요한 요소들인 과거 미국의 외교정책에 오점들, ,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지원의 문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패권정책, 중동국가들의 비민주성과 그러한 독재정부와 미국의 유착관계 등을 간과하는 것이 상황을 심각하게 오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경우 단순화는 쉬운 답을 제공하지만, 본질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화된 사고와 신학이 끼치는 폐해들을 우리는 미국과 한국의 교회들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헌팅턴 교수

                                              헌팅턴 교수의 책 '문명의 충돌'
     그동안 중동에서의 미국의 정책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목표들을 추구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석유를 확보해야 하고, 또한 미국의 최우선순위인 이스라엘의 이익과 안보를 보장해야 하고, 이러다 보니, 실제로는 수많은 독재정부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겉으로 미국의 가치(민주주의, 인권, 경제발전)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미국의 이익(냉전에서의 승리, 석유이익확보, 이스라엘 지지, 테러와의 전쟁)이 더 중요했고, 이러한 괴리는 아랍인들에게 심각한 환멸과 반미감정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입니다. 부시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와 알카에다와의 연계가 발견되지 않자, 후세인이 독재정부이기 때문에 침공이 합리화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미국은 자신의 다른 동맹국들 사우디 아라비아, 파키스탄, 이집트, 요르단, 쿠웨이트 등등도 침공해 민주화를 시켜야 했겠죠. 앞에서 말한대로, 파키스탄은 최근에 민간정부가 들어서긴 했지만, 군부와 ISI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재국가에 가깝고 테러와의 전쟁 내내 쿠테타로 집권한 무샤라프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상황은 민주주의의 기준에서 최악에 가깝고 일종의 중세시대에 가까운 상황인데, 정당이나 헌법조차 없을 뿐더러, 여성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개종을 하게 되면 국가가 목을 베거나 국외로 추방할 권리가 있을 정도 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많은 기독인들이 이제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라크 전쟁은 잘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는데,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이 사우디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우디가 최대의 산유국이고, 유가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석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기로 합의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은 중동의 안정과 이스라엘의 안보라는 이름으로 이집트에서도 무바라크의 독재정부를 지지해 왔습니다. 이집트에서 시민들이 무바라크에 대항하는 시민혁명을 일으켰을 때 미국이 이를 선뜻 지지하지 못한 이유이지요.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한 점령정책과 인권유린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함으로서 아랍인들의 공분을 사 왔습니다. 결국,이슬람의 문화와 종교가 근본 원인이라는 헌팅턴의 주장은 단순한 설명을 원하는 미국인들에게 쉽게 지지를 받고, 과거의 정책에 대한 불편한 양심을 잊어버리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테러리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듭니다. 귀에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일종의 거짓선지자인 셈이지요
 

     사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테러조직이 중동의 시민들의 삶과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가 뭐가 있습니까? 말 그대로 공포(Terror)와 분쟁만을 안겨주었을 뿐이고, 아랍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키고, 진정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가로막은 역할 밖에 한 것이 없지요. 예를 들어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중동에서도 시민혁명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테러리즘은 힘과 지지를 잃어갈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상당히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iv]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리즘이 이제까지 지속 되어 온 것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내재한 모순으로 인한 반미감정이 워낙 극심하고, 그것이 테러리즘에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왜 그러한 반미감정이 일어나는가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엄청난 무기와 첩보전을 통해서도 테러리즘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빈 라덴이 사살 된 후, 미국 언론에서 진행된 또 하나의 논쟁은 바로 고문의 효용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특히 폭스 뉴스를 비롯한 미국의 보수 언론들은, 오바마가 정치적으로 유리해진 상황을 못견디고, 이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는데, 특히 과거 부시정부의 인사들을 불러다가 고문을 허용했던 것이 빈 라덴의 위치를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전 부통령 체니, 전 국방부장관 럼스펠드, 그리고 법무부에서 일하면서 고문과 관련해 법률조언을 했던 버클리대 법과 교수 존 유 (John Yoo)등을 불러다가 인터뷰를 했는데, 특히 존 유 교수는 아부그레이브와 관타나모 기지에서 고문이 허용되도록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테러리스트에게는 제네바 협정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상당한 비판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최근 폭스 뉴스의 마이크 허커비 쇼에 출연한 그는, 지난 10년간 자신이 비난을 받았지만, 고문의 효과가 빈 라덴의 사살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했고, 호스트인 허커비도 고문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계 미국인인 존 유 교수가 고문이라는 국제법에도 위반되고 인권을 유린하는 정책을 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안타깝고, 아무리 보수인사라지만 남침례교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인 허커비가 자신도 고문의 중요성을 지지한다고 하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v] 같은 보수 정치인이긴 하지만, 베트남 참전시 포로가 되어 5년동안 잡혀서 고문을 경험했던 존 메케인은 다행히도 고문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재확인했습니다.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 유교수의 사진

                 존 유 교수를 전쟁범죄로 기소해야한다고 비난하는 시위자들의 모습

     고문이 빈 라덴의 위치 파악에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지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고문이 도움이 되었다면, 부시 정부는 두번의 임기가 끝나도록 왜 빈 라덴을 잡지 못했고, 이라크 침공을 비롯해 왜 그렇게 처참한 정보의 실패를 거듭했는가에 대답을 해야하겠죠. 하지만 실제로 도움을 주었더라도 그런 방식을 통해 과연 테러리즘을 해결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엄청난 군사력에도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라크전쟁에서도 수렁에 빠저 헤어나오지 못하고 제2의 베트남전이 되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모두가 정당성(legitimacy)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소련과 구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진 것을 보면, 고문과 도청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해도, 정당성이 없는 싸움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잘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정당한 목적과 더불어 정당한 수단이 도입되어야 장기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2005)을 보면 이스라엘 특수조직이 검은 구월단의 테러에 보복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의 지도자들을 역시 테러를 통해 암살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데, 결국 테러는 테러를 낳을 뿐이며, 암살된 테러 조직의 지도자들은 더욱 악독한 인물들로 교체되고, 테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인간성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영화 뮌헨(2005)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이 오늘 테러조직들의 뿌리가 된 것을 살펴보면, 손쉬운 문제 해결을 위해 도입한 불법적인 수단들은 결국 언젠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냉전기에 공산주의 소련을 저지하는 것은 어느정도 정당성이 있었지만, 그 목적이 모든 것을 합리화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고, 오늘도 테러리즘을 저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수단을 합리화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니체는 괴물과 싸울때는 당신이 괴물과 닮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사단의 시험도 결국 한마디로 말하면, ‘목적을 위해 수단을 합리화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정당성을 이야기 하면 현실주의자들은 순진한 이상주의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정책이나 전쟁이라도 정당성이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당성이 국내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담보하고, 국제적으로 동맹국들의 지지를 담보하며, 분쟁 지역에서 현지인들의 지지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전 이후 미국인들도 “winning hearts and minds”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배우게 되었죠. 이러한 정당성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정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국제정치와 관련된 논의를 들어보면, 미국의 지도자들은 물론이요, 많은 미국의 기독인들도 하나님이 아닌 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우상으로 섬긴다는 것은 번영과 안보가 궁극적 가치가 되어 다른 가치들과 충돌할때 최우선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문도 괜찮고 도청이나 납치, 암살도 괜찮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정의보다 국가 안보가 중요하다는 말외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다소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을 하면, 기독인들 중에서는 마음이 불편한 분들이 꽤 있으실 줄 압니다. 흔히 미국에 대한 입장은 친미냐 반미냐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갈라지는데, 저는 미국이 하는 것은 언제나 옳고 정의로우며 미국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친미, 그리고 미국이 곧 모든 악의 근원이며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곧 정의라는 반미도 기독인의 입장이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언제나 이러이러 하다라고 말한다면, 벌써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지요. 기독인들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거리를 두고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에서 지지할 것은 지지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 일치한다면 좋은 일이겠는데, 그 두가지가 충돌할 때, 우리가 국가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아닌 국익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지요. 성경은 이를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절대화를 상징하는 금신상앞에 절하기를 거부했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 처럼, 모두가 옳다고 믿는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독인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도해 봅니다. 설령 단기적인 손실이 있더라도, 목적과 수단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 궁극적으로 정의와 생명, 평화의 길이라는 것이 성경과 역사가 말하는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나오며

 

      빈 라덴이 사살된 것으로 이 글을 시작했지만, 빈 라덴의 죽음 자체에 글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은 것은, 이제는 빈 라덴 개인이나 그의 죽음 자체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빈 라덴이 더 이상 테러를 계획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기독인으로서 한 개인의 불행한 죽음을 축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의 그를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로 즉결 사살 한 방식에도 문제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11 테러 이후 공포심을 이용해, 정당성 없는 이라크전쟁을 밀어부친 부시 정부가 거짓말로 점철된 임기를 보냈다는 것과 비교한다면, 적어도 빈 라덴을 추적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오바마가 상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본 바 대로, 드러난 현상인 테러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과거 정책을 반성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비롯한 중동의 평화와 민주화가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테러리즘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i] Chalmers Johnson, ‘American Militarism and Blowback: The Costs of Letting the Pentagon Dominate Foreign Policy,’ New Political Science, Volume 24, Number 1, 2002, p.23.; Chalmers Johnson, ‘American Militarism and Blowback: The Costs of Letting the Pentagon Dominate Foreign Policy,’ New Political Science, Volume 24, Number 1, 2002, p.23-25

[ii] 2004년에 버클리대에서 진행된 찰머스 존슨의 인터뷰(Militarism and the American Empire)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oOjYteh-ZRs )

[iii] 2007년에 진행된 폴과 루디 줄리아니간의 토론은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cQrwKr_b4Lg )

[iv] 지난 5 5 CNN 에서 진행된 마이클 무어의 인터뷰는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CkOSgSsNXwM )

[v] 허커비와 교수의 인터뷰는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video.foxnews.com/v/4683623/huckab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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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yu Kim 2011/05/18 09:33  Addr Edit/Del Reply

    I earnestly and completely agree with your opinion.

