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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하나님의 의
바울이 사용한 하나님의 의(義)라는 말은 법정적인 용어로서, 불의(不義)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불의는 곧 죄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도덕성이나 선행으로, 즉, 자신의 의로써 나아가 보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선(善)을 의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기 의”가 불의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의에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 나님의 의는 죄가 전혀 없는 무흠의 완벽한 상태, 즉, 거룩으로서의 의를 말하며, 이것은 곧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입니다. 따라서 이 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기준입니다. 곧, 하나님의 완벽한 의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말은 결코 인간들에게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들에게는 슬픈 소식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슬픈 소식으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바울을 비롯하여 구약 성경을 알고 있던 당시의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어떠했는지 좀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9. 조건 언약으로서의 율법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율법이 갖는 기능 혹은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27:26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 누구도 만일 이 율법을 항상 모두 지키지 못한다면 율법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저주 혹은 진노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저는 크리스천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명기 28장 초반에 나오는 축복의 내용을 본문 전체의 문맥을 잘 살펴보지 않고 그냥 좋은 말씀이라고 좋아만 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본문의 내용들을 좋아하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28장 1절 서두에 나오는 조건 부분입니다. 즉, 어떤 조건을 만족시킬 때에만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1) 28:1의 서두를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조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5절 이하부터 그 나머지 절들과 그 다음 장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모든 명을 순종치 않을 경우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과 저주의 내용들을, 그 끔직한 상황들까지 포함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0. 율법과 하나님의 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 11항에서 좀더 다루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하나님 율법의 모든 내용들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율법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을 봅니다.“그래도 열심히 지키다 보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든지, 혹은 예수님 당시 어느 젊은 청년의 대답처럼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함으로써 종교적 형식으로서 율법을 이해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2)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고 있으며 엄격하고 엄중한 언약서입니다. 거기에는 에누리가 없습니다. 이 언약은 조건 언약으로서 하나님 수준의 의에 이르기 위하여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든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저주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불행히도 하나를 어기면 전체를 다 어기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 언약의 결과는 축복 아니면 저주인데,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듯이 죄인들 편에서 본다면 축복보다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을 확률이 월등히 높습니다. 물론 제사제도를 통하여 회개하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역사 속에서 회복을 이루셨지만, 율법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에게는 죽음의 선포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죄인들에게는 무서운 신적 계약서입니다.

하 나님의 복음은 바로 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 있는 율법서에서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거룩한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항상 다 지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 율법서의 메시지입니다. 에베소서 2:3에서 바울이 명확하게 말해 주듯이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혹은 인류에게 진노하시는 것으로 끝나기 위함은 아닙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도리어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당신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조건언약인 율법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구원이 율법과 연관하여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하여서 점진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본 글의 목적입니다.)

11. 율법의 목적과 기능
신명기로 다시 돌아가서 31장 16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 모세의 죽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 이방신들을 좇으며 하나님을 배신할 것을 미리 예견하십니다. 20절에서도 이스라엘이 배부르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 역시 31장 2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같은 말로 전합니다. 모세가 생존하였을 때에도 끊임없이 여호와를 거역했던 백성들이 모세가 죽은 뒤에는 오죽하겠느냐는 내용으로 모세가 걱정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31:29 역시 참조).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언약을 체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순히 진멸하시기 위해서 함정에 빠뜨리신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이스라엘의 타락성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셨을까요? 둘 다 아닙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러한 조건적 언약체결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무조건적 언약체결, 곧 그분의 전적인 자비/은혜에 대한 복선입니다.(3) 그러면 조건 언약인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지, 그 목적을 다음에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1) 신명기의 내용은 계약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 당시 속국과 종주국의 왕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당시 모세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언약의 형태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일반적으로 종교적 사고구조에 익숙하다 보면 사람들은 종종 마태복음 5장 48절의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의 말씀을 오해하여 자신도 모르게 율법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 다음에 좀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3) 조건언약인 율법을 옛언약(구약 Old Testament)이라고 부르며, 앞으로 설명할 무조건적 언약을 새언약(신약 New Testament)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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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능력”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복음의 능력)

지 난 2006년 7월 시카고 휘튼 대학에서 모였던 코스타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8, 9, 10장을 중심으로 복음을 공부하였습니다. 이제 약간 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면을 통하여 이 동일한 복음을 로마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로 마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거룩한 무리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복음 설명 및 적용 서신입니다. 본 지면에서는 로마서 본문의 모든 내용을 다 다루지는 못하지만, 로마서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 또 복음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본 글의 가장 큰 목표가 됩니다. 저와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기 위해서 독자들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한글과 영어 성경 본문을 면밀하게 잘 읽는 것입니다.
  2. 먼 저 로마서 1장 1절에서 17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이 왜 이 서신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길이 여러 번 가로막혔습니다. 그 동안 바울도 복음 안에서 성장하면서 처음 이해했던 복음보다는 훨씬 더 성숙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또는 복음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로마 제국 이방 사회에서 핍박 받고 있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서 로마로의 여행을 여러 번 시도했었습니다. (11절의 “신령한 은사”라고 번역된 말의 뜻은 “영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바울의 언어입니다. 원문을 보아도 그렇게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신령한”과 “은사”라는 말들에 대한 오해들이 많아서 정확한 원의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길들이 막히자 그는 결국 서신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길이 막힌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오늘 우리도 동일한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 러므로 본 서신의 목적은 그가 경험한 “신령한 은사” 즉,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본 서신 전체의 문맥상 물론 이 하나님의 영적 선물은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 서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1:1), “그의 아들의 복음” (1:9), 혹은 심지어 “내 복음” (2:16) 등으로 표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복음은 성경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객관적인 약속(고전 15:1-8)일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갈 2:20).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dunamis)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복음에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바울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서 전체의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신구약 성경 전체 문맥(context)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꽤 많은 경우에 성경의 용어들이 독자의 선입견으로 부정확하게 해석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말도 그런 듯싶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외적인 표적 (sign 또는 performance) 혹은 은사에서 찾는 경향이 많은 사람들은 16절을 읽으면서 “복음”을 외적 은사나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능력”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6절 문장의 문맥이 보여주듯이 여기서 능력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러한 종류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이라고 하는 내용에 비추어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왜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바울은 말하고자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로마서 1장 이하를 차근히 읽게 되면,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잘 계시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믿음”이라는 개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이 내용들을 1장 17절 이하에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그러면 로마서 본 서의 핵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1장 17절의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16절까지 인사 및 본 서 기록의 의도 등을 언급한 뒤, 17절에서 바로 복음의 핵심을 말해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 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의인”의 정의입니다. 이제 첫 번째 개념부터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 첫 번째 내용을 롬 3:21에 비추어 본다면, 복음 외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씀에 의할 때에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도 나타났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의”가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이해한 “의”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흔히 이해하고 있는 죄와 구원의 개념들도 이 의의 개념을 이해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6. 그 러면 롬 1:17에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선 먼저 간단히 결론적인 답부터 내리고 차후에 더욱 차근히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의라는 헬라어 말은 dikaiosune인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은 구약의 개념을 전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구약의 히브리 말인 Tzedeq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의” 혹은 “공의”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31:1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혹은 시편 35:24에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 . . “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 31:1은 Martin Luther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이 자기의 의에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켜 준, 즉, 그의 종교적 패러다임을 신앙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시켜 준 계기가 된 구절이기도 합니다. 루터가 깨달은 것은 자신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달려 있다는 진리였습니다. 이제 이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7. 하 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학자들 간에는 이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자비/은혜(hesed)라는 말과 동의어인 것으로 보는 이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위의 시편 31:1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의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3:6에서 사랑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한 데에서도 나타나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곧 의로우심과 항상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속성을 하나님의 자비/사랑이라고 하는 본질적 속성(요일 4:8, 16 참조)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비록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분리되어 나타나지는 않지만, 복음을 우리 수준에서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속성을 먼저 구약의 빛에 비추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적 속성인 사랑이 어떻게 당신의 의로우심과 함께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논의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바울이 사용한 법적인 용어로서의 “의”의 개념을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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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9장 강의
율법의 완성/성취: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영단번(once for all)의 완벽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첫 언약인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의에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성질 때문에 율법은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간을 구원해보려다가 안되니까 새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특별한 목적을 갖고 주어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제사장의 직분은 백성들의 죄사함을 중재해주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의 중심인 성소/성전에 상징적으로, 가시적인 방식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있는 지성소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대표하여 죄사함을 받고 나오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죄사함을 받으면서 관계를 (혹은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러한 종교적 삶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예표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인 제도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제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를 전달해주는 “문화적 형식 (cultural forms)”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은 특별한 종교 형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제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신 사랑과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오직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신약시대와도 같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여 아무리 완벽한 종교제도가 주어졌다고 해도 그 종교제도 자체가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죄성을 다룸에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제 예수님은 율법의 제사제도를 좇아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인류)을 대표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12절; 24절). 상징적이며 오직 그림자일 뿐인 지상의 성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대표하여 하늘에 있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 선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다함은 인류를 대표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두번째 아담으로 오셨다는 내용과 상통합니다 (롬 5:12-19; 고전 15:22). 첫번째 아담이 불순종으로써 하나님과의 가장 첫번째 언약을 파기함으로 죄가 들어오고 그 결과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온 것에 반하여,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첫번째 아담과는 달리 완벽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구원받은 새인류의 머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즉, 그분이 그렇게 해주신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신뢰하기만 하면) 그분이 이루신 의가 “전가(transference)”되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토큰인 “하나님 수준의 의”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에서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라는 뜻입니다 (롬 1:17). 오직 은혜로만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러한 두 번째 아담은 동시에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인하여 구약의 율법의 규례대로 우리의 죄를 우리가 아닌 다른 속죄제물에 전가(transference)시킴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줄 사명으로 우리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인간 (레위) 제사장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그의 족보나 계열의 다름이라기보다는, 속죄제물이 바로 죄와 흠이 없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 간의 죄성은 그 어떤 선한 율법도 결코 다 지키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영적 무능력 상태에서 자기의 의에만 만족하여 불행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완벽한 의인이 대신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주어야만 합니다. 그 길은 율법에 이미 예표로 나와 있었습니다. 율법의 제사 제도에 의하면 완벽하고 흠없는 그 누군가가 죄인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서 피를 뿌리고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만 합니다. 즉, 대속의 희생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흠없는 의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인간 세계에 오셨고,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바 로 하나님 자신이(성자께서) 두번째 아담(인간)이 친히 되셔서 의로운 희생을 치루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제사제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18에서처럼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가 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 및 속죄제물되심의 결론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제사는 “영원 가운데 오직 한번으로” (영단번, once for all) 완벽한 제사입니다. 율법의 모든 그림자/모형은 이제 예수님에 이르러서 다 성취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 (요 19:30)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이제 죄사함을 얻기 위한 땅에서의 모든 종교적인 의식들은 불필요해졌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의 가책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가 약해짐으로써 죄책감에 끌려 죄사함을 위한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려 한다면, 바울에 엄중한 경책과 경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 .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14)”

(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의 공로에 힘입어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내용이며, 우리에게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9의 내용은 우리에게는 적용적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담력”이라는 말은 “자신감”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parresia인데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편안한 관계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confidence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엡 3:12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하나님께 나간다고 풀어 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 위치입니다. 예수의 피의 희생제사가 가져다 준 결과는 바로 이렇게 완벽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회복인 것입니다.