안녕하세요. 개인적으로 이번학기에 박사과정 종합시험이 있어서 연재를 한참 쉬다가 오랫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이번에는 최근에 뉴스의 초점이 되었던 빈 라덴 사살과 관련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빈 라덴의 죽음과 숨겨진 역사 1

 

     지난 5 1일 오바마 대통령은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다고 발표했고, 뉴스에서 연일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백악관 앞에서는 수백명이 “U.S.A.”를 외치는 등, 많은 미국인들이 이에 대해 환호를 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2001년 알카에다가 일으킨 9.11 테러로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D.C.의 펜타곤 등이 공격당하고 약 3천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을 생각하면 미국인들의 이러한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과연 빈 라덴의 죽음과 지난 10년간 진행되어 온 테러와의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고, 답하기 힘든 질문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일지라도, 기독인의 입장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이 적절한가, 그리고 체포후 법정에 세워서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닌, 당시 비무장이었던 그를 일종의 암살에 가까운 방법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는 것이 정당한 방법이었나, 또한 근본적으로 미국은 선이고, 테러리스트 혹은 이슬람을 악이라고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는가, 테러리즘의 원인은 무엇이고 현재의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과연 테러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 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러한 미국의 정책이 이슬람권 선교에 도움이 될 것인가 등등의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질문에 다 답하기는 불가능 하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빈 라덴이라는 인물의 과거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서, 위의 질문들에 대해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빈 라덴 사살을 발표하는 오바마 대통령
                                          빈 라덴 사살을 다룬 타임지 표지 사진

                빈 라덴 사살 발표이후 백악관 앞에 모여 환호하는 미국 시민들 (연합뉴스)

     먼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도입차원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 두가지 간단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빈 라덴을 포함해 9.11에 가담한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분(90%이상)의 국적이 어디냐는 질문이고, 두번째는, 빈 라덴이 살해된 지역이 어디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는 질문입니다.

      첫번째 문제의 답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비교적 쉬운 질문이지만, 미국에서 진행된 설문조사 (Program on International Policy Attitudes Survey)에 따르면 불과 설문자의 27%만이 답을 맞췄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중 하나이며, 미군이 엄청난 규모로 주둔해 있는 국가인데, 9.11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분이 이라크나 이란, 아프가니스탄 같은 반미 국가, 혹은 소위 불량국가 출신이 아닌 미국의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라는 것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번째 질문의 답인 빈 라덴이 발견되고 살해된 지역은, 최근 뉴스보도를 통해 잘 알려진 대로, 아프가니스탄의 산간지역이 아닌,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불과 38마일 떨어져있고 파키스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아보타바드(Abbottabad)라는 부유한 교외지역이었습니다. 파키스탄 역시 미국의 동맹국으로,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중요성 등으로 인해, 미국에서 해마다 10억 달러 이상씩의 엄청난 원조를 받아왔는데, 이 사건 이후, 자기네 수도 근처에 빈 라덴이 살고 있는 것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요, 빈 라덴을 숨겨주거나 묵인해 왔다면 동맹관계를 배신한 행위라며, 미국은 파키스탄을 엄청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CIA 국장 레온 파네타는 최근 미 하원에서 빈 라덴의 은거지 위치로 볼 때, 파키스탄이 "정말 무능하거나 아니면 빈 라덴에 연루되어 있다(either incompetent or involved)"고 볼 수 밖에 없고, 둘 중에 어떤 경우든 심각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어떻게 빈 라덴은 파키스탄의 수도 근방에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 테러조직들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하는 가를 살펴봐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금 시간을 거슬러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던 시점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이를 소련이 아프간을 통과해 중동의 석유에 접근하고 부동항(겨울에도 얼지않는 항구)을 확보하고자 하는 '팽창 전략'으로 해석하여, 당시 카터 대통령은 유명한 '카터독트린(외부세력이 페르시아만을 통제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필요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막겠다는)'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소련을 약화시키고 아프간에서 철수하게 하기 위해 79년부터 3천만달러의 예산을 책정해 '사이클론 작전(Operation Cyclone)'을 시작하였고, 1985 3월 후임자인 레이건 대통령은 국가안보 결정 명령166호에 서명하여 지원액을 25천만달러로 늘렸고, 2년 뒤인 1987년엔 63천만달러까지 증액하여  무자헤딘에 대한 비밀 군사지원이 총 10년간 지속됩니다. 그 기본 전략은 파키스탄 정보국인 Inter-Services Intelligence(ISI)를 통해 근본주의 이슬람세력인 무자헤딘 게릴라를 지원해 소련에 맞서 싸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대통령 카터(오른쪽)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운데), 그리고 파키스탄의 지아 대통령(왼쪽)

                            전 대통령 레이건(왼쪽)과 파키스탄의 지아 대통령 (오른쪽)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초청해 백악관에서 대화하는 전 대통령 레이건


     
이에 따라
1986 1992년 사이 10만명이 넘는 이슬람 전사들이 CIAMI6(영국 첩보부)의 감독하에 파키스탄에서 훈련받았고 영국 특수부대 SAS는 미래의 알카에다와 탈레반 전사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쳤으며, 무자헤딘 고위 지도자들은 버지니아에 있는 CIA캠프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우디에서 온 빈 라덴을 포함, 전세계 43개국에서 온 35천명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아프간 무자헤딘과 함께 싸웠고, 수만명의 새로운 자원자들이 ISI CIA가 후원하는 파키스탄의 마드레사(이슬람학교)에 몰려들었습니다. 또한 엄청난 규모의 재정과 스팅어 미사일을 비롯한 무기들이 지원되어 전쟁의 판도를 바꿔 놓았는데, 예를 들어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스팅어미사일을 쏠 때마다 거의 70%의 확률로 소련 헬기와 비행기들을 격추시켰고, 한발에 6~7만달러 하는 스팅어 미사일로 소련군에 거의 2천만 달러의 손실을 입혔습니다. 결국 소련은 14,427명의 군인, 118대의 전투기, 333대의 헬기와 다른 엄청난 손실을 입고 아프간에서 철수하였고, 이는 소련의 붕괴에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카터정부의 국가안전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는 1998년 프랑스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아프간에서 수행한 미국의 비밀작전은, 소련을 미국의 베트남전에 비견되는 수렁으로 끌고 들어간 뛰어난 아이디어였다고 자랑한 바 있습니다. [i]

 

                                          대 소련 투쟁 당시 무자헤딘 게릴라들 
                                      미국이 지원한 스팅어 미사일을 사용하는 장면 


      당시 미국의 최우선순위는 냉전에서의 승리였기 때문에, 소련을 약화시키고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이었던 무자헤딘은 미국 언론에서 아주 호의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들은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서 외부 침략자들에 저항해온 용맹한 전사들로 그려지고, 반면 소련군은 엄청난 무력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저항세력을 토벌하는 잔인한 침략자로 묘사됩니다. 한 예로 우리가 잘 아는 실베스타 스탤론의 영화 람보III(1988)’는 베트남전에서 활약했던 람보가 아프간에 가서 무자헤딘을 도와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심지어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 영화를 용감한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바칩니다(This Film is dedicated to the gallant people of Afghanistan)’라는 헌사가 나올 정도입니다. 오락영화이긴 하지만, 당시 아프간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또한 2007년에 나온 영화 찰리윌슨의 전쟁(Charlie Wilson's War)’을 보면, 플레이보이면서 냉전의 전사였던 하원의원 찰리 윌슨이 어떻게 무자헤딘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적 국제적 수단들을 동원해 활약하는지를 잘 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CIA는 무자헤딘 게릴라의 사기를 진작을 위해 코란 수천권을 인쇄해서 배포할 정도였습니다.[ii] 지금의 관점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인데, 쉽게 말해 소련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수단이든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작전은 국가안보라는 차원에서 미국 국민들 대부분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진행됩니다.

 

                                 영화 람보III (상), 영화 찰리윌슨의 전쟁 (중),
                     무자헤딘들과 함께 촬영한 하원의원 찰리윌슨의 실제 사진 (하)


      문제는 이러한 비밀 작전을 수행하면서, 과격파 이슬람으로서의 무자헤딘 게릴라의 성격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또한 파키스탄의 ISI를 대리인으로 사용하면서 ISI가 다른 목적을 위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무자헤딘 지도자 중, 굴부딘 헤크마티아르(Gulbuddin Hekmatyar) 같은 인물은 유명한 6개의 헤로인 공장을 소유한 마약거래상이자 가장 무자비하고 극단적인 이슬람 군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하원의원 찰리윌슨과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 등이 ISI에 수억달러의 지원을 보낼 때, 그 지원금의 거의 절반을 받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CIA의 윌리엄 케이시는, 전쟁을 아프간을 넘어 소련까지 확대시키고자 하는 헤크마티아르의 극단적 성향으로 인해, 그를 특별히 선호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iii]

 

          전 CIA 부국장 리차드 커(오른족)와 함께 한 헤크마티아르(왼족). 1988년 이슬라마바드

      이러한 미국의 비밀 작전에서 마약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는데,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재정지원과 더불어, 상당량의 자금은 황금 초승달 지역(the Golden Crescent)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마약 거래를 통해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 CIA가 정부로 부터 받는 예산은 의회에 감사와 보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불법적이거나 비밀리에 수행되는 작전들에 사용할 수 없고, 따라서 외부 예산을 확보하는데, 여기에 마약이 중요한 재정공급원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베트남전 당시 Air America 항공을 통해 마약을 해외로 운송했는데, 이는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2007)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습니다. CIA 작전이 시작된 지 2년 안에 파키스탄과 아프간 국경지역은 세계 최대의 헤로인 생산지역이 돼 미국내 수요의 60%를 공급했고, 파키스탄에서 헤로인 중독자는 1979년 사실상 전무했으나 1985년에 12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무자헤딘이 승리했던 1986년경 아프간은 전세계 헤로인의  40%가까이를 생산하고 있었고, 1999년에는 80%를 생산할 정도였습니다. 1995년에 전직 CIA 아프간 담당자 찰스 코건(Charles Cogan)은 마약거래가 소련을 철수하는 주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부산물로 어쩔수 없이 나타났다고 합리화 했는데, 결국 마약 자금이 CIA작전에 중요하게 사용되었음을 인정한 셈입니다.[iv] 9.11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이 파트너로 선택한 북부동맹의 군벌들 역시 마약왕들이었고, 2009년 경에는 전세계 아편의 93%가 아프간에서 생산되었고, 현재 아프간 정부 내 정치인들과 고위층들도 공공연히 마약거래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현 대통령 카르자이(Karzai)의 친동생인 아흐메드 왈리가 바로 칸다하르를 지배하는 통치자이며 아프가니스탄의 '마약왕'이며 CIA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되기도 했습니다.