(5)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약입니다. 그분의 깨끗하신 성결의 피 때문에 우리가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지, 우리의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담력, 혹은 자신감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구원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영원토록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우리가 다시 넘어지는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분의 피로 우리의 본질이 바뀌어진 연고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다시 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cf. 롬 8:31-39).

(6) 그리고 바로 이 은혜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히브리서 10:23-25는 이러한 구원의 결과가 자연스럽게 신앙의 공동체로 나타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값으로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가치는 예수의 피값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롬 3:22).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하며 그 값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이러한 인식에 의하여 우리의 세계관은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10:24-25의 말씀은 진정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강의
완벽한 구원
그리고 새언약의 삶의 원리 (확신!)

이 미 앞 강의에서 히브리서 10장에서 하여야 할 메시지는 이미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시 재반복하면서 옛언약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리스도의 영단번 제사의 효능을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확실하게 일어난 일들을 다시 정리하여 우리의 확신을 더 다져보고자 합니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지금까지 강의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우리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더욱 분명하게 해보고자 합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지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나갈 수 있고, 그 어떤 도전에도 흔들림 없이 우리의 신분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 10:1-9에 의하면 예수님은 옛언약을 폐하러 오셨다기보다는 새언약의 모형/예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옛언약/율법의 원형으로 오셔서 (당신이 친히 대제사장과 제물이 되셔서) 옛언약을 성취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 더욱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혜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성취하기] 하려 함이로다” (마 5:17).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매우 놀라운 결과가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2) 먼저 10:10에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룩함”이라고 하는 말은 역시 구약의 레위기의 주제로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하여야만 한다는 율법의 요구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레 11:44-45; cf. 레 18:5).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질 수가 없음을 우리는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이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져야만 되는 것으로서, 여기서 “거룩함”이란 말은 바울이 말하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 (칭의, justification)”과 같은 맥락의 개념입니다 (롬 3-4장). 신적 의를 우리의 죄와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고후 5:21)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불공평한 거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감격스럽게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3) 히브리서 10:14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영단번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케”라는 단어는 “완벽하게 하다”(teleioo)라는 동사의 현재완료형입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써, (믿는)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용어대로 하면, 의롭다고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또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완벽하게” 하셨으며 그 효능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영원한 직분입니다 (히 7:24; 히 8:1). 다시 말해서,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의로운 자로서 완벽하게 영원토록 세우신 것입니다.

(4) 이것을 바울의 용어로 바꾼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롬 8:1-2; 갈 3:10-13; 갈 4:5; cf. 습 3:14-17). 예수님의 십자가는 또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갈 3:10-13). 그 결과 믿는 우리들은 결코 죄의 권세에 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이 연약하고 아직 우리의 몸이 구원받지 못하여서 시험에 들 때가 많지만, 우리의 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 아래로 더이상 끌고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6:14).

(5)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자유는 방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슴을 주님의 가슴에 맞추어 책임있게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전에는 죄의 힘이 너무 강하여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도 죄책감과 육신의 정욕때문에 그러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가슴에 변화가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님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함, 곧 영적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지키는 투쟁은 끊임없이 우리 삶 속에서 경험되는 영적전쟁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자유는 결과적으로 사탄의 권세와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의 힘으로부터도 자유하는 능력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6) 우리가 영적인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영역들은 바로 우리를 안팎으로 도전하는 세상 안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0:32-39에서 성도들을 격려하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핍박도 하고 유혹도 합니다. 사탄은 세상 뒤에 숨어서 세상 문화와 철학과 종교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끊임없이 기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문화관과 전통적인 가치관에 안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알려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탄과의 전쟁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전쟁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이 어떠한 특권이며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테스트할 수 있는 필연적인 영역이기도 합니다.

(7)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하여야만 영적전쟁터인 우리의 현실/삶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대함(parresia)과 인내와 믿음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32-39절). 이 세가지 덕목은 모두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격의 결과요 열매들입니다. 나는 그동안 이슬람의 확신과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여 왔습니다. 영적인 전쟁이라고 해서 과격분자들처럼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영적전쟁은 내면의 전쟁이며 확신의 대결이요, 결국 사랑의 대결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나의 가치를 가장 경멸하는 사람들, 그래서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들을 찾아가며 심지어 저들이 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찾아가서 그들과 대화하고, 그 대화와 만남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 선교입니다. 이러한 선교적 삶은, 히브리서를 통하여 확인했듯이, 진리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의 삶이 현존할 때에 비로소 세상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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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USA 2006 아침 성경 강해를 진행해 주셨던 김철수 선교사는 앞으로 eKOSTA를 통해 코스탄을 만날 것이다. 그 준비를 위해, KOSTA 집회 기간에 행했던 김철수 선교사의 성경 강해를 2회에 걸쳐 요약하려고 한다.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는 예수가 역사 속의 다른 어떤 영적인 인물들이나 혹은 우주의 그 어떤 영적 존재들보다도 왜, 어떻게, 얼마나 더 우월하신지에 대한 논의로 서신을 시작합니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의 논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진정한 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인데, 그의 제사장 되심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계열을 뛰어넘어, 마치 율법이 미처 주어지기 전인 아브라함 시대의 멜기세덱과도 같은, 율법 위의 신적인(divine) 계열로 오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요점은 모세의 율법에 지정된 제사의 법으로는 영원한 구원이 불가능하며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7:19) 오직 예수의 제사장 역할만이 율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8장에서부터 10장까지는 예수의 오심이 구약(옛언약)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하여 예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는 확실한 보증이 되신 것인지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공부하게 되면 다음의 중요한 성경의 (신학적) 개념들을 심도있게 파악하게 됩니다. (히브리서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구약의 모세의 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약의 로마서 역시 매우 중요한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다음의 개념들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복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1. 율법(모세의 율법, torah)은 무엇인가? 2.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 및 대제사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3. 옛언약(구약)과 새언약(신약)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4.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언약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5. 결국 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6. 결과적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연구의 질문들(research questions)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8, 9, 10장을 탐구하고 묵상하며 가슴에 복음진리의 말씀들을 새겨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8장 - 구약(옛언약)/율법의 기능과 구원

(1) 구약에 있어서의 제사장의 역할을 먼저 생각하여 보십시다. 제사장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제사장이 필요하였습니까?

-  제사장의 위치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입니다. 즉, 중재의 역할이 제사장의 가장 큰 임무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자신을 창조하시고 주인되신 그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선택된 백성의 특권을 갖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반드시 누군가의 중재를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12지파 외의 특별한 지파/부족을 하나님은 따로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레위 지파이며, 이 가문은 남성 전부가 제사장의 직무만을 수행하여야만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세의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참조해주셔야 합니다)

-  제사장의 임무는 히브리서 7, 8, 9, 10장에서 거듭 설명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신분을 유지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짐승의 희생의 피를 뿌림으로써 “대속 (대신 속죄)”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사함은 오직 피뿌림의 희생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히 9:22).

-  제사장들 가운데 최고 대표자로서 대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 (Day of Atonement)”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그들의 죄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성소의 맨 뒤에 있는 “지성소 (Holy of holies, 또는 Most Holy Place)”에 홀로 들어가 그동안 제사제도가 다 망라하지 못한 남은 죄들의 사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레 16:29-34; 히 9:1-10)

-  결국, 히브리서 7-8장이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속죄를 위한 언약인 율법의 제사제도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보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오히려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2) 그럼 Torah 혹은 율법(Law)은 무엇입니까? 그 기능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율법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음의 구절들은 이를 명확히 해줍니다. (행 15:10; 롬 3:20, 28; 롬 4:15; 롬 7:6; 롬 8:3; 롬 10:4; 갈 2:16; 갈 3:5, 10-14, 21, 24; 갈 5:3-4; 딛 3:5; 히 7:11-12, 18-19, 28; 히 8:7; 히 10:1)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부터 “구출/구원”된 이후에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 구원하신 분과 구원 받은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covenant)입니다.

-   율법은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1.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의 의를 계시해줍니다.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 서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완벽하게 깨끗하며, 흠이나 죄가 없으며,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의 본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피조물과 온전히 구별된 신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불의에 대해서는 의로우심으로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하면 불의와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오경을 비롯해서 오경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은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말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2.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될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의입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성에 기초하여 모든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로 그렇게 살 수 없음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끊임없이 율법의 의를 요구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 수준의 의로움”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마태복음서에서 예수님 자신이 강력하게 설파하신 주제입니다.


    -  마 5:17-20 – 당시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성이 강한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숭상하였고, 예수님이 그들의 유대전승을 따라서 율법을 “종교적”으로 지키지 않음을 보면서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당사자로서 율법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해주시고 있습니다.

    -  마 5:21-47 – 신학적으로 antithesis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예가 6가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구약의 율법의 말씀의 원래 의도를 왜곡하여 가르쳤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율법의 의도는 “신적 요구”입니다. 즉, 인간이 신의 요구 앞에서 불의함을 적나라하게 봄으로써 (심지어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러한 의도를 가진 율법의 요구를 유대 지도자들은 종교적 도덕 수준으로 그야말로 “종교적 율법”으로 타락시켜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율법을 주신 분으로서 “저자 직강”을 통하여 이 점들을 신랄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  마 5:48 – 예수님의 결론은 유대인들이 (나아가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20절) 결국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즉 “완벽하심 (perfect)”과 같이 완벽해야 한다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만큼 의로와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메시지입니다.

  3. 그렇다면 누가 과연 이러한 신적 의를 가질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러한 의를 가질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롬 3:10; cf. cf. 14:1). 율법은 오히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성질은 죄성이라,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결코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율법은 보여줍니다. (롬 8:3, 7-8절의 “육신”은 바울의 용법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죄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또한 율법 내의 내용에서도 이미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8장 이하 31장까지를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신 31:16, 20, 27, 29).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전체 문맥에서 읽지 않고 “복받고 싶은 심리”에서 엉뚱하게 읽는 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부분이 또한 신명기 28장 1-14절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전체와 특히 28장 본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맺는 “계약” 부분입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계약입니다. 즉, 율법은 조건 계약입니다. 오직 “만일 . . . . 하면” 기록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계약부분은 저주 부분에 비하면 지극히 적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을 가리켜 모세의 율법 혹은 옛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cf. 출 19:5).

  4. 그러므로 율법, 즉 옛언약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죄인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옛언약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혹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의 문제를 “대속”을 통하여 해결하여 함을 율법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자체가 처음부터 한계를 전제하고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는 이러한 율법/제사장의 역할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5. 율법은 따라서 인간의 종교적 의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인간이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대신 “신적 의”를 가져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 신적 의를 대신 가져다 줌으로써 우리를 죄인의 낙인에서 벗겨주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알고 싶으시다면 고린도 후서 5장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cf.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 결론
결국 율법으로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흠이 있거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때문입니다.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죄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도 인간을 죽음의 문제에서 구원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써 인간은 또다시 자신의 의를 세우는 교만의 죄에 빠집니다 (롬 10:1-3).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롬 4:15). 죄(죄성)가 기회를 타서 율법의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속이고 그것으로 자신을 죽였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롬 7:10). 그것은 인간의 죄(죄성)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죽을 지경으로 만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롬 7:13).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성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즉,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 앞에 우리는 지극히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율법 외에 그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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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구약의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봉사할 때 신발을 신지 않았다. 발은 땅을 밟고 몸은 여호와를 섬겼다. 맨발의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성하는 땅과 하늘,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다.