 

      CIA ISI의 지원을 받은 헤크마티아르는 또한 오사마 빈 라덴과 아주 가까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v] 오사마 빈 라덴이 CIA에서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느냐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결국 그도 미국의 지원 하에 치러진 아프간전쟁의 와중에 성장하고 적어도 간접적 지원을 받은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또한 빈 라덴 개인도 중요하지만, 파키스탄의 ISI, 탈레반, 알 카에다의 동맹 관계가 결국 냉전기 미국 패권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이 주목해야할 사실입니다.

 

      미국이 직접 지원이 아닌, 파키스탄의 ISI를 중개자로 해서 비밀리에 무자헤딘을 지원한 것은 소련의 파괴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는데, 여기서도 여러 부작용들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파키스탄은 이 비밀작전에서 얻은 자원과 경험을 자신의 적대국인 인도와 싸우는데 이용했고, 카슈미르 등의 분쟁지역에서 아프간전쟁에서 체득한 게릴라 전술을 활용했습니다. 또한 파키스탄 군부와 ISI는 무자헤딘을 교육하면서 이슬람을 완벽한 사회정치적 이념으로 가르치고, 무신론자인 소련 정부에 맞서 지하드를 일으키며 소련의 해체와 구소련 국가들에서의 무슬림 공화국 건설까지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교육했습니다. 실제로  파키스탄은 아프간 전쟁 이후에도 소련의 해체와 중앙아시아 지역 6개 무슬림 국가 건설을 지원하고 개입한 바 있습니다. 파키스탄 내부에서도 CIA ISI의 관계는 지아 울 하크 장군(Zia Ul Haq)이 부토 총리를 쿠테타로 축출하고 세운 군사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결국 파키스탄 내에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권력집단이 된 ISI와 파키스탄 군부는, 현재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과 민간 정부가 어쩌지 못하는 실질적인 파키스탄의 실세가 되어있고 핵무기도 이들의 통제하에 놓여있습니다. 이렇게 80년대에 미국의 지원하에 무자헤딘 네트워크와 극단주의 이슬람운동이 급속히 성장하자, 파키스탄의 전 총리였던 부토 여사는 미국을 방문했던 1989년 당시, 부시 대통령(아버지 부시)에게 당신들은 지금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경고할 정도 였습니다.[vi] 다시말하지만, 냉전기 미국의 비밀작전을 진행하면서 형성된 파키스탄 ISI  탈레반, 알카에다간의 견고한 동맹관계는 쉽게 통제할 수 없는 네트워크가 되어 버렸고, 오늘 미국이 골치를 않는 테러조직의 뿌리가 여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vii]

 
      아프간과 관련된 또하나의 정책 실패는, 소련이 철수하자 마자 미국이 아프간에서 즉각적으로 관심을 잃고 손을 떼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무자헤딘과 아프간을 소련을 패배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을 뿐, 아프간의 미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련의 지배는 60만에서 2백만에 가까운 아프간 민간인의 생명을 앗아갔고, 5백만이상의 난민을 발생시켰습니다. 89년 소련이 철수하자 놀라운 승리를 자축했지만, 미국은 전쟁으로 찢겨진 아프간에 대해서는 이제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무자헤딘에 대한 재정지원과 파키스탄의 난민 지원을 바로 끊어버렸고, 아프간 사회의 재건을 위한 진지한 지원은 전무했습니다. 1992년 마침내 미국은 파키스탄에게 책임을 넘기고 아프간에대한 모든 개입을 종료했습니다. 아프간이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와 관심에서 사라진 후, 아프간의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되기 시작했는데, 소련이 떠나고 난 후, 통합된 리더쉽의 부재는 다양한 무자헤딘 파벌간의 권력쟁탈전을 낳았고 군벌들의 난립과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예로 1994년에만 수도 카불에서 만명 이상의 인명이 사망했고, 마침내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극단적 이슬람 세력인 탈레반(Taliban)이 카불을 장악하고 근본주의 이슬람국가를 설립해 200년에 95%의 국토를 장악하게 됩니다. 탈레반 정권을 외교적으로 승인한 단 세나라중의 하나가 파키스탄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겠지요.

      알카에다(Al-Qaeda)는 빈 라덴과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이 파키스탄 페샤와르(Peshawar)에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외국인 출신의 무자헤딘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Maktab al-Khidamat)에서 유래합니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후 미국에 의해 소위 자유의 투사라고 불리었던 이들은, 1991년 사우디의 이슬람성지인 메카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사실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한 미국의 중동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이제 서방세계를 향해 테러를 시작합니다. 1993년 세계무역센터에 폭탄 테러를 하고 CIA 요원들을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93년 이들의 폭탄 테러에는 과거 무자헤딘 게릴라들을 위해 쓰여졌던 CIA의 폭파 교본이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viii] 상당히 의미심장한 내용이지요. 여론이 악화되자 알카에다 본부를 제공하고 있던 수단은 이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알카에다는 마침내 과거 대소련 투쟁의 동지였던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본부를 옮기게 됩니다. 1998 8 7일 알카에다는 동아프리카의 미대사관을 공격하고, 2001년 마침내 9.11 테러가 발생합니다.

 

                                                          2001년 9.11 테러


     
9.11을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테러가 일어나면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극적으로 달라지는데, 소련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영웅적 전사들에서, 인권을 유린하고 테러를 자행하며 마약거래를 일삼는 공공의 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어두운 면들은 미국이 이들을 지원하던 80년대에부터 동일하게 존재했던 문제들이고, 단지 냉전하에서 소련과 싸우는 미국의 필요에 의해 감춰져왔을 뿐이지요. 이와 유사하게, 유명한 노암 촘스키는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가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할 때는, 온갖 범죄행위들을 눈감아주다가, 독자노선을 가기 시작하고 파나마 운하에서 미국의 이익에 위협을 가하자, 바로 그를 깡패이자 마약장사꾼으로 비난하고 결국 침공해서 체포했다는 것을 예로 드는데, 사실상 그는 CIA 고용되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담 후세인도 이라크 전쟁시는 악당중의 악당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 80년대에 이란-이라크 전쟁시, 이란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미국은 후세인을 지지해 무기를 지원했었는데,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후세인은, 전쟁 후에 석유기업을 민영화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등,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시작한 후부터, 비난 받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 가르시아(Somoza Garcia)에 대해 했다는 다음의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 합니다. “He may be an S.O.B., but he’s Our S.O.B.” 외국의 지도자가 독재자냐 아니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미국의 이익에 합치하느냐라는 것이지요. 결국 미국 외교정책의 가치판단과 윤리는 상당부분 미국의 국익을 위해 쉽게 조작될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1983년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과 악수하는 젊은 시절의 럼스펠드. 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시 미국은 이란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라크를 지지하고 무기를 판매하였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빈 라덴이 파키스탄 수도에서 가깝고 군부대까지 주둔하고 있는 아보타바드에서 발견된 것에 대해, 최근 미국 정치인들과 언론은 엄청나게 분개하면서, 파키스탄내에 빈 라덴을 지원한 세력이 있다며 파키스탄 때리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지만, 군부대까지 있는 파키스탄 수도 근처에서 빈 라덴이 5년이상 은거하고 있었다면, 어떤 형태로는 파키스탄 내의 지원세력이 있다는 것(아마도 군부와 ISI내에 협력세력)이 거의 분명하겠지요. 이전에도 빈 라덴 이외에 상당수의 알 카에다 고위 지도자들이 파키스탄 영토 내에서 체포 된 바가 있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아흐마드 슈자 파샤 (오른쪽 끝) ISI 부장과
                            마이크 멀린 (왼쪽 끝) 미 합창의장 (사진: 한국일보)


      결국 9.11테러의 주범인 빈 라덴을 동맹국인 파키스탄의 어떤 세력이 숨겨주었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만, 이제까지 살펴본 80년대 미국의 비밀작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파키스탄 ISI를 통해 80년대에 무자헤딘을 훈련하고 무장시킨 것은 사실 미국이라는 것, 그리고 무자헤딘의 후신으로 나타난 것이 알카에다와 탈레반이라는 것을 기억해 본다면, 지금와서 그 관계가 깨끗하게 청산되었기를 바란다는 것이 오히려 우습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하다 보면, 미국인들은 상당히 선택적인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미국의 개입에 대한 과거 역사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과거 아프간에 대한 미국 개입의 역사를 설명했다면
, 다음 글에서는 그 의미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

[i] Le Nouvel Observateur, Paris, Jan, 1998

[ii] Steave Coll ‘Anatomy of a Victory: CIA’s Covert Afghan War,’ a article in the Washington Post, on July 19, 1992

[iii] Robert Dreyfuss, Devil's Game: How the United States Helped Unleash undamentalist Islam, New Work: Metropolitan books, 2005, p.268

[iv] Alfred McCoy, Drug fallout: the CIA's Forty Year Complicity in the Narcotics Trade. The Progressive; 1 August 1997.

[v] Steave Coll, Ghost War, The Secret History of the CIA, Afghanistan, and bin Laden, from the Soviet Invasion to September 10, 2001,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4. p.119.

[vi] Evan Thomas, 'The Road to Sept. 11,' Newsweek, October 1, 2001.

[vii] Steve Coll’s interview at the University of Berkeley (the Conversation with History) on March 15, 2005.