' 순결'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삶에서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하는 ?거부와 선택?의 투명성을 뜻한다.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성 그리고 말과 생각과 행위에서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거룩, 곧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순결과 세속화란 단어는 오늘도 서로를 적대감으로 마주보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서로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나 사렛대학교 백위열 총장은 “...어느 독일 작가는 유대인 학살이 시작됐을 때 위대한 독일교회는 침묵을 지켰다고 저술했습니다. 곧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립 가치와 합리성을 잃었으며 결국은 흉포한 히틀러 독재에 의해 통치되는 힘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교회는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를 드리거나 시간과 물질의 바탕이 없이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걸까요? 교회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일부분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만 충실한 나머지 세상의 고통과 공포는 외면한 채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잊고 있는지 진실로 반성하지 않으면 세상과 타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평화로운 내일을 위해 각 개인의 적합한 역할을 찾아서 반성하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라고 크리스천 논단에서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을 쓰고 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조롱받는 괴상한 단체가 되어버렸다.

순결은 거룩성이다

순 결은 세상에 대한 의도적인 고립이 아니며 술과 담배...등 원시적 도덕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순결?은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4-16) 말씀하신 구원의 부르심을 자아 실현하는 삶으로 ?거룩의 실현?에 있다.

초 대교부였던 제롬은 "거짓된 거룩함은 두 배로 악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인은 이중적이다. 자아 속에도 이중세계를 갖고 있으며 (옛사람과 새사람, 육과 영..) 살아가야 할 삶의 세계도 이중적이다 (죄와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나라..).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삶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주님께서도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지적하셨다. 하나를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를 경멸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거룩은 버리는 능력이다.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죄와 세상과 세속적 사욕을 버릴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해야만 한다. ‘거룩’은 ‘하기오스’ 구별하다, 세속적이고 비 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구별되다 는 뜻이다. 구별은 버리는 능력이다.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탈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24:3-6). ‘누구며..누군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중심진리를 깨닫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버리는 능력’을 찾아내야만 한다.

싱 가포르 리관유 전 총리는 “중국을 막기는 이제 어렵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 와서 장학금 받으며 공부하는 중국 유학생들이 각 학교에서 수석과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중국의 잠재력과 고도성장과 국세확장이 더 거세질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이미 11%.. 한국의 4배에 달한다. 2002년 자동차 생산은 한국을 추월하여 세계5위 자리를 빼앗았으며, 철강과 조선 업도 위협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지난 4년 반 동안 계속 낮은 수치의 성장을 계속하면서 뒷걸음질치고, 청장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정부는 경제재건을 위해 진실하게 고민하고 바른 정책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로마서 강해

2003 년 미국 코스타 오전 성경강해 시간에 로마서를 강해한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 로마서는 복음의 교과서였다. 로마서엔 거룩에 이르는 복음의 바른 정책에 대해 논리적인 교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알지 못하고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와 하나님의 이중 세계 속에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롬6:10-11)를 만드시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  SEX. 첫째 시간의 주제는 도덕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성적문제는 도덕성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을 버린 인간을 심판하시는 죄의 유배지가 ‘성적욕구와 열등감’이었기에 우리는 먼저 죄의 본질적 속성부터 이해 할 필요성이 있었다. 구원과 순결을 말하면서 먼저 성적욕구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정체성, 문화의 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에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  SIN.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죽음과 부활의 교리는 죄와 하나님의 이중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죽음과 부활, 죄와 하나님. 4개의 단어의 관계와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께 대한 부활 신앙이 인격화된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세상 속에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  SUCCESS. 세상은 성공주의에 지배되고 있다. 세상 속에서의 진정한 성공에 대한 가치관 회복과 성공을 이루어 가는 제자의 자아상을 원리적으로 제시했다. 죽음과 부활, 나와 그리스도 그리고 육과 영의 복음의 전개를 이해해야만 한다.

오 전 성경강해는 행위 적이고 도덕적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 복음의 근본 원리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다. 독일의 변증 철학자 헤겔은 삶의 인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끊임없이 교양을 채우고, 깊은 사색을 반복하면, 인식의 진보는 마지막 종착점으로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인식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 자기 계발이다.“ 로마서를 개인적으로 공부하며 복음의 절대정신에 이를 때까지 반복해서 학습과 깊은 사색을 반복할 필요성이 있다.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에게 첫 사역의 기회를 제공한 도시였다.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8-10)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작된 첫 번째 교회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 번 방문했다. 신학자 사우는 “이 서신은 바울 사도 자신의 가슴에 달린 창문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그의 창문을 통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신학자 본 소든은 “우리는 이 서신을 읽으면서 매우 거룩한 땅을 밟게 된다. 빌립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마지막 친서이다”라고 빌립보서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빌립보서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한 적극적인 생활과 인격을 배울 수 있다.

제1장. 중심주제: 복음

우 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으며(롬1:16),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거룩한 삶을 연출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며 완성인 복음에 대해 새로운 삶을 연출하는 자세가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작이다. 빌립보서 1장에 ?복음?에 대한 세 가지 생활방식을 가르치고 있다.

-  1: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1. 복음의 교제(1:3-11) 그리스도의 심장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 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1:3-5).

빌 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기쁨과 즐거운 추억을 남긴 교회였다. 바울은 10여 년 전을 되돌아보며 미소짓고 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했다. ‘생각’ ‘므네이아’ 즐거운 회상을 뜻한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은 ‘첫날부터 이제까지’(5절) 복음 안에서 지속적인 교제를 나눴다.

“너 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6-8).

그 들의 교제는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7절)에 서로의 사역과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동참하는 교제였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동정- 동역?의 협력의 교제를 가졌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았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빌립보 교회와의 지속적인 교제 때문이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를 섬겼다.

헨 리 나우엔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일정한 가치에 따라 판단된다. 고용자는 피고용자를 지식과 기술과 능력으로 판단한다. 은행과 상점은 신용에 따라 사람을 대우한다. 친구는 공통된 관심사를 기초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부모가 자기 자식의 지능지수가 40이라고 해서 다른 자식과 맞바꾸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회가 버린 사람들 곧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 창녀들의 친구이셨다.

사랑과 순결의 방정식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사랑이 계속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자신이 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내 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11).

바울은 세 가지를 위해 기도했다.
① 사랑이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지도록 기도했다.
② 사랑으로 위선된 삶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했다.
③ 사랑으로 의의 열매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진실하여’ ‘밀칠 하지 않은’ 고대사회는 도자기 산업이 성행했다. 가장 좋은 제품은 두께가 얇은 도자기였으나 굽는 동안 가는 금이 생기곤 했다. 가는 금이 간 도자기를 밀초로 몰래 칠해놓고 도자기를 파는 상점들이 많았다. 햇빛에 비춰보아야 장사꾼이 밀초로 틈을 메웠는지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심장만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능력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2. 복음의 진보(1:12-26). 그리스도의 이름

바 울은 14년 동안 3차례 전도여행을 다녔으며, 7년 간 감옥생활을 했다. 바울은 전도자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야 했다. 예루살렘에서의 불법적인 체로, 로마의 반역자로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항해, 로마의 투옥..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감옥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진보’ ‘프로코페’ 앞서가며 길을 만들다, 뒤에 따라오는 군대를 위해 길잡이 표적을 세워 놓는 것을 뜻한다.

미 션 인디아 존 데브라스 회장은 인도 땅에서 자행되는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으로 오히려 수천의 인도인들이 하루 3천 여 명씩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핍박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중생과 헌신의 부흥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흥분했다.

바 울이 로마 감옥에 갇힘으로 감옥에 있었던 로마 시위대 안에서와(13절), 시위대 밖에서 복음의 진보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바울을 보초 섰던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을 뿐 아니라 시위대 밖에서는 두 부류의 반응이 더욱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① ‘투기와 분쟁,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외모로’ 복음을 전하는 파벌의 전도자들이 있었다(15,17절). 교회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명성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② ‘착한 뜻..참됨과 사랑..’ 바울에 대한 동정심과 복음전파의 동역자 정신으로 바울의 빈자리를 채워준 전도자들이었다.

세계선교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모든 종족마다 자기 언어로 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한다. 전 세계 7천여 다양한 언어 가운데 아직 3천여 종족은 성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선교사가 없어도 자국어 성경만 있으면 토착교회설립이 가능하고 건강하게 부흥할 수 있어서 성경번역은 매우 중요한 선교사역이다. 선교사 파송과 함께 성경번역을 위해서도 중보기도와 필요한 은사와 자질을 갖춘 사람들의 헌신이 요구된다.

전도의 순결성

바 울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경쟁심이나 하찮은 시기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열등감과 시기심은 영적인 능력을 파괴한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 그리스도께 바쳐진 삶이 순결하다. 세상을 향해 복음전도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순결하다. 전도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생명의 사역이다. 세상에 복음을 증거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역은 없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리스도의 목표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날마다 전진해야 한다. 복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전진해야 한다.

캐 나다의 약사 엔드류 스타렛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무관심의 죄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예수께서 재림하셨을 때 약 팔고있을 자신의 모습 생각하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사업과 집을 정리하고 수단내륙선교회에 기증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친척들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다는 짤막한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결혼과 안식년도 포기하고 41년 간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았다. 전도의 열정이 그의 삶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모든 부족에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일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기회가 된다면 죽는 것은 더 나은 기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에서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그의 순결의 영성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고백하고 있다.

“나 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0-24).

죽 음은 위대한 모험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우리는 핵심을 잃게되며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주변의 것에 불과하다” 존 스토트의 말이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고정된 삶을 살았다. “살든지 죽든지..” 삶과 죽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 외에 어떤 삶의 계획도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삶 전체를 점령하셨다. 최상의 순결과 능력의 삶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모든 것이 되셨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 계셨다.

“죽 는 것도 유익함이라” ‘유익’ ‘이익, 소득’ 죽음은 완벽한 이익이었다. 그리스도와의 영광스럽고 완전한 연합으로 가는 기회의 문으로 여겼다. ① “살든지” 감옥에서 석방된다면 주님과 세상을 위해 열매맺는 삶을 살 것이다. ② “죽든지” 죽음은 위대한 모험이며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거할 소망 때문이었다. 바울은 ‘죽음이 훨씬 좋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벵겔도 고백했다. “나는 무엇을 살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

제18 회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 2연승을 했던 에티오피아 아베베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무명의 선수였다. 마라톤 경기 한 달 전 급성맹장염 수술을 하고도 그는 초인의 힘으로 우승을 이뤄냈다. 아베베의 연습장소는 산과 들이었으며, 운동화도 없는 맨발로 연습을 했었다. 도쿄올림픽 후 그는 11회나 우승을 했으나 자동차 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았다. “두 다리는 잃었지만 나는 아직 건강한 두 팔이 있습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장애인 올림픽 썰매경주부분에서 또 다시 우승을 이뤄냈다. 오늘 우리도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강한 복음의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3. 복음의 신앙(1:27-30)

‘오 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라’ Manner of Life. 생활방식을 가져라. 너희의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서약한 사람답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폴리테스’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행동해야 한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들은 로마시민처럼 라틴어로 말하고, 라틴 풍의 옷을 입고, 로마인 신분에 집착했다. 로마시민이 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였다. 로마시민으로서 완전한 충성을 바치는 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다.

“오 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1:27-28).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이다. 바울은 일치와 협력을 열망하며 복음의 신앙을 위해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에게 싸움과 고난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참된 일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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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월14일 오후 4시. 미국 뉴욕과 남동부, 캐나다 토론토를 중심으로 한 북동부 지역에 사상 최악의 정전사태로 대도시가 호흡을 멈췄다. 교통, 통신..등 도시가 대혼란에 빠져 5천여 만 명이 암흑의 고통을 겪었으며 7조원의 피해를 가져왔다. 최첨단 시설 위에 세워진 도시에서 후진국형 대형사고가 터진 셈이다.

그 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빛이 꺼지면 세상은 암흑의 고통에 빠진다. 암흑은 모든 삶을 정지시키고 고통과 절망을 가져온다. 고통의 게헨나 ‘흑암’을 몰아내는 것은 오직 빛뿐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빛의 사명보다 소금의 사명이 먼저 요구되었다. 소금의 순결한 삶이 우선될 때 빛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휠라 코리아 윤윤수 대표이사는 최고경영자에겐 세 가지 3S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Speed. 정보의 즉시성,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Strong. 강력해야 한다. Smart.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고객과 임직원을 섬기며 부드러운 열린 경영을 해야한다.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동일한 3S 덕목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된다. 세상 속에서 도덕적인 모범이 되어야 한다.

빌 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에게 첫 사역의 기회를 제공한 도시였다.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8-10)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작된 첫 번째 교회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 번 방문했다. 신학자 사우는 “이 서신은 바울 사도 자신의 가슴에 달린 창문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그의 창문을 통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신학자 본 소든은 “우리는 이 서신을 읽으면서 매우 거룩한 땅을 밟게 된다. 빌립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마지막 친서이다”라고 빌립보서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빌립보서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생활과 사역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복음의 세 가지 삶의 방식

독일의 변증 철학자 헤겔은 삶의 인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끊임없이 교양을 채우고, 깊은 사색을 반복하면, 인식의 진보는 마지막 종착점으로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인식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 자기 계발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순결한 삶을 살려면 ‘복음에 대한 절대정신’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으며(롬1:16), 세상 한가운데서 복음을 중심으로 거룩한 삶을 연출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서의 생존과 능력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복음의 절대정신을 소유하기 위해 바울의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빌립보서 1장엔 복음에 대한 세 가지 생활방식을 바울이 자서전적인 고백을 쓰고 있다.

  • 1: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1. 첫 번째 삶의 방식. 복음의 교제(1:3-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1:3-5)

빌 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기쁨과 즐거운 추억을 남긴 교회였다. 바울은 10여 년 전을 되돌아보며 미소 짓고 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했다. ‘생각’ ‘므네이아’ 즐거운 회상을 뜻한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합동신학대학원 교장이셨던 김명혁 목사는 “인 생에 필요한 것은 만남이다. 구원도, 목회도, 선교도 만남이다. 우리의 삶이 복음적 삶이 되기 위해서는 만남의 확장이 필요하다. 유학시절, 도서관에서 공부가 전부인줄 알고 생활하다가, 만남의 축복을 깨달았다. 주말엔 사람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피크닉과 운동회를 가지면서 만남의 축복을 더욱 깊이 누리게 되었다. 사마리아 여자도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었다.”고 칼럼을 쓰셨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빌립보교회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끝까지 지속되는 만남이다.

교제의 중요성(1:6-8)

“너 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6-8)
첫 번째 중요성(6절) ‘시작’과 ‘이루심’은 양끝을 의미한다.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이다.
“내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그 일을 그분의 은혜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바울은 10년 전 빌립보교회가 회심했을 때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의 일을 완전케 하실 것을 주님이 보장하신다고 말한다. 복음 안에서의 참된 교제를 통해 주님께서 ‘선한 일’ 곧 구원과 인생의 완전함을 성취해 가신다.

' 나홀로 족'으로 주를 섬기는 사람들은 결국 플라스틱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주님은 '따스한 관계' 안에서 일하시고 역사 하신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세상 속에서 고립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순결이 아니다. 도피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따른 지 수년이 지나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다. 그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아간다.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바깥에서 숨어사는 신자들일 뿐이다. 바울과 빌립보교회에서 보여준 우정을 세상에 보여주는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 헨리 나우엔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일정한 가치에 따라 판단된다. 고용자는 피고용자를 지식과 기술과 능력으로 판단한다. 은행과 상점은 신용에 따라 사람을 대우한다. 친구는 공통된 관심사를 기초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자식의 지능지수가 40이라고 해서 다른 자식과 맞바꾸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회가 버린 사람들 곧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 창녀들의 친구셨다.

두 번째 중요성(7절) 빌립보 교회는 ‘다 나와 함께 참예한 자들' 이었다. ‘매임, 변명, 확정함’은 모두 법률적인 용어다. ‘확정’은 계약이 법적으로 유효함은 보증하는 것을 말한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마음에 있었다.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전도사역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과 좌절을 함께 나눈 교회였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동정- 동역?의 협력의 교제를 가졌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았다. 오늘 교회도 세상에 대해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함께 고난을 받을 때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 자살 바이러스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 자살자 숫자도 1991년 6,593명에서 2002년 1만3,055명으로 10년 사이 2배로 증가했다. 연세대 황상민 심리학교수는 “자살하는 사람은 쉽게 죽는 방법을 선택한다. 고층아파트와 고층빌딩 밀집이 음독자살하기 위해 약을 사야하는 시간이 필요 없는 투신자살을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투신자살 현상을 해석했다. 또 다른 교수는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투신자살을 하게된다”고 분석했다. 카드 빚을 견디지 못하고, 직업을 구하지 못해 좌절하다가 막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는 1시간에 1.5명이 자살하는 현 사회에 대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세상 속에서의 순결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굿 모닝시티 분양 사기 사건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대형사고였다. 자본금 7억으로 9천억 짜리 사업 프로젝트를 사기치는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투자자 3천여 명의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 평생 모은 돈을 다 잃어야 했다. 그리고 그 돈의 일부인 4억2천만 원이 민주당 정대철 대표에게 대통령 만드는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국민들을 실망하게 한 사건이었다. 대선 자금 절반 이상이 돼지저금통에서 나왔다던 대통령의 말도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기 사건의 주범 윤창렬씨는 기독교인이었다.

세 번째 중요성(8절) 바울과 빌립보교회의 교제는 고품격의 교제였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만들어지고 성취된 우정과 사랑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극진한 사랑으로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독교의 본질과 생명과 거룩함은 사랑이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술과 담배. 영화보기.. 도덕적 기초수준이 아니라 세상에 흉내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심장'의 사랑이 기독교인의 윤리이며, 삶의 스타일이어야 한다.

화 가 이중섭 선생은 앓고 있는 친구 문명을 가면서 “미안하네, 벌써 찾아오려 했는데 빈손으로 오기도..” 하며 말을 흐리자, 친구는 “빈손이면 어떤가, 자네 형편 다 아는데..” 이중섭 화가는 들고 온 물건을 친구에게 건네주며 “자네 주려고 가져왔네. 이걸 가져오느라 좀 늦었지. 복숭아 그려왔다네.. 복숭아 사줄 돈이 없어서, 그려만 왔네..” 이중섭 선생의 따뜻한 우정은 친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그 그림은 그의 심장으로 그려온 따뜻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과 교회에 대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챔버스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 그분의 사랑을 다시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면 복음의 첫 번째 삶의 방식인 '복음의 교제'야말로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추구해야할 복음의 절대정신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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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또 다른 전쟁 (엡 6:10-24)

최근 미국 갤럽기관에서 조사한 결과 미국인의 68%가 사단의 존재를 믿는다고 대답했다. 사단에 대한 인식여부는 종교적 성향에 대한 객관적 평가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나머지 20%만이 사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으며, 응답자 중 85.5%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미국 내에서 기독교의 종교적 권위는 많이 상실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바울은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6:10,11)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이지않는 영적 전쟁터다. 사단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인 이중적 성숙이 요구된다. 교회는 연합의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 연합이 깨어질 때 사단의 모든 공격과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 시대의 교회가 연약한 이유는 개인의 성숙이 더디고, 교회의 연합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단은 성숙하지 못하도록, 연합을 깨뜨리기 위해 힘을 다한다.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 아시아센터 소장 프랑수아 고드망은 이라크 전쟁에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사담 후세인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바그다드 국경 수비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운 국제 무질서가 도래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했다. 이라크가 허무하게 굴복한 이유도 수비대가 힘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단의 존재성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2). 사단은 정사와 권세, 세상 주관자로 묘사되고 있다. 세상을 둘러 싼

모든 정치, 경제. 문화,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권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악의 영들은 악의

본부에서 파송된 대리자들로 그리스도인 들을 실족 시키고 믿음을 무너뜨린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3).

        ‘하나님을 향한 열광이라는 책에서 크리스토퍼 에드워즈는 이단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벗어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1975년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위해 버클리 대학에

등록한 후 주말에 한 농장에서 열리는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참석하고 나서 확인해보니 통일교 문선명이

주관하는 행사였다. 그는 7개월동안 광적인 세뇌교육을 받았고 새로운 메시야 문선명에게 완전히

순종하는 제자로 변화되었다. 문선명의 절대 통치 아래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고자

맹세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문가와 함께 아들을 만나고 거의 1년이 넘는 치료와 상담과 교육 후 광기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사단은 오늘도 비진리와 거짓된 교리, 이단종파의 유혹으로 그리스도인 들을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만든다.

        존 번연은 사단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다고 가르쳤다. 하나는 핍박과 환란

통해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유혹하여 범죄 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마귀가 그리스도인

들을 집중 공격하여 쓰러뜨리는 기본적인 5가지 영역이 있다.

의심.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 멀어질 때 갑자기 의심이 반복된다. 자신이 받은 사명과 구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멈추지 않는다. 의심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믿음으로 모든

의심을 일일이 거절해야 한다. 새가 머리 위로 떠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낙심. 낙심한 그리스도인은 쓸모가 없다. 낙심은 영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악의 영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을 주시는 일이 없다. 사단의 가장 오래된 무기인 낙심은 가장 정확한 공격능력을

발휘한다. 낙심은 거의 실패율이 없다. 낙심에 빠진 그리스도인 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바쁜 생활. 바쁜 생활로 인해 우리의 관심을 영적인 것에서 다른 것에 몰두하게 한다. 모임도 많아지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지며,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면 깨어 경계해야 한다. 너무 바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다. 바쁜 생활은 마치 닻이 끊어져버린 배와 같아서 조금씩 떠밀려가 버린다.