[viii] Michael Powelson, ‘U.S. support for anti-Soviet and anti-Russian guerrilla movements and the undermining of democracy,’ Demokratizatsiya, Spring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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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yu Kim 2011/05/18 09:12  Addr Edit/Del Reply

    Thank you for your clear essay.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성경은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인지의 여부를 결정했으며, 언약의 땅에서의 생존과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결정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고 그분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율법과 언약을 통해 자신이 원하시는 사회의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의 영역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 공평과 정의와 자비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2:3]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예레미야 33:15]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모세오경에 나타난 구약의 율법은 제사법, 십일조법 등 종교적인 법 뿐 아니라, 정결법, 도덕법, 희년법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공평과 정의의 원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기25:8-10]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칠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해야 했고, 칠년이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의 다음해인 오십년 째 해가 종이 해방되고 팔려간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희년입니다. 가나안 입성 시 땅은 지파와 가족 별로 공정히 분배되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방과 달리 땅을 영구히 팔 수 없었고, 팔았더라도 오십년 째 해는 원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습니다. 땅은 인간이 생산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주신 것이며, 그 땅의 분배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희년법은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헨리 조지에 의해 토지경제학으로 연구되었는데,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가 발전함에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는 현상과 이 레위기 말씀을 연구하면서, 땅값의 상승이 이자나 임금의 상승보다 언제나 빠르고, 경제발전으로 창출되는 부가 대부분 지주에게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강화함으로서, 과거 레위기에 나타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고, 경제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고 대천덕 신부님이나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등의 활동으로 많이 알려진 바 있는데,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음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대천덕,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홍성사; 성경적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www.landliberty.org)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언약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엄성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기 원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산수단, 생존의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것이 바로 땅이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간의 존엄성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정의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영구히 잃어버리거나, 땅이 일부 부유층에 독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서, 생산수단과 생존의 기반을 영구히 잃어버린 백성의 일부는 경제적, 정치적 노예가 되고,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된 소수의 부유층은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는 비극적 상황을 방지하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이러한 희년의 정신은 신약에 들어와, 흔히 예수님의 취임사로 불리는 누가복음 4:18-19에서 '은혜의 해'로 언급되고 있고, 예수님 승천 후 성령의 강림을 통한 자원의 희년을 통해 계승됩니다(이 부분은 다음에 올릴 글들을 통해 더 자세히 다뤄질 예정입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이러한 희년의 원리가 실천 될 때 나타나는 평화와 축복을 보여줍니다.

 

[열왕기상4:24-25]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 이쪽에 있는 모든 지역, 곧 딥사에서부터 가사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모든 왕을 다스리며, 주위의 모든 민족과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의 일생 동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미가 4:4]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전도서 9:7-9]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성경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산다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외적의 침략이 없는 것뿐 아니라, 사회 내에서도 경제적 정의와 공평이 이루어져, 구성원들이 자기의 생산 기반을 가지고 안정적 생활과 만족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희년의 정신이 구현된 사회입니다. 극도의 빈곤을 방지하고, 또한 극도의 탐욕을 방지하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필요가 채워지고 그분이 재어주신 구역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상태, 인간답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강력한 설계도를 우리는 율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실패합니다.

 

 [신명기 27:17] '이웃의 땅 경계석을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이사야 5:8]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열왕기상21:17-19] 주께서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 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위의 말씀들에서 보듯이
, 이스라엘의 극심한 타락기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장치 없이 노예로 팔리게 되는 악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양극화, 백성의 노예화, 성의 상품화는 토지제도의 문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예나 오늘이나 기득권층들과 부유층은, 더 많은 부를 갈망했고, 욕심으로 인하여 희년을 지키기 싫어했으며, 오십년이 되어도 점차 땅을 돌려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부의 증대를 통해 정치적 사법적 권력까지 갖게된 이들은 더 큰 욕망을 위해 자신들의 힘으로 공평과 정의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는 부의 집중과, 권력의 부패와 타락,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을 보면, 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끊임 없이 반복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가 단순히 돌에 절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상을 통해 제시되는 이방의 사회, 경제적 문화와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바알 숭배 사상은 대토지소유와 부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그리고 아세라 숭배는 끝없는 성적 욕망을 합리화 해주는 것이었습니다(참고도서: 하웃즈바르트,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 IVP).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줄로 재어주신 구역에서 살기 원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통해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와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에 만족치 않고, 더 많은 소유와 토지, 쾌락을 원하였기에 지속적으로 우상숭배와 이방의 시스템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이방의 공주로 시집온 이세벨에 의해 나봇의 포도원이 강탈당하는 사건은, 이스라엘 사회의 타락과 율법의 파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과 공평을 집행해야 할 정치권력이,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해 하나님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희년의 정신,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할 뿐 아니라, 이방을 본받아 극도로 양극화 되어 백성의 일부가 노예화 되고 인권이 무시되며, 개인윤리, 경제적 정의, 사법적 정의, 정치적 정의가 모두 무너지는 타락한 사회로 전락했습니다.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땅에서 뽑아내시며, 땅은 그들을 토하여 냅니다.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이라는 것으로 언약의 땅에서 그들의 생존이 보장 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했습니다. 언약을 무시하고 공평과 정의를 짓밟은 이스라엘이 땅에서 뽑히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9:6-7]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사야 1:21-23]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하나님은 망국이 임박한 상태에서도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고 종 된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 권력층과 가진자들의 악을 질타하십니다(예레미야 34).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이스라엘에게 처절한 심판이 임합니다. 이스라엘이 벌인 강포와 패역이 심판으로 그치게 되고 그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자, 비로서 그들이 지키지 않았던 희년과 땅의 안식이 이루어 집니다 (역대하 36: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로기 칠십년 이후 그 땅을 회복 시키시고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을,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행위를 통해 계시 하십니다. (32)

 

[예레미야 34:13-17]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 지 칠 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너희가 비로소 마음을 돌이켜서, 각자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줌으로써,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것도 나를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서 언약까지 맺으며 한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또 돌아서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다. 너희가 각자의 남종과 여종들을 풀어 주어, 그들이 마음대로 자유인이 되게 하였으나, 너희는 다시 그들을 데려다가, 너희의 남종과 여종으로 부리고 있다. 그러므로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두 너희의 친척, 너희의 동포에게 자유를 선언하라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것을 보고 무서워 떨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예레미야32:14-15]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증서들, 곧 봉인된 매매계약서와 봉인되지 않은 계약서를 받아서, 옹기그릇에 담아 여러 날 동안 보관하여라.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예로 부터 새로운 왕조나 정부는 언제나 토지개혁을 가장 먼저 실시했고, 정권이 망할 때에 이르면, 토지제도가 지극히 문란해져, 소수 귀족층이 땅을 독식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소작인, 노예, 유랑민으로 전락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양극화와 백성의 노예화가 극단화 되면, 민란, 혁명, 전쟁등이 일어나 정권의 교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타락한 사회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자, 하나님의 심판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힘과 재물이 그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룰 때 찾아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많은 경우 사회의 붕괴와 외적의 침입은, 그 사회 내부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데 실패한 결과입니다. 안보의 문제에 대해, 세상의 권력은 그것이 오직 힘과 재물로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하고, 안보를 위한 안보를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회의 안정과 생존은 언약의 순종 , 공평과 정의가 구현된 사회를 만드는가- 에 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외부의 위협을 부풀리고, 안보와 번영를 위해 공평과 정의를 희생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여,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를 만들고,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가 우리 사회 속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22:3-5]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너희가 이 명령을 철저히 실천하면, 다윗의 보좌에 앉는 왕들이 병거와 군마를 타고, 신하와 백성을 거느리고, 이 왕궁의 대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맹세하지만, 너희가 이 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바로 이 왕궁은 폐허가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토지정의, 경제정의의 문제는 우리 삶과 신앙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헨리조지가 관찰했듯이 지대가 오르는 속도는 언제나 임금이나 이자의 상승 속도보다 빠르기에,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번 사람들 상당수가 부동산을 통해 불로소득을 쌓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IMF 이후 이러한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있는데, 2006년 행정 자치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상위 1% 인구가 전체 토지 57%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2009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이 33.4%에 이르고 실제 비율은 더 높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한 최근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약 54만가구가 월 20만원도 못 벌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의 편중과 중산층의 몰락,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견제장치를 약화시켜 부의 양극화를 가속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소위 카지노 캐피탈리즘이라고 하는 투기형 자본주의가 판을 치면 정당한 방법으로 일해서 돈 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지고 경제활동 전반이 투기화 되어 돈이 돈을 벌고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 됩니다. 현대에는 노예제가 없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양극화가 진행되면, 하위계층은 낮은 임금으로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과 빚을 벗어날 수 없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사채업자나 포주들이 피해자를 빚으로 얽어매어 노예처럼 부리는 것처럼, 개인의 기본적 생존수단이 보장되지 않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권이 껍데기만 남아 무의미 해 집니다
     2009년의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약자의 경제권과 인권이 얼마나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임대인이나 피고용인의 권리 뿐 아니라, 토지소유자, 고용인의 권리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의 입장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법과 공권력은 언제나 가진자의 편이 되기 쉽고, 갈등이 있을 경우 강자에게는 그것이 '이익과 손실'의 문제인 반면, 약자에게는 그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공권력으로 무참히 진압하는 사회는 이미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사회도 희년의 정신에 나타난 기본적 경제권이 무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관심있는 분은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를 한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미국 의료보험 시스템의 심각성은 잘 알려져 있어서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중하위 계층에서 의료비용으로 고통받거나 파산하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고, 최근의 경제위기로 집을 차압 당하고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단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비극을 합리화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라는 차원에서 현실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영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서 루즈벨트의 '제2권리장전'을 언급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꼽히는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4년 연두교서 연설에서 제2 권리장전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에 명시된 '정치적 권리'가 모든 국민의 평등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아래에서 언급되고 있는 '경제적 권리'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특정한 경제적 진실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2 권리장전 아래 새로운 안전과 번영의 토대가 신분과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마련될 것입니다그것은 합당한 임금의 일자리를 가질 권리, 적절한 음식과 의복과 즐거움을 누릴 권리, 모든 농민이 작물을 기르고 팔아 그와 가족이 걸맞게 생활을 영위할 권리, 모든 기업인이 사업을 함에 있어 불공정 경쟁과 국내외 독점체제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모든 가정이  적절한 주거를 누릴 권리, 적절한 의료보호와 좋은 건강을 누릴 권리, 노령, 질병, 사고, 실업 등의 경제적 공포로부터 적절히 보호받을 권리, 훌륭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권리, 이 모든 권리들이 말하는 건 사회보장입니다. 우리는 이들 권리의 이행을 통하여 인류 행복의 새로운 목표에 정진해야 합니다.. 자국에서 사회보장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세계 평화도 지속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루즈벨트는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는 정치적 권리가 무의미해지기 쉽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희년의 정신에 상당히 부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네 번째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차대전의 종전을 앞둔채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경제적 권리를 법제화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이후 특히 레이건 대통령 시기를 거치며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국 사회의 경제권과 약자에 대한 보호는 더욱 더 약화되고, 감세정책으로 대변되는 가진자의 이익에 대한 철저한 옹호가 미국의 정책과 법률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미국이나 한국의 보수 기독교회가 공평과 정의의 원칙 보다는, 현대의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로 복음을 개인적 내세적 의미로 축소하고, 하나님 나라를 오늘 이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닌 죽은 후 가게될 천국으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안에 자본주의 정신과 반공주의(엄밀히 말해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의에 대한 주장을 무조건 좌파로 매도하는 매카시즘)가 복음보다도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공평과 정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강자의 횡포로 인한 약자의 고통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함과 분노를 듣지 못하고 있는 사실 때문입니다.   