열등감. “넌 할 수 없어 사단은 우리의 무능의식을 자극한다. 하나님께서 너 같은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쉼 없이 우리 안에서 속삭인다.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라는

여인들의 노랫소리에 무너져버렸다. 블레셋 골리앗 장군은 결국 사울을 처형한 결과를 가져왔다.

게으름. 게으름도 사단의 오래된 공격무기 중 하나로 구형무기이지만 강력하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권면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나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리스도인 들과 교회는 완벽한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바울은 두 가지 명령을 하고 있다.

        ꊱ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 하라(10절).

        ꊲ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11,13절).

모든 일상생활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잠시라도 전신갑주를 벗으면 공격 당하기 쉽다.

완전 무장한 채로 식사하고 잠을 자고, 샤워를 해야 한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 들어갈 때

전신갑주를 현관 입구에 벗어두기 때문에 가정에 많은 문제들이 일어난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두 가지 목적이 있다.

        11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13절: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구약의 열왕기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던 왕들은 거의 모두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만 한다. 6장11-14절에서 대적하라서라는 말이 각각 두 번씩 반복해서 기록되고 있다. 두 번씩

반복해서 권면 하는 것은 영적 전쟁의 중요성 때문이다.

마귀는 공휴일이 없다. 그는 결코 쉬지 않는다. 얻어맞고도 다시 일어난다. 앞으로 들어갈 수 없으면 뒤로

들어간다. 뒤로 들어갈 수 없으면, 지붕이나 바닥에 터널을 뚫고 들어간다. 그는 들어갈 때까지 결코

수고를 멈추지 않는다. 마귀는 교활하며 많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가 실패하면 또 다른 방법으로 그는

이길 때까지 계속해서 공격한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한다.

        캠브리지의 시므온은 어디로 이사를 가든지 항상 H. 마틴의 초상화를 제일 먼저 새집에 거는 것

잊지 않았다. 그는 매일 마틴의 초상화를 보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진지하라. 결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파멸의 구덩이로 몰려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결코 너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영적인 깊은 진지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없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진리의 허리띠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14절) 허리띠는 갑옷이 아니라 속옷의 가운데를 묶는 끈이다.

속옷은 겉에서 보이지 않는다. 허리 띠는 힘의 상징이다. 허리 띠는 속 사람을 매는 경건의 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주님과의 오랜 교제를 통해 내면의 경건함을 성숙시켜야 한다. 또한 진리의

허리띠는 성령으로 계시된 복음의 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

에베소서에서 간략하게 복음을 다시 설명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도덕적 부패가 심했다. 그 당시 런던으로 상경한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런던의 뒷골목 전당포에 취지하고,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지난 밤에 일어난 거리의 광란의 현장을 목격했다. 타락한 도시를 바라보며 소년은 절망했다. ‘이 도시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처럼 비참하게 살고싶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인생을 사용하셨다.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기도했던 소년이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쓰였다. 매일 아침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그의 인생의 새로운 허리띠를 매게 해 주셨다.

        의의 흉배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8).

흉배는 가슴과 등을 보호하는 군사장비다. 사단은 매일 우리 마음에 죄책감과 불안과 염려를 쌓아놓는다.

매일 부지런히 치우지 않는다면, 마당은 쓰레기로 넘쳐 날 수 밖에 없다. 죄책감과 염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① 죄책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롬8:33-34). 그리스도의 피가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으며, 한 번 용서를 받은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매일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죄책감에서 자유 해야

한다(요일1:9).

② 염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3). 염려는 곧 믿음이 실종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물이다.

캔자스 주립대학 교수 팀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든다라는 사실에 대해 연구한 결과

뇌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결정

메커니즘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두 개의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신중한 시스템이고 하나

는 감성적인 시스템이다. 계산영역의 신중한 시스템은 수학과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반면, 감성적

시스템은 뇌의 원시적 부분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 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두 가지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한다. 염려는 뇌의 원시적 부분이다. 염려는 해결방법이 아니다. 해결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기도해야 한다.

③ 질투.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의의 흉배가 떨어져나간 그리스도인 들의 가슴이 질투심과 열등감의 늪에 빠진다.

심리학 교수 살로비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20%가 질투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질투의 임상 학

저자 화이트 박사는 이혼하는 부부의 30%도 질투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질투는 열등감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결함을 질투로 바꾸는 사람은 불행하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든 질투심에서

해방되고, 겸손의 갑옷을 입을 수 있으며, 용서와 평화의 사람으로 공동체의 화목을 추구할 수 있다.

 

        복음의 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15절). 신자들에겐 두 가지 신발이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신발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미국 주도의 이라크전쟁이 세계의 종교적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인간의

비극이 종교적 재앙이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발표했다. 이라크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광범위한 충돌을 가져올 경우 종교가 분열될 위험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함으로 기독교 보수주의단체에서는 중동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문이 열렸다고 전제하고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남 침례교단엔 이미 2만5천 여명의 전도자들이 중동선교를

위해 떠날 준비를 마쳤다.

        주님께서는 “내가 전도하러 세상에 왔노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 들과 교회는 매일

복음의 신발을 신고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따라 주님을 섬겨야 한다. 해외선교센터에서 세계기독교인구를

발표했다. 20억7662만 명으로 연평균성장률 1.27%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해외선교사는 43만4천 여명

이며,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매년 1900억 여 시간을 전도에 힘쓰지만 미전도 인구는 0.5% 증가했다.

한 신학생이 선교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고 필리핀에 있는 선교훈련원에 입학하고 언어훈련을

받았으나 한 학기를 마치고 곧 좌절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는 훈련을 중단하고, 여름방학 동안 필리핀

여행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학기가 끝나고 거리전도 요청을 받고 필리핀 오지로 거리전도를

다니다가 그는 선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받게 되었다. 좌절감에 빠져있다가 그는 전도여행을 통해

다시 부르심을 받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 전도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생명을 더한다.

 

        믿음의 방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16절). 로마군인의

방패는 몸 전체를 가리는 방패로 길이가 1.2m 너비가 77cm로 두 겹의 나무판자로 만들었다. 전신을

가리는 방패가 필요했던 이유는 당시 고대전쟁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불화살이었다. 두 겹의 방패는

가운데가 비어있어 불화살을 맞으면 즉시 꺼지도록 만들어졌다. 사단의 모든 불화살의 공격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야 한다.

        테레사 수녀께서 유명한 변호사 에드워드 윌리엄즈를 면담하기로 했다. 변호사는 AIDS환자

치료수용소 재정후원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문구를 조수와 함께 작성한 뒤 테레사 수녀의 요청을 듣고,

이미 준비한대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수녀께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기도한 뒤 다시 후원을

요청했다. 변호사가 거절하자, 수녀께서는 다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변호사는 두 번째 기도에서

자신이 이 게임에서 졌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해야 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앞으로 한달간이라도

계속 기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도가 끝나자 변호사는 즉시 사업후원을 약속했다.

정채봉의 간장 종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꾸물거린다는

사실이다. 누가 불러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 나오는 일이 없다. 망설이고 꾸물거리다 끝난다. 마귀 군대는

매일 충격과 공포 작전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방패 없이 전쟁터로

나간 군사와 같다. 꾸물거리고 살다간 죽음뿐이다. 비참한 패배를 반복해야 한다. 방패 없는 군인이

생존할 가능성이 있을까?

 

        구원의 투구.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고 계급을 나타내는

장식이 있어 군대 내의 질서 유지와 군인의 생명을 보호했다.

        ① 구원의 투구는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가치관을 의미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모든 일에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철저한 삶의 목표의식을 가져야 한다.

웬디스 햄버거 창업자인 David Thomas는 “나는 10억 배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책에서 그가 성공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사생아 출신으로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일당 6천원을

받던 간이식당 종업원이었으나 근면과 정직과 헌신이라는 삼대정신으로 햄버거 장사를 시작하여

6조원 규모의 기업가가 되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 들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분명한 삶의 정신을 보여야 한다.

        ② 구원의 투구는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의미한다.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나 바울 이라는 표현을 즐겨 말했다. 세속적 관점에서의 자기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

에서 자신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이 아름답다.

에이즈로 죽어가던 한 여인을 심방한 목사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거절하는 냉담한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했다. 난 버림받은 영혼입니다. 내 자신의 일생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망쳐놓은

사람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겐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목사는

그녀의 옷장에 걸려있는 사진을 발견하곤 물었다. 저 귀여운 여자아이 사진은 누구입니까 제 딸입니다.

제겐 소중한 보물입니다. 만일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신은 도울 건가요? 실수해도 여전히

사랑하고 용서할 건가요? 물론이죠. 뭐든지 그 아이를 위해서 라면 할겁니다..그런데 왜 물으시죠?

하나님의 옷장에 당신의 사진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기억하는 투구를 써야

한다.

        ③ 그리고 구원의 투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또 다른 삶의 기대를 의미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무디는 나는 수년동안 설교할 때마다, 설교가 끝나기 전,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설교했다.고 말했다. 캠벨 몰간은 나는 매일밤, 내일이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잠이 들었다

고 고백했다. 재림의 진리는 성경의 진리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이다.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섬겼던

허드슨 테일러도 이렇게 말했다.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 내 사역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성령의 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에 모든 마귀의

시험을 기록하였으되 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우리도 매일의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모든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야 한다.

        한 청년이 한평생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살았던 무디의 성경책을 보고싶다고 했다. 무디가

성경책을 보여주자 청년은 놀랬다. 성경 전체가 빽빽하게 색연필로 칠해져 있었고, 성경 곳곳에 T.P

표시가 되어있었다. 무슨 뜻입니까? 묻자 무디는 실험해보고 입증되었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말씀이 곧 그의 삶이었다.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결론: 세가지 헌신(6:18-24)

바울은 마지막으로 세 가지 헌신을 에베소 교회에 요청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세 가지 헌신으로 연합된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23-24절)들로 구분될 것이다.

        1. 기도의 헌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18절). 기도는 쉴 수 없는 헌신이다. 무시로 판티 카이로 모든 시간에, 항상, 늘

기도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적인 골프 선수명단엔 항상 게리 플레이어 이름이 남겨있다. 그는 남아프리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과 역경 가운데 성장했다. 8살에 어머니를 사별하고, 탄광 광부인 아버지 손에서

자라났다. 신발을 아끼려 신발을 신기보다 들고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로 가난했다. 1953년 그는

프로 골퍼로 전향하여, 150여 개 대회를 우승했다. 우승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없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왜냐하면 골프의 재능은 하나님께서 빌려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기도에 헌신하지 않고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을 풍성하게 받을 수 없다

(23절). 기도는 기도로 배운다. 운동선수가 오랜 연습을 필요로 하듯이 기도도 많은 시간의 기도가

필요하다. 스펄전은 기도는 성령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는 기술이다라고 가르쳤다. 성령께

우리에게 마땅히 기도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주신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성령님과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2. 동역의 헌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9-20절).

에베소 교회는 기도로 바울과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기도로 수술실 의사의 동역자가 되고,

오지의 선교사들과 동역자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주를 섬겼다.

복음 전도를 위해 그의 생애 전부를 주님께 쏟아 부었다. 로마의 감옥은 바울에게 그의 설교단과 전도

센터가 되어주었다.

        조지 포먼은 45세의 나이에 권투를 다시 시작했다. 그가 권투를 다시 시작한 이유는 휴스턴에

세운 청소년 회관과 교회 때문이었다. 청년시절, 포악한 삶을 살았던 그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포먼은 마약과 범죄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돈으로

교회와 회관을 세우고 복음 사업을 추진했다.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게 되자 그는 다시 권투 글러브를

끼고 다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오늘도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기도로 동역하는 진정한 동역자들이 세계 복음화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우리는 세계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시카고 무디 성경학교에서 매주

토요일 밤 9시에 세계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여러 달 기도한 뒤 한 사람이 물었다. 부흥이

왔습니까? 아직 오지않았습니다. 다만 부흥이 올 때까지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복음 전도와 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역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이끌어낼 수 있다.

 

        3. 교제의 헌신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21-22절).

김명혁 목사께서 인생에 필요한 것은 참된 만남이다.라고 정의하셨다. 복음적인 삶이 되기 위해 만남의

확장이 요구된다. 누군가가 구원 받고, 헌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도 만남에 있다. 목회도 선교도

만남이다. 김명혁 목사께서도 미국 유학시절 도서관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전부였으나, 어느날 만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셨다. 그는 외국 학생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주말에 학생들을 초청하여 식사와 교제를

가졌으며, 피크닉과 운동회를 열기도 하셨다. 그 모임들이 나중에 한인 회와 한인교회를 세우는 동기가

되었다고 하셨다.

        바울은 마지막까지 알게 하여 서로의 교제를 위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로마의 감옥도

바울을 가두어 두지 못했다. 바울에겐 언제나 그의 친구들과 동역자들이 함께 있었다.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2002년 코스타 주제를 따라 10번에 걸쳐 에베소서 요약

강해를 함께 나누었다.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지성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진정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 우리에게 계시의 영을 주소서 기도하며, 복음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는 이 시대의

젊은 지성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복음을 깨달은 참된 지식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께 헌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윌리엄 부쓰에게 그의 성공 비결을 물었을 때 부쓰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물어린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보다 훌륭한 두뇌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러나 저는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이제 우리 시대는 이미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 고백하며 하나님나라를 회복해가는 암흑의 시대를 밝히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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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Lordship 구원 (엡 5:21-6:9)

한 유명한 기독교 계 지도자가 솔직한 고백을 남겼다. “지난 40여 년 간 나의 믿음은 진정 실패였다. 회심이후 사람들이 내 삶에서 분명한 변화를 볼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난 변화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족하고, 넘어지고, 거짓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복음의 진리가 손상되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늘어나고, 회심 자들은 증가되지만 구원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무엇이 문제일까? 존 맥스웰 목사는 ‘구원’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로드십구원"을 참된 구원으로 정의한다.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그분께 대한 구원의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받은 죄인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성취한 구속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바코드 그리스도인’들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으로 비유했다. 바코드는 스캐너에게 물품의 정보를 줄뿐이다. 개 먹이 바코드를 과자에 붙여놓으면 계산대 스캐너는 과자를 ‘개 먹이’로 읽어버린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바코드 정보만 읽을 뿐이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바코드만 붙였을 뿐 그 내용물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들어있지 않다. 바코드만 바꿔 붙여놓은 셈이다.
교회는 ‘구원’을 강조하지만 ‘구원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의 용서와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단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바울도 ‘로드십 구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구원의 반쪽 교리다. 나머지 구원의 절반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신앙과 삶의 연출에 있다.

아프리카 콩고 선교회에서는 선교사 훈련과정에 세(침)례 고백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훈련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염소고기를 먹었음으로 세(침)례를 베푸노라” ‘염소 고기 먹기’ 풍습은 콩고 노예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노예가 자기가 섬기던 주인이 너무 잔인하고, 혹독하게 노예를 학대하면, 그는 도망쳐 다른 새 주인에게 간다. 구원을 요청 받은 새 주인이 그를 구해줄 의향이 있으면 염소고기를 함께 먹었다. 노예가 새 주인과 함께 염소고기를 함께 먹는 순간 과거의 옛 주인은 도망친 노예에 대하여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다. 노예는 새 주인을 따라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죄의 종이었다가 의의 종이 된 신분변화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는지 새 피조물의 자각이 요구된다.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동상 세우기를 좋아하는 점이다. 10여 년 전, 구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을 때, 레닌과 스탈린 동상이 수난을 당했다. 미?영 연합군이 바드다드 시내로 진입하는 순간, 사담 후세인 거대한 동상이 무너지는 장면이 전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독재자의 동상을 철거하는 것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북한에도 약 3만5천여 개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일 비용엔 동상철거 비용도 상당부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주’ ‘소유주’ ‘주권자’ 예수께서 우리 자신과 온 세계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뜻한다. 내 영혼의 주님, 사회의 주님, 가정의 주님, 역사의 시간의 주님, 한국교회의 주님, 온 세상의 주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영접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6-9).

모든 사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날과 음식의 문제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업신여기자,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고 가르치고 있다. 주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사랑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스티븐 닐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 인간의 모든 관계는 변화된다”고 가르친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모든 인간관계에 머물기 때문이다.

1. 부부관계(엡5:22-3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2-33).
미국판 현모양처를 촉구하는 "항복하는 아내가 행복하다"는 책이 화제가 되었었다. 저자 도라 도일은 페미니스트로 바가지 긁는 전형적인 아내였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파경으로 치닫는 결혼생활을 통해 도라 도일은 ‘항복하는 아내’의 결론을 얻었다. ‘바가지를 긁거나 논쟁하지 말고 남편이 원하는 일을 하라. 남편을 통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 남편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여 전사와 같은 모습을 직장에 두고 집으로 와라..’ 그 말들은 불행을 통해 깨달은 아내의 아름다움과 사랑이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하나님의 권위의 질서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다(고전11:3). 하나님의 권위가 인정될 때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하는 태도로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해야 한다. 아내의 역할과 위치가 지나치게 굴종 적인 과거 문화 유산이나, 낡은 보수주의적인 견해가 아니다. 서로의 위치와 역할이 분명하지 않은 ‘권위의 질서 실종’으로 인해 오늘 많은 가정이 이혼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 두 가지 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신델렐라의 꿈과 평강공주 꿈이다. 신데렐라 꿈을 가진 여성은 백마 탄 왕자가 유리구두를 들고 자기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여성이며, 평강공주 꿈을 가진 여성은 현재의 남자가 바보온달 같아서 자신의 헌신으로 그를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여성이다. 출세한 남자를 원하는가? 아니면 출세 가능성이 있는 남자를 원하는가? 남자를 통해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두 성향에서 여성들의 남성관을 엿볼 수 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의 두 가지 꿈은 미스 코리아 형과 복부인형에 있다고 한다. 미인이냐? 아니면 경제력이냐? 에 목표를 두고 있다. 진정한 결혼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 코넬대학 인간행동연구소 신디아 하잔 교수 팀은 지난 2년간 남녀 5천명을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가슴 뛰는 사랑은 18개월-30개월이면 사라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으로,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화학물질을 상실한 뒤 독서와 생활에서 다듬어진 지성미와 교양미로 원숙한 아름다움을 가꿔나가는 것이 사랑을 오래 지속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과 믿음에 있지 않을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부부의 관계는 언제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부모와 자녀관계(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 순종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이미 약속되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3). 인생의 성공과 건강은 모두가 추구하는 공통적인 소망이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자녀들에게 두 가지 약속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 우리는 부모공경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비밀을 배워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그분의 축복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원자력 분야 세계적 석학 정근모 박사는 사람들 사이에 천재로 통한다. 서울대 차석 입학. 미국 미시간 주립대졸업. 24살에 플로리다대학 교수가 되고, 과기처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정근모 박사는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 안에서 생활한 결과일 뿐”이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는 그의 저서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공부 잘하는 7가지 방법을 말했다. 그가 첫 번째로 가르친 비밀이 ‘어머니의 기도와 잔잔한 미소가 힘이다’라고 고백한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하나님께서 정근모 박사의 인생을 만드시는 섭리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부모님을 주님의 권위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소유할 때 비로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두 번째 인생을 산다”고 했다. 부모와 자녀는 한 생명을 가진 운명공동체다. 부모의 삶이 자녀들에게 유전되고, 자녀들은 부모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모의 존재가 자녀들의 인생의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으로 논쟁을 벌이다 랍비를 찾아갔다. 남편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짓고 싶어하고, 아내도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짓고 싶어했다. 랍비가 물었다. “두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두 분 다 요셉인데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지 않나요?” 아내가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시아버님은 말 도둑이고, 저의 아버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누구 아버지 이름 따서 지었는지 저희가 나중에 어떻게 알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말 도둑이 될지, 아니면 정직한 사람이 될지 지켜봅시다. 그럼, 어떤 아버지 이름을 따른 것인지 자연히 알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3. 사회생활 관계(6:5-9).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5-6).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9).

44개국에서 7만 명이 넘는 직장인들에게 강의한 탁월한 ‘인력 전문가’ 존 곤스틴박사는 “유럽기업들은 매년 매출액 1%를 기업 내 사람 사귀는 법에 투자한다”고 강조한다. 직장인이 직장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회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 상사나 동료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업은 좋은 인재를 쉽게 잃고 만다. 무엇보다 중간 간부가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면 조직의 안정이 어려워진다.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의 주권이 직장, 사회생활에서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배당을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 율법주의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만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유를 유지하는 유지 주이시며, 만물의 소유주가 되신다(골1:15-17). 그러므로 주님의 주권은 제한된 예배당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회조직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서울대생엔 ‘나 홀로 족’이 많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최모 씨(28)는 1년도 안돼 직장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조직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결국 직장을 포기하고, 사법고시를 준비중이다. 이기춘 서울대 총장은 “이제는 감성지수, 도덕지수가 높은 졸업생을 배출해야 한다. 대학에서 인성과 대인관계 증진을 위한 리더십개발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대인관계 능력 부족은 사회생활에서도, 주를 섬기는 제자의 삶에서도 결국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갈등과 개인적인 깊은 고민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세상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은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17)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의 탐욕과 쾌락주의, 물질주의를 경계하고, 세속적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야 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요17:11)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주님께서는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 깊이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다. 우리들이 주님을 섬길 장소는 예배당 뿐 아니라 세상이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 주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여야 하고, 우리들의 삶의 공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여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우리 몸이 가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가 되며, 우리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손상시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뉴욕 셔틀버스 운전사 모임에 고든 목사가 참석했다. 한참 교제하다가 운전사 한 분이 “우리는 겨우 말 못하는 버스를 끌고, 맨해튼 섬이나 왔다 갔다 할뿐인데 목사님은 여러 나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시니 부럽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한심스러워하는 운전자들에게 고든 목사는 한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버스를 운전하기 전에, 빈 버스를 향해 이렇게 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앞으로 8시간 동안 이 버스를 성소로 선포하노라. 이 버스를 타는 사람들에게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을 선포하노라.’ 그리고 버스 운전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뒤 고든 목사는 셔틀버스 운전사들을 만날 때마다, “버스를 운전하십니까? 성소를 운전하십니까?” 하며 반갑게 항상 질문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버스 운전사로부터 은혜로운 간증을 듣게 되었다. 한 남자가 정류장 아닌 곳에 내려달라며 우기고,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자신에게 무례한 태도와 험악한 말을 하는데, 자신은 성소를 운전하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야하는 사명이 있기에 즐겁게 참았다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같이 반응했을 자신이었지만 그날은 다음 정류장에서 투덜거리며 내리는 그 신사에게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제 버스를 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운전사를 잘 아는 한 여자 승객이 “정말 많이 변화되셨군요” 하며 칭찬하더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성소이며, 우리의 하루하루는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삶이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평화의 인간관계를 이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요20:28) 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주권이 높임을 받는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참된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의 복종. 하나님말씀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방에 있다”고 정의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부부와 부모와 자녀, 직장생활의 인간관계에도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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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복종의 사회학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 준수 교수는 "뇌 중풍환자의 30%-50%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분노와 우울증이 밖으로 폭발할 때 대구 지하철 같은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2002년 정신질환자가 일으킨 범죄는 1,447건에 이르며 한국에 약 16만 명의 심한 우울증환자가 방치되고 있다. "혼자 죽기 억울해.." 세상에 대한 원망이 깊어가고, 살기 점차 힘들어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대인관계 파괴와 소외감에 절망한다. 서울대병원의 보고는 충격적이다. 20세 이상의 남자 45%가 인격이상징후가 있다고 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범죄는 소외감이 가져온 절망과 자포자기 행동이었다.