[시편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예레미야 5:26-29]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미가3:1-3] 그 때에 내가 말하였다.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의 지도자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너희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 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 살려 달라고 주께 부르짖을 날이 그들에게 온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그렇듯 악을 저질렀으니, 주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아모스 2:6-8]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에스겔 22:29-31]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국 이 시대의 지배적인 우상은 맘몬으로 상징되는 물신주의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우상을 분별하고 비판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맘몬의 포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이 사회에 구현하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우리 사회의 약자들)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물신주의 숭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거짓된 복음을 이야기 하고, 교회가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의 여부를 결정했듯이, 오늘날도, 기독인의 숫자나 교회의 숫자가 이 사회를 기독교 사회라고 보장해 주지 못하며,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방지해 주지 못합니다. 기독인과 교회의 숫자가 많다고 기독교 국가가 된다거나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를 축복하신다는 생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또 하나의 '선민의식'에 불과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가 억압과 고통을 받을 때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 줄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기독인들과 교회는 바른 사회 윤리를 외치고, 불의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희년의 원리를 살펴볼 때에, 우리에게는 '자선과 구제'를 통해 약자를 도와야 할 책임과 더불어,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도록 해야할 책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룻기는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자발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구조적인 '희년제도와 기업무름제도'가 어떻게 남편을 잃은 과부라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구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먼저 자선과 구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대변합니다.

레위기19:9-10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신명기24:19-22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말아라. 그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이다. 그래야만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너희는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딴 뒤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포도를 딸 때에도 따고 난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명기23:24-25 너희가 이웃 사람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지만, 그릇에 담아가면 안 된다. 너희가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

신명기14:28-29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출애굽기23:10-11 "너희는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서,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 너희의 포도밭과 올리브 밭도 그렇게 해야 한다

    

     위의 레위기19:9-10과 신명기24:19-22에 따르면, 추수할 때 지나치게 철저히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의도적으로 조금씩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는 어느때나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도둑으로 정죄당하지 않으면서 당장의 허기를 채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신명기 14:28에 따르면, 매 삼년 째에는 십일조를 모아 사회적 약자들다른 직업이 없는 성직자, 외국인, 과부, 고아들-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출애굽기23:10-11에 따르면 7년마다 휴경하는 것에는,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들이 거기서 자라난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룻기 2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한 자들에게 남은 곡식을 줍게함으로서, 이러한 자선과 구제의 원리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또한 4장을 보면 희년의 원칙에 따라 기업무름(가난한게 된 사람의 땅이나 자식없이 죽은 사람의 아내를 가까운 친척이 취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유업이 끊어지지 않고 가족들이 빈곤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제도)을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와 롯은, 자신의 게으름이 아닌, 자연재해와 남편의 죽음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자칫하면 빈민이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이자 여성, 그리고 과부로서, 다중적 약자였던 롯이라는 한 여성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실천되고 있었던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 제도적인 희년제도에 의해서, 보호받고 구제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 사회속에서도, 기독인들이 개인적으로는 적극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으로 복지제도와 경제정의, 토지공개념 등의 확립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형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정의롭고 공평하며 인애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 것을 촉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실천된다면, 보다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고, 우리 사회의 고통과 악이 상당부분 덜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이러한 원칙들을 명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며, 정의와 공평과 인애가 넘치시는 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부디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성경에서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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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슬란 2011/08/06 17:41  Addr Edit/Del Reply

    희년이 하나님의 마지노선 같아 보이네요..
    그렇게라도 회복시키시고 보호하시려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기독교의 역사속에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가 침투해 들어온 것에는,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격을 '민족적, 인종적 관점'으로 오해해온 것도 큰 영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구성원의 대부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열 두 아들의 혈연적 후손으로 구성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은 혈연 보다는 언약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였습니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수차례 반복됩니다. 동시에 혈통적으로 비 이스라엘일 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정의를 사모하여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은 이스라엘에 편입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 다말, 라합, ,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 등 다수가 이방출신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누구나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36-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렘18:27-29]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개정개역)

[이사야 56:3-7]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에스겔44: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아모스 9:7]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디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이 나라면 블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 내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온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위의 말씀들을 보면, 출애굽 당시부터 다양한 족속들(이집트 내의 피압박자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발했었고,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마음과 육체의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혈연에 기반한 공동체라기 보다 (그들중 다수가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일 지라도), 언약에 기반한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 할 경우 백성중에서 끊쳐진다는 것은, 단순한 혈연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약의 땅(The Land of the Covenant)’, 즉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진 땅이며,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앞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스라엘이 그 땅을 얻게 된 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악이 극에 달해 땅에서 뽑힐 정도로 관영했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시고, 그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으십니다. 러므로 그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이 특별한 백성이고,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안보와 번영을 무조건 적으로 보장하신다는 '선민사상'과 정확히 충돌합니다. 심지어 성궤를 가지고 나가도 죄가 있으면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어떤 '상징, 명칭, 이름, 혈연'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가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원칙을 현재 국제관계의 상황에 적용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현재 민족국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학살과 폭력에는 눈을 감는, 미국과 한국 기독인들의 입장이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세계 많은 민족 국가중 하나일 뿐인 국가 이스라엘을, 성경 예언의 성취로 확신하거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언약공동체이자 신앙공동체였던 구약의 이스라엘과 등치 시킬 수 있는지는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설령 그것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인종이 아닌 언약의 순종여부를 보고 심판하셨던 성경의 역사를 볼 때, 팔레스타인 땅이 무조건 인종적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인가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지원과 강력한 힘에 기반해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가는 이스라엘은, 다윗 보다는 골리앗에, 피해자 보다는 압박자와 가해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수천명의 팔레스타인들이 적절한 재판도 없이 구금되어 있고, 지난 2008년 12월 27일 가자지구 전쟁때는 무방비 상태의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1400명 가량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살해되었습니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도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 사망한 이스라엘인은 8년동안 20명에 불과한 반면, 이스라엘 전투기가 하루 공격으로 3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흔한일이라고 합니다. 2010년 1월에는 모사드 요원으로 추청되는 암살자들이 유럽과 호주 등의 여권을 위조해 두바이의 호텔에서 하마스 간부를 암살하기도 했고, 2010년 5월 31일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향하던 국제 구호선의 승선자들에게 발포해 10여명을 숨지게 하는 등, 이스라엘의 정책은 말 그대로 국제법과 인권을 무시하고 국가 테러를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세의 기독인들은 반유대주의에 기반해
, 유대인들을 처절하게 차별하고 핍박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현재 보수적 기독인들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식의 반대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스라엘이 핍박과 차별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내에서는 홀로코스트가 다른 역사상의 학살들보다 특별하고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이나 (실제로 북미와 남미의 원주만들에 대한 학살은 숫자나 처참함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에도,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무시되다 시피 한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문제제기도 곧 '반유대주의'로 취급되고, 결코 용납될 수 없다라는 식의 분위기가 미국 내에서 팽배한 것도 상당히 기이한 현상입니다. 심지어 미국의 몇몇 국제정치 학자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스라엘의 로비에 의해 납치 되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예전에 한 유대인 친구와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웃으면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유대인들보다도 오히려 이스라엘 문제에 열을 올리고 극단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을 보이는 것이 자기도 신기하다는 말을 하더군요. 실제로 미국의 팻로버트슨 목사 같은 경우는, 팔레스타인의 완전 점령을 주장하는 이스라엘 극우파의 입장을 지지해 왔는데, 지난 1995년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개념 아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시도했던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암살과 2006년 샤론 전 총리의 뇌출혈로 인한 사망을 하나님의 땅을 나눈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까지 주장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조악하고,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을 상당수 미국 기독인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교 신자들이 구약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마음과, 마지막 때에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독인들에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것과 현재 국가 이스라엘의 정책은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상식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에 비춰볼때,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상당히 비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한편, 미국의 보수기독인들안에는 “God bless America”로 대표되는 자국중심주의와 기독교신앙의 결합이 두드러집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고 그렇기에 이며,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실 거라는 생각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먼저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적인가, 그것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인구가 많다고 해서 그 국가가 기독교 국가인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운동이 일개 국가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가 등 의문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축복을 받을 것이며, 이방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구약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의 오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궤를 가지고 나갔어도, 이스라엘 안에 죄가 있을 경우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오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느냐 였습니다. 언약을 지킨 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를것을 의미했는데, 하나님은 혈연이나 기독인들의 숫자가 아닌, '정의와 공평'에 따라 이스라엘과 이방을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선을 행한다면 하나님이 미국의 편일수도 있겠지만 불의를 행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에 따라 미국이나 그 어느나라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링컨대통령은 하나님이 우리편인가를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를 기도하라고 했는데,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이 무슨 짓을 하든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고 자기들 편이어야 한다고 믿음으로서, 성경과 기독교의 정신을 왜곡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반성력을 상실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합리화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짐 월리스는 자신의 책 회심에서 진정한 회심은 우리가 섬기던 모든 죄와 우상에서 돌아서는 총체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외에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이 우상일 수 있고,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의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관찰한 보수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결국 미국이 기독교화가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미국화' 된 것이, 오늘 미국 보수 기독교의 안타까운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기독인들안에도 이런 민족중심적 사고가 많이 나타납니다. 그 예로, 한국은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제사장 민족이요, 앞으로 공산권과 무슬림을 향한 복음의 서진을 위해 하나님이 크게 쓰실 민족이라는 생각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부어주신 축복은 말할 수 없이 놀랍고, 저도 위의 바램이 이루어 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서 이후제사장 민족이라는 개념이 성경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안에 집단적 물질적 축복과 성공을 신앙적으로 합리화하는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닌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3세계에 나간 일부 한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처럼 예수 잘믿으면 경제가 발전하고 잘살게 된다는 것을 복음(?)으로 가르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게 복음의 핵심이라면, 예를 들어 기독인과 교회가 적은 일본은 왜 잘 살고 있는걸까요? 축복이 아닌 핍박을 받은 순교자들의 삶은 또 어떻게 설명합니까?). 한국교회와 한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면, 한국의 선교사들이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동시에, 한민족이 대륙을 달리며 세계 역사를 주도할 것이다(?)는 식의 희망을 피력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담론에서는, 심지어 과거 제국주의 선교모델과의 유사성까지도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론적 관점은 하나님의 윤리와 정의보다 성공과 부를 우선하게 하고, 그에 대한 욕망을 신앙적으로 합리화 해줄 가능성이 큽니다. 내부적으로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독재정권시기 비판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지 못한 것, 많은 사회 이슈들에 있어서, 약자의 입장에 서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강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대해서도, 교회안에 존재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사고의 악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 하나님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편이라고 믿는 것은 세계 열방의 하나님을 일개 민족이나 국가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키는 신성모독적 행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십자군이나, 이스라엘의 왜곡된 시오니즘, 그리스도인들안에 존재하는 인종주의, 민족주의, 패권주의, 선민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명백한 왜곡입니다

 

P.S. 미리 소개하는 결론

     이 시리즈의 결론이 되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기독인들 마저, 국제관계와 국내 정책에 있어 안보와 번영을 최 우선으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 안보의 위협을 제거하고 경제발전을 이루어 잘먹고 잘살게 되는 것이 지고지선의 가치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형적 부국강병의 논리이지요. 오늘이 한국에서는 지방선거일인데, 결국 선거를 좌우하는 메시지도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안믿는 이들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인들마저 이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안보와 번영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 화해와 평화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법도를 최우선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 도입 질문에 소개했듯이, 이라크 파병과 같은 정당성이 부족한 정책에 있어, 저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국가 이익보다 정의를 우선하고 끝까지 반대할 사람들은 기독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되고 안되고의 여부를 떠나, 모두가 이익을 좇을 때라도, 정의를 위해 No라고 말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승리를 믿는 자가, 당장의 이익이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외칠 힘을 갖게 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보수 기독인들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인 '정의' 보다도, '국익'을 금과옥조로 따르는 것 같아 의아함을 많이 느낍니다. 이런 왜곡의 결과는 역시 국가의 기독교화가 아니라, '기독교의 국가주의화'겠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단기간의 국익보다 정의를 우선했을 때, 장기적인 측면에서 더큰 국익이 찾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동시에 단기적 국익을 위해 정의를 희생했을 때, 장기적으로는 국익에 손실이 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시기를 얼만큼 잡느냐, 그리고 국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논의가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상당히 믿을만한 정보에 따르면, 파병결정 당시, 정책담당자들은 이라크 파병과 부시정부의 대북정책 유연화를 놓고 일종의 ‘빅딜’을 기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이러한 현실주의적 정책결정이 어떠한 득실을 가져왔는지 분명한 성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2004년 9월 3일 연설에서 제 3위의 파병국인 한국의 이름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며, 미국이 대북 정책을 선회는, 한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가 아닌, 미국 국내 선거의 공화당 참패와 네오콘들의 퇴진,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으로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 내 비난이 고조된 2006년 말, 2007년 초에 일어났기 대문입니다. 
     많은 경우 안보와 번영을 추구하면서 평화와 정의가 파괴됩니다. 다른 말로세상의 권력자들은 '안보와 번영이라는 거짓된 약속'을 내세워 평화와 정의를 파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처럼' 그것을 절대화된 '우상'으로 섬길 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 즉 공평과 정의를 추구할 때 '따라'오는 것이라는 점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무너진 것은 외적의 위협도 있지만 그 안에 이미 정의와 공평이 파괴되고 극심한 빈부격차, 토지제도의 문란 등으로, 국민들이 그 나라의 체제를 지킬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도 외적의 침입과 나라의 상실은 이스라엘의 국내적 죄(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총체적 타락)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고, 동시에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이었습니다. 
    
반대로 국민들이 삶에서 공평와 정의를 누리는 나라는 그 누구도 쉽게 침략할 수 없고, 그렇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의 원리를 따를 때,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안보와 번영이 최고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라를 지킬것이고,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느냐? 순진한 소리 말아라"라고 한다면 이렇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먼저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공평과 정의가 서면 하나님이 안보와 번영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이는 개인의 신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와 성공과 생존"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고 정의와 공평과 인애의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욕망에 굴복하기 쉽고 그럴때에 우리 삶에서 정의와 공평과 인애는 파괴됩니다. 현재의 기독교는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보다 부와 성공을 합리화하고 축복하는 왜곡을 보여주고 있고, 심지어 복음의 내용 자체도 물질주의, 성공주의, 승리주의로 교체되는 경향마져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회의 비극이며,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악'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고, 그분의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기독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관련 성경구절을 몇구절 소개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의'는 가급적 정의로 바꾸어 읽어야,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두 구절은 제가 개인적으로 바꾸어 읽은 것입니다.)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5:10]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벧전3:14]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10:31]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이제 다시 내가 너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 내듯 너를 씻고, 너에게서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주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패망하고, 주를 버리는 자들은 모두 멸망을 당할 것이다. 너희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 숭배를 즐겼으니,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가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으므로 창피를 당할 것이다. 기어이 너희는 잎이 시든 상수리나무처럼 될 것이며, 물이 없는 동산과 같이 메마를 것이다. 강한 자가 삼오라기와 같이 되고, 그가 한 일은 불티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둘이 함께 불타도 꺼 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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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지연 2010/07/10 16:24  Addr Edit/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 기대 되네요.

  2. 댓글 감사합니다. 글 쓰는데 격려가 되네요. ^^

  3. 아슬란 2011/08/06 17:38  Addr Edit/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의를 정의로 읽으니까 느낌이 확오네요- 더 적절한 해석같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도와주는 이유에 대해서는..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유대인들이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말도 안되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아닐까요?

  4. 이인엽 2011/08/25 18:04  Addr Edit/Del Reply

    아슬란님, 좋은 답글 감사합니다. 결국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막강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의 결과인데, 동시에 종교적인 부분도 그러한 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이 곧 성경적인 입장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배우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이 부분도 참 중요한 이슈인데, 기회가 되면 한번 글을 써 보려고 합니다.

  5. 전부현 2011/09/29 23:54  Addr Edit/Del Reply

    꼼꼼하게 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묻고 싶네요
    1.지금 세계 상황도 이스라엘 포함 하나님이 주권아래 있다고 믿습니다
    2.이스라엘 독립에 문제가 있어 당시 영국이 이스라엘보다 더욱 크고 비옥한 땅 아프리카 식민지를 유대인에게 주어 독립국으로 만들려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유대 독립국을 주도한 시온주의자 지도자들이 찬성하였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지지자들이 모두 일년안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일본.넑은 미국 땅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독립국으로 만족하고 살기원했지만 그들도 자기가 선택할 땅은 가나안 땅이라는 것을 벗어날수 없었습니다....그들도 테러에 시달리고 살고 싶지 않습니다...
    유대인들도 평화를 원하고 환경이 좋은데 살고 싶습니다...폭탁인 터지고 문제 많은 곳에 왜 하나님이 떠나지 못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왕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계획을 할지라도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결정합니다.
    3.팔레스타인도 그리스도 사랑에서 유대인도 그리스도 사랑에서 결합하며 서로 위로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지금 상황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먼저 입니다
    비판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하용조 목사님 설교중

    • 이인엽 2011/10/02 16:07  Addr Edit/Del

      전부현님 답글 감사합니다. 먼저 무슨말씀이신지 잘 이해할거 같은데, 그건 저도 몇년전까지 전부현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일부 목사님들이 하는 성경해석만을 듣고, 무조건적인 이스라엘 지지가 성경적 관점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성경을 좀더 읽어보고, 국제정치를 공부해 보면서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1. 저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구요,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제 주장은, 예수님 이후에, 유대인을 포함한 어떤 민족이 선민이라는 사상은 비성경적이며, 유대인이 구약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특수성과 유대인 복음화의 중요성을 인정하더라도, 현재 세속 국가 이스라엘이 추진하는 모든 정책이 무조건 옳다라고 믿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입장은, 상당히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왜곡된 선민사상이 아닌,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구요.

      2. 또 한가지, 내가 이해한 하나님의 뜻이나 성경해석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를 들어, 위에 언급하신 시온주의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오늘도 여러 자연재해나 사망사건들이 있는데, 그걸 하나님의 심판으로 손쉽게 대응하는건 상당히 조심스런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3.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하나님이 위로하실 거라는 말씀은 저도 무척 동의하고 바라 마지 않습니다. 다시말하지만,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 화해와 평화라는 관점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봐야할 그리스도인들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입장만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이 제 글의 목적이었습니다.