인간관계 파괴는 영적인 삶에도 치명적이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는 그의 저서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라(Restoring Your Spiritual Passion)>에서 "열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는 열정, 믿음으로 살며, 아낌없이 주를 섬기고 봉사하려는 열정, 자신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열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소망하는 열망이다. 그러나 이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열정을 얻는 지름길도 쉬운 길도 없다. 신비로운 해결책도 없다. 열정을 계속 공급받는 사람들만이 꼭대기로 오를 수 있다. 한 개인을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만드는 힘은 열정이다.." 열정은 마치 만나와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치 음식을 광야에서 거둬들여야 하듯 열정도 매일 새롭게 채워야 한다. 만나를 오래 간직하면 곰팡이가 펴서 먹을 수 없듯이 열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러들어 못쓰게 된다. 주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뒤에 쳐져 구경꾼으로 남겨지는 것은 열정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고백했다. 바울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주를 섬겼다. 쉽게 열정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죄의식과 패배감, 지루한 종교행위를 힘겹게 치루고 있다. 열정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고든 목사는 다시 모으기를 하라(Re-collection)고 권면한다. "나"라는 조각을 다시 모아야 한다. 영적인 열정과 에너지의 저장고가 되게 해야 한다. 흐트러진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목적과 헌신의 다짐, 비전과 소망의 에너지를 다시 되찾아내야 한다. 다시 모으기의 세 가지 원칙이 ?특별한 시간. 특별한 예배. 특별한 친구들?에 있다. 세 가지 원칙은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특별한 예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특별한 시간/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특별한 친구들"(엡5:18-21) .

특별한 친구들. 모세가 아말렉 족속과 전쟁할 때 ‘특별한 친구’들의 관계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승리는 특별한 친구들에게 달려있었다(출17:9).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우리도 주를 섬기다 피곤에 빠질 때가 많다. 모세의 팔이 피곤할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패배하고 있었다. 모세의 팔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아론과 훌이 모세를 앉히고 좌우에서 그 팔을 붙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세가 언덕 위에서 팔을 들고 있는 동안, 여호수아는 골짜기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출17:13). 모세의 주소록에는 특별한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잠재력을 증가시키거나 피곤을 막아주고, 약점을 막아주기 위해 동료의식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분주한 생활과 시간 속에서 특별한 친구들을 위한 시간이 할애되어야 한다. 특별한 친구들과 교제하고, 서로 양육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시간을 그들에게 투자해야 한다. 특별한 친구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영적 일과 중 하나여야만 한다. 바울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방인 전도를 위해 특별한 친구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곁에 두었다. 그의 주소록에는 바나바, 마가요한,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누가, 실라, 두기고..등 많은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의 중요한 원리로 제시한 "복종의 사회학"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복종은 사람에 대한 비굴한 노예적 굴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자발적 봉사를 뜻한다. 영국의 심리학자 캐럴 로스웰과 인생 상담사 피트코언은 지난 18년간 1천 여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80가지 상황에서 행복하게 만드는 5가지 상황을 선택하는 실험을 통해 행복의 공식을 발표했다. P+(5×E)+(3×H). P는 개인적 특성으로 인생관, 적응력, 탄력성을 의미하고, E는 생존조건으로 건강, 인간관계, 재정상태를, H는 더 놓은 수준의 조건으로 자존심, 기대, 야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복공식은 "생존조건이 개인적 특성에 비해 5배, 자존심, 야망등 더 높은 수준의 조건은 개인적 특성에 비해 3배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인간의 행복은 건강과 돈 대인관계가 훨씬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흥미와 취미를 추구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현재에 몰두하고, 운동하고 휴식하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리스도인의 모든 인간관계는 세 가지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부부관계(5:22-33). 부모와 자녀 관계(6:1-4). 사회생활(6:5-9). 가정과 사회적 관계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중심으로 관계되어 있다.
  •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5:22)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5:25)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6:1)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6:4)
  •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6:7)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도 인간관계의 비밀을 가르쳤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 여자-남자-그리스도-하나님으로 이어지는 헤드십의 관계는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행복한 삶이 만들어진다는 행복공식을 이해하게 된다. 헤드십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서로 섬기고 돌봐야할 섬김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의 관계에서도 머리가 되신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되지 않음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되고 그로 인한 피해가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환경과학자 데이비트 왠은 현대인의 소비 지향적이고 물질주의 적인 삶을 ‘어플루엔자’ Affluenza 유행성독감과 같은 전염성으로 비유했다. 소비적이고 쾌락적인 삶은 과중한 업무, 많은 빚, 근심과 낭비등 증상이 수반되며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방법은 검소한 삶과 자연에 접하는 단순한 삶 그리고 공동체생활에 있다고 지적했다. 느림의 자세와 단순함의 실천이 경쟁의식에서 떠나 자신만의 장점과 가능성을 개발하는 삶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자연과 친해지는 삶과 사람과 사람이 함께 모여 숨쉬는 공동체의 삶을 통해 잃어버린 인간의 소중한 자아상을 회복할 수 있다. 참된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먼저 모든 인간관계에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계심을 알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사랑"을 깨닫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선언되어야 한다.

두 가지 전쟁.

750여명의 호주 여인들의 누드 사진이 신문 1면에 컬러사진으로 실렸으나 선정성 시비가 없었다. 호주의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 시위였기 때문이다. 'NO WAR' 알몸으로 글자를 만들어 전쟁반대 시위를 연출하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축하행사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전 시위가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 러시아, 중국을 끌어 들여 형성한 반전전선으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지만 결국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라크 전쟁이 지구촌을 동맹구도로 재편하고 말았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석유독점을 위한 미국 패권주의를 그대로 드러낸 전쟁이었다. 모든 인간관계에도 비슷한 두 가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 야망의 전쟁. The Battle of Ambition. 야망은 앞장서 가려는 충동이다. 야망은 거룩한 언어로 포장되어 나타난다.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하나님의 뜻이면.. 문을 여시면..." 야망은 보상과 명예가 있는 자리에 유혹을 당한다. 개인적인 야망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향하는 열정은 서로 비슷해 보인다. 둘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전진하고 싶어하고, 자신과 재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어한다. 우리는 기회를 노리고, 자신을 높이고 싶어한다. 주목받는 것을 열망하고, 더 높은 명성을 주는 자리라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려 한다. 영적인 열정과 야망은 한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없다. 야망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끊임없이 정신적 게임을 시도하고, 자신의 처지와 하는 일을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성령의 빛이 없이 야망을 볼 수 없다.
  • 교만의 전쟁. The Battle of Pride. 야망의 친구는 성공을 다룰 능력이 없는 교만이다. 웃시야 왕은 교만의 경계가 되는 성경인물이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하나님을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26:5). 웃시야는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군대를 재조직하고 열악했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대하26:16) 몰락이 이어졌다. 결국 웃시야는 문둥이로 심판 받아 죽는다. 교만이 가져온 비참한 종말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망과 교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그들에게 인간관계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없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 인간관계가 맺어지고, 끊어지며, 다시 비겁한 거래가 계속될 뿐이다. 야망의 세상에서 인간은 철저한 이용물일 뿐이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폐기될 뿐이다.

한국사회는 ‘사오정’의 시대를 맞았다. ‘45세 정년을 맞는 시대’라는 뜻이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60년이었을 때, 2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고 10년쯤 죽음을 기다렸다. 평균수명이 80년인 지금, 30년 공부하고, 10년 일하다가 퇴출 당하고, 40년을 막막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정년 이후 살아가야 할 시간이 20-30년으로 우리 사회의 중간허리 부분인 40대가 불안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40대가 불안한 시대는 오래가지 못한다. 40대를 불안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정 진홍 교수는 지적한다. 한국정부가 40대를 살려내는 정책을 펴야한다고 강조한다. 불안한 40대로 인해 가정도 깨어지고, 남자들의 존엄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크게 약화되고 있다. 야망도 교만도 상실한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사오정 남자들은 이 시대에서 패배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의 위치와 권위가 인정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주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주님을 섬긴다는 말이 공허한 말로 남을 뿐이다.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인간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바울의 선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따뜻한 인간관계 회복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 부부는 따뜻한 부부애와 동료의식으로 온 힘을 다해 주를 섬길 수 있었다. J.C. 폴록은 테일러 부부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허드슨은 자기 아내를 모질게 대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영적인 성숙함과 고요함. 확고한 신앙과 애정으로 활력을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리고 남편이 하는 모든 일에, 그녀에게 있는 힘을 모두, 그녀의 총명한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생각을 모조리, 그녀가 가진 사랑과 힘도 모두 쏟아 부었다. 그녀는 남편 허드슨으로 하여금, 자신을 고갈시키도록 허락해주었고, 때로 그의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이기적으로 흐를 때도 그녀는 그것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오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긴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우리의 허상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우리가 어디서 허드슨 테일러 부부에게 보여진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 부부사이에서도 서로 마음을 줄 곳 없어 외로워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님 안에 산다는 말은 거짓일 뿐이다. 황폐한 땅 중국에서 평생을 허비하면서, 그렇게 소중한 사랑으로 한사람 곁에 특별한 친구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그리스도"이셨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모든 인간관계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해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한 겸손한 종들에 의해 무너진 하나님나라는 다시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최인호씨와 김수환 추기경께서 대담을 나누셨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네.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질 못했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마음 한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수님을 닮아가야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마음 한가운데 계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 한가운데 계신 주님이셨다. 평생 주님께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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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두 개의 세계...어두움과 빛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인 생의 삼분의 일을 억압상태에서 보낸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송금사건으로 더 큰 고통의 여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국민의 분노와 실망이 그를 외롭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퍼주기’ ‘현대 봐주기’로 이어진 북한과의 평화유지비의 비밀 송금에 대해 대통령 국민담화가 발표되었지만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지난 50여년 동안 갈라진 남과 북에 금강산으로 가는 비포장 도로와 대북 사업 교역의 물꼬를 텄지만, 월 스트리트 저널이 지적한 대로 ?김정일 돈 바치기?로 만들어진 남과 북의 평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도 보이지 않는 두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이중 자아와 어두움과 빛의 이중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회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거룩한 햇볕정책은 무엇일까?