      4. 하용조 목사님이 무슨 맥락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수님이 하신 수많은 비판들도 부정해야 겠지요? 잘못된것에 대해 비판조차 없다면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 해결이 어떻게 가능할지 궁금하네요. 그런식으로 비판을 막아온것이, 오늘 부패한 많은 교회들의 모습을 낳은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P.S. 꼼꼼하게 읽지 않으셨다고 하는데, 이 정도로 단정적인 답글을 달으시려면, 먼저 글은 한번 꼼꼼하게 읽어주시는게 예의겠지요?^^ 이 문제에 대해 관심도 많고 열정도 있으신거 같은데, 부족하지만 최근에 이스라엘에 대해 구체적인 글을 여기에 하나 더 썼고 앞으로 한두번 더 연재를 할 예정이니, 꼭 한번 정독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6. 에릭 2011/12/08 02:48  Addr Edit/Del Reply

    처음 올리신 글부터 계속 읽어가고 있습니다.

    <신앙>과 <현실 세계의 모습>때문에 의문점이 생기고 어리둥절할 때가 많은데, 올려주신 글이 큰 도움과 도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조지아주에서 아내와 함께 살면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인엽이라고 합니다. 2009년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석했었는데, TM 코스타에서 강의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때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었고, 강의안을 정리해서 올리기로 eKOSTA에 약속드렸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마무리를 못하던 중, 이번에 블로거로 초대해 주셔서, 앞으로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지난번 강의안으로 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읽으며 전공인 국제정치를 공부하면서 고민 했던 것을 정리해 올리는 글이 될것 같네요. 제가 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전공분야에서도 아직 기초를 다지는 중이라, 이렇게 글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신앙과 세상을 함께 고민하는 하나의 시도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소 딱딱하거나, 정치적인 견해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점 또한, 다양성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들어가며>  

 

    이런 류의 강의를 할때 제가 주로 시작하는 도입 질문중의 하나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당신이 당시 대한민국의 정책 결정권자라면 (파병 여부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입니다. 이 질문에는 국가의 이익과, 윤리라는 두 가지 변수가 중요할 텐데, 국가 이익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크게 세가지 정도의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파병을 통한 국익도 있고 이라크 전쟁이 윤리적으로도 정당하기에 찬성한다. 2.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국익을 생각해서 찬성한다 3. 국익이 있더라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기에 반대한다.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놀라는 것은 비기독인은 물론이고, 상당히 많은 기독인들이 두번째, 즉 현실주의적 선택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결국 국익이 최종 선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보수나, 진보보다도 강력한 담론은, 현실주의 혹은 국익 우선주의가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하에서의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과,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의 집권과 정책들 뒤에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국가이익(경제와 안보에 있어서의 물질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서, ‘올바로, 정의롭게, 평화롭게 살아보세보다는 잘먹고 잘 살아보세가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국내적으로는 애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자국 중심주의, 일방주의, 패권주의와도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크게 보자면,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이러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접하는 많은 사회문제의 기저에는, 그리스도인이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이익이라는 강력한 이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안에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로 신앙을 개인의 차원으로 국한하는 이원론적 관점이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언제나 일치한 다는 관점, 혹은 하나님 잘 믿으면 우리 나라가 잘 된다는 축복론적 입장 등이 암묵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온것이 아닌가 싶은데, 과연 이런 관점이 성경적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정치적 역할의 문제점들을 살펴봤을 때도, 역시 이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에 대한 논의와 고민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대략 아래와 같고, 인용한 성경은 표준새번역을 썼습니다.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4)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약의 윤리와 선지자들의 비판 전통

(5) 신학의 문제: 이원론과 콘스탄틴 주의

(6) 국가의 기원과 그 속성. 권력의 악마성과 그 대안. 

(7) 정치적 권위에 대한 두 가지 왜곡된 생각 

(8) 국제관계에서의 정의: 제국의 정신과의 충돌

(9) 예수님의 삶, 십자가의 영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

(10) 성령의 역사와 해방적 함의

(11) 뒤틀려진 기독교

(1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요한계시록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많은 경우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국가주의가 정치 조직과 구조에 기초한다면, 민족주의는 인종과 문화에 기반한다고 하겠죠. 한국처럼 비교적 인종적으로 단일한 국가라면(이 부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고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비롯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만), 두 개념이 중첩되고 서로 강화하는 형태를 띌 것이고, 미국처럼 다인종 사회 같은 경우, 인종보다는 문화와 정치조직이 더 중요시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가지의 공통점은, 자기 집단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자기애와 자기 중심성의 확장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물을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것이 애국 애족을 넘어, 우리를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또한 내부적으로는, 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의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집단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언제나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이러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부분을 성경의 관점에서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역사 중,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에서 나타난 이집트 심판과 가나안 정복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관점으로 읽혀져 왔습니다. 실제로 유럽의 기독교인들과, 흑인노예제 및 흑백차별제도하의 미국 남부 기독인들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이 저주받은 일화를 이용해 인종차별을 합리화 하기도 했고, 미국 역사 초기에 일어난 엄청난 숫자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의 기독인들은 가나안 정복이야기를 통해 합리화 했습니다. 최근에도 미국의 보수적인 목사들 중에는, 이라크 전쟁이나 대 테러 전쟁을 '이스마엘의 후손 대 이삭의 후손'의 전쟁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이 과연 위의 인종주의적 오류들과 얼마나 다른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민족, 혹은 국가의 수호신으로 왜곡하고, 이를 넘어서 폭력이나 학살을 합리화하는 데까지 성경의 가르침이 악용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한편, 사랑의 하나님이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일순간에 쳐서 죽인이야기나, 어린아이와 가축까지 모조리 없애라고 하신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기독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상당히 힘든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기독인들은,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자라고 하거나, 이를 영적인 싸움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오류들처럼, 이를 민족주의나 패권주의 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성경과 신앙서적들을 살펴보았는데,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민족주의적 성경해석의 오류를 풀어주는 성경구절들을 몇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 15: 13-16]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18:24-29]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저지르면, 이것은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들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혔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더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악한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너희는 모두 내가 세운 규례와 내가 명한 법도를 잘 지켜서,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지 않도록 하여라. 본토 사람이나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 역겨운 모든 짓을 하여, 그 땅을 더럽히고 말았다.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 누구든지 위에서 말한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면, 백성은 그런 짓을 한 그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들에 대해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아니라, 공정한 열방의 심판자로서 접근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을 줄 수도 있었지만, 사대를 걸쳐 기다려야 했는데,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그 땅에서 쫓겨나거나 멸망 당할 만큼 차고 넘치지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호수아 정복 시기에는 그들의 죄가 관영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수간이나 인신제사 같은 극악한 죄악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1-23)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그들이 민족적으로 이방민족이거나, 하나님을 안믿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기준에서 그들의 악이 멸망과 땅에서 토함을 받을 정도에 이르렀기에 심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시기나 제국주의 시기에 주장된 것처럼, 단순히 원주민들이 이교도들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논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런 논리가 맞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을 멸망시켜야 하셨어야 할텐데, 성경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 만민이 구원을 경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사상에 어두워 그 소명을 감당하지 못한것 뿐이지요. 그러므로 가나안 주민들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내주기 위해 없어져야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그 심판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같은 죄를 범하면 멸망당한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일하게 땅에서 토함을 당할 것이라고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점입니다. 이 경고는,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루어져서, 가나안 못지않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은 처절한 심판과 포로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거주민이 하나님의 뜻과 언약에 따라 '살아갈 때', 거주할 권리를 갖게 되는, ‘언약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적, 인종적으로 이스라엘만을 편애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무고하게 멸망시키시고, 이집트백성들을 죄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하던 시기, 그는 가나안족속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고(창23장), 야곱과 요셉 시기에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창47:1-12). 그들이 인종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 할 때 일어난 이집트에 대한 심판을 살펴보면, 이집트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들이 당시 약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강제노동과 영아살해와 같은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들을 보내라는 하나님께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전 이집트의 장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의 남아들은 태어나는 족족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압박자와 피압박자',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지, 인종적 차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사야서 19장의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다음과 같은 회복과 구원의 예언으로 끝납니다.

 

[이사야 19:21-25] 주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이집트 사람에게 알리실 것이며, 그 날로 이집트 사람은 주님을 올바로 알고, 희생제물과 번제를 드려서, 주께 예배하고, 또 주께 서원하고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주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치시고 나서는 곧바로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이므로,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주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

 

     결국,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는,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하지, 민족적, 인종적인 차원에서의 폭력과 학살을 합리화할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심판 받은 역사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말씀을 모르고 범죄하는 이방인과 싸우시지만, 말씀을 알고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과도 처절하게 싸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칼은 양날의 칼이요, 하나님의 전쟁은 이방과 이스라엘 모두를 향한 정의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타락하고 나서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점령당하고 포로되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도 잔인하실 수 있는가를 묻지만, 그 전까지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타난 총체적 타락상 성적타락과 부정직이 만연하고, 희년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노예로 부리고 팔아버리며, 뇌물을 받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하나님이 아닌 군사력과 강대국을 의지하고, 이방종교와 우상을 섬기는 을 살펴보면, 심판받을 당시의 이집트나 가나안 원주민이 보여준 타락과 포악의 정도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할 뿐더러, 오히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신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놀랍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결코 한 민족의 수호신이 될 수 없으며, 기독교의 사상은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와 근본적으로 충돌합니다. 과거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위해 불의한 인종차별과 학살, 전쟁등을 합리화 하고자 했고, 이에 발맞춰 일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악을 저질러 왔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고, 성경을 그에 맞춰 왜곡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그분의 정의를 더럽히는 심각한 죄일 뿐더러, 정의와 공평을 기대했던 많은 이들을 교회와 복음으로 부터 멀어지게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다음 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는 두가지 관점 (혈연적 공동체 vs. 언약적 공동체)을 소개하고 비교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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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슬란 2011/08/06 17:11  Addr Edit/Del Reply

    고민했었던 내용들인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2. 에릭 2011/12/08 01:01  Addr Edit/Del Reply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파고들다가 이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지난 수십년간 맘속에 담겨있던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을 드디어 찾은것 같아 정말 행복한 기분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떳떳히 말하고 또 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이런 종류의 애매한(?) 의문점들이 저를 항상 가로막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할만한 곳도, 대답해 줄 사람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한국기독교의 분위기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요? 말씀을 더욱 묵상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면서 어떤 조직 속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자신이 그 기관의 책임자일 수도 있고 또 우리가 그 속에서 하나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기관이나 조직이 이상적 이지 않고 건강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 사실은 그럴 확율이 더 많다.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첫째 반응은 그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노력한다. 그런데 그 때에 주로 우리는 지도자가 변화되기를 혹은 지도자를 바꾸기를 원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건강한 조직 속에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변화를 위하여 지도자에게 도전하고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면 지도자는 지도자  나름대로 자신을 방어를 해야하고 그래서 갈등이 발생하고 결국에는 지도자에게 반발을 일으킨 사람은 적절하지 않은 때에 그 조직을 떠나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 조직이나 개인에게 준비되지 않은 지도력 이양(Leadership Transition) 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조직이나 그 개인에게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경우이다.

 

둘째 가질 수 있는 태도는 조직에 대하여 기대를 버리고 그저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을 챙기는 식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변화할 수 없는 것을 변화시키려고 무리하게 행동하기보다는 그저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조직 속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조직에 대한 기대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도자라면 변화를 이끌어 볼텐데 자신이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지도자를 인정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마 그 조직 속에 있지만 기회가 되면 다른 조직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적극적으로 다른 조직을 찾고 그러는 동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사실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를 할 수 없고 지도자를 바꿀수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느껴질 것이다.

 

세째는 변화의 대리인(Change Agent)이 되기로 자처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지도자가 아닌데 그 조직 속에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능하고 조직이나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해야하는 일이다. 내가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설사 그 조직의 지도자가 되어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조직에 변화가 필요할 때 지도자를 바꾸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변화의 대리인이 꼭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개인에게는 중요한 이슈일찌 몰라도 그 조직의 변화에 꼭 필수적이지는 않다.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가 지도자이건 아니면 일원 중에 하나이건 그 조직에 대한 바른 비젼을 본는 것이 중요하다. 그 변화의 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찌에 대하여 분명한 그림을 가지고 그것을 향하여 움직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조직을 향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비젼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분명하다면 지도자이건 아니면 조직의 한 일원에 불과하건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혜롭게 그런 조직이 되도록 움직여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 변화의 대리인이 변화를 유도해 낼 때에 조심해야 한다. 좋은 의도이지만 그 과정이 잘못되면 그 조직에게 도리어 해가 되고 사람들을 분리 시킬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인정받기 위한 것이나 자신이 그 결과로 인하여 어떤 상급을 받으려는 욕구가 앞서서는 않되고 그 조직 속에 있는 기존 질서를 잘 인정하고 그 속에서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꼭 지도자가 아니어도 조직 속에 변화를 이끌러 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건강하지 않은 조직 속에 있을 때에 우리는 조직이나 지도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자신의 무책임성에 대하여 혹은 자신의 분노에 대하여 합리화하기 쉽다. 그러나 변화는 외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분노하고 조직을 쉽게 떠나 버리는 일이나 조직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직을 사랑하지도 않고 냉소적이고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나 다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조직의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외부의 변화를 요구하기 이전에 지도자의 변화나 교체를 요구하기 이전에 나의 태도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지도자가 안바뀌어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일은 이루어 질수 있다. 내가 꼭 지도자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질 수가 있다. 우리가 촞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움직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미국 신학교 총장을 역임하셨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였다. 당신이 더욱 좋은 자리 큰 자리로 움직여 가고 싶습니까? 현재 당신이 있는 자리를 그런 자리로 만들어 버리십시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있는 자리에 불만족하면서 불평하고 있다. 그러면서 더 좋은 자리로 가기를 구하면서 현재 있는 조직의 변화의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아마 그 총장님은 우리 자신의 변화를 먼저 요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런 태도의 기초 위에 변화의 대리인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현실에 대한 바른 직시가 필요하다. 현재 상황을 바로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를 보기를 회피해서도 않되고 그렇다고 문제를 과장해서 보아도 않되고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둘째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면 어떤 것이 잘된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없이 불만만 가지기 쉽다. 변화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완벽하고 구체적인 그림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세째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변화란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때문에 그 조직 속에 있는 사람 혹은 그 조직속에 없지만 변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관련된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호응도도 파악해야한다. 네째, 전체 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조직은 그 조직의 외부 환경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체 환경 즉 Macro Context 에 대한 바른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다섯째, 변화를 위한 자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에 여러가지 로 도움이 될수있는 자원들을 인식하고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행동 계획들이 필요하다.

 

내가 소속된 조직은 건강하고 만족스러운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건강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비젼을 가지고 움직여 나가고 있는가? 우리가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변화의 대리인이 될 수가 있으며 이런 경험을 통하여 나중에 우리가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되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http://lead2serv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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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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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사이 우리 기독교 교회에서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평신도 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평신도라는 주로 전문 기독교 사역자에 반하여 종교를 직업으로 갖지 않은 신앙인들을 지칭할 때에 쓰는 말인것 같다.  현대 교회에서 이들 평신도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재평가 하는 일과 더불어서 평신도들이 교회 사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는 많은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평신도들에 대한 재평가와 그들을 적극적으로 사역에 관여하게 하고 또 교회 안에서의 지도력의 위치에 설 수 있게 하는 경향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적극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의 삶과 사역 그리고 지도력에 대하여 좀 더 깊은 본질적인 의미의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 이 글을 적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평신도들의 참다운 가치는 소위 말해서 교회 안과 종교적인 일들 속에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비종교적인 일 속에서 그 참다운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김진홍 목사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식당을 운영하는 성도님을 심방하러 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큰 식당을 잘 운영하시는 분이신데 목사님의 심방을 받으면서 목사님의 손을 꼭잡고 하는 말이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한 일이년만 더 식당하고 그 다음에는 다 접고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지금 하고 계시는 이 식당 일, 이 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여 주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라고 반문 하였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상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언어 중에 바로 이 성도와 같은 것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종교적인 일이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한 선교 단체의 사역자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 분들은 한국의 유수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각 분야에서 탁월한 학자, 교수, 그리고 전문가들이었다. 그 분들이 그런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을 모아서 성경 공부를 시키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정말로 이중으로 탁월한 분들이셨다. 그런데 수업 중에 그 분들에게 자신들의 사명과 사역과 은사를 정리하게 하는 숙제를 드렸는데 그 분들이 (엄격하게 말하면 사이드로 하는) 종교 사역만을 쓰고는 자신들의 직업 분야에 관하여서는 별로 영적인 사명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은사가 탁월한 분야이고 그들의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을 쓰는 분야이고 상당히 가치가 있는 일들이지만 그 일들 속에서 영적인 사명 의식을 표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사역자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있는데 반드시 건강하다고만 생각되지는 않았다. 물론 세상 속에서 자기 분야에서 탁월하던 사람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문 종교인도 될 수가 있지만 그것이 신학적 선교학적으로 세상 속에서 하는 일 (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자체에 영적이고 선교적인 의미를 충분히 부여하지 못해서 오는 것이라면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 종교적인 일만이 영적인 가치가 있고 비종교적인 일 속에서는 종교적인 일과 상응하는 영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신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그들을 사역으로 이끌려는 많은 노력들이 현대 교회에 있다. 그런데 그 경향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주로 종교 전문인들이 교회 사역을 독점하던 것에서 평신도들도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옹되는 것 같다. 주로 평신도들이 종교 전문 사역자의 보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이 있는 일들로 봉사하는데 이런 평신도 사역은 평신도들의 인력을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더욱 끌어들리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평신도들을 적극적으로 종교 활동에 끌여 들인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세상 속에서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쓰는 그들의 직업 (비종교적인 일)은 교회와 종교적인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평신도의 회복은 교회성장을 위한 인적 자원 동원이라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지만 온전한 평신도들의 진정한 가치 회복이라고 볼 수 는 없다.

 

            둘째로 좀 더 열려진 자세로는 평신도 사역이라고 했을 때에 평신도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 나아가서 역할을 하도록 가르친다. 즉 선교적인 삶을 살 것을 도전한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가능하면 종교적인 일들을 하도록 훈련시키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것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신도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사업체를 하지만 그 속에서 손님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어야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직장 속에서 예배를 보고 신우회를 만들고 교회가 아닌 세상, 즉 직장 속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동료들에게 전도한다. 앞에 것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신도 사역인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태도는 평신도를 새로이 평가하고 또 그들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 그 자체를 종교적인 활동과 동일한 선상 위에서 보지 않고 있다.  이런 태도에 비하여 나는 평신도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과 일, 그 자체가 교회 안에서 혹은 밖에서 하는 종교적인 일과 동일한 영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을 종교적인 역할과 활동에 더 많이 끌여들이는 것보다는 도리어 세상 속으로 더 많이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은 종교적인 일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 속에서 담당한 역할 자체에 충실한 것이 선교적인 삶이라는 의식을 갖게 해야 한다. 오해 말 것은 앞의 두 가지 의미에서의 평신도 사역을 가치가없다거나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가치가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평신도들의 중요한 가치는 가치는 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 속에서 주워져야 하는 것이다. 선교란 종교적인 일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종교적인 일들을 바른 영적인 자세를 가지고 감당할 때에 선교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기독인들이 세상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들을 진실되게 감당할 때에 그들이 도리어 기독교의 진리에 매료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영적으로 세상 속에서 기능하는가가 중요한 선교적인 이슈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하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명 의식을 갖게 하고 세상 속에서 하는 일도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의 삶을 드린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는 의식으로 하게 하는 것이다. 평신도의 삶과 일에 대하여 이런 의미를 부여할 때에 평신도는 더 이상 덜 헌신된 그리고 앞으로 진짜 헌신해야 할 (다시 말해서 전문 종교인이 되어야 할) 이등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아니라 전문 종교인과 동등한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전문 기독교 사역자와 평신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역할과 기능의 차이이지 가치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평신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하여 꼭 종교적인 활동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영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 평신도들이 교회 공동체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또 힘을 얻지만 교회 속에만 머물러있는 나약한 신앙인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겠고 세상 속에서도 종겨적인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분야와 일터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적어본다. (lead2serv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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