1. 이중 세계의 속성.

에 베소는 로마 제국의 종교적 도시였다. 학문과 철학의 도시 아덴과 상업과 교역의 도시 고린도와 더불어 에게해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에베소의 ‘아데미 숭배’는 여사제들과의 혼음으로 도시 전체가 섹스의 쾌락에 빠져 있었다. 바울이 어두움의 속성으로 지적한 ‘음행, 더러움, 탐욕’은 모두 타락한 성적 욕망을 드러낸 부끄러운 단어들이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5:3)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5:5-6).

어두움의 열매

 

빛의 열매

음행

참예하지 말라

착함

더러움

시험하여 보라

의로움

탐욕

 

진실함

세상은 성적 탐욕의 늪 속에 빠져있다. 한국은 여성부에서 최근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매년 섹스산업에 허비되는 돈이 24조원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섹스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청소년 원조교제, 보도방..같이 숨겨진 일들은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20-30대 여성 25명 중 1명이 쾌락산업에 빠져있다. 섹스의 쾌락의 끝은 에이즈의 증가로 이어진다. 매일 전세계에서 1만5천명이 새로 감염되고 있으며, 한국은 매일 1명이 감염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계 에이즈 감염자는 2001년 말 3610만명으로 보고되었으며, 청소년 감염자도 매년 300만명이 증가하고 있다. 피어트 유엔 에이즈국장은 ‘미국에서 매년 비만 치료와 예방에 쓰는 돈 520억 달러 중 30억 달러만 있어도 아프리카 에이즈 감염률을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세계인구 2.7%가 에이즈로 숨지고 있으며 매년 그 숫자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빛의 자녀들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도덕적 실천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이 살면서 인가다운 삶을 사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도덕성과 윤리적 실천력을 소유한 새로운 하나님의 피조물들이어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5:8-10).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은 15살까지 교회를 출석했으나, 이후 교회를 떠나 무신론자가 되었다. 러셀은 기독교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웃을 사랑하고, 고난당하는 자를 동정하고, 잔인성과 가증한 악에서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무신론자를 자처했지만, 그가 말한 기독교인의 세가지 정의는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자아상을 지적한 말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도덕적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졌다. 권력남용, 이권개입, 불법정치자금, 뇌물수수와 청탁, 분식회계와 주가조작, 부정과 사기.. 청와대에서 검찰, 언론까지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었다. 지난 30년간의 압축, 고속성장과정에서 한국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했다. 근면, 성실의 도덕적 가치관은 퇴색하고, 물질과 쾌락 추구가 새로운 삶의 목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도덕적 나침반이 멈춰버렸다. 국제 경쟁력의 원천인 반부패와 투명성에서 한국은 하위그룹에 밑돌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도덕성을 상실해버린 무기력한 교회가 있다. 교회는 한국사회의 도덕과 윤리 붕괴를 저항할 힘을 이미 잃어버렸다.

2. 빛의 자녀들의 의무.

“너 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5:11-14).” 4세기 중엽, 안디옥에서 출생한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크리소스톰은 그가 살던 도시가 사치와 쾌락의 극에 달하자,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세상을 책망했다. 좋은음식을 찾지 않았고, 화려한 옷을 거부했다. 기도와 명상으로 살면서, 자신의 것을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가 가진 것은 몸에 걸친 옷이 전부였다. “깨어있으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돈을 쥐려는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움켜쥐어야 한다. 세상의 것은 나눠지면 적어지지만, 영적인 것은 나눌수록 늘어안다. 나누지않으면 가난해지고, 결국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것이다” 온 도시가 그의 말에 떨었으며, 황제도 그를 두려워했다. 오늘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이 교회를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 세습으로 한동안 곤혹을 치루었는데, 김동호 목사의 연봉 파문으로 또 다시 세상의 가십거리가 되고, CCC의 세습 움직임으로 또 다른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여중생 장갑차 희생사건으로 촛불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한기총이 시청 앞 광장에서 연 기도집회가 교회의 명예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책망하라. 참예하지 말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책임은 책망하는 삶의 실천에 있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가지는 빛이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곧 사라진다.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열매를 실천해야 한다. 1998년 중국에 취임했던 주룽지 총리는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내 것을 포함해 관 100개를 준비하라. 청렴한 정치 이뤄지지 않으면 경제강국의 꿈은 이뤄질 수 없다. 국가가 바로서기 어렵다.” 그는 취임직후 ‘밀수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2000년 ‘부패관료와의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

세상은 빛을 찾고 있다. 기독교를 외면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빛’의 원리여야 한다. 스티브 쇼그린 목사는 섬김의 전도를 통해 복음이 닫혀버린 세상에 새로운 빛의 전도를 실천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무료 세차, 상점 포장 도와주기, 상점 유리창 닦아주기...등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30대 한 남자가 주일 아침, 교회 앞을 서성거렸다. 손에 빈 콜라캔을 들고.. 안내위원이 “제가 버려드릴까요?” 미소를 지으며 묻자 그 청년은 “아닙니다. 이 콜라 캔을 저는 간직하고 싶습니다. 제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소중한 기념물이니까요” 그는 전날, 무료로 나눠주는 콜라 캔을 받아들고, 처음 자신에게 사랑과 친절을 보여준 전도팀에 대한 호기심으로, 교회까지 찾아오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빛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도덕적 실천능력일 것이다. 단순히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윤리 기준은 아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이 기독교는 아니다. 세상에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빛의 열매’는 세상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3. 빛의 자녀들의 삶.

“그 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15-21).

지혜-시간-주의뜻-성령충만 앙드레 모로아는 “인생을 영위하는 기술은 하나의 공격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다. 역사의 인물들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기 인생에 목표를 정하고 그 한가지 일에 전력을 다했다”고 인생의 바른 태도를 설명한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세상의 돈과 명예와 부를 좇는 ?죽은 자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현하는 바른 인생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지혜가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다. 신학자 존 데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챨스 휴멜도 “우리들의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는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한데서 온다.”고 지적했다. 19세기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의사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장래가 보장된 뛰어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미래를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심하자, 그의 형이 이렇게 동생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너는 네가 원한대로 네 인생이 아프리카 정글의 미개인들과 매장되지만, 난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가 될 것이다.” 수세기가 지난 오늘, 리빙스턴의 유골은 영국으로 옮겨져, 정중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죄었지만, 그의 형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누가 더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리석다. 삶의 지혜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창고 문은 열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 삭개오의 소유는 무엇이 인생의 참된 목적인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다. 어디서 그 인생의 목적을 찾았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현대사회는 급하게 발전하고 있다. 자연과학 계열의 지식은 3개월 시차를 두고 변화하고 있다. 3개월전 논문은 이미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인문과학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인터넷이 학문의 속도를 더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다. 선진국의 학문이 당일에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인들이 함께 읽고 있다. 학문에서의 답보는 곧 퇴보다. 인생에서도 자기중심의 삶을 곧 퇴보다. 모험없는 인생은 어리석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를 결단해야 한다.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노라”고 고백하셨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라. - 예배. 찬양. 감사. 복종. 황성주 박사는 그의 책에서 “나는 주님 때문에 팔자 고친 사람이다. 내가 올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리 온 사람이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누린 사람이다. 오직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인해 변화받게 하시고,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게 하셨다. 이젠 그 행복이 흘러 넘쳐 행복의 전달자로, 기쁨의 발산자로 살게하신다. 차고 넘치는 은혜, 사역의 확대, 비전의 확대, 인맥의 확대로 나타났다”고 자신의 인생을 설명한다. 2003년 2월.. 러시아 코스타에서 황박사는 만났을 때 그는 “호산나 네트워크를 인수하고, 크리스챤 여성 잡지 레베카를 인수했다”고 말하면서, 인도와 아프리카 등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을 설명하며 흥분에 넘쳐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사랑의 전달자, 행복의 전달자, 복음의 전달자’이셨다. 바울은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충만을 유지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인간의 능력과 도덕적 의지와 자기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4가지 비밀을 가르치고 있다. “①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②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③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④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 예배에 힘쓰라.
매 주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혼과 몸의 안식을 계속 얻는 사람들이 매일의 삶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지시하는대로 따라갈 수 있었다. 죠지 물러가 하루 16시간 넘게 일하는 한 형제를 방문했다. 그 형제는 심한 피곤과 영적 메마름에 지쳐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실하자, 모든 삶이 균형을 잃고 말았다. 뮬러는 그 형제에게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속사람이 힘을 얻게 하라”고 권면했으나 “이렇게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데..일하는 시간 줄이면..”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잃고 있었다.

(2) 찬송을 힘쓰라.
하 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충만과 찬양은 영성의 두 날개와 같다. 사울 임금이 악신으로 고통당할 때 다윗의 수금을 타는 찬양으로 평온함을 얻곤 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하고 기도할 때 감옥터가 흔들리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을 베푸셨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구원받으면서 빌립보 간수와 그 가족도 구원을 받는 성령의 능력이 빌립보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한 교수님이 갑자기 이상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있거나, 거리를 걷든지 혼자 중얼렸다. 궁금한 학생들이 질문하자 교수는 “며칠전 꿈을 꿨는데, 갑자기 베드로가 ‘찬송가 279장 불러봐’ 말하는데 우물쭈물거리자 ‘형편없는 신자구만, 찬송도 못부르면서 어떻게 천국 오려구해. 다음에 와..’ 놀라 깨서 찬송가부터 찾아봤지. 그날부터 매일 찬송가를 부르며 찬송이 충만해지도록 애쓰게 되었네” 웃으며 대답했다. 찬송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다.

(3) 감사를 힘쓰라.
감 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제물이다. 감사는 중요한 경건의 훈련이다. 감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믿음의 열매다.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다. 작은 감사를 잘 실천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닮았다. 글로벌화. 디지털화로 대변되는 21세기는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제품만이 생존하는 시대다. 세계일류기업의 뚜렷한 특징은 ‘연구개발, 제품개발, 생산, 마케팅’ 등 기업활동 4단계중 하나이상의 독특한 강점을 갖고 있다. 미국의 델 컴퓨터는 인터넷 마케팅으로 세계 컴퓨터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노키아는 직원 32%가 R&D 연구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강점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는 성령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 성품이기 때문이다.

(4) 복종하라.
바울은 복종의 인간관계를 가정과 사회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다음 시간에 ?복종의 사회학?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성령충만한 삶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고 피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유는, 인간관계의 파괴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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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K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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